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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베이징에 있는 태화전과 중화전은 북경의 정전(正殿)인가?
외집 9권
연기(燕記)
1765년(영조 41)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서 견문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1766년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약 3개월간의 기록으로 그의 문집인<담헌서(湛軒書)>의 외집 7∼10권에 들어 있다.
태화전(太和殿)
太和殿。大朝會正殿也。南有太和門。在午門之內。左昭德門。右貞度門。東有協和門。在東華門之內。西有煕和門。在西華門之內。北有中和殿。單簷圓閣。中和之後。爲保和殿兩簷。保和之後。爲中禁大內。惟見彩瓦峻甍。聳峙于瑞靄中而已。太和正殿三簷。高可百丈。南北三間。東西九間。一間之大。可二十尺。
태화전은 큰 조회를 보는 정전(正殿)이다. 남쪽으로 태화문(太和門)이 있는데 오문(午門) 안에 있고, 왼쪽이 소덕문(昭德門), 오른쪽이 정도문(貞度門)이다. 동쪽으로 협화문(協和門)이 있는데,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고, 서쪽으로 희화문(熙和門)이 있는데 서화문(西華門) 안에 있다. 북쪽에 중화전(中和殿)이 있는데 홑처마에 둥근 집이다. 중화전 뒤가 보화전(保和殿)인데 겹처마로 되어 있고, 보화전 뒤가 중금대내(中禁大內)인데 채색 기와와 높은 지붕이 영롱한 아지랑이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태화전 정전은 3충 처마에 높이가 백 길이나 된다. 남북이 3칸이고 동서가 9칸인데 한 칸의 크기가 스무 자는 된다.
丹陛高丈許。陛南月臺。可坐數百人。諸王,貝勒,閣臣所朝謁也。東有日影臺。石柱高十餘尺。西有石爐。亦丈餘。如長明燈制。列鐵龜鐵鶴各一雙。皆神聳如活。臺下爲階三級。高一丈有半。每級。翼以石欄。欄高齊肩。上下置靑銅香爐十八。朝會時所燒香也。階南之庭。可坐萬人。卽千官所朝謁。列有品牌有次。朝班之嚴。可見也
붉은 섬돌[丹陛]의 높이가 한 길은 되는데 섬돌 남쪽에 있는 월대(月臺)는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제왕(諸王)ㆍ패륵(貝勒)ㆍ각신(閣臣)들이 조알하는 곳이다. 동쪽으로 일영대(日影臺)가 있는데, 돌기둥의 높이가 10여 척이 되었고, 서쪽으로 돌화로[石爐]가 있는데 역시 한 길이 넘었다. 장명등(長明燈)처럼 만들어 세워놓은 쇠거북과 쇠학을 각각 한 쌍씩 세워 두었는데 모두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대(臺) 밑은 뜰이 세 계단인데 높이가 한길 반은 되고, 매 계단마다 돌난간을 붙였는데 난간 높이가 어깨와 닿았다. 위아래에 청동 향로(靑銅香爐) 열여덟 개가 놓였는데, 조회 때 향을 사르게 된다. 뜰 남쪽 마당은 만 명이 앉을 만한데 이른바 천관(千官)이 조알하는 곳이다. 품패(品牌)가 열지어 순서대로 세워져 있으니 조정 반열의 엄격함을 볼 수 있었다.
百丈-1장(丈)은 10자[尺]이며 미터법의 3.03m에 해당한다. 중국 주(周)나라에서는 8척을 1장이라 하고, 성년 남자의 키를 1장으로 보았다(당시의 1척은 지금의 1척보다 작았다). 사람의 키만한 길이를 '한길'이라고 하는 것도 거기서 유래된 듯하다[네이버 백과사전]
위는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에 쓰여진 기록을 보면
청나라 중화전을 태화전 북쪽에 중화전(中和殿)이 있는데 홑처마에 둥근 집이라 했는데
그러나 현재 중화전(中和殿)을 보면 홑처마까지는 맞는데 전혀 둥글지 않다.
[관리가 전혀 안된?-1906년에 촬영한 한반도 경복궁]
신중국이 들어 설 시기 1882년 부터 이 건물이 북경 건물로 역사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모습이 촬영되기 이전까지 이 건물은 관리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았던 공지, 폐허상태로 있었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생각컨데 지금 베이징이나 한반도는 어느순간의 지배력이 상실된 권력의 주체가 쫓겨가거나 해체되어 그 동안 전혀 관리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공지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모습은 한반도 경복궁을 보는 듯하다.
*********[圓閣]
둥근지붕-天坛(单檐圆攒尖)
지붕이 둥글다면 위 같은 건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태화전의 설명을 보면 태화전 정전은 3층 처마에 처마 높이가 백길이라 하였으니 한 길은 8-10자인데 2.4m -3m 라면 백길은 240-300m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높이다.
보통 사람의 키 길이를 한길이라고 하니 170cm 이면 백길이면 약 170m가 된다.
옛 사람들은 현재 사람들 보다 평균적으로 키가 작았다고 보고 160cm 라고 하면 160m이다.
그렇더라도 굉장한 높이다.
지금으로 보면 건물높이가 약 50층 정도이다.
현재 베이징에 있는 태화전은 3층이 아닌 2층 처마의 건물이며 건물 높이는 35m 이다.
홍대용의 기록과 지금 청나라 수도라고 하는 베이징(북경)의 태화전의 모습이 왜이렇게 다를까?
또 분명 기록에는 붉은 섬돌의 높이가 한길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베이징에 있는 태화전 계단에 붉은 돌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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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檐]-太和正殿三簷。高可百丈。南北三間。東西九間
[9开间大雄宝殿(三檐)]
[三簷]
이를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이 청나라에서 견문한 바를 기록한 책인데 홍대용이 잘못보고 기록한 것인가?
잘못보아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가?
150-160m 높이의 왕궁?
현대에 와서도 과연 그렇게 높이의 궁전이 존재하였을까 상상하기 힘든 궁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궁전이 있었던 북경은 베이징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지금은 찾을 수 없도록 감쪽같이 지워버렸다고 해야 맞지 않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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