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잉카제국 마지막 황제 무덤 발굴

한부울 2012. 3. 4. 14:06

스페인의 땅은 신라 땅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87

살수(薩水)의 薩의 뜻은 "보살(菩薩)"이라는 말로서 본딧말은  보리살타(菩提薩唾)이고 산스크리트어 보살(bodhisattva)의 음역이다. 그렇다면 인도와 함께 있어야 할 물이름이라면 그곳은 조선 천축이 있었던 곳에서 찾아야 맞다.

 

잉카는 분명 신라 영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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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 마지막 황제 무덤 발굴되나

[연합뉴스] 2012년 03월 04일(일) 오전 11:20

 

에콰도르 중부서 무덤 추정 유적지 발견(시그초스<에콰도르> AFP=연합뉴스) 잉카제국 마지막 황제인 아타우알파의 무덤이 에콰도르 중부 도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고 에콰도르 문화유산부가 3일(현지시간) 밝혔다.

 

마리아 페르난다 에스피뇨사 문화유산부 장관은 이날 코토팍시주(州)의 소도시 시그초스에서 아타우알파 황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면서 "이는 에콰도르 고고학과 안데스 지방 발굴 역사상 중대한 발견"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고고학자가 발굴을 시도했지만 아타우알파 황제가 묻힌 장소는 지난 수백 년간 베일에 싸였었다. 15~16세기 번성한 잉카제국은 1532년 스페인 군대에 붙잡힌 아타우알파 황제가 이듬해 피살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 때 잉카제국은 현재 볼리비아에서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에 이르는 안데스 산맥의 길이 1천600㎞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던 거대 제국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군대는 페루의 고지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붙잡으며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고 이후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정복해 식민 제도를 시행했다.

 

아타우알파 황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에콰도르 역사가 타마라 에스투피난이 발견했으며, 에콰도르 국립문화유적연구소가 곧 발굴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에스투피난은 지난 2010년 6월 안데스 산맥 동쪽의 협곡에서 유적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곳을 단순히 '잉카 고고학 유적'이라고만 설명했다.

 

그러나 발굴 과정에서 석벽과 수도교, 석조 등 무덤 흔적을 찾아냈다.

 

에스투피난은 "사다리꼴의 광장 주변으로 마제 석벽으로 이뤄진 직사각형 방 몇 개를 둔 것은 잉카 말기의 황실 건축물 양식"이라고 말했다. 고고학자 타마라 브라이는 "발굴된 잉카 유적이 경이로울 정도로 잘 보존됐다"면서 "이는 잉카인들이 안데스 지방 고지대뿐만 아니라 저지대에서도 활동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발굴 장소가 인근의 킬로토아 호수까지 포함하는 아타우알파 황제의 영지라는 것이다.

 

브라이는 "잉카 유적이 저지대에서 발견된 적이 거의 없었다"면서 "이 곳은 일종의 휴가지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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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우알파(Atahualpa, Atahuallpa, Atabalipa, or Atawallpa, 1497-1533)는 잉카 제국의 14대 황제이다.

 

 

현 에콰도르 지역에서 11대 황제 와이나 카팍의 서자로써 출생하였다. 1527년 형제 와스카르가 황제로써 즉위하자 이에 반발하여 키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5년간에 내전 끝에 아타우알파는 와스카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와스카르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황제로써의 생활은 얼마 가지 못하였다. 1527년 남아메리카에 상륙하여 잉카 제국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던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González, 1471 or 1476-1541)는 아타우알파가 내전에서 승리한 후 수도 쿠스코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거부하자, 피사로는 이끌고 온 180명의 군대로 아타우알파의 행렬을 습격하였다. 아타우알파 일행은 7천 명에 달하였으나,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어서 피사로의 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아타우알파는 타고 있던 가마가 붕괴하면서 피사로에게 체포되었다. 아타우알파는 몸값으로 자신이 감금된 방 안에 자기 어깨 높이에 이르는 금을 가득히 채워줄 것을 약속하였고, 그의 명령 하에 잉카인들은 대량의 금을 방안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잉카인들이 약속을 이행한 뒤에도 에스파냐군은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아타우알파의 목뼈를 부러뜨려 처형하였다.[위키]

 

잉카제국(Inca Empire, Andean civilizations, 印加帝國)

 

 

잉카 제국은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다.

잉카 제국의 행정, 정치, 군사의 중심은 지금의 페루인 꾸스꼬이다. 이 제국은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하였으며, 1438년에 본격적으로 역사시대를 맞이했다.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95년 동안 잉카는 무력 정복과 평화 조약을 적절히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남서 중앙 볼리비아, 북서 아르헨티나, 북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 남부등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방대한 남서 아메리카 대륙을 융합했다.

 

잉카 제국의 공식적인 언어는 퀘챠이다. 그러나 퀘챠 외에도 수백 개의 지역 방언과 사투리가 있었다. 퀘챠는 트완틴수유(Tawantinsuyu)라고도 한다. 퀘챠 표기법 개정 이전에는 타완틴수요(Tahuantinsuyo)라는 스페인어로 표기했다. 트완틴(Tawantin)은 넷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tawa와 그룹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미사 -ntin, 지역 혹은 지방이라는 의미의 수유(suyu)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즉, 퀘챠는 네 개의 지역 혹은 네 개의 지방 연합이라는 의미이다.

이름 그대로 잉카 제국은 네 개 수유로 나뉘어 있으며, 수유의 네 모서리는 수도인 꾸스꼬와 접해 있다.

 

각 지역에 다양한 우아까(Huacas)가 있었지만, 잉카 왕은 그의 권력을 이용하여 파차마마(Pachamama)와 같은 다른 신을 믿는 종교인들에게 태양신을 믿도록 종용하였다. 잉카 제국은 그들의 왕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1000년 오늘날 페루라는 불리는 지역에 정착해 기원전 1250년 안데스 산맥지역에 부족사회가 형성된다. 빈족, 치무족, 나스카족, 티아우아나코족 등이 있다. 서기 600년 우아리 지역에서 온 민족이 200여 년 동안 서부 안데스를 지배한다. 이때부터 미라를 매장하는 풍습이 생긴다. 900년 우아리 민족이 사라지고 다시 여러 부족으로 갈라진 뒤 1230년 2대 황제인 신치 로카가 자신의 부족을 다스리게 되며 세력 확장을 위해 다른 민족의 정복을 개시한다. (신치 로카는 1100년 전후에 재위했다는 설도 있다)

 

1370년에는 치무족이 페루 일대를 지배하게 된다.

1438년 창카족이 잉카인을 공격하나 실패로 끝났다. 파타쿠텍 잉카가 최초로 쿠스코에서 벗어난 잉카 제국을 성립시켰으며 이후 투팍 아마루, 와이나 카팍 등의 잉카를 통해 번영하게 된다. 잉카족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나, 제국에는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사이의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위시한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정복 당하게된다.

 

사파 잉카(Sapa Inca, 케추아어로 '유일한 왕'이라는 뜻)라는 칭호로 불렸다.

 

1.만코 카팍(Manco Cápac) 1200

2.신치 로카(Sinchi Roca) 1230

3.를쿠이 유판키(Lloque Yupanqui) 1260

4.마이타 카팍(Mayta Cápac) 1290

5.카팍 유판키(Cápac Yupanqui) 1320

6.잉카 로카(Inca Roca)1350

7.야후아라 후아칵(Yahuar Huacac)1380

8.비라코차 잉카Viracocha Inca) 1410 -1438

9.파차쿠티(Pachacuti) 1438–1471

10.투팍 잉카 유판키Túpac Inca Yupanqui 1471–1493

11.후아이나 카팍Huayna Cápac 1493–1527

12.니난 쿠요치Ninan Cuyochi 1527

13.화스카르(Huáscar) 1527–1532

14.아타후알파(Atahualpa) 1532–1533

15.투팍 와이파 (Tupaq Wallpa, 재위 1533년)

16.망코 잉카 (Manqu Inka Yupanki, 재위 1533년∼1544년)

17.사이리 투팍 (Sayri Tupaq, 재위 1545년∼1560년)

18.티투 쿠시 (Titu Kusi Yupanki, 재위 1560년∼1571년)

19.투팍 아마루 (Tupaq Amaru, 재위 1571년∼1572년)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 카하마르카

 

리마(Lima)는 'Rimac'을 에스파냐 사람들이 잘못 알고 부른 것인데 Rimac은 '왕들의 도시'란 뜻이었다고 한다.

 

신(Deities)

글라시아스 인티(Inti, 태양의 신이여 감사합니다.)

Viracocha (also Pachacamac) - Created all living things

Apu Illapu - Rain God, prayed to when they need rain

Ayar Cachi - Hot-tempered God, causes earthquakes

Illapa - Goddess of lightning and thunder (also Yakumama water goddess)

Inti - sun god and patron deity of the holy city of Cuzco (home of the sun)

Kuychi - Rainbow God, connected with fertility

Mama Kilya - Wife of Inti, called Moon Mother

Mama Occlo - Wisdom to civilize the people, taught women to weave cloth, and build houses

Manco Cápac - known for his courage and sent to earth to become first king of the Incas, taught people how to grow plants, make weapons, work together, share resources, and worship the Gods

Pachamama - The Goddess of earth and wife of Viracocha, people give her offerings of coca leafs and beer and pray to her for major agricultural occasions

Qochamama - Goddess of the sea

Sachamama - Means Mother Tree, goddess in the shape of a snake with two heads

Yakumama - Means mother Water, represented as a snake, when she came to earth she transformed into a great river (also Illapa)

 

잉카에 대한 이름과 오해

 

보통 잉카 제국이라 하나 참 이름은 타완틴수유(Tawantinsuyu)로 이는 4방위의 나라란 뜻이다. 그리고 잉카는 이 나라를 다스린 귀족들을 일컫던 이름이지 황제를 '잉카'라 했던 것이 아니다. 황제는 사파 잉카라고 따로 이야기했으며 모든 잉카는 자신들이 태양신 인티의 자손이라 여겼다. 수도는 페루남부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지점의 분지 쿠스코(Cuzco/Cusco)로 이곳을 세상의 배꼽이라 생각했다.

또한 케츄아족(남미 고산지대 원주민)이 잉카를 세웠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잉카족이 뒷날 케츄아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일 뿐이며 사실 케츄아족 같은 것도 엄밀히 말해선 존재한 적 없다. 케츄아는 지역 특성을 일컫는 이름과 부족 명을 헷갈려 했던 에스파냐 사람들이 오해해서 붙인 이름을 '케츄아족' 본인들이 받아들여 버린 것이다.

 

역사와 사회

 

타완틴수유(Tawantinsuyu)는 잉카족이 쿠스코에 자리를 잡은 뒤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통해 커갔다. 새로 임금이 된 잉카는 거의 언제나 전쟁을 해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제위 계승에서 밀린 혈족에서 분가해서 법적으론 '고아'가 되어버리고, 또한 그렇게 자신을 떠나보낸 황족에게 이전 사파 잉카의 개인 재산(국가 재산 말고)을 다 물려줘야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알거지'가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어떻게든 정복을 해서 자기 땅을 얻어야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잉카가 사실은 둘이었고 잉카 가운데 하나는 쿠스코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있는 이원제였다는 설을 요즘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커가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잉카는 보통 포위 전술로 지역 사람들을 쫄쫄 굶긴 다음에 살살 달래서 알아서 무릎 꿇게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곳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란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게 했다.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는 아이유라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열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씨족공동체 아이유(Ayllu)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마을 땅은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는데 뒤에 나오는 두 땅을 일구는 게 세금이었다. 물건이나 돈으로 내는 세금은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이고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벼룩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거나 병든 사람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를테면 지방자치식 사회보장인 셈이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걸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종교

 

종교로는 나라 종교로 인티(태양)을 섬겼고 사파 잉카의 형제나 그 밖의 가까운 친척이 대사제 일을 맡아 했다. 라마나 그 밖의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없지 않으나 부정적인면만 들어내는 근대사의 영향도 없지 않다.

 

사파 잉카의 권한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반면 그만큼 사파 잉카를 얶매는 풍습도 많았다. 가령 사파 잉카는 태양과 동일시 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버려졌다. 태양은 하루에 한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파 잉카가 하루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태워졌으며, 사파 잉카가 신던 신발도 역시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사파 잉카가 한번 동침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나면 그걸로 끝났다. 사파 잉카는 스스로 걸을 수 없었으며, 어딜가든 황금 가마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사파 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차스끼(Chasqiy)라고 불린 파발꾼들은 사파 잉카에게 보고할때 먼저 '대리인'에게 보고했고, 그 대리인이 사파 잉카에게 다시 보고하면, 사파 잉카가 이에 대한 조치사항을 대리인에게 지시하고, 그 대리인이 다시 차스끼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사파 잉카의 얼굴을 직접 보는 행위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그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파 잉카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 밖에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수녀'로 잘못 안 여자들이 있었다.

아크야(Aclla, 巫女)라고 한다.

잉카 제국에서, 태양신을 주재하고 왕을 섬겼던) 시녀

이들은 예쁘거나 핏줄이 좋거나 해서 뽑혔고 죽을 때까지 처녀로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고급 직물을 짜고, 술을 빚고,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사파 잉카가 후궁으로 삼거나 쿠라카들에게 역시 첩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렘과는 좀 다른 것이 Aclla들이 사는 수녀원(?)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잉카라도 맘대로 이 여자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크야(Aclla, 巫女)를 건드리는 보통 남자는 처형,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

 

죽은 사파 잉카들은 미이라로 만들어 살아 있었을 때처럼 모셨다. 그리고 이따금씩 '무덤'(비록 땅 위에 있긴 하지만)에서 끌어내어 말도 걸고 밥도 주고하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춤 추자고 끌어내는 것 말고는 뭐든지 다 했다고 한다.

 

기술과 문화

 

바퀴를 쓰지 않고(즉, 수레가 없었다) 철도 쓰지 않아서 뒤떨어진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미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하는 고도의 천문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땅심이 쉽게 빠지지 않는 계단식 밭이나 도시를 흐른 수도 시설, 면도칼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바위벽 같은 것을 보면 단지 발달 분야가 다를 뿐이지 어떤 면에선 당대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잉카의 은 채취 기술은 에스파냐가 이 지역을 정복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 쓰였고 특히 풍부한 은광이 있지만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 포토시에서 각광받았다. 에스파냐 기술로는 산소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고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2년 획기적인 수은 아말감법(amalgamation process)이 개발되면서부터는 잉카의 재래식 은 채취법은 씨가 말라버린다.

백제 금동대향로에 수은아말감법이라는 도금기술이 사용되었다.

 

타완틴수유(Tawantinsuyu) 곳곳으로 뻗은 잉카의 도로 역시 유명하다. 마치 로마 도로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유적으로만 남아있는 로마 도로와 달리 많은 수의 잉카 도로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길로 쓰인다. 산을 오르는데 가장 효율적인 경사를 따라서 길이 놓였기 때문이며, 어차피 해발 4000m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잉카가 다리를 만든 기술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식물섬유를 꼬아서 구름다리를 만들었는데 이 중 상당수를 19세기까지도 그대로 썼으며, 오늘날에도 험준한곳에 자리잡은 시골동네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해마다 다리를 고쳐 줘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현대의 다리와 견주긴 뭣하지만 처음 이 다리를 본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겐 놀라운 건축 기술로 보였을 것이다.

 

잉카 문자가 있었다, 없었다 말이 많은데 아직까지 정설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승문자(quipu, 結繩文字) 키푸라 하여 매듭으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키푸카마욕(Quipucamayoc)이란 관리들이 키푸를 다루었는데 이 방법은 에스파냐 정복 이후에도 한동안 쓰였고 키푸카마욕들은 지역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린 듯하다. 돈 잘 벌어 무역선을 산 사람도 있었다.

 

 

                                                              [All-tocapu]

몰락

 

스페인의 침입자들이 쿠바와 멕시코 일대를 장악한 뒤 눈을 돌린 곳은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이였다. 앞서 1521년 아즈텍(Aztec, 1248-1521)을 몰락시킨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에 뒤 이어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González, 1471 or 1476-1541)가 그 선봉으로, 잉카의 심장 쿠스코로 침략 멸망한다.

 

그런데 대반전이 발생했다. 아타우알파(Atahualpa, Atahuallpa, Atabalipa, or Atawallpa, 1497-1533)를 죽이고 그 아우 망코(Manqu Inka Yupanki, 재위 1533-1544)를 괴뢰 왕으로 삼았는데 망코가 스페인인들의 막장 행각에 분개. 몰래 빌카밤바(Vilcabamba)로 도주하고는 대규모 반스페인 봉기를 선동했다. 잉카군은 숫적 우세를 기반으로 스페인군은 곳곳에서 물리쳤고, 한때 쿠스코가 잉카군에게 포위, 함락될 뻔한 상황도 연출되기도 했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잉카군의 화공으로 쿠스코는 건물 한 채 빼고 모조리 불타서 이후 페루의 거점은 해안도시 리마(Lima)로 옮겨졌다. 쿠스코에서 약탈한 부를 이용해 신도시 리마의 건설에 착수하던 피사로는 내분에 휘말려 반란세력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망코는 스페인 탈영병들을 받아들여 기병과 총병 등을 창설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받아들인 스페인 탈영병들에게 암살된다. 이후 잠시 잉카는 스페인과 화친하지만 1572년 전쟁이 재발했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잉카의 패배로 끝났고 이로써 잉카는 완전히 망했다.

 

잉카를 정리한 침략자들은 이후 일사천리로 남아메리카 전역의 미개한 부족들을 차례로 짓밟으며 구석구석 쓸고 다닌다. 피사로의 휘하였던 아귀레도 일단의 병력을 끌고 황금이 묻혀있을 남미의 오지를 원정하러 나섰는데, 그 비참한 여정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곳을 그렇게 흽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 군대는 마푸체 족(Mapuche)을 이기지 못했고 덕분에 19세기 후반까지도 남아메리카 남쪽 원뿔 지역은 에스파냐 제국의 통제권을 벗어나 독립을 유지했다.[엔하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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