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철종과 함풍제 그리고 쿠데타

한부울 2011. 5. 31. 22:45

지난 2010.05.12 중국 역사학자로서 많은 역사도서뿐만 아니라 고대역사서를 두루 섭렵(涉獵)한 지식인이며 중국역사학강사인 원승비(袁勝飛)이란 사람이 아주 용기 있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대륙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그가 당당하게 주장한 사실은 바로 현재 중국역사는 5%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구라는 내용이다.


중국역사는 5%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구라고 하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10  


이와같은 주장을 하였음에도 우리나라 반도사학자들은 눈섭하나 까닥하지 않고 묵묵부답 꿀먹은 벙어리 허수아비처럼 지금까지 여기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특별한 보충설명도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주장하면 분명 미친놈이라고 손까락질하고 놀려되었을 것이다.

대륙에서 대륙인이 그것도 상식이 있는 전문사학자가 한말이라 도리 없이 듣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

밥그릇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쨍그랑거리니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을 저명한 지식자, 역사학자 또는 박사, 교수라고들 한껏 세운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겉만 번드레하고 하나같이 꿀먹은 벙어리들 뿐인데....

다 존재할 가치도 없는 껍데기만 있는 우리나라 사학자들이다.

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무엇을 기대 할 것인가?

안타까움 뿐이다.

그들이 그렇다고 아예 주저않고 포기 할 순 없지 않는가?

그들이 나서지 못하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나서야지 별 도리가 없다.

원승비(袁勝飛)란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온전치 못하였을 것이라고 상상된다.

지금쯤 대륙공산당에 잡혀 반역, 반동으로 몰려 안 할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자 그렇다 대륙에서 이런 주장까지 나온 마당이다.

95%의 거짓의 역사를 그들에게 풀어 달라고 맡길순 없다.

우리가 나서 죽이되던 밥이되던 고생고생하며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공대륙사가 5%만 사실이고 95%가 거짓이란 사실은 반도사에 갇혀 있는 우리를 더욱 더 조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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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과 함풍제 그리고 쿠데타

 

천주교(西學) 탄압
서태후의 쿠테타
천궁과 환궁
함풍제와 철종의 죽음
태평천국과 동학
도교(道敎)는 동학(東學)
고종(高宗)과 동치제(同治帝)의 재(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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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돌릭, 천주교(天主敎, Catholic Church) 탄압

 

전례 문제(典禮問題)

마테오 리치를 통해 중국에 전도를 한 예수회는 유교를 용인(容認)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을 천주 또는 상제라고 불렀으며 공자를 숭배하는 의식을 인정, 중국의 전통·습관 사이의 마찰을 피하고, 나아가서는 학술공예 등 문화적 공헌으로 명조·청조에게서 우대를 받아 전도를 독점하여 왔다. 리치가 죽은 후 1632년에 도미니크회, 1633년에 프란체스코회가 필리핀에서 중국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스페인령인 필리핀에서는 전혀 종래의 습관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회의 전도 방침에 반대하였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스페인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예수회는 이탈리아인과 포르투갈인을 주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 수도회의 세력다툼과 민족감정 대립이 생겨 유교의 습관을 어느 정도 용서하는가에 대해 100년간 논쟁이 전개되어 중국 전도사상 전례문제로 큰 사건이 되었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로마 교황에게 호소하고 특사(特使)인 투르농은 1705년 강희제(康熙帝)에게 그 주장을 상주했으나 각하(却下)되었으며 투르농은 마카오에서 옥사했다. 이리하여 불리해진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이 문제에 대해 교황의 재결(裁決)을 요구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는 도미니크회·프란체스코회의 주장을 지지하고, 예수회 쪽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재결을 내렸다. 문제는 이것으로 해결된 듯이 보였으나 대청제국(大淸帝國)으로서는 교황의 금지명령이 자국(自國) 내에 미치게 되므로 이를 주권의 침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692년에 공인한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도의 자유를 취소하고 허가제(許可制)로 하였으며, 전례문제에 관해 강희제의 훈령(訓令)을 받드는 선교사에게만 체재(滯在)와 전도를 허가하고 그 밖에는 국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하여, 여기서 중국의 그리스도교의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었다.[위키]


1667년(AD) 중국에서 강희제(康熙帝:조선현종)의 친정(親政) 시작. 가톨릭교 신앙행위 금지.

1692년(AD) 중국에서 예수회 수사(修士)들의 선교 공식 허가.

1704년(AD) 중국에서의 가톨릭 전례(典禮) 완화문제로, 로마 교황 클레멘스 11세 예수회를 이단(異端)으로 규정.

1706년(AD) 청나라 성조(聖祖), 재래식 전례를 부정하는 선교사의 포교 금지, 추방.

1717년(AD) 중국이 다시 그리스도교를 엄금

1723년(AD) 중국 복건[福建]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심화. 그리스도교를 엄금하고 선교사들을 마카오로 추방.

1736년(AD) 중국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노골화.

1747년(AD) 중국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청나라 거주 금지.

1773년(AD) 로마교황이 예수회를 해산.

1791년(AD) 조선 신해교난(辛亥敎難)발생.

1801년(AD) 조선 신유교난(辛酉敎難)발생

1811년(AD) 중국 서양인의 내지(內地) 거주 및 그리스도교 포교를 금지.

1839년(AD) 조선 기해박해(己亥迫害)발생

1846년(AD) 조선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AD) 조선 병인박해(丙寅迫害)


위 내용을 보면 한반도 조선은 소국이라 중국이 시키는 대로 엄청난 박해를 하였는데 정작 중국에서는 1723년(AD) 복건(福建)에서 탄압한 것 말고는 그리스도교를 금지만 하였지 심하게 박해 했다는 구체적인 사건이 명시되지 않는다.

짜집기 하다 보니 조선 박해만들어내고 대륙 즉 청나라 박해는 딱히 기록 할 것이 없어 막연하게 "박해 노골화"정도 표현으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이 금지를 하였는데 대륙에서는 아무런 반발이나 정부차원의 제제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청군벌 말기처럼 허용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대륙에서는 가만히 있는데 한반도 조선이 길길이 날뛸 필요가 어디 있는가 묻는 것이다.전통적인 유교나라라서?

전례(典禮)는 한반도에서만 중히 여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 전례문제 논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반도 만 길길이 날뛰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중국에서 천주교를 금지하였다면 분명히 그에 상응한 박해와 탄압이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므로 한반도 조선에서 박해한 것이 아니라 대륙 조선에서 박해 한 사실을 한반도 조선이 박해했다고 갇다 붙인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서학(西學)이라고 하는 천주교(天主敎)

대륙조선이 멸망한 주요원인을 분석해 볼 때 기존 유교적인 전통사회 틀을 파괴하고 낙후한 봉조왕권 권력기반을 통째로 뒤흔들며 이질적으로 서민에게 파고든 서양종교 예수회가 외부적으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예수회 천주교는 처음에는 주로 남인(南人:남명, 남만)학자들에게 전파되었다.

점차 중인, 상민, 부녀자 층으로 퍼져가자 천주교는 유교(포괄적 도교)적 전통성에 반항하는 사교로 규정되어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와 같은 여러 차례의 탄압이 발생하였다.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는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조선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잡혀 사형 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 정약용 등은 귀양 보내져 박해 피해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로 인해 같은 해 정약종의 조카사위였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백서사건 즉 외세를 끌어들이는 밀서(密書)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해 9월29일에 잡혀 한양으로 끌려올라와 11월5일에 처형되었으며 가산을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 처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 가게 된다.

그 후 아편전쟁(1840~1842)이 발발되기 1년 전에 발생한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는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

이것은 반도사가 말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이보다 더 한 내용의 박해 사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볼 수가 없다.

 

탄압이나 박해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서 벌어진 것이라 할 때 1차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은 위 천주교 박해를 핑계로 한 서양세력들의 작심한 침략전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철종5년(1854)에는 얀송(Janson)신부, 철종7년(1856)에는 베르누(Simon Berneus 張敬)주교와 리델(Ridel), 페롱(Feron)신부 등 12인의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전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점차활기를 되찾았다. 그 결과 철종이 졸하고 계승한 고종초년에는 전국에 천주교 신도가 약 2만 명이 넘을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1856년 제2차 아편전쟁(Arrow War, 1856~1860)이 일어난다.

이것은 대륙을 식민지화하고자 하는 침략자들의 교활성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륙조선역시 철종요절 의문의 죽임 이후 이에 대한 반발로 철종이어 집권한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 강화하고 1866년에 또다시 천주교를 탄압(丙寅迫害, 丙寅邪獄)하였다.

그러자 다시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 Battle of Keupsa Gate:1866)이 발생한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47463 

 

서양세력들은 이렇듯 철저하게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복수전을 벌렸던 것이다.

반도사에는 대륙 청나라에서도 예수회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데 그것은 조선스스로가 탄압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라라고 대칭되는 청군벌(清軍閥)의 실체가 청제국(Qing Empire)이 아니라 대륙조선(1392-1881)을 대임한 정부(Government:1882-1897)로서의 외교권한만 가지고 대외적으로 활동하였다고 보이고 1897년 대한제국(1897-1910)이 성립될 때 비로소 청제국(1897-1912)이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제국에서는 예수회 천주교를 탄압으로 일관하는 대륙조선의 반대세력을 키우고 전복세력으로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청군벌, 정부권력층은 대륙조선 황제의 지침과 다르게 그들 군벌에게 자금을 공여하는 서양눈치 보며 천주교를 옹호하였을 수 있는 것이다.

청정부(Qing Government)지칭되는 청군벌(清軍閥)의 대표격인 이홍장(李鴻章1823.2.15~

1901.11.7)이 1896년 영국을 방문하고 당시 영국 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상황을 대체적으로 짐작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중국이 청나라이고 천주교를 탄압한 주체가 중국이라면 청나라 외무대신이 일부러 영국까지가서 예수회제국 수장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이런 훈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영국은 이홍장의 공이 지대하다하여 훈장을 준 것이다.

무엇에 대한 공인가?

대륙조선을 뒤엎은 서태후가 보호한 이홍장은 직례총독(直隸總督)에 25년간이나 장기 근속하였다.

이홍장은 유교적 미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하고 증국번처럼 청렴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벌인 대부분의 근대화사업도 사리사욕과 관련 되었다 한다.
1896년부터 그는 러시아와 비밀동맹조약을 맺는 것을 시발로 하여 미국, 영국등 서양제국들을 차례로 방문하고 모종의 조약을 맺었다고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대륙조선을 밀쳐내고 청군벌에서 청제국으로 탈바꿈하는 행보가 아니었는가 의심이 되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1881년 이후는 대륙을 통치하는 세력들이 붕괴되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륙중국은 사실상 없는 공백기였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청군벌로 대체하고자 이홍장이가 서방지역을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00년에 일어난 대륙조선 복귀운동이고 외세(外勢)배척운동인 의화단(義和團)사건이 벌어진 후 극한 감정을 들어낸 서구열강을 상대할 협상대표로 그가 선임까지 되었다 하니 당시 대륙에서 그에게 국제적으로 의존하는 정치성은 가히 막강한 것이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이홍장은 모든 서양과의 대결 강화회담에서 빠지지 않고 참석한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던 정치가 권모술수(權謀術數)귀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홍장이 설쳐되는 시기에 대륙조선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당시 여론은 이홍장이를 반역자라고 손가락질까지 하였다고 보인다.

지금의 한족이 주도하는 중국이었다고 보았을 때 분명 이홍장은 영웅이라고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도라고 손까락질 하였다고 하니 당시 중국은 분명 대륙조선이란말이다.

당시 한족이라는 말은 바로 대륙조선인을 이르는 말이고 보통 화족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처럼 한족이라 하여 구분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이 모든 단어들은 1949년 대륙을 통일한 모택동이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어쨌던 다시 아래 이야기 하겠지만 의문의 죽음을 한 철종사망(1861 or 1863)은 여름궁전, 여름별장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곳의 국제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가 중요한 키 포인트라고 보인다.

이후부터 배외정책인 쇄국을 천명한 대륙조선은 서서히 힘을 잃고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보이고 로얄 대륙조선 대왕(황제)의 지휘도 받지않고 청군벌이라고 하는 청정부(Qing Government)이 독단적으로 서양과 타협하며 스스로 군벌을 키워갔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점이다.

그리고 새로운 대륙통치권력임을 서방세계에 적극적으로 알렸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등을 서양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었을 것이며 그러한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인물이 바로 대륙조선 부패관리 직례총독겸 청군벌 핵심 외교관 이홍장이라고 추측된다.

 

[이홍장의 훈장 수여 내용]

Li Hongzhang(February 15, 1823 – November 7, 1901)also spelled Li Hung-chang.
In 1896, he attended the coronation of Emperor Nicholas II of Russia on behalf of the Qing Government and toured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here he advocated reform of the American immigration policies that had greatly restricted Chinese immigration after the Chinese Exclusion Act of 1882 (renewed in 1892). (He also witnessed the 1896 Royal Naval Fleet Review at Spithead.) It was during his visit to Britain in 1896 that Queen Victoria made him a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Victorian Order.[위키영어자료]

 

청제국(Qing Empire)도 아니고 청정부(Qing Government)에서 나중에 청조정(Qing Dynasty)으로 올라갔을 뿐인데 어찌 청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바로 청 군벌인 것이다.

 

빅토리아 영국훈장(Victoria Cross)
1등급: Knight · Dame Grand Cross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GBE)
2등급: Knight Command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KBE) - 남성 · Dame Command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DBE) - 여성
3등급: Command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CBE)
4등급: Offic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OBE)
5등급: 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MBE)

 

American immigration policies that had greatly restricted Chinese immigration after the Chinese Exclusion Act of 1882 (renewed in 1892).

 

                    Chinese immigrant workers building the Transcontinental railroad.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이 무엇일까?
1882년에 미국에서 왜 이민을 제한하는 중국인추방법이란 것을 시행했을까?

표면적으로는 미국인들의 고용권이 침식당하는 문제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 미국이 정책적으로 시행한 일이라면 분명 대륙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이홍장이 가서 1892년에 이 법을 해제 했다고 하는데 무엇때문에 이런 조치를 내렸는지 내용이 궁금하다.
이것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대륙조선의 대한 실체를 밝히는 문제라고 보인다.

미국기록에서 근대조선이 망한 시기를 1881년도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1882년부터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러한 조치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엄연히 대륙에는 청 정부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를 내렸다는 것은 다시말해 청 정부(Qing Government)가 중국(Chinese)이 아니라는 반증이고 미국정부는 중국으로 허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청군벌은 청정부(Qing Government)일 뿐이지 청제국(Qing Empire)이 될 수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국(Chinese)이라는 제국은 바로 대륙조선(Modern cho-sen, 1392-1881)을 지칭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동지나해가 Blue Sea 였고 COREA SEA 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856

 

다시 박해문제로 돌아와 예수회 천주교인 서학(西學)에 반대하는 조선유생(도교서원:書院)들의 강력한 천주교 탄압 요구와 배외정책((排外政策, 쇄국정책)에 끌리어 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는데 이것을 병인박해(丙寅迫害, 丙寅邪獄1866년, 고종 3년)라 한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리델(Ridel)은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에게 박해소식을 전했고 이에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는 북경주재 대리공사 앙리 벨로네(Henri Bellonet)와 협의하여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인 것이다.

 

프랑스는 혁명(2월 혁명,1848년) 이후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에 베트남도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을 치르면서 베트남을 압박, 다낭을 공격하고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Bianhoa), 쟈딘(Giadhin), 딘뜨엉(Dinhtuong)등 3성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1867년에 프랑스는 남기(南圻, Cochinchina)를 병탄하고 메콩강을 통해 운남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나 그 상류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1871년에 프랑스의 모험가 뒤프(Jeon Dupuis)가 홍하를 통해 운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프랑스는 이를 통하여 중국으로 진출하려고 1873년 11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하노이, 하이두엉(Haiduong),닌빈(Nihnbihn) 등지를 공격하였다.[위키]

 

위는 1858년 프랑스 베트남 남부를 공격하는 내용의 글인데 병인양요 당시의 국제상황을 그려 보려 함이다.

 

그런데 병인양요로 인하여 살아남은 리델(Ridel)은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天津)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에게 박해소식을 전했다는 내용에서 분명 천진(天津)에 프랑스 함대 사령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프랑스 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베트남에서 긴박하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령부가 남동지나해를 거슬러 올라가 황해에 있는 항로거리 4,000 km 나 되는 위치에 있는 천진에 있었다고 하니 어찌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다낭을 공격하였고 사이공 주위를 점령하였을 때라 할지라도 남기(南圻, Cochinchina)를 아직완전하게 병탄하지 못한 상태이고 더군다나 메콩강 또는 홍하(紅河, 大江)를 통해 운남성으로 쳐들어가 메인 목적인 중국을 공격하려는 프랑스 입장에서 무엇때문에 머나먼 천진(天津)에 함대사광부가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있어야 한다면 바로 다낭(峴港)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천진(天津)과 북경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한반도 조선을 치기 위해 사령부가 그곳에 있었다고 하겠지만 프랑스가 처음부터 노리는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있는 중국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안된다.

그런 입장이라면 프랑스는 베트남과 한반도를 병행하여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가 움직 일 수 있는 거리는 베트남을 중심으로한 위치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프랑스가 이 때 선교사 박해를 구실로 일으킨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프랑스와 베트남전쟁이 발발되는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한 면이 많아 전장 장소가 베트남을 연계하는 대륙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천진도 그곳 가까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혼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시 종교로 인한 충돌은 동양과 서양이 대결하는 국면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역학관계가 존재하는 것이고 유라시아, 아시아전체에 영향을 주고 대륙조선 영역전체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긴박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천주교에 관대하였던 철종시대에 큰 변란이 크게 몰렸다는 점도 유심히 볼 일이다.

조선에서 천주교를 배타시하고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밀폐된 봉건사회체제에서 천주교가 서민에게 쉽게 기생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양식민지정책의 첨병역할을 음양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기존나라 체제를 부정하고 무조건 전복하고자 하는 불손한 종교로 지배계층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대륙조선의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종교가 무엇인가가 큰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만 가지고 이렇듯 서로 갈등을 유발할 수가 없는 것이라 서보 배치는 종교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동서양의 갈등 요인으로 남아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 회교간의 첨예한 갈등이다.

 

철종시대에 나타나는 혼란은 당시 속칭,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하는 중앙아시아 전체역학구도가 급변하게 되면서 대륙조선 영역이 몸살을 앓는 현상이고 급속하게 남진하는 러시아에게 영토가 침식되고 이와같은 러시아를 대항하여 인도 북부 인더스 방위를 목적으로 북진하는 영국에게 침식당하여 대결구조가 첨예하게 진행되면서 대륙조선 지배계층 전체를 한꺼번에 궁지에 몰아 넣으며 크게 동시다발적으로 압박하였던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대륙전체가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독일등이 나눠 먹기식하면서 달려들어 서방세력 각축장이 되면서 통제력 마저 상실한 상태에서 천주교는 급진세력들을 양성하면서 민란을 지속적으로 부추기며 종국에 체제자체를 마비시키고 말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제 대륙조선을 전복시키거나 아니면 꼭두각시정권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 되었다고 판단 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고 여기에 편승한 청군벌과 왜군벌은 서방세력의 근대화 된 군사기법과 거대한 자금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대륙조선의 붕괴에 앞장선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서태후의 쿠테타


그러면 철종시대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쿠데타 상황을 추리해 보자.

일단 철종과 함풍제가 동일한 인물인가 먼저 밝혀야 일이다.

아래 여러가지 부차적인 설명을 하였지만 결론적으로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난 시기를 보면 철종도 1831년이고 함풍제 역시 1831년이다.

죽는 년도를 따진다면 철종은 1863년도에 죽고 함풍제는 1861년도에 죽어 2년이란 시차가 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상황이 철종이나 함풍제가 너무나도 닮았다는데 있다.


먼저 함풍제(咸豊帝:1831.7.17~1861.8.22, 제위1850~1861)를 이야기하면서 서태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서태후가 장기 집권하였다는 장소가 지금의 베이징 북경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북경 건물 자금성은 중공정권이 들어서면서 만든 근대 건축물이라는 소문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서태후가 철권을 휘두른 장소가 지금의 자금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어딜까?

지금 판단으로 제일 가능성이 있는 곳은 바로 감숙성 서안(西安)이다.

그곳이 북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한양(漢陽, 漢城)이 무한(武漢)이었다면 서안(西安)이 북경(北京)이라고 불리웠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천진(天津)역시 지금의 베이징(Beijing)이 아니라면 지금의 천진(天津)일 수 없다는 공식과 같다.

1866년도경 프랑스 함대 사령부가 있을 곳을 찾으면 그곳에 천진이 있는 곳이다.

다 알다시피 서태후(西太后, 1835.11.29-1908.11.15)는 일명 자희태후(慈禧太后)라고도 하고 함풍제의 비(妃)로 알려져 있으며 동치제(同治帝)의 어머니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만주인(満州・旗人) 팔기(8旗:正黃‧正白‧正紅‧正藍‧鑲黃‧鑲白‧鑲紅‧鑲藍)중 양람기인(鑲藍旗人:홍색 테를 두른 남기)의 엽혁나납(葉赫那拉)씨의 출신이라고도 하고 아명은 행정(杏貞), 란아(蘭児)이다.

어쩌면 이 서태후는 근대 혼란기에 대륙조선을 제어하기 위해 만든 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여러 기록에는 서태후의 출생지가 불명하다 하였다.

그 만큼 역사 비주류에 있었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주족이라고 하면서도 안휘성(安徽省) 무호(蕪湖)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며 내몽고의 푸른도시(青色城市)호하트(Hohhot, 呼和浩特市)란 설이 있으며 산서성(山西省)장치(長治)설도 존재한다.

또한 중공역사학자들은 북경설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북경을 지금의 북경이라는 전제아래 생긴 말이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혀보자.

조선에서 1851년(철종 2년)에 수렴청정하던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純祖)의 정비(正妃)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1789년~1857년)는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이로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이 김문근의 딸이 바로 철인왕후김씨(哲仁王后:1837.3.23-1878.5.12)이다.

결국 안동김씨가 바로 청군벌이라고 의심하는 부분이다.

청군벌이 사용하는 이름앞에 爱新觉罗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곧 금(金·1115∼1234)나라를 잇는다는 뜻이며 시조가 경주김씨 신라를 말하는 것으로 안동도호부 김씨라고 할 수 있다.

안동도호부 김씨는 반도사에서 동인 또는 북인으로 통용되었음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굉장한 이야기가 아닌가?


서태후는 1852년 17세때, 3년마다 자금성에서 행해지는 후비선정면접시험(后妃選定面接試験)에서 선수녀(選秀女)가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인물일 가능성이다.

조선에서 1851년(철종 2년) 철인왕후김씨가 간택되는 것처럼 시기적으로도 흡사하다.

다음해 1853년 18세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란귀인(蘭貴人)이라고 하였으며 후에 란(蘭)에서 의(懿)로 휘호가 바껴 귀인에서 의빈(懿嬪)이 되었다. 이때 황후는 함풍제 황자(皇子)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시중들고 있던 유호록씨(鈕祜禄氏, 東太后)이었다. 1856년 함풍제의 장남(長男) 애신각라재순(愛新覚羅載淳. 同治帝)을 낳고 그 공적에 의해 의귀비(懿貴妃)로 승진한다.


함풍제가 죽을 시점에는 동치제(同治帝)는 나이가 겨우 6세였다.

동치제(同治帝1856-1875, 재위1861-1875)는 결국 고종(高宗, 1852-1919, 재위1863-1897, 1897-1907)이라고 보이지만 동치제와 항렬(行列)이 같은 애신각라 재첨(愛新覺羅載湉) 광서제(光緖帝1871-1908, 재위1875-1908)까지 연결된다.

바짝마르고 키가 커보이는 투르크계 고종과 퉁퉁하고 키가 짤다막한 몽골계 고종이 다른 것처럼 혼입이다.

동치제와 광서제는 항렬(行列)이 같은 배와 씨가 다른 형제지간이다.

이것 역시 혼입이라고 여겨진다.

함풍제는 자신이 죽은 후를 대비하여 고명대신 8(대륙조선의 전통적 계승방식)명 세우고 동치제(同治帝)가 원만하게 계승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조선에도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니 이들이 고명대신(顧命大臣)이다. 또 문종(文宗)이 임종(臨終)에 앞서 단종(端宗)의 유충(幼沖)함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黃甫仁), 좌의정 김종서(左議政 金宗瑞) 등에 보좌(補佐)를 유언(遺言)으로 남겼으니 이를 고명대신이라 한다.

 

그러나 섭정을 고명대신에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서태후는 황태자 재순(載淳)의 후견이 된 8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 재원(載垣)、단화(端華)、숙순(粛順)과 암투가 벌어졌다.

의귀비(懿貴妃:서태후)는 황후 유호록씨(皇后鈕祜禄氏)와 함풍제의 남동생으로 당시 북경에서 서양연합군과의 절충(折衝)하고 있던 도광제(道光帝)의 6째 황자(皇子) 공친왕 혁흔

(恭親王奕訢:1833.1.11-1898.5.29)을 끌어들였다.

1861년 갑자기 함풍제가 죽어(?) 함풍제가 피해있던 열하(熱河)에서 북경으로 관(棺)을 옮기는 도상(途上)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고명대신(顧命大臣) 재원(載垣)、단화(端華)、숙순(粛順)등을 처형(辛酉政變:1861년)하고 권력을 마침내 장악하였다는 이야기다.[한어자료참조]

북경(北京)에서 귀환 후 재순(載淳)은 동치제(同治帝1856.4.27-1875.1.12, 재위:1861-1875)가 되어 마침내 즉위한다.

 

북경(北京:Peking)이 베이징(Beijing)인가?

열하에 있다고 하는 별장, 궁전, 한어로는 피서산장(避暑山莊) 영어로는 "summer palace"는 어딜까?

혹 역설적으로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어코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에 피서산장이라고 간판을 내세운 것은 아닐까? 아래 사진을 보면 페인트 칠이라 던가 수리한 흔적을 보더라도 최근 근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있다.

 

 

하여튼 8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을 밀어내고 동태후와 서태후가 동치제의 후견으로서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공친황(恭親王)이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으로서 정치를 보좌하는 삼두(三頭)체제로 출발하였지만 실은 동태후(東太后)유호록씨는 정치에 원래 관심이 없던터라 실질적으로는 서태후와 공친황(恭親王) 이두(二頭)체제가 되었다 한다.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함풍제가 열하 피서산장에서 왜 갑자기 죽었는가 하는 점이다.

함풍제나 철종은 모두 병으로 요절했다고 하지만 누가 그 사실을 믿겠는가?

 

철종이라고 생각되는 함풍제 30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하고
그의 아들 동치제 역시 20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거하였으며
광서제 역시 37살 많지 않는 나이에 죽음은 독살이란 의혹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니 모든 것이 의혹이고 혼입이란 과정의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게 몰고 갈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주장을 믿을 수 없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대륙조선이 망한 시기1881년 이후 대륙은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 공백기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마디로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고 혼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함풍제의 죽음이나 철종의 죽음은 모두 의문의 죽임이다.

함풍제나 철종이 만약 같은 동일한 인물이라면 현대 우리가 접하고 있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서세의 암묵적 지지를 등에 업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만약 철종이나 함풍제가 러시아와 가까웠다고 생각한번 해보라.

러시아를 제외한 서방세력들은 분명코 제국의 황제를 제거하고자 하였을 것이 뻔하다.

가정이지만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판도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가 충돌하던 시점이고 소위 그레이트 게임이 절정에 다달았을 시점에서 벌어지는 암투이다.

여름별장 또는 여름궁전 쉬토라이 모히하사(Sitorai Mohi Hosa-Emir's summer palace)란 궁전이 있고 돌의 도시(石國)라고도 하는 타슈겐트(Tashkent)에 있다.

돌이 많아 여름에 시원한 돌로 궁전을 만들어 여름별장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Great game이 절정에 다달었을 1865년에 러시아군이 점령하여 1867년부터 투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그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러시아는 사마르칸트 지방을 빼앗고 1868년에는 부하라한국(汗國)전체를 러시아가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 당시 대륙조선이 중앙아시아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고 보이고 지배계층이 한꺼번에 몰살하는 수난을 겪으면서 하는 수 없이 동쪽으로 쫓겨 이동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때 서쪽 중원이 동쪽으로 이동되는 혼란과 모든 것이 뒤죽박죽 마구 섞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름별장이 있었던 타슈겐트는 1966년 4월 26일에 도시를 최하단에서부터 흔들어버린 리히터 강도 7.5의 대지진으로 도시의 약 70%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소실된 파괴되었으나 소련 각지에서부터 약 3만 이상의 혁명적 노동자가 투입되어 겨우 2-3년만에 도시를 완전히 새로운 근대도시로 변하게 했다 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시 대륙조선의 자취 또는 여름궁전이 남아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남아 있었더라도 완전히 뜯어 고쳤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요하(遼河: 알타이산맥상류, 티벳트상류)상류에 있었다고 하는 열하(熱河)!

여름궁전에서 함풍제의 시신이 든 관을 가지고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명대신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추측을 낳게 하기에 충분하고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함풍제나 철종이 죽검상태가 아니라 러시아에 쫓겨 북경이라고 하는 곳 동쪽으로 달아나는 과정에서 고명대신 중신들과 함께 모두 척살되었다고도 생각 할 수 있는 문제이다.

아시아 전역을 다스리던 칸중에 칸, 왕중에 왕인 제국황제와 중신관료 고명대신들이 한꺼번에 척살되었다는 것은 바로 아시아 전 지역 역학구도를 새롭게하고 종교적인 영향력 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깃점으로 대륙조선이 양보하지 않았던 수많은 난제들을 서세는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대륙조선의 정치구도 바껴 어느정도 유연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라면 역사가 아니라 더 한 것도 혼입하고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로 인한 이해 당사자들은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엄청난 쿠데타의 중심에 서태후가 존재하고 청군벌이 있었으며 그들 가까이에 왜군벌도 끼여 철저하게 기생했을 것이란 예측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중에 청군벌과 왜군벌이 충돌까지 한다.

이것을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도 바로 이 타슈켄트를 근거로 한 것이고 열하(熱河)역시 알타이산맥에서 흐르는 시르다리야(Syrdarya) 상류라고 판단된다.

 

 

천궁과 환궁


무엇 때문인지 1860년 철종은 경희궁으로 천궁(遷宮)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종11년(1860.9.26)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라고 단줄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알다시피 이어(移御)는 천궁(遷宮)과 같아 임금이 궁을 옮긴다는 것인데 나라의 중요한 변고가 아니면 이어(移御) 즉 천궁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런데도 이어(移御)라 하면서도 실록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은 천궁(遷宮)한 사실을 후세 역사조작세력들이 숨기고자 한 것이 틀림없다.

심하게 이야기 하면 아예 빼버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대륙 역시 같은해 함풍제가 열하(熱河)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이궁(離宮)도피(遷宮)하였다.

1년 후 실록에는 철종12년(1861.4.21)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다 하였으며

대륙 함풍제는 그해 북경이라고 하는 자금성으로 환궁하다 죽는다 하였다.

피서산장에서 죽었는지 북경으로 오다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위 상황은 어떤 세력에 의해 습격당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어자료에는 그 시기를 1861年 七月 十七日,咸丰帝在承德去世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2차 아편전쟁(Arrow War, 1856~1860)일어나는 시점에서 보면 대륙과 한반도 국내사정도 혼란 그 자체이다.

 

 

어쩌면 서양의 자본이 필요한 청군벌이 서양과 2차 아편전쟁을 봉합하면서 암묵적으로 협의 아래 1861년 함풍제를 암살하였을 수도 있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지 못한 청조정은 ‘내분을 먼저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의 중재를 받아들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외세를 받아들이다는 것은 보수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다.

때문에 반발을 촉발시킨 것이라도 볼 수있다.

물론 서태후가 내부세력인가 외부세력인가는 더 파악해야 할 문제이다.

내부세력이라 할지라도 불만세력의 쿠데타가 있을 수 있고 외부세력이라 할지라도 첨예하게 대립되던 국제상호간 암살, 테러는 늘 존재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혼란 상황을 보면 제2차 아편전쟁(Arrow War, 1856~1860) 뿐만아니라 대륙 운남성에서 일어난 판세이란이라고도 하는 두문수회교민란(杜文秀起義, Panthay Rebellion1855-1873)이 초기 단계에 있었고 홍수전에 의해서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이 일어나 광동성 계평현(桂平縣) 금전촌(金田村)에서 시작하여 영안(永安;현재의 광서장족자치구(広西壮族自治区) 몽산현(蒙山県)에서 호남성, 호북성을 목표로 삼고 북상하여 1852년 12월 하순에는 한양(漢陽), 한구(漢口)를 함락하고 1853년 1월에는 무창(武昌)을 함락하였으며 1853.3.19 남경(南京)을 함락시키면서 그곳을 천경(天京)이라 개명하여 태평천국 왕조를 세우기까지 하여 절정에 다달았을 때이다.

별도로 한반도 조선에서는 1862년 충청˙전라˙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 일어나고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라하는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농민봉기가 일어났으며 하삼도(三道:장강이남삼도) 삼남지방에서 삼남민란(三南民亂)이라고 하는 농민봉기사건도 겹쳐진다.

어떻게 같은 시기에 대륙사정과 이리도 비슷하고 똑 같은가 하는 말이다.

그 당시에 한반도에 무슨 신출귀몰한 연락 통신수단이 있어 이렇게 대륙과 동시에 똑같은 문제일 것 같은 사건이 비슷하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동일한 사건을 다른 것처럼 대륙과 한반도로 분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민란이라고하는 임술농민항쟁이 두문수민란으로 삼남민란 역시 태평천국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대륙 섬서성(陝西省)·감숙성(甘숙省)을 중심으로 발생한 봉기가 원인이 되어 동간(東干:투르크스탄)지역에서 약 12,0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동간회민혁명(1862-1873) 사건역시 1863년에 조선서울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금위영(禁衛營)군소요와 흡사하다.

이 사건을 내부 쿠데타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서세와 몽골계 청군벌 합작으로 투르크계 이슬람황실이 결단난데 대한 불만일 수 있고 이슬람 독자적인 황국을 세우겠다는 혁명으로 청군벌을 상대로 발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간혁명을 청군벌은 서세자금을 이용하여 토벌하게 된다.

 

동간(東干)혁명으로 본 간도(間島)와 만주문제 http://blog.daum.net/han0114/17050356 


한반도 조선에서 그해1862년 여름의 한발(旱魃)과 수해로 다시 민심이 동요하여 음력 8월 이후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대되었고 9월에는 제주도에서 수만명의 농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10월에는 함경도 함흥, 11월에는 경기도 광주, 12월에는 경상도 창원, 전라도 남해, 황해도 황주 등지에서 민란이 폭발하여 그 해가 저물도록 전국은 불안이 계속되었다 한다.

이듬해(1863년) 조선에서는 동학교조 최제우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평천국과 큰 궤를 같이하고 있다.

또 그해 서울한복판에서 금위영(禁衛營)군졸들이 받은 녹미(祿米)의 질 문제로 소요를 일으킨다.

군제(軍制) 5군영(五軍營)중 금위영(禁衛營)이란 요즘 수도경비사령부 격이다.

황제가 있는 곳에서 군소요가 일어났다는 것은 군사반란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군이 일으키는 내부 불만세력인 쿠데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을 청군벌에 의한 쿠데타라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수수께끼 같은 철종의 이어(移御) 또는 천궁(遷宮)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함풍제가 죽은 2년 후 1863년 음력 8월에 철종재위 14년 만에 33살의 나이로 함풍제와는 달리 후사도 없이(?) 결국 승하하고 만다.

따져보면 철종에게도 총 네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요절하거나 사망일을 모른다고 적혀있다.

이것을 수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후 족보상 7촌 조카뻘이며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라고하고 이름 첫자가 함풍제 아들 항렬인 재(載)를 가진 고종 이재황(李載晃 1852-1919.1.21,

재위1863~1897, 光武皇帝 1897~1907)이 철종 이어 승계한다.

이재황(李載晃)의 아버지 흥선군을 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1.16~1898.2.2)으로 봉하고 대왕대비 조씨(神貞皇后1808~1890.4.17)가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이것 역시 서태후가 동치제를 수렴청정한 것과 똑 같다.

이후 조선은 1864년 만주족이라고 생각되는 북인(北人:청군벌, 안동도호부 김씨)과 남명, 남만출신이라고 생각되는 남인(南人)을 등용하고 비변사(備邊司)와 의정부(議政府)의 업무 분장하였다.

청군벌과 남(왜)군벌을 말하는 것 같다.

한반도에서는 1864년에 최제우가 대구에서 사형 당하였으며 같은년도 1864년에 동학이라고 판단되는 태평천국의 천경(天京) 즉 남경(南京)이 함락되면서 홍수전(洪秀全)은 자살하고 이수성(李秀成)은 청 군벌에 잡혀 사형당한다.

이 역시 상황이 똑 같다.

이후 자살한 홍수전은 묘에서 꺼내져 실리주의자라고 하는 증국번(曾國藩, 1811.11.26-1872.3.12)에 의해 소각까지 당한다.

후세 실체를 파악 할 수 없도록 삭제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대륙과 조선에서 일어난 천궁과 환궁에 따른 급변 상황이다. 


함풍제와 철종의 죽음

 

헌종과 도광제가 동일인물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325

 

천궁과 환궁에서 말한 것이라 중복되는 점이 없지 않으나 함풍제의 생애와 철종의 생애는 여러가지 로 동일하다.

대가 끊어진 헌종(憲宗:1827-1849,재위1834-1849)과 함풍제의 아버지 도광제(道光帝:1782.9.16-1850.2.25,재위1820-1850)이력이 여러가지 내용적인 면에서 동일하다.

단지 헌종과 함풍제가 생몰년도와 재위년도가 다르지만 내용만 보면 큰 흐름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적어도 헌종부터 조선(朝鮮)과 청(淸)은 후세 역사조작에 의해서 혼합이란 불가사이한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혼합과 혼입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해 안동김씨의 실체를 유의할 필요성이 있다.

안동김씨실체와 청군벌 혼합 가능성이다.

 

여기서 서태후의 남편 함풍제(咸豊帝:1831.7.17~1861.8.22, 재위1850~1861)와

철종(哲宗:1831.6.17~1863.12.8, 재위1849.6.9~1863.12.8)이 동일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당시 국제, 국내 복잡한 사정을 총제적으로 한번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제1차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1840-1842)은 다 알다시피 1840년에 일어났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서 벌어진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로 인하여 일어난 침략행위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은 위 박해가 없었더라도 아시아 전역을 동인도회사를 기반으로 하는 침략전쟁에 몰두할 때이고 식민지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우리고 있을 때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18세기말경부터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사전에 동인도회사 요원들을 풀어 철저하게 조사하고 측량하고 계획을 세웠을 것이며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갖은 정보와 지역적인 환경을 수집 채취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륙조선은 이절적인 종교를 기반으로 한 제국이었기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당연하다 할 것이고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를 깃점으로 영국내 여론을 크게 자극하여 매파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 적극적인 침략행동을 감행할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보여지며 이를 위해 최신형 프리게이트 함선을 대량으로 만들어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를 하였다고 판단되는 시점이다.


철종 6년 1855년에 호네트호가 들어 온 곳은 한반도 동해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19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륙을 점령하여 인도처럼 식민지화하겠다는 목표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개방만으로 만족 할 수 없었을 것이고 1차 아편전쟁 발발 14년 후 개방이 안 되었다는 핑계아래 영국은 또 다시 애로호 사건을 유발하게 하고 똑같은 빌미로 청조선을 공격하여 강제적으로 천비초약(穿鼻草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하여 개방을 확대시킴과 동시에 결국 대륙조선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것을 일명 애로호 전쟁이라고 하는 제2차 아편전쟁(Arrow War, 1856~1860)이다.

이때 함풍제는 서세 연합군을 피해 열하(熱河)로 피난하였다는데 열하(熱河) 피서산장으로 피한 함풍제는 그곳에서 1861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외부와 관계되는 암살, 테러, 쿠데타라고 예측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주도 하였을 수도 있다.

당시 대륙조선과 맞대어 있는 영토문제가 복잡하게 얼켜 있었기 때문에 난관에 부딪힌 부분을 일소에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가 모험을 걸었을 수 있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예단 할 수 있다.

철종역시 함풍제 죽음 2년 후 죽지만 특이한 것은 자식들이 전부 몰살한 것처럼 이름도 없고 사망년도가 불명하여 어떤 세력에 의해 자손 대가 완전히 끊겼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절멸이란 표현이 적합하다 할 것이다.

왕자 이름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은 후세 혼합하기 위한 것으로 일부러 빼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 관계

부 : 순조숙황제

모 : 순원숙황후 김씨

사친 부 : 전계대원군

사친 모 : 용성부대부인 염씨

왕비 : 철인장황후김씨(哲仁王后 金氏,1837년-1878년)

원자(元子,1858.10.17~1859.4.23) 2살 때 요절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왕자(王子,1854.7.10~?) 왕자 이름도 알 수 없고 사망일도 모름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왕자(王子,1859.10.13~?)왕자 이름도 알 수 없고 사망일도 모름

후궁 : 궁인 이씨(宮人 李氏)

왕자(王子, (1862.8.8~?)왕자 이름도 알 수 없고 사망일도 모름 

 

 

 

1차 아편전쟁-정크선(junks)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인 복장이다. The Nemesis destroying Chinese war junks during the Second Battle of Chuenpee, 7 January 1841- 穿鼻(Chuenpee或Chuenpeh或Chuenpi) 코뚜레 꿰다. 천비초약(穿鼻草约1840.6-1841.5)영국이 홍콩,광주를 점령.

 

이사건에서도 보면 1857년에 시작한 애로호 전쟁으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광동성 광주(廣州)를 점령하고, 북상하면서 천진(天津)을 제압했기 때문에 함풍제가 피난하였다는 것이고 결국 천진에서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4개국과 조약을 맺게 된다는 설명이다.

어쩌면 태평천국은 서세를 향한 불만 세력일 수 있다.

그래서 구국일념으로 봉기한 의병이라고 할 수 있고 동학과 상당한 궤를 같이 한다.

적을 현 정부로 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태평천국을 상대한 군사는 모두 청군벌로서 서양세력들의 자금을 지원받는 용병이 주를 이루는 형태의 의혹이 산재되어 있다.

오히려 태평천국은 서세를 대륙에서 몰아내기 위한 구국적 혁명의 난 일 수 있다.

때문에 함풍제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은 태평천국이 아니라 제2차 아편전쟁의 연합군일 수 있다.

하지만 민란이 대륙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광동성 광주(廣州)에서 하북성 천진(天津)으로 곧바로 북상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질 않는 전황 설명이다.

앞에서도 간단하게 설명하였지만 프랑스가 천진에 함대 사령부를 두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북상하는 프랑스로서 함대사령부가 지금의 천진에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천진(天津)은 베트남에서 멀지 않는 광주(廣州)에서도 가까운 곳에 있어야 맞다.

제2차아편전쟁인 1857년 에로호사건은 운남성에서 일어난 두문수회교민란(杜文秀起義, Panthay Rebellion1855-1873)이 시작하여 불길같이 타 오를 때이고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역시 광동성에서 일어나 남경을 함락하고 천경으로 삼던 시기이다.

이 때 연합군 세력들이 이런 의병들의 활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제지 받지 않고 그대로 북상하여 천진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지금의 천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천진과 북경도 지금의 천진과 북경일 수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조선 충청도 하중부(河中府)로 본 소현세자와 강희제

http://blog.daum.net/han0114/17050219

북경(北京:Peking)이 베이징(Beijing)인가?

 

광동성 광주에서 남지나해를 지나 동지나해를 거쳐 상해로 들어가서 북상하거나 아니면 바로 황해발해만으로 들어가서 북경 가까이에 있는 천진을 직접 공략하였다면 몰라도 광동성 광주에서 하북성 천진을 향해 북상했다는 것은 당시 대륙혼란상황을 전제하지 않는 진로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천진이라는 지명과 북경이라는 지명은 함풍제가 존재한곳 철종이 거 한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적으로 그곳은 금위영소요사태와 관계 될 수 있으며 투르크스탄과 연결될 수 있는 항구가 유력하다.

예를 들어 광동성에서 곧바로 북진할 수 있는 지역 어디쯤에 천진이 있을 것이고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북경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물론 함풍제가 죽고 난 후 최종적으로 서태후가 장악한 자금성은 지금의 북경일 가능성이 있다.

서양세력들이 세운 북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편전쟁 당시의 북경은 그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함풍제가 피신한 곳 피서산장 역시 지금의 북경 북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고 앞서 말한 타슈겐트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함풍제(咸豊帝)는 그나마 서태후의 몸을 빌어 낳은 동치제가 있었던 것에 반해 철종은 후대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완전히 끊어 버렸다. 서세가 대륙전체를 완전하게 점령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꼭두각시 허수아비 정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배외정책과 천주교를 탄압하고 서양에 반하는 황제와 주요관리들을 없애고 싶어 했을 것이다.

아니면 영국과 대치된 러시아를 자칫 끌어들이려 하는 통치권력을 끌어내리고 싶어했을 지도 모른다.

서세 전체가 협력하여 최악의 경우 죽은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들을 세워 대륙조선이라는 제국을 청제국으로 바꿔치기하여 대임하도록 꾸밀 수도 있는 일이다.

기회를 잡은 일제가 지금의 열도를 일본국 영토로 만들고 그에 맞는 역사를 꾸미려고 하였다면 반드시 한반도에 조선이 존재한 것처럼 조작할 필요가 있었고 한반도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꼭 맞는 족보가 필요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함풍제라고 판단되는 철종 이후 대륙고종(동치제)과 별개로 대한제국 고종(1897-1910)을 한동안 세웠다고 보이고 그 후 완전하게 한반도역사로 엮었을 것이며 대륙고종대신 한반도 이씨왕족을 찾아 대임토록 하였을 것이란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완전한 몽골계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고종(高宗)은 여러 가지로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첫째 키가 작다는 것은 전통적인 대륙조선인의 형상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여러자기 자료에 대륙조선인은 강대하고 거대하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은 아마도 일제가 철저하게 편집한 결과일 것이다.

몽골계 이씨 왕조 만들기 프로젝트이다.

고종(高宗)이 대원군 2자(子)라는 것은 역사책에서 보아 다들 알고 있다.

또한 본명이 재광(載晃)이고 아명이 명복(命福)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고종 어휘가 두개이다.

이희(李熙:Yi Hi)와 이형(李逈:)이다.

많은 것이 중복이 된다.


아시아 전역을 통치하던 조선(칸제국) 대신 동쪽은 몽골인인 만주족(안동김씨세력)을 정부로 하여 통치하도록 하였고 서쪽은 대륙조선 고종:(李熙:Yi Hi) 이름으로 투르크계가 전통적으로 통치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일제가 만든 고종(李載晃)은 한반도용이다.

이 고종은 월국(안남이씨), 남명(南明)왕족, 한국(한국) 몽골계 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대원군 역시 대륙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베트남 왕조나, 남명(南明)의 귀족가능성이다.

그러한 것들을 한반도로 옮겨 심은 것이라고 예측 할 수 있다.

 

회민봉기-염군봉기(捻軍起義)와 둥간혁명(東干)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0

 

태평천국과 동학

 


동학(東學)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1 

 

태평천국 홍수전은 반봉건 반외세적 운동이란 명목아래 재산을 공유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성격과 미국의 대통령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한 민주주의적 성격을 동시에 갖춘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서양세력으로부터 이단교로 몰리고 서세가 적극적으로 나서 청 군벌을 지원하였으며 청 군벌과 협공하여 망하게 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양세력들이 태평천국을 이단성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은 홍수전 자신이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고 하는 교리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이란 풀이를“내가 하느님이다”라고 잘못 해석한 것에서 기인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인내천(人乃天:사람이 하늘이다)사상과 마찬가지로 인본주의를 말한 것인데도 말이다.


동학역시 제세구민(濟世救民), 제병장생(濟病長生), 영세무궁(永世無窮), 인내천(人乃天:사람이 하늘이다)사상이 있다.


태평천국 난은 내면적으로 대륙조선이 아닌 만주족(淸군벌:서태후정권)지배에 대한 불만과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공자료를 보면 태평천국의 난은 홍수전이 한(漢)족이라고 하여 만주족(淸군벌)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다는데 사실은 같은 한(漢)족이라고 하는 이홍장군벌과 그의 부하들에게 토벌되었다는것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한족의 독립을 저해한 원흉이 바로 이홍장이라고 해야 맞다.

어쩌면 홍수전이 조선(朝鮮)사람이기 때문에 한(漢)족이라고 하는 이홍장이 나서 섬멸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주원장 처럼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요사이로 말하면 국제 이중간첩 질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홍수전이 기독교를 표방하였다는 기록도 믿을 것이 못된다.  


도교(道敎)와 동학(東學)

 

 

 


동학과 태평천국의 난을 알기 위해 우리는 도교와 유교의 관계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도교(道敎,Taoism)와 유교(儒敎)는 우리의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도교의 문양인 태극을 보면 마치 상징성 처럼 고스란히 태극기에 옮겨져 있다. 

이 상징성만 보면 도교와 대한민국은 같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러한가를 보자.
도교(道敎,Taoism)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음양(陰陽), 오행(五行), 복서(卜筮), 무축(巫祝), 참위(讖緯)등을 더하고 원시천존(元始天敎:옥황(玉皇), 옥황상제(玉皇上帝:玉皇大帝)을 최고신으로 하는 다신교이다[위키]라고 정의가 내려져 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철학자인 노자(老子:기원전 604년-)가 BC 6세기경에 창시하였다고 하는 종교이다.

유교(儒敎) 시조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는 고대 중국의 정치가이고 사상가일 뿐이지 결코 종교 교주가 아니다.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인데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하고 사람이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

그래서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 인륜 명분을 가르치는 지침서라고 하는 것이 맞다.

발생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유교시조의 공자보다 도교 창시자인 노자가 시대적으로 앞선다고 볼 수 있다.

도교가 종교관점에서 보거나 아니면 학문관점에서 보더라도 시대가 앞서고 우선한다 할 수 있다.

때문에 유교(儒敎)는 엄밀히 하면 종교라 할 수 없고 학문이다.

하지만 반도역사에서는 이것을 종교화하여 전통적으로 받들었다고 엮어 놓았다.

단지 양식 지침서, 또는 예에 대한 교본 임에도 말이다.

제왕이 백성을 유효적절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먼저 백성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데서 이 유교가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말해 통치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가장 합리적인 교본 또는 지침서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백성들이 글을 특히 한문을 깨우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崔致遠, 857년~?)을 우리는 유학자(儒學)라 한다.

그러나 이 최치원은 신라시대때 오히려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도교 성지에 태수로 부임한다.

최치원은 884년 음력 10월 귀국하였는데 885년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태산태수(太山太守)를 지냈다 한다.

그곳이 바로 도교(道敎) 성지(聖地)가 있는 곳이다.

반도사에서는 태산을 지금의 한반도 전북 태인 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대륙태산(泰山)이다.

 

 

태극기와 대륙조선 상징 http://blog.daum.net/han0114/17049823 

 

 

 

독수리 가운데 태극문양이 서명한다.

극동아시아 귀퉁이 한반도에 한정된 초라한 역사를 가진 조그만 나라가 표장을 감히 독수리 이미지며 지구를 들고 있는 이미지를 당시 아무런 제지없이 원만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조선에서 정말 그렇게 했다면 첫째 서양제국들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 뻔하다.

침을 흐리던 일제는 뭐라 했을까?

금방 잡혀 먹힐 것들이 꼴갑을 떤다 하지 않았을까?

독수리가 지구를 들고 있다는 것은 희랍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신이 오른손에 번개를 왼손에 지구를 들고 왼쪽어깨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표장이다.

이것은 바로 Empreor 즉 강력한 황제를 나타내는 것인데 제우스와 같은 의미이다.

독수리는 황제 중에 황제를 말하는 것이고 지구를 들고 있다는 것은 광역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반도 조선이 그런가?

 

위 글 이어....

바로 당(唐)이 신라이고 삼한(韓)이었다는 말이다.

최치원의 격황소서를 보더라도 자국(自國)이 아닌데 구태어 황소의 난(黃巢之亂, 875-884)에 나서 주제넘게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올리고 보태어 남의 나라 사정에 콩 놔라 팥 놔라 하였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적으로 납득 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당나라에는 그만한 인재가 없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륙을 호령하는 입장에서 그만한 인재가 없고 변방국인 한반도에서 나타난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의 훈수를 당했다고 하는 것은 나라자체가 불실하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나라가 어찌 대륙전체를 호령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라가 당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거나 신라의 중앙정부가 당이라 하여 신라 전체에서 뽑힌 똑똑하고 명석한 학자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건의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은 대륙신라 내에 공존하였다고 보아야 맞다.

황소의 난(黃巢之亂)은 희종(唐僖宗, 862년-888년)이 四川省으로 망명까지 한 나라의 존망이 걸린 변란이었다 한다. 황소의 난을 일으킨 자들은 대부분 황소와 혈연을 맺은자, 원래는 부하였던자, 파산농민, 유랑무리, 부패한 당나라에 불만을 품은자 들이었다.

결국 황소는 부하 주전충에게 죽고 전멸했지만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전토를 유린했으므로 당은 거의 지배력을 잃어버렸고 907년에 본래 황소의 한 무장(武將)이었던 개봉의 절도사 주전충(朱全忠:後梁의 太祖)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그러나 최치원도 부패한 신라에 염증을 느꼈다고 하였고 당 역시 부패하여 불만을 품은자들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거의 같은 상황이라고 보아야 맞으며 당은 멸망하는데 신라는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앙정부가 당(이씨정권)에서 송(조씨정권)으로 바뀐 것 뿐 모체 신라는 그대로 존속했다는 것은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바뀐 것과 같다고 이해해야 맞다.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을 거쳤다는 것은 중앙집권제가 아닌 다당제 또는 다원제란 생각이 있고 최치원의 말대로 신라에도 부패로 인한 혼란이 끊임없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당에 간섭한 사실에서 이것을 역학구도로 보면 신라가 당을 관리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과 신라는 상황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어  당(唐)이 곧 신라(新羅)이고 크게 보아 삼한(三韓)이라는 말이 된다.

당(唐)이 한(韓)이란 사실은 일본 잡 문서에도 등장하는 사실이다.

최치원은 유교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仙), 도(道)를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으며  최치원은 유학, 유교를 바탕으로한 학자로서 오히려 도교신자라고 해야 맞다.

도교(道敎)는 어찌 보면 전통적인 동이족(東夷族)의 민간종교라 해야 한다.

한문이 동이족의 글자 이듯이 한문을 바탕으로 한 도교 철학 역시 동이족의 전통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이족이 근거한 지역에 도교사원들이 많이 있다.

대륙 동학이라고 하면 이 도교 사상이 깊이 담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륙에서 도교가 관계하는 민란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였으며 뿌리가 민간에 있기 때문에 늘 파괴력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만약 지금이라도 대륙에서 봉기가 일어나 성공을 예측한다면 반드시 민중 깊숙히 파고 들 수 있는 이 도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동학운동인 태평천국의 난이 끝나고 난 후 1871년 한반도 조선에서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이 있었다.

이 서원철폐령을 유교서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회교서원이나 도교서원이라 해야 맞다.

이렇게 볼 때 서학과 대립된 동학(東學)과 도교(道敎) 또는 회교(回敎)가 잘 연결되어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策)이라고 하여 건국초기 기본정책으로 삼았다는 한반도 역사는 이러한 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고종(高宗)의 재(載)와 동치제(同治帝)의 재(載)


또 하나 이상한 것은 16대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 6대손인 남연군(李球1788-1836)손자들의 가운데 이름 재(載)와 도광제(道光帝,1782.9.16-1850.2.25) 손자들의 이름 머리자 즉 항렬이 재(載)가 되어 모두 같다는 사실 또한 혼합이란 의혹을 배가시킨다.

 

헌종과 도광제가 동일인물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325 

 

청나라 도광제(道光帝,1782.9.16-1850.2.25) 9자식들의 손자

載治1854-1880,

载淳1856-1875 同治帝

载濂1854-1917 (고종과 관계?)

载漪1856-1922 

载澜1856-1916

载澂1858-1885

载滢1861-1909

载濬,早逝

载潢,早逝

載瀚,1865正月初六日辰時生,1866十一月初三日未時卒,年兩歲。

載湉,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即光緒帝。 

第三子:未命名,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1875.正月初八日子時生,初九日午時卒。

載洸,1880十月二十六日酉時生,1884甲申四月二十四日申時卒,年五歲。

載灃,宣統帝之父,攝政王,襲醇親王。 

載洵,清末海軍大臣。

載濤,清末軍諮府大臣。

載濤1887-1970

載澍1870-1878-1897-?                  

載瀛1875-?                    

載沛1872-1877-1878 


16대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 자손 중 남연군(李球, 1788-1836)

李載元 1831-1891

李載完 1855-1922

李載兢 1857-1881

李載冕 1845-1912

李載晃 1852-1919 高宗

상계군(李湛, 1769-1786)의 손자
李載悳1852-1877
李載星
풍계군(李瑭, ?-1826)의 손자
李載覲1857-1896
李載現1870-?
李載覺1874-1935
李載規1877-?
전계대원군(1785-1841)의 손자
李載純 1851-1904

 

고종 이재황(李載晃)을 이희(李熙)로 개명한 사실과

흥선대원군의 적장자(適長子)이자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을 일제가 이희(李熹)로 개명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의심쩍다.


미국에서 1881년 근세조선이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다시 섭정으로 재추대되자 일시적으로 이재면(李載冕1845-1912)은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사태수습에 힘썼고 호조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훈련대장을 겸하하게 된다.

바로1882년 7월에는 흥선대원군이 청 군부에게 납치되어 호송되었고 천진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감금생활을 한다.


알 수 없는 혼입(混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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