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미국국명과 코리아(대한제국)

한부울 2015. 4. 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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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글쓴이:한부울

 

[대한제국 5편]

1) 머리말
2) 순종과 다이쇼왕은 동일인물
3) 실증주의와 끼워넣기한 유럽사
4) 코리안학살
5) 한국인은 문맹이 많고 가난했던가.
6) 한반도는 본래 역사터전인가?
7) 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

8)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없었다.

9) 미국국명과 코리아(대한제국)

10) 미서전쟁(美西戰爭)허구와 대한제국

 

8)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은 없었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의 유고집 ‘일본산고(日本散考),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에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열도일본인)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이 더 오래이며 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잠재된 과거의 열등감이 우리 민족문화를 짓이기려 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란 글을 볼 수가 있다.

일본열도인들이 우리 한반도인에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증오하는 근원을 선생께서 역지사지(易地思之)식으로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가혹한 시련에서 나름대로 위안을 찾는 토로이다.

물론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반도역사사실만을 기준으로 한 일본을 영어명칭"JAPAN"으로 보지 않고 열도일본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박선생은 일본이라는 실체와 일제가 열도일본인 정치집단으로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현재 열도일본인들은 왜(倭), 왜구(倭寇), 화(和:Wa)라고 하던 서세(西勢)의 대역일 뿐임을 알았다.

서세(西勢)가 동양명칭 일본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한 것은 하나의 체제에서의 역사이다.

그러나 삼한역사 즉 하나의 역사에서 그들이 볼 때 열등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근세기에 한층 콧대가 올라간 서세들이 그 이름을 취했을리가 없고 또한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국(美國)역시 구태어 일본의 영어명칭 "JAPAN"를 택할 필요가 없었으며 일루미나티가 시작된 원년을 1776년 기준으로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것이 났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어쨌던 삼한역사에서 동양명칭 일본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열등역사인 일본은 서세만을 해바라기처럼 흠모하고 서세를 지양하며 그들의 분신처럼 쇄뇌가 되어있는 열도인들에게 이 동양명칭을 던져준 것이다.

그러나 열도일본인들은 열등역사가 아닌 어느듯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또한 동아시아에서의 역사는 그들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그들 하기 나름이라는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표현할 수가 있다.

비록 그들에게 왜, 왜구, 화라고 칭하고 근본이 없는 족속이라고 하여도 그들은 우리만큼 역사적인 트라무마를 앓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도역사로 인하여 그들이 우리보다 현실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며 근세기 그들의 조작된 역사로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것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자 서세와 미국이 열도일본인들에게 준 최상의 선물인 반면 우리 한반도인에게 지옥같은 역사만을 안긴 것이다.

이런 것은 서세(西勢)와 미국(美國)이 그들의 열등역사를 벗어 던질 수 있어 좋고 열도일본인들은 서세(西勢)의 지원을 확실하게 받으며 동아시아의 실력자로 군림해서 좋은 것이다.

이미 본 블로그가 펼쳐놓은 세계삼한역사를 알 것이다.

근세기 이전까지 열등역사만을 가지고 음지에서 해적질이나 하던 세력들이 거대한 자본을 소유하게 되면서 천하의 다시 없는 무기인 자본력의 서세(西勢)로 탈바꿈하였다.

때론 서세가 되었다가 때론 미국이 되었다가 때론 열도일본인으로 변화무쌍하게 변장술이 능한 역사를 소유한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그들의 허접한 역사를 우월하게 만든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생각처럼 과거 열등역사로 인한 서세(西勢)에게 말 할 수 없었던 포원(抱冤)이 있었다면 근세기 자본력을 바탕으로 해원(解寃)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과 그 중심에는 시온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를 지배코저 하는 유대인조직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물론 유대인들의 시온주의는 기독교와 유럽역사를 모체로 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목적을 이루려면 기존 역사와 충돌할 수 밖에 없고 때문에 언제든지 역사전쟁을 필연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다 아다시피 근세기에 벌어진 1.2차세계대전은 역사전쟁이다.

거대한 전쟁은 수많은 진실을 감출 수 있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으며 뒤 바꿀 수가 있기때문이다.

반도역사는 이러한 파고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도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식민지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겪었고 거대한 두개의 전쟁 끝에 우리 한반도인들은 식민지상태에서 비록 해방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서세들로부터 상당히 불합리한 처분을 받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또한 그럼에도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서 발생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근세사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안겨준 섭섭한 조치에 대한 것에서 대표적인 것이 1905년 7월 29일에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이라는 것으로 그것의 밀담을 전제한 내용을 보면 마치 시장터에서 장삿꾼들이 지들 마음대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국가 대 국가가 취해야 하는 상대적인 원칙이 그야말로 말살된 참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미국이 대국이라면 무엇보다도 정책결정에 있어 도덕적인 결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은근히 기대한 우리한반도인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한반도인들을 얼마나 얕잡아보고 무시한 처사인가 하는 말이다.

이 밀약에 대해 기존역사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나름대로 모순을 분석하고 불합리한 사실에 분노를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모두 기존 반도역사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해석의 한계에 부딪쳐 근원적 역사 문제의 핵심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밀약의 핵심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증오의 산물이라 해야 맞다.

특히 이러한 밀약이 진행 된 영토가 있었다면 절대 한반도가 아니며 굳이 한반도라고 고집한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사관에서 탈피해야 보이는 문제로서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면 핵심을 찾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정치적인 갈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무런 연관도 없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동양인 열도일본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며 그렇다면 왜 굳이 일본을 끌어들이고 이러한 불합리한 사실들을 동아시아대륙사에 집어넣고자 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아마 이러한 음모가 필요했던 것은 2차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난 후 아직 "하나의 체제" 뿌리가 남아 있는 아메리카대륙 근대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였고 또한 서세가 아시아에 동인도(東印度)를 세우기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에서 동양일본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고 동시에 냉정시대를 조성하면서 일본을 앞세우고 태평양지역 전체를 미국이 온전히 지배하기 위하여 필리핀이란 영역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와같은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라면 어떤 것도 했을 것이다.
미국인들의 "하나의 체제"에서의 위기의식은 미국 시카코출신인 '필립 킨드레드 딕(Philip Kindred Dick:1928-1982)'의 SF소설 제목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란 픽션에서도 알 수 있는 이야기로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에게 패했다는 가정을 전제한 것인데 이러한 주제의 이야기는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상당한 공포심이 존재하였을 것이고 이 책이 등장할 때 상당한 충격 또한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으로 
아마도 당시 미국인들은 이러한 문제에서 사회전반에서 심각하게 갈등하지 않았겠는가 한다.

딕이 출생한 시기가 1928년이면 세계불황이 시작되는 시기이며 그가 어린시절이나 청소년시설때를 볼 때 이러한 생각으로 그가 수많은 서적이나 자료를 찾았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과 일본이라고 하였지만 실체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쨌든 태프트가쓰라밀약은 미래를 대비한 기록임을 알 수 있는데 미국이 이 정도 잠금장치를 해 둘 정도라면 당시 없애려고 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실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는 점을 상상할 수가 있다.

이제부터 이 밀약에 깊이 들어가 보자.
비밀협정이라고 한 "태프트-가쓰라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을 미리 공개해놓고 비밀협정인 것처럼 알리는 것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이 협정이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대한제국이 엮이는 사건을 보면 대한제국이 건립되고 난 1년 후 1898년 미서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이라 할 수가 있다.

반도역사로 따질 때 그 정도라면 대한제국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열도일본이 아니라 그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1898)은 미국역사의 분기점같은 사건이라 했다.

그만큼 미국역사는 이 미서전쟁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점차 부흥했다는 이야기다.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1904.2.8-1905.9.5)은 그가 동양일본을 앞세운 것이고 대한제국이라고 할 수 없으니 러시아라고 하여 대리전쟁의 성격을 띄었기 때문이다.

물론 뒤전에 물러나 있는 것 같지만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충돌이며 두 사건 다 연결성이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전쟁들이 전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멕시코만과 그에 인접한 군항(하바나와 포트아서)이었다는 점인데 특이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두 대리전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러일전쟁은 북아메리카대륙 텍사스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푼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코리아는 옛 스페인 식민지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 이서지역 모두가 코리아 즉 대한제국 영역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이러했다면 미국은 어떤 명칭으로 불리었던 간에 대한제국을 몰아내려고 애를 섰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나름대로 기획하에 일본을 대리로 내세웠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기중조정(居中調停)에 위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술수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일본과 대립되어 있다면 미국이 부추기고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할 것이 아니라 대립상태에 중간에 들어가서 말리거나 화해를 붙여야 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고종을 이 부분을 중히 여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볼 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맺은 태프트-가쓰라밀약이 왜 위반되는 것인가 하면 지금도 양심적인 역사가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미국이 중간에 끼여 대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을 식민지하는데 일본을 도와주고 두둔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반도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러일전쟁이라고 하는 대리전쟁에서 설령 미국을 대리하던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 할 수 있었던 지역을 한정시키려면 텍사스주(Texas)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밀약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대한제국 때문에 러일전쟁이 발생되었다고 하였고 때문에 대한제국을 일본이 식민지로 삼게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서 한반도역사로 보았을 때 참으로 해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한반도가 아니 멕시코 만(Gulf of Mexico)을 기준으로 지금의 포트아서(Port Arthur)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멕시코만을 스페인만이라 하였고 그 이전에는 코리아만(Gulf of Corea)이라 하였을 것이다.

열도일본은 대리명칭으로 멕시코일 수도 있으며 그것을 조정한 세력은 미국일 가능성이 높고 결국 러시아라고 하였지만 악라사이고 아라사는 몽고라 하였기때문에 본 블로그 글 "휴스턴(Houston)은 몽고성(蒙古城)이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5 "에서 주장한 현 텍사스주 휴스톤의 옛 이름이 몽고성이었다는 사실도 상황참고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구도가 된다면 어느정도 혼란스러웠던 궤가 맞아 지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이니 영국이 미국이니 프랑스니 하는 국명들은 전부 1차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란 혹독한 전쟁을 치루면서 생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때문에 당시 1905년이라면 국가명이 제대로 생성되지 않았을 때란 점도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성있게 확인한 것은 유대자본 70%을 끌어들여 러일전쟁을 빗더미로 치루고 난 일본이 비록 승리하였다고 하지만 러일전쟁으로부터 얻을 것은 지협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며 "JAPAN" 이란 이름을 단 멕시코용병이거나 미국 또는 열도일본이라 할지라도 유대자본에 깊숙하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은 부정하기가 힘든다.

1898년에 발생했다고 하는 미서전쟁 역시 이 구도로 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서전쟁에 키 포인트는 바로 동아시아에 있는 필리핀을 미국소유로 만드는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필리핀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España:1519-1821)에 속하는 뉴필리핀(New Philippines)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일본식민지로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식민지로 필리핀을 승인한 것에서 동아시아의 필리핀이라 하였지만 기실 북아메리카대륙의 뉴필리핀이라는 지역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 일본 "japan" 이라는 것은 멕시코반란세력이나 일루미나티의 용병 멕시코정치세력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당시 러시아라고 하는 악라사지역과 가까운 곳에 세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손으로 그린 옛 삽화를 보면 금발의 모습인 러시아병사와 거의 같은 모습의 상대가 적군병사들임을 알 수있어 동양계열도의 일본병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눈을 속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는 단언하지만 1905년에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명확한 답이다.

이것이 실존케 한 시기는 1945년 미국이 승리한 후라고 단정내릴 수가 있다.

이 밀약이 동아시아대륙사에도 맞게 맞춤이 되었고 또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볼 때도 일본이란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어서 또한 맞춤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비밀각서는 말 그대로 일본-미국 관계를 다룬 대화(토킹수준)에 대한 각서(memorandum)을 누군가에 의해 타이핑되고 이것이 부풀려져 아마도 2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아시아대륙사를 정리하면서 만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대한제국이라는 실체를 아메리카대륙에서 들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가 있다.

합의내용도 들여다 보면 지극히 간단한 것으로 미국이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 :Spanish-American War)으로 영유한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으며,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동맹관계를 확보해야 하고, 미국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여기에 영국이 들어가는 것도 1902년에 러시아의 극동지역 진출을 견제할 목적으로한 영일동맹(英日同盟:Anglo-Japanese Treaty of Alliance)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연관하고 또한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으로 쿠바를 묶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당시 카리브해 지역에 야심을 품은 독일(유럽대륙의 독일아님)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쿠바의 독립보전이라는 명목으로 쿠바 내정 간섭권 및 해군기지의 차용권 등을 제한한 것으로서 이것들은 전부 북아메리카대륙에 관련되는 내용임은 물론이고 러시아(악라사)나 독일은 대한제국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즉 러시아는 1914년 이전의 러시아와 독일로서 악라사(대비달자)라 할 수 있다.

Photostat or the first page of the document containing the "agreed memorandum" in which was embodied the understanding arrived at in 1905 between the Japanese Premier and a representative of President Roosevelt. So as not to embarrass the latter, his name has been excised by Mr. Dennett.[엔하위키]

Second page of the text of President Roosevelt's secret agreement with Japan in relation to the affaire of the Far East. The last fourteen lines have been excised because they referred to a different question of diplomatic negotiation.[엔하위키]

 

위 사진은 [엔하위키]의 자료인데 첫페이지의 주기를 보면 미래에 논란을 없애기 위해 아무런 공직이 없었던 '데닛'이라는 사람이 대담하게 원문을 삭제하기까지 하였으며 2번째 페이지도 앞장과 마찬가지로 이 비밀협상에 다른 의혹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마지막 열네번째 줄을 삭제했다고 되어 있다.

마지막 열네번째 줄은 바로 쌍방 확인을 위한 서명란이지만 애초부터 서명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없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무엇인가 있었던 기록인 것처럼 삭제처리한 것이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그들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것을 숨기려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데닛'이라는 사람도 수수께끼같은 인물로서 밀약이란 점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다.

본래 위스콘신 스펜서(Spencer, Wisconsin)출신으로서 미국역사가라고 한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1883-1949)은 윌리엄스 대학교(Williams College)에서 1904년 졸업하였다는 것을 보면 밀약이 있었던 1905년에는 학생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고 졸업후 다시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에서 공부하고 1908년 학위증서를 받았으며 그 후 잠시 회중교회(會衆敎會)에서 일하다가 본격적으로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쌓았다고 하였고 그런 후 1922년 부터는 동아시아 극동지역에서의 미국정책에 대한 연구하면서 1924년 루스벨트 대통령 관련 문서들을 열람하다가 조작의 대명사인 우연히란 말을 빌어 그가 이 밀약 각서를 발견하였고 그의 저서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가 출판이 되면서 비로소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란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소리이다.

이것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기자들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퓰리처상(Pulitzer賞)을 1934년에 수상한다.

위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일러 데닛이라는 사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고 그와 동시에 그가 의도적으로 1924년 발표했다고 하는 사실이 있으며 그가 미래 동아시아의 역사판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문서의 기록을 마음대로 삭제하여 주요한 내용을 숨겼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 할 짓이 못되는 것으로 이것은 적어도 철저해야 할 미국역사자료 관리가 이런식이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역사 음모설을 일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세사는 음모가 아니라 조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이 들어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가 곤란하다.

소위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결코 음모라고만 할 수 없고 글쓴이는 앞에서 이미 단언 한 것처럼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란 실체를 믿지 않는다.

본 블로그 앞의 글 소제<7.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미국의 여성 사학자(American historian) 캐롤 쇼(Carole Cameron Shaw:1944-)의 저서 ‘외세에 의한 조선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란 글에서 그녀는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면서 1882년 5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제1조의 거중조정(居中調整:good offices)조항을 심각하게 위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는 사실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이 밀약에 실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한계였을 것이다.

 

또한 태프트-가쓰라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을 한번 더 세심하게 들여다 보면 이 밀약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태프트와 가쓰라의 임기와 생몰년도가 중복된다는 점이 참으로 이상하다.

이러한 예는 비일비재한 이야기로서 현재 날카로운 재야연구자들의 냉철한 판단력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도 인물 이중복제에 이어지는 인물 나누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이러한 사실들이 역사찾기하는 연구자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태프트가쓰라밀약이 있은지 4년 뒤인 1909년 3월 4일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909-1913,재임:1909-1913.3.3)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1910년 8월 22일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으며 1년 뒤 1911년 8월 30일, 가쓰라 다로(桂太郎,1848-1913,일본13대총리재임:1908-1911.8.30)가 사임하면서 이 밀약의 시효가 끝났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러나 가쓰라 다로(桂太郎)가 다시 1912년 12월 21일에 15대총리가 되어 1913년 2월 20일에 사임하는데 태프트와 퇴임시기 1913년 3월 3일과 거의 같게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또한 두 사람의 사망시기도 태프트의 사망이 1913년 3월 8일이고 가쓰라의 사망일자가 1913년 10월 10일로서 두 사람 사망년도 역시 같다는 것 등은 태프트와 가쓰라가 한 인물임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어떤 역사사실도 믿기가 힘든다.

1881년에'하나의 체제'인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처음 뉴욕을 중심으로 "JAPAN"이란 세력에게 점차적으로 침식당했다고 생각되지만 대한제국(大韓帝國) 1905년 추악한 이런 역사음모가 있었던 없었던 그것과 관계 없이 옛 대달단(大韃靼) 타타르(Great Tartary)지역인 지금의 유럽을 포함하고 오스트리아주를 포함한 아시아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그리고 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대륙, 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를 포함한 북부의 영역을 대동아전쟁이 발발될 시점인 1941년까지 충분하게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한 세계역사 중심에서 건재하여 마침내 미국과 숙명적인 근세기한판결전을 치루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9) 미국국명과 코리아(대한제국)

 

그렇다면 1905년까지 실제로 미국은 어떤 정체의 역사국명을 사용하였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체적으로 국가명이 정립,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청나라 말기인 1822년에 위원(魏源:1794-1857)이 지은 '해국도지(海國圖誌)'에 미국을 아묵리가(亞墨利加), 미리가(美理哥), 아미리가(亞美里加), 미리견(美利堅·彌利堅·米利堅)등으로 기술한데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한사람이 만든 책자에 같은 미국을 이렇듯 다르게 명칭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미국(米國)이라 하였고 철종6년(1855) 통천(通川)에 표류한 미국(米國)인들을 청나라에 호송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화기국(花旗國)'사람이라 한 것에서도 지금 성조기를 성화기(星花旗)라 했다고 한다.

분명 화기국이란 것은 꽃화(花)꽃을 새겨 넣은 그림의 깃발임을 알 수 있고 본 블로그에 게시한 적이 있는 붓꽃(Fleur-de-lis)을 상징하는 세인트루이스깃발(Flag of St. Louis)처럼한 깃발과 다른 별(星)을 사용한 깃발의 근원적인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표류한 미국사람들을 조선에서 청나라에 호송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도 본 블로그에서 밝혔듯이 청(淸:Qing:칭)은 만주족(滿洲族)을 말하는 것으로 현 멕시코로 볼 수 있고 중앙아메리카가 후금(喉衿:後金)의 목구멍지역이라 하였으니 내로우넥(Narrow Neck)과 같은 범주에 넣고 대입할 수가 있다.

조선(朝鮮)에 표류한 외국인들을 늘 청(淸)나라에 호송하였던 것도 다 이런 지리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미국인들이 중앙아메리카 부근에서 활동하던 세력으로서 하나의 체제에서는 여송인들처럼 전혀 알 수 없었던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점을 들어 미국 국명은 근세기 상당기간까지 세계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여송연(呂宋煙, Cigar)으로 본 이상한 근대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417 "에서 본 것처럼 조선에 표류한 여송사람들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9년동안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는 상황도 위와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북아메리카대륙 멕시코만이나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세력임을 알 수 있고 여송국도 그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사' 저(著),『여적[餘滴]』이란 제목 하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미국인을 만난 것은 일성록(日省錄:1760-1910)에 나타나고 1853년 1월[철종 4년(음력 1852년 12월 21일; 양력 1853년 1월 29일)]기사에, 미국의 고래잡이 배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을 때 부산첨사 서상악(徐相岳)과 동래부사 유석환(兪錫煥)지휘한 훈도 김기경(金耆敬)과 별차 김정구(金鼎九)와 소통사 김예돈(金藝敦)등이 선원들의 국적과 입국한 경위 등을 조사했지만 언어불통으로 실패하였다 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그들의 두발이 고슴도치머리 같았고, 자신들을 가리키며 '며리계(㢱里界)'라고 여러번 지껄였다고 했으며 그들이 쓴 글자가 여운여화(如雲如畵)로서, 전서(篆書)도 아니고 언서(諺書)도 아니어서 말과 글 모두가 불통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제에서 기존 왕래하던 세력과는 또 다른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세력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9년동안 언어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여송국 사람과 같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반도사서전체가 어디에선가 상당한 기간동안 기획적으로 날조(捏造), 가필(加筆), 윤색(潤色)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언어불통이라 하여 그들의 정체를 숨겼을 수도 있다.

위 일성록에서 말한 1853년 1월 29일에 부산에 왔던 배가 미국 포경선 사우스아메리카(South America)라 하였는데 이 포경선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861Cartoon of Scott's Anaconda Plan]

 

[위키자료]South America, a 606 ton whaleship purchased on 9 November 1861 at New London, Connecticut. She was beached with Peter Demill and Cossack on 8 December 1861 to serve as a at Tybee Island, Georgia, at the mouth of the Savannah River.

USS South America (1861) was a whaler purchased by the Union Navy on 9 November 1861 at New London, Connecticut. She was acquired to be sunk as an obstruction in the channel leading to a Confederate port as part of the Union blockade on ports and waterways of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However, instead of duty in what was known as the "stone fleet", the 606-ton bark was beached with Peter Demill and Cossack on 8 December 1861 to serve as a wharf during the landing of troops at Tybee Island, Georgia, at the mouth of the Savannah River.

 

위 위키영어자료를 보면 606톤급의 사우스아메리카(USS South America)는 코네티컷(Connecticut) 뉴런던(New London)에서 1861년 11월 9일 북군인 연합해군(Union Navy)에 의해 구매된 고래잡이 어선이라 하였으며 1861년 12월 8일 조지아주 사바나강(Savannah River) 입구 타이비 아일랜드(Tybee Island)해변에 300톤급의 피터데일(Peter DeMill)과 254톤급의 코사크(Cossack)와 함께 같은 임무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것은 1861.4.19 부터 실행한 북군의 남군봉쇄조치에서 나온 것으로서 남군 즉 아메리카 연합국 혹은 남부맹방(南部盟邦:CSA)의 수로(水路) 남군해안선 5,600 km 둘레의 항구(part of the Union blockade on ports)를 봉쇄조치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을 "돌을 싣은 선단(Stone Fleet)"이라 하였고 오래된 배들을 돌과 모래를 싣고 지정된 장소에서 밧줄을 묶어 가라앉게 만들거나 부두로 사용했던 것으로서 이때 24척 포경선(24 whaleships)들이 사용되었으며 북군해군장교 찰스데이비스(Charles Henry Davis:1807-1877)선장에 의해 지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대표적으로 사용된 곳은 찰스턴 항구(Charleston Harbor)이며 군대의 상륙 부두로도 사용되었다고 알려지고 이것에 더욱 놀라운 것은 이 24척의 포경선 중에 336톤급의 코리아호(COREA)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위키자료]Corea was a 336 ton armed store ship of the Royal Navy captured by fisherman from New Bedford, Massachusetts during the American Revolution, and later served as a whaleship. Reportedly she was not sunk and was in service with the US Army as late as 8 January 1862.

 

도대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왜 이토록 코리아란 이름이 성했을까?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에서도 보았듯이 어마어마한 화물선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건조했던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위 자료에 설명을 보면 이 코리아호는 미국독립전쟁 기간동안 영국해군무장함이었다가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뉴베드퍼드(New Bedford)에 사는 어부에게 나포된 것으로 나타나고 한반도 부산에 들어왔다고 하는 사우스아메리카호처럼 늦게 포경선의 역할도 했다 하였으며 이 배는 침몰되지 않았으며 1861년 1월 8일 늦게까지 미육군과 함께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코리아호는 포경선으로 활용하기 전 본래 영국해군(Royal Navy)의 무장함이었다 한다.

로얄네이비(Royal Navy)가 영국해군이란 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본 블로그글 "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8" 에서 'Cross of St George' 혹은 'St George's Cross'깃발을 영국해군 로얄네이비 깃발이라고 하고 있지만 붉은 십자가 깃발(Red Cross flag)은 서양 특히 현재 잉글랜드의 전유물이라 할 수 없는 이유가 있고 흰바탕에 붉은 흡사한 십자선을 그려놓은 깃발을 등대 역할의 작은 배, 등대선 깃발용으로 또는 출입국관리해군선박에 꽂는 깃발용으로 코리아(朝鮮:Corea or Korea)령내에서의 항로표식(航路標識:Beacon)을 제어 관리하는 깃발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설명한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붉은 십자기는 만주국 군기(滿洲國軍旗:manchurian army red cross flag)와 같다는 것도 알렸던 바가 있다.

사실상 20세기초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앵글로(anglo)로 나타난다는 사실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606톤급의 포경선 사우스아메리카(USS South America)호가 한반도 부산 용당포(龍塘浦)에 들어온 시기가 1853년이라면 파마나운하가 개통되기 전이기 때문에 절대로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적어도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시대의 대조선(大朝鮮)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로얄네이비(Royal Navy) 역시 대조선 해군(大朝鮮海軍)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물론 본 블로그 글에서 3탄 시리즈로 이어진"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으로 본 코리아해군(COREA NAVY)과는 또 다른 코리아가 아닌 대조선으로 보아야 성질의 해군력이 아닌가 한다.

위 봉쇄조치에 따른 배 쓰임새를 잠시 보았지만 1861년 2월 8일에 미국남부의 7개 중 6개 주가 연방탈퇴를 선언하고 수립한 남군의 해안선을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북군이 봉쇄함에 있어 우리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은 본 블로그 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에서 당시 목화수출항이었던 목포(木浦)를 텍사스주(State of Texas)의 휴스턴(Houston)과 조지아주의 사바나항을 꼽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주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 남부항구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목화항구가 있어 세계5위라고 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에 대조선과 대한제국이 나란히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세계목화5위 생산국이라는 것은 남군을 말하는 것으로서 북군이 남군해안선을 봉쇄하기 전에는 3년간 1000만짝이 출하되었지만 조치 후에는 95%가 감소되어, 봉쇄기간 중에는 50만짝 밖에 출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코리아에서 생산되던 목화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서 생산되는 목화와 과 일치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상의 사실에서 언어가 소통되지 않았던 미국인들이 몰고 온 고래잡이 배 사우스아메리카호는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있는 부산 용당포(龍塘浦)라 해야 맞는 것이다.

 

당시 미국정식 해안경비대(U.S. Coast Guard)창설의 역사를 보면 윌리엄 태프트에 의해 제안되었고 1914년 3월 12일에 상원통과하였으며 1915년 1월 20일에 하원에서 통과되어 1915년 1월 28일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재임:1913-1921)대통령에 의해 서명되었다는 사실에서 그때까지 미국은 북아메리카대륙 해안전체를 통제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결국 미국은 1915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멕시코를 대리한 한반도를 기준으로 하는 열도일본이 아니라 유대자본 일루미나티가 장악한 미국이라면 대한제국과 을사보호조약 따위의 역사는 일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가 있다.

다만 스페인부왕령을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앞에서 언급했지만 '태프트가쓰라밀약'의 기록물이 일반인이며 일개 저널리스트인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에 의해 주요단서가 될 수 있는 기록 부분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삭제되었다는 사실들은 솔직히 밀약이라는 존재자체를 무시할 수밖에 없게 하는 사실들이다.

만약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사한역사관점에서 당시까지 미국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히"JAPAN"이라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면 혹시 이 명칭때문에 데닛은 그것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또한 이승만박사 역시 1918년 국적을 "JAPAN"이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1776년부터 시작된 그렇듯 길지 않는 짧은 미국역사에서조차 이렇듯 오리무중이니 근세사전체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10)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허구와 대한제국

 

시어도어 루스베트가 설계한 태프트가쓰라밀약이 이런 지경이라면 과연 그가 주장하여 발생케 한 미서전쟁은 어떨까.

거의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성 싶다.

근세사에서 스페인제국이 1565년부터 1898년까지 영유한 식민지가 스페인령 동인도(Indias Orientales Españolas)라고 한 곳은 지금의 서태평양이 아니다.

물론 본 블로그에서 입이 닳도록 이 문제를 개진하였고 마땅히 서인도제도가 동인도제도라 하여야 한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미 결정이 나 있는 이야기다.

아래 지도에 보듯이 지금의 서인도임을 알 수가 있다.

즉 서인도라는 것은 잘못된 명칭이라는 말이다.

아래 지도에는 분명 뉴스페인 부왕령(Viceroyalty of New Spain)으로 불리었던 지도로서 맨 하단에 붉은 점선안를 보면 "스페인동인도"라고 쓰여져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북아메리카대륙을 포함한 서인도제도가 곧 동인도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쨌거나 미국역사에 있어서 이 스페인이란 명칭의 존재는 있어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없어서도 안될 애증에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단면이라 생각되며 스페인이란 역사명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의해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들고 만다.

그것이 미서전쟁이다.

 

 

그렇다면 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서전쟁을 고집하였는가 알아보아야 한다.

위 수정된 스페인 부왕령의 지도를 보면 미국이 왜 기어코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막교환하고자 한 태프트가쓰라밀약이 필요했는지 알 수가 있으며 실과 바늘처럼 필리핀을 연결시키고자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 필리핀이란 지명은 두 가지 것을 동시에 포함하고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동아시아대륙 필리핀(Philippines)이 필요했다는 것과 북아메리카대륙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España1519-1821)에서 뉴필리핀(New Philippines)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태평양전체를 장악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며 서태평양에 있는 필리핀을 여기에 대입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역사에서 동양역사를 빌어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공격한 곳이 바로 멕시코 만이다.

1차 동아시아대륙사에서 1895년에 있었다고 하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이며 2차공격은 1898년 미서전쟁이고 3차공격이 바로 텍사본토 공격으로 소위 러일전쟁이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따진다면 청일전쟁도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으나 한발 더 나아가면 고려(COREA)와 쿠바(Cuba)원주민간에 충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1895년 쿠바(Cuba)에서 제2차 독립전쟁인 대()에스파냐 반란(叛亂)이라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이 쿠바원주민이라고 하지만 일루미나티의 고용된 세력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하는 이야기.

근본적으로 동서나눔에 있어 현격하게 모순이 들어난 것은 마닐라(City of Manila)를 스페인정청(政廳)소재지로 하고,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 캐롤라인 제도(Caroline Islands), 스페인령 포르모사(Spanish Formosa), 말루쿠제도(Maluku Islands)까지 서태평양을 스페인령의 동인도(東印度)이라고 하였지만 스페인동인도가 있었던 곳은 위 지도에 나타나듯이 북아메리카대륙을 포함한 서인도제도였던 것이다.
때문에 미국이 미서전쟁으로 하여 필리핀과 동시전쟁하였다는 것은 이를 맞추기 위한 거짓말인 것이 판명이 난 것이다.
스페인부왕령(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의 신대륙에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España:1519-1821)으로 다스렸다 하는 알타칼리포르니아(Alta California), 뉴멕시코(New Mexico), 뉴필리핀(New Philippines), 뉴네바라(New Navarra), 뉴비스카야(New Vizcaya), 뉴엑스트레마두라(New Extremadura), 
뉴산탄데르(New Santander) 등은 법적으로 총독이나 법원보다 직위가 높았으나 실제로는 총독과 법원이 그들의 관할지역에서 상당한 독립권을 행사하여 부왕의 통치권은 매우 제약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실제로 대한제국의 황제가 있었지만 총독이나 법원이 법을 집행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반도역사에서 또 하나의 치욕적인 조약이라 한 것으로서 1909년 7월 12일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李完用:1858-1926)과 일본의 제2대 한국 통감으로 발령받았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1849-1910)사이에 맺어졌다고 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더욱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는 것은 이 소네아라스케가 순종(純宗,1874-1926)황제의 실권을 자신의 권력으로 탈취하였다 하였는데 순종과 사망년대가 똑 같은 동일한 인물 일본 다이쇼왕(大正天皇,1879-1926)이고 이 다이쇼왕을 내세워 일제가 1926년까지 조선총독부를 통치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대한제국 국기라 할 수 있는 오색기의 북양정부(北洋政府:北京政府,Republic of China:1912-1928)와 같은 년대이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북양정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대한제국의 국가가 오색기임을 알 수가 있다.

곧 중국(china)은 고려(高麗)였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인 것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China Republic national flag, 1912-1929]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직후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밀약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실체가 없는 사실에 불과하며 북아메리카대륙의 이야기를 감쪽같이 동아시아대륙으로 옮겨 문서만이 남아 돌아다니게 만든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 계속 11. 일본(Japan)이란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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