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순채(蓴菜, Brasenia)가 우리밥상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한부울 2013. 6. 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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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음식 순채(蓴菜, Brasenia)행방은?

 

글쓴이:한부울

 

 

위 사진은 우리가 순나물이라고 하는 순채(蓴菜)이다.

순채(蓴菜)는 식물분류학체계적으로 수련목(睡蓮目:Nymphaeales) 순채과(蓴菜科:Cabombaceae) 순채속(蓴菜屬:Brasenia Schreb)으로 분류되며 숙근성 다년초로 수생식물이다.

widely distributed in warm temperate and tropical regions of the world.

그리고 위 영어문장처럼 이 식물은 넓은 세계의 온대지역과 열대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蓴菜生南國 특히 한어자료에 나타는 것처럼 순채는 남국에서 난다하고 있다.

학명은 Brasenia schreberi 이고 1791년 독일 동물학자, 식물학자, 곤충학자, 파충류학자, 연체동물학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그멜린(Johann Friedrich Gmelin:1748-1804)에 명명되었다.

워터실드(Watershield)로 불리며 aquatic plant with floating oval leaves and purple flowers;구체적으로 순채를 묘사한 영어사전을 보면 떠있는 타원형의 잎과 보라색 꽃을 가진 수생식물라고 정리하고 있다.

순채(蓴菜)는 오래전 부터 우리나라에서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나물로 무침하기도 했던 서민 음식이라고 했다.

진서(晉書 卷92) 장한전(張翰傳)에 의하면 옛날에 장한(張翰)은 강동(江東)을 생각하면서 농어(鱸魚)와 순채(蓴菜)를 말했는데 장한은 진(晉)나라 오군사람으로, 제(齊)나라에 벼슬하여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는데, 가을바람이 불자 오중송강(吳中松江) 고채(菰菜), 순채(蓴菜)국과 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서 벼슬을 내놓고 돌아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오중송강(吳中松江)과 강동(江東)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

 

백과사전은 순채를 예로부터 강장식품으로 또는 약용식물로 사랑 받아 온 수초이라고 하고 순채 위 사진처럼 점액질 물질은 비타민이 많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잎과 싹을 수렴, 건위, 호흡기 질환에 쓰고 열을 내려 주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부기를 낫게 한다고 했으며 또한 몸 속의 여러 가지 독소를 제거하는 작용이 있다하여 특히 술을 많이 마셔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린 숙취 증상이 있을 때 순채국을 먹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고 한다.
이러한 약효에 대해서 소경(蘇敬)저서 당본초(唐本草)에는, "붕어를 넣고 국을 끓여 먹으면 위를 튼튼히 하고 소화불량을 치료한다고 하였으며 노인들에게 더욱 좋다."고 하였고 엽천사(葉天士)의 저서 본초재신(本草再新)에는, "뱀독을 해독하고 부스럼을 치료한다."고 했으며 전초를 달여 마시거나 생즙을 내 환부에 붙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약효가 좋은 만큼 부작용도 따르는데 당대(唐代) 진장기(陳藏器:681-757)저서 본초십유(本草拾遺)에는, "늘 먹게 되면 기를 잃게 되고 관절이 나빠진다." 고 하였고 성질이 차기 때문에 더운 체질에 좋지만 많이 먹으면 치아를 상하거나 식초와 함께 먹으면 뼈를 상하게 하고 머리카락이 빠진다고도 했다.

6세기경 후위(後魏) 제군(齊郡) 익도(益都)사람 가사협(賈思勰)가 쓴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참외, 가지, 무우, 연뿌리, 순채 등 채소의 생식(生食) 즉 생채(生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며 백과사전에 동국이상국집에 팽빙(烹氷)의 순갱(蓴羹)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순채냉국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이상에서 보았을 때 순채를 늘상 나물을 만들어 먹던 우리 조상의 지혜가 엿보인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서를 보면 허목(許穆:1595-1682)이 쓰고 정리하지 못한 것을 1689년에 숙종 명에 의해 간행되었다는 책, 미수기언(眉叟記言) 고양산수기(高陽山水記)에서 작자가 고양산(高陽山)의 산천(山川)을 두루 유람한 역정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서 순채(蓴菜)의 글이 보인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의 형제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는 표현이다.

순채와 생선 이야기는 진서(晉書)에 기록된 것처럼 똑 같은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순채를 나물로 애용한 것처럼 우리 땅에서 이 순채가 난 사실을 사서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조선에서도 이 순채(蓴菜)가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연산8년(1502)에 기사를 보면

○承政院啓: “蓴菜令各道封進。 如慶尙、全羅遠道, 貯水盛來, 非但易消, 弊亦不少。” 傳曰: “此豈有弊於驛路? 供上之事, 不當如是言也。”

승정원이 아뢰기를, “순채(蓴菜)를 각도(各道)에 진상하도록 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 같은 먼 도는 물에 담아 오게 되니 다만 녹아버리기 쉬울 뿐 아니라, 폐단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이 어찌 역로(驛路)에 폐단이 있겠는가? 공상(供上)에 대한 일을 이와 같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연산11년에도 같은 기사가 있는데

○命京畿監司封進蓴菜、葱、蒜、萵苣, 一應菜蔬, 令各道具根戴土, 使不至枯槁封進。 各道遂作檻, 置土封植, 相遞舁運, 絡繹不絶, 及至京中, 枯槁不得納。 遂於市裏貿之, 其價踴貴, 雖罄財莫能償之。 又分遣內官於各道, 採取山菜及民間雜蔬。

경기 감사(京畿監司)에게 명하여 순나물[蓴菜]·파[葱]·마늘[蒜]·상치[萵苣]를 봉진(封進)하게 하고, 모든 채소는 각도(各道)로 하여금 뿌리채로 흙을 얹어서 마르지 않도록 하여 봉진하게 하였다. 각도는 드디어 우리함[檻]를 만들어서 흙을 넣고 심었다가 끊임없이 번갈아 들어 날랐으나, 서울에 이르러서는 말라서 바칠 수 없으매 드디어 저자에서 사게 되니, 그 값이 뛰어올라서 재력(財力)을 다하여도 갚아낼 수 없었다. 또 내관(內官)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산나물 및 민간의 여러 채소를 채취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한성까지 거리가 먼고로 지금도 채소를 수송하기가 쉽지 않는데 당시라면 오죽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조선 숙종때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원대(元代)문헌 거가필용(居家必用)을 인용하기를

厠中生蛆。以蓴菜一把。投於厠中。蛆卽無。 必用

측간 속에 구더기가 생길 때는 순채(蓴菜) 한 줌을 측간 속에 넣으면 즉시 없어진다 하였고

산림경제를 통하여 이름만 전해질 뿐 실물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저서 문견방(聞見方)에 의하면

過熱病後。食蓴菜殺人。 聞見

열병(熱病)을 치른 끝에 순채(蓴菜)를 먹으면 죽는다고 되어있다.

순채(蓴菜)가 생산되는 토산지를 기록한 것으로서 세종지리지(世宗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세종지리지(世宗地理誌)에서 기록하길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제천현(堤川縣)에 토산(土産)으로 신감초(辛甘草)·순채(蓴菜)·잇[紅花]이라고 하였고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북쪽 대성산(大城山)이 있는데, 혹은 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하며 예전에는 산정(山頂)에 99개의 못[池]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만 3개의 못이 있고 가뭄을 만나면 비를 빌며 2개의 못에는 순채(蓴菜)가 있다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강원도(江原道) 고성군(高城郡)에 토산으로 또한 순채[蓴菜]가 난다 하였고 간성군(杆城郡) 선유담(仙遊潭)에 봄에 척촉화(躑躅花)가 바위를 끼고 많이 피며, 순채(蓴菜)가 못에 가득하다고 하였으며 전라도(全羅道) 함열현(咸悅縣)에 토산으로 순채[蓴]농어[鱸魚]가 나며 또 제주목(濟州牧)에 입산악(笠山岳)은 동쪽 50리에 있는데 산 위에 못이 있고 연꽃과 순채(蓴菜)가 난다 하였다.

그리고 경기(京畿) 연천현(漣川縣)에서도 나고, "이규보시에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계양산(桂陽山)에 가고 오면서 깊이 강호(江湖)의 흥취를 얻었고 홀연히 순채(蓴菜)와 농어(鱸魚)가 만리의 정취(情趣)를 일으킨다.” 하고 있다. 또한 경기 음죽현(陰竹縣)에서도 토산으로 순채(蓴菜)가 추택(楸澤)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순채(蓴菜)를 각도(各道)에 진상하도록 했다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순채를 물에 담아 운송을 하는데 녹아 버린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날씨가 덥고 두 도와 한성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르게 생각 해 볼 것은 바로 신증의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계양산(桂陽山)에 가고 오면서 깊이 강호(江湖)의 흥취를 얻었고 홀연히 순채(蓴菜)와 농어(鱸魚)가 만리의 정취(情趣)를 일으킨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來深得江湖興忽起蓴鱸萬里情

위 문장에서 볼 때 강호(江湖)는 세간, 사방각지를 뜻하는 대륙풍의 단어로서 조선 부평도호부를 그렇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할 때 순채와 농어가 있어 만리(萬里)의 정취를 일으킨다고 한 사실은 전혀 한반도 사정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는 표현이다.

장한(張翰)이 이야기 한 오중송강(吳中松江)과 강동(江東)은 신증에서 말한 강호(江湖)와 만리(萬里)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상 조선에서 자생한 토산지를 정리하면 세종지리지(世宗地理誌)에서 순채(蓴菜) 토산지로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제천현(堤川縣)과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를 지정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강원도(江原道) 고성군(高城郡)과 간성군(杆城郡), 그리고 전라도(全羅道) 함열현(咸悅縣)과 제주목(濟州牧), 경기(京畿) 연천현(漣川縣)과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음죽현(陰竹縣)을 지목한 것으로 정리가 된다.

 

이렇다면 결국 조선 땅 어디든지 서민나물 순채(蓴菜, Brasenia)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에는 이 순채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한반도에 사는 우리민족들은 이 순채에 대해서 특별하게 아는 것이 없을 정도로 낮설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역사적인 전통서민음식인 이 순채를 지금 사람들은 모를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에는 이 순채가 애초부터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위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다 무엇인가?

바로 근세기에 벌어진 역사 새판짜기에 의해 본래 있던 곳에서 옮겨진 역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실제로 DNA 분석을 통한 순채(蓴菜)의 원산지 즉 근원지가 과연 어딘가를 추적하고 알아 보기위하여 종전방식대로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와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하는 분포지도를 동시에 관찰하게 해본다.

그리고 한가지 더 자료를 첨가하여 분석하는데 북아메리카대륙 생물군 프로그램(The Biota of North America Program)자료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Brasenia schreberi J.F. Gmel. 1791, WATERSHIELD

Johann Friedrich Gmelin(1748-1804) was a German naturalist, botanist, entomologist, herpetologist and malacologist.

 

莼菜(brasenia schreberi),又名“水葵”,水生宿根草本。叶子椭圆形,深绿色,長約6至10公分,浮生在水面,嫩茎和叶背有胶状透明物质,夏季抽生花茎,开暗红色小花,嫩叶可食用,《詩經·魯頌》提到:「思樂泮水,薄采其茆。魯侯戾止,在泮飲酒。」《世說新語》也記載有「千里蓴羹」的名言。晉朝張翰因見秋風起,乃思吳中菰菜、蓴羹、鱸魚膾,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睡蓮目 Nymphaeales

科: 蓴菜科 Cabombaceae

屬: 蓴菜屬 Brasenia Schreb.

種: 蓴菜 Brasenia  schreberi 1791

 

 

 

디스커버 라이프 분포지도를 보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을 강하게 표시하고 있다.
생명의 백과사전 분포지는 명확하게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동부를 표시하고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BONAP(The Biota of North America Program) 자료를 보더라도 (연초록)Species present and not rare 연초록색부분은 희귀하지 않다 하였으니 흔하다는 말이고 (진초록)Species present in state and native 진초록색은 본래 원산의 지역이다. (황색)Species not present in state 황색은 자라지 않는 곳으로 그려놓고 있다.

이 순채가 본래 원산지역은 진초록색이 칠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표식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빈도수를 볼 때 동아시아대륙의 표식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조선왕조실록과 그리고 세종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기록한 순천 자생지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위 토산지를 찾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생각해보라.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던 요리이고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순채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80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 가정살림에 관한 내용의 책,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전라도의 순채나물이나 탕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국토에서도 그 만큼 흔했던 물풀이라고 하면서 송수권 시인이 말하길 "또 한되 들이 댓병 소주를 다 마셔도 순채나물 한 숟갈만 물에 타 먹으면 숙취가 말끔히 가셨다. 생각하면, 구황식(救荒食)의 채근(採根)만을 씹고 살아온 민족인데 언제부터 우리 식탁에서 이 순채나물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라고 의문스러워 하고 있다.

어찌 이 순채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생물들이 다 이런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찾기 이래서 필요한 것이다.

순채나물이 본래 있었는가 없었는가도 알지못하는 형편에서 우리가 이렇듯 스스로가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싶은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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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나물(蓴菜, Brasenia)

 

 

 

 

 

 

 

                                                         

                      馬湖莼菜  심천(深圳)순채 학명:Shenzhen Brasenia Schreberi

 

순채(蓴菜, Brasenia schreberi)는 동아시아와 인도 등에 분포하는 여러해살이 수생식물로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길게 자라서 잎이 수면에 뜬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며, 뒷면은 자줏빛이 돌고 중앙에 잎자루가 달린다. 잎이 자랄 때는 어린 줄기와 더불어 우무 같은 점질로 둘러싸인다. 꽃은 5-8월에 피고 검은 홍자색으로 잎겨드랑이에서 자란 긴 꽃대 끝에 1개씩 달리며 지름 약 2㎝이다. 열매는 난형이며 꽃받침과 암술대가 남아 있다. 우무 같은 점질로 싸인 어린순을 식용으로 한다.

Brasenia is cultivated as a vegetable in China and Japan and the mucilage it produces has been found to have anti-algal and anti-bacterial properties that may be useful as a homeopathic weed control. Fossil Brasenia is present in Europe although it does not occur there now. [위키]

蓴菜本身沒有味道,勝在口感的圓融。中國的江蘇太湖、浙江蕭山湖和杭州西湖有莼菜生長。蓴菜在台灣幾已絕跡,過去多產於日月潭,後來發現密生崙埤池亦有蓴菜。蓴菜本身含有豐富的透明膠質,《本草綱目》記載蓴菜具有腸胃方面之保健效果

 

수련과 다년생수초, 순나물, Brasenia schreberi는 다년생의 수생식물이다. 맑은 담수의 池沼(못)에 자생한다. 새싹의 부분을 식용으로 하기 때문에 재배되고 있다.

미나리아재비목 수련과의 여러해살이 물풀. 중국 원산이다. 연못에서 자라지만 옛날에는 잎과 싹을 먹기 위해 논에 재배하기도 하였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가지를 치면서 자라고, 원줄기는 수면을 향해 자라며 드문드문 가지를 친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며, 뒷면은 자줏빛이 돌고 중앙에 잎자루가 달린다. 꽃은 5∼8월에 피고, 검은 홍자색으로 잎겨드랑이에서 자란 긴 꽃대 끝에 1개씩 달리고, 지름 약 2㎝이다.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3개씩이다. 암술은 6∼18개이고 유두상(乳頭狀) 돌기가 있으며 수술은 많다. 열매는 달걀꼴이고 꽃받침과 암술대가 남아 있다. 우무 같은 것으로 싸여 있는 어린잎은 식용으로 하며 원줄기와 잎은 이뇨제로 사용한다. 동아시아·인도·오스트레일리아·서아프리카 등지에 분포한다.[야후사전]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순채


순채를 이용한 요리에는 순채초회, 순채전골, 순채 오미자차, 순채 불고기, 순채 립스틱(갈비), 순채 장국수, 순채 물김치, 순채죽 등 다양한 음식이 있는데, 특히 순채를 간장, 식초, 참기름, 들깨를 넣은 초장과 버무려 먹는 순채초회는 상큼하고 오묘한 맛이 일품이며, 독특한 비법으로 연구개발한 '순채립스틱'은 규격돈으로 사육한 연한 돼지갈비를 순채즙에 8시간 재웠다가 요리를 함으로써 잡냄새가 없고 소화가 잘되는 장점이 있다.

순채의 어린 잎을 넣고 국을 끓이고, 순채의 연한 잎은 데쳤다가 초장에 찍어 먹기도 하는데, 이를 순채회라 하고 또 순채로 화채를 해먹기도 한다. 옛날에는 의림지 수면에 쫙 깔려 있었다고 하는데 1914년 의림지 보수 이후 멸종되었다. 이후 1941년 송학면 무도리 만지실에 이식하였으나 지금은 그 못이 없어져 찾아 볼 수 없다.

 

약용 효능

 

 

 

 

순채는 예로부터 강장 강정 식품으로 또는 약용식물로 사랑 받아 온 수초이다. 순채의 점액질 물질은 비타민이 많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잎과 싹을 수렴, 건위, 호흡기 질환에 쓴다. 순채는 열을 내려 주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부기를 낫게 한다. 또 몸 속의 여러 가지 독소를 제거하는 작용이 있다. 특히 술을 많이 마셔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린 숙취 증상이 있을 때 순채국을 먹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고 한다.

《당본초(唐本草)》에는, "붕어를 넣고 국을 끓여 먹으면 위를 튼튼히 하고 소화불량을 치료한다. 노인들에게 더욱 좋다."고 했다. 《본초재신(本草再新)》에는, "뱀독을 해독하고 부스럼을 치료한다."고 했으며 전초를 달여 마시거나 생즙을 내 환부에 붙인다고 했다.

 약효가 좋은 만큼 부작용도 따르는 것 같다. 《본초십유(本草拾遺)》에는, "늘 먹게 되면 기를 잃게 되고 관절이 나빠진다." 고 했다. 또 성질이 차기 때문에 더운 체질에 좋지만 많이 먹으면 치아를 상하게 한다. 식초와 함께 먹으면 뼈를 상하게 하고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했다. 《의림찬요(醫林纂要)》에는,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냉하고 아프다."고 부작용을 경고했다

 

                                                               重庆莼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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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9년(1463 계미 / 명 천순(天順) 7년) 2월 10일(기사)

성균 생원 김경충 등이 신축 궁장이 성균관 반수 안에 들지 않도록 청하였으나 불허하다

○己巳/成均生員金敬忠等上書曰:

臣等竊聞學校, 風化之源, 賢士所關, 自古聖帝、明王莫不重焉。 天子之學謂之辟雍, 諸侯之學謂之泮宮, 其曰辟雍者, 水流旋丘如璧之圓, 其曰泮宮者, 以其半於辟雍者也。 聖人所以創立名意有在焉。 昔魯僖公能修泮宮, 其臣克頌之, 首章曰, “思樂泮水, 薄采其芹。” 次章曰, “思樂泮水, 薄采其藻。” 次章曰, “思樂泮水, 蓴采其茆。” 其所以頌之再三, 而必稱泮水者, 豈非有大於學而言耶?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경충(金敬忠)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 등이 그윽이 듣건대,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근원이며 어진 선비[賢士]에 관계되는 바이니, 예로부터 성제(聖帝)·명왕(明王)이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천자(天子)의 학(學)6058) 을 벽옹(辟雍)이라 하고, 제후(諸侯)의 학궁을 반궁(泮宮)이라 하니, 그 벽옹(辟雍)이라는 것은 물이 언덕을 돌아 흘러서 벽(璧)6059) 과 같이 둥근 것이며, 그 반궁(泮宮)이라는 것은 그 벽옹(辟雍)에 반(半)만으로써 함이니, 성인(聖人)이 창립(創立)하여 이름한 뜻이 있는 소이(所以)입니다. 옛적에 노(魯)나라 희공(僖公)이 능히 반궁(泮宮)을 닦으니, 그 신하가 이를 칭송하여, 수장(首章)에 말하기를, ‘즐거이 반궁의 물가에서 미나리[芹]을 캔다.’[思樂泮水 薄采其芹] 하고, 다음 장[次章]에 말하기를, ‘즐거이 반궁의 물가에서 마름품[藻]을 캔다.’[思樂泮水 薄采其藻] 하고, 그 다음 장[次章]에 말하기를, ‘즐거이 반궁의 물가에서 순채(蓴菜)를 캔다.’[思樂泮水 蓴菜其茆] 하였으니, 그 칭송한 것이 두세 번이었으되 반드시 반수(泮水)를 일컬은 것은 어찌 학궁에 큰 것이 있지 않고서 말하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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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8년(1502 임술 / 명 홍치(弘治) 15년) 4월 14일(을묘)

승정원에서 순채에 대한 진상의 폐단을 아뢰다

○承政院啓: “蓴菜令各道封進。 如慶尙、全羅遠道, 貯水盛來, 非但易消, 弊亦不少。” 傳曰: “此豈有弊於驛路? 供上之事, 不當如是言也。”

승정원이 아뢰기를,

“순채(蓴菜)를 각도(各道)에 진상하도록 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 같은 먼 도는 물에 담아 오게 되니 다만 녹아버리기 쉬울 뿐 아니라, 폐단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이 어찌 역로(驛路)에 폐단이 있겠는가? 공상(供上)에 대한 일을 이와 같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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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3월 25일(경술)

각도로 하여금 채소를 봉진하게 하다

○命京畿監司封進蓴菜、葱、蒜、萵苣, 一應菜蔬, 令各道具根戴土, 使不至枯槁封進。 各道遂作檻, 置土封植, 相遞舁運, 絡繹不絶, 及至京中, 枯槁不得納。 遂於市裏貿之, 其價踴貴, 雖罄財莫能償之。 又分遣內官於各道, 採取山菜及民間雜蔬。

경기 감사(京畿監司)에게 명하여 순나물[蓴菜]·파[葱]·마늘[蒜]·상치[萵苣]를 봉진(封進)하게 하고, 모든 채소는 각도(各道)로 하여금 뿌리채로 흙을 얹어서 마르지 않도록 하여 봉진하게 하였다. 각도는 드디어 우리[檻]를 만들어서 흙을 넣고 심었다가 끊임없이 번갈아 들어 날랐으나, 서울에 이르러서는 말라서 바칠 수 없으매 드디어 저자에서 사게 되니, 그 값이 뛰어올라서 재력(財力)을 다하여도 갚아낼 수 없었다. 또 내관(內官)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산나물 및 민간의 여러 채소를 채취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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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주]

옛날에 장한(張翰)은 강동(江東)을 생각하면서 농어[鱸魚]와 순채(蓴菜)를 말했습니다.

장한은 진(晉) 나라 오군 사람으로, 자는 계응(季鷹)인데 문장가이다. 제(齊) 나라에 벼슬하여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는데, 가을바람이 불자 오군의 고채(菰菜)ㆍ순채(蓴菜) 국과 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서 벼슬을 내놓고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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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林經濟卷之一

厠中生蛆。以蓴菜一把。投於厠中。蛆卽無。 必用

측간 속에 구더기가 생길 때는 순채(蓴菜 연못 등에 나는 풀이름) 한 줌을 측간 속에 넣으면 즉시 없어진다. 《거가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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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林經濟卷之二 治膳

食忌

過熱病後。食蓴菜殺人。 聞見

열병(熱病)을 치른 끝에 순채(蓴菜)를 먹으면 죽는다. 《문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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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나물은 남국의 산물 / 蓴菜生南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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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記言別集) 제9권

高陽山水記 戊戌

眉叟記言권9는 記(54)이다. 山川을 두루 유람한 역정

허목(許穆:1595-1682)

九年夏。承召至高陽。辭疾退留高峯之竹院。五日至西山。與主人遊篤才洞溪水間。上有小瀑。其下石絶水落處。又有二松樹。間指某可居。某可耕。某可濯。某可遊。明日。入重興洞。有古城跨絶頂。盡石門水口。此麗之北漢城也。過石門盤石。水益淸。石益白。洞壑皆高巖峭壁。到絶頂皆然。下有閔漬巖。閔漬者。麗之宰臣。好浮屠。遊名山澤。吾嘗登懽喜嶺石臺。有閔漬古跡。坐盤石上。觀潭水。渡石梁。苔深石滑。昨夜山中大雨。巖下多積陰。山逕皆濕。欲深入。巖壑間有暝色。乃出石門。宿於西山主人之舍。朝日。權永叔,鄭文翁,韓仲澄,李子膺,子仁兄弟。聞吾來。自城中至。主人具蓴魚。酌白酒爲懽。吾以病求醫。從數君向城西。過重興洞坐伽葉後嶺到谷口。憩溪石上。仍述此行山水之遊。途中無紙筆。追記以爲諸君示。眉叟。記。

9년 여름에, 상의 부름을 받고 고양까지 와서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을 머물러 있다가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 계곡 사이에서 놀았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어 그 밑에 절벽이 생겼고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두 그루 소나무가 있는데, 그 사이로 가리키며,

“저기는 집을 지을 만하고, 저기는 밭을 이룰 만하고, 저기는 목욕을 할 만하고, 저기는 놀 만하다.”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정(山頂)을 둘러 석문(石門)으로 된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석문을 들어가니, 반석(盤石)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절정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高麗)의 재신(宰臣)으로 불도를 좋아하여 명산 대택(名山大澤)에 두루 노닐었으니, 내가 일찍이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고적(古跡)이 있었다. 반석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와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질척하였다. 깊숙이 계곡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어둠 빛이 짙은지라,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 주인(西山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ㆍ정문옹(鄭文翁)ㆍ한중징(韓仲澄)ㆍ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의 형제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

나는 병이 있어 의원을 만나려고 몇 친구를 따라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산에서 쉬고 동리 어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 걸음의 산수기(山水記)를 지었으니,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미수(眉叟)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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