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까?

한부울 2012. 1. 14.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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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까?

 

글쓴이:한부울

 

이게 무슨 말인가?

그리스 전역에서 코라이(korai)란 도로명이 이상하게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스(Greece) 도시에 산재된 코라이(korai) 도로명(道路名)

Korai 36, Kalamaria 55132, Greece

Korai 15, Karditsa 43100, Greece

Korai 2, Larissa 41223, Greece

Korai 34, Volos 38333, Greece

Korai 8, Janina 45500, Greece

Korai, Kerkyra 49100, Greec

Korai 21, Patra 26222, Greece

Korai 1, Athina 10564, Greece

Korai 67, Moschato 18345, Greece

Korai 68, Egaleo 12241, Greece

Argenti Museum and Korai Library, 치오스섬(Chios) 에게해(海)

 

[클릭원본]

 

놀랍게도 그리스 전역 10개 도시의 도로이름이 코라이(korai)로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분명 코라이(korai)는 우리나라 코리아(corea)를 지칭하는 대칭명칭이다.

서양인들은 일찍이 우리나라를 corea 또는 korai 라고 칭했다는 사실이 분명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명칭인 코라이(korai)를 그리스 도시의 도로 명으로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나먼 그리스 땅에 이민을 갔거나 아니면 노예로 팔려가 그곳에서 자리를 틀고 향수를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반도사학자들은 이유를 갖다 붙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 둘이 아닌 10개 되는 도시 그것도 지리상 표시를 보니 그리스 전역이라고 할 만큼 다수 도시에 korai 라고 명명한데는 그와 같은 답은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민이니 노예니 하는 따위는 식민사관의 연장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어 신뢰가 떨어진다.

여기서 적어도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역사적 깊은 의미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자료의 한계 때문에 구체적인 증명이 곤란하여 우리가 구하고자하는 깊숙한 역사적 의미를 당장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개략적 의미를 보는 것에 만족 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자료를 만들고 증명해 나가고 있지만 삼한의 역사가 유라시아까지 더 나아가 지중해연안과 북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등을 연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진발생 장소를 바탕으로 탐구한 자료가 있어 그것에 따른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도 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야 할 역사적으로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하겠다.

삼한의 역사 찾기에서 그리스가 삼한의 고구려라는 사실은 이미 지진발생기록을 바탕으로 본 블로그에서 밝혔듯이 어느 정도 짐작하고 확인까지 하기에 이르고 있지만 솔직히 그리스 전역에서 삼한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정도라면 그리스인들에게 정서적인 면에서까지 삼한 특히 고구려나 고려의 이름인 korai 가 깊숙하게 묻어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도시의 도로명이란 단순한 판단을 뛰어 넘는 수준이고 자체가 문화이고 역사라고 감히 진단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도역사만 알고 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문화와 역사는 수도 없이  많다고 여겨진다.

근세기 서양인들은 예수회, 또는 기독교를 매개로 그리스와 로마를 서양문화의 표본인 것처럼 모든 역사사실에서 우월성을 담아 들어내 놓고 있지만 분명 서로마는 백제와 신라로 역사 속에서 모습이 나타나고 동로마 그리스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혼입되어 역사에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만 없다.

이와 같은 사실만으로도 우리 삼한의 역사를 서양인들이 자기네 역사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의문이 많다.

결국 그리스와 로마전체를 본다면 고구려, 백제와 신라 즉 삼한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혼입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연구할 과제인 것이다.

물론 서양인들이 내세우기 좋아하는 종교조차도 따지고 들면 역시 삼한의 원시불교와 배화교가 회교와 기독교로 둔갑하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고 있는 마당이다.

서양종교의 뿌리가 원시불교와 배화교란 사실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한이 가진 종교철학이 서양종교 교리의 기초로 둔갑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좀 더 관찰하여 밝혀야 할 사실이지만 중세기에 생뚱맞게 갑자기 등장한 십자군의 실체가 아무래도 이와같은 사실에서 꾸며 넣기한 허상의 역사가 아닌가 의심되는 내용이다.

이것은 서양사의 근본이지만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우리가 반드시 밝혀야 할 사실이다.

어쩌면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중간에 십자군을 등장시켜 종교와 문화, 역사모두를 서양인들의 고유 역사인 것처럼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 미래의 역사가 밝힐 것들이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척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스에 남아 있는 korai 에 대한 연구만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개념은 한마디로 고집과 아집으로 뭉쳐진 안방역사라 할 수밖에 없다.

과거 역사의 진실이 어떠하던 간에 그들이 알고 있고 암기하여 기억하고 있는 안방역사만 지키면 되는 안일과 안주에 빠져 과거 일제 논리에 함몰되었어도 그것조차 분간을 할 수 없는 기형적인 사고에 차 있다는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앵무새처럼 내깔리는 것은 일제가 만들어준 역사말고는 알지 못한다.

그 이상 연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과거 일제가 만들어 준 반도역사를 비판하는 역사학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건만 마무가내식으로 비호하고 지켜려고 만 한다.

그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일제망령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속일 수가 없다.

구한말 1929년때 조사를 보면 당시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문맹율(文盲率)은 거의 90%이었다는 사실에서 안주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인들은 현대에 이르러 급속하게 산업발전이 이루어지면서부터 동시에 엄청난 교육발전에 힘입어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명석하고 똑똑한 국민이 되었다.

국민정서와 의식이 날로 진보되어 어느덧 세계가 알아주는 일등국민이 되었지만 역사만큼은 문맹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이다.

그것은 과거 친일파 교단 뿌리에 매여 더 이상 발전을 할 수 없는 답보상태에 빠져있고 개인영달과 출세에만 눈이 멀어 미래를 위한 역사연구고 뭐고 진전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저 퀘퀘하고 구질구질한 식민사관 반도역사만을 되새김질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부이다.

어떤 역사든지 발전하고 진보해야 한다고 했다.

시대가 변하는 것 만큼 달라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국민들의 기본 시각과 의식이 변했기 때문에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도역사, 식민사관이 이에 대한 욕구를 철저하게 막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 역사 순리적인 흐름을 막고 있는 바이러스고 병폐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에 코라이(korai)란 단어가 왜 그리스 전역에서 도로 명으로 명명되었으며 그것도 10개 도시에 산재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연구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여태까지 이에 대한 논문 글 한 줄 찾아보지 못했다.

일반사람들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이러한 점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왜 의문을 가지지 않으며 모른척하고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그들의 보잘 것 없는 기득권이 하루아침에 날려버릴까하는 공포심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역사암흑기, 병탄기에 일제가 관리하고 넘겨준 조작된 식민사관으로 도배가 된 반도역사사서만 끌어안고 그것이 최상의 진리라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밝혀지면 그들이 설 땅이 없다는 불안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 어찌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겠는가?

일제가 만들어 놓은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의 역사란 틀을 깨뜨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그들에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교육이 무섭다는 것이다.

한번 교육받고 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까지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일반 국민들이 고급정보를 접하고 나서 역사학자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다.

꼬리타분한 교육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인터넷이란 대중적 문명의 이기에서 출발한 범 지식 자발적 운동은 이미 모든 상식을 뒤바꿔놓고 있다.

일반 민중들이 새로운 정보, 새로운 지식을 접하다 보니 상식도 날로 발전하고 생각도 진보적으로 변하면서 어느듯 의식도 진보적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환경에서 세계에 널 부러져 있는 삼한의 역사자취는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궁금증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으며 지식탐구욕구가 넘쳐나는 것이다.

때문에 누구라도 나서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

과거 역사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현대적 상식에 근거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은 밝히고 공론화하면서 열린 공간에서 연구하고 검토하고 그래서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도록 해야 만이 특별하게 자료가 없는 우리나라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 마땅히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앞장서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들은 거짓역사 틀에 갇혀 식민사관인 반도역사를 정사(正史)로 믿고 그러한 상식에 병들고 찌들어 다른 역사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이란 대중적인 정보매체 때문에 누구나 새로운 정보나 자료를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인식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대 변화가 낳은 과제이다.

이제 과거와 다르게 신분의 한정된 정보소유가 아니라 이젠 모든 학문의 고급정보가 노출이 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 한정된 암기력을 바탕으로 한 기억한 정보만 가지고는 새로운 정보질서에 참여 할 수가 없으며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논리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란 사실이다.

과거 거짓 역사에 집착한다는 것은 스스로 과거에 집착하고 몰입할 수밖에 없는 편집증 환자일 수밖에 없다.

역사가 어찌 고급인력 그들만의 학문인가?

환자는 치료가 급선무이지 학문은 개똥일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도 이제 마음만 먹으면 고차원적인 지식을 취할 수 있고 비판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 상식 역시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란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여태껏 모르고 있었던 역사사실을 대중적으로 알게 하여 기존 역사틀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제 거짓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거짓투성인 식민사관,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반도역사에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사회 밑바닥이 거짓의 똥더미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기존 역사 틀을 과감하게 깨뜨려 버려야지 바른 역사, 참역사가 우리 것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의심되면 이젠 검색하면 다 밝혀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인 것이다.

때문에 역사는 이미 학자만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제 도래된 시대를 맞아 하루바삐 식민사관인 반도역사에서 탈피하여 생각과 사고를 넓혀야 할 때가 지금인 것이다.

 

코라이(korai)란 단어가 왜 그리스 전역에서 도로 명으로 명명되었으며 그것도 10개 도시에 산재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코라이(korai)란 명칭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먼저 서양인들이 우리나라를 코라이(korai)라 한 예를 보자.

본 블로그에서 올린 글이다.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Name and periods of history

Its mediaeval! name was korai (domain of ko the founder) whence our term corea, from the Peking jesuits coree.

Asiatic history WM. Elliot Griffis(1843-1928)

New York: Phillips and Hunt, 1881

 

위 글에서 보면 WM. Elliot Griffis(1843-1928)란 미국인이 쓴 아시아인의 역사(Asiatic history)의 년대기와 명칭의 역사(Name and periods of history)편에

Its mediaeval! name was korai (domain of ko the founder) whence our term corea, from the Peking jesuits coree.

The Middle Ages, 중세의(서기 약1000년에서 1450년 사이)이름은 코라이(korai)="ko"란 도메인(영역)이라 하였고 꼬레(coree)북경(Peking:베이징과 다른 곳)예수회에서는 어디서든 코리아(corea)라 했다.

여기서 분명 코리아(corea)를 코라이(korai)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코라이(korai)는 코리아(corea)이다.

또 한가지, 꼬레(coree)에 있는(소속) 북경(Peking:현 베이징과 다른 곳)예수회라는 뜻인데 이 꼬레(coree)와 코리아(corea)가 다른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다.

꼬레(coree)와 코리아(corea)가 다르다?

꼬레(coree)는 타란티노어(기호:roa-tara) Coree 와

 

타란티노어(이탈리아어로 tarantino, tarandine)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Apulia : Regione Puglia)주 타란토(이탈리아어: Taranto)로 전해지고 있는 방언이다. 같은 주 북부에도 그 변종(Massafra (Greek: Messaphros) 방언, Crispiano 방언등)이 있지만, 타란티노어라고 하는 경우는 특히 타란티노시에서만 해당하는 지역어이다. 타란티노어의 기원은, 이 지역이 메사피(Messapii)인에 지배되고 있던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타란티노에 나타난 그리스인의 식민지화에 의해, 마그나 그라이키아(라틴어: Magna Graecia, Magna Graecia)의 주요 도시라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가(詩歌), 연극등 문화의 중심지로서 언어학상 많은 곳에서 남아있다. 연구자에 의하면 고대 드리아어의 억양에 대응한다고 하는 특징적인 엑센트뿐만이 아니라, 어휘나 형태·통어적인 면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원 그리스어로 지금도 몇 개의 말로 나타난다. 타란티노가 로마인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이 땅의 언어는 한층 더 인도유럽어족의 가장 큰 언어군 가운데 하나인 로망스어군(영어: Romance languages)의 특징을 가지며 민중어의 어휘가 된다.

 

프랑스어Coree로 불리던 것인데 고대 로망스어군까지 영향을 주었던 티란티노어가 담고 있는 역사적 근거로 보았을 때 크다란 뜻으로 전해 왔을 가능성이 있는 단어라고 보이고 코리아(corea)는 근세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영어명칭으로 전자의 원뜻을 축소하려고 한 의미가 있는 명칭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던 분명 그네들이 늘 부르는 코리아(corea)란 명칭에서 서기1000년에서 1450년까지 중세의 이름이 코라이(korai)했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북경예수회가 있는 꼬레(coree)와 코리아(corea)가 같은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분명하게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또 하나 서기 1000년에서 1450년까지 그들이 코라이(korai)라 했다 하였으니 고려연대가

1. Era of old cho-sen, 1122 BC-9 AD

2. Era of the three kingdoms, 9-962 AD

3.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

4. Modern cho-sen, 1392-1881 AD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 라면 고려가 망한 1392년 후에도 줄곧 코라이(korai)라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유나이티드 코리아(United corea)와 코라이(korai)를 같이 취급했다는 말도 된다.

어쩌면 코라이(korai)는 고려연합(United corea)의 의미도 함께 담겨 있는 복합적 명칭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초 서양에서 조선을 corea 라 하면서 정관사 The 를 붙여야 되니 마니하는 스스로의 혼돈이 있었다는 것을 자료로 확인하여 알 수가 있는데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것이다.

보통 나라이름 앞에 정관사를 붙이는 경우는

the United States (합중국-미국)

the United Kingdom (연합 왕국-영국)

the Soviet Union(소련연방)

등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방이나 연합국 앞에 정관사를 붙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 스스로가 corea 앞에 the 붙여야 했다는 것에서 위와 같은 연합, 연방제국이었음을 알게 하는 증거인 셈이다.

북경예수회가 소속된 꼬레(coree)라는 곳에서 코라이(korai)를 코리아(corea)라 했다는 말인데 서기1450년까지는 코라이(korai)라 했다가 그 이후로 부터는 코리아(corea)로 통칭했다하였다.

즉 서양인 스스로 코라이(korai)란 의미는 고려연합, 또는 연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감추려 했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당시 이것만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그러한 의문이 꼬리를 잇은 상황이 전개되는 것도 참고 해야 할 상황이다.

이 당시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는 정황이 나온다.

오스만제국의 7대 술탄 메메드 2세(Mehmet II, 1432-1481)가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공략하여 1453년 5월 29일 드디어 성공함으로써...서양인들은 이날을 치욕의 날이라고 한다...

동로마제국이라는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06-1453)은 드디어 멸망하고 오스만제국수도를 아드리아노플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던 1453부터는 서양인들이 오스만투르크, 터어키(Ottoman Turks, Turkish Empire, 1453-1922)등으로 불렀고 한편으론 코라이(korai)를 코리아(corea)로 불렀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 뿌리라고 하던 비잔틴제국이 코라이(korai)에 무너진 역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코라이(korai)를 오스만투르크, 터어키로 불렀고 새롭게 코리아(corea)라 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것이 결론이다.

 

                              이스탄불의 술탄 아메드 모스크(Sultan Ahmed Mosque)

                                                       [오스만제국의 팽창기]

                                                         [오스만 제국의 쇠락]

 

그렇다면 오스만(Ottoman)이란 명칭은 1453년부터 생긴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이전에는 코라이(korai)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어쨌던 1453년 오스만(Ottoman Turks, Turkish Empire, 1453-1922)의 이전 역사는 코라이(korai)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티무르와 교전을 벌릴 때 세르비아와 오스만의 연합한 것을 보면 세르비아 왕국(Kingdom of Serbia, 1882-1918)역시도 코라이(korai)에 속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세르비아왕국은 공교롭게도 대조선(Modern cho-sen, 1392-1881)이 망한 시점 이후부터 생긴 나라라는 사실에 대조선이 망하면서 새롭게 생긴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대조선과도 역사적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의 10개 도시 시가지 도로 명에서 코라이(korai)라 명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정작 알고 보니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지금 그리스에서 코라이(korai)를 코레(kore)의 복수형이라 하고 있는데 코레(kore)는 아르카이크기(期)의 입상(立像)의 기본 형태라고 하면서 소녀, 아가씨를 뜻하고 이와 반대로 청년 나체 입상 조각은 쿠로스(Kouros)라 한다 했다. 그리고 이들 입상(立像)의 제작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6세기후반에서 기원전 5세기 초라고 추측하고 있다.

근세기 서양사에서 코라이(korai)를 그저 단순한 입상 조각상 정도로 마무리 했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것은 서양인들이 비잔티제국을 점령하고 지배한 코라이(korai)에 대한 의미를 희석시키고 혼란을 주고자 한 것이라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생뚱맞은 갑자기 등장하는 십자군과 연계할 수 있는 같은 의미라고 볼 수도 있다.

덧붙여서 보면 영어로 코레(Core)는 중심, 핵심,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만큼 kore, core 그리고 korai 는 역사의 중심 또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학명을 보면 korai 라 붙은 종명이 수도 없이 많다.

특히 한국소나무(朝鲜崖柏, 学名:Thuja koraiensis) korai-ensis 이란 학명은 독일학자 “지볼트”가 1842년에 명명하였다.

아래는 그리스 이외에  korai 지명에 붙인 곳인데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이다.

그러고 보면 전세계적으로 korai 란 이름이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곧 삼한의 자취이고 우리가 마땅히 찾아야 할 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Korai, Jajpur, Odisha (Orissa), 오리사 인도

 

 

korai, Basti, 파키스탄

 

 

korai, Karapu, 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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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ai 36, Kalamaria 55132, Greece

 

테살로니키(Thessaloniki)의 Urban Area주에 있는 칼라마리아(Kalamaria)

오징어튀김-칼라마리아 티가니타(Kalamaria Tiganita)으로 유명한 칼라마리아(Kalamaria)

Kouri (Greek: "Κουρί")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

 

Korai 15, Karditsa 43100, Greece

 

카르디차(Karditsa)

카르디차 현은 그리스 테살리아(Thessaly)주 남서부에 있는 현이다. 농경이 주를 이루는 지역이다. 현의 명칭은 중심 도시 카르디차에서 따왔다. 현 북쪽에는 트리칼라 현, 동쪽에는 라리사 현, 남동쪽에는 프티오티스 현, 남서쪽에는 에톨리아-아카르나니아 현과 에브리타니아 현, 서쪽에는 아르타 현이 있다. 카르디차 현의 서쪽 지역은 핀도스 산맥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현내 주요 하천은 남쪽의 메그도바스 강과 북쪽의 피니오스 강이 있다.

 

Korai 2, Larissa 41223, Greece

 

라리사(Larissa)

라리사 (Λάρισα)는 그리스 테살리아 주 라리사 현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주요 농업 중심이고 나라의 운송의 중심축이며 볼로스, 테살로니키, 아테네와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인구는 약 25만이며 니카이아, 기아눌리 등의 근교 공통체와 자치에 참여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수도는 기원전 10000년 경에 사람이 살았다. 주요한 상업과 공업 중심 라리사는 테살리 평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아테네-테살로니키 간 국민도로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테살리아(Thessaly)역사

테살리아는 기원전 2500년경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에는 일부 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그렇게 발달한 문화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시절에는 테살리아의 저지대의 귀족가문, 라리사의 알레우아드 가문과 크라논의 스코파드 가문같은 귀족가문들이 동맹을 이루어 통치하면서 테살리아 지방전역에 동맹을 이루었다. 전통적으로 테살리아의 평지에서는 말의 조련이 뛰어나 테살리아 기병대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알레우아스 가문이 페르시아 제국을 지원했고 기원전 4세기 이후 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속주로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48년경 로마는 테살리아를 마케도니아 속주에 합병하였고 300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때 따로 테살리아 속주로 분리되었다. 이후 로마가 무너진 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다가 제4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세워진 테살로니카 왕국의 일부가 되고 다시 에페이로스 공국의 통치(1224-1230), 테살리아 공국(1230년 이후 에페이로스에서 분리된 공국)과 세르비아인,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1394년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고 1881년까지 통치하다가 그리스로 양도되었다.

 

Korai 34, Volos 38333, Greece

 

볼로스(Volos)

인구는 7만 1000명(1993)이다. 파가시티코스만(灣:볼로스만)의 안쪽 깊숙이 자리한 그리스 굴지의 항구이다. 고도(古都) 아노볼로스는 펠리온산(山)의 절벽 위에 있고, 현재의 볼로스는 해안을 따라 뻗어 있다. 시내에는 고대유적들이 많으며, 남쪽 3 km 지점에는 고대의 항구였던 파가사이의 유적이 있다. 1821년의 그리스 독립전쟁 중에 그리스인(人)들이 볼로스를 터키로부터 되찾으려고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1881년에 터키가 그리스에게 이 도시의 영유권을 넘겨준 후에 볼로스는 크게 발전하였다. 1941~1944년에는 연합군에게 점령되고, 1955년 4월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테살리아 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목화·잎담배·올리브·크롬 철광 등을 적출하며, 철도로 라리사를 거쳐 아테네와 테살로니카와 연결된다. 시내에는 고고학박물관이 있다.

 

Korai 8, Janina 45500, Greece

 

야니나(Janina)

이오안니나(Ioannina)는 그리스 북서부 이피로스 주의 한 도시로, 인구는 100,000에 이르는 대도시이며, 평균 해발고도 600m에 자리잡고 있다. 이오안니나 현의 현 소재이자 이피로스 주의 주도이다이며, 도시 서편에는 이오안니나 호수가 있다. 이오안니나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450km, 테살로니키에서 남서쪽으로 290km, 이구메니차항에서 동쪽으로 80km 거리에 떨어져 있다. 이오안니나 시는 종합 병원과 대학병원을 갖추었으며, 이오안니나 대학이 있고(도시에서 남쪽으로 5km 거리. 20,000명의 학생이 있으며 17개 학부를 갖추었다.), 이피로스 기술교육원의 일부 학부도 이 곳에 있는데, 기술교육원의 본부는 아르타에 있다. 이 도시의 문장은 근처 도도나의 고대 극장에 묘사된 황관을 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초상화로 되어 있다.

 

Korai, Kerkyra 49100, Greece

 

코르푸(Corfu)

케르키라 섬(Kerkyra, 라틴어: Corcyra, 이탈리아어: Corfù)는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에 있는 섬이다. 영어로는 이탈리아어식 표기를 좇아 코르푸 섬으로 칭한다. 이오니아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알바니아 사란데 해안과 폭 3~23km의 해협으로 떨어져 있으며, 알바니아의 부트린트와 그리스 테스프로티아 현과 가깝다. 이 섬은 케르키라 현의 일부이며, 이 현의 16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12개가 이 섬이 있으며, 나머지 4개는 주변 섬인 에리쿠사, 마타라키, 오토니, 팍시이다. 이 섬의 중심 도시도 이름이 케르키라이다. 이 곳에는 이오니아 대학이 있다.

 

케르키라 해협 사건(Corfu Channel Incident)은 국제 사법 재판소가 판결한 영국과 알바니아 사이의 국제 분쟁 사건이다.

 

케르키라 해협은 카시오피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지도에 그리스와 알바니아의 국경선에 표시되어 있다.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호와 Volage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알바니아 정부에 소해작업을 하겠다는 각서를 통보했다. 알바니아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영국은 소해 작업을 강행, 독일제 GY형 기뢰 22기를 제거했다. 영국은 이 사건이 알바니아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다. 당시 알바니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토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UN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리할 것을 권고했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 알바니아 정부는 1949년 12월 9일 선결적 항변을 제출하였다. 영국의 일방적 제소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부는 미숙한 대응으로 항변을 포기하는 듯한 대응을 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사법 재판소는 15대 1로 이를 각하했다. 이 소송은 영국의 제소로 시작되어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12대 2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

 

Korai 21, Patra 26222, Greece

 

파트라(민중 Patra) 또는 파트라이(고대 그리스어: Πάτραι)는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펠로폰니소스 반도 북부에 있는 아하이아 현의 현 소재지이며, 아테네와는 서쪽으로 215km 떨어져 있다. 이 도시는 파트라 만을 내려다보는 파나헤코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파트라의 광역 도시권에는 222,4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도심지의 역사는 4천 년에 이른다. 로마 시대에 파트라는 동부 지중해의 세계 도시였으며,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파트라는 성 안드레아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그리스에서 "서쪽으로 가는 관문"이란 별명이 있는 파트라는 상업 중심도시이며, 이곳 항구는 이탈리아와 서유럽과 소통하고 교역하는 결절지이다. 파트라 시에는 많은 학생을 수용하는 두 공립 대학과 기술원 한 곳이 있어 이 도시가 기술 교육에서 우수한 지위를 점한 주요 과학 중심지임을 보여 준다. 리오-안티리오 다리는 파트라의 동쪽 끝 지점인 리오 교외와 안티리오 시를 연결하며,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니소스 반도를 잇는다. 해마다 봄이면 이 도시는 유럽에서도 대규모이며 매우 화려한 사육제가 열린다.

 

Korai 1, Athina 10564, Greece

 

아테네, 아티나(雅典, Athina)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며, 아티키 주의 중심 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도시이며, 그 역사는 3,400년에 이른다.

아테네의 도시 경계 바깥을 아우른 도시권 전체 인구는 3,130,841 명(2001년)이며, 유럽 연합 내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다고 한다.(4,013,368명, 2004년)

국제 대도시인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 금융, 산업,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세계 도시 중 알파-급 도시로 등재되어 있다.

고전기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지였던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도 아테네에 있었다. 이 도시는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 고대 세계의 쟁쟁한 위인들을 배출하였다. 또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ㆍ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쳐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아테네에는 고전기의 유산이 아직 잘 남아있다. 수많은 고대 기념물과 예술 작품이 남아 있으며, 서양 초기 문명의 기념비적 건물인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있다. 그리고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다양한 유적이 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유적도 약간 남아있어 이 도시의 유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 독립 국가가 세워진 18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대에 들어선 랜드마크도 있는데, 그리스 의회 의사당, 그리스 국립 도서관, 아테네 대학교, 아테네 학회가 있다. 또 아테네에서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으며, 108년 뒤에 다시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지명의 어원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명 아테네 명칭은 아테나이(Ἀθῆναι)로 아테나 여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 도시의 명칭은 테바이, 뮈케나이, 델포이처럼 문법상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아테나(雅典娜, Athena: Αθην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전쟁·직물·요리·도기·문명의 여신이다.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 신화의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하며, 전쟁과 시, 의술, 지혜, 상업, 기술, 음악의 여신이다.

 

雅典-아테네(Athene)

雅-바를 아

典-법 전

娜-아리따울 나, 휘청거릴 나

아테나 雅典娜

 

19세기에 아테나이(Αθήναι) 표기가 아테네 시의 공식 명칭으로 다시 정해졌다. 그리스 정부가 1970년대 카타레부사 그리스어의 사용을 포기하면서 아티나(Αθήνα) 표기가 아테네의 공식 명칭이 된다.

아테네의 역사는 전 유럽과 전 세계를 통틀어 도시 중에서도 단연 가장 오래되었다. 적어도 3,000년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원전 천 년에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후 약 500여년간 아테네만의 문화 유적을 토대로 아테네는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중세 시대에 아테네는 쇠락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부흥으로 다시금 영화를 누린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이탈리아와의 교역을 토대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오랜 침체를 겪게 된다. 아테네는 19세기 그리스 공화국의 수도가 되면서 다시 부흥세를 누렸고 1896년 제1회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1920년대 그리스-터키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이동하면서 아테네 시의 인구가 급작스럽게 늘어난다. 하지만 가장 큰 인구 성장은 1950년대와 1960년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에 아테네는 엄청난 인구 팽창을 겪어 도시 전반이 점차적인 성장을 겪는다. 1980년대 자동차와 공장에서 방출되는 매연이 크게 증가하고 인구 과밀 등으로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아테네 시는 1990년대 본격적인 오염 규제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의 인프라가 증대되면서 오염이 상당 수준 경감되었으며 대기 질 향상을 토대로 훨씬 기능적이고 다기능적인 도시로 아테네가 탈바꿈하게 된다.

 

Korai 67, Moschato 18345, Greece

 

Moschato

Moschato이 또한 카니발 축제로 유명하며 코라이 거리가 있다.

그리스 아테네 남부교외 "Metamorfosis tou Sotiros"(거룩한 변모 축일)의 카니발 축제가 있고 Makrygianni 거리에있는 "올드 스퀘어"와 "새 광장" Korai 거리에 시청. 지방공공건물이 들어서 있다.

 

Korai 68, Egaleo 12241, Greece

 

에갈레오(Egaleo)

그리스의 아티카 남부에 있는 산으로, 수도인 아테네(Athens)의 서쪽 엘레우시스(Eleusis)의 남동쪽, 살라미스(Salamis)의 동쪽, 피라이우스(Piraeus)의 북서쪽에 있다.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469m이다. 산림의 대부분은 다프니수도원이 있는 북쪽에 있으며,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살라미스해협의 웅장한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곳에서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제3차 페르시아 전쟁중인 BC 480년 9월 23일)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산 주변의 마을과 명소로는 페라마(Perama)·피라이우스·드라페트소나(Drapetsona)·니카이아(Nikaia)·코리달로스(Korydallos)·카이다리(Chaidari) 등이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Argenti Museum and Korai Library, 치오스섬(Chios) 에게해(海)

 

[총정리: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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