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암리차르 학살사건과 제암리 학살사건

한부울 2015. 3. 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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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 학살사건과 제암리 학살사건

 

글쓴이:한부울

 

삼일운동의 제암리학살사건은 북인도(북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사건

 

이글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의 인식이 많이 달라져 있지만 본 블로그 글 "타고르(Tagore)와 인디즈(indies, 대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49852 "란 글에서 일단 시인 타고르를 중심으로 문제제기를 하였던 오래 전 주제이다.

당시는 솔직하게 영국과 일본이 같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실체를 알지 못한 상태의 글이었다.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으로 과거역사를 보게 되면 참으로 어안이 막힐 때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역사를 이렇게까지 날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힘이 있는 세력을 등에 업은 인간이 날조에 재미를 붙이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놀랄때가 많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역사사실을 볼 때 결과적으로 인류의 문명을 이룩한 "하나의 체제"가 낳은 문제의 물질에 의한 치명적인 헛점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근세기에 하나의 체제에서 존재한 역사를 이렇게 까지 농단한 서세들이 분리역사를 고집한 이유가 무엇때문인지 그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분리된 역사를 통하여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기존역사를 얼마든지 조작하거나 날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며 보잘 것 없는 그들의 열등역사를 최고의 역사인 것처럼 둔갑시킬 수 있다는 문제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체제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언어가 다르다고 하여 고치고 종교, 문화가 다르다고 하여 수정하거나 날조하고 더군다나 서양우월주의에 빠진 그들은 근세기에 역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억지로 분리시키면서 이러한 못된 짓은 량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취약한 물욕을 쥐고 농락하려드는 그들의 이러한 짓을 애초부터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고 역사사건의 진실과 진리자체를 거역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니 참역사라고 결코 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을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라 한들 그들이 어찌 불만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일본이란 무엇인가?

일본역사는 서세의 역사라고 하여도 모자라지 않는다.

동양사로 분류된 반도역사관점으로 보면 열도일본(列島日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반도역사는 지금까지 본 블로그에서 주지한 사실과 같이 동서양이 분리되면서 만들어진 동양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창조역사 같은 것으로 날조된 역사라는 사실을 여러 방면으로 밝히고 있다.

때문에 현재 열도일본은 만들어진 역사장소이며 국명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은 실제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우리 동양권에서는 한자로 일본(日本)이라고 하지만 서양(西洋)에서 “Japan” 이라 하지 않고 여러 나라의 이름을 병용한다는 것에서 선 듯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의 문제가 들어난다.

본래 일본(日本)은 "일국(日國)"이란 명칭이 변해 만들어진 것으로 태양신(:Ra)을 받드는 종족으로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에스파냐(España)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언급한 지팡구(Zipangu, Cipangu)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에스파냐(España)가 오늘날 스페인(Spain)으로 통칭되고 있음도 오히려 서양역사학자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때문에 몇 개의 역사를 합쳐놓고 있다는 사실들을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가 있다.

도치(dutch)라 하는 네덜란드(和蘭)BC 50년경부터 삼한제국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일국(日國)인 에스파냐에게 지배를 받다가 1568년부터 해적거지무리들(watergeuzen)이 중심이 되어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영길이국의 도움을 받아 1648년 독립하게 이른 나라이다.

이 나라는 특히 미국생성과 친밀성이 있다.

때문에 홍모번(紅毛番)이라고 하는 영길이국(英吉利國)과 네덜란드(Holland:和蘭) 또는 아란타(阿蘭陀)라 하는 것들이 속한 하란국(荷蘭國)이란 명칭은 에스파냐를 일국(日本)이라고 하는데서 변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일본(日本)으로 나타남을 최종적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국()이 아닌 본()도 따지고 보면 근원이라는 것이며 또는 여러 개를 나누어져 있지만 본래의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동서양이 나누어지기 전에는 고려(高麗:CORE:가우리)가 근본의 중심이었지만 근세기 서세에 의해 동서양이 나누어지면서 특히 동양의 중심이 일본이라는 뜻으로 본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일본은 서양세력(西勢)들의 총칭(總稱)이라 할 수가 있다.

이와같이 서세들의 비정상적으로 국명이 왔다갔다 하는 것은 코리아로 대칭되던 대조선(大朝鮮)이라는하나의 체제가 존속되었기 때문에 서세들은 그 체제 아래서는 나라의 국명을 취득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나의 체제하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 중에 서세의 두드러지는 것은 해적출신들이 자본경제권을 가진 세력으로 등장하여 근세기에 자본경제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하니 자본을 가지고 근대사를 장악한 서세를 포괄적 해적들의 조직이라고는 표현함이 합당할 것이다.

사실상 미국역시 나라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시기적으로 판단할 때 빠르면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이후라고 할 수 있고 그때부터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연안국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1898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보다 더 늦은 시기라고 한다면 1차 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이 끝나고서부터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이승만의 징집지원서에서 국적을 “japan” 이라한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친일파라고 단정짓기 보단 최소한 1918년까지 미국(美國)을 "japan" 이라고 통칭했을 것이란 판단이 있고 이것을 우리는 일본(日本)이라 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1905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도 알 수 있는데 러시아의 상대는 미국을 말하는 것임을 당시 전투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데 러시아의 상대군인들이 전부 서양인이라는 사실이다.

즉 조선통감부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모두가 미국인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보통 근세기에 서세들의 활동이 회사로 통칭되었다는 것은 경제활동이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또한 지배되었다는데 큰 이설이 있을 수가 없다.

때문에 대금업과 금화거래로 사업을 이룩한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가(Mayer Amschel Rothschild:1744-1812)란 괴물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자금공격에 자본경제경험이 없는 하나의 체제를 구가하던 대조선이 맥없이 붕괴되고 체제가 서세에 의해 1881년에 해체된 것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앞에 국명이 붙지 않는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 인도회사(Company of the Indies),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 북서회사(Northwest Company), 미시시피회사라고도 하는 서방회사(Mississippi Company:Compagnie d' Occident)등의 명칭을 서세들은 국명대신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러시아나 아메리카 역시 국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대신 하나의 체제에서 일본(日本)은 하란국(荷蘭國)이라 한 것이 보통명칭이었으며 이를 조선인들은 화()라 했던 것으로 미국인들도 아마 이 명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수도권 뉴욕(New York)을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라고 한 것처럼 험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 역시 네덜란드를 모계로 하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세계사에서 마치 오래전부터 유럽의 모든 국가가 고유 국명을 보유한 것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이것은 최소한 1922년 기점으로 간추린 세계대전에 의해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19452차세계대전(2次世界大戰)을 연합국이 승리로 이끌면서 완전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암리차르 학살사건제암리 학살사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본(日本)은 여기서도 영길이국(英吉利國)이라고 하는 영국의 대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大韓民國憲法前文)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되어 있다.

곧 일제식민지를 기본 사실화하고 그것의 항거한 3.1운동을 법통으로 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 조문을 왜 이처럼 좁혀 놓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도대체 일만년의 유구한 기존 역사를 굳이 외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기어코 일제가 남긴 식민지역사를 근거로 한 법통을 조문에 넣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삼한역사의 고고한 자존의 정체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사 반도역사가 삼한역사를 앞에서 언급하지 않고 반도에 이주때부터의 역사만 기술했다고 한다면 무엇때문에 역사사실에서 충돌이 일어나겠는가?

반도역사이면서 삼한역사는 부정하고 싶고 그러나 삼한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때문에 이토록 역사갈등을 유발시키는 요인이라고 해야 맞다.

하지만 삼한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한다면 반도역사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의 성격문제도 분명하게 있다.

한반도이주때부터의 역사일 것 같으면 독립문제가 있어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삼한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3.1운동이라면 독립운동이 아니라 체제회복운동이 맞는 것이다.

20세기에 발생한 민중운동은 어쩌면 3.1운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1919년에 발생된 모든 시위는 해체된 하나의 체제상징 대조선(大朝鮮)의 레스터레이션, 복고운동(Restoration movement)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의 체제는 어쨌던 누구뭐래도 인류의 문화역사를 창달하였고 근세기까지 인류가 큰 전쟁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해소된체 수십억의 인류가 공영했다는 것은 타고르(Tagore)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세기 서세들이 하나의 체제를 붕괴시키면서 인류가 겪지 말아야 할 큰 전쟁을 두 번씩이나 겪게 만들어 수많은 사상자을 발생케 하였던 것은 오늘날 서세들이 크게 반성할 문제이다.

이 큰 두개의 전쟁만을 끝으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이제 분쟁은 일상화가 되었고 핵전쟁이 도래한다면 인류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체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인류의 최대불안요소이다.

하나의 체제를 관리하고 통치한 세력은 다름이 아닌 삼한역사주체들이며 최후에 대조선이 있었고 삼한역사의 직계로 고려가 2차세계대전 말미까지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체제 정체성은 세계적인 것이다.

때문에 3.1운동은 한반도에서 일제에게 항거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에 대한 대중적인 복고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암리차르 학살사건제암리 학살사건"의 중심은 코리아(corea)라 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곳에서 발생한 3.1운동은 식민지에 대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체제복고운동으로서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근대사는 이것을 현재 동양(東洋)의 일본과 서양(西洋)의 영국이란 구도로 분리하고 있다는 점이 역사혼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19413일 인도(印度:India) 펀자브주(Punjab) 암리차르(Amritsar)에서 벌어진 학살사건과 1919415일 한반도에서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堤岩里)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은 오늘날 바로 우리가 반드시 바르게 풀어야 할 숙제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두 사건의 발생년도가 똑 같은 1919년이며 발생한 일자가 413일과 15, 이틀차이가 날 뿐임을 알 수 있고 두 사건 모두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으로서 무저항운동의 성격이 또한 같다는 것이다.

하나는 인도아대륙의 인도(印度)를 영국이 식민지한 상태에서 영국군대에 의해 학살사건이 벌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韓半島)에 일제(日本帝國)가 강압에 의한 식민지통치를 고집하는데 대항하는 민중운동으로 일본군대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다는 내용과 거의 동기와 발생상황이 똑 같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먼저 암리차르학살사건(Amritsar Massacre)을 보면 잘리안왈라 바그 대학살(Jallianwala Bagh Massacre)라고도 하는데 1919413일 인도북부(印度北部) 펀자브주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의 황금사원이 있는 시크교(Sikhism)성지(聖地)에서 외래품배척운동인 스와데이시(Swadeshi movement)요구와 자유를 억제하는 영국의 형사긴급권한법(Criminal Law Emergency Powers Act)인 롤라트법(刑事法緊急権限法:Rowlatt Act)19193월에 제정 발효되면서 이에 항의하기위해서 모인 비무장의 인도시민들에게 도검 쿠크리(Khukri)로 더 유명한 네팔출신 용병 구르카(Gurkhas:Gorkhas)부대가 무차별 난사한 학살사건을 말한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한 당시 상황은 영국에서 파견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가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하여 인도를 개척하였지만 최후 세포이항쟁(sepoy:1857-1858)의 책임을 물어 영국은 1874년에 동인도회사를 해산시켰으며 조선왕조실록, 마지막실록계보라 할 수 있는 철종(哲宗,章皇帝:,1831-1863,재위:1849-1863)인 것으로 파악되는 무굴황제 바하두르샤 2(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를 버마(Burma)로 추방하여 1862117일에 양곤(Yangon)에서 사망케 하였다는 것이고 이때부터 빅토리아(Victoria,1819-1901,재위:1876-1901)여왕이 인도여제(印度女帝: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Empress of India)로 겸임하게 됨으로서 영국에 의해 전인도가 직접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나타난다.

 

1917년의 영국 인도장관 영국계 유대인(British-Jewish)인 자유당소속 정치인 에드윈 사무엘 몬터규(Edwin Samuel Montagu:1879-1924)가 형식만의 자치를 인정하는 인도통치법의 발표하였고 19193월에는 인도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형사법으로서 언제든지 심리 없이 체포, 투옥이 가능하게 한 롤라트 법안(Rowlatt Act)이 공포되었다는 사실에서 억압정치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반영운동이 격렬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4월에 접어들면서 암리차르(Amritsar)를 중심으로서 판자브 주()에서는 대폭동이 발생하여 은행, , 전화국, 교회 등이 다수의 폭도에게 습격당해 수 십 명의 영국인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치안부대가 투입되었고 동시에 집회가 금지되었으나 413일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를 포함한 2명의 민족지도자의 체포에 항의하는 비무장의 집회가 암리차르(Amritsar)에서 행해졌다는 것이 사건 발단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여성과 아이들도 참가한 20,000여 명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나 비무장으로 폭력적 행위도 전혀 없었지만 인도출신 영국인 군인 레지널드 다이어(Reginald Edward Harry Dyer:1864-1927)가 펀자브 지방의 반란진압 여단장이 되어 그가 인솔하는 네팔출신 용병 구르카(Gurkhas)한 개 소대를 투입하였고 입구가 하나밖에 없는 광장에서 그는 발포명령을 내려 대규모시위대에서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등을 향해 10분부터 15분에 걸쳐 탄환이 다할 때까지 총격을 계속하여 379명이 사망하고 1,200 여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사건 결과이다.

다른 자료에는 이 때 사상자가 5,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후 계엄령(戒厳令:martial law)이 발령되어 폭동은 수습되었지만, 이 탄압에 의해 인도에서 반영운동은 점점 더 격화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191946일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에 의해 시작된 비폭력저항운동, 사티아그라하(satyagrah:非暴力,不服從)는 인도전국으로 반영운동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학살을 명령한 다이어 준장의 행동을 영국정부도 비난하였고 곧 대령에 강등된 후 파면되었지만 상원의 보수파의 보호로 본인의 건강상태의 악화를 감안하여 소추되지 않았다.

하지만 1940313, 사건당시 판자브(Punjab in India)의 주지사(1912-1919)였던 마이클 오드와이어Michael O'Dwyer1864-1940)는 학살을 방조하고 묵인하였다고 하여 학살 생존자인 우담 씽(Udham Singh)에 의해 런던에서 암살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한편 한반도의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의 설명을 보면 인도의 암리차르학살사건보다 이틀이 늦은 일제강점기인 1919415일에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으로 이것을 제암리사건이라 하였다.

사건배경은 일제강압정치와 식민지에 대한 반일운동으로서 19193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 운동의 여파라고 생각할 수 있고 3.1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331일 발안(發安)장날에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계속일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위키자료에 따르면 1919331일 정오, 발안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이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계획하여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였으며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의 위협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고 한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고 되어 있는 것도 인도 암리차르학살사건과 마찬가지로 판자브 주()에서 대폭동이 발생하여 은행, , 전화국, 교회 등이 다수의 폭도에게 습격당해 수 십 명의 영국인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치안부대가 투입되어 집회가 금지되게 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되자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하였으며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고주리 천도교인)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고 되어 있다.

 

이때 흥분한 시위군중들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업자 사사카(佐板)43명이 3리 밖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15일 제암리 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고 하니 소설같은 이야기 연속성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1일 발안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하며 42일 제1차 검거작전을 시작되면서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대장으로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었으며 6일까지 이어졌고 시위의 진원지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다는 것이다.

43일에는 수촌리 구장 백낙렬(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교회 전도사 김교철,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으며 4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시설은 물론이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는데 이것을 수촌리 학살사건(水村里虐殺事件)이라 했으며 4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작전을 벌였다고 나타난다.

413일 육군보병79연대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인도의 암리차르학살사건에서 네팔출신 용병 구르카(Gurkhas)한 개 소대를 투입한 것과 같다.

이 보병들에 의해 토벌작전이 끝난 발안지역의 치안유지가 그들의 임무였으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4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들어가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는 것이고 미리 명단을 파악하고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는 것이다.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을 가 하였으며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하였다.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하였으며 교회에 불이 붙자 ’(홍순진으로 추정)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남았다고 하였고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하였으며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태성)의 아내(19)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으며 홍씨’(홍원식 권사)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고 나온다.

군인들이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고 하였다.

 

이상 두 사건의 세부적인 기록을 보고 비교해볼 수 있었다.

오히려 인물 개별적인 신상까지 나열한 것은 한반도 쪽이니 더 신빙성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사실적으로 믿게 만들려고 소설 이야기처럼 사건을 연결시켰다는 것이 감지된다.

인도는 영국이 지배하였기 때문에 영국 용병 일개 소대가 광장에서 출입구를 차단하고 꼼짝할 수 없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서 학살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한반도는 일본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라면 소대급으로 시위대가 아닌 무고할 수 있는 양민들을 교회에 집합시켜 그곳에 몰아넣고 집중사격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교회에 다시 불을 질려 시체모두를 불태웠다고 하는 것은 마치 살인괴들을 보는 듯한 것에서 소름끼치도록 하나같이 똑같다.

 

이 학살사건을 선교사 수의학자, 세균학자이며 한국이름이 석호필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石虎弼:Frank William Schofield,1889-1970)박사가 현장을 찾아가던 중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리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들이 무엇을 알리려 했다는 것인가?

거짓의 한반도 역사를 알렸다는 것이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한국이름 '어비신'이라고 하는 애비슨 박사(魚丕信:O.R. Avison)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던 것은 분명한데 그곳이 한반도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가 1920년 3·1운동 견문록인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의 기록이 가르키는 사건 장소가 한반도이어야 한다면 그는 한국인에게 존경을 결코 받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수많은 선교사, 소설가, 언론인들이 코리아에 방문하고 한결같이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들이 전부 오늘날 한반도 역사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통으로 알려진 스코필드,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등 이런 사람들은 제암리학살을 고발하였다고 하지만 같은 년도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암리차르학살사건을 어찌 모른다 하겠는가?

같은 시간 동일한 사건을 한반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특별하게 고발했다는 것은 참으로 코메디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인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특별나지 않아 그들이 고발할 수 없었다는 것인가?

이슈가 되려면 양쪽 다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뉴스나 고발은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상황이 어떻게 지구땅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분야의 인사이겠지만 한편으로 볼 때 한반도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 주역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며 당시 활개를 친 황색언론의 대변자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실제로 이러한 참상을 실제보았다면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한반도인들에게 잘못된 역사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했어야 했다.

그들이 세상을 하직한 시기가 1970년 이니 충분한 시간도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에게 역사를 바르게 알릴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양심이라는 가면을 쓰고 잘못된 역사를 옹호했거나 동조했다는 오해는 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실제로 그들이 본 역사사실이 그 실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진실을 물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들이 무엇을 실제로 보았는지 어떤 외부로부터의 영향력이 없이 순수하게 정상적인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참상을 고발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서세와 같이 역사를 조작하고 날조하기 위해 협력자가 되어 그들에게 동조하기 위한 고발이었는지 밝혀 물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교묘하게 이렇듯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았다.

문제는 사건을 소설 같은 이야기로 나눈 것이 아닌 실제 당시 세계전역에서 비일비재하게 자행된코리안 학살사건이 있었고 암리차르(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난 인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를 정확하게 밝혀진다면 근세기에 만든 근대사가 엉터리라는 것이 금방 들어날 이야기가 아닌가.

근세기에 역사를 장악한 서세들이 분리한 동양사는 동양 사람이 전제되어야 하고 서양사는 서양 사람이 전제되어야 하는 날조된 원칙이 아니라 사라져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체제”에서 동양과 서양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한무리가 되어 공존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역사에서 이런 "코리안 학살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난 것인지를 반드시 밝혀 알아야 할 우리 모두에게 책무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이 물음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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