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글쓴이:한부울
1.영길이국 위치풀이
2.운남성의 본질
3..회민반란사건과 영면전쟁
4.운남성 역사에서 찾은 모순들
[1]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
[2]운남성 거리 수치문제
[3]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
[4]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
[5]안데스와 동방(東方)
[6]곤련(昆連)과 곤륜(崑崙), 광남(廣南)
5.서남이, 서이, 서중이라고 하는 대리국
6.차마고도(茶馬古道)는 소금호수, 부도호(浮圖湖)로 가는 길이다.
7.은(銀)광산이 주는 역사반전
8.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
들어가기 전
이 글이 완성되기까지의 집요한 노력의 결실 앞에서 모든 만감이 교차한다.
솔직히 이 글을 쓸 수 있기까지의 블로그 작업을 시작한지가 2005년이니 근 10년이라는 시간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가장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기후지리학적, 생물학적 근거를 찾아 헤메었던 시간이 얼마이던가.
기득권 사학계에 책 잡히지 않으려고 수많은 자료를 찾고 또 찾으면서 논리적으로 대비하고자 한 세월이 또한 얼마이었던가.
중간 중간 엉뚱한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블로거로부터의 생각지못한 방해에 직면했을 때 그리고 삶이 먼저라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러한 쉽지 않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이만큼이라도 결실을 볼 수 있었다는데 돌이켜 보면 참 다행스럽고 잘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기존 한반도 사관에 몰입되어 있는 기성세대뿐만아니라 자라나는 희망의 세대들에게 진실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또한 지금도 끊임없이 한반도 역사에서 탈피하여 본질의 역사를 정립하는데 애를 쓰고 있는 재야 사학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애써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이 글쓴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수고의 가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찾게 해준 이면에는 두 할 필요조차 없이 본 블로그를 즐겨찾기와 친구를 신청해주시고 아껴주시는 600여명에 가까운 동지들의 성원이 컸던 것도 분명하다.
이 분들은 세계삼한역사를 이해하고 긍정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계신분들이니만큼 천군만마와도 같다.
그동안 세계삼한역사관을 공감하고 지속적으로 본 블로그를 찾아 글을 읽어주면서 늘 조언을 아끼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준 덕분에 이러한 결과물을 돌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결과물을 재야사학연구에 여념이 없는 동지들에게 바치고 싶다.
한반도 역사가 비록 한 줄기 빛 조차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암흑같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이 처럼 수많은 시간을 소모하면서 끊임없이 조각조각 퍼즐을 맞추듯이 맞추다 보면 결국 번듯한 결과물을 찾을 수 있다는 과정을 제시한 것 같아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중간에 나약하게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했더라면 이러한 결과물은 맞이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간략하게나마 역사반전을 생각할 수 있는 연구 결과물을 두고 솔직하게 느끼는 바를 적어본다.
이제부터 고대하는 역사반전의 결과물로 들어가 보자.
1.영길이국 위치풀이
[1]부(附)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에 임진년 7월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 불모도(不毛島) 뒷바다에 표류해 오자, 고대도(古代島)앞 항구에 끌어다 정박시키고, 충청감사가 장계하였다.
영길리국(英吉利國) 선원들에게 묻길 너희나라에서 우리나라까지 길이 먼데, 그 사이에 몇 개의 나라를 지나왔는가?”
“크고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서남쪽이나 동남쪽에”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 둘은 품송(品松), 셋은 아라사(鵝羅斯),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입니다.
[2]조선왕조실록 순조(純祖)32卷, 32年(1832)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영길리국, 애란국(愛蘭國), 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리인데 법란치(法蘭治), 아사라(我斯羅), 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위 게시한 첫번째 기록은 1832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서경보(徐耕輔), 부사 윤치겸(尹致謙)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6월 말부터 이듬해 4월초까지 9개월 여간을 기록한 연원직지(燕轅直指) 기문(記文)권1에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부록편에 나오는 기록이며 두 번째 기록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순조32권인데 위 영길리국표선기와 같은 사건을 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의 장계에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소위 잉글랜드라고 알려진 영길이국에 대한 당시 위치를 설명한 내용인데 한반도사관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영길이국(英吉利國)에서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나 조선(朝鮮)까지의 거리가 똑같이 7만리(萬里)로 같다는 사실과 육로로 북경까지 거리가 4만리라는 사실, 그리고 그 지역의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한 사실이다.
세 가지 정도의 의문점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야 하는 중차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바다길이라는 것은 현재 유럽잉글랜드를 의식하고 중국북경과 조선을 동아시아대륙을 감안하여 7만리라고 하였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도대체 육로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말이다.
도대체가 대서양동북쪽에 섬으로 자리잡고 있는 잉글랜드를 영길이국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서양사가 고집하는 동아시아대륙에 중국이 있고 북경이 있으며 조선이 있다고 하더라도 육로길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한반도 역사학자들의 시발이 1945년부타라도 해도 지금까지 이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은 영길이국과 북경간에 육로가 상식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유럽 바다가운데 있는 잉글랜드와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북경간에 어떤 육로가 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의문을 품고 들어간다.
1832년경에 영길이국(英吉利國)이 존재하던 곳은 육지로 북경(北京)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정해져야 이 문제를 풀어갈 수가 있다.
또 한가지 결정적인 의문은 동아시아대륙에 있었던 운남성에서 발원한 하류가 유럽 잉글랜드 섬 한 지방을 거쳐 큰 바다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이 지구가 아닌 딴 행성에서 벌어진 것 같은 헛소리같은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떡하니 기록된 것이니 수수께끼라도 이만저만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무슨이야길까?
이것은 무엇인가 현재 근대사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모순이며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헛점인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우리가 그러한 모순을 애초부터 들여다 볼 수 없었다는 큰 약점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으면 안된다.
바로 주요 핵심은 영길이국의 경계(境界)가 되는 주변 변두리의 땅에서 가까운 곳에 곤련(昆連)이 있다 한 사실에서 이 곤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그곳이 근대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운남성(雲南省)일까 하는 문제, 그리고 이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하는 한줄기의 하류가 무엇을 가르키는가 하는 문제 점, 영길이국(英吉利國) 즉 잉글랜드의 한 지방을 거쳐 큰 바다, 즉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한 사실에서 영길이국과 잉글랜드가 동일한 국명인가 하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해라고 하는 바다가 어떤 바다인가 하는 점 등을 우리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밝혀보지 않으면 이 수수께끼를 도저히 풀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점을 풀 수 있는 결과물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도 크나큰 변곡점으로 나타날 것임이 틀림없다.
세계삼한역사관이 발전할 수 있는 분기점으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 여러가지 문제점을 정리했지만 핵심은 운남성(雲南省)의 정확한 위치파악이다.
만약 운남성의 정확한 위치만 파악된다면 위 문제점들이 저절로 풀려날 것이고 마침내 엄청난 역사모순을 베일로 가리고 있는 근세사의 부끄러운 면상 가죽을 완전히 발가벗겨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다가설 것이 불 보듯 뻔한 사실이기 때문에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도 알 수 없는 어떤 흥분에 쌓여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손가락 단면으로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2.운남성의 본질
운남성(雲南省)!
한자의 운남은 구름 운(雲)과 남녘남(南)이다.
구름이 가득한 남쪽 어디에 지명인 것은 분명하다.
운(雲)은 뜻을 나타내는 비우(雨)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云(운)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한자임을 알 수 있으며 雨(우)는 천체(天體)에 관계(關係)가 있고 云(운)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수증기가 하늘에 올라 자욱이 퍼지는 모양을 읽을 수가 있다 한 것이다.
뜻으로는 구름, 습기(濕氣), 높다, 많다, 멀다의 의미로 나타난다.
그래서 운남(雲南)이라 함은 일단 멀다란 의미가 강하고 습기가 가득찬 구름이나 안개가 자욱한 남쪽에 어떤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오래전부터 조선 또는 고려천자(天子)가 보았을 때 남쪽 멀리 떨어진 곳에 구름이 많고 습기가 많은 곳을 지칭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 였을까?
아마도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여건에서 명명되었을 것이다.
운남은 바로 운무(雲霧:cloud of dew)구름과 안개를 생각하게 한다.
지리학사전을 보면 수증기의 함유량은 매우 미세하여 그 반지름은 1㎛(마이크로미터)보다 작은 입자들의 뭉침으로서, 80% 이상의 습도가 유지될 때 운무(雲霧)라 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사람이 살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쾌적한 한반도날씨의 보편적인 습기가 50~60%라는 것을 감안할 때 80%이상이라는 습도는 매우불쾌한 후덥지근한 환경일 것이다.
2011년에 본 블로그 글 "말라리아(Malaria, 瘧疾, 唐瘧)와 금계랍수(金雞納樹, 幾那, Cinchona, Quinine)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7"에서 이 장독에 대해 밝혔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관리들이 유배, 귀양살이 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장기(瘴氣)라는 전염병이 있다하였다.
장기는 열대나 아열대 산림의 습하고 더운 공기를 말하고 이것에 노출 되는 것이 장독(瘴毒)이라는 질병인 즉 말라리아(Malaria)라고 하는 학질이다.
이 장독은 풍토병이라 하고 습한 기후에 따른 부패와 주위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복합적인 질병이라고 여겨지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관료들은 그들의 죄 값보다 귀양이나 유배를 당하여 이 장독이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면서 염라대왕처럼 여겼다는 기록이 무수히도 많다.
그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한반도 어디에도 이런 장독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코메디같은 답답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한반도 역사의 치명적이고 부끄러운 민 낮이다.
물론 당시 조선을 위주로한 동양의학이 서양의학을 능가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미 동양에서 금계랍(金鷄蠟)이란 식물에서 학질 치료제를 만들고 처방하였다는 사실이 있으며 이것이 서양인들에 의해 1820년에“키나”에서 “키니네(quinine)”라는 물질을 분리하였고 이 물질이 바로 말라리아에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키니네는 놀랍게도 남아메리카대륙 페루(Peru)와 볼리비아의 케추아족사람들이 이 키니네를 발견하고 쿠웨슈아(Quechua)나무에서 채취한 즙, 당분을 가미해 민간요법 해열제로 사용되었다고 한 사실들을 위 본 블로그에서 밝혔던 것이다.
cinchona tree's medicinal uses were first discovered by the Quechua people of Peru and Bolivia
여기서도 치료제의 본초가 남아메리카대륙 페루, 볼리비아를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이 장독이 성행할 수 있는 곳에는 끊임없이 구름이나 안개가 끼는 장소에 발달하며 높은 습도 때문에 식물학적으로 선태류나 착생 관다발식물이 두텁게 착생이 가능한 삼림(森林)이 우거진 소위 운무림(雲霧林:cloud forest)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고 이 운무림이 거대하게 이어지는 위치가 바로 정확하게 운남성(雲南省) 지명과 관계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계운무림분포지를 살펴보았다.
[세계운무림(雲霧林)분포지:Cloud forest world distribution]
위 첫그림지도에 보면 놀랍게도 이 운무림(雲霧林)분포지에 현재 운남성이 위치하는 동아시아대륙은 표시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남아메리카대륙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서부쪽을 가르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 붉은 색이 칠해진 페루와 볼리비아에 케추아족 사람임을 알 수가 있어 이곳에 키니네라는 식물과 함께 옛부터 장독이 무수히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동아시아대륙의 운남성의 운무림은 세계운무림 축에도 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상황이 모든 것이 이러하다면 운남(雲南)이라는 지명이 붙어야 할 곳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동아시아대륙의 운남지역 대신에 아메리카대륙에서 중점적으로 많이 표시되고 있는데 중앙아메리카대륙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파나마에도 일부가 있으며 남아메리카대륙에는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그리고 볼리비아 중앙으로 이어지는 안데스산맥(Andes Mountains:7,000km)을 깃 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뿐만아니라 더 멀리 아프리카대륙 서부와 콩고동부, 이디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모잠비크 동부에 뛰엄뛰엄 분포지가 점으로 나타나고 그 외 마다가스카르동부, 그리고 서남아시아의 인도아대륙 남부, 말레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 섬, 뉴기니로 분포지가 적도를 중심으로 나타나지만 아메리카대륙만큼 강한 표시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위 세계운무림분포지 그림에서 가장 표시가 굵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남아메리카대륙의 안데스산맥이 시작하는 북부지역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칠레지역 이듯이 이곳은 명실공히 운무림의 산지라고 할 수 있고 장독 즉 말라리아가 성행하였던 곳임에 틀림없다.
놀랍지 않는가, 동아시아대륙 운남성이 아니라 그곳이 남아메리카대륙일 수 있다니...
특히 안데스의 구름과 안개지역(Andes cloud and mist)으로는 볼리비아(Bolivia)에서는 융가스로드(Yungas Road)가 있는 지역, 라파스 주(La Paz Department), 차파레주(Chapare Province), 코차밤바 주(Cochabamba Department)가 꼽히며, 칠레(Chile)는 바스케이 데 프레이 호리해 공원(Bosque de Fray Jorge National Park)에 나타나고, 에콰도르(Ecuador)에서는 덴다야파(Tandayapa), 민도(Mindo)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는 과테말라 이남으로 거의 운무림이 분포하는 곳으로서 특히 코스타리카(Costa Rica)의 몬테베르데 운무림 보호지구(Monteverde Cloud Forest Reserve)이 유명한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며 고도 약 1,950m 지점(코스타리카 남서부 지대에는 1,470m)에 위치하는 운무림(雲霧林)은 연중 젖어 있는 이례적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이러한 설명에서 동아시아대륙사를 의식한 것인지는 몰라도 동아시아대륙 운남고원지대(雲南高原地帶)를 빼놓지 않고 위키자료등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운남성이란 지명이 붙어 지칭되어야 할 곳이 어딘가가 확실하다.
3.회민반란사건과 영면전쟁
근세사적으로는 어떨까?
동아시아역사를 보면 현 운남성(雲南省)에서 1856년부터 1873년 사이에 회민(回民) 또는 이슬람교도 무슬림(穆斯林:Muslim)이었던 두문수(杜文秀)회민반란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회민들이 희생되었고 그 사건으로 인하여 회민수가 현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사건의 발생지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것을 판데이 란(Panthay Rebellion:雲南回變又稱杜文秀起义)이라고 하는데 1853년에 주석광산(朱錫鑛山:tin mine)에서 일하는 회족(回族)과 한족(漢族)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다음 해에 청조(淸朝)당국이 반란진압에 만주사람 지방 무장조직 단련(團練:淸代地方民兵制度)을 투입시켜 회족(回族)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 원인으로 나타난다.
만주가 어디라고 글쓴이가 했던가.
중앙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가 없다.
1855년, 한족(漢族)광부들과 회족(回族)광부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운남 각지에서 회족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856년 영창부(현保山市) 회족출신 두문수(杜文秀)는 몽화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대래(大理)를 공격하고, 함락시키면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청나라는 향용(鄕勇)이라고도 하는 무장조직 단련(團練:淸代地方民兵制度)을 투입시켜 인종차별을 단행하였고 끝내 수많은 회민 희생자를 낳으면 사건 마무리가 되었다고 기록된 것이다.
동양인이 같은 동양인을 학살한 것이다.
이것은 근대사를 서양인들이 주도한 것이라면 무엇인가 구도가 이상하다.
향용(鄕勇)은 일련 보수세력들이다.
물론 본 역사에서는 동서양인들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군사조직을 일컫는 말인데 청 정부의 정규군이었던 팔기병(八旗兵)이나 녹영병(綠營兵)등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해지자 청조(淸朝)는 관위(官位)나 학위(學位)를 소지한 신분이 명확한 지방 신사(地方紳士)들에게 군사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고 여기에 응한 것이 소위 증국번(曾國藩)같은 사람이며 이 사람 자신의 고향이던 호남성(湖南省)에서 향용을 조직한 것처럼 호남성의 별칭이었던 상(湘)을 본 따 상군(湘軍)이라 불렀고 대표적인 향용으로는 상군 이외에 마찬가지의 군벌인 이홍장의 회군(淮軍)등이 있는데 사조직 사병 또는 용병의 범위를 벗어날 수없는 한계가 분명하게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세력군이다.
이후 이 조직체가 해산하지 않는체 군벌(軍閥)로 세력화했던 것임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사실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국 즉 영길이국(英吉利國)과 관계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철종과 함풍제 그리고 쿠데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63"에서 역사혼입사실을 밝혀본 사실인데 청군벌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1896년 영국 빅토리아왕실을 당시 이롭게 하였던 인물로 인정되어 영국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Royal Victorian Order)을 받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동양인으로서는 빅토리아훈장을 받은 인물로서 그가 유일한 것으로 나타나 글쓴이는 이 이홍장을 영국계 중국인이었을 가능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영국을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영국왕실을 이롭게 했다는 설명이 이채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또한 이홍장(1823~1901)과 조선의 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생몰년도가 3년의 차이를 두고 똑 같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글쓴이를 포함한 재야학자들로부터 도펠겡어(Doppelgenger)란 의혹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원군이 1873년에 은둔함과 동시에 명성황후의 등장과 빅토리아여제 탄생이 겹친다는 알 수 없는 혼란의 역사가 있다.
때문에 이홍장이나 이하응은 서양계 동양사서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서양인들은 두문수회민반란사건을 판데이반란(Panthay Rebellion)이라 한다.
판데이는 버마인(人)들이 운남성에 사는 이슬람교도를 가리켜 판데이(Panthay)라고 하며 버마로 이주한 중국의 무슬림 회족들을 말하는데 주로 북부버마(northern regions of Burma)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알려진다.
공교롭게도 회민반란사건이 일어난 1853년 앞 1852년 이때 영국과 버마가 1차(1824~26)에 이어 2차 충돌이었던 영면전쟁(英緬戰爭)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무슬림회족 학살의 주체가 청나라가 아니라 영국왕실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1885년 제3차 영면전쟁(英緬戰爭)을 끝으로 판데이라고 하는 미얀마(Burma)를 영국(잉글랜드:英吉夷國)에 넘겨주면서 인도(印度)와 병합하게 하고 미얀마의 마지막왕조 콘바운 왕조(Konbaung Dynasty:1752-1886)는 마침내 최후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미얀마(버어마)에서 영면전쟁(영국과 버어마전쟁)이 회민반란사건과 연결되고 합체한다는 사실은 영국(왕실)과 영길이국(청)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도, 버마, 영국 등을 우리가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살펴보았지만 결코 아시아대륙에서 존재한 국명이 아님이 밝혀져 있다.
이 판데이 반란사건으로 회교도 희생자 수가 기록에는 12,000,000명이라고 하며 진압비용이 청(淸)화폐가치로 2400만(萬)냥, 미화 27억 달러, 한화 2조 4천억원이 소요되었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손실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사건으로 본시 이슬람민족들이 피해가 막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신라계로 볼 것인가는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1648년부터 1878년까지 230년간 청(淸)지역에서 회족(回族)과 위구르(回鶌:Uygur)등 이슬람 회교반란(回敎反亂)을 묶어 동간혁명(東干革命:Dungan revolt)이라 하는데 1648년 동간혁명이 최초 발생한 다음해에 병자호란 삼전도사건의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죽고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이 등극하며 이어 213년 후 철종(哲宗)이 1862년 섬서성과 감숙성에서 회민(回民)봉기가 발생한 다음해 철종뿐만아니라 황실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가 틀림없으며 1862년(철종13)에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사건과도 신기하게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삼남지방이라는 곳에 회민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힌두인뿐만아니라 회인들이 인도의 주요 구성원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많다.
이것들은 거의 하나의 역사일 것이 분명해진다.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이 내린 서원철폐령(書院撤廢領)은 회교도와 관계할 것이고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인 금위영(禁衛營)반란이 발생되었다는 사실도 청(淸)군벌에 의한 쿠데타라는 것을 동시에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청은 곧 영길이국(영국왕실)으로서 세계삼한역사를 농단할 수 있는 깃점의 역사 현장이 아닌가도 한다.
풀어보면 이렇듯 다 풀린다.
이 당시 군벌을 장악한 서양세력은 과연 어떤 세력일지 생각해보면 잉글랜드(영국왕실)말고는 없다.
물론 한반도역사는 일본이라고 하겠지만 단순하게 현재 열도일본세력일 수가 없다.
이렇듯 교묘하게 동서양을 분리시켜 전혀 다른 역사인 것처럼 꾸민 것에 아둔한 우리가 끌려 다닌 것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한 이야기가 된다.
인도(印度)에서 발생한 최후의 세포이항쟁(sepoy:1857-1858)의 책임을 물어 영국(英吉夷國)이 1874년에 동인도회사를 해산시켰다는 것도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분명 1600년 영국왕의 칙허(特許企業:Chartered company)를 받아 조직되었으며 독점적인 무역기구로 탄생하게 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임에도 국왕의 권위를 손상하고 월권행위를 하였다고 하여 한순간 해산시켰다는 것은 그들의 설립동기만큼 이상한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본래 인도영내(印度領內)에서 벌어진 모태사건이 있었을 것이며 인도소유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를 영길이국(英吉夷國)이 군벌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그들의 소유라 만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피해의 당사자가 철종(哲宗,章皇帝)인 것으로 파악되는 무굴황제 바하두르샤 2세(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일 것으로 추정하고 그는 버마(Burma)로 추방되어 1862년 11월 7일에 양곤(Yangon)에서 사망케 하였다는 사실 또한 철종사망시간과 시간대가 일치한다.
이 모든 것들이 합치되어 서양세력들은 삼한역사를 장악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운남성 역사에서 찾은 모순들
[1]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
[2]운남성 거리 수치문제
[3]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
[4]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
[5]안데스와 동방(東方)
[6]곤련(昆連)과 곤륜(崑崙), 광남(廣南)
지금부터는 왜 운남성이 동아시아대륙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 현재 운남성의 위치에 대한 모순점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본다.
[1]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
다시 돌아가 운남성(雲南省)을 역사실에 의거하여 살펴보자.
청조행정구획행성(淸朝行政區劃行省)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을 수가 있다.
남북2경(南北二京)에서 남직례가 강남(江南)로 개칭 되면서 안휘(安徽)와 강소(江蘇)로 분리되고 협서(陝西)역시 협서(陕西), 감숙(甘肅)으로 호광(湖廣)도 호남(湖南), 호북(湖北)으로 분리되어 직례(直隷),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남(河南), 절강(浙江), 복건(福建), 강서(江西), 광동(廣東), 광서(廣西),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등 18성(省)으로 편제되었다.
물론 때로는 조선행정편제(朝鮮行政編制)가 포괄한다고 할 때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인 것을 인정하고 조선의 8도(道)개념과 완전히 별개로 볼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
청 편제를 보면 강서(江西)는 있으나 강동(江東)이 없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좌우가 아니라 상하의 세로로 흐르는 강(江)을 중심으로 하는 편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현 신중국대륙에는 이렇게 상하 세로로 흐르는 큰 강(江)이 없는 것은 물론이며 이것은 아마도 동아시아대륙이 중국 땅이 될 수 없다는 중요한 핵심적 증거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륙 중앙을 세로 지르는 강(江)이 존재한다는 것은 강동(江東)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 영역은 청(淸)영역이 아니라는 가설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남(河南)은 있으나 하북(河北)이 없다는 것도 가로 흐르는 하(河)를 중심으로 남쪽영역만을 이야기 한 것이니 신중국대륙에서는 황하나 양자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북은 청(淸)영역이 아닌 상황을 확인할 수가 있다.
강동(江東)과 하북(河北)에는 어떤 개체가 존재하였을까?
바로 코리아라고 하는 조선(朝鮮)이었을 것이다.
서부지역 스페인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려신라(高麗神羅)를 청(淸)이란 명칭으로 동아시아역사에서 교묘히 짜집기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청조(淸朝) 또는 중국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역사지도에 나타나는 상황을 스페인부왕령(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이라고 보면 한치도 오차없이 정확하다.
현 동아시아대륙 운남성은 북쪽 운귀고원(雲貴高原)에 접하고 서쪽으로 버마(緬甸:Burma), 남쪽으로 라오스(老撾:寮國,Laos), 남동쪽으로 베트남(越南:Vietnam)과 접해있다.
이와 같은 지형경계구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이 실제 과거 어떤 위치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위 접한 역사개체 명들은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된다.
때문에 결국 운남성(雲南省)을 제대로 찾을 때 이와같은 국명들은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구도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밝히면 이어 후차적으로 잉카제국도 다시 평가하거나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지금도 줄기차게 역사굳히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글쓴이를 매우 조급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아시아역사 굳히기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움직임 중에 운남성에 관련 된 것으로 약 258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지질시대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시기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원모인(元谋人)화석이 1960년대에 철도 기술자들에 의하여 현 운남성에서 발굴되었다고 야단을 떤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이후 1966년부터 신중국대륙에는 중국역사판짜기의 문화혁명이란 불씨가 시작된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이라 하고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인간이 중국에 도착한 화석으로서 신석기시대에 중국에서는 여섯 번째로 큰 담수호인 전지(滇池,면적 297.9km²)부근에서 이 원모인들이 생활하였다고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원모인들이 생활했다고 하는 전지(滇池)는 참으로 우습고 보잘 것이 없는 작은 호수일 뿐이다.
고어(古語)는 진남택(滇南澤)이라고도 하여 못으로 인식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평균깊이(Average depth)가 고작 4.4m 밖에 되지 않다는 것은 실망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규모의 호수가 중국 원모인의 생활터전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세계지구상에는 이와같은 허접한 호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인류가 생존했다고 하는 거창한 비유가 오히려 초라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북아메리카대륙 5대호 중 가장 작다고 하는 이리호(Lake Erie)의 표면적이 25,700km²에 평균수심이 19m이다.
어디 비교나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수(Lake Titicaca)는 58,000km²면적에 수심이 최고 281m 이다.
이정도는 되어야 원모인 운운할 수 있지 않겠는가.
[2]운남성 거리 수치문제
운남성(雲南省)을 역사적으로 뜯어보면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곽창(郭昌)을 보내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였고 당시 버마와 인도를 상대로 한 무역관계를 확대하기 위해 한무제는 당몽(唐蒙)을 보내 오척도(五尺道)를 지켜 확장하도록 하고 그 이름을 서남이도(西南夷道)라고 하였다고 나타난다.
바로 방향이 서남(西南)이다.
宋書卷九十七 列傳第五十七夷蠻
南夷、西南夷,大抵在交州之南及西南,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위 송서열전이만(宋書列傳夷蠻)에서보면 남이와 서남이는 교주(交州)에 있는데 남쪽과 서남쪽이다. 위치설명을 보면 대해가운데 대륙위에 거하고 거리는 혹은 3,500리(里)라 하고 멀리로는 2~3만리(里)라 하며 배를 타고 항해하여 거리의 리수를 알기가 불가하다. 외국 제이(諸夷)들의 리수는 정해지지 않는다.[한부울번역정리] 라고 해석할 수 있다.
3500리(里)라 함은 1374km 이고 2~30,000리(里)라 함은 7800~11,781km로 환산된다.
2-3만리라는 거리는 샌프란시스코나 덴버에서 칠레 남단 마젤란 해협에 있는 도시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까지의 육로거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현재 동아시아대륙 신중국 한나라 수도라고 하는 서안(西安)에서 서남이(西南夷) 운남성 대리국(大理國)의 직선거리가 고작 1,278km이다.
그리고 해로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아니다.
웃기지 않는가.
현재 운남성의 대리가 대해(大海)가운데 대륙위에 거하는 것도 아니지만 거리가 최소기준을 맞춰보아도 턱없이 모자란다.
[3]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
남이(南夷)나 서남이(西南夷)이라는 명칭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아야 할 지명이다.
《史記·西南夷傳》西南夷傳身毒國。卽天竺也。所謂浮圖湖是也。
서남이가 신독국(身毒國)이라 전하고 천축(天竺)이라 하였으며 소위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부도호(浮圖湖)가 있다.[한부울번역정리]한 것을 풀이하면 서남이(西南夷)는 화(華)에 대한 이(夷)의 종족 특히 중원(中原)의 서남쪽 혹은 파촉(巴蜀)의 서남쪽에 존재한 만이(蠻夷)집단을 총칭한 명칭이라고 어떤 연구자는 정리하고 있다.
또한 신독국(身毒國)이라거나 천축(天竺)이라는 것은 바로 인도(印度)를 지칭하는 말이다.
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의 소제 "조선(朝鮮)과 인도(印度)의 관계"에서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함을 인도아 북부 고원지대를 가리킨다고 한 것을 대입하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를 인도(印度)라 했을 것이다.
이글에서 무굴제국은 지속적으로 남쪽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면서 6대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1618-1707,재위:1658-1707)때인 1707년경에 남부남단만 남기고 전부 영토 안에 넣는다고 되어 있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일까?
실제로 보았을때 남단이라 함은 아르헨티나까지의 남부 영역이다.
그러나 이런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가 사망하던 1707년때에 영국이라고 하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 시작된 년도임을 적용할 수가 있다.
물론 이때 잉글랜드자체가 소멸되고 없어질 상황에서 고려라고 판단되는 스코틀랜드로 하여금 존재를 유지하게 된 사실을 인정할 때 당시 잉글랜드라고 하는 세력이 인도를 어찌해보겠다는 식으로 막무가내 준동한다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역사를 알고 보면 이슬람민족들이 대거 웅집하였던 곳이 아마도 남아메리카대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운남성에서 회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무굴 역대 황제들 중에서 정통 무슬림임을 자처한 아우랑제브(Aurangzeb:1618-1707,재위:1658-1707)는 가장 무자비한 정복자였다고 설명된다.
아리안족이 지배하는 남부 데칸(Deccan)이나 남인도 무슬림제국들을 정복하면서 아우랑제브황제가 강성의 어김없이 이슬람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힌두와 아리아인의 마라타제국(Maratha:1674-1818)의 힌두교도의 감정을 손상시켰고 고려인(그리스)과 신라인(페르시아)등의 혼혈로 된 아리아의 라지푸트족(Rājpūt)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으며 게다가 토지에 대한 재정적인 압박은 전체 행정체계를 왜곡했고 결국 그의 후계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자 제국은 붕괴되었다고 설명된다.
그렇다면 남아메리카대륙에는 이때 이슬람인들을 우대하면서 오히려 힌두교인들이 소외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무굴제국은 점차 영토를 잃게 되었으며 반대로 영국(英吉夷國:잉글랜드)은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를 확장하며 인도에서 상업권을 잡기 시작한 것이 1717년으로부터 1757년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64년 북사르 전투(Battle of Buxar), 그리고 4차에 걸친 마이소르전쟁(Mysore Wars:1766-1799)에 승리하여 마침내 무굴제국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인도 전국적으로 발생한 세포이 항쟁(Indian Rebellion or Sepoy Rebellion:1857-1858)에 의해 결국 무굴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인도아(印度亞)북부 고원지대가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와 너무나도 흡사한 것이다.
무굴제국 북부에는 페르시아인이 있었고 중앙에는 투르크인이 있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중앙아메리카대륙은 페르시아와 투르크가 병립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가 있어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 "에서 페르시아만이 멕시코만을 가르키는 것에서 의문시 되던 점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근대사는 참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막힌 비밀을 감추고 있었던 사실에 그저 놀랄뿐이다.
[4]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
B.C. 4세기 무렵부터는 철기시대가 시작되었고 한무제(漢武帝,재위:BC141-BC87)가 통치하던 이 시기에 운남(雲南)지역의 농업이 눈에 띄게 발전하여 한반도에 없었던 청동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소, 말, 양, 염소, 돼지, 개들의 가축을 길렀다고 알려지며 이 사람들은 타이 샴족(Tai Siam)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타이 샴족(Siam)은 샴(Sham)','쉠(Shem)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중해 동부 연안 지방을 샴이라고 하는데 동쪽에서 태양이 떠 오르는 곳(implying the rising of the sun in the east)즉 오늘날 비옥한 초승달(신월)지역(Fertile Crescent)이라고 알려지는 레반트(Levant)라 하며 이를 근동이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셈 족(Semites)이 거주하던 지역을 아라비아 반도라고 하고 근동에서 반월모양, 또는 초승달모양의 옥토지대를 근거로 하는 아랍인으로서 이곳에서 북쪽의 민족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서남쪽의 민족들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이주하였으며 북쪽으로 이동한 아카드인(Akkad)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켰다고 알려지는데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몇번 주장했던 바다.
이러한 사실도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한 것이다.
이미 이때 운남(雲南)지역에는 청동기문화가 익숙하게 발달하여 모든 면에서 앞서는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근동역사와 겹쳐진다는 것도 따져보면 절대로 동아시아대륙 역사가 아님도 알 수가 있다.
후한(後漢:25-220)이 몰락하기 시작했던 2세기 말부터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의 이곳을 남중(南中)이라 하였는데 사천성(四川省) 대도하(大渡河)이남(以南)과 운남(雲南), 귀주(貴州)를 포함한 명칭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대륙이 아닌 사천성 대도하 이남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
글쓴이는 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의 마그달레나 강일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마그달레나 강(Magdalena river)은 당시 콜롬비아가 차지하고 있던 파나마(Panama)에서 남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육상통로로 요충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강은 산맥과 함께 요충지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마그달레나강 하구, 1629년에 건설된 바랑키야(Barranquilla)항구를 타고 내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이 때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아랍인 즉 회회인들이 수난을 겪은 것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이 강은 콜롬비아 서부에서 카리브해로 흐르는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급격히 변할 수 있는 강(江)으로서 최고봉 5,364m 높이에 길이 1,023km의 코르디예라센트랄산맥(Cordillera Central)과 최고높이 5,410m, 길이 1,200km의 코르디예라오리엔탈산맥(Cordillera Oriental)의 분기점에서 발원하여 왼쪽에는 안데스산맥의 분계 코르디예라스(cordilleras)가 있고 오른쪽에는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Sierra Nevada de Santa Marta)산맥이 있는데 그 가운데로 관통하며 카리브 해까지 흐르는 길이1,540km의 강이다.
위 지도 그림을 보면 지형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코르디예라산계(Cordillera山系)라 함은 아메리카대륙서부, 태평양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을 통틀어 이르는 것으로서 로키산맥, 시에라네바다산맥, 안데스산맥이 다 포함된다.
이것들을 다 합하여 글쓴이는 태백(太白)이라고 감히 진단한다.
콜롬비아는 기원전 약 1만년전,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이 오늘날의 보고타(Bogota)부근, 엘 아브라(El Abra)와 테켄다마(Tequendama)지역에 존재하였고 이들은 막달레나(Magdalena)강 계곡에서 살면서 서로 문화교류를 하였다고 알려지며 기원전 1천년경, 아메리카토착민 무리들은 카치케(cacique)라 불리는 우두머리의 지도로 하여금 피라미드구조의 정치체계인 카치카즈고(cacicazgo)를 발달시켰고 이 체계를 가진 카리브해 부근의 타이로나(Tayrona)문명과 보고타 부근의 고원 지역의 무이스카(Muisca)문명이 존재하였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고대로부터 정치체계가 완비된 국가체제가 존재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1863年,太平天囯的翼王石达开曾受困於大渡河,多次搶渡不成,“粮尽食及草根,草尽食及战马,兼之疟疾流行,死亡枕籍”,最後全軍覆沒。
또한 신중국역사를 보면 1863년 태평천국의 익왕(翼王)석달개(石達開:1831-1863)는 사천성에 진출한 후 대도하(大渡河)남안의 자타지(紫打地)에서 청나라군과 그곳의 보수 반동 토사(土司)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때 이 군사들은 잉글랜드 또는 영길이국의 왕족용병이었을 가능도 없지 않다.
석달개 군사들은 물살이 빠른 대도하(大渡河)를 감히 건너지 못하고 식량이 떨어져 나무뿌리와 초근으로 군마(軍馬)들이 양식을 하였건만 병마들에게 말라리아(장독)가 퍼져나가자 베개를 깔고 죽어나갔으며 최후 청군과 토사들에 의해 전군이 소멸되어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곳이다.
대도하는 그 만큼 도하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명인데 험준한 협곡사이로 흐르는 강임을 정확하게 지형에서 알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콜롬비아의 마그달레나강 역시 어마어마한 거대한 산맥 가운데로 흐르기 때문에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급격히 변할 수 있는 강이라 하였으며 이와같은 것은 오히려 사천성의 현 대도하보다 더 강력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5]레반트 동방, 안데스산맥과 동방(東方)
운남(雲南)지역을 남중(南中)이라는 것은 북쪽 접하는 면은 익주(益州)라 하였고 남쪽 면을 교주(交州)라 하였으며 동쪽 면을 형주남부(荆州南部), 서쪽면 토번(吐蕃)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주(交州)는 한나라 때 교지(漢交址), 당나라 때 교주(唐交州), 송나라 때 안남(宋安南), 명나라 때 교지(明交址)라고 불리던 곳, 그곳은 분명 안남(安南) 즉 남부베트남(Annam, South Vietnam)이다.
서쪽이 토번(吐蕃)이니 티베트고원의 티베트왕국이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설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
티벳(Tibet) 즉 토번이라 하지만 변형된 명칭이라 할 때 태백(太白)과 같은 음일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제시한 송서열전(宋書卷九十七列傳)에 보면 남이(南夷)와 서남이(西南夷)는 교주(交州)에 있는데 남쪽과 서남쪽이라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또한 그곳을 남중(南中)이라 한 것으로서 바로 콜롬비아(Colombia)이다.
이것은 나중에 한 번 더 이야기 하겠지만 중앙아메리카대륙에서 요해처(要害處)인 목구멍 내로우넥(Narrow Neck)을 멕시코를 통해 빠져 남행하면 바로 콜롬비아가 맞닿게 되는데 이곳을 남중(南中)이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남중이 무슨 뜻일까.
남중(南中)은 익주 남부 변군지역을 아우르는 공간개념이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어느 연구가의 설명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를 바라보는 위치개념으로 변강(邊疆)혹은 변계(邊界)에 해당하는 변군(邊郡)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남이와 서남이, 남중등의 명칭은 중국에서 바로 볼 때 남쪽인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 중앙아메리카대륙을 적용하면 서남쪽으로 특별하게 통로가 있고 그 통로가 남쪽에 도착하는 곳을 바로 남중이라는 명칭 사용을 했을 것이란 사실이기 때문에 그곳은 어김없이 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며 파나마의 육지통로로 이어지는 곳 콜롬비아가 남중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서두에 게시한[2]조선왕조실록 순조32년(純祖32年:1832)기사에 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가 올린 장계에 영길리국(英吉利國)경계(境界)가 되는 주변 변두리의 땅에서 가까운 곳에는 곤련(昆連)이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 곤련(昆連)은 콜롬비아를 가로지르고 있는 바로 코르디예라스산계(la cordillera de los Andes)로서 최고봉 6,962m, 500km의 넓이로 7,000km 길이 세로(縱)로 이어지는 안데스산맥(Andes Mountains)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安第斯山脉的名稱來源尚不明瞭。通常認為其從奇楚亞語anti得名,意思是"東方"。例如Antisuyu(奇楚亞語"東區"之意),印加帝國其中一個組成部分。
안데스(安第斯山脉:Andes)산맥이란 명칭의 기원이 불명료한 것으로 남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언어 케추아어족(Quechuan languages)의 안티(anti)라고 알려지는데 이것의 뜻은 동쪽(east)을 뜻한다고 설명된다.
즉 동방(東方)이다.
이것 역시 근동지역의 레반트라는 의미와 같다.
또 하나는 잉카제국의 4개 지역 중 동쪽지역(東區)을 가리키는 안티수유(Antisuyu)이라고도 한다.
만약 남아메리카대륙에 잉카제국이 존재했다면 동서남북을 나누었다는데 동쪽을 안티수유라 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보면 아메리카대륙 전체를 동(東)방으로 보았던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현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볼 때 안데스는 서쪽 편 가장자리에 현저히 편중되어 뻗어있다.
그럼에도 안데스산맥을 동쪽이라는 것은 바로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에서 밝힌 동방(東方)의 위치확인이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6]곤련(昆連)과 곤륜(崑崙), 광남(廣南)
그렇다면 곤련(昆連)과 곤륜(崑崙)을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머리부수에서 메 산(山)을 생략한 것이 곤륜(昆侖)인데 이 역시 산 이름이다.
우리나라 사서(史書)에서도 곤련(昆連)이라는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곤륜(昆侖)과 잇닿을 련의 산맥 련(連)을 의미하는 것임을 정의할 수가 있으며 때문에 음(音)에서 련, 륜, 란(난)은 같은 음이라고 전제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곤륜산맥(崑崙山脈)은 하늘을 지지하는 천주(天柱)라 한다.
그만큼 신앙적인 욕소가 강하다.
태백(太白)이라는 것은 티벳(Tibet)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스페인어 코르디예라산계(Cordillera山系)라 한 것임을 앞에서 글쓴이가 주지한 사실이지만 아메리카대륙서부, 태평양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을 통틀어 이르는 합칭의 말로 로키산맥, 시에라네바다산맥, 안데스산맥이 다 포함한 것과 같다고 앞에서도 이야기 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어 코르디예라(Cordillera)를 설명하는 것에서 보면
Conjunto de montañas alineadas a lo largo de un eje que forman una unidad.
축(軸)에 따라 정렬 형성된 산의 집합단위를 말한다고 한 것과 같이 “la cordillera de los Andes; la cordillera del Himalaya” 안데스와 히말리아를 나타내는 의미라고 스페인자료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글쓴이 추측대도 태백, 티벳, 코르디예라, 또는 곤륜과 같은 의미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티벳에 대한 여러 설(說)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확실한 어원은 태백과 티벳은 음이 같다고 하는 사실에서 큰 테두리로 태백을 영어로 티벳이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되는 것이다.
곤륜(昆侖)은 한나라 이후 남해(南海), 남양(南洋)에서 광동(廣東), 교지(交趾)에 내항한 권발흑신(卷髮黑身) 즉 머리털이 곱슬곱슬한 고수머리를 하고 있는 흑인을 일컫는다 했는데 곤륜노(崑崙奴), 곤륜선(崑崙船), 곤륜약(崑崙藥)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단어라고 이미 본 블로그에서 설명한 예가 있다.
때문에 서남쪽의 곤륜(崑崙)민족들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이주하였다는 사실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海國聞見錄
南洋記
就安南接聯中國而言,海接廉州,山繞西北而環南,直至佔城,形似半月;名曰廣南灣。秦象郡、漢交址、唐交州、宋安南、明交址,陸接兩粵、雲南;風土人物,史典備載。後以淳化、新州、廣義、佔城謂廣南。因舅甥委守淳化,隨據馬龍角砲臺;北隔一水,與交址砲臺為界。自淳化而南至佔城,為廣南國,亦稱安南
위 청조(淸朝) 옹정8년(雍正八年:1730)에 썼다고 하는 진륜형(陳倫炯:1687-1751)의 해국문견록(海國聞見錄) 남양기(南洋記)에 보면 이상한 내용이 많다.
중국과 안남을 연결하는 말에 따르면 염주(廉州)는 바다에 접하고, 서북쪽의 산들은 남쪽으로 둥글게 포진하며 쭉 점성(佔城)까지 이른다. 이에 형상은 반월이다. 이것을 광남만(廣南灣)이라 한다. 진(秦)때 상군(象郡), 한(漢)때 교지(交址), 당(唐)때는 교주(交州), 송(宋) 안남(安南), 명(明)때는 교지(交址)라 했으며 육지로는 양쪽에 월(粤)과 운남(雲南)이 접한다고 하였으며, 순화(淳化), 신주(新州), 광의(廣義), 점성(佔城)이 광남(廣南)이다. 고로 순화를 외숙질간(舅甥)겹쳐지키는데 그곳에 마용각(馬龍角)포대가 있고 북쪽으로 떨어져 한 하천이 있으며 교지포대역시 경계에 있다 한 것이다.
그리고 순화(淳化)에서 남쪽 점성(佔城)까지 광남국(廣南國)이며 바로 안남(安南)이라 하였다.
현재 염주는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합포현(合浦縣)으로 신중국대륙자료에 나타난다.
하지만 위 남야기와는 다르게 광서장족자치구에서 보면 서북쪽 산들이 남쪽으로 베트남 점성까지 이어지는 것이 없다.
또는 둥글게 포진하지 않고 반월현상을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딜 광남만(廣南灣)이라 했단 말인가.
5.서남이, 서이, 서중이라고 하는 대리국
서기 621년, 당조(唐:618-907)는 운남(雲南)경내에서 요주(姚州)를 설치하였고 664년에 요주도독부(姚州都督府)를 설치하여 장악하나 현재 운남 대리시(大理市)북쪽에 엽유수(葉楡水), 서이하(西洱河:西二河)라 칭하던 이해(洱海)호수 즉 1960년에 원모인(元谋人)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택(못)의 남쪽 현 대리시(大理市)에 737년부터 조(詔)란 왕(王)을 의미하는 6조국(六詔國)을 세웠고 이 중 몽사조(蒙舍詔)가 가장 남쪽에 위치해 남조국(南詔國,大蒙國:653-902)을 건국하였으며 남조국은 중국 남서부 일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버마 북부까지 장악하였다고 한다.
902년 남조국 권신(權臣) 정매사(鄭買嗣)가 왕위를 찬탈하고 대장화국(大長和國)을 세움으로써 남조국(南詔國)이 멸망하지만 928년 양간정(楊干貞)이 다시 정권을 잡아 대의령국(大義寧國)를 세웠으며, 937년에는 통해절도사(通海節都使) 단사평(段思平)이 양간정(楊干貞)을 37개 부족들과 함께 공략하고 지금의 대리에 대리국(大理國:937-1254)을 세웠다고 알려진다.
대리국의 세력은 남조국(南詔國)이 가장 강성했을 때와 비슷해 북(北)으로는 사천성(四川省), 서남(西南)으로는 베트남, 그리고 북서(北西)로는 인도와 버마, 동(東)으로는 귀주성(貴州省)과 광서성(廣西省)의 일부까지 지배하였다고 하는데 귀주성은 정상흐름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만 사천성(四川省)과 광서성(廣西省)의 위치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특이한 것은 대리국(大理國)은 토번(吐藩)즉 지금의 티베트 보다는 송(宋)나라와 정치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물론 송나라는 고려(高麗)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이곳은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출발지로 삼고 농업용수나 식용수 확보를 위해 이곳 이해(洱海)에 수도를 두었다고 추측하며 대리국(大理國)은 1254년 몽골제국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항복하였다고 정리되고 있다.
이 몽골제국은 바로 고려(高麗)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때가 고려(高麗) 고종(高宗,1192-1259,재위:1213-1259)때이며 몽고(蒙古)는 몽케(蒙哥,1208-1259,재위:1248-1259)가 집권할 때이다.
그러나 이 대리국을 세운 단사평(段思平:893-944)을 보면 백족인(白族人)이라고 하는데 과연 신중국사가 말하는 소수민족인 백족인가 하는 문제가 분명히 있다.
이미 남이(南夷)든지 아니면 서남이(西南夷)든지 하는 만(蠻)은 남양(南洋)을 무대로 하는 서양인이란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사평(段思平)역시 서양인이라 할 수 있고 소위 백족인(白族人)이라 하는 것은 날 때부터 살과 털빛이 아주 하얀 코카시안(Caucasian) 즉 백인을 말하거나 아니면 백색을 좋아하던 포르투갈인의 한 종족이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1502년 1월에 포르투갈인 탐험가 가스파르 지 레무스(Gaspar de Lemos)가 브라질 남부 구아나바라 만(Baía da Guanabara)입구(湾口)에 도착하고 그 해안에서 벽을 희게 바른 집을 지어 살았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 신중국역사가 말하는 백족인을 바이족(白族)이라 하며 약 124만명의 화자(話者)를 가진 바이어(語)를 사용하는 종족이라고 하는데 통 역사성도 없고 신빙성도 없다.
이 바이어(語)가 이족(彝族)이 쓰는 언어와 가깝다고 하고 분류되기는 중국티베트어족 티베트버마어파(Tibeto-Burman languages)에 속한다고 되어 있으나 솔직히 전통성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소수민족일 뿐이다.
한 때 백족은 남이(南夷)와 서남이(西南夷), 남중(南中)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지금 바이족이라는 현실을 보라.
너무 초라하지 않는가.
1253년 11월 쿠빌라이의 여섯째 아들 후게치(忽哥赤:和克齊)을 운남왕(雲南王)에 봉하고 대리(大理), 선천(鄯闡), 다한장(茶罕章), 적독가아(赤禿哥兒), 금치(金齒), 교지(交趾)등지에 대한 난리를 평정하면서 민심을 가라앉히기를 명하였고 1276년 원조(元朝)는 정식으로 운남성(雲南省)을 편제화하였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명대(明代)에서 주원장(朱元璋)은 전우덕(傅友德)과 목영(沐英)을 파견하여 단(段)씨의 협력받아 양왕국(梁王國)을 멸망시켰으며 이 지역에 특히 은(銀)이 많이 생산된다는 것에 주목하고 명(明)의 직할지역으로 결정하면서 운남포정사(云南布政使)를 설치하였으며 개간과 채광을 위하여 많은 한족(漢族)을 이주시켰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말로 계획적인 인구이동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증가시킨 인구가 명(明)멸망시까지 120만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말(明末)시기에 명(明)의 유신(遺臣)들과 일부 반청(反淸)세력들이 합세하여 명(明)종실의 친왕(親王:朱常洵)을 황제로 옹립하였고 중국 남부지역에 남명(南明:1644-1664)을 세웠으며 그 중 후기 남명(南明)의 영력제(昭宗永曆帝:1625-1662)가 운남(雲南)으로 들어와 반청 저항의 본거지로 삼지만, 청(淸)의 오삼계(吳三桂:1612-1678)에 의해 1662년 버마에서 사로잡혀와 곤명(昆明)에서 명을 다하고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후부터 운남(雲南)은 귀주성(貴州省)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1413년 명 영락(永樂)11년에 호광(湖廣), 사천(四川), 운남승선포정사사(雲南承宣布政使司)로 분리되고 귀주승선포정사(貴州承宣布政使)로 배치되어, 예로부터 귀주(貴州)라 하였기에 귀주성(貴州省)라고 인증하였고 귀주성(貴州省)을 간칭으로 거무스름할“검(黔)” 혹은”귀(貴)”한 것을 보면 대체적으로 귀주성에 사는 사람들이 얼굴이 검었던 것으로서 흑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6.차마고도(茶馬古道)는 소금호수 부도호(浮圖湖)로 가는 길이다.
위에서 운남성과 관계된 역사기록을 통한 모순 5가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운남성(雲南省)의 제대로 윤곽이 들어남을 알 수가 있다.
좀 더 나아가보자.
소금(鹽:salt)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소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지구에 생명체가 생성될 때부터 소금 역사가 시작되고 그 년대가 30~40억년이라고 한다.
사람 혈액에는 90%의 염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소금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생성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설명을 과학자들은 매번 아끼지 않는다.
인간이 이용해온 조미료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음식의 간을 맞출 뿐 아니라 영양이나 생리적으로 다른 물질로는 거의 대체시킬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된 자료들의 하나같은 설명이다.
그 만큼 인간들의 역사속에서 필수불가결(essential)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대 발생한 모든 전쟁들의 주 원인은 바로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다.
민간요업으로도 중요하다.
명(明)때 누영(樓英)이 지은 의학강목(醫學綱目)에 갑자기 귀가 아픈 것을 치료하는데 소금 석 되에서 닷 되를 뜨겁게 찐 후 푸른 헝겊에 싸서 베개를 베고 식으면 다시 갈아주는데 바로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고 송나라 때 본초학의 대표작 당신미(唐愼微)의 증류본초(證類本草)에는 배가 그득하게 아프면서 가슴이 답답하여 죽을 것만 같을 때 아주 진하게 끓인 소금물 한 두 사발을 한 번에 마시고 토하면 진정된다고 한 기록을 백과사전에서 볼 수 있다.
소금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필수적인 식품임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옛사람들에게 소금의 위치는 거의 신(神)과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불교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위키 자료를 보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서약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안식일 빵에 소금을 더한다고 하였으며 카톨릭에서는 성수 축복에서 소금을 넣는 관습을 보존되고 있으며 부활성야라고도 하는 파스카 성야(Easter Vigil)의 성수 축복에도 소금을 넣는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동서양(東西洋)할 것 없이 신(神)과 교통의 매개체가 소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실크로드뿐만아니라 솔트로드도 존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근세사에는 실크로드만 부각시켜 정작 소금의 중요성을 역사뒤전으로 밀쳐낸 것이다.
실크는 옛 근세기에 삽화들을 보면 실크를 양산하는 뽕나무(桑田)가 동양에서 많이 식생(植生)한다고 알려져 누에고치로 생산되는 실크가 무역물품으로는 만연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소금이 실제로 인간에게 중요했다면 소금생산이 어마어마하게 곳을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소금을 얻기 위해 비록 수만리(數萬里)길을 간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감수해야 할 노고였던 것은 분명하다.
소금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소금이 풍부한 곳에서 인류역사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바로 남아메리카 중앙부 볼리비아의 포토시 주(州)(Departamento de Potosí)에 위치한 살라르 데 우유니(Salar de Uyuni) 또는 살라를 데 투누파(Salar de Tunupa)라고 하는 우유니소금사막(Salar de Uyuni)은 참으로 희귀한 곳임에 틀림없다.
이 포토시 주(州)는 이것이외 세계에서 가장 매장량이 큰 은(銀)과 주석(朱錫)이 스페인인들에게 발견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1853년에 운남성에 발생한 판데이 란(Panthay Rebellion:雲南回變又稱杜文秀起义)은 주석광산(朱錫鑛山:tin mine)에서 일하는 회족(回族)과 한족(漢族)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시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를 말하겠는가.
이미 결론은 나 있다.
당시 해적출신 서양인이 아니더라도 소금과 은, 주석을 보고 이를 탐내지 않을 사람이 있었겠는가.
인도가 망한 것도, 고려가 유럽인들에게 그대로 쫓겨난 것도 아마도 이러한 탐욕의 물질들을 탈취하도록 내 버려둔 것이 잘못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을 찾기 위해 멕시코남부나 과테말라에서부터 로정 거리가 거의 5,000km 이다.
바로 실크로드 또는 차마고도의 거리와도 똑 같은 거리이다.
차마고도(茶馬古道)라 함은 차와 말을 교역하던 신중국의 높고 험준한 옛길로 인식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이며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이 오갔다고 설명되지만 차를 실을 말이 다니던 옛 길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차와 말(茶馬)를 밑천으로 하여 주 목적은 바로 소금(鹽:salt)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평균 해발고도 4,000m이상에 위치하여 신중국 서남부 운남성(雲南省)과 사천성(四川省)에서 티베트(Tibet)를 넘어 네팔과 인도까지 5,000여km에 달하는 장대한 거리로서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역하던 높고 험준한 옛길'이라고 하였지만 실체는 바로 소금구하기다.
이 길은 한무제(漢武帝)때 장건(張騫)에 의해 서역개척이 이뤄졌고, 당(唐), 송(宋)시대를 거치면서 번성하였으며 이후 네팔, 인도, 유럽까지 연결된 문명, 문화, 경제, 육상교역이 바로 실크로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지만 실크가 아니라 흰 소금일 가능성과 유럽인들은 당시 남아메리카대륙에 오래전부터 즉 그리스인과 아리아인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서 멕시코를 통과 하여 과테말라(Guatemala)부터 특히 운무림(雲霧林)이 왕성지역으로서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그리고 파나마를 거치고 콜롬비아에서 마그달레나 강(Magdalena river)과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Sierra Nevada de Santa Marta)산맥만 넘으면 아마존강 상류를 거쳐 볼리비아까지 들어갈 수가 있다.
특히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는 바로 서남이(西南夷) 대리국이 건립된 대리(大理)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은 티티카카 호수는 약 258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지질시대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시기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원모인(元谋人)화석이 발견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볼리비아에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도로인 해발 4,300m의 융가스도로(Yungas Road)는 속칭 죽음의 길(Death road)이라고 하는데 수도 라파스(La Paz)에서 꼬로이꼬(Coroico)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라고 한다.
보통 티티카카 호수에서 우유니소금사막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면 현 신중국대륙의 대리국이 건립되었다고 하는 지금의 운남성 북부에 있는 담수호인 전지(滇池:297.9km² 수심:4.4m)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8,135km²,최대수심 281m)가 바로 그것인데 그곳에 남단 동부에 위치하는 코파카바나(Copacabana)에서 출발하여 수도 라 파즈(La Paz)를 거치고 동남쪽으로 에콰도르의 통화 단위 명칭인 수크레(Sucre)도시를 통과하여 다시 서남쪽으로 은(銀)과 주석(朱錫)광산도시 포토시(Potosi)를 지나면 바로 소금 사막인 우유니(Uyuni)가 나타난다.
이 길을 가서 소금을 얻기위해 그렇듯 험준한 길을 말과 함께 가고 또 가던 길이다.
볼리비아의 남서쪽 모퉁이의 볼리비아 남서부 포토시(Potosí)주와 오루로(Oruro)주에 세계에서 가장 넓으며 건조호수 소금사막인 살라르 데 우유니(Salar de Uyuni)가 있는데 이 사막의 넓이가 10,582 km²에 이르고 3,650m 높이의 안데스 영봉과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이 아마도 운남성이 끝나는 곳일게다.
소금사막 가운데에는 선인장으로 가득 찬'물고기 섬(Isla Incahuasi)'이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은 멕시코시티의 옛 이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란 어원에서 “선인장(prickly pear)의 땅”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간들에게 종교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 소금 사막에 저장한 소금량은 얼마나 될까?
2012년 기준 세계소금 생산량이 2억(億)6천톤이다.
우유니소금사막의 소금 총량은 최소100억(億)톤으로 추산되며, 두께는 1m에서 최대 120m까지 층이 다양하고 이 지역의 사람들은 오랜 전부터 이 소금을 채굴하며 생필품과 교환하는 등 중요한 교역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현재 2012년 세계소금 총생산량과 비교해보아도 약 50년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래전부터 인간이 소금을 채취하였음에도 아직까지 50년을 더 사용할 수 있는 규모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참으로 경이스럽다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우유니소금광산을 신(神)처럼 여겼다면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부도호(浮圖湖)라고 한들 부족할 것이 없다.
《史記·西南夷傳》西南夷傳身毒國。卽天竺也。所謂浮圖湖是也。
앞에서 언급한 사기(史記)서남이전(西南夷傳)에서 서남이(西南夷)가 놀랍게도 신독국(身毒國)이라 전하고 있으며 천축(天竺)이라 하였고 소위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 부도호(浮圖湖)가 있다 한 것이다.
부도호란 무엇일까?
부도(浮圖)는 뜰 부(浮)와 그림 도(圖)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부는 떠서 움직이는 의미화한 것으로 한량없다는 넘치다, 높다 등으로 쓰임을 알 수 있고 고승(高僧)의 사리나 유골(遺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이나 붓다(buddha) 혹은 탑을 말하는 스투파(stūpa)의 음사(音寫)로 알려진다.
때문에 부도호는 불교와 관계하는 엄청난 불사(佛事)들이 물에서 뜰 수 있는 신(神)의 호수라는 것이다.
신라(新羅) 박제상(朴堤上:363-419)이 지었다는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마고(麻姑)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중간인 짐세(朕世)에 팔여(八呂)의 음(音)에서 나왔다 하는 신인(神人)으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城)인 마고성(麻姑城)에서 살면서 천부(天符)를 받들고 지키며,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두 딸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았다 하며 이 두 딸 역시 선후천(先後天)의 정을 받아 배우자 없이 자식을 낳아 네 천인(天人) 황궁(黃穹)·청궁(靑穹)·백소(白巢)·흑소(黑巢)와 동시에 네 천녀(天女)가 있게 되었다 한다. 이들은 성중(城中)에서 나오는 지유(地乳)를 먹고 살면서 네 천인(天人)은 진(律)을, 네 천녀(天女)는 여(呂)를 맡아보게 되었으나 후천(後天)의 운(運)이 열리면서 이 진여(律呂)가 부활(復活)하게 되어 음상(音象)을 이루니 성(聲)과 음(音)이 섞이게 되었다 하며, 마고(麻姑)가 마고성(麻姑城)과 나란히 있는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뜨리니 물 가운데 땅이 생기고 육지와 바다가 여럿이 나란히 벌여 서는 병렬(竝列)하며 산천(山川)이 길게 뻗어지게 되었다 한다.
천지창조의 이야기다.
이 부두지가 말하는 위치 또한 어디일까?
물론 이 부도(浮圖)와 부도(符都)의 한문이 차이가 있다 하겠지만 음(音)이 같다는 것은 옛 역사에서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부도지(符都誌)에서 선천(先天)시대에 천인(天人)들을 먹이고 자라게 하던 신비의 젖 지유(地乳)가 있었다는데 이 지유, 즉 “땅 우유”가 바로 소금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인간이 습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소금이다.
율곤 이중재(李重宰)박사는 부도지(符都誌)나 당서(唐書)에 땅에서 우유가 나온다는 기록을 지유(地乳)라 하고 이 물은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 한 것이다.
곤륜산을 어딜 말하는 것일까?
안데스산맥이다.
우유니소금사막 지천에 안데스 영봉이 있다고 하였으니 틀리지 않는 말이다.
본 블로그 글"천축주(天竺酒)가 난 곳은 남아메리카(南蠻)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77"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천축주를 AD 800년 이전에 이미 아락(arack)이란 이름의 술로 밝혔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럼주(Rum)가 되었다는 사실로 정리했지만 이 글에서 천축(天竺), 천독(天毒)에서 축(竺)은 독(毒)과 통하는 글자이므로 천축(天竺)은 천독(天毒)이라 했고 불교에 관한 기록 중 천독(天毒)또는 천축(天竺)이라 함은 수미세계(須彌世界 :天國)을 의미하는데 산해경(山海經)에서 조선(朝鮮)을 천독(天毒)이라 칭하면서, 인도(印度)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고, 월지국(月支國)을 북천축(北天竺)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사달(阿斯達)과 연결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것을 보면 조선(朝鮮)전체를 천독이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옛말의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天竺)을 말한다(古謂天毒即天竺)라고 했으며 곽박이 말하길 조선천독(朝鮮天毒)의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국(天竺國)이라는 얘기다.
이어 동서남북, 중앙까지 천축을 구분하였는데 중천축국(中天竺國)이 삼만리(地方三萬里)라는 것은 다섯(오)천축국을 다스리는 나라가 중(中)천축국(中天竺國)이라는 뜻이 포함된 말이며 천축국은 동천축국, 서천축국, 남천축국, 북천축국, 중천축국을 합하여 삼만리(地方三萬里)였고 수십나라(數十國)가 있으며 모두 왕을 두었고 그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라했다 한다.
천축은 후한(後漢)때 일컬어졌고, 즉 전한(前漢)시에는 신독국(身毒國)이라 했으며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반기(盤起) 즉 반월국(盤越國)이 있는데, 모두 신독국(身毒國)의 땅이라 했다.
이것은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남천축국은 대해(大海)와 접해 있었으며 남아메리카이며 북천축국은 설산(雪山)가까이 있다하니 록키산맥을 끌어안고 있는 북아메리카대륙일 것이다. 동으로는 동천축국(東天竺國)이 있었는데 대해(大海)의 경계라고 했다는 것은 지금의 대서양으로서 대동양(大東洋)을 사이에 둔 유럽대륙을 지칭한 것이다.
물론 서천축국은 지금의 아시아대륙으로 봄이 마땅하다.
천축국(天竺國)은 가비여국(伽毗黎國)이며, 후한(後漢) 환제(桓帝) 5년에 월애(月愛)라는 파견사를 통해 상소를 받은 바에 의하면 천축국(天竺國)은 강과 바다가 접해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가비려(伽毗黎)는 기청세존(祈请世尊)의 의미가 있고 사리불(舍利弗,Shariputra) 또는 가비라바소도(迦毗羅婆蘇覩:Kapilavastu)이며 석가의 출생지를 이르는 말로서 이곳을 현재 네팔 타라이(Tarai)지방이라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또한 곽박은 천축국(天竺國)은 서역(西域)에 있다고 했으며 한(漢)나라 명제(明帝, 東漢 즉 後漢,AD58-75)때 파견된 사신이 부처의 뼈, 불골(佛骨)을 맞이하는 땅이라고 했으나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원가(袁珂)는 천축(天竺)을 지금의 인도(印度)라고 했으며, 대륙의 서남에 있는 나라이며, 천독(天毒)은 동북에 있어 방위는 다르며 옛 왕씨(王氏)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했다.
확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려를 숨기기 위한 것이며 서남에는 인도가 있다는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멕시코를 통한 남아메리카대륙을 말하는 것이고 동북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일 가능성이 있어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하는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근세사와 함께 이곳에 고려(高麗) 즉 코리아가 존재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에서부터 인도(印度)가 거대하게 눈에 들어온다.
7.은(銀)광산이 주는 역사반전
전기한 운남성 역사에서 명(明)초 주원장(朱元璋)은 운남(雲南)을 직할지역으로 결정하면서 운남포정사(云南布政使)를 설치하였으며 개간과 채광을 위하여 많은 한족(漢族)을 이주시켰다고 되어 있는 것은 은광(銀鑛)과 주석(朱錫)이 운남성(雲南省)에서 대단위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때문에 이 금속들을 얻기 위해 주원장이 한족을 거주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한족(漢族)이라고 하는 역사 정체성여부는 매우 희박한 것이 사실이고 대만학자 심건덕(沈建德1947~)의 주장을 빌리더라도[漢族向為少數民族,早已被眾蕃包圍消滅。]한족은 소수민족을 가리키면서 일찍이 주변의 여러 번(蕃)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한족(漢族)이 이런 소수민족임에도 13억명의 92%가 한족(漢族)이라는 것은 뻔한 허구임이 들어난다.
뿐만아니다, 2010년 5월 12일 본 블로그에서 개진한 사실이지만 중국역사학강사 원승비(袁勝飛)가 주장하길 중국역사는 5%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명조(明朝)때 은 광산(銀鑛産)으로 이주시킨 한족(漢族)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 한족은 서양인과 동양인을 구분하기 전에 힌두인이나 이슬람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남아메리카대륙에 이슬람인이라는 회회인들이 많았고 또한 힌두인도 많았다는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본 사실이다.
은(銀)의 역사를 보면 은(銀)광석에서 은(銀)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이후로 여겨 은(銀)을 처음으로 분리, 생산한 초기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 소아시아지역에서 납[鉛:Pb]광석으로부터 고온에서 용해하여 분리하는 회취법(灰吹法:cupellation process)을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하였으며, 기원전 6세기에 아리안계 리디아(Lydia:BC7∼BC6세기)왕국에서 처음 제조되어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졌다고 하고 로마시대에는 연간 약 200톤의 은(銀)이 생산되었고 이것이 신대륙 발견 이전까지의 전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의 은(銀)이 생산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One of the earliest silver extraction centres in Europe was Sardinia in early Chalcolithic.
또는 은(銀)을 가장 먼저 유럽에서 추출한 것은 이른 금석병용시대(early Chalcolithic)로서 기원전 제5천년기(5th millennium BC)에 사르데냐(Sardinia)에 의해서라고 한다.
In the Americas, high temperature silver-lead cupellation technology was developed by pre-Inca civilizations as early as AD 60–120.
또 한편으론 아메리카스에서의 고온에서 용해하여 분리하는 회취법(灰吹法)은 고대잉카문명(pre-Inca civilizations) 단기 60년–120년 사이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작 12세기에 생성되어,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하였으며 기원을 1438부터 1533년까지라 하고 스페인에게 멸망했다고 하는 근대사 설명에서 고대잉카제국이라 하면서 단기 운운하는 것도 마치 서양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고조선을 이야기하는 방식과 같다 할 것인데 여기서도 역사축소를 위한 편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아니할 수 없다.
남아메리카대륙에 청동기농기구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서양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오히려 줄기차게 유럽사를 앞세우려는 작태는 한이 없다.
물론 청동기문화, 철기문화를 본 블로그가 탐구해 볼 것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인류사와 연결되기에 서양인들은 이를 언제까지나 고집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해적신분의 서양인들은 아마도 은(銀)을 만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근원적으로 고대사 전체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Proto-Germanic *silubrą, whence also Old High German silbar, Old Norse silfr
은(銀)의 영명‘silver’는 앵글로-색슨어‘seolfor’에서 어원(語源)을 찾을 수 있고 화폐원소기호(Ag)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아르젠타리우스(argentarius)는 형용사로서 돈(of money)를 뜻하며 아르젠타투스(argentatus)는 은(銀)도금한(plated with silver)것을 말하면서 아르젠네우스(argenteus)는 형용사 은(of silver)를 말하고 아르젠툼(argentum)은 명사 silver(銀)를 뜻하는 라틴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현재 남미 종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Argentana)가 라틴어 은(銀)을 뜻하고 있음도 모두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은은 서양인들에게 별천지 세계를 가져다 준 금속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알 수가 있는데 역시나 해양세력으로서 아르게스테스(argestes)는 서쪽에서 부는 남서바람(the west-southwest wind)을 뜻하는 것으로 이 바람을 타고 정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어원도 그렇고 아르게스테스(argestes)라는 바람은 서양항해자들을 운남성(雲南省)으로 인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금본위제도가 본격화되기전까지 은(銀)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래 운남성(雲南省)은 은(銀)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곳이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사서(史書)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은(銀)의 제련은 신대륙발견과 같은 시기인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납[鉛:Pb]광석을 사용하여 은(銀)을 제련, 분리하는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을 사용하였으며 이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정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고 이것이 바로 현재 통용되는 회취법(灰吹法)과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제련된 단천(端川)은(銀)은 중국 은(銀)이나 일본 은(銀)보다 순도가 훨씬 높았다고 하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이곳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은(銀)이 발견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은(銀)
○ 은은 각처에 모두 있으나, 괵주(虢州)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고려에서 첩(帖)을 만드는 자들이 이르기를, “은광(銀鑛)에서 나는 것이 아니나, 색깔이 푸르러서 괵주의 것만 못하다.” 한다. 《당본초(唐本草)》
○ 은은 외국의 것으로는 네 종류가 있는데, 신라(新羅)의 은, 파사국(波斯國)의 은, 임읍(林邑)의 은, 운남(雲南)의 은이 모두 정련되어서 좋다. 《보장론(寶藏論)》
○ 원 세조 지원(至元) 26년(1289, 충렬왕15)에, 고려국에 은이 많이 산출된다고 해서, 공인(工人)을 그 지역으로 파견하여 근방의 백성들이 제련하는 것을 도와 관부(官府)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원사》
위 해동역사를 보면 신라(新羅), 파사국(Persia), 임읍(林邑:베트남), 운남(雲南)의 은(銀)이 모두 정련되어서 좋다라고 하였고 원(元:1271-1368)세조 지원(至元)기록에는 고려국(高麗國)에 나는 은(銀)이 많이 산출된다고 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위 모든 국가들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할까?
바로 남아메리카대륙이다.
신라와 파사국이 어찌 다를 것인가. 임읍과 운남은 남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아시아대륙에서 생산되었던 신중국 산(産)이니 뭐니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은(産)은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생산되었던 것을 스페인산이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 전체를 묵은(墨銀)이라 하였고 멕시코산을 응양은(鷹洋銀)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 이것이 일본산(産)으로 돌변하고 스페인 산(産)을 본양은(本洋銀)이라 중국에서 칭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일본은 미국용병들이다.
네이버게스트에서 인용한 미국지질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전 세계 은(銀)생산량은 23,800톤으로 추정하는 것에서 멕시코 4500톤(18.9%), 페루4000톤(16.8%)등으로 나타나며 그 외 중국은(銀)도 있지만 근세기에 개발되어 생산된 은광(銀鑛)이라 할 때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역사적으로 별의미를 둘 수가 없다.
3년 후 2014년 통계에서도 전 세계생산량 26,800톤에서 멕시코가 5,000톤 생산의 18.7%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꾸준한 생산량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은(銀)의 역사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신중국 대륙 서남쪽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에서의 광산역사를 따져보면 분명히 은(銀)과 주석(朱錫)이 세계적인 거대한 광산이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찾을 길이 없다.
개구시(個舊市)의 주석광산이 유명하다지만 생산량이 미미하고 동천구(東川區)에 구리광산, 무정현(武定縣)에 철광산, 선위시(宣威市)와 개원시(開遠市)에는 석탄광산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살펴보았던 결과 참으로 실망스러울 정도로 신중국사가 기록한 운남성(雲南省)의 역사기록과 너무나도 딴 판이다.
때문에 분명 본래 운남성(雲南省)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실제로 근세사를 살펴보면 중국(中國)에서 운남성(雲南省)의 은(銀)광산은 참으로 유명했던 것 같지만 존재자체가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란다.
물론 소량 생산되는 은(銀)광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2011년 기준 세계 은(銀)생산량에서 분명 멕시코(4500톤:18.9%)와 페루의 은(銀)생산량 4000톤(16.8%)의 수치가 600년 전 상황과 다름이 없는 사실과 같이 지금도 굳건히 세계 은(銀)생산량을 주도하는 것은 광산 역사 사실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운남성이 가져야 할 확실성이다.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운남성(雲南省)의 은(銀)광산현황과 생산현황은 그것들을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은광(銀鑛)의 역사는 지금도 각 자료에서 운남성(雲南省)을 말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은(銀)이 품질 좋은 것으로 여겨져 19세기 때 중국 은(銀)을 높은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있다.
그와같은 사실은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에서도 확인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중국 은(銀)이라 함은 청나라 은(銀)이라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묵서가(墨西哥)은(銀)이라고 해야 하며 멕시코 은(銀)을 중국 은(銀)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렇듯 잘나가던 멕시코 은(銀)이 갑자기 어느 날 사라지면서 일본 은(銀)으로 대체되는 역사를 보면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청일전쟁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을 미국계 잉글랜드라 한들 모자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은(銀)이 생산되던 운남성(雲南省)은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앞에서 6가지의 운남성에 관한 엄청난 모순과 역사사실을 비교하면서 결론에 이른 것은 바로 남아메리카대륙 운무림(雲霧林)이 왕성한 지역을 통철어 운남성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물론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포토시주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
잉카제국(Inca Empire:1438-1533)등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스페인은 1546년에 멕시코 사카테카스(Zacatecas)에서 발견했을 때와 같은 해 1546년 볼리비아지역의 포토시(Potosí)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했으며 광산촌이 세워졌고 광산에서 엄청난 부(富)가 창출되면서 포토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대도시 반열에 올랐으며, 인구도 200,000을 넘었다고 한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1556년에서 1783년 사이 포토시주(Potosi)부(富)의 언덕, 리치(rich)산이라고 하는 세로리코(Cerro Rico)에서 채굴한 순은(純銀)이 45,000톤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7,000톤의 은(銀)이 에스파냐 왕가로 들어갔다고 알려진다.
점차 원주민(이슬람) 노동력이 줄어들자 이를 벌충하고자 1608년 식민지배자들은 마드리드의 왕가에 해마다 1500~2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할 수 있도록 청원을 했다.
에스파냐(스페인)는 중앙·남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금(金:gold)과 은(銀:silver)광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유럽으로 가져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국가가 아닌 왕실은 재정이 매우 풍부해졌을 것이다.
1520∼1860년에 에스파냐에 수입된 은(銀)은 1만8000t나 되었으며, 금도 200t이 넘었다고 알려진다.
당시 유럽의 화폐는 금화나 은화이었지만 금은(金銀)등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유럽의 화폐가치는 곧바로 하락하였고,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유럽의 물가는 16세기 동안에 평균 2∼4배 올랐기 때문에 가격혁명(the price revolution)이라 칭했다.
이러한 가격혁명은 임금 노동자(賃金勞動者)나 고정된 지대(地代)로 생활하는 지주(地主)에게는 불리했겠지만 상인이나 수공업자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여 이들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대륙의 광대한 해외시장에서 상업혁명을 일으켜 시민계급과 자본주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서세(西勢)의 출몰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원주민들을 착취하여 생산한 은(銀)은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가 막대한 부를 창출시켰고 해상세력들의 무적함대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한때 남미 최대의 도시로서 포토시는 세계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초기에는 남미 원주민들이 채굴하다가 인력 손실이 많아지고 반란(反亂)이 잇따르자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노예들로 채워졌고 노예해방 이후에는 하층민(下層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정리되고 있다.
일단 이슬람인으로 보지만 남미원주민들의 실체가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안전장비도 없이 정련(精鍊)과정에서 생기는 수은 중독(水銀中毒:mercury poisoning), 코카 잎을 씹으며 환각상태에서 일 할 수밖에 없었던 작업환경으로 평균수명이 40세도 체되지 않았다고 한다.
1500년대부터 수백 년에 걸쳐 과거 전 세계 은(銀)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던 은광 도시 포토시(Potosí)는 은(銀)이 고갈되기 시작하는 1900년대부터는 주석이 그 뒤를 대체하였지만 점차 채산성 악화로 도시 전체가 침체되어 갔다.
세로 리코(Cerro Rico)라는 높이가 4,800m인 포토시 산(potosi Mt)은 원래 5000m가 넘었으나 광산채굴로 곳곳이 깎여나가 지금처럼 낮아졌다고 하니 은과 주석의 산출량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8.마무리
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
서두에 제기한 문제점을 밝힘에 있어 어쨌던 핵심요소라고 할 수있는 문제는 운남성의 위치였다.
그리고 또한 운남성(雲南省)과 가까운 곤련을 찾는 일이었다.
이 곤련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 역시 궁금했고 그 하류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한 사실에서 대해라는 것도 궁금했다.
운남성은 안데스의 구름과 안개지역(Andes cloud and mist)의 상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었고 볼리비아(Bolivia)에서는 융가스로드(Yungas Road)가 있는 지역, 라파스 주(La Paz Department), 차파레주(Chapare Province), 코차밤바 주(Cochabamba Department)가 그런 현상이 많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하였으며 칠레(Chile)는 바스케이 데 프레이 호리해 공원(Bosque de Fray Jorge National Park), 에콰도르(Ecuador)의 덴다야파(Tandayapa), 민도(Mindo)가 그런 지역이라는 사실을 세세하게 설명도 했다.
이곳들을 운남성이라 결론 지울 수밖에 없다.
1853년에 주석광산에서 일하는 회족(回族)과 한족(漢族)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회교도 희생자 수가 12,000,000명을 발생케한 회민반란이 바로 북부버마라 하였으니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로서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또는 베네수엘라까지를 포함하여 현재는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전은 엄청난 것이다.
그곳에서 1852년 영국과 버마가 2차 충돌이었던 영면전쟁(英緬戰爭)이 있었고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이 내린 서원철폐령(書院撤廢領)은 회교도들을 자극하였을 것이고 때문에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인 금위영(禁衛營)반란이 발생되었다는 사실도 이슬람인들이 많았던 당시 조선내 군사상황설명이 가능하다.
이를 청(淸)군벌 세력에 의한 쿠데타라는 것을 동시에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쿠데타는 잉글랜드 왕실을 이롭게 한 사실임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영길이국으로 진단한다는 사실이다.
철종(哲宗,章皇帝)인 것으로 파악되는 마지막 무굴황제 바하두르샤 2세(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를 버마(Burma)로 추방하여 철종사망시기와 거의 같은 1862년 11월 7일에 양곤(Yangon)에서 사망케 하였다는 것도 역사가 전부 합치가 되다는 이야기다.
운남성 역사에서 찾은 모순들에서도 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의 규모와 소금광산의 여건등을 살펴 그곳이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라는 사실과 이 티티카카호수 남부에 대리국이 건립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이 가능하였다.
운남성과 서안의 거리 수치문제 또한 이질적인 요소인 것이 틀림없다.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가 현재 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 산악지대로 비슷한 것을 그냥지나 칠 수 없었으며 조선(朝鮮)과 인도(印度)에서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함을 인도아 북부 고원지대가 아니라 이제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임을 알 수가 있게 하는 것이다.
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 또한 마그달레나 강(Magdalena river)이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확신을 한다.
그리고 안데스산맥의 어원이 동방(東方)을 뜻하는 것이라든지 잉카제국이 아닌 인도제국 역사가 함몰되어 마치 인도역사로 지칭되게 하는 문제가 의문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곤련(昆連)과 곤륜(崑崙)을 동일하게 안데스산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풀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차마고도(茶馬古道)라 함은 바로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에서 부도호(浮圖湖)까지 소금을 구하기 위한 고행길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
은(銀)광산이 주는 역사반전은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이치는 자연은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 동아시아대륙 운남성에 없는 대생산량을 보장하는 은광이 엉뚱하게도 남아메리카대륙 스페인인이 1546년에 발견했다고 하는 볼리비아지역의 포토시(Potosí)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던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와 닿는다.
이것으로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처럼 알고 싶었던 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은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영길이국이 19세기 중반에서부터 존재한 사실은 버어마의 영면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이것은 바로 회민반란에 의한 회민학살의 역사현장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영면전쟁으로부터 옛 인도의 힌두인과 이슬람인을 상대로 무차별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
이런 작업 후 자신에 차 있는 상태로 조선을 방문한 것이 바로 순조(純祖)32년(1832)이다.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부록에 나타난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이라 한 것은 바로 안데스산맥이다.
안데스산맥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페루(Peru)남부의 안데스산맥의 빙하호에서 발원하고 상류는 마라뇬 강(Río Marañón)과 우카얄리강(Ucayali江)이라고 불리는 하류(河流)가 모여 아마존강본류가 되며 이 본류가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영길이국(英吉利國)은 페루와 아마존 상류에 위치 한 것임을 알 수 잇고 바로 지금의 브라질북부 전역을 확보해 나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며 대해는 바로 대서양 즉 대동양(大東洋)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이야기 했듯이 1577년 경 버지니아 주(Virginia)노퍽(Norfolk)에 도착한 앨비언(Albion)들이 여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아무쪼록 세계삼한역사 연구자들에게 이 글이 획기적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부의 말씀은 미래역사발전을 위해 저작권 보호를 부탁드립니다. 모든 연구자들은 본 블로그에 게시한 사진과 내용들을 훼손없이 그대로 인용할 수가 있습니다. 글쓴이:한부울
************************************
'세계삼한역사 > 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흐미(khoomei)의 역사 밝힘 (0) | 2018.01.21 |
---|---|
서변(西邊)의 의미와 오대해(五大海) (0) | 2017.04.27 |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0) | 2016.07.15 |
한우로 본 코리아 북미서부 (0) | 2016.01.05 |
채핀가(家)의 코리아 행선지 고찰 (0) | 2015.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