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려 와 룸 셀주크(Sultanate of Rûm 1077–1307)

한부울 2011. 8. 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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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와 룸 셀주크(Sultanate of Rûm 1077–1307)

 

글쓴이:한부울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점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고려의 왕과 아나톨리아(Anatolia)의 룸 셀주크 왕 계보 년대가 이렇게 똑 같다는 것은 하나의 나라를 둘로 나눈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실로 놀라운 사실인 것이다.

고려 20대 신종(神宗) 재위년도(1197-1204)와 룸 셀주크 술탄 술레이만샤 2세(Rukn al-Din Suleymanshah II)의 재위년도(1196-1204)가 같고 최충헌에 의해 폐위 되었다고 하는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년도(1204-1211)와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Giyath al-Din Kaykhusraw) 재위년도(1205-1211)가 판에 박은 듯이 똑 같다는 사실이다.

대 셀주크(Seljuq dynasty 1037-1157)가 고려 초, 중기 왕가 재위년도가 일치한다고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셀주크에 이어 룸 셀주크 왕조(Sultanate of Rûm, 1077–1307) 마저 고려 중기와 말기 왕조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스쳐 지나갈 일이 아닌 것이다.

일제에 의해 편집이 이루어졌음을 감안 한다면 거의 일치한다고 해야 맞다.

총제적으로 보면 룸 셀주크 술탄 마수드 1세(Masud I, 1116-1156)가 고려 18대 의종(毅宗, 1146-1170)이라 보이고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Izz al-Din Kilij Arslan II, 1156-1192) 역시 고려 19대 명종(明宗 1170-1197)으로 보이며 술탄 카이쿠스로 1세(Giyath al-Din Kaykhusraw, 1192-1196)가 고려 21대 희종(熙宗1204-1211)으로 보인다.

술탄 술레이만샤 2세(Rukn al-Din Suleymanshah II, 1196-1204) 또한 고려 20대 신종(神宗1197-1204)으로 보인다.

이 카이쿠스로 1세는 1196년 폐위 되었다가 1205년에 다시 복위하였다.

카이쿠스로 1세와 술레이만샤 2세가 킬리지 아르슬란 2세의 아들이며 형제인데 한반도 계보로 따진다면 신종의 아들이 희종이라 한 것만 상이 할 뿐이다.

대신 앞서 의종과 명종은 인조의 아들로서 형제라는 사실과 마수드1세와 킬지지 아스슬란2세가 아버지 킬리지 아르슬란 1세 밑에 태어난 형제라는 사실 또한 같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일으키는 사실과 알레포(Alepo)를 지배하던 장기왕조(Zengid dynasty)의 지배자 누르 알 딘(Nūr al-Dīn, 재위1147-1174)은 소아시아의 소란을 틈타 아인탑(Aintab)과 근교의 도시들을 점령한 사실 또한 같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고려와 룸 셀주크가 똑같이 몽골에 굴복하였지만 독자적으로 통치하였음을 알 수 있고 반도사에서 고려는 원나라에서 충(忠)과 함께 시호를 내려붙였다는 사실이 있는 반면에 룸 셀주크는 술탄을 두고 아들들을 봉신으로 하여 말리크(malik:王)라 하였다는 사실을 엄밀히 볼 때 반도사가 고려왕들에게 충(忠)을 붙였음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고 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24대 원종과 25대 충열왕 역시 폐위, 복위가 반복된 것과 마찬가지로 룸 셀주크 왕조 역시 카이쿠바드 2세(Ala al-Din Kayqubad II), 메수드 2세(Giyath al-Din Masud II), 카이쿠바드 3세(Ala al-Din Kayqubad III)가 폐위, 복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같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짐작 할 때 반도사를 편집 할 때 대 고려연합이란 거대한 제국의 역사를 이리 찔끔, 저리 찔끔 끌어다 끼우거나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반도사의 고려 스토리와 셀주크의 이야기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일제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타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고려연합(United of corea or korai) 또는 연방제국은 사만왕조, 셀주크와 룸 셀주크, 이어 오스만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주변국을 종주국 입장이 되어 크게 다스렸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어진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고려(高麗) 중, 말기 왕 계보

 

대수

묘호

시호

재위기간

비고

17

    인종

  (仁宗)

克安恭孝大王

왕구(王構)

1122-1146

 

18

의종

(毅宗)

剛果莊孝大王

왕현(王晛)

1146-1170

무신정변-폐위(인종아들)

19

명종

(明宗)

皇明光孝大王

왕호(王晧)

1170-1197

최충헌 폐위(인종아들)

20

신종

(神宗)

敬恭靖孝大王

왕탁(王晫)

1197-1204

(인종아들)

21

희종

(熙宗)

仁穆誠孝大王

왕영(王韺)

1204-1211

최충헌 폐위(신종아들)

22

강종

(康宗)

明憲元孝大王

왕오(王祦)

1211-1213

 

23

고종

(高宗)

忠憲安孝大王

왕철(王皞)

1213-1259

원 충헌(忠憲)시호내림

최충헌과 관계

24

원종

(元宗)

忠敬順孝大王

왕전(王倎)

1259-1269복위 1270-1274

원 충경(忠敬)

시호내림

임시

-

英宗大王

왕창(王淐)

1269-1269

 

25

-

忠烈景孝大王

왕거(王昛)

1274-1298복위1298-1308

원 충렬(忠烈)

시호내림


 

Seljuq sultans of Rum (Anatolia) 계보

 

쿠탈미쉬(Kutalmish)

1060-1077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1029-1072,

재위1064-1072)과 셀주크 제국의 후계를 놓고 경쟁

술레이만 이빈 쿠탈미쉬

Süleyman bin Kutalmish

1077-1086

이즈니크(İznik, 니카이아, 니케아)에서 룸 술탄국의 창설

킬리지 아르슬란 1세

Kilij Arslan I

1092-1107

코니아(Konya)의 첫 번째 술탄, 십자군과 전쟁

멜리크샤 Melikshah

1107-1116

(아버지 Kilij Arslan I)

마수드 1세 Masud I

1116-1156

(아버지 Kilij Arslan I) 의종

킬리지 아르슬란 2세

Izz al-Din Kilij Arslan II

1156-1192

(아버지 Kilij Arslan I) 명종

카이쿠스로 1세

Giyath al-Din Kaykhusraw

1192-1196

1차 재위 (아버지 Kilij Arslan II) 희종

술레이만샤 2세

Rukn al-Din Suleymanshah II

1196-1204

(아버지 Kilij Arslan II) 신종

킬리지 아르슬란 3세

Kilij Arslan III

1204-1205

(아버지 Kilij Arslan II)

카이쿠스로 1세

Giyath al-Din Kaykhusraw

1205-1211

2차 재위 희종

카이카우스 1세

Izz al-Din Kayka'us I

1211-1220

 

카이쿠바드 1세

Ala al-Din Kayqubad I

1220-1237

중동국가 중에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됨

카이쿠스로 2세

Giyath al-Din Kaykhusraw II

1237-1246

카이쿠스로 2세의 죽음 이후 술탄국은 분열 1243년 몽골침입

카이카우스 2세

Izz al-Din Kayka'us II

1246-1260

 

카이쿠바드 2세

Ala al-Din Kayqubad II

1249-1257

1차 재위

킬리지 아르슬란 4세

Rukn al-Din Kilij Arslan IV

1248-1265

1260년 술탄국 통일함

카이쿠스로 3세

Giyath al-Din Kaykhusraw III

1265-1282

 

메수드 2세

Giyath al-Din Masud II

1282-1284

1차 재위

카이쿠바드 3세

Ala al-Din Kayqubad III

1284

1차 재위

메수드 2세

Giyath al-Din Masud II

1284-1293

2차 재위

카이쿠바드 3세

Ala al-Din Kayqubad III

1293-1294

2차 재위

메수드 2세

Giyath al-Din Masud II

1294-1301

3차 재위

카이쿠바드 3세

Ala al-Din Kayqubad III

1301-1303

3차 재위

메수드 2세

Giyath al-Din Masud II

1303-1307

2차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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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술탄국(Sultanate of Rûm, 1077–1307)

 

룸 술탄국 또는 룸 셀주크 왕조는 1077년부터 1307년까지 아나톨리아 지역을 다스린 이슬람 왕조로 이즈니크(İznik, Nicaea. 터키 북서부에 있는 도시)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룸(Rûm)이란 단어는 아랍어로 로마를 뜻하는데 이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왔기 때문에 붙여졌다.

 

1070년대 셀주크 제국의 말리크 샤 1세(Melik sah I, 1072-1092)의 먼 친척인 쉴레이만 이빈 쿠탈미쉬(Süleyman bin Kutalmish 1077-1086)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점차 세력이 강성해져 1075년 비잔티움 제국령인 이즈니크라 하는 니케아(Nicaea)와 니코메디아(Nicomedia, İzmit)를 점령했다. 2년 후 그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술탄을 선포하고 이즈니크(İznik)에서 자신의 술탄국을 세웠다. 1068년 쉴레이만은 시리아의 술탄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킬리지 아르슬란 1세(Kilij Arslan I, 1092-1107)는 포로로 잡혔다. 1092년 말리크 샤가 죽자 풀려난 킬리지는 아버지의 영토에 자신의 술탄국을 재건하였다. 그 후 킬리지는 제1차 십자군에 밀려나 남서 아나톨리아로 물러났고 코니아(Konya, Iconium. 터키 중부 코니아 주의 주도)를 수도로 삼았다. 1107년 그는 동쪽으로 원정을 떠나 모술을 점령했지만 그 해 죽었다.

 

킬리지의 아들 마수드 1세(Masud I, 1116-1156)의 치세 동안 룸 술탄국은 중앙 아나톨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다. 룸 술탄국은 그 이후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에 맞서 아나톨리아를 약 200년 동안 지배했으며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 룸 술탄국은 셀주크 제국의 유력한 후계국가였으며 12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발흥하자 소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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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셀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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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 알 딘 클르츠 아르슬란 2세(Izz al-Dīn Kılıc Arslan II, 재위1156-1192)의 치세는 마수드( Masud I, 1116-1156)가 일구어낸 것을 굳히고, 좀 더 확장하는 시기였다. 새로운 지배자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도전에 직면했다. 안키라(Ankyra, 지금의 앙카라)와 게르마노폴리스(Germanopolis, 지금의 찬크르Cankırı)를 지배하던 그의 동생 샤한샤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샤한샤는 삼촌인 준눈(Zunnun)과 야으바산(Yaghibasan)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알레포(Alepo)를 지배하던 장기왕조(Zengid dynasty)의 지배자 누르 알 딘(Nūr al-Dīn, 재위1147-1174)은 소아시아의 소란을 틈타 아인탑(Aintab)과 근교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클르츠 아르슬란(Kılıc Arslan II)은 아인탑을 탈환하기 위해 시리아의 십자군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1159년 누르 알 딘(Nūr al-Dīn)은 비잔티움과 협조해 이 위협을 견뎌냈다. 샤한샤 세력과 장기왕조(Zengid dynasty, 1127-1250), 비잔티움 제국, 다니쉬멘드 왕조(Danishmend dynasty 1071–1178), 십자군 세력의 연합에 직면한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1161년에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로 가서 평화를 간청했다. 하지만 1164년에 야으바산이 죽자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소아시아 북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172년, 누르 알 딘은 다니쉬멘드 왕조의 잔존 세력을 돕기 위해 세바스테이아(Sebasteia지금의 시바스)로 진군했다. 1174년에 누르 알 딘이 죽자 클르츠 아르슬란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세바스테이아,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 지금의 닉사르), 에우도키아(Evdokia, 지금의 토카트)를 점령하였다. 또 그는 준눈과 샤한샤를 압박해 그들이 로마 황제인 마누엘 콤네노스(Manuel I Komnenos, 1118-1180:재위1143-1180)에게 도망치게 만들었다.

 

마누엘 콤네노스(Manuel I Komnenos)는 옛 영토인 소아시아의 북부를 되찾으려 했다가 결국 실패했다. 마누엘은 점점 늘어나는 국경지대에 대한 튀르크멘들의 약탈과, 소아시아에서 점점 강해지는 셀주크 세력의 힘에 위협을 느꼈다. 특히 셀주크 세력의 힘은 장기왕조 누르 알 딘의 죽음 이후 더 강해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셀주크 술탄국의 심장부를 강타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에 착수했고, 곧 이코니온(Lconium)를 점령했다. 그 뒤인 1176년 9월, 미리오케팔론(Myriokephalon)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기는 하나, 당대인들은 이 전투의 결과를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 1071)이후에 일어난 일들과 같은 수준으로 보았다. 로마제국은 엄청난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클르츠 아르슬란 2세가 마누엘에게 제시한 조건은 아주 관대했다. 마누엘은 단지 국경지대의 성채 몇 개만을 포기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 일로 로마인들의 소아시아 수복에 대한 염원은 완전히 끝장났다. 이 승리는 룸의 셀주크인들이 동쪽으로 눈길을 돌릴 기회를 주었다. 1178년, 그들은 마침내 말라테이아(Malatya, Malateia)를 손에 넣었다. 그들의 경쟁 상대였던 다니쉬멘드 왕조(Danishmend dynasty 1071–1178)는 그렇게 끝이났다. 그 직후 룸 셀주크인들은 자지라(Jazeera)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인 살라흐 알 딘(Ṣalāḥ al-Dīn, 재위기간:1169-1193)이 그들에 앞서 장기왕조의 땅을 정복함으로서 이를 억제했다.

 

son of Kilij Arslan II

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1192-1196 and 1205-1211)

Suleiman II aka Rukn ad-Din Suleiman Shah (1196–1204)

 

하지만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치세의 끝은 패배와 내분으로 점철되었다. 심지어 그가 죽기 직전에 술탄은 그의 영토를 11명의 왕자들에게 나누어줬다. 그 중 대부분은 그의 아들들이였다. 그리고 그는 이코니온(Lconium)에 칩거하며, 그의 아들인 기야스 알 딘 카이 호스로 1세(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재위기간:1192-1197, 1205-1211)에게 권력을 넘겼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 영지를 나눠받은 왕자들은 그들의 속령에서는 완전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지는 못하고, 말리크(malik:왕)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 남은 것은 술탄이라는 칭호 밖에 없었다. 왕들은 곧장 내전을 시작했다. 1190년, 제3차 십자군(1189-1192)이 소아시아를 지나갔다. 술탄이 그들에게 안전 통행권을 내주었지만, 분열된 셀주크 국가는 십자군을 습격하는 튀르크멘 부족들을 막을 수 없었다. 십자군은 이코니온(Lconium)를 점령하고 거기서 5일간 머묾으로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셀주크 세력의 위신을 완전히 뭉게버렸다.

 

소아시아 셀주크 술탄국의 첫 한 세기는 셀주크의 역사에서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다. 이 지방의 무슬림들의 사료들이 적기 때문에 우리가 저들의 역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시리아, 아르메니아, 라틴, 그리스의 그리스도교 사료들에 주로 의존한다. 그 중 그리스 사료들이 소아시아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한다. 때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에서 쓰여진 사료들을 참고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소아시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변경일 뿐이었다. 이 정보의 빈곤은 소아시아의 무슬림들 중 그 누구도 연대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이븐 비비(İbn Bibi, 1285년 이후에 사망. 13세기 룸 셀주크 술탄국의 역사에 대한 책을 지었다. 그는 코냐에 있는 술탄국의 재상을 위해 일했다-註)는 기야스 알 딘 카이 호스로 1세(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1192-1196 and 1205-1211) 통치 이전의 소아시아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적었다. 12세기 후반이 되기전에 셀주크 궁정에서 후원자를 얻으려고 하는 페르시아, 아랍 시인의 이름조차도 알 수가 없다. 이는 1038년에 투으룰 베이가 니샤푸르(Nishapur)를 점령한 직후부터 이란의 대 셀주크 궁정에는 셀주크인들을 찬양하는 시인들이 넘쳐났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197년, 기야스 알 딘 카이 호스로 1세(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1192-1196 and 1205-1211)가 짧고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통치를 끝냈다. 그의 형제인 루큰 알 딘 술레이만 2세(Suleiman II aka Rukn ad-Din Suleiman Shah, 1196–1204)가 그를 이코니온(Lconium)의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는 북동쪽에 있는 테오도시오폴리스(Theodosiopolis)의 살토크조(Saltuk I, 1071-1202)를 패퇴시켜 동북쪽으로 셀주크 세력의 영토를 넓혔다. 그는 형제 아블라스타인(Ablastayn, 지금의 Elbistan)의 왕인 모기트 알 딘 투으룰(Moḡiṯ al-Dīn Tuğrul)을 그곳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실리시아의 아르메니아인들도 그에게 복종했다.

 

하지만 술레이만 2세의 동쪽에 대한 야망은 1202년에 그가 테오도시오폴리스의 동쪽에서 조지아인(Georgia)들에 의해 파시아네(Phasiane, 지금의 Basiani)에서 패배하고서야 끝이났다. 또 그가 대다수의 셀주크 왕들에게서 충성을 얻어내거나 반대파를 폐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제 안카라의 모히 알 딘(Moḥi al-Dīn)은 여전히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1204년의 안카라 정복은 술레이만 2세의 마지막 업적이다. 그는 그 해에 죽었는데, 그때까지도 조지아인들에게 전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술레이만 2세를 계승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이즈 알 딘 클르츠 아르슬란 3세(Izz-al-Din Kilij Arslan III, 1204-1205)이다. 이 정권은 곧 추방당했을 때부터 9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배생활을 보낸 기야쓰 알 딘 카이호스로 1세(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1192-1196 and 1205-1211)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는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전례에 따라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봉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인 이즈 알 딘 카이 카우스 1세(Izz al-Dīn Kai Kavoos I, 1211-1220)은 말라테이아의 왕으로 둘째인 알라 알 딘 카이 쿠바드 1세(Alāʾ al-Dīn Kai Kobad I, 1220-1237)은 에우도키아의 왕으로 마지막으로 자랄 알 딘 카이 파리둔(Jalāl al-Dīn Kay Faridun)은 코이루히사르의 왕으로 봉해졌다. (그러면서도) 기야쓰 알 딘 카이호스로 1세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들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테오도시오폴리스의 투으룰만은 실질적인 독립을 지켜냈다. 기야쓰 알 딘 카이호스로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1207년에 지중해에 접한 아탈레이아(Attaleia, 지금의 안탈리아)를 점령한 것이다. 이 도시는 셀주크 가문이 얻은 최초의 항구도시였다.

 

기야스 알 딘 카이 호스로 1세(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1192-1196 and 1205-1211)의 2번째 통치기에는 정교한 왕실 예법이 존재한다는 최초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자히르 알 딘 b. 야으바산(Ẓahir al-Dīn b. Yağıbasan)은 셀주크 궁정 최초의 파르바나(parvāna)이다. 파르바나는 술탄 개인의 급사에서 시작되었다. 궁성의 주방을 관장하는 지위(차쉬나 게르, čāšna-ger)와 시종(하젭, ḥājeb)의 존재가 이 시기에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기야스 알 딘 카이 호스로 1세(Ghīyāth al-Dīn Kai-Khosrow I, 1192-1196 and 1205-1211)는 1211년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지금의 Alaşehir)에서 로마 제국과 싸우던 도중 죽었다. 늘상 그래왔듯이 계승 과정에는 위험이 가득 차 있었다. 술탄국을 이끄는 고관들은 그의 장자 이즈 알 딘 카이 카우스 1세(Izz al-Din Kayka'us I, 1211-1220)를 술탄으로 옹립했다. 그의 동생은 형의 즉위를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동맹들이 그를 버렸다. 왕자는 안카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카이 호스로 1세는 그 곳을 1년간 포위한 끝에 동생을 생포했다. 결국 그는 말라테이아 근처의 외딴 성에 유폐되었다.

 

이 분쟁이 일어나는 동안 그리스도교인이 대부분이었던 아탈레이아(Attaleia)는 키프로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즈 알 딘 카이 카부스 1세가 이 항구 도시를 다시 장악한 것은 1215년과 1216년 사이의 일이다. 술탄은 파쓰나마(fatḥ-nāma)를 통해 자신이 승리했음을 보여줬다. 이 내용은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배자들에게 보내졌고 패배한 도시의 성벽에 새겨졌다. 또 다른 파쓰나마는

 

1214년, 이즈 알 딘 카이 카부스 1세가 흑해의 시노페(Sinope, 시노프Sinop)를 점령한 뒤에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An-Nasir, 1180-1225)에게 보내졌다. 술탄은 이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솔탄 알 바흐레인(Solṭān al-baḥrayn, 두 바다를 지배하는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2세기 후반에 루큰 알 딘 술레이만 2세(Rukn al-Din Suleymanshah II, 1196-1204)가 아미소스(Amisos, 지금의 Samsun)을 점령했음에도 그 중요성은 몽골시대까지 시노페(Sinope)에 의해 가려졌다. 하지만 시노페는 셀주크인들에게 러시아 스텝과 중동을 연결하는 트랜스 아나톨리아(Trans Anatolian)교역길을 장악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즈 알 딘 카이카우스 1세가 셀주크 세력을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로 확장하려했으나, 시리아에서 반호 북쪽해안의 아클라트까지 가느다란 띠 모양의 땅에 직/간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던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朝(Ayyubid dynasty, 1171–1341)에 의해 좌절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주크인들은 이 정책을 유지했다.

 

중세의 사료든, 현대의 연구자든 간에 모두가 이즈 알 딘 카이 카부스 1세의 형제인 알라 알 딘 카이 쿠바드 1세(Ala al-Din Kayqubad I, 1220-1237)의 치세가 룸의 셀주크 술탄국의 정점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알라 알 딘 카이쿠바드 1세의 치세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가장 인정받는 시점은 압바스 칼리프 나세르(Nāṣer, 1180-1225)가 세합 알 딘 아부 하프스 오마르 소흐라바르디(Šehāb al-Dīn Abu Ḥafṣ ʿOmar Sohravardi:1145-1234)을 이코니온(Lconium)로 보내 새 술탄에게 그가 소아시아의 지배자임을 인정하는 칼리프의 편지를 전했을 때이다. 소아시아의 무슬림 거의 대부분이 셀주크의 지배에 복종했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소아시아 외각만을 지키고 있었다. 서쪽에는 니카이아(Nicaea)의 비잔티움 제국이, 흑해 동안에는 트레비존드 제국(Empire of Trebizond, 1204-1461)이, 실리시아에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셀주크인들에게 실재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최후의 독립 소아시아 튀르크 공국은 1228년, 아르진잔(Erzincan)의 망구자크 왕조(Mengüçlü Beyliği, 1080-1228)가 알라 알 딘 카이 쿠바드 1세에 복종을 선언했을 때 끝이 났다. 비록 그 분파 가문이 여전히 디브리이(Divriği)에서 존재했기는 하지만 알라 알 딘 카이 쿠바드 1세 통치는 군사 분야에 대한 투자로 시작되었다. 이코니온(Lconium)와 세바스테이아(Sebasteia 지금의 시바스)의 성벽이 재건축되었다. 그 다음에는 아르메니아인이 지배하는 아탈레이아(Attaleia) 동쪽의, 지중해의 전략 요새인 칼로노로스(Kalonoros)가 술탄에게 점령되었다. 술탄은 이 요새에 알라이야(Alāʾiya, 지금의 Alanya)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게 1221년의 일이다. 알라 알 딘(Ala al-Din Kayqubad I, 1220-1237)의 야망에 있어 이 정복의 중요성은 요새화된 건물과 조선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데서 증명된다. 이 시기의 군사 원정들은 흑해와 지중해에서의 그의 지위를 굳히기 위함이었다.

 

실리시아에 대한 원정에서는 꽤 많은 주요 성채를 얻어냈다. 동시에 시노페(Sinope)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잠시나마 크림반도(Crimea) 최대의 시장이 위치한 수닥(Sudak)을 점령하기도 했다. 두 원정은 아마 1222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비록 트레비존드(Trebizond, Trabzon)을 점령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이 났기는 하지만, 룸 셀주크인들은 이제 중동에서 가장 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글: 최하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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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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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의종(毅宗)-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19대 명종(明宗)-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20대 신종(神宗)-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종과 명종의 막내동생이다.

21대 희종(熙宗, 1181-1237)-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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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8대 의종(毅宗, 1127-1173:재위1146-1170)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시호는 의종강과장효대왕(毅宗剛果莊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1134년에 왕태자(王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에 그는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武臣)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발탁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文臣)들 및 환관(宦官)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음양설(陰陽說)·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를 낳았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1173년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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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9대 명종(明宗, 1131-1202:재위1170-1197)휘는 호(晧), 자는 지단(之旦), 시호는 명종황명광효대왕(明宗皇明光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1170년에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무신들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이후 무신 정권 집권자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왕족들의 단합을 이끌어내어 무신들의 손아귀로부터 부단히 왕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이 무신정권 타도와 전(前) 임금인 의종의 복위를 천명하며 군사를 일으켰으나, 무신정권에 의하여 진압되고 의종은 시해되었다.

1179년 정중부의 전횡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경주로 달아난 이의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의민은 새로운 무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요직에 앉히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갖은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된다.

1196년 음력 4월, 최충헌이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정권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 최충헌은 거사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의 국정개혁안의 내용을 담은 봉사 10조(封事十條)를 올리고 명종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된 지 6년 후에 병을 얻어 승하하였으며 능은 장단군 장도면에 위치한 지릉(智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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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0대 신종(神宗, 1144-1204:재위1197-1204)휘는 탁(晫), 자는 지화(至華), 시호는 신종경공정효대왕(神宗敬恭靖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종과 명종의 막내 동생이다.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으며 1198년,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 민가의 안대(安碓)를 금지하였다. 같은 해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강릉)와 동경(경주), 뒤이어 진주와 전주, 합주(합천)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인사행정(人事行政)를 도맡았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제주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인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며 능은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양릉(陽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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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1대 희종(熙宗, 1181-1237:재위1204-1211)휘는 영(韺), 자는 불피(不陂), 시호는 희종인목성효대왕(熙宗仁穆成孝大王).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이다.

 

1200년,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으며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며 능은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석릉(碩陵)이다. 참고로 '고려왕조사' 등을 저술한 고려사학자인 류재하 씨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문화류씨 곤산군파가 이 희종의 후손이라고 한다. 곧, 개성왕씨 족보인 성원록에 보면, 희종의 손자인 광평공 혜의 자손이 유(柳)씨가 되었다고 하는데, 문화류씨 곤산군파가 이 후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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