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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도시(腰衣:Loincloth)와 열도일본

한부울 2020. 5. 20. 15:54

훈도시(腰衣:Loincloth)와 열도일본

 

글쓴이:한부울

 

먼저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백과사전을 보면 허리(腰)에 둘러 입는 형태의 의복으로 초기에는 매는 끈의 형태로 시작된 요대(腰帶)형태였으며, 요대가 커져서 허리를 전부 가리는 요의가 되고 점차 스커트의 형태로 발전하였고 엉덩이와 사타구니(loin), 서혜부(鼠蹊部)를 둘러싸는 직4각형 모양의 천조각이라 했으며 BC 3000년경 이집트인들은 몸을 여러 겹 싸서 앞에서 묶거나 띠를 두르는 직물인 쉔티(shenti, schenti, shendyt)를 입었다고 되어 있다.

패션큰사전에서는 허리에 둘러 입는 형태의 의복으로 초기에는 매는 끈의 형태로 시작된 요대 형태였으며, 요대가 커져서 허리를 전부 가리는 요의(腰衣)가 되고 점차 스커트의 형태로 발전하였다고 말하며 기후가 따뜻한 아열대 또는 열대지역인 아프리카, 중앙 아메리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이 입었으며, 이집트의 쉔티(shenti)가 대표적인 요의이다. 쉔티(shenti)는 바느질을 하지 않고 천을 허리에 둘러 끈으로 고정한 모습이라했다.

 

일본자료를 보면 사이즈나 소재, 속옷과 표착의 차이외, 만들어진 천을 그대로 허리(腰)에 묶거나 벨트로 고정하는 것과 허리끈을 꿰매어 묶는 등의 고정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다 하였고 사타구니에 끼우는 것(인도·dhoti 등)과 굽히는 것(고대 이집트·shenti 등)의 착장 방법의 차이 등으로 지역마다 다르다고 하였다.

또 바지따위의 가랑이 아래 길이, 고하(股下)로 통과하는 형식의 지방에서는, 남성(특히 전사나 노동자)이 사타구니에 통과하는 형식, 여성이 허리띠 형식과 착장(着装:몸에 붙임)방법이 성분화(性分化)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고하를 통과하는 형식이 노동(労働)때의 움직이기 쉬움을 고려하여 고안된 형식으로, 허리띠 식에서의 파생했기 때문이라 하면서 인도네시아 자바인(Java), 말레이인(Malay)등 회교도 허리에 감는 의복 사롱(sarong), 버마의 론지(Longyi)는 통형으로 꿰매며, 로인크로스이면서 통의(筒衣)분류되기도 한다 하면서 자신들의 훈도시(ふんどし)를 영어표기에서 로인크로스(loincloth)로 표시한다라고 하고 있다.

훈도시(ふんどし)는 들보라 하고 남성의 음부를 가리기 위한 폭이 좁고 긴 천.(=下帯)라고도 하며 속어(俗語)로는 게의 배 딱지, 아감딱지, 새개(=えらぶた:鰓蓋:operculum)라고 하였다.

일본자료에서 훈도시(褌:ふんどし:Fundoshi)를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라 한 것이다.

또 훈도시를 한문으로 곤(褌)이라고 하는데 곤(褌)은 통이 좁고 가랑이가 짧은 바지로 상고시대부터 착용되었으며, 지금의 잠방이와 같은 형태이고 고구려의 궁고(窮袴)와 비슷하나 가랑이가 좀 더 짧다라고 했지만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옷은 통이 좁고 가랑이가 길며 속속곳 따위의 안쪽에 받침으로 대는 헝겊 '밑바대'를 댄 바지라 했고 고려(高麗)시대에는 무인(武人)들이 이러한 군복으로 입었다고 되어 있다.

즉 잠방이는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한 짧은 홑고 의(衣)이다.

고구려와 고려시대의 통의(筒衣)는 짧은 바지라고 보이지만 일본 훈도시와 차이가 있고 훈도시는 요사이 말로 속옷 팬츠(pants)라 해도 과할 정도로 국부 가리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본자료가 말하는 것처럼 고구려나 고려의 통바지와는 비교자체가 불가한 것이다. 이런 가리개를 의복삼아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명치유신 전까지 일본인들이 착용했다는 사실이다.

 

훈도시는 띠 모양의 천을 몸에 감아 신체 후부에서 완결하는 것과 끈을 이용하여 바퀴모양인 윤형(輪形)으로 완결하는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하였는데 속속곳의 형태이지만 천이 아니라 끈으로 둘어 맨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현재 열도일본인들이 훈도시를 해석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자기 미화적으로 나타난다.

굳이 한문으로 곤(褌)이라 한 것에서 부터가 그렇고 곤을 한문 합성한자로 풀이한 것을 보면 의복 의(衣)의 의부(意符)와 군(軍)의 성부(聲符)가 합성된 글이라 하여 군(軍)이라는 의미의 전투복에서 유래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벌거벗고 싸움질 한 것은 고대 왜구들이 생각나며 13세기에서 16세기 경 서양해양세력이었던 해적이라 할 수 있는 해구(海寇)들 역시 이와같았다고 판단된다.

즉 상식적으로 보면 짧은 바지 내에 속속곳을 입었을 것인데 훈도시는 바지를 벗어버리고 속속곳만 차고 전투를 했다고 하는 것이니 기가찰 노릇이 아닌가.

하기야 삼국사기기록에서 왜구들이 벌거벗은 상태로 훈도시에 칼만 차고 날뛰었기에 그것을 군인이라 해석한다면 군인을 벌거숭이 왜구와 비교하는 것 같다.

 

일본자료가 주장하는 훈도시의 역사를 보면 전국시대때 천(布)값이 비싸기 때문이라 하였고 전사자(戦死者)의 신분은 곤(褌)의 유무(有無)로 구별하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삼베(麻)가 주류였으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와 무명(木綿)을 대체하여 무사(武士)외에 일반 서민에게도 보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훈도시는 남방전래설과 북방전래설이 있는데 남방전래설의 근거는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나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육척곤(六尺褌:6척 길이,181.8 cm의 샅가리개, 척은 피트와 같은 단위)와 거의 같은 형상의 것을 대입하고 있다는 점이고, 대륙전래설은 중국대륙에 '독비곤(犢鼻褌)'여름에 농부(農夫)가 일할 때에 입는 '쇠코잠방이'이라 불리는 남성의 국부가 소(牛)의 코(鼻)처럼 보이는 곤(褌)의 유행이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샅가리개라 함은 남성의 고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독비곤이라 하여 소코잠방이는 인도의 레슬링하는 사람들이 입는 랑곳(Langot)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훈도시는 랑곳과도 또 다르다.

그림:육척 훈도시같은 건 엉덩이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부위만 가리는 모양인지라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T팬티.[나무위키:출처]

 

그러나 남방전래설은 몰라도 북방전래설은 그들이 어디든지 묻어가려고 하는 습성에서 나온 잘못된 착각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러한 옷을 입게 된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더위에 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점이 있어 노동하는 남성들에게 불편하지 않는 옷에서 출발한 것으로써 전혀 옷이 필요치 않는 문화에서 전래된 것이며 대체적으로 습기가 많은 아열대기후나 열대기후의 종족들이 이런 가리개 정도의 옷을 입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 여성의 경우는 생략하겠다.

 

다음은 영어자료에서 발췌한 것인데 훈도시가 로인크로스라고 하니 이를 보면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는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단 하나의 천 조각, 전형적으로 몇몇 더운 나라의 남자들이 입는 유일한 옷이라고 하였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열대기후에 맞는 가리개 정도의 옷이다.

훈도시는 엉덩이를 덮는 수준도 아니라 엉덩이를 다 들어내놓고 끈으로 사타구니(가랭이)를 이어 고리에 연결한 것이 전부이다. 훈도시와 마찬가지로 로인클로스 역시 다른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거나 옷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에서 입는 옷이라 하였다.

이것들은 조금의 차이가 있듯이 용도가 다른데 옛 스리랑카(Sri Lanka)나 인도(India)의 논(rice field)에서 레슬링하는 선수와 농부들이 흔히 속옷이나 수영복으로 사용하였다 하고, 이것을 신할라(Sinhala)의 아무다야(amudaya)라 불리고 카우피남 (Kaupinam), 카우피나(Kaupina) 또는 랑곳(Langot)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인도 남성이 허리에 끈을 걸쳐 가랭이만 천으로 감싸는 속옷으로 입는 것이며 특히 종교적으로는 인도(印度:India)의 베다, 베딕시대(Vedic Period:B.C 2000-B.C 1500)초기부터 사용되어 왔고 시바(Shiva)의 신자들은 카우피남(Kaupinam)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인류역사를 통틀어 성기와 알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엉덩이가 아닌 성기를 덮는 근본적인 옷, 즉 가리개로 인식한 로인클로스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것의 재료가 나무껍질, 가죽, 천조각으로 다리사이에 끼어넣고 성기를 덮는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의 방법이 간단하면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가지 형태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개인들이 사용하던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 또는 브리치클롯트(breechclout)는 가랭이(thighs)사이를 지나 벨트로 고정된 소재(나무껍질, 가죽, 천)의 띠로 구성되어 있는데 로인클로스(Loincloth)와 달리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옛날 노예나 열대 지방의 원주민 등이 사용한 것이니 더 볼 품이 없었다고 보인다.

대신 로인클로스는 긴 천 조각으로 가랭이 사이를 지나 허리에 감겨 있다. 좀 더 발전한 것이다.

또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에 대해 1902년~1906년에 샤이엔 인디언(Cheyenne)과 카이오와족(Kiowa)의 가문의 문장과 역사를 연구하는 문장학(紋章學)에 정통한 미국민족학자 제임스 무니(James Mooney:1861-1921)는 본래 샤이엔(Cheyenne)은 '로인클로스를 입고 말을 탄다'라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인디언맨으로 알려져 있고 옛 북미 대륙의 동부에서 남동쪽 걸쳐 미시시피 강 유역을 거주지로 삼았던 체로키족(Cherokee)에 들어가 몇 년 동안 공동생활을 했다고 했다.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서, 남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허리에서 발끝까지, 주로 다리를 덮는 겉옷를 하였는데 그 형태는 부족마다 달랐고 재료는 사슴·염소의 부드러운 가죽 벅스킨(buckskin)으로 만든 레깅스(leggings)를 착용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좀 더 추운 날씨의 기후에 맞게 레깅스를 한 것이다.

많은 부족에서는 로인클로스(Loincloth)의 덮개를 앞뒤로 늘어지게 하였으며 다른 부족에서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의 허리띠 바깥쪽으로 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안쪽으로 넣개 하여 더 잘 어울리도록 하였고 때로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가 훨씬 짧고 전체적으로 앞뒤로 장식된 앞치마 천 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하고 있다.

비슷한 스타일의 로인클로스는 고대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즉 중앙아메리카의 특징이기도 하며 현대 멕시코 지역의 남성들은 천으로 감는 로인클로스(wound loincloth)를 입었다고 알려진다.

로인클로스의 한쪽 끝이 위로 올려져 있고, 나머지는 가랭이 사이를 지나 허리에 감긴 다음, 등에 집어넣어 고정시켰다. 또 1492년 신대륙 발견탐험가 콜럼버스(Christopher:1446-1506) 이전의 남아메리카에서는 고대 잉카 남자(Inca men)들이 끈이나 줄로 가랭이 사이에 천을 띠처럼 끼고 있었다고 말해지며 천은 뒷면의 줄로 고정되어 있었고 앞부분은 앞치마를 걸어 항상 잘 장식되었다고 하였다.

대부분 일반적인 면으로 되어 있지만, 지금은 T셔츠(shirts)처럼 때때로 상징이 장식된 앞치마가 있는 것인데 이 옷은 일본에서 엣추 훈도시(etchu fundoshi)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아마존 토착민(Indigenous people of Amazon)들 중에도 여전히 조상들이 착용한 로인클로스를 입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엣추 훈도시(etchu fundoshi)는 어떤 것일까?

위글에서 멕시코남성들이 입는 로인클로스(loincloth)로써 앞치마처럼 늘어진 것을 일본인들은 엣추 훈도시라고 했다.

게시된 나무위키자료를 보면 훈도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일본군에서는 육척훈도시 보다 더 쉽게 제작하여 착용할 수 있는 엣추 훈도시를 장병들에게 군용 속옷으로 보급하였고 이것을 이후 민간으로 확산되어 보편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명치유신(明治維新)이 1868년부터이니 이때부터 군용으로 보급이 되었고 나중에 민간이 따라 사용했다는 것인데 군용이라는 것은 옛 곤이라는 한자 의미의 군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전달될 수 있는 것으로써 일본인들이 착용한 것은 훈도시이고 훈도시는 군용이 먼저가 아니라 민간에서 습한아열대기후나 열대기후에 맞춰 민간에서 먼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명치유신 때부터 활동지가 바로 멕시코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엣추(越中)라는 것은 현재 열도에서 호쿠리쿠도(北陸道)의 도마야현(Toyama)을 말하는 것으로써 고대율령국이라 한다.

 

솔직히 한반도도 그렇지만 열도지도만 보고 있으면 지명이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위 지도에서 북륙도라고 할 곳은 오히려 혼슈 북쪽지역이어야 함에도 이상하게 동해에 접한 띠같은 곳을 호쿠리쿠도(北陸道)라 하였다.

어쨌던 중앙아메리카대륙의 고대잉카제국의 남자들이 입었던 로인클로스(loincloth)를 엣추 훈도시라 하였으니 일본인들이 본래 중앙아메리카대륙 습하고 무더운 아열대기후의 멕시코에 있었던 종족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지만 현재 위치는 동해 북쪽가까이에 가져다 놓아 기후는 훈도시의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지는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

로인클로스(loincloth) 또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남북아메리카 그리고 중앙 즉 메소아메리카에서 공통적으로 원주민들이 입었던 요의(腰衣)였다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글에서 남아메리카대륙의 아마존 토착민들 중에도 여전히 조상들의 로인클로스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오래전부터 열대기후인 남아메리카대륙 중북부지역에서 이와같은 옷이 입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이 바로 인도였다.

또한 1500년 4월 22일 포르투갈 항해사인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1467-1520)은 마누엘 1세(Manuel I,재위:1495-1521)와 엔히크(Henrique)왕자 명령으로 인도(印度)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대서양서쪽해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우연히 브라질 북동쪽 해안 몬테 파스코알(Monte Pascoal)에 도착하여 다음날 프레이드 강(Frade river)하구에 정박하자 현지 투피니킴 인디언(Tupiniquim Indians)의 무리가 해변에 모여들었고 그들은 바로 로인클로스 요의(腰衣)를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곳은 평소 농사일을 하던 인도인이었으며 그들은 지금까지 인도를 찾지 못했다고 하고 있지만 바로 인도(印度)를 정확히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현재 브라질이 아니라 당시에 진짜 인도(印度)였다는 사실이다.

얼마전 게시한 본 블로그 글 "금련화(金蓮花)와 석가(釋迦)탄생지 인도(印度)https://blog.naver.com/iikhan/221968912424 "에서 석가의 성(性)을 '찰리(刹利)'라 하였다는 것도 바로 칠레(chile)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과 석가께서 탄생하신 룸비니(Lumbinī)를 금련화(金蓮花)로 밝혀 네팔(Lumbini in Nepal)남부 테라이(Tarai)지방이 아니라 안데스산맥 칠레 북부지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인데 이러한 주장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남아메리카대륙이 인도(印度)라는 주장은 본 블로그에서 수십차례 이야기 한 사실이며 주요한 글만 하더라도 무려 15개가 된다.

그렇다면 서양해양세력들은 인도(印度)에 도착하고 정작 발견하였음에도 무엇때문에 엄청난 역사 부정을 하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에서 주장했듯이 동서양을 분리하고 현재 아메리카대륙의 동해, 즉 대서양이 대동양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덮고 동아시아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식민주의에서 동양을 식민지 뭐니 하는 역사를 만들려면 곧장 현재 인도아대륙을 인도라 하여 동아시아로 들어갈 수 있는 바탕을 깔아놓고 해양시대를 서양세력들의 창구역할을 하게 한 열도일본과 연결하여 일본이 서양역사문물을 전래하는 보루로 만들면서 일본을 동아시아 위치에 놓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 것이며 근세기 역사전체가 이틀에서 꿰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세력 입장에서도 최종 이러한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서영세력들의 집합체인 연합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승전을 하고 전쟁이 마무리되자 열도일본에 진출할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카리브해에 거주하던 열도일본세력과 빅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과 일본사이에 체결된 센프란시스코평화회담을 유심히 볼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게 역사적으로 지극히 불리한 조약들은 이때 소급하여 적용하는 식으로 틀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상기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시한번 정리를 해보자.

 

문제는 이 요의(腰衣)에는 크게 나누어 하나는 로인클로스(loincloth)라는 것과 하나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가 있다.

둘 다 옷이라고 볼 수 없는 것으로 그저 가리개 정도인 속속곳 임을 알 수 있지만 특이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자료에서 말하길 옛날 노예나 열대 지방의 원주민 등이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인클로스(loincloth)로 역시 따져보면 습한 아열대기후에서 나타나는 의복형태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은 이 로인클로스를 입고 겉옷을 걸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기후가 춥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대기후에 아메리카원주민들은 습하고 더운 기후가 그런 옷을 입도록 한 것이 틀림없다.

종교적으로 풀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로인클로스(loincloth)라 하고 이것이 인도(印度)의 베딕시대(Vedic Period)초기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시바(Shiva)의 신자들은 카우피남(Kaupinam)을 입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베딕 즉 베다시대라 함은 인류최초사회생활을 상상하게 하는 시기이다. 당시에 의복이 어느정도 보급되었는가 하는 것은 여러자료에도 알 수 있겠지만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인식할 수 있고 특히 더운 열대지방의 기후라고 하면 긴옷을 입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천왕문(天王門)에서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생령좌(生靈座)에는 로인클로스(loincloth)를 입은 마구니 악귀(惡鬼)가 엎드리거나 쪼그려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여러 블로그에서 생령좌의 아귀라 하고 옛 신라때 왜구들의 출몰이 심했을 때이니 훈도시를 하고 있는 악귀는 왜구(倭寇)라 한 것이다.

아다시피 불국사는 1937년 경북불교협회에서 발행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15년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했다는 절이다.

신라때 출몰하던 왜구들의 극성때문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그런지 수호신 사천왕 발 밑에 왜구가 엎드려 밟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왜구는 일찍이 삼한인들에게 악귀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인도 베다, 베닉시대라 함은 기원전 2000년까지 올라가는데 이때는 원시불교가 존재했을때이니 오늘날 불교와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때 시바(Shiva)신(神) 즉 오늘날 대승불교의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되어 나타나자 이 신(神)의 신자(信者)들이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만약 그러한 전통이 대승불교에 전해 졌다면 사천왕이 밟고 있는 것은 시바를 믿는자 중에 악귀가 있어 밟게 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당시에도 해적들이 설쳐되었다면 분명히 해적을 악귀로 상징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도 한다. 물론 왜구들의 훈도시를 시바의 신자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일게다.

또 한 가지는 오늘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훈도시문화를 BC 3000년경 이집트인들이 몸을 여러 겹 싸서 앞에서 묶거나 띠를 두르는 직물인 쉔티(shenti)를 입었다고 되어 있는 부분과 결부시키려 노력하지만 이것도 자세히 보면 당시 나름대로의 문명제국에서의 페션이었다고 보아야 맞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훈도시문화는 그들이 원천적으로 거주지가 기후적으로 습기가 많고 아열대기후에 맞게 착용한 것이다. 그곳을 카리브해를 포함한 메소(중앙)아메리카라 하는 것이고 멕시코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주지일 것이란 확신이 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여러형태로 만들어져 남아메리카대륙 열대지역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도 예측할 수가 있다.

분명 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 "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 "에서 잉글랜드가 남아메리카대륙 브라질을 점령하면서 당시까지 존재한 무굴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본 블로그에 밝혀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인도가 남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에서 만큼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1500년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1467-1520)이 오늘날 브라질에서 인도를 찾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그곳의 원주민들이 투피니킴 인디언(Tupiniquim Indians)이 착용했다고 하는 의복은 전통적으로 인도에서 논(rice field)에서 레슬링선수와 농부들이 흔히 속옷이나 수영복처럼 사용하였다는 카우피남 (Kaupinam), 카우피나(Kaupina) 또는 랑곳(Langot)이라는 요의 로인클로스(loincloth)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인들이 훈도시라고 하는 로인클로스(loincloth) 또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열대기후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전반적인 편의성에 의한 매우 간편하게 끈으로 연결하여 속속곳, 성기를 가리는 목적의 가리개처럼 만들어 걸쳤다고 해야 맞다. 우리는 여기서 훈도시 자체만을 놓고 미개인의 문화라던가 원시적인 비문명적이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중요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은 과연 지금의 열도에 존재하는 일본인들의 본거지 즉 근원적인 거주지가 명백하게 현재 열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형태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열도는 부분적으로 아열대(亞熱帶)가 될 수는 있어도 열대기후가 아니다.

시간적으로 고대 때 부터라고 해도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을 정도로 일년 내내 매우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지방의 기후대가 분명히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오카야마(Okayama)에서 열리는 훈도시만 걸치고 벌거벗은 일본인들의 광란을 사이다이지 에요 하다카 축제(Saidai-ji Eyo Hadaka Matsuri)라 하며 물로 정화를 받는 행사가 지속되고 있다. 다분히 훈도시문화가 미화된 것이다.

일본이 쇄국상태에서 개혁바람이 몰아친 1868년 명치유신이래 신문명국을 모토로 탈아입구(脫亞入歐)란 명목아래 준서양국, 명예백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 오늘까지의 제어할 수 없는 일본현황이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미개인들이 착용했다고 하는 훈도시문화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서양 노예신분으로 또는 서양무사계급아래 철저한 종속관계에 있었던 농노신분에서 쉽사리 탈피할 수 없었다는 이유가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왜구들의 약탈과 노략질, 강간, 살인등 일본이 우리역사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것이며 때문에 일본인들은 조선사회 귀족이나 사대부(士大夫), 지식자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으며 벌거벗은체 훈도시에 칼만 차고 은혜도 모르는 근본이 없는 종족이라는 소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왜구의 본 근거지가 일본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해양시대를 열었던 서양해양세력들의 역사가 오늘날 일본역사가 된 마당이니 그들이 착각할 만도 하다.

일찍부터 삼한역사주체들이 하나의 체제 속에 끊임없이 반발하는 왜구, 해적들과의 큰 전쟁부터 작은 전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상대하면서 잘 제어하였지만 과하다싶어 때로는 본거지를 점령하고 정벌하거나 토벌하여 그들의 조직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솔직히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이다.

만약 한국이 다시 번영하여 옛 고려나 조선처럼 세계통치국의 위치가 된다면 그들은 또 다시 우리주변을 맴돌며 왜구, 해구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반체제 근성이 많이 누그러뜨려졌다고는 보이지만 그들이 현저하게 궁지에 몰린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반체제 일원으로써 반란세력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들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골머리를 썩여야 할지 모른다.

다시금 말하지만 일본은 분명히 지금의 열도가 본거지의 역사가 아니며 삼한역사에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서양세력들은 왜 한반도 옆 열도에 일본을 앉혀 우릴 지속적으로 압박받게 만들었을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분명 우릴 경계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왜 서양세력들은 일본을 옆에 두게하고 그토록 우릴 경계하는 것일까?

보라, 서양세력들이 현 일본과 전혀 빅딜이 없었다면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같은 전범국이면서도 미국과 연합국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며서 일본왕부터 철저하게 사면을 단행했고 그것도 모자라 거금의 경제원조를 제공하였으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매우 의심이 가는 항목이지만 한반도에 갑자기 불을 붙여 동족간 전쟁하게 만들면서 열도일본인들이 고스란히 받아먹도록 군수기지로 활용하게 하였고 그 덕분에 급속하게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오늘날 세계 7대 경제대국 "G7" 일원이 되게 만들었다.

그것이 일본이 진주만공급으로 급습하여 미국을 2차세계대전에 밀어넣게 한 구실을 만든 댓가일까?

아니면 1905년 가쓰라-태프트협약의 소급조치인가.

미국과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항복했다는 댓가로 독일처럼 동서로 가르지도 않고 털것하나 건들이지 않고 사실유무가 분명치 않는 핵폭격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이렇게 보상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도록 조치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빅딜이 존재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과의 빅딜이었을까?

혹 서양역사 전반적인 틀을 인정하고 협조한다는 빅딜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패전국신세가 된 일본인들은 한반도 한국과 독도영유권을 두고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있어 한다.

그래서도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이란 국명아래 그동안 서양인들이 저질렀던 악행과 악역을 지금의 열도일본에게 전가시키고 유럽인들은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손결이 전혀 없는 우월한 지도국으로 변신하여 빠져 나간 것에 대한 댓가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열도일본인들에게는 그런 조치가 전혀 손해될 것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2차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독일과 다르게 이제 군사를 가지려 평화헌법을 손질하려 한다.

하지만 미국과 연합국은 그것에 대해 묵언으로 지지하는 형태이다.

그들이 그렇듯 부르짖었던 천황제를 그대로 존치하게 만들었고 패망이란 멍에를 쓰게 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열도일본인들에게는 영광이며 굉장한 추억속에 군사프라이드 그 자체로도 만족할 수 있다.

독일과 같은 전범국이면서도 그렇게 차이가 난다.

일본은 세계최고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것이니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준서양국이 되었으며 명예백인이 된 것인냥 착각하고 있다.

다시금 보아도 훈도시는 서양세력들의 노예신분, 농노신분, 무사계급신분, 용병신분에 있었던 그들의 아픈역사를 나타내는 증표이다.

서양해양세력들의 본거지가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카리브해를 포함한 남아메리카대륙라는 것은 일본인과 겹치는 역사이며 기후는 매우 습하며 더운 날씨 아열대기후이다.

생각해보면 일본이란 역사주체가 지금의 열도에 존재한다는 것은 기존역사체계에서 생물과학적으로, 또는 기후과학적으로, 더하여 인종적, 종교적으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생성된 역사 그차제라 해야 맞다.

열도는 일본인들이 2차세계대전 끝으로 서양연합국과의 빅딜에 의한 신일본역사공간일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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