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한부울 2016. 7. 1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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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글쓴이: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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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코리아 생성의 역사

1923년의 역사변이성

캘리포니아의 지진실체

서양코리아와 J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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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대한민국 사정은 총체적인 난국이라 해야 맞다.

역사에도 없는 열도일본인의 자위대 운운하면서 서울 복판에서 창립기념식을 버젓이 개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지도자, 언론인 누구도 이를 일본정부에 항의하거나 비판하는 모양새를 찾을 수가 없다.

일본은 근세기 역사가 만든 국가일 뿐이다.

이를 보는 답답한 개, 돼지 취급받는 국민들이 나서 이를 저지하고 반대집회를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나 말께나 하는 지도자에게 뚜렷한 정치철학이나 국가관을 찾기란 쉽지 않다.

늘 상 패거리, 지역주의 노름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선배들이 한 것처럼 빼지를 달고 군림하려하고 그들이 선출해준 선거권자들을 대중이라 몰아세우며 개돼지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저급한 실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잘나 마땅히 올라야 할 권위이고 지위이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력이란다.

어디 콩고물이나 없는지 젯밥 에만 신경을 쓰며 과거 일본이 저지른 짓거리나 국민정서 따위는 그들에게 안중에도 없다.

민중이 봉이고 국민이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냥 습관적으로 착각한다.

그럼에도 선거권자들은 냉정하지 못하다.

때문에 이런 관습에 젖은 그들이 한번 배지의 맛을 알고 나면 다선(多選)에 집착하고 알량한 정치철학조차 집어던지기가 일쑤이다.

오직 권력만을 탐하고 군림하려 하니 정치가 민주주의에서 벗어나면 마약과도 같다고 해야 맞다.

더군다나 헛개비 같은 열도일본을 상전으로 모시는 얼빠진 정치인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우리나라 정치계가 그런 얼빠진 생각에 빠져 있으니 서로 살아남기 위해 일본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때문에 민족주체성이니 애국이니 하는 따위는 그들에게 절대로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국민들의 시각이다.

일본정치인들에게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정치인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좌지우지 하니 그럴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안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반도 특수한 정치상황이야 국민들 뼛속 깊이 각인 되어 아는 터라 비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국민 대표를 자임할 때 굽실거리던 모습은 어디가고 열도일본정치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떳떳해야 할 지도자들이 입을 봉하고 비난조차 하지 않는 모양은 보기에도 딱한 것이다.

국가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불의임에도 단호하게 항의를 못한데서야 어떻게 국민을 대표하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 정치인들 뿐만아니라 말께나 하는 양반들이 정말 반성해야 할 이야기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고급 지식자들이나 고급관리들은 일제식민사관에 길들여져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의 판단에 난해함이 있고 또한 정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크다.

이 난해가 올바른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헛지식의 난해함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식민근성이 뿌리깊이 박혀있다는 소릴 들을 수밖에 없고 열도일본인들이 마구 저지르고 있는 못된 짓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비판할 줄 모르는 노예근성이 그들의 뇌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식의 지도자들을 언제까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가.

한반도 역사관이 만든 총제적인 난국인 것을 지금 우린들 어찌하겠는가.

친일파란 엄밀하게 따진다면 서양코리아를 섬기는 계파란 사실을 알기나 한 것일까.

그만큼 과거 역사에서 코리아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것을 한반도 구성원들은 제대로 알 수나 있을 것인가.

이런 성스럽기 조차한 역사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근세기에 서양코리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다.

그 허상의 테이블 위에서 꼴불견스럽게도 열도일본정치인들이 천지도 모르고 깨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이런 허접한 사실을 왜 우리는 알지 못할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대한민국이 살려면 허상인 열도일본인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시아에 세력균형을 맞출 필요를 느낀 미국에 의해 열도와 일본역사를 선물하고 경제지원을 하여 미국을 대신하는 세력으로 키웠던 역사패턴임을 우리가 깊이 알지 않으면 안된다.


서양코리아가 무엇인가.

이렇게 알면 쉽다.

유럽서양인들은 로마를 그들의 DNA 처럼 여긴다.

때문에 그리스가 그들에게 조상지(祖上地)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를 현실적으로 언제까지나 지원할 수밖에 없다.

유럽서양인들의 어찌보면 역사가 남긴 멍에일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파악해본 결과에는 정확히 로마, 그리스는 코라이(KORAI)로 압축된다.

어원이 희석되어 나타나지만 "CORE"가 그들의 중추신경과 마찬가지의 상징성이 있다.

어쨌거나 코리아는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명칭이고 단어이다.

때문에 아무리 우월한 역사 만들기가 통하고 백인순수혈통주의가 그들의 본질이라 할지라도 이 명칭을 그들이 밟지 않으면 "DNA"가 생성될 수 없다는 이치이다.

1878년 5월 선데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COREA"를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란 등식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지워버렸다는 사실은 “COREA”를 지워버려야 할 상황이라는 점과, 이것을 마침내 서양인들이 어용언론을 이용하여 사라지게 만든 핵심은 더 이상 중추신경을 노출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COREA" 대신 공식적으로 "KOREA"로 바뀌게 된다.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 하여 기행기에서 한반도로 전부 몰아 넣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코리아라 하니 서양코리아라고 지칭하면 오히려 친밀감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삼한역사가 서양인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지고 파괴되었다는 점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류의 최대발명품인 "불"을 발견한 역사민족이 바로 "COREA" 이다.

"COREA"를 글쓴이는 삼한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속에 고려, 신라, 백제, 이 삼국을 합친 조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역사를 창조하고 실천하면서 수많은 종족과 문화, 종교를 포용하고 하나의 체제를 구가한 거대한 조선(朝鮮)을 서양인들은 산업발달이 시대의 조류라는 이유만으로 천리를 어기며 끝내 망가뜨리고 그들이 앞선 코리아의 선역사를 탈취했던 장본이라는 문제의 상징성으로 우리는 보지 않으면 안된다.

언젠가는 우리가 거꾸로 되돌려 갚아줄 수 있는 역사 목표과 동기로 존재해야 할 것들이다.

이런 역사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인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필요이상으로 불공평한 조치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을 한반도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눈과 귀가 한반도 역사로 인해 가려졌다.

결국 한반도 역사를 탈피하지 않을 때 이러한 글쓴이의 주장은 역시 헛것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서양코리아세력은 하나의 체제를 구가하던 조선(朝鮮)을 망가뜨리고 그들 끼리끼리 모여 새로운 국가들을 족벌체제의 귀족별로 세우고 그들의 역사라 칭한 것은 태초의 인류사를 말살하고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근본 역사 정체성을 조작했다고 하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이 근세사와 함께 유럽서양사가 잉태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근원적인 피해의식을 따져 묻는다면 거대한 인류역사를 잃어버렸다는데 있을뿐이지 축소된 한반도 식민사관에 있지 않다.

우리가 마땅히 옛 역사를 자랑해야 하며 세계인들에게 당당해야 함에도 치욕스럽게 느끼고 비굴하게 피해야 했으며 불필요한 피해의식이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본래의 진취성과 높은 DNA를 망각하면서 우리의 과감한 진로선택을 우리스스로가 막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진정한 우리의 세계삼한역사 앞에서 크게 반성해야 할 점도 많다.

못난 역사, 구질구질한 역사, 창피한 역사로 알고 한반도 역사때문이라 하겠지만 우리 스스로가 인정해버리고 모질게 몰아붙인 우리의 경망스럽고 얄팍한 역사개념에 돌을 던져야 마땅할 것이다.


서론이 길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 하면 우리의 피해의식이나 노예근성 따위는 타에 의해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을 본래 식민근성과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 선지식자 역사학자들에 의해 확대재생산 되면서 오늘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피해역사에는 이런 불손한 의도에서 파생된 것이기에 언젠가는 우리가 제자리에 다시 바로 세워야 할 엄중한 역사실체라는 것이다.

우리 누구할 것 없이 이런 역사 아우라(aura)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잘난 정치인에게 알려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정치인들이 존재할 수 있다.

왜 우리가 한낱 열도일본인들을 머릿속에 넣고 맨 날 트라우마와 강박해야 하는가 묻는다.

서양코리아세력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의 몸과 정신을 오늘날 한반도라는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영토 안에 몰아넣는 것도 부족하여 허릴 잘라 분단을 시켜 근 70년이 다 가도록 안보비용을 스스로 덤으로 보상해가며 전범국(戰犯國)이라고 떠드는 열도일본에게 오히려 지속적으로 식민지인으로 취급당하며 갖은 트라우마를 당하면서도 그와 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불공정한 정치 상황들을 어느 누구도 궁금해 한 적이 없고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알려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워낙 한반도 식민사관이 철저했다고 해야 맞지만 허송세월이 얼마인가.

우리가 앉아 있는 한반도는 만리(萬里)가 아니라 수만리(數萬里)의 영토에 비하면 한 뼘조차도 안되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코리아세력들이 우리에게 왜 그토록 역사적으로 불리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오래된 해원관계에 있었다.

원천적으로 역사를 풀이하면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도 언급한 사실이지만 1609년에 이루어진 기유약조(己酉約條)에 대한 보복이며 전 세계에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행사에 대한 서양인들의 제재라 할 수밖에 없다.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제제는 마땅히 전범국이라고 하는 열도일본인들이 받아야 할 책임이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한반도가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전쟁이란 처참한 제재이다.

한국전쟁으로 쌍방 간 인명피해숫자가 얼마이든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옮겨간 기억지우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북한과 적대적관계가 사실상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굳어져 있다는 것도 언제까지나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되어 절대로 완전체가 될 수 없도록 사전 기획한 서양코리아세력의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역사진실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도 어찌보면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다.

과거 삼한역사가 천하를 통제할 때 변방에 존재하던 식민의 구성원이었던 신중국(新中國)관리가 감히 우리나라를 보고 내정간섭 투의 언질을 해도 누구하나 나서 반박하는 성명을 내는 사람이 없다.

현재 열도일본정치인들이나 신중국 관리들이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되는 것이다.

삼국관리들이 모두 역사를 잘못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드설치가 옳다 그르다 식에 우리나라 내부사정문제와 다른 주권국가로서의 위신문제이다.

대한민국이 반듯한 주권국가라는 사실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나아갈 것인가.

역사 바로 알기다.

지도자가 부정하고 부패하고 국민을 개돼지 민중으로만 본다는 것은 역사관과 국가관이 바로서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올바른 역사관과 그런 바탕에서 국가관이 생성된다 것에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다.

얼마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미래환경연구본부(KEI) 소속 한 연구원이 일왕만세삼창을 했다고 보도가 짧게 한번 나왔다.

그 이후 그것에 대한 어떠한 제제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얼빠진 역사관이 만든 얼빠진 인물이 저지른 짓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식민지근성, 노예근성으로 변이되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작금의 지식인들 어느 누구도 위와 같은 얼빠진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한반도 식민사관이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민교육 100년 대계라고 하는 교육부 정책기획관이란 직책이 어떤 자리인가.

이런 엄중한 자리의 공복(公僕)들 조차도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고 정책을 펴고 있는 상황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니 어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변이되게 하고 삐뚤어지게 만든 것일까?

서양코리아세력들이 그들의 가당찮은 우월성을 보장받기 위해 한반도 역사를 만들었고 그로인한 폐해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나 하는 것일까.


서양코리아 생성의 역사


그렇다면 우리를 이렇듯 시궁창으로 몰아넣고 자빠뜨린 서양코리아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먼저 변광현 교수의 저서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대하여"를 참고로 하자.

변광현교수라 할지라도 한반도인 모두가 그러하듯이 오직 한반도역사만을 생각하였던 상황에서 서양역사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발견하면서 비판하였던 사실들이 정확하게 그의 저서에 나타나고 이것들은 글쓴이가 주장하는 "서양코리아"의 실체와 생성과정에 대한 모든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결국 그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초반부터 본래 동양역사와 서양역사가 하나였고 같았음에도 분리시키거나 오히려 동양역사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처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동양역사의 것을 서양역사가 탈취하고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서양역사를 생성시켰다는 의혹을 말하고 있으며 이런 의혹에는 영국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런던 세인트 마틴(Saint Martin)미술대학 출신의 화가임에도 고인돌 및 상고사 연구를 하였으며 그의 화필에서 나올 법한 냉철한 분석력은 서양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점을 돌출하였고 그것에 대한 의혹과 의문을 곳곳에서 제기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본 블로그에서 이야기 하는 "세계삼한역사"라는 관점의 역사에 대한 존재를 파악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도 그가 발견한 서양역사의 문제점에서 세계삼한역사에 대한 흔적을 조금이라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한 것 중에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바로 투탄카멘(Tutankhamun)발굴으로 부터 전개된 영국인들의 변이된 역사개념이라는데 있다.

다 아시다시피 투탕카멘(,재위BC1361-BC1352)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Pharaoh)인데 그의 무덤이 왕가의 계곡(vally of the king:건립:BC1519-BC1000)이라고 알려진 공동묘역 "KV62"에서 당시 유대계 금융인 조지 하버트 카너본(George Carnarvon:1866-1923)의 후원으로 1922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1874-1939)로 하여금 처음으로 발견하게 하였고 이 발굴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이상하게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이 21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에서 의혹이 가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금융은 역사만들기 모든 곳에서 투입되는 자금 공급책이었다.

물론 이러한 죽음들은 발굴비밀을 막고 눈과 입을 봉하기 위한 살해라는 의혹이다.

투탄카멘 발굴이 끝나자마자, 1923년 카너번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후 곧 발굴 당사자인 카터 역시 죽었다는데, 이들 모두 모기에 물려 죽었다거나 면도하다가 난 상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로 실제 사인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기막힌 것은 이들 희생자들을 신비주의에 의한 괴이한 변고로 몰아넣고 이들이 모두 무덤의 저주로 죽었다면서 영국신문들은 글자하나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마치 합창을 하듯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이를 기사화했다는 점을 변교수는 가감 없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론플레이다.

즉 하나의 보도물을 만들고 언론들이 이를 꿰맞추면서 극대화했다는 이야기다.

더하여 변박사는 이 발굴로부터의 모든 상황들을 영국비밀첩보원들이 개입했다고 믿었다.


다음 기술내용을 보자.

미노아시대 크노소스(Minoan Period B.C.3000-1400,The palace of King Minos, Knossos)와 파이스토스(Phaistos:BC1700)의 유적, 고르티스(Gortys)유적이 있다고 하는 그리스문명의 크레타(Crete)와 오리엔트 문화라고 하는 이집트역사는 심각한 부풀기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영국학자들에 의하여 2000년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서양인들은 이 지역을 인류문명의 기원지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Ptolemaic dynasty:BC306~BC30)에 살았던 이집트의 역사학자 마네토(Manetho)가 기원전 30년 로마공화정(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BC508-BC27)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과거 3천년의 기간을 30개 왕조시대로 구분했다고 알려지면서부터 시작된 문제라는 것이다.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주장이다.

여기서 탁 깨보자.

서양인들의 역사 정신적인 지주라고 하는 로마의 역사명칭은 놀랍게도 코라이“KORAI”이었다고 하는 본 블로그의 주장처럼 이를 서양역사학자들은 숨기고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코라이“KORAI”란 명칭이 그리스전지역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글 "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까?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3 "에서 밝혔다.

백과사전을 보면 고대 이집트문명은 항구성(恒久性)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연속성을 3000년으로 본다는 것은 지극히 무리한 설정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이집트인의 주신(主神)을 프타(Ptah)라 하였고 이는 우주와 이집트의 창조신으로 받들어졌으며 태양신(羅)을 비롯한 다른 모든 신(神)도 프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서양학자들이 주장한다는 점이다.

본 블로그 글 "신라산(la sil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455"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태양신(羅)은 곧 신라(神羅, 新羅)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서양역사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이집트의 신(神), 프타(Ptah)가 삼라만상과 모든 신(神)을 창조한 후 쉬고 있는 동안에 태양신(羅:Ra, Rah, Ré)은 모든 생명을 키우는 원천으로 추앙되었고 이것을 아침에는 케프리(Khepri, Khepera, Kheper, Chepri, Khepra), 저녁에는 아툼(Atum, Atem, Tem, Temu, Tum)이라고 불리었다 하여 매의 머리와 인간의 몸뚱이로 구현되었으며 이 분신을 호루스(Horus)라 하였다고 나타난다 하여 아무리 태양신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초자연적인 신은 바로 이집트 창조신 프타(Ptah)였다는 사실을 서양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프타와 이집트를 태양신 앞에 세우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아마 이 글에서 여러분도 무엇이 문제인지 눈치 채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집트문명이 서양인들의 주장처럼 사실상 존재하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오리엔트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고고학자들 중심으로 이집트역사자체를 영국인들이 발표한 것과 별도로 철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문명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본래 삼한역사 최초인류사의 어떤 부분이 잘려 나갔을 것이란 추측 또한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변교수는 2000년을 뛰어넘는 이상한 역사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서양역사의 모체가 되는 이 이집트 역사가 생성되기 전에 2000년은 삼한역사로부터 기원된 역사일까?

우리가 반드시 따져야 할 역사근원적인 문제라 할 수밖에 없다.


인류의 문명기원지!

이 한 줄의 문장은 서양역사를 만들고자 한 영국인들에게 있어 유혹과 같았을 것이다.

이것을 서양인코리아 만들기라 보는 관점이다.

인류사를 잉태한 오리엔트문명보다 우월한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 서양인들에게는 이집트 투탄카멘(Tutankhamun)발굴은 마치 에덴동산의 유혹의 사과와 같은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크레타의 미노스문화와 고대 이집트문명은 고대 그리스문명 이전의 초유의 문명처럼 여기게 되었고, 이때부터 유럽의 고대역사는 아시아와는 별도로 크레타와 이집트에서 비롯하였다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는 지중해문명역사가 돌출된 것이다.

즉 하나의 체제 역사가 영국인들의 조작으로 인해 동양과 서양두개의 역사로 황당하게 나누어진 결과임을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가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꾸준하게 본 블로그를 통해 글쓴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에서의 소제목"3)실증주의와 끼워 넣기한 유럽사"편에서 실제로 러시아학자들에 의해 폭로된 사실인데 1954 stonehenge being built 사진과 함께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데코레이션(decoration)작업하던 사실이 백일하에 노출되어 이슈화되었다는 것과 이것은 영국의 역사지명과 유적 옮기기가 마무리되던 광경임을 우리가 예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에서도 신라(新羅)의 존속기간을 1000년가량 이라 하면서도 중국을 따로 세우고 있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역사 항구성(恒久性)이란 때로는 역사해석자들에 의해 남용되거나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며 이집트문명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라가 1000년을 지속했다고 하는 역사성은 어느정도 인정한 것이라 할 때 실체 그 보다 더 우월하거나 훌륭했을 가능성을 내다보게 하는 것이다.

이미 신라가 이집트문명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Sassanid Empire)의 두여제와 신라(新羅)의 두여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8"과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에서 충분하게 살펴보았던 것처럼 신라제국의 모태역사는 사산제국(Sasanian Empire:224-651)과 연결되고, 그 앞선 제국 파르티아(Parthian:BC247-AC224)와 연결되어야 하며 그 이전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BC312-BC63)역시 별종이 아니라면 마땅히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챈 서양학자들은 그 이전 마케도니아왕국(Macedonia:BC808-BC168)이 서양역사를 위해 세워지고 연장하여 그리스지역에 도리아인(Dorians)들의 침략이 빈번했던 시기를 그리스 암흑기(BC1200년-BC800)이라 하여 실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역사를 바르게 보는 우리입장에서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 역사가 바로 영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BC1600-1100), 그 이전의 미노스문명((Minoan civilization:BC3650-1170)그리고 키클라데스문명(Cycladic civilization:BC3300-2000)까지 이어지는 것에서 무엇인가 꿰넣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언제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한반도 역사에서 탈피한 우리나라 미래 영민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반드시 검증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싶다.


글쓴이가 마케도니아가 어디쯤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본 블로그 글 "압록강 자치(Korea taimen)는 갈색송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7"에서 오흐리드 송어(Orhid trout)의 근원지 분포지도를 정확하게 꿰뚫고 북아메리카대륙 와이오밍(Wyoming)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상류 미네소타(Minnesota)에 근원지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서양인들이 세운 마케도니아(Macedonia)역사는 기독교세력이 지배한 도시의 역사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케도니아가 존재했을 것을 예상한다면 바로 위 글에서 지적한 곳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번외 이야기를 잠시 한다면 마케도니아의 국기를 보면 요사이 일본이 즐겨 힘자랑하면서 사용하는 전범기로 알려진 "선 라이트 기"다.

이것을 굳이 이야기 한다면 서양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 상징적인 깃발이라 해야 맞다.

열도일본인들은 이러한 의미를 안다고 할 수가 없다.

기독교국가라는 의미를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고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함에 깃발을 꽂아 전쟁수행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열도일본인들은 과연 몇이나 알까?

기독교 시녀가 된 기분은 어떠한 것일까?

자랑스러워해야 할 대상인지 글쓴이는 잘 모르겠다.



글쓴이가 사해(死海:Dead Sea)라고 믿고 있는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에서 마케도니아가 있었다고 상상되는 와이오밍은 접해있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있다.

유타주(Utah)의 유타호수에서 북쪽으로 82 km길이의 요르단강(Jordan River)이 흘러 솔트레이크로 들어간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중동 사해와 요르단강과 똑 같다.

요르단 강이라 하지 않고 현재 미국에서는 "조단강"이라고 하는데 스펠링은 같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기독교의 파생지를 찾으려면 엉뚱한데 찾지 말고 이곳을 집중적으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결단코 영국인들이 우습게 뛰어넘은 2000년의 역사는 분명 기독교유럽사의 원천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다 이유가 있다.

서양역사는 왜 우리 삼한역사를 이토록 이용하려 하였는지의 역사정황을 세밀하게 추적한 결과는 그들의 역사열등의식에 의한 탐욕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羅馬, Rome)가 본래 코리아(COREA)라는 사실과 그것을 서양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연결성에서 분명하게 무리가 있었음을 변교수의 주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923년의 역사변이성


1923년이란 역사연대는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가.

그것에 대한 상징성을 몇 가지 집어본다.

이때 시기적으로 볼 때 글쓴이가 본 블로그 글 "미국에서의 태극(太極)과 일장(日章)의 상징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4"에서 말하길 동아일보 창간지에 미국(米國)육군 상비병 유육(紐育)발전(發電)이라는 제목과 함께 보도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은 뉴욕시(New York)에 육군 상비병원을 300,000명으로 정하기로 국회에서 결의하였다는 사실에서 미국(米國)이 그동안 상비군조차 없어 1920년에 가서야 비로소 의회에 결의를 거쳐 군대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고 그 이전 1차세계대전 당시 서양코리아국가들끼리 내전상태에서 유나이트 코리아(United Corea)가 나설 수 없었던 위치에서 뒤늦게 종전 임박한 1917년에 창설한 미국사단의 면면들을 살펴보았을때 실제로 미국이 군을 조직하고 정상적인 국가로 활동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시기는 1920년이라 했다.

즉 다시 이야기 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상식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미국이 실제로 국제간 국가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시기가 1920년부터라는 것이 거의 정확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 시기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이듬해인 1920년 1월 3개의 한국인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한 시기이다.


1923년이라 함은 미국의 이 같은 불명확한 국가성립문제가 있는 시대이고 그것이 불과 100년이 채 안된 시기임을 감안 할 때 역사의 무상함이라는 것은 실제로 글쓴이에게는 폐부를 깊이 찌르고 있음을 몸서리로 느끼고 있다.

2016년이라고 하면 정확히 96년이다.

96년 만에 역사가 어쩌면 이토록 변할 수 있단 말인가.

1, 2차세계대전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 본다면 하나의 체제에서는 내분이다.

이 두 차례의 내분 때문에 하나의 체제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거대한 국가라고 자부해도 내분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내부 구성원들은 잘 알 수가 없기때문에 내분에 동참한다.

큰 나라일수록 단결해야 하고 체제를 위해 관리들이 정직하고 청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거대한 미국이나, 신중국 역시 서로 내분하겠다고 하면 금방 사라지고 없어질 체제임을 우리 역사적으로 이미 경험을 해 본바다.

이 두 차례의 내분은 앞에서 말한 서양코리아 만들기가 부추기고 촉발시킨 것이다.

때문에 변혁이니 뭐니 하지만 정상적인 역사흐름이라기 보단 어떤 세력에 의해 인위적인 것으로 금융세력이 깊이 관여했을 것이며 돌변할 수 있는 산업혁명에 의한 물질환경시대와 맞물려 하나의 체제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든 것임을 알게 한다.

서양코리아 만들기 세력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하나의 체제를 조그마하게 만들기에 들어가 끝내 한반도에서 완성시켰으며 그곳에는 미국유학자들을 대거투입시켜 식민지사관이 물들게 한 것이다.

어찌 이와같은 상황에서 서글프다 하지 않겠는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끝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딴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기득권과 비기득권이 바뀌고 주인과 나그네 처지가 완전히 뒤 바뀌는 세상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치자면 70년이다.

1920년부터 1945년은 불과 25년이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차이의 기간밖에 되지 않지만 거대한 역사를 잊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우리는 세계1.2차대전으로 역사를 잃어버렸다는데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만리의 강토가 작은 땅덩어리 한반도로 변했다는데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작은 땅덩어리에 갇혀 유대인들이 뿌려놓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아주 망신창이가 되고 만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총뿌리를 겨누고 살상하던 민족동란이라는 오명 속에 한민족이 아니라 분단되어 완전히 다른 국가개념으로 거의 65년을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한국동란은 오랜 역사 기억지우기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총뿌리와 화염 속에 맡긴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2차세계대전은 우리에게 승리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러하질 못했다.

역사패전국으로서의 서글픔은 서양코리아의 교육을 받은 지식자들에 의해 한반도가 또다시 점령되면서 배가 되고 더욱 굳어지게 만든 것이다.

서양코리아의 지식자들이 차지하고 난 후 1945년부터 실시된 교육들은 변이된 서양코리아인들을 생성시켰으며 서양코리아가 만든 가짜일본인들까지 속출했다.

옛 역사를 찾기란 그때부터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를 잃어버린 것은 시작이고 변이된 서양코리아세력이 만든 동양일본은 우리 머리와 마음을 지배한 것이다.

문제는 서양코리아의 실체가 미국이라는 것을 모른다.

양질의 교육이든, 아니면 음질의 교육이든 교육이 왜 중요한지 우리처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비록 25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변이된 역사를 자본을 매개로한 언론을 중심으로 하면서 지속적으로 세뇌하고 수많은 책과 사진, 삽화 그리고 서양인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어용화가들까지 대동하였다면 기존 역사사실을 감쪽같이 감추고 사라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마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라 할지라도 감추고 가르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는가.

때문에 현 세계사는 정확하게 검증되지 않았고 검증할 수도 없는 가짜역사가 완전하게 변이체로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긴자의 역사를 누가 검증할 수 있는가.

본 블로그 글 "코리언(corean)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50년 민족동란 즉 육이오사변 때 남북한 장병들이 우리말을 깨우치지 못한 비율이 70%를 웃돌았다고 하는 사실은 한반도 영역과 그 속의 주민들이 과연 역사 항구성을 가질 수 있는 개체들인가에 대한 의심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제대로 역사가 이어지질 못했고 이어질 수 없었다는 반증이다.

또한 신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항일투사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역사를 몰랐다고 하는 사실이 곳곳에서 음모설처럼 발견되고 있는 것도 상대적으로 신중국인들의 비해 현저히 역사상식에서 부족했다는 점이 들어난다.

반면 신중국을 완성시킨 공산주의자 모택동은 역사학자와 마찬가지로 고대역사를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왜 우리 항일투사들은 하나같이 우리역사를 몰랐을까?

문제는 그것이 삼한역사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알고 있는 역사학자들은 삼한인일뿐 한반도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인들은 서양코리아가 만든 한반도 역사만을 줄줄이 암기했을 것이다.

흔하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설중에 보면 장개석 총통이 임시정부의 이시영 전부통령에게 중국 전체가 당신들의 역사무대인데 이런 역사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습니까? 식의 핀잔을 들었다는 설은 바로 동양코리아의 실체를 그들이 알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결같이 미국교육을 받은 지식자들은 도대체가 삼한코리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또한 동양인 사회주의자들은 동양코리아를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다.

주은래 역시 대륙남부복건, 동북지역의 역사가 조선인에게 귀속된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도 교육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오히려 한반도 사람들이 생소하게 여겼던 것은 한반도를 귀속으로 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서양코리아가 만든 역사에만 본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반증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중국지식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이런 핀잔을 주었음에도 누구하나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늘 상 한반도를 벗어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닌 것처럼 기존 유학파 역사학자들은 어린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한결같은 고집 등은 오늘날 우리를 역사바보천치로 만들었음을 알게 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 때는 세계삼한역사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중국인들의 역사상식을 그냥 흘려버렸다는 것은 전통역사 삼한인들 상식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허튼 지식에 가로막혀 믿지 않았거나 죽음이 두려워 감히 접근못했을 수도 있다.

특히 한반도 조선인들 가운데 지식인들 모두가 기독교개종과 함께 한결같이 서양역사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반면 신중국인들은 대륙본토 삼한인의 역사를 비록 질투를 느끼면서도 습관적으로 인지했다는 사실이다.

신중국인들에게 습관적으로 인지를 시켰던 주체는 오늘날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는 것들을 하루빨리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

정작 바른 역사를 알아야 할 사람들은 서양교육에 매몰되었다는 이야기다.

삼한의 진정한 코리아는 동, 서양인들을 모두 구성원으로 하는 역사주체이다.

즉 동양, 서양의 대한제국은 다른 국가명으로 변질되었다.

분명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1920년까지 통제 할 수 있었던 국가명은 "UNITED COREA"이다.

이를 현재 미국인들은 "UNITED STATE" 라 한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밀려나 한번 변질되고 서부로 옮겨가면서 고려는 대동아공영권으로 밀려낫지만 조선은 일본이란 체제 속에서 또 한번 변질되고 2차세계대전전까지 조선인은 일본에 매몰되었으며 고려인은 동양코리아체제속에서 아시아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일부도서,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의 북서부영토를 운영하면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구축하고 서양코리아와 일전을 벌렸던 것이다.

하지만 패전으로 인해 유민 고려인과 가짜 중국인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물론 "UNITED COREA"이었지만 동양코리아세력이라 할 수 있고 이속에는 사라진 러시아가 들어간다.

그렇다면 2차세계대전전까지 현재 열도일본인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1923년 관동대지진은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캘리포니아의 지진실체


서양코리아들이 키워준 일본의 위치확인 필요하고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관동대지진을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삼한전통역사 기록인 오대산본(五臺山本)이 일본 도쿄제대(東京大学:University of Tokyo)에 보관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주장이 한반도 역사에 버젓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기록이 의도적으로 소각되거나 분실되었다고 하는 비일비재한 한반도 역사사실을 감안할 때 이 역시 도저히 믿을 수가 없게 한다.

조작된 역사를 만들려면 기존의 역사를 고치거나 없애버려야 한다.

이글의 핵심은 서양코리아세력과 그로인해 생성된 동양일본인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역사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서양사를 새롭게 만들고자 했다면 기존 역사가 망가뜨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역사도 사실상 따져보면 고려나 조선 역사 내부에 존재하는 이름일 뿐이다.

때문에 한반도 역사에서도 왜란으로 혹은 내란으로 기술한 것이다.

오대산본이 동경제대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관동대지진이 실제로 현 일본 열도에서 존재한 지진인가 하는 문제이다.

동양계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열도에서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이 열도에 존재했다는 것은 근세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한발만 나아가 보면 일본은 거의 카브리해 도서(島嶼)에서 네덜란드나 잉글랜드와 연결되고 이어 시대가 변하면서 멕시코 일부지역 또는 산간지역 정도로 나타난다.

그곳에 네덜란드가 존재한 사실과 그곳을 동인도제도라 하였다는 사실도 명확히 따져보았다.

지진(地震)은 자연적 원인으로 인해 지구의 표면이 흔들리는 현상이라 하였다.

흔히 자연적 원인 중 단층면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변위 자체를 지진이라고 하고 현상적(現象的)인 정의로는, 지각 내에 저장되어 있던 스트레인(歪力:strain)이 탄성진동(彈性振動)에너지로 바뀌면서 급격하게 방출되는 현상이라 설명된다.

그리고 대륙에는 35km, 대양에서는 5-10km 두께의 지각(地殼) 또는 덮개(mantle)내 암석의 파괴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이 파괴가 일어난 장소를 진원(震源)이라 하고 그 지표점(地表點)을 진앙(震央)이라 한다고 정의된다.

즉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지형적환경과 지진이 진앙지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지속된다는 점은 전문가들도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나 시간적, 위치적으로 좁혀보면 지진발생지, 진앙지를 중심으로 지속되는 범위를 어느 정도 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견이 갈리며 지금까지의 통계수치로 판단할 때 거리가 약 1000km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딱히 정의 내려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서양학자들은 같은 불의 고리(Ring of Fire)위치에 있는 일본열도와 캘리포니아 서해안에서 동시 다발적인 지진을 맞이할 때 가능성을 높게 보았던 실례가 바로 열도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고 단언하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은 근세사 실체의 기록이 모습이다.

그러나 열도에 발생한 지진과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지진이 같은 해 시간적 차이가 있다지만 연계되는 식에 지진이 발생한 사실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한 곳의 지진이 이중으로 분리되었을 가능성이다.

현재 캘리포니아 앞바다에서 아래 주기한 것처럼 정확하게 1923년 1월 22일 오전 9시 4분 케이프멘도시노(Cape Mendocino)에서 지진규모 7.2의 지진이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은 1796년부터 2004년까지의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100대 리스트(100 Largest California Earthquakes:1796-2004)에서 9위에 랭크된 사례이기 때문에 상당힌 큰 규모의 지진이다.

이 같은 지진 규모는 재난에 가까운 것으로 "많은 빌딩이 파괴되고 철도가 휜다"하였다.

그리고 난 후 약 8개월 정도 기간이 흘러 같은해 1923년 9월 1일 서쪽으로 직선거리 7900km 가량 떨어진 일본열도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거리상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두 지역이 지진을 동반할 수 있는 지형적 환경, 불의 고리(Ring of Fire) 즉 태평양 주변의 지진과 화산 활동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들을 가리키는 환태평양 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circum-Pacific belt)에 속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지형적인 환경이 오히려 서양지질학자들에게 악용되었을 소지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세사의 이중 분리 시켜 일본을 열도에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역사기록이라고 하여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서양세력에 의해 근세기에 역사판짜기가 실행되었다고 보고 그러한 의혹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심각하게 역사적으로 따져볼 필요성이 있는 것은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열도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 6,000~6600명의 살해된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사건(關東大地震朝鮮人虐殺事件)은 우리에게 치욕이면서도 매우 괴이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상당히 식민지사관 만들기에 이용되었다고 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본 블로그 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과 조선인 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0"에서 이와같은 문제점을 소상히 밝혀보았지만 자연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지진문제는 또 하나의 변수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괴적임

굴뚝, 기둥이나 약한 벽이 무너진다.

6.5

보다 파괴적임

집이 무너진다.

6.9

재난에 가까움

많은 빌딩이 파괴되고 철도가 휜다.

7.3

XI

상당한 재난

몇 개의 빌딩만 남고 다 무너진다.

8.1

XII

천재지변

완전히 파괴된다.

8.1~


그렇다면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열도 지형상황을 보자.

현재 궁상 열도(弓状列島) 내지(內地)라고 하는 혼슈(本州)는 열도 본토을 말하는 것인데 그곳에서 관동(關東)이라 함은 이바라키현(茨城県), 도치기현(栃木県), 군마현(群馬県), 사이타마현(埼玉県), 지바현(千葉県), 도쿄도,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이렇게 모인 곳을 말한다.

본 블로그 글 “메밀(蕎麥)기원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2

“에서 지적했듯이 령(嶺)이나 관(關)의 개념은 한반도와 열도에서 본래 의미와 다르게 매우 축소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령(嶺)은 내리 뻗은 산맥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관(關)은 왕래할 때에 반드시 지나는 길로서 문(門)을 나타내고 ‘문의 빗장’을 가리켰다고 하는 백과사전 풀이를 인용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일본 열도에서 관서와 관동을 구별함에 있어 모호한 것도 사실이고 여기에서 관(關)은 관동산지(關東山地)라고 하는 것으로 작게나마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저런 산과 산맥을 통 털어 관동산지(關東山地)라 함도 참으로 특이하고 한 줄기로 내리뻗은 산맥이 아니라 산맥과 같은 산맥과 산이 어지럽게 마구 섞여 구분이 불과하며 특별하게 관(關)이라고 칭할 수 없는 지형 환경임에 놀란다.

오히려 순수하게 관(關)이라고 하기 보단 산지(山地)라고 하는 것이 맞을 성 싶다.

때문에 지나가는 통로, 관(關)이라 쓰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그렇다면 1923년 일본에 대지진이 있었던 곳을 관동이라 했다면 이 열도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아야한다는 이야기로 진전될 수밖에 없다.

일본피해지진총람(最新版 日本被害地震総覧:p272)에서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지진 진앙지(Epicenter)를 35°19.6′N 139°8.3′ECoordinates: 35°19.6′N 139°8.3′E 위치라 기록하고 있지만 이곳을 위성으로 확인해 보면 도쿄(東京) 남서쪽 연안도시 오다와라(小田原:Odawara)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다수 자료에는 가나가와현(神奈川県)남쪽의 사가미 만(相模灣)을 진앙지라 하고 있다.

진앙지 조차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같은 결과는 서양코리아(West Corea)들에 의한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캘리포니아에서 같은 시기에 발생한 지진들을 살펴보자.

1922년, 1923년, 1925년 가까운 시기에 거대한 지진이 3차례나 발생한 사실을 자료에서 확인된다.

정확하게 북아메리카대륙 서해안, 캘리포니아주 앞바다에서 모두 발생한 것이다.

즉 열도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진앙지를 사가미만(相模湾)이라 한 것과 어찌보면 같다.



[1]첫번째 1922년 01월 31일, 13:17:22(UTC) 지진 7.3규모(Magnitude)의 오리건주 유진(Eugene)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까지도 진동을 느낄 정도의 대규모지진이 캘리포니아 유리카 서쪽(West of Eureka)에서 발생했다는 기록이다. 이 지진은 1796년부터 2004년까지 100대 대규모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리스트(100 Largest California Earthquakes:1796-2004)에 6위에 랭크 될 수 있는 지진이라 하니 상당히 강했던 지진이었다.

[2]두번째 1922년 1월 31일, 13:17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 유레카(Eureka) 앞바다 케이프 멘도시노(Cape Mendocino) 7.2 진앙위치:40°42′N 125°33′W/40.7°N 125.55°W/ 40.7; -125.55이다.

[3]세번째 1922년 3월 10일 11:21(UTC) 6.3 규모의 몬터레이카운티 파크필드(Parkfield)지진은 79위에 랭크되며,

[4]네번째 1923년 1월 22일 09:04 01:04 케이프 멘도시노(Cape Mendocino), 규모7.1의 위치:40°29′N 125°19′W/40.49°N 125.32°W/ 40.49; -125.32에 발생한 지진은 1796년부터 2004년까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리스트에서 9위로 랭크되고 있어 상당한 규모임을 알 수가 있다.

[5]다섯번째 1925년 6월 29일 14:42(UTC) 6.3 산타바바라(Santa Barbara)는 80위에 랭크되었지만 이때 지진에 약한 건물들이 거의 파괴되었다고 하며 이 규모의 파괴상황을 위 도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벽에 금이 가고 떨어지며 것 보다 강함을 알 수 있고 굴뚝, 기둥이나 약한 벽이 무너지는 것보다 약한 수준임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1~2년 상간에 발생한 지진을 살펴보았지만 1923년만을 기준으로 할 때 위 지진이 발생한 곳을 중심으로 보면 시에라네바다 산맥(Sierra Nevada)이 있고 이것이 동쪽으로 나란히 남북으로 뻗은 산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산맥의 길이가 약 643km이고 최고봉 “휘트니 산(4418m)”이 있는 산맥이다.

또 하나의 산맥은 태평양과 접한 서부해안과 거의 가깝게 북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을 남북으로 내 달리는 산맥으로써 퍼시픽 코스트산맥(coast ranges)이라 한다.

그렇다면 관동(關東)의 본 의미를 대조해고 따져보자.

앞에서 열도관동은 산지라고 하는 편이 맞고 관이라는 의미가 부족하다고 했다.

어디를 통하는 관문(關門)이라는 의미가 게이트(Gateway)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사실상 관동(關東)이라고 함은 관(關)의 동쪽 지역을 통째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해석하면 산맥이나 산지에서 동쪽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통로 또는 관문(Gateway)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도시가 많은 서쪽보다 동쪽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이 게이트웨이는 동쪽에 관동지역이라는 동양개념과는 괴리가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상 북아메리카대륙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서부지역의 지형상황을 보면 캘리포니아 북쪽 지진발생지역인 연안인 유레카(Eureka)를 시작으로 서쪽으로 알카타(Arcata) 또는 포츄나(Fortuna)를 거쳐 퍼시픽 코스트산맥(coast ranges)을 통과하고 레딩(Redding)으로 들어가는 공간은 참으로 거대하다.

이곳을 관동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레드블러프(Red Bluff)로 나아가 또 하나의 관문인 시에라네바다 산맥(Sierra Nevada)을 넘어 알투라스(Alturas)나 수잔빌(Susanville)으로 빠져나아가는 길목임을 알 수 있고 특히 남쪽 연안에 다발성인 지진 진양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시작으로 산호세(San Jose), 세크라멘토(Sacreamento)에서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를 통과하여 리노(Reno)까지 이르는 관문이 캘리포이나의 주 관문으로 연결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그 쪽에는 네바다주가 깔려 있는데 이곳을 관동이라 한들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사실상 이곳에서 결국 네바다주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까지 이어지는 것은 예부터 주요루트로서 지금도 중요하게 도로가 사용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결국 교묘하게 동양한문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관동(關東)이라 것을 축소시켜 관동이라는 넓은 지역은 고사하고 한정된 부분만을 관동이라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며 캘리포니아주 퍼시픽 코스트산맥(coast ranges)동쪽위치, 혹은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의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빠져나간다는 의미가 강함을 알 수가 있다.

서쪽에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들이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빠져 나간다는 뜻으로 관동(關東)이라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적어도 1923년에 발생한 지진 3회 지진 진앙지(震央地:epicenter)를 중심으로 약 500km 내외에 있는 도시에 대규모로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가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동양계일본인과 동양계조선인이 거리를 두고 있었겠지만 간격을 두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곳에 동경(東京)이라는 지명을 가진 도시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관동이라는 지명과 함께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을 보자면 사실상 일본열도보다는 오히려 캘리포니아가 지형적으로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열도가 왜 일본영토가 되어야 했을까?

실제로는 이것이 키 포인트이다.

서양코리아세력들이 보았을 때 미래 지진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지역에 일본을 세워야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이것이 바로 옛 고려가 관할 땅 현 열도라는 결과이다.

결국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을 1920년경 미국이 장악하지 못했을 때 그곳에 중국인이라고 하는 고려인, 조선인, 일본인들이 서로 갈등을 만들며 거주했을 것으로 보고 각 도시들은 서양인들이 서서히 차지해 들어가면서 시골 한적한 곳으로 점차 쫓겨나 그 이후 모두 추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때문에 1920년경은 도시에도 동양계코리안들이 거주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전통적으로 일본이 거주하거나 근원지로 삼았던 곳은 지진과 화산이 속출하던 곳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일본은 오늘날 네덜란드로도 나타나고 또는 잉글랜드로 화하면서 섬으로 존재하다가 영토를 넓혀 멕시코를 차지하거나 북으로 영역을 넓혀 캘리포니아의 근거리에 있는 바하칼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까지 또는 텍사스주까지 동양인 일본집단들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전통적인 이민이 아니라 나중에 대륙횡단철도나 각종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도착한 서양인들보다 먼저 터전을 잡았던 것은 분명하다.

라틴아메리카 스페인령 필리핀에서 출발해 아카풀코로 향했던 마닐라-아카풀코 갤리온(Galleon)이라고 하는 대형범선에 탔던 아시아계 노예들 중에는 일본인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 노예들은 모두 중국인을 뜻하는 ‘치노(chino)’로 불리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당시 동양인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모두 치노(중국) 즉 고려인(高麗人)라 하였음을 하게 한다.

한참 어지러웠던 19세기에는 동양계일본인들이 텍사스주(Texas州)에 크고 작은 농장들을 사들이고 독점경영을 하였으며 소작이나 상대적으로 열악한 서양인들과 충돌을 야기했던 사실도 있다.

또한 멕시코에서도 1888년에는 양국의 국민들이 상대 국가로 이주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협정이 맺어졌고, 영사관들도 세워졌으며 멕시코는 1897년 일본인 이민자를 받아들인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는 기록도 볼 수가 있다.

문제는 아시아의 열도가 일본인들의 본거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으로 본 블로그에 낱낱이 공개하겠지만 1920년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백인서양인들은 일본인들을 캘리포이나주(加洲:California)에서 배일(排日) 또는 혐일(嫌日)의 대상으로 삼아 본래 밉상스러운 짓을 많이 했던 것을 트집으로 동양일본인들을 적극적으로 추방운동을 벌려 결국 쫓아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들이 결국 오갈 때가 없었기 때문에 2차세계대전후 미국의 도움으로 오늘날 고려(高麗:East Corea)영역이었던 열도에 정착하게 된 것임을 정확하게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 한반도인들은 이런 열도일본인들의 실체를 모르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서양코리아와 JAP


근세기 역사는 의문투성이다.

이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난 후 많은 나라에서 위로전문과 의연금, 의료물자 등 제공이 잇 따랐다고 하고 특히 1차세계대전 동안 함께 싸운 미국의 지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설명한다.

백인우월주의, 백인순수혈통주의가 팽배하여 벌어진 것이 1차세계대전이다.

기존 오리엔트문화 즉 동양인들을 몰아내는데 있다고보아야 옳다.

그럼에도 열도일본인 동양인들과 함께 전쟁을 치뤘다하니 믿기지가 않는다.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1920년 캘리포니아에서 배일, 혐일이라 하여 동양인일본인들을 몰아냈던 적이 있다. 

그러던 것이 지진을 매개로 하여 다시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미국은 1차세계대전((World War I,WWI:1914-1918)시기에는 미국이라는 나라자체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과 1차세계대전 발생지와 확전지가 북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본 블로그에서 알린바가 있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은 이상하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진 기부금은 대부분 미국, 영국, 대만에서 보내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명칭을 기준으로 재 편집한 내용이다.

미국은 잘아려진 것처럼 엉클 샘(Uncle Sam:US)으로 알려지는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 대표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이고 영국은 유대인 로스차일드가(Rothschild)이다.

대만(臺灣)은 당시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했던 것으로 오방색기(五方色旗)를 상징으로 하는 세계지도국가인 동양코리아(East Corea)로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을 관할하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려(高麗, COREA)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역사주체가 오늘날 동양대만(東洋臺灣)으로 남겨지면서 실체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 밖에 일본이재민 구호국가로는 인도, 오스트리아, 캐나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페루, 멕시코 등에서 구호품과 성금이 전해졌다고 한다.

물론 이들 국가들은 대동아공연권에 들어가 있지 않는 나라이다.

그리고 이 지원에는 러시아가 빠졌다.

러시아는 유대인 사회주의자 레닌에 의해 망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소련(蘇聯:1922.12.30-1991)은 왜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소련이란 나라자체가 1923년 9월 1일에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당시 고려(高麗:COREA)와 영토분쟁을 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지속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을 동원하여 양면으로 고려를 괴롭혔을 것이며 바로 소련도 대동아공영권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독단적인 외교 권한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미국이 일본이라는 역사주체는 대동아공영권에 속하지 않는 곳에 존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쨌던 동양코리아(East Corea)라는 하나의 체제에서 한 때 같은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일본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당시 고려 동양계 황제로 알려진 대청황제(大清皇帝) 부의(愛新覚羅溥儀)는 일본지진 소식에 매우 슬픔에 잠겨 당시 평가액(20萬$)상당치의 거대한 보석가지 등을 일본인들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백성들의 피해에 가슴아파했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도 피해자에 대한 모금 활동이 진행되었고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미군기지에서도 일본으로 다양한 물품이 발송되었다 하였으며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1887-1940)가 다이쇼(大正)에게 전보를 보내는 한편 흑인사회에서 모금활동을 실시했다고 주장한다.


                                               [시카고에서 열린 모금 운동]


The picture shows a bevy of american beauties dressed in kimonos and carrying paper lanterns. These girls marched through the streets of Chicago to collect money.[1923.9.15]]

사진은 미국의 적극적인 독려와 함께 기모노와 손에 들고 다니는 제등(提燈)을 갖춘 미국미인들이 보이고 이 소녀들은 시카고거리를 모금하기 위해 행진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분명 기모노와 제등은 동양인 일본인들의 문화인 것 같지만 생김새가 모두 미국 백인계 서양인들이다.

아마 네덜란드계미국인일 것이다.

일본을 위한 지진피해자 모금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왜 피해자인 동양계 일본인들은 이 행사에 일체 보이지 않는지 의문이다.

미국인이라고 하면서도 왜 이들은 기모노를 입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네덜란드인들의 문화가 그곳에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에서 이야기 했듯이 바로 네덜란드화가 고흐의 "탕기(Tanguy) 할아버지"작품의 배경으로도 쓰였던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풍의 기법을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곧 일본인이라는 의미와 마찬가지다.

네덜란드가 더치(Dutch)라면 이것을 미국(米國)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란 추측도 한다.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는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1621-1790)가 북아메리카 뉴욕 주 동부에 흐르는 허드슨강(Hudson River)하구에 건설한 식민지로서 지금의 뉴욕(New York)이라는 사실과 미국의 8대대통령 뉴욕 주 출신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1782-1862,재임:1837-1841)역시 루즈벨트 보다 앞선 네덜란드혈손이며 이때 제1언어를 영어가 아니라 네덜란드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2세(Theodore Roosevelt)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역시도 네덜란드 직계손으로 조상은 1650 년경에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뉴암스테르담의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Klaes van Rosenvelt)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네덜란드인을 화(和)라고 칭하는 것도 일본인 스스로가 화인(和人)이라 하는 것과 같다.

네덜란드 나막신(Patten)문화와 일본의 게다(下駄:Geta)문화가 같다.

때문에 동일한 국가명을 사용하던 동양인과 서양인이라는데 포인트가 잡혀 있다.

위 그림은 네덜란드인들이 "JAPAN"이고 네덜란드인들이 캘리포니아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나가기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세계사강(世界史綱:The Outline of History)을 출판했고,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것을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만들었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투탄카멘(Tutankhamun)발굴에 의한 2000년을 뛰어넘는 인류사기원를 확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서양사를 정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간추린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1922년에 만들지고 난 익년 1923년에 고려(高麗:United Corea)영역 곳곳에서는 대지진으로 인하여 참담한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황이 매우 어지러웠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미국은 동부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서부에도 미국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글쓴이의 판단은 서부는 미국이 아니었을 가능성과 잠재적이지만 일본(JAP)이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열도일본인들을 지칭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서양세력 독일 이나 네덜란드(dutch)를 지칭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미국은 대도시에서 정착민들이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분명 일본이 열도가 아님에도 서태평양을 운운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도 나중에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동양코리아의 영역인 대동아공영권을 바탕으로 따져보면 북아메리카대륙 알레스카(Alaska), 캐나다의 유콘준주(Yukon Territory), 노스웨스트준주(Northwest Territories)를 포함하고 그레이트슬레이브 호(Great slave Lake)의 이서(以西)쪽, 브리티시컬럼비아주(British Columbia), 엘버타주(Province of Alberta)를 포함하고 다시 남쪽으로 미국의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와 오리건주(State of Oregon)반을 가르고, 아이다호(State of Idaho)북부와 몬태나(Montana)서부를 포함하고 있어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 북쪽경계으로 한 북서영역을 모두 차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서부의 캘리포니아와 바하칼리포르니아주(California)와 멕시코(Mexico), 벨리즈(Belize)는 이 대동아공영권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외 카리브지역에는 바하마(Bahamas), 쿠바(Cuba)전 지역과 도미니카(Dominica)를 포함하고 중앙아메리카에는 엘살바도르(Elsalvador), 온두라스(Honduras),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rica), 파나마(Panama)가 포함되며 남아메리카대륙은 베네수엘라의 과나레(Venezuela Guanare)를 경계로 한 서부전역과 콜롬비아(Colombia)의 전역 에쿠아도르(Ecuador)까지의 영역이 대동아공영권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곳은 최소한 2차세계대전까지 동양코리아의 영역인 것은 틀림없다.

1937년 7월 7일에 발생한 중일전쟁(中日戰爭)역시 이 대동아공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일게다.

이 공영권 속에는 밴쿠버, 시애틀, 포틀랜드, 산호세, 파나마, 보고타, 키토 등 유명한 도시가 다들어가 있다.

그런데 위 일본관동대지진에서 구호금을 보냈다고 하는 곳은 이 대동아공영권에 있었던 나라는 보내질 않고 대신 멕시코와 페루가 구호금에 동참하였다.

필리핀에 미국기지가 있어 그곳에서 구호품을 일본으로 보내졌다는데 이 필리핀은 카리브해에 존재한는 도서일 뿐이다.

솔직히 미국이 일본열도에 구호금을 보냈다고 하는 것은 1920년이라면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대서양횡단을 하다가 사고가 빈번했고 예를 들어 1923년 8월 21일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 간 대륙횡단 우편비행개시될 때 훈련기가 아닌 보다 성능이 좋다고 알려진 DH4B로 그 구간을 6번 착륙하고 도착했다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직선거리가 4,141km 이니만큼 이 거리를 6번 착륙했다고 하면 1회 비행할 수 있는 거리의 한계가 690km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로마(Rome)에서 도쿄까지의 거리가 앞에서 나타난 숫자 17,700km이다.

이것을 주파하려면 자그마치 25~26회가량 착륙하고 다시 이륙해야 하는 번거러움이 아마도 비행하는 것 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로 로마에서 현재 열도 동경까지 주파가 가능했다고 믿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15세기 몇백톤 조각배같은 범선을 타고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남단을 지나 인도양으로 들어가 인도를 발견하고 따위가 다 마찬가지 이야기다.

서양인들이 무조건 믿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글쓴이의 판단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에 2차세계대전까지 미국의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와 오리건주(State of Oregon), 아이다호(State of Idaho)북부와 몬태나(Montana)는 중국인을 구성으로 하는 동양코리아가 장악하고 있었던 곳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동양계코리아들이 중국, 조선, 일본이란 이름으로 본래 원주민과 같이 거주한 것은 사실인 것 같고 서로 협력관계에 있다가도 충돌하고 다시 화해하고 이런 식을 2차대전까지 이어졌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 동양코리아의 힘을 꺽으려고 북아메리카대륙 미국과 아시아대륙으로 건너강 소련사회주의자들이 양면작전을 벌려 동양코리아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을 완전하게 동양인들을 좇아낸 시기가 바로 2차세계대전 끝말이다.

아마도 동부를 잃어버린 오리엔트코리아가 서부쪽으로 이동하였고 본격적으로 추방령에 의해 점차 아시아쪽으로 이동된 사실임을 판단케 하는 것이다.

어쨌든 캘리포니아와 멕시코등지는 동양계와 라틴계민족들이 뒤 섞여 공존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네바다, 아이다호, 와이오밍, 유타,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까지 그렇다.

본래부터 텍사스는 동양계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현 아시아역역은 그레이트 타타르(Great Tartar) 또는 악라사(鄂羅斯)영역으로 동양계코리아지역이어야 한다.

러시아종족이 포함된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를 차지고 있던 동양고려인(East Corea)을 과거 조선이 전역을 통제할 때 아마도 오랑캐라고 했을 수도 있다.

때문에 갇 군사력을 갖춘 1920년대에 미국이 서부전체를 점유했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

이 때 여기저기 사진으로 나타나는 조선인학살사건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백인순수혈통주의를 앞세운 서양코리아(West Corea)의 꼭두각시 자경단으로 활동했던 동양계일본인들이 있을 수 있고 서양코리아세력들에게 암묵적으로 길들여진 동양계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인들이 아니면 고려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조선인들이라고 하는 시체사진들을 글쓴이도 수차례 보았지만 대다수 지진으로 인한 피해의 모습일뿐 딱히 조선인만을 생각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어쨌던 조선인은 일본이름을 사용하던 서양코리아체제에 식민지상태였던 것은 분명하다.

고려인이란 범주에 일본인들이 속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고려인은 슬라브계가 아닌 러시아인일 수도 있다.

이 러시아인들은 악라사라고 하고 검은얼굴을 하였으며 눈이 벽안이라 하였으니 현재 중앙아시아계난 북인도사람과 흡사하다.


1881년 이후 백인정착민(The whites)을 미국인이라고 하기 전에 백인순수혈통주의를 앞세운 서양인(The Westerner)들 만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영토를 취득할 수 있다고 법이 제정되기 사작하고 동양인에게 토지 매입권을 박탈하였으며 점차 토지를 잃고 동양인 모두는 추방될 수밖에 없는 신세로 돌변한 것이다.

이것은 서양코리아에게 프론티어(frontier)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프론티어정신이라 함은 개척지와 미개척지 사이에 경계를 말하는 것인데 빼앗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매우 우월한 심리에서 나온 발상이고 그들이 나서 개척하지 않으면 토지, 또는 영토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니 기존 영토가 누구것이라 할지라도 총칼로 위협하여 빼앗버릴 수 있는 미개척지라는 것에 모두 합치점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정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동양계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고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인(朝鮮人)은 아마도 형편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고려인(高麗人:中國人)들에게도 이런 시련이 닥쳤을 것이고 2세계대전동안 끝내 대동아공영권을 미국과 캐나다에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동양코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방령이다.

이때부터 고려인들의 유민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맞다.

1882년 5월 6일에 체스터 앨런 아서(Chester Alan Arthur1829-1886,재임:1881-1885)미국대통령에 의해 미국에서 처음 발효된 것이라 하는데 동부에서 서부로 쫓아내는 수준이고 10년 후 다시 1892년 게리 법(Geary Act)에 의해 10년이 갱신되었으며 190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법의 효력 때문에 거의 동양인들은 동부보다 서부에 집결되는 형태를 낳았다.

그래도 서부에 많은 동양인 종족들이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UNITED COREA" 로 존재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신개척사라고 하여 인디언취급을 하고 동양계코리아안들 모두를 미개인취급을 하였다는 것이 문제이다.

백인이 아니라면 무기소지가 불가능하고 백인들만이 총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제대로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서부개척사가 그런 형태로 진행되고 완성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암리차르 학살사건과 제암리 학살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1"에서 지적한 글들은 일부분이라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제암리는 시카코의 어는 곳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 동부지역을 전부 당시 인도라 했기 때문이다.

인도라 함은 조선이라고 할 수 있고 코리아라고 명칭되었을 확률도 높다.

적어도 1919년 우리가 3.1운동으로 알고 있는 역사사건에서 그것이 일방적인 식민지상태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성질이 아니라 기존 가지고 있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복권운동이었을 가능성도 우리는 배제할 수가 없다.

글쓴이를 미쳤다고 할 텐가.

이처럼 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기존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복권형태의 폭동사건이 발발된 주요도시가 바로 풍성(風城)이라 했던 일리노이주 시카코(Chicago)를 시발점으로 1919년 그 한해 워싱턴디씨(Washington, D.C.),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Omaha),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톤(Charleston), 텍사스의 롱비유(Longview), 테네시주의 녹스빌(Knoxville), 아칸소주의 일레인(Elaine)등 전국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폭동은 2년 전 1917년 1차세계대전 말미부터 시작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내에서 폭동은 끊임없이 발생되었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9"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사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1917년부터 1920년 동안에는 적색공포(赤色恐怖)또는 레드 스케어(Red Scare)을 촉발시켜 사회주의자들의 추방령이 계속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백인순수혈통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단의 극열과 인종 배타성이 백인들에 의해 극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그야말로 오래 묵은 종족갈등에 의한 폭동이 미국전역에 전염병처럼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엇에 의한 식민지폭동인가.

세계사적으로 이를 정의 할 수 있겠는가.

서양코리아가 본래 정착주인 코리아를 몰아내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분명해진다.

주인을 나그네가 쫓아내는 시기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1922년에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주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하건데 1923년부터 당시 한반도가 아닌 곳에 존재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주동이 되어 한반도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오리엔트문명의 대표격인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1299-1923)이 같은 년도인 1923년에 멸망하고 해체되었다는 점은 역사실체를 따질 때 분명 동양고려(East Corea)세력이 서양고려(West Corea)세력들에게 무너지는 시점으로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이때부터 각종족별, 각문화별, 각종교별 국가가 탄생하고 각 국가별로 언어가 창안되고 그것이 각 연구소형식을 빌어 조직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들 조직우두머리들은 각국에 들어가 독립운동지도자가 되어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인의 유민신세

동양고려인들은 길 잃은 유민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사실을 앞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도 언급했다.

이 이후부터 터키는 "COREA 오스만"이라 하지 않고 완전히 분리된 투르크계"터키"라고 불리었던 것이 1923년 부터란 사실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터키란 지명등이 상징처럼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곳에는 러시아도 존재했고 스코틀랜드도 존재했으며 잉글랜드도 존재하였다.

터키의 아버지라고 숭앙받고 있는 초대대통령은 아타튀르크(Mustafa K.Atatürk:1923-1938)는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스탈린, 모택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백인들의 성화에 못이겨 동양코리아는 서부 쪽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2차세계대전 전까지 일어난 이야기다.

현재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하며 공화정부가 생성된 것이다.

우리 한반도 역시 초대대통령 이승만으로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미국유학출신으로 미국토착민이라 해야 맞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알아본 결과 관동대지진을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1923년은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에서 볼 때 분기점이라 하는 대표적인 상징성은 바로 오대산본(五臺山本)이 일본 도쿄제대(東京大学:University of Tokyo)에 보관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의 여파로 788책 중 74책을 제외한 모든 책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 역사가 생성된 본질이다.

이와같은 주장에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는가.

글쓴이의 이와같은 주장이 턱없는 비현실적인 낭설정도로 취급하겠는가.

하기사 역사판단은 각각 소신껏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역사를 조금이라고 집어보고 복기하기가 쉽지가 않다.

오늘날 한반도 역사가 생성될 수 있는 터전으로 이와같은 이유가 존재해야 함을 부정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에서 밝힌 것들은 바로 서두에서 이야기 한 영국인에 의해 서양인코리아(West Corea)가 만들어질 수 있는 바탕의 역사라 해야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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