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동경과 런던직통열차계획

한부울 2015. 7. 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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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과 런던직통열차계획

 

글쓴이:한부울

 

시베리아철도 태동
시베리아철도건설 완료시기
시베리아와 만주(滿洲)의 위치
러시아가 아시아대륙에 존재했다는 모순
일영직통철도계획

 

시베리아철도 태동

 

우리가 현재 대륙횡단철도라고 하는 것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 만주횡단철도(TMR), 몽골횡단철도(TMGR), 한반도남북횡단철도(TKR)까지 합한 이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시베리아횡단철도이다.

대한제국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야기하려면 먼저 로마노프왕가(House of Romanov:1613-1917)의 알렉산드르 3(Alexander III:1845-1894,재위:1881-1894)가 지시하고 시작한 시베리아횡단철도(Trans-Siberian Railway)의 공간적 시간적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실체가 무엇인지 먼저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6박 7일을 달려 종착역인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총 60여 개의 역에서 정차한다 라고 되어 있고 이 철도사용 궤(Track gauge)가 바로 본 블로그 글 "철도 궤(車軌)로 보는 러시아와 인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2" 에서 살펴보았듯이 1,520 mm(4 ft 11 27⁄32 in) 러시아궤로 부설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처음 시베리아철도가 부설된 곳이 현재 아시아대륙의 판도와 맞는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우선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 시베리아철도가 북아메리카대륙에 부설된 것임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시베리아철도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부설된 것이 사실일지라도 다르게 이름붙여져 있어 우기라 알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뒤 시베리아철도는 뒤늦게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8-1953,재임1924-1953)의 "철의 장막"이라고 하던 일인 독재 소련강압통치기간동안 얼마든지 이 사실이 조작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염려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구글위성으로 직선거리를 재어보면 횡단거리가 약 4,140km 정도가 된다.

반면 아시아대륙북부를 횡단해야 하는 시베리아철도 총로선 길이는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 역(Moscow Yaroslavskaya railway station)에서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까지의 거리가 배가 훨씬 넘는 거리 9,289 km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는 두개의 거대한 산맥이 있다지만 양쪽에서 동시작업이 된 결과에 대한 사실과 작업환경조건에서도 대평원과 같은 온화한 지역으로 작업자들이 심한 추위를 느껴야 할 동토 아시아땅 결코 시베리아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조건임을 알 수 있는데 아시아시베리아 건설조건이 불리하다는 것은 그만큼 같은 조건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직히 아시아대륙은 철도를 개설하고 건설했다고 모든 자료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과 독립적인 관계에서의 결과물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대동아공영권을 장악하고 비로소 미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를 조정 또는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걳이며 또한 이러한 조건은 결국 군수물자 수송의 불리함도 분명했다는 가정이 충분한 것으로 수송문제에서 커다란 결정적 전략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아시아대륙철도건설 조건은 북아메라카대륙과 같은 수준에서 볼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라도 동시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로의 구체적인 건설상황을 한번보자.

서쪽에서 센트럴퍼시픽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가 1863년 새크라멘토(Sacramento)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철로를 건설해나갔고, 동쪽에서는 유니언퍼시픽철도(Union Pacific Railroad)가 서쪽을 향해 1865년 네브래스카주(Nebraska) 오마하(Omaha)에서 공사를 진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쪽에서는 험난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뚫고 9개의 터널공사를 수행해야 했고 동쪽 유니언퍼시픽사의 아일랜드계 노동자로서 이주민들과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들로서 가칭 인디언의 공격과 로키산맥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1869년 5월 10일 두 철로를 합해 총연장 약 2,826km 거리의 2개의 철도가 본격 시공 4년 만인 유타 주 프라먼토리(Promontory, Utah)에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두 회사가 동시에 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산술적으로 8~12년이 소요 되었을 것이며 그 이상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당시 3000km 철도공사를 양쪽이 아니라 한 개 회사 만이 시공했을 때 8년정도 소요된 것이라면 거리가 3배가 넘는 시베리아철도라면 산술적으로 거의 24~36년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 지형과 기후의 불리함이 더 한다면 아마도 30~40년 이상 걸릴 수 있는 거리의 아시아횡단철도정체라는 사실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철도건설 완료시기

 

그렇다면 이를 냉정하게 한번 보자.

현재 아시아대륙 북부에 설치된 시베리아철도는 언제 완성된 것일까?

근대사는 1916년이라 못을 박는다.

이 물음에 앞서 과연 실제 1916년에 완성되었던 것이라면 유대인정권 볼세비키에 쫓긴 제정 백군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였을 것이고 아마도 러시아의 또 다른 국가가 아시아동부에도 존재했어야 맞다.

그러나 소련(蘇聯:Soviet Union:1922-1991)이란 괴물정권인 스탈린이 철의 장막이란 방패막을 쳐 세계모든 정보를 차단해버렸다.

이것은 마치 만리장성을 새로 축조한 문화대혁명과 진배가 없다.
소련 국내 모든 정보들이 해외로 나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외부정보 또한 소련 국내로 들어오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역사학자들이 모를 숙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베리아철도의 진실이 무엇인지 일반 우리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철의 장막(鐵의帳幕)의 기간이 1945년부터 1991년이니 거의 46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어쨌던 이시기는 아시아대륙에는 비극적인 시기였다.

동부유럽과 서부유럽이 갈라진 냉정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메리카대륙만 빼놓고 모든 곳에서 이데올르기가 판을 치던 시대였고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 경계라는 뜻의 철의 장막은 어쩌면 1920년부터라는 것을 알 때 더욱 이 시베리아철도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암흑같은 역사조작물이 생성되던 시기를 어찌 역사시대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근대사는 아시아시베리아철도가 1916년에 완성된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때문에 적어도 현재 아시아대륙의 시베리아횡단철도는 1916년 로마노프왕가가 완성한 시베리아횡단철도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다시 추증하자면 현재 아시아시베리아횡단철도는 시작도 소련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완성도 소련시대에서 완성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러시아 영내만을 통과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는 1916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총길이 9288㎞의 시베리아횡단철도(Trans-Siberian Railway)부설의 역사는 1891년 초 마침내 황제의 칙령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설을 공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조선이 프랑스화한 것을 감안한다면 분명 시베리아건설자금이 프랑스자본이라 하지만 조선자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시베리아 철도는 삼한자본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프랑스인자본들이 즐비했다는 것은 곧 그곳은 조선의 통치력이 미치던 곳이라고 풀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철도 완성시기가 1916년이라 한다면 1891년부터 약 25년이 소요된 것이다.

1916년이라면 대체로 북아메리카대륙의 횡단철도가 거의 마무리되고 간선들이 다시 설치될 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근대사가 말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예정선은 종래의 시베리아 가도(街道)를 따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는 것도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시베리아(Siberia) 즉 사백력(斯白力)이란 지명이 존재하던 곳은 다름이 아닌 북아메리카대륙 툰드라지역이라는 것을 알 때 지명자체가 이처럼 명확하지 않는데서 시베리아가도라한들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론 이런 이야기도 나타나는데 1887년에 로마노프왕가정부가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여 1888년 프랑스로부터 대규모 차관도입이 성사된데다가 영국이 만주에 철도부설을 기도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을 계기로 로마노프왕가 정부는 189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착공하였으며, 1897년에는 부분적으로 첼랴빈스크(Chelyabinsk)에서 이르쿠츠크(Irkutsk)가 개통되었다고 하였다.

로마노프왕가의 재정상태가 과연 어떠했을까?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 에서 고려(高麗)천자가 만국조천(萬國朝天)이었던 것처럼  세계 각국의 공사가 황제에 배알모습의 상징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를 주관한 러시아의 차르(Tsar)인 니콜라스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재위:1894-1918)역시 마치 중화(中華)의 천자인 것처럼 나타나는 사실에서 재정이 궁핍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후 상황설명에서도 1897년에는 재정고문 예브게니 알렉세예프(Yevgeni Ivanovich Alekseyev:1843-1917)를 시켜 조선의 재정을 장악케하였으며 반관반민 한로은행(韓露銀行:The Russ·Korean Bank)도 설립하였고 직접적으로는 공사 중에 대규모금광이 발견되어, 시베리아의 광업이 활기를 띠었으며 1897년 금본위제채택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시베리아광업이 유명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최소한 1920년 이후에 이야기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대한제국이 대규모금광을 발견하여 금본위제를 채택했다는 사실은 로마노프왕가시대때 이야기란 것이다.

1900년의 의화단 사건(義和團事件)때 사건의 진압에 참여하여 베이징(北京)의 열국 공사관을 구출하였다고 하는 수비대 사령관 예브게니 알렉세예프(Yevgeni Ivanovich Alekseyev)는 동시대에서 갑오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대한제국시대때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승진하고 기호성리학(畿湖性理學)까지 수학한 육용정(陸用鼎:1843-1917)과 생몰년도가 같아 동일한 인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의 자본은 대한제국의 시베리아철도건설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로 풀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대한제국)의 팽창이 남진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중앙아메리카에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던 서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조선과 만주를 넘보고 있던 일본의 팽창욕과 충돌하였고 대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가 마침내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조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만주(滿洲)가 어디었던가?

바로 중앙아메리카대륙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있었던 러시아 즉 로마노프왕가 또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대한제국이라할 수 있는 통치주체는 남부만주(滿洲:Manchuria)로 철도를 부설하고자 했고 그곳이 중앙아메리카라고 한다면 당시 파나마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중앙아메리카대륙을 탐내던 미국, 영국(잉글랜드), 일본(네덜란드)등이 이를 적극적으로 견제에 나섰다는 것도 동시에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시베리아와 만주(滿洲)의 위치

 

본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에서 말했듯이 후금, 만주, 강남은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과 서역불교국(西域佛敎國)들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위치하였고 그외 국가들은 남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길목 또는 반대로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목구멍 즉 후금(喉衿)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메리카에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가 있다 하였다.

또한 본 블로그 글 "아무르 강(Amur river)과 코(nose)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0",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8", "망강남(望江南:Senna occidentalis)으로 본 강남(江南)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0"등의 글에서도 후금, 만주, 강남이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즉 만주(滿洲)라는 글의 의미를 보더라도 차다, 가득하다, 넉넉하다, 둥그레지다, 곡식이 익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처럼 한냉지역의 황무지, 미개척의 땅이 아니라 인간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온화한 지역에서 자원이 풍부한 땅, 고려만(高麗灣)이라 할 수 있는 멕시코만을 감싸 둥그레질 수 있는 땅, 곡식이 무르익을 수 있는 기후환경조건을 생각할 때 지금의 동아시아대륙 동북부를 만주라는 것은 한반도 땅을 삼한역사 본거지라고 하는 조작사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것일뿐 한마디로 자연이치에도 맞지 않는 괴변, 괴론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만주철도라는 것은 중앙아메리카대륙에 당시 설치되었던 멕시코,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파나마철도라 할 수밖에 없다.

러일전쟁 당시만 보더라도 정작 러시아가 이 시베리아 철도로 육군병력과 전쟁물자를 수송해야 하지만 환바이칼구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시베리아 철도는 전략상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러일전쟁 당시 이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역사 큰 사실과 연결될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즉 러일전쟁은 어느 한 지역의 국지전으로 수송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어쨌던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하였기때문에 만주에서 힘을 잃었다는 것이며 한편으론 대한제국이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접근이 서세들의 영향력에 의해 용이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결국 대한제국은 러시아 영내를 통과하는 아무르 강 구간의 공사만을 재개하여 1916년 시베리아 철도의 전 구간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로 결론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북아메리마대륙 철도를 중앙아메리카대륙까지 연결코저 했던 것은 분명하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역시 근대사의 이야기는 혼란만 가중 시킬 뿐이다.

그렇다. 이러한 근대사가 이야기 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아시아대륙이라는 사실에서 발생되는 문제가 한반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알일이다.


모든 것은 1916년 완성된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지만 시베리아 철로 대부분의 수리가 계속되어 1924년과 1925년의 여러 해 동안 수리를 계속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비로소 1925년 3월 운행이 재개하였다고 하였고 또한 별개의 시설로 볼 수 있겠지만 1937년 전 구간의 복선화가 완성되었다는 것도 소련에 의한 지금의 시베리아철도의 생성과정이 아닌가도 여겨지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복선화가 비로소 아시아대륙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된 것이라고 알려주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볼 있다.

물론 그 보다도 더 늦을 수 있지만 말이다.

로마노프왕가에 의해 계획된 시베리아 개발의 완성이 본격화된 것은 스탈린체제 소련이 성립 후인 1928년부터 제15개년계획이 시행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고 그 뒤 2차 대전 후 시베리아중심지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 시베리아 총지부가 세워지면서, 그 남쪽에는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Akademgorodok)가 건설되었고 시베리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고 나타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본 블로그 글 "사할린(Sakhalin)은 섬()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 에서 살펴보았듯이 오호츠크해(Okhotsk Sea)가 1733년의 러시아에 의해 북방 대탐험을 시작하고 오호츠크해를 탐험했다고 하지만 막상 세상에 알려지기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4에 과학아카데미아의 해양조사로 인해 일반에게 처음 알려졌다는 사실이고 보면 곧 2차세계대전 이전까지 는 완벽하게 완성되지 못했거나 아시아러시아를 점령한 세력이 시베리아철도를 완성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1764-1807)에 의해 모피장사꾼들이 1799년에 설립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는 처음부터 알레스카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외 포트로스 캘리포니아(Fort Ross, California:1812-1841), 하와이의 포트 엘리자베스(Fort Elizabeth, Hawaii:1814-1817), 포트 알렉산더(Fort Alexander near Hanalei, Hawaii:1817), 포트 바실리 데 톨리(Fort Barclay-de-Tolly near Hanalei, Hawaii:1817)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관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절대로 러시아가 아시아대륙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 러시아아메리카회사는 코사크(Cossacks)가 세운 검은담비(紫貂.黑貂.林貂:babr:Sable)와 시베리아 호랑이가 상징인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먼저 관할한 것으로 나타나고 180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관할권이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1897년 대한제국이 건립될 시기에 시베리아철도가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우선개통되었다고 하는 것도 따져보면 결국 러시아아메리카회가가 미국에게 푼돈을 받고 기어코 알라스카를 팔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본 블로그 글에서도 충분하게 설명한 바가 있다.

때문에 시베리아철도는 결코 아시아대륙에 설치되지 않았고 이르쿠츠크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툰트라지역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란 명칭도 알고 보면 앞에 세인트(St)을 빼버리면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피터즈버그(Petersburg)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곳은 바로 버지니아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더붙여 생각해보자.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처음 건설하기 시작한 로마노프왕가가 있었던 곳은 어디었겠는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북태평양철도가 1883년에 완성되었으며 캐나다 태평양철도가 1885년에 완성되었고 이어 그리이트 노던철도가 1893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가장 늦게 완성된 철도가 유니온페시픽철도(Union Pacific Railroad)로서 일부지선은 1925년에 완성된 것이다.

유니온페시픽 덴버 및 걸프철도(Union Pacific, Denver and Gulf Railway)는 콜로라도 덴버(Denver, Colorado)를 통해 와이오밍주의 샤이엔(Cheyenne)으로 가는 경로로서 웬도버(Wendover) 그리고 덴버(Denver)에서 콜로라도 골덴(Golden, Colorado)까지의 루트라는 것은 바로 금광발견과 연결되며 아시아시베리아횡단철도에서 끝마무리가 되는 아무르 강 라인(Amur River Line)과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본 블로그 글 "아무르 강(Amur river)과 코(nose)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0" 와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사실이다.

어떤가.

우리가 밝혀 알기엔 이처럼 꼭꼭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러시아가 아시아대륙에 존재했다는 모순 

 

우리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사건을 한번보자.

1891년 5월 11일 일본 오쓰시에서 발생한 니콜라이2세 황태자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그것이다.

이것은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 기공식에 참석하는 것을 일본에서 막으려 했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철로기공식을 개최한다는 것은 이것을 막으려는 일본이란 체제의 사활이 걸렸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때 러시아는 아시아대륙을 포함한 유라시아에 존재했다는 설정이 있다.

영국의 힘이 강해지고 있는 동아시아대륙으로 원할하게 힘을 옮기려면 당시 지중해에서 동아시아대륙 북경에 도달하는데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가까운 29000를 항해해야 한다는 불리한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모스크바에서 동단에 도착할 수 있는 운송수단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공간적, 또는 시간적인 것이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이러한 목적은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러시아의 최종 목적지가 동쪽 끝 동양의 지배자(the ruler of the East)라고 하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라는 것은 엄청난 상징성을 담고 있다는 것은 이 지명을 스스로 무겁게 만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항구를 과거 러시아가 이를 부동항이라고 하였다고 하지만 웬걸 현실적으로 개항이후에 겨울이 되면 항만전체가 얼어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곳을 어찌 부동항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급박했다는 것과는 달리 블라디보스톡에 전진기지를 만들던 아니던 간에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성되기 1916년 이전에도 러시아는 충분히 동양 즉 동아시아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서 재정을 장악한 사실, 한로은행을 만든사실등은 이를 충분히 뒤받침하는 이야기다.

솔직히 군사적인 작전이 불리한 상황을 만들고 마치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일본과 충돌한 것처럼 꾸민 것이바로 러일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지않으면 안되었을까?

물론 이때 러시아란 이름 속에는 이러한 모든 활동이 대한제국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근대사는 이를 러시아로 둔갑시킨 것은 삼한역사존재를 들어낼 수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크다 하겠다.

이는 프랑스자본이 곧 조선자본이라는 원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추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역사음모꾼들에게 무엇보다도 크게 부각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각해보면 러시아가 유라시아에 있어 동양으로 진출하는데 엄청난 불리한 조건을 가지게 만든 것도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역사판짜기에 의한 세계질서 맞추기에 일환으로 또 다른 추악한 역사 기술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1891년 시베리아철도의 기공식에 마춰 알렉산드르3세가 니콜라이2세 황태자를 파견함에 있어서도 러시아함대가 기어코 지중해를 통과해야 했고 태평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과 그곳에 기어코 블라디보스톡이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진다.

이렇듯 29000㎞란 먼길을 돌아 온 니콜라이2세가 승선한 러시아함대는 가고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고 세토내해(瀬戸内海)를 거쳐 고베(神戶:Kobe)에 입항하였으며 1891년 5월11일 황태자 일행은 교토를 방문하면서 인력거를 이용 비와호(琵琶湖)를 보기 위해 1890년에 세워진 호반의 도시 오쓰(大津)로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호위순사들에 의해 칼 휘두림 변을 당했다고 하는 것도 어설프기가 짝이 없는 이야기다.

이곳 역시 조지아주와 캐롤라이나, 버지니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러시아 함대는 흑해를 출발 인도양을 돌아 일본의 남단에 도착하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기다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891년 5월 11일에 이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본왕이 도쿄(東京) 신바시역(新橋駅)에서 기차를 타고 러시아황태자가 누워있는 교토까지 문병을 갔다고 하는 것도 과연 당시 열도일본에 철도가 개설되었다고 볼 수 없는 문제와 함께 그렇더라도 열차시간문제가 있어 의문을 낳기는 마찬가지 이야기다.

서구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약소국이었던 일본방문에서 일본인들의 극진한 예우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약소국이었다는 것은 나라 존재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시베리아철도는 어쨌던 1891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착공했다고 알려진다.

나중에 다시 한번 더 이야기 하겠지만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는 본래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철도이며 바로 센트럴페스픽철도와 유니온페시픽철도가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그 포인트를 찾을 수가 있다.

서쪽 최종항구는 바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라고 판단한다.

물론 동양의 지배자(The ruler of the East), 해삼이 많이 난다는 해삼위(海参崴) 또는 물가, 강어귀의 소금저장고(鹽所)의 의미를 둔 포염(浦塩)이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는 이러한 여러명칭에서 보더라도 지금의 동아사아대륙 동단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설정은 기존 지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칭으로서 자연이치에 상반된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n April 1891, while traveling through the city of Otsu, Japan, Nicholas was the victim of an assassination attempt. [니콜라이2세 황태자 머리 붕대를 감은 모습이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일영직통철도계획

 

자 이제 위 글을 토대로 한 본 글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일영직통(日英直通)이 무엇인지 밝혀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래 그림을 게시한 동아일보 192553일 기사뉴스를 보면 1916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서백리아선(西伯利亞線)경유(經由)하여 최종 동아시아 극단에 섬나라 일본과 유럽 섬나라 영국을 직통하도록 철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일본주도하에 만들어졌다는 기사이다.

당시 주도한 국가가 유럽에는 영국이고 아시아대륙에서는 열도일본이 주도했다고 믿을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근대사의 설정임을 충분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물론 본 블로그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1925년 이전에 경우에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지 못했다면 동아일보가 보도하고 일본이 추진했다고 하는 일영직통철도건설계획은 한마디로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상 이미 결론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끝까지 따져보자.

분명히 동아일보가 이렇게 보도한 것은 물론 서양의 황색찌라시의 보도를 빼껴 옮긴 것이라 할지라도 실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대 기획의 거대한 프로젝트 철도건설이 현대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며 때문에 당시 과연 근대사가 큰 덩어리를 감추고 말하는 현 아시아대륙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프로젝트가 실제로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놓은 대철도사업을 아시아대륙인 것처럼 거짓으로 말하는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일영직통

동아일보 192553일 기사뉴스

서백리아선경유(西伯利亞線經由)로 일본에서 계획

일본정부에서는 서백리아(西伯利亞)철도의 활용에 대하여 동경윤돈(東京倫敦)간을 막사과(莫斯科), 백림(伯林), 파리경유(巴里經由)로 직통연락운수를 개시할 안()을 수립하고 외무성방면에서 로국(露國)정부에서 회담이 있을 터임으로 일본정부도 수락의 회답이 있는대로 관계있는 구주각국(歐洲各國)에 교섭하야 급속히 우()계획의 실현에 노력할 순서이며 기() 직통경로는 동경(東京), 하관(下關), 부산(釜山), 봉천(奉天), 합이빈(哈爾賓), 막사과(莫斯科)의 순서로 거기서부터는 로국(露國)측의 의향에도 의할 터인데 파란(波蘭)에 입()하여 왈소(Warsaw)방면으로 독일에 입()하든지 또()는 북로(北露)방면으로 독일에 입()하게 될터인바 하여간 백림파리(伯林巴里)를 경()하여 영불해협(英佛海峽)을 월()하여 윤돈(倫敦)에 지()한다더라(동경전)

 

시모노세키(下關:Shimonoseki)

윤돈(倫敦)런던(London)

막사과(莫斯科) 모스크바(Moskva).

파란(波蘭)폴란드(Poland, Polska)

백림(伯林),베를린(Berlin).

 

 

위 그림 "일본(日本)이 1925년에 계획한 동경(東京)과 런던(Lodon) 직통열차 로간(路間)"을 보면  

1891년 착공하고 1903년에 주요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1916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는 모스크바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 9,334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구간을 매개로 한 직통철도를 보면 아래와 같이 설명이 가능하다.

위 보도를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일본정부가 러시아정부와 협의를 원만히 마칠 수 있는 것을 전제하고 위 1916년에 완성된 서백리아(西伯利亞)철도를 활용하면서 아시아대륙 동경(東京)과 유럽대륙 런던(Lodon) 즉 윤돈(倫敦)간을 연결하는데 이상이 없다는 보도이다.

즉 일본동경에서 시모노세키(下關:Shimonoseki)를 거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한반도부산과 하관사이를 연결할 할 터널이야기가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기사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부산과 하관이 연결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하관(下關)에서 부산(釜山)이어진다면 그 다음 경로정거장이 봉천(奉天)이라 한 것은 이미 봉천은 한반도를 지나 만주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지나친 한반도에는 동경만큼 그렇게 주요한 도시가 없었던 것인가?,

그리고 만주사변으로 북만주철도(동청철도)의 주도권을 일본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합이빈(哈爾賓)까지 일본이 주도할 수 있다.

물론 이 만주의 동청철도(東淸鐵道:Manchurian Railway)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대륙북쪽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온화한 기후의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임을 알 수가 있고 1873년에 개통된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즈에 이르는 노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시베리아철도가 이를 대체하고 모스크바 즉 막사과(莫斯科)들어간다는 것은 만약 현재 아시아대륙이라면 매우 자연스러운 경로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보도한 이 경로는 절대로 아시아대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시베리아철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독자 상식에 맡겼다는 것이다.

이미 아시아대륙이 아닌 위치에 러시아 즉 대한제국은 이 철도를 무조건 건설하고 운영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그 다음 보도를 보면 이곳부터는 로국(露國)측의 의향에 의할 터인데 즉 러시아결정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 다음 로선을 한번 그려보면 폴란드 즉 파란(波蘭)에 들어가 바르샤바 즉 ‘왈소(Warsaw)’방면으로 독일에 들어간다든지 아니면 북쪽 러시아(北露)방면으로 독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과 그렇게 하더라도 무조건 베를린 즉 백림(伯林)과 파리(巴里)를 지날 수 있고 이후 문제의 영불해협(英佛海峽)을 뛰어 넘어 런던 즉 윤돈(倫敦)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다.

아시아대륙 상황을 놓고 보면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그도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 만주횡단철도(TMR), 몽골횡단철도(TMGR), 한반도남북횡단철도(TKR)까지 합한 건설을 거의 답보상태에 있는 현재상황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구름잡는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산과 하관을 잇는 한일터널은 언제쯤 개통될지 지금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영불해저터널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인데 시작하기는 1869년 해저터널위원회가 발족하여 1878년 프랑스인에 의해 굴착이 시작되었으나 당시 광견병문제로 곧 중지되었고 다시 영국의 포크스톤(Folkestone)과 프랑스의 칼레(Calais) 사이를 연결하는 50.45km의 길이 도버해협터널(Dover channel tunnel)은 비로소 1986년 5월에 시작하여 1990년 12월 1일에 완공하여 개통하였다는 사실이다.

한일터널역시 1930년에 일본에 의해 세워진 '동아시아 종단철도'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 보도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또한 일본이 다시 1942년에 동아시아 교통학회를 설립하고 일본에서 쓰시마 섬을 거쳐 부산과 연결되는 해저터널을 건설하여 위에서 설명한 동아시아 종단철도와 연결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실도 위 동아일보 보도와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다.

무엇이 가능하여 일본이 이처럼 일영직통 철도를 잇겠다고 하였을까?

동아일보는 어떤 판단을 근거로 이런 보도가 가능했을까 여러분들은 궁금하지 않는가?

현재 한반도와 열도지형상 한일터널이 존재하기가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이지만 실체 지형에서는 한일터널이 불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영불해저터널은 지금처럼 바다의 터널이었겠는가?

아마도 큰 강을 가로지르는 하저(河底)터널이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의 템스강에서 와핑(Wapping)과 로더히스(Rotherhithe)사이의 하저터널(Riverbed Tunnel)로 길이 360m로서 1843년 개통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허무맹랑한 것처럼 여겨지는 동아일보의 보도가 사실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실제로는 우리가 곧 명명백백 밝혀져야 할 실체 일본이 계획한 일영직통계획은 결코 계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단히 완성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를 우리는 아시아대륙이란 프레임을 깔고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을 곧 세계삼한역사의 실체를 맞이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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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마음 선생님"의 조언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