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한부울 2014. 12. 30. 16:45

*************************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글쓴이:한부울

 

1. 19척의 귀선(龜船)

 

a, 조선의 군사력

b, 판옥선의 문제점과 대조선의 군사력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분산되었다는 사실의 확인.

c, 19척 귀선(龜船)은 장갑함(armoured ships)이고 거북선 형태의 문제점거북선.

d, 귀선은 남북전쟁때 장갑선과 같은 것이다.

 

[a],조선의 군사력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는 큰 눈으로 보면 “하나의 체제”의 역사로서 세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그 자체가 인류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작게 보면 일찍이 고구려가 태동하면서부터 왜(倭)라 하던 서세(西勢)와의 역사전쟁을 치열하게 치루면서 삼한천자들이 서세를 나름대로 통제하였으나 근세기(近世紀)에 인간들이 물질에 만연되면서 치명적인 무기로 변한 물질자본을 잽싸게 축적한 서세에게 냉혹한 제로게임에서 결국 패하였고 그 결과 인류역사인 세계삼한역사를 손에 쥔 서세가 수천년만에 습득한 전리품을 타산적 계산아래 냉혹하게 반도삼한역사로 쪼그라들게 하거나 오그라들게 한 것으로서 이 모든 것은 왜(倭)라고 하는 서세(西勢)와의 기나긴 역사갈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 결과 유일무이한 인류역사는 마침내 망실되었고 하나의 역사체제는 하릴없이 산산이 조각조각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 보면 정의(正義)와 선(善:禪)이 사라지고 자나깨나 물질만능주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인류는 언제나 황폐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대결공포와 위협으로부터 늘 불안에 휩싸여야 하고 종국에는 가진자와 있는자가 승리하는 추악한 논리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서세가 인류역사를 차지한 결과이다.

 

본래 임진지역(壬辰之役)이라는 말은 중원(中原)을 잃어버리게 된 난리(亂離)라 할 수있겠다.

삼한천자(天子)가 중원(中原)을 끝까지 통제하면서 천방지축 날뛰던 왜(倭)를 다스리던 시기에 발생한 왜구(倭寇:서세해적) 반란으로 한편으론 그들의 터전을 절실하게 갈망하고 요구했다는 것에서 발생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만큼 철저한 통제를 벗어나려는 당시 그들의 절박함도 읽을 수가 있는 사건이다.

그곳은 동아시아대륙사 신중국에서 중원이라고 하고 바로 오늘날 중앙아메리카이다.

또한 만주로도 불리었다.

이때 천방지축 설치는 왜구퇴치를 위해 조선 영역 남해를 중심으로 신출귀몰(神出鬼沒)하게 누비던 거북선의 흔적을 한반도에서 찾겠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인가?

이러한 어처구니가 바로 오늘날 변질되어버린 반도역사로부터 기인한 것임은 물론이다.

한반도인들은 앞으로도 이것에 대한 답을 언제까지고 구하려 하겠지만 낳지 않는 애를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이는 것이니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 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뜻있는 사람들이 거북선을 찾기 위해 남해를 쥐잡듯이 했지만 왜구들에 의해 피침되어 침몰했을 것이란 위치에서 거북선의 썩은 나무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1909년 10월 26일 벌어진 히로부미처단사건 역시 신중국 정부가 가르쳐 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 요녕성 대련시 여순(旅順) 옛 감옥터를 샅샅이 뒤졌지만 실패한 것과 기어코 이유를 따진다면 이 두 가지의 문제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워낙 한반도와 밀착시켜 놓은 히로부미처단사건에 대해 언급하기가 그렇지만 일제가 기획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실체 사건이 아니라 유별한 한반도인들의 위험한 테러성을 역사에서 모함하고 당시 여론을 기만하거나 조장하려 했던 가상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5%의 주요 정보를 공유하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뉴스미디어를 이용한 여론조성차원에서 향후 역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후세사람들에게까지 기억을 각인시키려는 서세의 포괄적 계산과 움직임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일본 극우세력들이 히로부미처단사건을 테러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들이 근세기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버팀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붙인다면 당시 주요 미스미디어를 장악한 것은 바로 서세의 자본력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18년까지 사실상 따져보면 극악한 유태인 테러범들에게 당한 것은 세계삼한역사인물들이며 결국 대조선이 해체되게 된 이유중 하나로 그로인한 체제 중심이 흔들리고 내분이 발생하면서 종국에 통제력이 상실되었으며 결국 큰 파국까지 초래한 것이라면 그러한 암살사건은 거대한 "하나의 체제"에서 제어할 수 없는 휴유증이 생각보다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런 악행을 꺼꾸로 한반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논리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1918년까지 역사는 세계삼한역사이지 결코 동아시아대륙사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서 반도역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말기에 반도역사를 보면 명색이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600년 사직(社稷)이 시퍼렇게 살아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에 걸맞는 정상적인 역사 서술이 아니었다.

외교문제가 아니라 국내문제였음에도 자체 통제능력 상실을 말하고 군사력조차 보잘 것 없어 툭하면 왜라고 하는 일본이나 오랑캐라 하였던 청조에게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당연시 여기게 만드는 반도역사가 있었다.

더하여 본래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자주권이 없는 군왕이 유약하고 그에 따른 신하들은 언제나 사색당파에만 몰두하여 백성들은 삶에 고통속으로 내몰리고 그럼에도 유교 악습과 관습에 의해 양반쌍놈 신분제도에 파묻히게 하여 사회체제가 엉망이니 외교적으로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도 없기 때문에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거짓 사실을 각인시키던 반도역사가 있었다.

도대체 어떤 나라의 역사가 스스로 지지리도 못난 민족이라고 기술하였던가?

도대체 어떤 나라의 역사가 스스로 자학하게 만들고 피해의식을 가지게 하며 강박관념에 쌓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예근성을 심으려 노력했던가?

오죽했으면 대한민국 사람이 화병이 심한 것은 모두 반도역사 덕분이라고 하겠는가.

그 덕분에 8천만 한반도인들은 고고하였던 높은 자존은 깡그리 잃어버리고 여태까지 암흑같은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반도역사의 서술이 정말 사실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간교한 열도일본인처럼 못난역사를 잘난 역사로 각색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것을 탓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밝혀본 바 세계삼한역사이다.

그 자체가 인류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도역사는 세계삼한역사를 질투하고 시기하던 세력들이 만든 것이다.

이러한 추악한 역사에서 대조선이 보유하고 있던 강력한 군사력을 찾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반도역사에서는 조선말기라고 하는 시기, 19세기 후반 대조선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장이 활짝 열렸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1886년 당시 조선해군력 뿐만아니라 육군보유병력수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근세기 서세의 귀중한 자료를 공개한다.

 

[원문]1886. corea:—military officers 11

코리아(조선):병편

By E. H. Parker, Esq.

The navy nominally consists of 92 line-of-battle ships [戰船] each manned by 80 men; 48 guard-ships [防船] each with 30 men; and 132 gunboats [兵船] each carrying 60 men; also 19 armoured ships [龜船], 254 coast-guard boats [伺候船], and several score more boats of various nondescript names. Though it is not so stated by the Chinese Commissioners, most if not all of these boats exist only on paper.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는 1886년 당시 조선(朝鮮)이 보유한 해군함선들을 각 종류별로[2]92척의 전선(戰船:line-of-battle ships), [3]48척의 방선(防船:guard-ships), [4]132척의 병선(兵船:gunboats), [1]19척의 귀선(龜船:armoured ships), [5]254척의 사후선(伺候船: coast-guard boats)

 

위 영어원문은 미국장로회상해지부가 보관하던 기록으로서 영국변호사이며, 중국학을 연구하던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1849-1926)가 1886년에 쓴 것이다.

책 제목은 "중국기록과 선교보고(CHINESE RECORDER MISSIONARY JOURNAL)"이며 이 책 분량 약 4페이지 남짓한 부분“1886. corea:military officers”란 소제목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자료에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랄만한 이야기가 수두룩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886년 조선이 보유한 각종 해군함선들의 한문 명칭을 영어로 풀어 놓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발견한 어떤 자료보다도 가치있고 귀중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조선함선들의 한문명칭만을 보고 형태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진단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전부 동아시아대륙사에 등장하는 신중국 함선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서세와 일제가 주장한 것처럼 정말 속국처럼 되어버렸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실질적인 조선 선박기술은 물론이고 실제 건조되었던 조선의 함선가치가 상실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동아시아대륙의 함선을 보면 서양함선들보다 구조면이나 실용성에서 현저히 뒤떨어져 있었음을 숨길 수가 없기때문이다.

 

[b],판옥선의 문제점과 대조선의 군사력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분산되었다는 사실의 확인

 

동양함선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구조면을 한번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황하문명을 구가하면서 그 많은 중국역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대양을 넘나들지 못할 어둔한 모양과 형태를 고집한 답답함을 숨길 수가 없고 근세기 서양세력들의 눈부신 함선발전을 도무지 따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간격이 벌어진 상태에서 선박 비전문가이지만 역사연구하는 입장에 그 상황을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신중국 사정이 이러하였으니 속국이라 하던 조선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예를 들어 판옥선(板屋船)이 생긴 형태를 보면 참으로 갑갑하고 우스광스러울 수밖에 없다.

백과사전을 보면 판옥선을 조선시대 수군의 대표적인 전투선이며 기동성과 견고함을 갖춘 것이라 하였고 구조설명에서 평선(平船)인 맹선을 대신해 배 위의 네 귀에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가려 널빤지로 지붕을 덮고 마룻대를 얹었다고 되어 있다.

보기에는 함선이 아니라 수상(水上)판자집을 그대로 얹어 놓은 듯하다는 것에 아마 동의 할 것이다.

맹선(猛船)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한선(韓船)구조의 군선으로 선체는 단판(單板)이고, 선형은 판옥(板屋)구조를 이루었지만 몸집이 우둔하고 기동력도 결여되어,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1555년(명종10년) 획기적이고 새로운 군함이 시험되었는데, 그것이 판옥선이라 하였다.

그런데 획기적으로 만들어진 판옥선의 장점은 견후장대(堅厚長大)하였다는데 이는 통나무째 잘라 잇는 방식을 써 배가 무겁고 튼튼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보기에 맹선이나 판옥선이나 획기적으로 발전 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수군의 편제는 조선초 연안에서 극성을 부리던 왜구에 대항해서 이루어졌다 하여 기존의 대선, 중선, 소선은 왜구의 선박과 비교할 때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제대로 추격할 수가 없었다고도 하였다.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욱 빠르고 경쾌하게 만든 것이 세종초에 맹선(猛船)이며 이것 보다 더 획기적인 군함이 바로 판옥선이라는 하였지만 문제는 견고한 것 보다 속력이 구조적으로 느리다는 것이다.

 

 

                         [명종 때 개발된 전투함 판옥선[板屋船](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어째서 속력문제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또한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판옥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름이 개칭되었는데 바로 전선(戰船)으로 불리었다 하고 그 모형을 보면 단순하게 2개의 마스트가 있는 조금 큰 돛단배와 같은 형태이다.

서양함선의 예를 보면 2개의 마스트를 가진 것은 거의 500톤미만의 스쿠너(schooner), 브리그(brig), 브리건타인(brigantine)등이다.

아주 작은 것만 골라 조선의 전선(戰船)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대양을 옮겨다니면 거센 파도를 견디내면서 속력을 더 빠르게 항해할 수 있는 전선(戰船)정도가 되려면 포어 마스트(fore mast), 메인 마스트(main mast), 미즌 마스트(mizzen mast)가 있는 갤리온(Galleon)정도의 최소 3개 마스트가 구축된 것이어야 하지만 2개 마스트를 가진 500톤급의 전선이라 한 것은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고 언제나 서양함선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서양과 다르다는 독창적인 의미가 이런 형태이다.

이러한 형편에 있었으니 서양세력들에게 동양역사가 꼼짝할 수 없었다는 서세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합리화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조파저항(造波抵抗) 또는 마찰저항(摩擦抵抗)을 줄이는 류선(流線:streanm line)]

 

임진왜란 시 수군 제일의 전함 판옥선이 무엇이 문제인가?

판옥선은 전통적인 한선(韓船)을 따라 이어진 것이며 장점은 견후장대(堅厚長大)하다 하였다.

위 판옥선의 그림이 나오지만 해전을 치룰 함선이라면 돛을 다는 마스트가 중요한데 마스트를 걸 수 있는 장대 비슷하게 생긴 것은 딱 하나이다.

즉 하나의 돛이 달린 배라는 것이다.

동아시아대륙 함선의 형태자료들을 보면 실물사진은 하나도 없고 전부 산수화를 그리던 붓으로 그린 도면 그림이다.

또한 거의가 위 그림처럼 함선(艦船) 선수(船首)가 직립(直立)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동양학자들은 함선(艦船)에서 선수가 직립(直立)이어야 하는 것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고수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와같은 선박을 만들어 배를 띄워놓고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 같다.

해적질을 업으로 삼았던 왜구의 배도 이것 형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동서양이 구분되어 떨어져 정보교환이 용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해양선박의 가장 기본이 될 수 있는 속력문제를 따지 않는 형태를 고집스럽게 고수했다는 사실에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이래놓고 역사라고 믿으라 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장난이다.

왜 강단사학자들은 위 그림과 똑같은 판옥선을 만들어 거세게 파도가 치는 곳에 띄워놓고 어떻게 되는지 살피지 않는가?

특히 사는냐 죽느냐 이기느냐 패하느냐 치열하게 해전을 치루어야 하는 함선은 최우선이 바로 함선 속력이라 할 수밖에 없다.

16세기후반에서 18세기 무렵까지 사용된 범선(帆船)을 갤리온(Galleon)이라고 하는데 전부 선수(船首)가 일단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뾰족한 선수(Beak head)는 항상 파도와 정면충돌하고 파도는 일정주기로 선수를 때리기 때문에 필요하고, 선수부근의 배 옆과, 밑바닥 부분은 파도의 충격을 최대한으로 적게 받게 하기 위해 류선(流線:streanm line)으로 처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선수 꼭지점에서 류선이 마무리가 되어 뾰족한 선수 형태가 대양을 누비는 대다수 서양함선이 가진 것 처럼 함선의 기본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조파저항(造波抵抗) 또는 마찰저항(摩擦抵抗)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법이 바로 류선형태의 굴곡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증명되는 것은 오늘 날 선박들의 형태가 그렇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동양에서 고집한 선수를 직립으로 한 것이 장점이라면 당연히 오늘날에도 그러한 직립형태의 배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없지 않는가?

거북선이 만들어지는데 기초가 된 판옥선만 놓고 보면 선수가 직립(直立)이기 때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파도에 저항력은 클 수밖에 없어 느려 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속력도 없이 무조건 들이 박는 것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만히 서 있는데 들이박는 것만 생각하면 그것은 어린이 병정놀이만도 못한 것이다.

역사를 보더라도 좀 생각을 하면서 연구해야 한다.

이러했으니 거북선의 성능도 이미 알만한 것이다.

 

 

물론 맹선이나 판옥선 또는 거북선이라 불리는 것들은 본래 사실역사과 변질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형상의 어처구니는 근세기에 부랴부랴 동아시아역사판짜기가 진행되면서 동아시아대륙 함선의 독창성을 추구한 나머지 이처럼 조잡한 작품이 탄생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는 거의 동양3국(신중국, 한반도조선, 열도일본)이 비슷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에 더욱 기이하다는 것이다.

서양함선과는 달라야 한다는 틀에서 실용성과 편이성, 발전성이 무시되고 마구 동양적이라 하여 신비주의를 가미한 상상으로만 그려놓은 것이 오늘날 역사로 나타난 것이다.

서세의 서양함선들은 대항해시대때부터 실제 함선 그림들이 어마어마하게 그대로 남아 전해진다.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숨길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지만 이긴자의 자신감같은 것일게다.

실물도 근세기 해양박물관등에서 잘 보관되고 크게 전시까지 한다.

동양함선을 이렇게 할 수 있는 입장이 분명 아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 "1881년에 조선해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글쓴이가 바로 미국인 역사가 월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의 저서 "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고대기원(Era)편에서 모던조선(Modern cho-sen)의 연대를 1392년부터 1881년이라고 한 사실을 발견하고서부터였다.

반도역사가 말한 1910년이 아니라 1881년으로 못을 박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망한 것이 아니라 해체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후 조선이란 체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반도역사를 참고하면 1881년 당해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지만 시차가 좀 있다고 볼 때 1년 후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즉 구식군대(舊式軍隊)의 군병들의 군란(軍亂)이 발생하고 그 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집트의 우라비혁명(Urabi Revolt)이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에 성질상 엄청난 재정문제라는 것을 알면서 대조선이 기획한 대운하 토목공사를 실시하면서 상당한 자금난을 겪었다는 사실과 오스만제국의 경제불황과 함께 이러한 상황을 나름대로 심각하게 진단하였고 그것의 결정적인 것으로 유대인테러단체 일원이 자행한 1881년 3월 13일 백주 대낮에 폭탄테러에 의해 암살당한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1818-1881재위:185-1881)의 죽음이 컸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3개월 뒤 6월 18일 부랴부랴 당시 기득권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독일(德意志國:Deutsches Reich), 오스트리아(雙元帝國:Austria-Hungary), 러시아(俄羅斯帝國:Empire Russe)가 삼제동맹(三帝同盟:League of the Three Emperors)을 체결하고 뒤 수습한 것으로 보여져 이를 종합할 때 대조선이 해체되는 상황을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의 체제"가 "해체"되어 어떤 다수의 세력이 그것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이러함을 글쓴이가 감안하여 2009년 3월 9일부터 "1881년 조선해체"라 했던 것이다.

그 뒤 대조선의 해체로 인한 휴유증이 컷던 것인지 그 해 9월 19일에 미국 20대 대통령 제임스 카필드(James Abram Garfield,1831-1881재임:1881-1881)가 명목상 엽관운동(獵官運動)에 실패한 자에게 피살당하면서 그 다음해부터 분리되기 시작하게 되는데 반도역사는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에 의한 것이라 하지만 분리가 되는 것으로 1882년5월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시작으로 1883년11월26일 조독통상조약(大朝鮮國大德國通商條約), 1883년11월26일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1884년7월7일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 1885년7월10일 조이수호통상조약(朝伊修好通商條約), 1886년6월4일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로 이어진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가치있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것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 바로 1886년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가 말하는 대조선 군사력의 자료이기 때문에 물론 대조선이 해체됨과 동시에 많은 군사력이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라고 칭하고 있는 삼제(三帝)들에 의해 어느 정도 분산되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이러한 군사력 자료가 대조선의 실질적인 군사력이었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흥분되는 것은 세계삼한역사를 고집하면서도 대조선이 가지고있었던 군사력 전반에 걸쳐 행방을 찾지 못하다가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비로소 대조선의 군사력의 행방을 찾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주지해야 하는 것과 엄히 단정짓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에드워드 파커가 원문에서 그가 말하길 실물을 보지 못했다는 것과 문서로만 남겨진 것이라고 한 것에서 승조원이라 하면서도 당시 함선 내용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숫자를 첨가 해 놓은 것은 승조원의 숫자가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후일 밝힐 수 없도록 감추고자한 가식적인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늘 날짜가 2014년 12월 30일이니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6년만에 또 한번 경축해야 할 날을 만드는 것이다.

 

[c], 19척 귀선(龜船)은 장갑함(armoured ships)이고 거북선 형태의 문제점거북선

 

임진왜란 당시에 기록하였다고 하는 일본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는 "조선에는 전체를 철로 요해한(鐵ニテ要害シ) 배가 있다"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해군사관학교에서는 1대1 실물 복원모형을 만들어 이 거북선 개판에 얇은 금속제 판을 붙여 전시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거북선은 철갑선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의 말을 빌리면 귀선(龜船)은 장갑함(裝甲艦:armoured ship, ironclad ship)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는 몰라도 1886년 조선말기에는 장갑함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든다.

 

현재의 거북선 이미지는 어쨌던 반도역사와 열도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동아시아대륙사가 태동하면서 한반도역사와 열도역사가 동시에 만들어 지고 그 프레임에 맞추어 생성된 서세와 일제의 합동 창작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는 이것보다 더 실용성이 있고 가치가 있는 장갑선이어야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조선선박기술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까지 거북선의 3층 구조설이다 아니다 또는 거북선의 철갑선이다 아니다 등 여러 설이 난무했지만 그것에 합당한 자료나 근거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안타까움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 또한 우리가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반도역사로 인한 폐해가 이렇게 계속 될 수 없다는 점과 또한 늦었지만 가공의 역사 위에 허상을 심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위 두 가지의 설은 어디까지나 거북선의 실체를 담보하는 것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가지의 설이 우리가 천시하는 왜(倭)역사에 의존하고 일본의 임진왜란 해전 관련 기록이나 그외 일본 측이 가지고 있는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분명히 관련인사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기도하다.

시급한 것은 당장 반도역사를 없애는 일이 겠지만...

 

우리는 본래 똑똑하고 영민한 삼한역사인들이다.

때문에 세계유일무이한 세계삼한역사를 우여곡절은 있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왔고 앞으로도 이어 갈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반도역사로 인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멍청한 민족, 어리석고 아둔한 민족, 자주력이 없는 민족으로 취급된다는 점은 정말 모욕이며 치욕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왜 그런 불합리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형태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이 맞는지 사서를 통해 한번 살펴보자.

 

[1]태종(太宗 25卷)13年(1413) 2月 5日

○甲寅/次于通濟院南郊。 是朝, 命世子還朝, 世子固請從行, 上謂諸卿曰: “世子監國, 於禮得矣。 初欲令世子經宿而還, 今世子以不得扈駕, 怏怏不食。 世子非獨予之子也, 乃國之儲副也。 其擧動若之何而可?” 李天祐、李叔蕃等進言曰: “此乃湯沐之行, 固宜隨駕。” 上曰: “姑從之。” 世子喜形於色。 上過臨津渡, 觀龜船、倭船相戰之狀。

통제원(通濟院) 남교(南郊)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세자에게 명하여 조정(朝廷)으로 돌아가도록 하니, 세자가 따라가기를 굳이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諸卿]에게 말하였다.

“세자가 감국(監國)하는 것은 예(禮)에 맞는다. 당초는 세자로 하여금 하룻밤만 지내고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세자가 호가(扈駕)할 수 없다고 하여 앙앙(怏怏)대고 밥을 먹지 아니한다. 세자는 나의 자식만이 아니라 나라의 저부(儲副)인데, 그 거동(擧動)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천우(李天祐)·이숙번(李叔蕃) 등이 진언하기를,

“이번에는 탕목(湯木)의 행차이니, 마땅히 거가를 따르게 하소서.”

하여 임금이

“잠시 동안이다.”하고 그대로 좇으니, 세자가 안색이 기쁜 빛를 띄었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2]태종(太宗 30卷)15年(1415) 7月 16日

좌대언 탁신이 병비에 대해 올린 사의 조목

其六, 龜船之法, 衝突衆敵, 而敵不能害, 可謂決勝之良策。 更令堅巧造作, 以備戰勝之具。

愼時知兵曹。 上覽之, 下兵曹。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탁신(卓愼)이 이때에 병조를 맡았는데, 임금이 보고 병조에 내리었다.

 

조선왕조실록 위 두 기사를 보면 귀선(龜船)이 기록에 나타나는 시점이 놀랍게도 1413년과 1415년에 나타난다.

永樂九年(1411)倭寇侵犯金鄉、平陽。1411년에 왜구(倭寇)들이 명나라 연해를 침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거의 조선영역에 침범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으로 이러한 기록은 정확하게 명나라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이거나 조선이라는 사실임을 알 수 있고 이와 함께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태종(太宗)이 천자(天子)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것이다.

옛날, 천자가 출행할 때 쓰던 물총새의 깃으로 장식한 기(旗)를 취화(翠華)라 하고 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다는 태종(太宗)이기 때문에 분명 천자(天子)이며 황제(皇帝)였던 것이 틀림없다.

1411년, 1413년, 1415년 위 기록과 같이 왜구해적선과 귀선(龜船)은 연해에서 자주 충돌하였던 같다.

어쨌던 위 기록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즉 임진지역(壬辰之役)이 있기 전부터 당시 충돌용으로 사용하던 귀선(龜船)이 조선에 있었고 이것을 현재 거북선이라고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물론 명칭으로 보았을 때 분명 거북이 귀(龜)자가 앞에 붙었으니 거북선이다.

그러나 이 거북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과는 분명히 형태적으로 차이가 있고 근원적으로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들이 다음에 나타난다.

 

                  [기원전 7세기 뱃머리 부분에 충각을 설치한 배 페터콘터(Penteconter)]

 

조선왕조실록 위 두 번째 기사 태종(太宗)15年(1415)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은 병비에 대해 올린 사의(事宜) 조목(條目)에서 衝突衆敵, 而敵不能害, 可謂決勝之良策” 즉 많은 적과 충돌(衝突)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 한 사실에서 귀선(龜船)은 처음부터 충돌용으로 사용하던 함선이었고 최후 끝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하여 최종승리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옛부터 충돌용의 함선을 보면 특징이 있다.

앞에 충각을 장착한 위 그림같은 앞에 튀어나온 충격물을 장치한 페터콘터(Penteconter)와 같은 것일 게다.

백과사전의 거북선 설명을 보면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에 개발된 거북선의 모형(母型)이며 판옥선의 상장갑판 윗부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개판(蓋板)을 덮어 전시의 군사까지도 보호하는 거북선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앞서 "판옥선의 문제점"에서 이야기 했듯이 현재 거북선의 선수는 뾰족한 것이 아니라 직립(直立)이기 때문에 쇠정(鐵釘)이나 쇠붙이 충각(衝角)을 장착할 자리가 마땅찮고 전면 즉 선수(船首:bow가 넓어 충돌하면 오히려 충각이 없는 다른 곳에 부딪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어느 기록이든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언급된 것은 없고 오직 단편적으로만 보아 판옥선은 개발된 지 37년만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적을 여지없이 무찌르는 맹활약을 하였다고만 적고 있다.

 

[3]선조(宣祖 82卷), 29年(1596)11月 7日

경연을 열다. 유성룡·이덕형 등과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南以恭曰: “我國大船所觸, 常破賊船二三隻。 人人皆言: ‘若有舟師, 則可以鏖戰, 其禦大賊, 雖未可知。 而輜重船則定擊無疑’ 云。 今宜不論公私賤, 蠲除本役, 專屬舟師, 則舟師稍專而民亦得保, 豈不便好乎?” 成龍曰: “李元翼今欲下去南方, 某條召集人民, 以實閑山島、長門浦。 若失守巨濟, 則無復可爲矣。” 上曰: “龜船之制若何?” 以恭曰: “四面飾以板屋, 狀若龜背, 以鐵釘揷於傍兩頭。 若與倭船遇, 則所觸皆破。 水戰之具, 莫良於玆。” 上曰: “何不多造乎?” 趙仁得曰: “小臣在黃海道時, 造一隻, 揷之以劍, 似若龜背。 其制殊爲神妙。” 以恭曰: “戰艦, 以輕捷爲上。 當今只患無軍, 不患無船。 以公私賤之居海濱者, 專委舟師, 則其於國計, 可謂得矣。”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큰 배가 부딪치면 늘 적의 배 두세 척을 부수므로, 사람마다 다들 말하기를 ‘주사(舟師:해군水軍)가 있으면 힘껏 싸울 수 있으니, 큰 적을 막는 것은 알 수 없더라도 치중선(輜重船:보급선)은 틀림없이 칠 수 있을 것이다.’ 합니다. 이제 공천(公賤)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본역(本役)을 면제하여 주사에 전속(專屬)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사도 조금 온전해지고 백성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이 이제 남방으로 내려가려 하니, 아무쪼록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한산도(閑山島)·장문포(長門浦)를 충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거제(巨濟)를 지키지 못하면, 다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귀선(龜船)의 제도는 어떠한가?”하니, 남이공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하니,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하였습니다.”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입니다.”

 

위 조선왕조실록 1596년 선조(宣祖29년)기사를 보면 바로 임진지역(壬辰倭亂:壬辰之役:1592-1598)이 일어나 4년이 흐른 뒤에도 선조(宣祖)와 신하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가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아 공천(公賤), 사천(私賤) 즉 노비(奴婢)들을 그대로 본역(本役)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해군사단(水軍:舟師)조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수군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부터 달려 드는 왜구들을 막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말하고 이구동성으로 당장 수군을 충당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신하들은 주청(奏請)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도대체 한반도 사정과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이야기가 있어 언급해보는데 병조판서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若失守巨濟, 則無復可爲矣" 한산도(閑山島)와 장문포(長門浦)를 막지 못하면 거제(巨濟)를 잃게 되고 거제를 잃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는 긴박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한반도 남해를 기준으로 하여 보면 왜구들이 달려들었다고 하는 본거지 대마도일 것인데 한산도(閑山島), 장문포(長門浦) 위치를 따져보더라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왜 거제인가 하는 점이다.

거제가 무슨 지형적으로 주요한 군사기지가 있길래 거제를 잃으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했을까?

왜구입장에서 거제에 당시 군사기지가 있어 지나치기가 힘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지역이다.

또 한가지 대마도에서 왜구들이 전라도 땅으로 들어간다고 해놓고 구태어 남해 복잡한 해안을 진로로 삼아 굳이 어렵게 거제도 앞바다를 파고들었다는 이유 또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날 잡아잡슈 하는 것 같은 아주 멍청한 짓을 왜구들이 한 것이다.

더군다나 왜구 특히 해적들이 숨을 수 있는 곳이 많은 것으로 굴곡이 심하고 미로와 같은 해안선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섬들이 그들의 은신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다도해가 아닌가?

 

어쨌던 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보면 거북선이 생긴 형태를 감지 할 수 있는 것에서 남이공(南以恭)의 말을 참고하면 첫째로 "들이 받으며 두 세척을 깨뜨릴 수 있는 큰 배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과 조선배보다 작은 왜선들의 취약한 보급선인 치중선(輜重船)을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는 것을 대화에서 알 수가 있다..

그러자 임금이 의아해 묻는 것은 바로 무겁다는 귀선(龜船)이다.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남이공(南以恭)은"배가 쇠를 장착하고 있으면 무겁고 움직이기가 느리기 때문에 전선(戰船)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전선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을 이어간다.

이렇게 볼 때 귀선(龜船)은 쇠를 장착한 장갑선(裝甲船:armored ship)이 맞다. 

이어 귀선의 구체적인 형태를 설명한 것에서 공조참판(工曹參判) 조인득(趙仁得)이 말하길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揷之以劍, 似若龜背。검(劍)을 꽂고 거북 등(背)과 같이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한 남이공(南以恭)이 말하길 "四面飾以板屋, 狀若龜背, 以鐵釘揷於傍兩頭。"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몄고 그 형상은 거북 등(背)같으며 쇠정(鐵釘)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볼 때 쇠정이나 쇠창살을 꽂은 곳이 거북선 등(背)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거북 등(背)이라고만 하였지 덮개(蓋)를 씌운 것이라 한 것은 어떤한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어째서 거북 등(背)처럼 생긴 둥근 덮개(蓋)를 덮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무엇때문에 거북같은 거북선이라고 생각하였을까?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독창적인 것만을 운운하던 반도역사의 형태와 똑같고 이러한 어설픔이 여기서도 작동되는 것인데 처음부터 일단 의심하기는 했지만 결과가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냥 함선 곁 방(傍)과 양머리(兩頭)에 칼을 꽂았다고 한 것을 어찌하여 거북 등처럼 덮개를 만들어 그곳에 칼을 꽂았다고 생각하였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현재 거북처럼 거북 등 같은 덮개를 만들어 칼을 꽂았다고 하여 적선과 충돌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여 이런 형태가 나타난 것인지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남이공 역시 형태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냥"사면을 판옥같이 꾸미고 형상이 마치 거북이 등 같다"고 한 것은 사면 판옥을 거북 등처럼 굴곡지게 한 것임에도 이것을 난데 없이 거북처럼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고 하였으니 놀랄 놋자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결정적인 거북선 실체에 대한 문제점이다.

물론 함선이 무엇보다도 속력을 중요시 해야 하는데 판옥선이 가지고 있는 선수의 직립형태에서 더군다나 앞면이 넓어 파도에 접하는 면이 크다는 문제에서 조파저항(造波抵抗) 또는 마찰저항(摩擦抵抗)을 높인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같은 엉뚱한 형태의 해석문제는 한마디로 엉터리같은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현재 거북선은 쓰임새보다는 너무 상상이 지나쳐 이미지에만 치중하거나 강조한 부분이 있다.

거북선은 보기에는 신비스럽기도 하고 그럴 듯할지 몰라도 기껏해야 강이나 연안용에 불과하다.

그리고 물저항력때문에 느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참으로 궁금한 것인데 우리나라 고대 함선들은 모두 선수(船首)가 직립(直立)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은 바다 대양으로는 한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한계만을 이야기 할뿐이다.

거북선 즉 귀선(龜船)의 선수(船首)가 직립이라는 점은 동의할 수 없다.

장갑함 또는 철갑선이라 할 때 가중되는 함선의 무게와 선수의 직립이기 때문에 받는 저항등 명확하게 속력을 떨어뜨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귀선에 덮개가 있다는 것도 동의할 수가 없다.

개판에 십자로로 길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불화살공격에 의해 불이 붙었을 때 경사가 있는 개판 위를 해상 항해 중에 걸어 다니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 등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방화문제 뿐만아니라 시야를 막고 있다는 점은 쌍방 적을 알아야 하는 전투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으로서 정말로 위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 16세기와 달라 어지간한 배에 눈(시야)이라  할 수 있는 레이더 장치가 되어 있다.

이 레이더 구실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바보천치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거북선을 덮어 덮개를 만들어 병사들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거나 백병전을 피한다 하였는데 제일 중요한 시야, 눈을 가리고 무슨 놈의 전쟁을 치루겠는가.

적을 모르니 백을 잃고 하나를 얻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철갑선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 모양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추증: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해안경비선으로 공격함으로 얕은 근해에서 유연성이 강한 것이 무기였다고 하는 곡수선(曲艏船:Crommesteven)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위 사진의 그림과 같은 형태의 굴곡을 만들어 판옥과 같이 꾸미되 그 형상이 거북이 등처럼 굴곡이 지게 하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만약 거북 등처럼 덮개를 덮었다는 것이 맞다면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이지만 귀선 자료에서 어느 곳이든지 한자로 덮개 개(蓋)를 표시했을 것이지만 그러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귀선(龜船)이 충돌용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하여 거북선이라면 선수(船首:bow)에 뾰족한 쇠붙이 충각(衝角)이 매우 두드러져야 함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남이공이 말한바와 같이 해전에서는 빠르고 가벼운 전선(戰船)이 최고라 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반도역사 덕분에 사실성을 내다보는 안목이 형편없어졌다는 것을 탓하기 조차 싫다.

왜구들이 좀비처럼 마구 거북선 위로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낮은 곳에서 오르는 것만 겁이나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덮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덮개로 인해 오히려 불리한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해전에서 화력이 강한 측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서양해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이유때문에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전열함(戰列艦:ship of the line)을 만들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해전에서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전열함에 속한 함선들을 일자진을 만들고 화력을 집중하게 했다는 사실을 참고해야 하는 것이다.

거북선처럼 덮개가 닫힌 곳에 있던 지휘관이나 병사들이 덮개로 인해 시야가 막혀 적의 동태나 아군 함대 상황을 볼 수 없다면 동시에 발사해야 하는 국면에서 어떻게 일치되게 화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화력의 강도에 따라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처지에서 일자진 지휘에 어떻게 각 함선들이 적응할 수 있었겠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아무리 반도역사의 한반도 구성원들이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존재했다고 하지만 해전을 한번도 치루지 못한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늘 벗어나고 싶어나는 반도역사라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이치적인 면에서 생각하면 모를 것이 없다.

굳이 왜구들이 좀비처럼 마구 거북선 위로 뛰어 내리거나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덮개를 만들지 않아도 속력만 있으면 따라 잡을 수 있고 화력이 강하면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것이 해전의 승리요건이다.

개판에 금속판을 곳곳에 붙여 송곳같은 것을 꽂았다고 하는 발상은 오히려 전선행동반경을 더디게 하면서 움직임만 무겁게 할 뿐 적에게 오히려 이롭게 하는 어리석은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저명한 학자들은 말도 안되는 꿈을 꾸고 있다.

거북선은 "외판이 나무판으로 덮여 있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의 승조원을 보호할 수 있고 마구 덤벼드는 백병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돌격선이 되어 적진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등장하는 통제영 거북선]

 

또 한가지 지적한 것을 실제로 거북선 모형의 설계도면인 것처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중구난방(衆口難防)이라는 사실이다.

전체 모양만 비슷할 뿐 하나같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일반인들이 상상력만 가지면 누구라도 그릴 수 있는 그림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솔직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위 그림은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등장하는 통제영 거북선 도면인데 오히려 거북선에 덮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 통로가 트여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한 눈으로 알 수가 있다.

또 이것을 개폐식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그림은 선수(船首) 이물 밑앞에 닻(anchor)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며 충각의 용머리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며 또한 거북 등 개판에 쇠창살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들쑥날쑥한 것처럼 도면들이 모두 따로 놀고 있다.

이것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근세기에 생성된 동아시아대륙사와 함게 갑작스럽게 만든 창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상황들이다.

 

[d], 귀선은 남북전쟁때 장갑선과 같은 것이다.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는 이 귀선(龜船)을 분명히 장갑함(armoured ships)이라하였다.

이제부터 서양인들의 함선들을 참고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네이버케스트]에 보면 조선의 마지막 연대를 1881년이라 하였던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월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는 1882년에 펴낸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였고 그곳에서"금속으로 표면을 감쌌다(covered with metal)"라고 한 사실,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轄甫,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는 미국잡지 ‘하퍼스 뉴 먼슬리 매거진(Harper’s New Monthly Magazine)의 1899년 6월호에 거북선을 거북배(tortoise-boat)라고 표현하면서 철판(Iron Plate)으로 감싼 구조라고 명시한 사실, 이것은 거북선 모양같다는 것이 아니라 느리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1929년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14판에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군함(first Ironclad war vessel)"이라는 설명이 있었다는 자료를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분과지(Korea Branch of Royal Asiatic Society)에 실린 논문을 통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 때까지 모두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생각과 주장이 난무했지만 이것으로 한 풀 꺾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서세들에게는 본질적인 세계삼한역사찾기가 금기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한반도 인들은 스스로 자위하길 철체 선체 철갑선(Iron Hull-Ironclad)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제 선체 철갑선(Wooden Hull-Ironclad)도 존재했다라고 정리하면서 못내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무엇인가 불편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가? 

이와같은 사실에서도 볼 때 지금도 그렇지만 서세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아마도 당장 독도가 한국땅이 아니라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등에서 주장한다면 아마도 독도가  졸지에 남의 땅이 되고 마는 꼴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 역사는 그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설왕설래 하던 거북선 철갑선설을 1933년 영국왕립학회가 나서 냉정하게 정리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돌고 도는 법, 진실역사가 천리를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당장에 여기서 발견된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의 놀라운 기록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끝까지 작은 희망이라도 저버릴 수가 없다.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가 조선에는 19척의 귀선(龜船)이 있고 이것은 분명히 장갑함(armoured ships)이라 명시하였다

이제 반도역사관에서 빠져 나와 이 장갑함을 서양 장갑선(裝甲船:armored ship)에서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할까?

내셔날리즘이 너무 강해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다.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분과지(Korea Branch of Royal Asiatic Society)에 실린 논문을 통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라고 주장한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다분히 감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은 그들의 강한 부정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세계함선역사에서 장갑함(裝甲艦)이 서세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해군이 툴롱병기창(Arsenal de Toulon)에서 1859년 11월에 철갑전함 글로와(Gloire:5,618 ton, 철판두께 4.7inch, 사령탑두께 3.9inch)를 진수하고 부터 알려진 것으로서 나타나고 이에 자극을 받은 영국 등 각국에서도 경쟁적으로 건조하기 시작한 것임을 알게 한다.

프랑스는 조선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엮이는 국명이다.

때문에 소홀하게는 생각할 수가 없다.

프랑스 이후 장갑함은 이 철갑선이라고도 하면서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1861-1865)에 나타난다.

처음 장갑함 끼리의 충돌은 바로 남북전쟁때인 1862년에 버지니아(Virginia)의 체스터필드(Chesterfield County) 북동부지역 남부동맹의 요새인 드레위리 블러프(Drewry's Bluff)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남군 철갑선 버지니아(CSS Virginia:4,100 ton, 5-6노트, 320명 승무원 1862년 진수 1862년 자침(自沈))와 북군 철갑선 모니터(USS Monitor:1003 ton, 6노트, 49명 승무원, 1862년 취역, 1862년 12월 31일 실종)간에 충돌이다.

위 양 함의 기록을 보면 일단 남군의 버지니아가 북군의 모니터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충돌에서 모두 침몰되거나 실종되고 만다.

하지만 이 두척의 장갑함 이외 북군에는 512톤급의 장갑함 카이로(USS Cairo:512 ton, 4노트, 251명 승무원 1862년 취역 1862년 침몰, 1962년 회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오히려 규모면에서 모니터보다 작은 것이다.

역시 문제는 미국인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가 1886년 당시 조선에서 발견한 장갑함(armoured ships)이라고 하는 귀선(龜船)이 한 두 척이 아니라 19척씩이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실체를 찾는 일이다.

이것은 본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거의 펙트(fact)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을 뿐이다.

비록 그가 조선의 함선과 선원들을 확인할 수 없었고 실물이 아닌 명목상(nominally)이란 단어를 사용하거나 오직 문서로만 존재한다(exist only on paper)는 것으로 못을 박고 있지만 그렇게 볼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실제로 문서가 남아 있다는 것은 이와같은 실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승무원 숫자를 조작하면서 숨기려 한 것이 비록 그가 아니더라도 나중 편집과정에서 한반도 역사에 맞춰놓은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장갑함(裝甲艦)을 영어사전에 보면 “a cuirassed ship”, “an armored ship”라고 설명된다.

장갑함은 혹은 철갑함(鐵甲艦:ironclad)이라고도 하는데 백과사전에 보면 19세기 전함들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증기기관으로 추진되고, 철이나 강철로 된 장갑으로 함선을 보호하게 되며, 무거운 대포가 탑재되어 있는 것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알기 싶게 강철판(鋼鐵板)으로 싸서 무장(武裝)한 군함(軍艦)으로 사령탑, 포탑, 수선부 등을 한정하면서 발전되는 동안 곧 대다수 갑판을 철갑한 형태를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초기에 연안 경비함, 그리고 나중에는 발달하여 장거리 순양함 등의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지만 미국인 선교사였던 호머헐버트(轄甫,Homer Bezaleel Hulbert)가 말한 것처럼 느린 거북을 연상하여 거북배(tortoise-boat)라 하였듯이 아주 느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장갑함의 변화는 거포(巨砲:a big gun, cannon)의 발전에 따라 확장되었으며 1880년대의 철갑선은 유래 없는 가장 무거운 함포들을 경쟁적으로 장착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철갑의 시대는 해군의 전술들이 끊임없이 변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많은 장갑함들이 처음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것처럼 적(敵)함선을 들이받기 위해, 또는 많은 발전을 통해 어뢰를 발사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1890년대 말엽부터는 '장갑함'이라는 명칭을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철로 전함 또는 장갑순양함으로 건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위 장갑함 또는 철갑함의 설명 중간 어디 쯤에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가 조선에는 19척의 귀선(龜船)이 있고 그것이 장갑함이라고 한 사실을 여기에 우리가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대조선이 존재하여 1881년에 하나의 역사가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해군군사력 전반에 걸쳐 삼제동맹이 관할하면서 최후까지 서로 나누어 관리했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조선의 귀선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글쓴이는 오늘(2014년 12월 30일)에 이러한 결과를 돌출한 날을 기념일로 만들고 싶을 정도이다.

그 만큼 조선말기의 군사력을 찾기 위해 고민이 많았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은 실용성에서 문제점이 너무 많은 형태에서 이미지만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임을 앞에서 여러가지 설명을 붙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리하였다.

사실상 귀선(龜船)은 1412년 경 왜구의 침입으로 태종이 직접 해전을 관람할 수 있을 만치 충돌용의 함선으로 쇠정(鐵釘)을 양머리에 꽂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장갑함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1886년의 귀선은 이것의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고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인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가 1886년 당시 조선이 보유한 귀선(龜船)을 서양처럼한 장갑함(armoured ships)이라고 규정한 것에 상당한 의미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왜 서세우월주의에 함몰되어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1886년 조선이 보유한 19척의 귀선(龜船)은 남군 철갑선 버지니아(CSS Virginia:4,100 ton), 북군 철갑선 모니터(USS Monitor:1003 ton), 그리고 카이로(USS Cairo:512 ton)와 같은 형태일 것이란 판단을 충분하게 하게 하고 좀 더 나아가면 당시 독일제국이라고 알려진 독일 장갑함(ironclad warships of Germany)16척이 있다는 사실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2편 계속

 

 

 

 

 

 

 

                                                      버지니아(CSS Virginia)

 

 

                                                      모니터(USS Monitor)

 

 

                                                        카이로(USS Cairo)

 

 

Ironclad warships16

List of ironclad warships of Germany

 

Arminius class

SMS Arminius, 1864

 

Prinz Adalbert class (1,560 tons, 5 x 36pdr guns)

SMS Prinz Adalbert, 1865

Kronprinz SMS Kronprinz, 1867

Friedrich Carl class SMS Friedrich Carl, 1867

 

König Wilhelm class, (9,750 tons, 33 x 72pdr guns)

SMS König Wilhelm, 1868

 

 

Hansa class SMS Hansa, 1872

 

Preussen class (6,800 tons)

SMS Preussen, 1873

 

 

SMS Friedrich der Grosse, 1874

SMS Grosser Kurfürst, 1875

 

Kaiser class (7,319 tons, 8 x 26 cm guns)

SMS Kaiser, 1875

 

 

SMS Deutschland, 1875

 

Sachsen class (7,800 tons, 6 x 26 cm guns)

SMS Sachsen, 1877

SMS Bayern, 1878

SMS Württemberg, 1878

 

 

SMS Baden, 1880

 

Oldenburg class (5,250 tons, 8 x 24 cm guns)

SMS Oldenburg, 18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