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가 지닌 인도(印度)

한부울 2013. 3.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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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가 지닌 인도(印度)

 

1.서두
등명제(燈明祭)라고 하는 디왈리(Diwali)축제
2.카리브해가 주는 역사적 의미와 콜럼버스의 착각지도
3.인도계 주민 41%
4.트리니다드토바고의 식민지역사
5.트리니다드토바고의 인구동향과 함께 보는 아메리카 인구추이
6.인도아대륙의 인구변동상황
7.영국(英國)은 동양사(東洋史)에서 일본(日本)으로 나타난다.
8.삼위일체의 허구와 진실
9.콜럼버스에 의해 확인된 인도(印度)
10.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멸망에 깊게 자리 잡은 천연두
11.결어

 

1.서두

 

나는 얼마 전 TV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다큐(docu)를 본 적이 있는데 디왈리(Diwali)란 축제가 눈에 들어오면서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인도가 보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등명제(燈明祭)라고 하는 디왈리(Diwali)축제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서 디왈리(Diwali)란 무엇일까?

이것은 등명제(燈明祭)라고 하여 삼한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으로서 불교의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빛의 축제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은 빛과 진리에 의지해서 스스로 지혜롭게 살아가겠다는 표현으로서의 행사로 볼 수 있겠다 싶다.

이 축제는 힌두인에게 전통적인 힌두교(Hinduism)제사로 각인되어 매년 카르티카(Kartika-eighth month:10~11월)의 초승달이 뜨는 날에 행하여진다 하고 어원인 산스크리트어의 디파발리(dípāvalí)는 빛(light)의 행렬을 의미하며 겨울의 파종기를 맞이하는 상인들에게는 신년제사인 것이다.

기원은 오래되어 힌두교의 성전(聖典)의 하나인 푸라나(Purana, 傳承說話)나 고전기(古傳記)의 문학작품에 현재와 다름없는 풍속이 묘사되고 있다고 사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이 행사는 오래 된 전통행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행사가 열리는 이날 저녁에 사람들은 부(富)와 미(美)의 여신 라크슈미(Lakshmi:吉祥天)와 시작을 축복하고 재앙을 없애는 신(神) 시바(Siva)의 아들, 가네샤(Gaṇeśa)에게 예배 즉 푸자(puja)를 바치며 문(門), 지붕, 담 등 모든 곳에 작은 토기(土器)의 램프를 달게 한다.

때문에 이 날은 크리슈나(Krsna)가 악귀(惡鬼) 나라카수라(Narakasura)를 퇴치한 날이 되고, 라마(Rama)신이 악신(惡神) 라바나(Ravana)를 멸망시켜서 수도(都)로 귀환한 날이며, 비슈누(Visnu)가 권화(權化) 또는 화현(化現)해서 악귀의 왕(王) 바리를 죽이고 인도신화의 미(美)의 여신인 라크슈미(Lakshmi:吉祥天)를 구출한 날 등으로 하여 지방(地方), 종파(宗派)에 따라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고 백과사전에서 적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종교행사를 고스란히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서 인도계 주민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2.카리브해가 주는 역사적 의미와 콜럼버스의 착각지도

 

트리니다드토바고(Trinidad and Tobago)는 위치적으로 남아메리카에서 아주 가깝지만 문화적, 지리적 구분에 의해 남아메리카대륙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오히려 북아메리카에 속하는 나라로 분류된다는 사실이 퍽 이채롭게 느껴진다.

이것은 어떤 이야길까?

현대적으로 풀어보면 정치적인 문제에서 통상 카리브해(Caribbea)를 북아메리카대륙에 넣고 있는 원칙에 기인하겠지만 풀어 볼 때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을 특히 남부를 기점으로 하는 어떤 역사적 근원에 따라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도(印度)라는 거대한 역사가 있다.

 

이미 밝혔던 사실이지만 아메리카대륙은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에 보았을 때 천축(天竺)이며 인도(印度)영역이라고 벌써 주장한 사실이 있으며 삼한역사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러한 역사를 찾아 나선입장이다.

그러한 토대에서 포함되어야 할 카리브해(Caribbea) 역시 그러한 범주에 벗어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 카리브해를 통상 해(海)로 통칭되었을 것이란 예측을 한다.

통상 해(海)로 통칭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독립적인 지역으로 인정되던 곳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근세사에 등장하는 콜럼버스가 이 바다를 인도제도(Indies:印度諸島)라고 했던 것으로서 근세기에 들어 서양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였고 부정한 것이어서 인도제도라는 지칭에 대한 믿음은 더욱 확실하게 각인된다 할 것이다.

정말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의 동(東)쪽을 대동양(大東洋)라고 하였기 때문에 동쪽이 분명하고 동해라고 할 수 있어 이 카리브해까지 그 영역에 들어가겠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볼 때는 남쪽 바다가 될 수 있지만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볼 때는 북쪽 바다가 되어 서로 호칭에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이다.

때문에 남해나 북해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그냥 해(海)로 통칭하였을 것이란 생각이 있다.

그냥 해(海)라 하지 않았다면 분명 무엇인가 독자적인 호칭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근세기 이전 호칭으로 남해(南海)는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서쪽지역을 말하였으며 현재 태평양이라고 지칭되는 큰 바다의 남쪽이었다는 것을 옛 지도로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카리브해는 해(海)라 하여 해상대국 신라(新羅)가 있는 곳을 지칭했거나 신라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그밖에 상업측면에서 볼 때 전통적인 무역 중심지역할을 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지중해와 이 서인도제도 사이를 해상도로로 하여 무수히 왕래하였다는 것을 서양기록으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반면에 지금 태평양을 횡단하여 동아시아대륙과의 왕래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지리학적인 상식이 태평양을 극복하기에는 부족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상식은 콜럼버스의 착각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현재 태평양을 거대한 육지로 보아 아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이 붙어 있다는 상식이 통했던 시대이다.

이러한 상식이 15세말까지 그랬다면 거의 수백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고 파나마운하가 개통되면서 일반 상식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내다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착각지도가 만연했을 시기인 1592년에 북아메리카대륙과 연결되어야 할 동아시아대륙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황당한 설정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착각지도는 더 나아가 북아메리카대륙 중부를 카타이(catai)라 했으며 북부지역은 타타르(Tatar)로 기재되어 있고 남부에는 망기(Mangi, 蠻, mong)라고 적혀져 있어 인도(India)를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카리브해역에 있는 모든 제도들은 결국 콜럼버스가 말했듯이 서인도제도가 아니라 “인도제도(印度諸島)”가 틀림 없고 이 제도들은 북아메리카대륙 망기(Mangi)를 근본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누구인가?

신라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콜럼버스가 타고 온 배는 포르투갈이 처음 만든 배로서 백제 배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후세 서양세력들에게 처음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여 영웅으로 취급 되었지만 카리브해를 인도제도라고 했다고 지리학도 모르는 바보 천치, 심하게 말하면 지리학도 전혀 모르는 무식쟁이로 몰렸던 역사문제에서 양면의 칼날같은 기구한 운명의 인물이었음을 알게 한다.

결국 콜럼버스의 말처럼 인도(印度)는 아메리카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3.인도계 주민 41%

 

그런데 이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 인도계주민이 41%가 되어 거의 반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에서 또 한 번 놀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동인도(東印度)가 아닌 서인도(西印度)에서 그것도 오래 전에 스페인 식민지 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계(印度系)인구가 전체의 반을 차지 할 정도로 늘어났을까 하는 진한 의문을 남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종교(宗敎:religion) 비율적인 면에서도 자료를 보면 가톨릭 신자가 26%이고 그 다음으로 인도계의 영향으로 한 힌두교(Hindu)신자가 22.5%이며, 영국의 영향으로 성공회(Anglican)신자가 7.8%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파악에 매우 중요한 사실로 여겨진다.

물론 자료에서도 말했듯이 먼저 생각 해 볼 수 있는 것은 인도아대륙에서 이민해 온 주민이라고 생각되지만 말처럼 이민을 할 때 고향에서 하던 모든 생활양식, 풍습, 종교 등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지배자의 아량에 달려있다는 사실임을 이치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때문에 아무리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민이라고 하지만 어쨌던 스페인이 지배하였고 또한 영국(英國)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더군다나 그들의 전통 고향이라고 하는 동인도(東印度)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 역시도 영국지배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틀림 없어 오히려 원주민인 토착민보다도 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고 할 때 이렇듯 인구가 늘어나고 종교가 확장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 볼 때 영국이 무엇인가 못이겨 할 수 없이 암묵적으로 이를 허용하였거나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정도 인도계를 우대하고 그들의 종교를 보장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신분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러한 구도는 생각하기 쉽지 않다. 

인구증가, 종교 뿐만 아니라 언어문제에서도 현재 영어(英語)를 공용어로 하고 있으나 인도아리아어의 하나인 힌두어(Hindi language)의 북방 방언이라고 하는 카리브(Caribe)힌두스타니어(Hindustani)가 있고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등이 사용된다고 한다는 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대우이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인도인의 생식력을 보았을 때 오히려 흑인들이나 다른 부류의 인종들을 역유입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주변 상황인데 트리니다드토바고 뿐만 아니라 바로 아래 위치한 가이아나(Guyana) 역시도 종교적으로 힌두교 28.4%로 가장 우세하고 주민비율도 동인도인 즉 인도아대륙인 43.5%, 흑인(아프리카계)30.2% 로 나타나고 있으며 바로 옆에 있는 수리남(Suriname)역시도 힌두교가 27.4%, 힌두스탄인 37%으로 비율적으로도 가장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냥 인도계라고 단정지워 무시해 버릴 문제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 아다시피 가이아나는 인도의 상징인 기니피그(guinea pig)의 서식지 이름과 비슷하다.

 

 

4.트리니다드토바고의 식민지역사

 

그렇다면 이제 트리니다드토바고(Trinidad and Tobago)의 역사를 보자.

자료에 따르면 트리니다드(Trinidad)섬은 1498년 7월 31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의 제3차 항해 때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후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1542년 스페인은 트리니다드(Trinidad)섬에 초대총독을 임명하였다는 사실까지는 특이하지 않다.

그런데 1588년에 영국선원이 트리니다드(Trinidad)섬 북쪽 토바고(Tobago)섬에 상륙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 전까지 스페인이 관할하였던 지역임에도 어째서 토바고(Tobago)에서 영국과 스페인의 충돌 역사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1588년이면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4년전 일이다.

 

당시 세계 인구통계자료에서 트리니다드토바고 섬에 대한 인구 집계한 시기는 1815년으로서 나타나는데 전체 주민 수가 고작 31,000명 정도이다.

이 자료가 정확하다면 서인도제도라고 하는 곳에 위치한 전체 섬들 주민수가 거의 이런 수치정도이기 때문에 무시될 수 있다는 측면이 있겠다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민감한 것이 바로 영토문제라고 한다면 결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충돌은 뻔 한 수순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상식은 근세기 까지 계속되는데 근세기의 서양세력들이 차지하는 영토를 보면 거의가 할양(割讓, cession)이란 단어로 영토문제를 종결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1800년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은 이 할양이란 단어로 전 대륙을 차지하게 된다.

그것도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을 상대로 말이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서양사가 기존 들어낼 수 없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각기 편리한대로 국명이름만 바꿔 역사처리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낳게 하는 의혹이다.

거대한 하나의 세계역사를 아시아와 서양역사로 떼어 놓았다는 점도 이해 할 수 없지만 기존 역사를 이렇게 저렇게 분리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백으로 남을 영역 또는 위치에 마땅히 전쟁이나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변명할 자료를 만들기 보단 제일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할양이란 단어와 매입이란 수순을 거쳤다는 식으로 종결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어진다.

 

어쨌든 토바고(Tobago)섬은 일찍이 콜럼버스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름을 명명한 곳이기 때문에 스페인 관할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무단 상륙하는 영국과 스페인이 전혀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요즘말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나눠먹자는 이야기가 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세력 간에 이러한 유순함과 달리 지배자의 포악함이 여실히 들어나는데 힘이 약한 원주민을 상대로 무자비했다는 것으로서 1699년에는 트리니다드(Trinidad)섬의 원주민들이 스페인정착민에 항거하다가 멸족당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고 있으며 토바고(Tobago)섬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멸족당한 것으로 알려진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믿어야만 하겠지만 근세사가 만든 많은 모순때문에 솔직히 믿을 수가 없다.

이 시기에 한반도 조선(朝鮮)에 대한 근대기록을 보면 이양선(異樣船)들이 제주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627년에 네덜란드 3인이 제주도에 표류했다는 것이고 1653년에는 그 유명한 네덜란드 상선 슈페르베르(De Sperwer)호의 하멜 일행이 표류했다는 시기가 된다.

하멜은 한반도에 조선을 생성시키고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근세기에 역사 조작세력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로 비판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여기서 분명히 하자면 당시 모든 정보를 근세기들어 서세가 장악하고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사실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이때부터 삼한을 상대로 해적들이 준동한 시기로 볼 수 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네덜란드란 이름의 국가이다.

당시 이것이 국가인지 아니면 해적 집단인지 분명치 않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이야기다.

물론 하멜표류기는 후세 근세기 역사판짜기하면서 조작된 것으로서 원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재판인쇄가 지속되면서 철저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늘 가능한 이야기로 대두된다.

나쁘게 말한다면 지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마치 사실처럼 각색하여 사실과 다르게 편집하여 일방적으로 인쇄하고 출판하여 인위적으로 퍼뜨린 기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근세기에 동서(東西)가 분리되는 역사를 생성하는데 기여 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행위를 창안하겠금 한 도화선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기(東方見聞記)가 시발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이 동방견문기 로행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동방 즉 북아메리카대륙을 견문한 것이어야 맞다.

왜 그런지 위 게시한 콜럼버스의 착각지도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동방이 어딘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다.

동아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이 붙어 있다는 상식이 통한 시대이고 시절이다.

난데없이 동방을 동아시아대륙으로 몰아넣고 그것을 꿰 마추려 했으니 지탄을 받아 마땅한 책이다.

때문에 서양 기록에는 프랑스어(語)의 원본은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산일(散佚:scattered and lost) 즉 흩어져 없어졌다 하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문제의 원본은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다.

 

근대사를 보면 이런식의 엉뚱한 것들이 많은 곳에서 억지스러움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근세사를 결코 순수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고 분명 근세기이전까지 거대한 하나의 역사를 근세기들어 알 수 없는 이유때문에 서양사와 동양사를 철저하게 분리시켰다는 의심에서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을 꿰맞추기 위해 마르코폴로나 해적이라고 여겨지는 하멜같은 사람들이 필요하였고 그가 만든 기록이라 하여 책을 만들어 기록을 사실화하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양사나 동양사를 꾸미는데 불필요하거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소지에 있는 자료, 장애로 생각되는 것들은 가차없이 삭제하였을 것이고 후세 검증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완전히 비워두고 공백으로 처리하였을 것이란 판단을 쉽게 할 수가 있다.

실제로 스페인에 의해 멸족당한 트리니다드(Trinidad)섬과 토바고(Tobago)섬의 원주민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 알 길이 없도록 만든 것이라고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또 한가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원주민들은 스페인에게 멸족 당하였기 때문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흑인을 강제유입시켰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만약 인도인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를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리 강제 유입이라고 하더라도 토착민의 성격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면 흑인노예 대신에 인도계를 끌어들렸다는 도식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노예해방령을 동원해 이것을 정당화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어 결국 인도계가 유입되었다는 것으로 정리하였을 것이다.

당시 서구세력들은 아열대, 열대지역에 재식농업(栽植農業)형태인 사탕수수농장(plantation)을 만들면서 그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농장에서 일할 흑인노예를 아프리카대륙으로부터 강제로 이동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1838년부터 영국의 노예해방령에 의해 흑인들이 해방되면서 부족해진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머나먼 아시아(asia)땅,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으로부터 계약노동자가 유입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서양사의 주장이다.

계약노동자는 노예인지 아니면 일반 노동자인지 파악하기에 분명하지가 않다는 사실도 있다.

노예라면 인도아대륙에서 끌려온 것이고 일반 노동자라면 본토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도계 인구수가 늘어나 1917년까지 14만 3천여 명에 달하였다는 것은 전통 역사적인 인도인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세계역사인구통계자료에 따르면 트리니다드토바고의 1917년 전체 주민인구수가 371,900명이었으니 이때 143,000명의 인도계는 38% 조금 넘는 백분율이 된다.

현재 41%이니 그 때보다도 더 상승된 수치이다. 

1863년 1월 1일 링컨(Abraham Lincoln:1809-1865)에 의한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이전 이미 영국에서는 1807년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1833년에 대영제국전체에서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특히 인도영역이라고 판단되는 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 남부(南部)와 서인도제도만이 이 노예제도가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마침내 영국의 정치가이면서 노예폐지운동가인 윌버포스(Wilberforce William:1759-1833)와 벅스톤(Buxton Thomas Fowell:1786-1845)의 노력으로 영국의회에서 1838년 8월 1일을 기하여 유상방식(有償方式)에 의한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의 노예를 풀어주는 노예해방령(Emancipation Proclamation)이 통과되면서 서인도제도의 노예제도는 사라진 것이 된다.

대신 무상으로 쓰던 노예를 노동자로 취급하여 보수를 주었다는 사실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서양인들이 노예에 대한 시각변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토착민인 인도인들을 더 이상 노예로 보지 않고 노동자로 취급하였다는 말고 같게 볼 수 있다.

 

이것과 함께 노예해방령이 있었던 1838년까지 중앙,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분리독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1821년부터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분리 독립하기 시작하는데 1821년에 베네수엘라가 독립하고 페루, 멕시코, 도미니카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앞 다투어 독립 선포하였으며 1822년에는 멕시코 아구스틴 1세(Augustine I:1783-1824)황제가 독립을 선포하며 즉위하였고 그 해 브라질 역시 독립을 선포하면서 페드루 1세(Pedro I:1798-1834)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1825년에는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포하고 1828년에는 우루과이 독립하며 1830년에 큰 콜롬비아(Colombia)가 삼국으로 분리되는데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이다.

 

이때부터 세계정치적인 동향은 기득권 봉건세력과 신흥자본력이 충돌하기 시작하는데 노예해방과 관련하여 곡물수입을 억제하던 기존 지주계급과 대립하던 신흥자본 세력이 반곡물법(反穀物法)동맹을 1838년에 영국에서 결성하게 되면서 곡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시발이 되어 자유무역 시장경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해 온두라스, 니카라과가 중앙아메리카연방(United Provinces of Central America:1823-1838)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서인도제도에서 노예해방령이 시행되었던 1838년에는 중앙, 남아메리카대륙에서는 완전 분리 독립이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가 있다.

 

5.트리니다드토바고의 인구동향과 함께 보는 아메리카 인구추이

 

이러한 시기를 바탕으로 볼 때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처음 인구통계가 집계된 1815년에 인구가 31,000명 정도이었으며 본격적으로 인도계사람들이 유입된 시기인 1838년도에는 현존주민수가 47,000명에서 50,000명 정도로 나타난 것에서 출발하여 80년 후 1917년에는 14만 3천여 명으로 증가함에 따라 거의 7배가 늘어난 수치임을 알 수가 있다. 트리니다드토바고와 같이 인도계가 많았던 가이아나(Guyana)의 인구동향은 1834년에 96,500명이었던 것이 1917년 313,900 명이 되어 3.2배 상승율을 보이고 있고 수리남(Suriname)은 자료가 명확하지 않아 분명치 않지만 1845년에 57,000 명에서 1917년 91,600명으로 증가 폭이 2배를 못 미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인구 상승율은 대단한 것이다.

이와같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인구증가율은 주위와 비교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폭발적인 증가세임을 알 수가 있다.

 

트리니다드토바고 바로 아래 남아메리카대륙 베네수엘라를 보면 인도계가 유입되기 시작한 1838년에 총인구가 945,000 정도에서 1917년 베네수엘라 인구는 2,750,000 명으로 3배정도 불어난다.

베네수엘라 바로 옆 콜롬비아는 1838년에 1,686,000 명이었다가 1917년에 5,715,000 명으로 3.3배정도 늘어났으며 에콰도르 역시 1838년에 660,000명 정도에서 2.3배정도 늘어 1917년에 1,505,000 명이 되었다는 통계를 볼 수 있는데 반해 멕시코는 1838년에 7,044,000명 이었다가 1917년에는 14,630,000 명이니 약 두 배 정도만 증가하여 다른 국가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한 미국의 인구동향을 보면 2배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는 멕시코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영국에서 노예해방령이 있었던 1838년에 미국 인구는 15,843,000 명이었던 것이 80년 후 1917년에는 103,268,000 명으로 대폭적으로 늘어나 1838년부터 80년 동안 거의 트리니다드토바고 인구증가 수준에 버금가는 6.5배의 증가 수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즉 미국에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따른 유입인구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해마다 백 만 명이란 숫자가 증가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1억미만의 인구가 년 1,000,000 명씩 증가된다는 것은 자연적 증가가 아니고 유입에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6.인도아대륙의 인구변동

 

그렇다면 가장 미국이나 트리니다드토바고에 인구유입지라고 의심되는 현재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 즉 동인도라고 하는 아시아 인도의 당시 인구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인구동향을 분석을 해 보지 않을 수가 업다.

첫째 영국의 노예해방령이 발표될 시점인 1840년에 270,348,000명이었다가 80년 후인 1917년에 252,827,000 명으로 오히려 약 18,000,000 명 가량 인구가 감소한 형태를 볼 수있는데 이것은 상당한 충격적인 수치라고 판단된다.

증가해도 시원찮을 것인데 왜 이런 감소수치가 나올까 생각해본다.

1881년부터 1895년까지 년 1,000,000명 씩 줄다가 1895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 감소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어디로 인지 알 수 없지만 대폭적으로 빠져 나간 것이 된다.

1881년 최종 인구가 293,592,000 명이었다가 1920년에 43,893,000 명이 줄어 249,699,000 명이 된다. 1920년 이후 평균 증가 수치가 년 2,000,000~3,000,000 명 인 것을 대입하면 약 2억명이란 인구가 감소되어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 로 증가되는 속도는 계속유지되는데 년 4,000,000 명정도로 유지되다가 1950년에서 1951년 사이에 13,000,000 명이 갑자기 대폭증가하고 그 이후 점차 늘어나 평균 7,000,000 명 1957년 부터 9,000,000명 1962년부터는 10,000,000 명 1971년에서 1972년에는 16,000,000 이 증가 하는 추세 속에 현재 200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인구 증가 숫자는 평균적으로 14,000,000 명을 상회하는 인구수를 나타내고 있다.

세부적으로 볼 때도 이상하게도 크게 들쑥날쑥한 년대가 보이는데, 1860년, 1870년, 1881년이다.

1860년 인구가 292,366,000 명이었던 것이 바로 일 년 후 1861년에는 135,634,200 명으로 약 156,731,800 명이 감소되는 형상을 볼 수 있다.

1860년에 거의 53%가 되는 인구가 갑자기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이다.

이 시기에 인구감소요인으로 등장하는 세계주요사건으로 1861년에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이 있었고 같은 해 인도(印度亞大陸), 북서부(北西部)에 대흉년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862년에는 미국 대통령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있었던 해이고, 한반도 대조선(大朝鮮)역사에서는 1862년에 충청, 전라, 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民亂)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구 감소요인으로 볼 수가 있다.

 

또 인도(印度) 총인구에서 1871년에는 191,307,100 명이었던 인구가 1년 후 1872년에는 303,415,000 명으로 증가 되었고 증가된 인구수가 112,107,900 명으로 58%가 증가한 것이다.

이때 1870년대 주요사건을 보면 1871년에 인디언 최후의 저항투쟁인 아파치족의 반란이 시작되어 거의 15년간 1886년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872년에 인도 총독 리처드 부르케(Earl of Mayo)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극도의 혼란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사건속에서 짐작 할 수가 있다.

또 1875년에는 인도(印度亞大陸)인구가 300,963,000 명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6년 동안 인구통계가 전혀 없다가 1881년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나는데 201,888,100 명으로 감소되어 나타난다.

6년 동안 감소한 인구 숫자가 자그마치 99,071,900 명이나 되어 전인구의 약 33%, 거의 1억 명 가까운 숫자의 사람이 사라지거나 없어진다.

이것도 아파치 반란사건이 1886년에 마무리되고 1881년은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되던 시점과 맞물린는 시점에서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 때 주요사건으로 1875년에 인도 봄베이관구(管區) 데칸에서 농민폭동이 있었고 대조선(大朝鮮)에서는 울산에서 민란이 일어나는데 왕이 경복궁으로 이궁하였다고 할 정도면 상당히 위급하게 느껴지는 민란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으며 또 1876년에는 터키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같은 해 불가리아인에 대한 대학살사건에 항의가 있어 터키를 향한 폭동 일어났고 1877년에 일본 서남(西南)전쟁이 있었다.

반면 같은 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제국(帝國)을 설립하고 인도 황제를 겸임하는 모양새를 취하는데 이것은 인도(印度)란 역사장소를 현재 위치로 옮기고 난 이후의 제국다운 정치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같은 해 1881년에 갑자기 약 50,000,000 명이 증가하여 250,155,000 으로 불어났다가 같은 해 또 다시 293,562,000 으로 증가하는 아주 기이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1881년 한해에 갑자기 91,673,900 명이 증가하는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대량인구가 유입이 이루어진 것이다.

1880년에 아일랜드에서 폭동이 있었고 1881년에 인도에서 최초로 공장법(工場法)이 재정되었으며 같은 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가 암살되었으며 이런 와중에 기득권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합스부르크왕가(Habsburg Haus)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삼제동맹과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간 비밀동맹조약도 체결된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1882년에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이 시행되는 시점과도 연결되고 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추측하게 하는데 인도(印度)의 인구가 1875년부터 1881년까지 6년 동안 감소한 인구수가 1881년에 다시 그 감소한 인구수만큼 다시 증가되는 이상한 현상을 중국인추방법에 대비하여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130년 전이니 통계가 분명치 않을 수도,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인구가 수치상, 갑자기 사라지거나 증가되었다는 것은 분명 어떠한 큰 역사적 사건과 결부되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인도에서 1881년부터 1895년까지 년 1,000,000명 씩 줄다가 1920년까지 계속 감소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근세기 혼란과 결부되어 기이하게 보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미국의 총 인구수에서 남북전쟁(1861-1865)시점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1860년 총인구가 31,443,300 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날 시점인 1867년에 37,376,000 명이라는 수치를 나타내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감소가 없었으며 오히려 평균적인 상승 이상의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게 생각되는 점이다.

 

이상에서 미국과 트리니다드토바고  그리고 인도아대륙의 인구변동상황을 살펴보았는데 특별한 인구유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여러차례 목격할 수 있었고 또한 무엇으로 인한 대량의 인구감소 현상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늘 상 인구 이동 구도는 "A 에서 B로, B에서 A로" 인위적으로 대규모 인구가 급격하게 이동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게 한다.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인도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그렇듯 노동력 상쇄역할을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구의 대다수를 인위적으로 이동시킨 것이 아니라면 트리니다드토바고에는 전통적으로 인도의 고유문화와 풍습이 있었고 그것을 유지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인도양(印度洋)에 있는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의 사람들이 1838년 노예해방령이 떨어진 후 노동력의 결원을 채우려고 그들 고향을 버리고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힌두교를 가지고 그것도 대륙이 아닌 살기가 열악할 수밖에 없는 섬(島)인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면 노예라는 신분을 탈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1838년부터 유상방식(有償方式)의 노예라는 신분으로 인식만을 바꿨다는 것인데 이 인식은 노예라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지배자는 인도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7.영국(英國)은 동양사(東洋史)에서 일본(日本)으로 나타난다. 

 

또 근세사에 따르면 1757년에 트리니다드(Trinidad)섬의 수도를 산 조세프(St. Joseph)에서 포트오브스페인(Port-of-Spain)으로 이전하였으며 1797년 나폴레옹 전쟁기간 중 영국군이 트리니다드(Trinidad)섬을 점령하였고 1802년에는 트리니다드(Trinidad)섬이 아미앵(Amiens)조약에 의해 프랑스(스페인)가 영국에게 할양하였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은 유럽대륙에서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인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관리할 수 없도록 처해진 환경을 노려 영국(英國)이 카리브해(Caribbea)의 도서(島嶼)들을 할양받았다는 것인데  이어 1814년에도 토바고(Tobago)섬을 파리조약(Treaty of Paris)에 의해 다시 프랑스로부터 영국이 할양받았다고 하였으니 결국 영국은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어부지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본격적으로 1888년부터 트리니다드(Trinidad)섬과 토바고(Tobago) 두 섬을 통합하여 관리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섬은 유구국이라고 할 수 있는 섬에 속한다.

이미 동아시아대륙역사에서 유구국이 서인도제도의 윈드워드제도라는 것을 본 블로그가 주장했던 사실이다.

동양사적으로 유구(琉球)의 위치가 윈드워드제도가 되어 도미니카(Dominica), 마르티니크(Martinique),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 세인트빈센트(Saint Vincent), 그레너딘즈(Grenadines), 바에미도스(Barbados), 그레나다(Grenada), 트리니다드토바고(Trinidad and Tobago)가 유구가 된다는 의미이다.

영국(英國)은 동양사(東洋史)에서 일본(日本)으로 나타난다 하였다.

1802년의 아미앵조약(Treaty of Amiens)이나 1814년의 파리조약(Treaty of Paris)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할양한 이 섬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유구국(琉球國)으로 볼 수 있는데 1875년 일본이 강제로 군대를 보내어 점령했다는 것과 흡사하게 중복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앞선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역사로 볼 때 두 섬 모두 원주민들이 몰살되었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동양사적으로 보면 유구국의 주민들이 몰살당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 인도계 유입정책이 유구국의 원주민들을 대신해서 유입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유구국에 인도인들이 존재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다.

 

유구(琉球)는 윈드워드 제도(Windward Islands)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8

 

앞에서도 이야기 한 것이지만 인도계가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41%를 차지하는 상황을 보면 영국이 지배하면서 인도인들의 고유문화를 권장하고 조성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영국의 식민정책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다만 이곳은 전통적인 인도(印度) 즉 인디즈(Indies)라는 특수한 역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8.삼위일체의 허구와 진실

 

그렇다면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영국(英國)의 그림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보자.

그것을 알기위하여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문장(Coat of Arms of Trinidad and Tobago)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 문장을 보면  

제일 위에는 야자나무(palm tree)가 있다.

그 아래는

crown of the monarchy of the United Kingdom,

영국 군주의 왕관이 있고 그 아래 방패그림 상단에 두 마리(hummingbirds)의 벌새가 있다.

이 벌새는 특유의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많이 자라는 새이다.

그 아래는 콜럼버스의 신대륙을 항해하는데 사용된 3척의 황금 배(gold ships)라고 하여 그려져 있으며 방패 양옆에 두 큰 새들은 왼쪽은 홍 따오기라고 하는 주홍 이비스(Scarlet Ibis)라는 새와 오른쪽은 콜롬비아 북부, 베네수엘라 북부, 트리니다드토바고에 분포하는 차찰라카(Chachalaca:Cocrico:棕臀稚冠雉)라고 하는 새이다.

그리고 아래는 세 언덕(the Scarlet Ibis are three hills-Trinity Hills)이 나타나고 차찰라카(Cocrico)아래 섬 토바고(Tobago)가 보인다.

  

            
















 [영국군주왕관]


영국(United Kingdom)의 군주왕관은 분명 영국영향력을 상징한 것이다.

그와 함께 볼 것은 바로 세개의 언덕이라고 하는 바로 삼위일체(三位一体:Trinity)를 나타낸 상징성인데 이것을 트리니다드(Trinidad)라고 하고 이 세 산 봉우리 즉 삼위일체를 뜻하는 것은 콜럼버스가 이 섬에 도착한 것이 오순절(Pentecost) 다음의 일요일(三一節:Trinity Sunday)이기 때문에 명명한 것이라 하여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에서 새겨 볼 것이 있는데 바로 인도신화(印度神話)에 등장하는 삼주신(三主神 , Hindu Triad)의 삼위일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三位一体:Trinity)는 우리의 삼신(三神)사상에도 나타나는데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泰一)을 기초한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며 이것은 동방(東邦)철학사상으로 나타나 천(天), 지(地), 인(人)이라 하여 태극(太極)의 기(氣)와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삼재(三才)라고도 한다.

분명 동방(東邦, 東方)의 요소가 들어간 철학사상인 것이다.

동방(東邦)은 태양이 뜨는 땅이라 하여 아사달(阿斯達)을 근원으로 한다고 말했다.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 동방(東邦), 진역(震域), 근역(槿域), 청구(青丘), 계림(雞林), 삼한(三韓)의 땅이고 바로 라(羅)가 있는 곳이라고도 했다.

도가(道家)의 용어로서, 정(精), 신(神), 기(氣)가 합쳐 하나가 된 도(道)가 삼위일체라고도 한다.

일찍이 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는 3세기에 페르시아(Persia)의 예언자 마니(摩尼:Mani:AD 216–276/7)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고 사산왕조(Sassanid Empire:226-651)때 기독교(基督敎:Christianity),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拜火敎), 불교(佛敎:Buddhism)의 요소를 혼합하여 나스티시즘(靈知主義:Gnosticism)의 일파인 마니교(摩尼教:Manichaeism)를 창시하였다는 사실도 전해져 오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에서도 성부(聖父:God the Father), 성자(聖子:God the Son), 성령(聖靈:God the Holy Ghost)으로 삼위(三位)가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하나의 신(神)이라는 교리(敎理)가 바탕인 삼위일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트리니다드토바고의 트리니다드(Trinidad)는 곧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의 주요 기원도 따지고 보면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다신교(多神敎:polytheism)에서 나온 것으로서 지중해 권역의 다른 종교에서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원칙아래 하나의 신(神)안에 여러 인격체가 포함된다는 혼합주의 싱크리티즘(混合主義:syncretism)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고대 이집트 태양의 마을이라는 헬리오폴리스(Heliu polis)의 창세신화에서 창조신 아톤(Aton)과 태양신 라(Ra:羅), 그리고 우주의 창조 법칙인 여신 마트(Maat)가 하나의 인격 즉 삼위일체(三位一体:Trinity)를 이룬다는 내용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그것과 함께 놀라운 것은 인도 힌두에도 삼위일체(三位一体)의 신(神)이 있는데 근원적으로 섬(島) 트리니나드의 트리니다드(Trinidad)와 지극히 일치한다 할 수 있고 또한 발음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인도신화(印度神話)의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nu), 시바(Siva) 삼신(三神)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하는데 트리무티(Trimurti) “트리아드(Triad)”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세 개의 형상(Three Forms)”이라고도 하고 삼주신(三主神 , Hindu Triad), 힌두교삼위일체(Great Trinity) 또는 브라흐마-비슈누-마헤슈바라(Brahma-Vishnu-Maheshvara)라고 한다는데 바로 트리무티(Trimurti)가 “트리아드(Triad)”라 하여 음이 트리니다드(Trinidad)와 가장 근접하고 일치할 수 있는 명칭이라는 것이다.

 

9.콜럼버스에 의해 확인된 인도(印度)

 

근세기 이전 본래의 역사가 말하는 인도(印度)의 영역은 과연 어딜까?

지금 아시아(Asia)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콜럼버스를 지리학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

150톤 규모의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를 포함한 3척의 카라벨(caravel)범선을 타고 1492년 10월 12일에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섬(Guanahani)에 도달했고, 이 섬을 구세주의 섬이라고 하여 산살바도르(San Salvador)이라 칭하였으며 이어 쿠바, 아이티(Haiti)에 도착하여 이곳을 인도(印度)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Indian)이라 칭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발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즉 착각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그가 도착한 곳은 정확하게 인도(印度)이었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근세기 근세사를 완성시키면서 조작세력들에 의해 그것이 착각이라고 호도되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것 뿐이다.

그렇게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근세기 자본을 축적한 신흥세력들에 의해 역사 바꾸기 또는 역사 판짜기가 시도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것이 바로 신대륙이라는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때문에 신대륙이라고 했을까?

동방이 그곳에 있었고 동양이 그곳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부동의 역사사실을 없애기 위해서는 신대륙이라고 하여 역사적으로 빈 곳, 비워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印度)바꾸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인도위치가 동이냐 서이냐는 문제를 태동시켰다는 문제이다.

그것은 근세기에 지리학의 발전에서 나온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동인도와 서인도제도를 분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고 실제 그것이 통하였다.

물론 인도(印度)도 중요하였겠지만 기준을 삼을 동(東)쪽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인데 전통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을 기반으로 하던 삼한조선이 1881년 해체되면서 졸지에 극동 한반도로 몰려 그곳을 전통적으로 코리아라고 인식시키며 안착시킨 것인데 그렇게 되자 동서가 확실하게 구분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발견을 할 때만 하더라도 동서구분이 되지 않고 전체 기준을 태양이 뜨는 곳을 지정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동방은 북아메리카대륙이란 사실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북아메리카대륙의 동쪽 바다를 대동양(大東洋)이라고 부르던 곳임에도 이러한 확실한 역사조차 그들은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인도(印度)는 태양을 상징하는 라(羅)와 같은 의미의 나라이다.

분명 전통적으로 인도(印度)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南部)와 카리브해(Caribbea)를 끼고 있었을 것이고 이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北部)를 합해 통칭하여 인도(印度)라고 하였을 것이란 추측인데 이것을 동쪽이라고 하여 현저하게 서쪽으로 옮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남북전쟁(1861-1865)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륙북부와 전통적으로 대륙남부와는 이질적인 것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북부보다는 남부가 더 보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 동안 분명 아메리카대륙이 인도가 분명한데도 수많은 조심성 때문에 확인을 주저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본 블로그가 찾아 나선 인도(印度)란 명칭이 들어간 모든 주요 생물들은 거의가 멸종되다시피 하였고 그나마 흔적, 자취라도 찾아볼라치면 인위적으로 이동시켜 놓아 지금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에서 결국 찾을 수밖에 없게 하였다.

때문에 결국 그들은 치밀하게 역사 바꿔치기를 잘마쳤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역사판짜기까지 완벽하게 완성시킨 것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완전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헛점은 있다.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대령과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함장 그리고 군의(軍醫) 맥레오드(J.M'Leod), 박물학자 에이벌(Abel)등이 이끈 항해 무리들이 1816년 9월 1일, 코리아해안(Coast of Corea)에 도착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기록과 삽화를 보면 처음 군의(軍醫) 맥레오드 글에서는 분명 제목이 코리아해안(Coast of Corea)이라고 적혀있는데 함장 머리 맥스웰 글의 제목에는 서쪽(West)단어가 붙어 코리아서해안(West Coast of Corea)라고 하여 의도적으로 한반도를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노출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어 그들은 현재 백령도 부근에 이르러 9일까지 서해5도(西海五島)와 장항만, 고군산열도 등을 둘러보고, 코리아 즉 조선(朝鮮)주민들과도 여러 차례 접촉을 가졌다는 기록과 함께 삽화도 남겼지만 그들이 접촉했다고 하는 코리아인들의 삽화 모습은 지금의 우리모습과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햇빛 차양이 큰 갓을 쓰고 있는 인물들은 우리와는 전혀 닮지 않는 오히려 서양인 모습이나 터번을 쓴 아랍인의 모습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들은 분명 한반도에 들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챌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이 그들의 헛점이다.

 

적어도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함장의 기록들을 보면 주로 지중해와 서인도제도를 자주 항해를 한 영국의 항해꾼들이다.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 한 것이지만 동아시아대륙으로 갈라치면 항로가 이만 저만이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동부나 유럽 지중해에서 동아시아대륙으로 항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 시대에 남아메리카대륙 혼 곶을 돌아 태평양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거쳐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통 고난의 길이 아닐 것임에도 이들은 여유를 부리며 잠시 짬을 내어 코리아서해안과 유구 지금의 오키나와를 방문했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글을 읽는 사람들을 천치바보로 취급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는 허구의 이야기일뿐이다.

이야기야 꾸며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고쳐 들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이 코리아해안에 들어가 한국인을 만났다면 그곳은 바로 그들이 지칭하는 서인도제도 내에 그리고 조선 영역인 도서라고 해야 맞다. 그곳에 경계가 느슨하다는 것은 조선심장부와 아무래도 떨어진 곳이니 지방관리 정도와 접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서인도제도 어디쯤에 이들이 코리언이라고 하여 삽화를 그렸다고 본다.

 

결국 콜럼버스가 분명 인도제도(印度諸島:Indies)를 발견하였음에도 후세 서세학자들은 이것을 동서(東西)로 구분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동인도제도(東印度諸島:East Indies)와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west Indies)를 만들고 마치 콜럼버스가 지리학이 부족하여 착각한 것으로 몰아 인도제도를 서인도제도라고 지칭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인도(印度)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따진다는 것은 이미 밝힌 사실을 찾는 것이니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콜럼버스가 단순히 인도제도라고 했다는 것은 결국 동과 서 나누어 인도제도라고 따로 떼어 부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지금까지 카리브해 트리니다드토바고에 대한 모든 사실들을 여러각도에서 개괄적으로 밝혀 보았지만 들어나는 것은 근세사가 기록한 것들이 전부 허구일 가능성만 노출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 정확하게 콜럼버스가 인도제도(印度諸島:Indies)를 찾았다는 것이고 그것을 근세기들어 서세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일까?

앞에서 주장한 내용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급정보를 마음대로 열람 또는 폐기까지 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만에서 나온 욕심일 수 있고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를 뜯어 고칠 수 있다는 기회에 의한 유혹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10.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멸망에 깊게 자리 잡은 천연두

 

이러한 사실과 함께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바로 인류사를 바꾸어놓은 악질(惡疾)로서 남아메리카를 초토화시킨 천연두(天然痘, Smallpox)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트리니다드(Trinidad)섬을 1498년 7월 31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발견하고 난 후에도 아즈텍(Azteca)과 잉카(Inca)제국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대륙에 걸쳐 엄청난 세력을 확보하면서 거대한 제국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여러 기록에서 알 수가 있었다.

그러한 제국들이 악질 천연두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멸망했다는 사실은 좀 처럼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다.

특히 주목하고 볼 것은 현 멕시코시티라고 알려진 아즈텍 문명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은 주민가구수가 6만 5천 호로 약 20만 명 거주했다는 도시인 것을 보면 아즈텍은 실로 대단한 제국이었음을 알게 한다.

인구통계자료를 보면 멕시코의 1800년 전체인구가  5,765,000 명이었다.

근 삼백년 전이니 멕시코 인구는 2~3,000,000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같은 인구에서 한 도시에 20만명이라면 상당한 규모라는 것 쯤을 알 수가 있다.

내용이 갑자기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이 테노치티틀란을 1831년 개칭한 하내(河内), 즉 통킹만(東京:Tongking灣)이라 하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런데 이상스러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이곳에 갑자기 천연두가 발병했다는 시기가 한어자료에는 1508년이라고 하였지만 서양기록에는 1518년이라 하여 스페인 해적 코르테스가 침범한 시기와 일치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꿰 맞춘 듯이 진행되는데 천연두가 발병이 되자 아즈텍 전 주민이 몰살될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는 점에서 1519년 스페인 해적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1484-1547)가 단지 660명(?)의 부하와 14문의 대포, 16마리의 말을 이끌고 남 멕시코 해안에 상륙하여 베라크루스(Veracruz)에 일단 요새를 구축하였고 바로 2년 후 1521년에는 코르테스가 데리고 들어온 단 600명이란 보잘 것 없는 규모의 병력으로 거대한 아즈텍(Azteca)을 상대로 처참한 살육전을 벌려 결국 제국을 정복하고 막대한 황금을 빼았다는 식의 스토리가 바로 아즈텍 멸망이고 스페인의 정복 역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잉카제국(Inca:1438-1533) 역시도 아즈텍에서 발병된 천연두가 퍼져 전 주민들이 초토화되었다고 하여 잉카제국의 멸망을 뻔한 사실로 만들고 중국의 천자(天子)처럼 지칭되는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던 잉카제국의 왕을 상대로 스페인 해적 피사로(Francisco Pizarro:1475-1541)가 군사 단지 150명(?)으로 난데없이 기적을 일으키며 무참한 전쟁을 벌려 잉카제국 구성원들을 모조리 몰살을 시켰다는 것이 또한 잉카제국의 멸망사이고 스페인 정보사라는 이야긴데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20만 명의 주민이 있었다고 하는 도시를 소유한 거대한 제국을 단 600명의 병사로 어떻게 감히 몰살시켰다는 것이고 또 150명의 군사로 남아메리카대륙의 상징처럼 여기게 한 잉카제국 구성원들을 어떻게 모조리 전멸시켰다는 것인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소국이라도 그런 규모의 군사로 대적한다는 것은 전투작전면에서 볼 때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대제국들을 이런 식으로 멸망케 하고 정복했다고 하는 것은 솔직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진정 뇌가 있는 사람으로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역사이다.

 

스페인 사람이라면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무적의 괴력을 가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치에 타당한 것을 역사라고 해야 한다.

고약하게 보자면 아메리카대륙의 전체 역사를 너무 하찮게 취급한 것으로서 아무렇게나 꾸민 이야기를 그렇듯하게 편집하고 그것을 기록이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서세의 당시 자만심이 한껏 가미가 된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150명, 600명이 소유하고 있었던 무기라고 해보았자 조총수준이며 대포라고 해 보았자 대량살상, 초토화는 희망사항일 뿐 초기의 대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솔직히 그들이 기댈 것은 천연두가 철저하게 공격해주길 바라는 길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것이 스페인의 자랑스러운 정복사로 둔갑한 것이라고 하니 정말 말문이 막히는 일이다.

 

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

 

스페인은 정식적으로 1528년부터 침공하기 시작하였고 44년이 지난 1572년에 아즈텍과 잉카제국이 스페인 손에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 근세사이다.

그 후 스페인은 포르투갈 제국과 통합을 시작한 1580년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An Empire Under the Sun)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것이고 19세기에 들어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를 잃을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떨쳤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19세기 초반, 중반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스페인이 미국과 영토 전쟁 한번 뚜렷하게 못치루고 이 지역들을 1861년까지 다 내주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고 있다.

19세기초에 있었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침략을 들어 스페인은 쇄락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세계를 쥐어잡고 있던 나라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힘도 제대로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을 그냥 내주어야 만 했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미국과 영토전쟁이라고 한 것이 고작 19세기 말엽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 하여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쿠바문제를 둘러싸고 카리브해 쿠바와 서태평양의 필리핀에서 동시전쟁을 벌렸다는 것이 유일하다.

 

이런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대륙 정복사라고 거창하게 기록 된 것을 보면 한마디로 가당찮다는 것이다.

당시 남아메리카의 인구는 대략 1억여 명이었으나 이 중 90%이상 즉 90,000,000명이 천연두로 희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위 내용들을 합쳐 종합할 때 스페인과 잉카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기록이 뚜렷하게 없었거나 스페인이란 국명으로 들어 낼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세기에 역사를 씀에 있어 스페인은 어떤 거대한 서세들이 감히 들어 낼 수 없는 나라를 대신해서 대칭적인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스페인은 근세기의 나라이름이라고 보지만 그 이전 스페인이 대칭되었던 나라이름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서양기록대로 이야기한다면 1518년 천연두로 인하여 남미제국이 이미 초토화된 상태에서 스페인이 10년 후 침공하였다는 이야기이니 과연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망하게 한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11.결어

 

글을 써 내려가다보니 매우 힘들었고 글은 말 못하게 길어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리하여 글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람으로 찾으며 윗 긴 글들을 한번더 요약하여 정리하도록 한다.

등명제(燈明祭)라고 생각되는 디왈리(Diwali)축제가 트리니다드토바고에 늘 상 벌어진다는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의 역사가 인도란 사실을 알게 하였고 트리니다드토바고에 인도계가 41%로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를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이며 그 외 종교적으로도 힌두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과 이웃하고 있는 가이아나, 수리남등에서도 이와같은 사실을 공통적으로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카리브해에서 인도 찾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전통적인 인도는 카리브해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인구 통계학적으로 수치변동과 인구이동상황에서도 노예해방령이 있었던 1838년과 1917년을 비교하면 중남미국가들은 거의 증가율이 2배에서 3배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반면에 멕시코 만이 두 배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어 크게 변동없이 평이한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다만 미국과 트리니다드토바고가 거의 7% 의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어 인도찾기에서 특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구유입인 것이다.

인도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은 서로 구성원들이 유입과 감소를 닮고 있어 같은 변이현상에서 볼 수 있게 하였으며 특히 인도아대륙에서 시기적으로 1860년, 1870년, 그리고 1881년 또한 1920년까지 인구추이적으로 볼 때 심상찮은 일들이 발생하였을 것이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유구국(琉球國)이 카리브해 윈드워드제도라는 설정에서 트리니다드토바고가 포함되는 것은 동서양역사가 혼입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인도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했다고 믿어지는 카리브해 특히 트리니다드토바고 문장에서 살펴보면 트리니다드란 명칭은 기독교 삼위일체가 아니라 인도 힌두교의 삼위일체 트리아드(Hindu Triad)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것은 결국 콜럼버스가 스스로 확인하고 주장한 인도(印度)라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스페인이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을 점령했다고 하는 역사는 실제로 정복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대신 이와같은 밑뿌리에는 삼한역사가 있었다고 판단되며 근세사에 등장하는 서양국가명들은 모두 삼한역사의 대칭적인 국가명이 아닐까 하는 의혹도 제기해 보았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고 대입할 때 분명히 빈 공백이 남는 것이 보인다.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삼한역사일 것이다.

삼한에는 조선도 될 수 있고 고려가 될 수 있으며 또는 신라, 백제, 가야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역사이다.

인도아대륙에서 거대한 인구가 갑자기 절멸했다는 사실은 어떤 엄청난 충격의 역사가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맞다.

그렇지만 현재 잘 정리, 정돈된 서양사만 존재 할 뿐이지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은 알 길이 없다.

인도(印度)를 지우기 위해 서세들이 온갖수단을 다 부렸겠지만 실제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어떠한 살상무기를 사용하여 당시 인도인들을 몰살시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근세기 이전에 존재한 거대한 힘은 스페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삼한이다.

삼한이 있어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했다는 결론이다.

실제로 현재 유럽 한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보면 보잘 것 없고 특이한 것이 없는 이러한 국가가 어떻게 세계사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란 별칭을 얻을 수 있었는지 무척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근세사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분명 스페인은 프랑스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라이다.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의 벽을 넘지 못한 나라이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인도찾기가 힘들다고 그래서 인도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여 부정할 수 없다.

인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인도는 삼한역사와 같은 처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트리니다드토바고를 살피면서 그곳에서 인도의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수확이다.

어느정도 큰 연결고리도 밝혔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는 결코 근세사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고 모든 것에서 의문을 가지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인도는 삼한과 함께 우리가 알고 있는 가까운 곳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았다고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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