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한부울 2011. 7. 2. 19:53

 *************************************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글쓴이:한부울

 

적어도 19세기까지 유럽역사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동방(東方)이란 단어도 근세기에 생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역사전쟁에서 승자로서의 그들의 전리품이 생성된 시기가 바로 근세이기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실증주의 역사해석 방법은 언뜻 듣기에는 정의로운 주장같이 보이지만 사실 이기적인 방어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 역사사실에 대하여 더 이상 실증적이고 확정적인 자료에 의하지 않고서는 비판, 반박, 수정에 따른 요구 등을 일체 할 수 없도록 사전 방어막을 치는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할 때 이미 그들에게 불리한 자료는 모두 없애 버렸을 수 있다.

당당하게(?) 승자가 된 그들은 과연 처음부터 세계사를 그들 방식대로 만들어 버릴 때 이러한 실증주의 역사해석 방법의 원칙을 한 치도 어기지 않고 반드시 지켰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양사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그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이다.

역사적으로 비록 패자의 입장에 있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 역사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서 그들이 정한 방식까지 따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존 역사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아 불공평함이 따른다.

역사를 판단하는데 환경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자료가 불충분하다면 때에 따라 억측도 필요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유리한 자료가 남아 있기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식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비주류를 위한 역사 발전은 기대 할 수 없다.

역사전쟁에서 승리한 서양학자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접근자체가 못마땅하겠지만 어차피 그들의 기준을 맞출 수가 없다 할 때 이미 그들이 주장하는 방식은 다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선점하였다고 하여 역사 찾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것은 개연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못마땅하더라도 우리식의 접근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비록 비판이 있겠지만 약자입장에서 또는 비주류입장에서 이러한 억측이 낳은 부족한 부분을 또 누군가에 의해 손질되고 보충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모여 좀 더 명확한 자료로 생성되게 하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못마땅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억측을 바탕으로 한 주장을 지속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억측을 바탕으로 하는 접근방식이 무리가 있겠지만 역사 전쟁에서의 일단 패자인 동양 특히 고려조선(corea) 입장에서 볼 때 중요한 자료는 기득권을 가진 그들 소유라 한정이 되어 불리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양역사와 서양역사에 문제점을 풀면서 느끼는 것은 지금의 역사도식은 천리에도 어긋나 근본적으로 엉터리라는 점이다.

동양이란 개념과 동방이란 개념이 동서양에서 하는 해석이 다르고 근대사 역시 그렇게 시작하였다.

유라시아를 정복한 고구려 역사나,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고려, 아시아전역을 통치한 대륙조선의 역사가 어디에도 살아 있지 않다는데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기한 역사가 실제로 존재한 역사 실체라면 어떻게 세계사, 동양사 역사도식에서 이렇듯 고의로 뺀 것처럼 고스란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근대사를 부정하게 되고 서양사학자들이 만든 세계사를 따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그기에 대한 회의가 있으며 본격적으로 우리식으로의 역사 찾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동양역사가 서양 고유영역을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터를 잡았고 그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다면 승자가 된 서양사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지우기 위해 무슨 짓을 못하였겠느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놓고 실증주의 운운하는 것은 개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서양사가 당시 실체에서는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고 가정 한다면 말이다.

더군다나 근세기에 예수회를 앞세우고 동양전체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자본화하던 철두철미한 계획성과 실행성을 보더라도 얼마든지 이와같은 사실을 추리 할 수 있는 일이다.

근세기 역사전쟁에서 승리한 서양사학자들은 유럽에 남아있는 동양사적 근거지를 완벽하게 지우고 통째로 아시아대륙 동쪽 끝단으로 이동시켜 후환을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농후 한 것이다.

이 같은 예측이 아주 황당한 이야긴가?

절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미래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고 그들의 역사 우월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슬람과 첨예하게 대립되던 종교적인 문제도 역사성과 더불어 선교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국제적인 질서까지 그들이 주도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다.

고조선, 고구려를 위시한 삼한, 고려, 조선의 위치는 분명히 예수회와 대립되던 종교의 근원지란 사실을 기어코 그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눈치 챌 수 있는 문제이다.

예수회와 대립되는 종교, 이슬람과 불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포괄적인 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불교는 원시적인 종교로 남아 대립되었던 종교는 분명 예수회와 이슬람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를 위시한 삼한, 고려, 조선은 전통적으로 불교을 바탕으로 하는 이슬람을 뿌리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종교관점에서 좀 더 파악하여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필요성은 있으나 현재 개념적으로 판단 할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혼란스러웠던 역사 찾기가 제자리를 찾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대립적인 종교가 낳은 지역적인 근거가 바탕이 된 것이 근대사라면 전통적인 동방문화의 근거지 역시 그러한 영역을 중심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근대사는 고조선, 삼한, 고려, 조선을 불교를 원천으로 한 한반도에 꽁꽁 묶고 말았다.

말도 안되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세력은 바로 동남아 왜구무사정치집단 일제이다.

그들의 비천한 역사를 횟칠하여 들어 내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강제하여 한반도에 조선을 들어 앉히고 그 옆에 열도를 일본으로 만들면 비로서 그들의 한을 풀 수 있는 것이 되고 나라 없이 떠돌던 거류민 신세에서 벗어나는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을 누가 했을까?

일제인가 서양사학자인가?

일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닐 수 없고 서양세력입장에서도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

역사 빅딜 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판짜기 행태를 미루어 짐작 할 때 유럽은 거대한 영향력이 바탕이 된 동방역사의 한 터전이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역사대관(Outline of History,歷史大觀)을 출판했고,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것을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펴냈다. 거기 맨 첫 장이 "The World in Space"인데

"THE STORY of our world is a story that is still very imperfectly known. A couple of hundred years ago men possessed the history of little more than the last three thousand years. What happened before that time was a matter of legend and speculation."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관은 단지 동양역사를 앞지른 근세사만 역사이기를 강조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조선]최두환 박사님의 글에서 발췌한 자료이다.

위 자료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1920년에 비로소 역사대관이라고 하는 세계사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당시 세계사를 작성한 서양사학자들의 심리상태가 어떤 것인지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가 1920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근세기 역사 혼란기에 전리품을 차지한 서양역사학자들의 국수주의적인 사견이 대량 들어갔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기는 것이고, 그 때 서양사학자들이 동방역사에 대한 엄청난 사실에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심정적인 혼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밝혀지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그 당시 그들이 받았던 충격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서(尙書)는 중국전통 산문의 근원이고 임금들이 읽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라고 했다.

네이버사전에 보면 이 상서(尙書)는 한대(漢代) 이전까지는 '서(書)'라고 불렸는데, 이후 유가사상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을 포함시켜 한대(漢代)에는 《상서(尙書)》라 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와서 《서경(書經)》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상서》와 《서경》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우(虞), 하(夏), 상(商), 주(周)시대의 역사적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상서는 5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周)당시의 원본이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에 나온 위작(僞作)이다. 상서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소실되어 전승과정이 복잡하고 진위(眞僞)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판본으로는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여기에도 저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나온다.

상서(尙書)는 임금들이 읽고 보는 역사서라 했다.

후날 어떤 역사문제를 놓고 더 이상 논쟁의 씨앗으로 남을 원초적인 자료를 삭제 또는 없애버리는데 무엇보다도 편리한 방법은 불에 태우거나, 전쟁으로 인한 화마에 소실되었다고 하는 첨언, 부언따위가 제격인데 이러한 방법을 분서갱유 부터 시작되어 현재 사서 곳곳에 널 부러져 흔히 볼 수 있는 행태에 하나이다.

바로 이러함이 역사란 근본을 훼손시켜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고 시대적으로 언제나 기생하였던 역사조작세력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끊임없이 보내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행태를 고스란히 일제가 답습하여 반도역사를 창작하면서 즐겨 사용하고 애용했던 수단이다.

때문에 기존 역사사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조작하였는지 역사 승리자가 아니면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고 대신 그들의 새로운 창작 사서들을 만들어 끼워 남겼으니 역사가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서세가 활동하던 항해시대 때인 근세기라고 보이고 그들 서양역사가 비주류이던 것을 주류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 근세기 역사판짜기가 분명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 작업에 참여한 역사조작음모 세력들은 위 방식대로 세계 널려 있던 사서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감행되었다고 추리 할 수 있다.

 

[상서(尙書)]에는 "[한서(漢書)에 '고구려', '부여', '한(韓)'이 있는데,'馬干'은 없으나, '馬干'이 곧 저 '韓'이라, 음은 같고 글자가 다를 뿐"(尙書 卷18 周官 弟22 孔穎達疏 참고) 즉'韓'이라는 말은 단지 그 음을 빌려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인데 [마간], 또는 [ㅁ가흔]·[한]·[카흔]·[카안]·[칸] 등으로 발음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은 한문글자와 다른, 음이 같은 말은 부지기수라는 말이다.

통칭 로마(Rome)라고 하는 진(秦) 역시 이러한 문제점에서 비껴 갈 수 없는 국명일 수밖에 없다.

진(秦)과 대진(大秦)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분명 같을 것 같은데 다른 점은 무엇일까?

존속(?)년대가 다르다.

분서갱유 방식을 빌어 고쳐 바꾸면 될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많다.

첫째로 로마(羅馬)가 과연 존재했는가 이다.

있었다면 정말로 전 유럽을 통일하였는가?

아니면 근대에 들어 동방역사를 모두 들어내고 새롭게 만들어 끼워넣기 한 것인가?

로마가 서양사에 들어가는 것인가 아니면 동양사에 들어가야 할 역사인가?

대륙동쪽 이방인 훈족이라는 아틸라역사가 왜 그곳까지 들어가 분탕질을 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꼭 북방에 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부에 있는 중앙정권을 요절내는 것과 같다.

AD 410년에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유연(柔然:Rouran Empire-로란(Roran)과 로마(Roman)가 다른 것인가?

그런데 조선에서는 로마를 대진(大秦)이라 했다.

글자는 달라도 음이 같은 진(秦)과 진(辰, 眞)은 같지 않는가?

그런데 한(韓)과 한(汗)은 같다 한다.

 

이러한 질문을 먼저 깔고 유럽으로 들어 갈까 한다.

우리의 역사가 감히 유럽이 맞닿는 유라시아역사까지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반도사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현재 삼한의 역사와 고려, 조선을 승계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구성인인 한반도 한국인(韓國人)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북남방계 몽골리안(Mongolian)이다.

 

하지만 최두환 박사 글에서 보면 데일리메일(Daily Mail)기자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1869~1931)의『The Tragedy of Korea』(E. P. Dutton & Co., New York, 1908)-신복룡 역,『대한제국의 비밀』(집문당1999)에 “1870년대말…그들은 별난 모자를 쓰는데, 이는 말총이나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어떤 것은 엄청나게 크다. 그들의 머리칼은 머리의 꼭대기 위에 매어 있다. 그들의 살갗은 검고, 코는 펑퍼짐하며, 눈은 검은데, 그들의 몽고적 용모에서 코카서스인(Caucasus: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지역)을 연상케 하는 이상한 암시를 받게 된다...”

 

위 표현은 바로 중앙아시아, 유라시아에 사는 조선인을 말한 것이다.

이제 인종적으로도 북남방계 몽골리안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문제가 없어 보인다.

또 하나 종교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종교적인 면은 지금 당장 단정내리기가 곤란한 문제점이 많다.

좀 더 유럽역사와 유라시아 역사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 될 수 있는 문제라 본다.

 

1.고구려와 아틸라제국 관계

 

아틸라가 세운 제국 이름도 제대로 없다.

그냥 훈족(Hun)이라고만 하고 있다.

훈족(Hun)은 로마(Rome)멸망에 직,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정체불명의 유목민들이라고 하거나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 또는 5세기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과 중앙아시아 일대 존재하던 흉노(匈奴)와 같은 민족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듯 불명확할까?

당시 서양사학자들은 이 훈족이란 존재를 역사학적으로 애써 풀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근거가 없이 떠돌던 부랑자들 집단이라고 매도하여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그들이 만든 서양사에 특별하게 취급될 리가 만무하다.

또 흉노(匈奴)족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역사라고 하던 진(秦)·한(漢)을 위협했던 흉노의 자손이 바로 유럽의 훈족이라는 설인데 학계에 제출 된지가 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학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더라도 미심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사 정사(正史)에 등장하는 진(秦, BC221–BC207 )과 한(漢, BC206-AD220)이 바로 지금의 로마(Roman)라고 할 때 진(秦)과 한(漢)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훈족의 존재가 맞아 떨어진다.

200년의 세월을 끌어온 문제의 해결은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아래 그림 자료를 보자.

 

"훈족(Hun)야만인의 침략로, Routes of the barbarian invaders"란 특별한 그림이다.

 

한어자료에서 나온 것인데 훈족이 아니라 만(蠻)족이라고 나온다.

이 만족은 대륙사서에서 남만(南蠻)으로 호칭하였고 사이(四夷)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만북적(南蠻北狄)이라 하여 남쪽에 만이고 북쪽은 적이라 낮추어 불렀다.

한어사전에는 옛날 개화되지 않은 남방소수민족을 만(蠻族), (蠻人)이라 호칭(呼稱)했다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훈족을 만(蠻)족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대륙사는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만족이 남만이라면 대륙 남쪽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들어 간 것이 된다.

그러니 어쨌던 유럽을 공격한 의문의 종족은 유럽을 근거지로 하였다고 보아야 합당할 것인데 이상하게 전부 지금의 대륙 동쪽을 근거로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불손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서양사학자들은 유럽을 침공한 훈족이란 존재가 유라시아나 유럽을 근거로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고 자꾸 대륙 동쪽, 한반도의 고구려에 집착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유럽이나 유라시아에 근거하였던 고구려란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 만(蠻)은 유럽을 점유한 고구려를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만족(蠻族)의 유럽 침입로가 4개 노선을 명시하였고 그 노정(路程)은 유럽 전지역을 망라(網羅)하고 있다.

당시 유럽이라고 해봐야 東西로마(Rome)가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Rome)를 점령한다는 것은 유럽전역을 점령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유럽을 평정하는 것이 된다.

그림에 불열전(不列顚), 래인하(萊茵河, Rhine), 高盧(고노)란 글씨가 보인다.

 

불열전(不列顚)은 한문으로 영길리(英吉利)와 함께 영국을 나타낸다.

래인하(萊茵河, Rhine)은 라인강이다.

그런데 高盧(고노, 고로)가 무엇일까?

찾아보았다.

高盧(고노, 고로)는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를 말한다.

그래서 갈리아(Gallia) 자료를 한번 보았다.

역시 골(Gaul)이라고 나온다.

 

갈리아(라틴어: Gallia) 또는 골(Gaul)은 로마 제국(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의 멸망 이전까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Rhine:켈트어의 Renos: 흐르는 것)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100, 102-44)가 본국 이탈리아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의 갈리아 키살피나 (Gallia Cisalpina, 알프스 이남 북부 이탈리아)도 포함되었다. 이 지방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1세기에 이르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Gallia Narbonensis), 아퀴타니아(Aquitania), 갈리아 루그두넨시스(Gallia Lugdunensis), 벨기카(Gallia Belgica), 고지 게르마니아(Germania)의 다섯 로마 속주로 나눠졌다.

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Celtae)'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갈리아의 켈트족은 수십여 개의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갈리아인(Gallia)들은 260년 로마와 사산제국 제2차 전쟁 에데사(Edessa:터키 우르파)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Publius Licinius Valerianus, 200-260)가 사산제국(Sassanid Empire, 226-651)의 샤푸르1세(Shapur I, 241-272)에게 사로잡힌 이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포스투무스(Postumus 260-268)를 황제로 한 갈리아제국을 건설했으나 273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다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위키]

 

고노, 고로(高盧)는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 골(Gaul)를 말하는데 갈리아에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이라 하였다.

 

위는 켈트족이 근거하던 곳을 지도로 표시 한 것이다.

갈리아, 골 지역에 근거한 켈트족은 정통적으로 다신교(多神敎)를 믿는 민족이다.
이를 영어자료에 켈틱 폴리티이즘(Celtic polytheism)이라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들을 그냥 이교도라 불렀다 한다.

 

위 지도에 붉은 사각 선 안에 "core hallstatt territory" 란 단어가 의미 심장하다.

할슈타트 (Hallstatt)는 오스트리아(Austria)에는 할슈타트 문화(Hallstatt culture)라 하여 12000년전부터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고대 지역을 말하고 특히 소금광산이 있는 소금도시로 유명하여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 유산으로 지정 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위 지도에 보면 "CORE" 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물론 이 지도를 작성하고 설명을 추언할 때 CORE 는 중심. 핵심지역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되었겠지만 아마도 CORE 가 고대의 고려, 고리와 연결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본래 라틴어로 한국은 corea 이다. 그리고 corea 란 단어의 어근은 core 라 한다.

고리=골=구리=구려, 코리=고구려 등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 켈트인이라고 하는 갈리아인들이 서기 260년에 로마와 사산제국의 2차 전쟁에서 로마 발레리아누수황제를 사산제국 샤푸르1세가 포로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독립하여 갈리아제국(Gallic Empire, Imperium Galliarum 260–274)을 건설하였다고 나온다.

 

                                                    AD271년 갈리아제국지도

 

갈리아 제국(Gallic Empire, Imperium Galliarum 260–274)

갈리아 제국(Imperium Galliarum)은 로마 제국의 제3세기의 혼란기에 갈리아 지역에 260년부터 274년까지 14년간 존재했던 독립국의 이름이다. 갈리아, 혹은 갈리아-로마제국은 로마로부터 독립해 떨어져 나온 속주들로 구성되었다. 이 영역은 현재의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및 독일의 라인 강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갈리아 제국의 성립은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페르시아인들에게 생포당하는 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갈리에누스는 판노니아의 총독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도나우 강 일대로 향했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모든 병권은 포스투무스에게 맡겨졌다.

포스투무스(Postumus, 260-268)는 갈리아 제국을 선언하고 수도를 아우구스타 트레비로룸, 현재 독일의 트리어로 정한 뒤 로마 제국의 것과 유사한 원로원, 2명의 집정관, 호민관들로 운영되는 정부를 세웠다. 포스투무스 자신은 갈리아 제국 집정관에 5회에 걸쳐 당선되었다.

 

갈리아 황제목록

포스투무스(Postumus) 260-268 (Laelianus 268, usurper)

라엘리아누스(Marius) 268, 찬탈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 268년

빅토리누스 (Victorinus) 268-270 찬탈자 (Domitianus 271? usurper)

테트리쿠스 1세(Tetricus I)270-273 (residence Trier)

테트리쿠스 2세(Tetricus II) 270-274 (son of Tetricus; caesar)테트리쿠스 1세의 아들이자 부제

 

갈리아 제국의 속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벨기카

아퀴타니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히스파니라 루시타니아

히스파니아 베티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여기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위 왕조계보를 보면 도대체 2년이란 제국 수명에 합당하지 않는 적어도 백년이상도 무난할 것 같은 집권 계보란 점이 있고

또 하나는 무엇때문에 로마가 모든 병권을 좀 이질적으로 볼 수 있는(실제 이교도라 불리웠음) 켈트인인 포스투무스(Postumus, 260-268)에게 맡겼는가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병권을 맡기고 출정한 로마황제는 사산왕조에 패하고 포로가 된 상태에서 당연히 권력공백기가 있었을 것인데 병권을 쥔 포스투무스(Postumus)는 로마를 통째로 접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고 이상하게 수명이 2년 밖에 되지 않는 갈리아제국을 억지로 세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빼버린 것 같은 역사전개 흐름상 맞지 않는 허점이 보이고 있다.

 

아마 이때부터 고구려가 유럽북부지방에 자릴 잡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로마의 제정시대의 종식은 395년이고 같은해 동서로마의 분할 되었으며 476년에 비로소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결국 260년 로마는 이때부터 조그마한 보잘 것 없는 명맥만 유지하는 국가로 전락하는 것이고 마침내 훈족이 발흥하는 시기에 아틸라가 유럽전역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74년 발라미르(Balamir)가 이끄는 훈족의 일파는 볼가강(Volga River)과 돈 강(Don River)을 건너 알란인(Alan)과 조우를 하며 유럽의 역사 전면에 화려한 데뷔하게 된다는 위대한 설명이 나온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100여년 후에 일이다.

그것을 아틸라제국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본국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이다.

더군다나 로마 황제를 포로로 한 사산왕조는 신라라는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한반도 역사에는 뚜렷한 기록이 없지만 신라 석씨왕조 12대 첨해이사금(沾解, 247-261)이 바로 사산왕조 샤푸르1세(Shapur I, 241-272)일 가능성이 있다.

일단 가능성은 제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남쪽을 차지한 것이 되고 북쪽지방은 고구려가 차지 한 형국이 된다.

이만하면 유럽 역사 탐방도 이제 익숙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한부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