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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와 사만왕조 제왕 재위 연대가 겹쳐지는 이유?
근세기에 만들어진 동양사는 짜깁기 한 엉터리역사란 표증이다.
사만왕조를 다시 대륙지나왕조로 새롭게 만들고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나대륙은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이지 5대10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번 물어보자.
동서양 근대사가 신뢰성이 있는가?
...
적어도 나는 단언 할 수 있다.
전혀 아니올시다 라고...
왜냐?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양 근대사는 짜깁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역사 찾기에 나섰지만 설마 이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은 솔직히 하지 못했다.
서양의 어느 왕조를 동양의 어느 왕조로 둔갑시켜 제왕들을 나열하고 연대표를 만들고 물론 동서양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건을 날조하고 창조했다고 의심할 수 없을 것이란 가정 하에 마음대로 넣고, 빼고, 첨가하고, 삭제하고, 꾸미고, 각색하고...그리고 편집하고....등등
이것이 전부이다.
역사란 이긴 자,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렇듯 엉터리일 줄은 몰랐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동서양을 합친 근대사가 근세기에 철저하게 기획되어 전부 조작 또는 각색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동서양 제왕 연대표를 맞춰보면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돌출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창조의 대상은 근세기에 만들어 졌다고 판단되는 동양사일 것이다.
솔직히 그러한 문제점을 여러 번 반복하여 발견하거나 찾아 낼 때는 할 말을 잊게 된다.
나 자신 스스로도 심대한 충격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이것이 4번째 글인데 그러한 사한을 밝힐 때마다 새롭기는 마찬가지다.
1편에서도 고려중기 제왕과 셀주크 술탄왕조 제왕이 겹쳐진다는 내용:
셀주크 제국(1038-1157)과 고려중기 제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74
2편에서는 신라 말기제왕 중 두 여왕(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서산왕조 말기에 두 여제와 겹쳐지는 내용:
사산왕조(Sassanid Empire)의 두 여제와 신라(新羅)의 두여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8
3편에서는 고려 20대 신종(神宗) 재위년도(1197-1204)와 룸 셀주크 술탄 술레이만샤 2세(Rukn al-Din Suleymanshah II)의 재위년도(1196-1204)가 같고 최충헌에 의해 폐위 되었다고 하는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년도(1204-1211)와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Giyath al-Din Kaykhusraw) 재위년도(1205-1211)가 판에 박은 듯이 똑 같다는 사실.
고려 와 룸 셀주크(Sultanate of Rûm 1077–1307)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3
이제 4편에서는 바로 후진, 후주, 송나라와 사만왕조가 그런 것인데 제왕들의 재위연대표가 겹쳐지면서 동서양 제왕끼리 이상하게 중복되거나 겹쳐진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외 본 블로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 었던 것을 보면 아래와 같은데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에서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
정통칼리파시대 4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ī ibn Abī Ṭālib, 598-661:재위656-661)이 신라 무열왕과 겹쳐지고 우마이야 왕조 (Umayyad Caliphate 661~750) 시조 무아위야 1세
(Muawiyah I ibn Abi Sufyan, 661 – 680) 문무왕과 겹쳐진다고 했다.
고려의 무신정권과 아타베그(Atabeg) 장기왕조는 같은 것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5
고려 의종(毅宗, 1146-1170)을 폐위한 무신들은 이고(李高1170-1171), 이의방(李義方, 1171-1174), 정중부(鄭仲夫, 1174-1179), 경대승(慶大升, 1179-1183), 이의민(李義旼, 1183-1196)이 차례로 집권하게 되는데 이때가 장기왕조의 신자르(Sinjar, 이라크 북부에 위치함)의 아미르(Amir)-Zengid Emirs of Sinjar (in Northern Iraq) 첫째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 2세 (Imad ad-Din Zengi II 1171-1197)와 연결되며 무신정권 초기 시기(1170-1196)와 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대한제국과 오스만제국 연결 편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9
오스만제국이 티무르에 의한 긴박한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 I. 1360-1403, 재위:1389-1402)와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恭讓王, 王瑤1345-1394, 재위:1389-1392)이 근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과 1370년부터 티무르가 점령한 서(西)차가타이의 술탄 수우르가트미시(Suurgatmish, 1370-1388)와 그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Sultan Mahmud ,Mohammed II, 1388-1402)는 고려 32대 왕우(王禑 1374-1388)와 고려 33대 왕창(王昌 1388-1389)과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럴 수 있겠다 또는 겹쳐질 수 있다 또는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 칠 수도 있지만 감히 역사인지라 그것을 허용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까지 찾아 낸 4편 과 이어진 3편 모두 있을 수 있는 우연의 중복이 아니라 반복되고 겹쳐진다는 것은 한쪽 역사를 날조하여 조작하거나 창조 할 때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실수하여 작업자들도 모르게 중복되거나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냥 가정집 배추문서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이고 근대사의 주춧돌이라고 하는 동서양 정사가 그렇다면 이건 역사가 아니라 가정집 배추문서 만큼도 가치 없는 것이라고 못을 박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란 중대한 사한이기에 우연의 단발성에 끝나지 않고 이어지거나 중복된다는 사실은 도저히 역사로서 인정하거나 묵과 할 수 없는 역사적 모순이고 심대한 결함이라고도 할 수도 있으며 근대사는 분명 포괄적인 기획아래 치밀하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크게 의심 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앞에서 이러한 점을 발견하여 셀주크왕조와 고려중기 제왕이 우연히 아니라 중복되어 겹쳐진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서산왕조제왕 리스트 중에 두 명의 여제문제 역시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같은 시대에 동서양에서 똑같이 동시에 여자 여왕과 여자제왕이 나란히 재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이것은 우연이라고 하기 보다는 빼기거나 복사, 모방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복사하고 빼긴 것이지 알 수 없지만 1920년 이후에 대륙국민당 객가 정치인들과 일제가 공모하여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동양사가 아마 서양사를 빼기거나 복사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무엇인가를 역사 근원을 숨기고자 할 때 한쪽을 살려두고 나머지 한 쪽은 완전히 뜯어고쳐 다르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진행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 시대라면 충분히 가능한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은 그냥 공명심이 아니라 엄중하고 무거워야 할 역사란 문제에서 결정적인 결함이나 심대한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문제성을 밝혀야 당연한 일이다.
자라나는 세대가 신뢰성에 문제성이 있는 근대사를 마치 정사인 것처럼 배우고 읽는다는 것을 감안 할 때 이 보다 더 한 행동을 불사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 찾기에 당위성일 것이다.
이쯤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는 오대십국시대의 후진과 후주, 송나라와 고려 그리고 사만왕조, 사만왕조를 망하게 한 카라한왕조가 교묘하게 뒤 섞여 나타나고 있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별칭으로(故又别称) 화송(火宋), 염송(炎宋), 남조(南朝), 동조(东朝), 조송(趙宋)이라고 하는 송나라(宋, 960-1279)제왕의 재위연대가 이상하게 후진과 후주 그리고 사만왕조와 크게 겹쳐지며 고려 태조 왕건 재위가 사만왕조의 시조 나스르 2세 (Nasr II, 914-943)와 퇴위하는 연대가 일치하여 이상하게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송나라는 통상 여진족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가 동쪽 지나대륙에 세운 나라인데 말년에 금(金, Jin Dynasty 1115-1234)나라에게 밀려 1127년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北宋)이라 하고 그 이후 임안(臨安, 지금의 杭州)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南宋)이라고 불러 구분하고 있다.
이 남송(南宋)이 원나라에 쫓겨 달아난 필리핀 루손섬에서 여송(呂宋)을 건립하였다고 한 것이다.
남송(南宋)은 결국 고려연합이라고 판단되는 원나라(1271-1635)에게 망하였고 또한 고려연합이라고 판단되는 몽골수장 최충원에게 망한 금(金, Jin Dynasty 1115-1234)나라와 셀주크에 망한 카라한왕조(Kara-Khanid Khanate, Karahanlılar, 840-1212)가 혼입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이다.
우리가 시가(cigar) 여송연(呂宋煙)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연합이라고 판단되는 원나라에 망한 남송(南宋)잔당들이 최후에 필리핀 루손(Luzon)섬에 들어가 여송(呂宋)이란 나라를 세웠다고 근대사가 주장하고 있기에 그것이 아니라 여송(呂宋)은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되는 시가(cigar)를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와 유럽전역에 퍼지도록 한 스페인이라고 앞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여송연은 필리핀 루손 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페인이 여송연의 근원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사 특히 국민당과 일제가 공모해서 만든 동양사는 엉터리란 사실을 함께 밝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송(南宋)이 금(金, Jin Dynasty1115-1234)나라에 쫓겨 지금의 지나대륙 절강성(浙江省) 상하이(上海)에서 180km 떨어진 곳, 지금의 항주(杭州)라는 곳으로 피난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있지만 남송(南宋)이 수도로 한 항주(杭州)가 지금 지나 대륙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여송(呂宋)이 유럽스페인이라면 스페인이 남송의 잔당이 되는 것이니 지나대륙 항주가 아닌 유럽대륙 항주를 찾아야 하는 동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상하이(上海)는 유럽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충분히 근거가 있어 하는 말이다.
아래 지도를 자세히 보자.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유럽편과 지나대륙편이다.
대륙조선이라고 판단되는 중국에 선교사로 온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이고 귀족가문출신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利瑪竇 1552-1610)가 1602년 중국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로서 리치지도라고도 하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 보면 이탈리아 반도를 두고 위(東)쪽 바다를 상해(上海) 아래(西)쪽 바다를 하해(下海)로 지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면 지나대륙편을 보면 항주(杭州)만 있고 있어야 상해(上海)는 정작 없다.
상해(上海)를 유럽에서 도시로 본다면 어딜 지칭한 것일까?
욕먹을 이야기지만 지중해의 무역 중심지인 베네치아(Venezia) 베니스(Venice)가 아닌가 한다.
조선에서는 바로 1년 후 1603년에 마테오리치가 그렸다고 하는 원본을 도입하여 축소 모사한 것이 전하고 있다 하는데 바로 본 블로그가 올린 두 쪽의 사진이다.
물론 축소, 모사한 것이라고 한 사실도 반도사학자들이 하는 말이니 믿을 수 없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들어서고 난 후 아마 축소하고 모사 그리고 조작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충분하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대륙조선을 한반도에 그려넣고 그 옆에 열도를 일본이라고 표시하기 위해 1925년 이후 그런 작업을 하여 놓고 1603년에 한 것이라고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추측은 아마 거의 99%확률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조선에서 대륙조선인이 그린 곤여만국전도 원본은 아마도 불행하게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무슨 조치를 당했을 것이라는 예상도 함께 할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세계를 유럽(歐羅巴)·아프리카(利未亞加)·아시아(亞細亞)·남북아메리카(南北亞墨利加)·메카라니카(墨互蠟泥加)의 5개의 대륙으로 구분했다. 메카라니카는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세아니아 등인데, 커다란 남방대륙으로 그려놓았다. 지도 속에는 세계 각지에 관한 간단한 지리적 설명과 지도의 작성 경위를 밝힌 리치의 서문, 지구구체설 및 기후 등도 기록되어 있다.[야후사전]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 1552-1610)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 하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펴낸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라고 한다.
이규경 역시 예수회 신자이다.
특히 이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금과 은이 산출 된 곳이 바로 여송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송(呂宋)과 시팡구(Cipangu), 그리고 황금왕국(Castilia Del oro)을 밝히는 매우 긴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던 근대사를 바꿀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낳게 한 막대한 자본이 향료 뿐만아니라 금과 은 산출지에서 탐욕스러운 서양 침략자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이니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이 금(金), 은(銀), 보석(에메랄드)이 생산된 곳이 다름이 아니라 바로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라고 하는 그리고 지금의 콜롬비아 라는 곳임이 밝혀졌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地毬圖》呂宋國多黃金
《職方外紀》北亞墨利加州內。金加西蠟地。金銀至賤。
물론 마르코 폴로가 말한 시팡구(Cipangu) 역시 지금 열도 일본(日本)이 아니라 이곳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일본이 시팡구(Cipangu)라면 일본 역시 적도부근인 서인도제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나중에 올릴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양사는 전부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적인 요소이다.
결국 여송이라고 하는 남송의 잔당이 송나라에서 근원하고 실제 존재했었다면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 어디쯤 항주라는 도시가 있어 그 곳을 수도로 삼고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 지금 지나 대륙에 상해, 항주 운운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돌리고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도대체 오대십국시대의 후진과 후주, 송나라와 고려 그리고 사만왕조, 사만왕조를 망하게 한 카라한왕조가 교묘하게 뒤섞여 나타나고 있다니 무슨 이야긴가?
사만왕조(Saman Khuda, 819-999)는 이란의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와 호라산(Khorasan)지역에 존재했던 왕조로서 시조 사만(Saman)은 본래 발흐지역(Bactra, Balkh)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배화교)신자였으나, 호라산(Greater Khorasan)의 칼리파 아사드 이븐 압드 알라 알콰스리(Asad ibn ‘Abd Allah al-Qasri, 723-727)에게 감명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900년에 사파르왕조(Saffarid Dynasty, 861–1003)를 무너뜨리고 호라산(Khorasan. 고대파르티아BC 247-AD 224)을 병합하였으며
나스르 2세(Nasr II, 914-943)때는 이란 본토를 차지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998년, 카라한 왕조(Karahanlılar, 840-1212) 4대 일레크칸에게 크게 패배하였으며
999년, 가즈나 왕조(Ghaznavids, 977-1186)에 의해 결국 멸망하였다고 위키자료에 나온다.
사만왕조를 멸망케한 가즈나 왕조는 고려라고 판단되는 셀주크 투르크(1037-1194)에 의해 영토를 빼앗기고, 골 고구려 후신인 고르왕조(Ghor, Ghurid Dynasty1148–1215)에게 멸망한다고 나온다.
고려라고 판단되는 셀주크인들은 처음에 사만왕조와 동맹을 맺고 카라한왕조(Kara-Khanid Khanate, Karahanlılar, 840-1212), 가즈나 왕조와 맞서 싸웠으나 결국 사만왕조가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스스로 독립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 술탄국으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만왕조, 후진, 후주, 송나라의 군주계보를 한번 살펴보고 실제로 겹쳐지고 중복되는 것인가를 한 번 살펴보자.
사만왕조 군주(Samanid Amirs)
1.사만 호다 (Saman Khuda)
2.아사드 이븐 사만 (Asad ibn Saman
3.누 이븐 아사드 (Nuh ibn Asad, ?-841/2)
4.아흐마드 이븐 아사드 (Ahmad ibn Asad, ?-864/5)
5.야히아 이븐 아사드(Yahya ibn Asad 819-855)
6.엘리아스 이븐 아사드 (Elyas ibn Asad ?-859)
7.나스르 1세 (Nasr I, 864-892)사실상 875년에 독립
8.이스마일 (Ismail 892-907)
9.아흐마드 (Ahmad 907-914)
10.나스르 2세 (Nasr II 914-943)
11.누 1세 (Nuh I 943-954)
12.압드 알말릭 1세 (Abd al-Malik I, 954-961)
13.만수르 1세 (Mansur I, 961-976)
14.누 2세 (Nuh II, 976-997)
15.만수르 2세 (Mansur II, 997-999)
16.압드 알말릭 2세 (Abd al-Malik II, 999)
비교 해보니 이렇듯 중복되고 겹쳐진다 할 수 있다.
(1)사만왕조(Saman Khuda) 10대 나스르 2세(Nasr II, 914-943)는 고려태조(太祖) 왕건(王建:918-943)과 재임시기가 거의 같고 퇴위시기가 꼭 같다.
송나라(宋, 960-1279)가 960에 시작하는 개국년도가 고려연합제국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과 일치하는 사실이다.
위 자료는 미국이 작성한 아시아 역사기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송나라의 건국연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감안 할 때 이 송나라는 사만왕조가 되기도 하고 또한 고려연합제국 체제에 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2)사만왕조(Saman Khuda) 11대 누 1세 (Nuh I, 943-954)는
후진(後晉, 936-946) 2대 석중귀(出帝 石重貴, 재위 : 942-946) 과
후주(後周, 951-960) 태조 곽위(太祖 郭威, 재위 : 951-954)의 재위년도와 겹쳐지고 같으며
(3)사만왕조(Saman Khuda) 12대 압드 알말릭 1세(Abd al-Malik I, 954-961)는 오대십국시대 최후의 왕조 후주(後周, 951-960) 세종시영(世宗 柴栄, 재위:954-959)과 공제시종훈(恭帝 柴宗訓, 재위:959-960) 재위 년도와 중복되고 겹쳐지고 있다.
(4)사만왕조 (Saman Khuda:819-999) 13대 만수르 1세 (Mansur I, 961-976)에서 보면
후주(後周, 951-960)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960년에 나라를 세웠다는 송(宋)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 재위960-976)은 신라에게 선양을 받아 나라를 세우는 고려와 흡사하고 사만왕조 만수르1세 재위년도와 겹쳐지며 중복된다.
(5)또한 송(宋)나라 2대 조광의(趙匡義, 976-997)역시 사만왕조 14대왕 누2세(Nuh II, 976-997) 재위년도와 겹쳐지면서 같다.
어떻게 이처럼 중복되고 겹쳐지는 것이 두 나라에서 한 제왕 재위년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연이어 이렇게 겹쳐지고 중복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결국 근세기에 만들어진 동서양 근대사는 이런 식을 짜깁기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사만왕조의 말년에서 보면
만수르 2세 (Mansur II, 997 - 999) 와
압드 알말릭 2세 (Abd al-Malik II, 999) 아미르는 송나라 3대 왕 조항의 다섯번의 연호 중 제일 먼저 사용한 연호 함평(咸平, 998-1003)이 압드 알말릭 2세의 동생 이스마일 2세와 이어지고 두 번째 연호 경덕(景德, 1004-1007)도 이와 같이 연이어 연계된다.
그 이후에 연대표는 가즈나왕조와 카라한왕조를 오가며 더욱 혼란스러럽게 나타나는데
가즈나왕조 1041년 부터 1118년까지 연결되고 있고 이어 카라한왕조에 1017년부터 1042년까지가 1차 연결되고 1099년부터 1129년까지가 2차로 대체로 연결되고 있다.
송나라의 말기가 가즈나왕조와 카라한왕조를 뒤섞어 가며 나타난 것이다.
가즈나 왕조와 송나라 연호년대 중복
• Maudud ibn Mas'ud(1041-1050)
경력(慶曆) 1041년-1048년
• Ali ibn Maudud(1050 - 1053)
황우(皇祐) 1049년-1054년
• Abdul-Rashid ibn Alii(1053)
• Toğrül of Ghazni(1053)
지화(至化) 1054년-1056년
• Farrukhzad ibn Mas'ud(1053-1059)
• Ibrahim ibn Mas'ud(1059-1099)
희녕(熙寧) 1068년-1077년
원풍(元豊) 1078년-1085년
원우(元祐) 1086년-1094년
소성(紹聖) 1094년-1098년
• Arslan ibn Mas'ud(1115-1118)
정화(政和) 1111년-1118년
카라한 왕조와 송나라 연호년대 중복
• Mansur Arslan Khan 1017–1024
천희(天禧) 1017년-1021년
건흥(乾興) 1022년
• Muhammad Toghan Khan 1024–1026
• Yusuf Qadir Khan 1026–1032
천성(天聖) 1023년-1032년
• Ebu Shuca Sulayman 1034–1042
경우(景祐) 1034년-1038년
보원(寶元) 1038년-1040년
강정(康定) 1040년-1041년
서 카라한 왕조와 송나라 연호년대 중복
• Jibrail Arslan Khan 1099–1102
원부(元符) 1098년-1100년
• Muhammad Arslan Khan 1102–1129
숭녕(崇寧) 1102년-1106년
대관(大觀) 1107년-1110년
정화(政和) 1111년-1118년
중화(重和) 1118년-1119년
선화(宣和) 1119년-1125년
정강(靖康) 1126년-1127년
이렇게 볼 때 결국 사만왕조가 송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송나라 역시 바로 고려연합제국 체제에 시발점이 되고 고려에 존재하던 이름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어진다.
사만왕조는 카라한왕조(黑汗)와 가즈나왕조에게 망하는데 결국 북송이 금나라에게 쫓겨 남송이 되는 것처럼 사실상 북송이 붕괴되는 것과 꼭 같다.
이 금나라는 최충헌에 망하지만
남송을 셀주크 투르크에 대입할 수 있어진다.
남송의 잔당이라고 하는 여송은 필리핀의 루손섬이 아니라 이탈리아반도 서쪽 유럽대륙을 겨냥하고 있는 사실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근세기에 만들어진 근대 동양사가 원나라라고 하는 것은 고려연합체제에 속한 카라한왕조와 가즈나왕조라는 사실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만왕조를 멸망케한 가즈나 왕조는 고려연합체 술탄 종주국이라는 셀주크 투르크(1037-1194)에 의해 영토를 빼앗기고 합병되고 만다.
고려가 명실공히 통일하고 술탄국으로 칼리프로 자리를 잡는 형국인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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