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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피크(Harney Peak)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
소제: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글쓴이:한부울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내 로키산맥(Rocky Mountains)동쪽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서 블랙 힐스 국유림(Black Hills National Forest)이 자리하며 블랙 엘크 자연보호구역(Black Elk Wilderness)지역 안에 있는 해발 2,208m의 하니 피크(Harney Peak)정상에는 버려진 화재 감시탑과 그 외 지형물이 있다.
이것은 그곳 동판에 적혀 있는 문구이다.
그리고 시민보호청년단(平民保育團:Civilian Conservation Corps,CCC:1933-1942)에 의해 1938 년에 석조 화재탑 공사를 완료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 조형물을 보면 아래에 설명을 하겠지만 화재감시탑 이외 댐(Harney Peak CCC Dam)과 그리고
펌프하우스(Harney Peak CCC Pumphouse)가 있다.
[그림자료:1]
Harney Peak CCC Dam
"A small dam was built in a granite crevice just below the summit of Harney Peak to hold water for use in the Harney Peak Fire Lookout Tower."
이 “하니피크(峰)CCC 댐(Dam)”이라는 명칭의 이 작은 댐은 하니피크(Harney Peak,峰)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에 사용하기 위하여 하니피크 정상 아래에 물을 담을 수 있는 화강암 균열된(granite crevice)곳에 만들어졌다.
Harney Peak CCC Pumphouse
"A stone pumphouse was built just below the Harney Peak Fire Lookout Tower to provide water from the retention pond created by the dam."
하니피크(峰)CCC 펌프하우스(Pumphouse)란 이름의 이 석조펌프하우스는 댐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해 하니피크 화재 감시탑 아래 지어졌다.
Harney Peak was first used as a fire lookout tower in 1911, with nothing more than a wood crate placed at the summit. In 1920, a 12'x12' wood structure was built, and it was expanded to 16'x16' the following year. The Civilian Conservation Corps completed construction on the stone fire tower in 1938. Harney Peak was last staffed in 1967 as a fire lookout tower.
이 하니피크 정상에는 나무 상자에 불과한 것이지만 화재 감시탑으로 1911년 처음 사용되었다. 이것을 1920년에 12'x12 '나무 구조를 구축하고 다음해 16'x16으로 확대하였다. 시민보호청년단(平民保育團:Civilian Conservation Corps, CCC:1933-1942)은 1938 년에 석조 화재탑 공사를 완료했다.
하니피크의 화재 감시탑으로 1967년에 마지막으로 인력을 배치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인력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계삼한역사 연구에서 밝혀진 것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지형물은 분명히 세계삼한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이곳 블랙힐스(Black Hills)라는 곳은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으로 따질 때 그렇듯 간단할 수 없는 역사 장소라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글 “자작나무(白樺:Betula populifolia)는 박달나무(Korean birch)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2 ”란 글에서 밝혀 보았듯이 박달나무라 할 수 있는 흰 자작나무가 블랙힐스(Black Hills)지형 속에 세계삼한역사의 고리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 "란 글에서도 사할린이 블랙힐스(Black Hills)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바다.
아니 이것보다 훨씬 더 앞 선 글 "오페르트가 본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tower mount) http://blog.daum.net/han0114/17050552 "이란 글에서도 이미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 가 조선 강화부로 들어간 경로를 밝힌바가 있었으며 바로 오페르트가 보았고 그의 책에 삽화까지 그린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tower mount)가 지금의 미국 와이오밍 주의 북동부(Black Hills near Hulett and Sundance in Crook County, northeastern Wyoming) 벨푸어셰이강(Belle Fourche River)에 위치한 데빌스타워(Devils Tower)와 똑 같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을 받고 가슴을 쓸어 내린 적이 있었다.
바로 사우스다코타주와 경계선에서 블랙힐스 북서부에 위치한 바위 산으로 계곡의 하단부터 높이가 5, 112피트(1,558 m)인 신비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 조형물인 것이다.
The shore, up to this point low and uninteresting on this side, gradually gets steeper and more hilly, and the summits of the large mountain-ridges to the back become visible ; one of the highest of which, the Table Mountain, ia some 3000 to 4000 feet high.
When darkness came on, we anchored just in front of one of the deserted forts. Captain James and myself went a few miles further up the river in our boat to reconnoitre, and visited one of the forts, where we only found two or three watchmen, but not a vestige of any armament.
(번역)지금까지 낮고 지리 했던 강기슭이 점점 가파르고 높아지면서 뒤쪽에 있던 높은 능선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산인 테이블 마운트(Table Mountain)는 높이가 3000~4000 피트에 달했다.
우리는 어두워진 후 버려진 요새중 하나 앞에 정박을 했다. 제임스 선장과 내가 보트를 타고 상류 쪽으로 몇 마일 더 정찰을 나가 요새 한군데에 들러 보았는데 파수꾼만 두어 명 있을 뿐 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위는 바로 오페르트의 책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높이가 약 3000~4000피트라고 하였으니 5000피트와 눈대중임을 감안할 때 비슷한 수치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뿐만아니라 무엇보다도 삽화에 그려진 신기한 돌 기둥 조형물의 모습이 사진을 찍은 것처럼 똑 같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 조형물이 한반도 강화부에 있을 턱이 없다.
전 세계에서 이러한 조형물을 볼 수 없을 만치 유일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 바로 와이오밍 북동부와 사우스다코타 서부에는 블랙힐스란 지형이 반월성처럼 놓여있으며 면적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5,000 Square mile(13,000㎢)이나 된다.
한반도 강원도 면적이 약 16,000㎢ 이니 알만하다.
그러나 한반도 강화도(江華島)의 면적은 고작 302.4㎢이다.
이곳 블랙힐스를 우리는 충분하게 강화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북동쪽으로 흐르는 벨푸어셰이강(Belle Fourche River)과 남동쪽 흐르는 샤이엔강(Cheyenne River)이 북과 남으로 둘러 싸고 흘러 포위하듯하였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섬(島)이라고 할 수도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블랙힐스가 동아시아대륙 북동부에 오호츠크해에 있는 넓이 87,100㎢ 의 사할린(Sakhalin)이라는 사실도 이미 밝힌 바가 있다.
이렇듯 근세사는 짬뽕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이렇다면 근대사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하기사 이러한 사실을 강화부라고 하지 않고 그리고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세계삼한역사 연구랄 것도 없다.
힘들지만 이렇듯 파고들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비록 바위에 계란치기라 할 지언정 그래서 계란이 사라지고 말지언정 계란 노란 물이 바위에 젖은 흔적이라고 있을 수 있기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백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분명코 그곳이 강화부라면 마리산(摩利山)과 정족산(鼎足山)이 있어야 한다.
또한 1866년 이곳에는 유대인계 독일인 오페르트가 두차례 방문한 곳으로서 증거가 확실하며 때문에 마리산과 정족산 뿐만아니라 참성단(塹星壇)과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와 이전에 마리산사고(摩利山史庫)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위 하니피크 정상에 있는 구축물과 조형물들은 모두 중요한 문서나 유물, 서적들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하는 시설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0월 로즈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일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결국 로즈 제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위는 1866년 10월에 있었던 병인양요(丙寅洋擾)에 대한 백과사전의 요약한 글로서 당시 조선(朝鮮)은 굳건하게 전통성을 가지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프랑스니 영국이니 하는 따위의 나라들은 모두 실체가 없었던 것으로 그들이 꾸린 자본 회사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그들이 만든 근대사를 바탕으로 할 때 근세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국명(國名)에 의해 생성된 세력들임을 알 수가 있고 대체적으로 그 이전에는 백인(The whites) 또는 서양인(The Westerner)으로 불리었을 것이며 대조선으로부터는 왜구 또는 해적이란 부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때문에 유럽이든 어디이든 나라자체가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떠돌이 조직체가 희안하게도 근세기를 장악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당시 상황들을 보면 기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지고 있던 조선(朝鮮)을 치고 빠지기 식으로 마구 괴롭혔지만 지금처럼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니 소탕을 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들을 추적할 수 없는 조직체였다고 한다면 일방적인 방어로 일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제약이나 구애받음이 없이 조선(朝鮮)상대로 약탈과 침탈을 감행하고 사라지는 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미시시피강을 거슬러올라와 해역을 침범하여 불질러놓고 약탈하고 사라지거나 그들의 근거지로 숨어 들어가면 조선(朝鮮)은 특별히 제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때문에 거대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인 입장에 놓였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이럴 때 조선이 재정적으로 힘든 경우였다면 더욱 곤란하였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각종 비밀리 보관 되던 서적들을 그들의 침탈 경로지에서 될 수 있는대로 먼곳으로 옮기거나 그들이 침범 할 수 없는 외딴 곳에 자리를 정해 보관관리하였을 것이란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위 백과사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치 그들이 당시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유럽제국인냥 프랑스국의 아시아함대제독이니 사령관이니 하는 따위로 스스로 직함을 붙이고 야단법석을 부렸지만 나는 전혀 믿지 않는다.
오직 명목상 회사를 만들어 놓고 당시 조선영역을 침탈하여 돈 되는 것을 주워모았을 한심한 족속이상으로 볼 수가 없다.
이것을 해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어할 조선은 함대가 전혀 없었을까?
발달된 무기가 전혀 없었을까?
아닐 것이다.
단지 오늘날 그들의 세상이 되고 그들이 주도한 역사판짜기와 그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세계사의 생성과정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당시 방어능력이나 공격능력 등 주요한 함선이나 무기들이 모두 그들의 소유로 넘어가 아예 전무한 것처럼 나타날 뿐이지 실제로는 상당한 방어기지(port)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주객이 전도되고 도둑이 주인행세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이라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온갖 포장과 치장을 할 수 있는 도구들을 이용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당시의 그들의 위치와 행색를 숨겼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어쨌던 특히 대조선이 해체되던 1881년 이전까지 서양세력들의 도발이 이처럼 심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거의 조선은 방어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제일 걱정되는 것이 바로 사고(史庫) 운영이고 관리이다.
왜 삼한세력들은 사고(史庫)를 이렇게 중요하게 관리하려고 하였을까?
바로 지금 역사의 혼란을 미리 예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한 깊은 뜻을 우리는 숭고하게 받아들여야 할 무거움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반도역사의 기록을 보면 강화도(江華島)에 사고(史庫)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이라 하고 조선(朝鮮)에서 사서(史書)관리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세종이후로 4대사고 춘추관(春秋館), 충주사고(忠州史庫), 성주사고(星州史庫), 전주사고(全州史庫)가 1445년에 만들어지고 보관하게 되었는다는데 이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항해시대가 출발할 시점이다.
그것을 삼한역사주체들은 예상을 한 것이다.
그 이후 사서관리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세종이후 4대 춘추관, 충주(忠州), 성주(星州), 전주(全州)사고가 1445년에 만들어지고 보관하였는데 포르투칼세력이라고 의심되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으로 인하여 전주사고(全州史庫)만 무사하고 춘추관, 충주(忠州), 성주(星州)사고가 소실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더욱 사고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에 보관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하였으며 다시 1603년 강화도 마리산사고에 옮겨져 복간되고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는 1653년 마리산사고(摩尼山史庫)가 화재(失火)가 일어남에 따라 추진되어 1660년 정족산성(鼎足山城)이 완성되면서 사고를 옮기라는 명령에 따라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지만 옮기는 것은 1678년이었다고 한다.
이것과 별도로 1606년에 5대사고(춘추관, 마니산,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사고가 만들어져 보관되다가 1624년 관서(關西)지방에 도원수(都元帥) 이괄이 난(李适─亂:1624)을 일으켜 춘추관(春秋館)사고가 소실되었다고 하였으며 다시 1633년에는 만주(중원, 변경, 후금, 강남)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後金:1616-1636)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 지례겁을 먹은 조선 조정이 묘향산(妙香山)사고를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赤裳山)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는 것이다.
이만큼 사고에 대해서 예민하게 정책반응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보관, 보수, 이동을 거듭하다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때 강화도 외곽에 1782년에 지어졌던 외규장각(外奎章閣)은 프랑스군에 의해 강화도가 습격당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191종(유일본 30종 포함)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당했고 나머지 사서(史書)는 무엇인지도 밝히지 못하는 상태에서 불타 없어졌다고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는 실감을 하지 못한다.
그만큼 해양세력들이 무단으로 조선을 침입하는 사태가 비일비재 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사서 보관을 중요시 여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해양세력들이 침입할 수 없는 곳에 사서와 서적, 또는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가능하면 깊숙한 곳에 보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외규장각 의궤 탈취사건에 대한 프랑스와 조선관계에서 대해서 본 블로그글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외규장각도서가 주는 비밀" 편에서 충분하게 상황설명이 이루졌다고 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림자료:2]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니피크의 화재감시탑은 어떤 이유로 생성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언급할 것은 역사에 근거한 유물이나 유적이라면 최소한 역사가 흐르는 과정과 그것에 합당한 이치에 맞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그러나 위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지형에 해발 2,208m의 하니 피크(Harney Peak)정상에는 버려진 것 같은 화재 감시탑과 그 외 지형물이 있는데 이것들을 보면 무엇 때문에 조성될 수밖에 없었는지 현재 들어난 설명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1911년 목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화재 감시탑이 1938년에 석조 화재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둘째 이 석조 화재탑 바로 아래에 있는 지형을 이용한 구축물 석조펌프하우스의 용도가 그렇고 셋째 자연 화강암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작은 댐(dam)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림자료:3]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산불화재를 감시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이 화재감시탑이 있는 곳을 보면 암석이 솟아 있는 특이한 지형물들이다.
언뜻 생각할 때 오히려 산불화재가 확산되는 것을 최대한 방어할 수 있는 암석 지형인 것이다.
그리고 아래 주위 관망을 보면 크게 산불이 일어날 곳도 아닐 뿐더러 산불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화재감시탑에서 산불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수작업으로 산불을 소화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특히 하니피크 산 숲에서 발견 되는 가장 일반적인 수종이 나무높이가 70m, 흉고둘레가 7m 에 이르는 폰데로사 소나무(ponderosa pine)이고 좀 높은 고도에는 나무높이 25–40 m, 직경 1.5 m의 가문비나무(Picea engelmannii)가 자란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가문비나무 역시 생물학적으로 판단할 때 고려운삼(高麗雲杉:Picea koraiensis)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라고 부언하고 싶다.
만약 이러한 수목들이 불에 타게 되면 사람의 인력으로는 당시 열악한 환경으로 보았을 때 도저히 끌 수 가 없다.
그냥 넋 놓고 쳐다 볼 수밖에 없으며 화재감시탑까지 확산되는 것만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구축물의 목적은 불을 끄고자 하는 산불 감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형적인 것을 보면 일반사람들이 힐 시티(Hill city)에서 도보로 걸을 때 약 8.22km 떨어져 있는 화재감시탑까지 접근하기가 용이 하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는 곳에 세워진 구축물이라면 중요한 비밀 스러운 것을 숨기고자 한 시설인 것이다.
[그림자료:4]
위의 그림에도 볼 수 있듯이 화재 감시탑까지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는 지형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노란 선은 일단 사람들이 오를 수 있는 길을 표시한 것인데 거친 암석과 하늘로 치솟은 가문비나무들이 가는 길을 막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설물 중에 자연 화강암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작은 댐(Harney Peak CCC Pumphouse)이다.
왜 담수를 한 댐이 필요하였을까?
산불을 진화하는 방화수(防火水)로 쓰기에는 물의 양이 보잘 것 없다.
때문에 이 담수는 상층에 있는 비밀스러운 무엇을 보관한 구축물이 화재로 소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자연적인 방화수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형에 이러한 구축물을 구상하여 세우고자 한 것 부터가 매우 비상한 생각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매우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구축물은 자연 지형을 이용한 석조펌프하우스(Harney Peak CCC Pumphouse)이다.
영어로도 이 구축물을 펌프하우스라 한 것을 보면 분명코 이 댐에 담수된 물을 퍼 올리기 위한 시설물이다.
지금은 1911년부터 화재감시용으로 이 건물이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기실 오래전에 구축된 건축임을 알 수가 있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요한 문서나 유물, 서적들을 보관하던 곳이며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산불화재까지 감안한 지형에 구축물을 만들고 만약 사태에 대비하여 담수물을 퍼올려 화재를 진압할 수 있도록 한 것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림자료:5]
실제로 감시탑이 있는 지형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형임을 알 수 있지만 [그림자료:5]에서 보면 약 직선거리 6km 떨어진 곳에는 이 지역의 자랑거리이고 관광명소로서 미국4대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이 있다.
6km 라면 지척 거리(very short distance)이다.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은 본래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애환을 그린 너새니얼 호손(Nathanier Hawthorne:1804-1854)의 소설로서 이민자들이 살던 계곡에서 산을 바라보면 사람의 형상과 아주 흡사한 바위들이 마을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어 가까이서 보면 단지 바위일 뿐이지만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바위 얼굴의 모습은 마을을 지켜주는 인자한 산신령(山神靈)과 같은 존재라 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이 생긴 인물을 기다렸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동양의 미륵신앙(彌勒信仰)과 비슷하고 미신(迷信)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가져야 할 순수했던 이야기가 숨어있다.
이것이 모토가 되어 미국조각가인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1867-1941)은 1927년부터 미국을 만들고 융성케 한 4명의 기독교 대통령 조각상을 새겼던 것이다.
현재는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이라고 하지 않고 러시모아산 국립기념물(Mount Rushmore National Memorial)이라고 명명하였지만 다분히 큰바위얼굴에 대한 미륵신앙이 완성된 것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초대대통령 조지워싱톤(George Washington:1732–1799), 루이지애나지역을 구입한 토마스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 파나마운하를 구축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1809–1865)의 모습을 새겨넣었으며 결국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을 만든 조각한 거츤 보글럼이 말한 것처럼"위대한 지도자들의 말과 얼굴을 이곳의 하늘 가까이 높이 새긴다"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이중성이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 큰 바위얼굴이 새겨진 위치이다.
무엇때문에 유럽이민자들의 본고장인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새기지 않고 구지 블랙힐스에 새긴 것일까?
바로 천신사상이 깃든 곳을 그들이 선점하여 우월감을 표시하기 위한 것일게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실제로 블랙힐스(Black Hills)가 대조선의 영역으로서 강화부였다고 한다면 정족산과 마니산이 될 수가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옛부터 대조선 천상(天上)의 기운이 연결하던 곳이라고 숭배처라 할 때 이야기는 아주 심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기독교사상으로 무장된 서양인이나 선교사들 귀에 이러한 숭배처라고 알려졌다면 그들은 악마와 마귀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종교를 세우려 했을 것이 뻔하고 분명코 삼한의 정령(精靈)의식이 행해지던 "블랙힐스"에는 기독교적인 상징물을 만들려 했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들역시 "큰바위얼굴"을 조각한 거츤 보글럼이 말한 것처럼"위대한 지도자들의 말과 얼굴을 이곳의 하늘 가까이 높이 새긴다"라고 한 것처럼 하늘로 오르는 길의 제단, 참성단(塹星壇)이 있었던 마리산(摩利山)이라고 판단되는 러시모어산(Mount Rushmore)을 주저함이 없이 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결국 화재감시탑은 정족산성사고(鼎足山城史庫)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조선왕실은 임진왜란후인 선조 39년(1606) 4대 사고중에 한곳을 이곳 강화에 두었는데 현종 1년(1660)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해 보존해오던 서책들을 다시 정족산성 사고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내용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三郞城)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서양세력들이 처음 찾은 것도 대조선이 어지럽고 연일 해적, 해구들이 침범할 때 그리고 중요한 사서를 이리저리 옮겨놓을 때 공교롭게도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블랙힐스의 하니파크를 처음 등반한 사람은 로즈버드의 전투(Battle of the Rosebud)와 슬림뷰트전투(Battle of Slim Buttes), 3월의 기아(Horsemeat March)까지 참여한 외과의사 밸런타인 멕리커디(Dr. Valentine Trant McGillycuddy:1849–1939)이다.
이 하니 피크(Harney Peak)의 하니(Harney)란 이름 역시 1870년 후반 블랙힐스 지역의 군대지휘관인 윌리엄 하니(William S. Harney)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휘하 중위 구버너 워렌(Gouverneur K. Warren)에 의해 1850년 후반 이름 하였다 한다.
이들이 블랙힐스를 탐험하는 기간동안 1890년의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도 있었다는 사실도 우린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양민과 주민을 마구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적어도 국가를 가진 정당한 나라가 취할 것이 아닌 것으로 외부침략세력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만약 미국이 당시 정당한 국가라면 인디언은 원주민이고 토착민으로 대우해야 마땅하다.
어쨌던 미국자료들을 보면 이 하니 피크(Harney Peak:2,208m)산 정상에는 버려진 화재 감시탑이 있다는 설명이 많다.
버려진 화재 감시탑은 무슨 이야길까?
오래되서 버렸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숨어 있는 것이 있어 밝히기 어려워 버렸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니피크가 있는 이곳은 여러차례 이야기 하였지만 사우스다코타 주(州)에 있는 페닝턴 카운티(Pennington County)에 속하고 이곳에서 1874년 금광을 찾아내게 되자 수십만(tens of thousands of miners)의 광부들이 블랙힐스로 이주해 왔고 때문에 1868년 수족(Sioux)인디언과 백인(The whites)사이에 체결된 포트라라미 협정(Fort Laramie Treaty:1868)도 무시가 되어 인디언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페닝턴 카운티가 1875년 설립당시에는 행정중심지가 와이오밍주 북부의 셰리든(Sheridan)이었으나 1878년에 래피드 시티(Rapid City)로 변경 되었다.
[그림자료:6]화재감시탑이 있는 곳에서 래피드 시티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35km(90里)정도이니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강화부의 강도(江都), 심도(沁都)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부의 워싱톤이 아닌 서부에서 다른 또 하나의 강화부를 찾은 것이다.
[그림자료:6]
사실관계를 따져 이처럼 풀이해보니 실로 착찹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당시 상황을 보면 대조선에서는 심각한 외세침입으로 인한 대단한 홍역을 앓고 있었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자료:7]
[그림자료:7]를 보면 조선이 당시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인지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위 그림자료는 2170마일(3492km)의 오리건산길 또는 오리건통로(Oregon Trail)의 경로도로서 1869년 첫 번째 대륙횡단철도가 완료 될 때까지 1843년부터 노새 및 황소가 끄는 덮게 마차로 약 50만명이상의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하며 하루에 15마일(24km)씩 4-6개월을 여행했다 한다.
이 경로를 보면 강화부라고 할 수 있는 블랙 힐스(Black Hills)에서 바로 남쪽으로 이동되는 길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정부입장에서는 이러한 서양세력들에게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지도를 보면 1820년부터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는 삼림 생활자, 뱃사공을 가장한 탐험가(voyageur), 교역상인, 선교사들이 미주리 주(State of Missouri)에서 오리건 주(State of Oregon)에 이르는 약 3200 km의 오리곤산길(Oregon Trail)을 만들어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때부터 아마도 조선정부에서는 이들때문에 골치가 아팠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84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캘리포니아 북부 골드필드(Northern california goldfilelds) 그리고 시에라 네바다 골드필드(Sierra nevada goldfileds)를 중심으로 골드러시(gold rush)가 시작되면서 금(gold)에 눈이 먼 사람들이 금광을 찾기위해 집단이동을 하면서 이 통로를 빈번하게 이용하게 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물론 금광(金鑛,金山:gold mine)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앵글로 백인(Anglo whites)임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아마도 삼한세력들은 왜구, 해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다.
당시 조선에서 금을 취득하는 것을 법으로 막았기 때문에 조선백성들은 백인(Anglo whites)들과 같이 행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 길은 결국 앵글로 백인(Anglo whites)들에 차지가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고 그들에 의해 서부개척길이 되었다는 것으로서 캘리포니아 이주자, 유타주로 가려는 모르몬 교도(Mormone), 목장주, 카우보이(cowboy)등이 이길을 이용했다고 하였으니 당시 상황은 조선정부의 적극적인 방지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막무가내식으로 비밀스럽게 금을 찾아 이길을 제집드나들듯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조선은 일확천금에 눈이 먼 이들 탐욕세력들을 적절하게 관리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광부만 하더라도 이렇게 옮겨 이주한 숫자가 수십만명이라고 하였으니 그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이 길을 이용하였을 것이고 모든 조직체들이 나름대로 금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만하다.
바로 이때 1866년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랐던 제너널 셔먼호 사건과 1866년 10월 19일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한 것이며 이후 1871년 6월 10일에 발생한 신미양요(辛未洋擾) 그리고 1875년 9월 20일에 발생한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즉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까지 모두 같은 시기임을 알 수가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제너럴셔먼호는 탐욕에 젖은 독일 유대인들의 해적행위라고 볼 수 있고 병인양요는 미시시피회사의 장난으로 보이며 신미양요 역시 미국지주회사의 소행일 것이며 운요호사건 역시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의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시기에 미국백인과 인디언들의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차칫하면 여기에서 우리가 함정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은 본 블로그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하여 그렇다면 조선정부는 인디언세력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 세력은 조선지배세력과는 달리 보아야 할 문제가 많다.
대신 지방의 원주민으로서 조선사서에서도 야인(野人)으로 통칭된 사실이 있다.
반도역사번역가들은 야인(野人)을 여진족(女真族:Jurchens)이라고 하였지만 만주세력이라고 할
때 어쩌면 여진족도 청을 가장한 서양세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만주는 중앙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도 있다.
인디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야인(野人)을 조선영역에서 공존하는 원주민(原住民) 또는 선주민(先住民), 토착민(土着民:native people)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한다.
강화부(都護府)를 태종 13년(1413)에 설치하여 광무 10년(1906)에 없앴다고 하지만 없앨 이유가 없다.
그것은 결국 대한제국도 강화부를 소화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현재 한반도 강화도(江華島)라고 알고 있지만 면적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작 302.4㎢이다.
이곳에서 고려(高麗) 고종(高宗:1192-1259,재위:1213-1259)이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다는 곳으로 무엇인가 부족하다.
한반도 강원도 면적만큼 되는 면적 13,000㎢ 정도의 블랙힐스가 되어야 바로 강화부라고 하지 않겠는가 한다. 그곳에 정족산성사고(鼎足山城史庫)가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바로 이 화재감시탑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싸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소제: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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