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한부울 2013. 2. 22.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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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글쓴이:한부울


해치(獬豸)는 고려견(高麗犬)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5776 에서 말한 것처럼 박견(狛犬)이야기는 원래 사자상(獅子像)이었던 것이 나중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犬)로 모습이 변했을 것이란 추측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랍이란 유럽이다.

동시에 고구려이고 고려이다.

또한 일본내에 있는 박견(狛犬)으로 본 고려(高麗)는 당(唐)이고 중국(中國)이다.

그렇다면 통일 신라시대때 신라(新羅)와 당(唐)은 바로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임이 밝혀진 것이다.

 

일제는 병탄기에 삼한역사를 뜯어고치는 것을 넘어 100년 후 그들이 조작한 사실을 우리가 비로소 진실로 깨우치더라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서 쉽게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이중 삼중 안전장치를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반도역사만 탈피했다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어리석다는 뜻이다.

무엇 보다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역사로 인하여 종국에 가서 우리끼리 갈등하고 반목하면서 분열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력이 다 무소용으로 돌아가면서 역사가 다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위험에 처해진다는 사실때문에 걱정을 심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제가 남긴 한반도 문화재도 문제이지만 특히 일본문화재는 오히려 더욱 심각한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다.

어쨌던 일제가 저지른 역사조작은 피아를 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곳곳에 들어난다.

이 장에 주제는 바로 일본에 존재하는 유물 박견상인데 이 역시 이러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물처럼 가장한 유물이다.

박견이 무엇인가?

바로 고려견이라고 하여 일본에 있는 나무, 돌로 만든 조상(彫像)이라고 알려진다.

그런데 분명 일본 열도에 있는 박견(狛犬)은 고려(高麗)로부터 전래 된 것이라고 하고 지금 일본 열도에 있다면 본래 바탕이 되어야 할 고려유물이 왜 한반도에는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고려(高麗)의 역사가 있었다던 한반도에는 정작 박견(狛犬)이라는 것이 없고 동북 지방 땅에 사는 짐승이라고 하는 해치(獬豸)상(像)만 있을 뿐인데 이 역시 들어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빈약하기 이를 때가 없다.

적어도 동아시아전체를 지배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유물들이 보잘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 할 수 있을까?

답은 쉽게 나온다.

바로 원래 한반도는 물론이고 지금 동양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는 열도(列島)역시 고려영역 내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모든 역사가 제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자료에서 볼 수 있지만 현재 일본에서 성(城)의 정문을 보통 대수문(大手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중추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에도(江戶)시대의 남겨진 에도성(江戶城)의 정문(正門)을 대수고려문(大手高麗門)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우리입장에 매우 흥미롭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소리뉴스]자료에 의하면 대수문(大手門)은 내문(內門)과 외문(外門)의 이중문(二重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외문(外門)을 고려문(高麗門)이라고 한다는 사실에서 고려문은 외문을 무겁게 하는 것 만큼 건물의 웅장함을 더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냉정하게 따질 필요성이 있다.

일본 에도성(江戶城)의 성문(城門)10채가 모두 이런 식으로 고려문(高麗門)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그냥 도래인들이 만들었다고 보기가 힘들정도로 본래 고려문을 일상적으로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고려의 체제가 그곳에 머물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중국이라 한들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필시 고려영역내에 에도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있는 이야기다.

그들이 진정 쓸개가 빠진 족속들이 아니라면 그들의 정(正)심장으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門)을 어떻게 늘 적대했던 나라 이름으로 호칭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하게 되는데 이를 그들은 자랑스럽게 여겼다면 결국 열도일본인들은 고려의 피지배인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고려는 신의 나라가 아니면 그 이상의 나라였음을 알게 한다.

또한 지금도 일본열도 동경에 고려산(高麗山), 고려신사(高麗神社)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위 고려문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사실과 정반대 상황을 예측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어 재미있는 것은 한문으로 지방(地方)을 영어로 지판(Jipan)으로 읽을 수 있고 이것이 자폰(Japon)을 거쳐 제팬(Japan)으로 바뀌었다고 하여 일본은 고려나 조선의 지방 정도의 존재였음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해학적 탐구만이 아니라는데 역사를 보는 시각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도 열도일본인들은 1945년 이후 일본으로 만들어진 국가체제이다.

누구로부터일까?

자기 자신들의 껍데기를 벗어주고 속 빠져버린 초 강대국 미국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 열도에 존재하고 있는 고려의 유물들, 박견, 고려문, 고려산, 고려신사 등은 원래 부터 고려를 하늘처럼 섬기는 마음으로 열도 주민들이 만든 것이라고 할 때 도래인들이라 하여 따로 구분 할 것도 없이 열도에서 토착민들에 의한 자연스러운 유물들이라고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즉 열도인들은 고려체제통치의 식민들이다.

이것을 반도역사는 도래인이라고 하여 한반도에서 넘어간 부류들이 고향생각에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모두 입에 침도 안바르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간단하다.

처음부터 열도가 고려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일본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성 에도성 정문이 고려문이라고 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열도는 고려 지배권 내에 있었던 땅이라고 정리가 된다.

어쨌던 현 열도는 고려의 영향권에 속한 땅이다. 

주제 박견(狛犬)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바라보아야 할 유물이다.

박견(狛犬)은 원래 사자상(獅子像)이었던 것을 나중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犬)로 모습이 변했을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

이런 추측을 하게 한 것은 지금도 일본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박견(狛犬)을 만들었다고 한다는데 있다.

그들의 전통적인 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현재 박견(狛犬)이란 조상(彫像)이 여러 차례 의도적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변형 되었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워낙 명료하고 정확한 유물이기 때문에 무작정 없애 버릴 수 없어 고려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일제가 정리하였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도가 고려(高麗)영역이라면 즉 고려의 상징인 오리엔트(동방)을 나타내는 사자상(獅子像)이 유물로 남겨졌을 것이란 예상은 쉽게 할 수 있으며 일제가 치밀하게 이것을 감추려 했던 것은 분명하며 때문에 사자를 개(犬)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高麗)는 오래전부터 일본 열도를 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개의 상이 아니라 사자상(獅子像)이 맞다면 이름을 박견(狛犬)이라고 하지 않고 박사(狛獅, 狛師)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박견(狛犬)은 암시적으로 폄훼의 뜻이 강한 동물 개(犬)을 앞세워 고려개(高麗犬)라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현재 일본 고궁(古宮)이나 사당(祠堂)앞에 이 박견(狛犬)이 입상(立像)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가 있는데 원래 이 상이 세워진 동기는 요귀(妖鬼)를 물리치는 벽사(辟邪)라 하여 고대전설 중에 요괴(妖鬼)와 사악(邪惡)한 것을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짐승을 세워 액(厄)막이로 삼았다는 것이핵심이다.

한반도의 해치와 같은 개념이 이 박견이라 해야 맞다.

그러나 개를 신령스러운 짐승이라고 하기가 뭐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령스러운 짐승은 개(犬)가 아니라 사자(獅)가 되어야 맞는 이야기다.

고려는 왜 사자를 택하지 못하고 개를 상으로 만들었을까?

고려가 아니라 일제가 그렇게 만든 것임을 우리는 알아 차려야 하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다음에 들어난다.

일본이 이 박견(狛犬)이라는 동물을 중국으로부터 전래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고려견(高麗犬)이 되어야 하는가?

중국견(中國犬)이어야 하지 않는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중국(中國)으로 해석되는 역사반전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개는 후자적인 문제이다.

그렇다, 고려가 바로 중국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바보 천치들이다.

간사한 일본사학자들이 주는 자료만 가지고 줏대도 없이 이렇게 들어나는 사실조차 검증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되뇌이고 답습만 하고 있으니 어찌 멀쩡한 사학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역사를 보는 눈이 멀어 창의적일 수가 없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일본사학계는 진실을 담보로 하는 역사에서 끼일 자격도 없는 족속들이다.

그리고 늘 상 습관처럼 하는 역사조작국으로 이미 세계사학계에 망신살이가 뻗쳤던 막가는 조직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일본 역사계가 무슨 말을 한들 진실이 인정될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을 믿는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본사학계의 말을 그대로 믿는 바보들이 한심하게도 바로 한반도 사학계 얼충이들이다.

 

우리가 역사찾기를 한다면 수수께끼 노름에 빠져야 하는데 글쓴이는 일본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역방향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원칙으로 규명함으로서 비로소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정답인 것이다.

역사를 논할 때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래서 실증적인 문제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역사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그래야 그것에서 바로 진짜 역사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반도역사가 그럴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마찬가지로 서양학자들이라 한들 조금도 더 나을 것이 없다.

오히려 열도역사를 만든 장본인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근세기에 네셔널리즘에 의해 생성된 근대사는 허깨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예로 그들이 만들어 낸 실증 물들 중에 가장 쓰레기같은 것은 실제 근원도 확실치 않는 조잡한 삽화이고 그림이며, 사진, 지도들의 함정이다.

이것들은 근세기 역사를 만드는데 일등공신역할을 한 추악하고 쓰레기같은 개체들이다.

인간들이 가장 기억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각적인 것을 이용하였는데 근세기 들어 마구 찍어 내듯 한 삽화나 그림사진, 지도들을 생성시켜 오늘날 동아시아대륙 역사를 만든 것이 그들의 솜씨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앞세운 것이 바로 근대사가 우리에겐 이제 상식이 되었다.

믿음이 가는가? 

믿음이 가니 좋겠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일본이 특별하게 그들의 신사(神社)라는 곳에 비치하여야 하는 것은 개(犬)형상이 아니라 신령스러운 동물 사자상(獅子像)이어야 맞다.

그들이 믿는 신(神)이 있어 전통적으로 신사(神社)를 만든 것이 사실이라면 절대 개(犬)를 형상화 한 입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신(神)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근세기에 역사판짜기하면서 급조 된 조상(彫像)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박견(狛犬)은 무엇일까?

미안하지만 사자상(獅子像)을 변형시켜 박견이라고 했다는 것은 전자에서 이미 언급했다.

바로 유럽제왕들의 지배권력에 상징이 되어버린 사자상(獅子像)이어야 합당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고려라고 인식되고 있는 박(狛)이라고 하는 역사주체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상징이며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조상(彫像)이 박견(狛犬)이 아닌 박사(狛獅, 狛師)가 되어야 온당하다는 말이 된다.

 

박(狛)은 분명 일본과 신중국(新中國)에서 나란히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일본에서 만큼은 이 박(狛)을 고려(高麗)로도 보지만 또한 당(唐)이라 했다는 사실이다.

당(唐)은 근대사에서 중국(中國)의 대명사로 취급되고 있는 나라명칭이다.

그러한 당(唐)을 어떻게 고려(高麗)와 같이 취급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보나마마 바로 고려(高麗)가 당(唐)이고 중국(中國)이기 때문이다.

 

高麗;狛[こうらい(高麗);こま]

1.(こうらい only) Goryeo (dynasty of Korea; 918-1392 CE)

2.Korea (esp. the Goguryeo kingdom or the Goryeo dynasty)

3.(狛 only) (See 狛犬) (stone) guardian lion-dogs at Shinto shrine

 

 

위자료에서 보듯이 일본에서는 주로 ‘고려개’라 하여 박견(狛犬)이라고 하지만 때론 '고양이'라 하여 박묘(狛猫)라고도 하며 또한 고려 박(狛)이 아닌 당묘(唐猫)라고도 한다는 자료이다.

이것을 애매하게 설명하기를 “사자 모양의 개의 석상”이라고 하면서 고려(高麗)에서 온 것으로 신사(神社)앞에 벽사(辟邪)를 위해 쌍으로 마주 보게 놓았다고 하고 있다.

사자 모양의 개 석상?

 

狛犬

① 사자 모양의 개의 석상

② 神社 앞에 벽사를 위해 쌍으로 마주 보게 놓음

 

狛笛:こまぶえ

雅楽用の楽器の一つ。竹製の横笛。歌口の外に六孔あり、音律が高い。細笛。

「高麗笛」とも書く。

 

위의 사전을 보면 박적(狛笛)이라고 하는 아악용의 악기가 있는데 대나무제품으로 횡적(横笛)이라고 하고 입으로 부는 곳 말고도 여섯 개의 구멍 있고 음률이 높다고 하여 세적(細笛) 또는 고려적(高麗笛)이라고 쓴다는 사실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고려피리인 것이다.

 

高麗/狛

朝鮮半島古代の国名である高句麗(こうくり)。または、高麗(こうらい)。

名詞の上に付いて、それが高麗から伝来したものの意を表す。

 

그리고 일본에서 박(狛)을 고려(高麗)라 한다는 사실에서도 일본사전을 보면 박(狛)을 고려(高麗)라 분명히 하고 있으며 덧붙이길 한반도 고대의 국명인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를 명사(名詞)로 붙인 것이고 이것은 고려(高麗)로부터 전래했지만 다른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의 뜻 말고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이미 일본 내에 있는 어떤 문화나 유물이든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김달수<연관저서:일본 문화의 뿌리는 어디인가>님이 수고스럽게도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한반도 문화를 찾아 수많은 연구 끝에 많은 글을 발표하였는데 현 야마토(大和)남쪽 연안에 자리 잡고 있던 카시와라시(柏原市)지역, 북쪽연안에 카시와라(柏原)란 지역이 있는데 이곳 북쪽일대는 원래 고구려의 코마(高麗), 코마향(巨摩鄕)이었던 곳임을 알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코마 일족의 족장의 것이라고 하는 당(唐)나라 식(式) 거울은 사실 고구려 식(式) 거울로, 코마 일족이 고구려에서 도래할 때에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은 다시 말해 고려가 당나라임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글을 종합해봐도 고려(高麗)는 곧 당(唐)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며 또한 중국일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이 만든 박견사전(狛犬事典:上杉千鄕著)에 실린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의 박견(狛犬,こまいぬ)사진이 아래에 실려 있다. 이것들이 오랜 세월동안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나의 시각으로는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

아래 그림이 개로 보이는가 사자로 보이는가?

 

木彫 狛犬.  平安時代.  奈良縣  藥師寺 藏

사진출처: 나라육대사대관(奈良六大寺大觀)

 

김달수님의 글에서 박견(狛犬)이라는 글자는 중국어 사전에 당나라의 이백(AD701~762)이 20세 이전에 지었다는 대렵부(大獵賦)와 750년경에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을 지은 청나라 왕기(王琦)의 고부변례(古賦辨禮)의 글에 있다고 하였고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기록에서 고구려 민족이나 씨족의 이름이라는 글은 없다는 것이며 그냥 유목민족들이 기르는 목양견(牧羊犬:sheep dog)이라 했고, 늑대와 유사하며, 머리에 무소뿔(犀角)이 있고 뿔이 탈각(脫角)하는 개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박견(狛犬)을 설명하는 위 기록에서 결코 고려와 고구려란 명칭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런 자료 또한 근세기에 손을 타 온전하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에서 도래한 한 씨족의 이름으로 박견(狛犬)이라는 목양견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적한 것은 큰 이의가 있으며 더 하여 그는 말하길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맥족(貊族)으로 쓸 것을 박족(狛.族)으로 쓴 것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맥(貊)과 박(狛)은 음은 다르지만 글 형상은 같다. 

 

貊 오랑캐 맥 종족 이름. 고요하다. 조용함. 맹수 이름. 나귀만한 크기의 곰 비슷한 짐승. 나라 이름. 부여국(扶餘國).

 

위 자료에서 박견(狛犬)이라는 매우 특별한 개가 중국어로는 ‘빠’, 한국어로는 ‘박’으로 발음되지만 일본에서만 유독 고구려를 뜻하는 ‘코마’로 발음된다는 사실도 함께 전하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초기 박견(狛犬)은 귀(耳:ear)가 세워져 있었고 오히려 사자의 귀가 숙여져 있었으나 이후에는 모든 박견(狛犬)의 귀가 숙여진다고 했으며 초기 박견(狛犬)의 귀가 세워진 것은 박(狛)을 설명하는 글에 늑대와 유사하다는 말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늑대는 개를 유추하도록 도운 것이 된다.

 

사진출처:狛犬.犬事典 (上杉千鄕 著)

 

글쓴이는 여기서 생각한다.

본래 사자는 귀가 세워져 있다.

개는 귀가 세워져 있기도 하지만 숙여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자를 형상화 했다는 증거로는 처음부터 귀가 세워져 있었던 것인데 사자 귀를 숙이기 위해 개(犬)의 귀가 세워져 있다는 것은 늑대와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보이지만 이것은 후세 결코 사자(獅子)를 연상하지 못하게 하는 고도의 술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답은 바로 동방, 오리엔트, 그리고 고려를 상징하는 개가 아니라 사자라는 것에 귀착이 된다.

고려는 아랍과 유럽을 평정한 세력으로 보아야 맞다.

아랍과 유럽이라면 사자상(獅子像)을 떠 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개라 하는 것은 아랍이나 유럽이 아니라 한반도 고려(高麗)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하고자 위키 일본자료를 보면 이 박견(狛犬)을 상상의 동물로 여기고 조각한 것으로 신절이나 사원의 입구의 옆, 혹은 본전, 본당의 정면 좌우(左右)등에 한 벌로 마주보는 형태로 입상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 때에는 뿔이 없는 무각(無角)의 사자(獅子)와 뿔이 있는 유각(有角)의 박견(狛犬) 한 쌍을 돌로 비슷하게 조각해 놓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래 사자가 뿔이 없으니 뿔이 없는 사자(獅子)를 뿔이 있는 개로 만들어 신령스럽게 하고 박견(狛犬)이라 하였을 것이며 그것들을 고려(高麗)에서 전래된 것처럼 하여 고려영역임을 감추었으며 고려가 중국이고 당이라는 사실까지 감쪽같이 속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자료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어쨌던 이러한 모습으로 많은 세월동안 변이해 나가는데 처음 만들어진 모습과 판이하게 이 조각상이 변천하였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Most recently in 1905, the sand has been cleared away to expose the magnitude and beauty of the entirety of the Sphinx.

스핑크스의 아름다운 몸체와 그 규모는 가장 최근인 1905년에 모래에서 들어난 것이다.

The paws themselves are 50 feet long (15m) while the entire length is 150 feet (45m). The head is 30 (10m) feet long and 14 feet (4m) wide.

전체 길이 150 피트(45m)에 발 자체 길이만도 50피트(15m)이다.
머리는 30 피트(10m) 길이, 14 피트(4m)폭이다.

The most popular and current theory of the builder of the Sphinx holds that it was commissioned by the 4th Dynasty King, Khafre (2558-2532 BCE).

현재 가장 주목받으며 스핑크스를 연구하고 있는 건설자의 이론은 4왕조 왕 카프레(BC2558-2532)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 하고 있다.

 

사자의 학명 Panther Leo는 그리스어 Pan(모든) ther(짐승)이란 뜻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자라는 어원은 모든 짐승을 뜻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어도 신령스러운 동물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자는 서역(西域)을 거쳐 들어왔다는데, 현대 페르시아어에서는 사자를 Shir라고 함으로 이것의 음역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서역은 본 블로그에서 수차례 주장한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가르키는 것이다.

사자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나 프랑스에서 건축물의 양 옆 수호(守護) 짐승(獣)으로서 사자상(獅子像)을 두었던 것으로서 돌로 사자형상과 비슷하게 조각한 것을 기원으로 여겨진다고 했으며 고대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신사의 경내를 지키는 사자상(獅子像)도 그 원류로 여겨진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기원은 고대 오리엔트(Orient), 인도(india)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사자(獅子)를 코끼리 (象)로 대체하거나 또는 동시에 상(像)을 세웠으며 고대 오리엔트 제국에서는, 성스러운 것, 신이나 왕위의 수호신으로서 사자(獅子)를 이용하는 일이 성행했다고 보이는데 그 좋은 예가 고대 오리엔트 신화에 나오는 괴물 스핑크스(Sphinx)라는 설이다.

스핑크스는 원래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주물(呪物)숭배(Fetishism)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성격이 달라졌다고 하고 있는 것도 일본이 본래 사자상을 박견(狛犬)으로 변형시킨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혹 스핑크스가 박견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인들은 박견을 두고 그들의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아 설령 사자라 해도 기어코 고양이라고 하거나 개라고 하여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또 우리나라 사전에서도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원형은 사자이고 인도(印度, india)에서 불상(佛像의 대좌(臺座)를 장식할 때, 더러는 사자의 의구(意區)를 썼다는 것이며 한편 중국에서는 전한시대(前漢時代)부터 궁궐(宮闕)이나 묘실(廟室)앞에 수호신으로 석조 사자상(獅子像)을 안치한 풍습이 있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것들은 실제로 동양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서양사적인 것과 병행하여 볼 것이다.

중국이며 당이라고 판단되는 고려의 상징에서 박견(狛犬)은 바로 사자상(獅子像)이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유럽 최고(最古)의 문장은 1010년으로 기록된 독일 귀족의 것이라는 설과 1127년 영국왕 헨리1세가 아들에게 준 문장이 최고 오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문장(紋章:coat of arms)은 왕, 주권자, 국가의 문장으로서 영국은 사자문장이 유명하다.

그리고 프랑스의 백합, 러시아의 독수리문장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유럽왕족 문장은 거의 사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자(獅子)는 고양이과(Felidae)에 속하는 동물이라 일본에서는 묘(猫)라고 칭하여 박견(狛犬)을 박묘狛猫) 또는 당묘(唐猫)라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사자(獅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며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왕권(王權)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고려가 열도를 영역으로 한 것이라면 고려의 상징인 사자상을 곳곳에 입상하였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자를 문장으로 사용한 영국의 국장은 공식적으로는 지배권의 문장(Arms of Dominion)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장 꼭대기 장식에서 커다란 왕관 위에 올라선 사자가 돋보인다.

그리고 사자머리에 그 아래와 같은 형태의 왕관을 쓴 채 네 발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왕권 상징적인 문장임을 명확하게 알게 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단적으로 서양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자에 대한 상징적인 지배권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때문에 유럽왕가에서 사자문장을 사용한 왕가로서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가(House of Habsburg), 영국계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 독일의 귀족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가(House of Hohenstaufen), 네덜란드 연합 왕국 오라녜나사우 왕가(House of Oranje-Nassau)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볼 때 아랍과, 유럽 아시아대륙 전체를 영역으로 한 고려라면 마땅히 사자가 상징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결국 처음 사자상(獅子像)이었지만 일제에 의해 박견(狛犬)으로 변한 것에서 본 고려(高麗)는 당(唐)이고 중국(中國)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때 신라(新羅)와 당(唐)은 바로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임을 알게 하고 있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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