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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서울에 있는 중화전은 조선 중화전이 맞는가?
진연의궤(進宴儀軌)는 대궐 궁의 잔치의 규모나 의식절차에 따라 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수작(受爵)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719년(숙종 45) 4월부터 9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숙종이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됨을 경축, 진연을 베푼 기록인 <진연의궤>인데 아래 그림은 이 책에 실린 중화전(中和殿) 도식(圖式)이다.
여기에 그려진 중화전(中和殿) 도식(圖式)을 보면 현재 중화전(中和殿)과 모습이 확연하게 틀린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본래는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하고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으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고 한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고종(高宗, 1852-1919,재위:1863-1897, 1897-1907)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며 1895년 명성황후(明成太皇后, 1851-1895)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 또는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하는 사건을 겪고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국역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 35년 무술(1898, 광무 2) 1월23일 (정미, 양력 2월 13일) 맑음 기사에
태극전을 중화전으로 개호하라는 조령
○ 조령을 내리기를,
“태극전(太極殿)을 중화전(中和殿)으로 개호(改號)하라.”하였다.
이것을 반도사가 경운궁(慶運宮)을 지금의 덕수궁(德壽宮)라 하면서 1898년 이 경운궁에 있었던 태극전(太極殿)을 중화전(中和殿)이라고 고쳐 부르게 했던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설명에서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라 했으며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月臺) 즉 궁궐의 정전(正殿)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대는 상(上), 하월대(下月臺)로 구성되어 있고 하월대(下月臺)는 3단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넓은 대라고 하였는데 상월대나 하월대 모두 신하나 아관들이 앉으면 얼마나 앉겠는지 의문이 들정도로 넓지 못하다.
그리고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때 본래 중층(中層, 2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하고 있다.
기록과 현재 보는 건물이 왜 이렇게 차이나고 다를까?
그리고 왜 중화전 도식처럼 왜 똑같이 복원하지 않았을까?
그래놓고 무슨 연유로 중화전(中和殿)이라고 불렀을까?
돈이 없었어?
게을러 복원하기 싫어서?
반도사가 주장하는 왕조가 너무 무능했기때문에?
다 쓸데 없는 말이고 한반도에 반도사를 맞추기 위한 일제에 의한 창조적 행위예술이었다고 답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모습이 달라진 반도사의 이유에서 이상한 것은 한결같고 똑같은 레파토리(repertory)로 일관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화재이다.
본래 중화전의 모습이 다른 것은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등이 중건되었으며 1906년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고 하는 너무나도 똑같고 비슷비슷하며 식상한 화재 이야기가 거듭거듭 나온다.
한반도에는 외침도 많았단다.
이 좁은 한반도가 무엇이 있어 이렇듯 외침이 많았을까?
광대한 역사를 한반도 좁은 곳에 축소시켜 모아놓으니 그 광대한 역사를 소화시킬 수도 없었겠지만 내용상으로도 사건이 중복되어 시도때도 없이 전쟁과 외침이라하여 전란이 끝이지를 않았던 것이 간결하고도 확실한 이유이다.
한반도의 남아 있거나 또는 남아 있지 않는 모든 유적이나 건축물들이 본래의 것과 다른 이유와 또는 사라지거나 손괴되거나 없어진 이유는 모두 전쟁, 난리에 의한 화재로 인한 소실, 파괴, 손괴라 둘러대고 있는 한심한 역사 사실을 우리는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려니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高宗, 1852-1919,재위:1863-1897, 1897-1907)이 나중에는 2역, 3역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감히 생각한다.
반도사를 보면 고종은 적어도 3인은 되어야 한다고...
(1)1863년 재위로 부터 1881년 조선이 망할 때까지의 고종
(2)1882년 부터 또 하나의 조선이 1897년 대한제국에 흡수 될때까지의 고종
(3)마지막으로 1897년 부터 1922년(오스만제국이 해체되는 시점) 해체 될때까지의 광무제(光武帝)칭호를 달았던 고종
이 중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은 과연 어디에 속할까?
괜한 유적이나 오래된 건물을 화재에 날려버린 사실이나 조선말 고종이란 이름으로 많은 역할 다역을 하게 만든 것이 일제가 창조한 반도역사이다.
이와같은 사실에서도 아직까지 역사학자들은 죽어도 그래야만이 새롭게 역사를 조작할 수 있었거나 꾸밀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들어나고 있는 이러한 거짓의 역사를 어떻게 믿으란 소린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하나같이 화재로 소실되거나 없어졌다고 하면 모든 역사를 한순간에 뒤바꿀 수 있다는 음흉한 꼼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후세인들이 영원히 알 수 없고, 도저히 눈치 챌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가당찮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반민족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화재나 전란에 의한 소실이라면 반드시 복원을 해야 하거늘 더군다나 제왕이 거쳐 하던 궁궐을 얼렁뚱땅 그냥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원래의 궁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만들고 그것을 임금이 똑 같은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것은 절대적인 왕조 봉건왕권시대때 정황을 생각 해 볼 때 개가 하품할 이야기며 소가 웃을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믿으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던 세월?
한심하고 반환시키고 싶은 세월이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
어쨌던 이러한 거짓역사를 무조건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 반도역사의 실체이다.
오늘날 명경같이 밝은 세상에 후세인들이 일제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느끼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쥐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반도사학자, 식민사학자들은 침묵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그렇지 않다고 광분한다.
그러한 거짓의 역사를 믿고 따르라고 요구하고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거짓 사실을 암기하라고 강요하니 이게 어떻게 올바른 역사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거짓이 아닌 진실의 역사를 확실하게 밝히고 지금 배우는 역사는 과거 삼한의 역사가 아니라 근세기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반도역사라고 가르쳐야 마땅한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역사교육이다.
역사학자로서 양심에 의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삼한의 역사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모든 일에서 진실을 지향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아니겠는가?
거짓을 가르쳐 놓고 진실을 말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 잘못되면 뿌리, 근원이 잘못되는 것은 고사하고 나중에 사회 문제가 발생하여도 그들만을 탓할 수가 없는 암울한 현실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고민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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