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한부울 2013. 6. 1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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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글쓴이:한부울

 

서두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평소에 느낀 것을 토로 할 수밖에 없는데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를 접하면 접할 수록 연구가 본격화 되면 될수록 수많은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다름아닌 근세기에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삽화이고 사진, 그림따위 그리고 지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걸림돌일 뿐만 아니라 한마디로 풀리지 않을 족쇄처럼 단단하게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매번 이러한 삽화나 사진, 그리고 지도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실제로 이 삽화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곳, 위치가 정말 한반도인가? 그래서 여행자가 실제로 방문한 곳, 그곳과 지형 모두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일까? 혹시 20세기에 들어 한반도 지형과 비슷하게 고쳐 그 때 삽화라고 하지는 않을까 등의 의심을 품고 실체에 대한 의문으로 수십, 수백번 몸살을 앓았다.

이렇게 넘쳐나는 의혹과 의심은 갈 수록 커져만 가는데 그렇다고 하여 뚜렷하게 밝힐 자료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삽화나 그림등을 근거로 한반도가 틀림없다고 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솔직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냉정하게 판단할 때 이 모든 것은 허구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쓴이가 그 시대에 생존하지 않았으니 삽화나 그림이 주고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게 단념하면 할수록 그런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의 처참한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음은 더욱 답답하고 뭐에 걸린 듯한 고통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이렇게 방어벽이 철옹성같다고 하여 포기하고 백기를 들 수가 없다.

세계삼한역사가 분명히 존재했는데 포기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진다면 직무유기인셈이다.

그렇게 된다면 설혹 진실을 쫓다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겠지만 일제가 심어 둔 반도역사의 노예가 된 현재 강단사학자와 크게 다를게 없이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삽화나, 그림, 사진, 지도등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처참한 역사를 심어 주면서 잘 써 먹고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언제가는 이러한 허깨비들이 허구란 사실이 밝혀질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역사반전을 이루게 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싶다.

현재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인터넷으로 인하여 세계삼한역사찾기를 하기 시작한 것처럼 언제가는 우수한 우리나라의 두뇌들이 이러한 고리를 풀 수 있도록 어떤 장치를 개발하여 한방에 모든 의문이 해소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임을 기대하는 바이다.

 

삽화와 사진이 주는 역사진실혼란

 

우리를 혼란케 하고 있는 삽화와 그림, 사진 그리고 지도가 결국 우리에게 족쇄가 된 사실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찬란한 역사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전 미부통령, 엘 고어(Al Gore, Albert Arnold Gore Jr.1948-)가 서울2005∙월드ICT서밋(summit) 디지털포럼 자리에서 "한국의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세계최초의 인쇄술에 이어 전 세계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신세를 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큰 성과”라고 하며 경의를 표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 잘 알다시피 바로 1377년 고려가 발명한 금속활자(金屬活字)는 세계유명인들이 이처럼 인류발전에 지대한 공이 있었던 바를 인정한 것이다.

바로 금속활자가 세계인쇄술을 발달시켰고 발달된 인쇄술은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하게 하는 주요수단으로 작용하였으며 마침내 이러한 인쇄술을 바탕으로 반정부조직을 구성하여 당시 기득권세력인 구(舊)세대를 전복 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무기로도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시민혁명(市民革命)의 동력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시민혁명은 점점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게 되는데 바로 신문발명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은 자본의 속성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공유 수단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신문이 주는 것은 기존 세력을 뒤 엎으려는 욕구에서 정보공유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인류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 발전시켜 근세문명발달을 이루게 한 것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업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역사에 불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근세기 서세에 의해 만들어지고 세계삼한역사를 부수고 없애는데 철저하게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근세기에 벌어진 역사조작사실에서 이를 증명할 수 있고 거짓이 아닌 진실의 역사를 인류가 볼 수 없게끔 사라지게 하고 거짓의 역사를 마치 진실의 역사처럼 꾸밀 수 있었던 적극적인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 현재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는 신문의 실체이다.

신문은 자본(資本)의 속성에는 대단히 약한 편이다.

신문은 자본전략가 아니라면 현재도 존속하기가 쉽지 않는 언론도구이다.

즉 신문구독자가 신문에 흥미를 느끼고 많이 사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신문은 제 가치를 잃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이와 잉크비용, 인쇄기감가, 건물임대, 인쇄노임, 기자들의 적절한 보수, 신문폅집자의 이문등 이것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 언제든지 파산을 하고 파산은 인쇄기가 중단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팔리기 위한 언로인가 정의를 언로인가에 대한 갈등의 문제는 작금에도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탄생되었고 그 때부터 구세력과 신세력간에 전쟁은 인류전체에게 아픈상처를 주고 말았다.

문제는 19세기에 들어 갑자기 세력화된 신세력의 등장이다.

신세력은 근세기에 잉여자본을 취득하고 그것을 자본 속성을 이용하여 축적한 다음에 지금까지 기득권으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자본력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지주, 귀족, 국왕들의 구세력을 붕괴시킨 또 하나의 역사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세력은 곧 자본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bourgeois:中産資本)라고 하는 제3계급에 출신들로서 신진자본주는 당시 전 인구의 8% 정도였음을 알 수가 있다.

결국 세계1차전쟁은 이러한 신세력과 구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세력들이 개입한 자본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들어 난 것은 1840년에 벌어진 아편전쟁(阿片戰爭:1840-1842)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서양스스로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자조(自嘲)하던 사건이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비겁한 전쟁은 없었다는 말로서 자본에 의해 인간 속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버린 파괴행위였기 때문이다.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양귀비과의 양귀비(Papaver somniferum)의 즙액을 굳힌 습관성 환각제인 아편(阿片:opium)을 구세력에게 밀매시켜 잉여자본(資本)을 축적하고 이것들을 동원하여 체제를 혼란을 야기시켜 거대한 봉건제도(封建制度)의 구세력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사건으로 남아있다.

이때부터 구(舊)세력은 자본이란 속성에 매번 당하여 취약성을 들어내면서 결국 신세력들에게 타도의 타겟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資本)이 봉건체제를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자본(資本)의 속성(屬性)은 바로 이식(利殖)이라는데 있는데 봉건지주들은 땅을 이용한 이익(삯)을 습득하는 반면에 자본이 주는 이식은 땅에서 발생하는 이익에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땅을 가진 지주들은 부채를 떠 안고 탕진하여 쓰러지기 시작하였고 너도나도 땅 보다는 자본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어 영토의 귀중함이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봉건제도자체가 붕괴되는 빌미가 된 것이 틀림 없어 보인다.

영토 또는 봉지를 가지고 삯으로만 버티던 구(舊)세력의 특성상 대자본이 버티고 있는 신세력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본특성에 구(舊)세력은 힘도 한번 제대로 쓸 수 없이 괴멸된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다.

안타깝게도 구(舊)세력의 중심에는 바로 삼한(三韓)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문이 탄생되고 신세력이 구세력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류의 아픈 역사는 어느 정도였을까?

본 블로그의 글에서 1차세계대전(1914-1918)은 구(舊)세력과 신(新)세력의 기싸움의 전쟁이었고 2차세계대전(1939-1945)은 신세력에게 붕괴된 구(舊)세력의 잔재세력과 1차세계대전에서 완벽하게 구세력을 제거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신(新)세력과의 최후 전쟁이었다고 하였던 적이 있다.

2차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은 구(舊)세력의 잔재세력인 독일(Germany), 이탈리아(Italy), 헝가리(Hungary), 루마니아(Romania), 불가리아(Bulgaria)가 주도한 것인데 특히 독일명칭을 보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의해 장악된 1943년부터 1945년까지를 대독일제국(Großdeutsches Reich) 혹은 제3제국(Das Dritte Reich)이라고 한 사실에서 볼 때 당시 독일 히틀러의 구상은 힘을 잃은 구(舊)세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구(舊)세력에서 왜(倭)라고 천시하던 신(新)세력도 아닌 제3제국(第三帝國:Drittes Reich)이라고 하여 양쪽다 장점을 취한 체제를 강조한 사실은 1, 2차로 이어지는 세계대전이 낳은 또 다른 역사질서를 갈망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삽화: 예1] 아래 삽화 풍경이 강화도(kang-wha island)라고 한다. 

 

[삽화: 예2]올가 섬(olga island, Mouth of Kang-kiang river)도 오페르트가 한국을 방문하고 그린 삽화이다. 

 

[삽화: 예3]거트루드 섬(gertrude island, Entrance of Kang-kiang river)이것도 역시 오페르트가 한국을 방문하고 그린 삽화라는 점이다 

 

[삽화:예4]두개세Two-tree Hill, island of Kangwha.)  

 

위 4 가지의 삽화 예를 보면 이 풍경들이 지금 한반도라고 하는데 정말 화가 날 지경이다.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에 더욱 분개한다.

도대체 한반도에 이러한 풍경이 어디에 있는가 한번 찾아보고 비슷한 지형이 있다면 솔직히 알려주면 좋겠다.

 

본래 백과사전에서는 삽화(揷畵:illustration)란 글의 내용을 보완하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 내용에 관계되는 정경, 풍경, 인물 등을 묘사하여 글속에 삽입되는 그림이라고 정의 된다.

사진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래도 삽화는 글을 대신 할 수도 또는 글 설명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사실적인 풍경을 토대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거의 실체에 가깝다고 보아야 맞다.

 

사진(寫眞:picture)은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물체에서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電磁氣的:Electromagnetic)발광을 감광성(感光性:photonasty)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으로서 이러한 물리적인 현상장치, 사진기(寫眞機:camera)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최초로 인화된 사진은 1826년 프랑스인 조세프 니엡스(Nicéphore Niépce:1765-1833)가 루이 다게레(Louis Daguerre:1787-1851)와 공동 제작한 사진기를 이용한 사진이며 이어 1839년 구리판을 이용한 루이 다게레(Louis Daguerre)의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촬영술이 발명되어 대중에게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이 사진의 략사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이 직접 그릴 수 있는 삽화는 그 이전에도 빈번하게 이용되었겠지만 사진(寫眞)은 최소한 대중적으로 사용가능한 시기는 1839년 이후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위 게시한 네가지 예의 삽화는 오페르트가 방문하면서 그린 그림인데 1880년라고 적혀있다.

이때는 사진이 대중적으로 이용되고 난 후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대신 이 때 사진기가 너무 커 사람이 운반하여 가지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 할 때 여행가들이 삽화를 주로 활용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삽화나 사진, 그림, 지도는 인간에게 시각심리학적으로 상당한 오류를 유발시키게 한다는 사실이다.

위 오페르트의 삽화에서 지적할 사한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문제는 독일인 오페르트가 쓴 원문에 기록되었다는 강화(江華)라고 하는 지명이다.

이 강화(江華)는 반도역사에서 한결 같이 제왕들의 피난처로 상징해 놓은 지명이다.

그런데 이 강화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독일인 오페르트가 지명을 남긴 것으로 Beacon-Hill islands.
Olga island, Getrude island, Old dismantled Fort 모두를
"KANQ-KIANQ" 강에 있는 지명들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영어번역본에서는 "Kang-kiang River"라고 하고 말았다.

원문에 독일단어 KANQ-KIANQ 에서 당시 독일어 'q' 가 'g' 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강경강(Kang-kiang River)이라고 지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원어 KANQ-KIANQ 를 강경이라고 음역한 것인지 그 지명이 한반도 충청도 강경강(江景江)을 말한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사실과 전혀 다르게 당시 삽화로 유도되었다든지 조작, 꾸미기에 그것이 보태지거나 왜곡 등으로 얼마든지 이용되어 본질과 전혀 다르게 변이시켜 지금처럼 어딘지도 확실하게 정체조차 분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각심리(視覺心理)

 

위와 같은 사실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사람은 보는 대로 믿는다(People belive in seeing.)"는 속성(屬性)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된다.

현대인은 그러한 속성에서 어느정도 사전 교육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고려가 1377년 처음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난 후 1453년에 독일인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1398-1468)에 의해 유성(油性)잉크가 개발됨으로서 마침내 대량인쇄가 가능하게 되었고 그것이 발달하여 책이나 사서들이 범람하였다면 시각심리에 의해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본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근세기에 이와 같은 시각심리는 서세들이 이용하여 그들이 목적한 부분을 달성했을 것이란 판단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하고 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삼한역사가 철저히 농락 당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의 시각심리는 속성상 보는 그대로 인지하고 기억까지 해버린다는 맹점이 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상식적인 공간이 사전에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있는 것으로 지금의 종교역시 이러한 시각심리를 이용했을 것이란 사실과 주요 종교 서적도 이같은 예를 비켜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다.

글이 주는 신비스러움도 있겠지만 정당화하는 논리와 덧 붙인 삽화 또는 그림, 또는 사진이 주는 시각자극은 매우 강한 것이어서 과거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대단하였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르네상스시대의 유명한 그림들은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표현 한 것이라고 볼 때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예와 마찬가지로 근세기에 서세가 삼한역사에서 실제로 나쁜 의도가 있었고 삼한역사를 없애지 않으면 그들의 역사가 생성될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이러한 시각심리를 이용하려고 하였을 것이고 이것은 근대사를 짜깁기하거나 판짜기 할 때 결정적인 증거로 역할을 했을 것이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에 대한 의혹과 의문이 증대된다는 것은 이와같은 시각심리도 문제이지만 현재 삽화로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곧바로 역사 증거물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 블로그가 위 삽화 예를 게시하였지만 이것들이 모두 한반도 역사 증거물로 인정되었고 반론을 할 수 없는 사증(史證)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각심리 문제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각(視覺)은 눈을 통해 인지하는 감각들을 일컫는 말로서 눈을 통해 사물의 크기와 모양, 빛깔, 멀고 가까운 정도를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이라고 백과사전에서는 설명한다.

생리학적으로는 눈의 구조와 시각정보의 전달과정을 따져 볼 때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망막과 연결된 시(視)신경을 통해 뇌(腦, brain)에 전달되며 뇌(腦)에는 시각과 깊은 관련이 있는 특정부위가 있어 눈에서 전달된 정보를 저장하거나 처리한다는 사실이다.

이 특정부위가 소위 전두엽(前頭葉:frontal lobe)이라는 것으로 기억력, 사고력 등을 주관하고 다른 신체 각 파트(part), 연합영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조정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기관으로 인체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에 결정적인 심리학적인 현상에서는 인간은 눈으로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해 본 것을 스스로 해석한다는 심리가 발동하면서 자신이 본 것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심리는 어떤 사건의 중심에 있는 그래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삽화나 그림, 사진, 그리고 지도를 사실처럼 예단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시각적(視覺的) 친숙성, 친밀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보는 대로 믿는다(People belive in seeing.)"란 속성이 통하고 현실적으로 역사를 그렇게 대입할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로 확인 된 것이다.

 

이후 여기에 만족치 않고 인간은 이러한 시각심리를 활용하는 측면에서 발전을 거듭한다.

20세기부터는 움직이는 시각(視覺)을 이용한 영화가 “역사 판짜기, 만들기”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이때 미국에서 만들어진 역사물로서는 영화 징기스칸을 들 수 있다.

사실 징기스칸의 역사를 어떻게 묘사하는냐에 따라 세계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르까 미국영화 "정복자(The Conqueror)"란 제목으로 RKO(1928설립)가 1956년 제작하고 안카소(Arkansas)출신 딕 파웰(Dick Powell:1904-1963)이 감독이며 배우 존 웨인이 태무진역, 수잔 헤이워드는 그의 아내역을 맡아 칭기즈 칸의 일대기가 이처럼 영화로 태동한 것이다.

이것이 여과없이 세계전역에 전파하게 되었다. 

이때 더불어 기독교 영화들도 넘쳐 날 정도로 다작이 만연했는데 그 대표작으로서 잔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1927), 십계(The Ten Commandments:1956), 베르나데트의 노래 (The Song Of Bernadette:1943), 미국과독일합작영화 마틴루어(Martin Luther:1953), 벤허(Ben-Hur:MGM1959), 유대계영화 왕중왕(King of Kings:MGM1961), 이태리영화 바라바스(Barabbas:1961), 프랑스이태리합작영화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1964)등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삽화나 사진 그림따위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20세기부터는 활동사진이라고 하여 움직이는 시각심리까지 이용하였다는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종교, 역사 따질 것 없이 그것에 의한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특히 징기스칸 영화는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1975년 상영되었던 적이 있는데 서세가 세계사를 만들고 역사의 방향을 세우면서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역사증거로서의 가치를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분리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어 동양이란 개념을 심기 위해 동양을 주로 신비롭게 만들어 아시아를 기준권역으로 삼고 사실상 이설을 달수 없게 아예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나는 솔직히 1975년 징기스칸이란 영화를 보았고 당시 징기스칸은 미국인줄 알았다.

지금은 부랴부랴 신중국에서 만든 영화가 나와 징기스칸이 아시아 몽골이안인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새삼스럽지만 움직이는 시각심리가 인류에게 얼마나 가지고 싶어 하던 잠재적인 심리인가를 다음에 이어지는 설명에서 나온다.

인류는 처음에 삽화나 사진을 조각조각 붙여 손으로 돌려 움직이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요지경(瑤池鏡:Peep show)이라고 하는 보이는 장치이다.

이를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길 움직임의 기이한 현상을 호기심거리로 구경시키던 요지경은 지금의 시각으론 한낱 시시한 애니메이션 놀이기구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것이 놀랍게도 움직이는 사진의 결정체, 영화라는 열광적인 대중미디어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경마경기를 보고 그린 말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미 진보하고 있었던 사진기술을 이용하여 실제 말의 움직임을 확인하려고 했던 탐구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가 이루어낸 것은 가히 인류역사상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여태 ‘평면 또는 하나의 시간, 공간'으로 인식했던 움직임이 없던 시각적 심상(心象)의 회화적(繪畵的:painterly)전통에서 갑자기 벗어나 새로운 시간의 개념으로 다시 인식하고 충격적으로 또는 자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종전에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인류가 오래전부터 숙달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대중에게 꿈과 오락을 제공하는 영화는 사실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표현하려는 인류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하고 본래 이것을 인류가 구원하던 예를 보면 구석기로 추정되는 에스파냐의 알타미라나 동굴(Altamira cave)과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Lascaux cave)에 다리와 몸이 여러 개인 황소의 벽화가 그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곧 움직이는 동물을 여러 개의 겹쳐진 선묘(線描:line drawing)로 표현한 것이라 하였고 또한 약 4000년 전 이집트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동작 애니메이션은 레슬러의 경기모습을 여러 개의 그림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도 움직임을 연결된 상세한 동작으로 볼 수 있어 하나씩 드로잉(drawing)하여 그림을 연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이것들이 곧 영화의 시발이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던 시각심리의 최종 목표는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단계적으로도 시각심리가 가져다 준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인쇄술의 발달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금속활자는 고려(高麗)가 발명을 했다.

그러한 사실이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엘 고어(Al Gore, Albert Arnold Gore Jr.1948-)는 전 세계가 한국에서 큰 신세를 졌다는 말로 경의를 표했다는 사실이다.

고려가 금속활자를 만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프랑스혁명이 발발했을까?

시민혁명이 발발했을까?

신문이 태동했을까?

고려(高麗)는 인쇄술 발달뿐만 아니라 종이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려종이(高麗紙)는 뛰어난 품질로 정평이 나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태 기록으로 전해지는 세계 발명품은 물론 그에 의한 사서들은 모두가 삼한역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인들이 삼한역사가 대단했다는 것을 칭송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高麗)는 인쇄술과 종이를 통하여 분명 거대한 인류문명사(人類文明史)를 지배했다는 것을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반도사가 한반도에 제한한다하여도 이는 속일 수가 없는 진리(眞理)인 것이다.

인류문명발달이 종이에 기록으로 이어졌고 후일 대중들이 정보를 공히 접할 수 있는 인쇄술이 필요하였던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신문이 탄생하게 만든 것이다.

어찌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 블로거(blogger)는 현 동아시아역사(東亞細亞歷史)를 아래와 같이 생각하고 판단한다.

본래 삼한역사(三韓歷史)는 어마어마한 시원(始原)을 자랑하던 뿌리 깊은 기록의 역사주체라고 본다.

그와같은 사실은 근세기 열등의식에 빠져 있던 서양세력들에 의해 거꾸로 판도가 뒤 바뀌어 열등하던 그들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나타내기 위해 20세기초 세계사(世界史)를 새롭게 정리하였고 그러므로 역사새판짜기가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종전에 없던 동서양을 구분하면서 급기야 1920년경 새롭게 서양사(西洋史)와 동양사(東洋史)를 편집하여 세계사강(The Outline of History, 世界史綱)을 출판했고,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것을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만들어 세계사를 완성한 것이다.

모든 역사사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삼한역사가 그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서양사와 동양사가 근세기에 만들어졌는가 따지기 전에 근본역사서(根本歷史書)는 분명 신라(新羅:BC57-AD935), 고려(高麗:918-1392), 조선(朝鮮:1392-1897)이 만들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梵語:Sanskrit)를 기준으로 한 역사서가 존재하였음을 예상 할 수가 있다. 물론 고려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와 아시아, 유럽을 지배했다고도 본다면 라틴어 이외에 한문역사서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범(梵)은 ‘범어 범’이라고 하여 인도의 종교계급을 말하거나 깨끗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만 나는 다르게 보는데 뜰 범(汎), 즉 넓은 수면에 뜨는 모양, 또는 넓다, 광대하다, 널리, 두루 등으로 쓰이는 한자이기때문에 이 뜰 범자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보여 범어는 삼한의 표준어, 아니면 널리 사용될 수 있는 공용언어로서 존재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스크리트어는 삼한 역사의 공용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신라(新羅)는 에스페란토어(Esperanto語)와 맥을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고 고구려와 고려(高麗)는 라틴어(Latin語)를 지방어로 대신하였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하는데 대신 고구려가 있었던 아시아권역에 지방언어로 한문도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저런 식으로 동양사(東洋史)가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한문(漢文)을 근간으로 한 것이라고 정하여 뜯어 고쳤을 것이고 서양사(西洋史)는 라틴어로 편집, 제작하여 분리시켰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때문에 한문(漢文)역사서는 당(唐:618-907), 요(遼:916-1125), 금(金:1115-1234), 서하(西夏:1032-1227), 북송(北宋:960-1126), 남송(南宋:1127-1279), 원(元:1271-1368), 명(明:1368-1644), 청(淸:1616-1912)이란 명칭을 새롭게 붙여 생성(生成)시켰을 확률이 매우 높다.

본 블로거가 지금까지 분석한 것을 토대로 할 때 삼한역사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과 한문역사 당(唐), 요(遼), 금(金), 서하(西夏),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 청(淸)을 한 대륙에서 서로 공존했다고는 도저히 생각 할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반도역사를 따르더라도 삼한은 끊이지 않고 BC57년부터 서기1897년까지 명맥을 유지 한 반면에 한문역사는 곳곳이 단절되는 역사로서 아홉 개의 왕조가 이어지기에 급급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이 잘 사용하는 오리앤탈리즘(Orientalism)이란 용어는 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1935-2003)의 1978년 저서《오리엔탈리즘》에서 나온 것인데"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사고양식"으로 재정의 되어진 것이라 한 것을 보더라도 서양과 동양이란 구분은 확실히 인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1377년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공개한 사람은 프랑스의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1853-1922)이다.

반면 독일인 금(金)세공업자 구텐베르크는 1453년에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고 하였다.

언뜻 보기에는 고려가 만든 금속활자와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같아야 하고 같을 수밖에 없다.

다만 고려가 발명한 금속활자는 한문으로 인쇄 한 불교경전을 제시한 것이고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것은 바로 라틴어 성서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문은 동양, 라틴어는 서양이란 등식으로 구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분명하게 기술되어 나오는데 금속주조보다는 활자설계, 활자대량 생산기술과 특별하게 취급된 것은 바로 유성잉크 개발이고, 목판인쇄기를 결합시켜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쇄기계까지 개발한 것이 고려가 아닌 구텐베르크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역사주체 고려(高麗)를 감추기 위해 매우 편협적인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상기해야 할 것은 고려는 인쇄술만 아니라 질 좋은 종이를 만들어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고려종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또한 기록으로 알 수가 있었다.

인쇄발달에서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서양 자료에 보면 본래 금속활자 인쇄는 동철을 잘 녹여 활자를 부어내는 주조하는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어낸 활자를 판에 고착시키는 점착성물질(粘着性物質)과 쇠붙이 활자에 잘 묻는 기름먹물 유성잉크를 아울러 개발해야 하는 요소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당시 금속활자의 활용적인 측면에서 냉정하게 본다면 대량인쇄가 가능하게 하고 뛰어난 주조기술, 점착성물질개발, 유성잉크개발을 하였다는 구텐베르크의 손을 들어 줄만 한 것이다.

이어 구텐베르크는 1450년 마침내 인쇄소를 설치하고, 라틴어 불가타(Vulgata)성경을 인쇄하였으며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신약 성서를 인쇄하였고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발명품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高麗)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없어 고려는 금속활자발명사실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실제로 가치성은 구텐베르크가 독차지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모순이 아닌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바로 고려의 역사사실을 라틴어를 이용하여 독일 또는 유럽역사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던 이렇게 하여 인쇄술이 발달되었고 또한 인쇄기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금속활자의 가치성을 따져 볼 때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나 불가타(Vulgata)성경 모두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인쇄하여, 성직자와 지식인들만 읽을 수 있었던 경(經)과 성서(聖書)를 대중화시켰다는 것이고 당시 경(經)이나 성서(聖書)를 비롯한 책들은 전부 직접 손으로 쓴 필사본(筆寫本)이라 한정된 수량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싸 구하기가 힘들어 대중화가 될 수가 없었지만 금속활판(金屬活版)인쇄기술이 발달되면서 책은 대량 출판이 가능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기록이나 책을 접할 수 있었다는 역사사실을 중하게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인쇄물은 고려종이를 비켜갈 수 없었다는 점도 상기해야할 이야기다.

이와 같은 인쇄술 발달의 영향은 실제로 특히 동양보다는 유럽에서 두드러지게 기록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일어난 서유럽 문화운동인 르네상스(Renaissance)이고 이어 곧 바로 터진 부패한 종교의 권위를 타파한다는 종교개혁(1521-1640)이 발생되었으며 이어 프랑스대혁명(1789-1794)까지 인쇄술 발달은 끊임없이 인류사회를 풍랑으로 몰아넣고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존재한 것이다.

여기서 물음이 없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고려(高麗)에서도 오히려 구텐베르크보다 일찍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만들었다고 본다면 분명 유럽과 같이 수많은 인쇄물이 넘쳐났을 것이고 못지않게 의식이 발전되어 유럽과 같은 이러한 정치적 과격 현상이 일어났어야 함에도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작된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이와같은 사실을 아무리 뛰어난 서양역사학자라고 하여도 바르게 설명하기가 곤란 할 것이다.

시각적 심리상태가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둔 했던 것인가?

이것은 마치 영국이 아편전쟁을 앞두고 19세기초 생체 실험으로 아편이 서양인보다 동양인에게 잘 통한다고 하여 중국인들을 상대로 아편을 집중적으로 판매했다고 하는 엉터리 같은 말과 같아서 한 번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동양인은 사람이 아니고 유럽인만 사람이어서 그렇다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틀에서 나온 역사사실임에도 억지로 분리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의 역사는 한문을 중심으로 한 동양사와 라틴어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사로 가당찮게 인위적인 분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늘 상 있었던 역사 조작꾼들에 의해 근세기 자본물결에 휩쓸려 한탕주의 부(富)를 노리고 부도덕하게 역사판짜기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신문(新聞:News paper)의 태동

 

지금까지 삽화, 사진, 그림, 그리고 움직이는 영화, 인쇄과정까지 알아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문(新聞:News paper)의 태동이다.

뉴스 페이퍼(news paper)라는 용어는 1670년 영국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신문(新聞)은 근세기에 모습을 들어 낸 자본(資本)과 함께 태동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新聞)은 사람이 궁금해 하던 정보(情報)를 제공하는 특수한 상징성을 이용하여 팔고 사는 자본(資本)특성을 가지고 있는 측면이 분명하게 있다.

뉴스(News)란 낱말은 14세기 중세 영어에 처음으로 등장한 낱말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New(새로운)의 복수형태(newes:최근의 생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동서남북(North, East, West, South), 네방향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는 어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뉴스는 풍수를 말한 것이다.

위키자료에 따르면 뉴스(News)는 사람들 간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에서 서로간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밥 잘 먹었는가? 잘 잤는가? 별고 없으신가? 등 인간의 주요관심사가 의사소통에 주류가 되는데 바로 궁금증에 의한 소식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인류 역사적으로 보아도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BC384-BC355)는 아테네의 시민들이 뉴스 교환과 서로 간의 이야기를 짜 맞추는데 열중하고 있다고 묘사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측면이 생성될 수 있다는 가정이 있을 수 있고 이어 16세기 영국의 한 뉴스북은 발간의 취지를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목마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신문은 사람의 알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기는 한데 사실과 다르게 문제가 생성될 소지가 있음도 알게하고 있다.

바로 자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태생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대중 전달(大衆傳達) 또는 매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라고 하는 뉴스는 그것을 전달하려는 사람이나 조직에 의해 취사선택되기 마련이라고도 했다.

어떠한 것을 뉴스로 전달할 것인가를 정하는 가치 기준을 뉴스가치라고 하는데 자본 가치와 직결된다는 말과 같다.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원칙에는 영향력, 시의성, 저명성, 근접성, 신기함, 갈등 그리고 시사성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원칙적으로 포함되지만 결국 결속되는 부분은 자본(資本)이며 자본이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판단이 우선이란 사실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舊)세력은 영토와 땅만 가지고 권세를 누린 반면에 자본을 등한시 하였고 신세력들은 자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구(舊)세력에게 접근하여 잉여자본을 만들면서 그것을 축적하고 마침내 자본력을 향상시켜 이식놀이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때문에 여기서 실질적인 근대사의 명암이 갈라지게 된 것은 분명 자본이 주는 힘임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특성상 신문은 자본이 궁한 구(舊)세력을 좋아 하였겠는가? 아니면 자본이 넘쳐흐르는 신(新)세력을 좋아하였겠는가?

구세력이 정의가 맞던 아니던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은 언제부터 발행되었고 삼한역사개입은 언제쯤하였는가를 가늠해 볼 필요성이 있다.

로마공화국시대 악타 푸블리카(Acta Publica)라는 필사신문(筆寫新聞)이 최초의 신문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서양의 중세시대에는 읽어주는 구어적인 담화신문(談話新聞), 문서적인 서한신문(書翰新聞) 또는 필사신문(筆寫新聞)까지 연결되고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 공문을 급히 보내기 위해 설치한 역참(驛站)을 거쳐 달리는 파발(擺撥)을 들 수가 있다.

근대신문(近代新聞)의 생성은 고려의 금속활자발명,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보급과 함께 이루어져 최초의 부정기적인 인쇄신문으로 15세기 말에 독일에서 플루크블라트(Flugblatt)가 있다고 백과사전은 설명한다.

이후 1605년에 발행된 최초의 신문인 프랑스 레라치온(Relation)을 들 수 있고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日刊新聞)은 독일의 1660년에 창간된 라이프치거 자이퉁(Leipziger Zeitung)로 알려진다.

이것은 아마도 삼한이 관리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던 중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을 가지고 구(舊)세력은 신문 발행을 막았고 다시 1695년 출판허가법(Licensing Act)이 폐지되자 언론 사업으로 성공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으며 혼란시기라고 할 수 있는 18세기는 유럽대륙과 미국에서 신문발행이 융성한 시기라고 하고 있다.

신문으로 인한 영향은 구세력이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다달았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1702년 데일리 커런트(Daily Courant)가, 미국에서는 1704년 보스턴 뉴스레터(Boston News-Letter)가 본격적인 신문으로 첫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침내 신문(新聞)은 만인을 위한 언로(言路)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설명이다.

본격적으로 신문이 진짜 모습을 들어내게 되는데 영국식민지에서 신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메리카대륙의 신문은 독립전쟁(獨立戰爭:1775-1783)에 이르기까지 영국을 비판하고 저항하는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당시 식민총독과 식민지관리들의 비리고발, 인지조례(Stamp Act)와 타운센드조례(Townsend Acts)등에 대한 저항 등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아메리카대륙의 여론을 창출하고 결속시켜 나갔다는 사실은 삼한역사관점에서 매우 의미를 담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영국, 유럽에서의 영국은 하나가 아니다.

아메리카대륙에서의 프랑스, 유럽에서의 프랑스 역시 하나가 아니다.

아니 유럽전체의 나라가 이와 같은 고리를 정상적으로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체제가 달라도 달랐다는 사실이다.

개혁 성향의 신문들은 미국에서 활동을 한 것이다.

또한 신문(新聞)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인쇄술 발달로 일반대중에 다가갈 수 있는 통신매개체는 프랑스에서도 예외라 할 수 없었는데 미국독립과 결부된 고로 미국지원으로 인한 재정부채가 누적이 되어 정치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던 조선 정조(正祖)라고 판단되는 프랑스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3)가 갑자기 성불능자로 알려지게 만들고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1755-1793)를 요부로 그려진 그림들이 세상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다는 사실은 당시 왕실과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것이 되었고 왕실의 은밀한 비밀이 들어나게 되면서 그로 인하여 백성들은 왕실향한 존경보다는 불신이 커져 구(舊)세력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민의가 싹트게 되어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이 촉발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매우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것은 곧 신문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이고 1825년 무렵에는 미국에서는 이미 유럽보다도 많은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대륙 각지에 사는 주민들에게까지 배달되는 체계가 갖춰졌다고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와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라는 책을 남긴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이며 역사가로 알려진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은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을 한데 뭉치게 만든 힘은 바로 신문(新聞)에 있었으며 미국을 단결시키는 데는 여전히 신문(新聞)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당시로 보았을 때 매우 유효적절한 이야기로 생각된다.

이 말은 신문이 구(舊)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는 도구로서 가치를 인정한 것이 된 것이다.

이어 1833년 발행인 벤저민 데이(Benjamin Day:1810-1889)가 선(Sun)을 창간하여 자본친밀성이 물씬 풍기는 설명이 나오는데 한 부에 1센트를 받고 팔았다고 해서 '페니(penny)신문'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춘다'라는 켐페인으로 당시 최고 발행부수를 달성했다고 한다.

신문이 자본축적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이어 1850년에 로이터(Reuter, 1816-1899)가 최초의 통신사를 시작하였다는 것으로 신문발행을 정리할 수 있어진다.

결국 1850년부터는 사회비판이나 비평이 언로라는 개념으로 상당히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남부군의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1807-1870)장군이 버지니아주(Virginia)의 워싱턴대학(Washington College)학장으로 있을 때, 언론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어서 1860년대 후반부터 저널리즘 교육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대학수준에서 최초의 저널리즘 교육으로 통용되고 있었으며 1880년대부터 미중부의 주립대학 영문학과에서"기사작성법"등의 저널리즘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하였으니 이때부터 기자들이 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880년은 신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최고조로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일 년 후 1881년에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결어

 

사람이 본래 가진 시각심리를 뭐라 할 수 없다.

그것을 근세기에 서양역사학자들이 적절하게 이용하였고 그들에게 유리한 세계사를 꾸밀 수 있는 동력으로 삼았다는 사실 또한 비판할 수가 없다.

다만 삼한역사가 어떻게 사라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풀려야 마땅하다.

현재로서는 구(舊)세력이라는 명칭에서 삼한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삽화, 사진, 그림, 더 나아가서 지도(地圖)를 제작하여 인쇄를 하고 신문(新聞:News paper)을 만들어 발행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였지만 모든 것은 삼한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최종 신문으로 말미암아 구(舊)세력은 붕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는 사실까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당시 신문은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성과 공정성을 잘 지켜 하자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솔직히 자본이 시키는 것을 감히 거역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재 빈발하는 신문이 가진 병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괜히 삽화나 그림 또는 사진, 지도를 동원하여 흥미를 유발시켜 판매수를 늘리려 한 적이 없었는가 하는 점은 신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현재 위 삽화등을 보았을 때 현재 사실을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신문이 반성해야 할 것은 제1차대전에서 발생한 쌍방 희생자가 3천만명과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인명 손실이 발생한 쌍방이 합쳐 7천3백만명이나 되는 숫자이다.

양 대전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희생자 숫자는 거의 1억명에 가깝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이 정의인가 묻고 싶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이 미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반도에 구성원들은 거의가 몽골리안이다.

아니 한반도에 정착한 황색인종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위 두 사진은1880년도에 그린 유태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의 삽화인데 한사람은 갓을 쓰고 한 사람은 망건을 쓴 그림을 볼 수 있고 삽화아래를 보면 분명하게 Caucasian race(1880)이라고 기재 되어있다.

'Caucasian race' 백색인종을 뜻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백인 상인이라고 적혀 있고 아래는 그냥 백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당시 상인들의 갓은 차양부분인 양태(凉太)가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래 그림은 망건(網巾)을 쓰고 있는 사람인데 이 모두 분명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코카서스 즉 백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본 블로거가 주장한 것처럼 조선인은 서양인도 포함한 것임을 알게 한다.

바로 조선인 백인이 밝혀진 것이다.

대조선 프랑스인, 대조선 영국인, 대조선 미국인, 대조선 이탈리아인 그 속에 모두 포함 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더 무슨 이야기가 필요한가?

백인(Caucasian)이 조선의 갓을 쓰고 망건을 쓴다?

지금 반도역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위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Y-DNA 염색체 분류 하플로그룹'Haplogroup R1'를 가진 아메리카인디언들은 백인 통혼 이전 사진을 보아도 안와상융기(眼窩上隆起:supraorbital torus)가 발달하였고 코가 좁고 높은 형질이 많이 보이는 백색인종, 유럽인종을 이르는 코카소이드(Caucasoid)적 특징이 있다고 했다.

바로 위에 갓을 쓰고 있는 사람의 형상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Y염색체 하플로그룹'Haplogroup R1'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조선출몰지에서 나타나는 인종인데 이 'R1'에서 파생한 'R1b'가 러시아의 마지막 활제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1868-1918,재위:1894-1917)에게 나타나는 염색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 할 뿐이다.

이렇듯 대삼한 역사는 세계를 포괄하였고 세계인종을 포괄한 것이 된다.

이것을 서양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자본에 의해 대조선이 허약한 틈을 타 근세기에 분리했다는 사실을 감지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분명 역사를 거스르는 짓이며 이것이 정의라면 그들의 정의는 역사도둑질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구(舊)세력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신(新)세력에게 인류가 어떤 보상을 받았는가 묻고 싶다.

마찬가지로 구(舊)세력을 험오하던 권력과 악습이 자본권력으로 옮겨 가면서 신세력이 그것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인류가 발전했는가?

그렇다도 하층민계급이 보더 윤택해지고 불평등한 처우가 개선된 것인가?

하지만 정신적인 문제에서 구세력이 지배하던 세계보다 나를 것이 없어보인다.

인명을 경시하고, 이기적이며, 상하구분이 되지않고, 조상을 섬기지 않고 어른을 업신여기는 것이 원칙인냥 변해 버린 것이다.

"사람은 보는 대로 믿는다(People belive in seeing.)"라는 속성(屬性)은 결국 역사를 고치고 조작하는데 용이하게 하여 철저하게 이용되었음을 알았고 그들이 원하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그리고 신문(新聞)은 태동하여 한 때 인류에게 크나큰 위안이 되었지만 똑 같은 방식으로 정의를 버리고 자본을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은 옛 구세력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어 인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결국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은 사람을 피폐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지구전체가 아니 전 인류가 단 한번에 불 장난으로 완전히 멸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자본을 동원하여 핵을 만들고 핵 보다도 더 강력한 살상무기까지 만들려 하고 있고 결국 만들어질 것이란 예측을 할 수 있다.

언제든지 최악의 상황이 도래 할 수 있는 공동운명체가 되고 말았다.

향후 결국 가진자와 못가진자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매우 비관적인 이야기다.

무엇이 이토록 피폐하게 만들었는가?

바로 인본을 주로 삼지 않는 도덕 불감증이다.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삼한역사가 이런식으로 사라지고 없다는 것에 비통하게 생각한다.

이럴 때 삼한 역사가 역사반전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도역사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엉터리 역사 반도역사로 인해 적체되어 있는 오욕과 오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벗어 던질 수 있는 역사 반전(反轉)이 필요하다.

고려(高麗)가 금속활자를 발명하면서부터 현재의 이르는 오욕과 오물에 파묻히는 불합리를 겪었다면 이제 반전(反轉)을 통해 여태 불합리를 보상받아야 함은 당연하고 세계삼한역사를 찾아 최악의 공동운명체에 빠져있는 인류를 구원한다는 사명감까지 갖출 수 있도록 우리모두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비록 세계삼한이 구(舊)세력으로 몰려 사라지게 되었지만 이제 다시 한 번 역사반전(反轉)을 이루고 싶다.

머지 않아 우리가 기대한 반전의 역사를 기다리면서 짧지 않는 글을 마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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