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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땅은 신라 땅이다?
글쓴이:한부울
1.우마이야시대 신라
2 나침반 이야기, 장보고 이야기
3.혼천의 이야기와 포르투갈
4.위험한 항로와 대항해시대
5.근세기에 이루어진 지명이동과 이입
6.용(龍, dragon)상징 가우리(caule)제국과 끝말
1.우마이야왕조와 신라
일단 스페인과 신라는 밀접하다는 말 부터 먼저하고 시작하기로 한다.
1254년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여행가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1220-1293)의 ‘몽골제국 여행기’에 나오는 한국인의 묘사를 보면
“체구가 작고 스페인사람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들이 사제들처럼 갓을 쓰고 다니는데 검은 니스를 칠해 뻣뻣해진 외올베로 만든 갓들은 어찌나 윤을 냈는지 햇빛에 반사되면 마치 거울이나 잘 닦은 군모처럼 반짝인다.” 하였다.
이 프랑스인이 고려인을 보았다는 시기가 1254년이라면 고려연방제국 고종(高宗, 1192-1259, 재위1213-1259년)때인데 하필 스페인사람들을 비교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고려 사람들의 모습이 스페인사람처럼 비슷했다고 여겨졌을 것이고 또 하나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백인종, 황인종 따위를 나눠 구분 지칭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분명코 알아야 할 것은 근세기 서양위주 우위의 역사가 탄생하면서 백색우월주의가 있고 그러한 우월주의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동양과 서양을 양분하였다고 볼 때 당시의 사회상황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그 당시 동서양 사건 발생을 보면 큰 사건으로 동양에서는 몽골의 고려6차 침입(Mongol invasions of Korea)이 있었던 해로서 영어자료에 보면 몽골인들이 고려인들을 206,800명이나 포로로 잡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The Mongols enslave 200,000 Koreans and take them away.
이것은 늘 하는 이야기지만 제1차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 1914-1918)이 끝나고 만들어진 역사일뿐이다.
이 고려침공사건은 나라 대 나라의 침략이 아니라 고려연방제국내 불만세력, 또는 반란세력, 쿠데타 세력들에 의한 내습(invasions)이라고 진단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고려가 아닌 유라시아 아시아전역에 있었던 고려는 연방제국으로 늘 반대세력에 의한 반란은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소이다.
이 사건 이외 유럽에 있었던 사건으로 고려가 접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영역인 유라시아 지금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쪽 그리스 국경 근처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같은 년도 1254년에 아드리아노플 전쟁(Battle of Adrianople: The Byzantines defeat Bulgaria)이 있었다.
이 아드리아노플(Adrianople)도시를 우스쿠다마(Uskudama)라고도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제2차 불가리아연합제국(Second Bulgarian Empire, 1185–1396)과 니케아제국의 황제 테오도르 2세(Theodore II Laskaris, 1222-1258, 재위1221-1254)간에 전쟁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것 역시 비잔틴제국의 황제 테오도르 2세가 속절없이 죽는 상황과 년도가 일치한다.
즉 침략한 세력이 공멸하는 경우이다.
이 전쟁이 고려를 상대로 한 몽골내란 내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더 따져 봐야 하지만 이 전쟁과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제7차 십자군원정(1248-1249)인데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1171-1341)의 5대 술탄 알 카밀(al-Malik, 1180-1238)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2천 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자 1248년 오랫동안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프랑스의 성왕 루이(Louis IX ,1214–1270, 재위:1226-1270)가 원정을 하여 이듬해 이집트 두미아트주(州) 다미에타(Damietta)를 정복하였으나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의 살라딘 2세(As-Salih Ayyub,1201-1249,재위:1204-1249)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패하고 1250년 그 자신도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한다.
결국 루이는 1254년까지 이집트에 머물면서 몽골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실패했다.
이 제7차 십자군원정이 이상하게 고몽 전쟁 아니면 내습한 년도와 일치하며 니케아제국 황제 테오도르와 같은 신세에 쳐하게 된다.
이 모두 침략한 세력이 실패하는 꼴을 한 것이다.
십자군이 실패한 것과 니케아제국이 실패한 사실은 몽골내습이 고려연방제국에 의해 진정되거나 몽골반란군이 실패한 사실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생각 해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군의 극복대상인 고려연방제국을 치기 위하여 루이가 반(反) 고려 세력인 몽골등과 반란 음모를 도모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들을 들어 고려가 한반도에 쳐 박혀 있었던 하찮고 나약한 존재라고 하기엔 실제 나타나는 역사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너무 판이하게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고려연방제국이 유라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영역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의 주 세력이 있었던 곳에서 스페인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근거리에 존재하였다는 것이며 그래서 고려와 스페인 사람 생김새를 비교 하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을수 없다.
[The Umayyad Caliphate 661–750]
앞서 본 블로그에서 다마스쿠스 칼리프 왕조(Caliphs of Damascus) 무아위야 1세(Muawiyah I ibn Abi Sufyan, 661– 680)가 바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이라 한 사실이 있다.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
진지왕 손자 김용춘 아들 신라 태종(太宗)무열왕(武烈王, 654-661)은 정통 칼리파시대(The Rightly Guided Caliphs or The Righteous Caliphs, 632~661)의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 656-661)라 하였으며 무열왕 아들 법민(法敏) 문무왕(文武王, 661-681)은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의 시조 다마스쿠스정권(Caliphs of Damascus) 무아위야 1세(Muawiyah I ibn Abi Sufyan, 661–680)라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년도만 비슷한 것이라 아니라 행적 역시 똑 같다고 볼 수 있어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신라(新羅, silla, shila, silah)는 우마이야 왕조의 영역에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중해 전 연안을 영역으로 한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拜火教)를 국교로 하던 사산왕조(Sassanid Empire, 224–651)를 끌어내리고 문무왕 시대 때 마침내 우마이야 왕조로 아랍과 유럽을 통일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지금 근대사가 전하는 우마이야 왕조의 영역은 근세기에 서양사학자들에 의해 축소되었을 것이란 판단도 함께 할 수 있다.
2 나침반 이야기, 장보고 이야기
이 나침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자석을 우리는 지남철(指南鐵)이라 하는데 나침반을 만든 것을 보면 당시 자석을 가만히 두면 남(南)과 북(北)쪽을 가르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을 기초로 하여 나침반을 만들었다.
나침반(羅針盤)은 자석의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멀리 항해하는데 많이 이용되었다.
그런데 나침반은 문무왕 9년(669)1월에 중국 당(唐)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신나침반(新羅針盤) 얻어간 사실이 있고 동년 5월에는 신라(新羅)에서 신나침반(新羅針盤) 두 상자를 당(唐)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문무왕 12년(672년) 9월에 신나침반(新羅針盤) 1,500개를 당(唐)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미 신라(新羅, slla)가 신라침반(新羅針盤)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에서 결국 문무왕이 칼리프인 우마이야 왕조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 나침반이 마침내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 강력한 대제국 다마스쿠스 왕조를 태동시킨 이기(利器) 즉 보물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라가 만든 나침반이지만 근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는 문헌에 나오는 중국의 나침반은 송(宋)나라(960-1127)시대에 심괄(沈括:1031-1095)이라는 학자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그래봐야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설명이다.
바다를 항해할 때 자침을 사용한 것은 심괄(沈括, 1031-1095)시대 이후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미 신라인들이 이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사람들이 지중해 전 해안을 자유자재로 왕래하고 있었고 지중해연안을 영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니 통일신라(新羅)의 무장 출신으로 신라의 해상 호족이며 해상왕(海商王)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는 장보고(張保皐, 弓福, 弓巴, 788-841, 846)가 청해진(淸海鎭)를 중심으로 당, 일본, 동남아시아, 서역(아랍)의 여러 나라들과 해상 교역을 했다는데 이때 원양항해를 하였던 신라의 선박들은 나침반을 장치하고 항해를 하였다고 볼 수 있고 더불어 장보고가 설치했다는 청해진도 지중해 연안에서 찾아 할 것이라고 본다.
이후 가우리(caule)라고 판단되는 중국을 왕래하던 아랍(Arab, 신라를 통칭해서 불렀을 수도 있다)의 선원이 자침을 항해에 사용하는 기술을 유럽에 전달했다는 것이며 1302년 이탈리아 사람에 의해 오늘날의 자기 나침반을 제작하기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그래봐야 이 역시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설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15세기 서양인들이 대항해시대라고 떠들 때 이미 삼한 가우리(caule)에서는 세계 모든 항로를 분석하고 개척했을 가능성이 읽을 수가 있다.
이 나침반이 모든 것을 가감없이 설명해주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당(唐)이나 중국(中國)은 가우리(caule)를 지칭했거나 하지 지금의 지나 대륙에 있는 중공을 지칭한 것은 분명 아니며 이런 혼란도 근세기에 인위적으로 역사사실을 조작하거나 무엇을 노리는 세력들로부터 교묘하게 부첨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일단 신라인들은 지중해연안을 제집 드나들듯이 빈번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였다고 생각되기에 충분하다.
작가 서현우님 “바다의 한국사” 글에서 보면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중상주의를 앞세운 절대주의 중세유럽의 확장, 그것에 기초하여 전개된 산업혁명, 나아가 근대제국주의의 등장이 낳은 저들의 오만과 독선, 폭력은 그 저변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역사상 ‘최초’라는 우월주의 관념이 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뉴(새로운, 新, new)란 원초적인 욕망에서 질펀하게 들어나는 역사음모냄새이다.
새로운을 고집한다면 기존 것을 파괴하거나 들어내야 하는 이치이다.
근세기 역사가 한치도 어김없이 이를 추종했다는 사실이다.
또 그는 영국의 연구자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2001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심포지엄과 그 이듬해 출판하여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1360-1424,재위1402-1424) 시기의 정화(鄭和, Ma Sanbao 馬三寶, Hajji Mahmud Shamsuddin, 1371-1434)선단이 유럽에 훨씬 앞선 시기에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이미 조선(朝鮮)에서는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1402)가 제작되어 있었고 그들이 말하는 중국에는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 1389)와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1328-1392)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조선에서 김사형·이무·이회등이 그렸다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1402)는 정종1년(1399)에 김사형(金士衡)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의 이택민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 1330)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 1328)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반도 사관일 뿐이다.
또한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그 사본만이 일본의 용곡대학(龍谷大學)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왜 원본이 없을까?
원본은 있어도 내 놓지 못할 이유가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신뢰할 수 없는 반도역사의 폐단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형편임에도 서양인들은 대항해시대라고 스스로 부끄럼 없이 떠든다.
기존 항로를 답사한 흔적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인데 말이다.
칸티노 세계지도(현존하는 최초의 세계지도)
The Cantino planisphere of 1502 shows the line of the Treaty of Tordesillas.
위 칸티노(Cantino Planisphere, 1502) 세계지도가 유럽 서구인의 최초의 세계지도라 한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모데나시(Modena)의 에스텐세(Estense)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이 지도역시 포르투갈이 만든 최고의 현존하는 세계지도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분적 구도로 이야기 하고 있는 용을 상징으로 하는 제국에서 이미 그려진 세계지도인 것이다.
또 그가 특이하게 주장하는 것에서 보면
“1410년 중반 700여 년 지속된 아랍(무어인Moors, 摩爾人, 毛利人, 毛罗人,1062-1492)의 통치가 황혼에 접어든 이베리아(Iberia)남단에 나타난 이방인 즉 신라(新羅)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신분은 소공(梳工-키잡이), 도장(都匠-기사장), 선공(船工-목공), 단공(鍛工-대장장이), 번장(番匠-도목공), 암해자(暗海者-항해사) 등으로 뭉친 해상결사의 일원이었다. 또한 그들이 보여준 세련된 나침반(新羅針盤), 항해용 물시계(동호:銅壺)등의 물건은 그들보다 우수한 것들이었으며 공개하지 않았던 암해도(暗海圖)와 양갱(洋更-항법서)만은 비밀로 취급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보면 신라인들은 지금 이베리아 반도를 거침없이 드나 들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위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신라인들이 지중해를 마음대로 들락거렸던 것이다.
실제 이방인인가 하는 문제는 차후에 논해야 할 이야기다.
하지만 모든 환경적인 요소가 신라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틀림이 없으며 역사사실에 의한 반전(反轉)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 사실을 보면 유럽인들은 신라인들의 항해술보다 분명 뒤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이 무어(Moors)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어로 검다, 아주 어둡다를 뜻하는 마우로스(Mauros)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신라인들도 당시 까무잡잡하다 했으니 이와 같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거대한 사산왕조(Sassanid Empire, 224–651)가 망하고 이어 받은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 역시 아랍세력에 밀려나면서 쫓긴 우마이야 왕조 일족인 아브드알 라흐만(Abd ar-Rahman, 731-788,재위 756-788)은 죽음을 피해 난민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 에스파냐의 코르도바(Córdoba)에 피신하여 왕조를 건국하는데 이가 곧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phate of Córdoba, 929–1031)이며 서(西)칼리프국이라 하는 후 우마이야 왕조이다.
이후 아랍 또는 이슬람계 무어인들의 알모라비드(al-Moravaids1062-1232)왕조가 이어받고 그라나다왕조((Nasrid Dynasty(1232-1492)가 이어 받은 것으로 끝나는 역사가 있다.
이 우마이야왕조(Umayyad Caliphate)는 결국 신라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베리아반도에 나타난 신라인이라 하여 이방인이라고 할 것도 없으며 오히려 거주민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쯤하면 서현우님이 기술한 무어인과 함께 들어온 이방인은 신라인이라는 정체를 어느정도 짐작 할 수 있어진다.
그들이 바로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오래전에 도착했거나 정착한 신라인들인 것이다.
그러니 스페인과 신라인이 밀접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3.혼천의 이야기와 포르투갈
[천문학 연대표]
1395년 조선 태조,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완성하다.
1433년 조선 혼천의(渾天儀) 만듦
1464년 쿠자누스, 천동설을 의심하다.
1473년 코페르니쿠스가 출생하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De revolutionibus orbium coestium (천체궤도의 진화에 관하여)가 출판되다.
우리는 여기서 포르투갈의 항해술이 스페인 보다 앞서다는 사실에서 관찰 할 것이 있다.
바로 천문학 분야이다.
이 연대표를 보면 이미 1395년 조선태조 때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완성하면서부터 세계천문학은 비로소 개척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이 또한 조선 천문과학은 독보적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알 수없는 바다를 항해하는데 지리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천문학을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투갈 국가 상징인 문장을 보면 이 천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가 도안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천의(渾天儀)는 천체관측 기구로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린는데 해와 달, 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혼천의(渾天儀) 역시 우리 나라에서는 문헌상으로는 1433년 세종 15년 6월 9일에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제작한 것으로 나온다.
서양에서 대항해시대라고 떠들때 이미 조선에서는 해와 달, 별을 볼 수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작성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세종 60권, 15년(1433 계축)6월 9일(경인)
정초·박연·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리다
○鄭招、朴堧、金鎭等, 進新造渾天儀。
포르투갈 문장을 보면 국장 가운데에는 노란색 혼천의가 그려져 있으며, 혼천의 안에는 빨간색 방패가 그려져 있다.
혼천의는 대항해 시대의 천체관측 기구이자 항해 도구로, 포르투갈 선인들의 측량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이룩한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훨씬 앞서 나타나고 있는 위의 기록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1464년에 발표된 독일의 추기경·수학자·철학자로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의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별이 돌고 있다고 본 개념 천동설(天動說, geocentric theory)에 대한 의문은 무엇이고 1543년에 출간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에서 태양중심설(heliocentricism)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이러한 천동설이나 지동설을 뛰어넘는 천문학 기술을 조선에서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의 국가 문장에 나타나는 혼천의 상징조차도 천문학에선 조선에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대의 천문학은 누구로 부터 나온 것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파악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다.
혼천시계 340년 만에 복원-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9393
An armillary sphere in a painting by Sandro Botticelli, c. 1480.
4.위험한 항로와 대항해시대
서구 유럽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항해시대
그들에게 낙후한 역사에 대해 조금의 꼼수라도 없었을까?
위에서 조선의 천문학 수준과 서양인들이 떠들었던 천문학 정도에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실제 이런 천문학이나 신라의 발명품인 나침반의 기구를 포함한 항해 기술면에서 따져 그들이 항해한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숨김이 없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그들이 자랑스럽게 꼽고 있는 인물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을 시대별로 열거하면
포르투갈 리스본(Lisbon) 출신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가 있고 다음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가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한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출신인 신대륙 초기 탐험자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와 포르투갈의 남서부 시네스(Sines)출신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 그리고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출신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이 등장한다.
이들은 출생년도 별로 따져보아도 거의 동시대(1450-1480)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 지리학 항해기술은 거의 같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제일 주목해야 할 사람이 항로개척자 바로 디아스(Diaz)이다.
당시 포르투갈 주앙 2세(John II of Portugal, 1455-1495,재위:1481-1495)로부터 전설적인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Ethiopia)를 발견할 것을 명령받아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계획하였고 마침내 1487년 배 3척으로 떠났는데 한척은 잃고 2척의 배로 1488년 아프리카 남단(?)에 도달하였다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록에 따르면 1488년 말 폭풍으로 거의 2주간 표류하다가 폭풍 때문에(?) 희망봉을 돌았으나 선원들이 고생 끝에 폭동을 일으킬 분위기가 되자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왔다 한다.
위에 설명은 어쨌던 폭풍이 심하게 불어 어부지리로 난관을 넘었지만 선원들의 폭동을 염려하여 난관을 극복한 곳을 다시 되돌아 왔다고 하는 다소 어이없는 이야기가 된다.
항해술의 기본인 항법을 모르고 간 그들이 되돌아오는 길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을 성 싶은데 어쨌던 돌아왔단다. 폭풍이 그들을 막은 곳을 “폭풍의 곶”이라 이름을 지었다하는데 그곳이 지금의 희망봉 케이프타운이란다.
이후 그는 무역상인의 신분으로 1497년 인도 항로를 처음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를 따라 서아프리카대륙에서 떨어진 카보베르데(Cape Verde)제도에 이르렀고 1500년 포르투갈 출신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과 함께 브라질에의 항해에 동행하였다가 폭풍으로 조난당하여 사망하였다 하는 다소 애석한 이야기다.
일단 그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가 갈 길을 연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 그렇다면 그들이 극복해야 할 곳인 서아프리카 대서양의 환경은 어떠한가 보자.
서아프리카 남단 한류(寒流) 벵겔라해류(benguela current)와 난류(暖流) 아굴라스해류(agulhas current)가 만나는 곳을 지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다.
해류는 그 온도에 따라 따뜻한 흐름인 '난류'(暖流, warm current)와 차가운 흐름인 '한류(寒流, cold current)'로 나누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저위도 지방에서 비롯된 것을 난류라 하는데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표층해류 중 적도 부근에서 극 방향으로 흐르는 따뜻한 해류를 난류라고 부르며 적도 지방의 뜨거운 열을 극지방으로 옮겨 따뜻하게 만들어 주며 반면 고위도 지방에서 비롯된 해류를 한류라고 부르고 보통 극에서 적도로 흐르는데 뜨거운 여름 차가운 얼음이 체온을 식혀주는 것처럼 극에서 출발한 한류는 뜨거운 적도 부근의 열을 식혀주는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대륙 남반구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고온다습한 남동풍이 강하기 때문에 연안에서는 찬 해수가 아래에서 위로 표층해수를 제치고 올라오는 현상 용승(湧昇)이 일어나 표면 수온이 몹시 낮아짐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서부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며 3노트(3 kn, 5.55 km)에 달하는 유속으로 북상하는 한류(寒流) 벵겔라해류(benguela current)가 막고 있는 항로이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는 이곳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역시 이 항로에서 극복하는 과정은 녹녹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이 이 대항해시대에서 자랑으로 꼽는 것은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가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메 있어 그런 악조건을 뚫고 순조롭게(?)우회(右回)하여 1497-1499, 1502-1503, 1524, 3차례 인도를 항로를 개척하였다는 사실과 이후 1519년 서쪽 항로로 택한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이 스페인 산루칼(Sanlucar)항을 떠나 브라질 동해를 거쳐 남행하여 역시 유속(流速:약 2kn, 3.7km)이 매우 빠른 남아메리카 남단해상,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혼곶해류(cape horn current)가 동쪽으로 휘돌아 이어 북상하면서 남아프리카대륙 남단과 포클랜드제도사이를 거칠게 지나는 한류(寒流) 말비나스(Malvinas) 또는 포클랜드해류(Falkland Current)를 적당히 피해 좌회(左回)하여 태평양으로 들어 설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양대 절대절명 위험한 남단 곶을 넘어 항로를 개척했다는 것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마젤란은 이러한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남단으로 휘 돌지 못하고 칠레의 남부와 티에라델푸에고(Isla Grande de Tierra del Fuego) 섬의 북쪽 사이에 있는 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들어갔다고 둘러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의심을 하기 나름이지만 1402년까지 스페인의 항해술이 신라인보다 뒤 떨어져 있었다고 보았을 때 이 때는 그들이 이러한 기술을 극복했었는가 의문이 안들 수가 없다.
만약 이러한 항로를 개척했다면 그 항해 기술은 누구로 부터 나온 것일까?
무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되며 먹구름이 가득한 암흑 같은 환경에서 시야가 가려 하늘에는 별이 아니라 빛조차도 찾을 길 없는 망망대해 동인지, 서인지 방향조차 알 수 없을 때 그들의 공포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 어설픈 항법만 가지고 이러한 모험을 실행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공포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 한 것이다.
황금을 찾아 부를 찾아 명예를 찾아 무작정 나섰고 어찌 어찌 하다 폭풍을 만나 고생하다가 우연히 해로를 발견했다?
그들이 남기 기록이라고 하지만 모두 이런 픽션 같은 사실에 의거 그들이 자랑하는 대항해시대이야기가 결말에 이른다.
그 시대에 해상탐험가들이 선택한 경로를 보면 모두 유럽에서 서쪽 해로를 선택하였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가 그렇고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출신인 신대륙 초기 탐험자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그랬으며 나중에 1799-1804동안 항해한 독일 프로이센 (Preussen)의 훔볼트(A. von Humboldt. 1769-1859)가 그랬다.
동쪽항로를 택한 사람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 1467/68-1520)이다.
특히 앞세 말했지만 서아프리카를 돌아 동쪽으로 나가는 항로는 스페인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서아프리카 해안 서안(西岸)을 따라 항해 한다 하더라도 기니 만(Gulf of Guinea)연안에서 발생하는 해류와 폭풍의 곶 위치에서 발생하는 해류는 엄청난 위험이 있는 곳이다.
난류인 기니해류(guinea current)가 흘러 수온이 낮은 한류(寒流) 벵겔라 해류와 만나는 교류수역에는 뚜렷한 조경(潮境)을 형성하여 이때에 아프리카 남부의 서안에 짙은 안개나 이상강수(異常降水)가 나타나고 갑자기 일어나는 해무(海霧)현상과 아울러 강풍이 불고 소용돌이와 폭풍이 이는 곳이며 사하라 사막에서 기니만 연안으로 부는 열사풍 하마탄(Harmattan)도 무시 할 수 곳이다.
이 기니만(Gulf of Guinea)을 무사히 지났다고 하여도 이어 앞서 언급한 한류(寒流) 벵겔라해류(benguela current)과 난류(暖流) 아굴라스해류(agulhas current)가 만나는 교류수역에서 기니해류보다 더 심한 해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일기의 악조건과 강풍이 불고 무서운 소용돌이와 거침없는 어마어마한 파도(10~20m)가 높게이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당 풍속(50~60km)이 빠르게 몰아치는 곳이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가 이 폭풍의 곶을 발견했을 때 폭풍으로 인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살아 돌아 왔으니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나서서 희망봉으로 개칭했다 한다.
언제가는 극복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희망이라고 붙인 것은 아닐까?
어쨌던 이렇게 하여 인도에 도착 그 어려운 항로를 개척했다 한다.
제214대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Pope Alexander VI 재위:1492-1503)의 칙서(Papal bull)가 있는데 1493년 포고된 것을 보면 이 칙서에 따라 새로운 영토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분할되었다 하는 괴상한 기록이 있다.
Alexander VI Divides the New World between Spain and Portugal. It called for Indigenous Peoples to be subjugated so the Christian Empire and its doctrines would be propagated.
당시 세계 모든 영토가 교황의 소유물인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발견할지 못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러한 발상을 하였다는 자체가 신기하기까지 하다.
1493년 교황의 칙서에 새로 발견된 모든 지역과 앞으로 탐험될 모든 지역 중에서 새로 정한 국경선(1494년에 다시 고쳐짐)의 동쪽지역은 포르투갈의 지배로 들어갔고, 서쪽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게 된다는 칙서이다.
그래서 유럽으로 부터 동쪽은 포르투갈지배에 들어갔고 서쪽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게 된다는 사전 약속이다.
실제 근대사의 영역을 보면 그렇다.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대항해시대는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독단적이고 억지스러움이 가득한 것이라고 풀이가 될 수있고 칙서와 똑같이 그려진 근대사 영역지도가 왠지 이 칙서와 같이 밀실에서 짜여진 느낌을 받는다.
이렇다 할라치면 실제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것인데 교황으로 풀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교황보다 더 큰힘이 있었다고 보여지는 면이다.
그러한 큰 힘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이는데 바로 삼한이고 가우리(caule)가 아닌가 한다.
그것을 교황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만약 서양인들이 당시 노리는 모든 영역에서 실제 알 수 없는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면 그런 칙서가 다 무슨 소용이며 혹 침략하다가 실패하면 그런 원칙이 무슨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종교의 원칙인 정의와 선이 있을 것인데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강탈을 정당화하는 행위의 칙서가 용납 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다.
인도 켈리컷(Calicut , Kozhikode, 古里)을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서양인입장에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쳐도 그 전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면 이미 이러한 항로가 개척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년대가 다르지만 영락제(永樂帝, 1360-1424.8.12, 재위 1402-1424) 정난의변(靖難지變, 1399)과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의 계유정란(癸酉靖亂, 1453)사건에서 모티브가 같다는 점에서 동일 인물로 볼 때 이미 영락제 재위시 정화군단(鄭和,1371-1434)이 1417년 5차항해 때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마린티(케냐의 Malindi)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지며 1431년 7차항해 때 메카(Meca)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영국의 연구자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이 정화군단이 페루(Peru)까지 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바로 페루(Peru)트루히요(Trujillo)남미대륙 동굴속에 인류학자 Antonio de la Calancha(1584–1684)가 그린 조선인들의 말 탄 장수들의 모습을 보고 확인하였다.
남미에서 발견된 말 탄 사람의 그림 http://blog.daum.net/han0114/17050191
그 때 이미 용(龍, dragon)을 상징하는 해상군단이 존재한 것이다.
신라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일상적으로 들락거렸고 어쩌면 그곳에 거주 또는 정착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대항해시대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란 의미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이야기 하자면 그들이 신라인일 수도 가우리(caule)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위 정화해상군단의 활동영역과 1402년경 이미 이베리아 반도에 신라인이 들어 닥쳤다는 것은 그곳에 서양인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가1497-1499, 1502-1503, 1524,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다는 것은 신라인이나 가우리사람들의 앞선 항해술을 바탕으로 항해를 했다는 것이고 좋게 봐주어도 기존 제국의 식민지 확보를 위해 여러 번 답사 또는 찝쩍거렸다는 사실 말고는 다를게 볼 것이 없다.
이후 포르투갈이 개입한 조선에서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1598)이 발생한다.
특히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했다는 인도 켈리컷(Calicut), 고리(古里)는 우리의 지명과 흡사하여 매우 친숙하게 들린다.
5.근세기에 이루어진 지명이동과 이입
유럽의 지명은 북아메리카에 수도 없이 많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동지명도 마찬가지이다.
이 달걀은 닭이 낳은 것일까? 아니면 달걀이 닭으로 변한 것일까?
지금 현대지명과 그에 따른 역사가 유럽이나 아랍에서 아메리카로 이입(移入)되었을까 아니면 아메리카에서 유럽, 아랍으로 또는 남아메리카로 이동(移動)되었을까?
근대사를 보면 분명 유럽이나 아랍에서 아메리카로 이입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서양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존재, 기존 지배세력의 역사 가우리(caule)가 있었다면 그 반대 일 수도 있겠다 싶다.
북아메리카에 명명된 뉴(New)란 지명들을 보면 일단 신대륙 달걀이라고 여겨지지만 닭이란 실체가 역시 분명치 않다는 말이다.
모두 속단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두 경우가 모두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근대사가 아무래도 그들만의 역사로 생성하고 인위적으로 고착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동원된 세기의 작품이라면 그들의 비루한 원칙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훗날 사실을 파악조차 할 수 없도록 원자물질처럼 견고하게 엮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만으로는 밝히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며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로 분명 존재하고 극한 혼란만 유발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이 북미대륙을 신대륙발견이라 하여 그 이전에 존재한 역사와 문화, 건축물 등을 깡그리 없애 버린 것이라면 무엇을 어떤 식으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좋아 서부개척시대이다.
유럽에서 보는 서부와 아메리카 동부에서 보는 서부는 차원이 틀린다.
아메리카 동부를 시발점으로 하여 터를 잡았다고 하고 있고 이어 아메리카 서쪽에 있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한 것이라 한다.
그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뒤엎었을 것이고 제거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러 했다면 기존 역사를 깨끗하게 청소한 후 그들이 평소 목적한 이입(移入)의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들의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위해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 역사가 기어코 필요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던 세력들이 신생국가 미국에 쫓겨 유럽으로 아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한 있다.
이 세력들을 가우리(caule)라고 볼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15세기에 이렇게 항로를 개척할 때 서구인들이 이분법으로 말하는 동양이란 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겠는가?
아니라고 분명 앞서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을 분명히 남아 있는 지명으로도 알 수 있다.
실례로 1402년 경 이베리아반도에 항해기술자 신라(新羅)인들이 나타났다고 하는 스페인남부에 발렌시아주(Valencia) 실라(silla)란 지명이 문신처럼 남아 있고, 이집트 알 파이윰주(al Fayyum)에 실라(silah, sila)란 지명이 분명하게 남아 있으며 아라비아반도(Arabian Pen) 동부 아랍에미리트(Arab Emirates)서부 항구도시 실라(silah)란 지명이 있으며 또한 아프리카 북동부 수단(Sudan)으로 흐르는 나일강변에 부르카트 코라이(Burqat Korai)란 지명이 존재한다.
그외 유럽 그리스에는 코라이란 도로명도 무수히 많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칠레 산티아고주(Santiago Metropolitan)에 실라(sila)란 지명이 있으며 아르헨티나(Argentina)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도 실라(sila)란 지명과 우루과이(Uruguay)에 있는 실라 언덕(cerro silla grande)이 있다.
또 특별하게 신라산(新羅山)으로는 멕시코(Mexico) 북부 몬테레이(Monterrey) 실라산(Cerro de la Silla)이 있고 페루(Peru) 우아누코주(Huanuco, 州)에 있는 실라산(cerro silla mountain)있으며 페루(Peru) 리마(Lima)에 있는 실라산(cerro silla garnde mountain)이 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세운 상징성으로서 칠레(Chile) 산티아고 라스콘데스(Lascondes)에 있는 유럽남부천문대(歐洲南天天文台, The European Southern Observatory, ESO)가 있는데 실라천문대(European Southern Observatory la Silla)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로 닥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현재 뚜렷이 남아 있는 삼한(三韓)의 자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가우리의 흔적이라고 치부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산(la silla)과 동남해(東南海) http://blog.daum.net/han0114/17050455
이것과 더불어 생각할 것은 우리나라 역사서에 지방명 모두가 신라 땅이라는 뜻의 전라(全羅)가 주는 의미가 크며 그리고 전 세계지명에 붙어 있는 라(Ra, 羅)란 음어에서 마치 삼한 신라(新羅)의 실체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하고도 남는다.
"라(Ra, 羅)"는 "태양"을 뜻하며 태양 같이 눈부신 "금(비단)"을 뜻한다.
태양을 숭배하며 태양의 자손, 천손(天孫)으로써 태양의 기와 전통을 이어받은 적자의 혈통이라고
자부할 수는 어미인 것이다.
이것은 이입(移入)이 아닌 뿌리 깊은 잔존역사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다.
15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의 범선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던 시기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Age of Discovery)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인위적인 유물과 기록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감지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들이 근세기에 일방적으로 역사를 만들었음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자취가 남아 있다.
위 실례들은 신대륙발견을 고집하는 서양세력들이 어느 시기까지 존재하던 가우리(caule, 삼한)와 신라(新羅)의 역사를 깡그리 지우거나 없애버렸지만 그래도 생명력은 끝이 없어 죄다 없애버릴 수 없었음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역사찾기에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극히 일부 남은 귀중한 자국, 자취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삼한(삼한)의 역사, 가우리(caule)의 시원, 근원은 분명 아메리카대륙이라고 여겨진다.
최소한 신라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콜럼버스를 등장시켜 신대륙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러한 근원을 유추하는데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지명 이입(移入)이라는 경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주는 것은 마치 유럽에서의 원 지명에서 뉴(새로운, 新, new)란 글을 붙여야 했던 사실에 비추어도 그렇게 생각되는 점이다.
뉴로마(New Rome)를 신라마(新羅馬)라 했다는 것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끝 싱가포르(Singapore)까지 신가파(新加坡)라 했음을 기억한다.
이것 역시 기존 세력의 땅이라고 추리 할 수 있다.
싱가포르(Singapore)신가파(新加坡)라고 한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849
콘스탄티노플이 왜 신라마(新羅馬)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0
대다수 이 뉴(새로운, 新, new)를 고유지명 앞에 붙이는 것들은 모두 서양세력들이 시도하고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근세기에 모두 만들어 진 것들이다.
왜 그들은 이 뉴(새로운, 新, new)란 단어에 집착한 것일까?
이유는 기존 것들을 한꺼번에 뒤 엎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뉴(새로운, 新, new)란 단어에 집착했으니 정신적 신앙의 지주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가톨릭 역시 뉴(새로운, 新, new)란 개념으로 보아야 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인도가 불교인 나라임에도 현재 불교신자가 인구대비 0.77%도 채 안 되는 형태가 말하는 것은 불교가 지금의 인도를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적어도 인도는 불교가 살아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 불교 기원을 찾으려고 하면 불가능하다.
전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근세기에 들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역사를 만들 면서 인도(印度, india)란 명칭 즉 지명이 생겼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니 원래 인도(印度, india)는 다른 명으로 불렸을 것이고 지금의 인도대륙이 아닌 중앙아메리카 외 카리브해제도와 남아메리카가 기원 영역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불교와 이슬람국가들이 남아메리카에도 있었던 같은데 일체 그런 이야기가 없다.
신라는 이슬람국가였는가?
신라는 현재 나타나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拜火教)를 국교로 하던 사산왕조(Sassanid Empire, 224–651)와 우마이야 왕조를 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후 우마이야 왕조시대 땐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무어인이란 오해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신라가 스페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지만 모든 것에서 스페인이 신라로 된 것이 아니라 신라가 스페인으로 어느 날 갑자기 변신 또는 둔갑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신라가 영역으로 한 남아메리카에도 이슬람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슬람은 이슬람으로 존재했는지 원시불교로 존재했는지는 모른다.
아프리카인들을 서양인들이 노예시장에 팔여 세계에 퍼지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모순이 있다.
근세기 근대사의 근원을 찾는다면 어딜 시발점으로 할까?
근년 2-300년의 역사는 모르겠으나 그 이전의 서양역사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뉴(새로운, 新, new)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몇 백 년이 아닌 몇 천 년의 역사는 애초부터 그들에게 없었을 것이다.
그저 새로운 것 뉴(새로운, 新, new)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겐 애초부터 유구한 역사자체가 없었다고 단정을 지워도 좋지 않겠는가 싶다.
그렇다면 로마는 무엇이고 그리스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없어지고 사라진 가우리(caule) 역사이고 삼한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그들의 역사로 만든 것일 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맞는 이치이다.
실제 지금까지 무서운 역병과 자연재해 대지진, 기근, 자연식물학적으로 따져보아도 로마, 그리스는 그들의 역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삼한의 역사와 많이 닮았고 친밀감이 훨씬 더 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근세기 몇 백 년 역사에 몰입 우월감에 도취한 서구인들은 그 이전 역사에서 당시 기득권의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이질감에 치를 떨어야 했을 것이고 열등감이 뼛속깊이 스며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때문에 이렇듯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6.용(龍, dragon)상징 가우리(caule)제국과 끝말
러시아 제국의 국장
국장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빨간색 작은 방패 안에는 성 게오르기우스가 말을 탄 채로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가 가진 지리학 항해술이 그 이전 세력, 용(龍, dragon)을 문장 또는 상징으로 하던 기득권 세력인 가우리(caule)제국이 가진 기술보다 우월했다고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난맥상이 들어나고 있다.
어쩌면 콜럼버스는 이 가우리(caule)제국이 가지고 있던 우수한 지리학개념이나 항해술을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설이나 소문 또는 제삼자가 전달하는 일천한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영달의 욕심을 내고 무작정 항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일찍이 리스본 출신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가 1487년 에티오피아를 발견할 것을 명받아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하고 아프리카 남단에 도달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탐험가이자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가 인도(印度, India), 캘리컷(Calicut , Kozhikode, 古里)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독 콜럼버스만이 뒤 떨어진 지리학개념을 가져 헤맸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빨이 맞지 않는 조작된 느낌이 없지 않다.
1492년 1차 항해하기 전에 그렸다고 판단되는 그가 그린 지도를 보면 조악하기가 이를 때 없는 것인데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시팡구(Cipangu)가 그려져 있는 곳은 분명 카리브해(Caribbean Sea)중이다.
역으로 콜럼버스가 이런 상태라면 포르투갈 인이라고 특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콜럼버스가 이태리출신이지만 항해를 하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들어가 이사벨 1세(Isabella I of Castile, 1451-1504,재위1474-1504)여왕의 지원을 받고 항해를 시작하였다 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지리학에 따른 항해술이 이런 격차가 있었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로 느껴지는 의문 중에 하나다. 아니면 이 디아스와 가마는 기존 기득권세력인 가우리(caule)제국의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 or 1469-1524)가 인도(印度, India)에 간 것은 어쩌면 이미 가우리제국 사람들에 의해 항로가 개척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어렵지 않게 일상적으로 들락거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상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이임에도 앞선 역사를 다 잘라 버렸으니 알길이 없다.
이것이 바로 동인도니 서인도니 하여 훼갈리게 한 요인이 아닌가 한다.
이탈리아 제노바(Genoa)출신 탐험가이자 항해사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는 1492.8.3-1493, 1493-1496, 1498-1500, 1502-1504, 4차에 걸친 항해 실패에 대한 기록에서 솔직히 좀 어리석은 것 같지만 솔직해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신대륙발견이라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픽션이 있어야 하였겠지만 잘못을 시인하는 듯한 사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1492년 이사벨 1세(Isabella I of Castile)여왕의 후원을 얻어 파로스항(Palos)을 출발하여 대탐험에 돌입했지만 그렇게 소망하던 인도(印度, India)는 발견하지 못하고 서인도제도 즉 카리브 해만 맴돌고 말았다는데 솔직성을 말하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실수를 빙자한 역사 바꿔치기가 아닌가 한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출신 신대륙 초기 탐험자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아메리카를 탐험함에 있어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서쪽 항로를 택해1499-1500, 1501-1502, 1503-1504 이렇게 3차 항해 하였지만 콜럼버스처럼 야단 스럽지 않았고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콜럼버스도 그렇지만 이 베스푸치 역시 북아메리카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에는 어떤 존재가 있었기에 모두 피한 것일까?
이것은 진짜 인도가 아닌 다른 명칭의 가우리가 그곳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 콜럼버스가 카리브해를 발견한 것인데도 마치 북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처럼 만들었으며 그 이후 탐험은 서로 경쟁하듯 남아메리카에만 몰입한다.
카브랄과 베니푸치 경우가 그렇다.
과연 그들이 두려워 접근하지 못한 곳에 진짜 천축국(天竺國) 서양인들이 부르는 인도(印度, India)가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천축국(天竺國)은 별칭으로 천독(天篤) ·천독(天督) ·천두(天豆) ·천정(天定) 등이 있고 어원은 신독(身毒)이다.[네이버 백과사전]
산해 경(山海經) 제18권 / 해내경(海內 經)편에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朝鮮), 천독(天毒)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으며, 그 사람들은 물가에서 살며, 사람을 가까이 하며 사랑한다.(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지낸다).
이를 삼한사관으로 이해하면 동해(東海)가 지금 태평양이니 동해(東海) 안쪽은 북아메리카대륙이 둘러쌓고 있다고 하여 안쪽(內)이라 했을 가능성과 북해(北海) 모퉁이라 하였으니 지금 캐나다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북부지역일 것이라는 사실을 대조할 수 있고 조선(朝鮮)과 천독(天毒)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다 했으니 조선과 천독(天毒)은 같은 지칭이라 할 때 그곳에 천독(天毒), 천축, 이라고도 하는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말하는 가우리(caule)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물가(북아메리카 서부지역 태평양 연안의 켈리포니아주(State of California)지역을 상정할 수 있다)에 살고 사람을 가까이 하며 사랑한다 하였다는 기록은 바로 우리민족이 사는 정감의 풍경을 그린 듯하다.
콜럼버스가 이 가우리(caule) 즉 천축(天竺)이라는 그들이 인도(印度, india)라 하는 조선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식민지영역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기본 툴(Tool)인 지리학에 따른 진보된 항해술에서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조작된 것이고 앞선 역사를 이야기 못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 항해술이 앞서 보이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 1580년부터 1640년에 스페인이 오히려 포르투갈을 동맹 흡수하는 역사 사실에서 보더라도 말이 맞지 않는다.
이 정도의 항해술이 차이가 났으면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극복하고 이 항해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으리라 짐작 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은 어디에도 연출 된 것이 없다.
몇 백 년의 시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시대 같은 년도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은 시간적 동일 공간 안에서 서로 최소한의 공조 할 수 있는 해로 정보소통이 안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짜깁기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다.
탐험을 시작한 년도를 보아도 콜럼버스가 처음 출발한 년도가 1492년이고 바스코 다 가마는 5년 뒤 1497년이다.
최소한 오류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재차 항해한 3-4차 기간인 1498-1500, 1502-1504에는 항로를 바꿀 수 있어야 했다. 기어코 금은보석이 넘쳐흐르는 곳 가우리(caule) 즉 천축(天竺) 인도(印度, India)를 발견하려 하였으면 말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도착한 인도 캘리컷(Calicut , Kozhikode, 古里)은 이미 어마어마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세력의 고유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어째 맞춰놓은 옷을 입고 난 후 내가 만든 옷이요 하는 것이나 같게 들리는가.
[콜롬버스의 지리학 개념도]
서양인들이 대항해시대라고 하면서 난리를 치던 때 100년이나 앞서 동양이라고 하는 곳에서 1402년(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세계지도가 나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지도를 보았을 때 용(龍, dragon)을 상징으로 하는 제국에서 벌써 세계해양을 조사하여 세계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서구인들의 해양시대의 역사는 분명 뒤쳐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추리는 결국 콜럼버스가 갔다고 하는 카리브연안에 실제 시팡구(Cipangu)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고 시팡구란 곳 금가서랍(金加西蠟, Castilia Del oro)왕국은 지금 콜롬비아를 두고 이야기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천축이라고 하는 인도가 아메리카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지금의 열도를 황금의 땅 운운하였다는 것은 후세 이리저리 개작 수정과정에서 가미된 허구라고 판단되며 그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도 어쩌면 북아메리카 남단에서 일어난 사건일 수 있겠다 싶다.
이렇게 볼 때 전체적인 역사그림에서 근세 역사재편짜기 때 이 스페인은 신라로 변신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콜럼버스를 통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취득한 모든 스페인 식민지가 신라 영역일 가능성이 높고 총체적으로 신라를 스페인으로 둔갑시켰을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254년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여행가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1220-1293)의 몽골제국 여행기에 나오는 한국인의 묘사와 같이 고려인이 스페인사람 같다는 사실기록을 인용한다 하여도 이상할 것이 별로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문장에서 십자가를 세우고 용(龍)을 해하는 상징을 내세웠을까?
그들은 왜 용(龍)의 상징을 구태여 동양제국의 상징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용(龍)을 서양제국들의 문장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창으로 찌르거나 말발굽에 억지로 깔리게 하는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극복할 수밖에 없었던 대상의 상징이었다고 풀이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서양인들은 용(龍)에서 그들의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려 한 것이고 용(龍)은 분명 서양과 반대되는 동양의 상징이 아니라 대항해시대 전 존재하던 세계 권위와 대표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용(龍)은 서양인들이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 당시 세계를 지배력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현대에 들어 우월한 서양사에 의해 위축된 동양 상징으로 변했을 뿐이다.
어쩌면 용(龍)은 가우리(caule)의 문장이고 표상일 수 있겠다 싶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뱀을 신성시 여겼다는 사실을 용(龍)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가우리(caule)라는 삼한대명사와 용(龍)이란 절대적 상징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었음을 파악했다.
이 삼한의 가우리(caule)는 바로 천독이고 천축이고 조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상징은 바로 용(龍)문양이었다.
분명 이러하니 콜럼버스는 가우리(caule)가 있었던 곳을 신대륙이라 했다는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가우리(caule)의 문화를 그대로 승계 받으려면 신대륙발견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땅을 스페인이 차지했다.
백제의 땅을 영국이 차지했다.
고구려 땅을 러시아가 차지했다.
조선의 땅을 미국이 차지했다.
why 왜? 그들은 신대륙에 목을 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우월한 종교를 만들어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서?
그러했다면 가우리(caule)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 문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동양문화라고 이분적으로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기존 틀에 짜인 학론이 아닌 창조적이며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일이다.[세계사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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