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기후천문

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한부울 2016. 7. 29. 01:07

***********************

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 조선(朝鮮)


글쓴이:한부울


도대체 구풍이란 무엇인가?

태풍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구풍(颶風)을 단순하게 “사나운 바람”이라 하여 태풍(颱風)이라 하고 있다.

한반도 역사가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이런 해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된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먼저 태풍(颱風)이란 것은 북태평양 서쪽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을 말하는것으로, 분명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일부에 영향을 주는 폭풍우라고 되어 있다.

물론 협지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전체를 구도로 할 때 열대성저기압(tropical cyclone)은 열대지역인 5°와 20°사이 혹은 5°에서 25°사이 부근의 해면 수온이 약 27°이상의 따뜻한 바다위에서 가열된 공기가 가벼워져 위도(緯度)의 범위 내에 있는 해양 위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을 말하는 것인데 이미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누누이 주장하고 있지만 본래 이 명칭이 파생된 것은 하나의 체제가 존재하던 지역이었던 현 대서양 즉 인도양(印度洋)에서 발생하는 바람을 통칭해서 이야기했음이 자명하다.

그러나 근세기에 서세의 상대적으로 파생된 역사우월의식과 못된 이기심에 의해 이것이 동서양(東西洋)이 나눠지고 인도(印度)를 아시아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에 집어넣어 만들어지면서 각각 다른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현재 서남아시아 인도양에서 부는 바람을 사이클론(cyclone)이라고 하고 위에서 말하는 지역인 남태평양에서 부는 바람을 태풍(typhoon)이라하며 카리브해와 동태평양에서 발생하는 것을 허리케인(hurricane)이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미크로네시아(Micronesia)라 함도 오스트로네시아계·폴리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통털어 말하고 있으며 남태평양이다.

본 블로그 글 "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7"에서 1936년 8월 11일 동아일보 호외(號外)기사를 바탕으로 태풍의 진로와 발생상황을 살펴본 결과 당시 충주에서 집중호우(集中豪雨)가 있었고 이어 한강홍수(漢江洪水)로 인한 위급한 상황 등이 맞이한 것은 바로 1936년 동태평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Eastern Pacific hurricane)의 영향을 받은 수해(水害)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적어도 1930년에 조선인(朝鮮人)들은 이 허리케인이 발생하는 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 서남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구풍(颶風)은 태풍과 어떻게 다르며 정체가 무엇인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사서(史書)들을 뒤져보니 조경남(趙慶男:1569-1641)간행한 고려공민왕 때부터 조선선조 사이의 명(明)과 조선(朝鮮)간의 외교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 역대요람(歷代要覽)에서 이 구풍이라는 단어가 발견된다.

그러나 어김없이 한국번역원의 해석에서는“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폭풍우의 총칭이라면서 기어코 태풍(颱風)을 뜻함”이라고 정리해두고 있다.


역대요람(歷代要覽)

홍무(洪武) 명(明) 태조, 공민왕(恭愍王) 17년(1368년)

○六年。遣鄕試擧人金潛宋文中曹信等。赴京會試。在海途値颶風。金潛曹信賀正陪臣周英贊等俱渰死。再遣宋文中赴會試。

명(明) 태조6년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 김잠(金潛)ㆍ송문중(宋文中)ㆍ조신(曹信) 등을 보내어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응시(應試)하러 가도록 하였는데, 해로(海路)에서 구풍(颶風 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폭풍우의 총칭인데 태풍을 뜻함)을 만나 김잠ㆍ조신과 하정배신(賀正陪臣) 주영찬(周英贊) 등이 함께 빠져 죽었다. 다시 송문중을 보내어 회시(會試)에 응하러 가도록 하였다.


어째서 열대지방전체에서 발생하는 폭풍우를 태풍이라고 정리하고 있는가.

열대지방이라 함은 지구전체에서 위도 5°~25°사이를 말하는 것인데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다.

그것은 동서가 갈라지지 않는 하나의 체제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 지금은 엄연히 구분되고 갈라져 있다.

때문에 그냥 태풍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막연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한반도 역사에 그대로 함몰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던 비정상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렇게 막연한 해석에서 어떻게 과거 조선(朝鮮)이 동아시아지역에 있었는지 아니면 현재 서남아시아에 있었는지 또는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바탕으로 하는 허리케인 영향권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이와같은 침체의 해석은 현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학계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번역원의 해석은 차라리 체념(諦念)에 가깝다.

이런 방어책을 쓰는 그들에게 더 이상 어떤 역사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 역사를 방어하기 위해 태풍을 동서(東西)지역 어디에도 통할 수 있는 명칭으로 어정쩡하게 해석한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완당전집(阮堂全集) 제4권

서독(書牘)기십일(其十一)

해구(海颶)가 삼일 동안 법 없이 마구 횡행하여 세상을 굴리는 풍륜(風輪)과 더불어 맞 어울렸으나 다만 섬 중에는 아직 농사의 손상은 없으니 아주 다행이구려.

곧 계속 내려 주는 영감의 서한을 받들어 삼가 살핀바 무더위에 정무(政務) 나머지의 동정이 안온하시며 피부의 가려운 증세도 따라서 깨끗해지셨다니 마음에 흐뭇하여 치하를 드리외다.

누인은 증세가 어제와 같으니 까라진 늙은 기운이 한번 떨어지면 졸지에 회복되기는 어려운 모양이지요. 스스로 슬플 뿐이외다.

당액(堂額)에 대하여는 또 이와 같이 선뜻 고쳐 정해 주시니 아집을 버리고 남을 따르는 거룩함과 납오허수(納汚虛受)의 아름다움은 진실로 작은 양과 옅은 눈을 지닌 말세의 고집쟁이와는 날을 함께하여 말하면 안 될 것이외다. 우연히 이 한두 마디 지나가는 말로는 족히 그 뜻을 알차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나머지는 별지에 기록해 있으므로 짐짓 의식을 갖추지 않으외다.

[주D-001]해구(海颶) : 해중의 대풍으로 구풍(颶風)을 말함.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 하였음.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시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을 보면 “해구(海颶)가 삼일 동안 법 없이 마구 횡행하여...”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해구를 풀이한 것을 보면 “해중의 대풍(大風)으로 구풍(颶風)을 말함”이라고 되어 있고 남방 고대 민족사 연구에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남조(南朝) 송(宋)나라 심회원(沈懷遠)가 지은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하였다.

또한 해구(海颶)는 바다가운데 큰 바람으로 구풍(颶風)을 말한다 하였고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이라 하였다.

사방의 바람을 갖추었다는 것은 “회오리성” 바람이라는 말하는 것이다.

글쓴이가 남월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에서 남월국(南越國)은 영남에서 탄생한 첫 봉건국가라 했기 때문에 영남은 애팔래치아 남쪽 미시시피주, 애리바마주, 조지아주라 하고 미시시피강 하류지역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실제로 그곳은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수도 없이 많이 상륙하는 지역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 정해(1407,영락 5) 7월30일 (신사)

충청도 병선 11척이 군산도에서 바람을 만나 파손되다

○忠淸道兵船十一艘, 至群山島, 遭風傷敗。 忠淸道觀察使報: "水軍僉節制使盧仲濟、都萬戶宋琠等, 率兵船下海, 採救荒物件, 且搜探全羅道 倭寇, 至群山島, 遭颶風傷敗。"

충청도 병선(兵船) 11척이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렀다가 바람을 만나 상패(傷敗)하였다.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노중제(盧仲濟)와 도만호(都萬戶) 송전(宋琠) 등이 병선을 거느리고 바다에 내려가 구황(救荒)할 물건을 채취하고, 또 전라도의 왜구(倭寇)를 수색하여 군산도에 이르렀다가 회오리바람[颶風]을 만나 상패(傷敗)하였습니다.”


어김없이 조선왕조실록 태종7년 기사에도 보면 회오리바람을 구풍(颶風)이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자 구(颶)의 의미를 살펴보자.

구(颶)를 파자(破字)로 나눠보면 부(部) 바람풍(風)과 음(音) 구(具)가 합친 것을 알 수 있는데 구(具)를 돌개바람 형태의 상형문자라 할 때 나선(螺旋)같은 형태에서 회오리치면서 북상하는 급격한 바람과 같으며 갑자기 생긴 저기압 주변으로 한꺼번에 모여든 공기가 나선 모양으로 돌면서 일어나는 현상을 구로 나타냈음이 확인되고 또는 패(貝)의 모양에서도 나선형태의 소라를 생각하게 된다.

핵심은 이것들은 남양(南洋) 즉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 밝혀보았듯이 한 때 페르시아만이라고도 했던 멕시코 만(灣)에서 북진하는 따뜻하고 습한 해양성 기단이 저기압을 만들고 로키산맥에서 동진하는 한랭기단과 만나 에너지가 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014년 본 블로그 글 "토네이도(Tornado)로 본 유럽지명과 모스크바(Moscow)지명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3"에서 보면 토네이도(tornado)는 미국 중남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회오리바람이라고 하였으며 대체로 봄과 여름(5월에서 6월)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먼저 지형지물이 높고 낮음이 있는 곳보다 지형지물이 없는 평원이나 평야에 많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봄과 여름(5월~6월)에 생성 된다는 사실은 심회원(沈懷遠)가 지은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하였던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미국에서는 로키산맥(山脈:Rocky Mts)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대륙성 한랭기단(寒冷氣團:cold air mass)과 앞에서 언급한 멕시코 만(灣)에서 북진하는 따뜻하고 습한 해양성 기단(海洋性氣團:oceanic air mass)이 지형적 장벽이 없는 미국의 대평원(Great Plains)에서 만나서 육상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를 수시로 발생시킨 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육상이지만 육상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에서 만나면 이것은 용오름 현상과도 맞먹는 형태의 토네이도가 발생한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토네이도 리스트 중 가장 두드러진 피해상황으로는 1925년 3월 18일 미주리·일리노이·인디애나 주를 통과하면서 695명의 인명 피해를 낸 것으로, 이동경로 350km, 폭1.5km, 시속100km/h 이었다는 규모는 세워진 집들을 전부 파괴하는 수준인데 이러한 규모의 토네이도는 북아메리카대륙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실이며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인들에게 공포로 다가갔던 것이 틀림없다.


같은 토네이도 현상에서 해상에서 발생하는 것을 용오름(Water Spout)이라고 한다.

용오름 현상이란 물기둥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마치 용(龍)이 하늘로 승천(昇天)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 역시 아래 그림사진을 보면 1948년에 북아메리카대륙 남월로 의심되는 뉴올리언즈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목격할 수가 있다.



           

Twin waterspouts sharing a single cascade, off Grand Isle, Louisiana, May 19, 1948.[루이지애나 그랑 이슬(島)]


위 그림은 이 용오름의 쌍둥이 현상인데 바로 루이지애나 그랑 섬에서 바라본 현상이다.


[가]동아일보 1920.04.20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 미국(美國)에서 구풍(颶風) 발생관한보도

미국(美國)의 또 복구풍(復颶風) 거듭되는 토네이도라는 제목아래 일늬노이스주 동방일부, 오하요, 미조리, 인듸아나, 위스칸손, 쪼지아, 알나바마 각주에 구분이 대작(大作)하여 인명사상이 다(多)하였고 파괴된 가옥이 수천호이요 손해물이 수백만불에 달하였다더라(紐育發電)


                                 


이처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토네이도를 동아일보가 발 빠르게 보도한 것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이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1920년 4월 20일에 발생한 토네이도는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주(州) 클레이카운티(Clay County)와 앨라배마주의 매리언 카운티(Marion County), 로렌스 카운티(Lawrence County)를 강타하고 사망자 88명을 발생시킨 것으로 이것 역시 구풍(颶風) 토네이도이다.


[나]동아일보 1923.05.17 쌀미(米)자를 쓰는 미국(米國)에서 발생한 구풍(颶風) 피해보도

사상자다수(死傷者多數)라는 제목아래 미국(米國)의 구풍과 홍수, 텍사스주 콜로라도발전(發電)에 의하면 구풍과 홍수로 인하여 19명의 사망자들이 발생하였으며 또 알칸사스주 핫스프링스(Hot Springs)발(發)에 의하면 구풍과 화재와 홍수로 인하야 17명의 사망자를 발생하게 하였더라(桑港15日發)

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말한다.


                                  


이 또한 토네이도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북아메리카대륙 1923년 5월 14일에 텍사스(州) 빅 스프링(Big Spring)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사망자23명이 발생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동아일보 1924.05.03 쌀미(米)자를 쓰는 미국(米國) 남부지방 6개주에서 발생한 구풍(颶風) 피해보도


            


Southeastern United States(April 30, 1924)tornado outbreak

Long-tracked tornado family killed seven people at a school in Horrell Hill, South Carolina. Multiple violent killer tornadoes struck the Carolinas and Georgia.

(a)April, 29:오클라호마(Oklahoma), 아칸소(Arkansas), 루이지애나(Louisiana)에서 발생

(b)April, 30:앨라배마(Alabama), 조지아(Georgi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버지니아(Virginia)에서 발생


당시 영어자료에 의하면 최악의 토네이도가 발생한 곳은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의 한 시골에서 치명적인 손상(Devastating damage)급인 "F4 "손상을 주는 상당히 긴 수명의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일가족 53 명이 사망하게 하고 534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이를 보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보도 그대로 인용하면 1924년 5월 3일자에 미국남부 6개주(州)에는 최고 격렬한 구풍(颶風)이 기(起)하야 사자(死者)수백명과 다수의 수상자들을 출(出)하였고 손해도 1,000여만불(萬弗)에 달하였다 하더라(뉴오린스1일發)라는 내용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런 보도는 매우 신속한 것으로 참으로 의아해지는 것이다.

동아일보가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하기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토네이도 피해상황을 먼저 뉴올리언즈에서 5월 1일 보도가 되었다는 사실과 이 보도와 이틀의 시간차만 두고 5월 3일에 보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라 모든 사실적 관계에 비추어 불가한 것이다.

불가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당시에도 태평양에 미국과 일본열도간에 케이블이 깔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아니올시다.

이러한 보도체계는 물론 유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선으로 받아 기사를 작성했다고 보아야 옳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당시 조선이 있고 동아일보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인이 한반도에서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면 이렇게 빠른 미국소식이 왜 필요한가.

인도주의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배부른 소리일뿐이다.

이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에서 전보로 통신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맞다.

참고로 본 블로그 글 "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4"에서 살펴보았듯이 1915년 1월 25일에는 동부 미국 뉴욕과 서부 극단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4,700km의 대륙횡단 전화회선이 개통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결국 당시 동아일보는 샌프란시스코나 유선이 지나는 과정 장소에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가 있다.

세계에서 처음 무선통신이 이루어진 시기가 1927년 1월 7일 뉴욕(New York)에서 런던(Lodon)간 무선전화가 개통된 것을 생각해보아도 이를 알 수 있으며 또한 1924년 늦은 시기에 무선통신실험하였고 1925년 실행될 수 있었다는 것에서 볼 때 한반도 조선에서 미국사정을 무선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동아일보는 뉴욕에서 떨어진 유선통신으로 전보를 받을 수 있는 지역에서 보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구풍(颶風)이라 함은 한반도 사서 번역자들이 주장하는 단순히 "사나운 바람"이 아닌 분명 토네이도(tornado)를 말한 것임을 확신할 수가 있다.


[1]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7월22일 (기유)

사역원 판관 장약수가 표류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요동으로 데리고 가다

○遣司譯院判官張若壽, 押浙江 觀海衛百戶楊茂等如遼東。 楊茂率軍人四十八名, 徒步至義州自言: "乘駕海船, 到太倉裝糧, 隨同摠兵官平江伯, 率領糧船一千三百隻, 欲往北京交卸, 忽遭風颶, 飄到海邊, 船破上岸, 飢餓至此。" 兵馬使鄭耕以聞, 命厚加慰勞, 給鋪馬、脚力以送之。

사역원 판관 장약수(張若壽)를 보내어 절강(浙江) 관해위(觀海衛) 백호(百戶) 양무(楊茂) 등을 압령해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양무는 군인 48명을 거느리고 도보(徒步)로 의주(義州)에 이르러 스스로 말하기를,

“해선(海船)을 타고 대창(大倉)에 이르러 장량(裝糧)하고, 동총병관(同摠兵官) 평강백(平江伯)을 따라 양선(糧船) 1천 3백 척을 영솔(領率)해 가지고 북경(北京)으로 가서 교역하고자 하다가, 문득 태풍[颶風]을 만나 해변으로 표류되었는데, 배가 부서져서 해안에 상륙하여, 굶주리다가 이곳에 이르렀다.”하였다. 병마사(兵馬使) 정경(鄭耕)이 계문(啓聞)하니, 명하여 후하게 위로해 주고, 포마(鋪馬)와 각력(脚力)을 주어서 보내었다.


[2]조선왕조실록 세조 7년 신사(1461,천순 5) 6월8일 (정축)

병자년에 유구국으로 표류했던 양성ㆍ고석수를 유구국 사신이 데리고 오다

○羅州住船軍梁成、錦山住私奴高石壽等十人丙子正月自濟州行船, 値颶風漂到琉球國, 其中八人曾已還來, 今者琉球國使僧德源帶梁成、高石壽以來, 請令禮賓寺供饋。 上引見梁成等, 問漂流緣由及地形、風俗, 謂左承旨韓繼禧曰: "細問見錄以啓。"

나주(羅州)에 사는 선군(船軍) 양성(梁成)과 금산(錦山)에 사는 사노비(私奴婢) 고석수(高石壽) 등 10인이 병자년 1월에 제주(濟州)로부터 배를 타고 오다가 구풍(颶風)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였는데, 그 가운데 8인은 일찍이 이미 돌아왔고, 지금 유구국 사신 중[僧] 덕원(德源)이 양성ㆍ고석수를 데리고 왔으므로,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임금이 양성 등을 인견(引見)하고 표류한 연유 및 지형(地形)ㆍ풍속(風俗)을 묻고 좌승지(左承旨) 한계희(韓繼禧)에게 이르기를,

“자세히 묻고 갖추 기록하여 아뢰라.”하였다.


[3]조선왕조실록 중종 4년 기사(1509,정덕 4)5월27일 (무오)

우승지 송천희ㆍ도승지 성몽정이 조선의 패몰에 대한 대책을 아뢰다

○右承旨宋千喜啓曰: "朴元宗經筵所啓全羅道田稅推移輸納事, 何以爲之?" 仍啓曰: "臣聞漕船致敗, 專以大船重載, 遭風則難於運轉故也。 若私船則體小, 其容載不過三四百斛, 雖大洋颶風, 轉運甚便, 無敗覆之患。 今若依私船, 使之體小輕載, 則雖或遭風敗沒, 其所失之穀, 亦不多矣。" 都承旨成夢井啓曰: "漕轉時, 一差使員押領之船, 多至三四十餘艘。 其海上行船, 務令齊發齊止, 卒遇風波, 拘於號令, 不得各自爲便, 故易致敗沒。 若使漕船體小, 而多定差使員, 分運繼發, 則雖或遭風, 庶可預爲之圖矣。" 傳曰: "其收議于政府堂上、府院君及判書以上。"

우승지 송천희(宋千喜)가 아뢰기를,

“박원종이 경연에서 아뢴 바, 전라도 전세를 추이(推移)하여 수납(輸納)할 일은 어찌합니까?”

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조선(漕船)이 패몰된 것은 오로지 큰 배로 무겁게 실어서 바람을 만나면 운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선(私船) 같으면 선체가 작아 싣는 총량이 불과 3~4백 곡(斛)이어서, 대양(大洋)에서 구풍(颶風)을 만나더라도 운전하기가 매우 편리하여 패복(敗覆)할 염려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사선에 의하여 선체를 작게 하고 가볍게 실으면, 혹 바람을 만나 패몰하더라도 그 잃는 곡물이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도승지 성몽정(成夢井)은 아뢰기를,

“조전(漕轉)할 때 한 사람의 차사원(差使員)이 압령(押領)한 배가 30~40여 척이나 되어, 해상에서 행선(行船)함에는 될수록 일제히 출발하고 일제히 정지하게 되니, 갑자기 풍파를 만나면 호령에 구속되어 각자 편리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파몰되기가 쉽습니다. 만약 조선의 선체를 작게 하고, 차사원을 많이 정하여 나누어 운반하여 계속 출발하면 혹 바람을 만나더라도 거의 미리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정ㆍ부 당상, 부원군 및 판서 이상에게 수의하라.”하였다.


[4]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27권, 선조 33년 7월 5일 丙午 8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비변사에서 태풍으로 인한 중국측 피해의 대책을 아뢰다

○備邊司啓曰: "都司揭帖, 當以我邦之故, 許多天兵, 久戌絶島, 勞苦已多, 而颶風之變, 出於意外, 官兵渰死, 船隻破壞, 極爲驚駭。 前因杜副使移咨, 破壞船隻, 作急修補事, 慶尙觀察使處, 已爲行移矣。 以此措辭回答何如?" 傳曰: "允。"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사(都司)의 게첩(揭帖)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일로 인해 많은 천병(天兵)이 오랫동안 절도(絶島)에 수자리하며 노고가 많은데, 태풍의 변고가 뜻밖에 생겨 관병(官兵)이 익사하고 선척이 파괴되어 극히 놀랍다. 앞서 두 부사(杜副使)의 이자(移咨)로 인하여 파괴된 선척을 속히 수리할 것을 경상도 관찰사에게 이미 행이(行移)하였다.’고 하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회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하나같이 구풍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냥 사나운 바람이 아니다.

[1]태종 6년(1406)7월22일에 북경에 가서 교역하려던 명나라 사람이 구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의주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한반도 서해안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듯하나 그곳에 무슨 구풍이 발생한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물론 발해 역시 서해안 윗 발해만이라 할 수가 없다.

그곳에는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대륙성 한랭기단(寒冷氣團)이 없으며 또한 따뜻하고 습한 해양성 기단(海洋性氣團)을 만날 수 있는 지형조건이 안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한반도지형은 미국의 대평원(Great Plains)같은 지형이 없다는 명확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들은 기어코 구풍(颶風)을 태풍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2]세조7년(1461)6월8일에 나주(羅州)에 사는 선군(船軍) 양성(梁成)과 금산(錦山)에 사는 사노비(私奴婢) 고석수(高石壽)등 10인이 병자년 1월에 제주(濟州)로부터 배를 타고 오다가 구풍(颶風)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였다 한다.

역시 앞에서 지형환경조건이 불가한 상태라는 원칙에서 한반도 주변 전체를 적용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역시 제주에서 유구국까지 표류하는 장소를 현재 한반도와 열도 오키나와라고 할 수 없다.

그곳은 바로 카리브해와 동태평양을 깃점으로 발달한 토네이도 형태의 폭풍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3]중종 4년(1509)5월27일에 우승지 송천희ㆍ도승지 성몽정이 운반선 조선(漕船)의 침몰 즉 패몰(敗沒)에 대한 대책에서 우승지 송천희(宋千喜)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조선(漕船)이 패몰된 것은 오로지 큰 배로 무겁게 실어서 바람을 만나면 운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선(私船)같으면 선체가 작아 싣는 총량이 불과 3~4백 곡(斛)이어서, 대양(大洋)에서 구풍(颶風)을 만나더라도 운전하기가 매우 편리하여 패복(敗覆)할 염려가 없습니다" 한 기사내용에서도 조선 땅에서는 늘 상 운반선이 떠다니는 강(江)이나 바다(海)에 구풍 즉 토네이도가 발생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4]선조33년(1600)년 비변사에서 태풍으로 인한 중국 측 피해의 대책을 아뢰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일로 인해 많은 천병(天兵)이 오랫동안 절도(絶島)에 수자리하며 노고가 많은데, 태풍의 변고(而颶風之變)가 뜻밖에 생겨 관병(官兵)이 익사하고 선척이 파괴되어 극히 놀랍다. 앞서 두 부사(杜副使)의 이자(移咨)로 인하여 파괴된 선척을 속히 수리할 것을 경상도 관찰사에게 이미 행이(行移)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임금과 숙의하는 과정의 기사이다.

이글에서도 조선에서는 구풍이 발생하는 지형임을 알 수 있고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사들이 구풍 즉 토네이도에 익사하고 선척이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한반도 역사번역자들은 이를 태풍이라 하고 있음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구풍에는 토네이도 뿐만아니라 허리케인발생도 사실도 감안해야 하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사건을 고정시켜 놓고 보면 그러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5]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4월 6일 辛酉 3번째기사 1882년 조선 개국(開國) 491년

조미 조약(朝、美條約)을 체결하다。

第三款, 美國船隻在朝鮮左近海面, 如遇颶風, 或缺糧食煤水, 距通商口岸太遠, 應許其隨處收泊, 以避颶風, 購買糧食, 修理船隻, 所有經費, 係由船主自備。 地方官民, 應加憐恤援助, 供其所需。 如該船在不通商之口, 潛往貿易拿獲, 船貨入官。 如美國船隻在朝鮮海岸破壞, 朝鮮地方官, 一經聞知, 卽應飭令將水手先行救護, 供其糧食等項, 一面設法保護船隻貨物, 竝行知照領事官, 俾將水手送回本國。 竝將船貨撈起一切費用, 或由船主, 或由美國認還。

제3관 미국 선척이 조선의 근해에서 태풍(颱風)을 만났거나 혹은 식량·석탄·물이 모자라고 통상 항구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졌을 때에는 곳에 따라 정박하여 태풍을 피하고 식량을 사며 선척을 수리하도록 한다. 경비는 선주가 자체 부담한다. 지방관과 백성은 가엾게 여겨 원조하고 수요품을 제공해야 한다. 당해 선적이 통상하지 않는 항구에 몰래 들어가 무역을 하다가 잡힌 경우에는 배와 화물은 관에서 몰수한다. 미국 선척이 조선 해안에서 파손되었을 경우 조선의 지방관은 그 소식을 들은 즉시 영을 내려 선원들을 우선 구원하고 식량 등을 공급해 주도록 하며, 한편으로 대책을 세워 선척과 화물을 보호하고 아울러 영사관(領事官)에게 통지하여 선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게 한다. 아울러 배와 화물을 건져낸 일체 비용은 선주나 미국에서 확인하고 보상한다.


[6]고종실록 20권, 고종 20년 10월 27일 甲戌 7번째기사 1883년 조선 개국(開國) 492년

조선영국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을 체결하다

第七款: 一, 英國船隻, 在朝鮮海面, 如遇颶風失事及擱淺不測之虞, 朝鮮地方官, 應卽一面速行設法, 妥行往救, 竝保護被難人、船、貨物, 免致本地莠民肆行搶掠、欺凌。 一面速卽知照附近英國領事官, 竝將救護被難英民, 分別資送附近通商口岸。 二, 凡朝鮮政府, 所出救護英國難民衣食、解送及一切打撈、葬埋屍身、醫治傷病各資, 應由英國政府, 照數付還。 三, 撈救保護被難船隻及打撈該船貨物之費, 應將船貨交還原主時, 由原主照數付還, 不得向英國政府索償。 四, 朝鮮國所派官員及地方委弁巡役人等, 前赴英國難船失事處所及護送被難英民之員弁人等, 所用資費, 以及文函往來脚力, 均由朝鮮政府, 自行辦理, 不得向英國政府取償。 五, 英國商船, 在朝鮮左近海面, 如遇颶風, 或缺糧食煤水等需用之物, 無論是否通商口岸, 應許其隨處收泊, 以避狂颶, 兼修船隻, 購買一切缺少之物。 所有花費, 全由船主, 自行備辦。

제7관

1. 영국 선박이 조선 영해에서 사나운 바람을 만나 일을 그르치거나 좌초되어 뜻밖의 사고가 생겼을 때에는 조선의 지방 관원이 즉시 한편으로 속히 대책을 강구하여 가서 구제하는 동시에 조난당한 사람들과 배의 화물을 보호하여 줌으로써 본 지방의 불량배들이 멋대로 약탈하고 침해하는 것을 면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속히 부근의 영국 영사(英國領事)에게 통지하는 동시에 구해낸 영국 조난민들을 분별하여 여비를 주어 부근의 통상 항구로 보낸다.

2. 조선 정부에서 내어 준 영국 조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의복, 식량, 호송비 및 건져낸 시체를 매장하고 상처와 병을 치료한 각종 비용에 대해서는 영국 정부가 그 액수대로 반환해 준다.

3. 조난당한 선박에서 건져내어 보호한 비용과 그 배의 화물을 건진 비용은 배와 화물을 본 주인에게 반환할 때에 본 주인은 그 액수대로 반환해 주며 영국 정부에 보상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4. 조선국에서 파견한 관원과 지방에서 보낸 무관과 순시원, 인부들이 영국 조난선이 곤경에 빠진 장소에 갈 때에 쓴 비용 및 조난당한 영국 사람들을 호송하는 문관과 무관들이 쓴 비용, 그리고 문서가 오가는데 드는 경비는 모두 조선 정부에서 자체 해결하고 영국 정부에 보상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5. 영국 상선이 조선 부근의 바다에서 사나운 바람을 만났거나 혹은 식량과 석탄, 물 등 필수품이 결핍되었을 때에는 통상 항구든 아니든 관계없이 임의의 장소에 정박을 허락하여 사나운 바람을 피하면서 선박을 수리하고 일체 결핍된 물건을 구매하게 한다. 소비된 비용은 전부 선주(船主)가 자체 마련한다.


또 한 가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바로 고종실록(高宗實錄)기사에 등장하는 각국(各國) 통상수호조약(通商修好條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tornado)에 대한 두려움이다.

물론 조약을 체결하는 모든 국가에서 조선 내에서 발생될 수 있는 토네이도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할 시 조선에서 편의를 제공하게 한다는 조건을 조약항목 관(款)에 첨가해 놓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첫째 1882년 4월6일 체결한[5]조미조약(朝美條約) 제3관(第三款)의 내용을 보면 미국선박이 조선 근해에서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를 만나거나 식량, 석탄, 물이 부족할 때 곳에 따라 정박하여 토네이도를 피하게 해주고 선박을 수리가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번역원들은 이 구풍을 태풍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앞전 조선왕조실록 기사 예와 같은 것으로서 한반도지형을 고수하고 있는 구질구질한 모습이다.

두 번째 1883년 10월27일 체결한[6]조선영국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 제7관(第七款)의 내용도 보면 공통적으로 어긋난 번역은 바로 “사나운 바람”이라 하고 있다.

이 사나운 바람이 다름이 아닌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tornado)임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허리케인일 수도 있다.

한반도 역사 번역자들이 구풍이란 뜻을 몰라 사나운 바람이라고 했겠는가.

더군다나 위 역사기록물은 바로 국가대 국가가 체결하는 조약 내용이다.

이를 다르게 번역하거나 해석한다고 할 때 얼마나 치명적이겠는가.

마찬가지로 구풍을 토네이도라고 감히 할 수 없었던 사정은 한반도 지형사정을 고려한 것이다.

한편으론 이렇듯 한결같이 숨길 수밖에 없는 번역자들이 참으로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기타 이외 국가들의 조약도 구풍에 대한 우려는 다 똑같다.

조선독일수호조약(朝德修好條約)도 마찬가지고 조선과 이탈리아 조약(朝義大利國條約), 조선과 러시아 조약(朝俄羅斯條約)도 같으며 조법조약(朝法條約)도 같다. 그리고 조선과 오스트리아 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도 모두 구풍에 대한 사후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 고종 36년(1899)9월11일,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에도 구풍에 대한 내용이 있고 고종38년(1901)3월23일에 체결한 한비(Belgium)수호통상조약(韓比利時修好通商條約)도 같으며 고종39년(1902)7월15일에 체결한 한국과 덴마크간의 수호통상조약(韓丹國修好通商條約)도 이와 같은 것은 물론이다.


당시 조선을 내방하는 선박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 구풍을 두려워하고 이에 대한 사후대책을 조선(朝鮮)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기후변화에 의한 사후보장책은 거대한 조선내륙으로 조약국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항상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이 20세기초엽에 힘이 다 빠졌다고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가 항상 발생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다.

한반도 주위지형사정은 구풍 즉 토네이도가 발생할 염려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도 어떤 메스미디어 보도 상에 이 구풍, 토네이도가 발생했다고 보도한 사실이 없다.

또한 우리가 엄청난 피해들 주는 토네이도 즉 구풍을 한반도에서 목격한 사실도 없다.

어떤가.

이래도 한반도 역사를 고집할텐가.

끝으로 소중화에 대한 언급도 하고 싶다.

위 역대요람(歷代要覽)에 보면 굳이 명과 조선을 나누고 조선(朝鮮)사람이 명나라에 관직에 입직할 것도 아니면서 회시(會試)에 응시하려는 집착 때문에 구풍(颶風)이 몰아치는 머나먼 대양(大洋)을 건너명나라로 가다가 향시(鄕試)에 합격한 우수한 인재들을 모두 익사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비통함이 극에 달하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해석은 이렇듯 아까운 인재들을 아무의미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회시(會試)라는 것은 고려(高麗)때 지방(地方)에서 뽑힌 향시합격자들이 국자감(國子監)에 모이어 다시 보는 시험(試驗)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조선내에서 다시 시험을 보는 것과 같다.

어디가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라는 이야기다.

다만 조선이 거대하니 바다와 같은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고 또한 지방임을 뜻하며 고려(高麗)는 중앙(中央)이라 하여 곧 중국(中國)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바르게 알면 얼마나 역사가 쉬운 것인가.

조선(朝鮮)의 역사를 왜 우리스스로가 이토록 축소하고 나약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오늘날 조선(朝鮮)을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은  미국을 소중화라 하는 것과 같고 뉴욕 또는 워싱턴을 중국이라 하는 것과 같은 논리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