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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와 인디즈(indies, 대조선)
글쓴이:한부울
인도시성(印度詩聖)이라고 추앙받는 라빈드라나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그의 시를 통해 코리아란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는 근대사로 인해 엄청난 변형이 된 이 인디즈(indies)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진실의 이야기고 알리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가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시(詩)가 아닌 역사(歷史)를 문자가 아니라 영혼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방의 등불이란 이 시(詩) 한편은 당시 일본압제 속에서 절망하면서 초라한 가슴을 부여안고 마지 못해 생을 연명하고 있던 우리 민족 가슴에 그나마 희망이란 더운 온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그 시를 선물한 타고르 자신의 입장도 생각해보면 인도란 자신의 조국이 영국에게 식민지 된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아니기깨문에 이러한 시상이 떠올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졸지에 세계질서가 서세에 의해 붕괴되고 극명하게 나눠진 패자의 아픔과 절망이란 동일한 형편에서 희망과 기대와 바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하겠다.
이 시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타고르 자신이 이 시를 쓸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상태를 우리가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 스스로가 같은 아리안(Aryan)이 되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우리민족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라면 어쩜 그는 corea 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였지만 조국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타고르는 하나의 체제를 조선이라 했다면 조선인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하나의 체제를 고려라고 했다면 고려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아리안(Aryan)으로서 동질성을 말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아리안이 숭배하는 신 베다(Veda)라는 성전을 접하고 우울과 고민에 빠졌다 하였다.
인도 자국사정을 볼 때 타고르가 태어나기 3년 전(1858년:인도제국성립)이미 인도제국이란 국명아래 영국국왕의 통치를 받으며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에 대한 실망과 갈등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인도가 국가명인지 아니면 상징적 역사명인지 현재로선 알수가 없다.
영국과 인도(印度)!
사실 따진다면 영국도 당시 국명으로 불리던 적이 없다.
최소한 1858년까지는 무굴제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인도회사를 1874년에 해산하였다 하였으며 1877년에 가서야 정상적으로 영국이란 이름으로 식민지가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후 4년 후 1881년 대조선은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1862년 11월 7일에 양곤(Yangon)에서 사망한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는 조선왕조실록정식계보로서 마지막제왕인 철종(哲宗,章皇帝:1849-1863)이 아닌가 한다.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로계보에 제외된 고종(高宗,1852-1919,재위:1863-1879, 1897-1910)은 이 후 많이 축소된 상태에서 서세에 의해 옹립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1858년 영국이 인도를 본격적으로 통치했다고 하지만 인도(印度:india)란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체제를 금방 분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인도대륙을 그 전에는 무엇이라 지칭했을까?
어쨌던 통치 주체국인 영국의 결정이었을 것인데 결국 인도로 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인도(india)라는 단어는 어쩌면 영국의 통치가 있기 이전 명칭이었을 것이지만 역사상징성이 매우 높다.
그럼 인도(印度)와 병용된 명칭은 아마도 코리아가 아니겠는가 한다.
영국이 무단통치를 하기 시작한 인도제국이 성립되면서 부터 타고르가 고민에 빠졌다는 이야기다.
영국으로부터 쫓겨 간 인도전통적인 통치세력들은 과연 정체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궁금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같고 그 때 베다 연구를 시작 한 것 같다.
아버지가 성자라고 하였으니 사제계급이라고 보았을 때 최고계급 신분인 브라만(사대부양반계급)집안이다.
일단 집안이 부유한 터라 영국 엘리트 교육을 받아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타고르는 베다를 통하여 아리안(Aryan)이 인도의 전통적인 지배세력으로 보았다는 이야기고 전통적 지배세력은 근세기 영국에 의하여 쫓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처음에는 그 아리안(Aryan)이 일본으로 알았다가 바로 조선(고려:corea)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동방의 등불”과 “패자의 노래”란 제목의 시를 쓰게 된 사실을 우리는 쉽게 추리 할 수 있다.
베다를 습득한 타고르 역시 처음부터 조선이란 명칭과 고려:corea 란 존재를 몰랐다고 할 수도 있다.
1913년에 알려진〈기탄잘리 Gtñjali〉('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그 공로로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영국탄압에 저항하였고 그 뒤 약 5,000명이나 학살 또는 사상자가 발생한 1919년 암리차르(Amritsar)대학살사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하고 말았다고 한다.
1919년 암리차르(Amritsar)대학살 사건은 치안유지의 강화를 시도하는 영국의 인도정청(印度政廳)이"무정부주의적·혁명적 범죄에 관한 법"을 1919년 3월 성립시키자 이에 반대하여 1919년 4월 6일 간디의 호소로 전국적인 파업이 실시되었고 같은 달 13일 펀자브주 암리차르시에서 항의집회가 이루어졌으며 시위 장소는 잘리안왈라바그로 알려진 광장이었는데 이곳에는 출구가 1개뿐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영국 무장 군인들이 난입하여 인도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무저항주의 민중봉기 운동사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 소식은 인도대륙 전국으로 퍼져나가 항의 집회가 계속되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정청은 계엄령까지 선포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1919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던 3.1일 운동과 시기적으로 같고 많이 겹쳐진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과 함께 일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조선총독부 총독이 되어 무단 통치를 일방적으로 시행함에 반발 한 것이라고 나타난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에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시 하는 것은 어떻게 같은 년도에 그것도 같은 무저항주의 운동이 한반도와 가까운 대륙이면 몰라도 직선거리로 5,000키로 떨어진 장소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 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영국총독부 인도정청이"무정부주의적·혁명적 범죄에 관한 법"을 1919년 3월 성립한 것에서 살펴보면 이상하게 인도대륙의 영국과 한반도의 일제가 추구하는 목적이 똑 같다는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0 km나 떨어져 있는 한반도와 인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촉발되었다는 점이 이상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사건은 날조된 역사 냄새가 진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삼일운동이 일어난 배경으로 일본총독이 휘두르는 무단통치라고 하지만 기실 사건 흐름으로 보았을 때 강력한 통치방법에 의한 수단적인 면에서 영국처럼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어딘가 모르게 꾸며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고 있다.
반면에 똑 같은 무단통치에 반발이라고는 하지만 영국총독부가 1919년 3월에 성립시킨 "무정부주의적·혁명적 범죄에 관한 법"이 민중에게 극단적인 반발을 야기 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만들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혹 인도에서 항의가 끊이지 않고 극단적으로 학살행위가 자행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성이 많다고 여기게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벌어진 상황들은 매우 주관적인 사실만을 열거하고 있으며 거의 소설과 같은 픽션적인 설명이 사건을 전체를 포장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은 반도역사를 조작한 일제가 고도의 술수를 부려 한반도에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인도인들이 평소 흰옷을 즐겨 입는 다는 사실에서도 친근감이 있다.
우리 한반도인들이 흰색옷을 좋아한다고 백의민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한반도에서 같은 년도에 3월1일 삼일운동이 먼저 일어 났고 인도는 같은년도 4월 6일 간디에 의해 촉발된 것이 4월13일에는 이런 거대한 집회가 생성된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시간차를 두어 동일한 사건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은 33인과 3월1일이란 상징성으로만 존재하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인도의 4월13일 집회에 의한 학살사건은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 있는 아주 구체적인 사건임을 우리가 목격한다는 것이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한반도 삼일운동을 주도하고 희생한 유관순이란 여인이 일제의 잔혹성의 희생자로 남아 전설처럼 기록으로 전하고 있으나 인도는 간디란 불세출의 영웅은 해방 후 인도총리까지 오르게 된다.
역사 현실성이 인도가 더 신빙성이 있다.
같은 무저항주의 운동이라고 하지만 인도에서 발생한 운동은 사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삼일운동은 운동집회 회수가 무려 1214회란 숫자에서 보듯이 전국적으로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임에도 그 당시 삼일운동에 참가한 일반인들의 증언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1919년 5월4일부터 2개월간에 걸쳐 대륙전역에서 일어난 반일(反日)애국운동 즉 5.4운동이 더 사실적이라는 것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정작 빠르게 일어난 3.1운동은 마치 픽션같이 처리되었고 나중에 일어난 무저항주의운동들은 사실성에 가깝다는 것은 무엇인가 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비폭력무저항운동이 발생된 시기별로 본다해도 제일먼저 한반도에서 3월1일에 일어났고 그 다음 인도가 4월13일이며 대륙에서 일어난 반일운동은 5월4일이라 마치 도미노처럼 한반도에서 인도, 그리고 대륙으로 연결되는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도는 영국에 의한 것이지만 한반도와 대륙은 일제에 의한 것이 다르다.
여기서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세 사건 중 하나만이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동일한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운동을 여기저기 포진시켜 다르게 꾸몄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조선의 상대가 영국과 일제라고 보았을 때 인도 민중운동이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조선을 복권시키기 위한 복고운동의 일환으로 대중이 애국적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근세사에서는 기록을 중요시 하였다.
지금도 서양인들이 기록에 치중하는 점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기록을 마치 역사처럼 사용한 나라가 영국이 그렇고 일제가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두 개의 국명은 같다는 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렇다면 일본과 영국은 같은 세력이었으며 장소 역시 하나의 체제에 종속된 장소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기록이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그들에 의해서 전부 역사처럼 만들어 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사진과 삽화, 기록과 지도, 항해일지 등 실증사적으로 보면 사증으로 인증 해주지도 않을 것들이지만 이것들을 서세들은 충분히 활용한 것이다.
어쩌면 대조선은 이러한 서양 술수에 희생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고 사진과 삽화를 첨부하면서 조작된 항해일지와 지도를 남긴다면 누가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또한 근거가 없다.
증거를 제시하는 쪽이 뒤바뀌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마치 소를 제기하는 사람이 증거를 제시하여야 하는 것처럼 꺼꾸로 사실의 역사를 주장하는 측이 소를 제기해야 하는 형국에서 그들이 기득권이 되었기 때문에 소를 제기해야 하는 측이 사실의 역사 증거를 내 놓아야 하니 이것이 부합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암리차르 대학살사건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간과하고 있는 중요사건들 중에 하나 일 수 있으며 만약 대조선을 indies라고 하였을 때 인도와 어떤식으로든지 연계될 수 있는 것이어서 단정 지울수는 없지만 한반도 삼일운동(1919)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분석하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타고르는 암리차르(Amritsar)대학살 사건 이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세월을 보내게 되지만 평소 아리안족의 자취를 찾고 있던 그가 아리안족이 "고려:corea" 란 사실을 알고부터 엄청난 갈등을 가졌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1929년 68세때 그가 일본을 방문하게 되지만 그 당시 일본이 동남아, 대륙남부에 국제적으로 세력을 떨치며 대만, 열도를 모두 차지하고서도 한반도까지 지배하고 있을 때이니 영국에 쫓겨 간 인도의 전통적 통치세력 즉 아리안이 그들인 줄 착각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일제가 대조선을 대신하여 얼마나 날뛰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이 열도일본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영국에 쫓겨나간 아리안(Aryan) 즉 인도(印度:indies)의 전통적인 지배세력이 "고려:corea" 란 사실을 암과 동시에 그것도 인도대륙보다 몇십배나 작은 한반도에서 인구도 얼마되지 않게 조그마한 나라가 되어 일본지배까지 받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나라로 변한 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타고르 자신도 얼마간 충격에 빠졌을 것이고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에서 “동방의 등불”과 “패자의 사랑”이란 시를 남긴 것이라고 여겨진다.
...자유의 천국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곳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대조선은 영국과 달리 자유로운 곳으로서 마음이 인도되는 자유의 천국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글귀이다.
여기서 주지하여야 할 사실은 무엇때문에 어떤이유에서 타고르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 한반도 조선(corea)을 스스로 "마음의 조국"이라고 하면서 무한의 애착심을 가지게 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당시 그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읽으며 우리가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이 타고르시가 일본압제에 대한 보상심리로 남아 있게 하기 보다는 천축(天竺), 인도(印度), 인디즈(indies)란 비밀스런 커턴을 걷어내는 열쇠로 역할을 기대하면서 아쉬운 심정을 덮는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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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5.7-1941.8.7)
명문 집안에서 성장해 전통적인 인도 고유의 종교·문학에 친숙해짐과 동시에 영국문학도 배웠으며 진보적인 아버지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1877년 영국에서 약 1년 머물고 돌아온 뒤 우울과 번민 속을 헤매다가 1880년 시집 《아침의 노래(1883)》를 발표, 예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동방의 불꽃》과 《패자(敗者)의 노래》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 탄생의 진짜내용
이시는 타고르가 일본에 왔을 때 한국의 모 신문사 기자의 부탁으로 쓴 시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성이다 .
그는 역사 학자며 초창기 부터 전해 내려오는 흰두교 경전 베다 연구의 거목이며, 철학자며, 교육자며, 정치가며, 외교가였다.
그가 베다(veda 인도最古의 聖典)를 연구 하다가 발견 한 아리안족(Aryan)의 인도 진입 과정을 읽게 된다. 아라랏 고개를 넘어 검은 바다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어 타림분지를 지나 흰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indus)평원인 샤프타 신드후(Shapta Sindhu)지방에 정착하였던 아리안족의 행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길 떠난 무리의 주류를 추적하게 된것이다. 처음에는 일본이라 생각 했는데 한국의 단군신화를 접하고 베다의 나타난 단군의 나라와의 수많은 교류와 그들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게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일본에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힘 없고 인구도 얼마 안 되고 한 우리나라를 창조주가 계획한 숨겨논 앞날을 바라보고 우리나라를 그토록 극찬 할수 있었다 한다.
(타고르의 자서전에서 발췌)
아리랑 고개, 아라랏 고개, 아라랏(Ararat)산 http://blog.daum.net/han0114/17049876
(1)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The Lamp of the East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2)패자(敗者)의 노래
퇴각의 길목 지키며 패자의 노래 부르라
선생이 내게 요청하니
패자란 남몰래 선생이 사랑하는 약혼자이기에
어둔 빛 너울을 그녀가 쓰고 여느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나
가슴 깊이 어둠속에 빛나는 보배를 간직했네.
그녀는 밝은 햇빛에 버림받아 밤에는 번쩍이는 눈물 흘리며
이슬 젖은 꽃, 손에 들고 바라고 있네.
신에게 광명을 갖다 주길 말없이 눈을 내리감은 채
바람과 함께 불평소리 나도는 그의 집을 그녀는 뒤로 했네.
그러나 별들이 고욕을 나타내는 사랑스런 얼굴을 가진
그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에 힘을 돋구지.
고독의 방문 열렸네, 부름이 왔어.
그대 가슴을 두근거리네. 어둠 가운데, 뜻있는 시각의 불안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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