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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삼한역사
글쓴이:한부울
머리말
1920년 시카고 그리고 필라델피아
태풍과 허리케인이 구분되어야 했던 역사
1926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
제물포와 보스톤
마이애미 허리케인 발생부터 소멸까지의 상황
1926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태풍
마무리
머리말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 역사는 열도일본 뿐만아니라 미국과 소련, 신중국의 관심사였다.
결정적인 자료를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러시아제국 마지막황제 일가족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도 미국 못지 않게 적극적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역사를 강제적으로 한반도에 안착시킴으로써 미국의 용인하에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아시아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일개 도시 경사(京師)에 묶여 있는 중국을 거대하게 만들고 새시대에서 그들이 중국행세를 크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도일본은 일제 본질에서 모자라도 한 참 모자란 이런 틈바구니에 이용물에 불과하지만 곧 가난을 잊게끔 충분하게 보상까지 받는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런 틈바구니 역사에서 열도일본인들이 안하무인격에 한 껏 어깨에 바람을 넣고 끄떡 거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존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하늘인 미국이 도와주었기 때문이고 특히 한반도 전쟁상황을 이용하여 무기를 조립하면서 공급에 의해 엄청난 수익이 그들을 배불리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전쟁을 겪으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상대적으로 열도일본인들은 취할 것을 다 취했다는 것을 그들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 사람들은 전쟁통에 잃어버릴 것을 다 잃게 만들면서 전범국이라 내 세운 열도일본인들을 배부르게 만든 것도 미국이라면 이치를 떠나 정의롭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평화조약이니 운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 글 마무리에서 영토문제를 다시 거론 하겠지만 미국은 이미 1945년 9월 2일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한 미주리(USS Missouri:45,000 tons)의 선상에서 태평양전쟁 패전국인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하게 하면서 완전히 끝을 낸 사실을 약 6년이 지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유엔을 앞세우고 열도일본을 상대로 회담을 시작하여 1952년 4월 28일에 평화조약을 발효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 저 편으로 이미 사라진 독일과 그 추축국들은 체제를 잃어버렸고 사망처리된 시점이다.
전리품으로 역사를 새롭게 뜯어 고친다하여도 반대할 세력이 있을 수가 없다.
때문에 열도일본으로 묶여 1945년 이후 체제가 친미성향으로 바뀌면서 완전히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고 패전에 의해 항복한 상대라 하기엔 미국이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새로운 일본만들기에 적극적으로 지원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구글에서 태평양전쟁 당시의 사진이나 기록물들을 볼 수 있으나 이것도 열도일본인 모습만을 위주로 한 자료만 공개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편중된 이미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정보가 귀한 세상사람들에게 역사 이미지를 바꾼다는 것이 그렇듯 어려운 것 만은 아닌 세상이었고 가장 처참하고 참혹한 인류 최대 피해를 낳은 전쟁을 치룬 끝이었으니 참으로 혼란스럽고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시대였던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이러한 시기에 의문을 가지도록 하는 여러가지의 문제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전범국 일본이 36년간 식민지배를 했다고 하는 한반도에서 민족간 처절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정확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삼팔선을 일본열도에 그어서도 될 태평양전쟁 후처리에서 난데없이 핍박받았던 한반도에 그었다는 사실도 미국에게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 이야기지만 어떻게 일본 식민지지배를 받았다고 하는 한반도에서 민족간 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전범국인 일본과 평화조약을 굳이 맺어야 했던 것인지 그렇다면 그 저의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역사적으로도 따져 묻을 것이 많다.
현재에서도 그렇지만 처음부터 삼팔선은 분쟁의 씨앗으로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
과한 이야긴지 모르지만 결과는 전쟁이다.
지금도 미국이 촉발시키면 타버릴 수밖에 없는 늘 우리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전쟁이다.
전쟁은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핵도발이 문제를 발생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것이 60년이 훌쩍 넘도록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목매달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이와같은 미국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전쟁 불안감때문이다.
여기서 깊은 오해가 생긴다.
얄타회담때나 포츠담회담 때 미국과 소련정치지도자들은 어쩌면 열도보다 한반도를 분쟁의 터로 삼아야만 역사물적재산과 기억의 소산인 인적재산을 척결할 수 있고 또한 전쟁을 핑계로 재론의 여지를 없애면서 계획된 역사틀잡기가 가능해진다는 이런 판단이 조금이라도 사전에 그들에게 있었다라고 하는 오해소지가 분명하게 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시대가 도래하는 위험보다 역사틀잡기가 우선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2차세계대전을 마치고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미국은 소련과 냉전시대를 조성하였고 방어선을 한반도 남한을 제외하고 그으면서 1950년 1월 12일에 이를 에치스라인(Acheson line declaration)이라 선언하여 남침을 촉발한 원인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이미지와 매우 상반된 이런 전쟁 후처리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하고 남는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s://han0114.tistory.com/17050778" 에서 불공정하게 정책을 펼친 미국의 한반도 전 후 조치에 대한 진의를 세세히 밝혀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미국이 왜 자기나라에 총뿌리를 들이된 전범국 일본을 향후 동맹국으로 택하고 평화조약까지 체결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미국과 전범국인 일본이 내면적 동질성의 역사를 가지고 때때로 분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헝크러진 근대사의 진실이 좀 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이다.
다급하게 냉전시대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구촉했다는 설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소련입장에서 여러가지 거부한 내용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위와 같은 패전국이란 원칙에서 일방적인 평화조약이었다는 사실과 미국이 적법한 영유권을 가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일본의 여러 섬이 할양되었다는 영토에 대한 불만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들끼리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언제가는 우리가 나서 일본의 여러 섬들이 실제로 일본의 소유이었는가에 대한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재검토 되어야 할 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온갖 조약문서에 등장하는 영토문제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본래의 주인은 미국도, 소련도, 패전국인 열도일본도 아닌 바로 세계삼한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본래 주인임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본 블로그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에 대한 논제는 간단하다.
대한제국의 황제 서명이 없어 강압적으로 체결한 을사늑약(乙巳勒約:1905)과 정미7조약 (丁未七條約:1907) 2개의 조약이 법률상으로 무효라는 사실과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1945.7.26)에서 일본이 강탈한 영토는 반환한다는 국제법상 원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기위해 우리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때가 곧 다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뒤 치닥거리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본 글의 주제인 태풍(허리케인)문제는 실제로 우리역사에서는 대체적으로 낯선이야기다.
다만 수해로 기록된 것이 많은데 매년 자연재해가 엄연히 존재했던 삼한역사 땅에서 일상적인 위험과 공포로 맞이 했던 태풍에 대한 기록들을 명쾌하게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비극적인 요소를 떠나 한반도 역사의 전반에 나타나는 서글픔이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지배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태풍이라는 한문 용어를 찾을 수가 없을까.이것을 역사모순적 행태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다.
역사연속성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었다면 그동안 역사고서를 통하여 시정되고 바로 고쳐졌던 부분을 일부라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잔존한다고 하는 몇 안되는 역사고서에서 조차도 찾을 수 없다면 통째로 빼 버렸거나 들통날 것이 두려워 근세기에 조작이란 못된 짓을 저질렸을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 이전역사도 마찬가지지만 그 이후 특히 한반도에서 식민지체제에서 일반서민들을 매년 공포로 몰아넣었던 허리케인이던지 태풍이던지 간에 이에 대한 자료를 찾는 다는 자체가 무모한 것이 되어 버렸다.
조선왕조실록 정본이 철종대에 끝난다는 것은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고 왜곡되었다고 사학계에서 인정하고 있어 역사성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보기때문이다.
때문에 이것들을 우리가 실제 역사로 취급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무엇이 이토록 역사가 꼬이고 서글프게 만들었을까.
역사밝힘이 그렇듯이 언제가는 명백히 들어날 수밖에 없는 진실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를 무조건 덮어버리고자 하였던 역사 농단 세력의 고약한 저의가 근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서야 당연히 일만년역사라는 것을 알지만 5000년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는 한반도 역사 상황은 우리와 같이 오랜전통의 역사가 없는 민족이나 국가들보다 자연재해 동향을 알아볼 수 있게 한 역사사실에서는 우리가 딱히 나을 것이 없다.
무엇인가 남다른 특별한 것이 반드시 있을 터이겠지만 그래서 서양세력들이 탐을 내고 달려들었겠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부끄럽고 창피한 역사뿐이다.
솔직히 이를 역사라고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것일 수밖에 없다.
비록 한반도 지형에 맞게 잘 꾸며졌다고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후손들에게 긍지와 자존조차 보존할 수 없게 하는 부끄러운 역사 그 자체이다.
기존 뛰어나고 훌륭한 역사주체들이 남긴 우수한 과학적 자료는 다 어디에 있을까?
세계 어떤 곳에 우리가 절대로 찾을 수 없도록 꼭꼭 숨겨져 있을까?
지난 역사사실에서 매년 발생하는 기후상황과 자연재해에 관한 것은 후손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임을 무식자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천문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 천문지식이 그대로 전수되었던 것도 없다.
모두 중국으로부터 이어진다는 설명이 부첨되어 있을뿐이다.
태풍자료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이러한 말도 아되는 프레임에 의해서다.
후세에 참고가 되고 지식이 될 만한 알짜배기 자료나 데이터는 오늘날 세계질서를 독점하고 있는 국가의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이미 그들의 것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서두 설명이 길었지만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지구상에 아주 보잘 것 없는 역사주체라 할지라도 자국 역사 구성원이나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삶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은 지속적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보다 안전한 길이 될 수 있거나 사후보전처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문헌들이 즐비하여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근세기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 당하면서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번 뼈저리게 서글픔을 느끼는 것은 고려사절요에서 찾을 수 없는 고려역사의 사실들을 중국역사서로부터 알게 된다는 비참한 현실이다.
어느민족 어느국가든지 겪어야 했던 일상적인 전쟁으로 인해 유독 삼한역사만 큰 소실이 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이름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라 절단의 의미를 갖다 붙여 기록이라 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졌던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은 전부 중국사에 이관시켜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그러한 빈곤한 과정의 역사를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고 태풍이나 허리케인처럼 자연재해에 대한 명칭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글쓴이가 연구하면서 늘 아쉬워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 2014년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s://han0114.tistory.com/17050704" 에서 밝힌 것처럼 환국의 강역을 나타내는 고서 삼성기(三聖記)와 환국본기(桓國本紀)에 덧붙여 원초적인 역사 기록 언어에 대한 종류와 명확성을 보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그렇더라도 역사농단세력에 의해 그것조차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겠지만...
1920년 시카고 그리고 필라델피아
태풍과 허리케인을 이야기 하려면 동아일보 1926년 보도와 연관시켜야 하는데 192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가진 당시 신문발행사정을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러일전쟁은 허구라기 보다 발생 주체와 위치가 크게 잘못 알려져 있던 사건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함축적으로 이야기 하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거론 될 수밖에 없는 지명에 의한 영토문제는 아마도 미국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불안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만 그 당시 상황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메야 하는 처지도 그 고민보다 100배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 존재한다.
그래도 그들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핵심에 대해 정확한 상황을 알기가 힘들고 특별한 방법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서두에서 언급하였지만 우리가 일제식민지기간 동안 많이 발생하였던 수많은 주요한 사건들에서 명확하게 알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때로는 똥도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일제병탄시기인 1920 년 때 일제문화정책 일환에 의해 창간되었다고 하는 동아일보에서 글쓴이가 찾고자 하는 자료들을 종종 찾을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기도 하지만 일편 서글픈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틀림없다.
당시 일제압제란 상황에서 독자적 신문발행이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은 동아일보의 보도내용들을 보면 어떤 유수한 세계일간지 못지 않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세계전역의 뉴스가 상당히 지면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내용 면에서도 당시 시대상황을 생각할 때 상당히 충실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세계유력지라 평가되던 뉴욕타임스와 뉴욕 월드, 뉴욕 저널과 비교하더라도 조금도 뒤처질 것 같지 않는 착각에 빠진다.
무엇이 이와같은 정도의 보도가 가능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자료를 찾아 알아 본 결과 동아일보와 특히 뉴욕타임스와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름에 감지할 수 있다.
아주 미묘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1851년 1부에 1페니짜리(penny paper)의 신문으로 출발하면서 노동계급을 위한 값싼 신문들을 발간하던 뉴욕타임스의 탄생은 근원적으로 자본주의와 색채를 달리한다는 사실이 있겠지만 귀족이나 지식자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폭넓게 다수를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특별한 영업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東亞日報)가 당시 적어도 한국민만을 상대로 하였다고 볼 때 서민을 위한 신문인 것처럼 인식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겠지만 또 하나의 가정은 한문과 병용한 한글을 깨우친 서양인들도 적지 않아 동아일보가 한글과 한문을 병용하여 보도함을 고집하였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s://han0114.tistory.com/17050742"의 소제 '10)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허구'란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을 부추기면서 선정적 기사를 경쟁적으로 촉발했다하여 엘로저널리즘(黃色言論:yellow journalism)의 기수로 알려진 뉴욕 월드(New York World:1889)와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은 한정된 여론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목적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경제논리상의 문제이다.
뉴욕타임스가 그 주인공인데 기존 신문과 다른 '인쇄하기에 적합한 모든 뉴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란 슬로건으로 서양인 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란 글로벌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즉 언어가 다른 폭 넓은 독자를 겨냥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를 유대인출신인 아돌프 옥스(Adolph Simon Ochs:1858-1935)가 1896년에 인수하고 발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보도의 방향성에서 식민지제국의 어용신문으로 변신하여 언어, 문화, 인종,종교를 달리한 대상을 폭넓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체제를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자본제국의 미국체제에 적극적으로 의존하면서 종속적인신문으로 족했을 것이며 어쨌던 이 신문은 곧바로 세계유력지로 성장되었다 한다.
말 그대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 배포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뉴욕타임스가 기존 신문과 달랐다는 것은 세계유력지답게 주요한 뉴스를 보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 크며 당시 미국이란 체제에 동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유력지라는 대명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 내용은 뉴욕타임스가 고급 정보를 얻어 보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잘나가는 신문은 정권과 유착하면서 좋은 정보, 고급정보를 취하고 선점한다는 것과 같다.
1904년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타임스(The Times)와 함께 최초로 해군전투 현장을 연결하여 무선전신(無線電信)전송을 받을 수 있었고 바로 동아시아대륙(?)에서 벌어 졌다고 하는 러일전쟁(露日戰爭:Russo-Japanese Wars)전장에서 중국소속이었던 스팀 보도선(報道汽船) 해문(press-boat Haimun)으로부터 전장상황을 보고 받아 제정러시아해군 발트해 함대가 일본해군에게 완전히 괴멸되는 보도를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러일전쟁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1차대전도 그러했지만 언제나 방관자로 남아 경제이득만 챙긴 것으로 알려진 미국까지 합해 통신보도의 필요한 지원과 혜택을 제공받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당시에 모든 충돌은 경제내면에서 발생되고 또는 촉발되는 요인에서 찾을 수가 있으며 19세기까지는 영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권력이 그러한 칼날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20세기 초부터 미국이 이를 인수하여 대자본의 권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898년 미서전쟁부터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갈등대상에서 벗어나 대체 조직을 사용하거나 대체인력을 고용하여 이를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자료 전반에서 찾을 수가 있고 이를 미국정치인들은 수동적 공격 정책(passive aggressive policy)이라 하면서 중립국 형태를 지향한 것이 된다.
이러한 기조는 일본에 의해 진주만(眞珠灣:Pearl Harbor)기습공격이 시작된 1941년 12월 7일전까지 유지되었다.
[SS Haimun at Anchor off Chinampo]
위 사진은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게시한 것으로써 평양 인근의 항구인 진남포(鎭南浦)에 닻을 내리고 있는 중국소유의 통신보도선 해문이다.
물론 뉴욕타임스는 이 선박에서 보낸 보고서에 의해서 보도가 가능했다 한다.
세계유일했던 통신보도선을 한국영역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당시 한국영역은 세계질서의 주요한 각축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증거라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거의 10,000km가 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욕(New York)에서 해문통신보도선을 이용하여 무선통신전문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당시에 무선통신사정을 생각해보면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https://han0114.tistory.com/17050764"에서 밝혔듯이 1900년에는 이태리계 영국인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1874-1937)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해군군함에 무선전신시설을 설치하여 고작 121km 거리에서 소식을 교환할 수 있다 하였고 1901년 12월 12일 마르코니는 2,575km 떨어진 영국 잉글랜드 서남부 콘월 주(Cornwall)의 폴듀(fall due)에서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세인트존스(Saint John's)사이를 무선으로 잇는 부호를 이용하는 무선모스통신을 받아 역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과학자들의 의심이 컷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뉴욕에서 동아시아대륙 진남포에 있는 해문보도통신선까지의 거리가 10,000km 가 넘는다는 것은 무선모스통신 거리의 한계 무리선을 넘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대기권에 전파를 반사하는 전리층이 존재한다 하여도 당시 과학자들이 의심한 지구의 곡률을 감안할 때 1905년에 해군무선통신을 뉴욕에서 받을 수 있었다 하는 것에서 크게 날조된 것이라고 보지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단언하지만 뉴욕타임스가 뉴욕에 있었다면 통신보도선의 위치는 그곳으로부터 모스통신이 제어할 수 있는 한계치의 거리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약 3~4년간 발달 속도를 감안하여 거리가 121km 보다 더 길었을 터이지만 대서양을 넘는 거리 2,500km 가 자스트(just)라 할 때 이 거리 범위 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간에는 열도일본인들이 군국주의를 앞세워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헛소리를 그대로 인용하여 한반도 거문도에 무선중계소가 있어 어선으로 위장하고 대한해협을 순시중이던 일본함선 '신농환(信濃丸)'으로부터 "적함 발견"이라는 무선을 받은 일본 해군은 즉각 러시아발틱함대를 기다렸고 힘들지 않게 괴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주장까지 덩달아 인용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나중에 이야기 또 하겠지만 미국과 상응하는 발전적인 시설들은 한반도에 존재할 수가 없다.
한반도가 그렇듯 과학적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무분별한 황당한 이야기가 우릴 놀라게 하지만 사실상 근거가 있어 하는 주장은 아니라 열도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인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르코니가 실험한 것이 1901년이라면 1905년에 거문도 무선중계소가 설치되었다는이야기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어 우릭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반도가 어딘가.
북아메리카대륙 뉴욕에서 동해안을 한참지나고 또한 파나마운하를 지나도 기나긴 항로 태평양을 횡단해야만 한다.
시대는 1905년이다.
파나마운하가 개통된 것이 1914년이다.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s://han0114.tistory.com/17050702"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이야기로 미국에서 기자재를 가지고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이것을 말하려면 당시 1904년까지의 대한제국은 미국과 거의 같은 과학적 발달을 소지한 국가체제였다는 점을 먼저 주장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언급은 없고 무조건 한반도를 북아메리카대륙 상황처럼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고 열도일본인들이 그렇듯 뛰어난 것처럼 세뇌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사 어디에도 대한제국이 과학적으로 미국과 거의 동등하게 발달했다고 하는 문구는 눈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한반도에 설치되어야 할 무선중계소라면 그렇게 강대국이라고 하는 일본 대마도 부근에는 왜 무선중계소라는 것이 없어 거문도에 있다는 중계소에 의존했을까?
솔직히 대마도와 거문도와 거리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다.
대한제국을 보호하려고 하던 러시아가 동일한 체제에 주체라고 할 때 설령 거문도중계소가 존재하더라도 가시같은 일본함대에게 보고하게 만들었을까.
1904년이라면 을사늑약이전이다.
러일전쟁에서 십이면 아홉이 일본이 패한다고 했다.
글쓴이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상식에 벗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무선중계소를 한반도에 세우려면 당시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마르코니의 허가를 받아야 할터인데 그러한 문제는 무시하고 한반도 조선 상황이라 하여 역사가 그러니 하면서 마구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무기를 팔목적으로 링컨대통령을 압박하는 영국금융조직을 경계하기 위해 러시아함대가 뉴욕에 상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세력, 또는 유럽세력 또는 식민지제국 등의 모든 당시 권력은 금융조직으로부터 생성되었다.
또한 발틱함대라 하지만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s://han0114.tistory.com/17050718"에서 밝혔듯이 허드슨베이(Hudson Bay)가 발트해라 했다.
그렇다면 러시아함대는 뉴욕에서 무선통신이 가능한 거리 최대거리 2,500km 넘지 않는 곳에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항로 길목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 어디에서 일본함대가 기다렸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료를 보면 러시아의 거대한 군사력을 대적한 일본은 기습적인 공격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한반도와 전혀 관계없는 곳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뉴욕타임스가 당시의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장소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며 때문에 신뢰성과 사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뉴욕타임스가 말하는 1904년 러일전쟁의 상황보도는 이러한 관점으로 다시 관찰 할 이야기가 틀림없다.
In 1904, The New York Times, along with The Times received the first on-the-spot wireless telegraph transmission from a naval battle, a report of the destruction of the Imperial Russian Navy's Baltic Fleet at the Battle of Port Arthur in the Straits of Tsushima off the eastern coast of Korea in the Yellow Sea in the western Pacific Ocean after just sailing across the globe from Europe from the press-boat Haimun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위는 뉴욕타임스가 동아시아 한국동해안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상황을 보도한 것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멍청하다 하더라도 220일간 29,000km 휘돌아 있는 진, 없는 진 다 빼버리고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전략을 꾸렸다는 주장 자체가 황당한 소설과 같다.
이와같이 무리하게 꾸미는 것에서 생각할 때 이미 사라진 러시아제국을 바보천치로 몰아부치는 것으로써 마치 망자에게 온갖 패악질을 하는 것과 같아 반드시 지양되어야 옳다.
사라진 러시아제국은 현재 소련이라 할 수 없다.
대한제국의 서양계일 뿐이다.
때문에 바보천치가 되었더라도 그들이 그로인해 차지한 영토보상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일본을 깨부시기 위해 출발한 곳이 지금의 발트해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 뉴욕타임스의 자료에도 이와같은 의혹을 감지할 수 있고 이것의 신뢰성은 다시 검토할 것이지만 보도하는 내용을 풀어보면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입장에서도 이것이 과연 한반도 영해에서 벌어진 이야긴지 아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명에 대한 위치 상황 확인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에서 동의가 가능하지만 이것을 굳이 한반도라고 한다면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위 통신환경적 요인이다.
러일전쟁 당시 제정러시아의 주력함대라 하는 발트함대 전함이 일본해군에게 완전히 파괴되는 과정에서의 장소가 동아시아대륙 위치라고 한사코 우기지만 중국 소속 보도선박(報道船舶) 해문(press-boat Haimun)의 정체, 또는 존재유도관계도 역시 밝혀야 하겠지만 우선 발트해 함대가 일본함대에게 파괴된 곳이 위에서 포트 아서(Battle of Port Arthur)라 하는 위치 설명에서 보면 근대사가 고집하고 있는 설명과 차이가 너무 많이 있다.
분명 포트 아서는 육지에 붙은 항구라 할 때 포트 아서를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발트함대가 포트아서 쪽으로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220일 소모해 가며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항로를 길게 잡았다는 주장이 정상적이라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라도 항로하여 전장으로 뛰어 들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발트함대는 포트아서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에서 포트아서가 황해에 있었다면 황해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면 황해어디에서 받았을 것이다.
Port Arthur in the Straits of Tsushima off the eastern coast of Korea in the Yellow Sea
우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러시아의 발트해 함대가 북유럽 발트해에서 유럽을 휘돌아 전 세계(?)를 가로질러 항해했다하고 그런 후 서태평양(western Pacific Ocean)의 황해(Yellow Sea)에 있는 한국동해안(eastern coast of Korea) 끝, 벗어난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보도는 지형적으로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이야기다.
황해와 동해안을 같이 묶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라 할 수 없다.
또한 한국동해안을 벗어난 대마도해협(Straits of Tsushima)이라 한 것은 그렇다 해도 대마도해협에 마치 포터 아서(at the Battle of Port Arthur)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한반도 지형사정과 전혀 맞지 않는 위치 문제가 골치가 아프도록 한다.
아무리 어물쩡 넘어가고자 한다 하여도 이와같은 보도사실은 세계유력지라 한 뉴욕타임스가 보도할 내용이라고 하기엔 의문 투성이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당시 일본함대가 발틱함대를 공격하는 장소가 제각기 주장이 다르다.
지금 현재 일본이 주장하는 러시아함대 격돌지는 한반도 동해안이라 하고 신중국자료에 나타나는 황해상을 격돌지라 하거나 뉴욕타임스가 말하고 있는 보도내용은 한반도 동해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서해안이라고 볼 수 없는 황해가 아니라 또 다른 제 3 지역, 대마도해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현재까지 모든 근대사가 주장하는 것 중에 가장 의문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29,000km를 항해하여 마침내 포트아서를 기습공격한 일본을 황해로 들어가 공격해야 함에도 정비하기 위해 거꾸로 전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운행했다고 하는 것은 가히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블라디보스톡이란 도시의 생성도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이다.
무엇때문에 러시아의 발트해함대가 동아시아대륙 연해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만화도 이런 만화가 없다.
이것은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보았자 거짓말은 거짓말을 양산하는 결과로 발트해함대가 근원적으로 출발한 곳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들이다.
문제는 포트 아서(Port Arthur)의 정확한 위치다.
지금까지 동아시아대륙역사에서는 즉 한반도 동해안이 아닌 서해안 즉 황해(黃海:Yellow Sea)북부지역에 있는 요동(遼東)반도 남쪽 끝 여순(旅順)이라 한 것에서 이러한 오류가 눈덩이처럼 크게 쌓인 것이다.
위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는 내용에서 보면 대한해협이라고 하는 조선해협이나 또는 대마도해협 부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지역에 포트 아서가 있다고 포괄적으로 보도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요동반도 여순이라 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다.
뉴욕타임스가 대마도해협의 장소를 명확하게 한국동해안을 벗어난 지역이라 하였고 전치사 "at"를 사용하면서까지 포트 아서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지만 실제로 대마도 어디에도 포트 아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유력지인 뉴욕타임스의 보도 정확성을 믿는다면 위 보도에서 표현하는 위치는 분명 현재 동아시아대륙의 요동반도 남쪽 끝 여순(旅順)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황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북아메리카대륙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황해는 늘 상식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미시시피강에 범람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뉴올리언즈는 모래퇴적이 쌓인 곳이다.
그러니 황해라고 할 수 있는 곳도 멕시코만과 미시시피강이 만나는 하구라 할 수 있다.
물론 뉴욕타임스의 이 보도 조차 오보라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당시 뉴욕타임스가 내건 것은 이런 중대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신뢰와 믿음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할 때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사실을 어쨌던 인정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여순은 포트 아서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하다.
글쓴이는 이미 오래전에 이 포트 아서를 멕시코만 북부해안에 위치한 포트아서라 하였다.
본 블로그 글 "토네이도(Tornado)로 본 유럽지명과 모스크바(Moscow)지명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3"에서 동유럽에 위치한 모스크바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을 가능성과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s://han0114.tistory.com/17050718 를 바탕으로 할 때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 북동부에 있는 얕고 넓은 만(灣:bay) 허드슨베이(Hudson Bay)를 발트해라 한 사실에서 그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유럽을 휘돌아가 아니라 당시 유럽국가들이 꿰 찾고 있었던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을 휘돌아 남부 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2015.03.21 14:58]소제 13). 대비달자 악라사와 대한제국https://han0114.tistory.com/17050742"에서 이미 1898년 미국자본이 쿠바에서 도발하여 스페인을 쫓아내는 것 같지만 바로 대한제국의 대동아공영권 영역을 하나 하나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러일전쟁은 수동적공격정책을 지향한 미국자본이 제공한 용병대리전쟁(代理戰爭)으로서 멕시코만에 있는 포트아서(旅順軍港:Port Arthur)를 공격한 것이며 스페인 멕시코친미계를 재펜(japan) 또는 일본으로 이름을 통칭하고 기습공격하게 한 것으로 대한제국의 일부를 미국대체조직 일본이 가지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대한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멕시코와 텍사스주를 멕시코반란세력들에게 공여한다는 조건이 붙었다고 볼 수 있고 1905년 7월 29일에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체조직 일본과 맺은 또 하나의 주고 받기 식에서 이와같은 맥락에 의한 것임을 밝혔던 바가 있다.
1905년 이후 카리브해 제도에 일본 즉 "japanese" 라는 국명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다.
즉 포트아서는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여순이 아니라 멕시코만에 있는 포트 아서이어야 하고 그곳으로부터 시작한 땅 따먹기가 오늘날 미국서부영토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글쓴이의 여러 주장과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는 내용은 위치상 일치하는 것이며 러시아함대가 파괴되었던 여순구공격(旅順口攻撃) 또는 여순항해전이 발생한 즉 포트 아서 전투(Battle of Port Arthur)의 장소는 조선해협 또는 대마도해협에서 벗어난 지점에 있는 포트 아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마도 뉴욕타임스가 위 보도자료에서 한반도가 아닌 곳인 동해안에서 벗어난 대마도해협의 포트아서라 한 지형구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언급한 동아일보와 뉴욕타임스의 연결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920년 일제조치로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당시 환경에 반해 상당한 보도 수준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뉴욕타임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아래 뉴욕타임스 이력을 참조하면 알 수가 있는 일이다.
In 1910, the first air delivery of The New York Times to Philadelphia began.The New York Times' first trans-Atlantic delivery by air to London occurred in 1919 by dirigible. In 1920, a "4 A.M. Airplane Edition" was sent by plane to Chicago so it could be in the hands of Republican convention delegates by evening.
뉴욕타임스는 1910년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처음으로 항공배달을 했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런던으로 첫번째로 배달한 것이 1919년 대서양횡단비행으로 가능했다 하였으며 마침내 1920년에 비행기로 항공기판(版)를 시카고(Chicago)로 보내지면서 그 날 저녁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 것에서 1920년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창간된 시점과 일치한다고 보았을 때 그리고 세계유력지의 도움이 있었다고 볼 때 당시 동아일보는 시카고에 있었으며 뉴욕타임스가 항공배달한 원판을 번역하여 그대로 인용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풍과 허리케인이 구분되어야 했던 역사
이제부터 왜 포트아서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러시아가 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까지 점령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지를 본격적으로 찾아보자.
이것을 찾기 위해 허리케인 역사는 세계삼한역사의 중요한 자료라고 하고 싶다.
현재 북아메리카대륙은 허리케인으로 인하여 심한 몸살을 연속적으로 앓고 있다.
매년 그러하니까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지의 사람들의 고통은 우리가 겪는 태풍피해보다 훨씬 더 강도가 큰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최근 2017년 8월 13일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하비(Harvey)가 중심기압 938(hPa)에 평균속도(215 km/h)의 강도로 6시간 후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카리브해 서쪽방향으로 진행하였고 멕시코 남부에 있는 캄페체만(Bay of Campeche)을 통과, 록포트(Rockport, Texas)를 상륙한 후 휴스턴(Houston)을 강타하고 재차 8월 30일 캐머런(Cameron, Louisiana)에 재상륙하여 또 다른 피해를 낳았는데 9월 22일 포트 아서(Port Arthur)에서 북쪽으로 16킬로 떨어진 미국 국립기상청 관측소는 하비로 인해 무려 1,640mm의 강우량이 기록되었다고 발표하였고 700~1900억($)달러 피해액이 산출되어 우리나라 원화로는 140조억원이라 하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피해와 동시에 수많은 이재민을 남겼고 북아메리카대륙 텍사스남부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매체들은 보도하고 있다.
이어 9월 2일에 하비(Harvey)가 소멸함과 동시에 또 다시 2017년 8월 30일경 카리브해(Caribbean Sea)에서 발생한 어마(Hurricane Irma)는 중심기압(中心氣壓) 914(hPa)를 유지하면서 평균 풍속 ≥250 km/h(≥156 mph), 파고 ≥5.5m를 유지하다가, 중심기압이 920-952(hPa)까지 상승되면서 급격히 사피어-심프슨 열대저기압(Saffir-Simpson Hurricane Scale:SSHS)의 5등급까지 발달한 허리케인 어마(Hurricane Irma)는 드디어 글쓴이가 이 글을 쓰는 시간인 9월 9일 밤부터 플로리다주 주민 65만명 피난케 하였고 폭우를 동반하며 앞을 볼 수 없도록 무섭게 물아치면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상륙하는 허리케인의 광폭한 광경을 CNN 생방송을 통해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사실상 어떤 자연 재해이던 그 피해에 대해 규모가 어떠니 저떠니 하는 비교는 근원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선조들이 매년 이런 피해를 겪었고 재정을 망가뜨릴 수 있는 피해액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후손들은 과거 발생한 태풍의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불효가 아닐 수 없고 또한 조상님들께 실제로 면목이 서지 않는 이야기다.
어쨌서 이런 천하에도 없을 상황이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역사농단이 결국 우리의 정체성까지 말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실제로 우리의 선조들은 이보다 더 한 고통을 자연재해로 인해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그것에 따라 지혜롭게 세세하게 데이터를 만들어 대비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 후손에게 전달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겉 껍데기 뿐이다.
세계삼한역사가 하나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 사실이라면 각각 구성원부류에서 다른 종교문제와 문화의 의한 갈등, 그리고 인종, 민족간의 갈등 등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이와같은 기록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고서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종교, 문화, 인종, 민족에 의해 발생한 갈등을 전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이를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포괄적으로 민족이 하나인 것처럼 기록되었다는 것은 고서를 찾는 글쓴이에게도 실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한 거대한 사건 현장이 몇 백 년이 흘러 비록 지명이 변하고 결국 나라조차 바뀌었다 하여도 결코 근원이 변했다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며 때와 같은 장소가 아니라 해서 자연이치의 근본을 속이거나 감출 수는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언제까지고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진실을 간직한다는 것을 알기에 역사찾기를 결코 멈출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굳은 역사철학은 글쓴이의 머리 속을 늘 강하게 지배한다.
생각해보며 애초부터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가 우리나라에 태어날 수 없는 근원적으로 과학적인 문화 토양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결코 아닐 것이다.
존재했지만 적어도 한반도 삼한의 과학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고 있었더라도 근세기 역사판짜기에 의해 전부 빼앗겨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태풍이란 명칭은 과연 신조어일까?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공포심을 낳았던 태풍은 절대로 신조어의 대상이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마치 태풍이 전에는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처럼 말할 수 있겠지만 자연의 이치는 매년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몰아치는 거대한 폭풍들이 존재했음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
근래에 들어 북아메리카대륙에 이어 태풍이 빈발하는 것에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가 해수 온도상승을 유발하고 폭우를 발생시키는 습기 찬 공기를 발생케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본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이러한 거대한 폭풍은 수시로 발생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물론 지금처럼 흉폭해지는 강도가 더하고 덜했으면 몰라도 취약한 지역에 범람으로 이어짐은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그나마 고서에서 수해(水害)가 빈번했다는 것은 이와같이 볼 수밖에 없다.
현재 NASA에 의해 수집 된 자료에는 플로리다를 강타한 어마(Irma)경로의 해양 표면 온도가 카테고리 5등급 허리케인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수온이 30°C 이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은 현대들어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온난화문제도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주장인 것은 틀림없다.
또 태풍이 빈발하는 다른 요인으로는 대서양의 10년 주기 진동이 허리케인 형성 조건에 영향을 주면서 현재 허리케인 상태가 양호한 상태에 있는 대서양의 장기주기에 의한 것이며 대서양의 따뜻한 해수면 온도와 약한 수직 바람 전단은 거대한 허리케인으로 형성되고 강화되는데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상대적으로 동양태풍보다 더 심한 피해를 낳는 허리케인은 대서양의 특수한 환경조건도 크게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풍과 허리케인을 굳이 구분해야 하는 현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동양역사, 서양역사란 역사프레임 때문에 태풍이 갈라져야 하는 기막힌 사실부터 집고 넘어간다.
태풍은 왜 동양태풍과 서양태풍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동양태풍이란 말도 없고 서양태풍이란 말도 없다.
하지만 동양태풍이나 서양태풍이라 하지 않았지만 이런식으로 교묘하게 분리된 것이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2015.06.04 20:25) https://han0114.tistory.com/17050757 "에서 글쓴이가 밝히길 북서태평양(Western North Pacific)상에 태풍자료가 1939년 이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주목하고 의혹스럽게 바라보았으며 태풍과 허리케인이 달라야 하는 시대적 배경에서 근세기에 적어도 서세가 데이터 자료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 1939년 이후부터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세계인들에게 공개를 위한 자료화한 것은 한반도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시작되기 약 석 달 전인 1950년 3월 23일에 세계기상기구(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WMO)가 발족된 이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하게 한반도가 주목되어야 할 사실이 하나 둘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서두에서도 이상하게 본 이야기다.
한쪽에는 살상이 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새롭게 동양과 서양태풍을 분리하기 위해 국제기구가 발족되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마찬가지이야기다.
이미 1945년부터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상징처럼 남북한이 충돌하면서 내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살상을 위한 참혹한 참상들은 한마디로 가당찮게 기존 역사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기위한 세계에 공개된 학살현장으로써 사실상 부족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종전 된 후 피아 사망자수가 500만명이라 하였다는 것은 전체 인구의 1/6 이니 약 17%가 되는 것이라 이러한 사망자 숫자는 폭격으로 인한 것으로써 재래식 공격에 의한 살상보다 무차별 폭격이 주요 원인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도 본 블로그 글 "코리언(corean)학살https://han0114.tistory.com/17050740" 편에서 언급하였던 내용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꽃피었다 하면서도 수많은 유물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전시 문화재 보호에 대한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협약의 원칙이 무시되면서 공산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하지만 전쟁사 기록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퍼부은 폭탄의 숫자는 단일전쟁으론 최고라 하였다.
말로 안되는 무차별 폭격이었던 것이다.
공산세력을 척결한다는 이유였지만 끝내 또 다시 삼팔선을 대신할 휴전선만 남기고 언제까지고 갈등할 수 이쓴 요인으로 남겨진 것이다.
또 다시 휴전선이 한반도를 갈라 놓았을 때 전쟁을 했던 이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정당한 사유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또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같은 무차별 폭격이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이를 우리가 나서 막을 수 있을 것인지 현 국제정치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 역시 장담할 수가 없어 오히려 한국전쟁때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맞이 할 수 있다는 불안은 우리민족에게 존재한다.
무차별 폭격에서 안타깝지만 미국에겐 한반도의 역사유물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계기상기구(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WMO)가 발족된 이후 1951년 9월 8일에는 난데없이 전범국인 일본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San Francisco Peace Treaty)을 맺었다는데 분노하는 것이다.
전범국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으로 위치를 확인하는 협정이었고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동북아 질서개편에 일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다분히 새로운 동아시아대륙 질서를 위한 미국 포석 이면에는 영토의 확실성을 보장받겠다는 의도가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극단적인 반공운동이었던 매카시슴(maccarthysme)으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결국 미국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많고도 많다.
왜 이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궁극적인 것은 백색인종의 우월성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새로운 미국 건설을 위한 확고한 방침 때문이다.
실제로 아래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1926 Miami hurricane)발생 사실들은 서양인들이 본격적으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년대 1939년 보다 앞선 것이라 더욱 의혹스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 틀림없지만 문제는 똑같은 태풍이 한반도에도 발생했다고 하는 동아일보의 보도는 이런 의혹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늘 글쓴이가 앵무새처럼 되 뇌이는 것이지만 기존 역사를 쪼개어 동양사와 서양사를 만들어야 했다는 것은 근세기 서양세력들이 세계질서를 장악한 상황아래 놓여진 부정하기 힘든 그들만의 강구된 일정한 팩트로서 갈라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태풍(颱風)이라는 한자어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이어야 하고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외국어는 다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번역의 명칭은 역사개체 속에 기존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 마땅하고 번역이란 명칭아래 결코 실체가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번역은 번역일 뿐 번역하는 언어별로 역사가 결코 달랐다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19~20세기에 들어 동양역사와 서양역사가 서양세력들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혼란이 불필요하게 생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무수히 많은 역사가 각기 언어별도 개체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원칙아래 이것을 독립이라 규정하면서 특히 영어를 필두로 그리어와 라틴어가 이를 주도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이렇게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려(高麗)가 한자(漢子)를 사용했다.
고려정치체제 아래 한자만 특별하게 사용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고집이 아니다.
이미 영어자료에도 나타나지만 10세기부터 시작된 고려를 "united corea" 라는 연합, 연방 수식어는 정치형태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연합, 연방이란 단어 속에 여러이해집단과 인종, 종교, 문화, 민족등이 다르다는 전제가 있다.
고려정치권내에 라틴어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어도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며 고문서로 이를 기록하고 알렸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진본을 우리는 찾을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중국학자가 고려를 방문하여 저장된 문헌들을 대했을 때 수세기 전의 고문서들이 넘쳐났다는 토설이 이를 반증한다.
또한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2012.01.22 17:25) https://han0114.tistory.com/17050475 " 에서도 밝혔듯이 1377년 최초의 고려금속활자의 원본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라 한 것과 구텐베르크가 인쇄기술자로써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서, 즉 구텐베르크 성서(Gutenberg Bible) 또는 라틴어 불가타(Vulgata)성경을 인쇄했다는 사실과는 실체가 결코 다르다고 단정할 수 없고 또한 상대적으로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려에서 발명된 하나의 판, 인쇄할 수 있는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로 완성된 것이니 근본이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1888년 최초의 고려금속활자 원본을 소개한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1853-1922)가 스스로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역관의 도움 없이도 한문서적들을 읽을 정도로 한학에 능통했고 수많은 고서적 수집하는 등 동양문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면에 숨길 수 없는 역사전통성과 그 내면에 동질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반드시 동양역사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가 서양역사의 개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것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동서양이 분리되면서 마치 서양인들이 동양인에게 이러한 역사유물들을 기증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분리된 문화영역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전 역사 속에서는 프랑스인 그들도 같은 역사체제의 구성원이었던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를 현대인들이 눈치조차 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을 뿐이다.
1900년에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의 대한제국관에 고려금속활자의 원본을 기증한 이 프랑스인은 프랑스의 초대대사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서양세력이라 단정할 수 없는 어쩌면 순수한 코리아일반시민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고려가 생성된 10세기 때부터 여러 도시국가들을 연합하면서 대왕이 다스리던 방대한 국가체제라고 할 때 하나의 언어로만으로 국한되거나 제한되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미 고려체제아래 여러 언어로 각자 다른 문화와 민족성에 맞게 본질의 역사기록이 변질되지 않는 범위에서 남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필연적 개연성은 많고도 많지만 특히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종이역사를 보더라도 이와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2013.06.06 21:32) https://han0114.tistory.com/17050647 " 에서 글쓴이가 밝히길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에 전하는 것에“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 고려가 세계문화의 저장고란 성격이 짙고 이서(異書)를 세상(世上)에 흔하지 않는 보기 드문 서적(書籍). 귀(貴)한 책(冊)이라고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신분이 어떻던 생전에 볼 수 없었던 책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하며 언어가 다른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희귀한 책을 말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고집하는 한문만을 통하는 것이 아니거나 알 수 없었던 각 지방의 희귀한 언어를 사용한 문헌들임을 알 수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재 마치 워싱턴DC에 있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나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중국 백도백과(百度百科)자료에는 송(宋), 원(元), 명(明), 청(清)시대때 그들 나라에서 서사(書寫)쓰고 적는 것을 모두 고려종이(高麗紙)로 사용했었다고 하고 청(清)건륭(乾隆)시에는 그들 나라에서 고려종이를 방제(仿制) 즉 모조했다는 글이 있는데 백과사전에서 서사(書寫)란 의미를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용어라 하면서 넓은 의미로서는 어떤 언어를, 또는 문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일 전반을 가리킨다 하였으니 주로 빼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당시 고려의 문화적 지배력은 대단한 것이다.
근세기에 비로소 고려의 역사문헌들을 체계적으로 빼기거나 모사(模寫)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송, 원, 명, 청이라 하는 중국 조대명(朝代名)들은 참으로 무색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비록 다른 언어로 역사기록이 이루어졌겠지만 결국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한 하나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며 이것을 근세기에 서세(西勢)들은 오리엔탈(Oriental)이라고 통칭하고 이를 동양(東洋)이라 간격을 두면서 아시아(ASIA)로 만들어 역사심기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이 근세기에 마치 처음부터 역사가 달랐던 것처럼 여러 개의 역사로 분리되고 이질화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의 시기는 빨라야 중세기정도이다.
즉 중세기 역사부터는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는 것을 러시아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말을 빌려서 알 수 있지만 그것도 더 늦은 근세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태풍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면 오늘날 역사학자간에도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어째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 태풍(颱風)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에서 서두에 잠시 언급한 내용이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태풍이라는 자연재해가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참으로 기괴하고 이상함이 그 내면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아마도 허리케인을 의식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풍이 없는 세상에 존재했다고 믿어야 하겠는가.
이참에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신뢰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한번 지적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전 세계사적으로 기릴 만한 걸작이라 하여 1997년에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은 정확하거나 신뢰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글쓴이의 명확한 판단이다.
어떤 면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역사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일부의 기록일뿐이다.
왜냐하면 백과사전에도 자세하게 적시된 이야기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동란이 끝나고 1년 남짓 후인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 태백산본(太白山本)을 8분의 1로 줄여 인쇄하고 사진을 찍어 영인하여 A4판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는 사실과 이를 국내 도서관 뿐만아니라 난데 없이 전쟁통에 유럽과 미국의 주요대학의 도서관에 널리 반포하였다는 사실을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무엇이 그렇게 급해 쪼그라든 우리나라 한반도 역사를 이렇소 하고 알릴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이미 서두에서 걱정스럽게 자문한 것으로써 바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왜 한국전쟁 중에 시작되었을까 하는 의문과 맥락을 같이 하고 1951년에 발족된 세계기상기구와 최종 목적하는 의미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코리아 역사 없애기와 한반도 역사 알리기다.
상당한 많은 분량을 없애버리고 줄여 인쇄하고 전쟁통에 자국의 아픔이나 고통과 상관없이 마치 무엇인가에 의해 확실하게 정리가 된 것처럼 스스로가 세계만국에 공개하고 반포했다는 것은 굳히기가 가능했다고 판단했고 이러한 멍청한 짓을 우리 사학계가 나서 저질렀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가 유일 할 것이다.
때문에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오히려 이것들이 기존 역사로 굳히기에 들어간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듯 세밀하고 정밀하다고 국제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명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본 블로그에서 과학적인 면으로 모순을 다반사처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이제 역사사건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의 대표적인 태풍이 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한반도 역사의 이해할 수 없는 생성과정과 빈곤한 실체라 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동양역사의 중심언어라고 하는 한자(漢字)인 태풍(颱風)이란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선에서 생각해보아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어쨌거나 역사연속성에 의한 자연재해상황이 통째로 빠졌다는 이야기며 이 바람에 태풍사실도 이제는 남의 것이 되었다는 참으로 기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고종19년(1882년)세 번째 기사 조미 조약(朝美條約)이 체결되었다.
第三款, 美國船隻在朝鮮左近海面, 如遇颶風, 或缺糧食煤水, 距通商口岸太遠, 應許其隨處收泊, 以避颶風, 購買糧食, 修理船隻, 所有經費, 係由船主自備。
미국 선척이 조선의 근해에서 태풍(颱風)을 만났거나 혹은 식량·석탄·물이 모자라고 통상 항구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졌을 때에는 곳에 따라 정박하여 태풍을 피하고 식량을 사며 선척을 수리하도록 한다.
위는 조선(朝鮮) 고종19년(1882년)세 번째 기사인데 태풍(泰風)을 구풍(颶風)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유일하다.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이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標準國語大辭典)에서는 구풍을 “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하고 돌개바람과 비슷한 뜻이라고 풀이하면서도 원래 태풍을 구풍이라 했고 현재 태풍(颱風)은 ‘신조어(新造語)’라 말하고 있다.
하기야 태풍도 돌개바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역사기록이 이렇듯 두루뭉실해서야 어찌 역사기록으로 가치를 이야기 하겠는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5권 /문종인효대왕(文宗仁孝大王)2, 34년(1080)에 나타나는 구풍(颶風)이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조(太宗朝), 세조(世祖), 성종(成宗), 중종실록(中宗實錄)과 헌종(憲宗)11년(1845)각사등록(各司謄錄:1577-1910)의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에 나타나는 구풍(颶風)은 말 그대로 회오리바람 즉 토네이도(Tornado)일 뿐이다.
이것을 태풍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크고 작음을 모르는 눈감고 아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구풍을 태풍이라고 찾으니 진짜 태풍을 찾을 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이 태풍(颱風)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통째로 태풍을 빼 버린 것이다.
태풍의 태(颱)라는 글자는 청나라 초기 왕사진(王士禛:1634-1711)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처음 등장하며 그는 대만(台灣)지역 기후를 설명하면서 “바람이 크고 맹렬한 것을 ‘구(颶)’라 하고, 더 심한 것을 ‘태(颱’‘라 한다(台灣風信與他海殊異,風大而烈者爲颶,又甚者爲颱)”라고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즉 구는 돌개바람이고 태는 허리케인이다.
대만은 오래전부터 허리케인이 많이 와 닿는 지역이었을 것이니 바로 플로리다 근처이다.
단, 태(颱)는 1918년 세상에 나온 중화대자전(中華大字典)에도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글자를 널리 쓰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허리케인은 10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태풍을 말한 것이며 큰 자연재해를 사람들에게 매년 안겨 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태풍은 바람도 존재하지만 강우(降雨)를 동반하면서 폭우로 인해 곳곳에서 범람을 발생시킨다는데 더 큰 무서움이 있다.
대홍수와 수해는 이 허리케인이 쓸고 지나간 현상이다.
현재 허리케인을 바람이 크고 맹렬하다고 대입하는 것은 일부현상만 이야기하는 꼴이 아닌가.
분명 본 블로그 글 "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https://han0114.tistory.com/17050799" 에서 구(颶)를 고전번역원에서 한결같이 “사나운 바람”이라 고만 해석한 것을 동아시아대륙에 불어대는 태풍(颱風)을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토네이도라 정리하였고 이어 본 블로그 글"토네이도(Tornado)로 본 유럽지명과 모스크바(Moscow)지명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3"에서 토네이도(tornado)가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 사실을 근거로 삼한역사가 기록한 토네이도는 모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것임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세세하게 확인한 바가 있다.
그리고 변명이 궁하니 태풍을 기존 한반도 사학자들이 난데없이 신조어(新造語)라 하고 있지만 이것이 한문이 아니더라도 음을 태풍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많고 이를 허리케인이라 할 사실과 더불어 태풍(颱風)을 신조어라 하는 것은 궁색하기가 짝이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
https://han0114.tistory.com/17050757"에서 1936년 8월 11일 동아일보 호외(號外)기사를 바탕으로 태풍의 진로와 발생상황을 처음으로 살펴본 결과 당시 충주에서 집중호우(集中豪雨)가 있었고 이어 한강홍수(漢江洪水)로 인한 위급한 상황까지 맞이한 것은 바로 1936년 동태평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Eastern Pacific hurricane)의 영향을 받은 수해(水害)이었음이 밝혔던 바가 있었다.
이러한 밝힘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즉 동아시아대륙의 서태평양에서 생성되는 태풍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이치적 사실을 토대로 본 결과에 의한 이러한 사실들은 결코 삼한역사의 터전이 동아시아대륙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밝혀질 것을 염려한 조작된 것이다.
이제 무수한 사례와 진실이 교차하는 것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분명하다.
진실이 이처럼 낱낱이 밝혀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에 한반도 태풍과 비교할 수 없도록 차라리 태풍이란 기록을 삭제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과거 삼한 역사에서 등장하는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같은 태풍을 동일하게 태풍이라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제3제국(第三帝國:Dritte Reich,1933-1945)독일제국을 제압하고 1945년부터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이 장악한 세계는 코리아 위치부터 조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태풍들을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한 태풍이라 하면서 태풍과 허리케인을 구분이 어렵게 한 것이 틀림없다.
이것의 결과는 1951년 발족한 국제기상기구가 그것이다.
기후학적으로 보아도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토네이도와 허리케인이며 실제적으로 형태적으로도 다를 수밖에 없다.
기후학적으로 토네이도는 국부적으로 강력한 저기압이 발달하면서 강한 풍속을 가진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 생성원인은 온대저기압의 불안정이나 한대기단과 열대기간 사이에 형성되는 강한 한대전선(polar front:寒帶前線)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바람의 지름이 보통 태풍의 1000분의 1밖에 안 되며 태풍과는 달리 수평방향의 확대보다 수직방향의 규모가 크게 나타나는 바람이므로 일단 피해규모가 광범위하지 않다는 것인데 확연히 태풍과 같은 허리케인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왜 태풍을 태풍이라 하지 못하고 한사코 구풍이라 고집했을까?
따지고 물어도 결과는 같고, 사실과 진실은 결코 거짓과 조작사실과 병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태풍과 허리케인 역시 병존할 수 없고 하나 이어야만 한다.
최소한 1939년 이전까지의 태풍은 허리케인이고 허리케인은 태풍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월한 백색유럽역사를 만들기 위해 광분하던 서세는 고려(高麗:CORE)가 동서양으로 분리되어야 했고 한자기록의 고려(高麗)와 라틴어의 고려(高麗)가 구분되어야 했던 것처럼 고려가 그리스(Greece)이기에 그리스어(Greek)가 고려어(高麗語)라는 사실에서 굳이 서세 입장에서는 한자(漢字)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스어가 대신하고 라틴어가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 한자의 형상의 어원처럼 영어의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처럼 19세기때 서양인 지식자들 속에 한자(漢字)를 습득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이와같은 대비를 증명케 한다.
백과사전을 보면 로마제국의 동부에서는 그리스어가 거의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로마(羅馬)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Latin語)인구보다 그리스어 인구가 더 많았지만 교회역사가 유럽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중세시대에는 라틴어가 교회의 지배적인 언어로 인용되었고 라틴어 위주의 명칭들이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고 현재 모든 자료들이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고려어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글쓴이에게 조언을 부탁드린다.
아마도 한반도 인들은 고려어의 실제 형태가 어떤 것인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태풍의 어원(語原)에서도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는데 태풍의 영어 단어인 ‘typhoon[taɪ|fu:n]’은 그리스신화에 티폰(Typhon)Τύφωνα[Týfona]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과 ‘티폰(Typhon)'을 파괴적인 폭풍우[폭력적인 해양 선풍(旋風:Tourbillon marin d’une extrême violence)]와 연관시킴으로써 'taifung'을 끌어들여 'typhoon'이라는 영어(英語)표현을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영어(英語)의 ‘typhoon'이란 용어는 1588년에 영국에서 사용한 예가 있다 했으며, 프랑스에서는 1504년 ‘typhon'이라 한 사실을 들고 있어 영국보다 이르다는 것도 어쩌면 한글 생성과 프랑스어 생성과도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어보다 프랑스를 고급언어로 인정했다.
어쨌던 이것은 언어적인 문제라고 하지만 동서양 구분될 수 있는 개연성이 여기에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티폰”이라 이름 했다는 것은 곧 조선(朝鮮)에서도 태풍이라 했다는 말과 절대로 다르지 않고 물론 한문(漢文)을 그대로 음(音)을 따라 발음을 했건 간에 어떤 한자(漢子)가 사용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세속(世俗)으로 전해지는 음(音)은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태풍(Typhon)이라 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래 언어의 관계형태를 묶어 보았는데 참고하길 바란다.
[한글과 프랑스어]
1926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
전 세계의 태풍은 북대서양 서부 및 서인도제도 부근에서 11%, 북태평양 동부 및 멕시코 앞바다에서 약 17%, 북태평양의 동경(東經)180°, 즉 세계 각국의 시차(時差)를 결정하는 기준 경도선(經度線)의 서쪽에서 남중국해 사이 가장 넓은 바다지역에서 약 38%, 인도양(印度洋)남부,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서 동경 90°까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에서 약 28%, 벵골 만(灣)과 아라비아 해(海)에서 약 6%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백과사전에서는 정리하고 있다.
숫자적으로는 서태평양선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대신 위력적인 면에서는 북대서양 서부 및 서인도제도 부근과 북태평양 동부 및 멕시코 앞바다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에서 지형상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보이고 이것을 오늘날 허리케인(hurricane)이라 한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허리케인이 주는 공포와 피해는 어마어마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허리케인을 포함하는 태풍은 7월, 8월, 9월 동안에 내습한 태풍 수가 전체의 91%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태풍은 7∼10월 사이에 많이 발생하며, 적도(赤道:equator)를 사이에 둔 남북 위도 5° 이내에서는 태풍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다.
일반적인 태풍발생 특성은 열대저기압의 수온 27℃ 이상의 해면에서 발생하고 회전하는 물체 위에서 보이는 가상적인 힘의 원심력인 전형력(轉向力:Coriolis force) 즉 코리올리 힘(Coriolis force)이 비교적 약한 북위 5° ~20° 에서 발생하며 북반구에선 코리올리의 힘에 의해 바람이 오른쪽으로 쏠리며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일반적으로 발생 초기에는 서북서진(西北西進)하다가 점차 북상하여 편서풍(偏西風)을 타고 북동진(北東進)한다고 알려진다.
일반적인 허리케인 방향은 동해안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관측소를 동해안쪽에 두었던 것이다.
[Coriolis(kôr'ē-ō'lĭs)]
코리(cori)에-접미사(olis)가 붙어 있는 코리올리 힘(Coriolis force)은 프랑스 수학자 귀스타브 코리올리(Gustave Gaspard Coriolis:1792-1843)에 의해서라 하지만 코리(cori)의 의미는 코레(core)와 함께 우리에게 주는 것에서 생각보다 크게 나타난다.
중심축(CORE)이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있다.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돌기 때문에 낮과 밤, 계절의 변화가 생기며 이로 인해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받는 열량의 차이가 발생하고 또한 대륙과 바다, 적도에서는 일사(日射:sunlight)에 의한 열에너지가 풍부해지면서 극지방과 같은 지역에는 열에너지의 결핍에 따른 열적 불균형이 일어나 이런 열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현상 중에 특히 저위도(低緯度)지방의 따뜻한 공기가 바다로부터 수증기를 엄청나게 공급받으면서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하며 고위도(高緯度)로 이동하는 기상현상을 태풍 또는 허리케인이라 하고 허리케인은 고도차가 일반적으로 “970 hPa” 헥토파스칼 이하이며 중심부의 최대 풍속은 초속 32m/sec 이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허리케인은 시속 120~320km의 회전속도로 불고, 시속 16~32km로 이동하며, 직경이 약 1,000km에 이르는 것으로 소멸하기까지 1주일 내외가 걸린다고 한다.
특히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한반도 사정을 보면 7~9월 여름에 서해(西海)중부 먼 바다 해상까지도 27~28℃의 수온일 경우에 태풍발달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의 서해(西海)나 동해(東海)에서도 태풍이 발달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사례가 여태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북위 25° 이상의 해상에서 태풍이 잘 발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양열용량(Ocean Heat Content)과 하층과 상층의 바람 차이가 커질수록 강해지는 수직풍 시어(Vertical Wind Shear)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동아시아대륙 상에 놓고 풀어보면 서두에 이야기 했지만 특히 멕시코 만(灣)의 수온의 에너지를 받아 강력하게 되는 허리케인 하비의 경우처럼 한반도 서해안에서의 수온이 아무리 높아도 태풍이 생성되어 나타나는 것은 유사이래 지금까지 찾아 볼 수 없었고 수직풍 이어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약해진 태풍이 한반도 서해안에서 다시 살아나 피해를 준 사례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오히려 고기압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남해 지역에서 강하게 발달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관측소가 있으려면 남해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부터 태풍현상에서 참으로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동양태풍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하는 이름하여 태풍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다른 이름인 허리케인이 그것도 같은 년도, 같은 월, 같은 일자 그리고 같은 시간에 발생하고 똑 같이 진행하면서 더군다나 태풍의 진로 방향도 같아 다만 이름만 다른 두 개의 태풍 또는 허리케인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만약 그런 사실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세기의 기네스북 감이 아닐 수 없으며 기상과학자들이 못 볼 것 보았다고 난리를 칠 이야기다.
그렇듯 판으로 찍어낸 듯 같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자연이치적으로 이러한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참으로 헷갈리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한쪽의 보도는 한글이고 또 다른 한쪽의 기록은 영어라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은 번역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의 사건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니 둘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192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전하는 보도를 보면 1926년 9월 15일부터 태풍이 발생하였고 그래서 보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16일, 17일, 18일을 거쳐 9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비교적 약해져 소멸단계 있는 태풍에 대한 예보와 함께 보도가 끝난다.
물론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동아시아대륙의 태풍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또 다른 태풍 즉 미국허리케인 자료에는 동아일보가 보도한 거의 같은 시기인 1926년 9월 11일에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생성된 허리케인은 대서양을 가로 질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서북으로 이동하고 소엔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제일 북쪽에 위치한 세인트 키츠 섬(St. Kitts)으로부터 9월 14일에 보고되었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물론 보고를 받았던 기관은 미국기상청(United States Weather Bureau)이다.
생각해보면 미국기상대가 이 허리케인의 발생상황을 처음 보고 받았으니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도기관 즉 신문사에게 전달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신문이 보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야 1926년 9월 15일이 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동아일보가 처음보도한 일자와 일치한다.
미국기상대의 보고서를 동아일보도 받아 보도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허리케인 자료는 어떤 것인가.
바로 당시 어마어마한 피해를 낳았던 1926년에 발생한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이라 명명한 태풍이다.
이것의 발생부터 소멸하기까지의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고 글쓴이가 기존 본 블로그에서 밝혀본 사실을 근거로 비교하면서 동아일보의 보도가 우릴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해결하고 또한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풀어 우리가 여태 잘못알고 있는 역사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
생성(Formed) | 1926년 9월 11일 |
소멸(Dissipated) | 1926년 9월 22일 |
최고풍속(Highest winds) | 1-minute sustained: 150 mph (240 km/h) 150마일 |
저기압(Lowest pressure) | 930 mbar(hPa); 27.46 inHg 930밀리바(hPa, 헥토파스칼)수은주인치 |
피해(Damage) | $78.58 million (1926 USD) |
영향권지역(Areas affected):터크스(Turks), 케이커스제도(Caicos Islands), 바하마(Bahamas), 플로리다(Florida), 알라바마(Alabama), 미시시피(Mississippi), 루이지애나(Louisiana) |
최근 어마(Hurricane Irma)가 발생하기 전 휴스톤(Houston)을 초토화시킨 허리케인 하비(Hurricane Harvey)의 최저 중심 기압 938 hPa, 최대풍속 59(m/s)로 나타나는데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은 최대풍속에서 초속42m로 나타난다.
태풍(颱風)발생기준으로 따질 때 최고풍속(Highest winds)이 150mph(240 km/h)이기 때문에 4등급(210~249 km/h)으로 분류되었으며 이 정도면 지붕이 날아가고 해안 지역에 큰 침식이 일어나며 내륙 지역에 침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머지 않아 최고의 등급인 5등급으로 상승한다.
이 태풍은 워낙 큰 피해를 주었던 허리케인(hurricane)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이라고 하였으며 정작 이 허리케인(Unnamed)에게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에 각 지역마다 기상관리소가 존재하였지만 허리케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기관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글쓴이가 이야기 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아도 역사농단 실체들이 그때까지 제대로 활동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보면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은 서(西)대서양에서 1926년 9월 11일 서경 43° 0' 0"W , 북위 15° 0' 0"N 범위에서 발생하여 1926년 9월 22일에 루이지애나주(Louisiana州)데리더(DeRidder)근방에서 소멸된 것으로써 피해액이 $78.58 million(1926 USD)라 하였고 현재 환율계산으로 하면 1570억 달러($)의 큰 피해를 냈다고 알려지는데 오늘날 환율로 따져 178조가 되다 하니 우리나라 1년 예산의 약 45%수준의 규모이다.
이 피해는 곧바로 플로리다주의 경제공황으로 발전했다.
이상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이다.
경기의 거품이 붕괴되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은행들이 폐문하였고 부유한 사람들은 갑자기 돈을 잃고 거지가 되었다.
이런 플로리다주에 피해상황에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자 보도로 전하여 지는 것인데 난데 없이 동아시아대륙에 있을 일본이 직격탄을 맞았고 일본재계혼란과 더불어 조선상계(朝鮮商界)가 대공황(大恐慌)을 겪으며 쑥대밭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야 말로 글로벌한 이야기다.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을 미국입장이야 1926년과 연이어 1928년에도 발생한 허리케인 피해로 재정적인 부담이 커 그렇다고 하겠지만 거의 1만km 떨어진 일본에서 직격탄을 맞았다고 야단 법석을 떨어야 했을까?
미국이 이 여파가 컸던 것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이로인해 1928년에 일부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공황들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따져 볼 이야기지만 대체로 수긍이 안가는 것은 아니라 직격탄은 미국이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문에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시장이 대폭락하였고 이를 ‘검은 목요일’이라 하는 경제대공황 이 발생한 요인으로 취급될 수 있다.
하지만 경제대국이라고 하여도 동아시아일본은 이런 와중에 안끼이는데가 없는데 일본 역시 1927년의 금융공황으로 시작해 1929년의 미국과 똑같이 세계공황을 거치며 1930년에서 1931년에 최고의 공황을 맞이 했다고 하여 이를 소화공황(昭和恐慌:Showa Depression)이라 하고 있다.
아무리 세계가 한지붕이라고 하지만 가장 넓다고 하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북아메리카대륙과 동아시아대륙의 경제상황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과 다르게 물론 파나마 운하가 개통이 되었다고 하지만 1920년에 운송이 원활했다고 할 수 없고 동아시아대륙에 위치한 일본은 지리적 환경에 의한 무역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 뻔하며 엄청난 운송비의 문제로 인해 원가 상승이 발생하여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분명하게 있었음에도 미국과 상응한 경쟁력을 가진 것이라면 이것은 무엇인가 경제학적으로도 매우 뒤틀려 잘못되고 한참 잘못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같은 불리한 무역환경을 극복하려면 일본이 플로리다 가까이에 있든지 미국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일본이 미국과 대등한 경제대국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무한의 뻥에 가깝다.
다시 허리케인피해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 피해지역으로는 카리브해지역의 투르크(Turks)와 케이커스제도(Caicos Islands), 바하마(Bahamas), 플로리다(Florida)주(州)가 가장 큰 피해를 낳았고 북아메리카대륙 본토는 알라바마(Alabama)(州), 미시시피(Mississippi)(州), 루이지애나(Louisiana)(州)로 나타난다.
만약 과거 일본이 피해지역에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마이애미시티에서 발생한 사망자수 114명과 미국인 사망자수가 총 372명이라 하였지만 이 숫자에는 미국 외 지역의 재난인구수는 포함되지 않았고 약 43,000명의 노숙자는 대부분은 마이애미 지역이며 실종자 수는 추정조차도 불확실하다고 말해진다.
물론 일본인들의 피해상황은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제물포와 보스톤
1926년 카리브해 폭풍(Caribbean a storm)은 마이애미 기상청(American Weather Bureau)에 의해 묘사되길 아마도 미국을 강타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허리케인이라 하였고 플로리다주(Florida)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 데이니어(Dania), 브로워드 카운티(Broward County) 남동쪽에 있는 할리우드(Hollywood), 할렌데이(Hallandale) 및 마이애미(Miami)를 강타했다고 기록에 세부적으로 나타난다.
거의 허리케인이 최고조를 달할 때인 1926년 9월 18일에 사망자는 325명에서 800명으로 추산하였는데 이전 역사상의 폭풍으로 인한 재산 피해가 이와 같이 크지 않았다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에 대한 데이터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조선지배상황과 연결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마이애미 허리케인 발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 1926년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생성된 폭풍은 대서양을 가로 질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이동했다고 세인트 키츠 섬(St. Kitts)으로부터 9월 14일에 보고되었다.
2일 후 바하마(Bahamas)로 이동했고, 9월 17일 플로리다 남부(South Florida)쪽으로 향했다.
9월 17일 오전 10시(at 10 A.M). 워싱턴의 기상국(Weather Bureau in Washington)은 금요일 밤 바하마제도 뉴프로비던스(New Providence)섬의 북동 해안에 위치한 나사우(Nassau)를 통과하여 플로리다 해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매우 심한 폭풍(a very severe storm)"임을 발표했다.
신문도 보도했지만 독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시각이 9월 17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시 뉴스매체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한정이 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이애미 기상예보자(Miami weatherman) 리처드 그레이(Richard Gray)는 오후 6시 직전 워싱턴의 기상국(Weather Bureau)에서 허리케인 경보를 발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926년에는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고 알려진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이 허리케인을 어떻게 알고 보도 했을까?
동아시아대륙의 태풍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와같이 보도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이외라 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한반도 사람들을 위해 이같이 보도 했다는 것은 마이애미 기상예보자 조차 당시 대대적으로 알릴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한반도 역사가 거짓이 아니라면 참으로 대단히 발빠른 보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이렇듯 동아일보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을 빠르게 보도하도록 도왔을까?
동아일보 캡쳐한 원문을 보면 보도 마지막에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 발표(發表)라는 것이 보인다.
인천관측소가 한반도에 존재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거문도에 무선중계소가 있었다는 사실과도 느낌은 다르지 않다.
인천기상관측소라는 것은 제물포기상관측소를 말함인데 영어로 "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 라 하였다.
이에 대한 놀라운 자료가 있다.
1872년 7월에 미군 통신단(Signal Corps)에 의해 설립된 미국기상학저널인 기상월보[Monthly Weather Review]의 자료에 따르면 FIG. 1.-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사진과 함께 1905년 9월 발행된 기상월보(Monthly Weather Review)에 소개된 관측소가 바로 제물포기상관측소가 인천관측소라고 하고 있다.
제물포관측소가 대한제국에서 세웠다면 무엇때문에 세웠을까?
물론 빈번한 허리케인을 파악하기 위해 동해안에 세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 인천은 서해안이니 태풍이 지나가는 관문도 아닐뿐더러 기상관측소가 있을 하등에 이유가 없다.
그것은 한반도로 이름만 이관되었다는 뜻이다.
대자본국 미국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매년 무수히 많은 거대한 허리케인의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속에서 그나마 허리케인을 미리 예보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 바로 제물포기상관측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국에서의 기상관측소가 대서양과 맞대고 있는 동해안 메사추세츠 밀톤(Milton, Massachusetts)에 미국기상학자 애보트 로치(Abbott Lawrence Rotch:1861–1912)가 개인적으로 1884년에 설치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밀톤의 부루힐 기상관측소(Blue Hill Meteorological Observatory)이다.
그것의 역사를 풀어보면 본래의 기상관측소 건물과 본래 원석 탑은 결국 바람이 몰아부치는 비가 벽을 꿰뚫고 들어와 기구와 기록들을 손상시켰고 원석의 의한 진동 또한 구조상 문제까지 있다하여 1908년에 본래 고층 건물을 제거하고 1740년대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고딕 리바이벌 건축(Gothic Revival architecture)양식 네오고딕 건축(Neo-Gothic)형식으로 3층으로 보강하였다고 하는 자료가 눈에 띈다.
때문에 이런 약력을 가지고 있는 메사추세츠 부루힐기상관측소(Blue Hill Meteorological Observatory)와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인천에 세운 기상관측소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도 상당히 앞선 기상학건축물이라 생각되며 어떻게 미국동부에서도 당시까지 미국이 뛰어난 기상학자에 의해 개인의 이름을 빌어 설치하였다고 하는 기상관측소를 그것도 과학적으로도 크게 낙후되었다고 하는 한반도 제물포에 실제로 존재하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건물의 약력이나 제물포기상관측소의 사진으로 보면 모양새가 당시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세련 된 것임을 알 수 있어 실제로 제물포기상관측소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태풍보도를 한 동아일보 캡쳐 원문에 인천관측소발표라고 보도된 내용에서 적어도 1926년까지 인천이라고 하는 제물포(Chemulpo)는 본래 허리케인 태풍이 빈발하는 곳을 관찰하기 위한 장소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고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매년 휩쓰는 허리케인을 관찰하기 위해 적재의 장소인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 있는 보스톤(Boston)에 설치했다고 볼 때 제물포는 바로 보스톤이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이 관측소가 세워진 곳은 본 블로그 글 "청구(靑丘)와 bule hill, https://han0114.tistory.com/17050123"에서 밝혔듯이 바로 청구라고 할 수 있는 부루힐(bule hill)언덕에 세워진 것은 제물포관측소의 사진 전경과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싶다.
마이애미 허리케인 발생부터 소멸까지의 상황
허리케인의 경고 경로를 보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우스 플로리다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 된 경고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소유했을 뿐이라고 했다.
최고조를 달한 허리케인은 그날 저녁(9월 17일)바람이 강해지면서 기압계가 계속 떨어지고 파도가 솟구치기 시작했으며 강풍(Gale-force winds)은 해안을 강타했다,
새벽 2시, 폭 96.5km(60 miles wide)넓이의 허리케인이 해안을 강타했다.
마이애미에서 사망한 100명의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시력을 읽고 희생이 되었는데 강풍에 의한 파편에 맞아 익사했다라고 알려진다.
여전히 위협하고 있는 허리케인은 북서쪽에 있는 남부의 대습지대(大濕地帶) 에버글레이즈 호수(Everglades)를 가로질러 오케 코비 호수(Lake Okeechobee)까지 휩쓸어버렸으며 광폭의 바람은 호수의 가장 약한 제방을 뚫었고 호수의 남서쪽 해안에 있는 무어 헤이븐(Moore Haven)의 작은 마을을 경고도 없이 약 4.5m높이의 호수물이 그대로 마을을 덮쳐 건물들은 형체도 없이 붕괴되었다.
폭풍은 멕시코만(Gulf of Mexico)으로 이동하였고 마침내 최후를 맞이 하기 전 플로리다의 먼 북서쪽 끝에 있는 펜사콜라(at Pensacola)와 앨라배마 주 모바일(at Mobile)을 강타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는 천(千)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마을의 대다수 건물 등이 아무 것도 안 남고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강이 범람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동아일보에게 전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라델피아 신문은 "플로리다 남동부 지역을 쓸어 버렸다."고 표제를 달았다.
특히 필라델피아에는 항공으로 뉴욕타임스가 전달되었다고 서두에서 이야기 했다.
때문에 필라델피아의 신문들은 뉴욕타임스를 인용했을 것이다.
다시 살펴보면 열대성 저기압은 9월 11일 중앙 대서양에서 형성되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이다.
주로 이곳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한다.
북서쪽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꾸준히 강화된 열대성 폭풍은 그 다음날 허리케인 강도에 충분히 다 달았지만 폭이 넓은 대서양에서의 싶지 않는 관찰 결과에서, 약 9일이 경과한 1926년 9월 15일까지는 폭풍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고 되었다.
허리케인은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북쪽에서 마침내 허리케인 강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폭풍이 카테고리 4등급(Category 4 hurricane)의 허리케인과 같은 강도에서 최고 강도에 도달 한 다음날까지 강화가 계속되었으며 그 강렬함은 9월 18일 마이애미 근처에 상륙하기 위해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Turks and Caicos Islands)와 바하마(Bahamas)를 횡단하면서 그 힘은 계속 유지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힘의 열대성저기압은 바하마섬 전체와 남부 플로리다 전역에 엄청난 파괴를 발생케 한 것이다.
폭풍은 수없이 많은 주민들이 집을 잃지 않기 위한 섬을 가로 지르는 수백 개의 구조물을 세웠지만 이것들은 맥없이 파괴되었으며 이것에 의해 적어도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다.
플로리다 남부를 강타 할 때, 대부분의 사망자는 오케 코비 호 (Okeechobee)근처에서 발생했으며 폭풍이 몰아치고 둑이 붕괴되면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익사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한 사실이다.
허리케인은 플로리다 반도를 빠르게 지나 서해안 포트 마이어스(Fort Myers)근처에서 멕시코 만(灣)으로 이동했고 폭풍은 주변 지역을 휩쓸면서 강풍은 나무를 쓰러뜨리고 전기 시설을 무참히 파괴하였다.
그 후 각각 9월 20일과 21일 앨라배마와 미시시피주에서 강도가 약해지면서 육지의 상호작용으로 허리케인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9월 22일에 소멸되었다.
아래 그림은 진로 방향을 시간대별로 그린 것이다.
전자에서 소멸을 살펴보았으니 허리케인 생성부터 시간대로 별로 자세히 알아보자.
처음 허리케인은 1926년 9월 11일 소엔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마르티니크섬(island of Martinique)에서 동쪽으로 1,770km(1,100mile) 떨어진 곳에서 시간당 시속 100km/h(65miles)의 열대성폭풍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료를 볼 수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발생하여 9월 11일 중앙대서양에서 형성되었다고 믿어지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서북서(西北西)방향으로 추적하면 허리케인은 9월 12일 서서히 강화되고 강열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소앤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동쪽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예측이다.
9월 14일 오후 저녁 세인트키츠(at Saint Kitts)에서 열대성저기압이 바람을 몰고 일으키며 허리케인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음날 스팀선 마투타(Matura)에서 관측하길 우연히 열대저기압과 마주한 상태에서 28.82inHg 수은주인치(水銀柱inch:976mb=hPa)를 기록했다고 알렸다.
[UTC=그리니치 평균시(GMT:Greenwich Mean Time)]
동아일보가 보도하기 시작한 시간 마침내 본격적 활동이 시작된 9월 15일 06:00(UTC)를 기준으로 허리케인은 버진제도(Virgin Islands)북부에서 더욱 강열하게 강화되고 있었고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Saffir–Simpson scale)열대저기압등급 카테고리 4에 해당하는 강도에 이르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강화되었으며 강도는 150mph(241km/h)라는 풍속을 9월 16일 18:00(UTC)에 기록했고 이 강도로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부근으로 허리케인이 지나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 직후 허리케인은 바하마(Bahamas)의 마야과나 섬(Mayaguana)을 강타했고 섬을 지나친 허리케인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9월 17일 남부 바하마(Bahamas) 나소(Nassau)근처를 지나가면서 엄청난 힘을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9월 18일 맹그로브 산호초(Mangrove Cay)지역의 안드로스 섬(Andros Island)에 2번째로 상륙했고 그 후 허리케인은 안드로스섬을 건너 플로리다로 가는 도중 멕시코 만류(灣流), 걸프스트림(Gulf Stream)을 통과했는데 걸프스트림 지역을 유구(琉球)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물이 공처럼 구(球)를 그리면서 흐른다는 의미라 하였기 때문에 허리가 구부러지 쿠바도 들어가지마 스트림지역에 있는 제도들이 모두 여기에 속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로에 의해 플로리다 남부 근처 페리네(Perrine)해안으로 허리케인이 들이 닥쳤으며 9월 18일 12시(UTC) 다운타운 마이애미(Downtown Miami)남쪽으로 24km(15 mile)떨어진 곳에서 최소 233km/h(145 mph)의 풍속과 27.46 inHg 수은주인치(930 mb)의 기압을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허리케인의 크기가 매우 커 가장 바깥쪽의 등압선까지 횡단 길이가 604km(375 miles)가량이나 떨어져 바하마 중부섬인 롱섬(longisland)까지 이어졌고 허리케인급(級)의 바람은 플로리다 위쪽부터 키(Keys)에서 가까운 세인트루시에 카운티(St Lucie County)까지 보고 되었다.
18일 20시 30분(UTC)경 허리케인의 중심부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푼타 라사(Punta Rassa)를 통과했고 그때까지 중심부의 압력은 28.05 inHg(950 mb)로 상승했지만 태풍의 눈 주위의 적란운(積亂雲)의 풍속은 169km/h(105 mph)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허리케인은 육지의 상호작용에 의해 플로리다 남부에서 급격하게 약화되었지만 6시간 후 푼타 라사 (Punta Rassa)에서 멕시코만(灣)으로 들어간 후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9월 20일 멕시코 만(灣)의 따뜻한 수온은 열대성저기압의 3등급(Category 3 hurricane)에 상응하는 풍속 201km/h(125 mph)의 풍우로 두 번째 강열한 절정(secondary peak)을 맞이했다.
그리고 멕시코 만을 통과하여 더 북서(北西)쪽으로 진행했지만 플로리다주(州)해안의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지역을 평행하게 진행하면서 서(西)쪽으로 서(西)쪽으로 서서히 휘어져 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크게 약화된 허리케인은 앨라배마(Alabama)주 페르디도 해변(Perdido beach)근처로 두 번째 육지로 접어들었고 그 날 오후 21시30분(UTC)에는 풍속이 185km/h(115 mph)를 기록하였으며 육지 상륙 후 허리케인은 앨라배마의 평행사도(平行砂島) 장벽 섬(barrier islands)에서 빠르게 약해지면서 구불구불 움직였고 열대성 폭풍으로 미시시피주(州) 걸프 포트(Gulfport)근처에서 9월 21일에 마지막으로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다음날 루이지애나에서 소멸하기 전에 약한 열대저기압(tropical depression)상태에서 퇴화하고 말았다고 정리된다.
최종 마이애미 허리케인의 사망자 수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초기 추정치에 따르면 마이애미만도 사망자가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부상자 역시 2,000명 이른다고 알려진다. 심각한 사상자로 인해 휴양지는 일시적인시체 공시관이나 병원으로 변했으며 주택과 사무실 건물들은 허리케인에 의해 전복되어 약 3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캠프로 사용되었다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1926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태풍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1926.09.15부터 9.19일까지의 동아일보의 보도에 등장하는 태풍과 1926.09.11부터 9.22일까지의 미국허리케인이 각각 다른 종류의 태풍인가 비교하며 살펴볼 것이다.
분명 1926년 당시 동아일보의 켑쳐된 보도를 보면 어디에도 허리케인이라 한 적이 없고 오직 태풍이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 너무나도 허리케인과 일치한다고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하는 이름하여 태풍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다른 이름인 허리케인이 그것도 같은 년도, 같은 월, 같은 일자 그리고 같은 시간에 발생하고 진행하면서 더군다나 태풍의 진로 방향도 같은 다만 이름만 다른 두 개의 태풍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글쓴이의 물음이고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우리는 동아일보가 보도한 대로 폭풍이 발생한 곳은 한반도라고 지금까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다른 잣대로 증명할 방법도 없었고 비교할 대상이 우리에게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똑같은 태풍이 위도는 같지만 경도가 다른 곳에 동경이 아닌 서경 위치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태풍이라고 이야기해야 했겠지만 한반도 역사가 그것을 용인하였으니 한반도 구성원들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한반도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그것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같은 규모의 태풍이 발생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어느 누구도 답을 할 수 없는 자연이치에 의해 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짓말 할 수 없는 자연이치는 명확하고 정확했다.
즉 같은 조건의 두 개의 태풍이 같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고 확실한 이야기다.
때문에 한쪽은 허구라 할 수밖에 없다.
어느쪽일까?
즉 동아일보의 보도가 정말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1926.09.15부터 19일까지의 한반도 기후상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새빨간 거짓이고 허구라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당시 동아일보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게 하는 답이다.
동아일보 보다가 시작한 1926년 9월 15일까지의 북아메리카 대륙 허리케인의 진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최초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은 서(西)대서양에서 1926년 9월 11일에 서경 43° 0' 0"W , 북위 15° 0' 0"N 범위에서 발생했다고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1926년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생성된 폭풍은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 질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이동했다고 하는 것이며 미국기상대로 세인트 키츠 섬(St. Kitts)으로부터 9월 14일에 보고되었다는 사실과 9월 11일에 소엔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마르티니크섬(island of Martinique)에서 동쪽으로 1,770km(1,100mile)떨어진 곳에서 시간당 시속 100km/h(65miles)의 열대성폭풍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북서(西北西)방향으로 추적하면 허리케인은 9월 12일 서서히 강화되면서 강열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앤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동쪽에 머무르고 있었고 9월 14일 오후 저녁 세인트키츠(at Saint Kitts)에서 열대성저기압이 바람을 몰고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허리케인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보도로 완성되기 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동아일보가 보도한 9월 15일은 조건상 자스트(정확)라고 해야 맞다.
미국 자료도 9월 15일 06:00(UTC)를 기준으로 허리케인은 버진제도(Virgin Islands)북부에서 더욱 강열하게 강화되고 있었고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Saffir–Simpson scale)열대저기압등급 카테고리4 에 해당하는 강도에 이르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강화되었으며 강도는 150mph(241km/h)라는 풍속을 유지하며 9월 16일 18:00(UTC)에 기록했고 이 강도로 터크스와 카이코스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부근으로 허리케인이 지났다고 되어 있다.
[Tracks of centers of Anticyclones, septemper, 1926. inset departure of Monthly mean pressure from Normal]
[1]
위 동아일보의 1926.09.15 개황(槪况)을 보면 어제(9.14)필리핀 동쪽방향 바다 위에서 출현한 태풍은 오늘(9.15)아침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쪽 방향 200km 해상에서 740(粍:mm)를 알리며 북쪽으로 행하고 있다고 했으며 대륙의 흑룡강(黑龍江)지역의 회오리바람은 동북동(東北東)쪽으로 이동하여 오후에는 천둥소리와 비(雷雨)가 있다 하였다.
740(粍)라 한 것은 일본단위로써 mm 인데 강수량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동아일보의 보도에서 태풍이 9월 14일 필리핀(Philippines)동쪽 해상에서 발생했다고 하고 이튿날인 9월 15일 아침에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쪽 방향 200km 해상에서 740(粍:mm)를 알리며 북쪽으로 행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허리케인 자료를 보면 약 9일이 경과한 1926년 9월 15일까지 폭풍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06:00(UTC)를 기준으로 허리케인은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북쪽에서 마침내 허리케인 강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구분해서 볼 것은 필리핀 동쪽 해상에 발생한 허리케인은 9월 15일 아침(06:00(UTC))기준으로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쪽 방향 200km 해상에서 강우량 740(粍:mm)를 알리며 북쪽으로 진행했다고 한 것은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북쪽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가 있는 곳을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라 했던 것인데 버진 아일랜드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허리케인은 9월 12일 서서히 강화되고 강열해지면서 여전히 소앤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동쪽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과 9월 14일 오후저녁까지 세인트키츠(at Saint Kitts)에서 저기압이 바람을 몰고 일으키며 허리케인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바로 세인트키츠가 있는 소앤틸리스제도임을 있는데 이곳은 희한하게 8개의 크고 작은 섬이 남북으로 이어지면서 환(環:ring) 형태를 만들고 있는 지형이다.
이곳을 글쓴이는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라 판단한다.
팔중산열도를 지금은 대만(臺灣:Taiwan) 동쪽바다에 약 212km 남짓에 야에야마 제도라고 하는 곳인데 석원도(石垣島)라고 하는 이시가키 섬이 약간 동쪽으로 떨어져 있다.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혼란을 멈춰야 한다.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는 8개의 무거운 산으로 만들어진 열도라는 이야기다.
즉 소앤틸리스제도이다.
사실상 필리핀 앞바다가 무한정 넓어 정확하게 지정하지 않으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태풍 생성지는 기압과 높은 온도, 수온이 높은 곳, 습도 높은 뉴기니섬 주위나 필리핀 동부해상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태풍 낸시(Typhoon Nancy)의 경우는 1961년 9월 7일, 마셜 제도의 콰잘레인 환초(Kwajalein Atoll)부근의 저기압 지대에서 열대저기압이 발생한 것이라 하는데 필리핀에서 거리를 재어보면 거의 4,500km 가 넘는다.
그 만큼 폭이 넓다는 이야기다.
물론 마이애미 허리케인 역시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에서 소앤틸리스제도의 마르티니크섬까지의 거리가 약 4,000km 이니 비교하면 대형태풍은 거의 같은 거리에서 힘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낸시는 최대풍속이 345 km/h 인데 관측을 전제 하에 전 세계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 중 가장 큰 수치를 기록했다고 알려지는 것이어서 진행방향도 특이 했었다는 것인데 생성지에서 완전히 온 원을 그리며 일본열도 남방 기주반도(紀州半島)를 지나 일본 중부를 통과하고 북서부에 있는 아키타를 거쳐 북해도와 오츠크해지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완전히 크다란 원을 그리며 휘어진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926년 9월에 발생한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태풍경로는 현재 위치지명을 대입할 때 1961년 때 발생한 태풍 낸시보다 더 굴곡점이 심하게 나타나 필리핀 앞바다에서 팔중산열도로 들어가는 과정의 원이 꺽여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1951년 태풍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그러한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경우가 된다.
때문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태풍의 경로는 동아시아용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경로는 그대로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에 적용하면 다음과 그림과 같이 적용된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열대저기압권뿐만아니라 고기압권 내의 날씨도 보도하였는데 9월 15일 고기압이 천도(千島)방면과 중국내륙간(中國內陸間)에 있으며 764(粍:mm)를 알리고 있다 하고 있다.
그 외 기상의 상태에서 날씨(天候)가 만주(滿洲)는 산뜻하게 개이고(好晴) 조선(朝鮮)은 남부가 영향을 받는대신 북부(北部)에는 맑고(晴) 중부이남(中部以南)은 맑게 개인상태(晴天)이며 일본(日本)은 장기(長崎)에 뇌우가 있는 외에 기타는 대개 산뜻하게 개이나 동북지방 북해도(北海道)에는 비가 내리는(降雨)곳이 많다 하였다.
즉 일본의 나가사키 장기(長崎)는 어쨌던 허리케인 영향권내에 있다는 이야기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오래된 생각이지만 쿠바의 아바나(Havana)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 예상(豫想)으로 여송(呂宋) 동쪽 방향에 있는 태풍(颱風)은 점점 북상(北上)하나 그것의 위치(其位置)가 멀리 떨어져 있어(遠隔) 조선(朝鮮)은 중국(中國)고기압세력권에 있음으로 내일(明日) 조선(朝鮮)날씨는 대개 맑음과 흐림이 상반된다하였다.
여송(呂宋)을 필리핀이라 하였다.
당시 필리핀은 푸에르토리코, 여송,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소앤틸리스제도까지의 영역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그 후 이 지역들은 모두 일본령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된다.
미국이 일본동양계를 동아시아대륙의 열도로 보내고 난 후 동양역사질서를 잡았고 동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일본에게 양해를 구하는 행태를 취했다는 것들은 모두 이러한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고 포괄적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기존 카리브해에 있던 도서들을 묶어 동아시아대륙에 옮겨놓고 일본 소유로 할양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천도(千島)라 함은 우선 온타리오 호(Lake ontario)의 북쪽 끝에서 그 하류의 세인트 로렌스 강(Saint Lawrence River)에 걸쳐 1,864개의 군도(群島:archipelago of 1,864 islands)로 이루어진 사우전드 제도(Thousand Islands)를 말하는 것 같지만 일본세력이 북부까지 넓혔다고 볼 수 없어 플로리다주 남서부해안에 위치한 텐 사우전드 아일랜드(Ten thousand islands)가 아닌가 한다.
故日本又称“千岛之国”
옛날 일본을 칭하기를 천(千)개 섬(島)의 나라라 했다는 사실에서 일본을 현재 캄차카 반도 남단에 있는 쿠릴열도(Kurilskiye Ostrova)를 천도열도(千島列島)라 하거나 지시마열도라고 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일본은 최초 포르투갈이라고 볼 수 있고 이어 잉글랜드의 앨비언(Albion)시대가 이를 이었으며 명실공히 네덜란드인이라고 하는 미국인 스스로가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를 20세기초라 할 때 포르투갈,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체를 포괄적으로 보면 천도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존재하는 텐 사우전드 아일랜드(Ten thousand islands)를 말하는 것일 수가 있다.
이러한 점도 허리케인의 진로가 증명한다.
[2]
위 동아일보의 1926.09.16 날씨개황(槪况)을 보면 태풍은 석원도(石垣島)남방 100km 곳에 접근하여 738(粍:mm)를 나타내고 상당히 우세한 것으로 석원도(石垣島)방면은 폭풍우(暴風雨)로 변하였다는 사실과 일본해(日本海)와 9주(九州) 남동(南東)방향 해상에 작은 저기압이 있다고 알려주고 고기압(高氣壓)은 일본(日本)동(東)쪽방향 해상과 몽고(蒙古)방면 사이에 있어 761(粍:mm)를 나타낸다 하였고 만주와 조선(滿鮮)은 일반적으로 매우 맑으나 점점(稍) 냉기(冷氣)가 일어나고(催) 일본(日本)과 구주(九州)는 하늘이 맑게 갠(晴天)상태로 본주(本州) 방면은 대개 흐림(曇天)이라 하였다.
석원도 남방 방면 100km 까지 접근했다는 것은 태풍의 진위를 밝힐 수 있는 매우 명료한 이야기다.
허리케인은 버진제도(Virgin Islands)북부에서 더욱 강열하게 강화되고 있었고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Saffir–Simpson scale)열대저기압등급 카테고리4 에 해당하는 강도에 이르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강화되었으며 강도는 241km/h(150mph)라는 풍속을 9월 16일 18:00(UTC)에 기록했고 이 강도로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부근으로 허리케인이 지나갔다고 되어 있는데 위 동아일보 보도와 맞춰보면 버진 아일랜드 북부에서 강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석원도 남방 100km에 있는 것과 같아 버진 아일랜드 가까이에 있는 푸에르토리코가 석원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
위 동아일보 1926.09.17 개황(槪况)을 보면 어제 석원도 남방에 있던 태풍(颱風)은 북동(北東)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늘 아침(今朝)에는 석원(石垣)과 오키나와(冲繩) 중간해상에서 735(粍:mm) 내외를 나타내고 있는 까닭으로 유구(琉球)방면은 폭풍우(暴風雨)가 있고 석원도(石垣島)는 어제(昨日)부터 전신불통(電信不通)이라 했다.
만약 석원도가 푸에르토리코가 맞다면 오키나와 즉 유구는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이 카리브해 제국들을 침략한 이력을 보면 푸에르토리코를 1898년에 침략하고 미국소유로 들어간 것은1917년이며, 도미니카는 1870년에 구매하려고 시도했고 1916년~1924년까지 미군이 주둔했었고 재정까지 장악한 것은 1905년~1945년까지이다.
또한 아이티는 미군이 주둔한 것이 1915년~1934년까지이고 재정을 장악한 것도 1916년부터 1941년까지이다.
이것은 곧 일본이라 할 수 있는 개연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동아일보의 보도에서 동해도(東海道) 충합(冲合)에는 753(粍:mm)의 저기압(低氣壓)이 북동(北東)으로 이동하여 있고 고기압(高氣壓)은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에 762(粍:mm)의 것과 몽고(蒙古)방면에 760(粍:mm)의 것이 있다 하면서 큰 기후로는 만주와 조선(滿鮮)은 대개 대단히 맑고, 일본은 구주(九州)남단(南端)으로부터 관동(關東)지역인 치바의 보소반도(房總半島)까지 남안지방(南岸地方)은 비(雨)가 있고 기주반도(紀州半島)에는 100量, 100(粍:mm)에 달하였고 기타지방은 대개 흐림이라 하였다.
9월 17 일 오전과 오후의 고기압의 지도를 보면 동해도 충합은 쿠바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오호츠크해는 바로 멕시코만을 말하고 있으며 몽고 역시 글쓴이가 일찍이 휴스톤을 몽고성이라 했듯이 그 지역을 몽고지역이라 하였던 것이라 할 때 텍사스주가 그렇게 불리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구주(九州)는 위 지도로 파악할 때 바하마와 터크스케이커스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본래 동해도(東海道)라는 지명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현재 동경(東京)으로부터 시즈오카(静岡)·나고야(名古屋)를 경유 쿄토(京都)·오사카(大阪)·고베(神戸)에 이르는 간선 도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아마도 에도시대때 쿄토(京都)에 이르는 주로 바다에 면한 15개 지방을 이름이라 한 것으로 유추한다면 일본이라 한 배경에 도시이름들이 동쪽 해안으로 몰려 이름한 것이 아닌가 한다.
태풍 예상(豫想)은 유구(琉球)방면의 태풍(颱風)은 북동(北東)으로 이동하여 일본(日本)에 점차 접근하는데 과연 일본(日本)을 직접 엄습할는지 안할는지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나 내일(明日) 조선해협(朝鮮海峽)방면은 태풍(颱風)의 영향으로 차차 악화되어 해상에는 다소 험악화할는지도 알 수 없겠으나 기타지방은 대개 맑을 듯하다고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發表)가 발표하였다.
앞에서 유구는 오키나와로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황국이라 하였다.
일본은 이 보도만 보면 쿠바를 말하거나 플로리다까지를 포함한 것처럼 인식되는 것인데 일본은 당시 상당한 지역을 점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두 개의 미국 중에 스페인을 꺾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대목에서 조선해협(朝鮮海峽)방면은 태풍(颱風)의 영향으로 차차 악화되어 해상에는 다소 험악화할는지도 알 수 없다 하였는데 한반도 지형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오키나와에서 오는 태풍이라면 제주도를 걱정해야 맞다.
그러나 난데없이 조선해협(朝鮮海峽)을 운운하는 것은 여기서도 동아시아지역의 기후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며 조선해협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허리케인 진로를 생각하면 지금의 플로리다해협(Straits of Florida)이나 아니면 유카탄해협(Yucatán Channel)둘 중에 하나이다.
[4]
위 동아일보 1926.09.18 개황(槪况)을 보면 어제 유구(琉球)방면에 있던 우세(優勢)한 태풍(颱風)은 북경(北京)으로 이동(移動)하여 지금 아침(今朝) 구주(九州) 남동(南東)방향 해상(海上)에서 730(粍:mm)내외를 나타낸다고 하였고 고기압(高氣壓)은 몽고(蒙古) 방면에서 766(粍:mm) 고도(高度)를 알리고 만주(滿洲)는 대단히 맑은 것에 반해 조선(朝鮮)은 황해(黃海) 측(側)은 맑으나 동해안지방(東海岸地方)은 곳곳에 뇌우(雷雨)가 발생(發生)하여 해협(海峽)방면은 한층 더 악화(惡化)하였다고 하였다.
일본(日本)은 일반적으로 비(雨)가 내리고 남해안지방(南海岸地方)에는 바람과 비(風雨)가 있다.
동아일보의 보도를 그대로 동아시아대륙에 적용해보자.
이미 태풍은 일본 유구방면에 17일 오후까지 있던 것이 구주(九州) 남동(南東)방향에서 일본 남해안의 기주반도로 들어가는 상황인데 갑자기 북경(北京)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착각하였던가 인쇄가 잘못된 것인지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를 동아시아대륙 지형사정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동아시아대륙에 북경이 어디인가.
일본열도 기주반도(紀州半島)라는 것은 열도로는 정 남해안이다.
그런데 동경도 아니고 북경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일까?
참으로 난해하다.
허리케인을 적용한다 하여도 북경방면이라면 동해안을 이야기 한다고 보았을 때 아마도 필라델피아나 메사추세츠, 또는 뉴욕주 정도로 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을 고기압지도로 보았을 때 자꾸 동부지역을 가르키고 있으며 실제로 마이애미 허리케인이 발생하였을 때 북아메리카대륙 권내에 고기압등고선을 보면 분명 동부지역에 거대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동부지역을 1926년 당시 동아일보가 중국이라고 보도했던 곳이다.
이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하게 하는 것이다.
1926년 9월 18일에 북아메리카대륙의 고기압 지도를 보면 고기압(高氣壓)은 몽고(蒙古)방면에서 766(粍:mm) 고도(高度)를 알리고 있다 하였는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남해안을 강하게 포지하여 허리케인의 육지상륙을 막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허리케인의 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가 있다.
대신 만주(滿洲)와 조선(朝鮮) 황해(黃海)쪽은 맑으나 동해안지방(東海岸地方)은 곳곳에 뇌우(雷雨)가 발생(發生)하여 조선해협(海峽)방면은 한층 더 악화(惡化)하였다고 하였는데 위 지도를 보면 훨씬 이해가 빠르다.
즉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은 뇌우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추후 기상을 예상을 동아일보의 보도는 구주남동충(九州南東冲)의 태풍(颱風)은 북동(北東)으로 이동(移動)하기 때문에 일본(日本)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기후(天候)가 험악하게 변화고 있는데 그중에도 근기지방(近畿地方) 동해도(東海道)가 더욱 심(甚)하다.
에도시대때 근기지방이라 함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경제와 문화 중심지다.
위 고기압의 지도를 보면 당시 일본이 쿠바라 할 때 아바나 지역이 허리케인 권내에 들어가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반면 조선(朝鮮)은 남조선(南鮮) 연안지방(沿岸地方)이 다소악화의 모양이 있을 뿐이라 했다.
내일(明日)은 몽고(蒙古)방면의 고기압(高氣壓)때문에 대개 맑을(晴天)것이나 차가운공기(冷氣)가 나타날 듯하다고 17일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가 발표했다.
사실상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것은 거의 하루가 늦은 것으로 파악된다.
허리케인은 저녁(9월 17일)바람이 강해지면서 기압계가 계속 떨어지고 파도가 솟구치기 시작했으며 강풍(Gale-force winds)은 해안을 강타했던으로 나타난다,
9월 17일 남부 바하마(Bahamas) 나소(Nassau)근처를 지나가면서 엄청난 힘을 유지했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9월 18일에 마이애미로 상륙한 것으로 나타난다.
9월 18일 맹그로브 산호초(Mangrove Cay)지역의 안드로스 섬(Andros Island)에 2번째로 상륙했고 그 후 허리케인은 안드로스섬을 건너 플로리다로 가는 도중 멕시코 만류(灣流), 걸프스트림(Gulf Stream)을 통과했다.
이 경로에 의해 플로리다 남부 근처 페리네(Perrine)해안으로 허리케인이 들이 닥쳤으며 9월 18일 12시(UTC) 다운타운 마이애미(Downtown Miami)남쪽으로 24km(15 mile)떨어진 곳에서 최소 233km/h(145 mph)의 풍속과 27.46 inHg(930 mb)의 기압을 추정할 수 있었다.
새벽 2시, 폭 96.5km(60 miles wide)넓이의 허리케인이 마이애미 해안을 강타했다.
여전히 위협하고 있는 허리케인은 북서쪽에 있는 남부의 대습지대(大濕地帶) 에버글레이즈 호수(Everglades)를 가로질러 오케 코비 호수(Lake Okeechobee)까지 휩쓸어버렸다.
당시 허리케인의 크기가 매우 커 가장 바깥쪽의 등압선까지 횡단 길이가 604km(375 miles)가량이나 떨어졌고 허리케인급(級)의 바람은 플로리다 위쪽부터 키(Keys)에서 가까운 세인트루시에 카운티(St Lucie County)까지 보고 되었다.
18일 20시 30분(UTC)경 허리케인의 중심부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푼타 라사(Punta Rassa)를 통과했고 그때까지 중심부의 압력은 28.05 inHg(950 mb)로 상승했지만 태풍의 눈 주위의 적란운(積亂雲)의 풍속은 169km/h(105 mph)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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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동아일보 1926.09.19.개황(槪况)은 일단 하루전인 18일의 태풍상황이다.
태풍(颱風)은 어제(昨日)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을 지나 기주반도(紀州半島)에 상륙(上陸)하여 일본중부(日本中部)를 통과(通過)하야 금일 아침(今朝) 북서부 아키타(秋田:Akita) 부근에 있는데 세력(勢力)은 748(粍:mm)로 약해(衰)졌다 하였다.
18일 20시 30분(UTC)경 허리케인의 중심부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포트 마이어스(Fort Myers)와 푼타 라사(Punta Rassa)를 통과했고 그때까지 중심부의 압력은 28.05 inHg(950 mb)로 상승했지만 태풍의 눈 주위의 적란운(積亂雲)의 풍속은 169km/h(105 mph)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과 비교가 가능하다.
일본 4국충(日本四國冲)이라 하는 것은 바로 터크스케이커스제도와 바하마제도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고기압(高氣壓)은 중국(中國) 내부의 땅(奧地)에서 766(粍:mm)의것과 오호츠크해(海)에 764(粍:mm)의 것이 있다고 했으며 때문에 만주(滿洲)는 대단히 맑으며(好晴) 조선(朝鮮), 일본(日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흐림(曇)이며 남조선(南鮮)으로부터 경인지방(京仁地方)은 대단히 맑다(好晴)라고 되어 있다.
일본(日本)은 동북지방(東北地方)이 험악(險惡)할뿐 기타(其他)는 대개 회복(恢復)되었다.
태풍이 약해진 상태에서 예상(豫想)되는 기후상황은 북서부 아키타(秋田:Akita)부근의 태풍(颱風)은 세력(勢力)이 쇠퇴(衰退)하여 하등의 염려할바가 없다 했고 내일(明日) 9월 20일의 조선날씨는 대단히 흐릴(陰曇)듯하다고 18일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가 발표했다.
반면 허리케인은 18일 20시 30분(UTC)경에서 6시간 후 플로리다 주 서해안 푼타 라사 (Punta Rassa)에서 멕시코만(灣)으로 들어간 후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9월 20일 멕시코 만(灣)의 따뜻한 수온은 열대성저기압의 3등급(Category 3 hurricane)에 상응하는 풍속 201km/h(125 mph)의 풍우로 두 번째 강열한 절정(secondary peak)을 맞이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 허리케인은 멕시코 만을 통과하여 더 북서(北西)쪽으로 진행했지만 플로리다주(州)해안의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지역을 평행하게 진행하면서 서(西)쪽으로 서(西)쪽으로 서서히 휘어져 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크게 약화된 허리케인은 앨라배마(Alabama)주 페르디도 해변(Perdido beach)근처로 두 번째 육지로 접어들었고 그 날 오후 21시30분(UTC)에는 풍속이 185km/h(115 mph)를 기록했다고 알려지며 육지상륙 후 허리케인은 앨라배마의 평행사도 장벽 섬(barrier islands)에서 빠르게 약해지면서 구불구불 움직였고 결국 열대성 폭풍으로 미시시피주(州) 걸프 포트(Gulfport)근처에서 9월 21일에 마지막으로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다음날 루이지애나에서 소멸하기 전에 약한 열대저기압(tropical depression)으로 퇴화하고 말았다고 최종 정리되어 있다.
마무리
이러한 글을 마무리 하는 심정은 솔직히 상당히 벅차다.
언제나 없는 시간을 쪼개어 새로운 사실을 찾아 세계삼한역사연구를 열성껏 하는 입장이지만 글쓴이 스스로가 이와같은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의무적으로 또는 누가 시켜 이런 글을 쓰라고 했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글쓴이가 이런 연구를 하기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또한 생각 해보면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혼자만 알기에 벅찬 것이고 본 블로그를 한사코 찾아주시는 열정적인 애독자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어쨌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쓰는 글이라서 참으로 힘든 작업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글이 자꾸 늦어지는 부분에서 큰 이해가 있으시길 바랄 뿐이다.
이참에 허리케인을 좀 더 파고들어 명확한 답을 구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며 이 번 글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준비 해 둔 자료를 바탕으로 더 많은 허리케인에 대한 글을 쓰고 여러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가까운 시간에 이제 동부편을 올리고자 한다.
이 글을 완성한 시간이 무척 길었던 것은 기상학적인 지식이 풍부하지 못함으로 인해 수많은 시간을 자료 찾기에 급급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물학적 판단은 어느정도 이력이 나 있지만 기후학적 문제에서는 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길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글을 발표하면 그것이 싫으나 좋으나 글쓴이의 주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하는 태풍과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을 비교해가며 진로방향과 그것에 따른 저기압과 고기압의 위치를 밝혀야 했고 낯설 수밖에 없는 지명에 행적을 추적하고 지형을 관찰하며 역사사실과 다른 점을 일일이 검토하고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이미 밝혔던 것들을 근거로 혹은 바탕으로해서 최종 마무리 지울 수 있었다는 모든 작업에서 힘든 만큼 보람은 지대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름대로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공치사하긴 싫지만 블로그가 그토록 확신에 찬 지난 글들이 죄다 사실로 확인되는 기쁨도 맛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고기압을 추적하면서 멕시코만이 한 때 오호츠크해로 불리었고 동아일보조차 지명을 그렇게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경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도 이미 블로그에서 밝혔던 사실이 아니라면 아직도 헤메고 있을지도 모르는 복잡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본 블로 글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2014.03.25 11:17]
https://han0114.tistory.com/17050698"에서 먼저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주(South Dakota)의 블랙힐스(Black Hills)가 사할린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아무르(Amur river)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이라는 사실과 그와 동시에 미시시피강 하구 뉴올린어즈(New Orleans)가 바로 아무르강(Amur river) 하구(河口)임을 알 수 있었으며 오호츠크해(Okhotsk sea)도 바로 미시시피강을 근원으로 하는 오호타(Okhota)가 퉁구스(Tungus)말로 강(river)이라는 뜻에 이어 "거대한 강"을 말하고 있는 것은 미시시피강도 거대한 강임을 알아 동일하다고 판단하여 오호츠크해는 아무르강 즉 미시시피강이 흘러드는 곳 멕시코만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더하여 아무르 하구의 니콜라옙스크항(Nikolayevsk)을 외만주(外滿洲)라 했던 이유에서 뉴올리언즈가 외만주로 비쳐지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외(外) 만주라는 것은 내(內) 만주가 있었을 터이고 북아메리카대륙 멕시코만으로 둘어쌓인 곳을 말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본 글에서도 잠시 돌이켜 보면 이미 태풍은 일본 유구방면에 17일 오후까지 있던 것이 구주(九州) 남동(南東)방향에서 일본 남해안의 기주반도로 들어가는 상황을 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북경(北京)으로 이동했다고 한 동아일보 보도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가 위 지난 글쓴이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결말을 지울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보스톤을 찾았던 이야기도 1872년 7월에 미군 통신단(Signal Corps)에 의해 설립된 미국기상학저널인 기상월보[Monthly Weather Review]의 자료에 FIG. 1.-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의 설명을 붙인 사진 한장은 우리 근대역사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매우 충격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월보에서 한반도에 존재하던 인천관측소라는 데서 이상함이 발동했다.
솔직히 무엇때문에 서해안을 끼고 있는 인천에 설치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태풍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라면 먼저 남해 어디쯤에 설치해야 하였을 것인데 인천에 이 관측소가 설치되어야 했던 이유가 불분명한데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진은 바로 1905년의 제물포 기상관측소(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라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미국 동부에 유일하다고 믿어지는 메사추세츠 밀톤(Milton, Massachusetts)카운티 부루힐에 있는 기상관측소 역시 이와 같은 동일선상에 놓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서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이다.
모두다 공통적으로 태풍을 관찰하기 위함이고 빈번하게 발생되었던 곳임을 알 수가 있다.
1884년에 설치했다고 하는 미국의 부루힐기상관측소를 그대로 두지 않고 왜 1908년에 철거하고 새롭게 건축을 다시 했을까?
건물의 이력을 보면 최종 원탑은 콘크리트로보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도 철근을 사용한 것이 최초하고 하였다.
무엇인가 부수고 새로 건축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1908년이면 사진 한장이 말해주는 1905년보다 늦은 시기가 분명했다.
사진 한장에 비춰지는 제물포관측소, 인천관측소는 소위 위 허리케인 글에서 동아일보에 기사 끝을 마무리 하던 인천관측소라는 사실은 동아일보가 남긴 가치로 허리케인 보도만큼 큰 것이다.
그리고 어떤 언덕인지 알 수 명확하다고 할 수 없지만 언덕위에 당시 기상관측소라 믿기지 않는 상당히 값어치가 있는 고고한 건물에서 매우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도 있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은 원석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을 1908년 철거하고 새롭게 네오고딕 건축(Neo-Gothic)형식으로 지어졌다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지만 부루힐 기상관측소(Blue Hill Meteorological Observatory)가 인천관측소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의 기득권층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었다고 보이고, 메사추세츠, 뉴욕주 등지에 서양인들이 많아 밀물처럼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닌가 하며 제물포가 인상 받듯이 주요 무역항으로써 또는 옛 조선의 거대한 항구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때문에 미국 동부에서의 모든 활동들은 이러한 조선 기득권층들에 의해 촉발되거나 유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인천 관측소 역시 이런 정치적인 환경과 허리케인이라는 무서운 자연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했다고 보았을 때 이러한 추측 범주는 상식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또한 이 글의 서두를 돌이켜 보면 동아일보가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받아 한글로 번역하는 수준에서 보도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한반도가 아닌 곳에서 발행했을 것이 틀림없고 뉴욕타임스가 비행기로 보내줄 수 있는 지역이라 한정하였던 곳이 딱 두군데라 하였는데 한 곳은 1910년에 귀족들이 있었을 법한 필라델피아로 다른 한 곳은 1920년에 시카고로 항공기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192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는 시기적으로 시카고에 있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시카고는 당시의 경성이었을까?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을 살펴보았던 과정을 설명하면 미국 자체적인 관리의 힘이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연재해의 타격으로 미국이 힘을 잠시 잃었다는 생각에 미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경제와 미국경제는 하나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미국은 1898년에 미서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을 패배시키고 카리브해의 도서들을 전부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미국이 현재 미국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지만 일본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은 위 허리케인을 추적하며서 나타나는 지명들이 모두 일본과 연관되어 있다.
스페인의 지배지역을 미국이 스페인을 쫓아내고 차지했으나 1926년이니 거의 30년이 되도록 일본영역이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역사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자료를 보며 미국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미국의 은행가들은 러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게 전쟁자금을 대출했다고 하는 자료가 있다.
이것은 펙트이고 미국정치인들이 주창한 수동척공격형태이다.
미국에게 자본은 거대했을 것이지만 이런 대자연의 재해를 제어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1926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허리케인을 추적할 수 있는 충분한 시설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자본가가 대중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 이치이다.
그리고 인천관측소가 발표한 허리케인 상황들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것에서 사실이라면 보도 속도가 당시 미국이란 체제에 비해 상당히 빨랐다고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모든 당시 데이터는 워싱턴 D.C 에서 관리한 것 같으며 이곳에 미국기상청(United States Weather Bureau)이 존재했을 것이고 특히 9월 14일까지 허리케인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카리브해에 특별한 기상관측소가 없었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볼 때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수준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는 결론이다.
지금은 국립허리케인센터(The National Hurricane Centers HURricane DATabases :HURDAT)라고 하는데 이곳의 데이터베이스가 1851년부터 1949년까지 대서양(Atlantic Ocean)과 동태평양(Eastern Pacific Ocean)에서 발생한 열대성저기압에 대한 세부정보를 담고 있는 특별한 두 개의 별도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아마도 1945년까지도 이것들은 완전하다 할 수 없었던 증거이다.
그러나 북아메리카대륙에 조선세력이 있었다면 1926년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수준은 매우 수준이 높았다고 하지 앟을 수 없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s://han0114.tistory.com/17050778 "에서 밝혔지만 1920년에 비로소 뉴욕에서 30만(萬)명의 상비군(常備軍:standing army)을 신설하는 등의 경찰활동들을 실시했다고 볼 때 같은 시기에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창간하게 된 배경은 오늘날 미국이라고 단정 할 수 없지만 엉클샘(Uncle Sam)을 상징하고 경제를 주도하는 지배체제가 조선을 지배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1933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정책 또한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한 것이 틀림없는데 당시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조선이 처한 자연환경과 재난환경에서 이 미시시피강과 연결되고 일치하고 있다는 점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었다.
서두에도 언급하였지만 과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목적이 무엇일까?
정말로 평화조약인가.
아니면 미국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불안정한 영토적인 문제를 확실하게 잠금장치하려는 것은 아닐까?
열도일본을 내세우고 편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와같은 일방적인 행위를 하는 미국을 제어할 만한 국가가 없다는 점도 있다.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래의 미국이 잠금장치를 확실하게 하려는 영토의 본래 주인은 역사적으로 사라지고 없는 상황이니 크게 반론을 제기하거나 부정할 상대도 솔직히 없다.
그럼에도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나 만약에 미국이 힘을 잃게 된다 할 때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미국에게도 위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은 군국주의를 내세우며 전쟁을 할 수 있는 법안을 곧 의회에서 처리될 예정에 있다.
일본은 미국에게 아주 편한 상대로 인식되어 이러한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동맹관계라고 하여 어부지리를 얻어 부강해지고 군사적으로 강력해질 때 언제든지 미국이 힘이 약해지던가 미국이 자기 만족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면 일본은 이 평화조약을 강제성이 있었다 하여 모든 것을 거부하고 제자리로 가지고 가려고 애를 쓸 것이 뻔하다.
그러면 결국 미국이 의도한 것과 반대로 보존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남의 나라 걱정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미국이 붕괴된다든지 아니면 각 주가 분리 독립요구가 거세져 연방국이 힘을 잃을 때 위 평화조약은 오히려 미국을 옥죄는 것으로 나타나 일본에게 상당히 유리한 것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어중이 떠중이로 이용물에 불과하던 열도일본은 아마도 태평양 모든 제도를 가지려 할 것이틀림없다.
그리고 주제넘게 대동아공영권을 다시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국제조약이라는 것은 강자에게 약한 편이다.
물론 이와같은 여지를 미국이 낳았다.
잘못된 역사와 비뚤어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은 언제든지 이를 현실화하려고 애를 쓸 수 있기 때문에 미래는 미국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위 마이애미 허리케인의 글쓴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카리브해에 있는 제도가 필리핀과 연결되고 여송과 연결되며 일본이 소유하고 있는 팔중산제도와 석원도, 그리고 오키나와, 유구제도, 또한 러시아와 영토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사할린과 쿠릴열도까지 이 지명들은 본래의 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만주도 그렇고 오호츠크해도 그렇게 풀 수밖에 없다.
제정러시아가 관활할 때 뉴올리온즈는 니콜라옙스크항(Nikolayevsk)이라 했음도 알 수가 있다.
천도를 쿠릴열도라 하는 것도 엄밀히 따진다면 오호츠크해에 있는 열도 또는 천도를 말함인데 지금의 멕시코만에서 플로리다주 남서해안에 붙어 있는 텐 사우전드 아일랜드(Ten thousand islands)지명이라는 사실은 이 또한 영토의 소유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다분히 많다.
허리케인으로 알아본 지명들을 보면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가 소엔틸리스제도, 석원도(石垣島)는 푸에르토리코로 밝혀지나 버진아일랜드가 포함될 수 있으며 필리핀이라 함도 푸에르토리코와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더하여 소엔틸리스제도까지를 대비해 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식민지환경을 감안해야 하고 오키나와(冲繩)를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를 말하는 것과 유구(琉球)역시 이와같은 범주에 있으며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까지를 확대하고 볼 수 있고 구주(九州)는 바하마와 터크스와 카이코스군도 그리고 쿠바를 말한 것이 아닌가 하며 동해도(東海道)는 쿠바본토 동해쪽으로 접하는 도로를 말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이라 함은 도미니카, 아이티, 쿠바, 바하마를 대비케 한다.
이미 2015년에 본 블로그 글 "1차 려몽 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750"에서 쿠바가 일본이라는 것을 밝혔지만 미국이
1905년 비밀각서라고 알려진 태프트-가쓰라 조약(Taft-Katsura Agreement:1905)에서 일본에게 필리핀과 교환 조건 운운하는 것도 다 이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과 여송이 같다 할 수 있겠지만 여송은 버진아일랜드라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조선해협이다.
플로리다해협(Straits of Florida)이나 아니면 유카탄해협(Yucatán Channel)으로 보았지만 좀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카리브해라고 알려진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접한 바다를 일본해라 했던 것 같다.
사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영토(TERRITORY)항 제2조(Article 2)를 보면 많은 지명들이 본래 지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미국은 제주도(Quelpart), 거문도(Port Hamilton) 및 울릉도(Dagelet)를 일본에게 모든 권리와 소유권, 청구권을 포기해라고 주문한다. 타이완(Formosa)과 펑후제도(澎湖諸島:Penghu or Pescadores Islands)와 쿠릴 열도(千島列島Kurile Islands), 사할린(Sakhalin)를 마찬가지로 주문한다. 남극(南極) 또한 이와같고 남중해에 있는 남사군도(南沙群島:Spratly Islands)와 서사군도(西沙群島:Paracel Islands)까지 거론하였으며 그리고 일본영토로 화한 남서제도(南西諸島:Nansei Shoto:류쿠제도(Ryukyu Islands)), 大東諸島(Daito Islands), 남방제도(南方諸島:Nanpō Islands):(보닌 제도(Bonin Islands), 로사리오제도(Rosario Island) 및 화산열도(Volcano Islands火山列島)), 그리고 더글라스 리프(Parece Vela:Douglas Reef)와 남조도(南鳥島:Marcus Island)까지를 일본이 스스로 소유권과 청구권을 포기하게 하거나 미국의 신탁통치에 동의해야 하였고 긍정적인 조치가 있을 때까지 미국이 권리를 갖게된다는 등으로 나와 있다.
문제는 미국이 이 소유권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어쨌거나 명확한 것은 이와 같은 영토들은 본 블로그가 밝힌 다수의 영토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으로써 실제 주인은 미국도, 일본도 아니라는 주장을 전제해야 한다.
그만큼 세계삼한역사연구의 기대는 크다.
불안정한 영토문제를 미국은 1945년 종전 후 6년 동안 공을 들였고 1951년부터 이 잠금장치를 서둘러 했다고 보이는 것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며 그외 다수의 잠금장치이다.
남의 영토를 끝까지 지키려는 이러한 무리한 수단들은 언제가는 오히려 역이 되어 화살이 그들에게 달려들 것임을 끝으로 힘주어 말하고 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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