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은진미륵불

한부울 2010. 3. 27. 22:47

은진미륵불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모르게 이상하다.

조선말 일제사진 과 한반도 지금 은진미륵사진을 비교할 때 이상한 괴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첫째 은진미륵상 뒤에 나타난 배경인 산 지형적 차이와 불상배치가 다른 것 같고

둘째 은진미륵상이 주는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정감이 다른 것 같다.

인도서북부 간드라지방에서 불상을 조성할 때 부처님 이마에 둥근 구슬이나 눈과같은 표식한다.

세째 은진미룩상 이마에 붙은 둥근 표식 즉 백호(白毫) 모양이 많이 다르다.  

 

현재 한반도 은진미륵은 근세기 들어 새롭게 만든 불상은 아닐까?

조선 말 사진은 대륙 충청도에 있었던 은진미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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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불

보물 제218호 석조미륵보살입상.

 

관촉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에 있는 절이다.


관촉사는 우리에게 은진미륵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높이 19m, 둘레 9.2m, 귀 길이 2.7m, 눈썹 사이 1.8m, 큰 갓의 길이 3.3m.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대 석조 불상이다.

은진미륵 옆에 있는 사적비에 따르면 관음보살입상(속칭 은진미륵)은 968년(고려 광종 19년)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해서 무려 37년이나 걸려서 완성했다 한다.

머리의 화불이 내는 황금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중국의 송나라 승려인 지안이 그 빛을 보고 예까지 찾아와 예불하였으며, 그 빛이 마치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지었다고 한다. 은진미륵과 관련해 전해지는 설화는 그때의 일을 다음 같이 전하고 있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더니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땅 속에서 솟아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혜명대사에게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명했다. 석공 100여 명과 함께 공사를 시작했으나 바위가 하도 커서 머리를 들어 올릴 방법이 없어 걱정하던 혜명이 어느 날 냇가에서 놀던 어린이들이 부처를 모신다고 하며 밑 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아 올려 덮고 다시 모래를 쌓은 뒤 맨 위 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 거기서 방법을 깨달은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이 석불은 아무리 바라봐도 도무지 사실감이 들지 않는다. 19m나 되는 거대한 키, 육중한 몸은 사람의 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머리 위에 화불이 있었던 흔적으로 미루어 이 부처가 본래 관세음보살상임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석불을 미륵불로 부르고 있을까. 이 석불이 조성되었던 고려 광종 때면 아직 왕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배층에겐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상징할 수 있는 확실하면서도 거대한 조형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은진미륵을 바라볼 때마다 그 얼굴에서 근엄한 권력의 얼굴을 떠올린다. 미륵은 미소를 짓고 있긴 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 듯 웃는 둥 마는 둥 얼치기 표정을 짓고 있다. 발바닥마저 육중하기 짝이 없어 간질밥을 멕인다한들 쉽게 웃을 것 같지 않은 얼굴이다.


권력은 하고 많은 부처 중에 왜 관세음보살을 세운 것일까. 마치 자신들이 모든 백성의 앓는 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관세음보살인양 자처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권력의 의도를 철저히 배반한 민중은 저토록 근엄한 권력의 얼굴에다 결국 자신들의 염원을 투영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권력의 상징 관세음보살은 철저히 해체되고 민중의 미륵이 돼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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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은진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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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반도 은진미륵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