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한반도 분류학체계의 문제점

한부울 2012. 3. 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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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온전할 수 없는 한반도 분류학체계의 문제점

 

글쓴이:한부울

 

36년, 또는 45년 식민지역사, 피지배 역사가 곳곳에 망령처럼 살아있는 지금, 국민들이 초 현대적으로 사고가 달라졌다 하여도 식민지 전의 역사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이리저리 얽혀 놓아 쉽게 찾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륙사적, 세계사적 삼한의 역사에 따른 원산지 자연계 생물, 동물, 식물들을 우리가 바라는것을 영원히 찾지 못할 수 도 있겠다 싶다.

이런 현실에서 다급하지만 우선 반도역사가 아닌 세계, 대륙사학적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생물 분류학적인 면에서 근본적으로 사고나 인식을 고쳐야 할 사한은 없는지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이야기 하려 하는 것이다.

기서 혼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반도에 생존하고 실제 근원하는 식물들은 기존의 식물학 분류자료를 참고로 한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삼한역사가 한반도가 아닌 세계대륙역사, 대제국의 역사라고 할 때 기존 서양세력학자들이나 일제식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의 분류학체계가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없지 않다.

솔직히 아예 없는 것 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반도에 근거한 원산지 식물들을 정확하게 분류하는데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대륙의 조선역사, 세계사적 삼한 역사에 따른 원산지 식물들을 찾는데 혼란만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것을 분명히 할 때라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숨은 본질을 알아야 할 때이다.

본 블로그에서 늘 하는 이야기지만 19세기이후 적어도 대조선이 해체된 1881년을 깃 점으로 한 1900년 이후 부터 한반도에서 정리된 식물학적 분류과정은 역사학적으로 보았을 때 서양세력들에 의해 조정되고 정리되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근원으로 한 식물 학명의 종명으로 koraiensis, koreanum, koreana, koraiensis, chosenica, chosenensis, caulescens, coraiense, coreanum 라는 라틴어 형식을 빌어 섞어치기하면서 만들어 이식한 식물들은 모두 엄밀히 따진다면 본래 생육하지 않은 지역에서 자연적, 인위적인 원인에 의해 2차적으로 한반도에 도래 침입하여 야생화되고 기존 한반도식물과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를 이루는 식물의 총칭이라 할 때 바로 귀화식물(naturalized plant, 歸化植物)을 정리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바라는 역사적 근원의 식물은 도저히 될 수도 없고 비교 불가하다란 말이다.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문제에 같이 덮혀버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학문이 되어 버렸고 거짓 연구자료들 뿐이란 사실이다.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던 식물을 본래의 근원지에서 억지로 한반도로 끌고 들어와 인위적으로 이식하거나 비슷하게 엮어 야단법석 떨면서 선교사, 학자, 어중이떠중이 식으로 달려들어 분주하게 학문적 대의에 의한 명쾌한 정리가 아닌 암울한 대륙조선의 형태를 이용 개인적인 영달의 목적만을 위해 만들거나 조작했다고 보인다는 점이고 하나같이 변변치 않고 시원찮은 그들의 이름들을 귀화식물 학명 꼬리에 붙여 마치 역사적인 근원의 학명처럼 도식하거나 꾸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상황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에 그들에 의해 정리된 식물이 4,000점이나 넘는다 하니 죽통을 똥통에 붙이고 볼일 볼 사이도 없이 무단히 쫓아 다녔으며 마치 콩볶듯했다는 이야기다.

오죽했으면 그들 스스로 학명을 학살했다고 까지 표현 했겠는가?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조선 한반도에서 1900부터 1910년 까지 이러한 일을 하지 않으면 무슨 큰 손해라도 보고 아니면 생물학자를 위장한 스스로에게 큰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일까?

당시 대륙조선 또는 거대한 삼한을 제거 또는 해체한 서양세력 모든학계 공동관심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니나 다를까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암울한 역사 변괴가 일어나고 실제로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피밥받는 형국이 조성되고 말았다.

통칭대륙조선, 세계삼한이 해체되고 난 후 무주공산으로 남겨진 영역에서 서로 앙탈진 탈취 행위가 스스럼없이 자행 되고 있었던 시대였던것이다.

이들이 당시 신부나 식물학자들로 위장하고 한반도에서 활동하고 분류학 정리작업하는 과정에서 보면 특별하게 조선인과 함께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조선인은 왜 없었을까?

현재 역사학자나 생물학자들은 왜 이런 의문을 가지지 못하는가?

그 당시 자료에서 보면 일제는 한반도 유물발굴 한답시고 온 땅을 파헤치며 무엇을 찾는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이 때  찾기 보다는 심기에 바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때 유물발굴 현장에는 총독부감독하에 조선인 학자는 일체 접근 조차 할 수 없도로 하였으며 일부러 참여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식물분류작업에서도 조선인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빼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태 생물이 자라나는 곳, 생식하던 곳, 그곳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부터 보고 듣고 학문을 습득하고 한반도 자연환경과 조건 상황등을 실제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본토배기 원산지 조선학자들을 일부러 빼버렸다는 것은 연구만의 목적이 아닌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정치적인 계산이다.

일제는 물론 반도역사를 꾸미기 위해서라면 서양자연계학자들은 무엇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하였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구태어 순수한 학문이라면 똑똑한 조선인을 쓰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을 것인데 당시 조선에는 역사학은 물론 생물학 체계를 분류할 마땅한 인재도 없었다고 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긴가?

비록 1881년 대조선이 무엇으로부터 무너지고 해체되고 난 후 일어나는 기현상이라면 대조선의 백성은 있는데 나라가 해체 되어버렸으니 해체 되어버린 조선인들은 이미 조선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조선인이 없었다는 이치가 성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학자가 있지만 조선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세기에 한반도 전체에서 이루어진 안타까운 분류학적 역사의 문제점이다.

 

조선인인은 분명히 있었는데 1881년 해체되고 난 후부터 조선인은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게 많다.

바로 국적이라는 표딱지다.

한 예로 조선인은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등으로 변했고 더 나아가 일본인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예를 드는 것이 넌센스인가?

결코 넌센스가 아니다.

현재 미국처럼 독일계, 영국계, 프랑스계, 이태리계, 아시아계로 나뉘 것처럼 그런 형태를 상상할 수 있다.

고조선은 근세기 일제에 의해 한반도용으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조선의 실제국명을 명확하게 안다는 것은 바로 세계사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통일신라는 연합제국을 의미한다.

통일고려 역시 연합제국이다.

그래서 미국역사학자들은 united corea, 또는 korai 라 했다.

조선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맞다.

대한제국역시 그렇다고 본다.

그렇다면 연합국이고 연방제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 미국과 거의 틀리지 않는다고 보면 맞는 이야기가 된다.

 

한반도 식물분류정리를 한 서양학자들이나 일제식민학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한번보자.

한반도에 이식한 학명 꼬리에 이름을 붙이고자 안달한 사람들을 보면 그를 듯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모두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선교사이거나 식물어용학자들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54년 독일인 슐라이펜바흐(Schlippenbach, B.A)가 50종의 식물을 채집한 것을 러시아인 막시모비치(Karl Johann Maximowicz, 1827-1891)에 보내 한반도식물이 전 세계에 소개(?)하였으며 1901년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포리에(Faurie, R.P.)와 타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嚴宅基)신부가 1900년-1912년 사이에 국내 여러 지방의 식물을 채집하여 유럽으로 보내 후커(Hooker)·막시모비치(Maximowicz)·올리버(Oliver)등에 의해서 발표하게 했으며 1904년과 1910년 사이에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 겸 식물분류학자 레빌레(Augustin Abel Hector Leveille, 1864-1918)와 바니오트(Eugene Vaniot ?-1913)가 공동으로 작업까지 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다.

특히 일제압제 때 한반도식물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로는 나카이(中井猛之進.nakai, 1882-1952) 이외에 이시도야(石戶谷勉, Ishidoya)·우예끼(植木秀幹, Uyeki)·모리(森爲三, Mori) 등이 있는데 동경대에서 한반도 식물로 박사학위와 조선총독부의 촉탁식물학자로 활동한 나카이(nakai)는 정태현(鄭台鉉, 1883-1971)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식물을 대부분 정리하고 1971종에 달하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1909년 ‘Flora Koreana’를 발간했고 1911년에 그가 직접 채집 조사한 것을 포함하여 II권을 출판하여 1927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 식물 연구의 공이 크다하여 "日本学士院(The Japan Academy)桂公爵記念賞"을 수상까지 했다 한다.

또 경성의전의 모리는 1922년'조선식물명휘(朝鮮植物名彙)'에 160과 888속 2904종 506변종을 수록하였으며 해방이 되었음에도 주제넘게 1952년 나카이(nakai)는 최종 논문인'조선식물지경개(朝鮮植物誌梗槪)'에 한반도 식물을 223과 968속 3176종 841변종, 174품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발표하는 것도 부족해 특산식물이라하여 11속, 642종, 402변종, 74품종으로 보고까지 하였다 하니 조선인 학자들은 멍청하게 쌀만 축내고 앉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 해쳐먹는 것만 지켜보고 있어야 했단 말인가?

조선인 학자들에게 이들처럼 공명심이나 영웅심이 없었다는 이야긴가?

왜 이런 현상이 생겨야만 했을까?

우리민족이 변변하지 못해 생물학교육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지 말자.

그것은 누워서 침뱉기다.

그것은 일제식민학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일뿐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정리만큼은 매우 잘 하는 민족이라고 알려지고 글을 항상 읽는 민족이라고 자타가 공인해 오고 우리역시 그렇게 여겨져 왔다.

때문에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에서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나 임금의 어의였던 허준(1546-1615)의 동의보감(東醫寶鑑, 1597)등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이러한 문헌들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기록물이고 문화학적으로도 세계 우수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문서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특히 역사나 식물학분류만은 변변하지 못했을까?

변변하지 못했다기 보단 반도사관에 의한 후진국신세를 못면했다는 상황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당시 모든자료, 기록물을 보아도 식물학에서는 모두 서양, 일제학자들 판이고 조선학자들은 씨알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아예 막혀버린 것이다.

5000년 역사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나라가 어쨌던 살아 움직였다면 이럴 순 없는 것이다.

조선이 500년이란 사직이 있고 역사가 있다면 이러한 인재가 없다는 것은 역사와 문화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학명 꼬리에 이름 붙이는 것을 조선학자들은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역사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와 백성 모두를 누군가에 의해 통째로 도둑질 당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네이버자료를 보면 당시 조선에서 응용 동식물에 대한 기재와 재배 및 이용방법에 대해 기술한 문헌으로 기록된 것은 1431년(세종13)에 유효통(兪孝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이 160종의 약용식물의 재배법, 수확 및 조제법, 성질, 약효 등을 기록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있으며 1433년 노중례·박윤덕은 중국산 약재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미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있고, 1610년(광해군2) 허준(許逡)은 우리의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실은 “동의보감(東醫寶鑑)”까지 발간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1766년(영조42) 류중임(柳重臨)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수록된 약재의 소개와 채약법 등을 증보 발행하였으며 1884년(고종21) 황필수(黃泌秀)의 “방약합편(方藥合編)”, 강명길(康命吉)의 “제중신편(濟衆新編)”이 편찬되었다.

동물에 대한 보고로는 하연(河演)이 1422년에서 1425년에 출판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1469년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 토산부에 어류 21종을 소개하였고, 1434년 유효통·노중례·박윤덕 등의 “향약집성방”에는 하연이 발표한 것 이외에 7종이 첨가되었으며, 이행(李荇)은 1530년(중종25) 당대 학자 19명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토산부에 어류 46종을 기록하였다.

이미 응용동식물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말 실학부분에서도 보면 생물 연구에 대해서도 발전을 가져왔는데 1814년(순조14년) 정약전(丁若銓)이 저술한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인류(鱗類) 73종, 무인류(無鱗類) 43종, 잡충(雜虫) 4종, 해금(海禽) 5종, 해수(海獸) 1종, 해조(海藻) 35종에 관한 분류(명칭, 방언 및 한자명), 형태, 생태 및 이용 등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진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 단행 문헌으로서 귀중한 문헌이라고 할 만하다. 박물학적이기는 하지만 해산동물을 인위 분류하였으며, 내용상 수산학서(水産學書)라기보다 생물학서라고 까지 하였다.

정약전(丁若銓)은 서문에서 기초과학으로서의 박물학과 이를 기초로 하는 응용과학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자산어보”는 응용과학의 기초학이란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이 순수생물학의 범주에 있음을 분명히 한 점에서 우리나라 생물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정약전을 분명 생물학의 원조라고 까지 하였다.

다만 자연분류가 아니며 학명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서구방식의 근대생물학과 비교 할 수 없다는 점만 빠져지거나 비교될 뿐이다.

독창적인 면에서 기어코 서구방식을 따라갈 필요까진 없었다고 보이는 면도 보인다.

김로(金鑪)가 1821년 편찬한 “담정고(藫庭槀)” 중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는 어류 51종에 대한 명칭, 형태, 습성 및 시문을 기록하였고, 서유구(徐有榘)는 1834-1845년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집필하였다. 이 책의 전어지(佃魚志)에 어류 97종을 기록하면서 본인이 관찰한 것과 문헌(홍만선의 산림경제)을 인용한 것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개화기 땐 나름대로 서구 생물학의 소개가 있었는데 독립협회가 결성된 1896년과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 이후부터 서구의 생물학이 도입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생물학이 한문으로 번역, 소개된 책으로는 “박물신편(博物新編)”·“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보면 조선은 분명 후지거나 낙후된 사회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육인데 실제 인재를 양성하는 근대 교육이 실시되면서 원산학사(元山學舍)에서는 서양의 자연과학격인 격치학(格致學)을,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는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 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지학)을, 이화학당에서는(1889, 1892) (生理學, physiology)과 (科學, science)을, 배재학당에서는(1889) 생물학(生物學, biology)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갑오경장(1894) 이후 광혜원(제중원)은 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를 설립(1899)함으로써 서양의학을 통하여 생물학적 지식을 보급하였다 하였으니 서양이나 일제에 못지않는 교육체계가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가 이렇다면 우리가 역사학이나 자연과학에서 서양이나 일제에게 뒤질일도 없고 인재양성면에서도 부족하거나 미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카이(中井猛之進.nakai, 1882-1952)이가 1882년생이고 그의 제자 정태현(鄭台鉉, 1883-1971)이고 1883년생이라 한살차이가 나니 같은 년 배이다.

그런데도 스승이고 제자이다.

아마도 연구원이고 조수정도였을 것이지만 한반도조선과 일제 간 레벨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

 

또 하난 명확하게 알아 할 사실이 있는데 바로 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격치학(格致學)이다.

“物理学”的译法,而是多译为“格物学”或“格致学” 물리학을 번역한 것이고 격물학 또는 격치학이라 하였다.

격치(格致)란 말은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지식을 얻다란 뜻이고 청말(淸末)에 물리, 화학 등 자연 과학을 총칭한 말로서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격치학은 如1879年美国人林乐知将罗斯古编写的一本物理书翻译成汉语并命名为《格致启蒙》1879년 미국인 영 J 알렌(Yong John Allen, 1836-1907)에 의해서 처음번역되었다는 점이다.

이후1886年有译著《格致小引》,1889年又有《格物入门》出版.

 

그리고 알렌(Allen)은

林乐知在上海创办中西書院(Anglo-Chinese College)

培养中国现代化运动的人才。

第一次招生就招到学生四百多人,而当时圣约翰书院只不过七、八十人。

1882년에 상해에 중서서원이라는 학교를 세웠는데 1차 학생모집수가 400명다수이고, 당시 1879년에 설립한 성 존스대학(聖約翰大學, Saint John's University)은 7-80명이었다.
中西书院的正式校址建在虹口(今昆山路景灵堂对面,景灵堂原名景林堂,意为“景仰林乐知之堂”)

이 이름 자체가 많은 의미를 주는 것인데 자세한 것은 페이지를 별도로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한다.

그러니 1883년 통리기무아문주사(統理機務衙門主事) 정헌시(鄭憲時)가 세운 원산학사(元山學舍)보다 1년 빠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청(淸, 1616-1912)말기에 처음 들어왔다는 격치학이 이미 조선에도 들어와 격치학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청과 조선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실례인 것이다.

즉 청이나 조선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선 내에 청 정부가 대륙에 존재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같은 시기,  같은 동기로 함께 묶일 수가 도저히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가장 알고 싶은 사실은 실제 조선의 핵심, 지배권층이 있었던 곳, 존재한 곳은 어딜까?

이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알고자 하는 숙제이고 과제인 것이다.

어느정도 짐작은 가나 밝히기는 아직 이르고 그러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인내하며 끈기있게 풀어 나가면 확실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와

조선의 원산학사(元山學舍)는 원산항 통상 담당의 통리기무아문 주사인 승지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으면서 관민이 합심하여 1883년에 원산학사를 설립했다 하여 격치학(格致學)분야에서 리학(理學)즉 의학(醫學, medicine), 지리(地理, geography), 천문(天文, astronomy), 화훼(花卉, flowering plant), 금수(禽獸), 농리(農理), 기기(機器, apparatus)를 가르쳤으며 1886년 설립된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는 자연과학을 가르쳤고 이화학당에서는 생리학과 과학을, 배재학당에서는 생물학을 가르쳤으며 광혜원(濟衆院)은 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를 설립(1899)함으로써 서양의학을 통하여 생물학적 지식을 보급하였다고 자료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배출된 훌륭한인재들은 다 어디 갔는가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조선 식물분류학계를 좌지우지하던 나카이(中井猛之進.nakai, 1882-1952)도 나이도 따져보면 위 조선에서 이런저런 학교가 설립시기에 교육받았던 인물일 것이다.

1879년 미국인 영 J 알렌(Yong John Allen, 1836-1907)이 처음 번역한 격치학(格致學)을 이야기 한다면 결코 일제보다 교육기관의 설립이 늦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종합적으로 볼 때 격치학(格致學)은 서양자연과학인 이학(理學)즉 의학·지리·천문·화훼·금수·농리·기기를 번역하였다 하였으니 그렇고 자연과학을 가르쳤고 생리학과 과학을 가르쳤으며 서양의학을 통하여 생물학적 지식까지 완벽하게 교육 보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조선에서도 나카이 같은 인재가 수도 없이 많아야 했다.

그런데도 없다고 한반도 역사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일인지라 어느시기부터 조선의 나라와 백성이 통째로 없어진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명확해야 할 한반도 역사성의 난해한 문제점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덧붙일 것이 있는데 바로 박제가(朴齊家)가 에드워드(Edward Jenner) 동일인물이라고 할 기상천외(奇想天外)같은 실례가 있음도 우리는 분명코 알아야 한다.

 

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Edward Jenner)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

 

종두(種痘)에는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인두법(人痘法)과 에드워드 제너의 인공면역법(종두 접종법)에서 기원하는 우두법(牛痘法, cowpox)이 있는데 이 우두법(牛痘法, cowpox)을 1796년에 발견했다는 영국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조선 18세기 말에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라는 사실이다.

1881년 조선이 해체된 후 역사 새판짜기에서 한사람은 영어로 영국 사람으로 만들고 한사람은 한문으로 박제가란 사람을 만들었다고 보는 이유이다.

즉 대륙조선의 역사로는 영국사람이 한반도 역사로는 박제가가 맡았다는 이야기다.

이치적으로 따져보더라도 이 종두(人痘法)가 시행된 것은 인도(印度)라고 하는데 인도(印度)가 조선 (朝鮮)천축(天竺)이라면 12세기 무렵 송나라 사람역시 고려(高麗)사람이어야 하며 이러한 인두법(人痘法)을 바탕으로 연구한 사람이 바로 박제가란 학자이다.

 

나는 추측컨대 이러한 것들을 보면 당시 서양세력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던 모든 과학적 자료들은 바로 대륙조선, 삼한 가우리(caule)제국의 것이어야 맞는 것이다.

1900년부터 시작된 콩뽁듯한 식물분류정리는 언어를 다르게 하거나 역사를 다르게 분리시켜 세계영역과 한반도영역으로 분리하면서 당시 한반도에 자료 한 조각을 떼어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다.

 

얼마나 이름달기가 성행했으면 이렇듯 콩 볶듯 경쟁하였겠는가?

한 예로 자료에 보면 20세기 초 프랑스 선교사 신분의 레빌레(Leveille)는 그의 이름이 학명에 붙는 것을 마치 학살했다는 표현까지 받을 정도이었다고 하였으니 정작 조선역사에 따른 생물학분류에는 관심이 없었고 역사신생대라고 보는 한반도에 자신의 치적, 행적을 남기고자 한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도 앞으로 시간을 두고 따져 들어 갈 문제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레빌레(Leveille)가 연구한 프랑스자연사 박물관의 표본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왕립식물원에 20세기 초 싸게 팔려갔다는 것에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전해지며 에딘버러(Edinburgh)왕립식물원에 있는 한반도표본은 4000여 점이 넘는 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거대한 제국적 자료의 가치보다 그들이 학술적으로 이용하고 난 후 거의 한반도로 국한된 자료 가치성으로 볼 때 자료를 수급하는 자, 즉 관심사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반도역사 만들기에 광분하던 일제의 경도대학이나 동경대학 소장 표본수도 엄청난 숫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유럽 사람들이 당시 지정역학적 개념으로 따져도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산악지대인 한반도 식물에 무엇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고 특히 나카이(Nakai)와 그를 따른 일본학자들 논문들이 자기나라 열도생물학분류보다 오히려 열성적으로 자료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바빴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생각하게 한다.

학구파의 열정 때문에?

식민지를 삼기 위해서?

해방이 된 지금도?

이러한 콩 볶듯 한 일들이 다 주합(湊合)되어 1960년대에 L. A. Lauener에 의해 정리되고 세계참고 DB자료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이 현 한반도가 아닌 조선역사 생물학분류현황이며 대륙조선, 삼한제국 가우리(caule)의 역사가 붕괴되고 난 후의 세계현황이다.

차라리 현 한반도 역사가 해방이후의 역사로 독립 분리 전개된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해방이후의 역사가 아닌 그 이전 역사까지 포괄한 상탱에서 그러한 생물학분류와 함께 취급된다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학문연구이며 결과라는 사실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연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러한 문제점은 비일비재하게 들어나고 있다.

학명을 추척하다보면 분명히 조선이나 고려 삼한이라는 학명이 있음에도 한반도에 근거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생물들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밝혀 하루빠삐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상 우리가 찾고 연구해야 할 것은 한반도에 들어앉기 전 대륙역사의 근원지에서 모든 자연계 생물학근원지를 찾아 분류학체계를 세워야 한다.

그 근원지가 바로 우리의 올바르고 정당한 역사영역이기 때문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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