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대한제국과 오스만제국

한부울 2012. 11. 2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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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과 오스만제국

 

글쓴이: 한부울

 

대한제국(1897-1910)은 반도역사를 인용하면 한반도만을 근거로 하였고 건립 된지 13년 만에 일제에게 병탄당하고 마는 초라한 제국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이 설명이 정확하고 사실에 입각한 것이인가에 대한 회의가 많다.

그러나 한마디로 “절대, 절대, 절대 아니다”란 답을 먼저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대한제국이란 실체를 반도역사만 가지고는 수박 겉핥기도 모자랄 정도로 세부적인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 없다란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거대한 제국인 대한제국이 한반도에 존재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당시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역학적인 관계에 의해 인위적으로 다루어지면서 서세와 일제의 있을 수 없는 장난아래 서구제국들의 생성된 이해 관계에 따라 최소한의 입지를 보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이긴자의 가증스러운 역사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가증스런 묘안은 우리가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나 대체적으로 분석결과에 들어나는 개체들의 모습이다.

기득권과 신생세력 다툼에서 승리자가 된 서양사학자들의 일방적인 과도한 흠집으로 인하여 한반도 대한제국이 구체화되고 변질된 사실이 있지만 그들 역시 이 대한제국이 무엇때문에 존재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역사적인 대안을 준비하지 못해 거의 실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난감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혼란을 이용 적극적으로 덤빈 것은 서세를 등에 업은 일제임은 물론이다.

누누히 설명한 것이지만 지금의 열도에 일본이란 신생국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침탈과 노략질, 도둑질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서세의 역사 판짜기에 편승, 가담하여 삼한을 한반도에 묶어 놓고 그러한 역사사실을 기반으로 아마도 아시아 전 대륙에 걸쳐 존재하던 고려를 붕괴하도록 하면서 아마 대한제국을 그 곳에 집어 넣으려 하다가 조선이 한반도로 기반한다면 구태어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 대한제국마저 졸속하게 한반도에 조선 이어 등장한 것처럼 꾸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근세기 역사의 단면이고 실체라고 본다.

그것은 탐욕스러운 유럽이라고 하는 서양세력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보이지만 문제는 당시까지 세계를 경영하던 삼한 세력들이 하나하나 조각이 나면서 붕괴하고 마지막으로 대한제국(1897-1910)이 남는데 이마저 껍데기만 남기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껍데기마저도 온전하게 만들지 못하고 졸속으로 만들어져 어디에 근거 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으로 분탕질 쳐놓았다는 것은 가슴한구석에 진한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조선을 찾아 대한제국을 찾아, 삼한역사 실체를 찾아 이렇게 헤맬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서양세력들이 “core” 핵심, “골, 고르” 라고 하였던 실체를 찾으려는 것은 바로 삼한역사를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까지 본 블로그가 분석한 결과에 의한 들어나는 증거사실에 의하면 누가뭐래도 대한제국은 분명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흑해사변(黑海事變)이 있었던 1921년까지 존재한 것이 된다.

고정된 지명을 연상하게 하는 흑해사변(黑海事變)을 다변적인 명칭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둔갑시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 대한제국을 당시 국제적으로 거대한 제국이라고 하던 러시아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오스만제국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체제로 한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 제 한국의 보호국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메리카대륙과의 관계설정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韓國)은 한국(汗國)인가?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단지 동양사로 보았을 때 한국(韓國)이고 세계사로 보았을 때 한국(汗國)일뿐이다.

그렇다면 한국(韓國)은 서양인에게 어떻게 불려 졌을까 생각해 본다.

"khan"으로 불렸을 것이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근세기까지 서양사학자들에게 어떻게 불려 졌을까도 생각해 본다.

korai or corea?

choson, chōsen(선택된), Joseon

"united corea"

그들이 남긴 명칭들이다.

고려(高麗)라고 판단되는 셀주크제국의 명칭도 셀주크란 지배자의 명칭이고 오스만제국의 명칭도 오스만이란 지배자의 명칭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었다.

신라(新羅)라고 확인되는 사산왕조(Sāsānian dynasty)역시 아르다시르 1세의 선조인 사산(Sāsān)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티무르왕조(Timurid dynasty) 역시 지배자 티무르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서양사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모든 왕조 명칭을 지배자의 이름을 따 붙였다.

삼한의 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은 나라 명칭은 오히려 특별한 것이 된다.

이렇게 지배자 이름을 붙인 것과 다르게 서양사학자들은 중국이라고 하는 지역과 그들의 영원한 역사왕조 로마와 비잔틴은 그렇지 않다.

유독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 아랍지역의 왕조들은 이런 식으로 모두를 지배자 명칭으로 대신했다.

이것은 물어보나마나 근세기에 짜집기 한 증거인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하였을까?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반도역사가 말하는 근세조선을 이성계조선이라 하여 일제는 이씨조선이라고 했다는 사실이 역시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왕조라 함은 한반도 마지막왕인 고, 순종을 이씨왕조를 두어 마치 전 조선왕조가 이씨인 것처럼 꾸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결국 한반도 조선 계보는 그들이 꾸며 만든 것이라고 풀이가 된다.

조선 초기부터 전체 왕들의 성씨가 이씨라고 하는 사실은 절대 동의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성계가 티무르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것은 100% 확신할 수 있는 설정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고려 왕건을 따 왕씨 고려라 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서양사학자들 스스로가 고려를 korai, 또는 corea 라고 까지 하였다.

그렇게 하였음에도 고려의 왕(王)씨는 술탄(Sultan)이라고 하는 왕(王)으로 둔갑시킨 것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서양사에서는 고려초기의 왕들을 술탄왕조라 했던 것이다.

고려를 술탄왕조라 하면 금방탄로 나니까 술탄을 왕(王)으로 만들어 고려제왕 모두를 왕씨(王氏)라 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페르시아에서 왕 중의 왕(king of king)을 샤한샤(shāhanshāh)라 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왕(大王)이라고 표현했다고 본다.

때문에 한반도에 존재하였다는 대한제국을 그대로 대한제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의 제국이었는가 하는 것은 계속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물론 밝혀지면 대한제국이 러시아다.

고려는 오스만제국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하지만 그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보인다.

러시아제국이나 오스만제국의 옛 명칭이 대한제국이었다면 어떻게 될까?

대륙조선이 멸망한 시기를 1881년으로 미국역사학자들이 보았다면 그 이후에 역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1882년 이후에 특히 동양역사는 전부 꾸민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고려이거나 대조선이 중국으로 존재한 시기가 1881년까지이고 그 이후부터 동국 즉 지금의 중공 땅과 동시베리아, 한반도, 열도라고 하겠지만 동국은 아메리카 대륙까지 포함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기인한다.

이것을 졸지에 잃어버린 것이라면 그래서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만을 직접적으로 경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사는 결국 모두 뜯어 고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어떻게 고쳤는가는 후차적인 문제이다.

왜 고쳤을까 하는 문제가 먼저 선결되어야 한다. 

오스만제국(1299-1922)의 역사 끝자락이 대한제국(1882-1920)과 연결되거나 또한 깊이 들어가면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고 중앙아시아의 제 한국과 연결되고 있는 것은 근원적인 역사실체에서 나타나는 포괄적인 삼한과의 관계가 깊숙하게 존재한 것이 된다는 것이고 과거로부터의 역사 또한 사만왕조부터 사산왕조, 셀주크 이어 오스만, 티무르, 무굴까지 어떤 식으로든지 지속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동일선상에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들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금도 의심에 여지가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세부적으로 오스만과 티무르와 고려관계를 살펴보기고 한다.

 

오스만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이슬람 왕조 셀주크를 기점으로 한 방계국가들 중 전통 술탄으로서 또는 칼리프로서 명백한 승계요건을 갖춘 왕가이다.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의 국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등장한 유목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인솔한 군사 집단을 오스만 제국의 기원으로 보고 이슬람 회교국이며 다민족 국가라는 것이 근세기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하여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가 등장하고 티무르의 영향력이 가중될 때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 I. 1360-1403, 재위:1389-1402)와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恭讓王, 王瑤1345-1394, 재위:1389-1392)이 근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와 더불어 1370년부터 티무르가 점령한 서(西)차가타이의 술탄 수우르가트미시(Suurgatmish, 1370-1388)와 그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Sultan Mahmud ,Mohammed II, 1388-1402)는 고려 32대 왕우(王禑 1374-1388)와 고려 33대 왕창(王昌 1388-1389)과 흡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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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王禑)

1374-1388

이성계 에게

폐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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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창(王昌)

1388-1389

이성계 에게

폐위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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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讓大王

왕요(王瑤)

1389-1392

이성계 에게

폐위

 

오스만계보와 티무르계보 그리고 고려계보에 끼워넣기 또는 섞어치기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 역사를 기준으로 할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생각 해 볼 수 있는 것은 한반도 역사역시 섞어치기의 대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다.

티무르가 왜 이성계인가?

티무르가 이성계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현황이다.

티무르가 이성계와 같다고 하는 것 보다 티무르의 역사를 아니면 이성계의 역사를 똑 같은 역사를 따로 분리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정확하다 할 것이다.

진짜는 티무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성계가 1374년부터 고려왕을 세우고 폐위시키는 것을 자유자재로 했다.

티무르 역시 1370년부터 차가타이한국의 칸들을 세우고 폐위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허수아비 칸으로 만들기 까지 했다.

티무르는 당시 전통적으로 투르크-몽골의 전통에서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칸을 자칭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대신 아미르(Amir, Emir 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고 ‘위대한’을 붙여 그나마 ‘위대한 아미르’라 자칭하고 행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던 전통적인 삼한왕권의 관습은 무서운 것이다.

동시에 이성계역시 고려말 상황으로 볼 때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정권을 잡고서도 이성계가 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는 면이 같다.

때문에 대장군이라고 하는 이성계는 아미르인 티무르와 같은 사람이고 이러한 핸디캡(handicap)을 보완하고서야 비로소 독자적인 왕조를 꾸몄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사인 것이다.

그것이 서쪽에는 티무르제국이 되었고 동쪽 한반도에는 이성계왕조가 된 것이 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서(西)차가타이한국의 2대 술탄이자 마지막 칸 마흐무드(Sultan Mahmud ,Mohammed II, 1388-1402)이야기다.

마흐무드(Sultan Mahmud)는 수우르가트미시(Suurgatmish)의 아들이다.

1388년에 아버지 수우르가트미시(Suurgatmish)가 사망했기 때문에 대를 이었다.

아버지의 시대부터 서(西)차가타이한국의 군주는 티무르의 괴뢰 허수아비 군주 즉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는 말)신세와 다름없었지만 이 술탄 마흐무드(Sultan Mahmud ,Mohammed II, 1388-1402) 무렵에는 더욱더 심해 고려시대 최씨 정권 때 가신을 둔 것처럼 대장군 즉 아미르의 가신(家臣)과 같이 다루어졌다고 하고 있다.

마흐무드는 티무르를 따라 인도  원정에 나서기도 하여 7년 전쟁에 종군하였고 오스만제국의 앙카라전투(Ankara)에도 참가하여 오스만왕조 바예지드 1세(Bayezid I, 1360-1403:재위1389-1402)를 잡는 공적을 세웠지만 그 직후에 급사했다 하고 있다.

본래 역사를 꾸밀 때 골치 아픈 인물들을 글로  또는 상황으로 이야기로 죽인다.

아니 이야기 쓸 것이 골치아파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수수께끼이면서 바꿔치기 한 단면이라고 보여진다.

마흐무드의 사후에는 서(西)차가타이한국의 군주를 별도로 티무르에 의해 옹립되는 일도 없었다는 것은 티무르가 스스로 왕조를 건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이성계 왕조 즉 근세조선이라고 반도사는 당당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서쪽 티무르를 후세 서양사학자들은 티무르제국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였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반도사가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 고려가 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스만제국이 비록 티무르(이성계)에 의해 1402년부터 1414년까지 공백기가 있었지만 극복하였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바예지드 1세(Bayezid I.1360-1403, 재위:1389-1402)의 아들 메흐메트 1세(Mehmed I Çelebi,1382-1421, 재위:1413-1421)는 공백기를 지나 1421년에 제국 재통합을 이루면서 국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1481:재위1444-1446, 1451-1481)가 서세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동로마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95–1453)을 멸망시켜 버린 것이다.

서세의 역사 보루를 요절내 들어내고 만 것이 된다.

이러니 만약 고려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오스만제국으로 현재 서양사에서 나타난 것이라면 서양사에서 고려를 얼마나 경외스럽게 생각했을 것인지 안보아도 훤한 역사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때는 고려가 전 유럽을 통치하였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한에 반대세력들은 철치부심 이빨을 갈았을 것이고 언제가는 그들의 복수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면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서 친일학자들은 물론이고 반도역사에 길들여져 세뇌된 학자들은 나를 소설을 쓴다고 할 것이고 굉장히 미쳤다고 할 것이 틀림이 없다.

그들 말대로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나 그러나 미친 것은 아니고 특별하다고 볼 수있는 나름대로의 예시가 나에게 있는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국과의 대전으로 압축되는 이 대전은 바로 기득권세력과 신생세력의 대전이다.

그 전까지만 하나의 지배층으로 구축되어 있던 세계질서가 1881년 이후로 부터 급격하게 발칸화가 시작되면서 서로 나도너도 분리 세분화되어 서로 충돌이 많아지면서 그 중에서도 세력을 급팽창한 나라가들이 바로 신생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대제국인 삼한역사를 신봉하는 쪽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쪽에서 붙은 것이다.

그 전쟁을 좌지우지한 것이 바로 자본이다.

오스만제국은 안타깝게도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1914-1918) 패전국이 됨과 동시에 술탄제가 폐지되면서 끝내 1920년에는 패전국으로서 초라한 신세가 되어 세브르 조약(Sèvres 條約)까지 승인하게 되면서 메흐메트 6세(Mehmet VI, 1861-1926, 재위:1918-1922)가 폐위되었고 가진 것을 다 내놓고 대고려라고 생각되는 1922년 오스만제국이 해체되고 마는 신세가 된다.

여기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러시아인데 이 러시아는 대한제국이 된다는 과정에 있었던 나라이다.

솔직히 북아메리카북부에 존재한 러시아세력과 동부유럽에 존재하였던 러시아는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한 분석은 아직 다 마치지 못했다.

어쨌던 고려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만제국이 1922년에 멸망한 것이다.

이때 공교롭게도 세계사가 정리가 되고 편집된다.

그렇다면 흑해사변, 혹은 흑하사변이 일어난 1921년과 거의 동일선상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와 대한제국이 그 때까지 존속했었다는 이야기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장장 600년 왕조이다.

이씨조선, 근세조선이 500년 역사이니 100년이 더 긴 역사를 가진 왕조이다.

고려를 빼놓고 만 그렇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은 대한제국과 연결되어야 하는 숙명적인 실체란 느낌이 많이 있다.

이리저리 근세기에 끼어넣기, 섞어치기 한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와 대한제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고려와 대한제국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제국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기필코 찾아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함께 상승된다.

United corea=고려 이어 조선, 대한제국

동일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무엇을 더 이상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삼한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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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유세손서(諭世孫書)83(書)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의 임금이 25세의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반석처럼 편안하다…승정원일기의 세초(洗草;삭제)는 실로 너의 뜻을 따른 것이다. 또 듣건대 어제 무덤에서의 네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눈물로 옷깃을 적시었다고 한다….국초(國初)에 보인(寶印)을 만든 예에 따라 특별히 효(孝)자로 그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며 이 일을 후대의 본보기로 삼으니 산천초목과 곤충인들 누가 이 뜻을 모르겠는가….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5일 영조는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 2011.7.21.일자 A38, 유홍준의 국보순례(119)][문무의 조선사]

 

영조(英祖, 1694-1776:재위1724-1776)
정조(正祖, 1752-1800:재위1776-1800) 사도세자 아들, 영조손자.

영조 83세는 1776년도 인데 그 때서야 조선왕조 개시 300년이라 했으니 조선왕조가 건립된 시기는 1392년이 아니라 1476년이다.

조선왕조가 (1392-1897) 500년 왕조라 하였지만 1476년이 개국년도라면 500년에서 84년이 부족한 400년 왕조라고 해야 맞다.

1476년은 바로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그 주위제국들을 모두 평정하면서 크림 반도에 할거하던 몽골 제국의 후예국가인 크리미아 칸국을 복속시키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던 시기이다.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1481)는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초대 황제이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되고 나중에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으로 넓혀 ‘정복자(Fatih)’란 별명으로 불렸다.

 

1460년 펠로폰네소스의 모레아 점령하고

1461년에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던 200년간 존속하던 비잔틴계 국가 트라페주스 제국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발칸반도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세르비아를 정복했다.

1475년에는 크림 반도에 할거하던 몽골 제국의 후예국가인 크리미아 칸국을 복속시키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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