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불가리아(Bulgaria)와 고려(高麗)연합제국

한부울 2012. 3. 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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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Bulgaria)와 고려(高麗)연합제국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

 

 

 

유럽의 역사는 삼한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편에서 말했듯이 고려동경의 반란(高麗東京叛亂) 또는 경주민란은 신라 재흥(再興)이나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의 일환으로 발생한 민란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때문에 이 민란은 고려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바로 서양사 비잔티움제국 수도 신라의 경주, 고려의 동경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로마 즉 신라를 부흥 재흥하자는 민란이고 운동이었다는 말이다.

사실 러시아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의 주장을 보면 고대그리스, 고대 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반영함에 지나지 않았고,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트로이아 전쟁(Troia 戰爭)과 십자군(Crusades, 1096-1270)은 실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의 주장에서 공감하는 것은 바로 징기스칸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충헌이 러시아인이며 바로 몽골인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고려연합제국을 상대로 한 제4차 십자군 생성의 모순이라고 한다면 바로 배경이 되는 12세기 초 서유럽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물론 비잔티움제국역시 민란과 반란에 몰살을 앓고 있었지만 독일의 귀족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가(House of Hohenstaufen)가 노르만족의 시칠리아를 접수했고 잉글랜드 왕국(Kingdom of England)은 플랜태저넷(Plantagenet)왕가 출신 국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 재위1189-1199)가 죽은 이후 권력투쟁이 있었고 독일은 내전에 휩싸였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당시교황 인노첸시오 3세(Pope Innocent III, 1160 or 1161 -1216, 재임1198-1216)는 십자군을 다시 모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모든 전쟁을 하기 위해 모병하거나 징병할 때 세상이 시껍지 않아야 가능하다.

더군다나 종교를 앞세운 것이라면 더욱더 그러한 점을 따져 볼 것인데 시대상황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병이고 징집이라는 점에서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 생성의 중대한 결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슬람이 아닌 같은 기독교국가인 동방 정교회의 비잔티움 제국을 목표로 하였다 하면서 장사꾼인 베네치아(Venezia)공화국이 개입하여 파문에 이르게 되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종교적인 십자군에 상당한 이미지 훼손을 감수하는 것이며 어찌보면 억지스러움이 있는 역사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러시아학자 포멘코(Fomenko)의 주장을 빌릴 것도 없이 이치에 맞는 역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3세가 잉글랜드왕국 리처드 1세 뒤에 재위하는 존(John, King of England, 1166-1216,재위1199 -1216)왕과 생몰, 재위, 재임년도가 너무나도 같다는 사실이다.

혹 교황은 존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남을 정도이다.

 

각설하고

아무튼 이렇게 일어난 십자군은 로마제국의 복고 움직임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명목이 있으나 종교를 앞세운 십자군의 횡포에 오죽했으면 불가리아가 개입하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게 한다.

불가리아 군사개입은 당시 십자군의 야만적인 행동에 철퇴를 내리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이 제4차 십자군이 간 곳은 폐허가 될 정도로 참혹했다고 하니 이것은 옛 몽골군이 지나간 것과 진배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 그 또한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보인다.

“1204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이 도시를 유린했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약탈과 파괴는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을 낳았다.”

결국 십자군이 한 일은 1202년부터 시작하여 1204년을 끝으로 그들의 복고운동의 결산은 라틴제국을 세운다는 역사이다.

비잔티움제국이 고려이고 고려혼란기에서 발생된 신라부흥, 신라재흥이라는 운동이 동경반란 또는 동경민란이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난리라고 한다면 이 운동은 그리스 발칸 반도를 시작으로 유럽전체에 옮겨졌을 가능성을 생각 할 수 있고 고려연합제국 전체에서 이러한 사실을 도저히 지켜 볼 수 없었던 것으로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Kaloyan of Bulgaria, 재위:1197-1207)은 1205년 아드리아노플 전투(Battle of Adrianople)에서 라틴제국을 쳐부수고 보두앵 1세(Baldwin I, 1204–1205)체포하게 되고 결국 살해하는 것으로 마감된다.

 

1205 Battle of Adrianople The Bulgarian army defeats the Latin Empire and captures Baldwin I of Constantinople.

 

결국 동경반란에 불가리아가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불가리아!

이 나라는 어느 자료를 보아도 삼한이라는 사실을 속일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고려라고 판단되는 비잔티움제국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1205년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불가리아군인이 라틴제국을 패배시키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두앵 1세(Baldwin I, 1204–1205)를 체포하게 된다.

 

라틴제국의 보두앵1세를 체포한 칼로얀(Kaloyan of Bulgaria, 재위:1197-1207)은 제2차 불가리아제국의 차르(tsar)이다.

그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한 이반 아센 1세(Ivan Asen I of Bulgaria, 재위:1185~1196)의 막내 동생이었는데 1187~1195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고 형 이반 아센(Ivan Asen I)과 페타르(Peter IV of Bulgaria,1185-1190, 1196-1197)가 이반코(Ivanko of Bulgaria)에게 살해당하자 그를 죽이고 즉위했다.

그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기반을 닦아 그 후 이반 아센2세가 일으킬 번영의 초석을 닦았다.

그의 이름은 원래 이반(Ivan)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John II Komnenos, 1087-1143,재위:1118-1143)의 애칭인 칼로얀네스를 따라 칼로얀이라 개명했는데, 이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뛰어난 요한 혹은 잘생긴 요한이란 뜻이란다.

그는 마케도니아지방(Macedonia)과 트라키아(Thracia)를 정복하여 급속도로 팽창하였고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1161-1216)와 협약을 맺어 관계를 개선하고 왕을 칭호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또 그는 투르노보(Turnovo)의 대주교의 수위권을 인정받고, 주교 임명권까지 부여받았다.

그의 치세에 발칸 반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 라틴제국(1204-1261)이 건설되고 비잔티움 제국은 니카이아 제국(Empire of Nicaea 1204-1261)과 에페이로스 공국(Despotate of Epirus 1205-1479)으로 분열되는 등 비잔티움 제국을 약화시킨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칼로얀(Kaloyan)은 여기서 비잔티움 제국의 편을 들어 1205년 아드리아노폴 전투(Battle of Adrianople)에서 라틴제국군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1207년 그는 불만을 품은 쿠만족(Coman, Kun) 족장에게 암살당하고, 왕위는 보릴(Boril of Bulgaria, 재위:1207-1218)이 찬탈하였다.

 

여기서 불가리아가 삼한역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번보자.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의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란 제목의 글에서 보면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에서 송화(松花) 강, 눈(嫩) 강 유역을 지금의 만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Don river]

 

본 블로그가 판단할 때 만주는 북유럽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전체를 통 털어 지칭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송화강이나 눈강은 지금의 흑해(黑海)부근 쪽으로 옮겨 생각해야 할 명칭이다.

예를 들어 넌. 눈(嫩)으로 불리는 이 강은 돈(Don)강일 가능성이 높다.

또 그는 “중국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고 했으며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하였다.

또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고 적고 있다.

부여는 곧 고구려이라고 해야 맞다.

불자를 붙인다 하였으니 불가리아가 부여이다.

그렇다면 발, 벌, 불, 볼, 골, 굴, 갈, 걸 은 부여와 고구려와 연결된다.

그는 “발칸(balkan)이란 곧 부여이라고 하는 신채호선생의 암시가 있고 4세기말 요동부터 카스피해(Caspian Sea)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했으며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고구려 아발(Avars·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Don River)양안과 북 카캅스(Kavkaz, Caucasus)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다. 돈 강 하류, 흑해연안의 아발(Avars:유연:고구려 속국)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Avars)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고 하였다.

또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Kotrag)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구조는 한국어와 동일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라고 깔끔하게 정리까지 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 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란 글로 마친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로 보아 불가리아는 고려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비잔티움제국이 십자군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참전하여 복수를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제2차 불가리아 제국(1185-1422)

 

 

아센 왕조

페타르 2세 (1185년~1197년)

이반 아센 1세 (1185년~1196년)

칼로얀 (1197년~1207년)

보릴 (1207년~1218년)

이반 아센 2세 (1218년~1241년)

칼리만 1세 (1241년~1246년)

미하일 아센 1세 (1246년~1256년)

칼리만 2세 (1256년)

미코 아센 (1256년~1257년)

콘스탄틴 1세(티흐) (1257년~1277년)

미하일 아센 2세 (1277년~1279년)

이반 아센 3세 (1279년~1280년)

이바일로 (1277년~1280년)

몽골 지배 시기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테르테르 가문) (1280년~1292년)

스밀레치 (1292년~1298년)

차카 (1299년~1300년)

테르테르 왕조

토도르 2세 스베토슬라프 (1298년~1322년)

게오르기 2세 테르테르 (1322년~1323년)

시스만 왕조

미하일 3세 시스만 (1323년~1330년)

이반 스테판 (1330년~1331년)

이반 알렉산더르 (1331년~1371년)

이반 시스만 (1371년~1393년)

이반 스트라치미르 (1371년~1396년)

 

비잔틴 제국의 오랜 지배를 끊은 것은 1185년 아센(Ivan Asen I of Bulgaria,재위:1190-1196) 과 페타르 형제(Peter IV of Bulgaria,재위:1196-1197)의 봉기였다. 이반 아센 1세와 페타르 4세는 국가의 기초를 닦았고, 그들의 막내 동생 칼로얀(Kaloyan of Bulgaria, 재위:1197-1207)의 치기에 영토를 크게 넓혀 예전의 면모를 되찾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반 아센 2세(Ivan Asen II of Bulgaria,재위:1218-1241)의 치기에 불가리아 제국은 전성기를 맞게 되어 독립된 수좌주교구와 넓은 영토를 차지한 발칸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 후 몽골의 진출과 어린 차르들을 둘러싼 왕위계승다툼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콘스탄틴 1세(티흐)(1257-1277) 시절에는 봉건 귀족들의 힘이 강력해져서 사회기강의 문란해지면서 경제는 궁핍해졌다. 결국 1280년에 이바일로(Ivailo)의 농민반란으로 아센 왕조(1185-1280)는 단절되었고, 이 상황에서 킵차크 한국의 섭정 노가이(Nogai Khan, 재위:?-1299)가 불가리아를 장악하면서 쿠만(coman, kun)족 계통인 게오르기 테르텔(George Terter I, 재위:1280-1292)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불가리아는 근 20여년간 몽골의 속국이 되어 군주도 몽골 마음대로 바뀌었다.

 

그러던 중 게오르기 테르텔의 아들인 토도르 스베토슬라프(Theodore Svetoslav of Bulgaria,1270-1322, 재위?1300-1322)가 등장하여 몽골군을 격퇴하고, 분열된 국가를 재통일하여 새로운 중흥기를 이끌었다. 스베토슬라프 사후 시스만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시스만 왕조는 혈통적으로는 이반 아센 2세의 외손녀의 아들인 시스만에서 출발하여 그의 아들인 미하일 아센 3세가 개창하였다. 그러나 미하일 시스만(Michael III Shishman of Bulgaria, 1280-1330,재위:1323-1330)은 세르비아의 스테판 데챤스키(Stephen Uroš III Dečanski of Serbia,1285-1331.재위:1322-1331) 와의 벨부즈드(Velbazhd, Kyustendil,1330)전투에서 패한뒤 전사하였고, 이후 불가리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차르 이반 알렉산다르(Ivan Alexander of Bulgaria, 재위:1331-1371)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Stephen Uroš IV Dušan of Serbia,1308-1355, 재위1331-1346,1346-1355 )과 비잔티움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국가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오스만 제국이라는 강력한 적에 맞부딪히게 된다. 이반 알렉산다르는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두 아들에게 제국을 분할 상속하여 이반 시스만(Ivan Shishman of Bulgaria, 재위:1371-1395)은 터르노보(Veliko Tarnovo)지역을, 이반 스트라치미르(Ivan Sratsimir of Bulgaria,재위:1356-1396)는 비딘(Vidin) 지역을 상속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터르노보 왕국은 1393년에, 비딘 왕국은 1396년에 멸망하고 제2제국은 실질적으로 멸망하였으나 이반 알렉산다르의 손자 콘스탄틴이 아직 저항하고 있었고, 14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1395년에서 190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879년,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상태에서 불가리아 공국이 세워짐

1908년,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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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년에 있었던 아드리아노플전투(The Battle of Adrianople)

 

 

 

The Battle of Adrianople occurred on April 14, 1205 between Bulgarians under Tsar Kaloyan of Bulgaria, and Crusaders under Baldwin I. It was won by the Bulgarians after a skillful ambush using the help of their Cuman and Greek allies.

1205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전투(Battle)는 4월 14일, 불가리아(Bulgaria)의 차르 칼로얀(Tsar Kaloyan)지휘아래 불가리아군대와 보두앵 1세(Baldwin I)의 아래에 있는 십자군(Crusaders) 사이에서 벌어진 것인데 불가리아군대는 쿠만(Cuman)과 그리이스의 동맹국의 도움과 협조로 능숙한 매복에 의해 승리한 것이다.

Around 300 knights were killed, including Louis of Blois, Duke of Nicaea and Baldwin was captured and later died in captivity.

300명의 기사가 죽었고 블와(Blois)의 Louis를 포함하여, 니케아(Nicaea)의 두크(Duke)그리고 보두앵 1세(Baldwin I)를 사로잡아 후에 죽였다.

The Bulgarians then overran much of Thrace and Macedonia.

그리고 나서, 불가리아군대는 더 많은 트라키아(Thrace, Balkan 반도의 에게해 북동해안 지방)와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점령했다.

Baldwin was succeeded by his younger brother, Henry of Flanders, who took the throne on August 20, 1206.

보두앵 1세(Baldwin I)는 그의 남동생, Flanders의 앙리(Henry,1206–1216)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1206년 8월 20일에 왕위에 오른다.

The main source document for this battle comes from the Chronicles of Geoffrey de Villehardouin.

이 싸움을 대한 원천 문서는 Geoffrey de Villehardouin의 Chronicles로부터 나온다.

중세 역사서인 발아르두앵(Geoffrey of Villehardouin, 1167-1213)콘스탄티노플의 정복

Chronicles :구약 성서의 역대기(歷代記)

"Kaloyan, Tzar (Emperor) of Wallachia and Bulgaria, came to succour Adrianople with a very great army. He brought with him Bulgarians, Wallachians, and a full fourteen thousand Cumans who had never been baptised."

"왈라키아(Wallachia)와 불가리아제국의 차르 칼로얀(Tsar Kaloyan)는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을 돕기 위해 불가리아인, Wallachians, 그리고 baptised 되지 않은 일만사천 의 쿠만(Cumans)의 위대한 군사들과 함께 왔다"

It was arranged by the Crusaders that Geoffry the Marshal, and Manasses of l'Isle should guard the camp, and that the Emperor Baldwin and all the remainder of the army should issue from the camp if Kaloyan came and offered battle.

십자군(Crusaders)은 배열되었는데. 제프리(Geoffry) 사령관l, 그리고 라일사(l'Isle)의 매너세스(Manasses)는 그 야영지를 보호해야 했다. 그리고 차르 칼로얀(Tsar Kaloyan)이 왔고 싸움을 하게 되면 보두앵 1세(Baldwin I) 군대는 야영지로부터 나머지는 나와야 했다.

Thus they remained till the Wednesday of Easter week, and Kaloyan had by that time approached so near, that he encamped at about five leagues from the Crusaders.

그래서, 그들은 부활절부터 수요일까지 일주일이나 그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시간에 Kaloyan은 매우 가까이 접근했다. 그는 십자군(Crusaders)로부터의 대략 다섯 동맹에서 야영하는

Kaloyan sent his Cumans running before the enemy camp.

차르 칼로얀(Tsar Kaloyan)은 적 야영지에 쿠만(Cumans)를 보냈다.

A cry was raised throughout the camp, and the crusaders rushed out to meet their foe.

외침은 그 야영지에 올려퍼졌다. 그리고 그 십자군 전사는 적과 대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They pursued the lightly armored Cumans for a full league.

그들은 엄청난 수의 기수의 쿠만(Cumans)를 건성건성으로 추적했다.

The rout of the Cumans turned out to be a feigned rout, for when the Crusaders wanted to return to the camp, the Cumans turned around and began to shoot at them, wounding a good many of their horses.

그러나 십자군(Crusaders)이 그 야영지로 돌아가려는 찰라에 쿠만(Cumans)이 달려들었고 발사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말을 쏴 상처를 입혔지만 쿠만(Cumans)의 무질서한 공격을 거짓으로 위장한 것을 모르고 달려들었다.

As the crusaders returned to the camp, the barons were summoned to the quarters of the Emperor Baldwin.

그 십자군 전사가 그 야영지로 돌아간 대로, 그 남작은 보두앵 1세(Baldwin I)의 막사에 소환되었다.

They took counsel, and agreed that if Kaloyan would attack again, they would set themselves in array of battle before the camp, and not pursue the enemy when they turned around.

그리고, Kaloyan이 다시 공격할 것이라면서 그들은 그 야영지에 싸움의 걸면 정렬하여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그리고 그들이 돌아 갈 때 따라다니지 말자고 약속했다.

The next day, the Thursday morning in Easter week, while the crusaders held mass, the Cumans again ran up to their tents.

그 다음날에, 부활절부터 일주일이 되던 목요일 아침, 그 십자군 전사가 무리를 짓고 정렬을 하는 동안, 쿠만Cumans)은 그들의 천막까지 다시 달려 들었다.

The Crusaders ran to arms, and issued from the camp with all their battalions in array, as they had agreed.

십자군(Crusaders)은 급히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약속에 따라 그들의 모든 진영에서 야영지로부터 나와 정렬했다.

Count Louis went out first with his battalion, and began to follow after the Cumans, and sent a messenger to urge the emperor to follow him.

백작 루이스(Louis)는 그의 대대가 밖으로 나가 쿠만(Cumans)를 따라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황제에게 그를 따르도록 권하기 위해 심부름군을 보냈다.

Count Louis followed in pursuit of the Cumans for at least two leagues, and caught up with them.

백작 루이스(Louis)는 두 팀을 만들어 쿠만(Cumans)를 추격해 뒤따랐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잡았다.

The Cumans then turned upon them, and began shooting.

그리고 나자, 쿠만(Cumans)은 그들앞으로 돌았다. 그리고 발사하기 시작했다.

The desperate fight that followed lasted for several hours, but in the end, all Crusaders were slain or fled the field.

필사적인 싸움은 수 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모든 십자군(Crusaders)은 들판에서 죽거나 달아났다.

On the battlefield remained the Emperor Baldwin, who swore to never flee, and Count Louis.

포로된 백작 루이스(Louis)는 달아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싸움터에서, 보두앵 1세(Baldwin I)만 남았다.

The Emperor Baldwin was taken prisoner and Count Louis was slain.

보두앵 1세(Baldwin I)는 포로로 붙잡혔고 백작 루이스(Louis)는 죽었다.

Among the slain crusaders were:

그 살해는 십자군 전사 사이에서 있었다.

The war against Kaloyan and Theodore Lascaris continued.

차르 칼로얀(Tsar Kaloyan)과 니케아제국 테오도루스 1세(Theodore Lascaris, 1174-1222, 재위:1204-1222)에 저항하는 전쟁은 계속되었다.

In 1207 the Bulgarians attacked and killed Marquis Boniface of Montferrat at Messinopolis.

1207년 불가리아군대는 메시노폴리스(Messinopolis)에 있는 이탈리아북부(Northern Italy) 몬트페라트(Montferrat)출신 보니파스후작(Marquis Boniface)를 공격했고 죽였다.

He was beheaded and the head was sent to Kaloyan.

그는 목이 베어졌고 그 머리는 차르 칼로얀(Tsar Kaloyan)에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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