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1.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한부울 2015. 3. 2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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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글쓴이:한부울[韓夫蔚]

 

[대한제국 3]

1) 머리말
2) 순종과 다이쇼왕은 동일인물
3) 실증주의와 끼워넣기한 유럽사(스톤헨지의 이동)
4) 코리안학살
5) 한국인은 문맹이 많고 가난했던가.
6) 한반도는 본래 역사터전인가?
7) 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

 

1) 머리말

 

<대한제국1편>에서는 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라는 글에서 우리가 캘리컷이라 알고 있는 실제 장소위치가 브라질 쿠리치바라는 것을 토대로 캘리컷이 있는 인도양은 현재 대서양의 남쪽 남아메리카대륙 동쪽바다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밝혀 인도는 남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브라질과 남아메리카대륙 동북부는 카리브해와 연계되어 서세의 근거지로 활용되었을 확율이 높은 곳으로 확인했고 남아메리카대륙에는 무굴제국이 있었으며 그곳엔 동인도회사가 있었다는 결론도 얻을 수 있었으며 19세기 중기부터 이 무굴제국 영역을 영길이국이 관활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은 영국은 현재 인도아대륙이라고 하는 인도에는 근세기라 할지라도 아무런 연관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아대륙은 2차세계대전까지 어떤 역사주체가 관할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어 본 블로그의 글 "암리차르 학살사건과 제암리 학살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1"에서 3.1운동에 의한 만세사건이 있었던 제암리(堤岩里)가 북인도의 암리차르(Amritsar)라는 사실과 동시에 두 개의 장소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라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임을 밝혀내고 북인도가 남아메리카대륙 북부 또는 북아메리카대륙남부이거나 텍사주 및 멕시코까지의 위치를 확대 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고 그곳에는 황금사원(Golden temple)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이 황금사원은 에루살렘의 황금사원(Dome of Rock)과 같은 것일지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민족의 수호신에게 강한 숭배의 의지를 나타내는 두 종교의 사원이 같다라는 것은 일단 충격적인 이야기다.

그것과 함께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의 의미가 한반도를 침탈한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항거라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성격이 아니라 본 블로그가 주창하였듯이 서세의 총칭인 일제(日帝)가 장악한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이며 서세에 의해 해체된 대조선(大朝鮮)이란 역사주체가 1만년의 역사와 함께 이어온 세계를 '하나'라는 울타리로 구축한 사실에서 그것은 곧 여러국가가 나누어지지 않는'하나의 체제'인 것으로 밝혀지고 그것에 대한 갈망, 향수에 의한 복구운동, 또는 부활운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인도(印度)시성(詩聖)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가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제목에서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그곳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let my country awake)"라고 하였다는 사실은 곧 하나의 체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그 주체가 바로 "코리아"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타고르 역시 이런 슬픈 사실을 시로 읊었듯이 거대한 '하나의 체제'가 서세에 의해 일순간 무너졌고 점차 서세가 장악한 체제가 주는 강압적인 것에 의하여 옛 '하나의 체제'를 그리워하였고 옛 체제를 못잊어 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이런 복벽주의(復辟主義)에 의한 복고운동(reactionary movement)이 자발적으로 발생되었다는 것은 역사 연속성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체제를 대임한 서세의 무단통치체제가 지배를 강화함으로서 무리를 낳게 되면서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독일등 개별적으로 구분하여 지칭하지 않고 모두를 통털어 일제(日帝)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일제(日帝)라는 명칭은 서세의 통칭이다.

반면 한반도사관의 일제(日帝)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부터 열도일본을 지칭하게 된 것임을 알게 한다.

비록 한반도역사로 축소가 되어 일본으로 나타나지만 부풀듯이 풀어보면 한반도역사가 세계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일제는 여러 서양세력들을 다 합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2) 순종과 다이쇼왕은 동일인물

 

우리가 아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은 1897년에 생성되어 1910년까지 국가로서 매우 짧은 13년 남짓한 시간을 경과후 일제로 병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다.

왜 이렇듯 짧은 시간의 국가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내막을 들여다 보지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가진 현재 구성원인 국민으로서 비록 헌법전문(大韓民國憲法前文)에 나타나는 법통으로 수용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사성에서 모체라 할 수밖에 없는 대한제국의 실체를 모르고 식민지역사만 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이야기 아닐 수가 없다.

대한제국이 13년이란 짧은 존립기간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식민지사에 묻혀버린다는 것은 솔직히 역사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늘 의문을 갖는 것이지만 러일전쟁이 이상하게도 대한제국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

처음 글쓴이가 예상하고 추측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은 러시아를 대임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와 일본을 대임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국회사와의 충돌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즉 나라와 나라가 충돌한 것이 아님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 충돌은 기이하게도 대한제국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이었다.

사건은 190428일에 일본함대가 포트 아더(Port Arthur)라고 하는 여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것은 진주만공습과 똑같으며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대한제국 서울에 1904223일 일본군 1개 사단이 진주하며 위협을 가하였고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 1905527일까지 충돌하였으나 결국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한다는 스토리로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일명 <을사늑약>이라 한 것이다.

외교권박탈이라는 것은 지금같으면 심각하다 하겠지만 사실상 하나의 체제에서 볼 때는 황제는 그대로 내정만 보게하고 외교권을 일제가 가진다는 것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이 관심사항인 재정경제권이라 할 때 재정경제권을 그들이 관장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신 경제권은 서세 즉 일제로 넘어간 것이 된다.

이것에서 모든 경제에 관한 뉴스나 사건들은 모두 서양이름으로 기록되는 현상임을 알 수가 있다.

굳이 따져보면 러시아라 하였지만 대한제국이었다는 사실이며 러시아가 진주한 여순이라고 하는 포트아더 역시 대한제국의 영토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러시아는 1918년 이전의 악라사(鄂羅斯)라 하여야 하고 같은 러시아(露西亞:俄羅斯)이름을 쓰게되는 1922년 소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대조선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위치하였다고 할 때 남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위치한 영국과 프랑스, 독일(프로이센:Prussian), 러시아, 중앙아메리카대륙 뉴멕시코주 오스트리아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8년 이전의 악라사(鄂羅斯)는 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에서 밝혔듯이 현재 아시아대륙을 기반으로 하는 영토를 가진 대타타르(大韃靼:Great Tartary)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되어야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여튼 이 러일전쟁이라는 충돌사건으로 이름 자체가 이상한 19057월 가쓰라태프트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이 생성되었고 마치 세계의 비밀스러움을 양국이 가진것처럼 전제하면서 역사 실세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미국이다.

즉 미국은 조선으로 분장한 것이고 일본은 바로 서세의 집합 일제로 분장한 것이다.

대한제국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충돌을 마무리하는 강화조약에서 미국은 난데 없이 일본에게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역사에 한정하는 것이지만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현상이 벌어져야만 했다는 것인가?

문제는 이때까지 미국은 북아메리카대륙 어느곳도 실제로 점령할 수 없었다는 것이며 향후 어떤 경우에 이 비밀스러운 조약이 역할을 할 것이란 예측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 조약이 당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 대한제국을 극복한 2차세계대전 끝자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후 경제재정권을 쥐고 있던 서세의 집합 일제(日帝)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11월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고 1906131일 주한일본공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하고, 전국 13개소에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는 등 식민지지배를 위한 기초공사에 착수했다라고 알려진다.

그러나 전국13개소의 이사청이 무엇인가?

마치 역사가 1776년 이전으로 회귀한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의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가 클로즈업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제국 군대 해산(大韓帝國軍隊解散)이란이 이루어지는데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며 서울의 군대를 시작으로 하여, 8월 1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후에 순종 황제의 조칙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밝혀졌는데 왜 역사적인 처벌이 불가능했을까?

한반도역사자체가 조작이며 그것을 뒤엎을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대한 영향력이 한반도지배권에 국한하였기때문에 무시된 것이며 만약 북아메리카대륙에 대한 지배권이었다면 이것으로 또 한번의 큰 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을 이야기다.

여기서 순종과 요시히토에 대해 이야기를 한번하자.

순종(純宗,1874-1926)을 융희제(隆熙帝:재위1907-1910)라 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성은 이(李),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이다.
반면 다이쇼왕(大正天皇,1879-1926)은 일본의 제123대 왕(재위:1912-1926)으로 본명은 가인(嘉仁), 아명은 명궁(明宮)으로 나타난다.

위 두 사람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인가?

일본에서는 천황이라고 하는 순종(純宗)이 자기나라의 대신들의 농간으로 군대를 해산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순종의 재위가 1910년으로 끝나는 것에 반해 2년의 공백이 있지만 다이쇼왕은 순종재위를 연결한 것이며 1912년부터 재위가 시작되어 1926년까지 권좌에 앉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같은 년도에 두 사람도 죽는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어떤 힘이 있는 세력이 순종과 다이쇼를 허수하비를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국 한반도뿐만아니라 열도일본 역시 조정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볼 때 반도역사가 학문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싶게 알 수 있기 때문에 학문이라고 취급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더라도 국민들에게 좋은 역사서가 되었으면 하였지만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잘 다듬어진 풀 세트의 노예근성만을 키우는 몹쓸기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한반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한반도식민지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충고하건데 제발 삼한역사를 절대 끼워넣기해서 식민지역사를 함께 섞어치기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인류사인 삼한역사를 한반도식민지사에 끼워넣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인지 그러한 비정상적인 뇌를 당장 들어내 까 보았으면 좋겠다.

한반도식민지 사관이 그나마 존재가치를 인정 받으려면 대한민국 주체들이 어디서부터 도래한 것인가에 대한 것을 먼저 밝혀야 하고 근세기에 한반도로 이주(移住), 이동(移動)의 역사부터 숨김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난 후 열도일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던 근대사에서 일본이라고 하지만 아메리카대륙 어디쯤이 아닌가 하는 곳에서 한반도로 귀국하고자 하던 사람의 숫자가 약 1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들어난 이동숫자는 축약된 것이라 볼 때 그 보다 더 많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한국인들이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러한 이동이란 혼란북새통에서 기억지우기 일환으로 한국인들을 수장시킨 학살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45824일 우키시마마루호(浮島丸:4,730)는 이중 7,000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와 가족들을 태우고 아오모리현(青森県)에서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기뢰(機雷:naval mine)폭발로 한국인 524명과 일본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으며 이 사건은 고의적인 폭발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사건에 대한 의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물론 기억지우기 일환으로보는데 이 배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바로 한국인에 대한 계획적인 학살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이처럼 끔찍한 사건으로 닥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삼한역사를 한반도역사에 끼워넣기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삼한역사는 애초부터 식민지가 되어버린 반도역사와 같이 해서는 안되는 역사이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감히 반도역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며 실제 역사규모자체가 반도역사로는 곁에 번접할 수 없는 엄청난 인류역사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자행한 역사끼워넣기는 이미 역사가 제대로 흘러갈 수 없는 빌미를 만든 것으로서 지속적인 역사혼란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니 다른 나라에서 볼 때 자국의 역사를 놓고 저렇듯 갈등이 있구나 하고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 저속한 국민으로 오인되고 부정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비아냥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며 우리스스로에겐 말할 수 없는 굴욕감과 자괴감 그리고 피해의식 강박관념은 물론이고 노예근성을 키우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글쓴이는 이를 두고 서세가 만든 식민지역사에 의해 세계삼한역사가 참살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식민지역사는 1945년 이후 승전국인 미국에 의해 전리품처럼 만들어진 역사임을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5000년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6.25 전후 한글문맹자가 왜 태반을 넘었던 것인가?

더군다나 어려운 한자를 알기 싶지 않아 만든 한글이므로 남녀노소 누구나 친숙해야 할 글이다.

옛 할아버지나 우리부모세대들께서  학식이 높은 분들은 한자어를 많이 숙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때론 일본말을 읽고 쓰고 하면서도 한글을 읽고 쓸 수가 없었던 한글 문맹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사실에서 실로 당혹스럽게하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한반도역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6,25전쟁때 병사들의 70%이상이 문맹자(文盲者)였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한글을 처음부터 한반도주민들이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역사를 식민지사관으로 한 학자들은 식민지역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세계삼한역사를 엮어 결국 삼한역사의 위대성을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서세와 한짝이 되었고 이제 그들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는 한 배를 탄 것이다.

왜 세계삼한역사를 그토록 지질이도 못나게 만들고 열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자 한 것일까?

누구의 작품인가?

왜(倭)다.

잉글랜드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왜(倭: Wa)와 웨기( Waggie)라 한 것을 그대로 따른 음이라 할 수 있고 네덜란드사람들을 화(和:Wa)라 하는 음과 같은 것이라 할 때 실제로 왜(倭) 또는 왜구(倭寇)라는 해적신분이었던 그들의 절대성은 열등역사로 인하여 막혀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아무리 지우려 하려도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강박관념이 심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볼 때 이럴 해쳐나가려고 하였을 것이 뻔하지 않는가.

역사전쟁이 그들에게 필요하였던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한반도식민사에 몰입되어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는 현상과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을 지배했던 세계삼한역사에게 극도의 증오와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한 극대화된 질시하는 마음이 생성되어 기회만 되면 역사전쟁에서 끝장을 보려 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마침내 역사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1차대전과 2차세계대전 모두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본력을 바탕으로 기존세력으로부터 승리로 이끈 서세들은 그런 열등역사를 비로소 가장 우월한 역사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1차대전은 유럽전쟁이라고 하였고 2차대전을 역사전쟁이라 하였다는 사실과 때론 '제로섬게임'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결국 세계삼한역사의 주체라 할 수 있는"코리아"를 어떤 식으로든지 없애고 사라지도록 만들려 했음을 알 수가 있다.

 

3) 실증주의와 끼워넣기한 유럽사

 

앞에서 서세를 일제라 하였다.

서양세력 중에 가장 힘센 세력이 누군인가?

미국이다.

미국은 유럽사가 없으면 태동의 역사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생성된 개척의 역사 시초 한 가닥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신자 위그노(Huguenot)부터 시작하였고 1776년 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1775-1783)에 의한 독립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로부터 쟁취한 것이며 또한 독립전쟁을 할 수 있게 지원한 프랑스의 루이16(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3)가 있기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인들의 절대적인 보호로 등장한 신흥세력이라할 수 있기 때문에 유럽사의 생성은 미국역사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비난을 하고 있지만 반도역사를 추종하는 수구세력인 식민사관학자들이 옳고 그름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맹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자본을 지배하고 있는 서세가 만든 세계사이기에 한반도 역사를 부정하게 되면 동아시아대륙사가 망가지고 더 나아가 세계사가 망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엄청난 도발을 강단(剛斷)이 없는 일개 사학계 학자들이 나서 주장하기란 어려운 것이며 궁극적으로 보면 그들의 삶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위험을 자초하지 않을 것이란 추측하기는 쉬운 것이다.

그 만큼 용기내기가 애초부터 두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은 그때부터 기존사학계에서 버림을 받아야 하고 왕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한계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유럽사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근세기에 세계사에 끼어넣기하여 만들어진 역사일뿐이다.

서세가 1922년 초안을 잡은 세계사에다 유럽사를 억지로 끼워넣기 하면서 근본적인 틀이 잘못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의 출발은 바로 세계삼한역사를 조각조각 내어 본래 역사를 찾을 수 없도록 망신창이를 만들었고 대신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를 끼워넣기하여 거대하게 만든 불합리에서 그 문제의 핵심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랑케의 실증주의는 언제부터 회자된 용어일까?

물론 세계사가 완성되기 전이 아니라 완성되고 난 후부터일 것이다.

여기서 실증주의 문제를 한번보자.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유교와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유교(儒敎)는 차이는 종교관념 만큼이나 크다.

유교를 서양인들은 종교라고 고집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 없는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것으로 종교가 아닌 학문이라 해야 한다.

이를 백과사전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유교(儒敎)에는 처음 선진(先秦)때 본래 주장(主將)이 되는 근원(根源)을 말하는 것으로 본원유학(本源儒學)이라 하였고 한당(漢唐)때는 무엇을 풀이하여 해석하는 의미의 훈고유학(訓詁儒學)이라 하였으나 불교가 당()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인식되어 비판을 받게 되자 송명(宋明)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의 여러장점을 포함하고 ()과 악(善惡)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주장한 성리학(性理學)이 생성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 성리학을 현대학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생관, 세계관을 탐구하는 지혜(sophia)를 사랑한다는 뜻의 철학(哲學,愛智慧:philosophia)이라 할 수가 있으나 이미 남송(南宋)의 주희(朱熹:1130-1200)로 부터 시작된 성리학임을 알 수 있어 이에 비해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로부터 시작된 서양철학은 상당히 시기에 알려져 있어 철학은 주희로부터 시작된 사상임을 알 수가 있게 한다.

남송이라 하는 것은 여송국과 연계하여 볼 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이남지역인 멕시코지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이 할 수가 있다.

실상 이곳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모든 학문과 문화가 꽃피었다는 사실이 뒤받침 되고 있다.

어쩌면 같은 철학임에도 서양인들의 구질구질한 행적을 보자면 아마도 남송철학과의 관계를 애써 부인하면서 근대사완성과정에서 전체를 부정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

또한 서양학문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근세기에 유학(儒敎)의 한 가닥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중앙아메리카대륙에 근거한 청()의 고증학(考證學)이 있는데 이 학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용으로 하는 실학(實學)으로 문헌상의 언어학적, 역사적사실(史實)들이 비교적 고립된 개별문제로서 실증적연구에 의한 실증적, 객관적인 결과를 요구하는 학문임을 알 수 있어 이 학문의 개조(開祖)가 고염무(顧炎武:1613-1682)임을 감안 할 때 이미 동양고증사학적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시기적으로 늦은 서양쪽의 근대역사의 아버지라고 하는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는 이러한 학설자체를 부정한 모양이다.

때문에 그들만의 역사인 것이고 더군다나 편협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왜 일제와 미국을 구분할 수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실증학을 빙자하면서 교묘하게 하나의 역사에서 동양과 서양을 알아볼 수 없도록 갈라치기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아무리 뛰어난 학자인들 무슨 도리가 있었겠는가.

갈라치기란 이 황당한 작업을 주도한 세력들이 바로 자본력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이며 시온주의의 유대계 역사학자들인 것이 확실하게 저변에 나타난다.

때문에 아리안족을 고집한 히들러가 그들을 유별나게 증오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유대계 역사학자들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는 실증주의 역사가 독일 유대계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로 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일제히 말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특히 랑케의 역사기술에서 유럽외 인종을 무시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동양의 수많은 유교적이념을 바탕으로 한 사서들은 물론이고 이전의 역사학들의 존재까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오만한 서세우월주의에 함몰된 인간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가 활동한 시기보다 앞선 동양실증학인 고증학을 몰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그가 주장하는 이중성을 보면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 하였고 역사가는 "본래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가"를 알리는 것만을 의도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객관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사실(事實)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역사가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강조하여 엄밀한 실증주의 즉 사료비판(史料批判)에 기초를 둔 근대사학을 요구한 것처럼 알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실증주의(實證主義)를 빙자한 존재하지 않았던 오직 유럽사만들기에 열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오늘날 세계사는 모순과 오류 투성이라는 사실을 충분하게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가 본 시각에서 세계사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동양문화역사에서 하나의 역사인 세계삼한역사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곧 그것을 추상적인 인류(Menschheit)라 하여 취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고 그들이 자본이란 괴물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나의 체제에서 분리시킨 수많은 군소국가의 구체적인 국민(Nation)만을 바탕으로 한 역사가 중요하다 하였으니 그것은 사실적, 객관적,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유대자본이 지배할 수 있는 국가만을 단위로한 사건만을 역사로 인식했다는 오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솔직히 모순덩어리를 안고 있는 세계사를 정리한 랑케가 주장하는 실증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의 결과는 정말 회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랑케가 정확하고 명확한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세계사를 완성시켰던 것인가에 대한 양심적인 답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럽사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오류이다.

즉 그는 실증주의를 애초부터 지킬 생각도 없었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랑케보다 앞 선 동양고증학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독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돌 및 상고사 연구가인 변광현교수의 글에서 주장처럼 19세기 이후 고대유적조사를 이용하여 유럽의 고대역사를 아시아 역사 이전의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하였다.

그들이 실증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지키지 않았으면서 그들이 만든 유럽사가 포함된 세계사를 반박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방적으로 실증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니 만큼 이것 또한 기득권의 교만이며 역사를 선취한 세력의 오만방자(敖慢放恣)가 아닐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 랑케의 주장을 따르는 역사가들은 전부 유대인임은 물론이다.

랑케(Leopold von Ranke)를 위시하여 스코트랜드의 금융업자이면서 시온니즘(Zionism)유대민족주의자인 이삭 울프슨(Isaac WOLFSON:1897-1991) 만든 울프슨 문학상(Wolfson History Prize)은 그들만을 위한 상으로 만들어져 수많은 추종자들만 양성하는 꼴이 된 것이다.

그외 이 울프슨학을 1980년에 수상한 리처드 에번스(Richard J. Evans:1947-), 영국의 역사가이며 유대계() 폴란드인 루이스 네이미어(Lewis Bernstein Namier:1888-1960), 프랑스 유대계 역사학자 마크 블로치(Marc Bloch:1886-1944)등 실증사학의 추종자라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은 역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다.

프랑스 유대계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는 오늘날 역사학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역설하고 역사가의 작업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들의 기득권이 상처를 입는 것에 볼멘소리를 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실증주의는 마치 본래 도둑놈들이 남의 것을 다 탈취하고 그 탈취한 물건을 되찾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되레 도둑이라고 몰아붙이겠다는 뻔뻔한 주장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서 기가막히게 하는 것은 역사가에 의해 사실을 의미로 전환시키는 것은 역사가의 해석을 말하며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실증적 증거뿐만 아니라 역사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였고 더우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역사가는 실증적 증거가 빈약한 곳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작동시킴으로써 가능성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얼마나 자의적인 해석인가?

마치 군소교회목자들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처음 그들이 주도한 '세계사 만들기'가 이런 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결과적으로 볼 때 역사가 주도된 역사해설이라는 것은 역사가의 종교, 사상에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만약 실체의 역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에 의해 추상적이라 하여 배제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비판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유대계 역사학자라는 한계가 있고 시온주의에 함몰되어 사실과 전혀 다른 편파적인 해석에 의한 역사가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했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너무 지들끼리 하는 역사해석이고 보니 1960년부터 프랑스와 미국에서 발생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학파들은 기존 사학을 맹 비난하였는데 "역사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역사가의 텍스트에 의해 재구성된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라는 것으로 일갈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물론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 하였으니 다 같은 서양인들이니만큼 서양인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변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이 이런말 저런말 논리적이던 아니던 전개되는 모든 사실의 주장에서 결국 소외되고 제외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동양서양을 다 포괄한 하나의 역사 "세계삼한역사"라는 점에는 이설이 없으며 역사찾기가 그 만큼 힘겹고 어려운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의 역사문제를 어찌 범인이 나서 하루아침에 완전히 정립하겠다고 마음먹는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용기야 세계를 다 아우를 수 있겠지만...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Stonehenge 1611]

 

                                         [1954 stonehenge being built 사진 중 일부]

 

그렇다면 우리는 조급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우선 실증주의에 검증되었다고 하는 유럽사의 들어난 모순을 보자.

현재 나타난 사실만으로도 유럽사가 세계사에 끼워넣기 되었다는 사실이 곳곳에 들어나고 있다.

위 사진에 보듯이 아시아 역사 보다 앞 당기기 위해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만들기가 시작된 시기를 때론 1898년이라 하거나 위 사진촬영이 이루어진 1954년에 시작되었다는 등의 의혹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상 상상도 못할 날조현장이 그대로 사진으로 찍혀 온 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스톤헨지라 함은 영국 남부 윌트셔(Wiltshire)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Avebury)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 환상열석(環狀列石:stone circle)형태로 이루어진 유적을 말하는 것인데 만들어진 연대는 대략 기원전 3000년부터 2000년경으로 추정된다는 것으로 당장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한 단군조선보다 앞 섰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의 규모가 높이 8미터, 무게 50톤인 거대 석상 80여 개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인류 고인돌역사는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라 유럽 잉글랜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삼한역사를 끌어안고 있기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현재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고인돌역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싶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잉글랜드에 있는 고인돌 역사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할 때 잉글랜드로 옮겨진 본래 고인돌의 위치를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1954 stonehenge being built"

그럼에도 위 사진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54년에 스톤헨지를 건축했다"는 해설이 붙었다.

공사형태로 보았을 때 보수공사라고 할 수 없는 기중기를 동원하여 어디에서 옮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시간을 공들여 새롭게 세우고 있다는 것이 목격되는 장면이다.

문제의 1954년 사진은 러시아웹에 떠 있었고 곧장 인터넷에 퍼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참으로 역사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위 게시된 본래(삽화그림)위치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1611년 삽화그림같은 스톤헨지가 존재한 곳에서 영국으로 수많은 시간을 동원하여 옮겼다고 보는 것이며 파악한 바로는 시작은 189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나타나고 그 이후 아마도 운송문제, 기술문제 등 때문에 50년이 흐른 후인 1954년에 가서야 비로소 현재 장소에 거석들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유럽사의 역사 사실은 물론 동아시아대륙사에서도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화가이면서 고인돌 및 상고사 연구가인 변광현교수의 글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대하여"에서 보더라도 영국이 주축이 되어 유럽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1913년 부터 이집트 왕릉의 계곡에서 발굴조사를 하다가 투탄카멘(Tutankhamon)의 무덤을 발견하였을 때가 1922년이었는데 변광현 교수의 말을 빌리면 크레타(Crete)와 이집트역사는 갑자기 영국 학자들에 의하여 2000년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유럽에서는 이 지역을 인류문명의 기원지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글쓴이가 판단할 때 본래 인류문명지인 아메리카대륙임을 숨기려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변교수는 이어 이런 식의 근 200년 동안 영국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집트와 크레테 문화에 대한 무엇인가를 속여서 자신들의 고대 역사를 조작하고, 더나아가 유럽의 고대역사를 아시아역사 이전의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으로 밝혀진 "아시아동양역사가 아메리카대륙을 근거지로 한다는 명확한 사실에서 인류기원지도 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현재 인도(印度)라는 것은 본래 역사가 말하는 인도(印度)가 아니라는 문제까지 돌출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아시아대륙사보다 더 빠르거나 거의 비슷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이런 몹쓸짓을 자행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때문에 바른 역사가 밝혀지면 유럽사는 그야말로 한꺼번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허상에 불과함을 알 수가 있다.

지금도 잉글랜드에 있는 이 거석유적에는 고대 불교의식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영혼의 불멸·윤회(輪廻전생(轉生)을 믿고 죽음의 신을 '세계의 주재자'로 받드는 드루이드교(Druidism)인들이 1880년대부터 스톤헨지에서 하지축제(夏至祝祭:Midsommardagen)를 벌였다고 백과사전에 나타난다.

유럽사가 이러한 형국이니 근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사가 온전할리가 없다.

이것이 진정 랑케가 주장하는 실증주의에 의한 유럽사인지 밝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에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것은 역사가의 계획된 의도가 아니라 하늘이 주는 천리(天理)에 견주어 차이가 없어야 함은 어찌보면 가장 당연한 역사검증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천리(天理)를 거역할 수 있는가?

명명백백한 천리(天理)조차 감추고 싶어하는 세계사에 가려진 삼한역사만 생각하면 암울하기만 할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4.코리안학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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