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석교(釋敎), 범서(梵書), 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한부울 2012. 11. 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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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

경사편 3 -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 범서(梵書), 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고전간행회본 권 39)

 

석교는 불법(佛法)이요, 범서는 불자(佛字)요, 불경은 석전(釋典)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불경은 천축(天竺)의 가유위국(迦維衛國) 정반왕(淨飯王)의 태자(太子)인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법한 것이다. 석가는 주 장왕(周莊王) 9년 4월 8일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뚫고 나와 세상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기이하여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었다. 태자의 자리를 내던지고 출가(出家)하여 도(道)를 배워 근행(勤行)하고 정진(精進)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깨달았으므로 불(佛)이라 한다. 또는 불타(佛陀)ㆍ부도(浮屠)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 호어(胡語)이고, 화어(華語)로 번역하면 정각(淨覺)이다.

 

  

32상(相) : 부처의 몸에 갖춰져 있는 32가지의 표상(表象). 32대장부상(大丈夫相)이라고도 하는데, 이 상을 갖춘 이는 속세에 있으면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출가(出家)하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32상은 예를 들면, 1. 발바닥이 판판한 것, 2. 손바닥에 수레바퀴 같은 금이 있는 것, 3. 손가락이 가늘면서 긴 것 등등이다.

 

80종호(種好) : 부처의 몸에 갖춰져 있는 훌륭한 것 80가지. 80수형호(隨形好)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1. 손톱이 좁고 길고 엷고 구리빛으로 윤택한 것, 2. 손가락ㆍ발가락이 둥글고 길며 다른 사람보다 고운 것, 3. 손과 발이 제각기 같아서 별로 다름이 없는 것 등등이다. 원전에는 82호(好)로 되어 있으나 80종호의 잘못인 듯하다.

 

일체종지(一切種智) : 삼지(三智)의 하나. 일체 만법(一切萬法)의 별상(別相)을 낱낱이 정밀하게 아는 지혜, 곧 부처의 지혜를 가리킨다.

 

석가(釋迦)의 설(說)에 ‘사람의 몸이 비록 생(生)과 사(死)의 다른 점은 있지만 정신은 언제나 없어지지 않는다. 현존(現存)하는 몸 이전에 무량(無量)의 몸을 거쳐 왔다. 계속 닦아 익혀서 정신이 청정(淸淨)해지면 불도(佛道)를 이룬다. 천지(天地)의 밖과 사유(四維 건(乾:서북)ㆍ곤(坤:서남)ㆍ간(艮:동북)ㆍ손(巽:동남))의 상하에도 다시 천지가 있어 그 끝이 없다. 그러나 모두 성(成)과 패(敗)가 있는데, 한번 성하고 한번 패한 것을 1겁(劫)이라 한다.

 

겁(劫) : 도저히 연월일(年月日)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가리킨다. 대개 개자겁(芥子劫)과 반석겁(磐石劫)이 있는데, 개자겁이란 둘레 40리 되는 성 안에 개자를 가득 채워 놓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3년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그 개자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요, 반석겁이란 둘레 40리 되는 돌을 천인(天人)이 삼수의(三銖衣)를 입고서 3년마다 한 번씩 스쳐서 그 돌이 다 달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천지 이전까지는 무량겁(無量劫)이 있었다. 겁마다 반드시 수많은 부처가 도를 얻고 세상에 나와서 교화를 하는데, 그 수는 동일하지 않다. 지금 이 겁 가운데 반드시 천불(千佛)이 있을 것인데, 맨 처음부터 석가에 이르기까지 벌써 칠불(七佛)이 된다. 그 다음은 의당 미륵(彌勒)이 세상에 나와 삼회(三會)가 경과하도록 법장(法藏)을 연설(演說)하여 중생(衆生)을 개도(開導)할 것이다. 이 도를 닦는 데는 4 등(等)의 과(果)가 있는데, 첫째 수다원과(須陀洹果), 둘째 사다함과(斯陀含果), 셋째 아나함과(阿那含果), 넷째 아라한과(阿羅漢果)이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자는 출입(出入)ㆍ생사(生死)ㆍ거래(去來)ㆍ은현(隱顯) 어느 것에도 걸림[累]이 되지 않으며, 아라한 이상 보살(菩薩)에 이른 자는 불성(佛性)을 깊이 체득하여 성도(成道)하기에 이른다. 불(佛)마다 멸도(滅度)한 후에는 유법(遺法)을 서로 전하는 시대에 있어 정법(正法)ㆍ상법(象法)ㆍ말법(末法) 3등으로, 수박(粹駁)한 차이가 있고 시대의 원근(遠近)도 각기 다르다. 말법 이후에는 중생이 우둔하여 업행(業行)이 갈수록 나빠지고 수명(壽命)이 점점 짧아지다가, 수백 수천년을 지나면, 아침에 태어났다가 저녁에 죽기까지에 이른다. 그런 뒤에 대수(大水)ㆍ대화(大火)ㆍ대풍(大風)의 재이(災異)가 있어 일체를 제거하고 나서 다시 사람을 탄생시키면 이들은 또 순수함[粹]으로 복귀되는데, 이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며, 하나의 소겁마다 한 부처가 세상에 나온다.’ 하였다.

 

미륵(彌勒) : 대승보살(大乘菩薩). 자씨(慈氏)라고도 번역하는데, 중인도 바라내국의 바라문(婆羅門) 집에 태어나 석존(釋尊)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있다가, 석존이 입멸(入滅)한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면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한 뒤에 삼회(三會)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삼회(三會) :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나서 화림원(華林園)에 모인 대중을 위하여 세 차례의 큰 법회(法會)를 열고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법장(法藏) : 불교의 경전(經典)을 가리키는 말. 경전의 수많은 법문, 곧 온갖 법의 진리가 갈무리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업행(業行) : 업(業)과 같은 말로, 몸ㆍ입ㆍ뜻으로 지어지는 말과 동작과 생각하는 것과 그 세력을 말한다. 즉 이 세 가지의 작용에 의하여 선악을 짓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업은 사업(思業)인 의업(意業), 사이업(思已業)인 신업(身業), 구업(口業) 곧 신ㆍ구ㆍ의 3업으로 나눈다.

 

당초 천축국(天竺國) 안에 외도(外道)들이 많았는데, 모두 수화(水火)와 독룡(毒龍)을 구사(驅使)하여 그 변환(變幻)이 능란하였다. 석가가 고행(苦行)할 적에 이 모든 사도(邪道)들이 몰려들어 석가의 마음을 어지럽히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석가가 불도를 깨달은 뒤에 그들은 다 복종하여 모두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 제자 중에 남자는 상문(桑門)이라 하는데 번역하면 식심(息心)이요, 통틀어 승(僧)이라 하는데 번역하면 행걸(行乞)이며, 여자는 비구니(比丘尼)라 한다. 이들은 다 수발(鬚髮)을 깎고, 번뇌를 버리고 집을 떠나서 서로 함께 거처하면서 마음을 닦고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생명을 유지하면서 행(行)을 닦는다.

 

승(僧)에게는 2백 50계(戒)가 있고, 니(尼)에게는 5백 계가 있다. 속인(俗人)으로서 불법을 믿는 사람을 남자는 우바새(優婆塞), 여자는 우바이(優婆夷)라 하여, 모두 살(殺)ㆍ도(盜)ㆍ음(淫)ㆍ망언(妄言)ㆍ음주(飮酒)를 금하는데, 이것이 소위 5계(戒)이다. 석가가 세상에 나와 교화한 49년 동안에, 천(天)ㆍ용(龍)ㆍ인(人)ㆍ귀(鬼)까지 모두 와서 설법을 듣고, 득도(得道)한 제자가 무려 백천 만억으로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 뒤에는 구시나성(拘尸那城)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2월 15일 반열반(般涅槃 열반(涅槃)과 같다)에 들었다. 열반은 이원(泥洹)이라고도 하는데, 번역하면 멸도(滅度)이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도 한다.”

 

그의 도가 청정(淸淨)하고 적멸(寂滅)하기 때문에 입적(入寂) 또는 멸도라고 한다.

 

멸도(滅度) : 중의 죽음. 곧 열반(涅槃)과 같은 말로, 생사(生死)의 큰 고난을 없애어 번뇌(煩惱)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다.

 

불씨(佛氏) 내력

 

불(佛)의 내력과 시종(始終)에 대해서는《수서》 경적지가 비록 해박하다고는 하겠으나, 이러니 저러니하는 여러 설(說)들이 있으니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불설(佛說)에 “석가여래는 중천축(中天竺)의 마하타국(摩訶陀國) 정반왕의 태자이다. 모호(母號)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인데, 그는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하였다. 주 소왕(王) 26년 (갑인) 4월 8일에 탄생하였다. 그의 호는 실달태자(悉達太子)인데, 모후(母后)가 별세하자 이모[姨]인 교담미(憍曇彌)가 길렀다. 그가 막 태어났을 때, 손으로 천지(天地)를 가리키며 스스로 말하기를 ‘천상과 천하에 나만 존귀할 뿐이다.[天上天下 惟我獨尊]’라 하였다. 자라서는 총명하고 성스럽고 슬기로워 늘 속세를 떠날 뜻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동문(東門)을 나갔을 때 정거천(淨居天)이 아주 늙은 사람으로 화하여 곁에 나타났고, 또 남문(南門)을 나갔을 때는 정거천이 크게 병든 사람으로 화하여 나타났고, 서문(西門)을 나갔을 때는 또 죽은 사람으로 화하여 나타났고, 북문(北門)을 나갔을 때는 또 비구(比丘)로 화하여 나타났다. 이에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의 이치를 목격한 그는 속세를 떠날 뜻이 배나 깊어졌다.

 

정거천(淨居天) : 색계(色界)의 제사선천(第四禪天)에 구천(九天)이 있는데, 그 구천 중, 성문(聲聞) 제3과(果)인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證得)한 성자(聖者)가 거주하는 5종(種)의 하늘, 즉 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대왕(大王 정반왕(淨飯王)을 가리킨다)이 우타이(優陀夷 실달태자의 학우(學友))를 시켜 그에게 출가의 뜻을 가라앉히도록 간하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불로(不老)ㆍ무병(無病)ㆍ불사(不死)ㆍ불별(不別)의 네 가지 원(願)이 있다.’ 하므로, 왕은 야수타라(耶輸陀羅 실달태자의 비(妃))를 명해 보호를 배나 더하게 하고 이어 야수타라를 통해 이르기를 ‘왕이 후사(後嗣)가 없으니, 자식 하나만 낳아 주면 곧 출가를 허락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그가 야수타라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문득 임신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라후(羅睺 실달태자의 아들)는 하늘로부터 화생한 것이요, 부모의 회합을 거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뒤에 라후라 존자(羅睺羅尊者)로 호칭된 자가 바로 그다.

 

이윽고 그는 19세가 되는 해에 출가하면서 건척(犍陟 실달태자가 타던 말 이름)을 타고 마부 차닉(車匿)을 데리고 북문(北門)을 탈출하여 아라라가 선인(阿羅邏迦仙人)의 처소에 찾아가 수년 동안 고행(苦行)하여, 30세가 되는 계미년(癸未年) 4월 8일 녹야원(鹿野苑)에서 성도(成道)하였다. 지금 비구승(比丘僧)의 머리 깎는 풍습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수달장자(須達長者)가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고 그를 맞아들였는데,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수백 나한(數百羅漢) 등 늘 설법을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그가 일생에 걸쳐 설한 말들은 패다수엽(貝多樹葉)에 적혀 있어 이를 서로 전하면서 경문(經文)이라 이름하였는데, 모두 7천 27권이 되며, 그는 79세 되던 해 2월 15일 밤에 입멸(入滅)하였다.” 주 목왕(周穆王) 53년(임신)에 해당된다. 하였다.

 

《내전(內典)》에 “석가의 성(性)은 찰리(刹利)인데, 막 태어났을 때 대지(大智)의 광명(光明)을 놓아 시방세계(十方世界)를 환히 비추었고, 땅에서는 금련화(金蓮花)가 솟아나와 저절로 두 발을 받들었는데, 이 때 석가는 손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獅子吼)를 내었다. 때는 주 소왕(周昭王) 24년 4월 8일이었다. 그는 나이 19세에 출가하여 단특산(檀特山)에서 도를 닦아 30세에 성도한 다음 천인사(天人師)라 호칭되고, 녹야원(鹿野苑)에서 사체(四諦)의 법륜(法輪)을 굴려 논도 설법(論道說法)하면서 49년간 세상에 머물다가 청정한 정법(正法)을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하며 계(偈)를 주고 나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 이르러 오른편으로 누워 발을 포개고 담담하게 입적(入寂)하였다. 때는 주 목왕(周穆王) 52년 2월 15일이었다.

 

정법(正法) …… 말법(末法) : 석존이 입멸한 후에 그 교법과 교법을 실천하는 수행과 수행에 의하여 증득(證得)하는 증과(證果)가 있고 없음을 따라 시대를 3기(期)로 나눈 것. 부처가 멸도한 후 5백 년간을 정법시(正法時)라 하는데, 이 기간은 교(敎)ㆍ행(行)ㆍ증과가 모두 구비한 때이고, 정법시대 이후의 1천 년간을 상법시(象法時)라 하는데, 이 기간은 교와 행은 있으나 증득하는 사람이 없는 때이고, 상법시대 이후 1만 년간을 말법시(末法時)라 하는데, 이 기간은 교법만이 있는 때이다.

 

사자후(獅子吼) : 부처의 설법(說法)을 사자의 영각[哮吼]에 비유하는 말이다.

 

사체(四諦)의 법륜(法輪) : 사체는 사성체(四聖諦)라고도 하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말한다. 체(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으로 고체(苦諦)는 현실의 인생을 고(苦)라고 관하는 것이요, 집체(集諦)는 고의 원인이 되는 애욕(愛欲)과 업(業)이요, 멸체(滅諦)는 깨달을 목표이니 즉 이상(理想)의 열반이요, 도체(道諦)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니 즉 실천하는 수단이다. 법륜(法輪)이란 곧 교법(敎法)을 말하는데, 부처의 교법이 중생의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윤보(輪寶)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것과 같으므로, 법륜이라 한다.

 

《사기(史記)》에 “주 소왕(周昭王) 26년(갑인) 4월 8일에 우물 물이 넘치고 궁전(宮殿)이 진동하고 밤에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자, 태사(太史) 소유(蘇繇)가 점(占)을 쳐보고 나서 ‘서방(西方)에 성인(聖人)이 났다.’ 했다.” 하였다.

 

진(晉) 나라 이석(李石)의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부처의 본호(本號)는 석가문(釋迦文)인데, 곧 천축(天竺) 석가위국왕(釋迦衛國王)의 아들이다. 4월 8일 밤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였는데, 32상(相)이 있었다. 때는 주 장왕(周莊王) 9년이요, 노 장공(魯莊公) 7년 여름 4월인데, 이날 항성(恒星)은 나타나지 않고 밤이 환히 밝았다. 석가는 주 소왕 24년(임자) 4월 8일에 탄생하여 주 목왕 52년(신미) 2월 15일에 입적하여 수(壽)가 80이었는데, 혹은 79세라고도 한다.

 

《개황삼보기(開皇三寶記)》를 상고해 보면 ‘주 장왕 9년에 부처가 탄생하고 광왕(匡王) 4 년에 부처가 열반에 들었다.’ 하였으니, 만일 이 말과 같다면 부처는 계사년에 탄생하여 임자년에 열반에 들었으므로, 수는 80이 된다. 《보요경(普曜經)》에 이르기를 ‘도솔천(兜率天)에서 신(神)이 내려와, 서역(西域) 가유위국(迦維衛國) 정반왕의 후비인 마야부인의 배에 잉태되었다가 오른쪽 옆구리를 찢고 탄생했다.’ 한다.” 하였다.

 

《남제서(南齊書)》 고환전(顧歡傳)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불(佛)ㆍ도(道) 이가 (二家)가 교(敎)를 세운 것이 본디 달라서 학자들이 서로 비난한다. 고 환이 저술한 이하론(夷夏論)에 ‘대저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데는 의당 성전(聖典)에 의거하여 이교(二敎)의 근원을 추심해야 하기 때문에 경구(經句) 두 가지를 표시한다. 도경(道經)에 「노자(老子)가 함곡관(函谷關)을 거쳐 천축(天竺) 유위국(維衛國)에 들어갔다. 유위국의 국왕부인(國王夫人)은 이름이 정묘(淨妙)인데, 노자가 정묘의 낮잠 자는 틈을 타서 태양의 정기(精氣)를 타고 정묘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음해 4월8일 한밤중에 정묘의 왼쪽 옆구리를 찢고 나와서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7보(步)를 걸었다. 이로부터 불도(佛道)가 일어났다.」한 말은 「현묘내편(玄妙內篇)」에서 나왔고, 불경(佛經)의 「석가가 성불(成佛)하는 데까지는 진겁(塵劫)의 수를 겪어 왔다.」한 말은《법화경》ㆍ《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나왔고, 또「국사(國師)ㆍ도사(道士)와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되었다.」한 말은 《서응본기(瑞應本起)》에서 나왔다.’ 하였다. 고환은 이에 대해 논하기를 ‘오제(五帝)ㆍ삼황(三皇)은 부처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국사나 도사로 말하자면 노자ㆍ장자(莊子)보다 나을 사람이 없고, 유림의 종장으로 말하자면 또 어느 누가 주공(周公)ㆍ공자를 초월하겠는가. 그럼 만일 공자ㆍ노자 같은 이가 부처가 아니라면 누가 그에 해당된단 말인가. 그러나 이경(二經 도경과 불경)에서 말한 바가 마치 부절(符節)이라도 맞춘 듯이, 도(道)가 곧 불(佛)이요 불이 곧 도이다 하였는데, 그 성(聖)에 도달함은 다 같지만 그 행적은 상반(相反)되어서, 혹은 빛을 간직하여 가까운 데를 밝히고, 혹은 영혜(靈慧)를 빛내어 먼 데까지 보이게 한다.’ 하였다.”

 

진강(陳剛)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은 불도가 서역에서 온 종교(宗敎)라고 하는데, 재장(齋長)이 어찌하여 불씨(佛氏)도 오래 살기를 탐내는 소인(小人)이라 하였던가? 불씨의 설(說)은 공(公)을 숭상하여 일체의 세사(世事)를 죄다 버려 관여하지 않으며, 생각마저도 끊어 마음을 항상 공공 무아(空空無我)하게 한다. 이목(耳目)이 있어도 그 시청(視聽)을 없애어 이목을 항상 공하게 하고, 구체(口體)ㆍ수족(手足)ㆍ음양(陰陽)의 형체가 있어도 모두를 억제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백체(百體)를 항상 공하게 하고는 정(精)ㆍ기(氣)ㆍ신(神) 세 가지를 하나로 만들어 성령(性靈)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세상에 존재하기를 힘쓰니, 이는 생(生)을 탐(貪)하고 유(有)를 탐하는 마음으로, 진공(眞空)을 한답시고 진실(眞實)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天地)의 정화(精華)를 도둑질해다가 다시 천지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하니, 이는 천지간의 큰 도둑이다. 이를 어찌 진공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상고하건대, 부처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어머니 꿈에 큰 백상(白象) 한 마리가 들어왔던 것이 잉태되어 날마다 배가 점점 불러지다가 나중에는 감당하기조차 어려웠고, 그가 태어날 때는 그의 어머니 배를 찢었으므로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태어나게 되었다. 이야말로 하늘이 괴이한 사람을 내어 온 천하를 어지럽히려는 것이기에 먼저 그 어머니를 죽인 것이다. 세간(世間)의 악물(惡物)인 효조(梟鳥)ㆍ갈자(蝎子)ㆍ독사(毒蛇) 같은 것들이 태어날 때에 반드시 그 어미가 먼저 죽고 나서야 나온다. 그런데 소위 부처의 탄생이 어찌 이런 악류(惡類)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는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자기 어머니를 죽였건만, 세상 사람들은 곧장 재(齋)를 설치하고 초제(醮祭)를 마련하여 백방으로 자기 어머니를 위해 부처에게 기복(祈福)을 한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한 부처이고 보면,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상고하건대, 부처는 서역에서 범왕국주(梵王國主)가 되어 아리따운 처첩(妻妾)이 많았는데 이들을 보살(菩薩)이라 칭했으며, 금백(金帛)ㆍ재보(財寶)도 극히 많았다. 나라는 비록 부유하지만 땅이 워낙 협소하여 기세가 매우 약한 데다가 사린(四隣)의 나라들은 모두가 강포(强暴)하여 늘 그들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불국(佛國)은 병마(兵馬)가 미약하여 그들을 대적할 길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쳐서는 궁여지책으로 몸을 수행하고 선을 좋아한다[修行好善]는 한 가지 설을 제창하고 게다가 사생(四生)ㆍ육도(六道)ㆍ보응(報應)ㆍ윤회(輪回) 등의 허다한 표방(標榜)까지 내세워 그 사린을 우롱한 것인데, 그의 의사는, 너희들이 금세(今世)에 우리 백성을 살육하고 우리 재물을 노략질하면 후세에 반드시 견마(犬馬)로 환생하여 우리에게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12년 동안에 걸쳐 사린(四隣)이 과연 그 설에 우혹(愚惑)되었으므로 불(佛)이 다시 귀국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그 나라를 완취(完聚 성곽(城郭) 같은 곳의 헌 데를 고치고 백성을 모음)하고 예전대로 부강을 누리며 자자 손손 안전을 얻게 되었다. 불은 본디 지모(智謀)로 진공(眞空)을 내세워 허다한 실리(實利)를 획득한 것이요, 그가 어떤 도술을 가져 우리 중국을 교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중국에 성인의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데 기인된 것이다. 사람이란 욕심이 많으면 의혹된 생각이 더욱 많아져, 요순(堯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가 천명한 도의에는 향하지 못하고 오직 불자(佛子)에게만 빠져들어 은총을 기원하게 된다.

 

성인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 욕심을 없애고 귀신을 멀리하여 떳떳한 인도(人道)를 다하게 하였는데, 불자는 오직 자기 한 몸뚱이만을 알 뿐, 천하 국가를 전혀 도외시하는 것을 선회(善悔)로 삼고, 인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진공이라 여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도 공이 될 수 없다. 탐욕과 망령된 기원으로 사람을 유인하여 바른 인도를 그르쳤을 뿐, 모두가 공을 구하는 일념(一念)이 아니다.” 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불경(佛經)마다 첫머리에 야수타(耶輸陀)와 마후라(摩候羅)라는 자가 기재되었는데, 불씨(佛氏)가 출가하기 전에 장가들어 맞아온 아내가 야수타이고, 여기에서 낳은 아들이 마후라이며, 출가한 지 12년 만에 돌아와 처자와 다시 만났고, 또 그의 처자는 그가 돌아갔을 때 매우 비통해 했다는 말과, 사자(射子)에게 일러 모든 천신(天神)을 가르쳤다는 말과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에 관한 말이 많았으니, 이는 불(佛)도 우리 이륜(彛倫)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그의 무리들이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다만 억지로 정연(情緣)을 억제하는 것이 진속(塵俗)을 떠나는 것으로 여긴 때문에 모두가 처자 없이 홀아비로 살아온 것이지, 어찌 불(佛)ㆍ노(老)의 근본 교리가 이와 같으랴.

 

《불법금탕편(佛法金湯編)》에 “진 시황(秦始皇) 30년(갑신)에 서역의 사문(沙門) 실리방(室利防) 등 18인이 범어 (梵語)로 쓴 불경의 원본을 가지고 함양(咸陽)에 들어오자 유사(有司)가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임금은 이속(異俗)이라 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에 실리방 등이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婆羅密多)를 염(念)하자, 몸에서 광명(光明)이 나와 사방을 밝게 비추고 서기(瑞氣)가 맴돌아 감옥에 꽉 차더니 갑자기 장륙(丈六 1장(丈) 6척(尺))의 금신(金神)이 나타나 금강저(金剛杵)를 휘둘러 옥을 부수고 나오므로, 임금이 놀라 뉘우친 나머지 곧 그들에게 예우를 후히 했다.” 하였다.

 

명(明)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태평청화(太平淸話)》에 “변산(卞山)에 있는 초왕(楚王)의 사당에 양 간문제(梁簡文帝)가 비기(碑記)를 지었는데, 그 비기에 ‘항우(項羽)가 부처를 섬겨 당구제(唐丘除)를 죽이지 않았다.’ 하였고, 또 ‘항왕(項王)이 나물밥[蔬食]을 먹었다.’ 는 글이 있으니, 항우도 일찍이 부처를 섬겼던 것이다.” 하였다.

 

《열자(列子)》에 “주 목왕(周穆王) 때에 서역(西域)에서 화인(化人 선인(仙人) 또는 환인(幻人)과 같다)이 왔다.” 하였으니, 아마 불(佛)을 가리킨 듯하다. 그러나 이때에는 불이 아직 나오기 전인데, 이른바 “날아서 하늘에 올라 화인(化人)의 궁(宮)에 이르렀다.” 한 말이 주목할 만하다. 또 “상 태재(商太宰 상(商)은 송(宋) 나라, 태재(太宰)는 관명(官名)이다)가 공자(孔子)에게 성인(聖人)을 묻자, 공자도 삼황(三皇)ㆍ오제(五帝)를 내리 열거하면서 모두 성인이 아니라 하고 서방(西方) 사람을 성인으로 인정했다.” 하였으니, 서방 사람이란 곧 불을 가리킨 듯하며, 또 “서방 사람으로 성인이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고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는 불에 해당되므로 세상이 더욱 의심하는 바이다.

 

대저 “천독(天毒)이라는 나라는 《산해경(山海經)》에 기재되어 있고, 축건(竺乾)의 스승은 도를 주사(柱史 주하사(柱下史)의 약칭, 즉 노자(老子)를 가리킨다)에게서 들었다.” 하였는데, 이는 양 문공(楊文公 문공은 양억(楊億)의 시호)의 글에 나온 말이다.

 

불교(佛敎)는 이미 주(周)ㆍ진(秦) 시대부터 있었다. 불(佛)은 대지(大地)의 음달인 서역에 있어, 해가 반드시 뒤늦게 비추며 땅이 다 서쪽으로 기울고 물이 다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공(空)으로 성(性)을 말하였고, 공자는 대지의 양달인 중국에 있어, 해가 반드시 먼저 비추며 땅이 다 동쪽으로 기울고 물이 다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실(實)로 성을 말하였으니, 지기(地氣)에 의해서도 그렇게 된 것인가보다. 불(佛)은 성(性)을 영(影)에서 얻고 유(儒)는 성을 형(形)에서 얻는다. 이 때문에 유는 인도(人道)를 밝히고 불은 귀도(鬼道)를 밝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유ㆍ불의 차이점이다.

 

불도 이미 교리가 있는 이상 나름대로 문자(文字)가 있으므로, 소위 그 범자(梵字)라는 것을 패다수엽(貝多樹葉)에 써서 전한다.

 

원(元) 나라 성희명(盛熙明)의 천축서(天竺書)를 논한 《법서고(法書考)》에 “서역(西域)에 있는 오천축(五天竺 오인도(五印度)와 같은 말로 동인도ㆍ서인도ㆍ남인도ㆍ북인도ㆍ중인도를 말한다)의 문자가 각기 조금씩 다른데, 중천축의 문자만을 가장 정통으로 삼는다. 대를 깎아 붓을 만들고 패다수엽으로 종이를 삼아 썼는데, 글씨 종류가 자그마치 64종이나 된다.” 하였다.

 

여러 서번(西蕃)의 문자들이 비록 변천은 각기 다르나 그 음운(音韻)은 범음(梵音)을 이어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범음이라 하고 범서(梵書)라 하지 않는 것은 음률(音律)이 서로 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음(音)으로써 뜻을 가져오기 때문이고, 중국의 문자처럼 육의(六義)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조환광(趙宦光)이 말하기를 “중국 글자의 자모(字母)는 산만하여 질서가 없고 그 명칭이나 법칙도 도무지 정립된 것이 없지만 범문(梵文)은 실담(悉曇) 문자가 주축이 되어, 모(母) 34와 성(聲) 16이 있다. 이 모와 성이 서로 곱해져서 5백 44자(字)가 되고 소리[聲]도 이 숫자와 같으면서도 겹쳐지는 음(音)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이 전전하여 다시 곱해져, 형(形)ㆍ성(聲)ㆍ의(義)ㆍ훈(訓)이 한량없이 생긴다.

 

실담총지(悉曇總持)는 대해다라니(大海陀羅尼)라고도 하는데, 다라니는 주문(呪文)임이 분명하다. 이는 당승(唐僧) 법천(法天)이 타본(他本)과 대조하여 바로잡고 이를 채택하여 실담(悉曇)의 수총지(首總持)를 삼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문수문자경(文殊文字經)》과 《화엄경(華嚴經)》의 자모(字母),《반야경(般若經)》의 자모, 《석담경(釋談經)》과 《야오사장(若烏思藏)》의 자모는 곧 소서천(小西天)의 자모인데, 모가 30, 성이 5이다.” 하였다.

 

정초(鄭樵)의 화범(華梵 중국과 서역)에 대한 논(論)에 “여러 서번의 문자가 각기 다르나 많이 범서(梵書)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것이 중국에 흘러들어 온 뒤에 대대로 대홍려(大鴻臚)의 직(職)이 있었으나 경(經)을 번역하고 윤문(潤文)하는 관리가 그 요지(要旨)를 다 통효(通曉)하지 못하였을까 염려되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범서는 왼쪽으로 돌려서 써나가기 때문에 형세가 오른쪽을 향하고, 화서(華書)는 오른쪽으로 돌려서 써나가기 때문에 형세가 왼쪽을 향한다. 화서는 곧은 획이 교착되어 문자를 이루고, 범서는 비스듬한 획이 얽히어 서체를 이룬다. 화서는 글자 하나에 음도 하나만이 해당되지만, 범서는 글자 하나에 간혹 여러 음이 해당될 수 있다. 화서는 글이 종선(縱線)으로 곧게 서로 이어지고, 범서는 횡선(橫線)으로 비스듬하게 서로 엮어진다. 화서는 눈으로 보아서 전하기 때문에 글씨에 자상하고, 범서는 입으로 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마치 악보(樂譜)와 같아서 글씨의 형체를 대략만 기록할 뿐이다. 화서는 읽을 때 소리를 판별하기 때문에 소리에서 가차(假借)하고, 범서는 읽을 때 음을 판별하기 때문에 음에서 가차한다. 《칠음운감(七音韻鑑)》을 살펴보면, 이 책은 서역(西域)에서 나온 것으로 거문고의 칠현(七絃)에 맞추어졌고 천뢰(天籟 천지 자연의 소리)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종(從)ㆍ형(衡)ㆍ정(正)ㆍ도(倒)가 전전하여 도형(圖形)을 이루어 자연의 글 아님이 없으므로 그 정미로움이 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으로만 만들어진《운서(韻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칠음의 학(學)을 학자(學者)들이 연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화서에는 이합(二合)의 음만 있고 이합의 글자는 없으나, 범서에는 이합ㆍ삼합ㆍ사합의 음이 있고, 또 그에 따른 글자도 있다. 화서는 그것이 금보(琴譜)에만 있다. 대저 중국 사람은 음에 능숙하지 못하다. 지금 범승(梵僧)의 주문(呪文)으로 비를 부르면 비가 오고 용(龍)을 부르면 용이 나타나서 잠깐 사이에 소리를 따라 변화하지만 화승(華僧)은 아무리 그 소리를 배워도 실효가 없으니, 이는 실로 음성을 내는 방법이 미진해서이다. 서역 사람들은 음을 분별함이 음에 있고 글자에 있지 않으며, 중국 사람들은 글자를 분별함이 글자에 있고 음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범서는 매우 쉽다. 다만 이 두어 가지의 굴곡(屈曲)이 있을 뿐이다. 차별점(差別點)이 많지 않고 또 문리(文理)가 형성되지 않으면서도 무궁한 음이 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매우 음을 분별하지 못하여 절운학(切韻學)같은 것도 한 대(漢代) 이전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실은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른바 운도(韻圖)의 유에 대해서도 석자(釋子)들은 흔히 말을 잘하는데, 유자(儒者)들은 모두 기례(起例)조차도 알지 못하니, 이는 그 원류(源流)가 저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화서(華書)는 글자의 조립이 극히 조밀하고 점획(點畫)도 극히 많아서 범서(梵書)에 비교하면 실상 서로 요원하다. 그러므로 범서에는 무궁한 음이 있고 화서에는 무궁한 글자가 있다. 범서는 음에 오묘한 뜻이 있고 글자에는 문채가 없으며, 화서는 글자에 변통이 있고 음에는 치수(錙銖)가 없다. 서역 사람들은 음에 뛰어나서 얻는 것이 들은 것을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이곳의 참다운 교체(敎體)는 청정(淸淨)하여 음문(音聞)에 있으므로, 우리의 삼마제(三摩提)가 모두 듣는 것을 따라 들어왔다고 하고, 또 목근(目根)의 공덕은 작고 이근(耳根)의 공덕은 많다는 설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문(文)에 뛰어나서 얻는 것이 보는 것을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천하가 글자를 아는 사람은 유능하고 슬기롭게 여기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고 용렬하게 여긴다.” 하였다.

 

가차(假借) : 육서(六書)의 하나. 어떤 뜻을 지닌 음을 적는 데 적당한 글자가 없을 때 뜻은 다르나 음이 같은 글자를 빌려 쓰는 일. 예를 들면 영(令)은 호령(號令)의 뜻인데 이를 빌려서 현령(縣令)의 영(令)으로 쓰는 따위를 말한다.

 

삼마제(三摩提) : 삼마지(三摩地)와 같은 말로 곧 정(定)의 뜻인데, 마음을 한곳에 모아 산란치 않게 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서번(西番)에서 천방국(天方國)ㆍ묵덕나(黙德那)가 가장 먼 곳으로, 현장(玄奘 당(唐) 나라 때의 중)이 불경(佛經)을 가져온 지역이므로 서로 전하기를 불국(佛國)이라 한다. 그 경(經)은 36장(藏)으로 되어 3천 6백여 권이나 되고, 그 글씨는 전서(篆書)ㆍ초서(草書)ㆍ해서(楷書) 세 가지 법이 있다.” 하였다.

 

범서(梵書)의 종류

 

범서(梵書)는 64종(種)이 있다. 명나라 미공(眉公) 진계유(陳繼儒)의 《언폭여담(偃曝餘談)》에 “정반왕(淨飯王)이 밀다라(密多羅)로 하여금 태자(太子)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태자는 맨 처음 취학(就學)할 적에 가장 기묘한 것을 좋아하여, 우두전단(牛頭旃檀 인도에서 나는 고귀한 향나무 이름)으로 수판(手版)을 만들고는 순수한 칠보(七寶) 사연(四緣)을 장엄(裝嚴)하고, 온갖 특수한 천향(天香)을 그 등에 바른 다음, 이를 갖고 비사밀다라(毘奢密多羅) 아사리(阿闍黎)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칠보(七寶) : 일곱 가지의 보옥(寶玉). 금(金)ㆍ은(銀)ㆍ유리(瑠璃 : 검푸른 보옥)ㆍ파려(玻瓈 : 수정)ㆍ차거(硨磲 : 백산호)ㆍ적주(赤珠 : 적진주)ㆍ마노(碼碯 : 짙은 녹색의 보옥)를 가리킨다.

 

사연(四緣) :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그 연(緣)을 넷으로 나누는 것. 즉 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아사리(阿闍黎) : 불교에서 스승을 일컫는 말. 그냥 사리라고도 하는데, 교수(敎授)ㆍ궤범(軌範)ㆍ정행(正行)이라 하여, 제자의 행위를 교정하며 그의 사범이 되어 지도하는 큰 스님이다.

 

‘존사리(尊闍黎)는 나에게 무슨 글을 가르치겠습니까? 여기서부터는 태자가 널리 글에 대해 말한 것이다. 혹시 범천(梵天)이 설(說)해 놓은 글입니까? 지금 바라문(婆羅門)의 글인데, 모두 음(音)이다. 아니면 거로(佉盧)의 슬질서(蝨叱書), 수(隋)에서 노순(盧脣)이라고 한다. 부사가라선인설서(富沙迦羅仙人說書) 수에서 초과(草果)라 한다.ㆍ아가라서(阿迦羅書) 수에서 절분(節分)이라고 한다.ㆍ몽가라서(瞢迦羅書) 수에서 길상(吉祥)이라고 한다.ㆍ야미니서(邪寐尼書) 미(寐)는 망비(亡毗)의 반(反)이다. 수에서 대진국(大秦國)이라고 한다.ㆍ앙구리서(鴦瞿梨書) 수에서 지언(指言)이라고 한다.ㆍ야나니가서(耶那尼迦書) 수에서 타서(駄書)라고 한다.ㆍ바가라서(婆迦羅書) 수에서 자우(牸牛)라고 한다.ㆍ바라바니서(婆羅波尼書) 수에서 수엽(樹葉)이라고 한다.ㆍ바류사서(波流沙書) 수에서 악언(惡言)이라고 한다.ㆍ부여서(父輿書)ㆍ비다도서(毗多荼書) 수에서 기시(起尸)라고 한다.ㆍ타비도국서(陀毗荼國書) 수에서 남천축(南天竺)이라고 한다.ㆍ지라거서(脂羅佉書) 수에서 형인(形人)이라고 한다.ㆍ탁기로나바다서(度其荖那婆多書) 수에서 우선(右旋)이라고 한다.ㆍ우바가서(優婆迦書) 수에서 엄치(嚴熾)라고 한다.ㆍ승거서(僧佉書) 수에서 산계(算計)라고 한다.ㆍ아바물타서(阿婆勿陀書) 수에서 하(霞)라고 한다.ㆍ아면로마서(阿㝹盧摩書) 수에서 순(順)이라고 한다.ㆍ비야매사라서(毗耶寐奢羅書) 수에서 잡(雜)이라고 한다.ㆍ타라다서(陀羅多書) 오장 변산(烏場邊山)이다.ㆍ서구야니서(西瞿耶尼書) 수미(須彌)의 서쪽이다.ㆍ아사서(阿沙書) 소륵(疏勒)이다.ㆍ지나국서(支那國書) 이것이 곧 대당국(大唐國)이다.ㆍ마나서(摩那書) 과두(科斗)이다.ㆍ말도차라서(末荼叉羅書) 중자(中字)이다.ㆍ비다실저서(毘多悉底書) 척(尺)이다.ㆍ부수바서(富數波書) 화(華)이다.ㆍ제바서(提婆書) 천(天)이다.ㆍ나가서(那迦書) 용(龍)이다.ㆍ야차서(夜叉書)ㆍ건달바서(乾闥婆書) 천(天)의 음성(音聲)이다.ㆍ아수라서(阿修羅書)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ㆍ가루라서(迦婁羅書)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ㆍ긴나라서(緊那羅書) 비인(非人)이다.ㆍ마후라가서(摩睺羅伽書) 천지(天地)이다.ㆍ미가차가서(彌迦遮迦書) 모든 짐승의 소리이다.ㆍ가가루다서(迦迦婁多書) 새의 소리이다.ㆍ부마제바서(浮摩提婆書) 지거천(地居天)이다.ㆍ안다리차제바서(安多黎叉提婆書) 허공(虛空)이다.ㆍ울다라구라서(鬱多羅拘羅書) 수미(須彌)의 북쪽이다.ㆍ포루바비제아서(逋婁婆毗提阿書) 수미다(須彌多)이다.ㆍ오차바서(烏差婆書) 거(擧)이다.ㆍ이차바서(膩差婆書) 척(擲)이다.ㆍ바가라서(婆伽羅書) 해(海)이다.ㆍ발사라서(跋闍羅書) 금강(金剛)이다.ㆍ이가바라거리가서(梨伽婆羅佉犁伽書) 왕복(往復)이다.ㆍ비기다서(毗棄多書) 식잔(食殘)이다.ㆍ아토부다서(阿菟浮多書) 미증유(未曾有)이다.ㆍ사바다라발다서(奢婆多羅跋多書) 거전(擧轉)이다.ㆍ니차발다서(尼差跋多書) 척전(擲轉)이다.ㆍ바타리거서(婆陀梨佉書) 상구(上句)이다.ㆍ비구다라바타나지서(毗拘多羅波陀那地書) 종이증상구(從二增上句)이다.ㆍ야바타수다라서(耶婆陀輸多羅書) 증상구이상(增上句已上)이다.ㆍ말도바신니서(末荼婆哂尼書) 중류(中流)이다.ㆍ이사야바다바지마다서(梨娑邪婆多婆恀比多書) 제산(諸山)의 고행(苦行)이다.ㆍ다라니비차리서(陀羅尼卑叉梨書) 관지(觀地)이다.ㆍ가가나비려차니서(伽伽那卑麗叉尼書) 관허공(觀虛空)이다.ㆍ살포사지니서(薩蒲娑地尼書) 일체 약초인(一切藥草因)이다.ㆍ사라승가아니서(娑羅僧伽阿尼書) 총람(總覽)이다ㆍ살바위다서(薩婆韋多書) 일체 종음(一切種音)이다. 입니까?’

 

그때에 태자는 이상의 글을 이야기했는데 이 글의 종류는 무려 64종이나 된다.

 

옛날에 글을 만들었던 사람이 무릇 세 명이 있다. 첫째는 이름이 범(梵)인데 그의 글은 오른쪽으로 써나가고, 그 다음은 거로(佉盧)인데 그의 글은 왼쪽으로 써나가고, 셋째는 창힐(蒼頡)인데 그의 글은 아래로 써내려간다. 범과 거로는 천축(天竺)에 살았고,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창힐은 중국에 있었으며, 범과 거로는 정천(淨天)에서 법을 취했다고 한다.” 하였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글 만든 사람에 대해 이 설을 인용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은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거로의 슬질서(蝨叱書)는 수(隋)에서 노순(盧脣)이라 하는데 불서(佛書)에서는, 첫째는 범(梵)이고 셋째는 창힐(蒼頡)이라 망언(妄言)하였으니, 이 또한 유서(儒書)를 은연히 억누르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를 유동보살(儒童菩薩)이라 칭하는 것과 같은 유이다.

 

유동보살(儒童菩薩) : 불자(佛者)가 공자(孔子)를 일컫는 말. 《변정론(辨正論)》에 “중니(仲尼)는 곧 유동보살인데, 오탁(五濁 : 불교에서 말하는 겁(劫)ㆍ견(見)ㆍ명(命)ㆍ번뇌(煩惱)ㆍ중생(衆生)의 오탁)을 제도하고 오상(五常 : 오륜(五倫)과 같음)을 선포했다.” 하였다.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서역(西域)을 기록한 글에, 노순서(盧脣書)ㆍ연엽서(蓮葉書)ㆍ절분서(節分書)ㆍ대진서(大秦書)ㆍ타승서(駄乘書)ㆍ자우서(牸牛書)ㆍ수엽서(樹葉書)ㆍ기시서(起屍書)ㆍ우선서(右旋書)ㆍ복서(覆書)ㆍ천서(天書)ㆍ용서(龍書)ㆍ조음서(鳥音書) 등 64종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유양잡조(酉陽雜組)》에 나타나 있다.

 

보유(補遺)로는, 석(釋) 신공(神珙) 등의 《절운(切韻)》, 석 처충(處忠)의 《원화운보(元和韻譜)》, 석 지유(智猷)의 《보수가자절운(補修加字切韻)》, 석 종언(宗彦)의 《사성등제도(四聲等第圖)》, 석 정홍(靜洪)의 《운영(韻英)》, 석 진공(眞空)의 《직지옥약시문법(直指玉鑰匙門法)》등이 있다.

 

불교에 종파(宗派)가 있기 때문에 그 경도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이 있고 선좌(禪坐)와 계율(戒律)이 있다.

 

명 나라 금화(金華) 사람 송렴(宋濂)이 말하기를 “서방(西方)의 성인(聖人)이 중생 제도의 큰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나와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곧장 발제하(跋提河)에 이르러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를 연설하여 법문을 갖추었는데, 사람마다 성식(性識)ㆍ근엽(根葉)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대승ㆍ소승의 설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부처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인 대가섭(大迦葉)이 아난(阿難) 등 5백 인과 함께 그의 언행을 추후 찬술하여 문자로 엮어서 12부(部)로 만들었는데, 그후 수백 년이 지나 나한(羅漢)과 보살(菩薩)이 나와 서로 이어가면서 논(論)을 지어 그의 뜻을 찬명(贊明)하였다. 그러나 부처가 말하기를 ‘내가 멸도(滅度)한 후에 정법(正法)이 5백년, 상법(像法)이 천 년, 말법(末法)이 3천 년이다.’ 하였다. 그 뜻은 이와 같으나 전적(典籍)을 추심해 보면 한대(漢代) 이전에는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다. 혹은 이르기를 ‘오래 전부터 이미 유포(流布)되었었으나 진(秦) 나라 시대에 이르러 없어졌다.’ 한다.” 하였다. 불법이 중국 및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온 내력과 경(經)의 삼장(三藏)ㆍ보유(補遺)ㆍ찬술(纂述)ㆍ석각(石刻)ㆍ전서(篆書)ㆍ패엽(貝葉)과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의 팔만 대장경(八萬大藏經)을 아울러 변증하려 한다.

 

송렴(宋濂)이 말하기를 “불경이 중국에 들어온 경위에 대해,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가서 부도(浮屠)의 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고 애제(哀帝)때에 박사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이, 대월지왕(大月氏王)이 이존(伊存)을 시켜 입으로 전수해 준 부도경(浮屠經)을 배워 옴으로써 중국에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꿈에 금인(金人)이 궁전(宮殿)의 뜰에서 비행(飛行)하므로 이를 조신(朝臣)들에게 물었는데, 부의(傅毅)가 부처[佛]라고 대답하자 명제가 낭중(郎中) 채암(蔡愔) 및 진경(秦景)을 천축(天竺)에 사신으로 보내어 불경(佛經)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및 석가(釋迦)의 입상(立像)을 구해 오게 하였다. 이때 이들은 사문(沙門)인 섭마등(攝摩騰)ㆍ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동(東)으로 돌아왔다. 그때 채암 등이 백마(白馬)에다 불경을 싣고 돌아왔으므로 낙성(洛城)의 옹문(雍門) 서쪽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워서 그들을 거주하게 하고, 그 경은 난대 석실(蘭臺石室)에 저장하였고 또 청량대(淸涼臺) 및 현절릉(顯節陵) 위에는 불상(佛像)을 그려 붙였다.

 

장제(章帝) 때에 초왕(楚王) 영(英)이 불법을 존숭(尊崇)하기로 소문이 나자, 서역에서 불경을 싸들고 온 사문(沙門)들이 매우 많았다. 영평(永平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연호, 58~75) 연간에 축법란이 또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였는데, 그 나머지 전해온 역서(譯書)들은 통하지 않는 데가 많다. 환제(桓帝) 때에 이르러 안식국(安息國)의 사문인 안정(安靜)이 불경을 싸들고 낙양(洛陽)에 와서 번역한 것이 가장 잘 되었다. 영제(靈帝) 때에는 월지국(月支國)의 사문인 지참(支讖), 천축의 사문인 축불삭(竺佛朔) 등이 불경을 번역하였는데, 지참이 번역한 《이원경(泥洹經)》2권을 학자들은 본지(本旨)에 매우 적합하다고 여겼다.

 

한말(漢末)에 태수(太守) 축융(竺融)도 불법을 숭상하였고, 삼국(三國)시대에는 서역의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불경을 싸들고 오(吳)에 와서 번역하자, 오주(吳主)인 손권(孫權)이 크게 경모하여 믿었다. 위(魏)의 황초(黃初 위 문제(魏文帝)의 연호, 220~226) 연간에는 중국 사람들이 비로소 불계(佛戒)에 귀의(歸依)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에 앞서 서역의 사문이 여기에 와서 《소품경(小品經)》을 번역하였으나 수미(首尾)가 서로 어긋나서 통하지 않았다. 감로(甘露 위 고귀향공(魏高貴鄕公)의 연호, 256~259) 연간에는 주사행(朱仕行)이라는 사람이 서역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러 불경 구십장(九十章)을 얻어왔는데, 진(晉) 나라 원강(元康 진 혜제(晉惠帝)의 연호, 291~299) 연간에 업(鄴)에서 이를 번역하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제(題)하였다. 태시(太始 진 무제(晉武帝)의 연호, 265~274) 연간에는 월지국(月支國)의 사문인 축법호(竺法護)가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불경을 많이 얻어 낙양(洛陽)에 와서 번역하였는데, 부수(部數)가 매우 많다. 불교가 동토(東土)에 유입된 것이 이때부터 성해졌다.

 

석륵(石勒 오호(五胡) 16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별칭) 시대에 상산(常山)의 사문인 위도안(衛道安)이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불경을 날마다 1만여 언(言)씩을 외었는데, 호승(胡僧)이 번역한 《유마경(維摩經)》과 《법화경(法華經)》이, 그 깊은 뜻이 다 해명되지 못했다 하여, 여기에 생각을 몰두한 지 10년 만에 심신(心神)을 깨우쳐, 그 어긋난 점을 바로잡고 해석(解釋)을 널리 선양시켰다. 이때 중국에 분란(紛亂)이 일어나 사방이 격절(隔絶)되자, 도안(道安)이 문도(門徒)를 인솔하고 남쪽으로 신야(新野)에 내려가 돌아다니면서 현종(玄宗 심원(深遠)한 도(道)의 뜻으로 여기서는 곧 불도를 가리킨 말이다)을 도처에 유포(流布)시키기 위해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법성(法性)은 양주(揚州)로, 법화(法和)는 촉(蜀)으로 가고, 도안 자신은 혜원(慧遠)과 함께 양양(襄陽)으로 갔다가 뒤에 장안(長安)에 이르자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왕명(王名))이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도안은 천축의 사문인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법문(法門)에 통했다는 소문을 평소 들었던 터이라 그를 데려오도록 부견에게 당부했었는데, 구마라습 역시 도안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요배(遙拜)하며 존경하였다. 요장(姚萇 후진 주(後秦主)의 이름)의 홍시(弘始) 2년에 구마라습이 장안에 이르렀으나 이때는 도안이 죽은 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므로 구마라습은 매우 슬프고 한스러워 했다. 이어 구마라습이 경론(經論)을 대거 번역하였는데, 도안이 바로잡은 것과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이, 뜻이 마치 하나 같아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홍시(弘始) : 후진(後秦)의 참제(僭帝) 요장(姚萇)의 아들인 요흥(姚興)의 연호인데, 여기 원문에서 요장의 연호로 쓰인 것은 착오인 듯싶다.

 

당초 진(晉) 나라 원희(元熙 공제(恭帝)의 연호, 419~420) 연간에 신풍(新豐)의 사문인 지맹(智猛)이 지팡이를 짚고 서역 화씨성(華氏城 중인도(中印度)의 마게타국(摩揭陀國)에 있는 고성(故城))에 이르러 《이원경(泥洹經)》및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은 다음 동(東)으로 고창(高昌)에 와서 《이원경》을 번역하여 20권으로 만들었다. 뒤에 천축의 사문인 담마라참(曇摩羅懺)이 다시 호본(胡本)을 싸들고 하서(河西)에 오자, 저거몽손(沮渠蒙遜 오호(五胡) 16국의 하나인 북량(北涼)의 시조)이 사신을 고창(高昌)에 보내어 지맹(智猛)의 경본(經本)을 가져다가 서로 참고 대조하게 하려 하였으나, 그가 돌아오기 전에 몽손이 파멸되었다. 요장(姚萇)의 홍시(弘始) 10년에 지맹의 경본이 비로소 장안(長安)에 도착되자 번역해서 30권으로 만들었고 담마라참이 또 《금광명경(金光明經)》등을 번역하였다.

 

이때 장안에 들어온 호승(胡僧)이 수십 명이었는데, 그 중 구마라습이 가장 재덕(才德)이 뛰어나서, 그가 번역한 《유마경》ㆍ《법화경》ㆍ《성실론(成實論)》등 제경(諸經)과 담무참(曇無懺)이 번역한 《금광명경(金光明經)》, 담마라참(曇摩羅懺)이 번역한《이원경(泥洹經)》은 모두 대승(大乘)의 학(學)이 되었고, 또 구마라습이 번역한 《십송률(十誦律)》과 천축의 사문인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장아함경(長阿含經)》ㆍ《사분율(四分律)》과 도거륵(兜佉勒)의 사문인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번역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과 담마야사(曇摩耶舍)가 번역한 《아비담론(阿毗曇論)》은 모두 소승(小乘)의 학이 되었다. 기타의 경(經)ㆍ논(論)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로부터 불법이 유통하여 온 천하에 편만하였다.

 

동진(東晉)의 융안(隆安 안제(安帝)의 연호, 397~401) 연간에 또 계빈(罽賓 서역의 국명(國名))의 사문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ㆍ《중아함경(中阿含經)》을 번역하였고, 의희(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 405~418) 연간에는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화엄경(華嚴經)》의 3만 6천 게(偈)를 얻어와 금릉(金陵)에서 번역하였다. 또 사문 법현(法顯)이 장안(長安)에서부터 천축에 이르기까지 30여 나라를 거치면서 경(經)ㆍ율(律)이 있는 곳을 따라 그곳에서 쓰고 있는 글과 말을 배워 번역, 기록해 가지고 돌아와 금릉에 이르러 천축의 선사(禪師)인 발라(跋羅)와 함께 변정(辯定)하여 《승기율(僧祇律)》이라 하였는데, 학자들이 그를 전수한다.

 

제(齊)ㆍ양(梁) 및 진(陳)에도 외국(外國)의 사문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번역한 것으로는 법문(法門)이 될 만한 큼직한 부서(部書)는 없다. 양 무제(梁武帝)가 크게 불법을 숭상하여 화림원(華林園)에다 석씨(釋氏)의 경전(經典)을 전부 모았는데, 모두 5천 4백 권이었다. 이때 사문 보창(寶唱)이 경의 목록(目錄)을 찬하였다. 또 후위(後魏) 때에는 태무제(太武帝)가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정벌하고 나서, 사문들이 많이 불률(佛律)을 어기고 떼지어 추행을 한다는 이유로 유사(有司)에게 일러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블상(佛像)을 불태우거나 부수게 함으로써 장안의 승도(僧徒)가 일시에 섬멸되었다. 기타 지역에서는 이 조치를 미리 듣고 도망치거나 숨어서 살아남은 자가 열에 한두 명쯤 되었다.

 

그후 문성제(文成帝) 시대에는 다시 불도를 수복(修復)하게 하였다. 희평(熙平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의 연호, 516~518) 연간에 사문인 혜생(慧生)을 서역(西域)에 보내어 모든 경ㆍ율에서 채집하여 1백 70부(部)를 얻어왔고, 영평(永平 북위 선무제(宣武帝)의 연호, 508~511) 연간에도 천축의 사문인 보제류지(菩提留支)가 불경을 대거 번역하여 구마라습(鳩摩羅什)과 서로 대등하였는데, 그가 번역한 《지지경(地持經)》ㆍ《십지론(十地論)》은 모두 대승교(大乘敎)에 해당되는 것으로 학자들이 중히 여겼다. 후제(後齊)는 업(鄴)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불법(佛法)을 개혁시키지 않았는데, 주 무제(周武帝) 때에는 촉군(蜀郡)의 사문인 위원숭(衛元嵩)이 글을 올려, 승도(僧徒)들이 외람하다고 일컬음으로써 무제(武帝)가 조서를 내려 일체 철폐시켰다.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581~600) 원년에 고조(高祖)가 온 천하에 조서를 내려, 마음대로 출가할 수 있게 하고 이어 호구(戶口)를 계산하여 돈을 거두어 불경과 불상을 만든 다음 경사(京師) 및 병주(竝州)ㆍ상주(相州)ㆍ낙주(洛州) 등 큰 도시에는 관(官)에서 필사한 《일체경(一切經)》과 아울러 절 안에 비치하고, 또 별도로 필사하여 비각(祕閣)에 수장하도록 함으로써 온 천하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이 앞을 다투어 서로 경모(景慕)하여 민간(民間)에 있는 불경이 육경(六經)보다 수십 수백 배나 더 많았다.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 605~617) 연간에는 또 사문인 지과(智果)를 시켜 동도(東都) 안에 있는 도량(道場)에서 모든 경의 목록(目錄)을 찬하고 맥락(脈絡)을 분별하여 부처가 말해 놓은 경을 3부(部)로 만들었는데, 첫째는 대승(大乘), 둘째는 소승(小乘), 셋째는 잡경(雜經)이고, 기타 후인(後人)들이 가탁(假託)해서 만든 것 등은 별도로 1부를 만들어 의경(疑經)이라 하였다. 또 보살(菩薩) 및 여러 대덕(大德)들의 깊은 해석과 오묘한 뜻이 불교의 이치를 찬명(贊明)할 만한 것들은 논(論)이라 하였고 계율(戒律)은 대(大)ㆍ중(中)ㆍ소(小) 3부(部)의 구별을 두었다. 또 배우는 사람들이 그 당시의 행사(行事)를 기록해 놓은 것을 기(記)라 하였는데, 모두 11종이다.

 

왕의(王禕)의 《청암총록(靑巖叢錄)》에 “불씨(佛氏)의 학문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세존(世尊)의 대제자(大弟子) 아난다(阿難陀)가 총지(總持)를 많이 듣고 또 큰 지혜(知慧)가 있어, 세존이 말해 놓은 것들을 결집(結集)하여 수다라장(修多羅藏 부처가 말한 교법을 모은 총칭)을 만들자, 여러 존자(尊者)들이 서로 전후(前後)하여 화원(化源 교화(敎化)의 본원(本源)이라는 뜻)인 우바라(優波羅 율장(律藏)의 뜻)를 천명하여 사부율(四部律 율부(律部)의 네 가지.《십송률(十誦律)》ㆍ《사분율(四分律)》ㆍ《승기율(僧祇律)》ㆍ《오분율(五分律)》을 만들고 비니(毗尼 부처가 제자들을 위하여 마련한 계율의 총칭)라 하였다. 금강살타(金剛薩埵)는 비로자나(毗盧遮那)에게서 친히 유가(瑜珈) 5부(部)를 받았는데, 이것이 소위 비밀장구(祕密章句)이고, 무착(無着)ㆍ천친(天親)은 자주 지족천(知足天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하나인 곧 도솔천(兜率天)을 가리킨다)에 올라 자씨(慈氏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지칭하는 말)에게 자문하여 논(論)을 만들어 대승(大乘)을 발명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유식(唯識)의 종지(宗旨)이다. 천축의 용승(龍勝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이명(異名))은 자기가 얻은 비라(毗羅)의 강요(綱要)를 넓혀 중관론《中觀論)》이라 하였고, 돈황(燉煌)의 두법순(杜法順)은 《화엄경》의 불가사의한 경지에 깊이 들어가 깊은 뜻을 크게 선양하였는데, 소위 《화엄법계관(華嚴法界觀)》이다. 이것이 비니(毗尼)의 법의 대략 이다.

 

무착(無着)ㆍ천친(天親) : 무착은 북인도(北印度) 건다라국 부루사부라성(犍陀羅國富樓沙富羅城)의 바라문 출신. 처음에는 소승화지부(小乘化地部)에 들어가 출가하여 빈두라(賓頭羅)를 따라 소승의 공관(空觀)을 닦았는데, 뒤에는 법상 대승(法相大乘)의 교화를 선양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논소(論疏)를 지어 대승경(大乘經)을 해석하였다. 천친은 무착의 아우로 세친(世親)이라고도 하는데,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하여 크게 이름을 드날렸다.

 

비라(毗羅) : 비라는 인도 마갈타국 화씨성(摩竭陀國華氏城) 출신으로 부법장(付法藏) 제 12조인 가비마라(迦毗摩羅)의 준말이다. 처음에는 3천의 제자를 거느린 외도였으나 뒤에 마명(馬鳴)에게 설복되어 제자들과 함께 불교에 귀의하여 남인도에서 교화에 힘쓰고 《무아론(無我論)》 1백 게송(偈頌)을 지어 외도를 깨뜨렸으며, 그 교법(敎法)을 용수(龍樹)에게 전수하였다.

 

한(漢) 나라 영평(永平) 2년부터 불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왔는데, 그 후 서로 종(宗)을 달리하여, 교종(敎宗)ㆍ선종(禪宗)ㆍ율종(律宗) 세 파로 갈라졌다. 위(魏) 나라 가평(嘉平 제왕(齊王)의 연호, 249~253) 초기에는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비로소 《승기계본(僧祇戒本)》을 가지고 낙양(洛陽)에 이르자 담무덕(曇無德)ㆍ담체(曇諦) 등이 그를 계승하여 갈마수계(羯磨授戒)하는 법을 세웠고, 당(唐) 나라 때 종남산(終南山)의 징조율사(澄照律師) 도선(道宣)이 소(疏)를 지어 천명함으로써 사분율(四分律)이 드디어 크게 행해졌는데, 이것이 곧 남산종(南山宗)이 되었다.

 

갈마수계(羯磨授戒) : 불교에서 수계(授戒)하는 의식. 맨 처음 대중(大衆) 앞에서, 아무에게 수계 의식을 거행할 뜻을 알리는 표문(表文)을 백문(白文)이라 하고, 그 다음에 계를 받는 자에게 계법(戒法)을 주는 뜻을 기록한 표문을 갈마문(羯磨文)이라 하는데, 백문은 한 차례를 읽고 갈마문은 세 차례를 읽으므로 일백 삼갈마(一白三羯磨)라 한다.

 

살타(薩埵)는 유가(瑜珈)의 교법을 용맹(龍猛)에게, 용맹은 이를 용지(龍智)에게, 용지는 이를 금강지(金剛智)에게 전수했다. 당 나라 개원(開元 현종(玄宗)의 연호, 713~741) 연간에 금강지가 중국에 와서 만다라단(曼茶羅壇)을 크게 세우고 법사(法事 불법을 수행 또는 선전하는 일)를 열자, 대지선사(大智禪師)ㆍ도인선사(道氤禪師)ㆍ대혜선사(大慧禪師)ㆍ일행선사(一行禪師) 및 불공 삼장(不空三藏)이 모두 와서 그를 스님으로 존경하였는데, 이것이 곧 유가종(瑜珈宗)이 되었다.

 

유가(瑜珈) : 상순일치(相順一致)의 뜻으로 일체의 경(經)ㆍ행(行)ㆍ과(果) 등을 말한다. 경은 마음과 상응하고, 행은 이치와 상응하고, 과는 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당 나라 정관(貞觀 태종(太宗)의 연호, 627~949) 3년에 삼장(三藏 경ㆍ율ㆍ논 등을 번역한 스님의 일컬음) 현장(玄獎)이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자은법사(自恩法師) 규기(窺基)에게 전수하자, 규기가 여기에다 구설(舊說)을 망라하여 널리 소(疏)ㆍ논(論)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은종(慈恩宗)이다.

 

유식(唯識) : 삼라만상은 심식(心識) 밖에 실존한 것이 아니어서, 오로지 심식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양(梁)ㆍ진(陳) 연간에는 북제(北齊)의 혜문(惠聞)이 《중관론(中觀論)》을 읽고 오지(奧旨)를 깨달은 다음 용승(龍勝)에게 멀리서 예배(禮拜)하여 스승으로 삼고,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의 삼관(三觀)인 지관법문(止觀法門)을 열어 법화(法華)의 종지(宗旨)를 혜사(慧思)에게, 혜사는 이를 천태국사(天台國師) 지의(智顗)에게 전수하여, 그 설(說)이 크게 갖추어졌다. 지의는 이를 관정(灌頂)에게, 관정은 이를 지위(智威)에게, 지위는 이를 혜위(惠威)에게, 혜위는 이를 현랑(玄朗)에게, 현랑은 이를 잠연(湛然)에게 전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천태종(天台宗)이다.

 

수(隋) 나라 말엽에 두순(杜順)이 법계관법(法界觀法)을 지엄(智儼)에게, 지엄은 이를 현수(賢首) 법장(法藏 현수의 이름)에게 전수했는데, 청량국사(淸涼國師) 징관(澄觀)에 이르러 그 학문을 추종하여 종지(宗旨)로 삼아 《화엄경》의 소론(疏論) 수백 수만 언(言)을 저술하였고, 규봉(圭峯 종밀의 별호) 종밀(宗密)이 그를 계승하여 그 교화가 널리 퍼지니, 이것이 바로 현수종(賢首宗)이다.

 

유가종(瑜珈宗)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남산종(南山宗) 역시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세상에 행해지는 것으로는 자은종(慈恩宗)ㆍ천태종(天台宗)ㆍ현수종(賢首宗)뿐인데, 그 중에서는 천태종이 가장 성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세상의 이른바 교종(敎宗)이다.

 

세존(世尊)의 대법(大法)이 가섭(迦葉)으로부터 28대(代)를 전수하여 보제달마(菩提達摩)에 이르러,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의 뜻을 크게 넓히어 불립문자(不立文字 법은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어 문자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로 성(性)을 보아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인데, 달마는 혜가(慧可)에게, 혜가는 승찬(僧璨)에게, 승찬은 도신(道信)에게, 도신은 홍인(弘忍)에게, 홍인은 조계산(曹溪山)의 대감선사(大鑑禪師) 혜능(慧能)에게 전수하여 그 법이 비로소 성해졌다. 혜능의 두 제자인 회양(懷讓)ㆍ행사(行思)가 다 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갔는데, 회양은 도일(道一)에게 전수하니, 도일의 학문은 강서(江西)에서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는 회해(懷海)에게, 회해는 희운(希運)에게, 희운은 임제 혜조대사(臨濟慧照大師) 의현(義玄)에게 전수하였는데, 의현이 삼공문(三空門 즉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내세워 학도(學徒)들을 책려(策勵)하니, 이것이 바로 임제종(臨濟宗)이다. 회해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한 파는 위산(潙山)의 대원선사(大圓禪師) 영우(靈佑)가 초조(初祖)이고, 영우는 앙산(仰山)의 지통대사(智通大師) 혜적(慧寂)에게 전수하였는데, 서로 이어 제창하고 화답하여 미묘한 현기(玄機)가 이루 멎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위앙종(潙仰宗)이다. 행사(行思)는 희천(希遷)에게 전수하였는데, 희천의 학문을 호남(湖南)에서 종주로 삼았다. 그는 도오(道悟)에게, 도오는 숭신(崇信)에게, 숭신은 선감(宣鑑)에게, 선감은 의존(義存)에게, 의존은 운문(雲門)의 광진대사(匡眞大師) 문언(文偃)에게 전수하였는데, 문언의 언어(言語)는 마치 청천벽력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이 귀를 가렸다. 이것이 바로 운문종(雲門宗)이다. 현사(玄沙) 사비(師備)는 사실 문언의 동문우(同門友)였는데, 그는 계침(桂琛)에게, 계침은 이를 법안대사(法眼大師) 문익(文益)에게 전수하였다. 문익은 비록 화엄(華嚴)의 육상(六相)에 의거하여 종지(宗旨)를 천명하기는 했으나, 고원(高遠)에게 독립하여 세정(世情)에 상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법안종(法眼宗)이다.

 

육상(六相) : 화엄종(華嚴宗)에서, 만유(萬有)의 모든 법에 낱낱이 6종(種)의 모양이 있음을 말한 것인데, 그 내용은 여기서 생략한다.

 

희천(希遷)을 종주로 한 또 다른 한 파는 개조(開祖)가 약산(藥山) 유엄(惟儼)인데, 유엄은《보경삼매(寶鏡三昧)》ㆍ《오위현결(五位顯訣)》ㆍ삼종루진법(三種漏盡法)을 담성(曇晟)에게, 담성은 이를 동산(洞山)의 오본대사(悟本大師) 양개(良价)에게, 양개는 이를 조산(曹山)의 원증대사(元證大師) 본적(本寂)에게 전수하여 다시 크게 떨쳤으니, 이것이 바로 조동종(曹洞宗)이다.

 

법안종(法眼宗)은 두 번 전수하여 연수(延壽)에 이르러 고구려(高句麗)에 흘러들어왔고, 앙산(仰山)은 세 번 전수하여 파초대사 철(芭蕉大士徹)에 이르렀는데,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 944~947) 연간에 이르러서는 없어져 계승되지 못하였다. 운문종(雲門宗)ㆍ조동종(曹洞宗)도 비록 근근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마치 실낱처럼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임제종(臨濟宗) 하나만은 방대한 조직으로 무궁한 발전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성하니,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이른바 선종(禪宗)이다.

 

율종(律宗)은 하나같이 남산종(南山宗)을 종주로 삼았다. 진오 지국율사(眞悟智國律師) 윤감(允堪)이 저술한 《회정기(會正記)》등의 글은 실로 육십가(六十家)의 석의(釋義) 외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이 바로 회정종(會正宗)이다. 대지율사(大智律師) 원조(元照)에 이르러서는 다시 《법화경》의 개현(開顯)에 대한 원의(圓義)를 분별하여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를 지어 여기에도 회정설(會正說)이 있기는 하나 《회정기》와 같지는 않으니, 이것이 바로 자지종(資持宗)이다.

 

이 2개의 종파가 지금 비록 병존하고는 있으나 학자들이 대부분 자지종을 따르니,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이른바 율종(律宗)이다. 대저 불도라는 것이 처음부터 2개의 문(門)이 있는 것은 아니나, 석가의 시대가 멀어지면서부터 교원(敎源)도 멀어져서 유파(流派)가 더욱 여러 개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래서 조사(祖師)가 다르고 지도함이 달라 각기 종파를 세워 서로가 모순을 만들어낸다. 선종은 교종이 명상(名相)에 침체한다고 비방하고, 교종은 선종이 공적(空寂)에 치우친다고 비방하며, 율종의 경우는 비록 선ㆍ교가 다같이 갖는 바이기는 하지만 취사(取捨)가 각기 다르다. 선ㆍ교의 학자들까지도 각기 이의(異議)를 내세워 서로 더 나은 점을 선택하니, 하나는 저쪽, 하나는 이쪽이 되어 서로 통하지 않는다.

 

개현(開顯) : 개권현실(開權顯實)의 준말로, 권교(權敎)인 방편을 치우고 진실한 교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석가의 일대(一代) 50년 중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까지의 40여 년 동안은 방편교(方便敎)를 진실한 듯이 말했을 뿐 방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법화경》을 설하면서부터 “3승교는 방편이고 1승교는 진실이다.” 하여, 방편을 치우고 진실을 나타냈던 것이다.

 

명상(名相) : 모든 사물에는 명과 상이 있는데, 귀에 들리는 것을 명, 눈에 보이는 것을 상이라 한다. 다 같이 헛된 것으로 법(法)의 실성(實性)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나, 범부(凡夫)들은 이 명상을 분별하여 여러 가지 망혹(妄惑)을 일으킨다.

 

공적(空寂) : 우주(宇宙)에 만사 만물의 형상이 있는 것, 또는 형상이 없는 것 모두가 실체(實體)는 공무(空無)하여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나위가 없다는 말이다.

 

교종(敎宗)으로 말하자면, 자은(慈恩)은 3개의 교를 세웠고, 천태(天台)는 4개의 교로 나누었고, 현수(賢首)는 또 5개의 교로 만들었다. 선종으로 말하자면, 혜능(慧能)과 신수(神秀)가 다같이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받았지만, 혜능은 돈종(頓宗)이, 신수는 점종(漸宗)이 되었고, 도일(道一)과 신회(神會)가 다같이 혜능에게서 법을 받았지만, 도일은 회양(懷讓)에게서 밀계심인(密契心印)을 받았고, 신회는 지해(知解)에서부터 회복되었으니, 그 서로 다름이 이와 같다.

 

심지어 천태종 같은 것은 교종의 1파인데도 사명(四明) 지례(知禮)와 고산(孤山) 지원(智圓)의 성선설(性善說)ㆍ성악설(性惡說)이 마치 빙탄(氷炭)처럼 서로 부합되지 않으며, 임제종은 선종의 1파인데도 혹은 방(棒)으로, 혹은 할(喝)로 하다가, 횡천(橫川)에 이르러서는 다시 게송(偈頌)으로 하여, 마치 모난 것과 둥근 것이 서로 걸맞지 않는 것과 같아서, 지파(支派)들이 서로 어긋나고 논설(論說)이 수다하여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하였다.

 

혹은 …… 할(喝) : 방(棒)은 몽둥이요, 할은 큰소리로 꾸짖는 것. 선가(禪家)의 문답(問答)에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큰소리로 꾸짖는 수행을 말하는데, 방은 덕산(德山 : 당〈唐〉 때의 고승 견성선사〈見聖禪師〉)에서 비롯되었고, 할은 임제(臨濟)에서 비롯되었다.

 

《초목자(草木子)》의 불론(佛論)에 “석가가 청련화(靑蓮華)를 꺽어 보이자 가섭(迦葉)이 미소를 띠었다. 이로부터 기미(機微)를 보여 바로 달마(達摩)에 전수되었는데, 말을 하여서 능히 작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이 밖에는 별다른 종지가 없다. 이로부터 선종은 다 이를 초조(初祖)로 삼았다.” 하였다.

 

달마는 곧 동토(東土 중국을 가리킴)의 초조인데, 그는 말하기를 “사람의 성정은 본디 착하기 때문에 애써 수행하지 않아도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하였다.

 

가섭(迦葉) …… 띠었다 :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할 때 법좌(法座)에 올라 연꽃을 들고 말없이 대중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 응하는 이가 없었는데,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의 참뜻을 깨닫고 슬며시 웃었다. 그러자 석가가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이 있으니, 이제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하였다. 이는 곧 이심전심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불설(佛說)에 “욕계(欲界)에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번뇌를 여의는 것을 선(禪)이라 하고, 집착도 없고 의지함도 없이 항상 광명(光明)이 앞에 나타나는 것을 선이라 하고,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법의 근본을 깨닫는 것을 선이라 하고, 입으로는 도를 잘 말하면서 실제의 얻음이 없는 것을 하마선(蝦蟆禪)이라 하고, 입으로 설법하지 못하는 자를 아양선(啞羊禪)이라 하고, 중도 아니요 속도 아닌 자를 조서선(鳥鼠禪)이라 하고, 외모는 중이나 마음이 속된 자를 독거사(禿居士)라 한다.” 하였다.

 

회광반조(回光返照) : 선종(禪宗)에서 쓰는 말로 언어(言語)나 문자(文字)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회고 반성(回顧反省)하여 바로 심성(心性)을 조견(照見)하는 것을 말한다.

 

하마선(蝦蟆禪) : 두꺼비는 뛰는 것만 알고 다른 활동을 알지 못하므로, 선(禪)하는 사람으로 한쪽에만 고집하고 자유로운 행적이 없음을 꾸짖는 말이다.

 

아양선(啞羊禪) : 아양은 벙어리 염소. 지극히 어리석은 중이 선악의 계율(戒律)을 분별치 못하여 죄를 범하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것을, 죽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염소에게 비유한 것이다.

 

조서선(鳥鼠禪) : 조서는 박쥐. 파계(破戒)한 비구(比丘)를 비유하는 말. 즉 중도 아니고 속인(俗人)도 아니라는 뜻이다.

 

독거사(禿居士) : 독은 까까머리라는 뜻이요, 거사는 집에 있는 남자 신도(信徒)란 뜻으로, 계율은 파괴하고 법을 지키지 못하는 비구를 말한다.

 

청(淸) 나라 장조(張潮)의 《주대기연(奏對機緣)》제사(題辭)에 “부처가 입적(入寂)할 무렵에 정법안장(正法眼藏)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대가섭(大迦葉)에게 부촉(付囑)하고 아울러 아난(阿難)에게 명하여 가섭을 도와서 법을 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전전하여 달마(達摩)에 이르러서는 그가 중국에 들어와 9년 동안 면벽(面壁)하였다. 2조(祖) 혜가(慧可)는 눈[雪] 위에 서서 팔목을 끊자 달마가 드디어 의발(衣鉢)을 그에게 부촉해 주었고, 3조ㆍ4조ㆍ5조ㆍ6조는 각기 의발을 전수하지 않고 법게(法偈)만 전수하였는데, 그 후 몇 번 전수된 뒤로는 위앙(潙仰)ㆍ임제(臨濟)ㆍ조동(曹洞)ㆍ운문(雲門)ㆍ법안(法眼) 등 5개의 종으로 나누어져 모두 세상에 전하여졌다. 그러다가 근대에는 임제종ㆍ조동종만이 존재하는데, 임제종의 한 지파(支派)가 더욱 성하다.” 하였다.

 

면벽(面壁) : 벽을 향하여 좌선(坐禪)하는 것. 달마(達磨)가 중국에 와서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에 들어가 경전(經典)을 강설하지도 않고 9년 동안 석벽(石壁)을 향하여 좌선을 하였다.

 

혜가(慧可) …… 끊자 : 혜가는 선종(禪宗)의 제2조(祖)가 되었는데, 그가 숭산 (嵩山) 소림사(小林寺)로 달마(達磨)를 찾아가서 눈 속에 앉아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왼팔을 끊어 그의 굳은 뜻을 보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크게 깨달았다.

 

나는 상고하건대, 불도가 비록 이단(異端)이기는 하지만, 그 교 가운데는 곧 성인의 말들이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화장세계(華藏世界)는 원만(圓滿)하고 광대(廣大)하여, 아무 흠결도 없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두루 비추어서, 상(相)이 아니면서도 상이 되고 연(緣)이 아니면서도 연이 되며, 같은 것이 아니면서도 같고, 다른 것이 아니면서도 다르니, 진실로 사유(思惟)를 잘하면 곧 성체(聖諦)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왜 교(敎)와 선(禪)ㆍ율(律)이 서로 다르게 나누어졌으며, 또 어째서 서로 모순을 만들어 가면서 전문적인 것을 내세우며, 또 어째서 무기를 들고 공격하여 그 사설(師說)을 배반하는가. 그러나 장안(長安)에 들어온 자들 가운데 그 길은 동서와 남북으로 다르지만 그 종말에 이르러서는 다 같이 선(善)에 요점을 두고 있으니, 배우는 이들은 그 취향에 따라 분류된다는 점을 삼가야 할 것이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 광명변조(光明遍照)의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곧 부처의 신광(身光)ㆍ지광(智光)이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법계에 두루 비추어 원명(圓明)한 것을 의미한다.

 

화장세계(華藏世界) :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준말로, 석가모니불의 진신(眞身)인 비로자나불의 정토(淨土). 가장 아래는 풍륜(風輪), 풍륜 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고, 향수해 가운데 대연화(大蓮花)가 있으며, 이 연화 안에는 무수한 세계를 포장(包藏)하고 있다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곧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가리키는데,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을 참고 견디며, 또 이 국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히 중생들 사이에 참고 견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에서 감인 세계(堪忍世界)라고도 한다.

 

사유(思惟) :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자세히 생각하는 수행을 말한다.

 

그 교중에는 나물만 먹으면서 마두(魔頭)를 섬기는 것이 있는데, 송(宋) 나라 때 방납(方臘)이라는 자가 이 법을 가지고 민중을 고혹시켰다. 이것이 장각(張角)에게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맨 처음 복건성(福建省)에서부터 시작되어 온주(溫州)에 흘러들어온 다음 드디어 이절(二浙 절강성(浙江省)의 동부와 서부)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들이 사람을 현혹시키는 데는, 역시 고약(蠱藥)과 부수(符水)를 사용하고 《금강경(金剛經)》을 외며, 색상(色相)으로써 자아(自我)를 본다는 설로 사도(邪道)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신(神)이나 불(佛)을 섬기지 않고 해[日]ㆍ달[月]에만 예배(禮拜)하여 이를 진불(眞佛)로 여겼는데, 이것을 금강선(金剛禪)이라 하였다. 또한 방술(房術)과 환술(幻術)을 잘하는 그들은, 인생(人生)은 괴로운 것이므로 그를 죽여 주는 것이 곧 그를 괴로움에서 구제하는 길이라 여겨 이를 도인(度人)이라 하는데, 도인을 많이 한 사람은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네 가지 종류의 사이비 불교가 있는데, 하나는 회회교(回回敎)이고, 하나는 번승(番僧)의 연설환희불교(演揲歡喜佛敎)이고, 하나는 서장(西藏)의 황교(黃敎)이고, 하나는 서장의 홍교(紅敎)이다.

 

회회교는 하늘을 섬기면서도 불도(佛道)와 비슷하니, 이것이 곧 석씨(釋氏)의 이교(異敎)로, 마합마(馬哈麻)를 초조(初祖)로 삼는데 역산(曆算)에 능하며,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여자 거느리는 것은 일반 사람과 똑같이 한다. 연설환희불교는, 번승(番僧)이 사람과 가축(家畜)을 때려잡아 그의 피를 부처의 입술에 발라 환희불(歡喜佛)이라 하고, 남녀가 발가벗은 채 서로 끌어안고 음란한 짓을 하는 모양의 불상을 만들고는 사람을 죽여 골절(骨節)로 수주(數珠)와 음기(飮器)를 만들어 주육(酒肉)을 먹고 음란한 짓을 하며, 여러 가지로 참혹한 해독을 끼치면서, 자칭 마후라불(摩睺羅佛)이라 한다. 이 교가 곧 불교 중에 가장 음란하고 악한 것이니, 곧 불교의 외도(外道)이다. 황교(黃敎)는 전장(前藏)의 종객파(宗喀巴)를 초조(初祖)로 삼고 대보법왕(大寶法王)이 그 교주(敎主)가 되어 누른 색깔의 옷과 누른 관(冠)을 썼기 때문에 황교라 이름하였다. 홍교(紅敎)는 후장(後藏)의 다이제(多爾濟)를 개조(開祖)로 삼고 소보법왕(小寶法王)이 그 교주가 되어, 붉은 옷에 붉은 모자를 썼기 때문에 홍교라 이름하였다.

 

대보법왕과 소보법왕이 세상에 전생(轉生)하여 교대해 가면서 서로 사제(師弟)가 되어 반선(班禪)이라 호칭하였는데, 모두가 환술(幻術)이 있었고, 체상(體相)이 마치 도금(鍍金)해 놓은 것 같았다. 서번(西番)에서는 이를 활불(活佛), 또는 성승(聖僧)으로 일컬었다.

 

홍교는 자기네 도(道) 가운데서도 벌써 외도(外道)가 되었다. 심지어는, 노사고달이(魯思古達爾)의 당(黨)이 도량(道場)을 만들어 색단파(色丹巴)를 초조(初祖)로 삼고, 찰달극(札達克) 곧 저주술(咀呪術)이다.ㆍ분포이(奔布爾) 곧 살육술(殺戮術)이다. 를 범행(梵行 맑고 깨끗한 행실)으로 여기기까지 하여, 그 해독이 더욱 심하였다. 촉침(促浸) 구명(舊名)은 대금천(大金川)이다. 과 찬랍(攢拉) 구명은 소금천(小金川)이다. 의 추장(酋長)과 도중(徒衆)들도 모두 라마(喇嘛)의 명(命)에 따랐다. 라마는 중국 말로 번승(番僧)인데, 그들은 전경루(傳經樓)와 연설벽(演揲壁) 라마사(喇嘛寺)의 동서벽(東西壁)을 말한다. 에 모두 음설(淫褻)하고 불초(不肖)한 상(狀)을 만들어 놓고 이를 환희불(歡喜佛)이라 하였다. 달사랍(達思拉)은 홍교가 소지하는 경(經) 이름이다. 홍교는 가장 탐내고 성내고 살육을 자행하는 교이다. 그들은 청 성조(淸聖朝) 53년에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었는데, 서장(西藏)을 정복한 다음 그들의 경전을 불태워버렸다. 고종(高宗) 건륭(乾隆) 45년(경자)에 황자(皇子)를 보내어 황교(黃敎)를 맞아오게 하였는데, 대보법왕(大寶法王) 반선(班禪)이 건륭 46년(신축) 열하(熱河)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서장(西藏)의 홍교와 황교의 유래에 대한 변증설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불법의 동래(東來)

 

불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내력에 대해, 법안종(法眼宗)이 두 번 전하여 연수(延壽)에게 이르러서 고구려(高句麗)에 흘러 들어왔다는 사실로 본다면, 고구려에 가장 먼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임신)은 바로 동진(東晉) 열종 효무제(烈宗孝武帝)의 함안(咸安 371~372) 2년이요, 진왕(秦王) 부견(苻堅)의 건원(建元 365~385) 8년이다. 이 해에 진왕이 부도(浮屠) 혜순(惠順) 편에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보내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법안종이 두 번 전하여 고구려에 흘러들어왔다는 것인가보다. 영류왕(榮留王) 8년(을유)은 당 고조(唐高祖) 무덕(武德 618~626) 8년인데, 이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佛)ㆍ노(老)의 법을 구해왔으니,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전말이다.

 

신라(新羅)로 말하자면, 법흥왕(法興王) 12년(을사)은 양 고제(梁高帝) 보통(普通 520~527) 6년이다. 이해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오자 왕이 불교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군신(群臣)이 믿지 않으므로, 근신(近臣)인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사람이 “신(臣)을 목베어 군신의 의논을 바로잡으소서.” 하고 왕께 주청하였으니, 그의 뜻은 본디 자기 하나가 희생되어서 불도를 일으키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목을 베려 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목에서 마치 젖과 같은 하얀 피가 솟아나오므로 뭇사람들이 감히 비난하거나 훼방하지 못하였다. 법흥왕 15년(무신)은 양 고제의 대통(大通 527~529) 2년인데, 이해에 처음으로 불법이 행해졌다.

 

진흥왕(眞興王) 10년(기사)은 양 고제의 태청(太淸 547~549) 2년인데, 이해에 양 나라에서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왔고, 12년(신미)은 양 태종(梁太宗)의 대보(大寶 550~551) 2년인데, 이해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거행하였으며, 14년(계유)은 양 세조(梁世祖)의 승성(承聖 522~555) 2년인데, 이해에 월성(月城)의 신궁(新宮)을 절로 만들었고, 26년(을유)은 후량(後梁) 세종(世宗)의 천보(天保 562~585) 4년이요, 진 세조(陳世祖) 천가(天嘉 560~565) 6년인데, 이해에 진 나라에서 중[僧] 편에 불경을 보내왔다.

 

팔관회(八關會) : 고려 때의 불교 의식(儀式). 음력 11월 15일에는 개경(開京)에서, 10월에는 서경(西京)에서 거행했는데, 주로 천령(天靈)ㆍ오악(五岳)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 등 토속신(土俗神)에게 제지내는 의식이었다.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스스로 법운왕(法雲王)이라 호칭하였고, 왕비 역시 비구니(比丘尼)라 호칭하였다. 진평왕(眞平王) 35년(계유)은 수양제(隋煬帝)의 대업(大業 605~617) 9년인데, 이해에 수나라에서 왕세의(王世儀)를 우리나라 황룡사(黃龍寺)에 보내어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는 ‘애장왕(哀莊王) 8년(807)에 왕명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거제도(巨濟島)에서 판각하여, 그 판(版)은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저장하였다.’ 하나 이는 와전(訛傳)이다. 애장왕 7년(병술)에는 불사(佛寺)를 새로 창건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것이 신라 시대 불법의 전말이다.

 

백제(百濟)로 말하자면, 침류왕(枕流王) 원년(갑신)은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376~396) 9년인데, 이해에 호승(胡僧) 난타(難陀)가 진 나라로부터 와서 불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고, 성왕(聖王) 19년(신유)은 양 고조(梁高祖) 대동(大同 535~546) 7년인데, 이해에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열반경의(涅槃經義)》를 표청(表請)하였다.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 7년(911)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는데, 이해가 곧 주량(朱梁 즉 후량(後梁)을 가리킨다)의 건화(乾化 태조의 연호, 911~914) 원년이다. 궁예는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는 동시에 큰아들은 청동보살(靑童菩薩), 막내아들은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칭하고, 밖에 나갈 때는 동녀(童女)들을 시켜 번개(幡蓋)와 향화(香火)를 받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 또 비구승(比丘僧) 2백여 명에게 명하여 뒤를 따르면서 범패(梵唄)를 부르게 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1년(918)에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치고 비로소 팔관회(八關會)를 거행하였으며, 2년(기묘)에는 도성(都城)에 10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4년(신사)에는 팔관회 잡기(雜技)를 정지시켰고, 8년(을유)에는 살던 집을 절로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현종(顯宗) 1년(경술)에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를 회복시켰고, 8년(정사)에는 또 살던 집을 절로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문종(文宗) 2년(무자)에는 백고좌 도량(百高座道場)을 내전(內殿)에 설치하였고, 6년(임진)에 또 설치하였으며, 13년(기해)에는 백성들 중에 아들 셋을 둔 경우에는 아들 하나는 중으로 만들 것을 규정하였고, 18년(갑진)에는 인왕 도량(仁王道場)을 내전에 설치하였다.

 

백고좌(百高座) : 법회(法會) 이름. 사자좌(獅子座) 백을 만들고 큰 스님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법회이다.

 

순종(順宗) 원년(1083)에 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선종(宣宗) 1년(갑자)에 비로소 승과(僧科)를 설치하였으며, 2년(을축)에는 백좌도량을 내전에 설치한 다음 비로소 대가(大駕) 앞에서 불경을 받들고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4년(정묘)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어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였고, 6년(기사)에는 13층(層) 금탑(金塔)을 내전에 세우고 아울러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다. 예종(睿宗) 1년(갑오)에 백좌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4년(정유)에도 백좌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으며, 7년(경자)에는 송(宋) 나라로부터 불골(佛骨)을 맞아다가 금중(禁中)에 들여왔다. 인종(仁宗) 13년(1135)에 중 묘청(妙淸)의 반란(叛亂)이 있었다. 명종(明宗) 1년(1171)에 백좌도량을 내전에 설치하였고, 11년(신축)에는 인왕 도량(仁王道場)을 내전에 설치하였으며, 16년(병오)에는 《인왕경(仁王經)》을 내전에서 강(講)하였다. 충선왕(忠宣王) 원년(1308)에는 팔관회를 정지시켰다.

 

승과(僧科) : 국가에서 승려(僧侶)에게 보이던 고시(考試) 제도. 고려 광종(光宗) 때에 이 제도가 창시되어 선종(宣宗) 때는 문과(文科)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되었다.

 

경찬회(慶讚會) : 불상(佛像)ㆍ경전(經典)을 맞이하거나, 절ㆍ탑 등의 건축을 마쳤을 때에 거행하는 법사(法事)로, 곧 그 성공을 경축하는 것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세종(世宗) 1년(1419)에 오교(五敎)를 혁파하여 선(禪)ㆍ교(敎) 양종(兩宗)만 남겨 두었다. 세조(世祖) 10년(1464)에 성중(城中)의 중부(中部)에 있는 경흥방(慶興坊)에다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발행하였다. 성종(成宗) 8년(정유)에 축수재(祝壽齋)를 혁파하고, 23년(임자)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였다. 중종(中宗) 7년(임신)에는 원각사를 철폐하고 선ㆍ교 양종을 혁파하였으며, 11년(병자)에는 기신재(忌辰齋)를 혁파하였다. 명종(明宗) 6년(1551)에 양종의 선과(禪科)를 혁파했다가 12년(정사)에 다시 설치하고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귀양보냈는데, 이는 보우가 불사(佛事)를 널리 벌여 세상을 미혹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오교(五敎) : 우리나라 불교의 각 종파를 총칭하던 말. 소승교(小乘敎)ㆍ계율교(戒律敎)ㆍ법상교(法相敎)ㆍ밀교(密敎)ㆍ원교(圓敎)인데,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도승법(度僧法) : 승니(僧尼)가 출가(出家)할 적에 나라에서 허가증을 발급해 주던 제도. 이것은 본디 중국에서 세금을 면하기 위하여 출가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 폐단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였었다.

 

기신재(忌辰齋) : 조상의 기일(忌日)에 불공을 드려 그 명복을 비는 일이다.

 

선조(宣祖) 25년(임진)에는 승통(僧統)을 두었는데, 이는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중 휴정(休靜)을 불러 승군(僧軍)을 모집하게 한바, 휴정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고 또 격문(檄文)을 돌려 관동(關東)의 유정(惟政),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승군을 모집하여 성원(聲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후로는 8도(道)의 사찰(寺刹)에 모두 승군이 있었는데, 남한(南漢)ㆍ북한(北漢)ㆍ화성(華城)ㆍ밀양(密陽) 등지의 사찰에 있는 중들이 총섭(摠攝)이나 승장(僧將)이 되어 승군을 영솔하였다. 이것이 조선조 시대 불교 연혁(沿革)의 대략이다.

 

승통(僧統) :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승직(僧職)의 하나. 총섭(摠攝), 또는 섭리(攝理)라고도 한다.

 

불경(佛經)

 

송(宋)의 삼조예문지(三朝藝文志)에 “당(唐) 나라 개원(開元 현종(玄宗)의 연호, 713~741) 연간의 석장(釋藏) 목록은 모두 5천 48권이고, 정원(正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785~805) 연간의 석장 목록은 또 2백 75권으로 되어 있는데, 석전(釋典)에 대한 서적은 있지 않다. 황조(皇朝 송(宋) 나라를 이름)에 이르러 다시 번역(飜譯) 사업을 벌인바 태평흥국(太平興國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976~983) 초기에서 지도(至道 송 태종의 연호, 995~997) 2년에 이르기까지 2백 39권을 번역하였다. 다시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1008~1016) 4년에 이르기까지 1백 75권을 번역하였는데, 윤문관(潤文官) 조안인(趙安仁) 등이 새 목록을 편찬하여 대중상부의 법보(法寶)로 삼았다. 함평(咸平 송 진종의 연호, 998~1003) 초기에는 운승(雲勝)이 조서를 받고 《장경수함색은(藏經隋函索隱)》6백 60권을 편찬, 임금의 조서까지 끼워 넣고, 당 나라 정원(正元) 연간 이후로 권(卷)의 끝 부분에 붙여진 모든 장경(藏經)을 더 보탠 다음 이를 아울러 모각(摹刻)하게 하였는데, 유안인(劉安仁)이 또 나누어《대종묘각비전(大宗妙覺祕銓)》이라 이름하고, 진종(眞宗)의 《법음집(法音集)》에서 논(論)ㆍ송(頌)ㆍ찬(贊)ㆍ시(詩)만을 뽑아 3권으로 만들어 《법음지요(法音旨要)》라 이름하여, 이를 간행 반포하였다. 천희(天禧 송 진종의 연호, 1017~1021) 말엽에 이르기까지 또 70권을 번역하였는데, 대승경(大乘經)이 3백 34권이고, 대승률(大乘律)이 1권, 대승론(大乘論)이 29권, 소승경(小乘經)이 81권, 소승률(小乘律)이 5권, 서방성현집(西方聖賢集)이 29권이다.” 하였다.

 

《영녕원윤장기(永寧院輪藏記)》에 “석씨(釋氏)의 서적이 5천 48권인데, 그 조목은 논(論)ㆍ계(戒)ㆍ참(懺)ㆍ찬(贊)ㆍ송(頌)ㆍ명(銘)ㆍ기(記)ㆍ서(序)ㆍ녹(錄)으로, 중들이 만들어 놓은 데서 섞여나온 것이 태반을 차지하고, 경(經)으로 일컬어진 것은 모두 1천여 권이며, 그 가운데서 중들이 외고 읊는 것은 6~7품(品)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호응서(胡應瑞)의 《필총(筆叢)》에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에《불법록(佛法錄)》은 첫째 계율(戒律), 둘째 선정(禪定), 셋째 지혜(智慧), 넷째 의사(疑似), 다섯째 논기(論記)로, 모두 5천 4백 권이고, 4백 59질(帙)이다.’ 했다.”하고, 또 말하기를 “석장(釋藏)은 당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5천 48권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 수천여 권이 증가되었다. 육자연(陸子淵)이 이르기를 ‘지금의 장경(藏經)은 응당 옛날 그 숫자대로가 아니다.’ 하였으니, 아마 그 동안에 더 보탠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서역(西域)의 경목(經目)에 비교한다면, 겨우 천백 분의 1밖에 안 된다. 다만《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는 6천여 권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도리어 그때보다 숫자가 줄었으니, 이것으로 보아 번역된 숫자가 육조(六朝) 시대보다 줄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당(唐)ㆍ송(宋) 때에 이르러서는 선설(禪說)이 우세하고 경전(經典)은 조금 열세를 보였다.” 하였다.

 

불서(佛書)를 내전(內典)이라 하는 데 대해서는, 송 나라 때의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상고해 보니,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하여 “개성(開成 당 문종(唐文宗)의 연호, 836~840) 2년 2월에 왕언진(王彦進)이 왕명을 받들어 《내전목록(內典目錄)》12권을 만들었다. 내전은 대저 석가의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수백의 나한(羅漢), 그리고 매양 설법을 듣던 자 수천 명이 그 당시 부처가 논설해 놓은 말들을 모두 패다라(貝多羅) 잎에 써서 정리해 둔 것으로, 서로 전해 오면서 경문(經文)이라 이름하였다.” 했다. 이것이 곧 불경(佛經)의 본서(本書)이다.

 

불교의 시문(詩文)도 각기 이름이 있다. 양자(楊子)의 《치언(巵言)》에 “불시(佛詩)를 게(偈), 불문(佛文)을 별(莂)이라 한다.” 하였고, 유희(劉熙)의 《석명(釋名)》에는 “별(莂)은 별(別)이니 중앙에 큰 글씨를 써서 가운데를 갈라 구별한다는 뜻이다.” 하였으며, 《속설부(續說郛)》에는 포형(包衡)이 말하기를 “불서(佛書)는 1조(條)를 1칙(則)이라 한다.” 하였는데, 홍경로(洪景盧)의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도 이를 인용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불서(佛書)를 1박(縛)이라고 한다.” 하였고, 서계해(徐季海)는 불경(佛經)에 쓰기를 “위로 겹겹이 쌓여서 범협(梵夾 즉 패엽경(貝葉經)을 말함)과 같다.” 하였으며, 양신(楊愼)의 《병탑수환불전(病榻手欥佛典)》에는 “다라수엽(多羅樹葉)에 쓴 글이 모두 2백 40박(縛)이 있다.” 하였으니, 박(縛)은 옛날 견(絹) 자로, 곧 권(卷)과 같다.

 

불경(佛經)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경장(經藏)이 모두 35부(部)에 5천 48권이다.

 

《열반경(涅槃經)》1부가 7백 48권인데 또 하나는 4백 권으로 되어 있고, 《보살경(菩薩經)》1부가 1천 21권인데 또 하나는 3백 60권으로 되어있다. 《허공장경(虛空藏經)》1부가 4백 권인데 또 하나는 허공(虛空)을 영허(靈虛)로 하여 20권으로 되어 있고, 《수능엄경(首楞嚴經)》1부가 1백 1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은의경대집(恩意經大集)》1부가 50권인데 또 하나는 40권으로 되어 있고, 《결정경(決定經)》1부가 1백 40권인데 또 하나는 40권으로 되어 있다. 《보장경(寶藏經)》1부가 45권인데 또 하나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화엄경(華嚴經)》1부가 5백 권인데 또 하나는 81권으로 되어 있다. 《예진여경(禮眞如經)》1부가 9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고 《대반야경(大般若經)》1부가 9백 16권인데 또 하나는 6백 권으로 되어 있다. 《대광명경(大光明經)》1부가 3백 권인데 《대광명경》을 또 하나는《대광경(大光經)》으로 하여 30권으로 되어 있고,《미증유경(未曾有經)》1부가 1천 1백 10권인데 또 하나는 5백 30권으로 되어 있으며,《유마경(維摩經)》1부가 1백 7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삼론별경(三論別經)》1부가 2백 70권인데 또 하나는 42권으로 되어 있고, 《금강경(金剛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1권으로 되어 있다. 《정법론경(正法論經)》1부가 1백 20권인데 또 하나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불본행경(佛本行經)》1부가 8백 권인데 또 하나는 1백 16권으로 되어 있다. 《오룡경(五龍經)》1부가 32권인데 또 하나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보살계경(菩薩戒經)》1부가 1백 16권인데 또 하나는 60권으로 되어 있다. 《대집경(大集經)》1부가 1백 30권인데 《대집경》을 또 하나는 《대과경(大果經)》으로 하여 30권으로 되어 있고, 《마갈경(磨竭經)》1부가 3백 30권인데 하나는 《마갈경(磨蝎經)》으로, 또 하나는 《마갈경(磨喝經)》으로 하여 1백 40 권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法華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10권으로 되어 있고, 《유가경(瑜珈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상보경(常寶經)》1부가 2백 60권인데 또 하나는 1백 70권으로 되어 있고, 《서천론경(西天論經)》1부가 1백 30권인데 또 하나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승기경(僧祇經)》1부가 1백 56권인데 또 하나는 1백 10권으로 되어있고, 《불국잡경(佛國雜經)》1부가 1천 9백 50권인데 또 하나는 1천 6백 38권으로 되어 있다. 《기신론경(起信論經)》1부가 1천 권인데 또 하나는 50권으로 되어 있고, 《대지도경(大智度經)》1부가 1천 80권인데 또 하나는 90권으로 되어 있다. 《보위경(寶威經)》1부가 1천 2백 80권인데 또 하나는 1백 40권으로 되어 있고, 《본합경(本閤經)》1부가 8백 50권인데 또 하나는 본(本)을 금(今)으로 하여 50권으로 되어 있다. 《정률문경(正律文經)》1부가 2백 권인데 또 하나는 10권으로 되어 있고, 《대공작경(大孔雀經)》이 2백 20권인데 또 하나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유식론경(唯識論經)》1부가 1백 권인데 또 하나는 10권으로 되어 있고, 《패함론경(貝含論經)》1부가 2백 권인데 또 하나는 《패함론경》을 《견함론경(見含論經)》으로 하여 10권으로 되어 있다.

 

당(唐) 나라 현장(玄奘)이 서역(西域)에서 삼장(三藏)을 얻어가지고 오다가 물에 빠뜨려 그를 돌 위에 펼쳐 놓고 말렸는데, 책장이 돌에 붙으므로 그것을 떼 내다가 《본행경(本行經)》의 끝장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본행경》의 끝장이 지금까지 온전치 못하다. 그 때 《본행경》을 말리던 돌 위에 글자의 흔적이 그대로 돌에 박혀서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보유(補遺) 및 제가(諸家)의 찬술(纂述)은 다음과 같다.

 

《유교경(遺敎經)》ㆍ《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ㆍ《살달타경(薩怛陀經)》ㆍ《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ㆍ《패다파력차경(貝多婆力叉經)》ㆍ《준제경(準提經)》ㆍ《심지관경(心地觀經)》ㆍ《보은경(報恩經)》ㆍ《인과경(因果經)》ㆍ《다심경(多心經)》ㆍ《지장본원경(地藏本願經)》ㆍ《전등록(傳燈錄)》ㆍ《염송(拈誦)》ㆍ《십지론(十地論)》ㆍ《화정지(華亭智)》의《불조통기(佛祖統紀)》ㆍ석 행균(釋行均)의 《용감수경(龍龕手鏡)》3권ㆍ원중도(袁中道)의 《선문본초(禪門本草)》ㆍ《금강경구이(金剛經鳩異)》1권ㆍ김인서(金人瑞)의《염불삼매(念佛三昧)》ㆍ석 법현(釋法玄)의 《불국기(佛國記)》ㆍ양현지(揚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ㆍ단성식(段成式)의 《경락사탑기(京洛寺塔記)》ㆍ《미륵전비(彌勒傳碑)》ㆍ《석씨요람(釋氏要覽)》등이다.

 

우리나라의 보유(補遺)로는, 고려 시대 국사(國師) 의천(義天)이 새로 출간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신라 시대 석 원효(釋元曉)의 《삼매경소(三昧經疏)》, 석 의상(義湘)의 《법계도서추동기(法界圖書錐洞記)》, 원감국사(圓鑑國師)의 《어록(語錄)》, 요세(了世)의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 지눌(知訥)의《결사문(結社文)》ㆍ《상당록(上堂錄)》ㆍ《법어(法語)》ㆍ《가송(歌頌)》,고려 석 혜심(慧諶)의 《심요(心要)》, 혼구(混丘)의 《어록(語錄)》2권ㆍ《가송잡저(歌頌雜著)》2권ㆍ《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2권ㆍ《중편염송사원(重編拈頌事苑)》30권, 견명(見明)의《어록(語錄)》2권ㆍ《게송잡저(偈頌雜著)》ㆍ《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2권ㆍ《조파도(祖派圖)》2권ㆍ《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ㆍ《제승법수(諸乘法數)》7권ㆍ《조정사원(祖庭事苑)》30권ㆍ《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30권, 태고(太古)의 《어록(語錄)》, 원증국사(圓證國師)의 《어록》, 보제존자(普濟尊者)의《어록》, 나옹(懶翁)의 《삼가(三歌)》,《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1권, 일선(一禪)의《자기산보문(仔夔刪補文)》, 득통(得通) 함허당(涵虛堂)의 《현정론(顯正論)》1권ㆍ《원각경소(圓覺經疏)》3권ㆍ《반야경오가설의(般若經五家說誼)》1권, 의천(義天)의 《석원사림(釋苑詞林)》,《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등이 있다.

 

일본(日本) 중[僧]의 찬술(纂述)을 첨부하면, 유예(酉譽)의 《미타경주기(彌陀經註記)》,《만다라초방대기(曼陀羅抄方大記)》, 지증대사(智證大師)의 《연보(年譜)》, 최징(最澄)의 《법화경주(法華經注)》12권, 《금광명경주(金光明經注)》5권,《인왕경주(仁王經注)》3권,《무량의경주(無量義經注)》3권, 호명(護命)의 《연심장(硏心章)》, 공해(空海)의 《십주심론(十住心論)》, 의진(義眞)의《천태의집(天台義集)》 혜심승도(惠心僧都)의《일승요결(一乘要訣)》ㆍ《왕생요지(往生要旨)》ㆍ《아미타불경소(阿彌陀佛經疏)》ㆍ《대승대구사초(大乘對俱舍抄)》ㆍ《천태종이십칠의문(天台宗二十七疑問)》, 우다제(宇多帝)의 《광석류의(廣釋流義)》, 증현(證賢)의 《귀명본원초(歸命本願抄)》ㆍ《서요초(西要抄)》ㆍ《왕생지요결(往生至要訣)》,원명(圓明)의 《관경소기(觀經疏記)》10권, 응연법사(凝然法師)의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ㆍ《정토원류장(淨土源流章)》등이 있다.

 

【석각(石刻) 불경(佛經)】서장(西藏)의 석애산(石崖山)에 범서(梵書)로 된 대비주(大悲呪) 1편(篇)이 있는데, 청(淸) 나라 죽타(竹垞) 주이준(朱彝尊)의 석각불경기(石刻佛經記)에 “태원현(太原縣)의 서쪽 5리에 풍욕산(風峪山)이 있는데, 풍욕산 입구에는 풍혈(風穴 땅속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 구멍)이 있다. 서로 전하기를 ‘신(神)이 이르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면서 구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는 바람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다. 어떤 사람이 흙으로 그 구멍을 막고 그 안에 석불(石佛)을 세우고 또 석주(石柱)에 불경을 새겨서 빙둘러 세웠는데 그 석주가 모두 1백 26개나 된다. 그 후에 오랜 세월이 흘러 뱀 같은 것들이 그 안에 서식하므로, 아무리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병오년 3월에 내가 그 지방 사람을 대동, 횃불을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 그 서법(書法)을 자세히 살펴보니, 근대의 서법으로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주마다 3면(面)이 가려져서 그 전부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당대(唐代) 이전에는 서책(書冊)을 옮겨 필사하는 것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가죽이나 대, 또는 부들을 잘라 엮어서 필사하는 데 사용하였고, 불경도 산화(山花)나 패엽(貝葉)을 엮어 모아 책을 만들었으므로, 이 때문에 학자들이 평생토록 필사해 보았자 그 백분의 1도 다 써 모으지 못하였으니, 어려운 일이다. 석경(石經)은 채옹(蔡邕)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지러져 없어진 것이 많았다. 당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정담(鄭覃)ㆍ주지(周墀)가 다시 경조(京兆)에 새겼고, 후당(後唐) 장흥(長興 명종(明宗)의 연호, 930~933) 연간에는 다시 베껴 써서 이를 출간(出刊)하였다. 아주 어려운 방법을 버리고 아주 쉬운 방법을 선택한 이후부터 서적(書籍)이 날로 성하여졌으나 세상 학자들은 그 쉬운 점에 의한 경홀한 마음이 생겨 혹은 묶어만 놓고 보지 않으니 어찌 되겠는가. 이 어찌 날로 성해진다는 것이 도리어 날로 쇠해진 격이 아니겠는가.

 

북조(北朝) 시대 군신(君臣)들은 석씨(釋氏)를 숭봉하기 때문에 석각한 불경과 불상이 어느 곳에도 많이 있다. 태원(太原)에 사는 나의 친구 부산(傅山)이 평정현(平定縣)의 산중(山中)에 들어갔다가 잘못 벼랑길에 빠져들어, 어느 동굴 입구에서 석경(石經)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나 풍욕산에 있는 것 모두가 북제(北齊) 천보(天保 문선제(文宣帝)의 연호, 550~559) 연간의 글자였으며, 방산석경(房山石經)은 수(隋) 나라 때부터 새겨진 것인데, 그 서법이 매우 다양하다.

 

방산석경(房山石經) : 불전 석경(佛典石經)의 하나. 하북성(河北省) 평산현(平山縣)의 서북에 있는 방산(房山)에서 수(隋) 나라 때 정완법사(靜琬法師)가 맨 처음 불전을 돌에 새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후 도공(導公)ㆍ의공(儀公)ㆍ섬공(暹公)ㆍ법공(法公) 등이 서로 뒤를 이었고, 요(遼)의 통리대사(通理大師)에 이르기까지 이 작업이 존속되어 불전을 새긴 돌이 무려 2천 3백여 개에 달하였다.

 

지금 불궁(佛宮)에 있는 승도들이 작은 데는 백 명, 많은 데는 무려 수천 명이나 되지만, 불법의 요지를 통달한 자는 모두가 언어와 문자를 쓸데없는 것이라 하여, 불경을 강설하는 자도 이따금 차치해 버리고 탐탁잖게 여긴다. 아, 불설(佛說)이 비록 성인(聖人)의 말에는 어긋나지만, 모두가 그 나라 선생 장자(先生長者)의 말이다. 기왕 그 법을 쓰면서 그 선생 장자의 말을 죄다 버린다면 과연 어찌 되겠는가? 구경(九經)의 글은 서안부(西安府)의 학궁(學宮)에 있는데, 유자(儒者)들이 비록 다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를 얻어본 자는 다 아낄 줄을 안다. 그런데 풍욕산(風峪山)에 소장되어 있는 불경의 경우는, 승도들이 그렇게 많아도 누구 하나 돌아보는 자도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불도의 쇠미해진 것이 우리 유도(儒道)의 쇠미해진 것보다 더 심하지 않는가. 부산(傅山)이 내 말을 듣고, 그렇다고 하기에 이렇게 써서 기(記)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정조(正祖) 20년(병진)에 《은중경(恩重經)》을 옥석(玉石)에 새기라 명하였고, 또 어필(御筆)을 화성(華城)의 용주사(龍珠寺)에 소장하였는데, 이는 대개 현륭원(顯隆園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가리킨다)의 원찰(願刹)이기 때문이었다.

 

【전서(篆書) 불경(佛經)】 왕오(王鏊)의 《진택장어(震澤長語)》에 “송(宋) 나라 영은사(靈隱寺)의 중 막암도(莫菴道)가 전서 모으기를 좋아하여 《금강경(金剛經)》이 여러 체의 전서로 갖추어졌다. 이것이 꼭 다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변모되어 온 역대의 서법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패엽경(貝葉經)】 돈원거사(遯園居士 청(淸) 나라 장조(章詔)의 호)의 《제사기물기(諸寺奇物記)》에 “보광사(寶光寺)에 서역에서 가져온 패다파력차경(貝多婆力叉經)이 있는데, 패엽의 길이는 6~7촌(寸)쯤 되고 넓이는 그 절반이나 되고 잎사귀의 질은 마치 섬세한 어린 싹의 죽순(竹筍) 껍질과 같으며, 부드럽고 반지르르한 것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다. 불전(佛典)에 이르기를 ‘패다수(貝多樹)는 마가타국(摩伽陀國)에서 나는데, 크기는 6~7장(丈)이고 추운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으며 그 잎은 글자를 쓸 수 있다. 패다파력차는 번역하면 엽수(葉樹)이다. 경(經)의 글자는 크기가 마치 붉은 팥알만하고 횡서(橫書)로 쓰인 글씨는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 모양과 같은데, 무슨 경인지 알 수 없다. 겉에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꼭 끼워 놓았는데, 그 나무는 삼나무[杉] 같아서 무늬가 조밀 섬세하여 사랑스럽다.’ 했다.” 하였다.

 

또 《제사기물기》에 “이 패엽경은 6~7 백 년 동안을 지탱할 수 있다.” 했다.

우리나라 경기도(京畿道) 장단부(長湍府) 보봉산(寶鳳山)의 화장사(華藏寺)에 패엽경이 있는데, 고려(高麗)의 중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서역의 중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가서 사사(師事)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경이다. 이 경의 길이는 포척(布尺)으로 반 자쯤 되고 너비는 4촌(寸)쯤 되는데, 그 빛깔은 희고 무늬와 결은 마치 자작나무 껍질과 같으며 두께도 그와 같다. 한 잎에 6~7행(行)씩 범자(梵字)가 쓰여졌고 세자(細字)가 쓰여진 것까지 합하면 모두 천여 잎이나 되는데, 위아래 두 군데에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맸으며, 겉에는 양쪽으로 나무 조각을 대어 꼭 끼워 놓았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패다료게(貝多寮偈)에 상고해 보면 “패다는 천축(天竺)의 나무 이름이다. 그 정어(正語)로 다라(多羅)라 하는데, 이것이 곧 안수(岸樹)이다. 높이는 49척이고 녹음[蔭藹] 또한 그와 같으며, 잎의 너비와 길이는 마치 불설(佛舌)과 같고 빛이 윤택하여 물체가 비칠 정도여서, 금서(金書)ㆍ은서(銀書)ㆍ칠서(漆書) 등을 쓰기에 알맞다. 모든 아난총지(阿難總指)의 글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이 유사천(流沙川)의 상류(上流)에 있는데, 이 산에 다라수(多羅樹)가 많이 난다.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수국(隨國)에서 생산된 화피(樺皮)ㆍ패엽지(貝葉紙)ㆍ소백첩(素白氎)에 이 주문(呪文)을 썼다.” 하였고,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략소주(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注)》에 “불이(佛耳)가 마치 말린[捲] 화피와 같다.” 하였으니, 화피는 천축에도 생산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북관(北關) 막바지에 이 나무가 많이 있는데, 그 속껍질이 희고 깨끗해서 글씨를 쓸 만하다.

 

【불경(佛經)의 절운훈고(切韻訓詁)인 《용감수경(龍龕水鏡)》】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유주(幽州)의 중 행균(行均)이 불서(佛書) 중의 글자를 모아 절운훈고를 만드니, 모두 16만 자였다. 이를 4권으로 나누어 《용감수경》이라 호칭하였는데, 연(燕)의 중 지광(智光)이 여기에 서(序)를 썼다.” 하였고, 조씨(晁氏 송(宋) 나라 조 공무(晁公武)를 가리킴)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 “《용감수경》 3권은 거란(契丹)의 중 행균이 찬하였는데, 모두 2만 6천 4백 30자에 주석이 16만 3천 1백여 자이다.” 하였다.

 

【범아(梵雅)】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안구(安丘)에 사는 예부(禮部) 마응룡(馬應龍)이 《범아》 12권을 찬하였는데, 제1은 석언(釋言), 제2는 석의(釋義), 제3은 석상(釋相), 제4는 석교(釋敎), 제5는 석불(釋佛), 제6은 석보살(釋菩薩), 제7은 석성문(釋聲聞), 제8은 석외도(釋外道), 제9는 석인륜(釋人倫), 제10은 석천문(釋天文), 제11은 석지리(釋地理), 제12는 석조수(釋鳥獸)이다.” 하였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또한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는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신라(新羅) 시대 고찰(古刹)이다. 경판(經板)은 해인사 보안당(普眼堂) 남쪽과 북쪽 두 각(閣)에 저장되어 있는데, 모두 15칸[間]에다 옆이 3칸으로 도합 90칸이다. 한가운데 3층으로 시렁을 설치하고는 경판을 가득 꽂아 놓았는데, 경판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반이고 너비는 주척으로 2척이며, 변격(邊格)만 있고 오사란(烏絲欄)은 없다. 12항(行)에 항마다 14자(字)인데 글자의 크기는 마치 바둑알만하고, 글씨는 매우 해정하나 별로 취할 만한 것은 없다. 경판은 모두 옻칠을 하였는데 별로 윤이 나지 않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銅]를 얇게 올려 장정(裝釘)하였다.

 

변격(邊格) : 책지(冊紙)의 맨 가에 굵게 둘러 친 선(線)을 말한다.

오사란(烏絲欄) : 책지(冊紙)의 맨 갓줄을 제외한 한가운데의 자잘한 검은 선을 가리킨다.

 

《고적지(古籍志)》에 상고해 보면 “신라 경장왕(景莊王) 때에 합천(陜川)의 이서(里胥 촌락의 하급관리)인 이거인(李居人)이 명부(冥府 저승)에 들어가 삼목인(三目人)을 만나 염왕(閻王)에게 발원(發願)하고 이승[陽界]에 돌아와 왕에게 고하여, 왕의 명으로 거제도(巨濟島)에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판각하여 해인사에 옮겨 저장했다.”고 하였으나 그 설이 황당무계하여 믿기가 어렵다.

 

《경목(經目)》 3권이 있는데 천(天) 자에서 시작하여 동(洞) 자에 이르렀고, 각 함(函)은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婆羅密多經)》 6백 권에서부터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1백 권까지인데, 모두 1천 5백 63부(部)에 6천 5백 29권이며, 인지(印紙)가 7천 7백 28첩(牒)인데, 첩마다 두 장(張)씩이다. 이 밖에도 베껴 쓴 것이 있다.

 

우리나라 세조(世祖) 때에 《절목(節目)》 1책을 탑인(搨印)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천순(天順 영종(英宗)의 연호, 1457~1463) 2년(무인)에 대장경 인쇄할 계획을 세웠다가 천순 3년(기묘) 2월에 비로소 일에 착수(着手)하여 그해 9월에 준공(竣工)하였는데, 계양군(桂陽君) 증(璔)ㆍ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 등이 감동관(監董官)이 되고, 판선종사(判禪宗事) 수미(守眉)ㆍ해인사(海印寺)의 주지(住持) 죽헌(竹軒)이 감무관(監務官)이 되어 정작 38만 5천 8백 95첩(貼)의 인지(印紙)를 들여서 대장경 50건(件)을 인쇄하여 그 중 47건을 다음과 같이 각 사찰(寺刹)에 나누어 저장하였다. 합천 해인사에 2건, 고령(高靈) 반룡사(盤龍寺)에 4건, 진주(晉州) 백암사(白巖寺)에 1건, 오대사(五臺寺)에 1건, 칠불사(七佛寺)에 1건, 응석사(凝石寺)에 1건, 성주(星州) 용연사(龍淵寺)에 1건, 안봉사(安峯寺)에 1건, 영산(靈山) 보림사(普林寺)에 1건, 밀양(密陽) 재악사(載岳寺)에 1건, 안동(安東) 백련사(白蓮寺)에 1건,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 1건, 중방사(中方寺)에 1건, 대둔사(大芚寺)에 1건, 경주(慶州) 천룡사(天龍寺)에 1건, 불국사(佛國寺)에 1건, 함양(咸陽) 군자사(君子寺)에 1건, 의령(宜寧) 보리사(菩提寺)에 1건, 영천(永川) 거조사(居祖寺)에 1건, 정각사(鼎脚寺)에 1건, 상주(尙州) 관음사(觀音寺)에 1건,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 1건, 지평(砥平) 상원사(上元寺)에 1건,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1건, 강진(康津) 만덕사(萬德寺)에 1건, 영암(靈巖) 도갑사(道岬寺)에 1건, 능성(綾城) 쌍봉사(雙峯寺)에 1건, 장흥(長興) 성불사(成佛寺)에 1건,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에 1건, 무장(茂長) 참당사(懺堂寺)에 1건, 남원(南原) 승련사(勝蓮寺)에 1건,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에 1건, 진원(珍原) 하청사(下淸寺)에 1건, 태인(泰仁) 운주사(雲住寺)에 1건, 무안(務安) 법천사(法泉寺)에 1건, 광주(光州) 징심사(澄心寺)에 1건, 담양(潭陽) 용천사(龍泉寺)에 1건, 보은(報恩) 복천사(福泉寺)에 1건, 옥천(沃川) 지륵사(地勒寺)에 1건,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에 1건으로, 모두 50건 내에 47건이 이상과 같이 각 사찰에 저장되었고, 나머지 특수 인쇄한 3건은 해인사에 1본, 흥천사(興天寺)에 1본, 예조(禮曹)에 1본씩 각기 보관되었다.

 

사찰에 저장되었고 : 이상 열거된 건수가 맞지 않는다.

 

누판기(鏤版記)에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무신년(戊申年)에 고려국 대장도감(高麗國大藏都監)이 칙명을 받들고 판각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탑인(搨印)한 그 책의 경권(經卷) 아쪽에, 하나는 “계묘세(癸卯歲)에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고 판각했다.”고 새기고, 또 하나는 “갑진세(甲辰歲)에 판각했다.”고 새겼는데, 고지(古志)에는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판각했다.”고 하였다. 애장왕은 당 덕종(唐德宗) 16년(경진)에 즉위하여 10년 만인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806~820) 4년(기축)에 헌덕왕(憲德王)에게 시해되었으니, 그가 재위한 기간에는 아예 정묘년이 없다. 고려를 통틀어 계묘년이 여덟 번, 갑진년이 여덟 번이고 보면, 이는 아마도 고려 시대에 주조한 것인 듯하다.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에 “무신년에 판각했다.”고 하였으니, 고려조의 정종(定宗) 3년, 목종(穆宗) 11년, 문종(文宗) 22년, 인종(仁宗) 6년, 명종(明宗) 18년, 고종(高宗) 35년, 충렬왕(忠烈王) 30년, 공민왕(恭愍王) 7년이 다 무신년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맨 처음 판각한 것으로 본다. 《고려사(高麗史)》의 종실전(宗室傳)을 상고하건대, 대각국사는 곧 문종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인데, 송 철종(宋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 행세하였다. 국사가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고는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비로소 화엄(華嚴)을 닦아 오교(五敎)를 통달하였다. 선종(宣宗) 2년(을축)은 곧 송 신종(宋神宗)의 원풍(元豐 1078~1085) 8년인데, 이해에 의천이 사사로이 제자 2명과 함께 송 나라 상인(商人)인 임영(林寧)의 배를 몰래 타고 송 나라에 들어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얻어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고, 또 주청하여 흥왕사(興王寺)에다 교장도감(敎藏都監 고려 때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의천이 설치한 관청)을 설치하고는 요(遼)ㆍ송(宋) 등지에서 무려 4천 권에 이르는 많은 서적을 구입해다가 모두 간행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본부를 두고 있다가, 이윽고 남쪽으로 내려가 명산(名山)을 두루 편람한 다음 해인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는 사자를 보내어 그를 맞아다가 흥왕사의 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왕고(王考) 청장관선생(靑莊館先生)이 찬한 《앙엽기(盎葉記)》에 “의천(義天)은 곧 선(宣宗)ㆍ숙종(肅宗)의 아우이다. 선종 2년(을축)은 곧 송 신종(宋神宗) 원풍(元豐) 8년이요, 요 도종(遼道宗) 대안(大安 1085~1094) 원년이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경판(經版)에 대해, 고지(古志)에는 이르기를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판각했다.’ 하였으나, 애장왕이 재위한 10년 동안에는 아예 정묘년이 있지 않으니, 이는 아마 고려 선종 4년(정묘)에 의천이 판각한 경판을 애장왕 정묘년에 판각한 것이라고 와전된 것이다. 의천이 이미 해인사에 물러와 거주하였으니, 이 절 안에 경판을 저장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내가 해인사에 가 놀면서, 시험삼아 세조(世祖)가 탑인한 경권(經卷) 두 책의 아래쪽을 살펴보니, 하나는 ‘계묘세에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했다.’고 새겼고, 또 하나는 ‘갑진세에 판각했다.’고 새겼으며, 또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에는 ‘무신년에 고려국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했다.’ 하였다. 의천이 간행한 것은 모두 5천여 권인데, 지금 소장되어 있는 원수(元數)는 6천 5백 29권으로, 그 수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은 계묘년 이후로 해마다 보각(補刻)하였기 때문이니, 의천이 판각하지 못했던 것은 1천 5백여 권이다.” 하였다.

 

경판의 변격(邊格)에 다 글자를 새겼는데 천자문(千字文)으로만 하였고, 어느 경, 어느 권, 어느 장에는 가끔 보충해 넣은 것이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조선조에서 보충 판각한 것이다. 대개 중국 급고각(汲古閣)의 서적과 서로 비견할 수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충조(虫鳥)가 거기에 서식하지 못하고 먼지도 쌓이지 않는다고 하나, 모두 거짓말이다.

 

해인사의 경을 담은 궤(櫃)는 무설전(無說殿)에 저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4년은 곧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1736~1795) 5년(경자)이다. 이해 정월 8일에 이 무설전에 불이 나 경을 담은 궤가 불타버렸고 다른 절에 저장된 것도 누차 병화(兵火)를 겪었으므로, 혹시라도 남아 전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효종(孝宗) 10년(기해)에 해인사 법당(法堂) 삼불상전(三佛像殿) 안의 불상 밑에 도금(鍍金)된 석탑(石榻) 2좌(座)와 대장경 경판의 제3행(行) 일대가 그해 정월에 땀을 뻘뻘 흘렸다고 하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나에게도, 대장경 조각이 고려조의 조각임을 증거할 만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상고하건대, 주이준(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에서 《설루집(雪樓集)》에, 경수사(慶壽寺)에 대장경을 시주한 데 대해 쓴 정거부(程鉅夫)의 비문(碑文)을 인용하여 “서방(西方)의 성인(聖人)은 허공(虛空)으로 본(本)을 삼고 적멸(寂滅)로 종(宗)을 삼았는데, 그의 서적은 무려 5천 48권에 이른다. 후세에 그 서적을 존중하여 대보장(大寶藏)을 세워 저장하고는 이름을 대장경이라 하였다. 동남쪽 바닷가의 나라인 고구려는 예부터 시서 예의(詩書禮義)의 나라로 칭하던 곳으로, 불도를 신봉함이 더욱 성실하였는데, 원(元)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그들이 순조로이 내부(來附)하므로, 세조 황제(世祖皇帝)가 그들을 은혜로 감싸주고 예로 대우하여, 부자(父子)가 왕위(王位)를 이어가게 하고 아울러 외생(外甥 사위)의 서열에 있게 하였다. 지금의 왕은 또 총명하고 충효(忠孝)가 돈독하여 황제와 황태후(皇太后)의 깊은 총애를 받아오다가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7~1307) 을사년에는 대장경 1부를 경수사에 시주하고는 그 공덕(功德)을 상(上)에게 돌렸는데, 이 경수사는 역대 황제들의 복을 비는 곳이 되었다. 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 ” 하였다.

 

이로 본다면, 대덕 을사년은 원 성종(元成宗) 9년이요 고려 충렬왕(忠烈王) 31년으로, 이해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를 갔는데, 이때에 대장경을 가지고 가서 경수사에 시주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고려에서 대장경을 판각했다는 명증이 아니겠는가.

 

또 상고하건대, 정족산성(鼎足山城)은 경기도(京畿道) 강화부(江華府) 삼랑산(三郞山) 위에 있고 이 성 안에 전등사(傳燈寺)가 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기에 실록(實錄)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사고(史庫)가 있다. 고려 충렬왕의 비(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중 인기(印奇)를 시켜 배를 타고 송(宋) 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간행해다가 절에 저장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때에 아직 대장경을 판각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다. 충렬왕은 송 도종(宋度宗) 함순(咸淳 1265~1274) 10년(갑술)에 즉위하였으니, 이때가 곧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264~1294) 11년이다. 그때는 고려가 송 나라와는 국교가 단절되었고 벌써 원 나라에 귀순하여 신하 노릇을 해온 지가 오래이다. 그런데 어찌 배를 타고 송 나라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구해다가 절에 시주했단 말인가. 이 또한 본국에서 새로 탑인하여 시주한 대장경을 중이 잘못 송 나라에서 구입했다고 한 것이다.

 

 

이 밖에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인조(仁祖) 15년은 곧 명 의종(明毅宗) 숭정(崇禎 1628~1644) 10년(정축)이다. 이 해 가을 서호(西湖)에 표박(漂泊)하는 배가 한 척 있었는데, 배 안에 사람은 없고 대장경 함(函)만 실려 있었고 그 위에는 ‘중원 개원사 개간(中原開元寺開刊)’이라 쓰여 있었다. 그래서 서호 사람들이 이를 비국(備局)에 바쳐 상(上)께 진달하자, 상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찰 중에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 있으면 이를 그 절에 주어서 영원토록 잘 간직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8도(道) 중에 개원사로 이름한 절은 한 절뿐이었는데, 그 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기 때문에 별도로 사자를 보내어 그 함(函)을 저장하게 하였다. 그 사적이 《남한지(南漢志)》에 나타나 있고 또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의 사실이고 보면 이것이 응당 유실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팔만대장경이라 칭하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팔만 사천(八萬四千)이라 칭하는데, 이는 마치 대계(大戒)가 8만 4천여 조(條)로 되어 있는 것과 같으니, 이는 큰 숫자만을 들어서 말한 것이요 경권(經卷)이 8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왕고(王考)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3천여 권만을 간행하고 종이가 없어서 그만 두었으며,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이를 다시 간행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했다.” 하였다.

 

불사(佛史)

 

원(元) 나라 중 화정지(華亭智)의 《불조통재(佛祖統載)》와 《불조통기(佛祖統紀)》가 있는데, 불조에 대해서는 불가에 또 달리 사책(史策)이 있다.

 

불상(佛像)

 

불교를 받드는 자는 부처를 끝없이 존숭하여 불상을 설치해 놓고 공양하는 일이 있는데, 그 유래를 어찌 변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본(日本) 양안상순(良顔尙順)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서역(西域) 천축(天竺)의 마가타국(摩伽陀國)에 있는 수달장자(須達長者)의 장원(莊院)에서 7리(里)쯤 가면, 석가당(釋伽堂) 세 채가 있으니, 바로 석가(釋迦)의 입상(立像)ㆍ좌상(座像)ㆍ와상(臥像)이 봉안되었다. 석가당에 봉안된 불상(佛像)은 굴천대산세존(掘穿大山世尊)이 직접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석가당 앞에는 민가(民家)가 세 거리[三街]로 연이어 있으며, 석가당의 길이는 각기 2리(里)씩이고 세 당의 전체 길이는 6리 반쯤 된다. 높이는 2리 남짓하며, 기둥[柱]의 경(徑)은 1백60 사이[間]이고 둘레는 5백 사이이다. 불지(佛指)의 크기는 3사이이다. 그 불상은 본디 토석(土石)으로 만들었었는데, 참배하는 사람들이 금박(金箔)을 입혀 그대로 수천 년을 지내 왔기 때문에 그만 금상(金像)이 되어 버렸다. 영취산(靈鷲山) 높이는 1리이고 유사천(流沙川)의 상류에 있다. 에 좌선석(座禪石)이 있는데, 그 바위의 높이가 32정(町)으로 유사천의 상류에 우뚝 솟아 있으니, 매우 기이한 돌이다. 그 위에 좌선당(座禪堂)이 있고 석가상(釋迦像) 1구(軀)가 안치되어 있다.” 이 산에는 다라수(多羅樹)가 많이 있는데, 옛날 이 나무 잎에 글씨를 썼다. 하였다. 이것이 불상의 시초이다.

 

불상이 맨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마련했던 금인(金人)이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 “곽거병(霍去病)이 농서(隴西)를 떠나 언지산(焉支山) 천여 리를 지나다가,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금인을 얻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금인을 만들어 천신(天神)의 주(主)로 삼고 제사를 지낸 것이니, 불상이 곧 그 유법(遺法)이다.” 하였다.

 

한 무제(漢武帝)는 감천(甘泉)에 사당을 세워 금인을 안치하고는 ‘경로신사(徑路神祠)’라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불상과 근사하기 때문에 《진사(晉史)》ㆍ《수사(隋史)》에서 이를 근거로 삼았다.

 

《설루집(雪樓集)》에 “석가여래는 정반왕의 태자로 갑인년 4월 8일에 태어났는데, 이 해가 주 소왕(周昭王) 24년이다. 그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그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은 도리천(忉利天)에 왕생(往生)하였다. 소왕 42년(임신)에 그는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 수도하여 주 목왕(周穆王) 3년(계미)에 성도(成道)하고, 8년(신묘)에는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도리천에 올라가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였다. 우전왕(優塡王)은 그를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자 전단(旃檀)으로 불상을 만들었는데, 목건련(目犍連)은 불상에 미비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몸소 장인(匠人) 32명을 데리고 도리천에 올라가 석가의 상을 자세히 살펴보기를 세 번이나 거듭한 뒤에야 그 진상을 만들 수 있었다. 불상이 이루어지자 국왕(國王)과 신민(臣民)이 불상 받들기를 마치 부처 받들 듯 하였다. 이 해에 부처가 도리천에서 다시 세상에 내려오자, 이 불상이 몸소 부처를 맞아 머리를 조아리며 뵈었다. 이에 부처가 불상의 이마를 만지면 기(記)를 주었는데, 그 기에 ‘내가 멸도(滅度)한 지 천 년 후에는 네가 진단(震旦 중국을 말한다)에 가서 인천(人天)을 널리 제도하라.’ 했다.” 하였다.

 

이로부터 불상은 서역에서 1천 2백 85년 간 있다가 구자(龜玆)에서 68년, 양주(涼州)에서 14년, 장안(長安)에서 17년, 강남(江南)에서 1백 73년, 회남(淮南)에서 3백 67년, 다시 강남에 이르러 21년, 변량(汴梁)에서 1백 77년, 북쪽으로 연경(燕京)에 이르러 지금의 성안사(聖安寺)에서 12년, 그리고 북쪽으로 상경(上京)의 대저경사(大儲慶寺)에 이르러 20년을 있었고, 남쪽으로 연궁(燕宮)의 내전(內殿)으로 가서 있은 지 54년 만인 대원(大元) 정축년 3월에 연궁에 불이 나자, 상서(尙書) 석말공(石抹公)이 다시 성안사에 맞아 여기서 59년 동안 있었다. 세조(世祖) 지원(至元) 12년에는 대신(大臣) 패라(孛羅) 등을 보내 맞아다가 만수산(萬壽山) 인지전(仁智殿)에 봉안했으며, 정축년에는 대성수만안사(大聖壽萬安寺)를 창건하고 기축년에는 인지전으로부터 만안사의 후전(後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는데, 원정(元貞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5~1297) 원년에는 성종(成宗)이 친히 나가 공양하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우전왕(優塡王)이 불상을 만든 때로부터 지금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1314~1320) 3년(병진)까지의 연대를 계산해 보면 2천 3백 7년 간이다.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 “인지전으로부터 만안사의 후전에 옮겨 봉안했다가 백 40여 년 만에 경수사(慶壽寺)에 봉안하였고,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17년에 이르러 경수사에 봉안된 지 백 20여 년 만에 경수사의 화재(火災)로 인하여 상(上)에게 표(表)를 올려 취봉사(鷲峯寺)에 옮겨 봉안하였는데, 지금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573~1620) 25년에 이르기까지 58년 동안 봉안되었으니, 우전왕이 불상을 만든 해, 즉 주 목왕(周穆王) 12년(신묘)으로부터 지금 만력 25년(정유)에 이르기까지를 계산해 보면 모두 2천 5백 80여 년이다.” 하였다.

 

【금상(金像)】《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 “우전왕(優塡王)이 일찍이 교장(巧匠)들을 동원하여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불상을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공양 예배하였다. 이때에 파사국왕(波斯國王)도 교장들을 모아 ‘여래(如來)의 상은 마땅히 진금(眞金)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곧 자마황금(紫磨黃金)으로 여래의 상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 또한 5척(尺) 남짓하였다. 이때부터 염부제(閻浮提)에 비로소 불상 2좌(座)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수다라요의경주(修多羅了義經注)》에 “여래(如來)의 눈은 마치 포도 송이와 같고 귀는 화피(樺皮)를 말아 놓은 것과 같고 코는 쌍조갑(雙爪甲)과 같고 혀는 언월도(偃月刀 칼의 한 가지. 마치 초생달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름)와 같고 몸은 보주(寶珠)처럼 빛이 난다.”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에 “묘장엄왕(妙莊嚴王)이 말하기를 ‘여래의 입술 빛깔은 붉고 선명하기가 마치 빈바과(蘋婆果)와 같다.’ 했다.” 하였고, 《수능엄경(首楞嚴經)》에는 “도라면(兜羅綿)의 빛이 마치 서리빛과 같은데, 유연(柔軟)한 부처의 손도 그와 같다.” 하였으며, 《남사(南史)》에는 “부처의 머리털은 푸르고 가늘어서 마치 우사(藕絲 연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섬유(纖維))와 같다.” 하였고, 《남사》 부남국전(扶南國傳)에는 “부처의 머리털은 1장(丈) 2척(尺)인데 청감색(靑紺色)이다.” 하였으며, 유경승(劉景升)은 이르기를 “월지국(月支國)에는 부처의 머리털을 유리(琉璃) 항아리에 담아 놓았다.” 하였다.

 

【중원(中原) 불상(佛像)】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에 “불상이 본래의 것은 속되고 소박하여 사람들로부터 공경심을 자아내지 못하였는데, 잘 조각된 지금의 불상은 대옹(戴顒)에게서 비롯되었다. 대옹이 일찍이 불상 하나를 조각하면서 이를 장중(帳中)에 감추어 두고는, 어떻게 하면 좋고 어떻게 하면 나쁘다는 남들의 평을 들어서 그대로 고쳤는데, 그 작업을 10여 년 동안 계속하여 완성시켰다. 화백(畫伯)인 진(晉) 나라 대규(戴逵)가 불상을 주조 또는 조각을 잘 했는데, 이가 곧 대옹의 아버지이다. 수(隋) 나라 위지발질나(尉遲發質那)가 불상을 잘 조각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을공(乙恭) 역시 불상을 잘 조각하였고, 당(唐) 나라 양혜지(楊惠之)는 소상(塑像)을 잘 만들었다.” 하였다.

 

《원사(元史)》 방기전(方技傳)에 “유원(劉元)이 일찍이 아니가니(阿尼哥尼)를 사사(師事)하여 서역(西域)의 범상(梵像)을 배웠는데, 절묘(絶妙)한 기예(技藝)의 소유자로 일컬어졌다.” 하였고, 《철경록(輟耕錄)》에는 “유원이 일찍이 도사(道士)가 되어, 소상(塑像)을 만드는 데 뛰어나서 천하에 누구든 그와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솜씨 가운데 박환(搏換)이라는 것이 있는데, 토우(土偶) 위에다 비단을 덮고 그 위에 칠을 입힌 지 조금 뒤에 그 토우를 빼어 버리면 그 칠 입힌 비단이 곧 불상으로 된다. 그의 관직은 태학사(太學士)였다.” 하였다.

 

【대불상(大佛像)】여기는 중국과 우리나라 및 외국(外國)에 있는 대단히 큰 불상들을 기록하였다. 불상에 대해 청(淸) 나라 죽타(竹坨) 주이준(朱彝尊)의 제가산사벽(題柯山寺壁 가산사의 벽에 제함)에 “부처가 서역에서 탄생하였는데, 물론 다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무리가 한 명제(漢明帝)의 꿈에 장륙금인(丈六金人)으로 나타남으로 인해, 드디어 장륙불신(丈六佛身)이라 하여 《본행경(本行經)》 및 《아육왕전(阿育王傳)》에 넣었는데, 가산사(柯山寺)의 석상(石像) 같은 경우는 또 그보다 배나 길다. 이것이 곧 성교서(聖敎序)에서 말한 사팔상(四八相)이다. 대개 불교가 동방(東方)에 들어옴으로부터 승려(僧侶)들이 사람의 이목(耳目)을 현혹시키기에만 전념하여 산(山)의 골수(骨髓)를 다투어 깎아 못쓰게 만들었다.

 

사팔상(四八相) : 석가에게 갖춰져 있다는 삼십이상(三十二相). 곧 4×8=32로 된 말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높이가 3장(丈)이 되는 석상(石像)은 의주(宜州) 북산사(北山寺)의 것이고, 좌구(坐軀)가 5장이고 입형(立形)이 10장이나 되는 것은 신창(新昌) 석성사(石城寺)의 것이고, 병주(幷州) 동자사(童子寺)의 경우는 높이가 1백 70척이고, 북곡(北谷) 개화사(開化寺)의 것은 높이가 2백 척이고, 한가(漢嘉)에 있는 석상은 1천 척이고, 여양(黎陽)에 있는 것은 또 그보다 더 크다. 이보다도 더 괴이한 설이 있다. 범협(梵夾)에서는 이를 근거로 더욱 견강부회하여 일컫기를 ‘비바시불(毗婆尸佛)은 키가 60유순(由旬)의 거리만큼 크고 시기불(尸棄佛)은 키가 40유순의 거리이며, 비사바불(毗舍婆佛)은 키가 32유순의 거리이고, 구류손불(拘留孫佛)과 구나사모니불(拘那舍牟尼佛)은 모두 키가 25유순의 거리이며, 가섭(迦葉)은 키가 16장이었다.’ 하였다. 그러나 군자(君子)를 그럴싸한 방법으로는 속일 수 있지만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유순(由旬) : 인도(印度)에서 말하는 이수(里數)의 단위. 전륜왕(轉輪王)이 하루동안에 갈 수 있는 길로 40리에 해당함. 또 대유순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라고 하는데,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이어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가정부(嘉定府)의 대불산(大佛山)에 있는 불상의 높이는 47장이고 너비는 15척이고 누각(樓閣)은 10층이며, 사천(四川) 가정부(嘉定府)의 구정산(九頂山)에는 산을 깎아 미륵대상(彌勒大像)을 만든 바, 높이가 3백 30척으로 대층각(大層閣)을 세워 복개하였는데, 이는 위고(韋 皐) 때에 이르러 15년 동안의 공사 끝에 완성된 것이다.

 

일본(日本) 양안상순(良顔尙順)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천비야태이(天比夜太伊) 수달장자(須達長者)의 장원(莊院)에서 7리(里)쯤 가면 석가당(釋迦堂) 세 채가 있으니, 여기에는 바로 본존불(本尊佛)의 입상(立像)ㆍ좌상(座像)ㆍ와상(臥像)이 봉안되었다. 그 당에 봉안된 불상은 굴천대산세존(掘穿大山世尊)이 직접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당 앞에는 민가(民家)가 세 거리[三街]로 연이어 있으며, 당의 길이는 각기 2리이고 세 당의 전체 길이는 6리 반쯤 된다. 높이는 2리 남짓하며 기둥[柱]의 경(徑)은 1백 60사이[間]이고 둘레는 5백 사이이다. 불지(佛指)의 크기는 3사이[間]이다. 그 불상을 본래는 토석(土石)으로 만들었었는데, 참배하는 사람들이 금박(金箔)을 입혀 그대로 수천 년을 지내왔기 때문에 그만 금상(金像)이 되어버렸다.” 하였으니, 그 크기를 알 만하다. 이것이 서역(西域) 천축(天竺)의 본상(本像)이다.

 

일본 대화국(日本大和國) 대사(大寺)에 있는 큰 불상은, 높이가 5장 3척 5촌이고 면(面)의 길이가 1장 6척이고 너비가 9척 5촌이고 눈썹이 5척 4촌 5푼이고 눈 길이가 3척 9촌이나 된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호서(湖西) 은진현(恩津縣) 반야산(般若山)의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석미륵(石彌勒)은 높이가 54척이요, 호남(湖南) 금구현(金溝縣) 금산사(金山寺)의 미륵전(彌勒殿)에 있는 금불입상(金佛立像) 3구(軀)는 5~6장씩이나 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불상들이다.

 

이상의 여러 불상들이 비록 크다고는 하지만,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외기(坤輿外記)》에서 말한 것과 비교하면 거리가 멀다. 《곤여외기》에 “서아가아성(西亞嘉亞省)에는 목성(木星)에게 공양하기 위해 돌로 만든 인형(人形)이 대단히 크고, 대서양(大西洋) 낙덕해도(樂德海島)의 해구(海口)에 있는 동인입상(銅人立像)은 높이가 몇 유순(由旬)의 거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한 손에는 활을 쥐고 또 한 손에는 등(燈)을 잡고 있다. 가장 큰 배[舶]가 그 사타구니 밑으로 드나들고 혹은 겨드랑 밑으로 드나들며, 사람이 연등(燃燈)을 하려면 그의 배[腹]를 경유하여 작은 손가락으로 올라가서 불을 붙인다.” 하였으니, 그 크기를 알만 하다. 우리나라의 불상을 거기에 비유하면 마치 난쟁이를 용백국(龍伯國) 사람에게 비유함과 같다.

 

용백국(龍伯國) : 옛날 거인(巨人)이 살던 나라 이름.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용백국에는 거인이 있어 몇 발자국만 떼면 오산(五山 :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는 대여〈代輿〉ㆍ원교〈員嬌〉ㆍ방호〈方壺〉ㆍ영주〈瀛洲〉ㆍ봉래〈蓬萊〉의 다섯 산을 가리킨 듯함)에 이른다.” 하였고, 《하도옥판(河圖玉版)》에는 “용백국 사람은 키가 30길이나 되고 수명이 8천세나 된다.” 하였다.

 

【천화불상(天畫佛像)】천지의 조화가 융합되면 무슨 물건이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마치 오영야(吳寧野)가 이른바 “산하(山河) 대지(大地)에서도 다 공(空)을 볼 수 있고, 기왓장이나 조약돌, 진흙 같은 것도 모두가 불성(佛性)을 간직하고 있다.” 한 말이 곧 그런 뜻에서이다.

수 문제(隋文帝)의 합리불(蛤蜊佛)이 있고 송(宋) 나라 조무구(晁無咎)의 저골백불(猪骨白佛)이 있다.

 

【저골여래상(猪骨如來像)】《묵장만록(墨莊漫錄)》에 “획가현(獲嘉縣)에 사는 주씨(周氏)라는 사람이 돼지를 잡았는데, 유씨(劉氏)라는 사람의 개가 돼지의 두골(頭骨)을 주워먹고는 으르렁거리기만 하고 4일 동안이나 밥을 먹지 않았다. 유씨가 그 개를 잡아 해부해 보니, 개의 왼쪽 위의 어금니 안에 엄지 손가락만한 고깃덩이가 박혀 있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여래상(如來像)이었다. 이 여래상은 상투에 좁쌀 같은 구슬이 박혔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부좌(跏趺坐)한 자세로 앉아 있었으며 동자(瞳子)에는 장엄상(莊嚴相)이 은연중에 갖추어져 있었다.” 하였다.

 

【우골여래상(牛骨如來像) 《묵장만록(墨莊漫錄)》에 “진주(眞州)의 어느 부잣집에서, 여러 마리의 개가 우경골(牛脛骨) 하나를 가지고 서로 먹으려고 다투므로, 사람이 그를 빼앗아 쪼개어 보니, 그 뼈 속에 들어 있는 혈수(血髓)가 벌써 굳게 어려 마치 옥(玉)처럼 하얀데다가 천연적으로 하나의 보살(菩薩) 형체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의문(衣紋)ㆍ영락(瓔珞)ㆍ상호(相好)가 아주 기특하여, 아무리 사람이 직접 조각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는 부처의 자비(慈悲)로운 화신(化身)이 어디에나 나타나, 살생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계한 것이다.” 하였다.

 

【은행대사상(銀杏大士像)】청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신축ㆍ임인 연간에 경구(京口)에서 전함(戰艦)을 만들었다. 이때 강도(江都) 유씨(劉氏)의 정원에 백여 년이나 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역시 전함용으로 벌채되었다. 목수가 이 은행나무를 톱으로 썰어내자, 나무의 무늬에 완연한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 2좌(座)가 있었고 그 수식(首飾)이 천연스러우므로, 뭇사람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 이를 성남(城南)의 복연암(福緣菴)으로 보내었다. 이때 소주(蘇州)의 서광사(瑞光寺)에 관음상이 있었는데, 이 역시 큰 나무 속의 무늬가 천연으로 결성(結成)된 것이다.” 하였다.

 

【대나무 속[竹中]의 대사상(大士像)】인암(訒菴)의 《우필(偶筆)》에 “휴령(休寧)의 판교(板橋)에서 어떤 사람이 대나무를 벌채하다가 한 대나무가 몹시 단단하여 두세 번씩이나 찍어서야 잘라졌는데, 이 대는 모두 13마디로 마디마다 속에 다 관음대사상이 들어 있으므로, 곧장 본촌(本村)의 암자(菴子)에 모셔 놓고 공양하였다.” 했다.

 

【달마상이 비치는 돌[達摩影石]】《앙엽기(盎葉記)》에 “숭산(嵩山)의 달마암(達摩菴) 안에 있는 달마상(達摩像) 안전(案前)에 높이는 겨우 2척에 너비가 그 절반쯤 되는 돌이 있는데, 달마의 형체가 완연히 그 돌 위에 비치어 씻으면 씻을수록 더욱 뚜렷해진다. 대개 그 암자 위로 4리쯤 가면 달마동(達摩洞)이 있는데, 이 돌은 곧 달마가 9년 동안 면벽(面壁)했던 것이기에 그의 정신(精神)이 이를 인연해서 밖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하였다.

 

【채소 꽃에 담긴 여래상[菜花如來像]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채품(菜品) 중에 무[蕪菁]ㆍ배추[菘菜] 같은 유는 가뭄을 만나면 그 줄기에서 많은 꽃이 피어 마치 연꽃 같기도 하고 혹은 용(龍蛇)의 형상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본성이기에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1068~1077) 연간에 빈객(賓客) 이급(李及)이 윤주(潤州)의 수(守)로 있을 때 정원의 야채 꽃이 모두가 연꽃으로 변하여 피고, 이어 여러 꽃마다 불좌(佛坐) 하나씩이 들어 있었는데, 불좌의 형상이 마치 조각한 것처럼 생기었고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불볕에 쪼여 말려도 그 불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이군(李君)의 집에서 부처를 신봉함이 매우 독실하기 때문에 이런 기이한 일이 있다.’ 했다.” 하였다.

 

【사람의 심장에 들어 있는 관음상[人心中觀音像]】송렴(宋濂)의 《잠계문집(潛溪文集)》에 “임천(臨川)의 승려(僧侶)가 입적(入寂)하여 시신을 불에 태울 때, 심장만은 타지 않고 오색(五色)의 광채가 나면서 뼈도 아니고 돌도 아닌 불상이 나왔고, 또 어떤 휘사(徽士)가 죽어 화장(火葬)을 할 적에, 심장 안에 마치 조각한 것과 같은 관음상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다 사람의 의지가 분산되지 않아서 정령(精靈)과 기액(氣液)이 감응된 형상이다.” 하였다.

 

【보타암(普陀巖)의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에 보타암이 있고 거기에 대사상이 있는데, 화만(華鬘)이 천연스럽고 죽림(竹林)ㆍ앵무(鸚鵡)ㆍ선재(善財)ㆍ용녀(龍女)의 형상도 모두 다양하게 갖추어졌다. 금객(琴客) 정생(程生)은 일찍이 몇 매(枚)를 구경했다.” 하였다. 《숙원잡기(菽園雜記)》에는 “보타(普陀)는 범어(梵語)로 백(白)인데, 낙가화(落迦華)를 말한다. 이 산에 산반화(山礬花)가 많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죽림(竹林) :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 가란타촌(摩竭陀國迦蘭陀村)에 있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말한다. 석가가 성도한 후 가란타장자(迦蘭陀長者)가 부처에 귀의하고 죽림원(竹林園)을 바쳐 거기에 이 정사를 지었으니, 이것이 최초의 절이 되었다.

 

앵무(鸚鵡) : 전설에 의하면 인도의 수달장자(須達長者)에게 두 앵무불(鸚鵡佛)이 있어 아난(阿難)을 위해 사체(四諦)의 법(法)을 설(說)하였다 한다.

 

선재(善財) : 《화엄경》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준말. 그는 53명의 선지식(善知識 : 선우〈善友〉의 뜻)을 두루 찾아 뵙고, 맨 나중에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 십대원(十大願)을 듣고 아미타불 국토에 왕생(往生)하여 입법계(入法界)의 원(願)을 이루었다 한다.

 

용녀(龍女) : 《법화경》에 나오는 사가라 용왕(裟伽羅龍王)의 딸을 가리키는데, 나이 겨우 8세에 지혜(智慧)가 숙성하여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교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깨닫고, 석가에게 와서 남자의 몸으로 되어 보살행을 수행하고 남방무구세계(南方無垢世界)에 가서 성불하였다고 한다.

 

【바위 속의 불상[巖中佛像]】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근래 이경심(李慶深)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 고성(固城)에 영(營)을 설치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우물을 파게 하였는데, 10장(丈)쯤 깊이 파들어가도 물은 없고 밑에 반석(磐石)만 있으므로, 곡괭이를 사용하여 더 뚫어 내려가자 그 속에서 기와가 5~6장쯤 나오고 그 밑에는 또 반석이 들어 있었으며, 또 근래 황주(黃州)에 성(城)을 쌓을 때, 산석(山石)을 뚫어내다가 바위 속에서 조그마한 불상 하나를 얻었는데, 이 또한 알 수 없는 이치이다.” 하였다.

 

불화(佛畫)

 

당(唐)나라 왕유(王維)의 문수불이도(文殊不二圖), 양(梁) 나라 장승유(張僧繇)의 로사나불(盧舍那佛), 구룡상(句龍爽)의 보타관음(普陀觀音), 이공린(李公麟)의 화엄변상(華嚴變相), 오도원(吳道元)의 공작명왕(孔雀明王)ㆍ등각보살(等覺菩薩)ㆍ여의보살(如意菩薩)ㆍ탁탑천왕(托塔天王)ㆍ호법천왕(護法天王)ㆍ행도천왕(行道天王)ㆍ청탑천왕(請塔天王)ㆍ화수길용왕(和修吉龍王)ㆍ온발라용왕(嗢鉢羅龍王)ㆍ발난타용왕(跋難陀龍王)ㆍ덕차가용왕(德叉伽龍王)ㆍ남방보생여래(南方寶生如來)ㆍ북방묘성여래(北方妙聲如來), 양정원(楊庭元)의 오비밀여래(五祕密如來)ㆍ사유보살(思維菩薩)ㆍ인왕보살(仁王菩薩)ㆍ장수보살(長壽菩薩)ㆍ칠구지보살(七俱胝菩薩), 범경(范瓊)의 강탑천왕(降塔天王), 신징(辛澄)의 불공구보살(不空鉤菩薩)ㆍ보인보살(寶印菩薩)ㆍ보단화보살(寶檀花菩薩)ㆍ시향보살(侍香菩薩)ㆍ헌화보살(獻花菩薩), 왕상(王商)의 불림풍속(拂菻風俗), 왕비한(王祕翰)의 자재관음(自在觀音)ㆍ보타라관음(寶陀羅觀音)ㆍ암거관음(巖居觀音), 무동청(武洞淸)의 시향금동(侍香金童)ㆍ산화옥녀(散花玉女), 당(唐) 나라 범경의 대비관음삼십육비상(大悲觀音三十六臂像), 촉(蜀) 나라 장남본(張南本)의 대불좌대상(大佛坐大像), 당 나라 조공우(趙公祐)의 정좌불(正坐佛)ㆍ피발관음상변(披髮觀音相變), 이백시(李伯時)의 장대관음(長帶觀音), 당 나라 오도자(吳道子)의 백묘십팔응진도(白描十八應眞圖)가 있고, 청(淸) 나라 냉길신(冷吉臣)이 성조육십성수화(聖祖六十聖壽畫)와 나한도(羅漢圖)를 그려 바쳤는데, 그림의 길이가 20여 장(丈)이나 되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김동필(金東弼)이 소장한 오도자(吳道子)의 묘금여래상(描金如來像)이 있고, 이광호(李光浩)의 시승천불도(施僧千佛圖)가 있으니, 이 천불도는 부처가 마치 겨자씨[芥子]만큼 자잘하게 되었는데, 화면에 물을 뿜어야 모양이 나타나 꿈틀거리는 것같이 보인다. 경주(慶州) 분황사(芬皇寺)의 관음상(觀音像)과 진주(晉州)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이 있는데, 이 유마상은 신라 때 솔거(率居)가 그렸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달마절로도해도(達摩折蘆渡海圖)와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가 있다.

 

금강산(金剛山) 정양사(正陽寺) 사문(寺門) 안에 육각(六角)으로 된 무량각(無梁閣)의 좌우 4벽(壁)에 제불(諸佛)ㆍ천왕(天王)ㆍ법신(法神) 40위(位)를 그려 붙였는데, 이것을 원(元) 나라 때, 화사(畫師)가 오도자(吳道子)의 필적을 모사해다가 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견문록(見聞錄)》을 상고해 보건대, 송(宋) 나라 희령(熙寧 신종(神宗)의 연호, 1068~1077) 9년(병진)에 고려에서 다시 최사훈(崔思訓)을 사신으로 보내어 조공(朝貢)할 적에, 최사훈이 화공(畫工)을 대동하고 가서 상국사(相國寺)의 벽화(壁畫)를 모사해 갈 것을 요청하여,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고 그 모두를 모사하여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 화공이 필법에 자못 정교하였다. 금강산 무량각에 있는 벽화가 바로 이것이다.

 

관음대사교(觀音大士敎) 전래의 시말

 

우리나라에 관음대사교가 들어온 시말(始末)을 보면 온릉(溫陵) 개원련사(開元蓮寺)에 있었던 비구(比丘) 계환(戒環)의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관음(觀音)이란 세상의 언음(言音)을 관찰하는 것이니, 원오(圓悟)와 원응(圓應)의 호칭이다. 음(音)에다 관(觀)이라 말한 것은, 관지(觀智)로 비추어 보는 것이요 이식(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였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략소주(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注)》는 배휴(裵休)가 찬하고 종밀(宗密)이 과주(科注)를 붙였는데, 여산(如山)의 서(序)에 보(菩)는 보리(菩提)로 각(覺)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얻은 바의 불과(佛果)이고, 살(薩)은 살타(薩埵)로 유정(有情)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교화된 중생(衆生)이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고도 칭한다.” 하였다. 불전(佛典)에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관음대사(觀音大士)라고도 칭하는데, 남해(南海) 낙가산(落伽山) 조음동(潮音洞)의 보타암(普陀巖)에 거처하고 있다.” 하였다. 《숙원잡기(菽園雜記)》에 “보타(普陀)는 범어(梵語)로 백(白)인데, 낙가화(落伽華)이다. 이 산에 산반화(山礬花)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에 보타암석(普陀巖石)이 있고 그 암석에 대사상(大士像)이 있는데, 화만(華鬘)이 천연스러우며, 죽림(竹林)ㆍ앵무(鸚鵡)ㆍ선재(善財)ㆍ용녀(龍女)의 형상이 다양하게 갖추어졌다. 금객(琴客) 정생(程生)이 일찍이 몇 매(枚)를 구경했다.” 하였다.

 

대개 관음대사는 자죽림(紫竹林 절강성 정해현에 있는 지명) 안에 있으면서 맑은 감로수(甘露水)가 든 병(甁)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가지고 일체중생을 널리 제도(濟度)한다고 한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불교는 하나의 공적(空寂)뿐이다. 그러나 관음대사만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온갖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하니, 이 또한 공자(孔子) 이후의 맹자(孟子)와 같다. 관음대사가 세상에 나타난 상(相)은 본시 여러 가지인데, 지금 소상(塑像)이나 화상(畫像)에 흔히 여인상(女人相)으로 만드니, 이는 잘못이다. 기왕 ‘대사’라 일렀으니 어찌 여인이 될 수 있겠는가. 또한 기왕 ‘성불(成佛)’이라 일렀으니 남상(男相)이든 여상(女相)이든 다 있을 수 없다. 대저 상(相)이 있으면 정(情)이 있어서 음란한 생각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서(佛書)에 상고하건대 ‘어람묘녀(魚籃妙女)가 곧 관음대사이다.’ 했다.” 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의 《거이록(居易錄)》에 “오천장 문(吳天章雯 천장은 오문의 자)의 설(說)에 ‘계주(薊州) 독락사(獨樂寺)의 관음각(觀音閣)이 3층인데, 그 액자(額字)는 이태백(李太白)이 썼다. 이 각의 들보와 두공(枓栱)은 모두 나무와 나무를 서로 걸어서 만들었고 도끼나 자귀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기미년(己未年) 지진(地震)으로 관아(官衙)나 민사(民舍)가 하나도 남아난 것이 없었으나, 이 각만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보살상(菩薩像)의 높이는 이 각과 똑같아서 약 6장(丈) 남짓한데, 산조목(酸棗木 멧대추나무)으로 만들었다.’ 하였다. 나의 고향인 치천현(淄川縣) 황부촌(黃埠村)에 산조목 한 그루가 있는데, 그 크기가 두 아름이나되니, 월동(粤東)에 있는 용수(榕樹)의 크기보다 못하지 않다.” 하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상이 가장 크다. 그러나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매우 성행하였는데도 관음상(觀音像)만은 오로지 말해 놓은 것이 없는데, 옛날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가 지은 관음원기(觀音院記)에서 상고할 수 있다. 관음원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1086~1094) 5년에 고려왕(高麗王)의 아우인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바다를 건너 불법(佛法)을 물으러 왔을 때 제형(提刑 형벌이나 옥사(獄事)를 맡은 벼슬) 양걸(楊傑)이 그의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그가 그 멀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온 것은 불법을 고려에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1126~1127) 연간에 병화(兵火)가 연속되자, 관음전(觀音殿)의 주지 도언(道言)이 대사상을 우물 속에 숨겨 두었는데, 병(兵)이 물러간 후에 여럿이 대사상(大士像)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와력(瓦礫)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즉시 우물을 파본바 그 속에 대사상이 들어 있었으니, 그 신령하고 기이함이 이와 같았다. 심지어는, 비를 빌거나 날씨가 화창하기를 빌면 그 비는 대로 즉시 영험이 있었으며, 현신(現身)을 하기도 하고 현몽(現夢)을 하기도 하여, 그에 대한 기록이 어느 시대나 끊이지 않았다. 송조(宋朝)에서도 부처에게 공양(供養)한 사실이 모두 기록에 나타나지만, 더욱이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보타도량(補陁道場)을 중건(重建)하여 모든 절차가 매우 장엄(莊嚴)했음에랴. 고려는 중국과 거리가 멀어도 시골 구석구석에서 소동파(蘇東坡)의 ‘봄 누에 다 자라고 보리 반쯤 익었는데, 앞뒷산에 주룩주룩 비가 내리네. 농부들은 일손 멎고 쫓겨가는데, 흰옷 입은 선인은 고당에 앉았구나.[蠶欲老麥半黃 前山後山雨浪浪 農夫輟耒女廢筐 白衣仙人在高堂]’라는 우중유천축영감관음원시(雨中遊天竺靈感觀音院詩)를 매우 잘들 외지만, 이 시가 있는 줄만 알았지 불(佛)이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세 번이나 조명(朝命)을 받고 강절(江浙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지키게 된 인연으로 천축(天竺)에 들어가 대사(大士)의 상을 예배하였는데, 대저 정성들여 기도만 하면 그 영험이 마치 메아리처럼 빨랐다. 요사이도 외람되이 또 성은(聖恩)을 입어 부재상(副宰相)에 올라 다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천축의 사적을 대략 살펴보건대, 관음보살은 신통력이 광대하여 온 중생(衆生)에게 무외(無畏)를 베풀고 원력(願力) 또한 홍심(弘深)하여 일체의 유정(有情)을 제도하며, 삼십이응(三十二應)을 나타내어 달이 1천 강에 비치듯[月印千江]하고 천백억의 신(身)으로 화현하여 물이 대지를 흐르듯[水行大地]해서, 아무리 멀어도 못가는 곳이 없고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므로, 온 세상이 다 거기에 귀의(歸依)하여 사람마다 믿고 따를 줄을 안다. 그런데 고려만은 아직 전우(殿宇)가 없고 또 불교를 받드는 일이 결여되어 있다. 생각건대, 마땅히 목불(木佛)과 금불(金佛)을 만들고 소상(塑像)과 화상을 만들며 금폐(金幣)를 내어 사찰을 짓고 주옥(珠玉)을 들여 장엄(莊嚴)을 갖추어야만이 군생(群生)에게 유익하고 성상(聖上)에게 복이 돌아가며, 다음으로 국토(國土)까지 안락(安樂)을 누릴 것이다. 삼가 사적의 본말을 적어 고려의 여러 상공(相公)에게 고하노니, 바라건대, 국왕(國王)에게 계백(啓白)하여 특별히 전우와 불상을 만들고 장엄을 갖추어 숭봉하오. 이렇게 하면 거의 불법이 유통되어 사람마다 신봉할 줄을 알게 되리니,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1297~1307) 8년 6월 일.”

 

상고하건대, 대덕은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이니, 곧 고려의 충렬왕(忠烈王) 30년(갑진)이다. 이때부터 관음교(觀音敎)가 우리나라에 유전된 것이다.

 

삼십이응(三十二應)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하려 할 때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32종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1. 불(佛), 2. 독각(獨覺), 3. 연각(緣覺), 4. 성문(聲聞), 5. 범왕(梵王), 6. 제석(帝釋) 등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관음(觀音)의 현령(顯靈 영험을 나타냄)】능가사(楞伽寺)는 흥양(興陽)의 팔령산(八靈山) 기슭에 있는데, 옛날 유구국(琉球國)의 태자(太子)가 표박(漂泊)하다가 잘못 이 절에 도착하였다. 그가 본국(本國)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7주야(晝夜)를 관음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자, 관음대사가 현신(現身)하여 그를 겨드랑이에 끼고 파도를 헤치며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절의 중이 관음상을 그려 놓았는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서울의 창의문(彰義門) 밖, 옥천암(玉泉菴) 밑에 있는 한 바위에 대사상(大士像)이 새겨졌고 평산(平山) 총수(蔥秀)에 있는 석벽(石壁)에도 대사상이 새겨졌는데, 모두 단아하고 아름답다.

 

《화감(畫監)》에 “고려에 있는 관음 화상이 매우 정교하다. 그 화법의 근원은 당(唐) 나라 을지승(乙遲僧)의 필법에서 나온 것인데, 그의 필법이 흘러 고려에 이른 것이다.” 하였다. 을지승이란 곧 당 나라 을지발질나(乙遲發質那)를 말한다.

 

석씨(釋氏)의 명호(名號)

 

석가의 명호에 대해 주해가 매우 많으나, 지금 대략만 수록한다.《수다라요의경(修多羅了義經)》에 상고해 보면 “여래(如來)의 경우, 본각(本覺)의 이름은 여(如)이고 시각(始覺)의 이름은 내(來)인데, 시(始)와 본(本)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衆生)은 본각만 있고 시각은 없으니, 이는 여(如)일 뿐, 내(來)는 되지 못한다.” 하였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능인적묵(能仁寂黙)이라는 것이다. 보(菩)는 보리(菩堤)로 각(覺)이라는 것이니 이는 곧 얻은 불과(佛果)이고, 살(薩)은 살타(薩埵)로 유정(有情)이라는 것이니 곧 교화된 중생(衆生), 즉 마하살(摩訶薩)인데, 마하는 대(大)의 뜻이다.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은 묘수(妙首), 또는 묘길상(妙吉祥)이라 하는데, 신해지(信解智)를 나타내기 때문에 묘덕(妙德)이라고도 하고 또한 증지(證智)를 나타내기 때문에 문수사리라고도 하며, 《범어와정(梵語訛正)》에는 만수실리(曼殊室利)라 하였다. 보현보살(普賢菩薩)로 말하면, 체성(體性)이 두루 미침을 보(普)라 하고 곳에 따라 성덕(成德)함을 현(賢)이라 한다. 보안보살(普眼菩薩)로 말하면, 제법(諸法)의 청정(淸淨)함을 널리 보니 이는 대지보안(大智普眼)이요, 중생(衆生)의 성불(成佛)함을 널리 보니 이는 대비보안(大悲普眼)이다. 미륵(彌勒)은 자씨(慈氏)이다. 자(慈)는 그의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인데 이는 무승(無勝)이라는 뜻이다. 그는 수승(殊勝)한 덕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금 성만 일컬어 미륵이라 한다.” 하였다.

 

관음(觀音)에 대해, 《수능엄경해(首楞嚴經解)》에 “관음이란 세상의 언음(言音)을 본다는 뜻이니, 원오(圓悟)ㆍ원응(圓應)의 호칭이다. 음(音)에다 관(觀)을 말한 것은 관지(觀智)로 비추어보는 것이지 이식(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석(帝釋)은 도리천주(忉利天主)가 되어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통령(統領)하였고 사천왕(四天王)은 제석의 신하가 되어 세계(世界)를 통령하는 자이다. 거사(居士)는 은거(隱居)하여 뜻을 구하고 의(義)를 행하여 도(道)를 깨닫는 자의 호칭이다. 《금강경(金剛經)》의 금강에 대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바로 ‘견(堅)ㆍ이(利)ㆍ명(明)’이요, 《반야경(般若經)》의 반야에 대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바로 ‘실상(實相)ㆍ관조(觀照)ㆍ문자(文字)’이다. 사문(沙門)은 근식(勤息)이란 뜻으로 많은 선(善)을 지성으로 닦고 번뇌를 지식시키는 것이니, 이는 승도(僧徒)들의 공통된 호칭이다. 두타(頭陀)는 즉 두수(抖擻)라는 뜻이니, 모든 번뇌를 털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수다라요의경》에 “사문(沙門)은 출가(出家)한 사람의 호칭이고, 바라문(婆羅門)은 집에 있으면서 지(智)를 가진 사람의 호칭이다. 열반(涅槃)은 곧 적멸(寂滅)이라는 것이고, 승가람마(僧伽藍摩)는 중원(衆園)이라는 뜻인데, 승가(僧伽)는 곧 거기에 머무르는 대중[衆]이요, 남마(藍摩)는 곧 대중이 머무를 수 있는 처소[園]이다.” 하였다.

 

대비구(大比丘)는 《수능엄경》에서 파악(破惡)ㆍ포마(怖魔)라 번역하였다. 벽지(辟支)는 곧 독각(獨覺)이라는 뜻이고, 무학(無學)은 곧 나한(羅漢)이라는 뜻이며, 가야(伽倻)는 산명(山名)인데, 즉 상두산(象頭山)이다. 유순(由旬)은 40리(里)를 말하는데, 16리라고도 한다. 약차(藥叉)에 대해서는, 고산(孤山)이 말하기를 “약차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땅에 있고, 둘째는 허공에 서 있고, 셋째는 하늘에 서 있다.” 하였다. 나찰(羅刹)은 가외(可畏)라는 뜻이고 구반다(鳩盤茶)는 곧 염매귀(厭魅鬼)라는 뜻이다.

 

【십대제자(十大弟子)】두타제일(頭陀第一)에 가섭(迦葉), 다문제일(多聞第一)에 아난(阿難), 지혜제일(智惠第一)에 사리불(舍利弗), 해공제일(解空第一)에 수보리(須菩提), 설법제일(說法第一)에 부루나(富樓那), 신통제일(神通第一)에 목련(目連), 논의제일(論議第一)에 가전연(迦栴延), 밀행제일(密行第一)에 나후라(羅睺羅), 천안제일(天眼第一)에 아나율(阿那律), 지율제일(持律第一)에 우바리(優婆離)이다. 상고하건대, 제2조(祖)인 아난존자(阿難尊者)는 석가의 종제(從弟)로 본명(本名)은 아난타(阿難陀)인데, 이는 곧 경희(慶喜)의 뜻이다.

 

【십육응진(十六應眞)】명(明) 나라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십팔나한게(十八羅漢偈)에 “십육응진이란, 사대부주(四大部洲)에 분거(分居)한 부처의 십육대제자(十六大弟子)를 말하는데, 이는 다 범상(梵相)이다. 뒤에는 범한(梵漢)이라 하여 노(老)ㆍ소(少)가 각기 여덟씩으로 되었으니, 만일 그와 같다면 이미 그 본래의 뜻과는 어긋난 것이다. 십팔(十八)이라고 칭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였다.

 

【칠중비구(七衆比丘)】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사미(沙彌)ㆍ사미니(沙彌尼)는 출가(出家)한 오중(五衆)이고, 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는 집에 있는 이중(二衆)이다. 상고하건대, 식차마나는 학법녀(學法女)이니 지금의 장발(長髮)한 비구니이고, 우바새는 불법을 친근하게 받드는 속인(俗人)이고 우바이는 우바새와 같은 속녀(俗女)이다.

 

【사천왕(四天王)의 명상(名狀)】다문천(多聞天)은 범명(梵名)으로 비사문(毗沙門)인데, 복덕(福德)으로 이름이 사방에 알려졌다. 왼손은 쭉 펴서 창을 잡고 오른손은 굽혀서 불탑(佛塔)을 떠받들었으며, 머리에는 금빛 갑옷을 입고 두 발로는 여인(女人)을 꼭 밟았으며, 겨드랑이 밑에는 운기(雲氣)가 끼어 있다. 지국천(持國天)은 범명으로 제두뢰타(提頭賴吒) 호지국사(護持國士)인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앞을 향해 손바닥에 보주(寶珠)를 쥐고 광채를 발사하여, 착한 사람은 상주고 악한 사람은 벌을 준다. 증장천(增長天)은 범명으로 비류륵차(毗留勒叉)인데,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성덕(盛德)을 증장시킨다.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고서 2부(部)의 귀중(鬼衆)을 통솔하는데, 하나는 이름이 구반다(鳩槃茶)로 동과(冬瓜)와 같은 염매귀(厭魅鬼)이고, 또 하나는 벽여다(薜荔多)이니, 이는 곧 아귀(餓鬼) 가운데 아주 못난 것들이다. 광목천(廣目天)은 범명으로 비류박차(毗留博叉)인데, 일명은 잡어(雜語)로 능히 여러 가지의 말을 한다. 왼손에는 창을 쥐고 오른손에는 붉은 새끼[索]를 잡고서 눈을 부릅뜨고 입을 딱 벌려, 그 위엄으로 사악(邪惡)들을 궤산(潰散)시키기 때문에 광목(廣目)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는 2부(部)의 귀중(鬼衆)을 통솔하는데, 하나는 이름이 비사사(毗舍闍)로 사람의 정기(精氣)를 빨아 먹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사백사병(四百四病)을 얻어 고민하도록 하고 또 오곡(五穀)의 정(精)을 빨아 먹어서 국가를 기근(飢饉)으로 몰아넣으며, 다른 하나는 이름이 독룡(毒龍)으로 그 독을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다 죽는다.

 

불조(佛祖)

 

제1조(祖) 가섭(迦葉)에서부터 제28조 달마(達摩)에 이르러, 달마가 동토(東土)의 제1조가 되었고, 제2조가 혜가(慧可), 제3조가 승찬(僧璨), 제4조가 도신(道信), 제5조가 홍인(弘忍), 제6조가 혜능(慧能)이다. 상고하건대, 원 나라의 중 화정지(華亭智)가 지은 《불조통재(佛祖統載)》에 “달마는 관세음대사의 화신이다.” 하였고, 양(梁)의 보지선사(寶誌禪師)도 “대사의 화신이 달마와 때를 같이하여 남북으로 화현(化顯)했다.” 하였다.

 

사찰(寺刹)

 

한 명제(漢明帝) 때 서역(西域)의 중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백마(白馬)에다 불경을 싣고 낙양(雒陽)에 와서 홍려시(鴻臚寺)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중이 거주하는 곳을 사(寺)라 한 것이다.

 

청(淸) 나라 주이준(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에 “상고하건대, 요(遼)ㆍ금(金)으로부터 원(元)에 이르기까지, 도성(都城)에 불사(佛寺)를 세우지 않는 해가 없었고, 명(明) 나라 때에는 대당(大塘) 사람치고는 불사를 세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1465~1487) 연간에는 경성(京城) 안팎에 칙명으로 세워진 사관(寺觀)이 6백 39군데나 되었다. 《청회전(淸會典)》에 상고하건대, 성조(聖祖) 강희(康熙) 4년도 예부(禮部)의 통계에 따르면, 직성(直省)에서 칙명으로 건립된 큰 사묘(寺廟)가 모두 6천 73군데이고 작은 사묘(寺廟)가 모두 6천 4백 9군데이며, 사사로 건립한 큰 사묘가 모두 8천 4백 58군데이고 작은 사묘가 모두 5만 8천 6백 82군데이며, 승(僧)이 21만 2백 91명이고 도(道)가 2만 1천 2백 86명이고 니고(尼姑)가 모두 8천 6백 15명이며, 사묘가 도합 7만 9천 6백 22군데이고 승ㆍ도ㆍ니고가 도합 24만 1백 93명이었다.” 하였다.

 

사찰을 상고하건대, 천축(天竺) 불국(佛國)에 5개의 정사(精舍)가 있으니, 첫째는 급고독원(給孤獨園), 둘째는 영취산(靈鷲山), 셋째는 미후강(獮猴江), 넷째는 암라수(菴羅樹), 다섯째는 죽림원(竹林園)이다. 방옹(放翁) 육유(陸游)는 말하기를 “천하의 명산(名山) 가운데 화산(華山)ㆍ청성산(靑城山)ㆍ모산(茅山)에만은 절이 없다.” 하였다. 왕사진(王士禛)은 말하기를 “제남(濟南) 노산(勞山)에도 절이 없었는데, 명 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감산대사(憨山大師)가 해인사(海印寺)를 노산에 건립했다가, 얼마 안가서 도류(道流)들의 소송으로 인해 견책을 받고 월동(粤東)에 가서 수자리살이를 했다.”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북관(北關)의 백두산(白頭山)에만 절이 없다. 우리나라 사찰의 시초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부도(浮屠) 혜순(惠順)이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중 굉연(宏演)이 찬한 《도선전(道詵傳)》에 “처음 도선이 당(唐)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불법을 배울 때, 일행선사가 삼한(三韓)의 산수도(山水圖)를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병이 나면 혈맥(血脈)을 찾아 침(針)도 놓고 뜸질도 하면 낫듯이, 산천(山川)의 병도 그와 같아서 혹 절을 건립하여 불상을 세우고 탑을 세우면 마치 사람에게 침 놓고 뜸질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비보(裨補)라 한다.’ 하였는데, 뒤에 도선이 5백개의 사찰을 비보하였다.” 했으니, 지금 곳곳에 있는 석불(石佛)ㆍ부도(浮圖)가 아마 그때에 세운 것인가 보다. 지금 사찰을 따져보건대, 8도(道)의 해협이나 산 구석구석에 사찰 없는 데가 없어, 크고 작은 절이나 암자의 숫자가 무려 천여 곳이나 된다.

 

승니(僧尼)

 

중국 승니의 시초로 말하면, 한(漢) 나라 때 양성후(陽城侯) 유준(劉俊)에게 출가(出家)를 허락함으로써 이가 곧 승(僧)의 시초이고, 낙양(洛陽)의 부인(婦人) 아반(阿潘) 등이 출가함으로써 이가 곧 니(尼)의 시초이며, 석가의 이모인 교담미(憍曇彌)는 곧 서역에서 출가한 비구니의 시조이다. 상고하건대, 여종옥(呂種玉)의 《언정(言鯖)》에 《번우잡기(番禺雜記)》를 인용하여 “광동(廣東)ㆍ광서(廣西) 지방에 있는, 가정을 거느리고 있는 중들을 소위 화택승(火宅僧)이라 한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서관(西關)이나 북관(北關) 지방에, 처자를 거느리고 집에 있는 중들을 재가승(在家僧)이라 한다. 라마승(喇嘛僧)은 곧 서장(西藏) 등지에 있는 번승(番僧)의 호칭인데, 이들은 주육(酒肉)도 먹고 처자도 거느려 속인(俗人)들과 똑같다.

 

승도(僧徒)의 명호(名號)

 

대화상(大和尙)은 석륵(石勒 후조(後趙)의 고조(高祖)를 가리킴) 때에 불도징(佛圖澄)을 부르던 호칭이고, 법사(法師)는 석륵 때에 구마라습(鳩摩羅什)을 부르던 호칭이다. 국사(國師)는 진(晉) 나라 초기에 구마라염(鳩摩羅炎)이 구자국(龜玆國)에 가자 구자국의 왕이 그에게 요청하여 불렀던 칭호이고, 대사(大師)는 당 중종(唐中宗)이 만회(萬回)를 법령공대사(法靈公大師)라 부르고 요진(姚秦 요장(姚萇)이 세운 후진(後秦)) 때에 라습(羅什)을 대사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아사리(阿闍梨)는 제자의 행동을 잘 바로잡아 준다는 뜻으로, 정행수(正行隨)라고도 한다. 좌수(座首)는 옛날에 고승(高僧)들이 강자(講者)를 고좌(高座)라 한데서 온 것이고, 선사 수좌(禪師首座)는 당 선종(唐宣宗)이 중 변장(辯章)을 삼교수좌(三敎首座)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장로(長老)는 《아함경(阿含經)》에서 말한 삼장로(三長老)이다. 상인(上人)은 불설(佛說)에 “속에는 지덕(智德)이 들어 있고 밖에는 수승한 행적이 있어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을 상인이라 한다.” 하였다. 승록(僧錄)은《승사략(僧史略)》에 “당 문종(唐文宗)이 처음으로 좌우(左右)의 승록을 두었다.” 하였고, 승정(僧正)은《석씨요람(釋氏要覽)》에 “진(秦) 나라 때 승략법사(僧䂮法師)를 승정으로 삼았다.”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필추(苾蒭)는 출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천축국에 필추라는 만초(蔓草)가 있는데, 이 풀이 오덕(五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출가한 사람을 비유하여 부른 것이다.

 

《송사(宋史)》에 상고하건대 “선화(宣和 휘종(徽宗)의 연호, 1119~1125) 원년에 ‘불호(佛號)를 대각금선(大覺金仙)이라 고치고 나머지는 선인(仙人)ㆍ대사(大士)라 하고 승(僧)은 덕사(德士)라 하여, 복식(服飾)을 바꾸고 성씨(姓氏)를 칭하며, 사(寺)는 궁(宮)으로, 원(院)은 관(觀)으로, 여관(女冠)은 여도(女道)로, 니(尼)는 여덕(女德)으로 각기 고쳐 부르라.’고 조서했다.” 하였다.

 

의발(衣鉢)

 

청(淸)나라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육조(六祖)의 가사(袈裟)는 달마(達磨)로부터 전해 온 것으로, 본디 서역의 제불(諸佛)들이 서로 법(法)을 전수받던 신기(信器)인데, 이것은 곧 서역의 굴순포(屈㫬布)이니 목면(木綿)으로 만든다. 발우[鉢]는 위주(魏主)가 하사한 데서 연유된 것인데, 검붉은 빛이 나는 도기(陶器)로 빛이 투명하여 물체가 비칠 만하다. 육조가 황매(黃梅 5조(祖) 홍인(弘忍)의 자)에게 법을 전수받을 때 이르던 축사에 ‘가사는 싸움의 발단이 되니, 너희들은 전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그 무리들이 그것을 보배로 여겨 수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잘 보전되었다. 당(唐)의 숙종(肅宗)ㆍ대종(代宗)과 송(宋)의 인종(仁宗)은 모두 그 가사를 대내(大內)에 들여오도록 요청하여 공양 예배했었는데, 뒤에는 모두 사자(使者)를 시켜 조계사(曹溪寺)로 돌려보내도록 조칙하였다.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불의명(佛衣銘)을 지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장거(莊渠) 위교(魏校)가 광동(廣東)의 독학사(督學使)로 나가서 불씨(佛氏)를 이단(異端)이라 하여 가사는 가져다 불태워 버리고 발우는 두들겨 부숴버렸다. 그런데 장거는 본래 자식이 있었으나 이 신기(信器)를 훼손한 이후로 후사가 끊기는 보응(報應)을 받았다고 한다.” 하였다.

 

소림사(少林寺)의 승군(僧軍)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소림사의 중에게 내린 교사(敎辭)가 있는데, 그 교사에 ‘왕세충(王世充)이 분수 아닌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여 천리(天理)를 어기므로 법사(法師) 등이 모두 기변(幾變)을 깨닫고 미리 묘인(妙因)을 알아차려 저 흉적(兇賊)을 사로잡고 이 정토(淨土)를 넓혔으므로 내가 듣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뜻밖에 지금 동도(東都)가 위급하니, 그들을 조석 간에 섬멸하여 유종(有終)의 큰 공을 세우고 좋은 규범을 후세에 보이라.’ 하였는데, 이때에 공을 세운 사람이 13명이었다.” 하였다.

 

왕세충(王世充) : 수(隋) 나라 사람. 성품이 교사하여 양제(煬帝)에게 벼슬하다가 양제가 시해(弑害)된 후 스스로 정제(鄭帝)라 칭하였다. 뒤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 : 당 태종〈唐太宗〉)과 싸워 크게 패하여 항복하였으나 장안(長安)에서 살해되었다.

 

배최(裵漼)의 소림사비(少林寺碑)에 “이른바, 지조(志操)ㆍ혜탕(惠瑒)ㆍ담종(曇宗) 등 가운데 담종만이 대장군(大將軍)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작위를 받지 않고 전지(田地) 40경(頃)을 하사받았으니, 이것이 소림사의 승병(僧兵)이 일어났던 전말이다.” 하였고, 《위서(魏書)》에 상고해 보건대, “효무제(孝武帝)가 5천 기(騎)를 인솔하고 전하(瀍河)의 서쪽 양왕(揚王)의 별사(別舍)에서 묵을 때, 사문(沙門)의 도유나(都維那)인 혜진(惠臻)이 옥새[璽]를 등에 지고 천우도(千牛刀)를 갖고서 따랐다.” 하였다. 《송사(宋史)》에는 “범치허(范致虛)가 중 조종인(趙宗印)을 선무사 참의관 겸절제군마(宣撫司參議官兼節制軍馬)에 충용시키자, 종인이 중들을 모아 1군(軍)을 조직하여 존승대(尊勝隊)라 호칭하고 또 동자(童子)로 1군을 조직하여 정승대(淨勝隊)라 호칭했다.” 하였다.

 

명 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소림사의 중 월공(月空)이 도독 만표(萬表)의 격문(檄文)을 받아가지고 송강(松江)에서 왜적(倭賊)을 방어할 때, 그의 무리 30여 명이 스스로 부오(部伍)를 만들어 철봉(鐵棒)으로 왜적을 격살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송(宋) 나라 정강(靖康) 흠종(欽宗)의 연호, 1126~1127) 연간에는 오대산(五臺山)의 중 진보(眞寶)가 같은 승도와 함께 산중에서 무사(武事)를 익혔는데, 흠종(欽宗)이 그를 편전(便殿)으로 소대(召對)한 다음, 산으로 돌아가서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금(金) 나라에 대항하라고 명하자, 그가 산에 돌아가 승병을 모아 주야로 고전 끝에 사찰이 모두 불타버리고 승병들이 금 나라에 함몰당했다. 이에 금인(金人)들이 백방으로 그에게 항복하라고 꾀었으나 끝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우리의 법(法) 가운데 구사(口四)의 죄(罪)가 있다. 내가 이미 송 나라 황제에게 죽기로 허락해 놓고 어찌 다시 망언(妄言)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태연히 죽임을 받았다.

 

덕우(德祐 남송(南宋) 공종(恭宗)의 연호, 1275~1276) 말엽에는 상주(常州) 만안(萬安)에서 의거(義擧)한 중이 있었는데, “세상이 위태할 땐 나가 장수 되었고, 난리 평정되자 다시 중이 되었네.[時危聊作將 事定復爲僧]" 하는 시를 지었다.

 

내가권법(內家拳法)이 있는데, 황백가(黃白家)의 내가권법에 대한 서적은 소대총서(昭代叢書)에 들어 있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정묘어정무예도보통지(正廟御定武藝圖譜通志)》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나라 선조(宣祖) 25년(임진)에는 승통(僧統)을 두어 휴정(休靜)ㆍ유정(惟政)ㆍ의엄(義嚴)을 장수로 삼아 승군을 거느리고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고, 또 영규(靈圭)는 제독(提督) 조헌(趙憲)의 금산(錦山) 싸움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곽진경(郭震卿 중 의엄(義嚴)을 가리킨다)은 환속(還俗)한 중인데, 인조(仁祖)가 도총섭(都摠攝) 의엄화상(義嚴和尙)에게 하사한 시에 “충의 빛내어 임금에 보답해야지, 연하 탐하여 산 속에 숨지 말아다오 [直將忠義酬明主 莫向煙霞棲碧山]" 하였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내고 뒤에 환속한 이가 바로 곽진경인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상고해보면, 곽진경의 일이 명 나라 신보(申甫)의 일과 같은데, 곽진경은 머리를 깎았을 당시에 장수가 되었고 신보는 모자를 쓴 뒤에 장단(將壇)에 올랐으니, 이 점이 같지 않다. 우리나라 8도의 사찰에 승장(僧將)과 승병(僧兵)을 둔 제도는 임진왜란 이후에 처음 생긴 것인데, 대저 소림사의 승병을 모방하여 설치된 것이다.

 

석씨(釋氏)에 관한 잡사(雜事)

 

【불골사리(佛骨舍利)】《제사기물기(諸寺奇物記)》에 “천계사(天界寺)에 불아(佛牙)가 있는데, 넓이는 1촌(寸)쯤 되고 길이는 5촌쯤 된다.” 하였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가정주(嘉定州) 앞 능운사(凌雲寺)에 1척(尺) 남짓한 불아(佛牙)가 있는데, 보시(布施)하는 이가 주사(朱砂)로 불아를 본떠다가 집에 돌아와 공양했다.” 하였다.

 

우리나라 영남(嶺南) 통도사(通度寺)에는, 당(唐) 나라 초기에 신라(新羅)의 중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천축(天竺)에 들어가 석가의 두골사리(頭骨舍利)를 얻어다가 절 뒤에 탑(塔)을 만들고 묻어 놓았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탑이 조금 기울어졌다. 우리나라 숙종(肅宗) 44년(을유, 1705)에 중 성능(聖能)이 중수(重修)하려고 그 탑을 헐자, 그 안에 쓰여 있기를 “외도 성능이 중수하리라.[外道聖能重修]" 하였고, 비단 보자기에다 부처의 두골(頭骨)을 싸 넣은 은함(銀函)의 크기가 마치 동이만 한데, 비단 보자기가 이미 천여 년을 지났는데도 썩지 않고 새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또 조그마한 금합(金盒)에 저장해 놓은 사리(舍利)는 광채가 유난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사리가 봉안된 비각(碑閣)은 이미 고쳐 세워졌다.

 

사리를 불전(佛典)에서 실리라(室利羅), 혹은 설리라(設利羅)라고도 하고 또는 골신(骨身), 불골(佛骨)이라고도 하는데, 곧 골분(骨分)에 연유된 것을 통칭 사리라 한다.

 

《광명경(光明經)》에 이르기를 “사리는 정혜(定慧)를 닦은 데서 얻어진 것이므로 매우 얻기 어려운 것인데, 사리를 얻는 것은 상등의 복전(福田)을 얻은 것이다.” 하였다. 《대론(大論)》에 이르기를 “뼈를 부순다고 사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요, 경권(經卷)으로 수양을 쌓아야 사리가 나온다.” 하였다. 사리에는 세 가지 빛깔이 있는데, 골사리(骨舍利)는 백색이고, 발사리(髮舍利)는 흑색이고, 육사리(肉舍利)는 적색이다. 보살(菩薩)과 나한(羅漢)이 다같이 세 가지가 있다.

 

정혜(定慧) : 정은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혜는 현상(現象)인 사(事)와 본체(本體)인 이(理)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복전(福田) : 여래(如來)나 비구(比丘) 등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이에게 공양하면 복이 되는 것이,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 다음에 수확하는 것과 같으므로 복전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남의 복전이 되어줄 만한 이를 말한다.

 

경권(經卷) : 부처의 교법을 적은 경율(經律) 등의 경전. 옛적에는 책이 두루마리로 되었으므로 권(卷)이라 한다.

 

불사리(佛舍利)에 대해 맹희(孟熙 명(明) 나라 유적(鎦績)의 자)의 《비설록(霏雪錄)》에 “불사리는 망치로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았는데, 제자(弟子) 하나가 시험삼아 망치로 치자 곧 부서졌다. 시험해 보면 사리는 동남(童男)ㆍ동녀(童女)의 발근(髮根)을 가져 끌어 올릴 수 있다.” 하였고, 《물리소지(物理小識)》에도 “동남ㆍ동녀의 발근은 사리를 따라오르게 할 수 있고 유향(乳香)을 오래도록 묵히면 거기에서 사리가 나올 수 있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지금 사람을 화장시킬 때 짚으로 만든 거적에다 물을 적시어 섶나무 위에 덮는데, 만일 올볏짚[早稻藁]으로 된 거적일 경우에는 그 회즙(灰汁)이 떨어져 시체의 뼈에 닿는 곳이 마치 사리와 같다.” 하였다. 패설(稗說)에 “사리를 서각(犀角 무소의 뿔) 위에 얹어 놓으면 즉시 녹는다.” 하였고,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영양각(羚羊角)으로 사리를 두들기면 부술 수 있지만, 다른 쇠붙이로는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는다.” 하였다.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일찍이 수도승(修道僧)을 화장(火葬)하는 데서 나온 사리를 얻었는데, 모양은 마치 콩[大荳]처럼 생긴 것으로 물 속에 들어가면 수면(水面)에 구멍이 생기고 또 여러 가지 괴상한 광채가 나타났다. 세조가 이를 제신(諸臣)에게 보이자, 어떤 사람이 시험삼아 서각(犀角)으로 만든 칼자루 위에 올려 놓으니, 잠깐 동안에 다 녹아버렸다. 세조가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리란 음정(陰精)이 응결된 것이고 서각은 곧 남방(南方)에 있는 지극한 양물(陽物)이기 때문에, 음이 양에 의해 녹는 것입니다.” 하였다.

 

 

세속에 전하기를 “사람이 사리를 삼키면 정신력이 배나 좋아진다 하므로, 어떤 사람이 사리를 삼켰으나 효험은 보지 못하고 뒤에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낙도(落島)로 귀양갔다.”고 하는데, 어떤이는 이에 대해 “사리를 삼킨 죄악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하였다.

 

《묵장만록(墨莊謾錄)》에 이르기를 “정화(政和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1111~1117) 7년(정유)에 진주(眞州) 교외(郊外)의 어떤 집에서 양(羊)을 도살했는데, 이 집에서 고기를 사간 사람이, 고기의 근육 속에 마치 옥처럼 빛이 찬란한 사리가 가끔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 마을 전 주민이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였고, 반지항(潘之恒)의 《반당소지(半塘小志)》에는 “위고(韋皐)에게는 앵무새[鸚鵡]의 사리가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승불(僧佛)에게서만 사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수(禽獸)에도 사리가 있는 것이다.

 

위고(韋皐) …… 있었다 : 당(唐) 나라 때 위고의 집에 매우 영리한 앵무새가 있었는데, 하루는 놀래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은 채 날개를 거두고 죽었다. 이를 불에 태우고 보니 사리(舍利)가 나왔으므로, 위고가 탑(塔)을 세워서 그 사리를 간직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사리주(舍利珠)를 저장해 놓았는데, 빛깔은 청색이다. 맨 처음 수정(水晶)으로 된 조그만 그릇에 담은 다음 금합(金盒)에 넣고, 이를 다시 은감(銀龕)에 넣은 다음 동발(銅鉢)로 맨 위의 피갑(皮匣)을 만들었으며, 겉에는 채색 보자기로 1백 겹이나 쌌다.

 

【마등가(摩騰迦)의 진신(眞身)】《석림연어(石林燕語)》에 “지금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에 마등가의 진신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다. 마등가가 처음 나올 때 백마(白馬)에 경(經)을 싣고 왔었는데, 그는 죽은 뒤에도 시체가 파괴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마르거나 썩지 않았다. 칠관(漆棺)에 담은 채 석실(石室)에 넣고는 문고리를 매우 튼튼하게 잠그고 그 열쇠는 그 고을 관아(官衙)에서 간직하는데, 구경하려는 사람은 곧장 열쇠를 요청하여 받아 가지고 촛불을 잡고 들어가야만 자세히 볼 수 있다.” 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장성(長城) 밖 백운탑(白雲塔)의 석감(石龕) 안에 요(遼) 나라 당시에 입정(入定)한 중의 시신이 있는데, 육신이 지금까지 부패되지 않은 채 약간의 체온이 있고 살결도 유연(柔軟)하다. 다만 눈을 감았고 숨을 쉬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입정(入定) : 마음을 한 경계에 정하고 고요히 선정(禪定)에 드는 것인데, 여기서는 죽은 중을 가리킨다.

 

유시법(留屍法)을 상고해 보건대, 《물리소지(物理小識)》에 “시체를 썩지 않게 하려면 금(金)이나 옥(玉), 수은[汞]ㆍ운모(雲母)로 염(斂)을 한다.” 하였다. 《확변록(確辨錄)》에는 “자기 스승이 앉아서 죽었다는 명목으로 자기 스승을 파는 무리가 있어, 망사(砂)에다 용뇌향(龍腦香)과 수은[汞]을 섞어 코에 넣고 누향(耨香)으로 마취시키면 육신이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하였다.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죽은 사람의 입에 진주(眞珠) 한 알을 넣어두면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 하였고, 남회인(南懷仁)의 《곤여외기(坤輿外記)》에는 “노국(露國)에 기름[脂膏]이 나는 나무가 있는데, 향기가 매우 짙으며 발이살마(拔爾撒摩)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나무의 기름을 시신에 바르면 천년이 지나도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서역(西域)에는 수천 년을 지난 조사(祖師)의 시체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부패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마등가와 요(遼) 나라 때 중의 시신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도 아마 이런 방법에서 온 것이 아닐까?

 

【승랍(僧臘)】승니(僧尼)가 머리 깎고 중이 된 때로부터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의 햇수를 승랍이라 한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백팔세노비구상찬후(百八歲老比丘像讚後)에 “석가가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나서 등창[背痛]으로 죽은 날까지의 수(壽)가 겨우 80세인데, 또는 79세라고도 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백세를 채운 이는 혜수나연제려야사(惠秀那連提黎耶舍)이고, 햇수가 이보다 좀더 많은 이는 아희나단도개(阿喜那單道開)이며, 징관(澄觀)이 1백 2세, 이조(二祖) 혜가(慧可)가 1백 7세, 영탄 일조(靈坦日照)가 1백 8세, 백승광 법장(帛僧光法藏)이 1백 10세, 나란타사(那蘭陀寺)의 계현(戒賢)이 1백 11세, 불도징(佛圖澄)이 1백 17세, 도방(道房) 조주(趙州)의 종심(從諗)이 1백 20세, 숭악(嵩岳)의 혜안(慧安)이 1백 28세, 승감승군행준도선(僧椷僧群行遵道仙)이 1백 30세, 이보다 1세가 더 많은 이가 이조(二祖) 아난(阿難), 광주(廣州)의 원명(圓明)이 1백 38세, 동토(東土)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1백 50세, 원적(圓寂)이 1백 55세, 보리류지(菩提流志)가 1백 56세, 삼장 발달라(三藏鉢怛羅)가 2백 70세, 승경법희(僧景法喜)가 3백여 세, 순타 삼장(純陀三藏)이 6백 세, 걸가국(磔伽國)의 대림보살(大林菩薩)이 7백 세, 중천축(中天竺)의 달마국다(達摩掬多)가 8백 세, 서축(西竺)의 장이(長耳)가 1천 세, 서천(西天)의 보장(寶掌)이 1천 72세였다. 그러나 불법(佛法)에서는 장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깨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깨치기만 한다면 7세에 깨쳤던 용녀(龍女)의 나이도 적은 것이 아니요, 깨치지 못하면 억겁(億劫)의 수를 누리더라도 많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전경(轉經)】양신(楊愼)의 《단연총록(丹鉛總錄)》에 “당시복완(唐詩服玩)을 상고하건대 ‘어떤 중[僧]이 수집 전경했다.’ 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이 글을 베껴 쓰는 것을 전경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서방(西方)의 풍속은 죽은 사람을 천도(薦度)하는 데 있어, 규목(規木)과 원목(圓木)으로 두 개의 수레바퀴 모양을 만들어, 하나는 범전(梵篆)으로 빈서(牝書)를 쓰고 하나는 범전으로 모서(牡書)를 쓰는데, 빈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모서는 밖에서 안으로 향한다. 빈륜(牝輪)은 아래에 놓고 모륜(牡輪)은 위에 놓은 다음 기계(機械)로 원형(圓形)으로 굴리는데, 삼먁모태(三藐母駄)란 것이다. 내가 아주(雅州)를 지나다가 서역의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의 말이 이러하였다. 그들의 글도 중국과 같은 것이 있으니, 국(國) 자의 경우 구(口) 자와 대(大) 자를 따라 쓰되, ‘’은 모서이고 ‘’는 빈서이다.” 하였다.

 

천도(薦度) : 법회(法會)ㆍ독경(讀經)ㆍ불공(佛供) 등을 베풀어 죽은 이의 영혼을 정토(淨土)나 천계(天界)에 왕생(往生)하도록 기원하는 일을 말한다.

 

나는 상고하건대, 지금 연도(燕都)의 인수사(仁壽寺)에서 라마승(喇嘛僧)이 송경(誦經)할 때 사용하는 목종(木鐘) 하나가 있어 용문(龍文)이 그려졌는데, 이 종은 쉬지 않고 한없이 자전(自轉)하다가 송경이 끝나면 종도 저절로 그치니, 이것이 바로 옛날 전경의 유가 아닌가 한다.

 

【전륜장(轉輪藏)】《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에 이르기를 “양(梁)의 부대사(傅大士)를 혹은 선혜대사(善慧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라고도 하는데, 이름은 흡(翕), 자는 현풍(玄風)이다. 이가 처음 전륜장(轉輪藏)을 만들었는데, 큰 층감(層龕) 한가운데다 기둥 하나를 세운 다음 8면(面)의 문을 열어놓고 모든 경(經)을 채워 놓았으니, 이것을 전륜장이라 한다.” 하였다.

 

【초학 타좌(初學打坐)】 석서(釋書)에 초학의 타좌법이 있는데, 보드라운 자리를 두껍게 깔고 헐렁한 옷차림에 허리띠를 푼 다음, 결가부좌(結跏趺坐)나 혹은 반가부좌(半跏趺坐)하여 허리ㆍ척추ㆍ머리ㆍ목의 뼈가 서로 버티게 하고, 귀는 어깨와, 코는 배꼽과 서로 마주 보도록 앉아, 허리ㆍ등성이ㆍ입술ㆍ이[齒]가 서로 잘 접착되게 하며, 눈은 약간 떠야 하고 완전히 감아서는 안 된다. 만일 완전히 감을 경우에는 졸음이 쉬 올 염려가 있다. 몸은 반드시 곧고 반듯하여 그 모습이 부도(浮屠)와 같아야 하고 앉기는 편안히 하여 자연스럽게 해야 하며 호흡은 코로 하되, 거칠거나 빠르거나 오래 멎거나 꽉 막아서는 안 되므로 내쉬고 들이쉬는 데에 모름지기 면면히 이어지게 해야 하는데, 어디까지나 억지로 하여서도 안 된다. 이리하여 일체 선악(善惡)에 대한 사량(思量)을 죄다 끊은 다음 염(念)하는 것을 곧 각(覺)으로, 각하는 것을 곧 무(無)로 하여 오래오래 지나가면 염할 나위도 없이 저절로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출정(出定) 할 때에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서 편안한 자세로 일어나야 한다. 만일 이 뜻을 터득하면 사대(四大)가 경쾌해지므로 이것이 이른바 안락법(安樂法)이다. 상고하건대, 이것이 바로 선가(禪家)의 입정술(入定術)이다. 도가(道家)에서도 이렇게 하는데, 이것이 곧 호수법(互修法)이다.

 

출정(出定) : 중이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사대(四大) : 세상 만물의 원소(元素)가 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가리키는데, 사람의 신체도 이 네 가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하여 인체를 지칭한 것이다.

 

불법(佛法)에 좌선(坐禪)에 대한 세 가지 법이 있다. 불설(佛說)에 “항상 스스로 깨달아서 사상(思想)을 끊어버리고 혼침(昏沈)한 데 빠져들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며, 외부의 것은 내부에 들여오지 않고 내부의 것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을 좌라 하며, 외부의 어떠한 감촉에도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좌라 한다.” 하였다.

 

【백골관(白骨觀)】진계유(陳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에 “백골관법(白骨觀法)은 곧 선가(禪家)의 조그마한 술(術)이다. 즉 ‘오른쪽 발의 엄지발가락에 종기가 나 문드러져서 농(膿)이 흘러나와 점점 정강이를 거쳐 무릎을 지나 허리에까지 이르고, 왼쪽 다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되며, 이어서 점점 농이 더 흘러 허리와 배ㆍ가슴을 지나 목과 이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문드러져 버리고 백골(白骨)만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백골 밖에 없다는 것을 역력히 관(觀)하여 한 부분도 빼놓지 않는다. 이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관한 지 얼마 뒤에는 다시 ‘백골을 관하는 자는 누구이며 백골은 또 무엇이냐.’고 생각한다면, 육체와 나는 언제나 두 가지로 분리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어 ‘백골도 점점 나와 분리되어 처음에는 1장(丈)쯤 분리되어 가다가 나중에는 5장ㆍ10장 내지 백장ㆍ천장까지 분리되어 간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백골까지도 나와 아무런 관계가 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계속해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와 육체는 본디 두 가지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내가 잠시 이 육체 안에 의탁해 있을 뿐, 어찌 이 육체가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아서 내가 항상 그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를 알게 된다. 이같이 해야만 그 죽고 삶이 천지와 동일할 수 있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좌선 입정(坐禪入定)은 바로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과 생각나는 것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곧 신(神)이 형(形)에서 가벼이 여의는 것을 힘쓰는 것이니, 그 이치가 도가(道家)와는 다르다. 도가는 형과 신이 서로 합하게 하고 석씨는 형과 신이 서로 여의게 한다. 불가(佛家)에 백골관이 있는데, 맨 처음에 ‘이 육체는 한 점(點)의 정기(精氣)에서 비롯하여 점점 임신(妊娠)을 거쳐 뱃속에서 자라 출생한 다음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노쇠한 시절, 병들어 죽은 시절을 거쳐, 시체가 퉁퉁 불어났다가 바싹 말라버리고 이어 오래되면 백골로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이미 백골이 되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나면 자기 몸을 항상 마치 백골처럼 여기게 된다. 이는 마음이 육체를 버리고 이탈해서 조금이라도 연연하는 근심거리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이는 석씨의 공부 중에 가장 하급이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이상의 말 대로라면 백골관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겠다.

 

【불씨(佛氏)의 오계(五戒)】살생(殺生)하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사음(邪淫)하지 않는 것, 망언(妄言)하지 않는 것, 음주(飮酒)하지 않는 것이다.

 

【육바라밀(六波羅密)】바라밀승(波羅密僧)은 피안(彼岸)에 이른 이를 말하고, 육바라밀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이다.

 

피안(彼岸) : 모든 번뇌와 고통의 세계인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서, 이상경(理想境)인 열반(涅槃)의 저 언덕을 말한다.

 

【십악(十惡)】몸의 세 가지[身三]인 살(殺)ㆍ도(盜)ㆍ음(淫), 입의 네 가지[口四]인 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어(妄語)ㆍ기어(綺語), 뜻의 세 가지[意三]인 질(嫉)ㆍ에(恚)ㆍ치(痴)이다.

 

【삼생(三生)】불경(佛經)에 의하면, 과거(過去)ㆍ현재(現在)ㆍ미래(未來)를 삼생이라 하였다.

【삼세(三世)】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다.

【육통(六通)】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안통(神眼通)ㆍ신이통(神耳通)ㆍ혜안통(慧眼通)ㆍ혜이통(慧耳通)이다.

 

【선(禪)의 삼종(三宗)】종밀(宗密)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 “첫째는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 둘째는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셋째는 진현심성종(眞顯心性宗)이다.” 하였다.

 

【교(敎)의 삼종】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에 “첫째는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 둘째는 밀의파상현성교(密意破相顯性敎), 셋째는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이다.” 하였다.

 

【벽지(辟支)와 탑(塔)】벽지는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서 독각(獨覺)이라 하였고, 탑은 곧 부도(浮屠), 또는 부도(浮圖)라고도 하는데, 정각(淨覺)이라는 것이다. 불설(佛說)에 “이것은 마음을 전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부도라 한다.” 하였으니, 즉 탑이다.

 

진자정(陳子鼎)이 말하기를 “운남(雲南)의 영취산(靈鷲山)에 수많은 사찰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대개 천축국(天竺國)의 영역(領域) 안에 있다. 이곳은 옛날 아육왕(阿育王)의 봉강(封疆)으로 그가 일찍이 8만 4천 개의 탑을 세웠고 대리석으로 된 탑기(塔基)도 수백 개나 되었는데, 모두가 그의 구지(舊址)이다. 송(宋) 나라 건덕(乾德 송 태조(宋太祖)의 연호, 963~968) 2년에 사문(沙門) 3백 명에게 조칙하여 천축국에 들어가서 사리(舍利) 및 범서(梵書)를 구해오게 한바, 개보(開寶 송 태조의 연호, 968~976) 9년에 비로소 그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기록해 놓은 노정기(路程記)에 ‘외봉(巍峯)ㆍ계족산(鷄足山)ㆍ우바국다석실(優婆掬多石室)ㆍ왕사성(王舍城)ㆍ취봉(鷲峯)ㆍ아난반신사리탑(阿難半身舍利塔)ㆍ필발라굴(畢鉢羅窟)이 있다.’ 했다.” 하였으니, 지금 상고하건대, 모두가 대리국(大理國)의 고적(古蹟)이다. 대개 그 당시 서번(西番)을 경유하여 천축국에 들어갔다가 되돌아 동쪽으로 대리국에 도착한 것은 남조(南詔)가 이미 몽씨(蒙氏)의 땅이 되어서 검촉(黔蜀)의 길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백고통(白古通)》에 “석가(釋迦)가 이해(洱海)에 있으면서 여래(如來)의 자리를 증득(證得)하였다.” 했고, 불전(佛典)에는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서로 일치한다. 또 석가가 죽을 당시에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있다가 뒤에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계족산과 영취산은 서로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데다 필발라굴(畢鉢羅崛)의 사리탑(舍利塔)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니, 《통기(通紀)》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오선록(吳船錄)》ㆍ《구당서(舊唐書)》가 모두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불국(佛國)이라는 것은 곧 전남(滇南)의 이해(洱海)에 있는 나라로, 8월달 밤에는 바다에서 산호수(珊瑚樹)가 나서 두어 길의 높이로 자라는데 어부들은 다 볼 수 있으며, 금사강(金沙江)의 양쪽 언덕은 모두 백사(白沙)인데 불서(佛書)에 이른 항하사(恒河沙)가 바로 이것이다.

 

청(淸) 나라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내가 경오년에 금릉(金陵)에 있으면서 장간(長干)의 승사(僧舍)에서 글을 읽었는데, 하룻밤에는 탑(塔)에서 방사(放射)되는 광채를 보았다. 처음에는 하나의 실낱 같은 빛이 탑문(塔門) 안에서 계속 나오다가 점차 각 문에서까지 다 빛이 나더니, 그 빛이 더욱 많아지고 더욱 빛나면서 동시에 각 문으로 뿜어내었다. 이 탑은 9층으로 층마다 문이 8개씩인데, 층마다 문을 4개씩 닫아 놓았으므로 9층 가운데 열린 문을 계산해 보면 모두 36개이다. 이 36개의 문에 오색(五色)으로 가닥이 진 36개의 금광(金光)이 나와서 층층이 서로 이어져 맨 꼭대기 층에까지 달하였고, 그 금광 한가운데에는 석가존상(釋迦尊像)이 각기 1좌(座)씩 나타났는데 연화(蓮花) 위에 앉은 모습으로 상(相)ㆍ호(好)가 광명하고, 당번(幢幡)과 보개(寶蓋)에는 향화(香花)가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은 진정 내가 목격한 것이다. 옛말에 ‘당승(唐僧)이 구해온 사리(舍利)를 탑 속에 넣어 두었던바 그 사리가 이따금 빛을 방사하는데, 그 모양이 진정 한 가지뿐이 아니었다.’ 하는데, 내가 본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서울의 원각사(圓覺寺) 탑은 한성부(漢城府) 대사동(大寺洞)에 있는데, 바로 이곳이 고려 시대 조계종(曹溪宗) 원각사(圓覺寺)의 유지(遺址)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탑은 원(元) 나라 때에 공주(公主)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연경(燕京)에서 조각한 것을 우리나라에 시사(施捨)한 것인데, 무릇 10층쯤 되고 네 귀퉁이의 돌은 모두 옥(玉)에 다음가는 돌이었다. 탑 전면(全面)에는 불상(佛像)ㆍ운기(雲氣)ㆍ규룡(虯龍)ㆍ영산회(靈山會)의 상(相)이 조각되었는데, 극히 정교하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구가 여기에 불을 놓아 태운 다음 철삭(鐵索)으로 탑신(塔身)을 묶고 끌어당겨 헐어버렸으므로, 지금 몇 층은 탑신 옆에 내려져 있다. 내가 일찍이 중제(仲弟) 및 친구 몇 사람과 함께 그 탑 밑에 가서 그 고적(古蹟)을 완상해 보니, 탑 맨 아래 제1층 동쪽 면(面)에 이 본탑(本塔)과 생김새가 똑같은 탑 하나를 조각해 놓았는데 불꽃이 한창 치솟아 오르는 모양이었고, 또 그 곁에는 몇 사람이 쇠투구[鐵兜]에 철삭을 묶어 가지고 탑 꼭대기에 씌운 다음 그를 끌어당겨서 헐어내리는 모양이 조각되었다. 아마 이 탑을 조각할 때에 이 탑이 왜구들에 의해 불타버릴 것을 미리 알고서 그런 모양들을 조각해 놓았는지, 마치 도참(圖讖)처럼 하나하나가 다 들어맞았으니, 역시 탑으로서는 이상한 것이다.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의 회암사(檜巖寺) 탑은 고려 때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말엽에 포천(抱川) 사람, 용문(龍門) 조욱(趙昱)의 후예인 조기(趙其)가 무뢰한 몇 사람과 함께 이 탑을 헐고 보물들을 훔쳐갔는데, 그 안에 순금소불(純金小佛) 6구(軀)와 순은소불(純銀小佛) 33구가 있었고, 옥함(玉函)에는 송(宋) 나라 때 송설재(松雪齋) 조맹부(趙孟頫)가 필사한 불경(佛經) 1박(縛)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곧 명주베에 쓴 금니서(金泥書)였다. 중들이 그 도굴범들을 관아에 고발하여 관아에서 그들을 체포해 가두었는데, 당시 재상(宰相)이던 번암(樊菴) 채제공(蔡濟恭)이 그 죄수들을 풀어주고 금불(金佛)ㆍ은불(銀佛)을 징수해 보니 금불 몇 구는 이미 용화(熔化)시켜버렸고, 아울러 자앙(子昂 조맹부(趙孟頫)의 자)의 진적(眞蹟)도 추심해보니 여러 장이 없어졌다. 이래서 헐어진 탑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절은 이미 텅 비어버리고 탑만 우뚝하게 서 있다. 탑 곁에는 나옹(懶翁)ㆍ무학(無學)ㆍ지공(指空)의 비(碑) 및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이 탑 역시 다른 탑과는 특수하다. 송도(松都)의 경천사(敬天寺) 탑도 국중에서 유명한 것이다.

 

【석가세존고행상(釋迦世尊苦行像)】왕세정(王世貞)의 석가세존고행상송(釋迦世尊苦行像頌)에 “수많은 겁(劫) 이전에는 향적여래(香積如來)였었다는데 지금 어째서 아직도 배우는 자리[學地]에 있으며, 마야부인의 뱃속에서 제천(諸天)의 옹호를 받으면서 설법을 했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사리시(闍黎侍) 하나도 없으며, 도솔궁(兜率宮)에서 상묘(上妙)의 천식(天食) 공양을 받았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겨우 가사(袈娑) 한 벌에 밥 한 그릇뿐이며, 장륙금강(丈六金剛)은 무너지지 않는 법신(法身)이라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파리하며, 인간 세상에 태어날 적에 두루 7보(步)를 거닐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두 다리가 마치 매어 놓은 것과 같으며,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자기만이 높다고 했다는데 지금은 어째서 묵묵하게 이(咦) 1자(字)도 말하지 않는지. 끝내는 누가 옳고 그른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咦) : 웃는 소리, 또는 크게 부르는 소리. 스승이 학인(學人)을 일깨워 줄 적에 법어(法語)의 결말에 뜻이 극진하고 말이 지극하여 내는 소리이다.

 

【여래성도상(如來成道像)】왕세정의 여래성도상송(如來成道像頌)에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명성(明星)이 출현하던 때에 갑자기 깨치니, 별천지(別天地)가 생겨나고 대삼천계(大三千界)가 모두 발 밑에 깔려 있으며, 아승기겁(阿僧祇劫 무수(無數)의 겁(劫)의 뜻)이 전부 다 한눈에 들어왔다. 수보리(須菩提)와 제석(帝釋)은 다 크게 기뻐하여 법륜(法輪)을 가지고 때로 이르는데, 파순(波旬)만은 빨리 열반(涅槃)에 들기를 요청하면서 ‘나의 마사(魔事)를 방해하지 말라.’ 하였으니, 참인지 거짓인지. 아, 끝내는 파순도 그렇고 운문(雲門)도 그렇다.” 하였다.

 

순(波旬) : 살자(殺者)ㆍ악자(惡者)의 뜻. 욕계(欲界) 제6천(天)의 임금인 마왕(魔王)의 이름. 그는 항상 악한 뜻을 품고 나쁜 법을 만들어 수도하는 사람을 요란시키고 사람의 혜명(慧命)을 끊는다고 한다.

 

운문(雲門)도 그렇다 : 문언선사(文偃禪師)가 소주(韶州) 운문산(雲門山)에 있었으므로, 전하여 그를 가리킨다. 어느 때 한 중이 찾아와서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부처는 똥 닦은 막대기이다.”고 대답한 그의 화두(話頭)가 있는데 여기서는, 불법이 광대하여 나쁜 파순(波旬)도, 좋은 운문도 따질 나위가 없다는 뜻으로 그냥 인용한 말인 듯하다.

 

【십지보살(十地菩薩)】《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십지보살은 ‘마혜수라(摩醯首羅)’라는 이름을 가진 천신(天神)인데, 일념(一念)으로 삼천세계(三千世界)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를 알므로, 용왕(龍王)이 비를 내릴 때는 이 마혜수라가 그 빗방울의 수를 죄다 헤아린다고 하였다.

 

【우담화(優曇花)】《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부처가 세상에 나오기 어려운 것이 마치 우담화가 피기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무화과(無花果) 나무에서 꽃이 피기 만큼 어렵다는 데 비유한 것이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는, 우담화는 천 년 만에 한번 꽃이 핀다고 한다.

 

【장생전(長生田)】동기창(董其昌)의 호주 복산 인수원 장생전 기(湖州福山仁壽院長生田記)에 “세상에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물건이 없는데, 장생전이 있다고 하니 옳은 말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생전이 중[僧]에게만은 꼭 있다. 대개 사바세계(娑婆世界) 밖에는 향적사(香積士)가 있고 반라(飯籮) 가에는 굶어죽은 사람도 많은데, 이 밭은 정전(情田)도 아니요 식전(識田)도 아니다. 이는 곧 위음왕(威音王)이 준 것이요 불조(佛祖)가 전등(傳燈)한 것이다. 보리(菩提)로 종자(種子)를 삼고 정진(精進)으로 농기구(農器具)를 삼고 노지백우(露地白牛)로 일꾼을 삼아, 1백 유순(由旬)의 넓은 땅을 갈면서 밭 경계도 나누지 않고 미래(未來)의 억겁세계를 거치면서 주인도 바꾸지 않으며, 앙산(仰山)이 벼를 베고 조주(趙州)가 의발(衣鉢)을 씻은 바가 다 이 물건이다. 옛날 석옥노인(石屋老人)이라는 이가 인수원(仁壽院)에서 이 뜻을 선양하여 석사(石嗣)가 사는 곳을 보방(寶坊 절의 미칭(美稱))으로 만들었는데, 나쁜 무리가 수백의 군중을 거느리고 떼를 지어 식륜(食輪)만 늘 추진하므로 법도(法道)가 쇠해지고 탐욕(貪欲)을 깨뜨리기 어렵게 되어, 천인(天人)의 공불(供佛)이 끊어지고 꽃 머금은 새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의중상인(宜中上人) 적감(寂鑑)이라는 이가 있어 계행(戒行)이 엄정하고 원력(願力)이 견고하여, 약간의 밭을 모으고 돌에 새겨 사실을 기록하여 영원히 후세에 남기었다. 대저 구주(九州)의 밭 중에 호주(湖州)가 소유한 것이 그 얼마나 되며, 호주의 밭 중에 인수원(仁壽院)에서 소유한 것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능곡(陵谷) 또한 봉래(蓬萊)에 있고 강산(江山) 또한 화서(禾黍)를 슬퍼하는데, 상인(上人)이 어찌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뜻에 어둡겠는가. 혹시라도 석옥노인(石屋老人) 같은 큰 선지식(善知識)이 있으면 모셔다가 이 산에 머무르게 하고 법석(法席)을 널리열어 무생인(無生忍)을 설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장생전이요 가사(袈裟) 한 쪽을 펴게 하는 것이 바로 끝없는 천맥(阡陌)이다. 상인이 예(禮)를 마치고 가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하였다.

 

위음왕(威音王) : 공겁(空劫 : 괴겁(壞劫) 다음에 세계가 완전히 공무(空無)하여졌을 때부터 다시 다음 성겁(成劫)에 이르기까지의 20중겁(中劫)을 말함) 시대에 맨 처음 성불(成佛)한 부처. 한없이 오랜 옛적, 또는 맨 처음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전등(傳燈) : 등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이므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교법(敎法)에 비유하는데, 이 교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하여 가는 것을 전등이라 한다.

 

보리(菩提) : 도(道)ㆍ지(智)ㆍ각(覺)의 뜻으로, 불교 최고의 이상(理想)인 불타(佛陀) 정각(淨覺)의 지혜를 말한다.

 

노지백우(露地白牛) : 한데 서 있는 큰 백우거(白牛車)를 말하는데, 일승법(一乘法 : 승은 타는 것으로, 곧 수레나 배에 중생들을 싣고 깨닫는 경계에 수송해 준다는 뜻)에 비유한 것이다. 《法華經 譬喩品》

 

앙산(仰山)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산 이름. 당(唐) 나라 말엽에 고승 혜적선사(慧寂禪師)가 산신(山神)의 지시를 받고 개산(開山)하여 절을 창건한 다음 불교를 크게 떨쳤으므로, 전하여 혜적선사를 가리킨다.

 

조주(趙州) : 당(唐) 나라 때 고승(高僧) 진제대사(眞際大師)가 조주의 관음원(觀音院)에 있었으므로 그를 일컫는데, 그는 조주에서 불교를 크게 떨쳤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네 가지의 겁(劫). 성겁(成劫)은 세계(世界)가 이루어져서 인류(人類)가 살게 된 최초의 시대를 말하고, 주겁(住劫)은 이 세계가 존재하는 기간을 말하고, 괴겁(壞劫)은 이 세계가 괴멸하는 기간을 말하고, 공겁(空劫)은 괴겁 다음에 이 세계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부터 다시 다음 성겁에 이르기까지의 중겁(中劫)을 말한다.

 

선지식(善知識) : 곧 선우(善友)의 뜻으로, 부처가 말해 놓은 교법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무생인(無生忍) :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준말. 불생 불멸(不生不滅)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安住)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곧 보살이 초지(初地), 또는 칠지(七地)ㆍ팔지(八地)ㆍ구지(九地)에서 얻는 깨달음이다.

 

【약왕(藥王)】계환(戒環)의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약왕보살(藥王菩薩)ㆍ약상보살(藥上菩薩) 두 법왕자(法王子)의 말에 ‘우리는 무량겁(無量劫)토록 세상의 양의(良醫)가 되어 입으로 무려 10만 8천 종류나 되는 사바세계의 초목 금석(草木金石)을 맛보았다.’ 했다.” 하였다.

 

【지옥(地獄)】《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본래는 8대지옥(大地獄)이나 각기 16개씩의 지옥이 딸려 있어 이를 근변(近邊)이라 하는데, 모두 합하면 1백 36개의 지옥이 된다. 혹은 2백 72개의 지옥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첫째 알부타(頞部陀), 둘째 니랄부타(尼剌部陀), 셋째 알찰타(頞哳吒), 넷째 확확파(臛臛婆), 다섯째 호호파(虎虎婆), 여섯째 온발라(嗢鉢羅)인데 일명(一名)은 청련화(靑蓮華)이고, 일곱째 발특마(鉢特摩)인데 일명은 홍련화(紅蓮華)이고, 여덟째 마하발특마(摩訶鉢特摩)인데 일명은 대홍련화(大紅蓮華)이다. 이상의 지옥은 매서운 추위가 엄습하는 곳이기 때문에 팔한지옥(八寒地獄)이라 한다. 첫째 등활(等活), 둘째 흑승(黑繩), 셋째 중합(衆合), 넷째 호환(嘷喚), 다섯째 대호환(大嘷喚), 여섯째 초열(焦熱), 일곱째 대초열(大焦熱), 여덟째 무간(無間)인데 일명은 아비(阿鼻)이다. 이상의 지옥들은 매서운 더위가 엄습하는 곳이기 때문에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 한다. 일본(日本)에도 지옥이 있는데, 모두가 높은 산마루에 있다. 이들 산마루에는 항상 불이 이글이글하여 온천(溫泉)이 끊이지 않는다. “천축국(天竺國)이나 중국의 높은 산에도 다 지옥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온천(溫泉)이 흐르고 불꽃이 발발하는 산을 속칭 지옥이라 한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지옥에 대한 설이 옛적에는 전혀 없었는데,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 윤회(輪回)ㆍ보응(報應)의 설이 있게 됨에 따라 지옥의 설도 있게 된 것이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지옥에 대한 설이 송옥(宋玉)의 초혼편(招魂篇)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나오는 장인(長人)이나 토백(土伯)야차(夜叉)나찰(羅刹)의 무리이고 난토(爛土)뇌연(雷淵)도산(刀山)ㆍ검수(劍樹)의 지옥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문인(文人)의 우언(寓言)이기는 하지만 뜻이 그럴싸하다. 그래서 위진(魏晉) 이후의 문인들이 그 말을 부연하여 석씨(釋氏)의 글에다 부합시켰다. 옛날 송(宋) 나라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염입본(閻立本)이 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를 그렸는데,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이 그것을 얻어서 도리어 더 심하게 부연시켜 놓았다.’ 하였으니, 실은 송옥의 글이 그 허수아비[俑]가 되었던 것을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장인(長人) : 고대(古代) 만이(蠻夷)의 국명(國名).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의하면 “장인국(長人國) 사람은 키가 3~4장(丈) 씩이나 된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장인국 사람을 가리킨다.

 

토백(土伯) : 땅속의 괴물(怪物). 곧 땅속 제후(諸侯)의 장(長)이라는 데서 토백이라 한다.

야차(夜叉) : 8부중(部衆)의 하나. 약차(藥叉)라고도 하는데, 나찰(羅刹)과 함께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의 권속이 되어 북방(北方)을 수호한다고 한다.

 

나찰(羅刹) : 가외(可畏), 또는 식인귀(食人鬼)의 뜻으로, 악귀(惡鬼)의 이름이다. 야차(夜叉)와 함게 비사문천왕의 권속이 되었다 한다.

 

난토(爛土) : 토사(土司)의 이름. 토사란 변방(邊方)의 토만(土蠻)을 맡은 벼슬의 호칭이다.

뇌연(雷淵) : 뇌신(雷神)이 산다는 못을 말한다.

도산(刀山) : 도검(刀劍)의 산. 십지옥(十地獄)의 하나이다.

검수(劍樹) : 곧 검림지옥(劍林地獄)을 가리키는데, 이 지옥에는 뜨거운 철환(鐵丸)이 과일처럼 달려 있고 높이 24유순(由旬)이나 되는 검의 숲이 있다고 한다.

 

잡조(五雜組)》에 “사람이 죽어서 염라왕(閻羅王)이 된 이로는 한금호(韓擒虎)ㆍ채양(蔡襄)ㆍ범중엄(范仲淹)ㆍ한기(韓琦) 같은 이들이 전기(傳記)에 누누이 나타나 있고, 근세의 해 서(海瑞)ㆍ조용현(趙用賢)ㆍ임준(林俊) 같은 이들도 다 어떤 사람이 저승[冥間]에서 그들을 보았다 한다.” 하였다.

 

불경에 의하면, 명부(冥府)에는 선악(善惡)의 장부(帳簿)를 두어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복적(福籍)에 기록하기 때문에 선근(善根)을 심은 자를 복전(福田)이라 하au,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일체중생이 지옥에 떨어져서 모진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제도(濟度)할 것을 서원(誓願)하고, 늘 지옥에 가서 육환장(六環杖)를 휘둘러 옥문(獄門)이 열리면 신수(神水)로써 고통받는 중생을 씻어주고 잇따라 업풍(業風)을 불어 형체를 이루어 준다고 한다.

 

【지옥시왕(地獄十王)】불경 중에 《시왕경(十王經)》이 있는데, 이 시왕 중 염마왕(閻摩王)은 혹 염마라(閻摩羅)라고도 하고 또는 가운데 글자를 생략하여 염라(閻羅)라고도 하니, 이를 번역하면 쌍왕(雙王)이다. 《우란분기(盂蘭盆記)》에 이르기를 “오라버니와 누이동생이 모두 지옥주(地獄主)가 되었는데, 오라버니는 남자에 대한 일을 다스리고 누이동생은 여자에 대한 일을 다스리기 때문에 쌍왕이라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시왕경》의 시왕 중, 첫째는 진광왕(秦廣王) 부동(不動), 둘째는 초강왕(初江王) 석가문불(釋迦文佛), 셋째는 송제왕(宋帝王) 문수(文殊), 넷째는 오관왕(五官王) 보현(普賢), 다섯째는 염마왕(閻摩王) 지장(地藏), 여섯째는 변성왕(變成王) 미륵(彌勒), 일곱째는 대산왕(大山王) 약사(藥師), 여덟째는 평등왕(平等王) 관음(觀音), 아홉째는 도시왕(都市王) 세지(勢至), 열째는 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 아미타(阿彌陀)인데, 오도(五道)는 곧 지옥도(地獄道)ㆍ아귀도(餓鬼道)ㆍ축생도(畜生道)ㆍ인도(人道)ㆍ천도(天道)이다.

 

【사자좌(獅子座)】불서(佛書)에 이르기를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방장(方丈)은 3만 2천의 사자좌를 수용할 수 있어, 제삼선천(第三禪天)인 변정천(遍淨天)의 사람 60명이 함께 침두(鍼頭)에 올라앉아 설법을 들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는 마치 경(經)의 주설(注說)에 “염부리(閻浮提)에다 침봉(針鋒) 하나를 세워놓고 도솔천(兜率天)에서 겨자씨[芥子] 하나를 굴러내려 이 겨자씨가 침봉에 꽂히도록 한다.”는 뜻과 같은 예(例)이다.

 

【목어(木魚)와 건치(犍稚)】상고하건대, 지금 사찰에 달아놓은 목어(木魚)에 대해, 석씨(釋氏)가 이르기를 “염부리(閻浮提)는 곧 거오(巨鰲)의 등에 실린 곳으로, 거오가 가려움증이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게 되면 산이 따라 진동하기 때문에 그 거오의 형상을 본떠 달아놓고 치는 것이다.” 하였고, 《석씨요람(釋氏要覽)》에는 이르기를 “종(鐘)ㆍ경(磬)ㆍ석(石)ㆍ판(板)ㆍ목어(木魚) 등 두들겨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대중을 집합시킬 수 있는 것을 모두 건치(犍稚)라 한다.” 하였다.

 

【독고(獨鈷)】석전(釋典)에 의하면, 독고(獨鈷)ㆍ삼고(三鈷)ㆍ오고(五鈷)를 금강저(金剛杵)라 하는데, 진언종(眞言宗)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승복(僧服)】가사(袈裟)에 대해, 양신(楊愼)이 말하기를 “가사를 수전의(水田衣), 도와의(稻哇衣)라고도 한다.” 하였고, 내전(內典)에는, 가사(毠㲚), 또는 소요복(逍遙服)ㆍ무진의(無塵衣)라고도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무구의(無垢衣), 또는 이진의(離塵衣)ㆍ공덕의(功德衣)ㆍ대의(大衣)ㆍ승가리(僧伽梨)라 명명하였다.

 

《원시비서(原始祕書)》에 상고해보면 “당(唐) 나라 무후(武后) 조(曌)가 풍소보(馮小寶)를 총애하여 그를 중[僧]으로 만들고 이름을 설회의(薛懷義)라 하여 양국공(梁國公)을 봉하였기 때문에 의(衣)와 모(帽)를 모두 조복(朝服) 모양에 맞추어, 직철(直綴)이니, 편삼(偏衫)이니, 관의(寬衣)니 이름한 데다 금수(錦繡)를 더 넣고는, 살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겨 가사(袈裟)를 더하고 발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신을 신도록 하였다. 관(冠)은 오복(五福), 또는 비로(毗盧)라고 하는데, 혹은 팔보(八寶)로 장식하고 금옥(金玉)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무릇 불상(佛像)을 그리는 데 있어 당상(唐像)이니, 범상(梵像)이니 하는 설이 있게 된 것이 무후(武后)에게서 비롯되었다.” 하였다.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에 “중들이 입은 옷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안타회(安陀會)인데, 즉 5조(條)의 하품의(下品衣)로 명칭을 행도(行道)라고도 하고 또는 무츤신등의(務襯身等衣)라고도 한다. 둘째는 울다라승(鬱多羅僧)인데, 즉 7조의 중품의(中品衣)로 입중설법의(入衆說法衣)라고도 한다. 셋째는 승가리(僧伽梨)인데, 즉 9조 내지 25조의 상품의(上品衣)로 복전의(福田衣)라고도 한다. 이 복전의는 곧 수전(水田)에서 곡식이 나는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궁성(宮城)이나 마을에 들어갈 때에 곧 이 옷을 입는다.” 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라마승(喇嘛僧)은 곧 서장(西藏)의 번승(番僧)인데, 이들은 모두 붉은 선의(禪衣)를 입고 누른 죄계관(左髻冠)을 쓰고 팔뚝을 드러내고 맨발인데다 손발에는다 사슬을 채우고 귀에는 금고리를 달고 팔뚝에는 용 무늬[龍文]를 자자[刺]하였다. 대보법왕(大寶法王)은 황색보로(氆氌 양털로 짠 모직물)로 된 관을 썼는데, 말 갈기 같은 털이 달렸고 모양은 마치 가죽신처럼 생겨 높이가 두 자 남짓하며, 또 금으로 짠 선의(禪衣)를 입었는데, 소매가 없이 왼쪽 어깨에 걸쳐 온몸을 옷으로 쌌다. 그리고 옷깃 오른쪽 겨드랑 밑으로 오른 팔뚝을 드러내었다. 반선(班禪)은 금 삿갓[金笠]을 쓰고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다.” 하였다.

 

유 득공(柳得恭)의 《난양록(灤陽錄)》에 “서장(西藏)의 중들은 옷 색깔을 누르게도 하고 붉게도 하는데, 누른 빛을 아주 보배로 여긴다. 그 옷의 생김새는 깃만 있고 소매는 없는데, 어깨에 걸쳐 등을 가리고는 두 팔뚝으로 여미고 다닌다. 이 옷이 마치 우리나라의 천의(薦衣)라는 것과 흡사하다. 천의는 화음(華音)으로 선의(禪衣)라는 것인데, 서장의 중들을 본받아 왔던 원(元) 나라 풍속을 고려(高麗)가 또 그를 본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관(冠)은 마치 조그마한 포단(蒲團)처럼 생겼는데, 황색으로 물들인 양모(羊毛)가 여기저기에 장식되어, 머리에 쓰면 머리털이 헝클어진 것과 같이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승모(僧帽)에 곡갈(曲葛)이 있고, 승립(僧笠)에 굴립(屈笠)ㆍ약립(蒻笠)ㆍ송락(松絡)이 있고, 승의(僧衣)에 장삼(長衫)ㆍ주차이(周遮衣)가 있다.” 하였다.

 

【화만(華鬘)】석전(釋典)에 의하면, 화만은 본디 서역(西域)에 사는 여인(女人)들의 수식(首飾)이었는데,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에도 혹 씌운다고 하였다.

 

【여의(如意)】이는 마음의 표신(表信)이기 때문에 보살(菩薩)들이 다 갖는 것인데, 모양은 마치 운엽(雲葉)처럼 생겼고, 또는 전서(篆書)의 심(心) 자와 같기도 하다. 《수다라요의경(修多羅了義經)》에 “마니(摩尼)는 곧 여의(如意)라는 것이다.” 하였다.

 

【석장(錫杖)】석도(釋徒)들이 뱀 같은 것들을 물리치기 위해 짚는 것이다.

【수주(數珠)】일명(一名)은 염주(念珠)인데, 백 8개이다. 서역(西域)에서는 사람의 지골(指骨)이나 상황(象璜)으로 만들어서, 진언(眞言)을 외거나 불호(佛號)를 염(念)할 때 그 수를 헤아리는데, 중들은 이를 보리주(菩提珠)라 한다. 원숭이가 이 수주를 보면 근심을 하므로, 승(僧)이나 니(尼)가 다 목에 걸어서 가슴에 드리운다.

 

【범패(梵唄)】승 적지(僧適之)의 《금호자고(金壺字考)》에 “범패의 음(音)은 범패(范敗)인데, 선음(禪音)으로 읊는 소리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의 사문(沙門)은 이를 인도(引導)라 이름하는데, 마치 세속(世俗)의 장가(長歌)와 같은 것이다.

 

먼저 중이 되었다가 뒤에 머리를 기르고 벼슬한 사람으로는,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篇)》에서 말한 송(宋) 나라 탕혜휴(湯惠休), 당(唐) 나라 가도(賈島)ㆍ송경(宋京)과 우리나라의 곽진경(郭震卿)이다. 먼저 벼슬하다가 뒤에 머리 깎고 중이 된 사람으로는 남제(南齊)의 유협(劉勰), 양(梁) 나라 유지린(劉之遴)ㆍ장찬(張纘), 송 나라 요덕조(饒德操)인데 모두가 명사(名士)이며, 명(明) 나라 방이지(方以智)도 명사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에 승달(僧炟)이 있다.

먼저 니(尼)가 되었다가 뒤에 황후(皇后)가 된 여인은 당(唐) 나라 무후(武后) 조(曌)이다.

 

【도첩(度牒)】무릇 평민(平民)으로서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는 데는, 관(官)에서 도첩을 주어야만 머리를 깎을 수 있다.

 

【축발(祝髮)ㆍ계도(戒刀)】축발은 곧 치발(薙髮)의 뜻이요 치발은 곧 민둥머리가 되도록 머리를 깎는다는 것인데, 머리를 깎은 후에 계(戒)를 받는다. 《물리소지(物理小識)》의 척두불용도법(剔頭不用刀法)에 “석황(石黃)ㆍ석회(石灰)ㆍ유황(硫黃) 각 1돈[錢]을 곱게 분말하여 물에 타서 머리에 발라 1시간쯤 지난 다음에 빗[抿子]만 가지고 긁어내리면 머리가 곧 다 깎여진다.” 하였다.

 

【응량기(應量器)】혹은 양기(量器)라고만 칭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곧 중의 발우[鉢]이다. 《능엄경(楞嚴經)》에 “아난(阿難)이 응기를 가지고 성(城) 안에 들어가 차례로 행걸(行乞)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것이 곧 응량기이다.” 하였다. 《목련경(目連經)》에도 나타나 있다.

 

총론(總論)

 

도가(道家)의 서적은 주(周) 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한대(漢代)에 성하고 진(晉)ㆍ당(唐) 시대에 극치를 이루었으며, 석씨(釋氏)의 서적은 한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양대(梁代)에 성하고 수(隋)ㆍ당 시대에 극치를 이루었다. 이 모두가 남송(南宋) 시대에 와서 조금 뜸해졌다가, 석씨는 다시 원대(元代)에 와서 극성하여졌고, 도교 역시 그럴싸하게 전개되었으나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또다시 약세를 보였다.

 

유흠(劉歆)의 《칠략(七略)》에는 석씨를 논한 것이 없고 왕검(王儉)ㆍ임방(任昉)의 석전(釋典)은 다 위작(僞作)이며,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은 석(釋)ㆍ도(道) 2가(家)를 별도로 기록하였고,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도 대략 그와 같다. 《신당서(新唐書)》경적지에서는 이를 자가(子家)의 끝에 붙였고 《통고(通考)》에서는 이를 따라 편성하였다. 대체로 도가는 본디부터 구류(九流)에 들어 있으니, 석전만이 별도로 열거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도장(道藏)과 석장(釋藏)은 편질(篇帙)이 매우 많고 또 본디 방외(方外)의 학설이고 보면 문류(門類)를 나누어 별도로 기록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니 《신당서》경적지 및 《통고》의 예와 같이만 하여도 타당할 것 같다.

 

구류(九流) : 아홉 학파(學派). 즉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이다.

 

그런데 《구당서(舊唐書)》에는 석전을 수록하지 않았고, 청나라 때 만든 도서집성(圖書集成)ㆍ사고전서(四庫全書)ㆍ사고회요(四庫薈要)에도 모두 도가ㆍ석가를 수록하지 않았으니, 아무리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치더라도, 역대의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듯싶다. 내가 지금 도가와 석가를 논하는 것은, 세상에서 유가(儒家)ㆍ도가ㆍ석가 삼교(三敎)라 일컬어 마치 솥발[鼎足]처럼 평등하게 여겨온 지 오래이기 때문에, 도가ㆍ석가는 오로지 전고(典考)로만 삼기 위해 이 논을 지은 것이다. 삼교를 논한 것으로 말하자면, 당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삼교론형(三敎論衡)》이 있으며, 안연년(顔延年)의 《삼교주영(三敎珠英)》은 1천 권에 달하도록 많다.

 

유도(儒道)는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불도(佛道)의 경우는 그 유래가 훨씬 늦은데도 일종의 영혜(靈慧)만으로 어쩌면 그렇게 인물(人物)을 가장 쉽게 감화(感化)시켰는지 모르겠다.

 

반지항(潘之恒)의 《반당소지(半塘小志)》에 의하면 “치아탑(雉兒塔)은 천불각(千佛閣) 밑에 있고, 옛날 여주(廬州)에는 앉아서 죽은 고양이가 있었고, 협중(峽中 촉(蜀) 지방 삼협(三峽)의 약칭. 구당협(瞿唐峽)ㆍ무협(巫峽)ㆍ서릉협(西陵峽))에는 앉아서 죽은 원숭이가 있었고, 이공택(李公擇 공택은 송 나라 이상(李常)의 자)의 집에는 앉아서 죽은 뱀이 있었고, 위고(韋皐)의 집에는 앵무새[鸚鵡]에게서 사리(舍利)가 나왔고, 영녕현(永寧縣)에서는 서서 죽은 참새가 있었고, 심지어 승 상(僧爽)에게는 설법을 듣는 닭이 있었고, 생공(生公)에게는 설법할 적에 머리를 끄덕거린 돌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하였다.

 

생공(生公) …… 있었으니 : 양(梁) 나라 때 고승(高僧) 생공이 호구사(虎丘寺)에서 경(經)을 강할 적에 돌을 모아 놓고 그들을 청중(聽衆)으로 삼았는데, 돌들이 설법을 듣고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도보(陶輔)의 《상유만지(桑楡漫志)》에 “유가는 천리(天理)를 순종하는 자이고 도가는 천리를 우회(紆回)하는 자이고 석가는 천리를 벗어나는 자이다.” 하였고, 팽여양(彭汝讓)의 《목궤용담(木几冗談)》에는 “석가에서는 ‘도도(屠刀)만 놓아버리면 당장에 성불(成佛)할 수 있다.’ 하였고, 도가에서는 ‘항상 청정(淸淨)하면 문득 천존(天尊)을 볼 수 있다.’ 하였고, 유가에서는 ‘아무리 하우(下愚)라도 다 요순(堯舜)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였다.

 

도도(屠刀) : 백정의 칼인데, 여기서는 곧 집착을 말한다.

 

용촌(容村) 이광지(李光地)는 말하기를 “도가의 요지는 정(精)ㆍ기(氣)ㆍ신(神)이고, 불가의 요지는 계(戒)ㆍ정(定)ㆍ혜(慧)이니, 2씨의 요지가 서로 같은 바가 있다. 대개 이른바 도가에서 말하는 양정(養精)은 곧 불가에서 말하는 계이고, 도가에서 말하는 양기(養氣)는 곧 불가에서 말하는 정이고, 도가에서 말하는 양신(養神)은 곧 불가에서 말하는 혜이다. 그러나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도가에서는 비록 신을 말하지만 소중하게 여긴 것은 기이니, 이는 신을 빌어 기를 단련하고 성(性)을 길러 수명을 늘이는 것이요, 불가에서는 비록 기를 말하지만 소중하게 여긴 것은 신이니, 이는 형체를 떠나서 신만 존재시키고 마음을 밝혀서 성을 보는 것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성(性)은 유가에서 말하는 신(神)이고, 도가에서 말하는 명(命)은 유가에서 말하는 기(氣)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심(心)은 유가에서 말하는 의(意)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성은 유가에서 말하는 심이다. 유교(儒敎)의 경우, 그 마음을 바르게 했을 때 그 마음의 소재를 모를 리 없고, 그 뜻을 성실히 했을 때 그 뜻의 소재를 모를 리 없고, 그 기를 기를 때 그 기의 소재를 또한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은 이(理)인데, 이는 곧 성(性)이요 성은 곧 명(命)이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유가의 글은 마음을 간직하고 성을 기르는 학문이고, 도가의 글은 마음을 닦고 성을 수련하는 공부이고, 불가의 글은 마음을 밝히고 성을 보는 요지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유도는 인(人)에 밝은 것이고, 도가는 신(神)에 밝은 것이고, 불가는 귀(鬼)에 밝은 것이다.

 

진광정(陳光庭)이 말하기를 “한 친구가 ‘삼교(三敎 유(儒)ㆍ불(佛)ㆍ도(道))가 동일한 것인가?’고 묻기에, 내가 ‘동일하다.’ 하였고, ‘어째서 동일한가?’고 묻기에, 내가 ‘목적은 하나같이 인민을 제도(濟度)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한 처사(處士)가 ‘그렇다면 다른 바가 없는데, 왜 꼭 겸해야 하는가.’고 묻기에 내가 ‘공자(孔子)의 집대성(集大成)은 겸하지 않고서도 겸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도가(道家)는 사람을 제도하는 데 있어, 정(精)ㆍ기(氣)ㆍ신(神)을 모아서 영아(嬰兒)로 환원시키기도 하고 자유자재로 왕래하여 하늘에도 나고 땅에도 난다. 그러나 만물이 다 피폐되는 것이거니 어찌 죽지 않는 이치가 있겠는가. 불가(佛家)는 사람을 제도하는 데 있어, 탐진(貪嗔)을 버리고 육체를 벗어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며 하늘과 땅을 밝게 안다. 그러나 만물이 다 내것[我]이거니 어찌 공(空)에 도피할 데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의 교(敎)만은 그와 달라, 임금은 임금 노릇을, 신하는 신하 노릇을,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자식은 자식 노릇을, 남편은 남편 노릇을, 아내는 아내 노릇을 하여, 제각기의 직분에 순종하고 천성(天性)에 따르기를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이것이 곧 장생(長生)이요,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와서 어디에 집착됨이 없으니 이것이 곧 진공(眞空)이다. 성인(聖人)의 도는 천리를 순종하는 것밖엔 아무것도 없다. 어찌 도가나 불가처럼 이러니저러니 하는 잡다한 논설이 있겠는가.’ 했다.” 하였다.

 

별고(別考)

 

한(漢) 나라 영평(永平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연호, 58~75) 7년에 명제(明帝)의 꿈에, 몸은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이마가 햇빛처럼 빛나는데다 신장(身長)이 장륙(丈六)이나 되는 사람이 공중을 날아서 전정(殿庭)에 들어왔다. 꿈을 깬 명제가 다음날 이 사유를 부의(傅毅)에게 묻자, 부의가 말하기를 “신(臣)이 듣건대, 서역(西域)에 있는 불경(佛經)이 모두 날아다니는 큰 신통력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폐하의 꿈에 현신한 것입니다.” 하므로, 명제가 깨닫고 즉시 우림랑(羽林郞) 채암(蔡愔), 박사(博士) 진경(秦景)ㆍ왕준(王遵) 등 13명을 서역에 보내어 불법을 들여오게 하였다. 그러자 채암 등 일행이 총령(葱嶺)을 넘어 서역의 천축국(天竺國)에 들어가 불법을 맞아오다가 중로(中路)인 월지국(月氏國)에 이르러, 민둥머리에 방포(方袍)를 걸치고 상모(相貌)가 기이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범승(梵僧)을 만났다. 이에 그들과 함께 각기 백마(白馬)를 타고 석가의 진상(眞像)과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싣고서 동쪽으로 건너와 복명하였으니, 때는 벌써 영평 10년이 되었다. 명제는 매우 기뻐하며 친히 불상을 맞아다가 홍려사(鴻臚寺)에 봉안하는 한편, 도상(圖像)을 그려놓고 청량대(淸涼臺)에 나아가 정례(頂禮)하였으며, 잇달아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하고 이존(二尊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가리킴)에게 요청하여 사원(寺院)에 가서 설법하게 하였다.

 

이 해 겨울에 가뭄이 들자, 오악도사(五嶽道士) 하정지(賀正之)ㆍ저선신(褚善信) 등 6백 90인이 서로 “황제가 우리의 도교를 버리고 불교만 숭상하니, 마음이 매우 불쾌하다.” 하고는 곧 도중(徒衆)을 거느리고 도경(道經)을 갖고서 경사(京師)에 이르러 표(表)를 올리기를 “불교와 우리 도교를 비교하여 그 진위(眞僞)를 시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명제가 상서령(尙書令) 송상(宋庠)을 시켜, 그들을 장락궁(長樂宮) 앞으로 불러들여 놓고 조칙하기를 “도사(道士)와 승(僧)들은 원소일(元宵日)에 백마사 남문(南門) 밖으로 집합하라.” 하고는 동(東)ㆍ서(西) 양단(兩壇)을 설치해 두었다가 그날에 이르러 시험을 보았다. 그리하여 서단(西壇)에서는 도경(道經)을 불태우는데, 6백여 권이 순식간에 다 타버리고 노자(老子)의 《도덕경》 5천언(言)과《청정경(淸淨經)》 1권만 남았는데, 이 밖에 전하는 도가의 서적은 후세에 두광정(杜光庭)이 찬한 것들이다. 그리고 동단(東壇)에서는 불경을 불태우는데, 《사십이장경》이 조금도 타지 않고 5색(色)의 신광(神光)만이 나타나며 하늘에서는 보화(寶花)가 뿌려지고 선악(仙樂)이 다투어 울렸으므로, 군중들이 다 미증유(未曾有)를 찬탄하였다.

 

오악도사(五嶽道士) : 중국 오대 명산(五大名山)의 부적[符]을 가진 도사로, 도교인을 가리킨다. 동악(東嶽 : 태산(泰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장수할 수 있고,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서 상해를 받지 않고, 중악(中嶽 : 숭산(嵩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거만(巨萬)의 재물을 취득할 수 있고, 서악(西嶽 : 화산(華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병인(兵刃)의 피해를 받지 않고, 북악(北嶽 : 항산(恒山))의 부적을 가진 사람은 수난(水難)을 면하고 복록(福祿)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태부(太傅) 장연(張衍)이 모든 도사들에게 이르기를 “시험을 해 보았으나 불법을 이기지 못하였으니, 모두 불법에 귀의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하정지(賀正之)ㆍ저선신(褚善信)은 부끄러움을 통감한 나머지 모두 기(氣)가 차서 스스로 죽고, 혜통(惠通) 등 6백 20인은 모두가 관(冠) 홀(笏)을 내던져 버리고 불가에 투신하였다.

 

양왕(梁王)의 《불통(佛統)》에 “부처는 동인도(東印度)에서 태어났으니, 그때가 바로 주 장왕(周莊王) 9년 4월 8일이었고, 한 명제(漢明帝) 영평(永平) 8년에 그 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본디 동인도는 사람의 성질이 굳세고 살벌을 좋아하여, 전사(戰死)하는 것을 아주 좋은 일로 여기고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아주 상서롭지 못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노자(老子)가 함곡관(函谷關)을 떠나 부도법(浮屠法)을 만들어 그들을 교화했는데, 남녀가 다 머리를 깎되 신체는 상하지 않게 하여 이를 부도라 하였다. 이어 주 장왕 9년 4월 8일에는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고 별이 비오듯이 쏟아지더니, 이날 밤에 석가가 탄생하였다. 뒤에 그가 노자의 도를 잘 닦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종(宗)으로 삼아 불(佛)이라 호칭하였다. 불이란 곧 중국에서 부르는 신(神)의 호칭이요, 그 다음으로는 보살(菩薩)이 있다. 그 나라는 인종이 번성하여 외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 나라에 왕생(往生)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불교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서역 인도에 파급되었다가 다시 서역 인도를 거쳐 중국에 돌아온 것이니, 이교(夷敎)는 아니다. 노자는 실로 불조(佛祖)이며 불(佛)은 실로 노자의 법을 부연했던 것이다. 신(神)은 곧 불이고 불은 곧 신으로, 다만 중국과 외국의 자음(字音)이 서로 다른 것에 불과하다. 유가(儒家)는 황제(黃帝)의 제자(制字)에서 비롯되어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의 화생(化生)하는 묘도(妙道)를 발달시켰으니, 황제는 실로 유조(儒祖)인데, 어째서 후세에 황제ㆍ노자를 이단으로 치는지 모르겠다.

 

노자의 아들 종(宗)은 현달하여 가통(家統)을 잘 계승하였고, 석가의 아내인 야수타(耶輸陀)와 아들인 마후라(摩睺羅)는 석가가 죽을 때에 뛰고 울부짖으며 매우 애통해 하였으니, 불도 역시 인륜 도덕을 떠난 외도(外道)는 아니다. 그런데 후세에 나쁜 폐단이 생기어 인륜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단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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