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 와의 이상한 관계
글쓴이:한부울
먼저 서양의 한국인과 동양 한국인이 존재했다고 하면 너무 비약한 것인가?
그래서 과거 역사에서 세계를 지배한 세력은 한국인이었다고 하면 큰일 날 일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손해 볼일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수위만큼 폭을 넓혀 보지 않으면 안되는 혼란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바로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의 관계이다.
금속활자가 세계문명 발달에 주었던 영향력은 과히 지배를 논 할 수 있을 만큼 지대하기 때문에 그 가치성을 보아도 인쇄술을 주도한 세력이 곧 세계를 지배 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성 싶어 하는 말이다.
금속활자 발명이란 자체를 단순하게 볼 수 없음이다.
이와함께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역사를 대변하는 지칭인 “COREA” 의 실체이다.
서양인들이 정해주었다는 사실과 관계 없이 우리역사 정체성의 대표되는 이름이 “COREA” 라고 한다면 근세기 역사에서 동양, 서양이라고 지금처럼 구분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이름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나열하게 되면 대체적으로 이런 명인데 “Caule”, “Cauly”, “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 korai, united corea. 이다.
이렇게 많은 명명이 무엇때문에 필요한 것일까?
우리가 생각 해 볼 수 있는 것은 광범위한 역사, 종교, 문화, 인종, 영역 등이 달라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에서 고정된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쉽지 않아 이렇게 많은 이름이 필요했거나 존재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다양성이 있는 이름은 일단 한반도에 쳐 박혀 있었던 이름은 아니라는 말이다.
15세기 16세기까지 한반도는 섬이란 인식이 강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런 한반도에 있는 “COREA” 가 알려졌으면 얼마나 알려졌겠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하였을 때 조선인들은 미개인이라고 하였고 일본인들은 문화인이라고 극단적으로 구분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보면 그들의 시각은 무지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거짓 표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그런데도 하멜의 기록은 우리나라 근세기 모습을 제일 근접하게 표현 한 것이라 하여 마치 역사처럼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일제가 한반도역사를 쥐고 농단한 사정과 다르게 해석될 수 없다.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 만들어진 지도들을 보면 한반도의 지명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도 유럽인들이 한반도를 “Caule”, “Cauly”, “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 식으로 다르게 불렀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19세기까지 서양제국에서 보았을 때 한반도에 존속한 아주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나라가 코리아인데 어떻게 국명하나 바르게 알지 못하고 이렇게 많은 지칭을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물론 이같은 의문은 한반도에만 “COREA”가 존재했었다는 반도역사에 기준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볼 때 위의 수많은 지칭이 발생한 근본 이유는 “COREA” 가 그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던 실체였다는 것이며 워낙 귀속된 방대한 영역의 문화, 종교, 인종이 다양하고 달랐기 때문에 전부 이처럼 여러개의 지칭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들어 대해양시대에 세계 곳곳에 출몰 준동하는 왜(倭)라고 지칭되던 세력들이 시장을 점령하면서 갑자기 산업화가 이루어져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세력이 커졌고 거대한 힘을 결집할 수 있어짐에 따라 기존 거대한 “COREA”는 상대적으로 급속하게 통제력과 지배력을 상실하면서 실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광의적으로 왜(倭)라고 칭하던 세력들이 “COREA”란 영역을 침범 다 차지하면서 부터 무수히 많은 지칭들이 혼란을 가져오면서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정리 한 것이 바로 “COREA”란 지칭으로 일단 통일시켰던 것이라고 판단을 할 수 있다.
영국이 태양이 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영토를 가져 그들의 역사가 방대했다면 차지한 나라마다 언어와 문화, 종교, 인종이 달라 영국을 지칭이 다양할 수 있을 법한데 영국의 지칭이 영어로 잉글란드(England), 불열전(不列顚), 영길리(英吉利)가 전부이다.
그것은 자기네들이 뭐라고 변명을 해도 실제 역사가 꾸준하게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이고“COREA” 만큼 거대한 영역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싶다.
실제 영국의 역사는 따져보면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리스 오톤왕(Othon)이 철종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2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연합왕국 역사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
은 1801년에 그레이트브리튼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과 아일랜드 왕국(Kingdom of Ireland:1542-1801)이 합병하여 성립한 왕국이다. 다른 시기의 영국과 구분하지 않을 때에는 이 나라도 그냥 영국(英國),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라고 부른다.
(1)1801-1820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 재위:1760-1820)하노버왕가3째
(2)1820-1830 조지 4세(George IV, 1762-1830,재위:1820-1830)하노버왕가4째
(3)1830-1837 윌리엄 4세(William IV, 1765-1837,재위:1830-1837)하노버왕가5째
(4)1837-1901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재위1837-1901)이자 인도의 여제(1877-1901)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이다.
위자료에 나타나듯이 시작은 1801년부터임을 알 수 있다.
불과 100년 만인 1901년에 가서야 빅토리아시대, 해가지지 않는 나라고 불렸다는 것이고 세계에 알려 지면서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100년만에 이러한 위치를 차지 하였을까 하는 놀라움이다.
기존 기득세력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지도를 보면 거대하고 방대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근세기 19세기 이후 어떤 일이 발생하였길대 이렇게 전도 되었을 까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영국이 이러한 영역을 차지하기 전에는 분명 그자리를 COREA 란 이름으로 그자리를 대신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COREA 란 한국의 이름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란 글에서 보면 “Caule”, “Cauly”, “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 등으로 지속적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세계를 다스리는 거대한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서양의 “COREA”가 분명하게 존해했다고 확신 할 수 있는 일이다.
1254년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여행가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1220-1293)의 ‘몽골제국 여행기’에 나오는 한국인의 묘사를 보면
“체구가 작고 스페인 사람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들이 사제들처럼 갓을 쓰고 다니는데 검은 니스를 칠해 뻣뻣해진 외올베로 만든 갓들은 어찌나 윤을 냈는지 햇빛에 반사되면 마치 거울이나 잘 닦은 군모처럼 반짝인다.”(몽골제국 여행기) 란 표현처럼 어쩌면 서양의 “COREA”는 스페인사람처럼 모습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져본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또 최두환 박사 글에서 보면 데일리메일(Daily Mail)기자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1869~1931)의『The Tragedy of Korea』에 조선인을 묘사한 것을 보면
“1870년대말…그들은 별난 모자를 쓰는데, 이는 말총이나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어떤 것은 엄청나게 크다. 그들의 머리칼은 머리의 꼭대기 위에 매어 있다. 그들의 살갗은 검고, 코는 펑퍼짐하며, 눈은 검은데, 그들의 몽고적 용모에서 코카서스인(Caucasus: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지역)을 연상케 하는 이상한 암시를 받게 된다...”라고 표현했었다.
이 대목에서 코카서스란 명칭이 현재 흑해와 카스피해사이에 지역이라 하여 백인이란 명칭과 혼입되면서 코카서스라고 하는 인종 구분에서 무조건 백인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위 두 가지 예를 보더라도 지금 한반도 우리의 모습과 큰 차이가 있고 서양 코카서스계, 또는 라틴계의 모습과도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때문에 지금의 우리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세력들이 동과 서에 나뉘어 존속했었다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생각을 낳게 하는데 대표상징 코리아(COREA)란 실체가 전 세계광역적으로 퍼져 있었고 각종 기록에서 통일이 안되는 여러가지 모양새로 다르게 묘사, 표현되거나 나타난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도 대표상징 코리아(COREA)는 전 세계적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지배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코리아가 역사, 문화, 언어, 인종, 지역등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광역의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인데 그러한 사실을 당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반도역사를 꾸미기 위해 동원되었던 네덜란드 하멜의 주장만 믿는다는 사실이다.
진짜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들은 프랑스 기행가가 말한 "체구가 작고 스페인 사람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들이어야 맞다.
아니면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가 묘사했듯이 "몽고적 용모에서 코카서스인(Caucasus: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지역)을 연상케 하는 이상한 암시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반도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특이하게도 다른나라 사람, 남은 우릴 보고 크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작아야 되고 실제 작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2005∙월드ICT 서밋(summit)”에서 엘 고어(Al Gore, Albert Arnold Gore Jr.1948-)전미부통령은 과거 교황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로 AD1453년 구텐베르크가 유럽에서 금속활자 인쇄의 시대를 열었다고 하였다.
(연설기록기사)
한국의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세계최초의 인쇄술에 이어 전 세계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신세를 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큰 성과”라며 한국의 디지털기술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저에게 한국은 인상이 깊은 나라입니다.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세계에는 많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국인은 디지털에 관심이 높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이 같은 관심이 지구촌 문명의 발달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렇게 자신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디지털포럼은 2004년 행사에서 디지털 컨버젼스를 주제로 다뤘습니다. 포럼은 무척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휴머니즘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디저털 컨버전스나 디지털 혼돈속에서 휴머니즘을 통한 방향제시가 흥미로웠습니다. 적절한 문제의식이었다는데 동감합니다.
1년 후에 열린 이번 2005년 행사에서는 디지털 기술의 유비쿼터스 성향을 화두로 제시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분명 유비쿼터스적 성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TV나 인터넷 등 모든 디지털 기능들이 하나의 기기에 녹아드는 융합추세를 보이고 있고 또 이 서비스들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기기를 통해서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발전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트랜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이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아마 그길을 휴머니즘에서 찾아야 할 것이빈다.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봅시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낫게 만들까요?
기술의 발달을 건전한 지구촌의 발전으로 연결할 수 는 없을까요?
답을 찾기에 앞서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고자 합니다. 기술에 너무 현혹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우리는 기술이 제시하는 강력한 성능과 또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능의 향상에 너무 쉽게 압도됩니다. 하지만 명심합시다. 기술이나 이를 담은 기계는 결국 우리가 선택한 방식에 따라 작동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세상은 기술이 발달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술을 지구촌 차원에서 활용하면서 진정한 지구촌 차원의 문명이 형성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세상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지구촌은 급변하는 환경 속에 과거에 경험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기술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동안 우리가 현명하게 살아온 방식입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이 같은 흐름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스위스 바질에 있는 '인쇄박물관'에서 저는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접했습니다.
인쇄 기술에 관한 것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처음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질에서 접한 연구결과는 이를 의심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의 인쇄술 개발 이전에 교황사절단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교황사절단은 독특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금속활자의 그림과 설명도 같이 갖고 왔습니다. 구텐베르크가 그들로부터 값진 정보를 얻었음이 확실합니다.
서로 아주 친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1468)는 1453년 유럽에 인쇄술을 소개했습니다.
유럽 사회가 깜짝 놀랄 만한 획기적인 기술이었습니다. 하지만 구테베르크는 자신이 이 기술을 한국이라는 나라를 통해 배웠음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지금 디지털혁명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선두에 한국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새로운 정보의 혁명이 한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디지털기술은 놀라운 수준에 이르러 전 세계가 활판인쇄술에 이어 두 번 째로 도움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합니다.
(앨고어/커런트TV회장, 전 미국 부통령)
정말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위 미국정치인인 엘 고어의 말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1468)과의 이상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현재 신뢰의 상징이라고 하는 정치인 엘 고어가 2005년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포럼에서 한 발언을 보면 한반도“COREA”에서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고 확인까지 하고 있고 이어 로마 교황사절단이 한반도 “COREA”를 방문하여 금속활자기술을 배워 얻어온 기술을 가지고 1453년에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1468)이 금속활자를 만들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COREA”라고 하는 것은 한반도 코리아이겠는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코리아란 말인가?
로마 교황사절단이 한반도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 할 뿐이다.
이러한 자료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래 세계기독교약사와 중국 천주교 역사 자료를 옮겨보았다.
[1]세계기독교약사
1228~29 제6차 십자군 전쟁-예루살렘이 프레드릭 2세에 의해 회복됨(협상으로)
1239 프레드릭 2세가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파문됨
1244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됨
1245 제1차 리용공의회가 프레드릭 2세 황제를 공식적으로 폐위함
1248~54 루이9세 이집트와 팔레스틴에서 십자군 주도(제7차 십자군 전쟁)
1250 황제 프레드릭 2세 사망
1250 중앙아시아 위커족(Uighurs), 케라이트족(Keraitits), 몽골족(Mongols) 그리고 모든 주요종족들이 부분적으로 기독교화
1255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에서 교수하다(~1274)
1261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을 회복
1270 루이 9세, 튀니지에서 십자군을 주도하던 중 사망
1274 제2차 리용 공의회가 로마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일치를 선언-동방과 슬라브 지역 에서 거부
1281~1924 오토만 제국
1291 십자군 악코에서 철수(십자군전쟁 종료)-시리아 지역 마지막 십자군 요새인 프랑 크족 항구 아크레의 함락-이슬람의 확장
1295 몬테코르비노(Montecorvino)의 요한(John)이 중국 북경에 도착
몽고 왕조 이슬람으로 개종-동시리아 교회 파괴(앗시리아 교회는 쿤디스탄 산악 지역에 잔존)
1302 보니페이스 8세가 '우남상탐' 발표-교황의 보편적 통치, 시속권력에 대한 영적 권 위의 우위 선언
1303 아나그니 굴욕(교황 보니페이스 vs 프랑스필립왕)
1305 클레멘스 5세 교황으로 선출됨-교황청의 아비뇽 유수
1307 몬테코르비노의 요한( John of Montecorvino)이 북경의 대주교로 성성되다
1308 둔스 스코투스 사망
1309 바빌론의 유수(∼70년간)
1311-12 프랑스의 필립 4세, 교황 클레멘스 5세 압박, 성전기사수도회 해체
1314 ~단테의 '신곡' 완성
1324 파튜아의 마르실리우스의 '평화의 수로자'-교회는 일반 공의회에 의해 통치되고 교회의 재산은 국가의 의존한다.
1327~47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오캄의 윌리엄, 실재론 비판, 교황청 논박서 저술
1327 독일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비주의자 요한 에크하르트 사망
1347 유럽, 페스트로 인구 1/3 감소(∼1351)
1350 기독교의 세계적 현황: 그리스도 이후 44세대인 당시의 세계는 24.1%가 기독교 인이며, 28%가 복음화 되었으며, 성경은 28개 언어로 번역됨. 기독교의 지리적 확장이 급격히 쇠퇴
1365 페름(Perm)의 주교 스테반(Steaphan 1335-1396)이 러시아의 콤미-페름
(Komi-Perm)종족을 복음화
1368 중국 명조(Ming Dynasty)에 의해 기독교 폐지
1374 게르트 데 흐로테 회심(공동생활 형제단을 홀랜드의 데벤터레서 조직)
1375~82 존 위클리프가 성직자의 부와 수도원, 교황의 권위 비판
1378 서방교회의 대분열(~1417)-우르반 6세와 클레멘스 7세 두 명의 교황이 대립
1387 흐로테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더번스, 빈데샤임 수도원 설립
1413 얀 후스가 '교회론' 저술
1414~18 콘스탄스 공의회,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음을 천명
1415 얀 후스, 콘스탄스공의회에서 화형으로 순교, 마틴5세 교황 선출
1418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저술
1431~49 바질공의회
1433 쿠사의 니콜라스가 교회와 제국 개혁 프로그램을 제안
1438~9 페라라-플로렌스 공의회, 로마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일치선언-정교회에서는 거부
1440 자라 야콥 황제에 의한 에티오피아 교회 개혁
1450 트리포(Trifo)와 테오도릿(Theodorit)이 콜라라프족을 복음화
1453 동로마 멸망(by 이슬람) 오토만 투르크 족에 의한 콘스탄니노플 점령
[2]원나라의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와 천주교(13~14세기)
(1) 원나라의 종교정책은 비교적 관대하고 느슨했다. 중국에서 경교는 점점 부흥했는데, 야리가온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야리가온<也里可溫>은 몽고어로 <복음을 받드는 자>란 뜻이다.
(2) 천주교는 원나라시대에 또한 야리가온교라 불리워졌다. 당시 원나라와 로마 교황청간에 왕래가 빈번했고, 1245년에는 교황이 중국에 대사를 파견하여, 원나라의 정종(定宗)이 믿게 되었다.
(3) 1269년에는 원나라의 세조가 이탈리아에서 원나라에 상업 차 방문한 2명의 상인들을 통하여 교황에게 과학자와 종교 전문가 100명을 중국에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중국으로 오는 도중에 전쟁을 만났는데, 수도사들은 중도에 돌아가고, 상인들만 중국에 도착했다. 그 중 한 명의 상인의 아들이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이다.
(4) 1294년 요한 몬테코르비노(John Montecorvino)는 교황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대도(大都: 오늘날 북경)에 도착하여, 원나라 성조(成祖)의 환영을 받았고, 북경에 3개의 교회당을 세웠는데, 1305년에는 6,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5) 1300년에는 중국에 이미 3만 명의 신도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숭복사(崇福司)란 기구를 두어 종교 사무를 모두 관리하게 했다. [중국선교연구원]
자료 [1]세계기독교약사에서 연대별로 찾아보아도 한반도 교황사절단이야기는 없다,
자료 [2]원나라의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와 천주교 자료에도 중국이라고 하는 원나라에는 교황청에서 파견된 사실은 나오지만 우리나라 한반도에 교황사절단이 들어온 사실은 기록된 것이 없다.
어떻게 된 것일까?
엘고어가 말하기를 분명 교황사절단들이 한반도 고려“COREA”에 방문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분명 고려 주체가 한반도에 없었고 다른 역사의 고려라는 사실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아는 역사상식을 왜 우리는 몰라야 하고 확인 해줄 자료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래서 모르는 역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분명히 남아 있어야 할 거대한 “COREA”역사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역사 중에 한 가지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COREA”이고 “COREA”가 원나라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다.
물론 반도역사학자들은 입에 거품을 물일이지만 역사의 진실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금속활자 발명에 대한 구텐베르크(Gutenberg)와 철저하게 엮이고 있는 문제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서양에서는 금속활자 발명을 금속장인집안 출신인 구텐베르크 개인에게 나온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고 모든 기록에서 그가 금속활자를 만든 배경과 경위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나라가 아닌 그의 개인 성과로 돌리고 있다.
물론 서양인들의 개인주의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보지만 이것은 의도적으로 국가와 개인을 따로 분리 하여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발견하고서도 불경을 쓴 사람이 백운화상이라고 나오지만 실제 금속활자를 누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단체가 제작한 것인지에 대해서 일체 해석이 없고 함구하고 있다.
막연히 일반사람들은 금속활자 발명은 고려시대때 만든 것이란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당시 여건상 금속활자를 제조하는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서양인들은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때 만들어졌다고 하는 금속활자의 직지의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의 찬자(撰者)인 백운화상(白雲和尙, 1289-1374)은 백운이 그의 호이며, 법명(法名)은 경한(景閑)이고 고려 충렬왕 24(서기1289)년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1374)년에 여주(驪州)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한 사람이며 당시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1372)년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코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위의 자료에서 찬(撰)은 글을 짓다. 저술하다. 이기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이지 인쇄 할 수 있는 도구 금속활자를 만든 사람, 즉 철을 만드는 장인이 분명 아니다.
백운화상이 불심에 의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면 인쇄를 하는데 목판이 아닌 금속을 다듬는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서양과 다르게 인쇄를 할 수 있는 도구 금속활자를 정작 만든 사람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맹점이라면 맹점이다.
우리역사에 금속활자를 처음 사용한 예는 고려고종 21년(1234)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종때 재상 최윤의(崔允儀, 1102-1162)등이 지은 50권의 상정고금예문(古今詳定禮文)을 주자로 인쇄(鑄字印刷)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지만 정작 이 금속활자로 찍은 인쇄본이 없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발명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것이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실증주의 역사해석 방법에 따른 것이다.
기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도둑질 당한 것이니 어쩔 수가 없다.
이러한 큰 하자가 있기때문에 세계인들로부터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명확한 사실을 공히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무엇 때문인지 정작 제일 중요한 금속활자의 제조과정인데 이 부분은 완전 빠져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한다.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즉 반도역사 전체가 이유야 어떻든 간에 세계 역사학자들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 차릴 수 있다.
세계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우리나라 반도역사의 정체성에 대해서 낱낱이 알고 있다는 것이고 어떤 근거를 가지고 만든 것인가에 대한 세세한 것 까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그들 생각은 지금 반도역사는 죽다 깨어나도 과거 영광의 COREA 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느정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판단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반도역사가 스스로 세계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Exposition universelle 1900]
금속활자인쇄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프랑스로 넘어간 구체적인 기록을 보면 이 직지는 원나라(고려이다)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인데 중심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것은 상하권 중 하권 1책뿐인데, 1886년 한불수교가 체결되면서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1888년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인쇄출판업자의 아들이었던 그는 스스로도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역관의 도움 없이도 한문서적들을 읽을 정도로 한학에 능통했으며, 고서적 수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또한 이 사람은 조선의 궁중 무희이자 관기로써 조선 최초의 근대화 여성 리진(Lee Jin, 李眞)과 결혼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동양의 학문과 책에 관심이 많았던 플랑시는 1, 2차 재임기간동안 약 1500권이 넘는 한국의 책들을 수집했고 그는 단순히 그 책들을 수집만 한 것이 아니라, 1890년 조선에 부임해 온 그의 부하 외교관이자 대학 후배인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1865-1935)과 함께 조선의 책들을 조사, 연구,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 현재까지도 한국 서지학의 금자탑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국서지(韓國書誌:1894-1896)를 펴내게 된다.
서양입장에서 볼 때 철저하게 조선분석이 완료 되었던 것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이렇게 한국 책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플랑시가 구매한 것이었다.
그는 직지를 손에 넣고 이것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책 표지에 “이 책은 1377년 한국에서 인쇄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금속활자 인쇄물이다”라고 펜으로 써 놓았다 하고 이 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1900년에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의 대한제국관에 전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플랑시는 이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성공적인 전시를 위해 개인적으로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 한다.
이것은 조선인여인과 결혼했다고 하는 친밀성 보다 무언가 다른 국가관이 있었음을 알게 할 정도의 적극적인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사람이 직지를 파리만국 박람회에서 알리고 대한제국의 것이라고 도모하지 않았다면 고려가 만든 금속활자란 사실 조차 숨겨질 뻔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한반도 고려인과 인종이 다른 쿠텐베르크라는 실체가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플랑시는 서양 즉 프랑스에 애국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줄기인 대한제국에 크나 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 프랑스인을 어쩌면 우리와 인종이 다른 서양 "COREA", 대륙조선인으로 볼 소지가 많은 것이다.
비록 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프랑스에 있지만 어쨌던 현재 2001년 9월 4일에 조선"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까지 되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에도 알 수 있듯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현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틀림 없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교과서, 백과사전, 인터넷에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의 42행 성서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잘못되어 소개하고 있고, 또 세계인에게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보다 구텐베르크(Gutenberg)가 널리 소개되어 있는 실정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유명 교과서인 글렌코/맥그로-힐(Glencoe/McGraw-hill),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출판사의 세계역사(World History)를 보면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 및 중국의 인쇄본만 소개하고 있고 이외에도 아시아 유럽 등 각 나라의 주요 교과서를 보더라도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와 중국과 일본의 인쇄본은 자세히 소개하고 있지만 한국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크직지세계화사이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금속활자 발명에 대한 구텐베르크(Gutenberg)와 이상하게 엮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과연 구텐베르크(Gutenberg)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1468)는 약 1453년에 금속 활판 인쇄술을 발명한 독일의 금(金) 세공업자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사실이지만 그의 진정한 업적은 이런 기술과 유성잉크, 목판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제작과정을 들었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고,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鑄造)를 채용하였다는 것이 우리가 내놓을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분명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금속기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엘 고어 이야기는 고려에서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금속활자를 만든 사람이 분명 고려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 기록으로는 금속활자를 만든 사람으로서 구텐베르크 이외 등장한 인물이 동서양에 없다.
분명 고려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데 고려의 금속활자 만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근세기 역사판짜기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앞장을 선 영국에 있는 엑슬리(EXLEY)출판사에서 만든 구텐베르크 전기에 의하면, 구텐베르크는 1394년 아니면 1398년에 마인츠(Mainz)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조차도 불분명하다.
그가 태어난 마인츠(Mainz)는 BC14~9세기동안 켈트족(Celts)의 거주지였으며, 로마인의 침략 후 모군티아쿰(Mogontiacum, 켈트족의 신 중 하나의 이름)이라는 군사 막사를 세웠다. 그 후 로마인이 떠난 뒤에 451년경 게르마니아(Germania) 수도원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6세기에 시가지가 완성되었다. 군사적으로 작전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상업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과 만하임(Mannheim)에 밀려 거의 발전하지 못했지만 라인 강의 포도주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1118년 자치권을 취득했고, 1244년 완벽하게 자유도시가 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자유시, 자유주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켈트족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인 켈트어파를 쓰는 유럽 게르만 민족을 가리킨다.
기원전 7세기경까지는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 씨족사회(氏族社會)를 형성하였다.
스키타이 인(Scythia)이 실롱스크(Silesia), 모라바(Moravia)와 체히(Čechy, Bohemia)를 침입하여 원주민들이 상당히 약화되자 이들을 시기하던 켈트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체히, 모라바, 그리고 실롱스크 일부와 상류 지역의 비스와 강(Vistula)유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서 켈트족의 "위대한 팽창"이 시작되는데, 이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격렬한 봉기를 야기시켰다.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은 로마를 공략하고 전 국가를 공략하려고 위협하였다.
이시기에 훈족(Huns)의 발흥 난습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시기와 맞물린다.
훈족(Huns)의 활동
352년~354년 - 알라니족(阿蘭, Alans, Alani, Alauni, Halani)과 전쟁을 벌이다.
알라니족 또는 알란족은 흑해 연안 북동쪽의 스텝지역에서 기원한 이란계 유목민
371년 - 동고트 왕국을 실질적으로 차지하다.
375년 - 동고트족을 남쪽으로 몰아내다.
376년 - 150년간 다키아 일부를 지배하고 있던 서고트족이 훈족의 압력 하에서 로마 제국에 도나우 강 남쪽으로 건너갈 것을 요청, 수락되다.
378년 - 트라키아를 공격하다.
410년 - 아틸라의 탄생
422년 - 테오도시우스 2세가 평화를 대가로 훈족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인정하다.
423년 - 훈족 4만여 명이 로마군에 용병으로 들어가다.
430년 - 비잔티움 제국이 금 113킬로그램을 조공으로 바치다.
432년 - 아틸라가 왕이 되다.
441년경 -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다.
451년 -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나 카달라우눔의 전투에서 패배, 퇴각하다.
452년 - 동로마 제국을 재침하나 교황 레오 1세의 중재로 물러나다.
453년 - 아틸라의 사망
이후 판노니아를 침입한 아바르족, 마쟈르족 등과 섞여 헝가리를 이루다. 나머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중앙유럽 등지에서 혼혈화되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391-413).의 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2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유럽 점령과도 맞물리는 시기이다.
그리고 켈트족들은 또 소아시아를 뒤흔들고, 일부 켈트 부족들은 그 곳에서 영구 거주지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후일 파울로스(Paul the Apostle)가 서간(Epistle to the Galatians)을 써 보냈던 갈라티아인이 되기도 하였다.
갈라디아 사람은 갈리아사람(Gaul)들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소아시아 지역을 정복하고 살고 있었다
갈리아, 골 지역에 근거한 켈트족은 정통적으로 다신교(多神敎)를 믿는 민족이다.
이를 영어자료에 켈틱 폴리티이즘(Celtic polytheism)이라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들을 그냥 이교도라 불렀다 한다.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와도 연결된다.
이 갈리아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이란 사실은 여러가지로 삼한 역사와 연계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어쩌면 "갈리아(Gallia)", "골(Gaul)"과 “Caule”, “Cauly”, “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 연관성을 제기해 본다.
켈트족(Celts)의 거주지이었던 마인츠(Mainz)는 1254년에 강력한 라인(Rhine)지방 도시 연맹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1440년에는 여기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던 것이다.
독일을 무대로 신교(改新敎,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 30년전쟁(Thirty Years' War:1618-1648)중 스웨덴과 프랑스에 점령되었던 굴곡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다 1792년에는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중 재점령했다.
그의 집안은 하급 귀족으로 마인츠를 지배하는 대주교 밑에서 돈을 찍어내는 금속 세공 관리로 일했기 때문에, 구텐베르크는 주물, 압축 등의 금속 세공 기술과 지식을 익혔다.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집안환경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교회와 세속 권력 간의 헤게모니(hegemony:지배권)다툼이 있었는데, 다툼에서 지면 추방되었다한다.
구세력과 신세력의 경합이라고 볼 수 있다.
1411년에 구텐베르크의 부친도 시민들에 의해 추방되어 슈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하였다.
고향에서 쫓겨난 1428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알자스주(Alsace, 州) 바랭현(Bas-Rhin, 縣)의 주도(主都)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전기 작가들은 그의 직업을 상인, 장인 등으로 추정한다.
다시 금속활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444년경 귀향하였다.
그리고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서, 즉 구텐베르크 성서(Gutenberg Bible)를 인쇄하였다.
이것이 구텐베르크 성경(Gutenberg Bible) 또는 42줄 성경, 마자린 성경(Mazarin)이라 하며 15세기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라틴어 불가타(Vulgata)성경이다.
이때 1453년 코라이(korai)라고 판단되는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고려연합제국인 오스만제국 메흐메트2세 에게 함락이 되면서 비잔틴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삼한 역사로 보았을 때 통일(United corea)인 것이다.
솔직히 이때가 변혁기라고 생각ehls다.
그리스가 삼한역사와 겹쳐지는 부분은 본 블로그에서 여러각도로 진단하였다.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도로명으로 도시전역에 나타는 코라이(korai)는 전통적 삼한의 역사 이름이다.
삼한은 고조선 부터 진한, 마한, 변한을 뿌리를 두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나눠지는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이렇게 많은 나라가 존속했는데 "COREA" 하나의 이름이란 사실도 어찌 보면 잘못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많은 나라가 삼한의 이름으로 존속했다면 삼한을 여러각도에서 다르게 칭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Caule”, “Cauly”, “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등으로 불리었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거나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라고 본다.
대체적으로 유럽전역에 삼한의 역사가 깊게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종교개혁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구교와 신교의 충돌이라고 하지만 실제 삼한세력과 그와 반대되는 세력간에 지배력 다툼이었다고 본다면 고려 즉 삼한사람인 구텐베르크의 부친은 시민들에게 쫓겨 났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구텐베르크의 부친과 그의 아들은 1453년까지 동유럽전역에 존속했다고 여겨지는 삼한(korai)세력의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비진틴제국이 멸망으로 1453년 그리스 북북 코라이 세력들이 붕괴되면서 빈공간으로 남았을 때 비로소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 神聖羅馬帝國:962–1806)이 그 영역을 차지했고 신세력의 왕조가 등장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with haloes 1400-1806]
이 제국은 비잔티제국과 상관 없이 중세에서 근대 초까지 이어진 중부유럽 나라들의 정치 연방체라고 하는 전통적인 삼한(korai)세력들이 오스만제국(고려통합)에 패하고 통합(united)되면서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년)으로 나뉜 동쪽에서 독일왕이 마자르족(Magyar)을 격퇴한 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받아 신성 로마 제국 건국을 선포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독일제국인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인쇄한 라틴어 불가타(Vulgata)성경은 왠지 고려불경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동양한어로 불경이라면 서양어 특히 라틴어로는 마자린성경(Mazarin)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미친다.
불가타(Vulgata) 또는 새 라틴어 성경은 5세기 초에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이른다.
382년 교황 다마소 1세(Damasus I:366-384)는 옛 라틴어 번역을 개선하고자, 카토릭 성인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5-419) 에게 성경을 번역할 것을 명령한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Ioannes II, 재위: 533-535)는 불가타를 개정한 새 대중 라틴말 성경(라틴어: Bibliorum Sacrorum nova vulgata editio)을 발행하였다. 이 노바불가타(Nova Vulgata)가 현재 로마가톨릭 라틴어 전례에서 사용되는 공식 성경이다. 한편 구약 부분은 히브리어(Hebrew language) 타나크(Tanakh)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이며, 이전에는 70인 역에서 번역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인 정본이 되었고, 그래서 "번역된 출판"이라는 뜻의 불가타(versio vulgata)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위키]
구텐베르크는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신약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 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발명품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이 사라지고 없어 확인 할 수 없다 하여도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의 태생 자체가 고려시대의 금속 활자 탄생과정과 연계되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가 기록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금속활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고려인이 아닌 구텐베르크가 철저하게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다.
오해소지가 있겠지만 불경이라는 것과 성경이라는 것을 같이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섣불리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거대한 한 개의 역사를 두 개로 나누면서 고려와 독일로 분리 한 것이고 종교까지 분리한 것이라고 감히 내다 볼 수 있는 일이다.
비약이 지니친 것인지 모르지만 추측은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고려가 연합국이었다면 실제 지방자치제에 의한 독립적인 왕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독일도 그 구성원으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표장의 독수리 문양에서 가슴과 날개의 달린 8개의 괘는 이러한 것은 잘 나타내고 있는 상징일 수 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문장으로 본 동질?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4
이것이 바로 정리 되었다고 보는 “COREA”라고 본다.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 이러한 금속활자가 주는 가치와 역사흐름의 영향력이다.
금속활자의 가치를 볼 때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나 불가타(Vulgata)성경이나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인쇄하여, 성직자와 지식인들만 읽을 수 있었던 경과 성서를 대중화시켰다는 것이고 당시 경이나 성서를 비롯한 책들은 전부 손으로 쓴 필사본이라 수량이 적어서 가격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어 대중화가 못되었지만,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책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과히 혁명이라고 할 정도의 전도인 것이다.
이것은 이치적으로 따져 고려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의 기존세력과의 충돌시 가장 가치를 읽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가치를 노리고 제작 하였을 것이란 추리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 두역사를 나눔에 있어 시기적인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만 볼 때 고려는 1377년이고 독일은 1453년이란 차이다.
어쨌던 이 금속활자 발명은 고려나 유럽 모두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인데 유럽쪽에는 역사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바로 종교개혁이고 이어 터지는 프랑스대혁명과 결부된다는 점이다.
모두 기득권과의 싸움에서 신진세력들이 이기는 역사이다.
종교개혁과정에서 보면 구교와 각을 세우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 가톨릭의 대사(大赦,Indulgentia)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The Castle church in Wittenberg)의 문에 붙였다 한다. 이 글은 활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두 주 만에 독일 전역에,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대사를 비판하는 논리를 널리 퍼트려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고려는 어떤 큰 방향을 일으켰는가?
혁명에 가깝게 나타나는 뚜렷한 역사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 기록에도 그러한 변화는 없다.
“Caule”, “Cauly”, “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 이처럼 수많은 지칭으로 불리었던 고려에서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낀다.
결국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금속 장인 구텐베르크와의 관계는 밀접한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고려와 금속활자 구텐베르크, 고려와 독일, 불경과 성경, 고려한어와 라틴어, 이 모든 것은 정말로 다를 수 있고 생각에 따라 같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하게 있다는 식의 애매한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일어난 서유럽 문화운동인 르네상스(Renaissance)와 이어 터진 부패한 종교의 권위를 타파한다는 종교개혁(1521-1640)그리고 프랑스대혁명(1789-1794)에 이르기까지 혼란의 역사와 금속활자 발명이 여러가지 조건상 맥을 같이하지만 실제 우리가 아는 것은 거대한 "COREA" 삼한(korai)의 역사가 완벽하게 빠진 역사만 알고 있을 뿐이다.
끝으로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세계사강(The Outline of History, 世界史綱)을 출판했고,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것을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만들었는데 이 책의 맨 첫 장에 나온 글에서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관은 단지 동양역사를 앞지른 근세사만 역사이기를 강조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란 모호한 의미가 내포된 주장을 우리는 되새김질을 할 필요성이 있지 않는가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 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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