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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서해안(West Coast of Corea)의 위치 발견
글쓴이:한부울
머리말
삼한사고(史庫)의 이상한 보관상황
해서정맥(海西正脈)은 캐스케이즈(Cascade Range),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그리고 캘리포니아 해안산맥(California Coast Range)
머리말
우리나라 역사라고 하는 한반도 역사를 바라 볼 때 늘 통곡하는 심정이다.
있어야 할 도리와 이치가 온데간데 없고 꼭지가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이 아래로 숨겨진 꼬리가 어디에 말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찾으려 하는 만큼 비례하여 의문과 의혹이 계속 쌓이는 역사찾기에 솔직히 가슴을 짓누르는 엄청난 중압감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한 중압감은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진실의 역사를 알면 알 수록 더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은 한 줌의 머리속을 어지럽게하기에 충분하다.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지금 닥친 비극적인 민족의 문신이라고 하여도 크게 상관 없어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문제가 우리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될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괴변을 늘어 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까란 난해한 질문이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있는 답은 어디에도 그저주는 것이 없다.
그러한 난해 보다 더 숨막히는 것은 비록 용케 찾았다 하더라도 누구하나 이것을 싶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우리나라의 진실의 역사가 처한 상황이다.
세계삼한역사의 거대한 몸집을 누군가가 억지로 구부러뜨려 한반도에 들어맞게 맞추어 놓은 것이 바로 반도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에 도리와 이치가 자리가 없을 것이다.
잘못된 역사이다.
이것을 우리는 쪼그라들었다, 혹은 오그라들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반도역사라 불리게 된 이유가 이런 불합리에서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큰 것을 작게 오그라뜨렸으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뼈가 부러지는 육체적인 고통을 느꼈겠지만 기록의 역사는 여백만 채우면 그만이다.
뼈가 뿌러지는 고통 보다도 더한 자존의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존의 상처는 기존 세대의 자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이어져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불합리하고 조악한 이런 한심한 모습의 반도역사를 가지게 되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크다란 전쟁에서 우리가 패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삼한역사는 세계삼한역사라는 것이며 세계사라는 변할 수도 없는 영원한 사고의 틀인 패러다임(paradigm)인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고는 하겠지만 오래되지 않았을 근세기에 어떤 세력의 준동에 의해 이렇듯 말도 안되는 식으로 역사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밝혀 알아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패러다임속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부분에서 혼란 스러운 것은 일제라는 동양사명칭이다.
이것이 영어로 "japan" 이라 하였다는 자체가 논란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깊이 조차 알 수 없는 일본제국(日本帝國)이라 하는 함정은 팍스아메리카가 된 미국에 의해 파여진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지금까지 동양명칭 일본을 열도일본세력으로 보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제란 실체는 근세기 벌어진 큰 전쟁에서 승리한 세력이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간과한 나머지 패전국인 열도일본세력을 일제라고 알고 그것에 몰입된 것이다.
결국 반도역사는 패전국인 열도일본세력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조선 끝자락에서 대한제국이 생성되고 다시 대한제국의 끝자락에서 일제가 부당하게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였으며 실제로 점령하여 조선총독부를 두었다는 역사사실이 남아 있지만 그걳은 한반도와 열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이다.
역사 주무대가 아닌 이상 이러한 틀도 조작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반도역사뿐만아니라 동아시아대륙사가 말하는 모든 사실은 옮겨진 역사일뿐이다.
한반도에 삼한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청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더하여 러일전쟁이 발생했다 하는 것은 신흥세력인 동양일본만들기라는 것이다.
이 일본은 신흥세력으로서 조선을 집어삼키고 중국을 상대하였으며 러시아를 혼줄을 낸 것이다.
때문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글쓴이가 지속적으로 따져 들어가 보니 결국 열도일본세력은 그럴 능력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열도일본세력들은 미국에 의해 동양일본으로서의 역사교육과 정치적인 인질을 만들어 이들을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자 일본열도에 옮겨거주하게 하고 신생국가를 세웠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구분이 불가한 정도의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분리 생성시키면서 하나의 역사를 감쪽같이 감추거나 혼미하게 만든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본래 대조선은 해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하였던 대조선 동해, 또는 남해에서 해안 거류민들을 상대로 폭악하고 잔인하게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던 무리였기 때문에 거주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이 버지니아에 처음 개척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대조선에서는 이들의 거주권을 박탈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이 일본이고 잉글랜드로서 잉글랜드역사학자들이 근세기에 그들의 치욕적인 서양사는 감쪽같이 숨기고 동양일본을 만들어 대조선을 동양에서만 상대한 것처럼 꾸며놓은 것이다.
그 이후 북아메리카대륙사와 별도로 동양에서 허구사실이 생성되는데 바로 1853년 미국의 해상깡패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가 우라가(浦賀)에 입항한 것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특유의 갈취방법인 함포외교로 불평등조약까지 맺었다 하면서 이미 동양에는 나약한 조선이 있기에 그들이 대조선에게 품은 억하심정을 동양일본역사에서 화풀이 한 것으로서 1885년에 실존인물이라고 볼 수 없는 일본개화기 사상가라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등장시켜 동양역사의 원숭이가 감히 정조론(征朝論)운운하면서 허구의 동양일본이 해적출신 서양의 개가 되겠다고 탈아입구(脫亞入毆)를 부리짖던 것은 잉글랜드가 주도하는 서양역사를 만들기에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허구의 동양일본은 1895년 중국을 상대로 청일전쟁을 도발시켰다 하였고 다시 미국이란 유대자본의 힘을 빌어 1905년 당시 세계지도국으로 존재하던 대한제국 즉 러시아(로마노프왕조)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이 러일전쟁이다.
물론 당시 국가이름도 분명치 않는 미국은 "엉클 샘(Uncle Sam:US)"으로 족했고 금융자본조직체제를 지배하던 세력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향후 동양에서는 일본을 서양에서는 미국이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전초작업으로서 동양에서 대조선과 중국, 러시아를 능가하는 강한 일본을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역사를 부풀리고 확대시켜 동아시아대륙의 강자로 군림하게 만든 것이 지금의 혼란 역사의 끝자락이고 본질이다.
이것은 미국이란 금융자본조직이 북아메리카대륙(서양)과 동아시아대륙(동양)을 모두 지배하기 위한 알루미나티의 세계지배야욕에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만든 동양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도발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되는 태평양전쟁이다.
진주만이 하와이에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글도 곧 올릴 것이다.
대조선을 지배하고 중국에게 도발하였고 다시 러시아에게 도발하여 한 껏 몸값을 올린 후 뻔한 결과를 만들어 미국을 적으로 삼아 무한 충돌을 야기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동양일본을 가상적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도 힘겹게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 한 후에야 비로소 일본왕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전제하에 동양역사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과 당위성으로 서양우월주의 역사 최후 종편을 마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동양일본이라는 미국의 전쟁상대는 바로 로마노프왕조로 가려진 대한제국이다.
이러한 논제의 이야기는 이미 본 블로그 글[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전18편에 이르는 "대한제국 시리즈"에 의해 총체적으로 정리된 사실들이다.
이렇듯 감쪽같이 만든 역사이지만 헛점은 있는 법, 패전국인 열도일본은 갑자기 미국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처리되고 만다.
실제로 미국과 전혀 적대하지 않았고 전혀 미국에서 피해를 주지 않았던 정치주체이기 때문이다.
미국전쟁사에서도 인정하였듯이 열도에 있었던 일본세력들을 합칭 전범국(戰犯國)이라는 딱지를 붙였음에도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뭇솔리니처럼 가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일본왕 히로히도는 오히려 미국과 연합국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받는 인물로 나타난다.
이것은 동아시아대륙에서 피해를 본 피해당사국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의 처사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근원적인 모순된 조치이며 불합리한 결정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따진다면 동아시아대륙에서 열도일본세력에게 크게 피해를 본 당사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대만인들은 지금도 일본인들을 선호하고 한반도인들을 비교적으로 증오한다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함대를 상대로 일본왕의 이름을 앞세우며 가미가제특공대라는 자살까지 강제한 사실들이 있음에도 어째서 히틀러나 뭇솔리니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미국에 의해 처단되지 못했던 것인지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원자폭탄 두방이 면책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던가?
더군다나 미군병력은 태평양 도서 섬에서만 미군병력이 들어갔을 뿐 열도본토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치를 않았다는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식민지란 멍에를 쓴 우리입장에서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독일이 2차세계대전의 주요 전범국이기 때문에 동서독이 분단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 어째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무모한 불장난을 한 일본열도는 무사하게 만들고 오히려 피해를 본 한반도만 분단되게 만든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도무지 이해가 불가한 처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론적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상황은 보통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불합리와 근원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무엇때문에 미국과 연합국은 이러한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까?
당시 모든 나라의 미래까지 운명을 쥐고 생사여탈권지권을 가지고 세계국가질서를 누가 제어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촛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에서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아(core)호를 대조선에 헌납한 사실은 1668년 발행된 네덜란드 식민지문서 제255호에서 밝혀진 것으로 당시 코리아가 생사여탈권(與奪權:life-or-death authority)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는 바로 팍스아메리카란 미국이다.
이것이 일제이다.
이것은 동서양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하나의 체제의 주체가 대조선이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일본이 대조선을 식민지하였다는 사실과 대조선의 후신이 대한제국 즉 고려까지 쓰러뜨린 것이 일본이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을 제거한 것은 소위 동서양을 합한 세계를 통제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동양문화를 서양문화가 점령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로 미국이 모든 역사를 제어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들은 한반도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세력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도 동시에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세계삼한역사의 주요 맥, 포인트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 이러한 사실들을 한반도인들은 하루빨리 사고정리가 필요한 것으로 괜한 열도일본인들에 의한 트라우마(trauma)를 스스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일본열도는 전통적으로 고려(타타르)가 지배한 땅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삼한사고(三韓史庫)의 이상한 관리상황
우리나라의 역사서 삼한사고(三韓史庫)가 과연 한반도에 보관되었던 것은 맞는 것일까?
한마디로 "절대 아니 올씨다"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
"와 "하니 피크(Harney Peak)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1"를 통해 이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보았다.
백과사전 자료에 보면 고려실록 또는 고려왕조실록(高麗王朝實錄)은 고려의 태조왕건부터 34대 공양왕까지 474년간 편년체(編年體)로 편찬된 사서로서 기록으로 보자면 분명 충주사고(忠州史庫)에 조선 태종(太宗,1367-1422,재위:1400-1418)까지 보관되어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1392)부터 가계가 몰살했다 할 수 있는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까지 25대 472년에 걸쳐 총 1,893권, 888책이 간행되었다고 하는데 거의 소실 당해 남아 있는 것은 요약편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솔직히 이쯤되면 완전히 사서란 존재는 절멸한 것과 같다.
조선(朝鮮)초기의 태조, 정종, 태종의 3대 실록은 처음 각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창덕궁(昌德宮)내의 춘추관(春秋館)에, 1부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보관했던 곳에 고려실록과 함께 충주사고(忠州史庫)에 간직하였다고 하였다.
참으로 충주사고는 주요한 곳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왕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만 합치더라도 그 량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복사복으로 만들었다 했느니 합한 량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것 뿐만 아니다.
본 블로그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 "편의 글을 보면 고려에 쌓인 서화(書畫)가 산처럼 많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량의 사서(史書)가 엄격하게 장소와 관리가 이어지면서 전해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 대목이다.
그 이후 부족한 기록이지만 사서(史書)관리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세종이후 4대 춘추관, 충주(忠州), 성주(星州), 전주(全州)사고가 1445년에 만들어지고 보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반란이었던, 임진지역(壬辰之役)이라고 하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으로 인하여 전주사고(全州史庫)만 무사하고 춘추관, 충주(忠州), 성주(星州)사고가 소실이 된 것으로 거의 당시 모든 사서가 사라졌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사서가 사라졌다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뒤 불과 10년도 체 되지 않는 시간동안 복구하여 1606년에 5대사고(춘추관, 마니산,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사고가 만들어져 보관되다가 또 다시 반란인 1624년 관서(關西)지방에 도원수(都元帥) 이괄이 난(李适─亂:1624)을 일으켜 춘추관(春秋館)사고가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춘추관이 이괄의 난이 일어난 상황과 연관되게 하였고 다시 1633년에는 만주(중원, 변경, 후금, 강남)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後金:1616-1636)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 지례겁을 먹고 조선 조정이 묘향산(妙香山)사고를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赤裳山)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본 블로그 글"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 와 "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8"에서 이미 목구멍 후금(喉衿), 만주(滿洲)가 중앙아메리카에 존재한 사실을 밝혔다.
만주에서 북상하여 만날 수 있는 곳에 분명 묘향산이 있었기 때문이며 붉은치마 같은 적상산은 후금이 근접할 수 없었던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이때까지 내부반란에 의한 것은 소실되었을 것이지만 만약 외침이라면 빼앗기고 유출된 것이기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부반란도 문제지만 외부적이라고 하면 해적들일 수밖에 없다.
해적이라 함은 서세들이라고 할 수있는데 잉글랜드와 프랑스, 포르투갈, 미국(네덜란드)등 이들이 박물관이란 이름 하에 보관한 것들 중에 삼한사서가 없다라고 단정내릴 수만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서 정도의 모습이 아닌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형태의 사서(史書)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세계 유명박물관 어느곳에 보존되고 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세계유명박물관 루브르(Louvre), 영국(British), 바티칸(Vatican),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1782년 정조시대 강탈된 규장각 의궤(儀軌) 사본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가 대여갱신방식으로 2011년에 한반도에 들어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마니산(摩利山)사고의 실록은 1660년 강화도내의 정족산(鼎足山)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때 청(淸:1636-1912)군대에 의하여 크게 사서가 파손 되었다 하여 현종(顯宗,1641-1674,재위:1659-1674)때 사서를 보수하였다 하였으니 주요한 사서들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마음놓고 보수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한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살아남은 것이 조선말기까지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의 전등사(傳燈寺),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의 월정사(月精寺),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의 안국사(安國寺), 태백산사고(太白山 史庫)의 각화사(覺華寺)에 보관된 것이라 하였는데 마치 현재 불교 사원이나 절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사(寺)가 과연 어떤 형태의 건물인지 우리는 알수가 없다.
사(寺)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절 즉 사찰이외 고대 중국에서 사법을 관장하던 중앙관서(官署)를 대리사(大理寺)라고 하였고 의례를 관장하던 관서(官署)를 태상사(太常寺)라 한 것처럼 관서를 말하였거나 이슬람교의 사원(寺院)를 사(寺)라 하였던 사실 등을 참고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하니피크(Harney Peak)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1 "이란 글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내 로키산맥(Rocky Mountains)동쪽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서 블랙 힐스 국유림(Black Hills National Forest)이 자리하는 것으로 블랙 엘크 자연보호구역(Black Elk Wilderness)에 있는 하니피크(Harney Peak)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을 글쓴이는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하였던 바가 있으며 물론 이와같은 시각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본 것이지만 적어도 귀중한 사서를 보관할 사고(史庫)가 되려면 화재감시탑처럼 이렇듯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이중 삼중으로 엄중하게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반도역 말처럼 외침이 많았던 삼한사정으로는 어쩌면 당연한 관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남아 있는 사고(史庫)들의 모양새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붉은치마란 뜻이 있는 적상산(赤裳山)사고는 지금 북한에서 보관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적상이라는 뜻에서 보면 콜로라도 고원(colorado plateau)에는 붉은 바위 산(red rock mountain)들이 많은데 그곳 이디쯤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태백산(太白山)사고는 1910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이관되었다가 해방후 서울대규장각에서 정부기록보존로 옮겼다고 하였으며 정족산(鼎足山)사고는 총독부관리하에 있다가 경성제대를 거쳐 서울대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오대산(五臺山)사고인데 이것 역시 총독부관리하에 있다가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동경제대(東京帝大)로 가져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1923)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관동대지진이라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열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어쨌던 이들 모두를 최종 소실로 처리한 것이다.
이 정도라면 과연 어떤 것이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단 말인가?
또한 태백산(太白山)사고는 848책으로 1910년 조선총독부(미국)에 이관되어 관리되다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4년 동안에 경성제대(京城帝大)에서 초고(草稿)나 원본(原本)이 남아 있었다는 것으로 이 저본(底本)으로 하여 실록전체를 사진판으로 영인한 일이 있다 하였고 이 때 30부밖에 출판하지 않았음에도 이것조차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가고 국내에는 8부 밖에 두지 못했다고 하고 있다.
왜 이들은 남의 역사, 한반도 역사에 집착했을까?
해방후 미군정(美軍政)시대인 1946년에 설립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25 대 472년에 걸쳐 총 1,893권, 888책이 간행되었던 실록을 48책(양장본)으로 축소영인(縮小影印)하였다고 하는데 영인이란 말은 사진을 찍어 인쇄하는 행위로서 미군정전(前) 식민시대에 역사사서를 축소한 사실과 다를 바가 없다.
오대산(五臺山)사고 중 남아 있는 책이 74책이라고 하고 27책은 경성제대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며 이것에서 2006년 오대산사고 74책 중 나머지 47책이 일본에서 한국에 반환처리된 상태라고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반도역사에 맞춰 완성시킨 자료로서의 형편없는 가치만 인정될 뿐이다.
글쓴이의 안타까운 생각을 말하자면 자주적인 역사관념에서 쓰레기보다 못한 이러한 역사사서는 차라리 반환처리를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
어쨌던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반환받았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만족하겠지만 이것은 사실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사서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진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한심한 이야기 그 자체라 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남의 나라에 있었던 사서가 온전할 턱이 없음에도 한반도 사학자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이상할 뿐이다.
문제는 반도역사가 본질적으로 세계삼한역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사서들은 이미 세계 역사학계를 휘어잡고 있는 절대적인 세력에 의해 역사전반적으로 편집되었거나 새롭게 각색, 조작 수정된 사서로서 본래 역사사서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것을 한반도인들은 신주단지처럼 섬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 할 것은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고종, 순종실록은 다분히 심각한 역사왜곡의 표본이라고 단정지어도 될 만큼 정체성이 결여된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의 체제, 하나의 역사가 종결된 것은 아마도 철종시대였던 것은 분명하다.
대조선의 하나의체제에서 종결난 것은 철종시대가 마지막이었고 철종계보가 완전히 파탄이 나고 왕족직계가 완벽하게 절멸한 1863년을 끝자락으로 모든 삼한의 진솔된 역사는 종을 쳤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1881년까지 연장은 되었겠지만 허수아비, 꼭두각시의 만들어진 왕조와 왕실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을 일제시대때 고종실록52권 52책, 순종실록 22권 8책, 도합 74권 60책이 더 간행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일제를 내세운 또 다른 세력들이 원하는대로 아예 한반도 역사에 맞게 창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게 짐작되는 것들이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을 조선왕조실록계보로 보지 않는 다는 학계의 주장은 이런 사실을 뒤받침하는 것이며 일부라고 하지만 양심적인 학계의 인사들은 이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종과 순조는 삼한시대 끝자락에서 방계(傍系)왕족이란 인위혈족(人爲血族)한계에서 대조선을 장악한 세력들로부터 세우진 후 한반도 왕족처럼 꾸몄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렇듯 반도역사가 온전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나름대로의 원칙에서 알 수 있는 것인데 사서관리가 정상적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애초부터 모든 실록은 당쟁 등 정치적인 이유로 수정(修正)되거나 개수(改修), 보궐(補闕)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빌미로 일제강점기를 핑계로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런 식으로 수정 또는 개수 보궐 되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결과를 단순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전란이나 반란으로 인해 보관된 사서들이 불에 타 없어질 것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란이나 반란을 예상하지 못하고 한반도 사고들처럼 무방비한 상태로 허허벌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취할 수 있는 공간에 보관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전문가가 아니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반도에 외세침입이 그렇게도 빈번했다고 하면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한반도 사서들은 그래도 용케도 살아 남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오히려 당혹스럽다는 사실이다.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사고들을 보면 일반 곡식창고가 거의 가를 바가 없다.
이런 곳에 사서를 보관했다는 자체가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결국 어쨌거나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지만 결국 삼한인들의 사서관리들이 절대적으로 무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예를 보더라도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던가?
그래도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럽3대박물관과 미국박물관에서 유물이 넘친다.
전란, 전쟁의 핑계를 댈 것도 없이 오천년역사 또는 일만년 역사라고 하는 삼한역사주체들은 정말로 무능했던 것인가?
이러한 허점투성이에 또 하나의 핑계거리가 되어버린 6.25사변까지 겹쳐진 상황이니 믿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없다.
예를들어 한반도에 건축된 고대 건축물에서 150년-200년 이상 년수를 가진 건물이 있기나 한 것인가?
그러나 유럽에도 인류가 가진 전쟁중에 가장 혹독하고 참혹했다고 하는 1.2차의 큰 전쟁을 두번씩이나 겪었다는 사실과 이것외 시대마다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다고 하는 상황을 보면 한반도 역사유물보관상태와 천양지차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역사가 살아 있다고 하는 고대 유명유럽도시에는 중세기 건물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유럽 유적과 건물들은 수많은 전쟁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 말고 다르게 이야기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유독 반도역사만이 외침이 잦았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과장된 것으로서 소실의 빌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역사와 단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소실(燒失)은 불에 타서 사라지거나 그렇게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불에 탈 소(燒)가 사라질 소(消)로 들리는지도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소(燒)가 훼(毁)로 변이되어 부수다, 파괴하다, 훼손하다, 망가뜨린 사실을 어디까지나 예상하지 못한 천재지변과 난리지변에 빌미가 된다는 사실들은 조작한 세력들에게 조금의 위안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도역사의 이러한 해석과 설명을 들을때마다 숨이 막힌다.
근세기에 서세가 신흥세력으로 등장하고 세력판을 잡으면서 동양과 서양역사를 분리할 필요성을 느꼈고 때문에 동양에서 동아시아대륙역사를 만들어야 했으며 서세의 구상에 의해 처음부터 역사판짜기가 시작되면서 왜구의 시나리오가 핵심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틀이 짜여진대로 편집하다보니 기존 사서들의 행방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새로운 역사만들기와 상충되거나 방해되는 것들은 사람, 건물, 사서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소실로 처리하고 새로운 역사창조에 열을 올린 것이다.
그 결과 끊임없는 열도일본인들의 헛소리와 반도역사가 만든 한반도인들의 끝없는 피해의식, 강박관념,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게 만들었으면 이제는 이에 더하여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심한 열등의식을 한반도 모든 구성원들이 앓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걱정될 뿐이다.
생각해보면 일제 강점기때 자그만치 20만여권의 사서를 소각했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최면이다.
우리나라 역사사서가 씨알이 말라 버렸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반도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에 역사정체성이랄 것도 없다.
솔직히 어린세대들에게 이러한 역사를 가르쳐서 그들에게 결굮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조성의 무능함과 비참한, 모욕적인 역사사건들에 의해 불필요한 피해의식만 더욱더 키울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피해의식이 강하다보면 노예근성이 싹을 트게 된다는 점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참에 한가지만 더 첨가한다면 참으로 신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에 등장하는 삼한의 제왕들이나 신하, 무사들의 초상들을 보면 하나같이 일률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서글픈 역사인 것이다.
우리역사 사실에서 이런 못불인견이 어느정도인가 하면 본 블로그의 글"X-ray 사진, 조선관리 청대(淸代) 의복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초상화 http://blog.daum.net/han0114/17049750"에서 이야기 한 것으로 심히 창피할 정도이다.
조선시대 신하들의 초상화에 적외선을 비추어 보니 조선관복을 이중으로 그려놓은 것이 들통나 버린 참으로 해괴한 상황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해외 토픽감이다.
일만년의 역사를 가진 국민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갓 쓰고 있는 코카서스얼굴(Caucasian race)"의 사진를 보고 서양인도 조선관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에서 충분하게 살펴보았던 이야기다.
코카소이드(Caucasoids)의 공통의 형질에서 볼 때 머리는 중두형(中頭型)이며 키가 크고, 눈빛은 청색 내지 담갈색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코는 좁고 높고 입술은 엷은 것이 특징이라 하지만 코카소이드라는 결코 백인(white)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헷갈리는 이야길지 모르지만 1962년 충북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 확인된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청동기시대 인골로서 키 174cm의 두개골이 북구유럽형 장두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2005년 강원정선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8-7세기의 사람으로 DNA 염기서열이 영국인과 비슷한 170cm의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백인이 오래전부터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문제로서 동아시아대륙에 본래 백인들이 거주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무조건 최면에 걸려 동아시아대륙은 우리와 모습이 똑같은 몽골리안만이 살았다고 단정지워버리는 형태에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조선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단일인종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예술품 역시 모조리 중국예술품의 모사라고 하여 제대로의 가치를 전달하길 꺼려하는 것도 한반도역사이다.
반도역사가 이렇게 기술하는 것에서 청소년들이 조선시대 예술가들은 전부 중국 것을 보고 빼겨그리는 모사(模寫)만 할 수 있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게 될까바 솔직히 걱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주요한 조각, 서화, 뛰어난 예술작품이라면 죄다 비슷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소위 감정가들조차도 모사(模寫)라는 말을 즐려사용하고 필연적으로 한반도에는 진품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록에 모사(模寫)는 조선말기에 청조가 조선의 서화를 모사했다고 나오지만 이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현재 한반도 고사감정사를 포함한 역사 전문가들의 일관된 상식이라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에는“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書冊)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말한 것을 그들은 어찌 알려하지 않는가?
그 만큼 반도역사의 뿌리가 허약하고 제멋대로라는 이야기다.
해서정맥(海西正脈)은 캐스케이즈(Cascade Range),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그리고 캘리포니아 해안산맥(California Coast Range)
이제부터 서양인들이 지칭한 'COREA'가 고려(高麗)인가 조선(朝鮮)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 아다시피 고려는 1392년 이성계에 의해 망한 나라라고 배웠다.
때문에 고려(高麗)이후 조선이 승계받은 것이기 때문에 19세기 이양선이 등장하면서 호칭된 "COREA" 는 당연히 역사주체 조선(朝鮮)을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곧 반도역사가 주장하는 것일뿐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달라야 한다.
뉴욕(시러큐스)[ProZ.com]
Explanation:"Tauxem"was the name of Koean Peninsula which is wrritten on a map. The map was made by geographer `Teixeira` who is belong to Kingdom of Spain 's royal family. The map was published in Begium in 1595 and Korea Penisula was drawn in the form of island which cotains a geographical name as "corij" and "tauxem".
And also the name of Koean Peninsula was called by Wetern people in a various way like a Core, Corea, Cory, Corij, Coria, Coreae, Caoli, Kaoli, Corais, Corai, Coray, Couray, Corey, Corei and Corie which is reffered to as The Goryeo Dynasty (918-1392)
In the same way , Joseon (1392-1910) (also Chos?n, Choson, Chosun) was also called Tiauxen, Tiauxem, Tauxem, Taucian, Chau Sien, Cioscien, Chao Sien, Tchao Sien, Tschao Sien.
위 번역자사이트 "프로즈"의 자료를 보면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분리하여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포르투갈 출신으로서 스페인에 소속된 텍세이라(Domingos Teixeira)`가 1595 년 벨기에(Begium)에서 발표한 포르투갈 지도(Old portuguese map)에 한반도가 타우젬"Tauxem"과 "corij(코레이)"라고 쓰여있다는 사실과 서양인들은 Goryeo 즉 고려(高麗)를 Core, Corea, Cory, Corij, Coria, Coreae, Caoli, Kaoli, Corais, Corai, Coray, Couray, Corey, Corei, Corie 로 칭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Joseon"조선(朝鮮)도 Tiauxen, Tiauxem, Tauxem, Taucian, Chau Sien, Cioscien, Chao Sien, Tchao Sien, Tschao Sien 으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고 특히 조선을 칭하는 것들은 모두 남아프리카네덜란드어(South African Dutch language)라고 하는 아프리칸스어(Afrikaans)라는 것도 참으로 특이한 것이다.
동시에 코리아 북쪽에 Tauxem 이라 하였고 남쪽에 Cory로 표기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할 것이다.
이 설명에서 코리아 반도(Koean Peninsula)라고 하였다는 사실과 섬 형태로 그려졌다(drawn in the form of island)는 사실들은 동아시아대륙 한반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바하칼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를 말하는 것이다.
Nouvelle et exacte description du globe terrestre reveue corrigée et augmente´e suivant les derniéres relations des Anglais et Hollandois. Par Guillaume Blaeu 1645.
네델란드 지도제작자 블라우(Willem Janszoon Blaeu:1571-1638) 1645년지도를 보면 캘리포니아와 코리아의 지형모습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려(高麗)는 조선(朝鮮)과 적어도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까지 공존했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그 이후 조선을 이어 고려가 끝까지 세계를 지배했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고려라고 불리었던 모든 명칭들은 '가우리' 뜻 '가운데' 핵심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과 그것을 세계중심, 'core'라고 영어로 의미가 전달된다는 점 등에서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 동호(東胡)라고 하는 키타이 거란(契丹:Khitan), 이것을 지나(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진단(振旦), 진단(振丹), 진단(眞丹), 신단(神丹), 신단(神旦), 전단(栴丹)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중국 명칭이라 한 사실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을 삼한역사의 근원지로 삼을 때 본 블로그 글 "가자미(鰈)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성 접역(鰈域) http://blog.daum.net/han0114/17049902"에서 보았듯이 북아메리카대륙은 접역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을 단군신설(檀君新說)에서 접계(鰈系), 접역(鰈域), 접국(鰈國), 접허(鰈墟), 접해(鰈海)라 하였고 접수지향(鰈水之鄕)이라 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사실이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고려실록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를 새롭게 만들거나 조작하기 위해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가 생성된 것을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서로 정보를 공유할 정도로 전통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매우 가까웠다는 의미이지 고려가 없어 조선이 대신 하였다고 생각하면 바로 반도역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당리화(棠梨花)와 압록강 http://blog.daum.net/han0114/17049507"에서 관직에서 중국의 품계가 18위 품계인데 반해 조선시대 제24위의 품계(品階)로 이를 포용하는 것이며 차이가 6품계가 생기는 것은 당시, 명, 청으로 옮겨지는 과정의 중앙정부의 품계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있다.
조선(朝鮮) 고려와 중국을 합한 품계를 사용하는 대관직의 국가 하나의 체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에서 살펴본 바로는 고려는 때로는 호(胡)라 명칭으로도 불리었고 조선역시 호(胡)라 하였는데 호(胡)는 중국북방민족 또는 서방민족으로 호칭된 것이지만 바로 아메리카대륙이다.
고려는 요(遼)이며, 송(宋)이고 금(金)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몽골 타타르와 키타이가 고려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근세기까지 고려(高麗)가 오스만제국이란 이름으로 하여금 1922년까지 어쨌던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朝鮮)은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변경하기전 1897년이 아니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1881년에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이 역사적으로 공존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1816년 바실 홀 일행이 도착한 'COREA'는 조선(朝鮮)이 아니라 고려(高麗)를 뜻하는 것으로 그들은 영어로 고려(高麗)를 Core, Corea, Cory, Corij, Coria, Coreae, Caoli, Kaoli, Corais, Corai, Coray, Couray, Corey, Corei, Corie 에 이어 'COREA'라고 통칭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코리아'COREA'란 명칭은 신라와 함께 스페인과도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으며 더우기 생물학적 판단에서 볼 때 남아메리카대륙의 적지 않은 식물 속명(屬名)에서 코리아세움(coriaceum)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COREA'는 삼한을 통칭한 것이다.
그렇게 볼때 어떤 거대한 영역이나 지역에서 동쪽은 조선(朝鮮)의 영역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쪽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들은 미국과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러게 총독부가 생성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조선(朝鮮)의 서쪽경계를 넘어서면 그곳에 고려(高麗)라는 거대한 나라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아메리카대륙 전역에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또한 가능하다.
한 예로 고려의 5도에서 바로 황해도에는 남북으로 뻗은 산맥을 해서정맥(海西正脈)이라 하였는데 남북으로 길게 똑 바르게(正) 뻗은 산맥(脈)이라는 뜻의 이 지형을 한반도 해서(海西) 즉 황해도에는 눈딱고 찾아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기이한 현상이 존재한다.
해서라는 것은 바다가까이에 있는 지역의 뜻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현재 한반도 황해도에서 서쪽에 곧게 뻗은 산맥을 찾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존재하였다던 해서정맥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때문에 이 해서정맥은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의 캐스케이즈(Cascade Range),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그리고 캘리포니아 해안산맥(California Coast Range)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본 블로그 글 "황해(黃海)지명에 대한 문제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61"과 “조선강역(朝鮮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6 ”에서 충분히 따져 설명한 이야기다.
세계삼한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고려(高麗)는 조선(朝鮮)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양선이 코리아해안에 들어닥칠 때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들은 쉽사리 지구 한바뀌를 1,000톤급의 범선으로 휘 돌 수 있다 하였지만 이것을 믿기 보다는 우리의 세계삼한역사를 믿는 쪽이 오히려 현명할 것이다.
고려(高麗)의 행정구역이 5도(道) 양계(兩界)에서 양광도(楊廣道)·경상도(慶尙晉州道)·전라도(全羅州道)·교주도(交州道)·서해도(西海道)의 명칭에서도 조선(朝鮮)과 행정구역이 다를 뿐만아니라 고려 행정구역에는 조선에 없는 서해도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계속:이양선 알세스트호와 리라호의 괴이한 이력-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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