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한부울 2015. 1. 5.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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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글쓴이:한부울

 

[대한제국 1편 계속]

아라사의 정체
악라사의 인종 구별
타타르 땅은 악라사 땅이지만, 현재 러시아라 할 수 없다.
악라사(鄂羅斯)의 영토와 위치
대한제국의 생성과 아라사제국
19세기초 급속히 발칸화에 진행되는 것은 역사분리인가 독립인가
마무리

 

아라사의 정체

 

악라사(鄂羅斯)는 아라사(阿羅斯), 아라시(俄羅嘶)라 읽어지고 곧 러시아라고 인식하기싶다.

역사적으로 보면 러시아(Russia)는 루시(Rusi)를 바탕으로 하는 명칭이지만 러시아란 명칭은 근세기에 생성된 이름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어서 역사와 전통성을 말하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한어사전에는 악(鄂)은 나라이름으로 쓰인다 하였고 호북(湖北)지역의 별칭으로 쓰이거나 몽골유목을 나타내고 몽골의 으[è]발음의 글자이며 나라이름 첫 자에 들어가 아(阿)는 호칭아[ā]로 쓰이며 아(俄)역시 음(音)이 으[é]로 나타나 악(鄂)과 같은 것으로 풀이되어 아라사(俄羅斯)와 같이 쓸 수 있다고도 판단된다.

그렇더라도 아직까지 악라사를 아라사라고 한다지만 악라사가 러시아(Russia)라고 단정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세사는 러시아를 러시아제국(俄羅斯帝国:1721-1917)이라하고 동양에서는 한자 음(音)으로 라송(羅宋:Russian Empire)이라고도 하며 역사적으로는 표트르 1세(Great Peter I:1672-1725,재위:1682-1725)로부터 시작되는 연대표에 나타남을 알 수 있고 표트르1세가 1721년에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스웨덴 프레드리크 1세(Fredrik I)와 모스크바에서 강화하면서부터 시작된 역사라고 근세사는 적고 있다.

때문에 러시아가 시작된 것은 1721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1721년의 의미를 하나의 역사로 보면 1720년 숙종이 졸하고 경종이 즉위하는 것과 표트르1세가 죽는 1725년 앞에 1724년 경종이 졸하는 것과 대비되며 1725년에 처음 베링해협 발견하게 된다.

 

 

                                                   [Beta vulgaris-Beets Bundle]

 

동양에서 알려진 음식으로 러시안스프, 라송탕(羅宋湯)이라고 하는 보르스치(borsch)스프가 있다.

사탕무(beet:Beta vulgaris)를 넣고 끊여 강한 붉은 색을 띠는 수프로서 우리 김치찌개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러시아와 폴란드의 대표적인 음식이며 처음 보르스치를 먹기 시작한 곳은 우크라이나로서 동유럽, 중앙유럽할 것 없이 선호하는 요리가 되며 먹을 때 사워크림(sour cream)을 곁들여 먹는 전통음식이다.

그런데 이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사탕무(beet)는 우리사록에는 첨채(甜菜)라 하는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이 비트를 구하지 못해 주로 토마토를 많이 넣는다고 알려진다.

동양과 동아시아대륙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위 지도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의 자료로서 1900년 이전 DNA를 분석을 바탕으로 한 사탕무의 분포지도를 살펴보면 일반자료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단 유럽남부와 지중해연안이 원산지로 밝혀지는 것과 일치하고 좀 더 넓은 유럽전역을 분포지로 나타난다.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유럽지역과 생물학적판단에서 마치 합체된 느낌을 주고 있는 캘리포니아(California)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British Columbia)가 주요분포지로 나타나며 그리고 텍사스주(Texas)를 가르키고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캘리포니아, 브리티시컬럼비아, 텍사스주를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비트(beet)의 원산지 개념과 함께 라송(羅宋) 즉 악라사의 근원지라 할 수있는 흔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도 한다.

 

다 잘알다시피 러시아의 역사근원은 9세기에 등장한 동슬라브계(East Slavic)의 키예프 루시(Kievan Rus:8821283)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근세사는 말하고 있다.

러시아 시조라고 하는'루시(Rus)'는 바로 1240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拔都:Batu:1207-1255)'가 통치하던 금장한국(金帳汗國:Golden Horde) 즉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1243-1502)"몽골계타타르인"들에게 완전히 절멸(絶滅:extinction)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음에도 끝까지 동화되지 않고 러시아(Russia)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은 서양우월주의에서 만들어진 유럽사의 고질적인 모순과 함께 인종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수가 있다.

이와같은 것은 대만인 심건덕(沈建德1947~)의 한족(漢族)허구의 주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漢族向為少數民族早已被眾蕃包圍消滅그는 말하길 한족은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것인데 일찍이 주변의 여러 번()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고 하였음에도 현재 동아시아대륙에 신중국 인구의 92%가 한족(漢族)이라 한다는 것은 거짓이며 기존 역사자체가 허구라는 한 것이다.

동아시아대륙사가 허구라는 문제에서도 중국역사학강사 원승비(袁勝飛)가 2010년 5월 7일에 주장하길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중국의 역사교과서보다 역사를 덜 왜곡하고 있다면서 중국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내용 가운데 5% 정도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순전한 허구다"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 중국사의 허구설을 정확하게 뒤받침되는 것이다.

한족이 92%라고 우기는 것이나 현재 신중국에서 중국사라고 논하는 동아시아대륙사 95%가 허구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주장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100%허구라는 사실보다 못하지만 역사허구란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유럽사라고 하는 근대사는 몇%가 허구겠는가?

동아시아대륙사가 그렇다면 거의 100%라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역사체제에서 유럽역사가 자리잡을 공간이 없었고 유럽역사는 북아메리카대륙을 신대륙이라고 하는 허구의 역사 프레임을 깔고 만들어진 역사이기 때문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동아시아대륙사에서 말하는 한족(漢族)은 중앙아메리카의 역사구성원이라 할 수 있고 대만인 심건덕(沈建德)이 말한 번은 외번(外)을 말하는 것으로 서세색목인(西勢色目人)들이며 근세기 이전부터 이를 해양세력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들에게 포위되어 소멸되었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루시가 현재 러시아의 조상이라 할지라도 이미 킵차크한국 몽고타타르에게 절멸되고 인종적으로 동화되었을 것이고 인종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소멸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 때때로 고구려와 맥을 같이 하는 메르키트족(Merkit)이 몽골타타르라고 하는데 루시는 어디까지나 인종적으로 여기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대륙사의 95 % 허구라는 사실과 유럽사가 거의 100%가 실제역사가 아니라는 사실들은 러시아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를 참고하여도 알 수 있는 것으로 유럽사가 허구란 사실은 이미 프랑스학자이며 예수회도서관장출신인 쟝 아르두앵(Jean Hardouin:1646-1729)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절멸하고 소멸한 인종들을 남아 있게 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근세기에 만든 역사새판짜기에서 들어날 수밖에 없는 허구의 사실들을 가리고 숨기기 위함이다.

근세사는 본래 하나의 역사체제에서 없던 것을 새로 만들거나 새로 생기게 하는 오직 서양중심편향된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동아시아대륙에 신중국을 만들수 밖에 없었지만 이마저도 따져보면 유럽사가 태동되기 위한 수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때 동양사라고 한정하고 동아시아대륙에 세위진 중국사가 서양사에 비해 얼마나 열등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몽골타타르족(Tatar)이 날고기를 갈아서 양념에 버무려 먹는 일종의 전투식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함박스테이크(Hamburger steak)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인종(人種)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가 있는데 현재 초식성 체질을 가진 동양인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검증가능한 다수의 학자들의 생물학적 주장을 참고 하더라도 육식동물의 위(胃)는 간단하고 소장과 대장은 짧고 반듯하며 평평하고 매끄럽다고 되어 있고 장의 길이는 등뼈의 길이의 3 배로서 초식동물에 비하여 매우 짧은 편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서양인의 장 길이 보다 동양인의 장 길이가 약 30%나 더 길다고 하고 있으니 장 길이가 7.5~9m라고 볼 때 30%라는 것은 상당한 길이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고기가 오랜시간 동안 창자안에 머물고 있을 경우 체내에서 부패하기 쉽고 부패될 경우 독소가 생산되어 흡수되면 간과 신장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소화가 덜된 고기 찌꺼기 등을 신속하게 체외로 배설시키기 위해서 창자를 짧게 유전적으로 변이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물학적인 명확한 자료가 있음에도 육식을 하는 몽골인을 초식의 동양인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은 엉터리가 같은 이야기다.

그것은 오류를 넘어 논란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서 단지 1934년 독일의 인류학자인 에곤 폰 아이크슈테트(Egon Freiherr von Eickstedt:1892-1965)가 쓴 인종학과 인류인종역사[Rassenkunde und Rassengeschichte der Menschheit]란 책 한권으로 몽골리안(Mongolian) 또는 몽골로이드(Mongoloid)이라는 이름의 딱지를 가슴에 단 아시아 황색인종들은 징기스칸이 황색인종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악라사의 인종 구별

 

그렇다면 이제 몽골인이라고도 하는 악라사는 사료에서 어떤 인종으로 구별하였는지 살펴보자.

心田稿[]

留館雜錄, 諸國

鄂羅斯亦名大鼻橽子國在黑龍江北距中國二萬餘里十年一至留館遞易不朝不貢其人黑面高鼻性悍

위 기록은 강원감영 막비 출신인 박사호(朴思浩)의 심전고(心田稿:1828) 유관잡록(留館雜錄) 제국(諸國)편에 일부의 글로서 악라사는 대비달자국이라 하였고 흑룡강 북쪽에 있으며 중국과 거리가 이만여리나 된다 하였으며 그들이 묵는 유관(留館)에 관원들이 10년 한차례씩 바뀌면서도 조례()도 하지 않고 조공()도 하지 않으며 그 사람들은 얼굴이 검고 코가 높고 성질이 사납다라고 정리되어 있다.

악라사라고 하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의 사람들은 얼굴이 검고 코가 높다는 것을 일단 알 수가 있다.

얼굴이 검다는 것은 흑인(黑人:Negroid)이다.

현재 아시아 인도아대륙에 있는 인도사람들은 검은얼굴들이 많다 하지만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은 코카소이드(Caucasoid)라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자료에 보면 오래전 코카소이드는 검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연행기사(燕行記事) 잡기(雜記)

문견잡기(聞見雜記)

其爲人與淸人自別兩顴高眼碧髥紫皆悍惡麤健不思室居雖極寒之時只設帳於車上而宿於道路朝乃拂雪而起飢則只噉駱肉又與狗同器而食其性之勁悍醜惡如此故淸人上下皆畏而賤之罵辱之際比以蒙古則必勃然而怒以爲大辱其不以人類相待可知也

 

위 이갑(李押1737-1795)의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기록에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강한(强悍)하고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淸人)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蒙古)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에서 관찰할 것은 첫째 몽고인과 청인이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몽고인은 일단 광대뼈(顴)가 높다는 것 이외 눈이 푸르고(眼碧) 구레나룻수염(髥)이 붉은(紫)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즉 청인은 위의 조건의 인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형질은 똑 같지만 형태적으로 이런 모습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광대뼈가 높다는 것은 현재 몽골리안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벽안(眼)이라는 것은 오히려 동아시아인들이 서양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들어 벽안호승(碧眼胡僧)이란 말도 중국에서, 외국인인 ‘달마대사’를 달리 이르던 호칭으로 호승(胡僧)은 서양인 승려(僧侶)이고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천축향지왕(天竺香至王)의 셋째 아들로서 서양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몽고인은 일단 서양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호(胡)라는 것도 서양인 것이다.

결국 청인도 중국인과 다른 색목인이 아닐 뿐 서양인이다.

 

연행기사(燕行記事) 잡기(雜記)

문견잡기(聞見雜記)

蓋歸服之蒙古其種本少而待之與滿州無別中國之人與外番色目人爲婚者雖嚴禁而此則昏媾相通西洋人若干雖隷於欽天監以修曆法而其餘則外夷無入仕者此則仕宦與滿州同外國雖通物貨俱有防限操切而此則商賈互相往來無間八旗之制選任之規各項差役一如淸人而實則其中煞有界限渠輩亦各從其類有若淸漢之終不相混

 

또한 문견잡기(聞見雜記)에 위와 같은 아리송한 내용도 있다.

"귀순 복종한 몽고(蒙古)는 그 종락(種落)이 본래 적은데 대접하기는 만주와 같이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과 외번(外番) 색목인(色目人)과의 혼인은 엄금하지마는 이들과는 서로 혼인한다. 서양(西洋) 사람 약간이 흠천감(欽天監)에 예속되어 역법(曆法)을 맡고 있지만 기타의 외이(外夷)로서 입사(入仕)한 자는 없는데 이 사람들은 만주 사람과 같다. 외국과는 비록 물화를 통하나 모두 한계와 구속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상고(商賈)가 왕래하며 차별이 없다. 팔기(八旗) 제도와 선임(選任)하는 규정과 각항(各項) 차역(差役)도 청인과 똑같다. 그러나 그중에도 한계는 있다. 이것은 그들이(渠輩)각기 제 종류를 따라서 마치 청인과 한인이 끝내 서로 섞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위 문장들을 다시 풀어보면 즉 중국(中國)사람들은 서양 색목인(色目人)인 외번(外番)과는 혼인이 불가능하지만 몽고인과는 가능하다고 하였고 청조 토속인 만주인과 똑같이 대우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청인 역시 몽고인과 다르지 않는 인종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문제를 생각해보면 서양인도 색목인과 그렇지 않는 서양인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하여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며 살펴야 하겠지만 지도상 대서양과 소서양을 나누고 있는 것도 이와같은 구분을 하는 지명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 서양(西洋) 사람 약간이 흠천감(欽天監)에 예속되어 역법(曆法)을 맡고 있다 한 것은 지금의 페르시아인을 두고 이를 말일 것이다.

역법, 수학에서 가장 오랜된 자료들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페르시아라고 하기 때문이다.

 

연행기 제1 起鎭江城至熱河경술년(1790,정조14) 7[1-15]4

淸有天下參用蒙回諸部朝廷太半是色目人以中華之利與外夷共之故邊塵之不警已百餘年

 

그래서인지 위 서호수(徐浩修:1736-1799)가 쓴 청조 여행기인 연행기(燕行紀)에는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고서 몽고(蒙古), 회회(回回)등의 여러 부족들을 섞어서 등용하게 하니, 조정의 태반(太半)이 색목인(色目人)이다."한 것처럼 청조 조정에서 등용한 몽고와 회회가 색목인이었다는 것으로서 비율적으로도 그들을 더 많이 등용한 것임을 알게 한다.

때문에 현재 황색인종 동양인과 구별되는 서양색목인들이 득실되는 조정(朝廷)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눈 색깔(Eye color)자료를 참고하면 1899년부터 1905년에 태어난 백인의 푸른 눈(眼)의 비율 57.4%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푸른 눈을 가진 인종은 백인이라고 취급되었을 수도 있다.

색목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눈 색깔들을 보면 푸른 색(Blue)과 녹색(Green)을 색목인이라 하였을 것이란 판단이 든다.

이렇게 식별로 잘 들어나는 색깔의 색목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이란, 인도인에게도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연행기기록들을 가지고 이와같이 색목인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에서도 획기적이라 할 수 있지만 아마 반도역사개념으로는 이런 사고발전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한반도 북쪽 만주에 서양색목인들이 득실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서양인이라는 것은 곧 서세라 통칭되는 유럽인이라고는 잘라 말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풀이를 보면 색목인(色目人)원대(元代)의 서역(西域) 여러나라 사람의 총칭으로 31()의 종족으로 나누었다고 하였으며 특별하게 중국이라 하지 않고 중원이라 해도 되는 중토(中土) 민인(民人)의 족류(族類)가 아닌 서양인 외번(外番)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구분 설명하고 .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서역은 이미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라 하였으니 그 서부에는 31종의 종족이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별도로 본다면 대서양과 소서양지역에서도 이러한 인종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본 블로그에서 중원이라는 것은 중앙아메리카라 하였다.

그곳 중원의 원주민의 여러종족들은 색목인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서양인 외번들이 색목인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본시 우측을 중시하고 숭상하던(新朝尙右之禮) 몽골인들이 지배하던 원조(元朝)에서 우방과 좌방으로 나눌 때 우방(右榜)에 몽고인과 서양색목인(色目人)을 앉혔다.[元史卷81選擧志1]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반도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가 판단하는 것과 매우 다른 이야기다

이런 인종이 백인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가장 확율적으로 높게 보인다.

 

또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안사고(顔師古:581-645)가 쓴 한서(漢書)주석편에 나오는데 漢書卷九十六下,西域傳第六十六下[]師古曰烏孫於西域諸戎其形最異今之胡人青眼赤須狀類彌猴者本其種也 "즉 오손(烏孫)은 서역의 여러 융()중에서 그 형상이 가장 기이(奇異)하다. 지금의 호인(胡人)이 청안(靑眼)과 붉은수염의 형상이 원숭이(彌猴)종류와 같은 것으로 본시 그런 종족이다."이라 한 것에서도 오손(烏孫)은 이름에서 이미 까마귀 오가 들어가 검은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고 악라사(鄂羅斯)사람과 똑같이 푸른 눈을 가졌다고 하여 호인(胡人)도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眼)를 가진 서양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한다.

이것을 오늘날 코카소이드라고 하지 않았는가 판단한다.

코카소이드를 무조건 백인이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몽골인종(Mongoloids)이라 하는 특징은 피부색이 황색 내지 밝은 갈색이고, 두발은 검고 빳빳하며 체모는 적고 얼굴 모양은 폭이 넓고 코나 낮으며, 눈은 갈색내지 흑갈색을 말하는 것과 완전히 대조될 뿐아니라 다른 인종임을 심전고(心田稿)연행기사(燕行記事)를 통해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실제로 근세기에 출판된 우리나라 잡서에도 보면 아라사(俄羅斯)를 대비달자(大鼻獺子)라고 하고 몽골종족 또는 유종(遺種)이라고 하였으며 생김새가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코가 크고 수염이 붉은 것으로 오늘날 우리와 다른 형태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몽고제국의 징기스칸을 러시아사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러시아의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반도역사보다 훨씬 더 솔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현재 러시아인들의 얼굴을 보면 검은 얼굴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다시 말해 달단(韃靼) 즉 타타르(Tatars)라고 하는 역사사실과 일치할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그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최소한 1945년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1949년까지의 흐름의 역사가 절대 자연이치에 따른 정상적인 역사라 할 수 없었던 말살의 시대이고 폭압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악라사가 아라사(俄羅斯)라 할지라도 지금의 러시아라고는 단정 할 수가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있다.

이런 인종적인 문제를 살펴보아도 어떤 큰 역사 하나가 중간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말은 악라사와 러시아사이에 거대한 역사 실체와 그 명칭이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타타르 땅은 악라사 땅이지만, 현재 러시아라 할 수 없다.

 

Gaultier, abbe(Aloisius Edouard Camille), 1746-1818

Author : Wauthier, J. M. 1799

Publisher : Harris and Son(London)

 

 

위 지도는 런던에서 1799년 출판제작한 고티에[Gaultier, abbe(Aloisius Edouard Camille), 1746-1818 ]의 유럽과 아시아란 지도이다.

이 지도를 출판한 이유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근세기 이전 역사 사실이야 어떻던 간에 이런 지도를 무차별 만들어 퍼뜨린 서양인들은 타타르(Tartary)조차도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기존역사사실과 완전히 배치되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영역적으로는 현 아시아대륙에서 유럽대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우랄산맥과 돈강(Don river), 볼가강(Volga river)을 중심으로 동쪽전체를 대달단(大韃靼:Great Tartary)이라 하고 세부적으로 시베리아 혹은 루시안타타르(Siberia or Rufsian Tartrary)를 북쪽, 중앙아시아부분에 타타르자치국(Independent Tartary), 동아시아대륙에는 차이니스타타르(Chinese Tartary)를 표시하고 있다.

이 영역이 아시아대륙으로 굳어진 것이다.

즉 18세기 말엽까지는 서양에서도 아시아대륙을 타타르 영역이라 했다.

하지만 콜롬버스의 지리학 개념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북부를 타타르라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감안해야할 이야기다.

 

[콜롬버스의 지리학 개념도]

 

 

 

한반도역시 차이니스타타르 영역에 뚜렷한 경계선도 없이 소속되어 나타나고 서양인들이 코리아(高麗)를 어쨌던 달단(韃靼) 즉 타타르(Tartary)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려가 타타르라는 설은 틀리지 않는다.

 

현재 러시아의 역사실체가 사실과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위 고티에[Gaultier]지도가 그려지던 시기 1799년에서부터 따져보면 무엇인가 이치에 맞지않는 것이 많다.

이 지도가 그려진 1799년에 알레스카에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설립되었다.

그것에 역사적인 연고는 없지만 식민지화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논리는 다분히 유럽서양세력들의 먼저 선점하는 발견주의, 탐험주의, 개척을 빙자한 침탈에 의한 식민지영토만들기 운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세가 그린 위 지도에는 타타르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면 위 지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랄산맥을 경계로 한 동쪽영역에 시베리아 혹은 루시안타타르(Siberia or Rufsian Tartrary)라고 표시된 실체가 과연 러시아아메리카회사를 설립하게 한 국가주체인가 하는 점이다.

이 시베리아 혹은 루시안타타르(Siberia or Rufsian Tartrary)가 결국 러시아제국이라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이야기다.

러시아제국의 역사야 표트르1세가 1721년에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부터 러시아제국이 출발했다고 분명하게 근세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근세사가 말하는 이 러시아가 현재 러시아라고 하는 실체의 러시아인지는 알 수 없고 그러한 러시아가 과연 이땅의 역사적인 연고가 있었던 것인지 서세가 그린 지도에 타타르가 표시된 것에서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세사는 또한 극동(極東)러시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러시아는 극동에서 연해주를  청()으로부터 확보한 것은 1860년에 체결된 북경조약(北京條約:Convention of Peking)에 의한 것인데 당시 제2차 아편전쟁(Arrow War:1856-1860)으로 청과 유럽국가(서세:영국, 프랑스)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하고 그 보상으로 연해주를 얻었다는 것이다.

어쨌던 근세사가 다 얼렁뚱땅 넘어가고자 하는 모양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이후 동양의 지배자(the ruler of the East)란 뜻의 블라디보스토크, 해삼위(海參崴:Vladivostok)라고도 하는 도시를 연해주에 세웠으며 동시에 시베리아철도(Trans Siberian Railroad)를 건설했다고 하였는데 이런 상황과 러시아가 취한 역사와 전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계획은 이미 1850년에 세웠음에도 1867년에 금과 구리뿐만아니라 침엽수림의 목재나 석탄, 천연가스 등 기타 자원들까지 합쳐 미화 수십억달러(현재 미화 수조달러)이상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땅, 면적1,717,856km²의 알래스카(Alaska)를 단돈 720만달러($7.2 million)를 받고 미국에게 팔았다고 하였다.

극동에 그만큼 영향력을 넓혀 진출을 하고자 했다면 바로 건널 수 있는 베링해만 사이에 두고 있는 알레스카를 푼돈 몇푼받고 팔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앞서 1725년에 베링해를 탐험하고 발견했다고 하였다.

극동지역만 중요하고 알레스카는 헐 값으로 팔아버릴 수 있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알레스카는 비록 베링해가 사이에 있지만 거의 붙어있는 영토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이다.

또한 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러시아가 1850년에 ()중국무역과 극동지방의 군사적 의의(意義)증대 및 시베리아식민지확대등을 목적으로 극동진출에 따른 시베리아철도건설계획을 세웠다 하였고 그로 부터 17년 후 알레스카를 팔아버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후 1887년에 시베리아철도로선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1891년부터 착공하고 1897년에는 부분적으로 우랄산맥(Ural Mountains)동편 첼랴빈스크(Chelyabinsk)에서 바이칼호(Lake Baikal)서편에 있는 이르쿠츠크(Irkutsk)까지의 로선을 개통하였음에도 그야말로 수백년동안 인민에게 먹여살릴 수 있는 엄청난 보고를 푼돈도 되지 않는 돈을 받고 매각해버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와같은 불명확한 사실에서 결국 당시 러시아가 아시아 연해주에 진출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결코 아시아대륙 북쪽 거대한 땅을 러시아란 이름으로 차지할 수가 없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러시아는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얄타회담에 의한 또 하나의 유럽괴물 만들기에서 역사판짜기의 작품이 아닌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물론 지금의 러시아(Russian)가 알레스카 매각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일개 모피장사꾼들이 1799년에 설립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가 알레스카 그 넓은 땅을 다 관리하고 전성기에 포트로스 캘리포니아(Fort Ross, California:1812-1841), 하와이의 포트 엘리자베스(Fort Elizabeth, Hawaii:1814-1817), 포트 알렉산더(Fort Alexander near Hanalei, Hawaii:1817), 포트 바실리 데 톨리(Fort Barclay-de-Tolly near Hanalei, Hawaii:1817)이란 지명의 포트까지 다 관리할 정도였다는 것은 참으로 회사만능주의라 할 수 있는 신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와같은 주장은 다분히 서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주와 북태평양의 하와이까지 엄청난 영역을 관리하고 통제했다는 것은 일개 회사가 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서세가 만든 근대사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근세사라고 하였으니 도리가 없다.

당시 경쟁상대였던 영국계 허드슨베이회사(Hudson 's Bay Company:1670-1869)도 마찬가지로 국가가 할 수 있는 권한을 모두 실행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영역을 기반으로 오늘날 캐나다가 생성되었다는 논리를 깔고 있지만 역사영토개념과 매우 이질적인 이야기가 분명하다.

전부 경제논리가 가미된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말하길 러시아아메리카회사는 영국의 허드슨베이회사와 미국계 수송선 회사의 경쟁과 방해로 인해 알력이 있었고 또한 러시아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이유로 식민지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갑자기 1867년 이 회사가 폐업하면서 동시에 회사 마음대로 이 거대한 알레스카를 독단적으로 미국에 매각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 영토 상식으로 이해가 불가한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길 러시아는 1862년 만기가 된 이 회사의 면허권을 갱신해주지 않았다고 못을 박고 있다.

러시아가 실체가 없는 국가임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서류상 만들고 그것을 조약이니 협약이니 마음대로 꾸며놓고 그것이 역사라고 둘러대니 당할 사람들은 지금의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하는 지식층들이다.

그들은 서세가 만든 교육기관에서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교육을 받고 그들이 주입한대로 암기하고 그것을 지식이라 하여 다시 재생산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기때문에 탓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다.

실체가 이렇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토가 곧 파워라는 등식의 제왕 입장에서 식민지라면 기존 땅보다 더 애착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다.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국가가 자국영토가 된 마당에 있는 땅이 가치가 있던 없던 보존하고 끝까지 지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개똥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이치에 없는 사실들은 거의가 조작된 허구일 것이며 실체는 러시아가 아닌 역사주체가  따로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큰 전쟁에서 패한 나머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할 수 없는 입장에 있지않고 사라지고 없는 역사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고 토를 달고 싶다.

때문에 1918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러시아가 현재 아시아대륙에 존재했다는 것은 맞지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가 일반에게 알려진 시기는 놀랍게도 2차대전 후 1954년이었다 하였으니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크림반도(Crimea)에서 실시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을 밝히는 것 이외 답이 없을 것이다.

옛 타타르의 땅을 전부차지하게 된 것은 현재 러시아라고 하였지만 역사실체가 아닐 수 있고 이 모든 권한이 넘어간 시기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부터 비로서 극동진출이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깃발

 

         The Russian Empire: St. Petersburg(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러시아아메리카회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1764-1807)가 러시아 차르[tsar] 파벨1세(Paul I:1754-1801,재위1796-1801)의 명으로 1799년 7월 19일에 설립했고 처음 코사크(Cossacks)가 세운 검은담비(紫貂.黑貂.林貂:babr:Sable)와 시베리아 호랑이가 상징인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먼저 관할 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비록 3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1897년 대한제국이 건립될 때 시베리아철도가 이르쿠츠크까지 우선개통되었다고 하였으니 알라스카를 팔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곧 180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관할권이 넘어갔다는 것에서 다분히 도시집중적인 기록들이난발된 것은 어쩌면 당시 러시아가 존재하지 않아 러시아 명칭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북미관할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도시들이 실제로 러시아에 존재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르쿠츠크의 도시 상징인 검은담비가 중점적으로 노획된 곳이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지역이란 사실이고 이를 관리하던 회사가 바로 러시아아메리카회사와 경쟁을 하였던 영국 허드슨베이회사라는 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란 명칭도 알고 보면 앞에 세인트(St)을 빼버리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Pennsylvania州)의 피츠버그(Pittsburgh)가 되지만 이 피츠버그의 지명이 미국전역에 거의 40 곳이나 된다는 사실은 이와같은 것들을 더욱 의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악라사(鄂羅斯)의 영토와 위치

 

렇다면 실제로 악라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사료를 통해 영토확인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심전고(心田稿)는 박사호(朴思浩)가 강원감영의 막비(幕裨:裨將)로 1828년(순조 28)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정사(正使) 홍기섭(洪起燮)의 부름으로 받고 수행원이 되어 부사(副使) 유정양(柳正養), 서장관(書狀官), 박종길(朴宗吉)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1828년 10월말부터 이듬해 4월초까지 약 5개월 간의 일기를 기록한 것이라 하였으니 1799년 러시아아메리카회사를 설립하고 난 후이지만 시베리아철도를 계획한 1850년 전이며 알레스카를 매각한 1867년 전 상황이다.

 

심전고(心田稿) 2

유관잡록(留館雜錄)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

鄂羅斯館在玉河橋傍入兩重門建一高閣閣中畫一丈夫披髮赤身流血淋漓瞑目垂首奄然一死人也見之駭愕畫紙上貼琉璃映透其下設椅卓爐燭丹雘鮮麗門楣上畫人物亦以琉璃貼之宛若活動問其尊奉何神鄂羅太子被殺於中國死而有靈故旌表其被殺之狀以奉之云或云利瑪竇被殺留像云未知孰是

악라사관은 옥하교(玉河橋) 곁에 있다. 두 겹문[重門]을 들어가니, 한 고각(高閣)을 세우고 각 안에 한 장부(丈夫)를 그렸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벌거벗은 몸에 유혈이 낭자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엄연히 한 죽은 사람이다. 보고 놀랐는데, 그림 종이 위에는 유리를 붙여 속이 비치어 보인다. 그 밑에는 의자와 탁자, 향로와 촛대가 놓여 있는데, 붉은 칠이 곱고 아름답다. 문미(門楣) 위에 그린 인물도 또한 유리를 붙였는데, 완연히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 받들어 모시는 것이 무슨 신이냐고 물었더니, 악라 태자(鄂羅太子)가 중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죽어서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피살의 모습을 정표(旌表)하여 받든다고 한다. 혹은 이마두(利瑪竇)가 피살된 상이라고도 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위의 심전고(心田稿) 제2권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에서 매우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예수상이라고 판단되는 기록이다.

위 글대로 이야기하면 청나라 북경 옥하교 곁에 악라사관이 있어 들어가니 머리를 풀어헤치고 벌거벗은 몸에 유혈이 낭자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하였는데 순간적으로 예수상이라는 느낌이다.

이 죽은 사람의 조상이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악라태자(鄂羅太子)라고 하며 중국(中國)에서 피살되었다고 하고 그의 영혼을 믿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문()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상의 악라태자 이름이외 이마두(利瑪竇)라 한 것이다.

이마두(利瑪竇)는 이태리 수학자이며 예수회 선교사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의 또 다른 한문 이름이다.

적어도 서양사람이든 무엇이든 간에 하나의 역사체제아래 모두 한문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간과하지 말하는 것은 악라사는 러시아 이외 또 다른 이태리[意(義)大利:Italia]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앞에서 몇군데서 인용한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학교수이며 수학자이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는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1600~1799)에 걸친 것으로 1534815일에 군인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하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또한 그가 말하길 예수그리스도( Jesus Christ)가 기원전  인물이 아니라 12 세기의 인물로, 콘스탄틴노플(Constantinople)에서 기둥에 묶어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책형(磔刑)형벌(刑罰)로 죽었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심전고에서 중국에서 피살되었다고 하는 악라태자의 모습과 비슷하여 중국이 콘스탄티노플임을 알리고 있고 동시에 예수상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다.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예수회 로마 수련원에 들어가 수학, 천문학, 역법, 시계, 지구의, 천체관측기구 제작법까지 배웠다고 하는 선교사 마테오리치는 1598년 북경에 도착 1602년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했다고 하는 것처럼 조선 반도역사를 보면 마찬가지로 역서와 지리에 밝았던 문신 한백겸(韓百謙:1552-1615)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1615]와 출생일이 똑 같아 비견되는 것이기도 하고 이마두(利瑪竇)의 이름을 가진 마테오리치가 중국 북경에서 생활했다는 사실 또한 의문을 이와같은 범위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기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그러나 예수상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기회있을때 다시 하겠다.

 

다음 자료 [1]과 [2]은 역시 심전고의 기록인데 본격적으로 악라사의 영토이야기가 등장한다.

 

[1]按鄂羅斯亦名大鼻㺚子國在黑龍江北與中國通商旅不臣不貢十歲一至留館替易其人深目高鼻天性悍獰嘗白日殺人于街巿乾隆命磔其數人自是稍畏戢石鏡出其地者品佳入其館甚精灑器玩皆珍寶有一人迎坐頗解東語堇敍寒暄床有滿漢書冊篇帙頗多以鄂羅字繹之細字謄書字如梵書卓上有自鳴鍾制甚精妙又有自鳴琴大如掌者其制一轉軸則隨柱撥絃彈成音調又有一紋匣長數尺者雕刻精妙上有圓孔貼琉璃懸于壁間其匣底有一樞機以手轉之則杜鵑忽自匣中飛上琉璃圓孔矯首窺外一聲叫二聲叫聲聲淸婉俄而還下此非眞禽也問鄂羅人此去貴國相距幾里二萬餘里問地方幾里三淸國爲一我國云蓋地盡北海幅圓甚大淸國中原也爲鄂羅三分之一云

살피건대, 악라사란 또한 이름을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 하여 흑룡강 북쪽에 있으며, 중국과 통상하지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조공도 바치지 않는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다 교체(交替)하는데, 그들은 깊은 눈 높은 코에 천성이 모질고 사납다. 한번은 대낮의 저잣거리에서 사람을 죽였는데, 건륭(乾隆)이 그 몇 사람을 찢어죽이는 형벌에 처하였더니 그때부터 조금 두려워하여 중지되었다. 그 땅에서 나는 거울은 품질이 좋다.

그 관에 들어가니 매우 깨끗하고 기물들이 다 진기한 보배였다. 한 사람이 있어 맞아 앉히는데 우리나라 말을 조금 알아 겨우 인사를 건네었다. 책상 위에는 만주와 중국 책이 있어 편질(篇帙)이 퍽 많은데, 악라 글자로 번역하여 작은 글자로 베껴 쓴 것이 범서(梵書)와 같다.

탁자 위에 자명종이 있는데 만듦새가 매우 정묘하다. , 손바닥만한 자명금(自鳴琴)이 있는데, 그 만듦새는 굴대를 한번 돌리면 기둥을 따라 용수철이 튕기어 음조를 이룬다. , 한 문갑(紋匣 무늬가 있는 곽)이 길이가 두어 자 되는 것이 있는데, 조각이 정묘하고 위쪽에 둥그런 구멍이 있어 유리를 붙여 벽 사이에 걸어 놓았다. 그 갑 밑에 한 돌림쇠[樞機]가 있어 손으로 돌리면 두견새가 갑자기 갑 속으로부터 둥근 유리 구멍으로 날아올라와 고개를 들고 밖을 내다보면서 한 마디 울고 두 마디 우는데, 소리마다 맑고 간드러진다. 조금 있다가 도로 내려가는데, 이것은 진짜 새가 아니었다.

악라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서 귀국에 가려면 거리가 몇 리나 되는가?”

“2만여 리가 된다.”

땅의 넓이가 몇 리나 되느냐?”

청 나라 셋이 우리나라 하나만하다.”

하였다. 대개 땅이 북해에 닿았고 넓이가 매우 커서, 청나라는 중원이지만 악라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2]鄂羅斯館在玉河館後街乾魚衚衕不過半里許鄂羅斯或稱阿羅斯或稱俄羅嘶以其人皆鼻大故或稱大鼻㺚子卽蒙古別種也其國蓋在大漠外絶域史無所見不知在何處而聞其人自言其國幅員甚大東西三萬餘里南北二萬餘里東南接琉球安南東北接蒙古西南接大小西洋西通流沙之外不知爲幾萬里東距中國爲五萬里云儘如是則其大殆數倍於中國矣意其夸誕之辭而四至地界亦未知是否

악라사관(鄂羅斯館)은 옥하관 뒷거리인 건어호동(乾魚衚衕) 반 리쯤 못 가서 있다. 악라사는 혹 아라사(阿羅斯)라 일컫기도 하고, 혹 아라시(俄羅嘶)라 일컫기도 하며,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크므로 혹 대비달자(大鼻韃子)라고도 하니, 몽고(蒙古)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큰 사막 바깥의 외딴 지역에 있는 듯하나, 사책에는 보이는 바가 없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 나라는 지역이 매우 커서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가 된다.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고,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 서쪽으로 통하는 사막의 바깥은 몇 만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며, 동쪽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5만 리가 된다 하였다. 참으로 이와 같다면 그 크기가 거의 중국의 몇 배가 될 것이다.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꾸민 말일 것이며, 사방에 이르는 지역의 경계도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다.

  

이제부터 악라사의 영토를 보자.

위 [1]번 내용을 보면  

問鄂羅人此去貴國相距幾里二萬餘里問地方幾里三淸國爲一我國云蓋地盡北海幅圓甚大淸國中原也爲鄂羅三分之一云

악라사사람에게 묻길 여기서 귀국에 가려면 거리가 몇 리나 되는가?”하니 “2만여 리가 된다.”하였고 다시 땅의 넓이가 몇 리나 되느냐?"하니 나라 셋이 우리나라 하나만하다.”하였다.

대개 땅이 북해(北海)에 닿았고 넓이(幅員)가 매우커서, 청나라는 중원(中原)이지만 악라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a)북경에서 악라사까지 2만리

 

 

알기싶도록 구글어스로 북경에서 2만리를 재어보았다.

그랬더니 터이키 서쪽 종단까지 거리가 된다.

다시 [2]번 내용을 보면 而聞其人自言其國幅員甚大東西三萬餘里南北二萬餘里東南接琉球安南東北接蒙古西南接大小西洋西通流沙之外不知爲幾萬里東距中國爲五萬里云儘如是則其大殆數倍於中國矣

"그 나라는 지역이 매우 커서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가 된다.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고,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 서쪽으로 통하는 사막의 바깥은 몇 만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며, 동쪽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5만 리가 된다 하였다. 참으로 이와 같다면 그 크기가 거의 중국의 몇 배가 될 것이다. "라고 한 기록대로 구글어스를 이용하여 실측을 한 번 해본 결과 아래 지도그림 (b), (c), (d)로 나타난다.

 

이것을 총정리를 하면 심전고(心田稿)을 쓴 박사호(朴思浩)악라사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악사라까지 몇리가 되는가 하였더니 20,000 ()가 된다 하였다. 즉 키로로 환산하면 7,854km 이다.

이것을 구글지도로 실측하여 보니 위 (a) 그림과 같이 나타난다.

청나라 북경이라고 한 곳이 지금 동아시아대륙의 베이징이라면 그곳에서 서쪽으로 2만리를 재어보니 소아시아 반도의 서쪽 종단 이오니아지방 터어키 이즈미르주(Izmir)까지의 거리가 되는데 거의 근사치인 7,899km 정도 나타난다.

문제는 그 곳부터 서쪽으로 악라사 영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어키반도 서쪽 종단 부터 대서양과 맞대어 있는 포르투갈 리스본(Lisbon)까지가 악라사라는 이야긴데 거리를 재어보니 3,000km[7600(里)]밖에 되지 않는 넓이다.

이같은 거리는 동서길이 3만리라는 것에 비할 수가 없다.

[2]번 글에서는 악라사의 영토가 동서 3만여 리(里)라 하였으니 환산하면 11,782km이고, 남북이 2만여 리(里)라 하였으니 환산하면 7,899km 가 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동아시아대륙에 북경을 두고 실측하였더니 동서로 남은 곳은 유럽땅 3,000km[7600(里)]넓이의 공간만 남아 심전고의 기록을 따를때 동서가 3만리(里)라 하였으니 7600리(里) 정도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는 청나라와 북경을 아시아대륙에 놓고서는 악라사의 영토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청나라 뿐만아니라 베이징이라고 하는 북경도 동아시아대륙에 없었던 것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대륙을 벗어나 좀 더 동쪽에서 청나라와 북경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b)남북(南北) 2만리

 

 

(c)동서(東西) 3만리

 

 

(d)악라사(대비달자)의 영토

 

아시아대륙을 벗어나 동쪽으로 나아가면 아메리카대륙일 수밖에 없다.

즉 위 심전고가 말하는 악라사의 거대한 영토는 청나라가 없는 지금 아시아대륙 전체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동서가 3만여 리(里), 남북이 2만여 리(里)뿐만아니라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다 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으며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 하였다.

더하여 결정적인 것은 위 [1]번 내용을 보면 "蓋地盡北海" 아락사 땅이 북해(北海)에 닿았다고 한 사실에서 위 (d)악라사(대비달자)의 영토 지도를 살펴 보면 아시아대륙 전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가 있으며 남북거리가 2만리가 된다 하였으니 거의 8000km로를 남북으로 거리를 재어보면 북해끝에서 인도차이나반도 베트남 남쪽 종단 까마우(Ca Mau)까지의 거리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이러한 넓은 곳은 아시아대륙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서3만리라는 것은 유럽대륙을 포함하는 아시아전대륙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악라사는 유럽대륙을 포함한 전 아시아대륙을 영역으로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유럽사가 있을 공간이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

 

1844년도에 우리나라 곤여만국지도를 모사(模寫), 빼긴 것이라고 보이지만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위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를 보면 "西南接大小西洋" 서쪽과 남쪽에 접하고 있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 즉 대서양(大西洋)과 소서양(小西洋)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가 있다.

위 지도가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에서 어떻게 유럽사와 동아시아대륙사가 들어갈 공간이 있겠는가?

동아시아대륙사가 아무리 거짓말을 하여도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덩달아 반도역사가 없던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거짓말 역사라는 것이 탈로나는 것이기에 덮고 숨길 수도 없는 그야말로 꼼짝 할 수 없는 것으로 이 대서양과 소서양의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면서 명백한 사실들을 읽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e)동쪽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5만 리

 


마지막으로 심전고(心田稿)에서는 西通流沙之外不知爲幾萬里東距中國爲五萬里云儘如是則其大殆數倍於中國矣。"서쪽으로 통하는 사막의 바깥은 몇 만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며, 동쪽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5만 리가 된다 하였고 참으로 이와 같다면 그 크기가 거의 중국의 몇 배가 될 것이다."라고 한 기록을 풀이하면 결국 지도 (a)에서 보았듯이 도저히 아시아대륙에는 청나라 북경과 중국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중국과의 거리가 동쪽으로 5만리(里)(19,636 km)라 한 것은 이미 청나라와 중국과의 거리차이가 있는 것만큼 위치가 다르다는 것도 더불어 알 수 있다.

위 글에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만약 청나라가 중국이라면 청나라에서 악라사까지의 거리가 2만리라는 것과 가는 거리도 같은 거리에 있다고 해야 하지만 악라사에서 동쪽으로 5만리라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청(淸:Qing)나라 악라사관(鄂羅斯館)이 있는 북경과 중국이라고 불리는 장소위치가 현저히 다르다는 이야기다.

5만리 약 20,000km의 거리에 있다고 하니 참으로 먼곳이 아닐 수 없다.

 

대한제국의 생성과 아라사제국

 

검은얼굴과 푸른 눈을 가진 몽골인 즉 타타르(Tartary)라고 판단되는 악라사는 지금의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전부 차지한 거대한 영토를 가진 종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라사와 연관되었다고 하는 아관파천이 무엇인지 악라사의 영토사실을 바탕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알아보자.

그렇다, 1881년 모든 권한을 서세정치세력들에게 빼앗기고 허수아비가 된 삼한 고려(高麗)황제는 고심끝에 대한제국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는 것에서 당시 상황을 추려볼 수 있다.

코리아(corea)라고 대칭되는 고려(高麗)황제의 절망적인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마는 현실적으로 하나의 체제가 명을 다했다는 것도 시대의 소명으로 쉽사리 받아들이기에는 우선 해결하고 정리해야 할 산적한 문제가 많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문제는 시대가 군주의 제왕적인 힘보다는 나라의 경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자본력을 지배하는 것이 군주제왕의 힘보다 더 세고 막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경제논리의 시대적인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결과라는 것이다.

아마도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된 원인 중에 하나가 자본력을 가진 신흥부르주아(bourgeois)세력들의 조정지배가 가중되고 그에 따른 여론을 그들이 지배하게 되면서 유일체제에 의한 독단적 왕권에 대한 일반백성들의 혐오증이 증대됨과 함께 변혁의 바람이 더욱 거세게 황제를 압박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이때 전 세계적으로 민란이 발생한다.

서세 신흥부르조아세력들이 연합하여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나타나고 기존 제왕의 권력이 전횡되었던 정치판도를 흔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의 체제를 고집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태를 고비로 생각하여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수천년간 이어온 하나의 역사, 삼한역사가 졸지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절대절명의 위기의식에서 아관파천이 강행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시에 유독 경제분야에만 기록이 있는 미국의 경우를 보면 당시 국제경제사정을 알 수 있는데 1896년 아관파천이 있을 당시 1893년부터 지속되던 경제불황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895년에는 미국재무부(Department of the Treasury)의 금 보유고가 4500만달러 아래로 떨어지고 있을 때 유대인 존 피어폰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과 독일유대계(German Jews) 로스차일드가(Rothschild family)가 미국정부에게 6500만달러($65 million)가치의 금(金:gold)을 저장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서세들의 이런 거대한 자본결집력에서 아마도 황제는 위기의식을 더욱가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일단 아관파천의 상황전개는 반도역사 이야기를 인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조선천지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경제가 불안전한 틈을 타 서세자본력이 개입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원인은 황실재정이 급박하게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 체제존립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린 황제와 보수세력정치인들은 어쨌거나 체제 분열을 막고자 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수천 수백년간 이어온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려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판단아래 대한제국이 탄생된 것이라면 대한제국건립은 삼한역사를 살리기 위한 위대한 선택이었서야 했다.

위기의식에 빠진 대조선 기득권 보수세력 주체들은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긴박하게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고민의 결론은 당시까지 거대한 아시아대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악라사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고 보이며 급진세력들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북경 옥하관 뒷거리인 건어호동(乾魚衚衕)악라사관(鄂羅斯館)을 찾아가는 아관파천을 강행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상황을 반도역사를 인용한 이야기지만 서세의 역사를 빌리면 삼제동맹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유럽사는 삼제동맹(三帝同盟)을 1887년에 수명을 다한 것으로처리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구체제세력들이 최후의 신흥세력과 역사전쟁에서 일전을 벌리는 1차세계대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오스만제국등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이러한 정치적인 결단이 급진세력에게 반감을 줄 수 있는 것이기에 당시 고려황제라고 판단되는 광서제(光緖帝,1871-1908,재위:1875-1908)와 세자가 경복궁(景福宮)을 떠나, 1896211일부터 1897220일 덕수궁(德壽宮)에 도착하기까지 어가(御駕)악라사관(鄂羅斯館)으로 옮겨서 아관파천(俄館播遷)단행했고 다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그해 817일 광무(光武)란 연호와 함께 모든 땅에 밝은 빛을 내리게 한다는 광명천지(光明天地)를 표어로 한 광무제(光武帝)칭호 건의를 수락한 것이 103일 이라고 반도역사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천자(天子)로서의 삼한황제 칭호가 새삼스러운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일 예로 서울대 노명호교수는 고려태조 왕건이 쓰고 있던 관은 중국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라 하여 황제설을 지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삼한제왕 조선 태종(太宗:1367-1422), 세종(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 세조(世祖,1417-1468,재위:1455-1468), 성종(成宗1457-1494,재위:1470-1494)이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본 블로그에서도 확인하였으며 그리고 정조대왕(大朝鮮正祖大王)은 건륭제(乾隆帝)일 것이란 세계삼한역사관점까지 피력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말할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三韓者, 爲萬邦酋, 榮兆民群, "삼한(조선)은 만방에 우두머리이고 많은 백성의 영광이다"란 이 말은 성종(成宗)25년(1494)에 유구국왕(琉球國王) 중산부주(中山府主)가 조선 예조대신(禮曺大人)에게 전하는 글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는데 영조민군(榮兆民群)의 조민(兆民)이라 함은 천자의 백성, 만백성, 만민이라는 뜻으로서 많은 백성의 영광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반도역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삼한제왕들이 천자라는 참역사이다.

그러니 대한제국의 황제호칭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본 블로그가 밝혀온 사실에 미루어 볼 때 대조선은 1881년에 해체 될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산업혁명에 의한 갑자기 자본시장과 경제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황실살림은 상당히 충격속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그러한 충격들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대조선이 이러한 이유로 체제가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해체되고 난 후에도 거대한 군사력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과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다행스럽고 중요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많은 군사력은 하나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황제 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대조선이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지만 이 모든 군사력은 하나의 체제에서 가졌던 소유권한이 그대로 얼마간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조선 대신에 삼제동맹(三帝同盟)이 이를 공동 관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삼한황제는 삼제동맹을 믿었을 것이고 그의 일원이라고 판단되는 악라사관을 찾아갔던 것이라고 생각되며 어쨌든 이러한 바탕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생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대한제국은 삼제동맹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할 수가 있다.

 

19세기초 급속히 발칸화에 진행되는 것은 역사분리인가 독립인가

 

반도역사에서 말하는 대한제국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이야기가 많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일제(日帝)란 무엇인가?

일본이 서세의 연합세력이라고 한다면 일제는 서세를 통합한 제국이라는 뜻이다.

1897년에 건립하지 13년 만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모든 것이 이관되는 식민지역사속에 파묻혀버리고 마는 대한제국.

대조선이라는 체제의 해체된 상황만을 이야기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건립된지 불과 13년만에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는 것은 망하지도 않고 그냥 합해버렸다는 것인데 반도역사는 조선은 이미 대한제국이 건립하면서 합체가된 상태이기때문에 또 다시 조선총독부라 하여 이관되었다고 하는 것은 조직적으로보면 이중처리가 된 것이다.

도대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실체가 무엇인가?

반도역사가 주장하는 것은 한반도 조선의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여 대한제국을 건립했다고 했고 그 시기가 1897년이라고 하여 이미 조선은 대한제국이란 이름이 생성되면서 사라진 역사 명칭이라 하였다.

그런데 대한제국총독부, 대한총독부라고 했다면 역사연속성에서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조선총독부가 도대체 무엇인가?

대한제국이 건립되면서도 조선을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이야긴가?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인데 조선과 대한제국을 의도적으로 묶으려 했다는 것이다.

조선이 나약하고 망할 수밖에 없었다면 대한제국 역시 그런 수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세우기 위한 것일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총독직책에서 일본이름이 나열되었다고 하여 현재 열도 일본인의 총독이라고 단정을 누가 내릴 수 있는가?

만들어 놓으면 되는 가짜 일제 총독의 일본이름이 무슨 대수인가?

한반도 조선 임금들을 실제 인물인냥 초상화를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실제의 인물을 보고 그린 초상화라고 생각하면 그 역시 넌센스라 할 수 있고 역사마저도 해적질한 일제나부랭이와 같은 부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실체가 없는 식민지총독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고종의 난장이 같은 모습의 사진은 실제인물인가?

절대아니다.

본 블로그의 글 "X-ray 사진, 조선관리 청대(淸代) 의복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초상화 http://blog.daum.net/han0114/17049750 "에서 국립중앙박물관소장한 정곤수초상를  X-RAY 사진으로 비추어 보니 조선관복 아래 청나라 사신복이 비춰져 본래 청나라 관복위에 조선관복을 입힌 것임을 확인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 이상 무엇을 증거로 내 놓아야 믿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수천, 수백년동안 세계를 통치하던 하나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식민지역사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한제국이 1차세계대전 역사전쟁에서 서세연합세력인 일제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체제를 지키려 한 것인데 마치 조선총독부로 이관되기 위해 건립된 것처럼 반도역사는 말하고 있다.

아관파천까지 하면서 대한제국 건립한 역사적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본래 대조선의 고려황제가 삼제동맹을 믿고 아관파천까지 한 것은 이와같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솔직하게 조선총독부란 명칭은 반도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명칭 자체가 조선을 지배하는 총독부라는 명칭이 맞는 것인지 틀리지는 것인지 조차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이다.

조선을 관할하기 위해 일본이 설치것한 것이라면 일본총독부라고 해야 맞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조선이 한반도를 관할하기 위한 총독부라면 조선총독부라 해야 맞지 않는가?

조선이 한반도에 있어 일본이 조선을 관할 한 것이 맞다면 일본총독부라 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조선총독부다.

열도일본이 한반도에 있는 조선을 관할하기 위한 것이 조선총독부다?

조선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상하지 않는가?

다시 되 돌아 볼 때 하나의 역사체제에서 청일전쟁이라는 것은 헛깨비 역사라 볼 수밖에 없다.

쿠바원주민들이 스페인에게 항거하였던 사건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쿠바 제 2차 반란사건으로 1895년 4월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José Martí)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Cuban War of Independence)과 동기와 환경이 비슷하다.

물론 청일전쟁과 똑같은 년도에 일어난 사건이며 전쟁의 시작과 끝나는 시기도 비슷하다.

일본을 쿠바 원주민으로 보고 청을 스페인이라고 볼 때 그림이 맞아떨어진다.

이와같은 독립전쟁은 하나의 체제에서 분리코자 한 분열이다.

 

분리역사를 왜 독립이라고 했을까?

늘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일본은 서세 연합체 이름이다.

그 속에는 근세기에 급진정치세력들 각 분파별로 존재한 앵글섹슨, 게르만,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 브라질에 있었던 포르투갈, 스페인급진세력, 프랑스급진세력, 미국북군출신 내셔널리즘의 정치세력들일 것이다.

이들은 하나의 체제에서 각자 색목인이란 신분으로 분파적정치꾼들로 행세했을 가능성도있다.

19세기 초 근세기부터 하나의 역사체제를 급진적으로 분리요구한 세력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갑작스럽게 분리된 것인가를 알아보면 먼저 인구가 가장 밀집된 지역인 중앙아메리카에서 아이티(1804)와 파라과이(1811)가 먼저 역사분리인 독립을 시작하였고 그리고 이어 남아메리카대륙으로 이어져 역사분리가 가속화되었고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을 선언했고 볼리비아(1825), 브라질(1825), 캐나다(1867), 칠레(1844), 콜롬비아(1819), 코스타리카(1838), 쿠바(1868)는 1차반란시기로서 일본명치유신시기와 일치하고, 도미니카(1865), 에콰도르(1830), 엘살바도르(1841), 과테말라(1839), 아이티(1804), 온두라스(1838), 멕시코(1821), 니카라과(1838), 파라과이(1811), 페루(1879), 우루과이(1828), 베네수엘라(1830), 그리고 그나마 늦은 시기라 할 수 있는 1902년 파나마가 독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미국령이 된 것을 보면 루이지애나 1803, 서부플로리다 1810, 레드강분지 1818, 동부플로리다 1819, 캐나다국경선 1842, 텍사스 1845, 오리건 1846년과 1872, 멕시코할양지 1848, 개즈던매입 1853, 구아노제도 1856, 알라스카 1867, 하와이 1893년 등이다.

거의가 1800년 중에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하면서 분리되던지 기존 체제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벗어나 한없이 흩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메리카대륙을 마치 벌집 쑤셔놓은 듯 하다.

1902년 파나마가 독립 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것은 역사분리하고는 다른 성격으로 콜롬비아에서 독립된 것이니 이것 역시 서세와 미국의 대립에서 미국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을 수 있는 운하를 장악하는 것이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도시인 타고르가 코리아의 분열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애타게 읊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와같은 역사분리가 결코 독립이 아니라 세포분열인 발칸화(Balkanization)였던 것이고 이렇게 나누어지게 하는 것은 이해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더 많은 이익과 이윤을 창출 할 수 있는 지극히 장사속에 의한 판단에서 자본축적에 혈안이 된 서세들이 요구하던 개방운운하는 것이다.

하나의 체제에서 세포분열을 이루며 발칸화한 수많은 국가를 만들고 내외부 첨예한 이해관계를 만들고 충돌을 야기하고 그것을 무마한다고 군을 파병하며 장악한 군의 힘으로 분열한 세력들을 제어하면서 급진세력들의 활동영역을 급속하게 넓혀나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고 이러한 장악 원칙은 지금까지도 서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고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미국이 한반도 남북한을 이용하고 대한민국과 일본을 이해관계에 의해 충돌시키면서 그들이 만든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도 이와 같은 것에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마무리

 

그렇다면 아관(俄館)과 노관(露館)은 모두가 악라사를 칭한 것일까?

아관은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 한데서 온 것이고 노관은 러시아를 로서아(露西亞)라고 한데서 온 것이다.

반도사에서는 아라사(俄羅斯)라 하였고 열도일본은 로서아(露西亞)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로서아(露西亞)란 명칭이 대한제국 1905(광무9) 로일전쟁(Russo-Japanese War)후 미국중재로 강화조약을 맺을 때 "로서아(露西亞)"를 사용했다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했다.

이 로서아라는 것은 현재 러시아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미국에 의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사라진 악라사일 가능성도 없지않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강화조약하고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을 했다는 것은 다분히 대한제국이라는 실체가 일제란 가당찮은 이름때문에 공중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실제 위 두 문제가 당시 미국과 일본의 대화요지라고 한다면 이 밀약자체가 없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밀약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굳이 밀약이라고 하여 궁금하게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냐하면 필리핀은 아시아필리핀이 아닐뿐만 아니라 카리브해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란 사실을 확인하였고 대한제국 역시 삼제동맹 즉 삼한역사체제의 보수세력 기득권제국들의 합명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와같은 것은 하나의 역사에서는 나타나지만 동서양 분리된 상태에서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비록 밀약이라고 하였지만 기실 헛것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 풀이 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밀약이라고 하면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숨겨야 할 사실들을 다 알려진 것이니 비밀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것은 동아시아대륙사에 이와같은 요소들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 밀약이 언제쯤 깨질지 알 수 없지만 이것 때문이라도 향후 한반도대한민국과 열도일본간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발생하여 충돌 할 때 미국은 반드시 일본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는 원칙과도 같은 밀약이 아닌 밀약일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본보다 우릴 더 생각하겠지란 미국에게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절대 금물이다.

아무리 짝사랑을 하여도 서세들의 원칙은 열도일본쪽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는 결과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이미 밝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최근 독도가 미국 CIA 문건에서 한국지도에는 빠지게 만들고 오히려 일본지도에 들어가게 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원칙에 의한 움직임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일본이란 동양명칭이 역사로 생성된 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은 어쨌거나 서세의 급진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결집하기 위한 연합체라고 하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은 또 다른 미국인들이 벌려놓고 미국인들이 합의하고 미국인들이 마무리 짓는 꼴로 나타난 것일게다.

그러나 이 러일전쟁의 러시아는 절대로 현재 백인 러시아가 될 수가 없다.

또 한가지 진실된 역사로 볼 때 1905년 체결된 을사보호조약(乙巳條約)역시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대한제국이 일본을 보호하면 보호했지 꺼꾸로 보호받을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대한제국은 삼제동맹의 합명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해양국가라 하였음에도 재정이 부족하여 11척의 순양함만을 보유하고 약 17만명의 호남군사숫자에도 모자라는 병력을 보유한 일본군사력을 대조선의 대임주체 삼제동맹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보더라도 대한제국은 당시 기득권전체를 합친 군사력임을 알 수 있고 반도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절대 을사보호조약 따위를 맺을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서 단지 근세기에 열도일제만들기에 동원된 허울좋은 명칭일뿐이다.

당시 아관파천에서 삼한의 마지막 황제가 체제위기속에 삼한역사를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반도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제왕목숨까지 위협을 느꼈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반도역사가 말하길 당시 아관파천이 있을 때 허상의 일제가 대규모의 군병을 이끌고 조선을 직접적으로 침범하여 순식간에 궁궐에 진입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아관파천이 있기 10년전이라 할지라도 영국변호사이며 중국연구가인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1849-1926)가 1886년에 조선군사병력수가 정확하게 989,376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허개비 취급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의 말을 따른 전선만 하더라도 강열한 전열함(戰列艦:line-of-battle ships) 92척이 있었다는 것을 본 블로그 글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확인 한 사실이다.

그외 수많은 함선들이 있었고 방위함선도 부지수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이러한 해군력은 주로 해상전투가 주를 이루었던 1차세계대전을 거뜬히 치룰 수 있는 군사력인 것이다.

근세사의 반도역사는 억지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듯하게 묘사하였지만 알고 보면 모든 사실들이 반도역사를 만들기에 동원된 허상에 허수일 수밖에 없다.

무슨 피신하는 것처럼 파천(播遷)이라 한 것도 난센스 같은 주장이지만 이런 설정은 반도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도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조선(朝鮮)은 대한제국이란 이름의 나라가 생기면서 1897년에 멸망했는가 하고 물어보지만 어디에도 멸망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미국자료에 본 블로그가 발견하길 1881년에 해체되었다는 것이 결말이라면 결말이다.

아마도 이 해체(disband)는 조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라면 대조선 하나의 체제가 해체된 것으로 여길 수 있고 대조선의 구성원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말일게다.

물론 극단적으로 조선해체를 반대하던 적극적인보수정치인들은 죽음을 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대다수 구성원들은 수많은 나라가 생긴 것 만큼 갈라지거나 전향하면서 동화되었을 것이다.

대조선인을 찾으려면 동서양인 가리지 않고 다 그 범주속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시아대륙 전체를 영토로 하던 검은얼굴의 푸른 눈을 가진 악라사는 어떻게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일까?여기에서 최소한 1918년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집단학살(集團虐殺) 즉 제노사이드(genocide)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후 사라진 인명은 얼마나 될까?솔직히 궁금하다.가까운 예로 신중국에서 발생한 문화혁명기간에 얼마나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지는지 알길이 없다.

1917년 프롤레타리아혁명(proletarian revolution)에 의해 정권을 잡은 강경파 볼셰비키(Bolsheviki)나 온경파 멘셰비키(Mensheviki) 모두 초기의 고위 공산주의자들은 거의 유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하나의 역사체제 기득권세력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유대인정치세력들이 들어 선 것과 다름이 없다.

레닌조차 외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다.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에 보면 악라사가 차지하고 있던 땅의 넓이(幅員)가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나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맞춰보아도 현재 아시아대륙 전역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이 지구 상 어디에도 이와같은 곳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악라사의 영역이 있었던 곳은 바로 위 서양지도 1799년 출판제작한 고티에[Gaultier, abbe(Aloisius Edouard Camille),1746-1818]의 유럽과 아시아 지도에 타타르라고 표시한 전 지역과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도에서 갈라놓고 있는 유럽땅까지가 다 포함된다고 하였으니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심전고(心田稿)를 쓴 1828년과 거의 시기도 맞아 떨어지니 서세가 그린 지도보다 사료가 더 믿을 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 타타르지역은 바로 몽골타타르(鄂羅斯:大鼻橽子國)의 영역인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검은 얼굴의 푸른 눈을 가진 이 몽골인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의 역사체제"를 증오하던 정치세력에 의해 말살되었을 것이다.

서세가 장악한 이 시대에 집단학살(集團虐殺)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막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1918,재위:1894-1917)일가족 전부를 한꺼번에 학살한 주체는 유태인계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1870-1924)이다.

가족까지 살상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씨를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의 증오가 그토록 심했던 것인가?

이 이야기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있기 전 이야기다.

이러했다면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유대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던 원인이 없는 결과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자연 이치이다.

이후 레닌을 따랐던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30년 넘게 집권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청소를 가장한 집단학살(集團虐殺)이 있었는지 정확한 수치에 대해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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