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기후천문

먼지폭풍 황진(黃塵:dust storm)의 놀라운 역사

한부울 2017. 8. 2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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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폭풍 황진(黃塵:dust storm)의 놀라운 역사


글쓴이:한부울


머리말
1935년 9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조선(朝鮮)의 괴이한 기상현상
미국의 1930년대 기온상황
가뭄과 북아메리카대륙 먼지폭풍사태
1930년대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
함경남도 북청은 오클라호마에서 더스트 보올(Dust Bowl)이 발생한 범위 내의 지명이란 역사찾기 결과물과 마무리


머리말


한반도에 엄청난 먼지폭풍(砂風:dust storm)이 과거 1930년 경에 발생했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까?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대한 먼지폭풍이 발생할 지형과 지리적 여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재 나이가 많이 드신 분이라 할지라도 거의 100동안 한반도 어디에도 경험을 해보지 않았던 중요한 기억이기에 또는 풍문으로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낯선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역사는 조용히 이런 엄청난 사실이 존재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1930년경 한반도가 아닌 곳에 거주하던 우리역사주체들이 지금은 그 기억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 하겠지만 분명히 먼지폭풍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여러 면을 통해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

먼지폭풍은 사막이나 풀이 자랄 수 없을 만치 매우 건조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 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인간의 이기심이 커 자연을 배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사막가까이나 아니면 본래 초원을 갈라 엎은 뒤에 맨 땅이 들어나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지형환경 조건을 충족시키는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지금처럼 역사적으로도 남의 나라 땅이었던 내몽고로부터 날아드는 먼지가 아니라 조선 영토에서 발생하는 먼지폭풍에 대한 것이니 더욱 의아하게생각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모래먼지 즉 황진(黃塵)이라고 하면 본 블로그 글 “멜론(甜瓜:melon)은 조선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6”에서 비닐하우스(vinyl house)가 없었던 시절, 멜론(甜瓜:melon)이 의주(義州)에서 났다는 사실과 함께 생물학적 근거를 통하여 결국 한반도가 아닌 미국 콜로라도주(Colorado)의 아칸사스 강(Arkansas River) 계곡(Valley)에는 이전부터 멜론이 풍부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역사 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1552-1608,재위:1567-1608)가 한양(漢陽)에서 서진(西進)하여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몽진(蒙塵)한 곳이 의주(義州)라 했던 사실과 비교하여 보았던 것으로 그곳은 여러 기상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사막 가까이에 있는 건조한 땅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이를 회진몽복(灰塵蒙覆)의 줄임말인 몽진(蒙塵)또는 몽수풍진(蒙受風塵)이라고 할 수 있었던 만큼 기후환경적으로 반드시 먼지폭풍에 의한 고통스러운 이동이었음을 견지하고 지적했던 것이다.

실제로 콜로라도 서쪽으로는 한반도 2배가 넘는 541,727 (km²)에 달하는 그레이트베이슨(Great Basin)사막이 존재한다.

이 의주(義州)를 지금의 한반도 신의주라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근원적으로 한양에서 즉 서울에서 서진(西進)을 하면 황해 바다임에도 서진(西進)했던 곳을 신의주(新義州)라 하니 그야말로 어안이 막히는 이상한 헛소리가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에 신의주란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본래의 의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옮겨지면서 할 수없이 새 신(新)자를 붙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저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지명이 급조되었거나 본래 지명의 의미와 상관없는 곳에 새롭게 지명되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근세기 역사판짜기에 동원된 모든 역사사실들이 이렇듯 쇠사슬에 얽어 메어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다.

때문에 한반도 역사가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와같은 지명의 변경은 거짓의 역사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며 의주(義州)를 찾으려면 기후 환경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곳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것으로써 애초부터 이곳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콜로라도주의 아칸사스 강 계곡가까이에 존재하는 도시라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그곳을 바로 본래의 의주(義州)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글쓴이가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메론을 참외로 오인하였던 것도 가당찮지만 생물학적 판단으로 첨과 즉 메론(甜瓜:melon)의 근원지 또는 원산지 파악에서 비로소 찾았던 도시가 콜로라도의 주도 덴버(County of Denve)였다는 사실은 역사찾기에 개척같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조가 1592년 음력 4월 30일에 한성(漢城)을 떠나 서진(西進)하면서 몽진하여 도착한 의주는 바로 덴버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도착한 시점이 바로 이른 초여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 삼한역사 조선역사에서 일찍부터 놀랍게도 먼지폭풍에 대한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알리고 있었지만 자손인 우리가 어리석고 미천하여 이를 바르게 알지 못하였고 엉뚱하게도 자학적인 역사에만 매달리며 부질없이 조상을 원망하고 울부짖는 짓만 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와같으니 한반도 식민지역사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막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한반도에 엄청난 먼지폭풍(砂風:dust storm)이 발생했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작된 역사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도 우리가 반성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역사사실에서 실제로 한반도 사람들이 거대한 먼지폭풍이 어떤 것인지, 사람의 숨 쉴 구멍은 모두 막아 눈만 내놓고 걷거나 생활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한반도에서야 지금까지 전혀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듯 심각한 환경적 재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실제로 그러한 고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본질의 역사에서 가볍게 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농단세력들이 아무리 숨기려 하더라도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원칙은 변할 수가 없다.

한반도 역사를 추종하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들어나는 것은 역사농단세력들에게 매우 귀찮은 것이며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이치와 천리를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의 한반도 사람들의 먼지폭풍이란 의미는 1948년에 만들어진 신중국(新中國)의 내몽고에서 발달한 먼지폭풍이 성장위주의 신중국의 산업찌꺼기 아황산가스, 납, 다이옥신 등 유해 중금속을 싣고 남동풍(南東風)을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곧잘 날아들어 한반도인들을 환경적으로 매우 괴롭히는 것이니 일단 귀찮은 문제가 틀림없겠지만 과거 역사가 말하고 있는 먼지폭풍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1935년 9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조선(朝鮮)의 괴이한 기상현상


하지만 놀랍게도 현재 네이버사이트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20년 이후부터 신문발행이 허가된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원본 기사가 캡처되어 공개되고 있는데 바로 뉴스라이브러리 카테고리에는 일제병탄기인 1930년대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먼지폭풍을 말하는 것 같은 기사들이 줄 지어 나타난다.


       


위 그림을 아래에 풀어 놓았던 것으로 1935년 9월 10일자에 보도된 기사제목이 “괴(怪)!창공(蒼空)에 광란곡(狂亂曲) 열풍(烈風), 조상(早霜), 혹서(酷暑)로 재앙속출(災殃續出)”과 그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怪(괴)!蒼空(창공)에狂亂曲(광란곡) 烈風(열풍),早霜(조상),酷暑(혹서)로災殃續出(재앙속출)

1935.09.10 동아일보

怪(괴)!蒼空(창공)에狂亂曲(광란곡)

烈風(열풍),早霜(조상),酷暑(혹서)로災殃續出(재앙속출)

颱風(태풍),南朝鮮(남조선)에上陸(상륙)

發穗稻作(발수도작)에大被害(대피해)

風圈(풍권)에든地方(지방)은大田以南(대전이남)

關釜聯絡船(관부연락선),昨夜(작야)부터缺航(결항)

【부산지국전화】제주도(濟州島(제주도))를 거처온 태풍(颱風(태풍))은 작八(팔)일에 목포(木浦(목포))를 지나 금九(구)일은 대구(大邱(대구)),부산(釜山(부산))간을 횡단통과하리라 한다.

풍속은 十六(십육)메돌로서 상당히 강한 바람인바지금(九日午前十一時(구일오전십일시))의 태풍중심은 거창(居昌(거창))에 잇으며 진주(晋州(진주)),사천(泗川(사천)),하동(河東(하동)),산청(山淸(산청))지방은 이바람 범위안에 들어 피해가 상당히 만흐리라한다.더욱이폭우가 쏟아지는 까닭에 발수(發穗(발수))중에잇는 벼에는 여간한타격이 아니라 한다. 이리하야 현해(玄海(현해))에도 폭풍우로인한 파도가 높으므로 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관부연락선))은 작 八(팔)일과금 九(구)일은 결항되고잇다


“괴(怪)! 창공(蒼空)에 광란곡(狂亂曲) 열풍(烈風), 조상(早霜), 혹서(酷暑)로 재앙속출(災殃續出)”에서 괴(怪)란 단어에 느낌표(!)까지 동원된 것을 보면 일단 보도하는 기자도 놀라운 현상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며 이어 창공 즉 푸른 하늘에서 광란곡의 열풍이라 한 것은 푸른 하늘에서 열풍의 광란곡 같은 현상은 마치 뜨거운 열기를 가득 품으며 광란곡처럼 요동을 치며 열풍바람이 휘몰아치는 괴이한 현상을 그려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먼지폭풍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분명 이러한 현상은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의 표현이다.

그 다음 단어가 조상(早霜)이라 하였는데 이른 서리를 말하는 것으로 서리는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기 전에 미리 위기의 상황을 알려 대비하고 준비하라는 자연현상이라면 가을도 아닌 여름에 벌써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써 이로 인해 농작물이 여물기 전이라 특히 상해(霜害)피해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참으로 괴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다음 단어가 바로 혹서(酷暑)이다.

광란의 열풍에 열기가 하늘을 찌르고 이른 서리하며 혹서 즉 뜨거운 날씨 탓에 재앙이 속출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기상은 보통 그리고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을 보면 어마어마할 이야기가 사라지고 없고 다만 대전이남(大田以南)폭풍으로 인해 이삭이 패고 벼를 심고 가꾸어 거두는 일에 피해가 많을 것이란 사실과 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이 결항될 것이란 내용뿐이다.

이것은 제목에서 이야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써 괴이한 기상현상의 보도를 빼먹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같은 사실에서 조선에서 당시 심각한 어떤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35.09.10 일자의 보도에서 동아일보가 빼 먹어버린 보도내용은 어떤 것일까?

혹서 즉 당시의 더위는 얼마나 심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글쓴이 역시 지난 70년대까지의 젊은 시절을 떠 올리면 여름이나 겨울, 혹독한 기후에서 느끼는 체감기온은 현재 체감기온과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당시 거의가 못 먹고 헐벗었을 때 이므로 더위와 추위가 오늘날 느끼는 체감온도 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강열했다는 것은 인체가 받아들이는 체감에서 지방질이 없어 더 추위를 느꼈다든지 아니면 덜 입어 보호막이 없었다는 이유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생활이 윤택이지면서 추위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약해져 추위나 더위를 더 강하게 느끼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발달된 냉방기구, 또는 보온기구등으로 인해 어지간한 더위와 추위를 별로 힘들지 않게 이겨내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키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현저하게 발달이 된 그래서 사람에게 유익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전기기구나 전열기구가 없었을 당시는 도리 없이 추위나 더위를 그대로 체감으로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헐벗고 배고플 때 기껏 추위를 이겨내는 것은 몸에 두르고 있는 얇은 천을 몇 겹 두르는 정도이거나 짐승가죽정도가 유일했을 것이며 한 여름에는 그늘진 곳을 찾아 자연바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그땐 무작정 사람들에게 인내심만 강조되던 때이다.

실제로 수치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위를 이야기할 때 에어컨이 있는 현대보다 1934년 부터 1936년경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한 여름의 무자비한 열기에는 체감 정도가 훨씬 더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먼지폭풍이 발발한 시점에서 1930년 기온통계자료를 보면 더운 열기가 끊기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더위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1930년대 기온상황


1930년대 1936년의 미국기록을 보면 그해 북아메리카대륙의 열파가 가장 심했다고 하고 있다.

전자에서 동아일보의 기상현상에서 빼먹어버렸지만 괴이한 열풍의 광란곡 같은 현상, 마치 뜨거운 열기를 가득한 열풍바람이 상상되는 때가 그 전해인 1935년도이다.

이때는 1929년에 시작된 사상 최대의 경제 대공황(Depression of 1929)으로 인해 모두가 헐벗었을 때이고 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의 한가운데서 더위가 발생되어 엄청난 인간의 고통과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 더욱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다.

미국의 가뭄은 1933년 11월 11일부터 매우 강한 모래 바람은 상층토를 말려 벗겨져 나갔다고 표현한다.

그해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에서 일련의 심각한 모래 바람은 경작지를 망가트렸다.

1934년 5월 9일에 시작해서 2일 동안 강한 모래바람은 크고 무거운 언덕을 제거하였고 시카고 어떤 지역에 1,200만 파운드(lb) 즉 5,443(ton)의 먼지를 옮겨놓았다고 되어 있다.

2 일 후 이 같은 폭풍우는 동쪽으로 불어 먼지들이 각 도시에 도착하였는데 클리블랜드(Cleveland), 버팔로(Buffalo), 보스턴, 뉴욕 그리고 워싱턴이다.

어쨌던 1930년 초부터 시작된 이러한 열파에 의해 사망자가 5,000명이 넘었고 농작물피해가 심각했으며 이 열풍은 지속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위의 동아일보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보도내용이 이와같은 상황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미국 전역의 기온이 38°C(100°F)를 넘으며 6월 하순부터 열풍이 시작되었고 중서부 지역은 6월 최고 기온을 기록했으며 더불어 가뭄 상황이 악화되면서 북동부에서는 기온이 90°F(35°C)로 상승하면서 남과 북은 또한 열기와 가뭄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열기는 캐나다까지 퍼져 가뭄이 전체 대륙을 덮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그 해 7월은 기온이 사상최고치를 나타냈었는데 노스다코타주(州) 스틸(Steele)에서는 기온이 121° F(49°C)에 달했으며 이는 노스다코타의 기록이며 오하이오주(州)에서는 기온이 43°C(F110°F)에 이르렀고 이는 1934년 이전 기록과 거의 같았으며 그 외 텍사스, 오클라호마, 캔자스, 알칸사스, 미네소타, 미시간,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펜실베니아, 루이지애나, 네브래스카, 위스콘신, 웨스트 버지니아 및 뉴저지주(州)도 기록적인 고온을 유지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가뭄 즉 한발(旱魃)의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가 있다.

                                                      [미국대륙기온지도]


위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당시 미국내 기온의 변화상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온타리오주(Ontario州)와 매니토바주(Manitoba州)의 주도에서는 43°C(110°F)이상의 기록적인 최고치를 기록했고 시카고 미드웨이 공항은 1936년 7월 6일부터 17일까지 12일 연속으로 100°F(38°C)이상의 온도를 기록했다. 그 해 여름 일리노이주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의 1936년 8월 12일에서 29일 사이에 여름철 기온이 100°F(38°C)이었다.

미국 중서부의 일부방송국은 1936년 7월 25일 네브래스카주(Nebraska州) 링컨(Lincoln)에서 33°C(91°F)와 최저 기온을 32°C(90°F)으로 보도했으며 남서쪽 사막은 1934년 7월의 열파가 진행되는 동안 캔자스주 애티슨(Atchison, Kansas)에서 34°C 이었다고 하고 있다.

1936년 8월은 5개 주에서는 가장 뜨거운 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일 최고 온도가 38°C(100°F)이상의 상태로 오래 동안 겪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가뭄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동일한 시간에 일부 주에서도 늘 평균 이상이었다.

열파와 가뭄은 대부분 9월에는 끝나 평균상태로 돌아가지만 많은 주는 여전히 평균보다 더 건조하고 뜨거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많은 농부들의 여름 수확물이 거의 파괴되었고 대지와 잔디밭은 마른 채로 남았다고 자료는 말하고 있다.

당시는 오존층의 위협이 극히 적었을 때다.

지표면의 온도가 지금처럼 위협을 받거나 자외선이 지표까지 그대로 도달할 위험이 적은 상태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최고 온도를 나타내는 것만큼 기온 상승하여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심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기온이 상승되면서 발생하였던 사태가 바로 공포의 먼지폭풍 바로 그것이다.

백과사전을 보면 모래바람(砂風:dust storm)이 자주 발생하는 북미대륙의 로키산맥 동쪽의 산록분지로서 대초원지대(Great Plains)지형이 사발(bowl)모양을 한데서 비롯되어 더스트 보울(dust bowl)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주요원인으로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밀(小麥:Wheat)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농부들은 약 11만(km²)에 달하는 새로운 곡물지대를 확보했고 1930년이 되자 밀 생산량은 10년 전에 비해 3배가량 증가하면서 그것과 비례하여 시오트(Sea Oats:Buffalo Grass) 즉 버팔로그레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34년 봄이 왔을 때 연례적인 가뭄기간 동안, 엄청난 규모의 먼지 폭풍이 형성되었다고 알려진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역사에서 황진(黃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임진왜란 시 선조가 당한 몽진의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가뭄과 북아메리카대륙의 먼지폭풍 사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먼지폭풍에 의한 피해는 1930년 전반부터 특히 1938년까지 이어졌다한다.

동시에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대공황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그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경기불황과 함께 밀어닥친 피해에서 사람들에게 와 닿는 고통이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먼지폭풍에 의한 피해가 이를 더욱 가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기상학적으로 뇌우(雷雨:thunderstorm)유출 및 돌풍전선(突風前線:gust front)과 연관되어 나타날 수 있는 더운 먼지 또는 먼지폭풍(duststorm)등으로 불리는 기상상황은 1934년 봄에 먼지 폭풍이 휩쓸고 지나 간 후 대평원에 거주하던 35만명(萬名)이상의 주민들이 짐을 챙겨 서부로 북부로 이동하게 했을 정도라고 알려진다.

더러운 삼십(Dirty Thirties)이라고 하는 말은 1930년대 더스트 보울(Dust Bowl)이 약 10 년간 지속되었고 1930년에서 1936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대초원 땅에 심각한 농업피해를 야기한 심한 폭풍의 시기였기 때문에 농사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천막 집- 텍사스 출신의 가뭄 피난민들이 캘리포니아 근처 엑세터(California near Exeter에 진입. 가족7명]


더러운 이란 말은 당시 가뭄과 먼지폭풍으로 인하여 사람들 몸메 번지가 들어 붙어 까맣게 더러워짐에도 물이 없어 씻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기후환경이 주는 삶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큰 것이었을 것이다.

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인들이 초췌한 환경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발과 함께 어려운 시기라 할 수 있는 1930년과 1940년 사이에 대략 350만명의 사람들이 대초원들 밖으로 이동했다.

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시작된 1년동안 86,000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는데 이 숫자는 1849년 골드러쉬(Gold rush)동안에 이주자들 수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이 심각성을 반영한다.

이곳의 이주자들은 오클라호마, 아칸소, 미주리, 아이오와, 네브라스카(Nebraska), 캔자스, 텍사스(Texas), 콜로라도에서 자신들의 농장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북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덜 하였지만 남부평원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고 한다.

1930년에 동부에서 처음 가뭄으로 타격을 입었고 이듬해부터 서부(西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1934년에는 대평원에 사막화가 진행되었는데 대공황이 이로 인해 더 길어 졌다는 것을 자료들은 하나같이 말하고 있다.

특히 미국 중남부에 위치한 오클라호마주(Oklahoma州)는 토양이 말라버려 먼지구름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검은 눈보라(Black Blizzards) 혹은 블랙 롤러(Black Rollers)라 하였을 정도이니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국가 가뭄 상황:THE NATION'S DROUGHT SITUATION 'AT A GL'ANCE]


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으로 대평원(Great Plains)으로써 오클라호마(Oklahoma), 텍사스 펀핸들(Texas Panhandle), 콜로라도(Colorado)와 뉴멕시코(New Mexico)을 중심으로 약 1억(億)에이크(100 million acres) 즉 404,685(km²)가 넘는다고 하였으니 한반도(韓半島)넓이가 227,943.05(km²)이라면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는데 한반도 두 배정도의 피해 지역이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먼지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창이 없는 모자를 쓰고 콧구멍과 얼굴을 바셀린을 묶은 손수건으로 덮어 먼지가 덮힌 황무지에서 먼지폭풍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1934년 5월 11일, 심한 먼지폭풍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까지 3억 4천만톤(340,000,000t)이상의 먼지가 날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뉴욕타임지(New York Times)는 먼지가 "뉴욕 시민들의 눈물과 목구멍을 막았다"하였고 보스톤과 애틀랜타까지 먼지는 날아갔으며, 심지어 몇 백 마일(mile) 즉 적어도[4~500(km)]떨어진 해상에 운행하는 선박 갑판에서도 먼지를 보았다고 한다.

이 먼지폭풍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수백만(萬)명의 농민들이 땅을 포기하게 했고 특히 텍사스와 오클라호마(Oklahoma)의 주민 50만(萬)명이 집을 잃었다고 하였으며 이 지역의 인구 4분의 1이 피해지역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재신을 챙겨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으며 수치가 장확하지 않겠지만 20만(萬)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고 알려지는데 오클라호마에서 왔다고 하여 이들을 오키(Okies)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도시 근처에 판잣집과 장막을 세우고 농업을 포기하면서 버려둔 부자재로 만든 집에는 배관 공사를 할 수 없어 부족한 전기와 오염 된 물, 쓰레기와 폐기물 등으로 종종 장티푸스, 말라리아, 천연두 및 결핵까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서부쪽으로 이동한 주민들은 모두 이와같은 처지이었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식의 가난에 시달린 이민자들로 가득 찬 농촌 캠프가 급기야 시골을 점령했고 그것을 좋아할 리가 만무한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은 법률가들로 하여금 그들을 해산 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이것에 효과가 없자 때로는 폭력이 난무하면서 이민자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판잣집을 불태우는 등 테러가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만약 이와같이 주민의 결속력이 극도로 와해된다면 어떤 특별한 역사관이나 국가관이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당시 들어나지 않는 역사존재가 되었지만 만약 이곳에 있었던 조선인이나 한국인들의 처지는 어땠을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재해로 인해 피난 한 대평원의 주민 특히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주민들은 먼지에 의해 병이 나기 시작하면서 폐렴과 영양실조로 점차 사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어떤 구성원이든 소멸되는 형태가 나타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먼지폭풍의 극단적 피해지역이 오크라호마(Oklahoma), 아칸소(Arkansas), 미주리(Missouri), 아이오와(Iowa), 네브래스카(Nebraska), 캔자스(Kansas), 텍사스(Texas), 콜로라도(Colorado), 더 하여 뉴멕시코(New Mexico)로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미국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대이동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고 하였으며 농사를 망쳐 은행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태가 계속되었다고 알려진다.

아메리카 원주민 말로 ‘와이오밍’은 대평원이라는 뜻이다.

대평원은 대륙 가운데 위치한 충청(忠淸)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재해들은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훼손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재해로써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드는 아픈 역사인 것이 틀림없다.

이때 조선인이나 한국인들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나 있었을까?

일제식민지 기간이니 오죽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거의 내팽겨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와이오밍 같은 지역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평원을 뜻하는 의미 하듯이 척박한 땅이었지만 그나마 사막화를 막은 것은 뿌리가 깊은 여러해살이풀이 땅을 뒤덮고 있어서인데 갑자기 남북전쟁과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수요가 급증한 옥수수와 밀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갈아엎자 대평원의 생태 균형이 깨져버린 결과라고 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30년대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


그렇다면 이러한 한발과 먼지폭풍이 한꺼번에 겹쳐 발생한 상황에 중심에서 찾아야 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어떻게 이를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것의 실마리는 바로 1920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에 접근 할 수 있는 자료는 단지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가 이토록 빈약한 것임을 새삼알게 하는 것이다.

서두에 게시한 1935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보도가 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의 발생일자와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다 하지만 1930년 전반에 걸쳐 발생한 기후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혀 비교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1935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보도는 내용면에서 상당한 보도사실이 누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목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명확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먼지폭풍이 발생하는 현상과 같은 기사사실의 제목이라 할 수 있어 실제로 북아메리카대륙 정 가운데서 발생한 가뭄에 대한 당시 동아일보에서 받아 쓴 기사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광란의 기후와 비교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당시에 조선 영토내에서 발생한 심각한 기상상황을 자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독자들께서도 이해 하실 것이다.

동아일보의 보도 사실만으로 이 모든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마치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세계삼한역사찾기란 명제에서 이 같은 글쓴이의 무모한 시도는 그나마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이지만 네이버사이트, 뉴스라이브러리에 나타난 동아일보기사 자료가 비록 일제강점기란 압제란 역사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 것임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 사실적인 보도라고 하겠지만 동아일보가 일제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보도를 완벽하게 처리 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100%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 하겠지만 역사찾기에 관한 궁금증만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역시 받아 쓴 보도라 하고 일편 걱정스럽다는 것은 이러한 글쓴이의 역사찾기가 대체로 정확했다 하더라도 1945년 미국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존 보도자료가 다시 수정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어떠한 조치가 가해 졌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우려스럽다 하는 것이다.

대체로 미국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당시 상황등과 동아일보가 같은 시기에 보도한 기사내용에서 거의 일치하는 문맥과 제반 사실들이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만은 구태어 부정하고 싶지 않는 것이다.

“1935.09.10 이라 보도 제목인 “괴(怪)! 창공(蒼空)에 광란곡(狂亂曲) 열풍(烈風), 조상(早霜), 혹서(酷暑)로 재앙속출(災殃續出)”과 같은 심각성의 한발사태에 따른 당시 상황설명의 보도와 주민들의 고통에 따른 모습의 보도는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자료와 거의 일치하는 보도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어떻게 이런 똑같은 기후상황이 한반도와 북아메리카대륙 동시에 발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1930년 가뭄의 발생상황과 그로인한 피해상왕등의 보도를 묶어 다음과 같이 게시하는 것이다.





함경남도 북청은 오클라호마에서 더스트 보올(Dust Bowl)이 발생한 범위 내의 지명이란 역사찾기 결과물과 마무리


위 표는 동아일보 한발의 대한 보도기사를 종합적으로 시간대별로 발췌하였으며 이것과 명확하게 비교하거나 사실적 접근이 가능한 북아메리카대륙 한발과 먼지폭풍에 대한 사실들을 비교분석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가뭄은 표[NO:A2]1930년부터 축적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동아일보

조선사회면에 등장하는 가뭄 즉 한발에 대한 보도 분석에서 거의 같은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러한 면이 1932년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위 보도기사 명세서  표[NO:1]기사에 완도(莞島)에서 한발(旱

魃)로 인하여 음료수 즉 식수가 부족하여 십리나 물 길러 다녀야 했다고 기사화되었으며 표[NO:2]기사는 대전 및 충청남도 전도 그리고 보은과 아산등에서 앙판(秧坂)은 균열(龜裂)이 되어 충청남도 전도의 7할 이상이 이앙을 중단했다 하였으며 때문에  맥령(麥嶺) 즉 보리고개조차 희망이 없어져 전멸상태임을 알리고 있으며 1933년 7월 26일  표[NO:3]기사에는 천안(天安)에서 한발(旱魃)이 발생하였는데 8년이래 이와같은 경우가 처음으로 수은주가 화씨100 도 즉 섭씨 38°C(100°F)로 20여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또한 미국의 가뭄도 표[NO:A1]1933년 11월 11일부터 매우 강한 모래바람은 상층토를 말려 벗겨져 나갔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이와같은 상황이 발생되려면 동아일보 보도와 같은 수은주가 지속하면서 사전에 유지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먼지폭풍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원인 부터 거의 상황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의 글 소제 "미국의 1930년대 기온상황"에서 잘 설명했듯이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의 한가운데는 이와같은 무서운 더위가 지속적으로 발생되었음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표[NO:A3]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

트보올(Dust Bowl)의 한가운데서 더위가 발생되어 엄청난 인간의 고통과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아일보보도를 보면 표[NO:4]에 1934년 5월 30일 즉 약 20일 후 상황의보도임을 알 수

있는데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괴천후(怪天候)가 一個月(일개월)동안 계속되면서 전혀 햇빛을 볼 수

가 없어 흉년 징조가 보였다고 하고 있고 1개월동안 매일 담천(曇天) 즉 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것을 말

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먼지구름, 즉 검은 눈보라(Black Blizzards) 혹은 블랙 롤러(Black Rollers)라

표현 한 것이다.
즉 함경남도 북청(北靑)은 검은 눈보라(Black Blizzards) 혹은 블랙 롤러(Black Rollers)가 발생했다고
하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남부 오클라호마주나 대평원의 중심이 되었던 더스트 보올(Dust Bowl) 범위 내에 존재한 지명이라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
아마도 한반도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이야기다.
그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위 표에 보면 이와 관련된 사실들이 마치 현장을 묘사하듯 보도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표[NO:5]1934.06.21충청남도 아산(牙山)지방은 작년 그러니 1933년 가을 부터 우량이 부족하여 모내기에 곤란하였고 식수까지 결핍되어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표[NO:6]

1934.06.23 보도내용은 폭서가 전조선(全朝鮮)에 밀어 닥쳤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연일계속되는 불볕으

로 철없이 뛰어오르는 수은주라 하면서 광분하는 수은주라 하였을 정도로 도로의 "아스팔트"는 힘없이

녹아지고 들판의 곡식은 말라죽게 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기후현상이 전조선(全朝鮮)

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
표[NO:7]은 거제 통영에서는 화씨100도가 오르내리는 한발(旱魃)에 의해 염병(染病) 즉 장질부사가

만연함을 알리고 있으며 같은 날 보도 표[NO:8]경상나도 함양군에는 한발(旱魃)로 인해 농가 14호가

소실되어 대화(大火)를 알리고 있다.


1934년의 무서운 열풍은 대조선이나 북아메리카대륙이나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표[NO:A4]미국자료를 보면 이듬해인 1935년 4월 14일에 발생한 검은 일요일(Black Sunday)이라는

것은  더스트보울(Dust Bowl)의 일환인 미국의 대초원지역에서 3억톤(ton)의 표토를 날려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먼지폭풍인데 처음 텍사스북부의 스피어 먼(Spearman)에 접근하여 피해를 낳기 시작하면

서부터 1935년 4월 14일 오후, 그레이트플레인스(Great Plains)대초원의 거주자들이 이 먼지폭풍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고 이 폭풍은 오클라호마 팬핸들(Oklahoma Panhandle)과 오클라호마 북서

부(Northwestern Oklahoma)를 먼저 휩쓸었으며 이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비버(Beaver)를 오후4시경

에 치고, 이어 보이즈 시티(Boise City)를 오후5시15분에, 텍사스 아마릴로(Amarillo, Texas)를 오후7

시 20분에 쳐 피해를 낳았다고 알려진다.
이 결과 역시 오클라호마와 텍사스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폭풍의 영향은 물론 다른 주변 지역까

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와같은 당시 현장 보도는 덴버(Denver, Colorado)소재 AP통

신사(Associated Press)기자 로버트 가이거(Robert E. Geiger)에 의해서이며 그날 오클라호마 주 보

이시(Boise City)에 있었고 그에 의해 블랙선데이(Black Sunday)와 더스트보올(Dust Bowl)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동시간의 동아일보의 보도는 어땠을지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 북아메리카대륙의 사건과 동일하다고 판단 할 수 있는 동아일보 보도 기사는 찾을 수가 없다.

위 북아메리카대륙 검은일요일 먼지폭풍 보다 하루이틀 전의 상황은 표[NO:9]1935.04.10보도에는 함

경남도내에 장기한발에 의해 산화(山火)가 빈발(頻發)하고 있다는 사실과 표[NO:10]김소월 시인의 고

향인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한발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등을 알 수 있고 표[NO:11]1935.04.23일자 신의주(新義州)발보도는 서조선(西朝鮮)에 흔하지 않는 한발(旱魃)에 의해 곳곳에서 대산화(大山火)가 빈발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NO:12]1935.04.24일자보도를 보면 함경남도 영흥(永興)에 한발(旱魃)과 폭풍(暴風)에 의해 곡식과 묘자리, 꽃이 시들고 마르는 형상이 지속되며 그러니 4월 20일부터 돌연 내습한 폭풍은 3.4일 계속되어 이미 발아한 곡묘가 고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먼지폭풍에 의해 토양이 비산(飛散)즉 날아서 흩어진다 하였으니 북아메리카대륙 검은일요일의 닉네임을 가진 폭풍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표[NO:13]똑같은 시기 1935.04.25 일자의 평안남도 신안주(新安州)보도를 보면 한발(旱魃)이 너무나도 심해 청천강(淸川江)상류가 고갈되어 목재운송이 막히고 동강수를 이용하는 관개사업도 위협을 받는다 하였다.
표[NO:14]1935.04.25일자 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보도에는 해서지방(海西地方)에도 한발(旱魃)이 계속되었다 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적벽강(赤壁江)의 큰 강물도 고갈이 되어 강바닥을 육지같이 걸어다니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섣부르게 넘어갈 수 없다.
바로 동아시아대륙 호북성의 양자강 강변 황강(黃崗)시 황주적벽(黃州赤壁)이라 하기도 하고 동파적벽(東坡赤壁)이라고 불리는 황주(黃州)를 말하고 있음이다.
어찌한가.
이렇게 따져 들어가니 놀랄일이 한 둘이 아니다.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 "에서 노스다코타주 리치랜드카운티의 와페턴(Wahpeton)까지 이어지는 북쪽 레드강(Red river:캐나다와 미국국경경계선지점)에서 흔히들 중국역사처럼 인식하고 있는 적벽(赤壁)을 찾을 수 있다 하였고 캐나다 민요 홍하의 골짜기(Red River Valley)의 무대가 위니펙 호수(Winnipeg Lake)란 사실에서 미네소타강으로 들어가는 상류지역임을 알 수 있었는데 여기가 곧 적벽(赤壁)을 연상케 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었다
호북성의 양자강 강변 황강(黃崗)시 황주적벽(黃州赤壁)이라 함은 분명 이곳을 지칭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황주의 황해도 위치가 혼란스러운 것이 틀림없어 정확한 위치는 다시 한번 따져 볼 일이다.
또 표[NO:15]1935.04.25 같은 일자 황해도(黃海道) 풍천(豊川)보도에도 동일한 구역 해서(海西)일대에 비가오지 않아 대소맥흉(大小麥凶) 즉 밀 흉년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한반도 황해도에 밀 흉년이라니 말이 되는가.
한반도에는 애초부터 밀 생산이 되지 않았던 지역이다.
표[NO:16]1935.04.26 평안북도 용천(龍川)에도 해빙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비가 내리지 아니하는 한발이라 식수가 고갈되었다고 하였으며 표[NO:17]보도 역시 함경남도의 장기간(長期間)의 한발(旱魃)끝에 속출(續出)하는 산화(山火)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
표[NO:18]청천강연안일대(淸川江沿岸一帶)에 검은일요일이 발생된 16일째 되는 4.30일자 보도는 작년 같은 기간에서 부터 한발(旱魃)이 계속하여 토질이 너무나 건조하게 되었으며 도리어 폭풍만 연일계속되어 전답이 전부 초토화되었다고 하고 있다.

한반도 황해도에 연일 폭풍이 계속되었다 하는데 도대체 폭풍이 황해도만 발생했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그렇지 않는가.

동서 허리가 짧은 한반도에서 발생할 이야기가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표[NO:19]1935.05.10일자 평안북도 신의주발 보도에는 평안북도는 수십년(十數年)이래 처음으로 개천이 고갈되어 못물도 부족할 정도로 한발이 심하고 매일같이 강풍이 불어 이런 현상의 춘한(春旱)은 수십년동안 없었던 상황이며 이와같은 지역으로 함경남도지방인 군선(群仙), 평안남도 안주(安州), 경상북도 김천, 영동(永同)등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흔한지 않는 봄 가뭄이 어떻게 한반도와 동시에 북아메리카대륙에도 발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위 표에 특이한 것이 있는데 표[NO:20]1935.05.11일자 함경남도 함흥(咸興), 안변, 풍산발에 의하면 남북조선에 걸쳐 한발이 계속되었다 하면서 1935년 2월이후로 하늘도 무심하야 기다리는 비는 내리지않고 매일같이 모진바람만 계속되는 괴천후(怪天候)라 하였으며 이를 흥진만장이라 하였지만 기사가 오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감추려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흥진만장이 아니라 황진만장(黃塵萬丈)의 세계라는 것인데  하늘 높이 치솟는 누런빛의 흙먼지 현상을 비유한 것으로 중국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 아마도 결정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황진만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남북조선(南北朝鮮)에 걸쳐 일어난 현상이라 하고 특히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이러한 보도가 나왔다는 것은 검은일요일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 같은 날 보도로 평안북도 백마(白馬), 전라북도 신태인((新泰仁), 평안북도 방현(方峴)등지에서 하지도 지나간지 여러날이 되어도 한발은 계속하고 폭풍만 더 심하여 경작은 전혀할 수없게 되어 폐농 지경이라 하고 주린 창자를 초근목피로 채워가면서 겨우 보리 고개를 넘어가는 농민에게 큰 걱정이다 하였다.
표[NO:24]1935.05.11보도 역시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을 비롯하여 16개군에도 금년 1935년 1월경부터 비가오지 아니하야 농민들은 푸른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하였고 표[NO:25]와 표[NO:26]을 보아도 평북지방(平北地方)에 한발(旱魃)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과 저수량이 계속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등을 알리고 지속적을 산불이 계속 발생한다는 보도를 볼 수가 있다. 
표[NO:27]과 표[NO:28]를 보면 남도(南道)에는 한발로 인해 농민간의 물싸움이 일어나고 특히 김제평야, 만경평야, 옥구평야, 전주평야, 나주평야등 한발의 피해로 울거나 외치는 대중이 백만(1,000,000명)이라 하였으며 온 산하가 흉작이라 대겸지옥(大歉地獄) 즉 흉년에 의한 지옥이라 하고 있다.
조선의 쌀 총생산량(朝鮮米總生產量)의 3분지1 이상을 생산하여 조선이 자랑하는 곡창(糓倉)지대가 이제 흉년(凶年)으로 인해 농작물(農作物)을 거둘 것이 없게 된 땅이 되었다고 하였다.

표[NO:29]는 이러한 극도의 곤란한 기후환경에 의해 농사를 망친 농민이 비관하여 열차에 치여 자살한 사실까지 실로 끔찍한 장면들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첨부할 이야기는 위 투신자살한 사람의 이름이 아주 난해하다.

한국인의 이름이 아니라 사택풍차(寺澤豊次) 53세라 하였는데 분명 일본인의 이름이다.

그런데도 기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지극히 상식적으로 굳이 구분하지도 않았다. 왜일까?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창씨개명에 의한 것이라 그냥 뭉개버릴 것인가. 아니면 당시에 일반 대중들은 조선인(朝鮮人)이라고 굳이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일반적인 사항이라는 것일까.

지난 30년대 일제탄압아래 존재했던 사회일반사실들이 이처럼 궁금할 수밖에 없다.

조선인이라 대명사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다.

기상상황의 이 모든 보도들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미국자료처럼 1934년 5월 9일에 이미 마를 때로 말라 있던 대초원의 상층토가 벗겨지며 모래폭풍(Dust Bowl)을 일으킨 사실이 정말로 조선(朝鮮)땅 한 가운데서 벌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에 더하여 1년 후 1935년 4월 14일 텍사스북부의 스피어 먼(Spearman)에 접근하면서 발생한 블랙선데이(Black Sunday)역시 조선(朝鮮)땅에서 발생한 것이 과장 없는 정확한 사실이라면 그래서 정말로 조선인(朝鮮人)들에게 다시없는 고통스럽고 끔찍했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태였다면 결국 이런 끔찍한 기후재앙이 발생한 정확한 위치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역사가 고집하는 한반도이었는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는지를 독자여러분께서는 이 시점에서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조금은 의심이 있다는 하는 독자가 있다면 끝으로 글쓴이가 위에 게시한 사진 그림을 유심히 볼 필요성이 있다.

바로 1807년에 설립했다고 하는 미국상무부 산하의 정부기관인 미국해양대기관리처(美國海洋大氣管理處)소속 국제종합해양기상센터(ICOADS)에서 돌출한 지구 표면 온도 데이터인데 확장 된 해수면 온도 버전4(Extended Reconstructed Sea Surface Temperature Version4(ERSST.v4))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문제의 먼지폭풍, 더스트보올(Dust Bowl)사태가 발생한 시기인 1934년 11월의 섭씨온도 기준(℃)으로 해수면 기온의 변이[SST(Sea Surface Temperature)anomalies]상태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1.5~3.5(℃)범위의 현상이 몇 일 간 지속된다면 엘니뇨의 특성으로 간주되지만 과학자의 의견은 열대 태평양의 기온이 정상에 가깝다는 것이며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낮다는 것을 종합하여도 엘니뇨(El Niño)나 라니야(La Niña)상태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1930년대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가뭄과 먼지폭풍의 기후현상에서 당시의 기후체제가 알래스카 근처의 고진폭순환기형(high-amplitude circulation anomalies near Alaska)에 가깝다는 과학자들의 의견도 있고 또 한편으론 동태평양의 해수면의 온도가 높고 대서양의 해수면 온도가 과하게 높아 북아메리카대륙에는 거대한 고기압이 형성되고 겨울이 끝나면서 고기압은 서쪽으로 이동하였으며 미국 서부해안에 자리 잡았던 고기압으로 습한 날씨가 사라졌고 전통적으로 중앙 평원에 내리는 봄과 여름강우를 간섭했다고 하였으므로 결국 가뭄과 동반하여 먼지구름이 발생하면서 비구름의 형성을 돕는 증발을 막기 때문에 먼지구름의 존재 자체가 강우를 줄이는데 일조한 것이라고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NASA and the Lamont-Doherty Earth Observatory have discovered that the 1934 drought was 30% more severe than the runner-up drought (in 1580) and extended across 71.6% of western North America.

미항공우주국(NASA)과 콜롬비아대학 라몽도 헤르티 지구 관측소(Lamont-Doherty Earth Observatory)과학자들은 1934년 가뭄이 1580년에 발생했던 두 번째로 심한 가뭄보다 30% 더 강했으며 북미서부지역의 71.6%로 확장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기후학적으로 이보다 더 세세한 것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기상학자에게 넘길 수밖에 없으나 그렇더라도 한반도와 밀접한 우리 입장에서는 대륙 간의 해수면온도의 현격한 차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위 게시 그림에서 한반도(A)해수면 온도 상황과 북아메리카대륙(B)해수면 온도 상황을 비교할 수 있고 해수면의 온도의 영향으로 육지의 기압이 변이된다고 할 때 한반도는 낮은 기온(푸른색)의 기압이 흐름을 알 수 있고 반면 북아메리카대륙의 기압의 흐름은 더운 공기(붉은색)가 흐름을 알 수 있다.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 고기압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와같은 기후학적인 이론들은 1934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한발의 사태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먼지폭풍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조선인에게 큰 피해를 준 사실이 정확하게 세계삼한역사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한발과 먼지폭풍에 관한 보도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사태발생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북아메리카대륙이다.

이것이 바로 글쓴이가 한결같이 주창할 수밖에 없는 세계삼한역사관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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