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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
흑룡강-미주리, 압록강-미시시피강 상류, 중류 하류-황하, 또는 야루(Yalu)
글쓴이:한부울
머리말
역사고찰(歷史考察)-서양인들의 전진기지 나가사키 역사지우기
역사고찰(歷史考察)-일본역사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사서(史書)기록분석
서양인들이 본 꼬라이의 압록강
[1]꼬라이 강 넓이 3레구아
[2]꼬라이 강 하구넓이 10레구아
[3]임진왜란에는 일본열도와 한반도가 없었다
마무리
머리말
서양인의 자본주의세력들은 마침내 하나의 체제를 쓰러뜨렸다.
그때부터 근원도 알 수 없는 엉터리 역사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네셔널적인 푸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체제는 하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인류사의 근본이라 해야 맞다.
바로 세계삼한역사이며 코리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시발점으로 한 부르주아(bourgeoisie)세력들의 역사전면등장은 하나의 체제에게는 불행한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사악한 물질을 추구하는 세력들임에도 시민민주주의를 내세우는데 현혹되어 기존 인본주의체제를 통째로 흔들었던 것에 쉽게 용인했던 것은 분명하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를 잉태하였고 거대한 자본을 양산하면서 기존 역사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 끝내 자본을 축적한 세력들이 마침내 세상을 차지한 것이다.
시민혁명을 비판적으로 볼 때 대다수의 일반서민 무산계급들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시대가 변한다고 하였지만 하층계급에게 또 다른 세력계층을 만드는 것으로서 그들만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한 혁명이었던 것에서도 모순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는 제3신분이라고 하지만 전 인구의 96% 의 대다수가 농민이며 아니면 고용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인구 2700만 중 왕족과 성직자가 10만명 그리고 제2신분인 귀족 수가 40만명을 합하면 50만명으로 전체의 1.85%를 나타내며 대다수 무산계급까지 포함한 비율 96%를 더하고 100에서 빼면 2.15%정도 약 58만명이 남는데 이것은 당시 상공업층 부자(富者) 즉 실제 부르주아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자본력을 가동시켜 시민이란 이름으로 군중을 동원하고 혁명을 부추긴 면이 없지 않다.
즉 봉건제 1.85%와 자본제 2.15%와의 권력 교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봤자 일반서민 무산계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혁명임에도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최고 부자 자료를 보면 스위스은행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uisse)의 2014년 연례 보고서를 인용한 수치에서 우리나라 국민 중 44만8000명이 세계 상위 1%, 순자산 79만8000달러(약 8억6000만원)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부자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알려진다.
세계 상위 1% 부자 4700만명 중 1800만명이 미국에 몰려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인구 32,258만명이라 할 때 전체 인구의 5.6% 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우리나라는 전체인구 4904만명에서 비율은 0.9% 정도이다.
어쨌거나 체제변화는 1.85%의 봉건제의 왕족과 성직자에서 2.15%의 당시 부(富)를 축적한 상공업층 중산계급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하지만 시민은 농민이나 무산계급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은 부르주아세력들로부터 동원되었거나 군중심리에 의해 발효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봉건제의 지주가 아니라 자본체제의 자본주를 택했다는 것이며 왕권에서 자본권으로 권력교체시대를 맞이 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이야기 한 프랑스혁명의 설명에서도 나타나는 이야긴데 억압되었던 무산계급층이 아니라 유대인에게는 사적인 해방이며 기회라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 마음이 쓰라린다.
어쩌면 인류물질발달사가 주는 역사흐름에서 하나의 역사는 할일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자본주가 생성된다는 것은 봉건주의 제왕의 권위 보다 더 강력한 또 하나의 물질권력이 만들어진 결과로서 인류가 그것이 주는 위험을 추호도 경계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물질이 주는 매혹과 편의성에 완전히 도취되어 기존 창조적인 역사를 망각했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만큼 자본이라는 무기는 당시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생각할 때 1815년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약 200년이란 짧은 시간의 역사가 그 이전 인류사 전체를 완벽하게 흡수한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물질을 택함으로서 그것에 댓가는 톡톡히 치루었다.
제1차대전에서 발생한 쌍방 희생자가 3천만명과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인명 손실이 발생한 쌍방이 합쳐 7천3백만명이나 되어 두 큰 전쟁의 희생자숫자가 합계 거의 1억명이란 숫자의 인명이 손실된 것이다.
하지만 이 대전뿐만아니라 서양인들에게 학살당한 숫자를 합하면 역사전쟁으로 인한 손실된 인명은 배를 넘는 계산이 나온다.
2차세계대전 총 인구 당 손실비율이 3.0~3.7% 로 나타나는데 1차세계대전 비율 1.61~1.92% 보다 증가된 수치이다.
이와같이 1,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은 역사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참혹한 시련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19세기부터 극대화된 자본력과 정비례하여 과학의 발달은 집단살상무기를 양산하게 하고 점점더 파괴력이 커지고 있으며 이제 지구전체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가공할 무기가 생산단계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만약 현대 세계대전이 벌어지면 사상자가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질문에 전체 인구손실 비율자체가 의미 없는 것으로 1.2차 세계대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물질이 주는 공포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오늘날 인류역사는 자본을 축적한 서세에 의해 충분히 파괴된 상태에서 새로 구축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부한 물질을 바탕으로 인간의 말초적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자본은 인본주의를 파괴하기에 충분한 무기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박식한척하여도 이미 자본의 시녀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부를 추구하고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그것들을 딱히 제어할 방법이 특별하게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도덕을 화폐가치로 평가하고 그것을 축적하는 인간사회가 된다면 모를까 방법이 없다.
물질만능시대라 하면서도 스스로 노예를 자청하는 시대이니 만큼 물질향유에 빠진 인간사회전체는 이미 정상이랄 수가 없다.
현대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질향유를 위해 정치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력은 자본력과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가진자와 못가진자가 극명하게 분리된다는 사실은 프랑스혁명의 모토인 인간평등원칙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인간만 차별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과거 식민지로부터 탈피한 국가 역시 이러한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경제력이 곧 국력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특히 한반도 구성원들은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이니만큼 강대국 등쌀에 힘겨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삼한이 2차례 큰 역사전쟁에서 패배하였기에 감내해야 할 일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주가 지배하는 세상은 과거 봉건주의 제왕제도와 다를 것이 없다.
자본주의귀족이나 봉건귀족이 무엇이 다른가.
요사이 한국과 일본사이를 왔다갔다 하는"L"사를 보면 통혈히 느낀다.
자본부르조아세력들이 봉건주의 제왕들의 억압과 탄압이 싫어 인간평등원칙을 외쳤고 시민혁명을 일으켰지만 오늘날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결국 부를 축적한 자본주르조아들은 왕권을 사라지게 하고서도 과거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여 이제 제왕을 대신하면서 없는자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과거 하나의 체제시대때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며 인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다.
역사고찰(歷史考察)
서양인들의 전진기지 나가사키 역사지우기
오늘의 주제는 바로 압록강의 실체을 밝히는 것이다.
압록강이라 하니 그 지명에 참으로 많은 역사사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임진왜란 당시 압록강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하면서 스페인어 번역의 대가인 박철교수의 저서「제8장 16세기 서구인들이 본 꼬라이」를 때마침 운좋게 접할 수가 있었다.
평소부터 번역자들을 언어학적으로 선구자라 판단했기 때문에 무척 존경하였던 글쓴이가 이 번역본에서 특히 임진왜란 당시 꼬라이의 상황이 세세하게 적시된 것에서 많은 기대감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번역본을 도서관에 의뢰하여 볼 수 있었다.
특히 역사번역서는 우리나라 문화도 익숙해야 하지만 여러언어를 우리문화와 맞게 번역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는 작업이다.
문제는 포르투갈어이든 스페인어이든 간에 원본을 번역하는 사람의 역사적인 양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번역서의 가치를 논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반도 역사를 진짜 역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번역한다고 할 때는 이 번역서 또한 뻔한 것이다.
물론 역사번역문제에서는 번역자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진실을 알 수 있는가가 중요하지만 그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공정한가 아닌가에 판단도 어렵다.
번역자가 평소 서양 관습적이거나 절대적 지식 자기중심에서 판단할 때 원본 해석이 아무래도 그쪽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번역서에서 이러한 점들을 글쓴이는 늘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번역본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원본(原本)을 기술한 시대적 배경은 1592년-1598년까지 서양인들이 7년전쟁이라고도 하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동안임을 알 수 있어 한반도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
이 번역본은 주로 예수회선교사라는 신분의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에 의해 기록된 사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이런 종교적인 문제가 특별하게 생각되는데 과연 종교적인 시각을 벗어나 번역자가 객관적인 사실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이 기록들은 분명 편향된 종교적인 의미가 강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해양세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사실을 밝힌다는 문제에서는 종교문제 보다도 해양세력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해양세력이라 함은 바로 해적신분이므로 후세 종교신분으로 감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사들을 왜구라 했고 이 왜구란 명칭은 열도일본인들도 스스로 칭하는 명칭이다.
고서에 보면 중국과 우리나라 연안을 무대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을 왜구(倭寇)라 하였으며 영어역시 "Japanese raiders"라 하여 일본침략자로 풀어놓고 있으며 노략질을 일삼는 도둑집단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라고 볼 때 본 블로그 글"종려(棕櫚), 야자나무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49487"에서 일본열도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화(和:Wa)를 자기 상징처럼 사용하는 것이나 왜(倭:Wa)와 웨기(Waggie)가 잉글랜드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이라는데서 충분히 음으로 전달된 왜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서 왜구와 해적은 결코 다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왜구라는 것은 서양인들 해적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해적들을 따라다녔다는 예수회선교사라고 한다고 하여 그들을 종교인으로만 숭고하게 볼 수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들이 활동범위가 동서양을 오르내렸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들은 선교문제라고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이 집거한 서양이라고 하는 유럽과 동양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간의 지리적인 엄청난 거리한계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기어코 왕래했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들이 일본이라는 전진기지를 삼고 왕래하거나 항해를 했다고 하겠지만 동아시아대륙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의 활동반경은 보수적으로 보아도 카리브해를 가운데 두고 왕복항해 했을 공산이 큰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동인도제도는 카리브해가 맞고 결코 서인도제도라 했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엉뚱한 발상 때문에 그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불가사이에 항로를 막무가내식 항해를 했다고 하는 것이며 이를 대항해시대란 이름을 빌어 정당화하는 것이 틀림없다.
서양사는 본래 동아시아대륙을 주인이 없는 곳으로 보았다.
만약 그곳 동아시아대륙에 중국이 있었다면 감히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인도가 그곳에 있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감히 인도양을 마음대로 활개쳤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중국이나 인도는 엉뚱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리아라고 하는 대타타르가 아시아대륙 전체를 영역으로 삼았고 유럽까지 뻗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그들은 숨어지낼 수밖에 없는 비주류인 것이 분명하다.
비주류들은 주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자체를 그들만의 역사로 대체하고 싶은 것이다.
기존 체제에 불만세력들로서 심한 경계와 감시가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했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들어난다.
물론 그들은 왜구라하는 해적신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포르투갈인들도 당시 왜구이며 해적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한발 더 나아가 해적조직체는 종교를 가질 수 업었겠는가.
종교유무는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종교가 있어 그들끼리 충분히 믿고 의존했을 것이다.
포르투갈선교사, 스페인선교사라고 한들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들의 세상이 된 것을...
서양사에서는 무조건 출발지로 유럽대륙의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 스페인의 팔로스(Palos), 잉글랜드의 포츠머스(Portsmouth)로부터 출발하였다 하면 남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너끈히 돌아 인도양 그리고 말라카 해협을 마음대로 누비며 시간이 중요할 뿐이지 아무런 문제없이 동아시아대륙 신중국땅 천진(天津)까지 매번 항해를 거뜬히 해치운다.
그러한 거리가 약 32,000km를 대장정이지만 그들에게는 예수회의 신이 있기에 별 어려움도 없었고 특별하게 실패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역사에서 나올 수 있는 참으로 불가사이(不可思議)한 노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해괴한 항해이야기가 서양사가 된 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항해를 할 수 없었다면 서양사 자체가 존재하기가 어렵다.
온갖 실존했는지 아닌지도 분간 할 수 없는 각종 해적서적과 항해일지등이 그들의 서양사의 사료도 둔갑한 것이다.
누가 알 수 있는가.
항해를 했다면 했다는 것으로 믿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들을 그대로 믿는다면 세계삼한역사관으로는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어진다.
예를들어 15세기 포르투갈이 인도양 캘리컷까지 항해하였던 함선을 보면 고작 200톤에도 못미치는 조각배같은 카라벨(Caravel)이라는 범선이다.
본 블로그 글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1668년 네덜란드 식민지문서 제255호에 나타나는 기록에서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아(core)호"의 정체를 우리는 확인한 것이다.
사실상 이 배는 당시 코리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생사여탈지권(生死與奪之權)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해양세력들에게 가장 극복해야 하는 권위였다는 사실이다.
즉 본래 코리아에서 배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회사가 개입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니면 네덜란드 회사가 코리아에게 이 배를 상납하고 그들의 무역통행을 허가 해주길 기대했다는 것도 있을 수가 있다.
이러한 기록들이 나중에 식민지문서로 만들고 그곳에 끼워넣었겠지만 진의가 변질 된 이야기다.
이미 코리아에서 1,000톤급의 배를 너끈히 건조할 수 있는 기술과 바탕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런 조약한 배를 타고 험난한 항해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항해술 뿐만아니라 항해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해적신분과 비교해볼 때 32,000km 의 항해길을 왕복하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상 그들만의 이야기다.
간단하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비로소 동서간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된 시기가 1869년이다. 그러한 철도개통이 왜 필요했을까 바로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 전이기 때문에 실제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서부해안으로 범선을 타고 항해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각배같은 범선으로 해상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바다환경 때문에 대륙끝 남단을 휘돌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콜럼버스의 착각지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역시 지리학개념이 형편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애초부터 남아메리카대륙 남단을 돌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놓고 그들은 충분히 항해 할 수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항해 방향과 위치를 식별할 수 없어 서인도를 동인도라고 판단했다는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서양인들이 서인도제도라고 하는 카리브해를 1785년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동양지도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에서 그곳을 정확하게 대동양(大東洋)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나침반(羅針盤:compass)을 해양강국인 신라(新羅)가 개발하고 국가기밀로 해적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해양세력들이 어떻게 항로방향을 알았을까.
신라인을 이슬람인으로 또는 중국(키타이인)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양사의 모든 가치있는 자료들은 이미 서양화시켰고 그들이 소유하거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동인도양을 발견하기 위해 나섰던 곳이 스페인 팔라스라고 하지만 이곳은 전통적으로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을 서인도제도라고 하지만 동인도양(東印度洋)이라 함은 북아메리카대륙 동쪽바다를 대동양(大東洋)이라 지칭한 것과 같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할 지명이기 때문에 동인도라는 것은 현재 대서양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지명상에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이를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고 하고 모든 식민지영토를 아시아대륙에 맞추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곧 서양사가 동양사를 정복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대동양에 연결된 카리브해가 왜 서인도가 되어야 할까?
그들은 대동양을 대서양으로 만들고 카리브해를 서인도라 해야만 아시아대륙 동남도서들을 그들이 식민지영토라는 사실을 합리화할 수 있고 그곳을 동양이라고 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그들이 유럽대륙에 서양유럽사를 만들기 위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말임을 알 수가 있다.
아랍은 신라이다.
아랍을 유럽이라고 하니 신라가 빠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현재 카리브해가 곧 동인도(東印度)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사의 모든 기록들은 이러한 원칙을 무시한체 동남아시아 남해를 동인도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동아시아대륙 일본 나가사키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서양인들의 전진기지를 만든 것이다.
그 만큼 일본열도는 서양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역사지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한 것은 그렇듯 나가사키가 서양인의 전진기지이고 보루임에도 미국은 2차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과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유만으로 나가사키같은 서양유적지에 핵폭탄을 투하했다고 하니 얼마나 놀랄일인가.
이것은 서양인이 주는 말할 수 없는 역사 모순이다.
여기서에서 세계삼한역사적인 고찰이 생기는데 바로 미국이 핵포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본래의 역사를 숨기고 나가사키의 서양전진기지란 역사적 근거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핵폭탄투하소문으로 서세가 심어놓은 역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아예 지워버린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에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전시 문화재 보호에 대한 1899년과 1907년 헤이그협약의 원칙에서 특히, 1907년 4차 헤이그 협약의 규약 제 27, 56조와 기타 후속 조약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사실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어떤 민족이든 그 나름대로 세계 문화에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문화재에 대한 손상은 곧 모든 인류의 문화유산에 대한 손상을 의미한다.”[문화유산의 고의적 파괴에 관한 유네스코 선언]라는 규약이다.
때문에 제네바협정에서 고대유적이나 전통유산 유물들이 있는 역사장소에 폭탄을 투하할 수 없는 규정을 미국이 위반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일본인들은 나가사키원자탄 투하로 인한 역사적 유적지가 파괴된 부분에서는 전혀 이의는 물론이고 거론하기조차 터부시한다.
왜 이토록 서양전지기지인 나가사키를 지워버려야 했을까.
문제는 그들의 항해 경로를 믿게 하려면 당시의 기록들을 검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하지만 그것이 곤란하니까 이렇듯 깡그리 지워놓고 검증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서양인들은 해양시대를 통해 절대로 동아시아대륙 열도일본에 오지 않았고 열도 나가사키는 서양전진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에서도 밝힌 것이지만 그들이 유럽대륙을 용케빠져나왔다 해도 아프리카 서부해안 기니해류(guinea current), 벵겔라 해류(Benguela Current)와 만나는 교류수역과, 아프리카 남부의 서안에 짙은 안개 또는 이상강수(異常降水), 갑자기 일어나는 해무(海霧) 또는 강풍, 그것에 더하여 벵겔라해류(benguela current)와 난류(暖流) 아굴라스해류(agulhas current)가 만나는 교류수역들은 무서운 해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등 언제든지 있어 포르투갈인들이 당시 타고 있던 200톤 미만의 조각배를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소용돌이와 거침없는 10~20m 높이의 파도가 시간당 풍속 50~60km 빠르게 몰아치는 광풍 등을 실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세력들은 유럽대륙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착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인도양을 항해하여 캘리컷에 도착했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한마디로 증명될 길이없는 그들만의 역사이며 허구일 뿐이다.
그리고 32,000km 이란 거리는 동양 주척길이 81,000 리(里)이다.
이런 항로길을 마음만 먹으면 왕복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가당찮은 이야기다.
또 한가지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왜 일본열도에 많이 거주했다고 기록에 나타날까.
그것은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당시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포르투갈과 일본인을 기어코 따져본다면 포도아(葡萄牙)라고도 하는 포르투갈(Portugal)의 어원은 라틴어 포르투스 카레(Portus Cale)에서 나온 것으로 의미로 포르투스(Portus)=들어가다(entrance),와(+) 칼레오(caleō)=따뜻하다(to be warm)이고 포르투갈어로 항구를 포르(porto, Litin:portu)라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며 때문에 온화한 항구(溫暖的港口)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처음부터 국가(國家)명칭이 아니라 도시나, 항구지명에서부터 출발된 역사임을 알 수가 있다.
이말은 절대로 현재유럽대륙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 항구는 바로 브라질에서 정착했다고 하는 구아나바라 만(Baía da Guanabara)의 항구를 지칭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브라질에 당도하기 전 패망한 백제세력이라 할 수 있는 포르투갈인들이 유럽대륙에서 쫓겨 간 곳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新羅,B.C57~A.D935) 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며 오늘날 스페인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송(宋,960-1279) 영종(英宗,재위:1063-1067)과 동일한 계보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패퇴시키고 난 후 일부잔존세력들에게 거주지를 확보해주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에서 알아보았듯이 카스티야왕국은“COREA”이름이 발견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삼한역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서양사 중에 하나이다.
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해협(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아프리카 북부극단 세우타(Ceuta)를 정복하였고 아프리카대륙서부는 15세기~16세기에 걸친 포르투갈 사람들의 본격적인 탐험지역으로 알려졌다는 것도 이와같은 역사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에 의한 흑인노예무역가 번성해지기 시작할 때 그 주도세력은 바로 백제패망유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 포르투갈인이라는 이양기다.
포르투갈은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라고 일컫는 시대를 통해 엔히크(Henry the Navigator:1394-1460)와 주앙2세(D.João II:1455-1495,재위:1481-1495)가 지휘한 것으로 나타난다.
15세기 중엽부터는 세네갈(Senegal)과 기니(Guinea)해안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충분히 남적도 해류(south equatorial current)를 따라 남아메리카대륙 동부 브라질로 곧장 상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들이 바로 남아메리카대륙 동부를 기반으로 하거나 거쳐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건너 북아메리카대륙해안으로 들이닥쳤을 가능성이 일단 농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그렇게 볼 때 포루투갈예수회들은 체제반란세력이고 이 반란세력을 도와주거나, 길을 안내했다거나 심지어 전란에 동원되어 같이 행동을 한 세력이 바로 예수회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대조선으로부터 왜란의 정리를 요구받은 덕천가강(徳川家康)은 200여년동안 천주교를 박해하여 완전히 씨를 말렸다는 소문이 있다.
포르투갈인들이 천주교박해가 그렇게 심했다던 일본열도에 무더기로 생활하였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고 목숨을 담보하면서까지 그들이 종교선교만의 목적으로 왜구반란세력들과 함께 꼬라이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을 같이 했다는 사실들을 어떻게 그들 설명대로만 이해하란 말인가.
일본열도에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은 서세가 만들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역사고찰(歷史考察)
일본역사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
서양인들이 예수회나 기독교를 앞세운 것은 그들의 무례함을 희석시키려 한 면이 없지 않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임진왜란은 동양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로 보았을 때 세계역사사건이므로 이것은 서양인들의 침략이고 노략질인 것이다.
때문에 예수회를 전면에 포진 시킨 것은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서양인들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서양을 분리시킨 것이 확실하며 동양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예수회가 맡은 역할은 적극적으로 선교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적인 면을 부각시키려면 역사진실성과는 관계없이 지리적인 문제와 지형적인 문제 또한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번역본을 믿지 못한다는 것보다 원본을 이런식으로 서세가 교묘하게 장난을 칠 수 있다 이야기다.
그들에게 애초에 없는 유럽역사를 만들기위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러시아의 수학자이며 역사가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말을 빌리자면 예수회라는 것은 1534년 8월 15일에 군인출신 로마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1491-1556)가 창설한 단체라는 것인데 실제로 예수회란 단체가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솔직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기존서양사를 바탕으로 판단한다면 주동자가 로마가톨릭 수사라고 하니 예수회 성격 또한 천주교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후 예수회의 활동과 행적에서 해양세력과 융해되는 특이한 그들의 활동반경을 볼 때 다분히 체제불만자들이 만든 단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고립을 자초하고 늘 역사에 녹아들지 못하던 문제의 유대인역사와도 연결시켜 볼 수 있다.
로마역사가 삼한의 신라와 백제와 관계된다는 것도 이와같은 판단을 한다.
서양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모든 것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당시 예수회가 동아시아대륙에 왕래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한 모든 문서들은 현재 한반도의 지형과 맞춰질 가능성이 크고 다분히 현재 서양사를 기준으로 꾸며졌거나 조작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먼저하게 한다.
포멘코(A.T.Fomenko)는 예수회가 조작한 사실에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한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친 것으로 절대적으로 신뢰를 가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하였다.
현재 서양사가 이 모양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포르투갈기록이 부족하면 스페인어로 이를 보충시켜 남겨두면 현대들어 그것을 용감한 한반도 번역자들이 역사해석을 나름대로 하게 되고 토양이 부족한 한반도역사에서 이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면서 좀 더 서양사로 접근시키는 방법들은 다분히 지식자들이 빠질 수 있는 늪이며 함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조하지만 한반도 역사는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옭아맨 부분이 적지않다.
이런 주장에 한편으로 너무 지나친 피해의식에 근거한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보는 시각은 현 역사상황이 단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근대사가 이렇듯 간단치 않다는 것은 아마도 기존 역사학자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수긍할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근거로 일본을 강하게 만들고 그들의 행위를 미화하고 정당화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기존역사의 체제반란 세력일 뿐이다.
현재 열도에는 서양인들의 지대한 노력으로 인해 완벽하게 일본화가 되어 마치 동양일본인들이 그 시대에 존재한 것처럼 만들고 있지만 이것은 명확한 역사사실 판단에서 보면 참으로 미친 짓과 같은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사실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기존 역사사실조차 알 수 없도록 변질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포멘코(A.T.Fomenko)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포르투갈인이고 네덜란드인이며 잉글랜드인으로 나타는 것은 그만큼 일본열도역사가 만들어져 사실성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예수회도 마찬가지다.
이미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살펴보았듯이 스페인은 에스파니아이고 신라이며 고려이어야 한다.
현재 스페인은 신라와 고려의 축소된 서양세력의 대역에 불과할뿐이다.
임진왜란을 생각해보면 근원적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어째서 예수회가 이 체제반란세력과 동행하였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단순히 나타나는 것은 예수회 선교목적이었던 사실만 강조한다.
실제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라지만 분명한 것은 대조선을 침략한 체제불만세력과 밀착되어 음양으로 도움이 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종교인으로만 볼 것인가에 대해 현대시각으로도 납득이 불가능하다.
만약 이러한 예수회의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인이거나 같은 조직체 왜구이면 답은 간단하다.
그렇다면 예수회는 당시 란을 일으킨 체제불만세력과 같이 볼 수밖에 없는 조직이라는 것이며 때문에 곧 포르투갈 예수회는 조직체를 갖춘 일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포르투갈인을 일본인 중에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왜구(倭寇)란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서양세력들이 역사적으로 집거했다고 하는 유럽대륙에는 과거 서양인들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글쓴이의 일관된 판단이다.
그곳에는 서양인들이 타타르라고 하는 고구려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럽 서부에는 백제, 동부에는 신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800년~900년 사이 통일신라시대쯤에는 유럽대륙전반을 통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 유럽국가명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잉글랜드인(England)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죽음을 신비롭게 만들어 숨기고 있지만 출세를 위한 장사꾼이었던 네덜란드(Netherlands)인 덕천가강(德川家康)에 의해 책임을 물어 살해되었고 그 수급이 조선에 의해 확인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긴박한 정치상황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이시기는 서양사에서 말하는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동인도회사 교체되는 시기와 같다.
사후처리를 만족하게 하겠다고 나선 덕천가강(徳川家康:1543-1616)에게 대조선은 이와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방책을 그에게 요구하였을 것이고 이에 만족하게 정리한 그에게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제1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으로 삼았으며 이전까지 불허한 조선영역내에서 상거래를 허가하면서 떠돌던 그들의 거주지를 정해주어 결국 그곳을 애도(江戶)라 한 것이라고 풀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이 무엇 때문에 발생되었는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소위 꼬라이라고 하는 대조선(大朝鮮)은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일으킨 왜구들을 섬멸하고 삼포를 단호하게 폐하였으나 그들이 다시 간청하여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었고 1544년 다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을 일으키자 조선정부에서는 1512년에 맺은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완전하게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아예 금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간청하여 노예조약인 정미약조(丁未約條)를 맺게 하였다.
하지만 다시 그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대조선은 왜구의 준동에 스트레스를 안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대신 1609년에는 덕천가강에게 노예조약이라고 하는 기유조약(己酉條約)을 강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왜란을 일으킨 구(舊) 일본세력들을 최대한으로 활동에 제약(처벌)을 가하고 제한을 시켰다는 것이다.
주요내용을 보면 ①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을 명령했고, ② 왜란중에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해올 것을 요구하였으며, ③ 납치한사람들 즉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할 것 등 3대조건을 대조선이 제시하였다고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아마도 이보다 더 엄격한 조항들이 많았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던 서세들이 1609년에 맺은 기유조약에서 정확하게 300년이 흐른 후인 1909년에 대한제국에게 기유각서(己酉覺書)를 강요한 것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후세 우리가 과거 어디에 발생된 것인지는 아직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왜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는가에 대한 배경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최소 이런 역사의 결과를 볼 줄 모른다면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더 이상 역사를 논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제가 적어준 역사만으로 어떻게 진실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임진왜란 정리 과정에서 일본인을 도운 예수회 신세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종교단체라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온전하게 묻어두었겠는가 아니면 절멸을 시켰을 것인가.
조선에서 허가한 에도막부정권은 기독교세력을 200년동안 씨를 말렸다 하였으니 알만 한 것이다.
세계사가 무척 복잡한 것 같지만 맞춰보면 다 일치한다.
체제반란 세력들은 현재나 과거나 실패하면 삼족이 멸해지는 역적이 되고 조직이 산산조각이 나는 파멸의 순간을 겪지 않을 수가 없다.
인류가 개인이 아닌 조직체로 살아 있는 한 역사의 순리는 그렇게 언제까지도 갈 것이다.
이것을 순리의 역사 흐름이라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역사반란을 할지라도 사라지거나 절멸당하지 않으려면 실패하지 않는 것이 답일 것이다.
어쨌거나 임진왜란에서 큰 패배를 맞본 서양세력들은 결국 근세기에 재도전하고 실패하지 않았으며 기존 역사를 완전하게 그들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오늘날 세계사이다.
대항해시대란 역사를 믿는가.
대항해시대가 왜 서양인들에게 중요하고 필요하였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대항해시대란 미명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32,000km가 넘는 항해 길을 죽음도 불사하고 탐험했고 신개척이라고 하면서 체제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수도없이 자행했지만 실패한 적이 없으며 세계 수많은 지역에 서양인들의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하는 역사프레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 대항해시대란 명칭만큼 허황된 것이 없으며 대항해시대로 합리화시키고 있는 사실들이 참으로 불가사이(不可思議)한 소설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을 남기고 또한 서적을 만들고 논문을 생성시켜 그것들을 다시 교육자원으로 활용함으로서 7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인들은 황당함이 전설이 되었고 불가사이가 놀라움으로 변하면서 비판이나 검증을 엄두도 낼 수 없는 막연하게 동경까지 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서양인들의 역사집착력과 완성도의 저력을 지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양사에서 우월성은 대항해시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을 신개척시대로 접목시킨 것이다.
미국의 건국정신,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18세기부터 프런티어(frontier)정신이 미국역사전반을 지배했던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진짜 역사를 짐작했어야 했다.
프론티어란 미국정부의 공식 정의로는 1평방 마일(2.58999776640km²)즉 783,475평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과의 경계를 잇는 선이라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는 곳은 모두 그들의 영토가 될 수밖에 없는 이론이다.
왜구가 저지른 행위는 영어풀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본침략자이다.
프론티어를 탐험과 개척이라고 하지만 침략이고 침탈이며 노략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가되지 않는 영역에 들어가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은 도적때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안타깝지만 해양세력이라 하면 역사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역사정의가 되었다.
일본역사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 했다.
본 블로그 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에서 구체적으로 밝혔듯이 “미국은 일제이다”란 주장에 변함이 없다.
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사와 한반도의 삼한사, 열도의 일본사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절대적인 리더가 될 수 있는 역사는 신중국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한반도사라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서양인들이 떠받치고 있는 바로 열도의 일본사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동양사적으로 일본사가 리더가 될 수 있는가 반문할 것이다.
바로 근세기에 만들어진 서양사가 동아시아대륙사를 만든 근본이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서양사가 무너지면 솔직히 동아시아대륙사는 자취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대륙사의 취약성은 1882년 한반도에는 임오군란이후부터 나타나며 신중국사는 1910년 신해혁명이후부터의 역사가 매우 취약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미국이 개입된 사건임에도 현재 열도일본인들에 의한 것처럼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미국과 일본관계에서 우리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래 미국은 적어도 1920년까지 국가체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일본을 경유한 것이다.
스스로 제독이라고 하는 원정대장 페리(Perry)에 의한 함포외교(艦砲外交)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에도막부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상징성이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
글쓴이는 막부정권을 네덜란드로 본다 하였다.
네덜란드와 미국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때 네덜란드어를 미국어로 통용시킬 것을 제안했다고도 한다.
1854년 2월 9척의 함선을 이끌고 에도(江戶)만에 나타나 3월 31일에 개방과 아울러 가나가와조약이라고도 하는 미일화친조약(Treaty of Kanagawa)이 체결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이다.
이것을 동아시아대륙사 열도판에서는 마치 근세기에 명치유신정권이 애도막부정권을 괴멸시키는 시발점으로 해석하고 있고 가짜 일본왕을 세워놓고 역사노름판을 진하게 펼친 것이다.
이렇게 1868년에 생성된 권력이 친미세력인 열도명치유신정권이라는 것이며 명치유신이 들어섬과 동시에 정한론(征韓論)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는 사실도 미국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대한제국세력을 정벌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조선(朝鮮)을 극복하지 못하면 미국도 없다는 뜻일게다.
이렇게 볼 때 동아시아대륙사는 미국사의 어쩔 수 없는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인류역사가 오리엔탈문화에 의해 창달되었던 것은 분명하고 끊임없이 동양문화가 세계사를 지도하고 이끌었지만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서세뿌리가 된 부르주아 세력들은 부를 극대화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우월주의 역사를 만들어 동양문화 속에 끼어넣기 하였고 오리엔탈 본래의 역사는 그들에 의해 조각조각 나눠지거나 형태도 알아볼 수 없도록 찢기어지면서 종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역사가 된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사서(史書) 기록분석
압록강은 우리역사에서 의미가 매우 큰 강이 틀림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 포르트갈인과 스페인인이 본 압록강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겠지만 서양역사에서 우리가 바로 알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사실과 문제점을 밝혀보고 이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서양역사고찰에서 "서양인들의 전진기지 나가사키 역사지우기"와 "일본역사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를 먼저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기전에 서론이 너무 길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압록강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서양인들에 의해 전달되는 적지 않는 자료나 기록들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 보는 번역서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분명 번역한 원본에서는 압록강이라는 지명에 대해 일체 언급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압록강으로 추증한 사실이 지금까지의 상식이다.
그것은 중국과 꼬라이의 경계로 이루어진 강이라고 하니 바로 한반도 압록강이라고 단정지운 것이다.
이런 식의 역사해석이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 없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咸鏡道),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압록강
南流爲鴨綠江北流爲松花江爲混同江東北流爲蘇下江爲速平江東流爲豆滿江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라고 되어 있다.
위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회령도호부의 압록강편에 보면 분명 압록강은 남쪽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다.
참으로 놀랄이야기가 아닌가.
또한 신증에서 기록된 지명들은 모두 조선 지명임에도 북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만주땅에 있는 송화강이라고 하거나 혼돈강이라고 하였다.
신증을 편찬할 때도 그러했지만 조선은 이미 압록강을 경계가 영토이기 때문에 만주는 청나라 영토인 것이다.
사실상 북쪽으로 흐를 수 있는 지형조건은 한반도지형안에서는 도저히 찾아볼수가 없는 강이다.
반드시 높은 산악을 바탕으로 북쪽으로 낮은 지형을 이루어져 그쪽으로 기울기에 따라 북쪽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이런 도식이 이루지려면 조선 강역내에 로키산맥같은 상당히 높은 지대를 서쪽으로 두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대강이나 아니면 북쪽 먼 바다로 이어지는 낮은 지형이 깔려 북해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다.
또 지적할 이야기는 오히려 한반도 두만강처럼 동북쪽으로 흐르는 강을 소하강이나 속평강이라고 하였고 두만강은 정동쪽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다.
한반도의 압록강은 서쪽으로 흐르고 두만강은 동북쪽으로 흐르지만 전혀 맞지 않는 역사기록인 것이다.
한반도 역사를 믿지 못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 남음이 있다.
아래 [1750. BELLIN, J.N]프랑스지도에는 한반도지형을 기준으로 ‘Yalo King ou R. Verte'(압록강 또는 녹색강)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녹색을 록(綠)이라 하니 압록을 이야기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야로“Yalo(यलो)”는 힌두어로 ‘yellow’(노란색)의 어원이다.
즉 황하(黃河), 황해(黃海)를 말한 것임을 알 수가 있어 압록강과 황해가 같다는 것은 일단 어원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압록강을 단순하게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이와같은 의미를 의식한 서양지도제작자들은 이를 분리하기 위해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의 북쪽강을 황하(黃河)라고 하였고 한반도 서해를 황해(Yellow sea)라 하여 치밀하게 중국영토로 구도화하였음도 알 수가 있다.
Carte du Katay ou Empire de Kin.[Paris, 1750. BELLIN, J.N]-Pour Servir à I' Histoire de Jenghiz Khan. raportee dans I'Histoire Générale des Veyages Tirée de I' Anglois.
때문에 위 지도가 무엇인가에서 지명들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북아메리카대륙지도를 숨기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고 아시아대륙에서 고려(高麗)“COREE”만을 나타내려고 시도한 지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금의 동해를 코리아해(MER DE COREA)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으로 이어지는 전 영토가 코리아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이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Carte du Katay ou Empire de Kin" 키타이 ‘Katay’와 킨왕국'Empire de Kin'의 지도에서 볼 때 거대한 코리아(Coree)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第一集雜纂集第二十三卷
○文獻備考刊誤
輿地考 卷十五 十七號。
列爲三大水之鴨綠。疑今之黑龍江是也。黑龍其源甚長。且東流入海。
먼저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저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등장하는 문장에서 엄청난 사실을 이미 밝히고 있었다.
"큰 세 개의 대강 중 즉 삼대수(三大水)에 속하는 것이 압록"이라고 하였고 "추측컨대 지금 흑룡강(黑龍江)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며 "흑룡강의 발원은 심히 길며 또 동쪽으로 흐르고 바다로 들어간다"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생각해보라.
도대체 그것도 큰 세 개의 강이 압록강이라 하였고 동쪽으로 흘러 바다도 들어간다 하였다.
앞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에서는 분명 압록강이 남쪽으로 흐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동쪽흘러 남쪽으로 흐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지형상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처럼 지형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역사사실에서의 압록강을 비판없이 그대로 일제가 심어놓은 사실대로 한반도 북쪽 경계로 한 강을 압록강이라고 알고 있었으니 한심하다는 것이다.
압록강이 얼마나 크면 삼대수(三大水)라 하였겠는가.
삼대수라 함은 세개의 큰 강이 한데 합쳐 흐른다는 말과 같다.
흑룡강(黑龍江)은 압록강과 더불어 동일한 강으로도 알려져 있었다는 기록도 놀라운 것이지만 이들 강들은 전부 동류입해(東流入海)한다 하였으니 동류(東流) 즉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기암(氣陷)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기록 하나만 보아도 한반도 압록강은 우리의 역사 강(江)이 아님이 명백히 판단할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아무르 강(Amur river)과 코(nose)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0"에서도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어 본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란 글과 함께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주(South Dakota)의 블랙힐스(Black Hills)가 사할린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이어 아무르강(Amur river)라는 것은 사할린인 블랙힐스(Black Hills)을 감고 도는 북동쪽으로 흘러드는 벨푸어셰이강(Belle Fourche River)과 남동쪽으로 흘러드는 샤이엔강(Cheyenne River)을 지칭하였거나 북부본류인 미주리강(Missouri River)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 하였다.
더군다나 위 여유당전서에 열수(列水)라는 것은 본 블로그 글 "대승(戴勝)후투티(hoopoe)로 본 조선열수(朝鮮洌水)의 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7"에서 보았던 것처럼 조선열수를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으로 해석한 것으로서 '열(洌)'은 대동강(大同江) 또는 한강(漢江)이라는 역사 명칭과 함께 물이 맑다, 물결이 거세다, 시원하다는 뜻이 있고 음(音)으로는 열다, 뜨겁고 더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에 형성된 지형과 기후와 일치한다고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의심할 필요없이 동류(東流)로 흐른다는 사실과 로키산맥의 눈과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을 압록(鴨綠)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압록(鴨綠)'과 견줄 수 있는 것으로서 또한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도 일치하는 역사명칭임을 알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밝혔듯이 흑룡강(黑龍江)은 압록강과 더불어 동일한 강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게 한 것이다.
이 두 강 모두가 동류(東流)한다는 사실, 또한 原論有鴨綠東流。與黃河同之語。"원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압록은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말하며 그렇듯 황하와 같은 말이다."하였다는 사실들은 한반도 구성원들이 의혹케 하는 모든 역사사실들을 완전히 평정한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황하(黃河)는 앞에서 프랑스가 만든 지도에도 알 수 있었지만 압록강의 옛 명칭 야로(Yalo)는 바로 힌두어로 황색(Yellow)의 어원임을 이야기한 것으로 황하가 될 수 있는 이름이다.
때문에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황하의 이름은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전체를 말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어 근세기에 압록강이라 찍힌 사진에서 야로(Yalo)란 이름을 자주볼 수 있었던 것을 의아해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본 블로그 글“청일전쟁 (First Sino-Japanese War)이 주는 혼란 http://blog.daum.net/han0114/17049833”에서 압록강해전(Yalu River)에서 압록강을 야루강이라 하였고 이것을 다른 명칭으로 황해해전(黃海海戰)이라 했다는 사실도 강 하(河)를 바다 해(海)로 둔갑시켜 만든 조작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즉 청일해전이 일어난 곳은 미시시피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서양인들은 이런 짓을 하였을까?
바로 미국을 신대륙으로서 오리엔탈이 아닌 서양역사의 바탕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계수나무(Cercidiphyllum)와 카누(canoe)의 노(櫓) http://blog.daum.net/han0114/17050599"에서 말하길 카누의 노를 만드는 재료로 미주리강(Missouri river)을 중심으로 자라는 계수나무(連香樹:Cercidiphyllum)였다는 사실도 밝혀 미주리강(Missouri river)을 인디어말로 “大獨木舟之河” 즉 "큰 카누(canoe)의 강"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과 카누(canoe)를 우리말로는 "마상이"라 하고 마상성(馬尙船), 마상진(馬尙津), 독목주(獨木舟)라 한 하였던 것은 옛 압록강에서 이 독목주 즉 마상이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였다.
이역지(异域志) 元·周致中 ●卷上○朝鲜国(1597)
古朝仙,一曰高丽,在东北海滨,周封箕子之国,以商人五千从之。其医巫卜筮、百工技艺、礼乐诗书皆从中国。衣冠随中国各朝制度,用中国正朔,王子入中国太学读书。风俗华美,人性淳厚,地方东西三千,南北六千。王居开城府,依山为官,曰神窝。民舍多茅茨,鲜陶瓦。以乐浪为东京元代中国人认识的太平洋黑潮,百济金州为西京,有郡百八十,镇三百九十,洲岛三十。以鸭绿江为西固,东南至明州,海皆绝碧,至洋则黑海,人谓无底谷也。
위는 주치중(周致中)의 이역지(異域志) 조선국편이다.
이를 풀어보면 “고조선은 일명 고려라 하며 동북해빈(東北海濱)에 있고 주(周)나라가 봉한 기자국(箕子國)으로서 상(商)나라 사람 5천명이 따랐다. 의사와 무당, 복서(蔔筮), 모든기술자, 기예(技藝), 예악(禮樂)과 시경(詩經),서경(書經)모두 중국을 쫓았다. 의관도 중국을 따르고 역대왕조가 나라를 세운 뒤 새로 반포하는 역법(曆法)를 중국 것을 사용하였으며 왕자는 중국에 입국하여 태학을 공부하였다. 풍속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인성은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지방이 동서 3천리이고 남북이 6천리이다. 그나라 왕은 개성부(開城府)에 거하고 관청은 산을 등지며 신(神)의 자리라 한다. 민가는 띠풀의 지붕이 많고 질흙으로 구워 만든 기와는 적다. 원대(元代)중국인들은 낙랑을 동경이라는 이유는 태평양의 흑조(黑潮)라고 인식하는 것이며 백제 금주(金州)를 서경(西京)이라 하였는데 180개의 군(郡)과 390개의 진(鎭), 30개의 주도(洲島)를 두고 있다. 압록강은 서쪽에 두고 동남(東南)은 명주(明州)까지 이르며 바다는 모두 짙푸르고 큰 바다 흑해에 이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길 해저에 밑바닥이 없다 한다.”라고 해석된다.
본 블로그 글 "인더스(Indus)는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25"에서 보았듯이 山海經, 海內經第十八“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 즉 대동양(大東洋)인 대서양에서 북해(北海)의 모퉁이, 귀퉁이, 구석 등 번역이 되어 북해(北海)를 끼고 있는 상태의 우(隅)이니, 북해지우(北海之隅)는 북해(北海)를 접하고 동해지내(東海之內)에 두고 모서리, 구석진 곳은 바로 조선과 천독이 있었던 위치로서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단(北東端)이란 사실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북방면에 바다가까이에 근접한 동북해빈(東北海濱)이란 말 역시 북해지우(北海之隅)란 말과 같은 것으로 파악될 수 있어 고조선부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놀랍게도 이역지의 압록강 기록에서 압록강을 서고(西固)라 한 것은 나라 서쪽에 완벽하게 두었다 하였으며 그리고 동남은 바로 명나라 땅 명주(明州)에 이른다 하였던 것이다.
바로 압록강은 긴 줄기로 인해 나라의 서쪽을 막고 있다는 것과 같다.
명주라는 것도 이를 한반도에서 동남이라 함은 경상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명나라 땅이라는 이야기다.
경상도가 명나라 땅이면 임진왜란 당시 열도 대마도에서 침략할 때 정명가도(征明假道)라 할 필요조차 없다.
근세사가 열도일본을 만든 것도 엉터리이지만 정명가도란 것은 꾸며진 이야기로서 왜구들이 요구할 수 없는 한마디로 당치도 않는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까지 신증 압록강편과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이역지(異域志)와 본 블로그의 글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압록강(鴨綠江)은 바로 부정할 수없게 하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이다.
賦曰:睠彼東國,朝家外藩,西限鴨江,東接桑暾。天池殆其南戶,靺鞨為其北門。(其國東南皆際海,西北為建州,正北為毛憐、海西。)
동국(東國)을 보건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藩:지키다)라. 서쪽(西)은 압록강(鴨江)까지(限)이고, 동쪽(東)은 상돈(桑暾)에 닿아(接) 있다. 천지(天池)는 자못 그 남쪽 출입구(戶)가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門)이 되었다. 그 나라의 동남(東南)쪽은 모두 바다와 만나 이어(際海)지고, 서북(西北)쪽은 건주(建州)이며, 정북(正北)쪽은 모련(毛憐:滿語意為馬:여진족)해서(海西)이다.
위 글은 본 블로그 글 "뽕나무(桑木:Morus rubra L)로 본 대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3"에서 살펴보았던 조선성종19년(1488)에 명(明)의 우서자 겸 한림시강(右庶子兼翰林侍講) 동월(董越)이 사신(史臣)신분으로 조선(朝鮮)을 방문하여 조선에 대한 사정을 기록하여 펴낸 것으로서 조선부(朝鮮賦)에 실린 조선의 지형설명의 한부분이다.
이 기록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기적으로 임진왜란(1592)시점과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압록강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국(東國)은 조선(朝鮮)을 말하는 것으로서 조가(朝家), 조정(朝廷)의 바깥 울타리라 한 것은 번(藩)들을 지킨다는 것이다.
“西限鴨江” 서(西)쪽은 압록강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한 부분과 앞에서 비교한 사실과 일치한다.
중국이라고 하고 명이라고 하는 것은 즉 조가라 하거나 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조선 땅 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으로서 그의 전서(毛傳)에 "中國은 京師다"라 한 것이다. 경화(京華), 경도(京都), 경성(京城)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역사에 상당히 밝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혹 그는 고려나 신라를 중국이라 한 것을 축소하기 위해 주장한 것일 수도 있다.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 에서 흑룡강(黒龍江)유역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여진족(女眞)이라 불렀고 동북지방의 생여진(生女眞)은 고려 함경도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을 말하는 것이며 서남지방에 있던 숙여진(熟女眞)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이 고려 북서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압록강 유역 양안에 서여진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종족을 옛부터 야인(野人)이라고 한 것이다.
압록강 위치를 더욱 확신하게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당리화(棠梨花)와 압록강 http://blog.daum.net/han0114/17049507"에서 본대로다.
조선부(朝鮮賦)에서 동월(董越)은 부사(副使)인 공과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비롯한 13인과 함께 그해 정월(正月) 중순(中旬)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 3월 13일에는 모화관(慕華館)에 입성하였고 조선(朝鮮)에 40여일(2.25-4.5)을 머무르다가 4월 5일에 중국으로 돌아가기까지 그가 접한 조선의 풍물과 조선시대 초기 풍습, 지리, 산물, 외교관계, 건축, 식품, 의복, 도시 등등 여러가지 견문(見聞)한 바를 기록한 책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동월(董越)은 중국으로 갈 때 동남(東南)쪽 어디에 있을 압록강을 넘어서자 당리화가 최고점 만개가 되어 하얗게 절정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에 동월이 말하길 조선(朝鮮)은 점점 동남쪽(東南)으로 가까이 갈수록 땅이 따뜻해진다 하였고 그가 당리화가 만개한 것을 보았다는 것을 학명 “Pyrus calleryana Decne” 풀어알 수 있었는데 이 종 당리화(棠梨花)의 DNA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대륙동남쪽이라는 사실은 정확하게 생물학적으로도 판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바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하게 중국이란 경사가 존재한 땅은 버지니아나 남북캐롤라이나 범주에 있어야 할 도시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중국의 실체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예수회회원들은 당시 시대적으로 따진다면 분명 조선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이를 꼬라이(Coray)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꼬라이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 중국은 과연 무엇이라 지칭했을까 생각해본다.
중국(中國)를 지금도 러시아발음으로 키타이(Китай, Kitay)라 하며 중세유럽(medieval Europe)에서는 중국(中國)를 카타이(Cathay)이라 하였다.
고려(高麗)를 호(胡)라 했고 타타르(Tatar)라고 한 사실과 고려를 키타이(kitai)라 하였다.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에서 호는 아메리카대륙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우리사서에 보면 구려호(句麗胡), 고려호(高麗胡), 조선호국(朝鮮胡國)이란 명칭이 나타난다 것이다.
서양인들은 키타이(Kitay)를 중국이라 하지만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이라고도 한다.
결론은 이종족들이 고려(高麗)내에 포함된 것인데 야루(Yalu river)를 앞에서 설명하면서 프랑스 지도에 나타나는 기록사실에서 고려 내에 키타이 ‘Katay’와 킨왕국'Empire de Kin'포함된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고려(꼬레:Coree)를 서양인들이 무엇이라 했겠는가.
키타이(中國)이다.
이같은 사실을 얼마전 블로그 글 "흰 매(海東青:gyrfalc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5"에서 충분히 이런사실을 알아본 결과이다.
만약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중국의 지형을 따져 볼 때 왜구라 함은 잔여 고대영어를 사용하던 여진세력들이라고 볼 수 있고 중앙아메리카대륙이나 카리브해연안에 포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이 대륙북쪽으로 공격한다 해도 미시시피와 앨라배마, 조지아와 플로리다를 막고 카비브해 동해로 나갈 수 있는 쿠바와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대앤틸리스 제도(Greater Antilles)에서 해상의 길만 차단하면 경사가 있는 동부로 들어갈 곳이 없다.
그렇다면 조선은 이러한 방패역할을 하는 지역을 통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또 하나 확정적인 것은 앞에 게시한 주치중(周致中)의 이역지(異域志)에서 낙랑(樂浪)과 백제 서주(西州)를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으로 나눈다 하였는데 이것을 중국인들이 서태평양의 일본 열도 남안을 흐르는 구로시오 해류(Kuroshio海流)를 흑조(黑潮)라 하였기 때문이라 한 것이다.
이것을 근세기에 조작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흑조는 바로 멕시코만난류(墨西哥灣暖流:Gulf Stream) 또는 '걸프 스트림'이라는 사실을 밝혀던 바가 있는데 본 블로그 글"흑조(黑潮)의 진실이 주는 일본의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9"에서 충분하게 지적한 사실이다.
또 한가지 더 지적한다면 이역지(異域志)에서 海皆绝碧,至洋则黑海,人谓无底谷也。라 하여 “짙푸르고 큰 바다 흑해에 이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길 해저에 밑바닥이 없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밑바닥이 없다 한 것은 해심이 깊다 하여 흑해라 했던 것이다.
흑해(黑海)라 할 수 있는 곳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심해들이 넓게 퍼져 있는 바다를 말한 것이며 그 중에 북아메리카 바진(North American Basin)같은 곳은 해심(海深) 6,995m 깊은 곳이라 충분히 밑바닥이 없다고 여길 정도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상으로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압록강을 살펴보았고 결국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과 미시시피강을 통째로 전부 압록강(鴨綠江)이라 했음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동쪽으로 흐른다는 사실과 남쪽흐른다는 사실 모두 압록강이라 했기 때문이다.
이 강을 흑룡강(黑龍江)인 아무르강이라고도 하였으며 또한 황해(黃海)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와 미시시피강의 토착인을 내세워 인디언이라고 하며 서양인들이 처음 문명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현 북아메리카대륙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어쩜 이토록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는가.
서양인들 중에 프랑스를 가장 먼저 등장시킨 기존 미국역사가 거대한 오리엔탈 문화를 어떤식으로 무력화했는지 짐작만 가고 알길이 없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을 감추고 있다면 끝내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다.
미국도 그렇지만 프랑스 역시 세계정사(世界正史)에서 서양국가로 취급될 수 없는 해적신분이라는 한계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도적때들이 세계역사를 쥐고 흔들고 있는 이 시대가 과연 정의가 살아있고 학문적으로도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는지 기존 지식자들은 자문하고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서양인들이 본 꼬라이와 압록강 확인
지금까지 압록강에 대해 사서자료들과 본 블로그 글만을 통해 이만큼 밝혔다.
그래도 무엇인가 부족함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스페인어의 대가인 박철교수의 저서「제8장 16세기 서구인들이 본 꼬라이」에 나타나는 기록에서 번역본을 참고로 하여 꼬라이 지형에 관한 것들을 발췌해 보았다.
[1][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조선은 히라도(平戶)섬으로부터 북쪽으로 80리(里)거리에 떨어져 있고, 북위 35도 부근에서 처음 해안이 시작되어 안쪽으로 펼쳐지는 지역의 하나이다. 일본식 리수(里數)로 계산해 보면 남북의 길이는 250리(里), 동서의 폭은 90리(里) 또는 그 이상이다. 조선은 서너 나라와 경계가 접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중국과 접촉하면서 조공국으로서 중국에 대해 매년 공납을 바치고 있다. 북쪽 및 북동부 쪽으로는 타타르[Tartaros]와 오랑캐[Orancais]의 토지와 인접해 있다.[생략]
[2]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an)의「선교사들의 이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중국의 왕이 살고 있는 뻬이징주(북경) 옆에 있는 꼬리아(Coria) 또는 꼬라이(Coray)라고 불리는 섬을 감바꾸도노(豊臣秀吉)는 정복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꼬라이는 넓이가 3 레구아(régua:尺)인 수량이 풍부한 강을 경계로 하여 나누어져 있으며 이 강을 건너면 꼬라이에서 중국으로 쉽게 갈 수 있다.”라고 꼬라이를 섬나라고 지칭하였다.[220p]
[3]가스빠르 비렐라 신부의 동인도 고라(Goa)시에서 발송한 1571년 10월 6일자 편지 내용을 보면 “일본에서 배를 타고 삼 일 거리에 있는 땅에 꼬라이라고 부르는 큰 왕국이 있는데, 우리들이 옛날부터 부르던 타르타리아(Tartaria)입니다. 이 나라는 매우 큰 중국 땅이 아래쪽으로 내려 뻗어 있는데, 소문에 의하면 대 알레마니아(Alemania:독일)라고 불리는 땅의 반대편 지역까지 이 왕국의 한쪽 끝이 도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피부가 희며, 싸움을 잘하고, 훌륭한 기마족들입니다. 왜냐하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 화살, 창, 칼 등을 갖고 싸움을 합니다. 이들은 보기 좋게 수염을 기르는데, 사자·호랑이들의 사냥에 매우 능숙하고, 또한, 우리들이 사슴과 토끼를 사냥하듯이 이들은 맹수 사냥을 합니다. 나는 꼬라이 왕국에 관하여 얘기를 들어 왔으나 그 나라도 가는 길목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여 나의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226p]
[4]임진왜란 발생시점에 기록인「1592년 일본 예수회 연례보고서 부록」에서 “꼬라이 왕국은 일본의 피란도섬(平戶島)으로부터 북쪽 80 레구아(1(régua:尺-5.572m) 가량 딸어져 있으며, 36도 선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식계산에 따르면 꼬라이의 길이는 250 레구아(régua:尺)에 달한다. 이 왕국은 세 나라와 교역을 하며 국면을 맞대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그들이 매년 조공을 바치는 중국인들,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각각 ‘탈탈’족(Tararos)과 오랑캐(Orancay)들과 접하고 있다. ...(생략)또“내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하며 특히 그들 중 하나가 꼬라이와 중국 땅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그 강의 폭이 3 레구아(régua:尺)에 달한다.”[229p]
[5]스페인신부 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an)의 1601년 저술한「선교사들의 이야기」에서 “꼬라이는 피란도 북쪽 80 레구아(régua:尺)에 위치해 있으며 세 나라와 접하고 있다. 서쪽에는 그들이 매년 조공을 바치는 중국이 있으며 중국과는 3 레구아의 강을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탈탈족 및 오랑캐들과 접하고 있으며 그들과는 자주 싸움을 벌인다. 일본이 꼬라이에 오기 몇 해 전에 오랑캐는 탈탈족과 연합하여 꼬라이와 전쟁을 벌렸지만 용감히 싸우는 꼬라이 사람들에게 탈탈족과 오랑캐들은 패배하였다.[232p]
[6][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 조선은 히라도(平戶島)로부터 북쪽을 80레구아 떨어진 거리에 있고 첫 해안지역들이 북위35도 상에 있다. 일본식 거리 측정법에 따르면 남북의 길이는 250 레구아로 우리 포르투갈식으로 계산하면(166)레구아에 해당하고 동서의 폭은 90레구아 또는 그 이상이다. 선의 북쪽은 대단히 춥다. 추위를 막으려고 난로를 사용한다. 강은 얼어붙는데 얼음은 매우두껍다...(생략)“강 하류의 길이가 10레구아(régua:尺)나 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중국이 나누어져 있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꼬라이에는 지나가기 매우 어려운 거대한 사막(沙漠:desert)이 있다고 한다.”[231p]
위 번역본 6개의 문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첫째 레구아(regua)라는 단위(尺)숫자이다.
이미 예수회가 어떤 조직체인가를 말했던 사실에서 볼 때 그럼에도 마치 예수회 상부기관이 로마교황인 것처럼 하였다는 것은 예수회의 절대적인 농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로마카톨릭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예수회와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연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천주교를 나름대로 정의할 때 동양철학을 가미한 종교임을 알기 때문이다.
레구아란 단위에서보면 지금 우리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지만 대항해시대란 틀에서 당시 서세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포르투갈과 스페인끼리의 상징적인 영토분할을 나타나내는 것으로 1493년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서 사용된 단위로서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서양역사는 어떤 해적이나 왜구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조직체들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 하였고 유럽 대륙외 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이 있었다고 하였다.
가당찮은 것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교황의 중재로 1494년 6월 7일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맺은 조약이라고 하며 소위 200톤급 조각배를 가지고 세계 온바다를 그들 마음대로 돌아다녔다고 하면서도 이처럼 선을 긋고 야단부린 것은 세계역사가 아니라 그들만의 역사로서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조약이 있었다면 비주류들의 조약일 뿐이지 주류 역사체제와는 상관이 없는 고약한 주장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세상에 하나의 체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연히 당시 동양문화역사가 존재한 사실은 그들도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결국 이를 희석시키려 동양과 서양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밝혀본 사실들이다.
서세들이 온 세계를 15세기부터 장악했다고 하는 발상은 기존 인류사를 무시하거나 무지한데서 발생된 것이지만 그들이 이때부터 동양사를 저만치 밑에 두고 서세우월주의에 빠져 오만을 부렸던 것은 틀림없다.
지들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영토를 분리했다고 하는 것은 동양으로 지정한 아시아대륙이 휴면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통제한 것도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던 오린엔탈문화의 근원이었던 타타르라는 것이 이미 확인 된 사실이다.
이것이 19세기에 악라사로 나타났을 뿐이다.
레구아란 단위에서도 보면 이 조약에서 처음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즉 아프리카 서쪽 끝 앞바다에서 약 100레구아(480km)떨어진 곳을 기준으로 하여 서쪽은 스페인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구분하면서부터 시작된 단위이고 포르투갈에 의해 다시 조정된 2차 조약이 이루어진 것은 기준이 370 레구아로 변한다는 것만 있다.
이때 단위는 1레구아(regua)는 4.8km 라 한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레구아(legua/legua)란 단위에서 스페인 레구아는 4.2km. 포르투갈 레구아는 4.44km~6.17km 사이라 하였으며, 해상에서는 5.55km 라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1레구아를 6km 라 하였다.
위 사실에서 보면 각 스페인, 포르투갈이 단위를 다르게 책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어 교황이 당시에도 표준을 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위는 당시 그들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으로 중국과 꼬라이 사이에 있었던 강의 넓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증거들은 과거 실제 압록강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열쇠가 되기에 하는 말이다.
[1]꼬라이 강 넓이 3레구아
위 6개의 문장에서 보면 "꼬라이의 북쪽은 타타르(Tartaros), 북동쪽은 오랑캐(Orancais)라 하였고 서쪽은 중국이며 중국과 꼬라이 사이에는 수량이 풍부한 3 레구아의 강이 있다" 하였다.
이것과 내용이 좀 차이가 있다지만 충격적인 것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쓴 일본사(Historia de Japam)를 보면 "강 하류의 길이가 10레구아(regua)나 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중국이 나누어져 있다"라고 한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분명 중국과 꼬라이 사이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3 레구아의 넓이의 강이라는 것이다.
이 강 줄기에 따라 강의 넓이가 차이가 있다 하겠으나 보통 또는 특별하게 3 레구아 넓이 강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 압록강이 아니라는데 모든 자료가 말하고 있다.
3 레구아라 한사실에서 스페인 단위 4.2 km 를 적용한다 하여도 강의 넓이가 12.6km 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강의 넓이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와 중국 경계가 되어 있는 현재 압록강 보통 경계 사이의 강의 넓이가 1.2 km 정도이며 수풍댐(水豐水庫)지역에서 매우 여유있게 측정한다 하여도 최고 6.94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하튼 중국과 꼬라이 사이로 흐르는 강의 넓이가 현 압록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넓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참시 수풍댐에 대해서도 집고 넘어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수풍댐은 1937년 10월에 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와 당시 만주국과의 공동출자로 발전소 건설을 위한 댐공사가 시작되었고 1943년 11월 제1기공사가 완료되어 발전기 1∼6호기가 가동되었으며 1945년 8월 북한이 인수, 가동해왔으나 6·25때 발전시설의 70%가량이 파괴되었다 하였고 1954년 1월 소련의 원조에 의하여 완전 복구되어 1958년 8월부터는 설비용량 70만㎾로 정상가동이 시작되었다라고 백과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이와 시기가 비슷한 경우로 몬타나주 미주리강의 포트펙 댐(Fort Peck Dam)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과거 뉴딜정책(1933-1937)으로 1936년 7월에 펙(Peck)에 시작된 포트펙댐(Fort Peck Dam)건설은 10,546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결과 1940년에 완료되었고, 1943년 7월에 전력을 발생시키기 시작하였다고 나타난다.
공사시작은 1년차이가 시기적으로 나타나지만 발전가동은 약 4개월정도 밖에 간격이 없다.
이것은 역시 사람이 아닌 "댐 도플갱어"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상한 이야기다.
왜 미주리와 엮이는 것일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바로 앞 소제목으로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사서(史書) 기록분석"에서 충분히 살펴본 결과 압록강은 미주리강과 미시시피강임을 이미 밝혔던 바가 있다.
때문에 임진왜란 시 서양인들이 보았다고 하는 꼬라이의 지형설명에서 중국과 꼬라이 사이에 흐르는 강을 미주리강와 미시시피강으로 충분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이 정도만 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한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
중국과 꼬라이 사이에 강이 흐르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방향으로 흘렀는가가 문제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는 흐르는 방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3]가스빠르 비렐라 신부의 기록에서 "매우 큰 중국 땅이 아래쪽으로 내려 뻗어 있는데..."라고 하여 중국영토가 세로 길이로 길게 뻗어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서양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꼬리아가 있었던 곳은 중국을 서쪽으로 하고 경계를 이루는데 사이에 강이 흐르는다는 것은 한반도 압록강처럼 가로 흐르는 경계가 아니라 세로로 흐르는 강의 경계임을 알 수 있으며 중국과 꼬라이 사이에 흐르는 강은 남쪽으로 흐르는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일 수가 있다.
[야로강(Yalu River)사진]
"경계가 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강을 건너면 꼬라이에서 중국으로 쉽게 갈 수 있다"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섬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이야기다.
어쨌던 당시 그들은 섬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된 사실을 무시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남쪽과 동쪽이 바다라는 것을 그들이 미리 알았고 꼬라이에 상륙을 해보니 거대한 강이 바다처럼 보여 그것을 섬이라고 인식했을 수도 있다.
때문에 강은 바다같은 강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야루강은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다.
[A]미시시피강 너비 120∼320km에 이르는 범람흔적지
[B]미시시피강 옛 강의 지형모습
첫째 그림은 미시시피강에서 미시시피주의 베일우드(Valewood)남쪽 루이지애주와 미시시피주의 경계를 이루는 번치스 커토프(Bunchs Cutoff)와 올드리버추트(Old River Chute)사이에 거리로서 지금은 토사에 막혀 강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적어도 400년전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 강 범람 흔적의 지점을 측정해보니 14.7km 이다.
두번째 그림은 루이지애나주의 올드강관리구조"Old River Control Structure"라 하는 구조물이 있는 곳인데 올드리버(Old River)로 알려져 있는 강이다. 또한 삼수[三水]야생조류보호구역(Three River Wildlife Management Area)라고도 하는 곳인데 남쪽으로 흐르는 두 강인 것 같이 보이지만 옛날 이 강은 두 강이 합쳐 진 것으로 양쪽 강 가장자리를 측정해보니 15.46km 나 된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강의 넓이이다.
서양인들이 임진왜란때 본 꼬라이 서쪽에 있는 강 넓이가 “3레구아”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수가 없다.
올드리버라는 것은 이름 그대로 옛 강(Old River)의 넓이를 가늠하게 하는 것으로서 백과사전에 보면 미시시피 강은 본래 흘렀던 꼬불꼬불한 흔적, 절단수류, 하적호(河跡湖), 배수로가 막힌 습지 등을 남겨놓으며 흐르는 곡류하천(曲流河川)의 전형적인 예라 한 것이다.
지금은 토사에 막혀 강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적어도 400년전이라면 양쪽이 합한 상태에서 가운데로 강물이 흘렀다고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지형적인 원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서북쪽에서 내려오는 미주리강도 수량이 많지만 일리노이주의 케이로(Cairo)에서 수량이 풍부한 오하이오강이 동쪽에서 흘러들어 오면서 서북쪽의 미주리강과 오하이오주의 위클리프(Wickliffe)에서 합해지고 이때부터 이 강을 미시시피강이라 부르는 것으로 강물이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미시시피강은 사시사철 수량도 풍부하다고 알려지며 하류 각 지점에 어지러운 범람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2]꼬라이 강 하구넓이 10레구아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어마어마한 사실은 임진왜란때 꼬라이(Coray)의 강을 본"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쓴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 기록하길 강 하류, 하구(河口)의 길이가 “10 레구아(regua)”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10레구아는 얼마나 넓은가.
앞에서 보았지만 보편적인 스페인 단위4.2km를 적용해도 42km 이다.
프로이스의 단위 6km 를 적용하면 “60km”이다.
신기하다 못해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구의 넓이가 60km 라니 한반도에 어떤 강이 이런 하류가 있고 하구가 있는가.
강 퇴적물이 흘러 하구를 만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금도 그렇지만 423년 전 16세기말엽에 이런 하구넓이라면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시시피강 하구 넓이 지도]
놀라지 말라.
바로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시시피강 하구에 나무뿌리가 갈라진 것처럼 또는 나뭇가지처럼 3개의 가지가 내리뻗은 하구가 구글위성으로 자그마치 58km로 측정된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세계삼한역사의 참모습인 것이다.
[히라도 와 부산거리 지도:205.67km]
[3]임진왜란에는 일본열도와 한반도가 없었다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몇가지 총체적으로 어긋나는 것들을 집합적으로 살펴보고 마무리짓자.
소제목처럼 임진왜란에 일본열도가 없었다는 것은 서양인들이 기록한 히라도와 꼬라이 부산간의 간격 즉 거리가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서다.
살펴볼 것은 위 일본식의 레구아 해상척도가 5.572km 로 계산되는 것은 정비례계산법으로 돌출한 것으로서 앞에서 잠시 설명했지만 레구아의 포르투갈 단위는 바로 일본식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실을 먼저 전제하고 모든 기록이 남긴 레구아 실제 단위측정을 해보려 하는 것이다.
첫째 꼬라이의 영도 길이가 250 레구아라 하였으니 5.572km 를 곱하면 1,393km 인데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거리가 구글위성 측정거리가 약 700 km 이니 이것조차도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가스파르 비렐라 신부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3일거리에 있고 꼬라이를 옛날부터 타르타리아(Tartaria)라 하였으며 또한 소문에 의하면 대 알레마니아(Alemania:독일)라고 불리는 땅의 반대편 지역까지 이 왕국의 한쪽 끝이 도달하고 있다 하였다.
먼저 알레마니아를 현재 독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고려인 것이 확실하다.
그레이트 타타르(Great Tartar)영토 즉 악라사제국의 영역이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 전체를 포괄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알레마니아는 바로 대고려, Coree)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꼬라이까지의 항해거리가 3일 거리는 거리라 하였으니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100년정도 차이는 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기록으로 비교할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팔로스항에서 출발, 항해를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에 있는 산살바도르(San Salvador)(추정)에 도착했다는 근거로 걸린 시간이 71일이 경과한 것으로 나온다.
콜럼버스가 항해한 거리를 직선으로 구글위성으로 측정해보면 6800km 정도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71일로 나누면 하루에 약 95km 정도 항해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시속 4km[2.16(kn)]속력으로 계산되는데 배가 정박하여 휴식시간이나 수선시간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니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측정 계수를 가스파르 비렐라 신부가 말하는 거리를 환산해보면 3일 걸렸다 하였으니 해상거리가 285 km 정도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열도 히라도섬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구글위성으로 측정해보니 205.67km 로 계산된다.
차이가 거의 80km 차이가 난다.
이것은 부산의 위치와 히라도의 위치가 잘못된 것이다.
더군다나 서양인들에 기록에서 일본의 피란도섬(平戶島)으로부터 북쪽 80 레구아(1(regua:尺-5.572km)가량 딸어져 있다 하였으니 해상측정 단위 약 5.55km 를 적용한다고 하여도 거리로는 444km 가 나타나 실측한 205 km의 배가 넘는 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임진왜란 때 일본열도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주지할 것은 바로 꼬라이의 첫 해안이 시작된 위도를 한쪽에서는 북위 35도라 하였고 한쪽에서는 아예 한반도가 북위 36도라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직히 한반도라면 제주도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제주도 남단 끝 북위는 33도 12부이다.
그렇다면 제주도를 제외하고 한반도 남해 해남 극단의 위도는 북위 34도 17부라 해야 맞다.
이것조차도 차이가 난다.
현재 태종대 전망대를 기준으로 할 때 북위 약 35도 선상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북위 36도라 함은 한참 북쪽에 있는 포항이 그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임진왜란 당시 서양인들의 위도측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현재 한반도 지형이 아니라는 것쯤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한번 이 북위 노름을 생각 할 때 서양인들은 분명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북위 35는 타르강(Tar river)과 뉴스강(Neuse river)이 흘러드는 노스캐롤라이나주(州)의 팜리코 사운드(Pamlico Sound)와 북위 36도는 로어노크 강(Roanoke river)과 초완강(Chowan river)흘러드는 앨버말 사운드(Albemarle Sound)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단 이사람들이 북위 운운하는 것은 그들이 혹 있었던 곳일 가능성도 있고 종전에 보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임진왜란때 왜구들이 침범한 지역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州)는 꼬라이의 영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본 블로그에서 파악된 것으로서 스코틀랜드가가 자리잡았던 지역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는 러시아로 자리매김하기때문에 과거 근세기 역사는 사실상 수수께끼같은 것으로 얽혀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최종 마무리 이야기로 할 수가 있겠다.
마무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조선은 서너 나라와 경계가 접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중국과 접촉하면서 조공국으로서 중국에 대해 매년 공납을 바치고 있다 한 사실과 꼬라이 서쪽에 있는 강 넓이가 “3레구아”라고 했다는 사실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위 지도를 적용하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지도는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1667년 런던[London]에서 인쇄한 것으로 지도제작자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그린 지도라고 하였는데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하여 중국바다와 인디즈라 한 사실을 상기하기 바라고 대고려의 영역인 라틴제국의 스페인부왕령(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일제가 이토록 꼭꼭 숨겨둔 역사사실을 풀어헤쳐 놓은데 이 글은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흑룡강은 미주리강, 압록강은 미시시피강 상류, 미시시피강 중류와 하류를 황하, 또는 야루(Yalu)라고 명쾌하게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패수(浿水)라고도 하는 압록강(鴨綠江)은 남류한다는 전제로 보아야 맞다.
미주리강, 미시시피 강과 오하이오강을 삼수(三水合爲洌水)라 할 수 있는데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서 위나라 사람 장안(張晏)이 ‘조선(朝鮮)에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3수가 있는데, 이것이 합쳐 열수(洌水)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미주리강은 몬태나 주 남서부 갤러틴 군의 로키산맥지대(해발 약 1,200m)에서 124km 길이의 제퍼슨 강(Jefferson River), 295km의 메디슨 강(Madison River), 193km의 갤러틴 강(Gallatin River)이 갤러틴 군(Gallatin County)에서 합류하여 총 3,725㎞ 길이로 흐르다가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 도착하는데 증기선으로 미주리 강을 운항하려는 시도는 1819년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지고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던 시기 1870년까지 이렇게 운행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흑룡강(黑龍江)이다.
미시시피강은 북쪽 수원(水源)으로 하는 미네소타주(State of Minnesota) 이타스카호(Lake Itasca)에서 남류하면서 세인트폴(Saint Paul)까지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상류가 되고 세인트폴(Saint Paul)지점 서쪽에서 들어오는 미주리 강 어귀까지로 물살이 빠르고 센 중류가 되며 마침내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주리강과 합류하게 된다.
글쓴이는 대체로 미시시피강 맑은 상류를 최종 압록강(鴨綠江)의미와 같게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서 합류한 미주리강과 함께 미시시피강 이때부터 막대한 양의 운반물질이 함께 흘러들어 강의 모습이 황토색으로 달라지고 일리노이 주(State of Illinois)의 카이로(Cairo)를 지나면서 동쪽에서 흘러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고 알려지고 가장 많은 수량을 공급하는 1,579 km 길이의 오하이오 강(Ohio River)과 합류하는데 이곳이 미시시피 강의 원래 삼각주가 형성된 곳이라고 한다.
미시시피강 하류에서는 삼수가 합류한 카이로(Cairo)부터 시작되며 그 모양이 완전히 달라져 거대한 황토색 물결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게 하구를 향해 흘러간다고 설명된다.
이 하류를 황색의 야로(Yalu)라고 했거나 황하(黃河)라고 했을 것이다.
이와같이 수량이 엄청난 흐름때문에 하류는 꼬불꼬불한 흔적, 절단 수류, 하적호(河跡湖), 배수로가 막힌 습지 등을 남겨놓으며 흐르는 곡류하천(曲流河川)라 하는 것이다.
이 하류는 '외륜(外輪)을 단 궁전'이라 불렸던 유명한 기선이 다녔다고 하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외륜선이 많이 왕래했음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8"에 보면 외륜이 얼나나 꼬라이 강으로 들락거렸는가를 알 수가 있다.
압록강이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간단하게 압록강 발견에 대한 것만 알리려 했는데 글을 쓰다보니 이것저것 이야기 할 것이 많이 생겨 본의 아니게 많이 글이 길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수정을 하면서도 기존 종교와 충돌이 있을 법한 선교사의 이야기는 썼다가 지워버렸다.
이번 압록강과 관계 없는 글을 삭제하고 중요한 포인트만 가려 쓴 것이 이렇다.
이렇듯 역사문제는 간단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역사찾기를 하면서 기존 역사와 충돌을 예상하여 많은 증명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번역자의 역사관을 떠나 어쨌던 박철교수 번역본을 접하면서 압록강 위치를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그분도 말했듯이 ‘섬나라 꼬라이’라 했다가 ‘일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꼬라이’라고 수정하였으며 다시 ‘쓰시마섬에서 쉽게 꼬라이로 건너 갈 수 있어 항해시간은 짧다’라고 하는 것들은 현재 한반도와 열도를 기준으로 수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며 16세기때 정확한 꼬라이 위치 내용은 이것과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점도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역사원본을 번역함에 있어 반드시 기존 한반도역사에 몰입된 상태가 아닌 깨어있는 영민한 번역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런 원본들을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며 또한 원본이라 할지라도 시대에 맞는 진본인지 아닌지의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할 것이다.
서세들의 믿을 수 없는 근세사 준동을 보았을 때 다분히 후세에서 조작질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an)의「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구술, 즉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로 이러한 그들이 사실성이 있는지가 의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근세기에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이런식이었다면 진실성은 언제든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술만을 믿고 책을 썼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구스만이라는 인물이 존재한 것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이야기다.
예수회 선교사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원칙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대항해시대나 근세사의 역사진실은 왜구나 해적들에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또한 이 구스만의 기술서는 그가 임진왜란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록면과 그것에 대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예수회동료들의 기록에 기반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의심을 낳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사실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꼬라이 사람들은 피부가 희다는 것과 수염을 보기 좋게 기르며, 사자와 호랑이를 일상적으로 사냥한다 하였고 꼬라이에는 지나가기 매우 어려운 거대한 사막(沙漠:desert)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 블로그 글 "조선강역(朝鮮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6"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도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 사막을 북아메리카대륙의 서부에 있는 그레이트 바진(Great basin), 남쪽으로 이어지는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의 모하브사막(Mohave), 그리고 애리조나주, 바하칼리포르니아 주 남부, 멕시코 소노라주의 소노란사막(Sonoran)을 들 수 있는데 전체 이어지는 폭 길이가 약 3,000 km 정도이니 만리라고 할 만하다라고 결론 지었던 적이 있다.
위에는 예문으로 게시하지 않았지만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 꼬라이는 남쪽으로는 큰 섬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바다로 약 50레구아 정도거리에 있다고 하며 이 섬은 구름도 뚫고 지나갈 정도의 참으로 높은 산이 있기로 유명하다는 말과 함께 그 산을 코라이산(Coraysan)이라고 한다 하였고 또한 이나라는 풍요해 쌀과 밀이 많이 나고 과일로는 배와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이 있으며 무한량의 꿀, 약간의 비단, 많은 면화와 마(麻)가 나며 금광이나 은광은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미시시피강의 역사를 보면 한마디로 동양문화역사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러나 위 본문에 따져본 결과 그렇지 않다.
미시시피강의 범람원은 너비 120∼320km에 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는 생각과 함께 미시시피강 유역에는 밀 ·옥수수 ·목화 ·쌀 ·사탕수수 등이 산출되고 미시시피강 중류에는 납 ·아연광상이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납 ·아연광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산출된다 하고 있다.
대신 은이 생산된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치한다.
또한 미주리강과 오하이오강이 합쳐져 내려오는 하류에서는 그 모양이 완전히 달라져 거대한 황토색 물결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내려 쏟고 고요하게 멕시코 만을 향해 흘러간다고 하였다.
바로 황하(黃河)라는 것이며 야루(Yalu)이다.
미시시피강의 존재는 1507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때부터 알려졌다 하였지만 상류 탐험은 1541년 에스파냐인 H.데소토(Hernando de Soto)가 효시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후 1673년 프랑스인들에 의해 발견되고 탐험되었다고 하였고 이어 1682년 프랑스인 르네-로베르 카벨리에 시에르 드 라살(René-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이 미시시피강 이서(以西)의 유역일대를 프랑스령이라고 감히 선언했다 한다.
1718년부터 프랑스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강어귀에 뉴올리언스를 건설하면서 프랑스가 소위 이 지역을 영토삼았다고 하고 있다.
때문에 프랑스의 파리도 아마 뉴올리언스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762년 미시시피강의 지배권은 다시 에스파냐로 넘어갔다고 하였으나 서양인들끼리 주고 받고 하다가 1803년에 미국자본에 의해 루이지애나 매입이루어졌다고 미국역사는 말한다.
안타깝지만 서양인들이 꼬라이를 목격한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루이지애나매입 따위의 미국역사는 우리가 믿을 것이 못되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통곡할 일은 위 서양인들이 본 꼬라이 번역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는 결코 압록강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학자나 지리학자들은 이를 압록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과 꼬라이가 이 강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추론하고 확정한 주장이다.
한마디로 때려 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미안하게도 압록강은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이 노릇을 어쩔 것인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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