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한우로 본 코리아 북미서부

한부울 2016. 1. 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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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로 본 코리아는 북미서부


글쓴이:한부울


소의 역사

누런 황색의 황소뿐인 한반도

1912년 보르나병의 발생지는 코리아

마무리


소의 역사


순박·근면·우직 등의 특성을 지닌 한우를 한반도 역사에서 말하길 우리민족성과 같다고 한다.

이것은 근면하거나 순박, 우직하다는 의미라 하겠지만 다분히 자학적 표현으로 식민사관에 따른 것이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근세기에 역사피해를 당하면서도 우직하고 순박하다고 자위하고 있으니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런 멍청한 비교는 다시 하지 않았으면 한다.

위키자료에 보면 소(牛)가 가축화된 것은 기원전 7000-6000년경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사육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동서(東西)로 퍼지게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는 것은 현재 인위적인 가축소의 분포지와 관계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살펴보건데 본 블로그 글 "백령도(白翎島)와 제주(濟州) 들소(野牛, 兕, bis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0"에서 말하길 아메리카들소 바이슨(bison)은 평원들소(plain bison)와 숲들소(woodland bison)라 하면서도 유럽소로 만들었다는 의혹이 있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북부지역에 서식하였다고 보는 수우(水牛)등을 합해 야우(野牛)라 하는 것을 버팔로(Buffalo)라 한 것도 근원적으로 소(牛)의 서식지는 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Oxen are thought to have first been harnessed and put to work around 4000 BC

또한 집소로서의 가축소 역사를 보게 되면 위 영어자료와 같이 황소가 기원전 4000년부터 마구를 끌게 되거나 사람들을 대신하여 농사일을 하게 된 시초라고 대다수 과학자들이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볼 때 소와 인간과의 관계 역사가 적어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New Stone Age)까지 연결된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도·중국 등지에서는 농경에 사용하기 위하여 소(牛)를 이용하였던 역사사실이 있는 반면에 서양 유럽에서는 그저 식품으로서의 고기와 젖을 얻기 위하여 소(牛)를 사육했다고 알려진다는 것은 역사가 얼마나 서양위주로 편중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역사는 아시아는 소의 생산지역으로 유럽대륙은 소의 소비지역으로 나누는 것과 동일하다.

물론 편중된 시각의 역사가 애초 서양 유럽역사란 자체의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기에 사실상이러한 주장들을 신빙성이 있게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생물학적 판단문제에서도 근세기에 생성된 역사판짜기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린네(Carl Linnaeus:1707–1778)에 의해 정리된 소(牛)에 대한 분류학체계에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학명 ‘보스 타우루스(Bos taurus)’와 인도혹소 즉 호반우(虎班牛)라 하는 ‘보스 인디쿠스(Bos indicus)’, 현재 1627년 폴란드의 야크토로프카(Jaktorów) 숲에서 마지막 1마리가 죽어 멸종된 상태에 있는 유럽종인 학명 ‘보스 프리미제니우스(Bos primigenius)’라 하는 오록스(aurochs)'등 3종(種)으로 크게 나누고 있는 것에서 보더라도 유럽종이라고 알려진 라틴어 프리미게니우스(primigenius)의 뜻은 최초, 본래, 고유(original), 원시, 태고(primitive)등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DNA”가 가축소의 유럽상징성에 묶여 있다.

때문에 근원적으로 소의 원종은 유럽대륙에 속한 것처럼 모든 것에서 유도되었다는 측명이 있다.

라틴어 보스(bos)의 어원은 옥스[(noun)An ox], 또는 거세한 소(a castrated bull; a bullock)을 뜻하는 것으로 소전체를 말하기 보단 황소의 뜻이 강하다.

동아일보기사(1925.1.1)를 보면 소(牛)는 학명으로 보스(Bos)라 한다는 사실과 범어(梵語)로는 우크사(Uksh)라 하고 만주어로는 '밍화', 몽고어로는 '뿌화'라 한다 하였고 원대(元代)인명에서 불화(不花)가 많았다는 것은 소(牛)를 의미하는 것인데 소가 근본적으로 인간역사와도 뿌리깊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삼한역사와 소(牛)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것은 첫째로 '우두주(牛頭州)', '우이동(牛耳洞)','소우도(小牛島)','우수(牛首)', '우이산(牛耳山)','우봉현(牛峯縣)'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넓게 지명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사실과, 부여에서는 우가(牛加)라는 관직명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기원전 300년부터의 철기시대(Iron Age)에 사용된 써래 또는 철제 농기구를 제작해 사용한 기록은 역우(役牛)에 관한 것이며, 김해패총(金海貝塚)에서 소 두개골 발굴된 사실, 신라 지증왕(智證王,재위:500-514)때 소로 논을 가는 우경(牛耕)을 장려했고 고구려 정벌때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2천여두(頭)의 우차(牛車)를 사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고구려 때 소(牛)도살을 금지하는 보호령이 제정되었으며 백제시대는 육부(肉部)를 설치해 소(牛)를 보호했고 고려조에는 요동(遼東)에서 와서 둔전우(屯田牛) 5천 7백 두(頭)를 교역(交易)해 갔다는 것에서 축우사양법(畜牛飼養法)이 시행되었다는 사실, 조선시대에는 농업가우(農業家牛)를 설치해 우역(牛疫)을 예방했다는 것과 태조가 전구서(典廐署)를 설치했다는 사실, 세조는 혼기에 달하면 집소를 이용하여 결혼비용으로 충당하기도 했다는 양우법(養牛法)을 편찬하여 소(牛)의 개량과 증식을 권장했다는 기록 등에서 옛 선조들의 지혜로운 소 보호책과 증식의 관한 노력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수많은 집소가 조선에는 존재하였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의 사실과는 관계 없이 한반도 역사에는 해방이 되기 전인 일제시대 때 일본인의 인구정책과 육류수급측면에서 한우정책이 추진되었다고 하고 이 때 많은 한우가 일본으로 공출 또는 수출되어 수난의 시대를 맞았다고 되어 있으며 1945년 해방직후에는 구체적으로 60만두의 한우가 사육되었다는 사실과 1950년 6.25사변으로 39만두로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한우증식을 위한 도살 및 보호 등 각종 법이 제정되면서 1959년 말에는 1백2만두로 늘어났다는 정도를 알 수가 있다.


태종 4년(1404,영락 2)

조정 사신(朝廷使臣) 장인사 경(掌印司卿) 한첩목아(韓帖木兒)·홍려시 서반(鴻臚寺序班) 오수(鄔修)·행인(行人) 이영(李榮) 등이 왔다. 오수 등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싸 가지고 왔다.“1. 농정(農政)을 위한 일. 영락 2년 2월 22일에 〈명나라〉 본부 상서(本部尙書) 이지강(李至剛)이 공부 상서(工部尙書) 황복(黃福) 등의 관원과 함께 봉천문(奉天門)에 일찍 조회(朝會)하여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였는데, ‘근자에 건문(建文)이 조훈(祖訓)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서 군사와 백성들이 많은 해(害)를 입었는데, 지금은 천하가 태평하여 군사와 백성들이 각각 생업(生業)을 편히 한다. 다만 요동(遼東)에는 소[牛]가 적고, 조선국은 요동과 접경(接境)하여 소가 많이 나니, 너희 예부(禮部)는 사람을 보내어 조선 국왕에게 말하여 알려서, 저들로 하여금 쓸 만한 경우(耕牛) 1만 필을 뽑아서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보내게 하되, 소 한 마리에 견(絹) 한 필, 포(布) 4필로 하고, 그것을 2부(部)로 운반하여 요동으로 가서 요동 도사에 넘기고, 진료(鎭遼) 천호소(千戶所)에 저자[市]를 세워, 만일 저쪽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매매하기를 요구하거든, 그 편의를 들어주라.’ 하였으므로, 그대로 흠준(欽遵)하는 외에 지금 성지(聖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본국(本國)에 이자(移咨)하여 알린다.


위 조선왕조실록 태종4년 기록을 보면 명나라가 있는 요동(遼東)에는 소가 적다 하였으나 조선국이 있는 요동은 소가 많다하는 것도 사실상 한반도를 지형으로 하는 설명에서는 도무지 무슨 이야긴지 알기가 힘드는 것도 사실이다.

즉 요동은 한쪽은 소를 사육하기가 어려운 환경임을 알 수 있고 한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쨌던 조선에서 경우(耕牛) 1만 필을 구해 요동도사에게 보내라는 기록으로서 그곳 천호소(千戶所)에 시장을 세우라 하였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매매를 원하면 편의를 제공하라는 특별지시지 명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는데 당시 조선에 역우(役牛)라 하는 사육소가 많았다는 사실과 때문에 논밭을 경작할 때 사용(使用)하는 쓸만한 소를 구하기가 힘든 명나라가 이런 정책지시를 내린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세종 13년(1431,선덕 6) 3월28일 (임진)

목장으로 할만한 곳을 찾아 소를 기르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소는 국가에 있어 그 용도가 심히 큰 것이온데, 관에서 이를 길러 번식하지 않는 것은 실로 궐전(闕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이제부터 생곡초(生穀草)를 납부하는 경기의 각 고을을 제외하고 유수(留守)·대도호부·목(牧) 등의 고을에는 암소[牸牛] 6두(頭)와 황소[雄牛] 3두를, 도호부와 지군사 등 고을에는 암소 4두와 황소 2두를, 현령(縣令)·현감(縣監) 등의 고을에는 암소 2두와 황소 1두를 배정하여 국고의 요두(料豆)로 길러 번식하게 하고 회계(會計)에 실려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이를 관장하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이에 더하여 조선 전역에서 소증식을 장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각 유수, 대도호부, 목(牧)등의 고을과 도호부와 지군사의 고을, 현령과 현감의 고을에 집중적으로 암소와 수소 비율 2:1로 나누어 제공하고 번식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당시부터 지금까지 조선에는 엄청난 수의 역우(役牛)가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누런 황색의 황소뿐인 한반도


                                                    [두산백과사전:한반도 한우]


                                                 [채핀이 본 코리아 의 한우]


역우를 한우라고 보았을 때 한우의 상황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현재 보존되고 있는 토종 한우는 털색에 따라 황소, 칡소, 흑소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황소는 털색과 상관없은 것으로 서양에서 구분할 때 황소(Ox)는 일을 시키기 위해 거세한 수소로 알려지고 암소(females)인 카우(Cows)와 수소(males)인 불스(bulls)로 나누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이나 오래된 사서(史書)기록을 찾아보면 종류별로 알 수 없으나 농우(農牛), 유우(乳牛), 경우(耕牛), 얼룩소(犂牛), 검은 수소(牡牛)로 기록되고 있고 일반적으로는 암소라고 하는 자우(牸牛)와 수소라고 하는 웅우(雄牛)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미 본 블로그 글 "리우, 이우(犂牛)는 얼룩소? http://blog.daum.net/han0114/17050664"에서 이우(犂牛)는 학명 ‘Bos indicus Linnaeus, 1758 Zebu Cattle’라 하여 이것을 호반우(虎班牛:Tiger Cattle)라 하고 브라만 소(Brahman cattle)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우(犂牛)는 바로 학명 인디쿠스(indicus)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소, 한우(韓牛)라고 하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밝혀보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칡소 또는 호반우, 얼룩소라고 하는 이우(犂牛)를 우리가 친숙하게 여기는 얼룩송아지 정도 알고 있지만 한반도와는 전혀 무관한 우종이라는 사실이다.

2005년에 대한민국 농촌진흥청에 의해 발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태까지 현재 분류학적으로 멸종처리 된 유럽원우(Bos primigenius)와 혹이 있는 인도혹소(Bos indicus)의 혼합종(種)을 한우로 보았던 것은 본래 원종일 수 있겠지만 한반도 사정으로는 한마디로 턱도 없는 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애초의 분류체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새롭게 내놓은 것이 몽골, 중앙아시아등지에서 한우(韓牛)의 가축화가 일어나 한우, 연변한우 및 일본화우(和牛)등으로 분포되었을 것이라는 설을 따르는 것으로 겨우 정리하였는데 이는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가축의 집 소의 근원지를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상 이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가 아니라 실제로는 아메리카대륙미시시피강 이서쪽으로 보는 것이 맞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서식하던 학명 보스 타우러스(Bos taurus Linnaeus,1758)를 바탕으로 집소의 원종을 말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한우(韓牛)역시 집소(Domestic Cattle)학명 보스 타우루스 코레아나에(Bos taurus coreanae)라 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라틴어 최초, 본래, 고유의 뜻을 가진 프리미게니우스(primigenius)가 “DNA”가 상징이 되면서 유럽종을 보스 프리미제니우스 타우루스(Bos primigenius taurus Linnaeus,1758)라 하였는데 이는 멸종처리되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실제로 유럽소(歐洲牛)라고 하지만 그것에 대한 근본 원종을 찾기란 불가능 해지면서 동시에 한우역시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 황우(黄牛)라고 하는 것은 노란빛을 띤 갈색 소를 말하는 것으로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일반상식이 되었지만 사실 황우(黄牛)라는 황소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색깔하고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수소를 가리키는 황소는 본래 한소(韓牛)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한우는 누런 황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韓(큰) + 牛(소)로 큰 수소처럼 힘이 세다는 의미를 더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이 한우라 하는 명칭자체의 역사성이다.

황소의 황(黃)은 누를 황 자(字)를 쓰는데 누런 뜻보다 ‘크고 세다’라는 의미가 더 크다.

수소 즉 황소를 뜻하는 신중국어 공우(公牛)와 같은 것이다.

때문에 항우장사라는 의미도 황우장사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설을 따르든지 간에 일단 황소는 ‘덩치 큰 수소’로 정리되어야 하며 "얼룩빼기 황소", 심지어 "검은 황소"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감안할 수 있는 것은 털 색깔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한우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일제식민지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형되었다고 하는 의혹에서 볼 때 현재 축산과학원의 말을 빌리자면 일제가 1938년부터 한우 심사표준을 정하면서 '한우의 모색을 적색으로 한다'는 규정을 내세워 털색을 통일시키면서 벌어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정해진 것이 오늘날 한반도에서 한우가 되었는데 한우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누런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덩치가 큰 수소를 말하는 것임에도 이러한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사실화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언어풀이가들은 용비어천가(1447년)에 등장하는 ‘한쇼’는 ‘거우’(巨牛)와 대응된다 하였다.

이런 상식적인 것에서 볼 때 한우가 누런색이란 등식의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아야 할 장본인들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일 것인데 여태 이러한 사실조차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본 블로그 글 "채핀가(家)의 코리아 행선지 고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4"에서 보았듯이 한반도를 1910년에 찾았다고 하는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의 사진들을 보면 논밭을 경작할 때 사용(使用)하는 농우나 짐 등을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는 운반용 역우(役牛)들이 전부 검은 소라는 사실이다.[윗 그림참조]

적어도 1910년까지 코리아에는 일소들이 전부 흑색소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축산과학원에서 이야기 하는 사실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은 동아일보 1938년의 보도된 내용에서 일제에 의해 시행된 "한우 심사표준"을 정하고 '한우의 모색을 적색으로 한다'는 규정의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조선우심사표준(朝鮮牛審査標準)에서 1.자질(資質) 20점을 정하는데서 ...피부초후(皮膚稍厚)탄력있고 피모적색조강(被毛赤色粗剛)치 않는 것으로.."[동아일보1938.12.17 기사]되어있을뿐이다.

즉 피부가 약간 두텁고 탄력이 있고 털이 적색에서 거칠거나 강하지 않는 정도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전체를 강제적으로 적색화하였다는 것은 좀 과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인데 아마도 한반도세력들이 노란색의 한우가 생성된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에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반도 역사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분명 1938년 조선우선정과정에서 털 색깔이 붉다는 것과 동시에 거칠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붉은 털을 강요했다고는 볼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존재하였던 조선우나 고려우는 처음부터 검은 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적으로 검은 수소를 모우(牡牛)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이 역시 덩치가 큰 한우라 할 수밖에 없다.

모우(牡牛)가 뿔 각(角)을 오징어 오적(烏賊)이 흑액(黑液)을 부여케 했다는 의미는 매우 강한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서의 검은 소는 제주도에 ‘꺼멍소’라고 알려져 있는 흑한우(黑韓牛)가 있다.

백과사전등에는 우리나라에 재래종으로 칡한우와 흑한우가 있다고 되어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칡한우는 한반도에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리우, 이우(犂牛)는 얼룩소?"에서 알아본 것이지만 이 칡소가 바로 인도혹소라고도 하는 제부(Zebu)이며 남아메리카에 분포지로 하고 성스럽다고 하는 범(梵), 산스크리트 브라만‘brahman’의 음사(音寫)를 붙여 브라만 소(Brahman cattle)라고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한반도 사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 칡소를 '정지용' 시인이 쓴 “향수”에 나오는 '얼룩배기 황소'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얼룩빼기 황소가 바로 이우(犂牛) 또는 호반우(虎斑牛)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한반도에 흑한우가 존재한다는 것에서도 현재 일부한정된 지역인 제주흑우와 내륙흑한우로 나누고 흑한우(黑韓牛)가 한반도에 들어와 뒤늦게 생성된 소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역사와는 무관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기원전부터 오랫동안 제주지역에서 사육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제주흑우는 조선왕조실록, 탐라순력도, 탐라기념 등 옛 문헌에 제향 및 진상품으로 공출된 기록이 있다 하여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연계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주흑소가 문헌에 나오는 흑소인지는 단정내리가 어렵다.

그러한 의혹에 더 하는 사실은 바로 제주흑우가 전신의 털 색깔만 흑색인 것으로 전통적 한우라고 할 수 없는 체구가 작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재 제주흑우만이 고유 혈통을 가진 고유 재래종으로 제주축산진흥원에서 체계적인 혈통관리 및 사양관리를 하고 있고 천연기념우로 지정 보호하고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본래 흑한우와는 거리가 있다는 문제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1912년 보르나병의 발생지는 코리아


농촌진흥청이 제공하는 농업용어사전에 따르면 한반도에 한우는 한국 농촌의 중요한 생산 수단이자 경제 기반이어서 오래 전부터 널리 사육되었다고 했고 전라도 화순군에서만 1974년에 1만 1076두를, 1985년에 1만 1891두를 사육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특히 동복면에서 많이 사육되었다고 적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가 현대임에도 나타나는 수치는 참으로 빈약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방에서 벗어나 한반도 전체적으로 보아도 1945년 해방직후에 60만두의 한우가 사육되었고 1950년 6.25사변으로 39만두로 급속히 감소했으나 한우증식을 위한 도살 및 보호 등 각종 법이 제정되면서 1959년 말(末)에는 1백2만두로 늘어났다고 하고 있다.

물론 남북이 갈라진 상황에서 최종 북한 한우까지 통계가 적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거의 40년 전인 1920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기사를 보면 경성가축가금현황에서 1919년말 기준으로 현재 경기도관내의 모우(牡牛)가 55,977 두(頭)이고 빈우(牝牛)가 58,685 두(頭)로서 합계 111,662 두(頭)로 집계된다 하였고 3년 후인 1923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기사를 보면 전체조선(全朝鮮)의 생우두수(生牛頭數)는 약 160만(萬)두(頭)로서 모우와 빈우의 비례가 2:1로 암소가 부족함을 나타내고 있어 미래 소 개체수를 걱정하는 기사임을 알 수가 있다.

1945년 전체 한반도 사육한우 수가 60만(萬)두(頭), 전쟁 후 1959년에 102만(萬)두(頭)라고 한 것에서 비교 해 볼 때 22년전인 1920년도에 생우두수가 160만(萬)두(頭)의 3/1 로 나타나고 1959년도 개체수역시 비교하면 약 60%밖에 되지 않는 기이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반도 사정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말이다.



원래 조선우(朝鮮牛)의 계통은 강원도의 고원지대산(産)과 함남(咸南)산(産), 평북원야(平北原野)의 산(産)등 3대계통으로 추풍령이남(以南)아래는 현저히 체격이 작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남부지방의 소가 가장 작고, 중부와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크다는 사실과는 다르지가 않다.

또한 1925년 1월 1일 동아일보기사를 보면 '야크(Yak)'의 마우(摩牛)는 티벳 파중산(巴中産)이라 하고 육중이 천근이라 하였으며 위우(犩牛,wild ox; wild yak)는 촉중산(蜀中產)이라 육중이 수천근(數千斤)이라 하였고 '난장이 소'라 하는 피우(犤牛)는 직우(稷牛)라하고 과하우(果下牛)라하는데 체격이 작아(體小)유명하며 수우(水牛)는 각(角)의 형상으로 구별하니 보통황우 보다는 체중이 더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지금 신중국에서는 이러한 이름들이 알려지지도 않다.

이러한 상식은 잘 알려지지 않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야크 종의 소들 역시 동아시아대륙 티벳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 블로그 글 "안식향(安息香)으로 본 삼한(三韓)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1" 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지아코모 가스탈디(Giacomo Gastaldi :1500–1566)가 1546년에 제작한 지도(Universale Cosmographo)에 티벳이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발견에서 티벳 샹그리라(Shangri-La)가 그곳에 있었다고 한 사실과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에서 히말리아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 있었다는 글쓴이의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제식민지 기간 1912년과 1914부터 1918년동안에 우리나라 소 수출 감소가 현격하게 나타난 것은 두가지 원인으로 밝혀졌는데 하나는 유럽에서 최초발생했다고 하는 진 것은 바로 우역이라고 하는 보르나병(Borna's disease virus)때문이며  또 하나는 1세계대전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처음 개전시에는 감소상태에 있다가 종전이 되면서 엄청난 수출증가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다.

수출에 관해 이 기사가 말하길 "우리는 농경으로 국본을 삼아온 나라이기 때문에 우(牛)를 역용(役用)으로 중히 여겼고 종류는 산지로 구별하였으니 강원우(江原牛), 함경우(咸境牛)라 칭하였고 일본은 우리에게서 수출(수입)한 것이니 역사상에 들어난 사실로는 일본흠명왕(欽明王)때 우리 백제에서 우(牛)를 수출한 것이 시초라 하였다.

현재 특히 조선소(朝鮮牛)가 질이 좋아 만국에서 선호했다고 하면서 1912년부터 1918년까지의 수출 기록을 그 증거로 제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래첨부된 그림 1921년 10월 2일자 기사를 보면 일본(日本)과 아세아노서아(亞細亞露西亞)와 중국(中國)에 소를 수출한 그 상태를 표시하면 표와 같다고 제시한 표를 글쓴이가 다시 정리[참조그림아래표]한 것인데 자세히보면 1912년에 소 수출수가 격감한 것은 당시에 유행된 우역(牛疫)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감소 후 점차 회복하다가 1914년에 까지에 전년의 배수로 증가된 것은 구주전쟁(歐洲戰爭) 즉 1차세계대전이 원인으로 과거 8년간의 증가율로 이야기할 때 그 수(數)에 있어서는 78%가 증가하고 그 가격(價格)에 있어서는 59%증가되었다고 기사화하고 있는 것이다.




                                                           [수출가격 증가율표]


보르나병(Borna's disease virus)은 '보르나병 바이러스(BDV)'또는 급성 말 뇌수막염으로 알려지는 것으로 Borna virus appears to have a wide host range, having been detected in horses, cattle, sheep, dogs and foxes.

넓은 농생물학적 숙주범위(宿主範圍)에는 말, 소, 양, 개, 여우 검출되어 나타난다고 되어 있고 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동물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처음 이 병이 시작된 것은 1885년 독일의 'Borna'지방에서 말에게 집중적으로 이 병상이 나타나 대유행한 적이 있었던 지발성(遲發性)바이러스 감염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으며 보르나병이라는 명칭도 이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보르나병바이러스는 신경문제를 일으키며 여러 '말'에서 치명적이었으며 쥐와 같은 설치류도 감염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잠복기는 상대적으로 길며 바이러스가 신경을 따라서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감염 후에 임상증상이 나타나기까지는 6개월 정도가 소요된다고 알려진다.

증상은 발열, 인두마비, 근육의 진전(振戰) 떨림, 감각과민증 등을 나타내며 허약, 마비, 무기력, 실명, 쓰러짐, 사지부조화, 머리를 누르거나 어두운 코너에 있는 이상한 행동, 우울증 등으로 나타난다 하였으며 바이러스의 전염경로는 흡입 또는 뭔가를 먹어서 전염된다고 믿으며 진드기를 통한 감염도 의심이 되면서 철새들에 의해 퍼진다고도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자료들은 현재까지 구체적인 치료법은 알려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바이러스가 1912년에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동부에 집중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분명 동아시아대륙이 아니었다.

이때 유행한 이 바이러스를 ‘서부말뇌척수염’이라고도 하는데 미국 콜로라도, 켄사스, 미주리, 네브라스카, 오클라호마 각주에서 본 병이 처음 관찰되었다고 확인한 것이다.

바로 동아일보가 말한 1912년 우역이다.



Contribution from the Bureau of Animal Industry, A. D. Melvin, Chief

February 14, 1914.

CEREBROSPINAL MENINGITIS ("FORAGE POISONING")뇌척수막염(풀사료 중독)

By John R. Mohler, Y. M. D., Chief of the Pathological Division. 병리학관리국장

It is prevalent with more or less severity every year in certain parts of the United States, and during the year 1912 the Bureau of Animal Industry received urgent requests for help from Colorado, Georgia, Iowa, Kansas, Kentucky, Louisiana, Maryland, Missouri, Nebraska, New Jersey, North Carolina, Oregon, South Carolina, South Dakota, Virginia, and West Virginia. While in 1912 the brunt of the disease seemed to fall on Kansas and Nebraska, other States were also seriously afflicted. In previous years, for instance in 1882 as well as in 1897, the horses of southeastern Texas were reported to have died by the thousand, and Note.


이에 대한 참고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미국병리학관리국장 존 몰러(John R. Mohler,1875-1952)의 기록에서다.

내용을 보면 이 바이러스는 미국일부지역 또는 1912년에 동물산업국(Bureau of Animal Industry)에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한 콜로라도(Colorado), 조지아(Georgia), 아이오와(Iowa), 캔자스(Kansas), 켄터키(Kentucky), 루이지애나(Louisiana), 메릴랜드(Maryland), 미주리(Missouri), 네브래스카(Nebraska), 뉴저지(New Jersey),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오레곤(Oregon),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버지니아(Virginia),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에서 심각하거나 심각하지 않거나 간에 매년 유행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1912년 동안 이 바이러스 공격에 의해 캔자스(Kansas)와 네브래스카(Nebraska)가 치명적인 피해를 가진 것처럼 보였고 다른 주에서도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고 있다. 앞선 년대에서는 1897년과 같이 1882년에도 텍사스 동남부의 말들이 수천마리 그 이상 죽었다는 보고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하고 위에서 알아보았듯이 넓은 농생물학적 숙주범위(宿主範圍)에는 말, 소, 양, 개, 여우 검출되어 나타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말 뿐만아니라 소에게도 치명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단순하게 볼 수 있는가.

바로 코리아 즉 조선이라고 하여도 상관없겠지만 이 때는 분명 고려로 보아야 옳고 고려지역에 폭넓게 말 뿐만아니라 소 역시 치명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위 [표]에도 알 수 있지만 72%가 직전년도에 비해 수출액이 감소된 것이 나타난다.

일본은 조선만을 장악했고 어쩌면 코리아는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가 있다.

코리아가 일본에게 수출할 수 있었던 사실에서 그 가능성을 배체할 수 없고 그 코리아물품을 일본이 중계역할을 했다고 볼 때 동아일보가 기사화한 1921년까지 미국이 북아메리타대륙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을 가능성과 우선 서부지역의 코리아 경제권을 어느정도 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일단 동아일보가 말하고 있는 코리아는 이러한 예속에서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최종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위 50개주 지도에서 붉은 사각선이 있는 캔자스(Kansas)와 네브래스카(Nebraska) 이서쪽지역으로는 분명 코리아가 존재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마무리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동아일보에서 말하는 1923년 코리아에 모우(牡牛)와  빈우(牝牛)를 합하여 160만(萬)두(頭)가 있었다는 사실이나 구주전쟁(歐洲戰爭) 이라고도 하는 1차세계대전이 종전되던 1917년과 1918년에 소 수출 금액이 전년대비 132%, 124%로 폭증했다는 기록을 보면서 결코 한반도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한우를 학명 "Bos taurus coreanae"이라 하는 것도 사실상 따지고 보면 아시아 한반도에 국한된 학명이며 분류체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영어로 한우(韓牛)를 "K"를 붙여'코리언 네티브 캐틀(Korean native cattle)'이라 한다 하여도 사실상 한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낙인찍기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 해도 결국 한반도에서는 노란 털을 가진 한우 밖에 찾을 길이 없다.

부디 1910년부터 수출한 한우가 한반도에 존재하는 노란 털을 가진 한우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1912년 발생한 보르나병(Borna's disease virus)이라고 하는 우역 때문에 직접적으로 수출금액피해가 전년대비 71%감소했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발생한 지역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는 물론이고 서부지역을 포괄한다는 사실도 충격적인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것이지만 한반도 역사에 길들여져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분명하다.

코리아가 왜 미시시피강 서부로 밀려나고 그곳에서 버티고 있었던 시기가 그렇듯 짧아야 했던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1921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 수출국을 일본과 아세아노서아, 중국이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보면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주위에 이들나라말고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맹점이다.

코리아, 중국, 일본은 거의 가까이 때로는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도대체 노서아면 노서아이지 아세아노서아가 무엇인가?

왜 아세아 노서아라고 하였을까?

이것은 아세아가 아닌 곳에 노서아가 또 있다는 소리다.

분명 북아메리카대륙에는 또 다른 로서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노서아는 근세사가 주구장창 러일전쟁을 말하는 도식의 노서아가 분명하게 존재한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한번 더 강조하고 넘어 갈 것은 위 [수출가격증가표]에서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점차적으로 소에 대한 수출가격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1917년과 1918년 두 해는 각각  증가율이 132%, 124%로 전년대비가 나타난다.

이같은 통계표는 엄청난 것이다.

시기적으로 생각 할 때 1차세계대전 전쟁말미가 되어 여태 누적된 소비욕구가 한꺼번에 늘어나고 첫째 식품공급이 우선시 되면서 소 육류 수요가 폭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육류수요폭증에 수해국이 식민지상태에 있었던 어찌 한반도의 코리아라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적어도 1921년 이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코리아는 결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코리아는 결코 이때까지 우물안에 개구리신세가 아니라는 이야기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목장 위치장소명과 북미대륙에 존재하던 오래된 목장 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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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3월28일 (임진)

목장으로 할만한 곳을 찾아 소를 기르게 하다

○兵曹啓: "牛之於國, 其用甚大, 不於公處畜養孶息, 誠爲闕典。 請自今除納生穀草京畿各官外, 留守、大都護府、牧官、授牸牛六首、雄牛三首, 都護府知官, 牸牛四首、雄牛二首, 縣令縣監牸牛二首、雄牛一首, 養以國庫料豆孶息, 載之會計, 令司僕寺掌之。" 命與政府諸曹同議, 僉曰: "在官在民, 孶息無異, 各官分養, 則喂養之際, 民必受弊。 宜訪各道可作牧場處, 換牛隻放養, 以充國用, 或聽民間貿易。" 命依所啓, 仍命曹與司僕寺提調, 議訪牧場處, "今考去丁未年牧場革除, 京畿 陽城縣 槐台吉串、水原府 弘原串、仁川郡 龍流島ㆍ無衣島、南陽府 仙甘彌島、江華府 注文島、黃海道 海州 睡鴨島、忠淸道 唐津縣 孟串、泰安郡 多利串、藍浦縣 津串及曾革咸吉道 安邊府 押戎、龍津縣 反上 四訥、洪原縣 馬郞耳島、北靑府 羅萬北島, 皆可放養。 又於慶尙、全羅道, 訪得水草俱足, 可以放牧處, 使之入牧。 其買牛隻, 則以各道魚鹽所出及各營公物貿易。" 從之。

병조에서 아뢰기를,

“소는 국가에 있어 그 용도가 심히 큰 것이온데, 관에서 이를 길러 번식하지 않는 것은 실로 궐전(闕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이제부터 생곡초(生穀草)를 납부하는 경기의 각 고을을 제외하고 유수(留守)·대도호부·목(牧) 등의 고을에는 암소[牸牛] 6두(頭)와 황소[雄牛] 3두를, 도호부와 지군사 등 고을에는 암소 4두와 황소 2두를, 현령(縣令)·현감(縣監) 등의 고을에는 암소 2두와 황소 1두를 배정하여 국고의 요두(料豆)로 길러 번식하게 하고 회계(會計)에 실려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이를 관장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의정부 및 제조(諸曹)와 같이 이를 의논하게 한바, 모두 말하기를,

“관이나 민이나 번식시키는 데는 다를 것이 없사온데, 각 고을에서 나누어 기르게 되면 기르는 사이에 백성들이 반드시 그 폐해를 받을 것이오니, 각도의 목장(牧場)을 설치할 만한 곳을 물색해 놓고 소를 교역하여 놓아 길러서 국가 수용에도 충당하고 혹은 민간과의 교환도 들어주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이내 본조와 사복시 제조에게 명하기를,

“목장으로 할 만한 곳을 의논해 찾으라.”

경기 양성현(陽城縣)의 괴태길관(槐台吉串),

수원부(水原府)의 홍원관(弘原串),

인천군(仁川郡)의 용류도(龍流島)·무의도(無衣島),

남양부(南陽府)의 선감미도(仙甘彌島),

강화부(江華府)의 주문도(注文島)

황해도 해주(海州)의 수압도(睡鴨島)

충청도 당진현(唐津縣)의 맹관(孟串),

태안군(泰安郡)의 다리관(多利串),

남포현(藍浦縣)의 진관(津串)과

함길도 안변부(安邊府)의 압융(押戎)

용진현(龍津縣)의 반상사눌(反上四訥),

홍원현(洪原縣)의 마랑이도(馬郞耳島),

북청부(北靑府)의 나만북도(羅萬北島)

North America

[Canada]

Douglas Lake Ranch in British Columbia, Canada is Canada's largest working cattle ranch1886,

Gang Ranch in British Columbia, Canada1863.

[United States]

A. S. Gage Ranch in Texas 1883

Adams Ranch in Florida 1937

Allen Ranch in Texas (now dissolved)1842

Babcock Ranch in Florida1914

Bell Ranch (New Mexico) in New Mexico1824

David L. Shirk Ranch in Oregon1881

Grant-Kohrs Ranch National Historic Site in Montana1857

Hardware Ranch in Utah1860

Harris Ranch in California1937

Hollister Ranch in California 1769

JA Ranch in Texas1837

Keys Desert Queen Ranch in California1879

King Ranch in Texas1843

La Escalera Ranch in Texas1908

Lee's Ferry and Lonely Dell Ranch in Arizona1871

Michaelis Ranch in Texas1890s,

Miller Brothers 101 Ranch in Oklahoma1893

Parker Ranch in Hawaii1847

Philmont Scout Ranch in New Mexico1938

Pitchfork Ranch in Texas1881.

Roba Ranch in Oregon1860s

SLW Ranch in Colorado1880s

Snake River Ranch in Wyoming1929

Spade Ranch in Nebraska1878

Spade Ranch in Texas (now dissolved)1880

TA Ranch Historic District in Wyoming1882

Tejon Ranch in California1843,

Thomas Ranch in Arizona1902

Vermejo Park Ranch in New Mexico1902.

Waggoner Ranch in Texas 1889 to 1903,

Whitehorse Ranch in Oregon1826.

XIT Ranch in Texas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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