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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이 대륙역사와 세계사에 빠진 이유?

한부울 2011. 7. 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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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이 대륙역사와 세계사에 빠진 이유?

 

글쓴이:한부울

 

아시아 대륙역사의 정사(正史)라고 하는 25사(史)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25사(史)란 사서(史書)는 한 왕조가 지나가면 1사(史)씩 붙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결국 25 왕조의 이야기고 역사이다.

하지만 25사(史)를 작성한다는 것은 통일 왕조로서 존재할 때 가능한 것이다.

지난 역사에서 발흥된 통일왕조와 성격을 완전히 달리할 수밖에 없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성과 정체성이 결여된 정치세력들이 서세의 난동으로 인한 공백기를 이용 국민당을 만들어 통일왕조를 마치 세운 것처럼 하였고 뒤 이은 중공역시 역시 서세가 바탕이 된 공산주의 사상을 이용 지금의 중공정권을 무자비하게 세워 스스로 옛 통일왕조로 자임하고 나서 대륙전통역사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두 정권 모두 동양사상이나 문화를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성이 없고 정체성이 심하게 결여 되었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청조선이 망한 후 스스로 대륙을 통일했다고 착각하였던 국민당 정권(객가인들이 주축이 된 정치세력)은 전통성을 무시한체 주제넘게 25사(史) 작업을 무리할 정도로 도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은 중공정권 모택동 역시 전통성 없기는 마찬가진데 1949년 부터 문화혁명기를 거치며 국민당 창작품을 아예 굳히기작업까지 완료하였다.

때문에 천리가 바탕이 된 근본적인 역사가 파탄이 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부족하다 하여 서북공정, 동북공정 운운하며 중화(中華)란 가짜 간판까지 내 걸고 모든 것을 흡수하려 들면서 새로운 1사(史)를 기어코 보태겠다고 하여 종국에 26사(史) 완성을 위해 부끄러움도 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이고 26사(史)인가?

전통성도 정체성도 없는 서양사상이 낳은 공산당을 위해?

솔직히 중공정권이 내세우는 공산당은 그들의 기득권과 지배권을 담보하기 위한 빛 좋은 개살구 수단일 뿐이지 바른 역사라고 할 수 없다.

 

25사(史)의 근원은 한나라 무제(武帝)때까지 기록한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에서 시작되었다 하고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 32-92)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 398-446)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4사(四史)라고 하였으며.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진서(晉書)》《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양서(梁書)》《진서(陳書)》《위서(魏書)》《북제서(北齊書)》《주서(周書)》《수서(隋書)》《신당서(新唐書)》《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남사(南史)》《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한다.

원(元)나라 말기에《송사(宋史)》《요사(遼史)》《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 1720-1797)의《17사 상각(商)》, 조익(趙翼, 1727-1812)의《22사 차기(箚記)》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했으며 청나라의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이에 더하여《구당서(舊唐書)》와《구오대사(舊五代史)》를 만들어 24사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했다.

국민당시절 1921년, 총통(總統) 서세창(徐世昌, 1855-1939)은 가소민(柯劭忞, 1848-1933)등을 시켜 기존의 원사(元史)의 내용을 보완해 편찬한 257권(巻)의 신원사(新元史)를 정사(正史)로 인정해 25사(史)로 하였다 하고 있으며 그 뒤 발동이 걸린 그들은 1931년 3월 22일에 장려화(臧勵龢)등은 많은 인명사전(人名辭典)과 각종 역사서(歷史書), 지리지(地理志)등을 인용(引用)하여 그들끼리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이란 지명사전을 엮어 만들었다.

그들만의 아시아 대륙역사를 완벽하게 굳히기에 들어 간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대륙사의 지명들을 해석하고 있다.

기존 역사의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그들 목적과 입맛에 맞게 모든 역사지명을 옮기고 삭제하고 새롭게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에게 삼국지로 알려진 소설명칭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 하는데 중국의 고전소설로서 명(고려) 때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쓴 책이다. 이 책 최초 판본은 명(고려) 가정 1년인 1522년에 판각한 “가정본(嘉靖本)”이며, 이 판본은 나관중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는《삼국지연의》는 읽기 불편한 점(읽기불편하지 않는데?)을 청(조선) 때 모종강(毛宗崗, 1632-1709)이 읽기 쉽게 다시 엮은 책이 모본(毛本)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소설가가《삼국지연의》를 번역했으나,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당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대만에서 가져온 것으로 원본이 아닌 모본(毛本)이다.
나본(羅本)도 문제지만 청(조선)때 모종강이 각색했다고 하는 모본(毛本)은 국민당정부의 25사와 맥을 같이 한다. 때문에 지명이나 인명 등에서의 오류가 심각하다 했다.[위키참조]

벌써부터 이 삼국지(三國志演義)의 생성과정이 불분명하여 역사로 인식되는점을 경계하고 있었으나 사실 분석 할 때 분명 대륙에 있던 국민당이 모택동이에게 패하고 달아나 지금 대만에 쫓겨 들어가 국민당정부를 꾸민 것인데 한국 문인들이 대만에서 이 모본(毛本)을 가지고 와 소설화 했다고 하였으니 이미 25사,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과 함께 손 본 가짜를 진본으로 알고 번역하고 소설을 쓴 것이 된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급하게 했을까?

국민당 정부(1919)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1920년부터 이 작업을 실행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일제역시 본격적으로 조선총독부관리하에 1921년 12월 4일 조선사편찬위원회(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을 발족하고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가동되면서 1937년까지《조선사》 35편,《사료총서》 102편,《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는 사실이다 분명 존재한다.

역사서를 뜯어고치기 시작한 년도가 국민당정부, 서양세력, 일제와 동시에 이루어 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세기 역사판짜기라는 대공정인 것이다.

이러한 졸속과정 때문에 세계사 뿐만 아니라 아시아대륙사가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청나라에 대해서는 국민당(民國)초에《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이를 정사로 올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유리한 사서가 아니란 것을 단편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재야학계에서는 청사고(淸史稿)를 곧잘 인용하고 있다.

실제 참 대륙역사로 볼 때 비주류였던 그들이 그들 기준으로 25사(史)를 만들었기 때문에 비주류로서의 한계가 분명하게 있고 세계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주었던 주류 삼한(三韓)을 빼버린 어리석음 때문에 신뢰성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역사를 통칭하고 대변한다는 25사(史)는 1921년 대륙국민당시절 때 새롭게 만들어진 역사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서양세력과 일제 역시 동참했다는 사실 또한 밝혔다.

물론 그 속에 핵심인 삼한의 역사가 통째로 빠진 것이다.

서양사가 완성 되었다는 시점도 1920년이라 대륙사보다 1년 빠르지만 같은 시점에서 서로 조작된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야 맞다.

일제 역시 그들과 함께 모의하고 소통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물론 25사 기초로 하였다고 하는 전한(前漢)의 역사가(歷史家) 사마천(司馬遷, BC145-BC86) 사기(史記) 역시 실체가 아니고 위작일 가능성이 존재하고 국민당이 서양세력과 일제와 모의하여 1921년 당시 25사를 모아 편집할 때 총체적으로 곳곳을 손 보았을 것이고 심하면 통째로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의심받기에 개연성이 충분하다 할 것이다.

1920년대는 동아시아 대륙전체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환경도 그렇다.

 

1919.1.21-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사망.
1919.3.1- 일제 강점기: 3·1 운동.
1919.3.2~6-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창당대회 개최.
1919.4.13-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5.4- 5·4 운동: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반일운동이 시작되다.
1919.6.21-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독일 대양함대, 스카파플로우에서 집단으로 자침.
1919.8.19- 아프가니스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19.8.21-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판 독립신문 발행.
1919.8.25-이승만, 미국 워싱턴 D.C.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설립.
1919.8.30-이동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
1919.9.10-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하다.
1919.9.10-제1차 세계 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와 연합국 사이에 셍제르망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와해되다.
1919.10.10-쑨원이 중화혁명당을 개편하여 중국 국민당을 결성하다.
1920-한국의 독립 운동가, 역사학자 운초 계연수선생이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1921-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하는데 소비에트적위대에 의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며 이 사상자가 3,000명에 육박한다.
1921.7월 11일 - 몽골이 대륙조선(중국)으로부터 독립하다.
1922.2.28- 이집트 왕국이 대영 제국(대륙조선)으로부터 독립하다
1922.11.1- 케말 파샤의 술탄제 폐지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 멸망하다.
1922.11.19- 오스만 제국 최후의 황제 압둘 메지드 2세가 퇴위하여 제국이 해체되다.
1922.12.4- 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회 설치 조선역사 왜곡을 시작.

 

사마천이 당시 사기(史記)정도 만들 수 있는 특출한 지식인이라면 분명 그의 자세한 이력이 남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출생년도 조차 분명치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란 사실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역사 95%가 허구란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것은 고려 김부식이가 만든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진본이 아닌 가짜라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만약 삼국사기가 가짜가 아니라면 분명 사기의 사만천 이력이 분명해야 함과 같고 고려가 아시아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표현되고 기록되어야 했단 말이 된다.

그러나 근세기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던 사학자들의 어리석은 참여와 판단으로 천리의 역사는 사라지고 말았다.

거짓의 역사를 만든지 100여년도 채 안되어 우리에게 낱낱이 들통나고 만 것이다.

동양사 즉 아시아대륙사가 이러하듯 근세기 1920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세계대관 유럽역사 즉 서양사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예수회 전통성과 정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회가 바탕이 되는 역사는 예수회가치만큼 합당하게 관철시켰을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는 사실이다.

유럽역사를 들어 가 보면 과연 서양인들의 고유역사가 실제로 존재한 것이 맞는가 할 정도로 의심가는 부분이 많다.

고대 로마(羅馬)가 아시아대륙사의 진(秦), 한(漢)과 흡사하고 5호16국이 로마제국 제후국으로 난립한 번국 왕조들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전진, 서진, 동진 또한 로마와 연결된다.

 

전조(前趙 304-329) 유연(劉淵)한(漢)

전진(前秦 351-394)부홍(苻洪), 국명이 진(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국명의 나라가 많기 때문에 가장 먼저 건국된 이 나라를 전진이라 구별하여 부른다.

서진(西秦 385-400, 409-431) 강족 요장(姚萇)

후진(後秦 384-417)선비족(鮮卑族) 걸복부(乞伏部)의 걸복국인(乞伏國仁)

동진(東晉, 317-420)서진 왕조가 유연(劉淵)의 전조(前趙)에게 멸망한 후, 사마예에 의해 강남(江南)에 세워진 진(晉)의 망명 왕조이다.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른다.

 

훈족이라고 하는 아틸라제국이 4~5세기 100년이 넘는 동안 유럽전역을 지배하고 통치한 상황을 보면 당시 로마가 존재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 같다.

만약 5호16국이란 역사가 동국이라고 하는 아시아대륙에 아예 없었고 대신 고구려, 신라, 백제가 대륙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고구려, 신라, 백제 영역 전체를 지금의 한반도에 꾸겨넣는 우 때문에 생성된 빈 공간을 무엇으로던 반드시 채워야 하였을 것이고 삼한과 연결이 의심된다는 로마에 난립한 번국들을 한문(漢文)화하여 5호16국이라 하여 그대로 옮겨 심었을 가능성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아니면 그 반대 쪽도 생각 해 볼 수 있다.

한어자료를 보면 5호16국시대는 기록된 국가보다 더 많은 국가가 난립하였다고 애매모호하게 보충설명까지 하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대륙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삼한(三韓) 왕조의 생몰년도가 동서로마황제 생몰년도와 불과 몇 년 차이로 지속적으로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하지만 심증적인 자료는 넘쳐난다.

결국 이러한 결과를 추리해 볼 때 유럽과 아시아대륙 전역을 가름하여 존재하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역사를 무리하게 통째로 들어내고 빼버린 결과 수많은 부분에서 괴리가 생겼던 것이다.

때문에 유라시아고려, 대륙조선이란 가칭으로 재야학계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본격적으로 분석, 검토작업이 강행되고 있는 환경적인 면을 설명할 수 있다.

삼한의 역사를 세계사와 대륙역사에서 빼버렸다는 사실은 무슨 변명을 한다해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판단 할 신뢰성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하는 악수가 되고 만 것이다.

현재 대륙역사와 세계사는 일반사람들이 조금만 분석해 들어가면 역사도식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인가 모르게 역사 공백상태가 지속적으로 보여 치밀하지 않다고 여기는 면이 많다.

한 예로 고구려가 생성하고 멸망한 시대에 아시아 북부대륙전체와 시베리아 전역 즉 전통적으로 고구려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은 그야말로 역사가 없는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광할한 그곳을 누가 어느 종족이 지배했다는 사실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차지하기 이전까지 계속되고 모호하게 그려 놓고 있다.

이것이 근대사의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근세기(1920년경)에 당시 힘을 가진 역사비주류들이 모여 아시아대륙사와 서양사를 날조하였을 가능성을 높게 볼 수밖에 없다.

1920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세계사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위 아시아대륙역사를 의식하고 도식을 꿰맞춘 것이라고 총체적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중공치하 중국역사학강사 원승비(袁勝飛)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 중국역사의 95%가 허구라고 그들이 만든 대륙역사를 비판까지 했을까 한다.

곰곰이 되씹어 볼 수 있는 주장임에 틀림이 없다.

삼한(三韓)을 빼 버린 25사((史)와 세계사.

그것은 안꼬를 빼버린 진빵과도 같다.

때문에 25사(史)라고 하는 대륙역사는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소수 정치권력 만을 위한 기록이고 이를 대치 할 수 있는 새로운 대륙역사, 세계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분명 이 역사판짜기에는 과거 역사주류들이 관계하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역사판짜기에는 옛 역사주류(몽골계와 투르크계)와 진정한 중국(삼한)이 구성원으로 참여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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