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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글쓴이:한부울
종이의 역사와 파피루스
종이(紙,paper)의 역사는 서기105년 후한(後漢:23-220)의 채륜(蔡倫:50-121)이 발명한 것을 깃점으로 하며 당시 이 종이를 '채후지(蔡厚紙)'라고 하였고 이것은 식물섬유를 사용해서 만든 종이의 기원이라고 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이 기록하는 재료로서 돌, 금속, 찰흙, 가죽, 뼈, 나무껍질, 나무, 대나무 등을 이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이러한 기록을 위하여 쓰인 재료들 중에서 오늘날 종이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라고 하였다.
파피루스(Cyperus papyrus)는 사초과(莎草科:Cyperaceae), 사초속(莎草屬:Cyperus)의 단년초 식물인데 현재 과학적 근거라고 할 수 있는 DNA 분석 자료에 의한 분포지도를 보면 현 이집트 지역에서 월등이 높아야 할 빈도수가 빈약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적어도 이집트가 본래의 위치가 아닐 것이란 의심마저 들게 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이집트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파피루스(Papyrus)가 오히려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의외로 중앙아메리카라는데서 놀라움을 금 할 수 없고 혹시 본래 근원지가 중아메리카가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물론 기존 생물학계에서는 미친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생물근원지를 가장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DNA 추적이다.
이 DNA 가 남겨져 있다는 곳으로 이집트가 있는 중동지역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만 아래 분포지도를 참고하면 중동지역에서 DNA 분포지가 나타나는 곳은 이집트(Egypt) 한 곳과 다수의 이스라엘(Israel)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근원지라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표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왕성한 분포지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또는 중앙아메리카, 또는 남아메리카대륙 북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백과사전에서의 설명도 아프리카 수단(Sudan) 령(領)에만 이 파피루스가 근원지로 나타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파피루스(Papyrus)란 식물의 명칭은 현재 영어 단어 페이퍼(paper)의 기원이 되었다는데 이설이 있을 수가 없다.
왜 페이퍼가 파피루스가 되어야 했을까?
왜 실제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의 이름이 페이퍼의 기원이 되질 못했을까 하는 생각해 보게 된다.
여기에서 근세기 역사새판짜기 과정에서 볼 때 매우 난해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전에서는 고대 이집트(Egypt)사람은 나일(Nile river)강변에 야생하는 키가 2~3m 이상으로 굵기 둘레가 10cm 정도의 파피루스(Papyrus)라는 갈대와 비슷한 식물을 얇게 베어 가로세로로 맞추고 끈기가 있는 액체를 발라서 강하게 압착시킨 후, 잘 건조시켜 서로 이어 기록하는 재료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 것에서 이 파피루스가 지금도 나일강변에 많이 야생한다 하였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생물근원을 알 수 있는 DNA 분포지도에는 현재 나일강변에 표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있어 현 나일강변이 파피루스의 근원지라는데 전적으로 동의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근원적으로 불분명한 식물의 이름을 페이퍼 기원이라고 하였다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무엇때문일까?
고대 그리스어로는 파피로스(papyros), 라틴어로는 파피루스(papyrus)라 하며 이집트 특산의 식물로서 이집트 지방의 상징이 되었다는데 이렇게 되면 딱히 증명할 길이 없어진다.
분명 생물 DNA 분석이 정확하게 가리키는 다른 곳에 이집트의 역사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 이 파피루스의 한어명칭을 보더라도 현 이집트에 국한하지 않는 식물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는데 대표 식물 명칭으로 지사초(紙莎草)라고 하고 종이갈대라고 하는 지초(紙草:Paper reed), 부들 골풀이라고 하는 포초(蒲草:Bulrush), 이집트의 애(埃)를 딴 애상초(埃莎草), 애지초(埃紙草), 애초포(埃蒲草), 나일잔디라고 하는 니라초(尼羅草:Nile grass)등이다.
이것과 다르게는 "인도 매트 식물"이라고 하여 인도총초(印度叢草:Indian matting plant)라고 하였는데 매우 의미심장한 명칭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이집트로 충분할 것 같은데 갑자기 인도라는 명칭으로 불려졌을까?
이것은 곧 인도(印度)와 애(埃)가 역사적으로 공통점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수차 언급한 사실이지만 지금의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와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를 포함한 지역을 인도(印度:India)라 했을 것이란 주장을 매번 하여 왔다.
이 파피루스가 위 DNA 분포지도처럼 실제로 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 한 것이라면 이집트 역시 아메리카대륙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 다시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근세기 역사는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마찬가지로 애란 명칭의 이집트(埃)는 인도(印度)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 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할 역사 명칭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또한 니라(尼羅)란 명칭에서도 마찬가지로 의구심이 가는데 라(羅)는 본래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니 현재 중동 이집트 이미지와 상관되는 듯 하지만 이 라(羅)는 북아메리카대륙 인디언들이 숭상하는 태양신이라는 사실 또한 배제 할 수 없는 것이다.
명확한 파피루스의 근원지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도록 앞에서 언급한대로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와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하는 분포지도를 동시에 관찰하게 해본다.
Cyperus papyrus L. PAPYRUS, Papyrusfrench, Paper Reed 종이갈대
분포지
Egypt (Africa & Madagascar)
Syria (Asia)
United States (North America)
Peru (South America)
Guatemala (Mesoamerica)
Gabon (Africa & Madagascar)
El Salvador (Mesoamerica)
Costa Rica (Mesoamerica)
Brazil (South America)
Colombia (South America)
紙莎草(学名:Cyperus papyrus),又稱紙草(英语:Paper reed)、蒲草(Bulrush)、埃及莎草、埃及紙草、埃及蒲草、尼羅草(Nile grass)、印度叢草(Indian matting plant)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單子葉植物綱 Liliopsida
目: 禾本目 Poales
科: 莎草科 Cyperaceae
屬: 莎草屬 Cyperus
種: 紙莎草 Cyperus papyrus
二名法
Cyperus papyrus L.
위 두 지도의 근원지 표식을 관찰하면 현재 중동지역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빈약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주요 표식은 아메리카대륙에 집중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위 분포지를 디테일, 자세하게 게시한 부분에서도 보면 시리아(Syria)말고는 전부 아메리카대륙을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세부적으로 보면 북아메리카대륙은 물론이고 페루,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브라질, 콜롬비아와 유일하게 아프리카대륙의 가봉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볼 것은 북아메리카대륙 확대지도에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 그리고 서부에는 캘리포니나, 하와이가 표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곳이 나일강문명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파피루스의 역사근원지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성립되고 있음이다.
결국 이집트 역시 현재 중동이 아니라는 가설까지 생긴다.
근원적으로 불명한 식물의 이름을 페이퍼 기원이라고 하였다는 것에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도 아메리카대륙 인도(印度)설과 병행하여 크게 따져 보아야 할 문제라고 보인다.
고려지에 대한 사서의 기록
종이역사의 근간이 되는 파피루스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이야기하고 본격적으로 종이 역사사실을 밝혀볼 차례이다.
사서(史書)의 모든 자료를 통해 알아본 결과 종이(紙,paper)의 역사가 후한(後漢:23-220)의 채륜(蔡倫:50-121)에 의해서라는 사실과 별도로 실제 종이사용은 삼한(三韓)에서 생산되거나 만든 종이가 탁월하여 모든 기록사서나 서화에 전폭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세계적으로도 삼한 종이가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종이는 결국 삼한 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삼한의 대표 종이는 단연 고려지(高麗紙)로 통칭되었음을 알 수도 있는데 특히 동아시아 사서(史書)에 보면 공통적으로 고려지(高麗紙)를 닥나무와 뽕나무를 섞어 만들었다고 하고 있는데서 억지스러움이 있고 명확하게 따져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분리역사를 만들때 발생한 모순이다.
당시 고려가 거대한 나라라고 생각해보자.
고려 땅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고려지라고 통칭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현재 역사가 근세기 역사새판짜기에서 성립한 것이라고 할 때 그래서 고려역사를 사라지게 만들거나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조각조각 새로운 나라들을 구성해 놓은 것이라면 그렇게 분리시켜놓은 국가라 할지라도 결국 원래 고려지(高麗紙)가 사용되었거나 통하지 않을 곳이 어디에 있는가 되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원 그림이 고려 그림이라면 그것을 조각조각 오려 놓은다 하여 고려 그림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와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아래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한어자료에는 고려지(高麗紙)라 함은 뽕나무 껍질을 원료로 해서 만든 두꺼운 종이라고 하고 질이 강하고 창, 벽을 바르는 데 쓰이며 놀랍게도 하북성(河北省)에서 난다 하였다.
Paper (紙) : It is not just any kind of paper. It is thin mulberry bark paper (Xuan or Pi paper from China and Washi paper from Japan). It is also generically called "rice paper" in the west though rice is not one of the ingredients.
물론 현재 동아시아대륙의 하북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크다.
여러면에서 고려(高麗)의 실체가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곳에서 질 좋은 종이가 났던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결국 하북성은 고려의 주요 종이가 만들어져 집결되는 장소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또한 고려(高麗)는 강남(江南)의 기준이 되는 강(江) 북쪽 즉 하북(河北)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에서 즐겨 찾았던 고려종이, 고려지(高麗紙)에 대한 사서기록이 다양함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제작방법부터도 당시에 고려종이에 대한 우수성을 마치 자기나라의 일처럼 그렸다는 사실과 호기심으로 점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조(淸朝)의 주량공(周亮工)이 쓴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세상에 전하기를, 조선국의 종이는 누에고치로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것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육기(陸機)의 시소(詩疏)에는 그것을 일컬어 ‘저상(楮桑)’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강남 사람들이 이것을 다듬이질하여 종이로 만드는데, 광택이 아주 좋다하였으며 대개 형체가 뽕나무와 비슷하다.” 하였다. 짐(朕)이 사신에게 물어보고서, 조선 사람들이 닥나무를 베어다가 거친 겉껍질을 벗겨 내고 그 속에 있는 흰 껍질을 사용하여 찌고 다듬이질해서 종이로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비단같이 치밀하면서도 매끄러워 누에고치와 비슷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마침내 누에고치로 만든 것이라고 잘못 전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고려지를 만드는데 닥나무를 사용한 것이지 누에고치가 되는 뽕나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귀한 물품을 보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구구한 이야기가 많게 마련이다.
고려종이가 아무리 이런저런 억측이 많았다고 하지만 짐이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 청나라 임금(황제)이 한 말인데 이 임금까지 나서 종이 만드는 방법까지 캐려 하였다는 것은 너무 도가 지나칠 정도로 고려 종이 사랑이 아닌가도 생각되게 한다.
다른 자료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데 그만큼 고려에서 생산되던 종이의 질이 매우 좋아 이런 혼재된 말이 나온 것이라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1123년 송(宋)사신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닥나무만을 전적으로 쓰지는 않고, 간간이 등나무를 섞어서 만들며,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한데, 좋고 나쁜 것의 몇 등급이 있다” 하였고
1590년 명조(明朝) 도륭(屠隆)이 쓴 고반여사(考槃餘事)에는 “고려지(高麗紙)는 금견(錦繭)을 가지고 만드는데, 종이의 색깔이 하얗기가 명주[綾]와 같고, 질기기가 비단[帛]과 같아서, 여기에다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은데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역시 기이한 물품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중국이라는 명칭은 근세기에 붙인 이름인데 역시 기이한 물품이라고 감탄을 하고 있다.
명조(明朝)의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는 “모두 조선에서 나는 종이는 누에고치[繭]로 만들었다고 전하였는데, 지금 이에 닥나무[楮]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 만드는 기술이 교묘할 뿐으로, 내가 일찍이 불로 태워서 시험해 보고는 그런 줄 알았고 두꺼운 종이는 4폭(幅)으로 1장(張)을 한 것도 있고 8폭으로 1장을 한 것도 있다. 여기에다가 기름을 먹인 것을 통틀어서 유석(油席)이라고 하는데,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도 이를 귀중하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대체적으로 고려의 종이는 깨끗하고 질기며 매끄러워서 글씨가 잘 쓰여 진다고 하고 있고 분명히 닥나무 하나만을 원료로 만든 것이라고 수고스럽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만큼 품질이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법이 실제로 궁금했던 것일게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데 명조(明朝)의 화가, 진계유(陳繼儒:1558-1639)의 서화사(書畫史:1515)에 이르기를, “사릉(思陵)의 서화 가운데 상등의 진적(眞跡)과 법서(法書), 양한(兩漢), 삼국(三國), 이왕(二王), 육조(六朝), 수(隋), 당(唐)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墨跡)은 고려지(高麗紙)로 맨 앞장을 꾸미는 장정(裝幀)한다 하였고 명조(明朝)의 명화(名畫)의 두루말이 역시 고려지(高麗紙)로 맨 앞장을 장정하였으며 모사(模寫)한 육조(六朝)의 진적(眞跡)은 고려지(高麗紙)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라 한 것을 보면 고려지(高麗紙)가 얼마나 질이 좋았길래 모든 고급 사서 겉 표장을 장식하는데 꼭 필요한 물품이었던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 만큼 종이 가치가 있었다고 하겠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매우 자연스럽게 고려지(高麗紙)를 애용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도 한다.
삼한인 고려(高麗)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당시 모든 유명 서화(書畵)의 앞장은 질 좋은 고려지(高麗紙)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세계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모든 서화(書畵)의 앞장은 고려지(高麗紙)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 글을 읽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좋은 종이, 고려지(高麗紙)로 쓴 모든 서화(書畵)는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매끄러운 질 좋은 이런 고급사서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고대 서적이나 문필, 문장 등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다면 모두 고려 종이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말을 첨부하지 않더라도 종이 질이 너무 좋아 당시 누구든지 당대의 문필가, 문장가라면 억지로라도 고려 종이를 택하였을 것이고 일부러라도 사용하려고 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고 판단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해동역사 예문지(藝文志) 경적(經籍) 총론(總論)에 보면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에 전하는데“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엄청난 서책이 고려에 있었다는 사실 이외 고려가 위 진, 당, 수, 양을 포괄한 역사주체였음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놀랄만한 기록인가?
도대체 이러한 서책들이 지금 다 어디로 증발해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은 고려(高麗)가 관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왜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못하고 늘 상 천박하게 해석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까?
또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 문방류(文房類) 종이[紙]편에 보면 우리나라 종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 고려의 땅에서는 백추지(白硾紙)가 생산된다. 《송사》
朝鮮白硾紙不知用什麼原料(譯按∶多以桑皮為原料)。
더불어 추가한 위 한어자료를 보면 조선(朝鮮)백추지(白硾紙)의 원료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찌보면 그 만큼 제작방법은 비빌스럽게 취급되었을 공산이 크고 근세기에 거대한 역사를 조각조각 분리하고 나눌때 그것을 적기가 불편하여 생략하고 넘어간 것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 고려의 종이는 깨끗하고 질기며 매끄러워서, 온주(溫州)의 견지(蠲紙)와 매우 비슷하다. 정계(程棨)《삼류헌잡지(三柳軒雜識)》
[蠲紙]唐宋時杭州、溫州等地所造紙名。紙質潔白瑩滑,故稱。宋趙與時《賓退錄》卷二:"臨安有鬻紙者,澤以漿粉之屬,使之瑩滑,謂之蠲紙。
해동역사 기록과 별도로 또 추가한 위 한어자료를 보면 견지(蠲紙)를 설명한 것인데 특히 온주(溫州)의 견지(蠲紙)를 말하고 있다.
견지(蠲紙)는 당송(唐宋)시 항주(杭州), 온주(溫州)등지에서 만들어지는 종이의 이름이라 하였고 종이의 질이 백옥같이 희고 미끄럽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송(宋)의 조여치(趙與畤)가 지은 빈퇴록(賓退錄)에 지금의 절강성(浙江省)항주(杭州)에 종이를 파는데 이는 가루분처럼 윤기가나고 옥같이 미끄럽기 때문에 이를 견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고려지(高麗紙)를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지와 특성이 매우 같고 모조 하지 않았다면 바로 고려땅 항주 또는 온주에서 생산된 것이 틀림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溫州蠲紙在唐代開始生産。(宋)錢康公撰《植跋簡談》載:“溫州作蠲紙,潔白堅滑,大略類高麗紙:東南出紙處最多
이어지는 위 한어자료는 온주견지는 당대(唐代)때부터 생산이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송(宋) 전강공(錢康公)이 쓴 식발간담(植跋簡談)에 온주에서 만든 견지는 백옥같이 희고 미끄러운 것인데 대략 같은 종류로 고려지(高麗紙)를 말할 수 있고 이것이 동남(東南)에서 제일 많이 산출된다고 하고 있다.
온주의 견지가 바로 고려지(高麗紙)임을 증명하는 글이다.
權貴求索者寢廣
이어 또한 권세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자나 깨나 찾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애용하고 앞 서 말한 것처럼 바로 고려지(高麗紙)를 사용하기 위해 고관대작들이 애를 썼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又名韩纸,高丽贡纸。书画用纸。产于朝鲜,高丽为其古称,故名。质地坚韧 、光洁,受墨微渗有韵,宜书宜画,且有镜面及发笺等多类品种。
또한 이어지는 한어자료에서는 일명 한지(韓紙)라고 하는 고려지(高麗紙)는 서화용 종이라고 하면서 조선에서 나고 고려(高麗紙)라고 예부터 그렇게 불렸다 하며 품질은 단단하고 질기며 깨끗하고 매끄러워 묵이 잘 묻고 배어나오는 것이 적어 글과 그림에 맞고 거울 같은 면을 가진 발전(發箋)등 종류도 다양하다 라고 적고 있다.
실로 고려지(高麗紙)가 엄청난 가치를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종이로 푼 역사 대반전
다음에 이어지는 기록에서 엄청난 반전의 기록이 있는데 신중국 백도백과(百度百科)에 보면
宋元明清时我国书写所用高丽纸,大部分是桑皮纸。清乾隆时我国有仿制的高丽纸。
송(宋), 원(元), 명(明), 청(清)시대때 그들 나라에서 서사(書寫)쓰고 적는 것을 모두 고려지로 사용했었다고 하고 청(清)건륭(乾隆)시에는 그들 나라에서 고려종이를 방제(仿制) 즉 모조했다는 글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록인가?
세계삼한역사가 이런 것이다.
바로 송(宋), 원(元), 명(明), 청(清)시대때 쓰고 적는 것을 모두 고려지로 사용했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고려의 소산이고 고려 역사이며 고려 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또한 청(清)건륭(乾隆)시에는 고려종이를 모조까지 했다고 자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반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말로 대단한 이야기고 놀라운 자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이 넘쳐나는데 채륜이 종이 발명자라 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중화사상에 몰입된 신중국에서 이 채륜을 한족으로 만들고 있으니 정말로 가당찮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가당찮은 역사가 현재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치적으로 따져보자.
종이를 발명 한 나라가 삼한이고 고려이기 때문에 계속 연구노력하여 추가 기술을 발전시켜 마침내 고려지(高麗紙)라고 하는 엄청난 재질의 종이를 생산하였던 것이다.
종이를 발명했다면 한족이 아니라 삼한인이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이야기다.
결국 후한(後漢)은 삼한의 나라를 떼어 낸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채륜은 삼한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채륜이 한족(漢族)이라고 하여놓고 보니 이치가 맞지 않자 고려지를 청대에 모사까지 할 형편이었다면 이것은 사실적인 이야기가 분명아니라 역사를 도둑질한 것이 된다.
이러함에도 채륜이 한족일 것이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는 우리스스로가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고 답답한 노릇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주지할 사실은 한족(漢族)은 근세기 되기전에 주위 번족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버리면 안된다.
또 특이하게 발견되는 기록은 다음과 같은데 원말, 명초의 학자인 도종의(陶宗儀)가 쓴 현산시화(玄散詩話)에, “시앵(試鶯)이 조선의 두터운 견지(繭紙)를 가지고 잉어 모양의 함(函)을 만든 다음, 양쪽 편에 고기비늘을 그리고, 배(服) 아래에다 편지를 보관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옛사람들이 편지를 고기 뱃속에 넣어 보냈던 유제(遺制)이다.” 하였다.
이것은 편지함을 조선 견지로 만들어 편지를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예로부터 전(傳)하여 오는 제도(制度)라고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성 역사 문화와 직결되는 이야기다.
아무리 좋은 종이라고 하더라도 유제(遺制)라는 전통성을 고려할 때 조선의 두터운 견지(繭紙) 즉 고려지라고 하여 그들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할 때 이것은 꺼꾸로 이야기 하면 곧 도종의가 말한 사실 전부가 조선의 이야기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삼한역사, 고려 땅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명말청조(明末清初) 장서가(藏書家) 강소서(姜紹書)의 운석재필기(韻石齋筆記)에 내가 일찍이 조선에서 판각한 황화집(皇華集)을 보았는데, 바로 중국에서 칙서(勅書)를 내리거나 책봉(冊封)하러 간 사신들과 그 나라의 문신(文臣)들이 창화(唱和)한 시집이다. 그런데 판각을 새긴 것이 정밀하고 견지(繭紙)가 깨끗하기가 옥과 같은바, 해방(海邦)의 서책이 참으로 기이하다고 칭할 만하였다.
황화집은 명이나 청에서 만들어야 맞다.
왜 조선에서 판각하여 황화집을 만들었을까?
답은 나와 있다.
바로 조선이 황제와 관여된 주체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칙서(勅書) 또는 책봉(冊封)이라 한 것은 조선을 조공국으로 둔갑시켜버린 것에 불과 한 것인데 이것은 조선이 칙서와 책봉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풀이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것이 바로 아래 증명되는데 조선(朝鮮)을 해방(海邦)이라고 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이것은 해동(海東)과 또 다르게 불렸던 명칭이 주는 방(邦) 즉 국가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방(邦)은 자기나라에 붙이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강소성 단양(丹阳)사람인 강소서(姜紹書)는 바로 해방(海邦)사람임을 알 수 있고 바로 조선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조선에서 두터운 견지(繭紙)를 사용하였을 뿐이다.
古指近海邦国。《诗·鲁颂·閟宫》:“遂荒大东,至于海邦。” 郑玄 笺:“海邦,近海之国也。” 晋 陆云 《祖考颂》:“光宅海邦,大造江汉 。”
또 해방에 대한 한어자료를 찾아보니 위와 같은 내용이 있는데 주대(周代) 작가(無名氏)의<시. 노송 .비궁>이란 글에서"해방국은 동쪽의 대초원을 다 통하는것을 해방이라고 한다 하였고 후한 때의 유학자 정현(郑玄)은 해방은 근해지국을 말하는 것이며 진(晋) 육운( 陆云)은 성덕(聖德)을 멀리까지 드러내어 천하를 밝게 다스리는 것을 해방이라고 하고 크게 만든 것이 강한(江漢)이라 하였다.
성덕(聖德)을 멀리까지 드러내어 천하를 밝게 다스리는 것을 해방이라고 하였으니 수황대동(遂荒大东)! 즉 대동국의 대초원을 다 통한다는 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한어자료를 보면 해방(海邦)을 축소하여 복건(福建), 절강(浙江)을 말하며 더 작게는 항주(杭州)를 말한 것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어찌 고려가 아니고 조선이 아니겠는가?
앞에서 하북성은 고려의 영역임을 주지한 사실이다.
어쨌던 해방(海邦)은 조선(朝鮮)의 또 다른 명칭임을 알게 하였다.
고려 종이 화폐
또 하나 우리 사서에서 남겨진 사실 중에 중요하게 생각 할 것은 바로 종이 화폐이야기다.
지금까지 반도역사공부를 하였지만 고려에서 만들어진 화폐란 존재자체를 알 수 없었다.
고려말기, 조선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 돈이 저화(楮貨) 또는 저폐(楮幣)라고 하는데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발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유통되지는 않았다고 축소하고 감추어 반도역사는 적고 있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에 화폐관리관청인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이듬해 저화(楮貨) 2천 장을 발행하였다는 기록과 발행 초기에는 저화(楮貨)한 장이 쌀 두 말의 값어치를 가졌으나 그 뒤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겨우 쌀 한 되의 값어치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중종7년(1512)경에는 아예 종이화폐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반도역사는 적고 쉬쉬 숨기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당시 고려화폐가 어떤 형태의 것인지 한번도 실체나 사진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진이나 그림을 그들이 조작하여 그릴 수가 아니면 실체를 밝혀줄 수가 있겠는가?
삼한 제왕의 얼굴 그림이 전무한 사실과 같아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지금이라도 고려화폐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고 해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반도역사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왜 감추었는지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라도 고려종이의 실체와 함께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할 형편임을 아픈 역사사실과 함께 가슴으로 묻을 수밖에 없다.
닥나무와 조선의 위치
한어자료를 보면 종이를 여러가지로 호칭했음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하게 인도종이(印度纸)를 성경지(聖經紙)라 하였고 영어로는 인도 페이퍼(India paper), 또는 인도지(Bible paper)라 하였다.
인도지라고 하는 바이블 페이퍼(Bible paper)는 한문으로 성경지(聖經紙)와 같다.
이것은 보지 않아도 명칭으로 알 수 있는데 종이가 종교(宗敎)신앙(信仰)의 최고(最高) 법전(法典)을 의미한다는 것으로서 매우 성스럽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고 좋은 질의 종이를 분명코 사용했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있게 한다.
세계적으로 질 좋은 종이라고 알려진 고려지가 성경지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성스럽고 좋은 질의 종이라고 판단되는 인도지가 고려지 보다 더 값어치가 있다 할 것인데 고려지만 나타나고 인도지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알 수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 역시 감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위 기록 전체에서 고려에서 생산되는 종이의 이름으로서 나타나는 명칭은 백추지(白硾紙), 견지(蠲紙), 청자지(靑磁紙), 취지(翠紙), 청지(靑紙) 또는 아청지(鵝靑紙)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넓게는 계림지(鷄林紙), 삼한지(三韓紙), 고려지(高麗紙), 조선지(朝鮮紙)등으로 불렸음도 알 수 있다.
그것을 또 다르게 인도종이(印度纸)라고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종이의 질이 좋다는 것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단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볼 때 서기105년 후한(後漢:23-220)의 채륜(蔡倫:50-121)이 발명한 종이의 역사가 결코 삼한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음도 우리는 반드시 새겨야 할 이야기다.
어떤 일이든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실제로 고려종이가 생산되기 이전에 원료가 되었던 닥나무의 근원지를 분석해 보고 닥나무 조선 산지와 연결하여 조선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가름해보자.
닥나무의 근원이 어딘가를 알면 삼한이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생각도 하지 말라.
옛 우리나라 사료를 보면 닥나무 생산지로는 세종지리지(世宗地理誌)에서 평안도(平安道), 전라도(全羅道),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 경상도(慶尙道), 충청도(忠淸道)에 토산물(土宜)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경기(京畿) 바다 가까이에 있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 대마도(對馬島),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우도(牛島)를 토산지라 하고 있다.
산림경제 종수(種樹) 닥나무[楮]편에 보면 닥(楮)은 돌 무더기 주변 건조한 땅에 심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건조하다는 것은 사막같은 기후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성호사설에 보면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萬馬洞) 것이 가장 좋아서 물화 축에 끼인다고 하였으며 남중(南中)지방의 닥나무가 유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커프라이트(赤銅石, cuprite)로 본 신라(新羅)"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2>에서 이 전라도 일부가 북아메리카대륙 애리조나란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남중이라고 하면 보통 삼남을 이르는데 경상, 충청, 전라도를 말한다.
아래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과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하는 닥나무 분포지도를 동시에 관찰해보면 놀랍게도 동아시아대륙의 분포지에서는 오밀조밀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듬성 느슨한 것으로 나타나 도저히 근원이라고 할 수 없는 근거가 되어 이같은 형상은 아마도 근세기에 이식된 흔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構樹(学名:Broussonetia papyrifera)是一种桑
科构属的植物,也叫楮树或谷树。
Paper Mulberry
故在台灣民間又俗稱鹿仔樹
释名[编辑]构树一名出自《酉阳杂俎》,别名有楮桃(《救荒本草》)、楮(《植物名实图考》)、谷桑(《诗疏》)、谷树(《诗经》)等。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未分级) I类真蔷薇分支 eurosids I
目: 薔薇目Rosales 或 蕁麻目
科: 桑科 Moraceae
屬: 構樹屬 Broussonetia
種: 構樹 B. papyrifera
二名法
Broussonetia papyrifera (L.) Vent.(L.) L'Herit. ex Vent.
Broussonetia kaempferi Siebold + 동아시아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Kozo동아시아
Broussonetia kurzii (Hook. f.) Corner 동남아시아
특이한 것은 오히려 오밀조밀하게 나타나는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이다.
그리고 파피루스의 분포지와 견줄 때 서부 캘리포니아, 하와이와 남부의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가 겹쳐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유럽도 범위에 넣을 수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 삼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그곳에서 삼한땅과 연결할 때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 경상도(慶尙道), 충청도(忠淸道)를 찾아야 할 것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토산으로 나타나는 경기(京畿) 바다가까이에 있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와 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 대마도(對馬島),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우도(牛島)까지를 비견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즉 돌더미 건조한 기후의 땅을 찾으면 된다.
그곳에 아마도 성호사설에서 말한 닥나무가 물화축에 끼인다고 한 전주 만마동(萬馬洞)이 있을 것이며 남중(南中)지방도 그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도와 대마도 역시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종이 생산지
닥나무로 만들어지는 종이(紙)생산지를 살펴보면 세종지리지(世宗地理誌) 기록에서 전라도 임실현(任實縣)과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에는 조지소(造紙所)를 두고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류로는 경기(京畿)에는 노화지(蘆花紙), 충청도(忠淸道)에는 파고지(破古紙)와 칠지(漆紙), 경상도(慶尙道)에는 중국이 아니라 고려(원문:有進獻)에 바치는 표지와 나라에서 쓰는(國用) 표지등이 생산된 것을 알 수 있고 그 명칭으로는 도련지(擣鍊紙), 안지(眼紙), 백주지(白奏紙), 상주지(常奏紙), 장지(狀紙)등이라 했다.
그리고 종이는 경주부(慶州府)에서도 생산되었으며 특히 전라도(全羅道)에서 다양한 종이가 생산되었는데 그 이름이 표전지(表箋紙), 자문지(咨文紙), 부본단자지(副本單子紙), 주본지(奏本紙), 피봉지(皮封紙), 서계지(書契紙), 축문지(祝文紙), 표지(表紙), 도련지(擣鍊紙), 중폭지(中幅紙), 상표지(常表紙), 갑의지(甲衣紙), 안지(眼紙), 세화지(歲畫紙), 백주지(白奏紙), 화약지(火藥紙), 장지(狀紙), 상주지(常奏紙), 비 올 때 사용하는 두꺼운 유지(油紙) 즉 유둔지(油芚紙)등이며 전라도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는 표전지(表箋紙)가 유명했던 모양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기록에 보면 경도(京都)에 조지서(造紙署)가 있는데 세종조에 창설한 것으로 표전(表箋), 자문지(咨文紙)등이 만들어졌다 하였고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영천군(榮川郡),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에 종이가 나왔으며, 경기(京畿) 양근군(楊根郡), 지평현(砥平縣)에서 종이가 생산되었다고 하고 특히 경기(京畿) 가평현(加平縣)에는 지양소(紙壤所)를 둔 것으로 나타나며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에서는 백면지(白綿紙)와 세폐(歲幣)가 생산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에서는 다양한 종이가 생산되었다고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공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
종이가 만들어지는 원료가 닥나무라고 한다면 닥나무의 근원지에서 종이가 생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위 DNA 분석 분포지를 참고 한다면 종이가 생산된 곳은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보아 삼한이 있어야 할 곳, 그곳은 바로 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위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아도 종이로 본 삼한의 위치 또는 조선의 위치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증명하는 것에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아직도 증명할 생물, 무생물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이것들을 죄다 밝혀 검토하고 분석한다면 최종 공통 분배수는 반드시 들어 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와같은 끊임없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그것과 함께 인도와 이집트가 과연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종이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파피루스의 원산지도 재검토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모든 사서 또는 모든 자료에 등장하는 고려종이의 우수성은 그야말로 글로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찬탄이 이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매우 탁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과거 종이가 인류를 지배하는데 쓰였고 발달된 인쇄술이 인류를 개화하였다면 그 중심에 분명히 고려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곧 고려가 세계역사를 이끈 것이고 문화발전을 도모케 하여 인류에게 무한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기 틀림없기 때문에 위대한 역사가 분명코 그 중심에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고려시대에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일이다.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
다 아다시피 고도로 발달된 인쇄술은 일찍이 종교혁명을 생성시켰고 또한 산업혁명의 시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가 없다.
그 중심에서 세계문명역사를 움직인 것은 다름아닌 삼한이었다.
무엇을 더 말하랴![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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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나무(楮) 조선 토산지
산림경제 제2권
종수(種樹)
닥나무[楮]
二月蒔之。 纂要 楮宜石堆邊燥土。掘地두001 臥植。覆土頗두002 厚。勿用足踏。以石壓之。則易活。待其稍長。曲其枝埋於土。仍以石壓其埋處。則便生別根。着根年久之後。用牛耕其根傍。則根露處。輒復生笋。 俗方 臘月斫之。正月燒其根。不燒則不茂。 纂要 四月宜斫楮皮。非此月斫者。多致枯死。臘月斫之亦可。 神隱 纂要曰。非臘月斫者枯死 每年斫之。以木杵打碎斫頭。則甚茂。 俗方
2월에 모종을 낸다. 《사시찬요》
닥은 돌무더기 주변 건조한 땅에 심는 것이 좋다. 땅을 파고 뉘어 심은 뒤 흙을 두껍게 덮는다. 발로 밟지 말고 돌로 눌러놓으면 잘 산다. 줄기가 자라거든 그 줄기를 구부려 휘묻이를 하고 묻힌 곳을 돌로 눌러놓으면 그곳에 뿌리가 내린다. 뿌리를 내린 지 몇 년 뒤에 그 뿌리 근처를 소로 갈아 뿌리를 드러내 놓으면 드러난 뿌리들에서 다시 싹이 돋는다. 《속방》
섣달에 닥나무를 깎아내고 정월에 그 등걸을 태운다. 태우지 않으면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 《사시찬요》
4월에 쪄[斫]서 닥껍질을 벗기는 것이 좋다. 이 달에 찌지 않으면 말라 죽는 것이 많게 된다. 섣달에 찌는 것도 괜찮다. 《신은지》ㆍ《사시찬요》에는 “섣달에 찌지 않으면 말라 죽는다.” 했다.
매년 깎아낸 다음 몽둥이[木杵]로 등걸을 두드려 부숴 놓으면 매우 무성해진다. 《속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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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8권
인사문(人事門)
생재(生財)
종이는 닥나무가 원료(原料)인데,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萬馬洞) 것이 가장 좋아서 물화 축에 끼인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에는 소나무를 기르는데, 제주도처럼 사슴이 많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잡아서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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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바다 와 가까이 있다.
【토산】 백옥(白玉) 저지도(楮只島)에서 난다. 소금[鹽]ㆍ밴댕이[蘇魚]ㆍ병어(兵魚)ㆍ홍어(洪魚)ㆍ조기[石首魚]ㆍ참조기[黃石首魚]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뱅어[白魚]ㆍ숭어[秀魚]ㆍ준치[眞魚]ㆍ오징어[烏賊魚]ㆍ호독어(好獨魚)ㆍ조개[蛤]ㆍ가무락조개[黃蛤]ㆍ맛조개[竹蛤]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낙지[絡締]ㆍ해파리[海䑋]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곤쟁이[紫蝦]ㆍ게[蟹]ㆍ청해(靑蟹)ㆍ부레[魚鰾].
【토산】 쑥[艾]ㆍ감[枾] 면(綿)ㆍ마(麻)ㆍ저(楮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ㆍ칠(漆) 등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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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
대마도(對馬島)
토산물은 귤과 닥나무뿐이다
대마도(對馬島) 곧, 일본의 대마주(對馬州)이다. 옛날엔 우리 신라[鷄林]에 예속되었었는데, 어느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부산포(釜山浦)의 도유삭(都由朔)으로부터 대마도의 선월포(船越浦)까지 수로가 대략 6백 70리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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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우도(牛島) 둘레가 백 리인데 주 동쪽 정의(旌義) 경계에 있다. 사람과 말[馬]이 떠들면 풍우가 일어난다. 섬의 서남쪽에 구멍이 있는데 작은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조금 나아가면 배 오륙 척을 감출만하다. 그 위에는 큰 돌이 집 같은데, 마치 햇빛이 떠서 비치고 별들이 찬연하게 벌여 있는 것 같고 기운이 심히 차고 냉하여 머리털이 쭈뼛한다. 세속에서는 부르기를 신룡(神龍)이 있는 곳이라 부르는데, 7, 8월 사이에는 고기잡이배가 가지 못한다. 가면 크게 바람이 일어나고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져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손상시킨다. 그 위에는 닥나무가 많다
牛島,人馬喧則有風雨。其西南有竇。可容小舡。稍進則可藏樓舡十艘。水牛恒居。其上。大石如屋。若有日光浮耀。星芒燦然。氣甚寒凉。毛髮竦然。俗傳。有神龍。七,八月間。漁舟不可往。往則有大風雷雨。拔木損禾。其上。多楮木有羊場。
우도(牛島) 인마(人馬)가 시끄럽게 하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그 서남쪽엔 작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굴이 있는데 차츰 들어가면 누선(樓船) 10척을 둘 만하다. 물소가 늘 산다. 그 위엔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태양이 빛나듯 별빛이 반짝이는 듯하다. 기후가 몹시 추워서 털이 쭈삣[竦然]하다. 전설에, “여기에 신룡(神龍)이 있어서, 7ㆍ8월 사이엔 고기잡이배가 갈 수 없으며, 만약 가기만 하면 큰 바람이 일고 천둥이 울며 비가 쏟아져 나무가 뽑히고 벼를 상하게 한다.” 한다. 그 위엔 닥나무가 많고 양치는 목장[羊場]이 있다ㆍ비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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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서 제1권
사민을총괄하여 논함
以我東地勢言之。山回水環。在在皆然。遮擁屛蔽。形勢極好。山水雜沓。津液滲漉。水旱風霜。亦難爲灾。西關之紬綿。北道之麻布。海西之鐵冶。南中之竹楮。沿海之魚鹽苔藿。峽中之菽粟木植。凡可以養生送死之具。無所不有
우리나라의 지세(地勢)를 보면, 산이 둘러싸고 물이 감돌아 곳곳이 병풍을 두른 듯 형세가 매우 좋고, 산수가 많아서 진액(津液)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수(水)ㆍ한(旱)ㆍ풍(風)ㆍ상(霜)도 재해가 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리고 서관(西關 평안도 지방)의 명주ㆍ무명, 북도(北道 함경도 지방)의 삼베,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의 무쇠, 남중(南中 삼남 지방)의 대와 닥나무, 바다 근방의 물고기ㆍ소금ㆍ김ㆍ미역, 산골의 콩ㆍ조ㆍ재목 등 무릇 우리 생활에 필요한 물자로는 있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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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2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닥나무의 품질
우리나라의 닥나무는 종이를 만들기에 알맞기는 하나, 무겁고 또 털이 일어나므로 왜산(倭産) 닥나무의 가볍고 반질반질하며 정치(精緻)한 것만 못하다. 평시에 인쇄한 서책 가운데 지금 간혹 남아 전해지는 것들은 대부분 왜산 닥나무로 만든 종이로서, 더없이 보배로운 것인데 이제는 점차 없어지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조종조(祖宗朝) 때 왜국에 가서 그 종자를 가져와 번식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남쪽의 바닷가에 더러 있기는 한데 사람들이 널리 보급하여 심을 줄을 모르니, 지금 열읍이 모두 그것을 심게 하되 백성들을 권유(勸諭)하여 널리 번식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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