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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글쓴이:한부울[韓夫蔚]
[대한제국 4편]
1) 머리말
2) 순종과 다이쇼왕은 동일인물
3) 실증주의와 끼워넣기한 유럽사
4) 코리안학살
5) 한국인은 문맹이 많고 가난했던가.
6) 한반도는 본래 역사터전인가?
7) 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
4) 코리언 학살
코리언 학살이란 단어는 한반도 사람들을 국한 시키는 단어가 아니란 사실부터 우리는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하나의 역사체제에서 코리아라는 명칭은 각기 다른 음으로 세계여러지역에서 상징적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될 수 있는 가능성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스톤헨지와 같은 방법으로 유럽사가 끼워넣기에 의해 생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본다.
있을 수 있는 비근한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을 너무 침소봉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랑케가 주장한 것처럼 실증주의를 바탕으로한 세계사라면 이러한 오류는 간단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수많은 오류중에 하나일 수 있고 또한 역사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유럽사를 만들려는 세력들이 근세기에 총칼을 잡고 세계질서를 지배하였다면 상대적으로 핍박받을 수밖에 없는 삼한역사의 소속된 개체들은 그들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암리차르 학살사건과 제암리 학살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1 에서 보았듯이 1919년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은 인도의 암리차르학살사건(Amritsar Massacre)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수촌리 학살사건(水村里虐殺事件)역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은 인도을 점령한 영국 잉글랜드에 의해 자행된 살육전은 극에 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무엇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1만년의 인류역사가 가진 최소한 안정장치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때문에 기존 "하나의 역사"는 총칼을 가진 서세들이 차지할 수밖에 없는 전유물, 소유물에 속하는 종이에 쓰여진 기록에 불과하다는 사실말고는 특별할 것이 없다.
문제는 기존 역사사실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려했던 사실과 사상과 서적을 없애려 하였을 것이며 기존역사를 땅에 묻어버리고 그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로 하여금 사실을 은폐하거나 뒤 덮으려고 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자행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큰 전쟁이나 대대적인 학살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할 때 그들이 택한 것은 수학적 확률에 의한 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하면 제로(0)가 되는 제로섬게임(zero-sum game)법칙을 그대로 적용했을 것이라는 판단은 어렵지 않게 한다.
그렇다.
근세기 역사전쟁은 바로 제로섬게임이라 할 수 있으며 역사기억지우기에 일환으로 세계전 지역에서 실행되었을 것이다.
대한(大韓)!
그 이름도 가슴 벅차게 하는 그레이트 코리아(Great Corea)!
소도경전(蘇塗經典)에 한(韓)은 황(皇)인데, 황은 대(大)며, 대는 일(一)이다 하였다.
위 황(皇)라 함은 바로 구황(九皇)의 의미이다.
구이(九夷), 구한(九韓), 구황(九皇), 구맥(九貊), 구려(九黎), 구주(九州)은 세계 전역을 말한다.
한(韓)은 천지사방(天地四方)에 해가 비추고 가죽(韋)옷을 입은 사람이 서있는 형상이라 하였으며 하나(一)은 하늘(天)을 낳고, 하늘(天)은 '크다'·'많다'의 간(干)으로 발전하였고, 간(干)은 환(桓)으로 이어진 것이라 하였으며 환(桓)은 한(韓)으로 되었고, 한(韓)은 한(漢)과 한(汗)으로 변천하고 발전했다고 풀이한다.
즉 동아시아대륙사에서 한(漢)과 한(汗)은 한(韓)에서 발전한 부속개체라는 확실한 정의가 내려진다.
다 같은 동음이지만 원조는 한(韓)이라는 말이다.
이 문제만큼은 이제 누가 뭐라해도 정립할 수 있어야 하고 좀 헷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한은 하나이어야 하고 이름자체가 본래 컸고 더하여 더 크다는 뜻이다.
얼마나 컸길래 이런 명칭이 붙여야만 했을까?
컷던 만큼 역사말살에 의한 휴유증도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임도 잠시 생각하게 한다.
위 정의를 토대로 할 때 대한이란 명칭은 바로 세계(世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대한이란 이름의 "코리아(COREA)"의 실체가 위와 같았기 때문에 서세들은 오래적부터 겁을 집어먹고 CORE, CORAI, COREA, COREE,란 명칭에서 경이적인 것으로 보았을 것이 틀림없고 동시에 위엄과 권위에 올라타려고 했을 것이고 도전하려고 절치부심했다는 것은 축소된 반도역사에서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들의 세상이 되자 이 대한(大韓:COREA,COREE)이 가지고 있던 역사를 없애버리려고 애를 썼던 것이 틀림없다.
하나의 체제, 하나의 역사가 힘을 달할 때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격변기(激變期)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제1차대전에서 발생한 쌍방 희생자가 3천만명과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인명 손실이 발생한 쌍방이 합쳐 7천3백만명이나 되어 두 큰 전쟁의 희생자숫자가 합계 거의 1억명이란 계산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 또한 정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변혁기라고 할 수 있는 1900년부터 1950년까지의 세계인구통계를 보면 1900년 16억5천만명, 1910년에 17억5천만명에서 10년간 1억인구가 증가하여 증가율 6%로 나타나고 1차세계대전이 끝나던 1920년에는 18억6천만명으로서 하여 10년간 증가율이 6%로 거의 비슷하게 나나타며 1930년에는 20억7천만명으로 증가율 11%로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나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인구증가율은 앞 선 10년증가율보다 거의 배가 증가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1940년에는 20억3천만명으로 인구가 나타나 인구증가율 똑같이 11.1%이며 2차세계대전이 소용돌이 친 10년이 끝난 시점 1950년은 25억2천5백만명으로 9.7%의 증가율을 보여 계산상 약 3,200만명이 감소되는 수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숫자는 세계인구전체를 알 수 있겠지만 개략적인 의미에서 더 정확할 수는 없다.
이 글에 들어가기 전 본 블로그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그리이트 타타르의 영역에 존재하던 타타르인들의 정확한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사실에서 2차대전 말미에 현재 러시아영토내에서 코리안들이 거의 6천만명 학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타타르인들의 행방과 연결될 수있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이와같은 모든 상황을 짐작하건데 역사명칭의 코리안들이 2차세계대전 와중에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가 기억지우기의 일환으로 희생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세계삼한역사가 가지고 있던 역사가 사라지는 고통과 참혹함은 실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거대한 역사이기에 삼한의 역사기록만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며 제로섬게임에 걸 맞게 그들의 목적달성을 이룰 수 있는 공간에서 코리아를 지워 없애야 하기때문이다.
인정도 사정도 없는 역사 기억지우기가 광범위하게 시도되었을 것이고 이에 따른 한국인(COREAN)에 대한 고의적인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피해 피난, 피신, 귀화, 신분을 숨기면서 안전한 곳으로 위장하거나 한반도까지 쫓겨간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론 의도적으로 한반도로 집합시켰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서두에서도 언급한 사실이지만 학살의 대상이었던 한국인을 현재 우리의 모습만 생각하면 오류가 있는 것으로서 코리안들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조심스러움도 없지 않다.
프랑스자료를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란 제목으로 동일한 파트에 들어있는 그림들이 모두 우리들에게 낯이 익은 것들이다.
한국인(coréen)이 아니라 "한국에서(en Corée)"의 학살이라 하였으니 한국인은 생략하고 한국에서란 제목의 그림에서 알려주는 것은 코리아의 위치가 포괄적인 것임을 알게 하고 특히 라틴어를 사용하는 코리안들을 학살하는 사실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코리아영역에서 코리안을 살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 놀라운 그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첫째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로서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 알려진 프란시스코 고야 (rancisco Goya:1746-1828)의 작품 1808년 5월 3일의 학살(The Third of May)그림이다.
총 5개의 작품이 있고 제일 위에서부터 차례로 전개되는 것을 연결하여 최종 메인은 제일 막지막 게시된 그림 제목 "5월 3일(El tres de mayo)"이란 작품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다.
고야가 그린 그림 5점 모두가 코리아에서 발생된 사건의 그림이라는 이야기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에 인물들은 모두 라틴어를 사용하는 코리안들임을 알게 한다.
위 그림들의 전개를 보면 처음 마드리드에 들어왔을 때 아기를 안은 부녀자, 돌을 든 부녀자, 직접 단도를 들고 나선 부녀자들이 시민군과 합세하여 나폴레옹군대와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모습은 반도역사의 행주산성싸움을 보는 듯하며 그 다음 그림에서 시민군의 활약모습이 그려져 있고 다음에는 나폴레옹군대에 반하는 사람을 군인들이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묘사되었으며 그 다음 4번째 그림은 5월 2일까지 시민군과 치열하게 전투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고 그 다음 그림은 메인으로 그 다름날인 5월 3일 바로 문제의 낯이 익은 학살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이다.
일부러 진행과정을 알 수 있게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끈 막강한 프랑스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고 지배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반항하는 세력들에게 공포심을 가지도록 광장에서 그들의 입성을 구경하던 무고한 양민들을 끌어내어 학살하는 장면으로 대다수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전혀 알지못하는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존재들이라는 해설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그림이다.
물론 이 그림 역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란 파트내의 있는 작품이다.
설혹 이것에 반한다 하여도 고야가 그린 그림의 의도가 코리아영역에서 일어난 종합적인 사건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나폴레옹이 하나의 체제에 반기를 든 반란자로서 스페인이라고 하는 고려(高麗)를 침략한 것이며 학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코리아영역에 있는"코리아안"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가 있다. 물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을 평안도(平安道) 용강(龍岡)출신의 홍경래(洪景來)로 보는 것이니 만큼 그는 분명 고려(COREA)에 대항하는 반란 수괴가 틀림없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두번째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1832-1883)의 1868년 작품 합스부르그 왕가(House of Habsburg)의 막시밀리안 대공인 '멕시코 황제의 처형(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이란 제목의 그림 역시 합스부르크왕가는 전통적으로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이은 귀족왕가로서 신라의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962-1806)이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지만 삼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을 통해 합스부르크왕가(House of Habsburg)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표면으로 하여 1918년까지 지속된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1848-1916)의 동생인 막시밀리아노1세(Maximiliano I,1832-1867)멕시코황제가 코리아체제의 귀족이었다는 사실이며 사형집행한 멕시코 반란자들은 유대자본을 쥐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주를 받았던 세력임을 감안할 때 역시 나폴레옹과 다르지 않는 서세의 반란조직이거나 서세의 용병들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 그림 역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란 파트내 들어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고 프랑스에서 활동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노근리 학살'이라고 전제하는 1951년 작품은 발표시기가 1951년이기 때문에 6.25사변과 연결되고 있지만 미국군대가 당시 코리안(COREAN)을 무차별 학살하였던 사실에서 남한"노근리"만 한정시킨 것이 아니라 당시 미국 또는 서세가 한국인을 총제적으로 학살한 모든 사건을 함축한 사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평론가는 이 그림의 총을 들고 있는 무리를 서양세력(西洋勢力)으로 비유하고 있다.
[Mural del Gernika:1937]
이데올로기문제에서 피카소 역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社會主義:socialism)로 분류되어 냉전시대 소련과 북한에 기울어졌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던 화가지만 나치 독일공군의 폭격으로 도시인구의 1/3에 달하는 1,654명의 사망자와 88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한 게르니카 학살사건(Bombing of Guernica:1937)을 고발한 "게르니카[Guernica]"라는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볼 때 객관적으로 노근리사건뿐만아니라 코리안(한국인)들이 서세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는 모든 사실을 알리려 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사회주의자이지만 스페인 말라가출신으로 같은 역사적인 하나의 체제였던 고려인이라고 할 때 한국전쟁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알리고자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같은 연결의 끈은 전혀 한반도사람과 연관이 없을 인도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가 "마음의 조국 코리아"라고 시(詩)를 영혼으로 읊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에 열거한 모든 그림들이 놀랍게도 분명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로섬게임 법칙에 따른 연관성에서 볼 수 있는 사건으로 또한 뛰어난 화가의 작품이 밑받침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노근리학살이 있었던 6.25사변이라고 하는 한국동란 즉 한국전쟁에서도 폭격에 의한 학살이얼마나 심각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자행되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고 하지만 서방세계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전쟁을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 하는 것을 보면 한국전쟁은 서세들에게 숨겨야 할 전쟁이었던 같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때문에 서방세계 언론들은 이 전쟁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던 것일까?
청일전쟁, 미서전쟁, 러일전쟁 등 동양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사건들은 삽화를 그려가며 실제 사건보다 더 크게 보도하던 당시 황색언론들이 정작 한반도 전쟁에서 이처럼 조용했다는 것이 참으로 이외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 전체인구 당시 3,000 만명(남한:2100만명, 북한:900만명)중에 민간을 포함한 인명피해가 500만명을 넘는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야말로 처참한 큰 전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서방언론들은 조용했다고 한다.
이 인명피해 숫자를 비교하면 1492년부터 1900년까지의 아메리카식민지전쟁에서 인디언의 인명손실 200만명에서 500만명 숫자와 거의 비슷한 수치라고도 한다.
Total civilians killed/wounded: 2.5 million
영어자료에는 민간을 포함하여 남한의 사상자 수가 990,968명, 북한은 1,550,000명으로 합계 약 250만명으로 집계하고 있으며 인명손실비율을 보면 남한은 4.7% 인데 비해 북한 인구의 17%가 넘는 것으로 인명손실은 북한 쪽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난다.
위키자료에서 전황을 보면 1945년부터 1950년 6월 25일 전에도 38선 부근에서 내란 형태의 국지적 무력충돌이 지속되다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하여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였고 이처럼 불법으로 북한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시도하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540명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 특수 임무대(Task Force Smiths)가 참전하면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북한선제공격이었지만 미국에 의해 전쟁이 유도되었다고 하고 미국은 통일보다는 한반도 분단을 원칙으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에서 전범국인 독일처럼 분단을 고집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을 발발시켰다는 오해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해방후 미국이 한반도를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처지임에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전쟁을 막지 않았다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북한이 남쪽까지 밀고 들어오길 기다려 비로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남침한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남한 땅 전역을 무차별적 폭격의 대상지역으로 삼았다는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인권을 중요시 하던 미국에서 가장 염려해야 했던 것은 남한을 폭격함으로서 주민들의 인명손실과 유적파괴라 할 수 있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다.
여러분들께서는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가.
'한국인의 박물관'이라는 뜻의 코리안들이 만든 영문잡지라는 것이다.
이 영문잡지는 코리아란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박물관'이라는 뜻의 이 영문잡지는 현재 우리모습의 몽골리안들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주축된 것이라 하니 더욱 괴이하다.
물론 일찍이 본 블로그를 통해 한국인들 중에 코카소이드 인종(Caucasian)들도 구성원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크게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지만 이들이 과연 미국인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미국국적을 가진 사람인가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은 증발된 것처럼 없어진 지식층에 사람들로서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서양계 코리안임이 틀림이 없다.
처음 창간은 1892년 때론 영국인이라 알려졌지만 미국 오하이오주에 태어난 플랭크린 올링거(武林吉:Franklin Ohlinger:1845-1919)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서 그는 1887년에 이미 한글을 정복하였고 이것에 의해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잡지라고 하며 동년12월에 휴간되었다가, 1895년 미국인이며 한국이름 아편설라(亞篇薛羅)라고 하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와 한국이름 홀법, 할보(訖法,轄甫)라고하는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등에 의해 계속 속간되었지만 이상스럽게도 돌연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이듬해인 1899년에 폐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왜 미서전쟁 이듬해에 폐간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혹이 없을 수가 없다.
이 미서전쟁은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고려와 미국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 코리아가 존재한다는 역사적인 문제 중심에 있으며 이로인해 폐간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미서전쟁과 밀접한 연관성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서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에 의해 중지되었다는 것이며 유대자본이 미국의 경제권을 60% 넘게 장악한 상태라면 운영권이 황색언론에게 장악되었다든지 아니면 금전적으로 미국이 지원을 막아 더 이상 발행을 할 수 없도록 큰 제약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반도 기록들은 모두 한반도에서 발행한 것처럼 모두 말을 맞추고 있다.
6.25전쟁 당시에 병사들이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70%였다는 감안할 때 올링거는 한글숙지도가 한반도 사람보다 빨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문맹자가 이렇게 많은 한반도에 영문잡지를 발행한다는 것도 이상스러운 것이라서 이 영자신문이 발행될 수있는 환경은 한반도가 아니며 북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사실은 한글을 한반도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더 많이 알려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때문에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을 창간한 감리교 선교사 플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가 1919년 한반도에서 사망했고 그의 묘석들이 한국전쟁에서 파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증명할 길이 없기때문에 확인이 불가하다.
이같인 영자신문을 최초발간한 미국인이 한반도에서 사용하여 묘석이 남아 있어야 함에도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인하여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무엇때문에 미국은 한국전쟁 중에 특히 남한을 이렇듯 쑥대밭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
소위 한반도 역사자체를 싹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무차별적 마구잡이 폭격이 아니라 좀 더 제한적이고 신중하게 폭격을 감행했어야 옳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기간 동안 폭격에 사용된 폭탄의 수가 1차 세계대전과 맞먹는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초토화하였다는 비유가 맞고 그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한반도에 한정된 전쟁이라지만 사상자수가 500만명이라는 피해사실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 결과 남한에는 45%에 이르는 공업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고 북한은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교통시설이 파괴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거의 한반도 땅은 완전히 초토화란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 땅에는 풀한포기가 나기 힘들었다는 사실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한반도 주민들이 생명자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기적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면 불과 한국전쟁이 발발되기 전 5년 앞에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절대적으로 극복해야만 하는 최고의 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열도에 상륙하는 문제를 놓고 말이 많았고 결국 미국군대는 인명손실을 핑계로 상륙조차하지 않았으며 주요도시 몇 군데만 폭격한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뒤처리는 두 개의 핵폭탄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미국인에게 총부리 한번 뿌리지 않고 큰 소리조차 하지 않았던 한반도 그것도 미국이 만든 정권이 들어선 남한은 물론이고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전지역을 대상으로 일본에 투하하지 못한 폭탄을 무자비하게 퍼 부었다고 하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도 이해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아니 이것은 어떤 원한에 사무친 한반도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보복이 아니면 이런 행위가 가능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것은 한반도 역사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무차별적으로 폭격한 곳에 유적파괴조차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반도역사가 말하는 오천년의 역사 자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반도역사자체를 믿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즉 역사에 의한 유적이 아니니 폭격해도 무방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지역에 그처럼 막무가내식으로 폭격을 가했다는 것은 아무리 냉전구도라 하지만 그것만으로 볼 수 없는 또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역사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며 공산정권인 북한은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남한지역에 무차별 폭격한 사실은 도가 넘는 군사행위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유네스코 폭격금지조항에서 특히 역사유적이 있는 지역에 폭격을 금지한다는 것에서도 크게 위반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처음 분명 3.8도선이 그어진 1945년부터 지속적으로 국지적인 내란 상태에 있었던 것은 미국이 큰 충돌을 막을 수 있도록 사전에 개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영역이었기 때문에 관할권이 소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솔직히 대동아지역 전쟁에서 승전국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아닌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미군이 개입하고 정리를 했어야 하는 것이 당시 역사상황이라는 것이다.
최대의 난적이었던 일본이 이미 항복하였고 머리를 조아린 상태이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는 미국이다.
소련은 합의된 상태에서 미국을 견제하지만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고 중공이 도사리고 있었다지만 미국은 얼마든지 중공자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전쟁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방치했다는 오해가 있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것이며 5000년 의 유구한 역사가 존재했다고 하는 한반도에 유적이나 중요한 인류역사자료가 있건 말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어떤 불손한 목적이 있지 않으면 실행이 불가능한 이야기로 극단적인 면에서는 삼한역사자취를 말살코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미국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임을 알 수가 있다.
만약에 한반도에 삼한역사가 애초부터 없었다면 그리고 혹이나 그것을 반증할 유적이나 자료가 혹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것을 쓸어버리고 반도역사에 맞게 다시 심을 수 있는 큰 핑계거리가 필요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이해할 수 없는 이중성을 한번보자.
일본의 나가사키(長崎:Nagasaki)의 데지마(出島)는 에도막부(江戶幕府)가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포르투갈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었던 곳이고 1641년 히라도(平戶島)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전하여 200년동안 네덜란드인들을 거주시켰던 곳으로 서양인들에게는 대항해시대에 동양시장을 확보한 거점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이 도시는 일본에게도 중요한 역사지명이지만 서세에게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태평양전쟁 당시 이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열도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적이 없다는 괴담이 횡행한다.
세계사에서 열도일본에 나가사키가 있었다고 하면서 또한 근세기 동양대륙사를 나가사키와 밀접하게 연결시켰으면서도 그만큼 그들이 보존해야 할 역사공간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서양인들의 무역 본거지 유적을 원자탄으로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들의 유적이 있는 나가사키는 핵폭탄 투하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의심을 받는 것이다.
솔직히 이것이 그들의 인류역사유적을 생명처럼 여긴다는 서양인들이 할 짓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으며 서양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또 다른 거짓 역사를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나타나니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괴리가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다는 주장을 뒤받침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고 밝히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에 아예 추궁의 빌미를 없애버리자는 속셈에서 원자폭탄 투하했다는 사실만 강조하게 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
그만큼 일본이란 위치의 역사는 근대사를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탄으로 인한 인명피해의 인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미국역사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마치 어린애 보호하듯이 하는 일본이라 할 때 실제로 투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점과 완전히 다른 모습은 한국전쟁에서 볼 수 있는데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하고 난 후 진정상황을 보면 참으로 어안이 막히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에 미국이 주도한 126개국들에 의해 헤이그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것으로서 “어떤 민족이든 그 나름대로 세계 문화에 그 나름대로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문화재에 대한 손상은 곧 모든 인류의 문화유산에 대한 손상을 의미한다.”[문화유산의 고의적 파괴에 관한 유네스코 선언]라고 하는 그럴 듯한 협약이다.
이와같은 조약이 한국전쟁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전시 문화재 보호에 대한 1899년과 1907년 헤이그협약의 원칙에서 특히, 1907년 4차 헤이그 협약의 규약 제 27, 56조와 기타 후속 조약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사실들이다.
왜 미국은 1899년과 1907년에 체결된 협약은 지키지 않고 종이조각 취급을 하였을까?
역사라고 해보아야 200년도 못 미쳤던 미국이 5000년의 역사가 그렇듯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서일까?
그런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국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서글픈 비유일 수 있겠지만 반도사학자들은 무차별적인 한국전쟁 통에 역사유적을 일부러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간단한 예로 사적을 보관하였던 사고건물들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할 정도이니만큼 한반도 사정에 맞게 사고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이다.
얼마나 역사해석이 편했겠는가
5) 한국인은 본래 문맹이 많고 가난했던가.
한국인들은 본래 문맹이 많고 가난했다고 하는 말들을 어떻게 우리가 소화해야 할까?
이 문제는 1945년 해방후 미국이 한국민에게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이다.
한국민들은 한반도로 들어와서부터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본래 한국민들은 자본을 굴려 뭉치돈은 없었을 망정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19세기부터 무수히 많은 이양선이 들이 닥쳤다는 것은 자원이 풍부했다는 소리이며 돈 냄새를 잘 맡던 유대인과 상술이 능한 서세들이기에 솔직히 먹을 것이 없으면 구태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비교하면 서세들이 1차세계대전을 통해 유럽땅을 차지하기전까지의 항해시대때는 "하나의체제"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당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해적질 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들의 힘들었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때문에 그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은 바다에 내몰리며 해적이란 위험천만한 신분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만큼 궁색하지 않았고 또한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역사문화가 선진하여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때문에 서세들은 집요하게 "하나의체제" 주위를 맴돌면서 언제까지고 기약없이 그들의 처참한 삶을 연장시켜 나갈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다.
이 하나의 체제가 "하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서 바로 삼한역사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역사기억들이 서세들에겐 포원(抱寃)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글쓴이가 탐구한 결과이며 이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서양인들 뿐만아니라 특히 친일학자들이 한국민들이 못 배우고 미개하기 때문에 가난했다고 하지만 근세기 이전에는 인구의 극소수만이 문자언어를 이해하고 있었던 시절에는 사회적, 정치적 지위나 계층 따위의 등급에 의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외에 문자언어가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배울시간과 환경, 인적자원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어 서세나 동양인이나 할 것 없이 이러한 환경에는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쇄술 발달은 교육발달과도 직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 아다시피 우리 삼한역사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체제"의 고려(高麗:COREA)에서는 일찍부터 인쇄술이 발달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 "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인쇄술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종이제조기술 또한 고려가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동역사 예문지(藝文志) 경적(經籍) 총론(總論)에 보면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에 전하는 것으로“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유학이 공자로부터 시작된 이후 까지 고려 전역에 수많은 각종 학문적인 책자들이 널리 만들어져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는 것 또한 알 수가 있다.
이서(異書)라 함은 세상에서 보기드문 진귀한 책이라 하였으니 알만하지 않는가?
또한 선진(先秦)시대이후라 하였으니 기원전(BC 221)부터 고려에는 없는 책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하나의 체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으로서 인쇄술과 종이기술이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당시 고려인민들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개화되었던 것인지를 열등의식에 가득찬 서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정확하게 이를 진단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려의 이러한 문화터전은 곧 바로 서양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을 낳게 하였고 그것으로부터 현재 서양종교라 할 수있는 복음주의 개신교가 탄력을 받아 루터와 칼뱅(Jean Calvin:1509-1564)등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미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 에서 충분하게 이야기 한 바가 있다.
이러한 문제에서도 당당해야 할 역사임에도 떳떳하게 자부할 수 없는 비굴하고 비겁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반도역사만 메달려 들어난 역사사실 조차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는 문제이다.
선교사가 준 책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고 서양인들이 만든책이라 하여 우대하여 우리의 역사문화가 마치 그들에 비해 낙후된 것처럼 지례 짐작하여 열등의식을 가지는 자세가 문제이며 역사문화적으로는 전혀 서세들에게 꿀릴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금속인쇄술의 기초는 고려로부터 출발한 것임을 서양인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이다.
고려의 뛰어난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었던 서세들이 18세기후반부터 산업혁명의 덕분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문(利文)에 밝아 도둑질 잘하고 남의 것을 가리지 않고 많이 빼앗아 그들만의 비축창고가 늘어나고 그것이 다시 잉여자본이 되어 그들 소수만이 배 불리고 그들 소수만이 특수한 교육해택을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교육 우월성을 말할 수 있을지언정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종족에게는 가혹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작 그들에게 버림받았던 대다수 그들 하층계급의 종족들은 어쨌거나 하나의체제에 반하지 않는다면 인종차별없이 확실하게 백성으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 뻔한 이치이다.
하나의 체제가 무엇인가?
길게 이야기 할 것 없는 바로 "코리아"이다.
코리아사람들이 문맹율이 높았다는 것은 어딘서인지 알 수 없지만 한반도로 강제 이동된 이유를 제일 먼저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언어를 기준으로하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잣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점도 있다.
한문만 통용되는 곳에서 산 사람은 한글을 모를 수밖에 없으며 라틴어만 통용되는 곳에서 산 사람은 한글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여진어라고 하는 영어라고 한들 미국인이라고 한들 또는 영국인이라고 한들 영어를 죄다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언어의 확대도 인쇄술발달이 가져다 준 해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일본인이라고 칭하는 서세의 그룹에서도 무슨 언어를 통해 문해율이 높았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한반도에 한글이 세종대왕1443(세종 25)년 훈민정음(訓民正音)28자가 발표되었을 때부터 한반도인들에게 알려져 국민글자로 체계화 되었다고 믿을 수 없게 하는 사실들이 분명하게 있는데 그것 중에 제일 미심쩍은 것이 1907년부터 시작된 한글맞춤법에 대한 시도이다.
한글을 460년 동안 가만히 두었다가 왜 난데 없이 식민지시대부터 맞춤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을 생각해본 사람이 아마 드물 것이다.
나라 환경이 완전히 안팎으로 딴판이었던지 아니면 그 동안 죽은 글자가 되었다가 식민지시대부터 새롭게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다.
이런 형국이었다면 과연 한글을 싶사리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이러한 환경에서 놀랍게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897년에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를 창간한 무림길(武林吉)이란 이름을 가진 플랭크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1845-1919)는 1887년에 한글을 완전히 숙지했다고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과연 한반도에서 한글을 숙지했을까 의문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1942년 2월 미국 국무성소속 주한미국총영사 윌리엄 랭던(William Henry Langdon:1873-1939)이 말하길 “한국민의 절대 다수가 문맹이고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자치의 경험이 없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사실에서 우리를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언질이다.
또 다른 자료에 보면 일제식민지시대에 어떤 형태로든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본 사람은 14%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함께 문맹율은 80%가 넘었다는 사실들이 안타깝게도 낱낱이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의 구성원들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1만년 가깝도록 유구한 삼한역사를 이어온 역사문화 구성원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반도는 근원적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영역이라고 보았을 때 그리트 타타르(Great Tartary)영역에 속함을 알 수가 있다.
이 그키트타타르를 세부적으로 나누면 시베리아타타르(Siberia Tartary), 루시안타타르(Rufsian Tartary), 독립타타르(Independent Tartray), 차이니스타타르(Chinese Tartary가 되는데 이것에서부터 흘러들어온 사람과 아메리카에서 강압에 의해 강제이동된 사람, 아메리카에서 쫓겨 들어온 사람, 어떤 세력에 의해 기획적으로 이동된 사람등으로 꼽을 수가 있다.
앞에서 소제 <코리아 학살>편에서 언급하였듯이 6.25전쟁시 한국병사들의 문맹율이 70%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정말 반도역사가 주장하는대로 한글이 처음 만들어지고 발표되었던 곳이 한반도가 틀림이 없다면 1945년 광복직후에 12세 이상의 한국인 가운데 22%가 한글을 읽을 수 있었던 사실을 전제하고 해독율이 떨어진다는 주장처럼 정말 한글의 대중적 효율성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적어도 한글이 문자 해득율(文字解得率:literacy)효율면에서 탁월한 것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사실이라면 한글은 본래 한반도에서 만들어지고 발표된 글자가 아니라는 것이며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빨라야 식민지기간을 통해 어디서 사용되고 있던 한글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 받침이 없다면 한반도 사람들의 높았던 문맹율을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글 해독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위 관점이외 한글표준화에 따른 맞춤법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야 한다.
본래 산스크리트어(Sanskrit)와 같은 문자임을 감추려 이를 변형시킨 조치가 한글맞춤법이라 주장도 있으며 1912년 총독부에 의해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이 시행되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럽게 하는 것으로서 그 뒤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기존한글 형태와 쓰임구조가 절대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란 추측은 동시에 역사문제도 함께 하는 것이다.
사실상 맞춤법에 의해 등장한 구개음화(口蓋音化), 모음조화(母音調和), 두음법칙(頭音法則), 연음법칙(連音法則)등과 자음접변(字音接變)같은 것은 영어발음의 대한 어려움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한 두가지 아님도 알 수가 있다.
대한제국 고종의 폐위에 이은 한국통감부(統監府)관제에 의한 조선한글보급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1908년 주시경이 주도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에 이어 1921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창립되었고 후 1931년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넘어간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본래 한글을 숙지하기 못했다는 것을 여러면에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주시경(周時經:1876-1914)등이 주도하는 ‘한글파’와 박승빈(朴勝彬:1880-1943)등이 주도하는 ‘정음파(正音波)’의 주장이 대립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결국 세(勢)에 밀린 박승빈은 "..일반대중이 사용할 정서법(正書法:맞춤법)은 간편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한 민족의 언어나 표기법은 역사적 지속체(持續體)여야 한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복잡하며 혁신적인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반대하였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는데 결국 여기서 아래아[ㆍ]가 사라지고 만다.
기존 언어에 대한 혁신이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백성들에 의해 길들여져 있는 글이라면 수정정도로 변화를 줄 뿐이지 결코 완전히 다른 글자를 만들고자 하는 혁신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때문에 본래 한글이 해독력에서 떨어진다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으나 한글의 변형 즉 혁신에 의한 달라짐에 대한 것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이다.
때문에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늦게 들어온 결과 한반도인에게 생소했거나 아니면 한국민들에게 늦게 알려진 글이라는 점에서 종합적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한다.
하나의 체제에서 세종대왕께서는 한국민(韓國民)이라 하지 않고 그저 백가지 성(姓)을 가르키는 백성(百姓)이라고만 하였으니 세분된 지금 국가 명칭으로 어떤 국가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맹점도 같이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민에게도 서세에 못지 않는 교육제도가 있었다.
고구려 때는 중앙에는 태학(太學)이 있었고 지방에는 경당(扃堂)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때는 중앙에 국학(國學)이 있었고 고려때 항교(鄕校), 국자감(國子監), 사학(四學)이 있었으며 조선시대는 서원(私學), 성균관(成均館),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고려의 십학제도는 철학인 유학(儒學)·무학(武學)·역학(譯學)·의학(醫學)·음양학(陰陽學)·산학(算學)·율학(律學)·화학(畵學)·도학(道學)·악학(樂學)이 있었고 이것을 그대로 조선 태조2년에 수용하여 병학(兵學), 율학(律學), 자학(字學), 역학(譯學), 의학(醫學), 산학(算學)의 육학(六學)을 설치하였으며 이것은 태조 6년에 무학(武學), 이학(吏學), 역학(譯學), 음양학(陰陽學), 풍수학(風水學), 의학(醫學), 자학(字學), 율학(律學), 약학(樂學)으로 발전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언어학에서도 한학(漢學), 몽학(蒙學), 여진학(女眞學), 왜학(倭學)이 있었고 그리고 주자학이란 양명학(陽明學)과 이슬람교라고 보는 동학(東學), 가톨릭의 서학(西學:Catholic)등 종교이론도 함께 세계온갖 학문을 전부 수용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함에도 고려부터 조선까지 세계적인 유명한 학자가 없었다는 것도 참으로 희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모두 연기처럼 증발한 것이다.
서양인들이 교(敎)가 붙어 종교라고 주장하는 유교를 한번보자.
유교(儒敎)는 삼한역사에서만 찾을 수 있는 서양문화에 없는 동양철학사상의 특별한 학문(學文)이다.
물론 대중성이 있다 없다는 차원을 떠나 이미 백성을 교화하는 수행교육학문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양(아메리카 오리엔트)질서의 뿌리였다.
앞에서 소제 <실증주의와 끼워넣기한 유럽사>에서 유교(儒敎)에 대해서 어느정도 살펴보았지만 서양인들의 시각에 대해서 잠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여기지만 이해할 수 없게도 유교(儒敎)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들 않다.
그것은 공자(孔子)가 논어 술이(述而)편에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으니, 의롭지 않는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을 뿐이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이라 하여 즉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苟且窮塞)하면서도 그것에 구속(拘束)되지 않고 평안(平安)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심오한 철학이 깃든 것을 서양인들의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잣대로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근본원인으로 제멋대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많지 않으니 부자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않고 나쁜마음을 먹지 않으니 마음편하고 즐겁다는 것을 욕구, 욕심에 의한 말초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동양철학은 지극히 인본주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정신적 훈육의 교육적인 가르침임을 알 수가 있다.
학식이 뛰어난 것을 가난하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학문이 성장할 자리가 없다.
한국인들에게 유교사상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찾을 수 없는 무한의 장점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전에 보면 공자(孔子,BC 551~BC479)를 종사(宗師)로 하여 개인의 인격적 성숙[修己]과 사회적 질서의 실현[治人]을 기본과제로 하는 가르침이라 했고 유(儒)의 글자를 분석하면 인(人)과 수(需)가 되는데, 그 의미는 한 사회에서 유용하게 쓰이[需]는 사람을 기른다는 교(敎)가 합친 것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을 참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 즉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본시 인간은 성선설(性善說)을 토대로 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인간 내면에 하늘[天]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을 따라 윤리적으로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는 덕(德)을 밝히려는 것으로서 꾸준하게 이러한 이치를 인식하고 실천을 하게 하는 배울 학(學)의 의미가 크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한국민에게는 이러한 교육바탕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에 의해 학문이 종교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성경이 학문이 아니라 종교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사람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
교육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그들 잣대로 교육이 아니라 종교라고 하니 교육자체가 없는 것이 된다.
먄약 서양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유교가 종교라면 공자기원대에 이미 고구려때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384-392)이 실행한 수용 종교에 포함되어야 하지만 여기서 보면 조로아스터교(拜火教:Zoroastrianism)를 수용했다는 사실과 신라 마니교(摩尼教;Manichaeism)와 백제 네스토리우스교(景敎:Nestorian)를 수용했다고만 언급될 뿐이다.
그들 종교도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때문에 유교가 종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유교가 근세기에 서양종교에 묻혀 들어갔을 것이란 추측 또한 가능한 이야기다.
삼한에서는 애초부터 세계종교를 다 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특별하게 종교차별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유교라는 종교로 묶어 사상을 고로하게 만들고 유교의 특성을 범교들과 비교하여 공자를 섬기는 것으로 변질시켰으며 그들이 접근할 수 없는 하늘의 가르침을 희석시키고자 한 못된 문화깍아내리기 작태라는 것을 금방이라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단군을 우상이라고 하는 작태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유교는 유학으로서 성리학이라 하였고 성리학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실학인데 이 실학은 곧 서양의 모든 과학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학문이 아니라는 것인가?
결국 삼한역사를 협소하게 만들고자 한 결과로서 반도역사를 위한 왜곡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은 이러한 유학에 심취한 한반도인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하였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살면서 구태하다는 도식에 넣어 건방지게도 그들의 의한 개몽이 필요하다고 거들먹거렸던 것이다.
가당찮은 것은 그들의 역사가 하나같이 비천하면서도 감히 한국민의 깊고 넓은 역사문화를 폄훼하는 것을 넘어 질시하기 시작했고 18세기초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역사사실을 날조하면서까지 그들이 접근하는 곳마다 트집잡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이것들은 그들의 열등적인 포원이 저변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서양인 특히 기독교인들은 자신 조상,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왜 싫어하는 것일까?
도대체 의미나 알고 싫어하는 것인가?
종교일선지도자가 막았을 뿐이지 예수가 막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사를 지낸다는 진실된 의미를 그들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늘과 통한다는 것이니 신과 같은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제왕들만 이런 호사를 누렸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인만이 할 수가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곧 내가 죽어 신처럼 대우받는다는데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러나 종교를 이용하여 돈 벌이는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몫을 침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각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으로 코리아땅에 파견하면서 알았던 사실은 한국인들은 거의가 뚜렷한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한국민의 토속신앙을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미신(태양신:샤마니즘)이라고 치부해버린 탓이다.
서양종교도 따지고 보면 토속신앙(태양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은 그들은 애써 부정한다.
결국 서양종교의 우월성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서 동양인 문화를 폄훼하기 위한 못된 습관성 부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이야기다.
무속(巫俗)이라는 것이나 서양의 마법사(魔法師)가 다르지 않다.
사주를 보는 동양의 명리학(命理學)과 같은 것이 서양에는 점성술(占星術,astrology)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점성술은 일찍이 바빌로니아에서 BC 2000년경부터 별자리가 통용되기 시작하였고, BC 6C경에는 황도 12궁(黃道十二宮)의 지식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러시아 수학자이면서 역사연구가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 는,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Astrological sign)의 통계적 상관관계에 근거한 독자적인 신역사학(新歴史学,New Chronology)를 이것으로 통해 창시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인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AD83-168)의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에 묘사된 황도12궁(Zodiac)의 상징물과 조선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별자리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같다는 것은 세계가 동서양으로 갈라지기전에 "하나의 체제"에서 "하나의 역사"속에서 존재했던 것임을 암시하는 증거이다.
동양에서만 미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못지 않게 미신을 찾는다.
'13일의 금요일', '검은 고양이의 미신', '거울깨지면 불길하다', '사다리밑으로 들어가지마라', '재채기하면 영혼이빼앗긴다', '666 에 대한 믿음공포증', '말편자를 대문 위에 걸어 두면 행운이 깃든다', '소금을 엎지르면 싸움이 생길 징조', '새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면 나쁜소식'등 서양인들도 동양사상과 비슷한 미신이 적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샤마니즘 위에 있는 것처럼 우월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미신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은 신과 교감이 없다는 것이며 그 만큼 역사가 메마르다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문화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미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을 믿는다는 것일뿐 그들의 종교적으로 부정할 것이 없다.
기독교의 십자가가 퇴마사(退魔師)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도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이야기다.
17, 18세기 선교사들이 코리아를 방문 후 쏟아내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서양우월주의에서 의한 것이며 이런 선교사로 인해 세계역사가 엄청나게 조작 또는 날조되었다는 사실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역사 배경에만 한정시킨다면 그들은 선지자이고 개몽자이며 성인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반도는 기독교 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 역시 자본에 지배받아 물욕에 사로잡혀 있던 여타 서양인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유교(儒敎)를 감히 기독교 상대교로 취했다는 다는 사실은 역시 그들의 난감한 우월성을 고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본을 기본으로 하는 유학(儒學)은 서양인들에게는 먼 학문일 수밖에 없다.
본래 우리민족은 그렇게 구태하지 않았고 우리만 알고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역사를 그렇게 꾸려 간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강했지만 포용했고 엄했지만 관용이 있었으며 다양했지만 실용적이었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연구에서 그러한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으로서 특히 물질이 아니라 인본주의를 중시하고 한 국가의 작은 면이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제세이화 사상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우리문화의 핵심이고 장점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반도역사가 주장하는 가장 어리석은 이야기는 우리민족구성원들은 늘 상 문꼬리만 부여잡고 씨름하는 배타적인 성격의 나라, 절대로 개방하지 않고 서양인들이 못 들어오게 하는 쇄국정책만 쓰는 구제불능의 미개한 나라의 사람으로 묘사하거나 취급하여 결론적으로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뚱단지 같은 이야기가 한국인이 만든 한국역사라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인들은 가난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유교이니 뭐니 역사때문이 아니라 1945년부터 내란에 있었고 이어 1954년에 끝난 한국전쟁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니 전쟁으로 인하여 풀 한포기조차 없는 초토화된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초토화되도록했다는 불만과 함께 오해가 우리에게 있다.
실제로 우리가 가난을 겪어야 했던 것은 하나의 체제가 무너지고 기존 삶의 터전을 강압에 의해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그 뒤 전혀 상업적 기반이 없고 개발이 되지 않는 한지같은 한반도에 근세기 역사 기억지우기에 쫓겨 들어온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때다.
그리고 여유도 없이 곧장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것이다.
보릿고개와 죽만 먹고 살았던 옛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은 한국전쟁 때문이란 점이 분명하다.
"은둔의 나라”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한사코 개방과 개몽이 필요했던 것처럼 도식하는 것은 서세의 장난에 의한 것으로서 이것을 그대로 반도역사가 인용하며 놀아난 것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서세의 이야기를 어리석게 대변까지 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6) 한반도는 본래 역사터전인가?
앞 글에서 서세들은 하나의 체제에게 상당한 포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어처구니 없는 불합리의 달갑지 않는 선물들을 우리 한반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가만히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들이 간섭하고 무엇인가 배풀것처럼 하였지만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을 가난하게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은 일본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불합리가 그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열도일본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그들의 노력만으로 이룬 것처럼 인식하고 서세를 닮아서인지 서슴없이 우월감을 토로한다.
근간에 어중이 떠중이 같은 인사들이 한 술 더 떠서 일제에 의해 경제기반을 딱았다고 헛소리를 지꺼린다.
70%가 산악지대인 한반도는 자원이 풍부하지 않는 곳이다.
그것도 부족하여 허릴 짤라놓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민의 의지를 보여주고 경제기적을 이루며 세계경제10위 대국으로 발돋음한 사실에서 그들도 한국민의 특이한 삶의 집착력에 아마도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본래 역사적으로 의지가 강했던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못살게 만들어서도 정말 혼자 힘으로 잘 살 수 있었으니 썩어도 준치라는 한국민들의 강한 저력을 아마도 서세들이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가 정말 한국민들의 본래 역사 터전인가?
근세기에 전하는 조선역사사실들을 보면 한반도 환경과 전혀 다른 쪽에서 지리학적, 생물학적으로 근거가 나타나는 사실들은 한반도가 본래 역사터전이라는 사실자체를 믿을 수가 없고 본래 역사터전은 자원이 풍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명확하게 진단할 수 없겠지만 19세기말엽과 20세기초 미국의 경제 60%를 장악했던 유대자본 로스차일드(Rothschild)가 코리아영역에서 자원을 팔아 만든 금융재벌이라고 하면 아마도 놀랄 이야기다.
본 블로그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미약하지만 계속 밝히고 있고 코리아땅 가는 곳마다 금을 포함한 온갖 풍부한 자원들이 넘쳐났다는 것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었던 사실이다.
예를 들어 본 블로그의 글"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에서 보았듯이 목화 5위 생산국이었다는 사실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경제환경을 어떻게 한반도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선종 담배의 기원과 분류조사(朝鮮種煙草 起源及分類調査)란 자료에서도 보면 일제강점기인 1921년 조선에서 연초 전매제가 실시되었다는 사실과 전매지국도 경성(京城) 이외 전주(全州), 대구(大邱), 평양(平壤)이 있었으며 전주전매국에서는 놀랍게도 멕시코 담배 묵초(墨草)라고 하여 일명 대묵초, 수묵초, 소묵초(一名大墨草, 水墨草, 小墨草)가 있었고 그외 다른 전매국에는 양초(洋草), 당초(唐草), 홍연초(紅煙草), 약초(藥草), 해초(海草), 유초(柳草), 고초(苦草)등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담배종류가 생산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어 코리아 땅 모든 산업에서 이와같은 규모로 경영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전매제도를 일본이 당시 식민지지배하에 있으면서도 생소한 것처럼 세세하게 연구하고 자료로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담배 세계집산지를 코리아가 영역에 넣고 있지 않다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어멀리켐프 원본일부]Korea is the fifth largest cotton producing country in the world, and now that it is opening up to trade, with fresh facilities of transport by land and sea, it is likely to make rapid progress.
또한 위 어멀리 켐프의 원문‘The face of Manchuria, Korea, & Russian Turkestan(1911)에 나타는 것을 보면 "한국은 세계 목화 5위의 생산국으로서 빠른 속도로 발전할 가능성은 현재 육지와 바다를 통해 새로운 운송을 위한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개시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자체적으로 항만시설을 조성하여 세계 각 지역과 무역함에 있어 세계5위의 목화생산국 답게 목화수송에 지장이 없도록 시설투자 같은 간접자본에 집중적인 투자를 강행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가 있다.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코리아 동쪽보단 서해안에 풍부한 자원이 있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며 이러한 소문듣고 물욕에 눈이 먼 해적선을 가장한 이양선들이 그렇듯 몰려들었던 것임을 알 수 있고 쇄국정책 운운하는 서양인들의 목적이 기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순순한 선교활동, 상업활동, 개몽활동 등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일부이다.
물욕에 눈이 먼 서양세력들은 신분을 위장하기까지 하면서 코리아정부에서 법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음에도 무작정 들어닥쳐 도둑질에 이어 강탈하였고 워낙 많은 숫자의 불손한 무리들을 정부가 국가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엄격하게 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쇄국정책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이긴자의 오만한 역사기록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으나 한심스럽게도 덩달아 반도역사는 기정사실처럼 맞장구까지 치고 있으니 이 안타까운 현실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독일계 유대인 사기꾼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같은 자들이 설쳐되었던 시절이다.
다 아다시피 이 사기꾼은 1868년 3월과 8월에 충청도 덕산(德山)을 침범하여 남연군분묘(南延君墳墓)도굴한 사건에 연류된 도굴범으로서 사건이 밝혀지자 줄행랑을 쳐버려 코리아정부가 처벌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쇄국정책이라 하였으니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적반하장인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뻔뻔하게 코리아를 방문한 기록으로 미국 뉴욕에서 책을 만들어 팔기까지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오페르트의 여행기록을 보면 코리아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of milk and honey)"이라고 분명하게 묘사하였고 "쿠빌라이이후 가장 눈부신 동양문명을 일구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이 마구 침범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코리아인들은 우리가 어리석게 알고 있는 것처럼 교육을 못받아 무식하지도 않았고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그곳이 한반도가 아니라는데 역사문제가 있다.
7) 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
어쨌거나 서세의 포원(抱寃)에 대한 해원(解寃)은 우리에게 불합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근세기의 숙명같은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이승만 미(美)체류시절 자필 국적(國籍)은 일본[뉴시스기사:2013-10-05 10:02:32]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8” 에서 보았듯이 1918년 이승만 박사가 미국(美國)에 거주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에 자신의 국명을 “Japan”이라 한 사실 앞에서 우리국민 모두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적어도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분명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시 일제(日帝)로부터 핍박받고 있었던 민족을 생각하여서라도 자신의 국적(國籍)을 조선(朝鮮)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영어명칭 "COREA" 라고 왜 떳떳하게 기록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으며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기때문에 더욱 그렇다.
흑백논리나 ‘좋다, 나쁘다’의 2단 논법에만 의존한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러한 증거는 이승만박사가 한편으론 일본인이었거나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매국노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대통령이라는 것은 비록 근세기에 침탈의 역사가 있어 전국토가 일제 식민지상태에 있었지만 일제가 패망함에 따라 그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중요했고 더군다나 반도역사가 말하는 삼한역사 근원지인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에 의해 초대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과 3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제강압정치에 의해 한반도 전 구성원들이 압제의 고통속에 살았다는 사실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비로소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니 만큼 전 국민이 갈망하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초대대통령이 친일인사라니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린가.
이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혼란시키는 것을 넘어 미래가 이 때문에 온갖 갈등이 발생할 것이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다.
때문에 더욱 아쉽다는 것은 당시 세계질서를 휘어잡고 한반도정치전반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미국이 왜 이런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막아주지 못했을까 하는 섭섭한 마음이 분명하게 있다.
그러나 한국민의 바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은 친일 인물인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실망을 주었던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무엇때문에 한국민의 절대적인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미국은 이런 독단을 내려야만 했을까?
미국이 1948년부터 한반도 남한을 실제로 식민지화한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남한만이라도 자치권을 스스로 회복시키기 위해 잠시 군정한 것이라면 이승만을 대통령이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되었다는 말이다.
일본과 똑 같은 전범국인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역시 최고권좌에 오르려던 필리프 페탱(Philippe Petain,1856-1951)을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1890-1970)이 나서 총살형으로 처벌하였다는 사실에서 실제로는 무기징역으로 생을 마감하게 했다고 하지만 전범국에 부역(賦役)한 사실에 대한 처벌 상징성이 중요했다는 것을 미국이 모른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새로운 민주주의국가를 건설코자 하는 한국민의 열망을 이런식으로 헌신짝버리듯 할 필요가 어디에 있었는가는 곰곰이 되집어 보아도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시 이데올르기 대립이 팽배하던 냉전시대에서 상대가 소련이 지원하는 북한이었다는 환경때문에 비록 한국민들이 반일감정에 분노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와같은 정서 따위가 무시되어야 했다는 것은 해방이 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시점임을 감안할 때 한국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조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냉정하게 이 사태를 분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승만 미(美)체류시절 자필 국적(國籍)은 일본"이란 충격적인 보도에 따른 사실에서 볼 때 이승만박사는 1918년 9월 12일에 제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를 작성한 것은 1918년 11월 11일에 종전된 1차세계대전을 몇달 앞에 두고 쓴 것이다.
이승만박사가 기록한 국적 "japan"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열도에 있는 일제(日帝)와 일본(日本)이 맞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일본(日本)은 1941년부터 미국(美國)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전범국이 틀림없고 결국 1945년 나가사키(長崎:Nagasaki)와 히로시마(廣島:Hiroshima)두 도시에 원자탄투하로 인하여 항복한 숙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구도가 잘못될 수 있는 것인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승만박사가 미국에 체류하고 그곳에서 활동했다면 열도일본을" japan" 이라 했을지라도 구태어 국적으로 표시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일본인과 친숙할 수 있겠지만 그가 일본국적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열도일본이 아닌 미국땅에서 제약받을 일이 없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승만박사가 일본(japan)이라는 국적으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했다는 것으로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을사늑약(乙巳勒約:1905.11.17)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국가권한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만약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미국(美國)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미국(美國)이 일제(日帝)라고 하면 어떻게 역사가 굴절되는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정말로 1910년에 사라졌는가?
왜 모든 주요 사건들이 미국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미국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한반도정치에 구심점이 되어야 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美國)에 거주하던 한국민들은 재펜(JAPAN)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그들의 국적은 모두 재펜(japan)이라고만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국적(COREA)은 왜 이승만에게 국적으로 배척이 되어야 했을까?
이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미국(美國)은 코리아(COREA)를 그냥 싫어한 것이 아니라 증오(憎惡)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싫어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례들이 있다.
반도역사에서 말하는 것을 기준으로 미국과의 접촉사를 따져 보면 첫 충돌인 1866년 7월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를 군민이 합동하여 대동강에서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고 5년 뒤 1871년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 군사끼리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이후 별다른 접촉없이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임에도 이상하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맺어졌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가 심각한 큰 충돌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코리아(COREA)를 근원적으로 상당히 싫어했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반면 여러 당시 보도물을 보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재펜(japan)을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도 알 수 있다.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8월4일, 이승만(Rhee syngman)은 하와이의 윤병구(尹炳求)목사와 함께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일단 혐한(嫌韓)인물로 등장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을 면담한 바가 있다 하였고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지(New York Herald Tribune)등 미국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과 윤병구는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一進會)’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비난하고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고종황제의 특사라는 말도 있으나 이승만은 당시 일진회(一進會)가 친일단체라 하였으니 어쨌던 친일정치인이 틀림없지만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친일이라는 단어가 친 재펜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승만에게 대한제국이 배척되면서 일진회, 또는 재펜(japan), 미국이 자연스럽게 한 중심에 모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이런 식의 주장의 배경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싶지 않다.
1905년에 이런 주장을 한 것이라면 1918년 징집지원서에 자신의 국적을 재펜(Japan)이라 기재한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고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취급을 할 수밖에 없으며 만약 "하나의 체제에서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재펜(japan)을 “일본”이라 한 것이라면 서세의 총칭의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도 한다.
예를 들어 대조선이라고 하는 "하나의 체제"가 서세들에게 장악될 때 경제재정권을 가지고 장난 친 것이라고 할 때 경제를 쥐고 있었던 세력을 통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진회는 금융자본조직인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한 조직이거나 일루미나티일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경제권을 일루이마티가 60%를 장악하고 있었으니 미국을 경영하는 단체라 할 수 있고 정치적인 파워을 부릴 수 있는 실세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이승만이 고종과 동급으로 일진회를 말한 것이라면 어느정도 파워가 있는 단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이승만이 국적을 "japan" 이라고 쓸 수밖에 없는 핵심적 요체가 아닌가 한다.
"Japan” 은 한동안 미국과 혼용하여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여러군데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열도일본을 지칭한 것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미국땅에 거주하면서 굳이“Japan”이라 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여성 사학자(American historian) 캐롤 쇼(Carole Cameron Shaw:1944-)의 저서‘외세에 의한 조선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란 글에서 그녀는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면서 1882년 5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제1조의 거중조정(居中調整:good offices)조항을 심각하게 위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스코틀랜드 캐나다인(Scots-Canadian)으로서 데일리메일(Daily Mail)특파원 프레데릭 아더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1869-1931)의 말을 빌리면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을사조약의 강제성을 잘 알았지만 “일본의 환심을 사기위해 안달이 나 있었고, 교묘히 한국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며 ‘한국은 자치가 부적절한 민족’이라고 확신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은 당시 루스벨트가 얼마나 코리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가 미국언론뉴스로 넘쳐날까?
앞서 이야기한 사실이지만 이때는 거짓 역사를 꾸미면서 본질을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날개속에 숨겼다는 것으로서 미서전쟁(1898)부터 시작하여 소설을 쓰듯이 기록을 남기려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거짓 보도는 전부 현재 역사기록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이러한 문제를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에서 충분하게 개진한 이야기다.
코리아가 아메리카대륙에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영향력을 그때까지 행사하던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서 벌린 황색언론 테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신문만큼 장난을 진하게 칠 수 있는 것은 없다.
신문에 게재되는 뉴스자체가 진실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으며 이미 활자로 인쇄가 되어 신문이 곳곳에 넓게 퍼졌다는 것은 어떤 독자든지 그것을 읽게 되어 있고 때문에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기사가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기사를 쓰는 기자의 양심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뉴스기사가 마치 역사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특히 한반도인에게는 취약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신문의 횡포가 과해지면 한반도인 뿐만아니라 특별난 사람들일지라도 감당하기가 힘든 법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유착관계가 얼마나 어떠했는지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재야사학자 캐롤 쇼(Carole Cameron Shaw)는 아래와 같이 그의 책에서 이야기 한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 주선으로 미영(美英)의 대기업들로부터 1904년 4월과 1905년 5월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4억 1000만 달러의 전비차관(戰費借款)을 받은 사실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앞장서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회원이기도 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와 존 피어폰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등을 통해 유대자본을 일본의 전쟁비용으로 주선하여 약 7억엔(현재14조원상당)을 조달했다는 사실을 카네기의 편지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한다.
미국이 유대자본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미국경제공황(1893-1896)기간에 연방정부의 금준비가 계속 감소하여 1억 9천만달러($)에 달했던 지불준비금(支拂準備金)이 법정 최저한도인 1억달러($)조차 위협받게 되었을 때 1895년 2월에 JP모건(J. P. Morgan)이 주도하는 연방채권(聯邦債券) 인수단과의 협상을 통하여 JP모건자본과 로스차일드(Rothschild family)자본이 제공한 6천 5백만달러($)가치의 금(金:gold)을 미재무부에 저장시켜 연방채권(聯邦債券)이 발행되면서 부족분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이와같은 지원은 당시 미국의 전체 경제의 60%가량이 곧 유대자본에 의해 점유 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었던 사실이다.
주식회사의 주주지분이 50%가 넘으면 과점주주로서 경영권을 가진다고 보았을 때 실제 미국경영은 일루미나티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전체운영권을 유대자본이 가졌다고 하여 이상스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전혀 열도일본과의 관계가 없을 유대자본을 사용했다는데 있고 사실적으로 일본정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며 이와같은 미영차관과 유대자본차관 14조원상당액을 합쳐 28조는 전쟁비용 총17.2억엔(413억 달러:37.2조원)의 75%에 달하는 것임을 알 때 거의 일본은 서세와 유대자본에 의해 러일전쟁을 치룬 것이 되니 예속될 것이 틀림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놈의 을사늑약이니 을사보호조약이니 떠 벌릴 수가 있겠는가 하는 소리이다.
러시아와 전쟁을 한 세력은 미국이거나 일루미나티의 용병 또는 멕시코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1882년에 미국(美國)과 조선(朝鮮)이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에서 조선이 외침을 당했을 때 미국이 개입하여 중재한다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약한 나라가 힘 센 나라에 의지 한다는 것인데 사실상 자본을 쥔 미국이 자본이 궁한 조선을 쥐락펴락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미 세계삼한역사에서 1881년에 조선이 해체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에 조선이름으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은 실제 역사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생각해보면 중재라는 말은 주도권을 가진 나라가 하기에 따라 일방적일 수 있기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쨌던 형식의 관례용어이겠지만 이것은 단지 반도역사 허울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중재라는 문구에 고종이 한껏 기대했다고 현 역사가의 해석하는 것도 푼수같은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얼마나 조선황제를 우습게 보았으면 그런 식의 평가를 하였겠는지 생각하면 한심스러운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역사를 모르면서 벌 소리하는 역사가들은 각성을 해야 함은 당연하다.
전부 이런 식이니 이런 말도 안되는 역사공부하는 청소년들이 불쌍할 뿐이다.
유대자본가 존 피어폰 모건(J. P. Morgan)은 국제적 금융가의 지위를 확립해 9개월 3주간 벌어진 스페인왕위계승문제로 촉발된 프로이센-프랑스전쟁(Franco-Prussian War:1870-1871)때 프랑스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 2세(J. P. Morgan, Jr.:1867-1943)가 영국과 프랑스정부를 지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자료에는 이들이 영국함대에 투자를 하였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코리아, 코리안 학살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생각해보더라도 극히 혼란스러운 것은 언제까지고 해소가 되지 않는 문제이다.
전자에서 언급하였듯이 세계삼한의 코리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주인공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닌가 추측되게 하는 결과이다.
그가 평안도(平安道) 용강(龍岡)출신의 홍경래(洪景來)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엄밀하게 포괄적으로 코리아인이면서도 스스로 코리안을 무차별 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계속 8.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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