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부(河中府) http://blog.daum.net/han0114/17049416
티무르제국과 조선의 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48289
1937년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한인송환? 완료의 뜻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4563
명성황후의 본 모습 http://blog.daum.net/han0114/17050043
고종황제가 미국인황후 얻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0
철갑상어(鱘 Sturgeon), 케비어(caviar)가 조선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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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충청도 하중부(河中府)로 본 소현세자와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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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충청도 하중부란 지명의 뜻을 한번 새겨 볼 필요성이 있다.
먼저 강(江)의 중심지역, 중앙지역이라는 뜻을 감지할 수 있다.
후세 급작스럽게 발생한 역사 변혁으로 인하여 언어와 종교, 인종들이 변했다고 뿌리가 같은 역사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현대 우리가 접하고 있는 역사는 분명 서양위주의 역사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현격하게 다르게 변형시켜 버렸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그리고 유라시아, 중앙아시아가 우리와 다른 역사라 하여 완전히 이질적인 역사로 취급하고 보는 선입견도 버려야 할 것들이고 고쳐나가야 할 것들이다.
그러한 생각은 스스로 서양위주의 역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역사라고 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시아, 또는 대륙역사가 아닌 한반도역사, 몽골역사만 을 고집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일제가 근세기에 서세의 힘을 빌어 그들의 왜구나라를 새롭게 생성하고 한반도 남동쪽에 존재하고 있는 열도에 일본이란 나라를 우겨 집어넣고 마치 정사인 것처럼 만들기 위해 그렇게 조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 입장에선 영혼까지 팔고 조작해서라도 기필코 완성해야 할 역사였을 것이다.
한반도역사는 이러한 왜구들의 과욕이 잉태하게 한 혼란의 역사 그 자체이다.
대륙조선의 중앙아시아 역사가 지금처럼 몰라보게 바뀐 것은 불과 19세기 후반에 일이다.
중앙아시아는 19세기 초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정책을 폈던 곳이다.
보통 우리가 알기로는 러시아의 부동항을 찾을 때 한반도를 깃 점으로 한 블라디보스토크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 블라디보스토크도 신 블라디보스토크라 하니 구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바로 중앙아시아를 목표로 하고 남진정책을 진행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힘이 없어진 대륙조선이 존재하였던 지역이다.
그리고 영국이 부강해지도록 한 인도대륙을 손에 넣기 위해 러시아는 철치부심하던 때이다.
전통계보의 끝을 맺는 철종조 사망과 철종왕가 일족이 몰살당하는 의혹이 발생하는 년도가 철종14년(1863)이다. 이때 대조선 수도 중심에서 발생한 훈련도감 금위영의 반란사건은 국제적인 역학구도와 맞물려 많은 의문점을 던져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회민봉기와 임술 농민봉기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0
이 사건이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과 연계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서세의 총체적 음모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또 한가지는 1878년부터 시작된 제2차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란 실체이다.
1882년 미국에서 발행한 Asia history corea 편에서 보면 modern cho-sen(조선) 1392-1881로 년대를 확정하고 있어 1881년도에 조선이 공식적으로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
적어도 서세 신생국 미국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시점에서 생각할 때 대륙조선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세에 완전히 밀려 흩어지거나 와해되고 일부 복권을 꿈꾸던 지도층이 동으로 들어가 현 신강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고 보이고 대륙서안역시 조선말기에 존재하였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투르크계 철종 이후 다시 투르크계 고종을 옹립함으로서 공백기간 33년이란 시차를 두고 있지만 여러가지 산고 끝에 대륙에서 대한제국(1897∼1910)이 탄생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철종을 이은 고종이 철(哲, 테무르 鐵, iron)종처럼 투르크계인지 확실치 않다.
고종황제가 미국인황후 얻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0
"필라델피아 출신 미국 아가씨 에밀리 브라운 /한국의 황후가 되다"
1903년10월24일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지의 전면 머리기사이다.
이때 고종사진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골계 고종과 모습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슬람 투르크계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04.8.22-제1차 한일협약(第一次韓日協約)
1904.10.15-러일전쟁발발(대륙동부, 대륙북부, 남지나해, 한반도와 열도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충돌)
1905.1.22-제정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유혈사태
1905.4.13-대한제국 군대해산.
1905.5.27- 러일전쟁 결정적인 전황, 쓰시마 전투에서 러시아가 패하다.(일본은 대륙조선 영향력을 확보)
1905.7.29- 미, 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대륙조선 영토 필리핀을 미국에 제공?)
1905.9.5- 러일전쟁종결,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간 포츠머스조약 체결.
1905.11.17- 을사늑약-대한제국 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
이후 고종은 몽골계로 각인되어 한반도로 추방되는 것처럼 만드는데 실제 고종이 한반도로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알 수 없는 여러가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다만 한반도에 정착한 몽골계 왕족들은 남방(월, 유구)왕족으로서 결국 이들은 1910년 한일합방에 이용되었고 종국에는 구팽되었다고 볼 수 있고 동시에 모든 진정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끝을 맺은 것이라고 풀이 된다.
그것과 별도로 본래 북경(아스트라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이 아닌 신북경(현Beijing)에 서방세력에 의한 북방몽골계 청 왕조를 세우는데 바로 이가 광서제(光緖帝, 愛新覺羅載湉 : 재위 1875-1908)이다.
아스트라한왕조(阿斯特拉罕王朝 1599-1753)
位于俄罗斯南部伏尔加河(Volga river)汇入里海处,是阿斯特拉罕州的首府,人口504,501(2002年)。這裡曾是可薩(Hazar)汗國的首都,名阿提爾。和金帳汗國首都薩萊(Sarai)很接近。這裡是阿斯特拉罕汗國(아스트라한)的首都。這裡有很多來自中亞的商人在此交易,甚至置館居住。其中有烏茲別克人(우즈베키스탄),亞美尼亞人(아르메니아),甚至有印度人。
철갑상어(鱘 Sturgeon), 케비어(caviar)가 조선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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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라한(Astrakhan)은 조선천자가 있었던 북경인가?
이 아스트라한은 카스피해 저지, 볼가강(Volga River) 하류 삼각주에 위치해 있다.
카스피해 기슭으로부터 90km 가량 떨어져 시가지는 11개의 섬으로 되어 있으며, 카스피 해에서 잡히는 캐비어(魚子醬, caviar)의 가공지라고 자료에 나온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 성종(成宗14年, 1483.9.20) "도승지를 시켜 상사·부사에게 젓갈 등을 주게 하다" 기사에 기록된 캐비어(魚子醬, caviar)는 카스피해에 북쪽에 있는 아스트라한(Astrakhan) 가공지에서 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가지 정황을 맞춰보면 조선 성종 때 이 기록은 분명 이 아스트라한에서 일어난 일이 맞다.
바로 이곳에 아스트라한왕조가 있었고 이 왕조는 분명 조선의 왕조이며 더 나아가 대륙조선 천자가 있었던 북경이라고 볼 수 있다.
본 블로그가 아시아고려, 대륙조선이란 실체를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예상했던 사실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아스트라한
명성황후의 본 모습 http://blog.daum.net/han0114/17050043
위 자료를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되는
노보예브레먀(Novoe Vremya : 新時代, 1943.6. 발행) 국제문제 전문주간지에 1895년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기사와 사진이 나온다?
무엇때문에 러시아 서북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반도 조그만 나라인 조선 왕후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고 기사 보도 했을까?
이와같은 사실에서 추측 할 수 있는 경우는 이미 러시아 영역으로 들어간 북경에서 쫓겨 난 조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모든 아시아, 대륙조선의 기득권이 서방세력, 러시아와 일본으로 옮겨지는 과정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러시아는 흑해 주변에 사는 슬라브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튀르크(터어키)와 발칸전쟁을 일으키면서 패배하였으나 러시아의 알렉산더2세는 코칸트(1875), 부하라(1873), 히바(1873) 등지를 정복하였고 1881년에는 카스피해까지 점령한다.
대륙조선이 멸망한 년대와 맞아 떨어진다.
중요한 사실은 이때까지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5개국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존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영국학자 매킨더(H. J. Mackinder)의 말처럼 서방 모든 나라가 대륙조선이 사라지고 남은 중앙아시아 공백 중원(中原)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충돌하였던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인도에서 북진하던 영국과 남진하던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에서 충돌한다.
현재까지도 아프카니스탄은 서방세력의 각축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륙조선 충청도 하중부란 본론으로 들어가
임하필기(林下筆記) 벽려신지(薜荔新志)편에 조선시대(古名) 하중부(河中府)란 위치를 자료에서 찾아보면 하나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사마라칸트(Samarqand)가 있고 또 하나는 대륙산서성(山西省) 영제시(永济市)가 있다.
사마라칸트가 있는 우즈베키스탄에는 시르다리야강(锡尔河, Syr Darya)과 아무다리야강(阿姆河, Amu Darya)이 있는데 그곳에 위치하는 도시가 바로 사마라칸트이다.
1.시르다리야강(锡尔河, Syr Darya)
中国古称药杀水,也即叶河.
발원:锡尔河发源于天山山脉,
2.아무다리야강(阿姆河, Amu Darya)
媯水,音譯阿姆河
Amu Darya意即“疯狂的河流”,古希臘稱Oxus,是中亞最長的河流。
발원:阿姆河的源頭瓦罕河(Wakhan)出自帕米尔高原东南部和興都庫什山脈海拔的4900米的山岳冰川,西流匯合源出帕米爾高原的帕米爾河,稱噴赤河(Pyandzh),再曲折西流,匯合瓦赫什河後稱阿姆河,向西北流入咸海。
그러나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위치지도를 가만히 보면 바로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하중부(河中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북쪽 시르다리야강 상류지역과 남쪽 아무다리야강 상류지역 정중앙에 사마르칸트 도시가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스그드인으로 불리던 민족이 거주한 곳 자라프샨 강(Zeravshan River) 전제 정 중앙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산서성(山西省) 영제시(永济市)는 황하(黃河)강이 북(北)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동(東)쪽으로 빠지는 형태이지만 하중부가 내포하는 정중앙이라 하기 어렵고 交点(꼭지점), 角(모서리), 沿岸 등의 명칭이 오히려 적합하다고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원래 하중부란 뜻으로 쓰였던 지명의 위치는 분명 사마라칸트가 맞다.
그곳에 분명 조선 충청도 하중부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 지명도 점차적으로 영역확대에 따라 동쪽으로 이동 되었을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편 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이고~에서 직산(稷山)을 찾아보니 산서성 영제시 북쪽에 직산현(稷山縣)이 있다.
세종지리지 충청도 직산현
토의(土宜)는 기장·벼·피·콩·조·팥·메밀·녹두·율무[薏苡]
토공(土貢)은 칠·대추·감·족제비털·잡깃[雜羽]·종이·여우가죽·삵괭이가죽,
약재(藥材)는 속서근풀[黃芩]·연밥[蓮子]·백출(白朮)이다.
동국여지승람지리서 충청도 직산현
[토산]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위 세종지리지를 보면 충청도 직산현에 토공으로 대추가 있다.
한어자료에 나오는 직산현(稷山县)의 토산 특산물은 대추인데 ”枣乡“之称 즉 대추마을이라고 까지하였다.
또 율무역시 중국대륙 및 말레이반도 동남아 아열대지방을 원산지로 하고 있다.
녹두역시 원산지로 운남(云南)、광서(广西)와 방글라데쉬, 인도, 파키스탄을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지리서에 나오는 직산현의 토산은 아열대, 열대지방에서 나오는 안식향과 산무애뱀까지 망라 되어 있다.
안식향(安息香)과 충청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1
율무 (薏苡:adlay)와 충청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9691
대륙조선과 백화사(白花蛇 Deinagkistrodon) http://blog.daum.net/han0114/17049777
녹두(綠豆 Mung bean) http://blog.daum.net/han0114/17050129
결론적으로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편 하중부(河中府) 직산(稷山)이라 하는 곳은 분명히 한반도가 아님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하중부 위치를 알고 조선말기에 생성된 청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청나라는 상징적인 명칭으로 대륙조선이란 거대한 제국내에 중앙정부라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기존 자료에는 이러한 청나라를 세운 인물이 강희제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강희제의 나라는 강씨제국(Kangxi Emperor)이라 한다.
강씨제국이 어딘가?
강국(康國)이다.
강국은 사마라칸트이다.
강희제(康熙帝)(1654.5.4~1722.12.20)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1661년~1722년)이자 1644년 숭정제의 자살 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청나라 군대의 입관(入關)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의 두 번 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고 하였고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 짧게는 인황제(仁皇帝)이며 연호는 강희(康熙)라고 하였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라고 모든 자료에 나온다.
그런데 이 강희제가 강씨(康氏)제국이라 하였으니 바로 조선 충청도 하중부(河中府)가 있었던 우즈베키스탄 왕조라고 볼 수 있고 기록에 따르면 년대적으로 아스트라한왕조(阿斯特拉罕王朝,1599-1753)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강희제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라칸트(康國)에서 나온 왕조라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조선 현종과 숙종과 그대로 연계됨을 알 수 있다.
티무르제국이 있었고 하중부가 있었던 사마라칸트 1500년 이후 왕조는
부하라한국(Khanate of Bukhara,布哈拉汗國 1500-1598)
아스트라한왕조(阿斯特拉罕王朝 1599-1753)
曼吉特王朝(1758-1920)가 있다.
또 1644년 명나라 제16대 황제 숭정제(崇禎帝, 1611.2.6~1644.4.25, 재위1628~1644, 묘호 의종(毅宗))의 태생과 죽음(자살)과 조선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 음력1612.1.4~1645.4.26)의 태생과 죽음(자살)에서 보면 년대 차이가 1년 밖에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에 대한 자살이란 의혹역시 동일하다. 년대 차이가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엄밀히 따져 보면 음력과 양력차이 정도로서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조씨(昭容趙氏 : 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645년 음력 6월27일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결국 명나라 제16대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조선 소현세자일 가능성이 많다.
소현세자 동생인 제18대 효종(孝宗, 1619년~1659년, 재위 1649년-1659년)은 남명 마지막 황제와 고스란히 연결되는데 1650년 청군이 중국남부 경동과 계림(桂林)을 함락시키면서 1656년 주산열도를 점령하고 1659년에 운남까지 차지하자 영명왕(永明王)은 버마로 도주하지만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 오게 되면서 후한을 두려워한 버마왕에 의하여 청나라군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살해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명왕(永明王)이 남명의 제5대 마지막황제 소종영력제(昭宗永曆帝 1625~1662, 제위:1649-1662)이고 주유랑(朱由榔)이다.
또한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사촌동생에 해당된다 하였다.
결국 소현세자 동생인 효종은 버어마에서 살해되는 참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후 강희제(1654~1722, 제위1661~1722)가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 현종, 숙종일 가능성이 많다.
조선 대변혁기
1.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亂) 단종2년 1453.10.10.
2.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음력 9.2(양력 9.18)-사마라칸트 정부(아스트라한왕조)
3.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광해군15년, 인조1년) 음력 3.12. 서인이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는 정변-명에서 청으로 이어지는 정변
4.철종사망 1863년 음력12.8.
강희제(1654~1722, 제위1661~1722)
조선의 제19대-현종(顯宗, 1641년~1674년, 재위 1659년-1674년)
조선의 제20대-숙종(肅宗, 1661년~1720년, 재위 1674년-1720년)
청나라 강희제의 제위년도가 등극과 졸함이 위 조선 현종, 숙종과 딱 2년 빠르고 늦다.
거의 일치한다고 보아야 맞다.
대륙조선의 명정부에서 청정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청 제9대 황제 함풍제(咸豊帝, 1831~1861, 재위 1850~1861)와 조선25대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은 동일한 인물인가? 하는 물음은 계속된다.
철종과 함풍제는 동일인물인가?(2)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5
철종과 함풍제 그리고 쿠데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63
이후 대륙조선(청) 계보는 서세연합에 의하여 갑자기 몽골계로 바뀐다.
청 제10대 황제동치제(同治帝, 1856~1875, 재위 1861~1875)는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요절하고 이때부터 생모 서태후가 전면에 나선다.
이때 신데렐라 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태후다.
서태후는 대륙조선과 청이란 상징성을 분리시키는 중요한 인물로 작용한다.
함풍제 즉 철종의 동태후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1837-1881)가 갑자기 사망하자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3년 후 그녀는 공친왕(恭親王 奕訢 1832~1898)을 제거하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다.
문제는 철종의 후손들이 전부 몰살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만약 함풍제가 철종이라면 함풍제 역시 자손이 없어야 맞다.
그러나 함풍제는 2남2녀를 두었고 장남 동치제(同治帝)가 대를 잇는다.
子女 咸丰共生有2子1女。
皇长子载淳,即同治帝,母懿嫔(慈禧太后?)叶赫那拉氏; (懿嫔 이라고 하고 있으나 서태후인지 알 수 없다.)
皇次子悯郡王,出生後未及命名即逝世,母玫贵人徐佳氏;
皇长女荣安固伦公主,母丽嫔他他拉氏;
養女荣壽固伦公主,恭親王奕訢之女。
서태후는 서양세력이 어떤 의도에서 갑자기 세웠던 의문의 여인이라고도 한다.
서태후가 갑자기 등장한 1881년부터 대륙조선과 완전히 다른 궤를 세우는데 그것은 서세연합에 의해 북방몽골계를 한정하여 옹립한 왕조라 보이고 바로 청나라라고 통칭되던 신북경(PA베이징왕조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의문점은
대륙조선이 망한년도가 1881년라면 그 이후에 연결되는 왕들의 정통성이 분명하지 않다.조선멸망후 1882~1896년까지의 고종과 대한제국이 건국 된 1897년 이후부터 1907까지의 고종은 과연 같은 임금인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1908년 이후 등극한 왕들은 대륙조선과 관계 없는 정체성이 모호한 일제가 만들어 세운 왕(월,유구)일 수 있다는 의문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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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
충청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순천부(順天府)는 지금의 대흥(大興)이고, 진강부(鎭江府)는 단양(丹陽)이고, 지주부(池州府)는 청양(靑陽)이고, 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이고, 운중부(雲中府)는 회인(懷仁)이고, 소흥부(紹興府)는 신창(新昌)이고, 공주부(贛州府)는 석성(石城)이고, 광주부(廣州府)는 연산(連山)이고, 중경부(重慶府)는 충주(忠州)이고, 천주부(泉州府)는 영춘(永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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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충청도 직산(稷山)
稷山,春秋称"稷"属晋,汉为河东郡闻喜县地,北魏太和十一年置高凉县,相传后稷曾于县境南陲的山中教民稼穑(산중백성을 가르치고 파종하고 수확하다),后称此山为稷王山,遂于隋开皇十八年改高凉县为稷山县。后历代沿用至今。
[资源]境内矿产资源主要有铁矿石、钾长石(칼리장석)、钠长石(조장석)、石灰石、石英(차돌)石、磷矿(인광)石、铝矾土(bauxite)、去母等。工业有冶铁、化肥、炼焦、纺织、水泥、缸套等。玻璃刀、台虎钳、白水泥等产品畅销省内外。
[历史]稷山县历史悠久,文物古迹颇多,著名的有稷王庙、青龙寺、金墓郡、大佛寺等。青龙寺始建于唐,寺内的元代壁画,对研究中国绘画发展很有价值。金代墓室十四座,砖雕仿木结构,造形为舞台戏俑,为研究中国戏剧史提供了可靠佐证。
[特产]稷山县土特产以板枣为最、肉厚皮 薄、核小、糖分高,出口于北美、日本和东南亚等国,颇享盛誉。素 稷山县板枣
有”枣乡“之称,距今已有上千年的栽培历史。红枣加工已成为特色产业,研制开发出金丝蜜枣(꿀에 잰 대추)、参芩药枣、港式蜜枣、酒枣、玉枣和枣茶、枣汁等20多种系列产品。
稷山麻花和烧饼(사오빙)是名特小吃(snack)。稷山麻花是咸的,一尺左右长(有大小几种몇가지),有普通的和油酥(食用油를 넣어 구운 후 바삭바삭한)的,每根都多次扭转抻拉折叠而成,色香味诱人,做主食和零食都可。稷山烧饼有半圆的和三角的,半圆的又叫锅盔(비교적 작게 구워 만든 밀전병)好烧饼松软可口,是出门在外和旅行佳品。从前只有在过年时才家家户户炸麻花,现在常年四季都有。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忠淸道) 직산현(稷山縣)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세종지리지 직산현(稷山縣)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재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는데, 고구려가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신라 때에도 그대로 따라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천안(天安)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太祖) 2년 계유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使臣)이 되어 와서 청하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 신사에 다시 감무(監務)로 강등하였고,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하양창(河陽倉)을 고쳐 경양현(慶陽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고 감장관(監場官)을 겸임하게 하다가, 본조 태조(太祖) 5년 병자에 현(縣)을 혁파하여 직촌(直村)으로 삼았다.
성거산(聖居山)이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천(鎭川)에 이르기 28리, 서쪽으로 평택(平澤)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천안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경기(京畿) 양성(陽城)에 이르기 19리이다.
현의 서쪽 경양산(慶陽山)에 있다.【서쪽으로 아산(牙山) 갓바위[笠巖]에, 북쪽으로 양성(陽城) 괴태길(槐台吉)에 응한다.】
《남사》에 또,
“백제는 소해 동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소해란 바로 그것이다. 패수의 하류가 지금의 벽란도(碧瀾渡)로서 소해로 흘러 들어가니, 패수가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뒤에 또 백제를 침략하여 한수(漢水) 이남, 충청도 동북 일대 직산(稷山)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ㆍ괴산(槐山)ㆍ연풍(延豐)ㆍ음성(陰城)ㆍ충주(忠州)ㆍ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영춘(永春) 등 읍(邑)과 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청송(靑松)ㆍ진보(眞寶)ㆍ영해(寧海)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영천(榮川)ㆍ순흥(順興)ㆍ안동(安東)의 임하현(臨河縣)이다. 를 차지하고, 신라를 침략하여 그 북쪽 땅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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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중부(河中府)-사마르칸트(Samarqand)-蒲州(今山西永济市)
河中府,一般是指位于今中亚境内乌兹别克斯坦撒马尔罕,位于锡尔河、阿姆河之间,撒马尔罕是著名的古都,古名寻思干、撒马而干,“干”或“罕”在当地指“城池”성벽과 성호(城壕-垓子)。河中府曾是西辽国首都。
河中府,今山西省永济县蒲州镇。唐开元八年(公元720年),开蒲州为河中府,因位于黄河中游而得名。同年改为蒲州。乾元(公元758-759)时又改称河中府。以后历代屡有变动。明洪武二年(1369)河中府改为蒲州。
唐朝的河中府-蒲州
蒲州,中国古代行政区划名。
北周明帝二年(558年)以泰州改置,治蒲坂县(今山西永济市西南蒲州镇)。
隋大业三年(607年)改为河东郡,
义宁元年(617年)复为蒲州。治桑泉县(今临猗县西南临晋镇)
唐武德三年(620年)移治河东县(今蒲州镇)辖境约当今山西省永济、河津、临猗、闻喜、万荣等市县及运城市西南部地区。
开元元年(713年)曾升为河中府,旋仍为蒲州
乾元三年(760年)又升为河中府。属河东道
金天会六年(1128年)改为蒲州。属河东南路
天德元年(1149年)复为河中府
明洪武二年(1369年)复为蒲州,省州治河东县入州。辖境相当今山西省永济、河津、临猗、万荣等市县及芮城县西部地区。属平阳府
清雍正二年(1724年)升为直隶州,六年升为蒲州府。为晋、陕间交通咽喉,历为军事重地。
향포(香蒲). 蒲-부들. 부들과(科)의 여러해살이풀로 늪이나 연못가에 절로 나며, 잎으로는 방석, 줄기로는 부채를 만들기도 하고, 꽃가루는 지혈이나 통경(通經), 이뇨제 등으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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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济市是位于中国山西省西南隅的一座县级市。南倚中条山,西临黄河,与陕西省隔河相望。同蒲铁路穿越市境。
[历史]古称蒲坂,相传为舜帝之都。战国时属于魏国,称蒲邑。秦置蒲坂县,王莽时改蒲城。东汉復名蒲坂县。隋开皇十六年(596年)析蒲坂县置河东县,大业二年(606年)省蒲坂入河东县。至明洪武二年(1369年)省河东县入蒲州。清雍正六年(1728年)升为蒲州府,并设附郭永济县,以境内永济渠命名。1912年废府存县,1958年与安邑、解虞、临猗三县合并为运城县(现运城市)。1961年析运城县复置永济县。1994年1月撤县设市,目前隶属于地级运城市。
[物产]矿产有磷、石英砂、石灰岩、白云石、铁、铅锌、金、铜、红玛瑙等。
野生动物有野猪、野兔、野羊等。
土特产主要有桑落酒、蒲柿、黄河大鲤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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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亚的河中府-撒馬爾罕(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우즈베크어: Samarqand)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고도이고 아무다리야 강의 지류인 제라프샨 강 하류에 있고, 기계·화학·면화·비단·피혁등의 공업이 발달해 있다.
인구약 38만 명(2001년).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는 이 도시출신이다.
주민은 400만 명이고, 우즈벡인, 타지크족, 러시아인, 유대인도 거주하고 있다.
[역사]
동부이란 변경의 중심적 도시로서 일찍부터 개발되어 알렉산드로스의 동정(東征) 무렵에는 마라칸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 이후 수(隋)·당(唐) 시대에 걸쳐 실만근(悉萬斤)·살말건(薩末建), 특히 강국(康國)으로서 유명하였다.
제2차 고당전쟁때는 고구려인들이 동맹세력을 찾기 위해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8세기 전반 칼리프 정권 하에 들어가 이슬람화하였으며, 9~10세기에는 이란계(系) 이슬람정권인 사만왕조(Samani dynasty, 萨曼王朝 874-999))하에서 번영하였다. 그 후 카라한왕조(Kara-Khanid Khanate 可汗王朝、黑汗国?-1212), 카라키타이 왕국(Kara Khitan, 西遼 1124-1218), 호라즘샤 왕조(Khwarezmian dynasty 花刺子模 1077~1231)등의 지배하에 점차 투르크화하였다. 요(遼)·원(元)의 사서(史書)에 심사간(尋思干)으로 보이는 것은 투르크명 Semizkend의 음을 사음(寫音)한 것이다. 13세기 전반, 몽골족의 정복 이후에는 약간 쇠퇴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티무르제국(Timurid dynasty, 1370-1405)의 수도가 되어 크게 번영하였다. 16세기초 이래 부하라한국(Khanate of Bukhara,布哈拉汗國 1500-1598)의 영유가 되었고, 19세기 중엽에는 러시아가 점령한 바 있었다.[위키]
撒马尔罕(乌茲別克语:Samarqand)是中亞地區的歷史名城,也是伊斯蘭(이슬람)學術中心,現在是乌兹别克斯坦(Uzbekistan)的舊都兼第二大城市、撒马尔罕州(Samarqand.)的首府,有人口40萬,現任總統伊斯拉木·卡里莫夫(카리노프)生於此城。Samar意为“肥沃”,qand意为“土地”,撒馬爾罕意为“肥沃的土地”;야율초재(耶律楚材, 1189년~1243년)说:“寻思干者西人(中原人)云肥也,以地土肥饶故名之。”
생각건대 서인들이 기름지다하는 것은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이다.
十四世紀時為帖木兒帝國(Timurid dynasty)國都,這裡也是帖木兒陵墓的遺址Gur-e Amir所在地。Bibi-Khanym Mosque清真寺也是著名地標之一,Registan則是市區古老的中心。
在2001年時,聯合國教育、科學及文化組織將擁有二千七百五十年歷史的撒馬爾罕(Samarqand)編入世界遗产之列,稱為Crossroads of Cultures(文化交匯之地)(亚洲和大洋洲世界遗产)
[歷史]
철마이한(撒马尔罕,Samarqand)建立于公元前3世纪的西汉时期。由于地处絲綢(silk)之路上中国和中东的交界處,使當地成為兩地貨物的交流地,並促使當地經濟繁盛。
《魏书》称为悉万斤(실만근),《隋书·西域记》称为康国,唐慧超(新羅僧人)《往五天竺国传》作康国,屬昭武九姓(即康、史、安、曹、石、米、何、火寻和戊地)之一,唐杜环《经行记〉作康国、萨末建,《新唐书》称为康国、萨秣建,元耶律楚材《西游录》作寻思干,《长春真人西游记》作邪米思干,《元史》作薛迷思加,明陈诚《西域番国志》、《明史》、明严从简《殊域周咨录》均作撒马儿罕。
撒马尔罕曾經是花剌子模的首都。當年成吉思汗攻打撒马尔罕之時,8天後破城。所以在撒马尔罕陷落之後,成吉思汗下令屠城。和伊斯蘭教長有關係的五萬人可留在城內。其他不出城的格殺勿論。下令把十萬康里人處死,其他人用二十萬第納爾贖金免死。这里人口多是說突厥語的塔吉克人(因「颯秣鞬」本即突厥語辞彙),唐時突厥化,苏联时乌兹别克化。
시르다리야강(锡尔河, Syr Darya)
中国古称药杀水,也即叶河.
발원:锡尔河发源于天山山脉,
아무다리야강(阿姆河, Amu Darya)
媯水,音譯阿姆河
Amu Darya意即“疯狂的河流”,古希臘稱Oxus,是中亞最長的河流。
발원:阿姆河的源頭瓦罕河(Wakhan)出自帕米尔高原东南部和興都庫什山脈海拔的4900米的山岳冰川,西流匯合源出帕米爾高原的帕米爾河,稱噴赤河(Pyandzh),再曲折西流,匯合瓦赫什河後稱阿姆河,向西北流入咸海。
부하라한국(Khanate of Bukhara,布哈拉汗國 1500-1598)
아스트라한왕조(阿斯特拉罕王朝 1599-1753)
아스트라한(阿斯特拉罕), 位于俄罗斯南部伏尔加河汇入里海处,是阿斯特拉罕州的首府,人口504,501(2002年)。這裡曾是可薩汗國的首都,名阿提爾。和金帳汗國首都薩萊很接近。這裡是阿斯特拉罕汗國(아스트라한)的首都。這裡有很多來自中亞的商人在此交易,甚至置館居住。其中有烏茲別克人(우즈베키스탄),亞美尼亞人(아르메니아),甚至有印度人。
曼吉特王朝(175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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