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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글쓴이:한부울
[대한제국 2편 계속]
프런티어가 만든 서양사의 모순
태양신과 세계사
캘리컷과 고려(高麗)
조선(朝鮮)과 인도(印度)의 관계
인도와 브라질(캘리컷과 쿠리치바) 혼입-재스민으로 본 포르투갈
조선사서 기록과 브라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근대사
끝맺음.
머리말
프런티어가 만든 서양사의 모순.
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서양사는 모순 덩어리다.
브라질(巴西國:Brasil,Brazil)을 처음 발견한 것은 스페인 출신의 핀손(Vicente Yanez Pinzon:1462-1514)이었다는 것은 사전에 나타난다.
그는 1499년, 4척의 배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출발하여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1500년 1월 26일에 오늘날의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주(Pernambuco州)에 도착했다고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하지만 어쩌면 바스코 다 가마에 앞서 무한의 도전을 감행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브라질에 주저앉았다는 것은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스페인이라는 곳이 브라질과 가깝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서해안을 통과하면서 표류하여 해류를 따라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유럽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어원 풀이에서도 위치적으로 상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서세들의 탐험대라는 것은 소위 그들이 말하는 프런티어정신에 입각한 것이지만 해적정신이투철한 탐욕자들이라고 해야 맞다.
프런티어라는 것은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신대륙 발견부터 부르짖어 1898년 미서전쟁에서의 루즈벨트 호언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실제로 온전한 남의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는 도적, 날강도 같은 정신이라 할 수밖에 없다.
프런티어란 단어 속에는 궁극적으로 인본주의가 아닌 물질만을 추구하는 온갖 나쁜형태가 숨어 있다는 것은 애초부터 순수한 정의와 도덕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근대사를 한마디로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폼페이(pompeii)를 보게 했다.
그것은 매우 기독교적인 의도라 할 수 있지만 시민들의 타락과 방종에 대한 신의 저주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은 교훈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앞서 왜 폼페이소재가 현재 이탈리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먼저이어야 했다.
서로마역사문화를 유럽대륙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겠는가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는 것은 1592년에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작품들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지게 되면서부터인데 그것에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근사하게 그들 탐험가 혹은 항해사, 개척가등의 온갖 수식어를 다 붙여 그들의 행적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만 그 사실자체를 검증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핀손이 브라질을 발견한 거의 같은 시기인 1500년 4월 22일에는 포르투갈 사람인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1467-1520)이 인도(印度)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지리적 환경조건에 기인한 것일게다.
역사사실에서 ‘우연히’라는 수식어들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거의 픽션이라고 해야 맞다.
어쨌거나 이 두사람이 시도한 브라질발견은 현재 아시아의 인도아대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서술이겠지만 이미 이때 그들은 인도제도(印度諸島)를 발견하고서도 한사코 인도(印度)가 아니라고 하는 부정사실에서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서양인들은 근대사를 만들기 최소한 1922년경부터 이미 기존역사를 면밀하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아메리카대륙에서 기존 문화 역사가 전혀없이 정말로 인디언들만이 존재한 미개지였다면 구태어 이런 식의 구차한 역사기술이 필요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엇인가 감추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인도(印度)지명문제 이었을 것이다.
처음 브라질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먼저 발견했다는 선개척영유권 원칙대로 서로 영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한다.
하지만 솔직히 선개척영유권이란 개념이 무엇인가.
그것이 전통적인 세계역사사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긴지 헷갈리는 이야기다.
기껏해야 15세기말에 움트면서 기존 역사 전체를 무시하고 마치 세계전체가 그들의 역사말고는 없었던 신천지같이 생각하였으니 그 발상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당시 그렇듯 오만하고 자만에 빠지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산업기술의 발달을 생각할 때 월등한 무기를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근대사가 만들어낸 편견이다.
쪼그라진 반도역사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당시에 조선에서의 무기발달상황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미 1377년(우왕 3)에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1325-1395)의 건의로 화통도감(火㷁都監)설치되었고 화약의 제조법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을 강남인 즉 서번들에게 배워 화약제고까지 하였고 공개적으로 화포시험까지 하였다 한 것을 보면 각종 크기별 총포가 지속적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본 블로그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에서 살펴본 것으로 "조선에서 만든 세계최초의 권총"이라 소제목 속에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6월 27일기사에서[원문]然以軍器監所造細銃筒試之, 齎持放射, 竝擧便易。 雖不合於體探人之用, 對敵相戰, 馬上多齎, 各自放射, 甚爲便益。 危急之際, 雖兒童婦女, 可執以放, 故今送細銃筒一百五十、皮翎箭一千、鐵箭一千五百, 隨宜用之。"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細銃筒)으로 시험하니 지니기와 쏘기에 모두 편리하였다. 비록 정탐꾼이 쓰기에 합당하지 못할지라도 적과 서로 마주하여 싸울 적에는 말[馬] 위에서 많이 가지고 각자가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며, 위급할 즈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세총통 1백 50개와 피령전(皮翎箭) 1천 개, 철전(鐵箭) 1천 5백 개를 보내니,마땅한 대로 쓰고..." 에서 이미 세총통(細銃筒) 즉 작은 총,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16세기에 거의 유럽에서 사용되던 피스톨(拳銃:Handgun, Pistol)과 같다고 보아 무기발달이 상당히 진보하였고 서세에 뒤 떨어지지 않았음을 일단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열등반도역사에서 조선에는 활과 화살만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처럼 만든 죄가 없지 않다.
대조선이 세계를 통치했다고 하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본 블로그 글 "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5 글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당시 해양을 주름잡던 서양세력들을 감당하려면 이렇듯 무기가 진보하지 않으면 나라를 그들로부터 보호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임진왜란, 임진지역으로 충분하게 경험하여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부터 급격하게 조선해군력은 강력해 졌을 것이란 추측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문에 서세들이 결코 대조선을 넘 볼 수 있는 무기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월한 것은 무엇일까?
무기가 아니라 근세기에 물질이 숭앙되면서 괴물로 등장한 자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서세와 큰 싸움이 있었던 것은 14세기 말엽에 있었던 임진왜란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전쟁에서 조선의 피해도 심각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을 침입한 일본세력들은 그들의 자취도 찾을 수 없는 처참한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죽 했으면 풍신수길이라고 여겨지는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가 잉글랜드 엘리자베스1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에 시신을 납(lead coffin)으로 만들어진 관에 넣어져 수장했다고 하는 것이니 만큼 그가 죽은 후에도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도일본역사에서도 풍신수길의 묘를 아예 폭파해버렸다고 하는 것들은 기존체제가 할 수 있는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 틀림없고 또한 그들의 역사사실을 숨기려 했던 간교한 짓임을 알 수가 있다.
아무튼 서세의 역사에서는 이런식으로 선개척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포르투갈 왕실은 곧바로 이 곳을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하였으며 파우 브라질('Pau Brasil')이라는 "빨간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해서 붉은 나무의 의미인 “브라질린(brazilin)”이라고 불렀다는 것에서 오늘날 브라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역사처리가 간략하고 간편하지 않는가?
이 붉은 나무가 열도일본에 자생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록을 보고 본 블로그의 글“홍목(紅木), 소목(蘇木)으로 본 유구와 일본, 남만 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50458 ”에서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현재 열도에는 일본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느느 사실을 밝혔던 바가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과거 임진왜란이라고도 하는 임진지역에서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는 외국인들 중에 포르투갈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포르투갈인들이 고려라고 판단되는 해안지역의 중국인과 교섭이 잦아 접촉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당시기록에서 재조번방지 3(再造藩邦志 三)進見關白。透探大明消息。或倭奴假作佛郞機番人。潛入廣東省城。覘伺動靜。“관백(關白)은 대명의 소식을 염탐하며 혹은 왜놈이 불랑기(佛郞機)의 번인(番人)으로 가장하고서 몰래 광동성 성 안에 들어와 동정을 엿보기도 한다”는 것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은 불랑기 즉 포르투갈인과 비슷하게 생겨 변장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대명은 포르투갈인으로 밝혀지더라도 왜구처럼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포르투갈인이나 당시 일본인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참으로 멍청하다는 소릴 우리나라 사람들은 들을 수밖에 없다.
이런 기록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도무지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열도일본인을 일본인이라고 그대로 믿고 확신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것이다.
선개척주의를 따진다면 스페인사람이 브라질을 먼저 발견하였음에도 포르투갈에게 식민지를 빼앗겼다는 것은 선개척주의에 어긋나는 모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포르투갈이 식민지영토권을 주장했다는 것은 브라질에 본래 포르투갈인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원주민개념에서 그렇게 처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브라질은 본래 포르투갈인들이 있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개척주의를 반하는 상황임에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처럼 만든 것은 서세의 역사에서 포르투갈이 꽤나 중요했던 모양이고 본래 포르투갈의 근원지를 숨기고자 하는 것이며 포르투갈이 스페인에게 예속된다는 사실만 이야기 할 뿐 영국 즉 하란국에게 브라질이 점령당한 이야기는 쏙 빼버린다는 것이이상할 뿐이다.
그러나 영국이라고 하는 영길이국은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원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당시 서세들은 영토개념이 없는 해적이었기때문에 거처가 확실할 수가 없다.
백과사전을 보면 브라질 최초의 주민은 BC 11,000년에 베링해(Bering Sea)를 건너서 아시아에서 온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사하라사막을 넘어 아시아로 이동했을 것이란 전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시아(亞細亞)란 명칭이 근세기에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역사사실은 재고되어야 할 문제로서 오히려 인류가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북쪽 사하라사막(Sahara Great Desert)을 건너가기 보단 바다를 건너 브라질 즉 남아메리카대륙으로 도해(渡海)했을 확률이 높고 그럴 가능성은 서아프리카에서 남적도 해류(south equatorial current)만 잘 타면 바로 브라질로 상륙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페인인이나 포르투갈인들이 이런식으로 브라질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렇게 도착한 브라질에서 아마존을 따라 다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하여 베링해를 건너 아시아로 들어갔을 것이란 사실을 본 블로그의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 ”에서 주장하였고 이러한 점에서 인류최초이동역사가 다시 쓰여야 한다고 한 바가 있다.
아시아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넘어 들어갔다는 것은 다분히 동양역사기원지를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고 현재 아시아대륙역사를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겠지만 주 목적은 아메리카대륙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동양역사문화(東洋歷史文化) 발상지고 기원지(起源地)라는 사실은 숨기려 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오리엔탈문화가 박해당할 수밖에 없는 역사실체인 것이다.
서양인들이 현재 유럽대륙을 본거지로 삼은 것 같지만 날고 뛰어보았자 이글에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아메리카대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열등 역사의 한계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실체를 망각한체 주제넘는 우월역사를 쓰겠다고 안달하였으니 그들이 오리엔탈역사문화에 대한 상대적인 역사열등감이 실지로 상당했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서양역사 만들기의 끊임없는 집착이 있었고 마침내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옛 고려마을 캘리컷(Calicut)이란 지명이 서양역사의 대문에 걸려 있는 것은 서양역사의 시발점을 알리는 상징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양세력들의 생성배경은 마치 인도(印度)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세의 힘이라는 것은 요약하면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먼저라고 하지만 결국 하란국이라는 이름안에 이 모든 국명이 들어있다.
상대적으로 그 만큼 인도(印度)를 극복하고자 했을 것이지만 오히려 인도지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가 컸다고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도지명에는 그들이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일만년의 오리엔탈문화와 역사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탕이 된 "하나의 역사"로 이어진'하나의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변 할 수 없는 이치와 근본은 파괴해야 하는 것이고 곧 오리엔탈, 동양역사를 그들이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는 교만에 의한 음모사술을 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의 무모한 이런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역사찾기가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인도(印度:india)란 지명은 오리엔탈(동양:Oriental)과 함께 그들에게 엄청난 역사스트레스로 압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1935-2003)의 1978년 저서《오리엔탈리즘》에서 밝힌 것으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용어는"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사고양식"으로 재정 되어진 것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알만하다는 것이다.
근세기에 발생한 역사사건을 하나하나 파헤치다 보면 인도아대륙을 인도(印度)만들기에 거의가 귀속된다.
마찬가지로 이 캘리컷(Calicut)이란 지명 만들기도 이와같은 연속된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는 것은 서세(西勢)의 합체(合體)라고 볼 수 있는 일본대칭 네덜란드 하란(荷蘭)이 1602년부터 현재까지 동인도제도(東印度諸島:East Indies)를 물고 있으며 끝까지 식민지 타령을 한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인도 유령을 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분명아니다.
특히 미국에서도 이러한 사시들이 주요한 맥마다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 당시의 13개 주 중 미국헌법을 가장 먼저 승인하여 "첫 번째 주(First Stat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델라웨어(Delaware)지역들을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라 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끈적끈적한 것이 아닐 수 없고 또한 루즈벨트대통령의 가문들이 전부 네덜란드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릴 놀라게 하는 것들이다.
소위 네덜란드는 인도를 식민지하고 있는 상징으로 만족하고 그것이 곧 미국이라는 등식이 작용하고 있으니 그들에겐 부족한 것이 없다.
대신 막대한 역사 피해자가 된 세계삼한역사는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일게다.
인도(印度)란 지명은 이렇듯 아시아대륙으로 옮기려는 서세에 끊임없는 작업에 의해 존재자체가 희석되어 별 스럽게 닥아오지만 결국 중앙아메리카를 연결하고 브라질까지 이어지는 남아메리카 전 대륙에 존재했어야 할 지명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아메리카대륙에 인도 유적을 찾기가 싶지 않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까지 걸쳐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고산도시 해발 3,399m의 페루 쿠스코(Cuzco)를 수도로 삼은 잉카제국이 안데스지역 전체를 차지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잉카제국 최후의 도시로 알려진 마추픽추(Machu Picchu)유적 뿐이다.
정말 인도가 남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몰골의 역사를 보는 것이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인류역사가 망실되어 찾을 길 없다는 것은 비통함이 아닐 수 없다.
어쨌던 좋은 역사, 나쁜 역사를 모두 안고 있는 스페인침략자들의 소행으로 만든 것도 이상한 것이지만 곳곳에 유적이 다 파괴되고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은 서세가 책임 질 임에 틀림이 없다.
어쩌면 남아메리카대륙이 인류(人類)시원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지만 이미 세계사를 지배하는 것은 동양역사가 아닌 서양역사인지라 그러한 사실조차 밝히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사실에 무력감만 더 할 뿐이다.
북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은 근세기에 틀림없이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게다.
남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보다 좀 더 진보된 아메리카인디언(America Indians)스타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모습들을 하나의 체제의 실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서양세력들은 동쪽의 의미를 무조건 역사시원으로 보았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들도 그것이 진실의 역사임을 인정한 사실이며 모든 특수한 일급정보를 취급한 그들이 이미 진실의 역사사실을 낱낱이 목격했거나 알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에 아마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들을 해쳐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무차별적으로 인도와 오리엔탈이라는 지명 옮기기에 광분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본래 오리엔탈문명의 터전인 북아메리카대륙은 그들의 본거지로 만들어야 했고 그곳을 해가 뜨는 동쪽이 아닌 해가 지는 서쪽으로 부득이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나름대로의 애환을 읽을 수가 있다.
동아시아에 던져진 동(東)쪽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태양신과 세계사
고대 이집트 신화에 태양신(羅:Ra)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이집트 카이로(Cairo)를 '알 카히라(al-Qahira:the Victorious)승리자의 도시'라 하거나 케이로( كايرو :Kayro) 즉 "세계어머니(the mother of the world)"라고 하였으며 한어사전에서 개라(開羅)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빛의 세상이 열리는 것으로 개성(開城)과 의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카이로를 '1000개의 첨탑(규배루)을 가진 도시(the city of a thousand minarets:叫拜樓, 宣礼塔, 光塔)'라 하여 태양신을 받드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태양신을 받드는 최초의 도시라는 의미를 찾을 수가 있겠다.
여기서도 문제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현재 이집트는 본래의 위치가 아닐 수 있다는 문제이다.
근대사가 아무리 막고 있지만 동로마(東羅馬)가 신라(新羅)이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글쓴이는 평소 포르투갈이 당조(唐朝)에게 패하며 사라진 최후의 백제(百濟)를 생각하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당조(唐朝)는 신라(新羅)이다.
때문에 동로마(東羅馬) 비잔티움제국(Byzantium Empire)을 라마제국(羅馬帝國)이라 한 사실에서 바로 신라(新羅)라고 한 것이다.
라(羅:Ra)는 이집트 고사에 등장하는 태양신이다.
아폴론은 그리스의 태양신이라 하듯이 로마의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숭배는 동방페르시아(Persia)의 태양신앙, 조로아스터교(拜火敎:Zoroastrianism)라든가 고대 이집트의 태양숭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어쨌거나 숨길 수가 없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로마태양신의 탄생일 동지(冬至)를 크리스트교의 탄일인 크리스마스라 한 사실에서 그들의 역사 강박관념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특정종교를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의 역사 열등감을 이야기하고 그것의 문제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벨리스크(Obelisk)는 태양 광선을 숭배하는 상징물로써, 태양신 라(羅:Ra) 혹은 호루스(Horus)에게 바쳐진 구조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집트에 있어야 할 오벨리스크는 보잘 것이 없다.
물론 서양인들이 다 훔쳐가고 남은 것이라 하지만 본래 이집트가 아니라는 의혹이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 동부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168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인가?
태양신은 인류가 경배하던 유일한 신(神)이었기 때문에 워싱턴도 태양의 도시이다.
삼한의 태양신은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 한다.
인도의 태양신은 인드라(Indra)이다.
석제환인(釋提桓因)과 인드라(Indra)는 같은 신의 이름이며 이를 조선말에 상제(上帝)라 하였고 하느님이라 하였으며 이것을 예수회에서 천주라 한 것이 오늘날 특정종교에서 칭하는 하나님이 되었다.
즉 ‘하느님’이나 ‘하나님’이나 모두 ‘태양신’을 나타내는 칭호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엘EL(el) 빛이고, 아랍어 알라(Allah) 역시 빛을 나타내는 신이다.
신라(新羅)는 새로운 태양의 나라이다.
이것을 서양세력들은 라마제국이라 하면서도 동로마제국(Imperium Romanum Orientale)이라 하였으나 갑자기 1557년 네덜란드인 혹은 독일인(German)일 수 있는 역사학자 히에로니무스 울프(Hieronymus Wolf:1516–1580)가 자신의 역사서에서 ‘비잔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사라진 용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독일인은 삼한역사에 반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유대계 독일인(네덜란드:dutch)들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서양인들은 동로마라 한 것이 그렇게도 걸려 비잔티움이라 한 것은 서양인의 특이한 동쪽질시개념이 만든 것으로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 태양(빛)의 근원지며 태양신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서세가 유대자본을 동원해 만든 역사일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반했을 것이 틀림없다.
반도역사에서는 신라(新羅)를 고려(高麗)가 합병했다 하였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도 신라(新羅)와 고려(高麗)가 아메리카대륙에 동시 나타나는 것을 유의해야 했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로마(東羅馬)인 비잔티움제국(Byzantium Empire)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투르크(高麗)에게 합병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러 가지 억측이 있을 수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신라마(新羅馬)라 하였고 재성리(在城里)라 하였으며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이 살던 곳으로 토프카프 궁전(Topkapi Palace)의 높은 문, “게이트(پایتخت:Pâyitaht)”라 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다.
또한 전통 슬라브족(Slaves)들은 이를"짜리그라드(Tsargrad)" 즉 "황제의 도시(皇帝之城)"라 하였고 바이킹(维京人)은 노르웨이고어(Miklagarð)로 "위대한 성(偉大之城)"이라 하였으니 빛의 성이며 신라(新羅)는 바이킹족 노르드인(Norsemen)뿐만 아니라 가톨릭을 믿는 서슬라브족인 독일, 동방가톨릭교 정교회를 믿는 남슬라브족 그리스, 그리고 이슬람교 신자들까지, 또한 동슬라브족인 중앙아시아의 제 민족까지 그 영향권 안에 넣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당시 인구 100만 명의 거대한 도시라 하였으니 신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있다.
물론 열도일본인들의 네덜란드 풍의 회화를 보면 당시 당선(唐船), 한선(韓船)이라 하여 그들 섬에 도착하는 중국배로 대우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동경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는 그림에는 청도기(淸道旗)를 들고 행진하는 조선군(朝鮮軍)을 당인(唐人)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조선군은 고려군이라고 해야 맞다.
즉 신라(新羅)라는 것은 새롭게 건립된 태양신의 나라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이집트란 국명이 존재하려면 신라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의 글“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마(新羅馬)는 신라의 수도 동경(東京)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이며 이스탄불이라는 사실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으나 현재 그리스어로 도시의 의미를 가진 이스탄불"εις την Πόλιν[istimbolin]" 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16세기 예수회의 세계삼한역사를 망치기 수단도 꽤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에 의해 제기된 새로운 역사사실에서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는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이에 의해 꾸며졌다는 주장에서 볼 때 로마 가톨릭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1491-1556)가 1534년 8월 15일에 창설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활동은 기존역사와 완전히 배치되는 거짓의 역사를 만들려고 심하게 장난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서양사 대문에 걸려 있는 지명 캘리컷(Calicut)을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역시 예수회 소속이다.
생각해보면 예수회 소속을 미화시키는 것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유럽사(Europe History)라고 하는 로마역사를 보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과 이렇듯 밀접하게 엮여 있는 것이라면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0 or 1469-1524)가 1498년 처음으로 밟았다는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의 항구 캘리컷(Calicut) 역시 아메리카가 인도란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아시아 땅 멀리로 이관시켜 보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충부하게 인지할 수 있다.
캘리컷과 고려(高麗)
캘리컷(Calicut)은 현재 인도아대륙 남서부 케랄라주(州), 말라바르해안(Malabar Coast)에 있는 도시로 인도어로는 코지코데(Kozhikode)라고 하고 영어로 캘리컷(Calicut)이라 하며 ‘中国古籍中称为古里’ 중국의 고대명칭은 고리(古里)라고 한다.
고리의 리(里)는 도시의 이름이라는 것을 앞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재성리(在城里)라고 한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고리(古里)라고 하였으니 우리역사와 관계될 성싶은 것은 당연하다.
한자(漢字)가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대명칭이라 하였고 실제로 이 고리(古里)는 고리(cori)로 읽혀지고, 코레(core) 음(音)이 그대로 전달된다.
코레(core)가 무엇인가?
핵(核), 중심(中心)이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태양(太陽)의 근본이 될 수 있는 단어이다.
고려(高麗)의 고리(高離)와도 음이 다르지 않고 Gori, Gory, Cori, Cory까지 고리라 함은 태양의 환(鐶:ring)과도 연결되며 고원, 관산, 고구, 고산, 고토, 구리, 국토, 모향, 본고장, 시골, 요람, 전리, 향관, 향리, 향촌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국어사전에서 참고 할 수가 있다.
지구상에 나타나는 모든 역사의 근원이 바로 코리아“corea”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근세기에 그들이 기존 역사를 접하면서 고려(高麗)란 수많은 변형된 명칭 앞에서 아마도 입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나의 나라이름에서 수많은 명칭이 있다는 것은 세계역사에서 수많은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수많은 종족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기에 “CORE”란 단어를 희석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을 것이 뻔하고 그들이 최종 만든 것이 바로 현재 어쩐지 왜소하게 보이는“Korea”란 명칭을 한반도에 끼워 넣기 한 것이 그들의 노력한 결과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더라도 서양인에게는 "CORE"가 고려(高麗)라는 삼한전통적인 명칭이라는 사실을 싶사리 부정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Latin cor (“heart”); or from Old French cors (“body”), from Latin corpus (“body”). See also heart, corpse.
현재 영영사전에 나타나는“CORE”의 어원에서 보면 라틴어로 cor(“heart, body”)'마음'이고 '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람의 몸', '인체'를 말하며 결국 '주검'까지 상징하는 것으로 '영혼'을 포함한 인류를 포괄적으로 말하는'인본주의(人本主義)'를 나타내는 훌륭한 단어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서양세력들이 집요하게 삼한역사 파괴를 시도한 문제의 핵심이다.
가만히 두고 보아도 이렇듯 심오한 뜻이 그 속에 농축되어 있기에 서양인들이 시기나 질시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쯤하고 다시 돌아가 근세기에 들어나는 고려의 땅, 캘리컷(古里:Calicut)이란 지명의 역사를 보면 당시 유럽인들의 늘어나는 수요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던 향료(香料:perfume)가 베네치아 이집트상인 이슬람인(Islamic)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을 때 이 상권을 빼앗기 위해 기존 이슬람 상인에게 공급되는 향료생산지와 다른 생산지를 찾아 점유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고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블로그의 역사 찾기 과정에서 연구한 바로는 생물학적 근원에서 굳이 20,000km 넘는 머나먼 거리의 항로를 항해하여 현 인도아대륙 캘리컷에 도착할 것이 아니라 유럽대륙과 가까운 곳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에도 무한정의 질 좋은 향료가 생산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굳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을 담보하여야 하는 절대적인 위험스러운 항로에서 알 수 없는 변화무쌍한 기후, 날씨 소용돌이가 곳곳에 넘쳐나는 바다환경에 따라 길어질 수밖에 없는 힘든 항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물주가 따로 있다고 하겠지만 운항으로 인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비용부담을 안고 동인도제도(東印度諸島)란 이름 붙여진 곳을 찾아, 더군다나 암초가 많은 말라카(Malacca)해협을 기어코 통과하여 동인도제도에 도착해야 했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설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원칙은 물론이고 특유의 합리적, 타산적 판단을 정확하게 한다는 서양인들의 섭리에도 반하는 것이 아닐 수 없어 이치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타고 간 배가 바다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함선이었던 것도 아니다.
소형 갤리온(Galleon)의 범선(帆船)이라고 하였지만 기껏해야 200톤 미만의 조각배 같은 것이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끌고 간 선대를 살펴보면 기함 산 가브리엘 호(São Gabriel:length 27m, width 8.5m)178톤, 산 라파엘 호(São Rafael:Length:25.7m, Beam:8.5m,Draft:2.3m)100톤, 팔리오 호(Bérrio)100톤, 그리고 식량 운반선 산 미구엘(São Miguel:110톤 또는 200톤)등 모두 4척의 배와 선원 170원을 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기함이라고 해봤자 200톤이 안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엽편주(一葉片舟)같은 범선으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거리가 20,000km가 넘는 인도아대륙 캘리컷에 도착했다고 하였으니 이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서질 않는다.
우선 이러나 사실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이기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喜望峯:Cape of Good Hope)을 휘 도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것인가?
특히 스페인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서(西)아프리카 해안 서안(西岸)을 따라 항해 한다 하더라도 기니 만(Gulf of Guinea)연안에서 발생하는 해류와 폭풍의 곶 위치에서 발생하는 해류는 엄청난 위험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이 항로를 잡지 못하고 브라질에 먼저 상륙을 한다.
난류인 기니해류(guinea current)가 흘러 수온이 낮은 한류(寒流) 벵겔라 해류(Benguela Current)와 만나는 교류수역에는 뚜렷한 성질이 다른 두 해류의 접경인 조경(潮境)을 형성하여 이때에 아프리카 남부의 서안에 짙은 안개나 이상강수(異常降水)가 나타나고 갑자기 일어나는 해무(海霧)현상과 아울러 강풍이 불고 소용돌이와 폭풍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사하라 사막에서 기니만(灣)연안으로 부는 열사풍 하마탄(Harmattan)에 의한 폭풍도 무시 할 수 없는 방해꾼이다.
또한 이 기니만(Gulf of Guinea)을 무사히 지났다고 하여도 이어 앞서 언급한 한류(寒流) 벵겔라해류(benguela current)과 난류(暖流) 아굴라스해류(agulhas current)가 만나는 교류수역에서 기니해류보다 더 심한 해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일기의 악조건 맞물려 강풍이 불고 무서운 소용돌이와 거침없는 어마어마한 파도(10~20m)가 높게 이는 것은 물론이며 시간당 풍속이 50~60km 빠르게 몰아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때 200톤 미만의 조각배 같은 소형 갤리온(Galleon)으로 해쳐 나갈 수가 있었다는 사실자체가 참으로 신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능하다면 가능했다는 것인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란 머나먼 험한 항해 길에서 벗어나 비로소 리스본에 귀국하였을 때는 그의 기록에 170면의 선원 중 55명만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도 힘든 항해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지만 객관적인 판단에서 오히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고 비록 55명이라도 귀환 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高麗)는 그들에게 그만큼 극복의 대상이었을 것이니 그런들 참아야 했다면 어쩔 수가 없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참으로 그들의 알 수 없는 영토개념이다.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우리역사님’이 그의 글에서 서양인 즉 유럽인들은 민족성이 결여된 종족이라고 강하게 지적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유럽인들은 정통교의(精通敎義) 즉 이름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Catholic)이란 신앙을 바탕으로 국가개념보다는 종교적인 일치점을 찾고 있을 뿐 오스트리아 왕이 스페인을 다스려도 스페인 사람들은 환영하고 오히려 자신이 스페인 사람이나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유럽인들의 민족주의를 지적한 것이니 만큼 이러한 사실들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공감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듯 위험하게 항해하여 도착하고 개척을 하였음에도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영토였다가 그 후 영국, 프랑스, 덴마크 등의 영토가 되었다고 하는 것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투쟁했다거나 항거했다는 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는 것은 지금 유럽대륙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국명과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고 개념인 것이다.
그들은 영토를 차지하여 소유하던지 말던지 결과에 대해 안중에 없는데 유독 동양인들은 영토문제에서 항거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심히 궁금하다.
즉 서세들 간에 누가 영토의 주인이 되던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초월했다고 볼 수 없는 영토의 신성함이다.
그들의 역사가 프런티어정신을 부르짖고 개척사 운운하지만 국가나 민족이 가진 독특한 애착심 또는 애국애족심이 없다는 것은 곧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물질욕에 의한 이문에만 관심이 있었다니 그곳에 순수한 역사가 들어 갈 공간이 없다.
근세기 특히 19세기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이 영토를 취하는 것에서 보면 거의가 그냥 넘겨주고 넘겨받는 식의 할양(割讓)방법을 취하였으며 거대한 유대자본을 가진 화이트(white)들은 매도에 의한 매입이라는 방식을 취하였을 뿐 영토의 신성함이 함께 하는 피와 살이 뒤범벅이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영토쟁취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는 것을 특징지을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그들도 그들의 땅이 아니었으니 그냥 넘겨 주어도 손해될 것이 없다는 식이다.
바로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라 하지만 분명치 않는 브리티시가 그렇다.
그들이 주요사건마다 필히 즐겨 사용한 것은 무슨 놈의 조약이 그렇게 많았었는지 툭하면 조약으로 매듭을 짓고 조약이라고 긁적인 문서 몇 조각으로 영토역사를 대체하였고 사건을 정리한다는 이러한 방식에 의해 서세들끼리 마음대로 이리저리 옮겼다 한 사실을 알 수가 있어 역사사실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적 객관성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존역사와는 담을 쌓았고 오직 프런티어정신에 입각한 빼앗기에 능수능란한 해적신분에 맞게 기존 것을 빼앗는 것에만 몰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니 근대사가 이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도 기존 역사질서를 지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러한 가상의 논리가 아니라면 그들의 역사가 끼일 공간이 없었다고 해야 맞다.
항료(香料:perfume)를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의 선원들이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질렀다는 말이 “그리스도와 향신료를 위해(christos e espiciarias!)”라고 하였다는 것인데 그들의 신이 도와주서 고맙고 그저 물질에 의해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귀한 향신료를 얻었다는 기쁨을 표현하였다는 말인데 상당한 픽션같은 표현이다.
고생끝에 결과를 얻었으니 참으로 벅찬 감격이 있을 법한데 결코 포르투갈을 위한 다든지 아니면 국왕을 위한 다든지의 구호는 없고 물질성취에 관심이 있었다는 원초적인 인간욕망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국가나 민족이 없었는가?
그들에게 역사가 없었는가?
개념이 제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 같으면 “대한민국 만세!”라 하였을 것인데 말이다.
물론 부(富)가 그들의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 기술이 아닌가?
하기야 해적신분에서 배가 고픈데 국가와 민족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들에겐 처음부터 역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때문에 잘 짜여진 각본에 의거한 이야기겠지만 바스코 다 가마 역시 해적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들의 항해가 곧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조선(朝鮮)과 인도(印度)의 관계
포르투갈인(佛朗机:Portuguese)들은 인도 캘리컷을 처음 개척하고 당연하게 1511년 이곳에 요새화된 무역소를 세웠으나 무굴제국이 성립되면서 1525년에 이곳을 버리고 떠나버리는데 이것에서 무굴제국과는 포르투갈과 엮이는 역사사실이 별로 없다.
무굴제국은 삼한제국이다.
포르투갈이 옛 고려땅에 도착했겠지만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역사주체에게 쫓겨 달아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그곳의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이슬람 왕조 무굴제국(蒙古:Mughal Empire:1526-1857)이라는 것이다.
티무르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바부르(Zahir-ud-din Muhammad Babur:1483-1530,재위:1526-1530)가 1526년 로디왕조(Lodi dynasty:1451-1526)를 점령하고 무굴제국을 세운 것과 포르투갈이 인도 남부를 지배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본래 대조선이라 할 수 있는 티무르(Timur)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던 것처럼 각 정권이 나뉘어 통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쿠라산헤라트(Khurasan.Herat.Fars.Iraq-e-Ajam), 사마르칸트(Samarkand), 부하라(Bukhara), 히사르(Hissar), 파르가나(Farghana), 발흐(Balkh), 카불(Kabul)정권이 그것이다.
티무르왕조(Timur:1370-1507,멸망1523)의 말미에 집권한 후세인 바이카라(Husayn Mirza Bayqara)는 티무르의 직계후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후세인 바이카라의 소생인 3명의 아들 모두가 반하거나 모반하거나 반란을 일으켜 결국 모든 정권들이 흩어져 버렸으며 장자 바디 알자만(Badi' al-Zaman Mirza)이 아버지 후세인이 있는 헤라트를 공격하여 폐위시키며 결국 자신도 우즈베크족에 의해 정권에서 쫓겨나 결국 떠돌이 신세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아버지를 배반하는 반정에 의해 티무르제국이 멸망하는 사단이 일어남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대조선 역사에서 일대 위기를 막게 되는 집안싸움이 분명하다.
이 사건은 음력1506년 9월 2일에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일치하는 것으로 마치 티무르왕조에서 마지막 왕이었던 바디 알자만이 아버지를 폐위하는 것은 반(反)이고 이것을 전부 무굴제국을 정(正)으로 하여 합(合)을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정(反正)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지만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1770-1831)의 정반합(正反合)이론에 따른 것이다.
티무르가 망했다면 대조선(大朝鮮)도 망해야 하지만 불사조같이 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오히려 더 강력한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은 반도역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다.
반도역사에서 이야기 하는 중종반정은 조선성종(成宗,1457-1495,재위:1469-1495)계비 제헌왕후 함안 윤씨(尹氏)소생인 첫째아들 연산군의 실정과 폭정으로 인해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걱정하는 가신들의 반란으로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된다는 사건인데 진성대군은 성종 둘째계비 정현왕후 파평 윤씨(尹氏)소생으로 성종의 차남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티무르제국에서의 사단은 선대부왕을 폐하고 아들이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에서 반을 느낄 수 있고 무굴제국을 건립하는 바부르에 의해 정(正)이 만들어지면서 합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무굴제국 역시 헤라트의 '후세인 바이카라'의 후원으로 카불(Kabul)정권을 정복한 바부르(Zahir-ud-din Muhammad Babur)가 세우는 것이며 연대적으로 차이가 조금 있으나 동양역사와 서양역사를 따로 만들면서 간격을 둔 것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거의 같다할 수 있어 반도역사가 말하는 중종반정과 이어진다고도 할 수가 있다.
그 이후 바부르(Babur)의 장자 후마윤(Humayun,1508-1556,재위:1530-1540,1555-1556)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북인도(北印度)를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부르와 합한 중종(中宗,1488-1544,재위:1506-1544)계보 년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조선은 북인도를 이때까지 점령하고 지배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결국 반도역사에서는 이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연산군이 폐위되었으며 진성대군 이역(李懌)이 옹립된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만 중종(中宗,1488-1544,재위:1506-1544)은 바부르와 후마윤의 연대를 합한 것과 같아 조선(朝鮮)은 무굴제국(Mughul帝國)이라는 이름으로 인도(印度)를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결국 포르투갈인(佛狼機/佛郞機)들은 1525년에 조선 무굴제국에게 피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계속 인도에 머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1530년에 돈 주앙 3세(João III:1502-1557,재위:1521-1557)가 브라질을 식민지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맞물려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굳이 생각한다면 자치권을 생각할 수 있다.
인도와 브라질(캘리컷과 쿠리치바) 혼입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정리해야 한다.
먼저 포르투갈이 과연 나라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Others have hypothesized that the word Cale came from the Latin word for 'warm' (Portus Cale thus meaning 'warm port').
본래 포르투갈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 포르투스 카레“Portus Cale”는 라틴어로 온화한항구(溫暖的港口)를 말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일단 국가(國家)명칭이 아니라 지명일 뿐이다.
웜(warm)을 사전에 보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우리말의 <더운>의 영역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하였으니 덥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한반도 처럼 사시사철 나누어지는 곳에서 웜이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어원에서 포르투갈의 역사성과 본래 따뜻한 온화한 곳이라는 곳을 추측할 수 있는데 열대몬순기후(Tropical Monsoonal)나 온난습윤기후(Humid Subtropical)기후를 생각해볼 수가 있다.
그것은 굳이 캘리컷을 찾고 있는 것에서 같은 기후 환경이 아니겠는가 하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지만 서양인들에게 국가개념이나 민족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국가명을 가지고 있을 수 없음에도 근대사는 거창하게 대항해시대라 하여 마치 국가별로 온대양을 그들이 난리법석을 피운 것처럼 만들면서 생긴 오해이고 이로 인한 지극히 과장된 픽션(fiction)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늘 상 말하는 것이지만 음지에서 활동하던 해적이나 왜구일뿐이다.
그들이 조그마한 조각배로 어딜 갈 수 있었겠는가?
너무 부풀려 놓았으니 그들도 이미 역사가 된 마당에 수습하기가 싶지 않다.
이 캘리컷과 고아등 포르투갈이 벗어난 이후 90년이 흐른 1615년에 영국탐험대가 이곳을 다시 방문하고 1664년에 영국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란 무역소가 비로소 건설되었다 하였으며 뒤이어 1698년에 프랑크인(Franks)들이 들어 닥쳤으며 1725년에는 노르만족(Normans)의 북게르만(North Germanic)일파인 데인인(Danes)출신 덴마크인(丹麥:Denmark)들이 상륙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곳은 인도(印度)가 되어야 하는 아시아(亞細亞)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포르투갈이 식민지 한 브라질에는 영국의 발이 닺지 않았겠는가?
영국은 이 브라질 만큼은 포르투갈이 지배한 곳이니 피해야 한다는 무슨 암묵적인 약속이라고 받았다는 것인가?
다 같은 해적일뿐 그들에게 이런 따위에 약속이나 양보심을 기대하기가 힘든다고 보았을 때 분명 영국이 가만이 있었을 리가 없다.
아시아의 인도아대륙이라면 거리상 싶게 결단할 수 없었겠지만 브라질이라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남아메리카대륙에 설립되었을 확률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인도가 남아메리카대륙이라면 이런 설정이 가능한 것이다.
아세아는 아(亞)와 아(亞)사이에 있는 영토를 말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곳은 고리(高離), 고리(古里)라는 지명을 쓸 수 있는 삼한(三韓)세력이 지배한 땅임을 정확히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상륙하고 그것을 역사에 인용하여 상징성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당도한 곳이 현재 인도아대륙 캘리컷이라 했던 코지코데(Kozhikode)이라 했지만 리스본(Lisbon)에서 가까운 브라질의 쿠리치바(古里提巴:Curitiba)가 발견된다.
캘리컷 처럼 한어자료에는 고리(古里)가 들어가 있다.
리스본과의 거리는 불과 8500km밖에 되지 않는 거리란 점에서 오히려 캘리컷 보다 인도고리(印度高里)의 지명신뢰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 정도의 거리이고 위치라면 1498년 5월 18일 바스코 다 가마가 얼마든지 200톤 미만의 소형 갤리온이라 할지라도 이끌고 도착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캘리컷과 쿠리치바 두 곳 중 어는곳에 바스코 다 가마가 갔을까?
남회귀선 바로 아래 남위25도, 서경50도에 있는 쿠리치바(古里提巴:Curitiba)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동경75도 45부, 북위11도15부에 위치한 코지코데(Kozhikode,古里)일까?
어느 곳이든 그곳을 캘리컷(Calicut)이라는 지명이 붙어야 했던 것이다.
근대사에서 만난 두 위치의 도시는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위도 약 36도 차이와, 경도 125도 정도의 차이를 두고 근세사의 모순함께 공교롭게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재스민으로 본 포르투갈
인도의 캘리컷(Calicut) 혹은 코지코데(Kozhikode)라 하는 곳은 인도(印度:india)서남쪽, 데칸고원(Deccan Plateau)남쪽에서 말라바르해(Malabar Coast)기슭까지 걸쳐 있는 카르나타카주(Karnataka州:Mysore)에 속하는 도시로 18세기에는 재스민(茉莉:Mali)산업이 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 블로그 글 "홍말리(紅茉莉:Bouvardia ternifolia)로 본 민(閩)땅 http://blog.daum.net/han0114/17050667 "에서 임화필기 벽려신지(薜荔新志)의 기록에 ‘민(閩)땅에는 홍말리(紅茉莉)가 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이것을 살펴보니 분포지가 중앙아메리카(Mesoamerica)와 남아메리카대륙을 강하게 표식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오히려 인도 캘리컷이 있는 남부에는 이 재스민이 표식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재스민(jasmine)은 페르시아어로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인 야스민(yasmin)을 유래로 한다하였고 이 식물은 200 여 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舊,old)세계의 열대와 온대지역에 분포한다고 하였으며 또 백과사전에 보면 속명의 야스미늄‘Jasminum’은 그리스어‘jasme’로 ‘향유(香油)’를 함유한 것이 많아 붙여진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재스민을 말리(茉莉)라 한다.
말리(茉莉)라 하는 것도 법문(梵文) 말리카(Mallika)향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종명(種名)삼박‘sambac’ 역시 향기를 뜻하는 범어(梵語) 참파카(champaka)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것으로서 모두 흰색 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에서 놀라운 것이 발견되는데 포르투갈 재스민 학명"Jasminum azoricum L." 가 Jasminum fluminense vell, 1829 로 이관되면서 브라질 재스민(Brazilian Jasmine)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Jasminum azoricum, commonly known as lemon-scented jasmine, is an evergreen twining vine native to the Portuguese island Madeira.
위 포르투갈을 원산지로 하는 학명"Jasminum azoricum" 는 포르투갈 마데이라제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 자료설명이다.
위 DNA 를 분석으로 하는 Discover Life 의 분포지도를 살펴보아도 특이한 것은 인도아대륙에는 이 재스민의 표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재스민의 한어명 말리(茉莉)라 하는 것도 법문(梵文) 말리카(Mallika)향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여 향료생산지"말레카" 역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대륙의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재스민은 아시아 인도아대륙이 아니라 브라질에서 생산되던 것이기에 캘리컷을 찾으려면 브라질에서 찾아야 함도 알 수가 있다.
인도아대륙 남부 카르나타카주(Karnataka)의 마이소르 왕국Kingdom of Mysore:1399-1947)통치자이면서 군사령관이었던 하이데르 알리(Hyder Ali,재위:1761-1782)가 1765년 캘리컷을 점령하여 도시의 모든 유물을 파괴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이것은 근대사에서 역사 감추기를 위해 1.2차대전을 통해 지배하던 영국정치꾼들이 벌렸던 꾸미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마이소르왕국의 사령관 하이데르 알리가 이런 몹쓸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꾸밀 수 있었던 세력이 바로 영국이고 유럽인이기 때문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대하여》...영국이 주축이 되어 유럽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의 섬 크레타에 모여들어 유적 조사를 시작하면서 크레타(Crete)섬이 터어키 영토에서 그리이스 영토로 넘어간 때가 1913년이며, 영국인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십여년간 이집트 왕릉의 계곡에서 발굴조사를 하다가 투탄카멘(Tutankhamon)의 무덤을 발견하였을 때가 1922년이다....프랑스인들은 1836년에는 이집트의 길이 22m 되는 길다란 단일거석인 오벨리시크(Obelisk, 긴 첨탑)를 배로 실어 날라 파리 콩코드 광장에 세워 놓았으며, 이에 질세라, 1878년 영국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오벨리스크를 배로 실어 날라 테임즈 강변에 세워 놓으면서, 점차유럽인들의 문화재 약탈이 늘어나 나중에는 해적 이상으로 그 한도가 끝이 없었다....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투탄카멘의 무덤 발굴은 발굴된 황금유물보다 이를 발굴하던 발굴관계자들이 하나씩 십 여 년에 걸쳐 모조리 의문사를 당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더욱 유명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영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럽 신문기자들의 글 솜씨 탓도 있었지만, 오히려 비밀 첩보기관의 개입일 가능성이 더 크다....이렇게 이집트와 크레테에서 발굴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의문사하거나 떼거지로 몰살당하고 난 후, 크레타와 이집트 역사는 갑자기 영국 학자들에 의하여 2000년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유럽에서는 이 지역을 인류 문명의 기원지로 여기게 되었다. ....유럽의 고대 역사는 아시아와는 별도로 크레타와 이집트에서 비롯하였다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총칼을 거머쥔 힘있는 자가 말하면 그대로 인정되는 기상천외한 추정연대와 방사성탄소 절대연대에 있다.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4000년대 즈음으로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초기 이집트 문화는 기껏 올려 잡아도 중국 전국시대의 오월(吳越)문화인 기원전 1000년대에서 기원전 500년대 안팎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일부는 기원후까지 내려갈 수 있다.[2003-06-22 발표]
위는 변광현 교수님의 글《상고시대(上古時代)에 대하여》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총칼을 거머쥔 힘있는 자가 말하면 그대로 인정되는 기상천외한 추정연대와 방사성탄소 절대연대에 따라 이집트역사가 바뀌고 유럽역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하이데르 알리(Hyder Ali)가 유물파괴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한반도 삼한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전쟁이나 난리 등 화재소실로 사라지게 한 것처럼 역사진행 행태와 판박이처럼 비슷한 수법임을 알게 하는데 이것 역시 서세의 수법이고 일제는 서세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위 글을 보더라도 근대사는 심각한 역사의 모순이 얼마나 잘못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임을 확실하게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인도아대륙으로 근세기에 옮겨진 역사도 그러했겠지만 본래의 역사도 이와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근대사가 절대적인 믿음 주지 못하는 것도 원인을 따져보면 이런 숨기기나 없애기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역사이치에서 불편함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솔직히 근대사가 이에 전혀 꿀릴 것이 없으면 이런 몹쓸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서세, 유럽인들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마치 전리품처럼 마음대로 옮기고 그것을 광장에 전시한다는 것이 바른 역사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만들어진 물증을 토대로 한 꾸민 역사를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근세기에 이러한 물증의 대부분은 모두 해적신분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부도덕한 무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취약한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근대사의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든다면 바로 해적들이 남긴 해상일지, 분명하지도 않는 조각난 지도, 삽화등이 역사가 된 사실은 비일비재하다.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하멜표류기이다.
그들의 끝없는 물질탐욕에 의한 항해일 것이 분명함에도 탐험에서 남긴 기록이라 하여 그것을 근대사에 인용한다는 것은 도둑말을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욕을 탐하는 그들에게 정의나 바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절대적인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에 역사가 결부된다면 남아 날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늘의 이치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이미 그들이 장악하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역사가 미화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화, 합리화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으며 그것들을 영원이 뒤집을 수 없도록 다시 이론화시켜 역사로 고착화를 시키는 것에 비록 반 할 지라도 어떻게 뒤집을 수가 있는가?
때문에 글쓴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쓸데없는 헛짓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손 놓고 그냥 지켜만 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현재 인도아대륙의 캘리컷이라고 하는 코지코드의 항구는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거의 이용할 수 없는 곳이라 한다.
다른 계절에도 선박들을 5㎞ 떨어진 앞바다에 정박시켜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항구로서의 조건으로서 부적합한 곳임을 알 수 있다.
해적들은 다 알다시피 개방된 넓은 지역에서 들어나게 활동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야 하고 급습해야 하기에 공격할 대상이 찾을 수없는 자신들만의 공간을 찾아 은밀하게 은폐할 수 있는 곳에서 배를 정박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때문이다.
현재 인도아대륙의 서해안 말라바르해안(Malabar Coast)에 있는 캘리컷은 앞에서 언급한 항구로서의 불편함도 물론이지만 중요한 것은 해안선을 따라 서(西)고츠산맥이 육박해 있기 때문에 좁고 길며 단조롭다는 지형적인 특징이 있는 곳이어서 해적 정크선(junks)들이 숨을 수 있는 작은 만(灣)을 찾기가 힘들다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런 지형조건은 해적들이 찾지 않는다.
해적선이 대낮에 훤히 보이는 곳에서 출현할 때 육지에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두고만 보았겠는가?
대낮지 아니라도 그렇다.
달 빛이나 바다의 음영에 따라 훤히 보이는 곳에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는가.
코리아서해안에 표류를 핑계삼아 이양선을 가장한 해적선이 나쁜 의도성을 가지고 들어온적이 많다.
그들이 본래 은폐할 지형이나 숨을 곳을 찾는 것은 그들의 정체가 쉽사리 노출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위험 감지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급습하여 빼앗고 달아나는 것이 그들의 주요 작전행동지침이다.
또한 코지코드의 기후는 열대몬순기후(Tropical Monsoonal)로 3월과 5월에는 높은 온도를 기록하며 매우 습한 열대기후를 가지고 있고 우기는 6월~9월이며 연 평균 강우량이 3,266mm 로 3월에 39.4℃ 이고 최저는 12월에 14℃ 정도가 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강우량이 1,100~1,500mm 이니 알만하지 않는가.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캘리컷(Calicut)도착한 것은 1498년 5월 18일이니 시기적으로 높은 기온에 우기를 맞이할 때이며 계절풍을 맞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시기임을 알 수가 있다.
생각해보라, 현재 인도아대륙의 캘리컷이라하는 코지코드의 항구는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거의 이용할 수 없는 곳이며 다른 계절에도 선박들을 5㎞ 떨어진 앞바다에 정박시켜야만 했다는 사실에서 불과 200톤의 갤리온(Galleon)의 작은 범선(帆船)으로 이러한 환경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고 볼 수가 있는 지를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바스코 다 가마가 만약 브라질에 왔다면 여러가지 문제가 해소된다.
재스민의 산업이 활발했다는 것이 일단 증명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된 20,000km 의 먼 거리로부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먼저 해적 정크선 같은 것들을 은폐하거나 정박시킬 수 있는 아담한 만 같이 것들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브라질의 파라나과(paranagua)항은 지형적으로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쿠리치바(Curitiba)는 브라질 남부 파라나(Parana)주의 주도로, 리우데자네이루(里約:1月嘅河,Rio de Janeiro)에서 800㎞ 떨어진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는 도시이며 동쪽으로 약 80km 지점에 외항 파라나과(paranagua)가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 항은 쿠리치바의 동쪽 주요항구로서 커피수출항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후는 온난습윤기후(Humid Subtropical)로 몬순, 즉 계절풍의 영향으로 여름은 고온 다우(高溫多雨)하며 겨울은 한랭 건조(寒冷乾燥)한 기후로서, 매우 찌는 듯한 더운 여름과 비교적 온화한 겨울날씨가 상존하며 인도아대륙 캘리컷처럼 비가 많은 시기인 여름인 1월부터 3월에는 빈번하게 35도 이상을 나타내면서 가끔 40도 기록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한겨울인 7월에는 최고기온이 21℃에서 22℃, 최저 기온이 13℃ 정도 된다는 것을 보면 인도 코지코드와 기후차이가 거의 없는 곳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도착한 1498년 5월 18일은 이곳에서는 거의 온화한 날씨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열대몬순기후는 적도 근처의 지역인 것에 반해, 온난습윤기후는 남북 위도상 약 30˚-40˚정도에 위치한다는 것이 차이가 있으며 파라나과(paranagua)항구나 쿠리치바(古里提巴:Curitiba)기후는 동아시아대륙 양자강 이남의 기후와 열도 일본날씨와 비슷하고 북아메리카대륙 텍사스주(Texas)를 포함한 남부기후와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도시는 1940년대와 1950년대부터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알려져 있고 지금은 1968년부터 건설된 자연생태도시로도 유명하다.
도시의 역사를 보면 1630년경에 금광(gold mine:金山)이 많아 주위에서 이주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654년 처음 금(金)채굴지로서 건설되었으며 이렇게 서서히 촌락을 형성해가자 1693년 3월 29일에 마을로서 인정되었는데 나뭇가지 모양이 촛대장식모양으로 캔들라브라(Candelabra)라고 하는 파서송(巴西松:Araucaria angustifolia)의 광대한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곳을 포르투갈어로 ‘노사 세노라 데 루즈 도스 삐냐이스(Nossa Senhora da Luz dos Pinhais)’라고 하여 ‘Our Lady of the Light in the Pine Forest’ 즉 ‘소나무 숲의 빛은 우리의 성모’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하는 것은 가톨릭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이 길다 보니 간편하게 ‘쿠리치바’라고 줄여 부르게 되었고 1721년에 마을의 명칭을 정식으로 ‘쿠리치바(Curitiba)’라고 했다 한다.
브라질의 쿠리치바에는 금, 골드가 나왔다고 하였으니 물질에 정신팔여 있는 그들이 안가고 못 배겼을 것이다.
이러한 하다면 포르투갈인들만 그곳을 차지하려 했겠는가?
One theory is that the name "Curitiba" comes from the Tupi words kurí tyba, "many pine seeds" due to the large number of pinecones of Paraná pines in the region prior to its founding. Another version, also using words from the Tupi language, is that it originates in the combination of kurit (pine tree) and yba (large amount).
현재 알려진 쿠리치바의 어원(語原)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원주민이 사용하고 있던 투피어어(Tupian languages)로 ‘송(松:core)이 많다(多:etuba)’의 의미로 ‘Core Etuba’라고 불리었다 하며 또 하나는 역시 ‘소나무(松:kurit) 큰(大:yba)’라고 하는 의미로 ‘Kurit Yba’ 로 불렀다고 하는 것에서 소나무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아마도 "kuri"라고 발음하는 대고려(大高麗)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리(古里)의 리(里)는 이웃, 인근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이와 다르게 고리(高離)의 리를, 리방(離方)즉 남쪽의미로 볼 수 있어 이 도시 위치가 대륙 남쪽임을 나타내는 것일게다.
1842년에는 마을로 격상이 되었고 1853년에 상파울루(São Paulo)지방이 분할되었던 것에 따라 신설된 파라나(Parana)주의 수도가 되었다고 백과사전은 적고 있으며 이 도시 경제는 남쪽의 가축 농장과 북쪽의 시장 사이 입지조건 때문에 가축교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고 1850년대부터 유럽이민자들이 밀려왔는데 주로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 출신자이며 주요산업으로는 마테차(茶), 목재, 가축의 집산지로서 제지, 방적, 가구, 시멘트, 담배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고 알려지는 곳이다.
인도의 캘리컷(Calicut)도 순면직물이 유명했다고 알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방적산업도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사서 기록과 브라질
서양고지도에서 남아메리대륙 북서부에 브라질(Brazil)이란 표시를 본 적이 있다.
브라질은 남아메리카대륙전체에 사용되었을 명칭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게 된다.
○ 일본남쪽에 수로(水路)로 두어 달 동안 가면 구라파(仇羅婆) 구라파(歐羅巴)란 나라가 있고, 그 나라에 기리단(伎利但) 기독(基督)이라는 도(道)가 있으니, 그 방언에 하늘을 믿는다는 말이다. 게(偈) 12장(章)이 있고, 그 도는 삼교(三敎:儒ㆍ佛ㆍ道敎)를 배척하기를 원수같이 한다. 모든 마음 쓰는 것이나 일해 나가는 것이 하늘을 어기지 않으며, 각각 천존(天尊)의 화상을 그려 받들어 섬겼다. 일본은 옛날부터 불교(佛敎)를 높여 받들었는데, 기리단교(伎利但敎)가 일본에 들어오자, 불교를 요망한 교라고 배척하였으니, 그 전에 평행장(平行長)이 이 도를 믿었다고 한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위는 1776년(영조 52) 이전에 완성된 이긍익(李肯翊)이 엮은 조선시대의 사서(史書)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변[西邊]편에 어우야담(於于野譚)를 인용한 글에서 대마도(對馬島)를 서술한 것을 보면 일본 남쪽에서 수로로 두어 달 동안 가면 구라파(仇羅婆, 歐羅巴)란 나라가 있다 하였고 그 나라는 기리단(伎利但) 기독(基督)이라는 도(道)를 믿는다 하였으니 그것은 크리스트교를 말하는 것이다.
구라파라고 하면 우리는 유럽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일본을 카리브해에 있었다고 보면 남쪽으로 해로나 수로를 타고 두달 가는 곳을 생각해보면 남아메리카대륙 밖에 없다.
순조(純祖 32年)(1832)의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英國 地方, 其在 毆羅巴 , 人亦有貴, 地方在此 亞未利加 , 其亦有好大地方, 又在 西忻慶 其有海島盛, 多在 亞非利加 極南角, 好望之甲, 爲 垂圍 之屬地, 又於太平南洋, 有屬 英國 許多發達下落之地方, 終者在 亞西亞州 , 多有海島, 且 忻都斯担 , 古圍 各地方, 皆入於 英國 版圖矣。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 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위 1832년의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를 보면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에도 있다고 한 것과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가 인용한 글과 같다.
당연히 일본총체(總體)인 네덜란드 하란(荷蘭)의 위치가 동인도제도가 아니라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고 보면 그 제도에서 강(江)을 타는 수로(水路) 또는 바다를 건너는 해로(海路)로 두 달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그곳에 구라파가 있다 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이 구라파가 영국(英吉利國:England)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영국은 브리티시(British)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던 1494년에 체결한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이다.
1493년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항해를 위해 바다에서 충분히 활동할 무대를 가질 수 없게 되자 불만을 표시하였다 하고 이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PP. VI)가 스페인과 중재하여 이 조약을 맺게 하였는데 서경 48°와 49° 사이로 경계선을 정한 것인데 이것은 순전히 포르투갈을 위한 조약으로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으로 출발하기 3년전에 체결한 것이다.
즉 암암리 길을 열어줬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근세기에 스페인영여과 구라파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서경 50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하나 남아메리카대륙에 포루투갈 이외 유럽인들이 거주한 역사를 쓰기 위함인데 영길이국의 활동범위를 넓혀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임하필기 제39권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편에 보면 영길리국(英吉利國)의 여자들이 출행할 적에는 금루합(金縷合)에 비연(鼻煙)을 담아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비연은 코담배(Snuff:tobacco)를 말하는 것으로 절구를 이용하여 마른 잎을 가루를 내어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코로 담배가루를 들이쉬어 마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끽연행위는 브라질 토착인(indigenous populations of Brazil)들이 시초였다는 사실에서도 영국과 브라질이 기이하게 엮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위 글에서 영국의 지방이 아미리가(亞未利加)즉 아메리카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라고 하였으며 조선관리와의 답변에서 答我國名英吉利國。又號大英國。而居蘭墩忻都斯坦地。국명을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 하고, 난돈(蘭墩)과 흔도사탄(忻都斯坦)지방에 살고 있다 한 것에서도 흔도사탄을 한어자료에 보면 忻都斯坦(今印度) 오늘날 인도(印度)라 하였으니 이것은 원나라의 무장(武將) 흔도(忻都)를 홀돈(忽敦:ᠾᠦᠨᠳᠣᠡᠨ,hundun)이라 한 것과 비교할 때 몽골(蒙古)라 할 수 있어 앞에서 언급한 인도(印度)의 무굴제국(Mughul帝國)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고 그곳에 영국이 터를 잡았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에 이 영길이국사람들이 조선에 당도할 때 1832년 올해 2월 20일에 서남풍(西南風)을 만나 동쪽으로 향하여 왔습니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그들이 바람을 이용하여 서북쪽으로 진행한 것이라면 남아메리카대륙 구라파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구라파가 남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함을 인도아 북부 고원지대를 가리킨다고 한 것을 보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를 인도라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問英國山多耶。水多耶。答山多。
또한 문답에서 “영국은 산이 많은가 물이 많은가? 하는 물음은 영토가 땅인가 섬인가 하는 물음인데 산이 많다고 한 것은 육지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이때 인도(印度)를 나름대로 장악한 상태에서 자신있게 조선에게 보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근대사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포르투갈은 아마도 백제(百濟)의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포르투갈과 일본이 엮이는 보면 그렇다.
우리는 백제(百濟)라고 쓰고 읽는다.
제(濟)의 한자 뜻은 바로 많다, 건너다, 이루다 제(濟)이다.
그렇다면 백제란 뜻은 백 개의 강이나 물을 건넌다는 뜻이라면 이것과 브라질 아마존의 수많은 강들을 연결시켜 생각할 수가 있다.
또한 백제는 백가지를 이룬다는 뜻이고 많다는 뜻이니 완성하다는 뜻이 더 강할 수도 있다.
흰 백(白)자를 붙여 백제(白濟)라고 하여도 깨끗하고 맑은 물과 관계가 있으며 또는 임금. 천자의 제(帝)를 붙여 백제(白帝)라 한다면 흰색의 빛(光)과 깊은 관계가 있는 태양신을 믿든 뜻이다.
물론 삼한의 전통적인 제석신(帝釋神)인 태양신(太陽神)을 말하는 것일게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은 해변가에 흰 색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1502년 1월에 포르투갈인 탐험가 가스파르 지 레무스(Gaspar de Lemos)가 브라질 남부 구아나바라 만(Baía da Guanabara)입구(湾口)에 도착하고 해안에서 벽을 희게 바른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였으며 그것을 아마존(Amazon)강 근처에 사는 인디오 선주민의 투피족(Tupi)들은 그들을 흰 집의 의미인 칼리오카(Kari Oka)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태생의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이 흰집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백제가 연결될 수도 있다.
어쨌던 근대사에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예속된다고 쓰여진다.
마찬가지로 신라(新羅)에게 백제(百濟)가 예속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신라가 스페인이라고 하는 것은 근세기에 신라를 대체한 역사 국명이 스페인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스페인도 사실상 명칭에서 많은 혼란을 가지고 있는데 에스파냐(España)와 이스파니아(Hispania)가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와 오늘날 스페인(Spain)과 일치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스페인 학자들도 설왕설래 하는 문제이다.
더군다나 지팡구(Zipangu)가 스페인의 초창기이름으로 나타나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해안에 거점을 틀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종족개념에서 이야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근대사에서 서양학자들은 이들 모두 한데 섞어치기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보면 1415년부터 아프리카북부 지브롤터해협(Strait of Gibraltar)연안의 세우타(Ceuta)를 정복한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백제 영역이 아닐까 한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1450-1500)는 희망봉의 발견자로 등장하고 그가 대서양과 인도양을 이었다는 항해자라고 나오는 것은 해양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근거지는 서아프리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적도 해류(south equatorial current)를 따라 브라질에 곧장 도착할 수 있는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지역이 바로 포르투갈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판단된다.
포르투갈 군인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fonso de Albuquerque:1453-1515)의 해양 정복덕분에 16세기 전반기 동안 포르투갈의 전력은 아시아(아메리카대륙)로 확장하게 하였고, 1530년에 돈 주앙 3세(João III:1502-1557,재위:1521-1557)는 마침내 브라질을 식민화하기 시작한다고 되어 있다.
이 시기가 바로 티무르제국이 사라지고 무굴제국이 건립되던 시기이다.
1578년 알카세르 키비르(Alcácer Quibir)전투에서 돈 세바스티앙(Dom Sebastien:1554-1578)과 상당수 포르투갈 귀족이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전멸하고 아비스 왕가(House of Aviz)의 단절이 있었으며 이어 추기경왕 엔히크(Henry:1512-1580)가 즉위하지만 2년 뒤 사망하면서 종지부를 찍는 듯이 보인다.
실제로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후부터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Philip II,1527-1598,재위:1581-1598)가 포르투갈의 왕이 되어 두 나라가 한 왕을 섬기되 통치는 분리하는 동군연합(同君聯合)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때 무굴제국은 1600년경 남부만을 남기고 인도전역을 차지한다.
이로 인해 독립된 외교력이 상실되고 스페인과 묶여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인도양 독점무역이 깨지는 것으로 포르투갈은 큰 퇴보를 겪게 된다는 이야기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임진왜란과도 엮일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러한 스페인의 지배는 갑작스런 쿠데타로 근위대를 쓰러뜨린 포르투갈 귀족들이 1640년 12월 1일 스페인지배를 종식시켰고, 이후 돈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1604-1656,재위:1640-1656)가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1668년까지 가서야 리스본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며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무굴제국이 남쪽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면서 6대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1618-1707,재위:1658-1707)에 의해 1707년경에 남부남단만 남기고 전부 영토안에 넣는다.
하지만 그 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로부터 무굴제국은 점차 영토를 잃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반대로 영국(영길이국:잉글랜드)은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를 확장하며 인도에서 상업권을 잡기시작한 것이 1717년으로 1757년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64년 북사르 전투(Battle of Buxar), 그리고 4차에 걸친 마이소르전쟁(Mysore Wars:1766-1799)에 승리하여 마침내 무굴제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며 인도전국적으로 발생한 세포이 항쟁(Indian Rebellion or Sepoy Rebellion:1857-1858)에 의해 결국 무굴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역사가 존재한다.
그 이후 정확하게 24년 후 대조선이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순조(純祖32年,1832)의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를 기록할 때 한 껏 자심감이 넘쳐 고조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영국지방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동맹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였지만 나폴레옹1세(Napole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1815)가 산업혁명으로 강해지는 잉글랜드를 대상으로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에서 발령한 대륙 봉쇄령(大陸封鎖領)에 참여하길 요구하는 것에 거절하였기 때문에 1807년 나폴레옹군대의 침략을 받아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하였고 지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수도를 천도(遷都)하게 되는 것은 마치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서 웅진성(熊津城), 사비성(泗沘城)천도하는 반도역사를 생각하게 하는데 사실상 나폴레옹의 출현의 위치를 어디로 볼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은 1816년부터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연합왕국(Reino Unido de Portugal, Brasil e Algarves:1815-1825)의 왕이 된‘돈 주앙6세(John VI,1767-1826)’가 1821년 첫 헌법을 공포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귀환할 때까지 지속된 역사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연결은 결국1821년에 영국이 터전을 닦은 곳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곳을 현 유럽대륙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문제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존재한다.
글을 쓰다보니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늘어나 너무 량이 많아졌다.
이 캘리컷이 브라질의 쿠리치바라는 주제만 가지고 달려왔던 것이 유럽사 전반에 걸쳐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참으로 답답한 것은 과연 스페인이란 나라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사의 행태를 두고 볼 때 스페인은 신라를 대칭한 역사유럽국명이라고 치부하였지만 스페인이란 존재가 1898년 신흥세력이라고 하지만 프런티어의 마지노정신을 부르짖는 신출내기 같은 미국에게 허물어질 때 너무나도 비참하게 허물어진다는데 거의 실망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페인은 완전히 서세라고도 할 수 없다.
단지 종교적으로 가톨릭선교를 주 목적으로 한 통치세력인 것 같으나 지배세력으로서의 역사성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쩌면 허깨비 역사가 아닌가 여길 정도로 존재성에서 의심이 된다.
근대사는 매우 특이하게 스페인이 신대륙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아메리카전역에 설치한 4개의 부왕령(副王領:Virreinato)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을 열거하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전역을 관할하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España1519-1821)과 남아메리카대륙 서경 50도 이서(以西)전역을 관할하는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 Peru:1543-1824), 그리고 중앙아메리카대륙의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1776-1810)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카리브해 도서(島嶼)를 관할하는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Granada:1740-1823)이 그것이다.
특히 신대륙에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법적으로 총독이나 법원보다 직위가 높았으나 실제로는 총독과 법원이 그들의 관할지역에서 상당한 독립권을 행사하여 부왕의 통치권은 매우 제약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총독(總督)을 따로 두고 자치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을 몽고점령지의 다루가치(達魯花赤:drughachi)나 삼한사서에 등장하는 도호부(都護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이민족의 통치와 호찰(護察). 독찰(督察)을 위하여 변경 또는 외지(外地)등에 설치한 최고 통치기관인 도호부나 도독부의 정의인 것처럼 이것도 이와같다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조선(朝鮮)의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 도호부(都護府)의 내역을 보면 그대로 광대한 지역을 관할 것을 알 수 있는데 경기(京畿)의 4개, 충청도(忠淸道)는 없고, 대신 경상도(慶尙道)에 대도호부를 포함하여 7개가 있었으며, 전라도(全羅道) 4개, 황해도(黃海道) 3개, 강원도(江原道)는 대도호부를 포함 5개, 평안도(平安道)에 대도호부를 포함 5개, 함길도(咸吉道) 대도호부를 포함하여 10개나 있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38개나 되는 대도호부나 도호부는 모두 쳐서 빼앗은 땅임을 알 수가 있다.
이미 대조선 초기에 이렇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행정 제도에서 부왕의 통치력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북쪽으로 산루이스포토시(San Luis Potosi)·사카테카스(Zacatecas)·쿨리아칸(Culiacán) 등 남쪽으로 테우안테펙 지협(Isthmus of Tehuantepec)즉 본 블로그의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이라고 한 지역까지를 한정하여 관할 했다고 하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당연히 부왕이라면 왕을 대신한 것인데 지배력이 멕시코 한정지역에 갇혀 있다는 것은 솔직히 스페인이 과연 아메리카대륙 전역을 통치하거나 통제했겠는가에 대한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멕시코 중남부에 한정되었을 뿐만아니라 그곳은 코리아(고려)땅이니 그것도 그들에게 한계로 다가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전역을 관리했다고 하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은 원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에만 매달렸고 나름대로 교육에 집중하였을 뿐이며 대부분 광산업과 목축에 바탕을 둔 경제를 감독했다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본 블로그가 많은 것을 밝혀낸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통치권과 다른 경제권만을 미국이 통제하고 있었던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스페인과 전쟁전까지의 모양새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이율배반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스페인부왕이 관할 하면서부터 학살이 얼마나 자행되었는지 스페인 부왕이 통치한 100년 동안 혹사, 질병, 토착문화의 파괴 등으로 누에바에스파냐의 원주민 인구는 2,500만에서 100만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긴가?
조선 한반도의 근세기 인구통계데이터 자료에 남북한 인구 1881년 1,623만명, 1940년 2,473만명이다.
동아시아대륙에 1500년경에 넘어갔어야 할 인구가 1억명이다.
그 인구가 동아시아대륙에 그대로 이동되어 지금까지 확산된 것이라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될까?
정확하지 않겠지만 500년이 넘었으니 아마도 지금의 신중국에서 한인 인구만큼 될 것이다.
왜 스페인이나 서세기록에서 북아메리카서부지역인구와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대륙인구를 줄이려 노력했을까?
도대체 스페인이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았다면서 인구는 왜 줄게 만들었을까?
중앙마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 스페인들이 초기에 전염병을 옮겨 1억명을 몰살시켰다는 사실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스페인의 최고 부흥기인 펠리페 2세(Felipe II,1527-1598,재위:1556-1598)가 집권할 때이며 포르투갈 필리핀의 어원(語原)이라고 생각되는 필리피나 왕가(Philippine Dynasty:1580–1640)의 첫 왕인 "필리프1세"로 즉위하게 되는 것이 이때이다.
북아메리카대륙 텍사스(Texas)주를 “New Philppines”이라 한 것도 지금의 아시아 서태평양(西太平洋), 마닐라와 필리핀(Philippine)의 본거지에 대한 정체가 들어난 것이니 이 얼마나 해괴한 역사를 우기가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인지 모두가 혼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결국 1898년에 난데없이 동시전쟁이란 말도 안되는 구도로 끌고 들어가더니 필리핀은 텍사주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끝맺음.
구라파라고 하는 것은 유럽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유럽대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위에서 알아보았듯이 기어봤자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동인도회사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지만 결국 밝히고 나니 모든 것은 풀리고 있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것들이 이번 글로 인해 술술풀리는 듯하다.
무굴제국의 등을 타고 잉글랜드는 인도지명을 얻었다.
무굴이 아니라 이제 인도를 타고 더 넓은 훨씬 더 강한 경제메리트가 있는 아시아 인도아대륙을 역사적 소유로 하여 제국을 운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하다.
캘리컷이 인도양에 있어야 한다는 원리가 무엇인가?
인도양이 되려면 대서양의 남쪽 남아메리카대륙 동쪽 바다를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인도는 남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한다.
그곳에는 무굴제국이 있었고 동인도회사가 있었다.
그리고 구라파라고 하였으니 영길이국과 가까운 세력들이 전부 그곳에 움크리고 있다가 유럽으로 옮긴 것은 유럽전쟁이라고 하는 바로 1차세계대전이다.
이 만큼 알았으면 부족한 자료만으로 참으로 많이 안 것이다.
대조선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고 동시에 고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경계로 동쪽에 조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쪽에는 코리아가 있었다는 보이는데 이것을 고려라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간혹 프랑스가 대조선의 대칭된다든지 아니면 스페인은 신라로 대칭된다는 것은 시시때때로 그들이 편한대로 일관성없이 닥치는대로 옮겨 심기에 급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최소한 2차대전까지 대조선과 고려의 영역을 그들이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근세기에 대한제국이 대조선(大朝鮮)의 권한을 이어 받아 당당하게 존재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어 2차 세계대전(2次世界大戰)과 북중미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 발발되었고 특히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미국(美國)의 핵무기에 의해 패함으로서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역사가 한반도 구성원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었던 4개의 부왕령은 아마도 대한제국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영토의 귀속권이 모두 삼한제국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티무르제국에서 독립한 바부르가 이슬람 왕조 무굴제국(Mughal Empire:1526-1857)을 건립하게 된다는 사실과 바부르(Babur)와 그의 장자 후마윤(Humayun)이 지배한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과 북인도(北印度)라는 것은 남아메리카대륙의 북부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아대륙의 캘리컷과 브라질의 쿠리치바가 역사에 혼입되었다는 사실과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스페인의 해괴한 역사행적에서 볼 때 거꾸로 쓴 근대사를 역으로 생각하면 인도는 남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이 거의 90% 밝혀진 셈이다.
어쩌면 영국은 1차세계대전까지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잔존하다가 미국에 의해 현재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아르헨티나가 화이트인데 남아메리카대륙 남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라고 하는 소비에트연방도 동유럽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서세들과 공동전선을 취했던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1차세계대전 전 남아메리카대륙에 있었어야 할 나라들을 보면 서경 50도 이동지역에 소비에트연방국일 수밖에 없는 아라사국(我羅斯國)과 법란서(法蘭西)를 프랑스라 하였으니 법란치국(法蘭治國)은 프랑크(Frank)일 것이고, 일본총칭 네덜란드(Japanese)가 하란국(荷蘭國)이니 이와같고 마지막으로 프로이센(Prussia)의 파려사국(波呂斯國)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附)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에 영국에서 조선까지 오는데 큰 나라를 열거하는 것에서 첫째 법란(法蘭 프랑스), 둘은 품송(品松 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 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오스트리아)가 있다 하였으니 최소한 영국 가까이 북쪽에 프랑스가 있었고 그 다음에 러시아라고 알려진 프로이센 즉 파려사국이 있으며 그 위에 아라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현재로 파악되는 것에서 오스트리아는 멕시코에 있었을 국명일 가능성이 많다.
1차세계대전은 이곳에 웅거하고 있었던 서세들이 유럽땅을 차지하기 위해 벌렸던 전쟁이며 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땅을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서 전 북중미, 남미할 것없이 전 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과 서세에 대치하던 대한제국과의 한 판 끝장대결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끝장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 이전까지의 완전하지 못한 지배력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대동아전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한제국은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대동아전역의 영토가 서세의 전리품이 되었으며 그 틈에서 소비에트연방은 우랄산맥 이 동쪽의 영토를 차지 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과 합의 한 것이다.
무엇을?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이다.
대동아시아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은 놀랍게도 넓은 사각형에서 동쪽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알레스카(Alaska), 캐나다의 유콘준주(Yukon Territory), 노스웨스트준주(Northwest Territories)를 포함하고 그레이트슬레이브 호(Great slave Lake) 이서(以西)쪽, 브리티시컬럼비아주(British Columbia), 엘버타주(Province of Alberta)를 포함하고 다시 남쪽으로 미국의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와 오리건주(State of Oregon)반을 가르고, 아이다호(State of Idaho)북부와 몬태나(Montana)서부를 포함하면서 캘리포니아주를 비껴나 서해안을 그리지만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를 고려영역으로 보아 포함할 수도 있으며 아메리카대륙 태평양 연안에서 남쪽을 지나 과테말라(Guatemala)남북을 동쪽으로 가르고 벨리즈(Belize)남쪽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가 플로리다 남쪽 바하마(Bahamas)를 포함한 쿠바(Cuba)전 지역과 도미니카(Dominica)를 포함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동쪽 끝으로 남아메리카 대륙 베네수엘라 과나레(Venezuela Guanare)를 경계로 한 서부전역과 콜롬비아(Colombia)의 전역 에쿠아도르(Ecuador)까지의 영역을 포함한 중앙아메리카대륙에서 멕시코를 제외한 엘살바도르(Elsalvador), 온두라스(Honduras),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rica), 파나마(Panama)가 공영권에 들어가고 남극에서 꼬리 있는 북부지역과 남극 서부쪽 해안을 감싸고 돌아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뉴질랜드(New Zealand)를 남쪽 한계 내에 넣고 서쪽 끝으로는 인도양(印度洋:India Ocean)으로 나가 동경(東經) 70도 선상에서 직선으로 북상(北上)하여 모리셔스섬(Mauritius)을 포함하고 그 경계선으로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Indian subcontinent)을 넣고 다시 북상하여 서파키스탄(West Pakistan)중앙을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동부를 포함하고 타지키스탄(Tajikistan), 키르기스스탄(Kyrgyzstan)을 넣고 카자흐스탄(Kazakhstan)을 반을 갈라 러시아 땅 옴스크(Omsk)를 기준으로 곧장 북쪽 북해(北海:North Sea)에 다다르며 경계를 이루고 동경(東經)70도 선상(線上) 타스 강(Taz River)동쪽 시베리아 전체를 대동아공영권에 넣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한부울:대한제국 글에서 참조]
참으로 방대한 지역이 아닌가?
현재 시베리아를 포함한 아시아대륙 북부전역과 인도아대륙과 중앙아시아지역 그리고 동아시아대륙, 호주, 뉴질랜드를 포괄한 땅을 고스란히 서세의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에게 넘겨준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미국은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준비하였다고 볼 수 있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포함한 위 4대 부왕령을 완전하게 지배하지 못한 상태에서 2차대전을 맞이 했다고 보아야 맞다.
즉 할양이라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
때문에 미국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을 먼저 와해시킨 것으로 나타나는데 1810년 부터 분리독립을 시키기위해 자금을 공급하며 지원을 했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전역은 1821년부터 카리브해 도서(島嶼)는 1823년부터, 남아메리카대륙 서경 50도 이서(以西)전역을 대상으로 1824년부터 대한제국의 체제를 깨뜨리려고 무진장 애를 쓴 보람이 있었던 것이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대한제국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부득히 어리석은 열도일본인들이 미국의 계략에 말려들어 선제공격하는 것으로 미국과 전면전쟁을 하게 이른 것인데 현재 열도일본인들과의 태평양전쟁만 부각되고 나머지는 말살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캘리컷이 쿠리치바라는 사실과 함께 브라질이 포르투갈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고 그곳을 영국이 점령하여 동인도회사를 꾸렸지만 아마도 제2차세계대전에서 상호주고받는 형식의 영국이 양보하는 대신 역사에서 중요한 명칭인 인도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소위 꿩먹고 알먹고한 행사권이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상상한번 해보자.
그렇다, 만약에 미국이 대동아전쟁에서 대한제국을 극복할 수 없었다면 지금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난데없이 한반도의 허리가 무엇때문에 짤려야 했던 것인지 궁금하지 않던가?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병합과 동시에 역사에서 완전히 흔적도 남지 않게 말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숨겨진 역사사실 때문이 아닌지 이제 그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새로운 역사문제라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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