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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핀가(家)의 코리아 행선지 고찰
글쓴이:한부울
서문
채핀가의 단절
한반도를 찾은 채핀이 본 철도시스템은 북미서부를 가르킨다.
또 한사람 채핀이 방문한 서울은 킹 카운티
결문(킹 카운티, 경성, 서울)
서문
코리아가 정말 한반도에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기존 역사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를 참고하거나 인용하게 되며 20세기 초반을 기준으로 한다고 할 때 당시 해운운송기술이 세계최고로 발달한 미국에서도 1869년까지는 연안항로 운송수단을 수송선 라인(line)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 때까지 먼 바다로의 수송은 위험이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어 기피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안전한 연안수송라인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소위 장사꾼라 할 수 있는 뉴욕상인이었던 월리엄 아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이다.
이것은 투자안정성을 고려한 것이다.
이 사람은 1848년에 초보적인 스팀선인 1,000톤급 규모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인 캘리포니아호(SS California:1848–1866, 1872–1874), 오리건호(SS Oregon:1848–1861), 파나마호(SS Panama:1848–1861) 3척을 건조하여 운송을 시작한 것이 바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라는 사실을 지금 한반도에 당시 코리아가 있었는가 하는 판단에서 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즉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 태평양을 횡단은 생각할 수 없었던 때이고 중앙아메리카 서부연안 파나마를 깃점으로 북상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아스토리아(Astoria)까지 운항을 왕복한 것이다.
이것은 한번 출항하면 긴 항로를 운항해야 하는 바다 횡단사업에 쉽사리 투자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손해보험을 든다고 하지만 항해에서 침몰을 전제하면 손실금이 막대할 수밖에 없어 회사존폐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1848년 이전까지는 연안수송선조차도 풍향에 의존해야 하는 범선(帆船:Sailing ship)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증기선으로 바뀌는 것이 1848년이었고 이때부터 1899년까지 이 스팀선도 10,000톤을 초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험을 걸수 있는 서양인이라 할지라도 장사속에서 바다횡단사업은 망서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원이 전무한 한반도에 무슨 잇속이 있어 기어코 한반도에 가야할 이유가 분명치 않고 이처럼 태평양횡단에 위험을 감수해야 함에도 한반도 왕래가 필요했다는 것은 도저히 서양인들의 장사잇속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에 코리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설정한 서양인들의 조작질이다.
한반도에 자원이 본래부터 풍부했다면 한반도인들이 해방이후 보릿고개같은 그렇게 궁핍할 이유가 없다.
1868년 독일인 유대계 상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한반도에 입국했다는 사실또한 믿는 것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그가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은 어디서 발생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1866년 한반도 대동강에 침입하였다는 미국 상선(商船) 614톤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는 작은 강(江)이나 연안(沿岸)용인 187톤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 제너럴셔먼호는 본 블로그 글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에서 언급하였듯이 1874년 1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피어곶(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생각해보라.
이런 작은 연안용으로 어떻게 태평양을 횡단했다고 여기는 것인가.
모두 서양인들이 무차별 뿌려놓은 헛된 거짓 책자들에 의해 무한 마취가 된 상태에 있어 그렇다.
병인양요(丙寅洋擾)사건에서도 프랑스의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가 양력11월17일에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도합 800명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강화도 부근 물치도(勿淄島)까지 진출했다고 한 사실을 어떻게 한반도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프리깃함이라고 해봤자 1,092 tons 급 범선이다.
이역시 장소는 미주리강 주위에서 찾아야 할 이야기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이지만 이 프리킷함도 연안선을 벗어날 수가 없는 함선이다.
명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비로소 안전하게 여행객을 싣고 태평양을 횡단하였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완성되고 난 후부터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옮다.
이때부터 안전성이 확보되었다는 이야기다.
안전성이 확보되었다는 것은 함선을 수리, 수선할 수 있는 해군 공창(工廠)이나 조선소는 전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있었다는 것도 이에 대한 이유이다.
일찍부터 본 블로그 글에서도 밝혔듯이 본격적으로 태평양 횡단수송이 가능한 시기는 1919년 부터였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때 여객선 규모가 보통 20,000톤을 상회하는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 태평양횡단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를 거꾸로 볼 수밖에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코리아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정확하게 설명 한다면 한반도를 가기위한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코리아를 향해 미시시피강을 연안용 범선이나 스팀선으로 항해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순리의 역사이다.
이같은 글쓴이의 주장은 아마도 앞으로 진보된 우리나라 근대사를 향후 밝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용할 키 포인트가 될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1667년 제작된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의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란 제목의 지도가 지금의 미시시피강유역을 중국바다로 인식한 것은 서양인들이 미시시피강을 중국바다도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미시시피강유역이 굉장히 넓었기 때문에 강으로 받아들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 강 주위에 중국이란 고려역사주체가 오래전부터 존재한 것이며 그래서 코리아에 들어가려면 일단 미시시피강을 건너야 했다는 것을 서양인들 상식을 지배했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2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되고 난 후 미국위정자들 생각에서 반드시 고려가 있었던 북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나 생각할 수 있도록 역사를 만들어야 했고 오늘날 우리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한반도로 가려면 건널 수밖에 없는 미시시피강이 아니라 태평양으로 인식하도록 근세기에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철저하게 조작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양인들이 특히 19세기초부터 한반도와 열도를 부지런히 찾았다는 것은 이러한 프레임을 깔기 위함이며 당시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적 발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서양인들의 항해 능력을 한껏 부풀려놓고 실제로 불가능했던 항로길이를 엄청나게 고무줄처럼 늘려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그들의 독특한 항해술은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판단해볼 때 일엽편주 조각배같은 것을 몰고 포르투갈에서 인도 캘커리까지 무한 항해했다고 하는 것이며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인을 처음만났다고 하는 열까지의 거리가 장장 30,000km 를 마음대로 넘나들었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가능한 이야긴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같은 허황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서양인들이 자랑하는 항해시대라는 것이다.
하여튼 근세사판단에서 주요한 자료가 될 수밖에 없는 잘못된 항로인식문제와 서양인들의 무조건적 바다횡단 인식문제는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채핀가의 단절
본 블로그 글 "HANCOCK과 HANKOOK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3"과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에서 인용하였던 1846년에 제작된 북아메리카대륙 지도“Chapin's Ornamental Map Of The United States”를 그린 사람은 바로 장서표(藏書票,Bookplate)조각사로서 15세에 판화 제조술을 익히고 뉴욕(New York)으로 가서 20년간 이일에 종사하였다고 하는 월리엄 채핀(William Chapin:1802-1888)으로 알려진다.
그 역시 서양인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동부해안도시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아버지 나단 채핀(Nathan Chapin:1766-1826)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카스트너(Elizabeth Castner:1776-1854)사이에서 태어나 성년이 되었고 엘리자베스 바세트(Elizabeth Bassett:1798-1884)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존 바세트 채핀(John Bassett Chapin:1829-1918), 토마스 해버 채핀(Thomas Heber Chapin:1831-1853), 윌리엄 카스트너 채핀(William Castner Chapin:1833-Unknown), 안나 엘리자베스 채핀(Anna Elizabeth Chapin:1836-1916), 해리엣 엠 채핀(Harriet M Chapin:1838-1926)등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채핀이라는 똑같은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한반도에 1910년에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는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1851-1928)은 당시 코리아인들의 생활모습을 상당수 촬영하고 그것을 사진첩으로 엮어 출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사진첩은 질곡의 한반도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사진들은 버릴 수조차 없게 사슬처럼 엮여져 있는 것이다.
위 지도제작자 월리엄 채핀(William Chapin)과 같은 채핀가의 사람인 윌리엄 W. 채핀은 뉴욕 로체스터(Rochester, New York)출신이며 그의 아버지 루이스 채핀(Louis Chapin:1809-1894)은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 Massachusetts)출신으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지도제작자와 사진사 직종에서 볼 때 같은 업종에서 채핀가란 같은 친척일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북아메리카대륙에 있는 서양인 특히 미국인들은 전부 스스로 이민자라고 하였으니 출신지역들이 주로 뉴욕주, 매사추세츠주, 펜실베니아주로 좁혀진다.
전부 근거리에 접하는 주이기 때문에 같은 지역이라 할 수가 있으며 이들 가계 또한 한국인들처럼 수천년 뿌리가 깊지 않아 성씨의 파가 많은 것도 아니라면 거의가 친척이고 가까운 가계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이상한 이야기다.
두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루스벨트가처럼 정치가 집안이 아닌 대신 채핀가는 인쇄술이나 사진기자 업을 천직으로 하는 가계임을 알 수가 있어 어쨌든 서로 소통되었다고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미국인들의 당시 힘이라는 상징적인 것이 곧 거대한 자본시장 뉴욕울 말한다.
현재 난무하고 있는 18세기의 잡다한 책들도 발행지가 거의가 뉴욕이다.
뉴욕을 지도제작사나 사진사들이 대거 진출한 곳임을 알 수가 있다.
미국인들의 직업적으로 활동지역의 중심지 또한 뉴욕이다.
때문에 뉴욕에서 활동하던 미국인들은 스스로 선진문명에서 길들여 있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방문했다고 하는 윌리엄 W. 채핀도 뉴욕에 적을 두고 코리아에 왔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뉴욕은 상업중심지로 또는 금융자본의 중심지로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어쩌면 뉴욕은 여론 향배를 가름하는 곳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은 황색언론들이 활개를 쳤던 곳이니 하는 말이다.
월리엄 채핀(William Chapin)과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의 같은 성씨에서 채핀가의 계보를 찾아 친척임을 밝히려 해도 밝힐 수가 없다.
한반도를 찾은 채핀이 본 철도시스템은 북미서부를 가르킨다.
한반도를 찾았다고 하는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은 사진사로서 미국국립지리학회가 1888년 창간한 내서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Society)의 일원이 되었고 이 잡지가 1910년부터 칼러 사진을 게재하기 시작한 때에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만든 사진첩의 제목이 바로 “외국 땅과 사람 흘켜보기(Glimpses of foreign lands and people : William Wisner Chapin's early photographs of Korea)”라는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냥 '흘켜보기"와 '땅, 사람'정도 이상의 단어가 보이지 않음에도 왜 한국과 중국이라고 해석하는 것일까?
당시 사진첩을 출판하기 위해 제목을 선정함에 있어 비록 코리아와 중국사람들을 촬영했다고 하겠지만 그저 단순하게 보아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흘켜보기"라는 의미도 '정확하다' 또는 '진실하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의 문구이다.
이상한 것은 한반도 사람들이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비록 그가 찾았던 곳이 한반도로 알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위 제목만을 보면 그냥 외국이라고만 하였을 뿐인데도 기어코 "중국"이나 "코리아"란 이름을 붙여 기정사실화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foreign land" 또는 "people"이라고만 하였다는 것은 사진사 채핀이 외국 여러나라를 다녔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가 실제로 태평양을 건너 열도에 갔다가 한반도에 건너가고 다시 북쪽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는 것이다.
왜 우리 한반도의 사람들은 당시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이 분명코 한반도를 방문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이것은 아니다.
당시 중국이나 코리아란 명칭을 그들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약 정말 한반도로 여행한 것이라면 왜 지리특성인 반도를 말하지 않았을까?
그가 촬영한 곳이 한반도라는 것은 촬영된 사람들이 한반도 사람과 비슷하다고 하여 한국사람이고 한반도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빼버린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흘켜보았다고 하는 서양인들이 스스로가 그냥 외국"foreign land"이라 하였음에도 우리 한반도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 그냥 외국이라 한 것은 바로 한반도 코리아라고 꼭 집어 일깨워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이는 것이니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막연한 것일 수밖에 없는 오류가 있음에도 한심하다는 것은 이 사진의 촬영지가 실제로 한반도인지 아닌지의 명확한 판단요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구성원 모두가 기존 역사에 대한 비판력이 없으니 판단력도 떨어진다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형편에서 이사진들의 실체도 모르면서 너도나도 인터넷에 마구 뿌려놓고 있는 것이다.
마구 뿌려진 사진들은 아마도 후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유구한 역사가 존재했다고 한들 우리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때 어느누구에게도 역사가치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한반도 역사도 그렇지만 이러한 서양인들의 의도된 사술에 우리가 끌려가고 있다는 현실이 더 서글픈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메스미디어까지 이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세계적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가 ‘경술국치’ 직후 발간된 1910년 11월호에서 한국 특집 기사를 톱으로 다뤘다" 하면서 사진기자 윌리엄 W. 채핀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한국이 처음 알려진 것처럼 자랑스럽게 기사화한다는 사실이다.
글쓴이가 볼 때 절대로 자랑스럽다(?)고 볼 수 없는 불량한 사진들이 다수가 발견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불만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글쓴이의 지적은 1910년에 윌리엄 W. 채핀이라는 사진기자가 실제로 한반도를 방문했다고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논박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그가 태평양을 횡단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사람이 한반도에 찾아왔다고 하는 나이가 1910년이면 거의 59살 때인데 당시 나이로는 무리가 있었을 법한 머나먼 태평양을 횡단하면서까지 한반도에 기어코 찾았을 이유가 그들에게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설마 일제 탄압때문에 힘들어 하였을 한국인을 위해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칼라사진을 처음 게재하면서 사진잡지를 팔아야 할 중대한 의무를 안고 뉴욕에서 회사비용으로 코리아에 왔을 테니까 인도적인 문제는 논제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 사진만 보더라도 사진 촬영을 위한 사진임을 알 수가 있다.
첫째로 아마도 정책적인 것이거나 새로탄생한 회사 홍보책자에 끼워넣기 할 수있는 사진일 수 있다.
59세의 나이아지만 그가 건강하여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태평양을 건널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 수 있는 이야기다.
한일합방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역사가 자리를 틀고 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 사진사는 한일합방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 했다는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당시 일제라고 하는 일본을 도우려 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의 사진들 다수가 코리아란 사람들의 빈곤한 생활모습만을 중점적으로 촬영하여 그처럼 낙후한 이유가 일찍부터 서양인들이 요구한 개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것이고 때문에 일본에게 합방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는 필연적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프로젝트 작업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는 가정도 얼마든지 세울 수가 있다.
요점은 일제가 뉴욕을 근거로 하던 미국인가 아닌가에 대한 답이 필요할 뿐이다.
그가 촬영한 어두운 사실들이 여론에 공개된다면 일단 코리아 정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일본정부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 합방자체를 용인하는 여론이 확산되는 정점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Japan in 1909 on Japanese liner Tenyo Maru. 1909년 덴요마루를 이용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열도로 가 열도에서 한반도 부산에 도착하여 흘켜 본 것이 부산 부두의 하층근로자, 막노동꾼, 나무지개를 맨 사람, 짐을 나르는 사람,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면 달려드는 어촌사람들, 신작로를 넓히고 있는 일꾼, 가래질하는 사람, 삿갓 쓴 농부, 젖을 내 놓고 있는 농부의 아내, 가난한 벌거숭이 아이 등의 모습에서 빈곤함과 낙후된 모습만을 찾았다는 고의성이 분명하게 있다.
이 사진들은 누구에게 유리했던 것일까?
특히 사진상의 개인 성향이라고 한다면 순진한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불량스러운 사진을 집중적으로 촬영한 것은 그의 성적도착증과 페티시즘(fetishism)시각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긴 시간동안 촬영했을 법한 기차간에서 촬영한 먼거리의 사진들은 거의 볼 수가 없다는 점도 무시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눈에 알 수 있는 지형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근거리에서 촬영한 도심지 모습인데 그냥 흘켜본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어두운 구석구석 생활내면을 속속들이 촬영했다는 사실에서 제목과 동떨어지는 이야기다.
그가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흘켜보는 것 중에 그래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 것은 당시 코리아의 철로시스템이 일본시스템과 똑같다는 사실과 또는 미국기차와 같은 차량을 사용하고 식당칸도 있었다고 한 사실이다.
그런데 위 사진에서 보듯이 그가 촬영한 기차차량이 정차한 곳에 이상하게도 중국인과 티벳계 사람들이 보이지만 한반도 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
그의 사진 설명중에도 일본사람들만 기차에서 볼 수가 있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지만 실제로 일본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희한하지 않는가.
정작 일본인들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910년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경부선이 1901년부터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고 1904년에 일부가 완성되었으며 1905년에 들어 서울-초량 간 철도까지 개통되었다는 사실들이 자료등에서 나타나 분명하지 않다 하더래도 경부선이 존재했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일제가 독자적으로 부설권을 가졌다고 하여 철로를 놓을 수 있는 기자재를 생산했던 것은 아니며 미국철강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기차와 똑같은 차량이 서울에 운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일제와 미국이란 경제권이 동일하다는 놀라운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가 한 역할은 한반도에서 역사만들기에 동원된 브로커 역할 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현재 한반도 역사가 만들어진 실체이다.
서문에서도 잠시 이야기 한 것이지만 본 블로그 글"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에서 1914년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절대로 태평양횡단을 할 수 없었다고 했고 비로소 태평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은 1919년에 가서야 완성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첫째로 투자가가 안전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어떤 사업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행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비로소 이러한 안전성이 어느정도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는 1919년부터 횡단이 가능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열차차량이 어떻게 한반도로 건너갈 수 있었겠는가.
태평양을 횡단할 수가 없었다면 기어코 한반도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이상한 환경을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가는 형태의 형국임을 알 수가 있는 것으로 일제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영국시스템이고 철도차량은 자연스럽게 미국것이 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 글 "철도 궤로 보는 러시아와 인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2"에서 밝혔듯이 일본철도시스템이라는 것은 바로 협궤(狹軌, narrow gauge)케이프(1067mm:Cape)궤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케이프궤간이 1872년에 영국기술자에 의해 일본철도가 놓였다는 사실과 현재 이 협궤들을 한반도에서 찾아 볼 수 없지만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는 이런 자취들이 남아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1890년에 이 케이프궤간으로 부설된 뉴브런즈윅주(New Brunswick), 뉴저지(New Jersey), 뉴욕(New York)의 펠햄 공원 도시섬 철도(Pelham Park and City Island Railwa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가 있고 서부을 보면 캘리포니아(California), 덴버 트램웨이(Denver Tramway)의 콜로라도(Colorado), 네브래스카(Nebraska)의 커빙톤 콜럼버스 검은언덕철로(Covington, Columbus and Black Hills Railroad), 오리건(Oregon)등이 있다.
또한 캘리포니아(California)에만 보더라도 현재 거의가 사라지고 없다고 하지만 경부선과 같은 시기에 시작한 1901년부터 운영한 로스엔젤레스전철(Los Angeles Electric Railway)가 있고, 1893년에 오픈한 마운트 로우 레일웨이(Mount Lowe Railway), 오렌지 엠파이어 철도박물관(Orange Empire Railway Museum), 태평양전철(Pacific Electric), 포웨이미드랜드철도(Poway–Midland Railroad), 샌디에이고전철(San Diego Electric Railway), 샌프란시스코 시영 철도(San Francisco Municipal Railway)등은 케이프궤간을 적용한 곳이다.
이곳들은 실제로 코리아와 결부시켜도 좋은 곳이다.
만약 코리아가 위 협궤가 설치된 서부에 경부선을 부설했다고 한다면 미국철도차량회사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고 얼마든지 철도차량을 운반할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정말 당시 한반도에 철도부설과 기차차량이 필요하여 이를 위해 완성된 차량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품과 해체한 차량 또는 철도 부설기자재 따위를 수송선에 싣고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것은 장사꾼입장에서는 거의 모험수준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했다면 차량운송에 따른 수송비가 어마어마했을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이것을 식민지 나락으로 곧 떨어질 코리아의 재정상태가 이를 어떻게 소화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야 한다.
대륙정복을 위해 일제가 철도부설권을 쥐고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하는 한반도 철도부설을 자임했다고 하지만 먄약 일제가 당시 재정이 풍부한 미국이 아니라면 턱도 없는 소리이다.
대륙정복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잇속이 아니라면 한반도 철도 부설 따위가 일제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얼마나 기초 경제상식조차 배제한 아둔한 이야긴가.
솔직히 당시 일본열도나 한반도에 철강회사가 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실 듣지 못했다.
그래도 일제가 아무런 이익도 없는 한반도에 철도부설을 하였고 그 모든 비용과 수송에 따른 보험료까지 몽땅 일제가 감당했다고 식민지사관붕신들은 말할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이야기다.
뉴욕사진잡지 기자신분의 채핀이 한일합방에 대한 타당성을 여론화하기 위해 코리아의 어두운 모습만을 촬영한 저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뉴욕은 서부를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일제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캘리포니아를 장악한 멕시코 세력이다.
멕시코 반란세력들로서 이를 제어하는 것은 미국인 자본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때 일제의 식민지 영향력이 미친다 할 수 있는 지역은 멕시코에서 머지 않는 애리조나나 뉴멕시코지역 그리고 텍사스주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의 지배 주체는 오늘날 미국이라 하지 않는가.
앞에서 지적한 사실을 재론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코리아 사정을 들여다 볼 필요성이 있다.
채핀이 촬영한 코리아의 농촌여인들이 젖을 들어내고 있는 모습의 사진들을 보면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코리아인들을 미개인처럼 폄하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하기사 위 게시된 1864년에 일본인을 촬영한 브리티시 귀화인 이탈리안 사진사 펠리스 비토(Felice Beato:1832–1909)의 사진도 보면 미개인 모습이기는 마찬가지다.
서양인들의 인종차별시각이 어느정도인지 할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역사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국민정서에 불손한 자극을 주려는 서양인들의 심리전이라고도 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철도건설 노동자들이 전부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위 게시한 사진에 철도역에 중국인과 티벳인들만 보인다.
코리아 땅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일제의 식민지를 극대화한 것은 바로 서양인들의 농간이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정확히 인식하여 당장 내서널 지오그래픽을 상대로 이와같은 저질적인 사진게시를 문제삼고 이에 대한 사실판단을 할 수 있게 당시 자료들을 정식적으로 청구하는 수순을 밟는 것이 현재 그나마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아시다시피 뉴욕이 어딘가?
황색신문들이 활개치던 곳이니 이런 불손한 사진들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했을 것이고 이를 편집한 잡지 판매수를 높이기 위해 저질적인 사진도 게재하려 했을 것이다.
특히 현재 우리가 채핀사진을 접하면서 가져야 할 자세는 '흘켜보다', 또는 '훌터보다'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분히 흥미위주의 선정적인 것으로 매우 단편적인 사실만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점을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고 이들이 이런 짓거리가 무엇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한사람 채핀이 방문한 서울은 킹 카운티
위에서 채핀이 촬영한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보았다.
물론 기본적인 사실판단에서 현재 한반도에 위 사진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논점에 대상인 것은 확실하다.
본 블로그 글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가 방문한 코리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6”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감히 한반도역사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당시 코리아의 발전된 모습이다.
이 글들의 판단 시기가 채핀이 방문한 시기와 거의 같은 1911년에 방문했던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 :1860-1939)의 글'조선의 모습(The Face of Korea, Duffield)에서 보았듯이 "한국은 세계에서 5 번째로 큰 목화생산국이며, 지금은 육지와 바다에서 교통의 새로운 시설을 보유하고 무역 개방을 하고 있어 급속한 발전을 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였고 더 나아가 "한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생산품이 바로 금(gold)인데 그 나라에는 풍부하다"는 사실을 적고 있는 것과 "우수한 무연탄 석탄 및 기타 광물도 있지만, 아직 활용되는 것은 극소수"라고 한 사실은 당시 자원이 코리아 땅에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는 자원을 찾아 현재 쓰고 있는 량이 전체 매장량에 비해 극소수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코리아"는 본래부터 자원이 빈곤한 한반도일 수는 없다.
이렇게 넘쳐나는 자원이 코리아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은 자원이 풍부한 미국대륙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서양인들은 코리아에게 줄기차게 개방을 요구한 사실을 정확하게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개방주장이 코리아 위정자들에게 막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강압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하였을까?
에멀리가 코리아를 방문한 1911년이니 일제합방한 익년이다.
일제 합방이라 할지라도 세계무역국으로서 기반 인프라가 손색이 없다 한것이다.
일제라는 것은 바로 소위 프런티어(Frontier)정신을 부르짖는 세력으로서 즉 뭐든지 보이는대로 빼앗고 장악하려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행동을 주문하고 독려하였을 것이지만 이 역할은 철저하게 자본에 동원된 용병이었을 것은 틀림없다.
1852년부터 골드러시가 서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다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때부터 서부개척자들은 역마차를 타고 마구 질주해 들어간 곳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이다.
이곳들은 코리아 땅이어야 맞다.
이미 최근 본 블로그 글에서 코리아 압록강은 미시시피강 상류라 한 사실과
2009년에 쓴 본 블로그 글"오페르트가 본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tower mount)
http://blog.daum.net/han0114/17050552"를 시작으로 하여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 "아무르 강(Amur river)과 코(nose)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0" 그리고 "하니 피크(Harney Peak)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1"까지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기점으로 코리아가 존재한 사실을 알렸던 사실을 글쓴이에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10년까지 어쩌면 미국인(화이트)들은 서부전체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서부지역을 뒤늦게 손아귀에 넣었다고 하는 것은 시간별로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역사사실에서도 몇가지 확인해주는 것도 있다.
이때도 루스벨트는 뉴욕황색신문들을 동원하여 여론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볼 수 있고 코리아의 황실은 이에 압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한반도를 일제가 점거했다는 사실은 전부 한반도역사를 통해 알았던 사실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설이 애초부터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기전까지 미국대통령의 제도는 현재 대통령제도와 같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알 수 있어야 하며 특히 시어도어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가 재임하면서부터 경제권을 가진 정부수반을 넘어 권력기관으로 변하였고 권한이 막강해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분명한 것은 당시 실권 없는 황제가 별도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 황제가 때론 조선순종(純宗:1874-1926,재위:1907-1910)이 되었다가 때론 일본다이쇼왕(大正,1879-1926,재위:1912-1926)이 되었다는 사실도 본 블로그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인데 어쨌든 제국의 모양새는 유지시키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조선황실과 별개로 고려(高麗)황제가 존재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동서양이 자본을 쥔 서양세력들에 의해 확실히 나눠지면서부터 생성된 혼란으로서 이상하게 빅토리아여왕(Victoria,1819-1901,재위:1837-1901)이 사망하고 난 후부터 시어도어루스벨트가 모든 권한이 강해지면서 각종 충돌을 야기하고 중미와 남미등에서 각종 반란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기존 고려황제를 바탕으로 하는 질서자체를 흔들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다.
1910년이라면 조선은 이미 서양세력들에게 장악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고려 또한 이 같은 경제자본압박에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코리아 즉 대한제국이 그나마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 많은 영역이 이때 감소된 상태였을 것이다.
앞에서 채핀가의 계보를 따지면서 분명 인위적으로 단절된 사실을 지적 하였다.
이것은 가상의 인물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니면 한참 뒤 촬영한 것을 한반도라고 속일 수도 있다.
실제로 코리아를 방문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한반도를 방문한 사람이 채핀이란 똑같은 성을 가진 사람인 것은 분명한데 어떤 사람이 진짜 서울을 방문했을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강력한 지배자나 통치자에 의해 변질될 수밖에 없는 역사란 맹점은 결정적인 것을 누군가가 숨겨버리고 알 수없게 만든다면 그것을 찾아 되돌려놓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라고 하여 병합을 일제한 것으로 역사기록에 나타나지만 이를 한반도 역사가 아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미국이 서쪽 코리아까지 점령하면서 이때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사실상 점령지라고 할 수 있는 서부에 미국인들의 인구실태조자를 하지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이 아니라 고려(코리아)가 있었던 서울에 과연 미국인이 얼마나 거주하고 있는지가 궁금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1870년부터 미국은 서부인구조사를 실시하였고 한일합방시기인 1910년에도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특히 워싱턴주만 5회째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Index to the 1910 population census schedules comprising 48 states, two territories (Arizona and New Mexico), Puerto Rico, and Military and Naval (in Philippines, Hospitals, Ships, and Stations). The index has been created by FamilySearch and Ancestry.com.
위 영어자료에서는 1910년에 미국전지역 동시에 실시된 인구조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48개주와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지역을 포함하면서 카리브해의 푸에르코리코, 그리고 육군과 해군(필리핀, 병원, 선박, 그리고 주둔지)전체를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The United States Census of 1910 is the fifth federal census of Washington State since the creation of Washington Territory in 1853. Enumerators were given one month, starting on April 15, 1910, to travel around the state and collect census information.
문제는 이때 1853년 워싱턴주가 설립되고 난 후 5번째 맞는 연방정부인구조사를 1910년 4월 15일부터 실시하여 1개월간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위 영어자료는 알리고 있다.
1910년 인구조사에서 워싱턴 주(Washington)만 보면 1870년에 23,955명이던 미국인 수가 1900년에는 518,103명이었으며 1910년에는 1,141,990명으로 10년만에 거의 배가 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워싱턴주 킹 카운티에서 미국인들 인구를 조사한 사람의 이름이 다름이 아니라 바로 뉴욕 온타리오(Ontario, New York)출신인 당시 나이 37세의 윌리엄 W 채핀(William W. Chapin:1877~)이다.
1910년 한반도를 방문한 뉴욕 로체스터(Rochester, New York)출신 윌리엄 W. 채핀(William Wisner Chapin:1851-1928)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때문에 비교될 수밖에 없다.
William W. Chapin
윌리엄 W 채핀(37)
Birth: abt 1877 - New York
Residence: 1880 - Seneca, ontario, New York
[Washington, DC: Micro-Film Lab., Bureau of Census, [195-?] 1 microfilm reel]
여기서 냉정하게 보자면 첫째 1910년 한반도에 찾아 코리아의 암울한 모습만 촬영했다고 하는 윌리엄 W. 채핀(William Wisner Chapin:1851-1928)과 1910년 킹 카운티(King County)에 인구조사로 방문했다고 하는 윌리엄 W. 채핀(William W. Chapin:1877~)과의 인물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과연 동일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반도에 찾아왔다고 하는 윌리엄 W. 채핀은 당시 나이가 59살 때인 반면에 킹 카운티에 방문한 윌리엄 W. 채핀은 당시 37세이기 때문에 나이가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앞에 채핀이 한반도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조작된 사진을 기획적으로 몇 장의 채핀사진을 촬영하고 이것을 증거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왜냐하면 서울을 방문한 동기가 후자가 인구조사를 위해 킹 카운티를 찾았다고 하는 사실이 더 크고 합당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인구조사는 여행을 담보한다고 보았을 때 사진 촬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때 인구조사에 나타나는 당시 킹 카운티(King County)의 미국인 인구는 291,452명이다.
결문(킹 카운티, 경성, 서울)
한반도를 찾았다고 하는 채핀은 경부선 터널이 매우 긴 터널이 있었다고 하였다.
채핀이 경험한 터널길이가 얼마나 되기에 길었다고 하였을까?
하지만 경부선 철도 터널 역사를 보면 1904년에 경의선 아현터널(382m)과 의영터널이 최초의 터널이라고 하였으며 1905년에 완설된 경부선 서울에서 초량간의 상선에서 단선 터널이 있었다는 것이 고작이다.
경부선에는 터널다운 터널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을 통과하는 터널정도가 되면 실로 길다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알려지기는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긴 터널인 캐스케이드터널(Cascade Tunnel) 길이가 12.7km 로 알려지며 이는 북서부 워싱턴주 중앙부를 가로 지른 것으로 1892년 그레이트노던 철도(Great Northern Railway)가 시작하여 스티븐스 고개(Stevens Pass)를 넘어 대륙횡단 철도를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것은 로키산맥이 있는 지형적 상황에서 터널이 길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찾은 채핀의 이러한 언급 역시 한반도 지형과 차이가 있고 미국인들이 길다고 여길 만큼의 긴 터널이 1905년 완설된 경부선 터널역사를 들춰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 채핀이 찾아 사진을 촬영했다고 하는 정확한 역사장소가 더욱 한반도가 아니라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앞에서 그가 이용한 철도 승객들이 거의가 일본사람이라고 한 사실에서도 이러한 모순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설령 한반도라 할지라도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본인만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동양인이 서양인을 볼 때 정확하게 어떤 나라사람인지 알 수 없듯이 서양인들의 시각에서도 이와같을 것인데 동양인이 아니라면 몰라도 실제로 열도일본 동양인이라고 하면 같은 동양인들 속에서 일본인과 코리아인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일본인이라 함은 한국인과 현격하게 구분될 수 있는 미국인이거나 아니면 멕시코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한가지 1911년 코리아를 방문한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가 말처럼 목화수출에서 기반시설을 갖추었고 세계무역국으로서 전망을 좋게 하였듯이 조선에서 사회기반시설이 그렇듯 형편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철도시스템역시도 일본시스템과 같다는 사실 역시 위에서 분석하길 협궤 케이프(1067mm:Cape)궤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플렛홈에는 수돗물이 흘러나와 너나 없이 손도 씻고 얼굴도 씻는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코리아의 사회모습도 그렇듯 경직된 것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채핀이 방문한 시기가 더운 날씨가 지속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 일본인들은 얼음물을 함부로 마시지만 그들은 더워도 끊인 차만 마셔야 했다고 하니 당시 풍토병같은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한반도에 풍토병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쨌던 채핀의 이야기에서 쉽게 조선인과 구별되는 일본인의 실체가 참으로 궁금한 것이다.
또한 그가 탄 기차 차장 밖에는 산에 나무가 없다 했는데 솔직히 북아메리카대륙 남서부 지역은 온대지방처럼 많은 나무가 식재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한다.
1910년이라면 본 블로그 글 "흑조(黑潮)의 진실이 주는 일본의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9"에서 멕시코 혁명가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1830-1915,재임:1876-1880,1884-1911)가 무쓰히토왕(睦仁,1852-1912,재위:1868-1912)과 흡사하다 하였고 또한 경부선 역사를 보아도 1901년 6월 일본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세워, 8월 21일에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착공식을 거행했다고 알려지는 것과 더불어 일본은 영국에서 설비자금을 빌려와 미국이 가졌던 부설권과 건설 장비를 구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디아스가 근 30년간 장기 집권하던 포르피리아토(Porfiriato)시대에 외자는 주로 미국에서 들어왔지만, 디아스가 권력 유지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영제국과 독일 등 유럽투자를 통하여 미국의 영향을 완화한 덕분인 측면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후의 역사는 현재 멕시코가 존재하는 것과 맞물려 수많은 권력자들이 바뀌는 혼재속에 혼란스러운 과정이 존재한다.
어쨌거나 일제는 미국 자본주이어야 맞다.
미국이 너무 포괄적이라면 루스벨트가라고 하고 싶다.
하나 지금은 일제의 모습을 미국에서는 찾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세계민주주의 정치 지도국으로 탈바꿈한 상태에서 루스벨트가가 장악한 시대의 대통령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루스벨트가의 양 대통령이 추구한 기본 원칙은 미국에게 법이나 신념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지는 코리아에 대한 시각을 정확하게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앞에서 채핀가를 이야기 했지만 지도제작자 월리엄 채핀(William Chapin)의 아버지 나단 채핀(Nathan Chapin)역시 부모들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채핀가(Chapin家)라 할지라도 한반도에 찾아온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이 이 채핀가와 정확하게 친척인지 아닌지와 더군다나 킹 카운티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한 채핀역시 이러한 관계에서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채핀이 찾았다던 서울이 과연 킹 카운티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좀 더 신중해야 할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본질적으로 서울 찾았다던 동기는 분명 인구조사 때문에 킹 카운티를 방문했다는 사실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느낌은 없지 않다.
어떤 역사사실도 동기와 원인을 제공하지 않으면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흘켜보는 한반도 사진의 모습들은 어딘가 주요한 어떤 역사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것들은 그것들을 알리려 하지 않는다.
나이가 비록 차이가 나지만 채핀이란 성을 똑같이 사용하는 두 사람 모두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연결된다고 하고 싶다.
대신 윌리엄 W. 채핀이라고 하는 이름을 사용하는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한사람이 가상의 인물인지도 알 수가 없다.
1910년 똑같은 한일합방시기에 한사람은 한반도 서울을 찾았다 하고 한사람은 북아메리카대륙 워싱턴주 킹 카운티에서 인구조사를 했다고 하는 것을 대입하면 혹 킹 카운티가 경성이라고 하는 서울이 아니었는가에 대한 의심은 가질만 할 것이라고 본다.
본 블로그 글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 "에서 말한 조선 한성과 다른 고려 수도 서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글쓴이의 축적된 세계삼한역사에 대한 특별한 감성도 작용한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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