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카자흐스탄에 있는 의병장 후손

한부울 2011. 2. 5. 15:18

발해(渤海)와 합천(陜川)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9653  

1937년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한인송환? 완료의 뜻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4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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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아시안게임에서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데니스 텐(18.카자흐스탄)은 구한말 의병장인 민긍호(閔肯鎬, 1865~1908.2.29) 4대 손자라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민긍호 의사(義士)의 직계가족들이 카자흐스탄에 있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거인이라고도 부른다.

1850년경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으며, 1925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36년에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되었다.

1991년12월16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한 나라이다.

카자흐인들이 15세기부터 이 땅에 민족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는데, 주로 유목생활을 했다. 19세기에 제정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볼셰비키 혁명이전까지 러시아차르의 지배하에 있었다.

광대한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륙적으로 건조하며 초원·사막이 매우 넓다.

계절변화가 뚜렷한 대륙성기후로서,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특히 평원과 골짜기 지역에 그 특징이 심하게 나타난다. 연평균 강수량이 북부가 약 250㎜, 남부 산악지대가 450㎜에 이르지만 사막은 비가 훨씬 적게 내린다. 스텝과 사막이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있다.

주민은 카자흐인이 절반이다. 에너지자원(석탄·석유·수력) 외에 철, 구리, 납, 아연, 금, 니켈, 크롬, 망간, 보크사이트, 인회토(燐灰土)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인구는 약 15,217,700명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약 $8,318 이다.

고려인의 비율은 약 0.5% 약 80,000명 정도라고 통계에 나온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47%, 러시아 정교회가 44%, 개신교 2%, 기타 7%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위키]

 

1850년 카자흐스탄을 시작으로 중앙아시아 5개국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러시아에 점령당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은 누구의 영역이었을까?

지금 역사로는 무주공산 상태이다.

역사를 빼 버린 것이다.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유라시아고려, 대륙조선 일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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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 시원지라고 판단되는 발하슈호Lake Balkhash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라고 하면서 세운 나라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大振國)이라 칭하였으나 이후 발해(渤海)로 바꾸었다.

발해의 어원은 바다 해(海)를 발(originates)하는 뜻이 강하다.

발하슈호(巴爾喀什湖 :Lake Balkhash)

古稱夷播海

발하슈호를 옛날에 칭하던 이파해(夷播海)는 이(夷)족을 퍼뜨리는 바다란 뜻이다.

즉 근원지란 말이다.

파(播)뿌리다-파 1. 퍼뜨리다. 전파하다. 방송하다.

발하슈 호는 아랄 해 다음으로 큰 호수로 카스피 해와 아랄해를 포함하는 분지의 일부이다.

 

                                       Map of the Lake Balkhash drainage basin


The present name of the lake originates from the word "balkas(발카스)" of Tatar, Kazakh and Southern Altai(남알타이) languages which means "tussocks in a swamp(늪 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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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나라에 고려인이 있다는 것만 해도 상상하기 쉬운 것은 아닌데 그 고려인이 조선말 의병대장의 손자라니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한말 어지러운 때이니 일제를 피해 카자흐스탄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반도에서 10,000里가 넘는 먼 거리를 그렇게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1937년 연해주에 있었던 고려인들을 강제송환한 사실에서 러시아비밀보고서에 송환완료라고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주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1937년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한인송환? 완료의 뜻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4563

 

민긍호 의사의 본관이 여흥(骊兴)이라 했다.

이 여흥(骊兴)을 한반도 경기도에 있는 여주군(驪州郡)이라 하는데 위치는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충주시, 서쪽은 광주시, 남쪽은 이천시, 북쪽은 양평군과 접한다.

그런데 1914년에 여주군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문제는 일제에 의해 토지행정개명이 이루어지고 1910년 이후에 일어난 지명변경은 모두 대륙조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흥의 여(骊)는 검은 말이라는 뜻인데 즉 검은 말이 많이 나는 곳으로 풀이 할 수 있다.

한(漢)나라 때는 현(县)이라 하였고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융창(永昌)은 려간(骊靬)이다.

즉 근세기들어 대륙에서 흥(兴)을 쓰지 않고 땅이름 뜻인 간(靬)을 썼다는 이야기다.


그 시초는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 노나라사람인 민손(閔損) 자

闵损(前536年-前487年),字子骞,春秋末期鲁国人。孔子弟子中,孔門十哲之一,以德行修养而著称,在这方面和颜渊齐名。

민자건(閔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한 것이라 하는데, 고려 때부터 명문 가문이며 가문에서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로는 원경왕후, 민영익, 인현왕후, 명성황후, 민영환, 순명효황후등이 있다.

山东省济南市百花公园内有闵子骞衣冠冢

본가는 산동성 제남시 백화공원내 민자건(閔子騫)의 의관총(衣冠冢) 즉 죽은 사람의 옷과 모자등의 유품만 매장하는 묘(墓)가 있다고 한어자료에 나온다.

시신이 묻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본묘(本墓)라 할 수 없다.

어쩌면 본묘는 대륙여흥에 있어야 옳다.

노(魯)나라 사람인 민자건(閔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고려(高麗)에 귀화했다는 내용은 아무래도 한반도 역사를 꿰맞춘 왜곡인 것 같다.

한어자료 어디에도 무슨 이유로 귀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옛 사서에 기록된 귀화인들 대부분 귀화하였다는 기록은 나오는데 귀화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 모두가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꿰맞추려고 근세기에 고쳐 만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흥은 어디에 있었을까?

구한말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민긍호(閔肯鎬.1865∼1908)의사 활동지역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강원도(사천, 청해성)가 아닌가?

여흥이 감숙성 영창(永昌)은 아닌가?

그렇다면 의병장 직계가족과 후손이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산다는 사실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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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후손 텐, 한국에도 감사

[연합뉴스] 2011년 02월 05일(토) 오전 06:25

 

 


"고조부 묘소에서 가져온 돌이 행운의 상징"

"저는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카자흐스탄인입니다. 두 나라 모두에 자랑스럽습니다."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데니스 텐(18.카자흐스탄)은 '한국에서 왔다'며 축하를 건네자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한국말을 꺼내며 반가워했다.


텐은 구한말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민긍호(閔肯鎬.?∼1908) 선생의 고손자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이에 저항해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민 선생은 충주지방 탈환 전투를 벌이는 등 홍천과 춘천, 횡성, 원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전공을 세웠다.


민긍호 선생의 외손녀인 김 알렉산드라가 텐의 할머니이다.

벌써 4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뿌리에 대한 생각은 잊혔을 법도 하지만, 텐은 먼저 "나는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카자흐스탄인"이라면서 뚜렷한 자의식을 드러냈다. 이미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한국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던 텐은 당시 한국 팬들이 보내줬던 뜨거운 성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텐은 "한국 팬들에게 정말 고맙다. 한국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며 "한국 팬들도 내 금메달을 따뜻하게 축하해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에서 '피겨스케이팅의 희망'으로 불릴 정도로 기대받는 유망주인 텐은 이번 대회에서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3~4일 열린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합계 208.89점으로 우승하면서 카자흐스탄 역사상 첫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 남자 싱글에서 일본과 중국 외의 선수가 우승한 것은 25년 역사상 처음이다.


텐은 "한국과 카자흐스탄 팬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며 웃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텐은 오른 발목을 다쳐 정상적인 경기를 하기 어려웠다.

쇼트프로그램에서는 76.22의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둘째날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여러 차례 착지가 흔들렸고 한번은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는 등 체력 부담을 드러내 2.01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우승했다.


텐은 고조부의 묘소에서 가져온 '행운의 돌'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지난해 1월 전주 4대륙선수권대회를 마치고 원주에 있는 고조부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돌을 하나 가져와 늘 지니고 다니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습니다"


텐은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는 '하프코리언'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국을 찾아 좋은 연기를 보이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아스타나=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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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閔肯鎬, 1865~1908.2.29)


본관 여흥(驪興). 서울 출생이다. 한말의 의병장.1907년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 명령에 의병을 일으켰다. 양주 이인영 의병에 가담, 관동군 창의대장이 되어 100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조선 말기의 의병장.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의 정교(正校)를 지내고, 뒤에 춘천분견대에 전입,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약 3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하고,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秊)·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3개 소대를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7년 8월 12일 약 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로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뒤 이곳 일본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이 의병부대로 지원해와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이천·양근 일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8월 중순 이강년과 같이 충주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운 뒤 22일 행동을 개시하였으며, 23일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뒤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洞)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9월 17일 약 600명을 2개부대로 나누어 홍천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9월 10일 약 200명의 의병이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한, 나머지 400명의 의병은 낭천군아(狼川郡衙)를 기습 공격, 총기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20일 춘천 남방의 정족(鼎足)부근에서 약 30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23일 횡성군 봉복사(鳳服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격전,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뒤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11월 27일 홍천 서남 양덕원(陽德院)에서, 12월 8일 원주 동북 작곡(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의병 20여명이 사살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탈출하다가 사살되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의병부대로 강원도·충청도·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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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1907년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지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 판단됨)

 

1.1 崔益鉉(포천, 1833~1907), 대마도 유폐지(대마경비보병대대 병영내 감금소)에서 순국(음력 1906.11.17, 새벽 3시) → 1.5. 최익현의 유해, 부산 도착 / 한북흥학회, 漢北義塾 설립

1.4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합하여 서북학회 조직

1.9 伊藤博文 통감, 황태자의 嘉禮에 일본궁내대신을 특사로 파견한다는 사실을 長谷川 통감대리에게 통지

1.21 황간분파소 순검들에 의해 노응규 의병장 등 황간의병의 핵심인물들 피체로 의진 와해. 노응규 의병장 옥중순국, 중군장 서은구, 선봉장 엄해윤, 종사관 노공일 등 백령도 유배(7년형)

1.16 『大韓每日申報』·『런던 트리뷴지』에 게재된 고종의 을사늑약 부인 기사를 轉載

1 고광순 담양에서 봉기 → 창평에서 1월 24일 창의 → 양한규로부터 연합 제의, 남원으로 진출 → 양한규 의진의 와해로 퇴각 → 화순읍 점령(4.25) → 동복으로 진군 圖馬峙에서 교전 끝 패산 → 이후 유격전 전개 → 고광순 연곡사 전투에서 순국(10)

1.21 日, 주식시장폭락(日露戰後 공황의 시작)

1.24 황태자(純宗), 윤택영의 딸(純貞孝皇后)과 혼인

1.25 日 통감부, 남산 倭城臺 신축청사로 옮김

1.29 徐相墩·金光濟 등 국채보상운동 시작

1 천도교에서 제명된 이용구, 侍天敎 창시 / 미국 하와이 공립협회 지도부는 독립전쟁 수행을 위하 한국에 통일연합기관 국내지부를 설치하고자 하여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에서 大韓新民會를 발기

 

고광순이 사용하던 불원복기 -1906년 제작된 불원복 태극기(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제침탄이 본격화되자 일제에 맞서 싸우며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不遠復)라는 신념아래 대륙조선의 영역을 복원하려는 뜻이다)

 

일제에 의한 일방적인 대한(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삼한)제국 외교권박탈(대륙에서 한반도로 넘어감) 을사늑약(乙巳勒約)은 1963년 국제법상 무효가 되었다.

국내에서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가 있는데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이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프랑스의 유명한 법학자 프란시스 레이(Francis Lai; 1936.4.26 출생)는 1906년 , 자신의 논문에서 서명이 행하여진 당시의 상황을 볼 때, 1905년 한일간에 체결된 조약은 " 무효" 라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3년 발행된 유엔 국제법위원회 연감에서도 위협강요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기록되어있고, 그 예로서 한국에서 1905년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이루어진 소위 " 을사조약 " 은 무효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바로 대륙삼한조선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 된 사실이 무효란 증거이다.

 

2.1 농상공부소관 도량형사무국, 工業傳習所, 측후소관제 공포 시행

2.4 露외상, 日露협상 제의 

2.13 양한규 지리산일대를 근거로 의병거병→남원성 기습 공격 및 성을 점령(2.13) → 진위대 추격중 양한규 전사 → 관군 반격으로 패산

2.16 진주에서 기병, 함안·마산·진해·김해에서 활약한 의병장 盧應奎(함양, 1861~1907) 옥사순국

2.16 미국상원, 신이민법안 의결

2.17 일본 사회당 제2회대회 개최 사회당에 결사금지를 명함(22)

2.21 大邱民議所에서 斷煙會를 조직하고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황성신문』 등을 통해 전해짐

2.22 국채보상기성회 조직 → 3월 말까지 전국에 27개의 국채보상운동단체 설립

2.26 대마도 유폐의병 가운데 임병찬과 안항식 2명 석방

2.27 고종, 단연을 실천하고 英親王의 吉禮를 7월(음력)로 연기하도록 명함

2 하와이에서 동족상애·일화배척을 목적으로 한 노소동맹회 창립(회장 편성원, 발기인 편성원·정병섭) / 하와이에서 항일운동·일화배척을 목적으로 한 의성회 창립(회장 김재규, 거류공포들의 공동 결의하 발기) / 하와이에서 대동단결·일화배척을 목적으로 한 국민단합회 창립(회장은 김건호)


3월초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발기 조직. 서울 북촌 양반가 부인들이 대안동 故判書 김규홍의 집을 중심으로 조직함. 발기인은 김규홍의 부인 申蕭堂 등 11명. 1907년 창립된 이후 11월까지 7회에 걸쳐 299명으로부터 현금 141원 10전과 은 4냥을 수합하여 『대한매일신보』로 송달

3.2 통감부 경무총장, 국채보상기성회에 관해 요지를 통감에 보고

3.3 在東京 대한유학생회, 『대한유학생회학보』 창간

3.5 평리원 검사 이준, 항일운동자에 황제의 특사령을 시행하지 않는 법부대신 이하영을 탄핵하다 태1백의 형을 받고 면직됨

3.9 일본 유학생 총회에서 단연하여 절약한 담배값으로 국채보상할 것을 결의하고 수금위원 3인 선정. 이후 4월 7일에는 수금한 18원 56전을 5월에는 29원 49전을 황성신문사로 보냄

3.7 심남일, 전남 함평에서 거병 → 강진면 오치동에서 교전(3.7) → 장흥 적 3명 사살 (6.19) → 능주에서 적 5명 사살 및 노획(6.25) → 영암 소촌 전투에서 적 10명 죽임(7.30) → 나주(8.1), 장흥 신풍(9.20), 해남 (10.9), 능주 석정(10.27) 모두 100여 명 살상

3.13 미국, 일본· 조선인 이민금지.

3.14 美 양원,일본이민제한법안 가결

3.14 신기선·이용직·박용대·조중응 등, 대동학회 조직

3.15 日, 樺太廳 관제 공포. 일본인 오쿠라기하치로(大倉喜八郞), 한국 학부에 선린상업학교의 설립을 청원  

3.18 일본 동경유학생들은 대구에서 보낸 국채보상 취지문을 받고 100여 명이 회동하여 斷煙同盟을 발기함

3.25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는 김성무·임치정·이교담의 명의로 「국채보상의연발기서」를 발표하고 미주교포들의 의연을 당부함

3.25 오적암살단(나철·오기호·李鴻來 등), 을사5적 습격

3.31 일제에 의해 대한자강회 해산


4.1 미국남장로교, 광주에 須彼亞女學校(1), 전주에 紀全女學校 설립(15)

4.1 日, 남만주철도 개업

4.8 국채보상운동 각 지방의 수금을 총괄하는 통합기구 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설립하고 전문 29조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규정과 공함을 발표하고 소장으로 韓圭卨을 추대함

4.11 시위보병 2개연대 편성됨

4.12 한국재정고문부, 각도고문지부에 배치할 재무보좌관보 15명을 일본으로부터 초빙할 것을 결정

4.20 이준 등,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차 출국

4.20 日 통감부, 한국인여권규칙 폐지, 외국인여권규칙 공포 시행

4 양기탁·안창호, 新民會 창립, 비밀결사로 활동 / 양회일 거병(4월 하순) 刀摩峙에서 패배

 

5.2 일진회, 정부에 대한 탄핵문 발표하고 국채보상운동을 비난

5.8 헐버트,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특사를 돕기 위해 출국

5.17 桂東學校,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설립됨

5.20 朴齊純 내각 사퇴 → 李完用 내각 성립(22)

5.22 중국혁명동맹회, 광동성의 黃崗에서 봉기

5.23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외에 한글판 간행

5 이강년·안성해·백남규 등과 제천에서 거병


6.4 현재 주한일인경무보좌원 330명, 사무원·통역관원 1천여 명

6.5 궁내부 소속 내수사 및 각 궁의 宮庄土의 導掌 폐지

6.10 파리에서 佛·日協約 및 佛領 인도차이나에 관한 선언서에 조인. 교환문서에 청국에서의 양국의 세력범위를 확정

6.14 內閣官制 공포(皇權 축소, 의정부 폐지)

6.15 네덜란드, 제2회 헤이그평화회의 열림

6.24 만국평화회의 특사 헤이그 도착

6.27 헤이그특사,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한국국권 유린과 한국외교권 탈취 등의 내용 호소 / 이위종, 만국기자협회에서 연설       

6 주한일본인 거류민 10만명, 그들 소유의 토지 2억3천만평으로 판명


7.2 헤이그특사,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 폭로. 특사파견 기사가 미국 신문에 게재

7.2 在헤이그일본대사, 외무대신에게 헐버드가 파리에 도착하여 일본을 비난했다고 보고

7.3 헤이그특사사건, 『대한매일신보』에 의해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짐

7.3 伊藤博文, 한국황제에게 헤이그특사파견을 항의

7.6 청 광복회, 안휘성 安慶에서 봉기. 서석린사건 발생

7.6 湖南學會 창립 / 이완용 내각, 어전회의를 열고 밀사사건의 사후책 논의

7.8 이위종 만국기자협회에서 연설

7.12 나주의병 김태원·신덕순, 정읍에서 창의, 나주·함평·장성 등지에서 활동

7.12 일본내각, 伊藤博文에게 對韓강경책을 훈령

7.14 李儁(1859~1909), 헤이그에서 순국(독립협회·보안회·대한자강회에서 활동)

7.16 경기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具然英(春景, 1864~1907) 사망

7.17 이완용·송병준 등 전각료,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주장.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교청년회원 등 2천여 명, 종로에서 양위반대시위

7.18 황제 강제퇴위,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발표 / 신기선·민병석, 양위반대내용의 경고문을 伊藤博文에게 발송

7.18 『大韓新聞』 창간(『만세보』를 인수,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로 출발)

7.18 일본외무대신 林董·統監 伊藤博文, 한국황제를 알현하고 밀사사건을 추궁함

7.19 서울 시민, 고종 양위에 반대하여 시위(국민신보사 습격) → 이지용·이근택의 별장에 방화(22) → 대구상인 황제양위에 반대하여 철시(24) → 양위에 반대하던 동우회원 30명, 日警에 체포

7.20 皇帝讓位式, 中和殿에서 거행(순종 즉위)

7.24 韓日新協約(정미7조약) 체결. 그 부수각서로서 군대해산이 결정 / 新聞紙法 제정(신문발행 허가제, 신문기사 사전 검열)

7.24 日 제3차 한일협약 조인(내정장악, 군대해산)

7.27 보안법 공포, 집회·결사의 자유 제한, 무기휴대 금지

7.28 日 노일통상항해조약, 어업협약 조인

7 민종식이 진도에 유배 / 백남수와 김치헌 등 의병 관아습격 등 대규모 공격활동을 멈추고 의병모집과 친일파처단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영해·영덕·평해 등지를 주로 활약 / 하와이, 무예장려·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한 신간회 창립 / 하와이, 무예·실업장려,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실지회 창립(회장 박승렬)

7.30 러시아·일본, 제1회 러일협약 조인

7.31 군대해산 조칙 내림


8.1 군대 강제해산식, 훈련원에서 거행. 시위 1연대 제1대대장 朴昇煥(1869~ 1907),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자결. 서울시위대, 일본병과 충돌 → 지방진위대 항쟁 촉발(2)

8.2 연호를 隆熙로 바꿈 / 의병 출신의 侍衛隊 參尉 南相悳(의령, 1881~ 1907), 군대해산에 항전 전사

8.2 강화분견대 부교 연기우는 전등사에서 항쟁 모의

8.2 한국 경무총감에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임명

8.3 개성과 청주진위대를 필두로 지방진위대 해산 / 충북 청풍 의병, 청풍읍 습격 및 경무분파소 파괴 / 문경 의병, 우편소청사 공격 / 이강년, 갈평 전투 시작 → 민긍호부대와 연합하여 충주공략 → 일군과 교전 후 영월로 북상(9.25) → 일군과 격전 및 남하(10.6) → 일본군 일대 타격(10.21) → 죽령에서 치열한 접전(11.10), 소백산을 거쳐 순흥공략에 나서 순흥 일군분견소, 경찰서 파괴 → 영춘 동쪽에서 일군과 격전(11.26) → 경기지역을 향해 북상중 와병, 기습공격으로 참패를 당함(12.16) → 강원도 퇴각, 설악산 백담사 도착(1908.4.10) → 일본군 백담사 공격, 패퇴시킴(4.13) → 청풍으로 남하하던 중 제천 수비대 일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나 패산, 이강년 포로가 됨(7.2) → 이강년 사형(10.13)

8.4 조인환, 경기도 양근읍 의병 진입

8.5 金德齊·閔肯鎬원주진위대, 군대해산명령에 저항. 250명의 원주진위대 병사와 지역주민이 합세하여 무기고를 파괴하고 1,600여 정의 소총과 40,000발의 탄환을 탈취하여 원주읍을 장악, 충주 쪽에서 공격해오는 일본군 청주수비대를 2시간 전투 끝에 격퇴

8.8 원주진위대는 2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민긍호가 거느리고 제천·충주·죽산·장호원·여주·홍천 방면에서, 다른 한 부대는 김덕제가 거느리고 평창·강릉·양양·간성·통천 방면에서 크게 활약 

8.9 수원진위대 제1대대 강화분견대 군대해산. 연기우, 전 진위대 참교를 역임한 유명규, 부교 지홍윤과 함께 병사 50명을 이끌고 자강회원 중심으로 모인 주민 500여 명과 합세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1,000자루 소총과 탄환을 탈취하여 파출소를 습격하고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이며 군수인 정경수를 살해

8.10 강화분견대 일본군과 항쟁

8.10 ~20 여주의병 활동, 한강 항행하는 일인 목선을 기습, 일인 총살 및 적재화물 일체 노획 → 여주 의병, 여주읍 점령 서울-원주간 도로 차단, 음죽·장호원 장악하여 원주 일본군을 고립시킴(8.12) → 여주읍 포위, 일경과 3시간 교전, 읍을 점령(8.20)

8.11 ~25 일까지의 각지 의병(11일), 600명 강화분견대 항쟁군이 강화읍 탈출, 지홍윤부대는 해서지역으로, 연기우부대는 장단으로 이동하였으며, 잔류한 일부 부대는 강화 서북산악지대를 근거로 의병전쟁을 전개 / 11일, 영천군내 의병 300명 분파소·우편국 습격, 철도노선 파괴 / 13일, 이동휘, 강화군내 의병조직 건설에 힘쓰다 체포 / 14일, 민긍호부대 홍주읍 점령 / 김덕제 부대, 평창·진부를 점령, 우편국원 2명 사살 / 15일, 경기도 죽산읍 의병 점령, 충북 제천 의병 점령, 경기도 수원역 의병이 공격 / 17일, 강원도 인제읍, 의병이 진입하여 군아와 서기청, 분파소 파괴 / 20일, 일본군 춘천·원주·충주·영천·삼척·강릉을 잇는 포위망 형성 → 의병의 활동은 더욱 민활해지며 전투구역 확대됨(순흥·영춘·청산·옥천·괴산·간성·고성) / 20일, 신돌석의병 300여 명 규모로 영양읍 공격, 분파소와 관아 공략 / 25일, 산남의진, 청하읍 공격 / 8월,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 접경의 산악지방인 금산·용담·무주·고산·장수·곡성·구례 등지에서 의병부대 활동이 다소 활성화(~9)

8.12 통감 伊藤博文, 귀국

8.16 일본황태자 嘉仁(후에 大正天皇) 내한. 황제, 인천에 출영

8.17 巡檢을 일본식 명칭인 巡査로 개칭

8.18 통감부, 재경일인단체 해산종용 / 제2인터네셔널의 슈투트가르트대회 열림

8.20 간도 용정에 통감부 출장소 개설 → 청국, 철수를 요구(8.24) → 1909년 11월 1일 폐쇄

8.21 대한자강회 강제해산

8.26 태황제·황제·황태자, 모두 단발

8.29 일본, 立敎大學 설립

8 하와이 마우이에서 인재양성,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한 부흥회 창립(회장 서성년, 발기인 서성년·전백전)


9.2 韓人合成協會 설립(하와이)

9.3 북청진위대를 마지막으로 한달 사이에 군대해산 완료, 장교 1,225명을 대량 해고

9.6 강화분견대 의병 유명규는 통진에서 무기조달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총살

9.6 日 통감부, 의병진압을 위해 총포 및 화약단속법 제정. 을미사변 관련자들 특 

9.10 奇參衍, 영광 석수암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후 의병진을 편성하여 ‘湖南倡義會盟所’라 이름하고, 무장·법성포·고창·장성 등지에서 활약

9.11 고광순, 담양에서 의병 일으킴

9.12 이석용, 임실에서 창의궐기대회 → 진안읍 기습(9.13) → 내원사 골짜기에서 적병 사살(9.16) → 화암리 후방산에서 적과 접전, 병력 열세로 의병을 잃음(10.8) → 성수산에서 의진 재편(11.14) → 장수읍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시킴(11.17) → 진안 무술촌에서 적 사살(12.25) → 진안 失洞(1908.3.5) 馬根峴(3.14), 殊流山(3.17), 館村驛(3.27), 嘉水里(4.30)에서 접전 → 의진해산(9) 및 유랑 →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힘(1912)

9.15 의병장 南錫仁(청송, 1878~1907), 청송·영덕에서 활약하다 교전 중 부상, 피체, 옥중순국

9.17 태황제, 경운궁으로 移御 /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로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조직됨(회장, 馬浦三悅)

9.18 日 육군, 13개사단 증가 

9.21 산남의진과 신돌석 의병, 청송읍 연합 공격

9.23 기삼연부대, 고창 문수암으로 진군하면서 교전

9.26(음8.19) 이남규 부자, 의병 지원 혐의로 일본군에 피살 순국(장소,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평촌 냇가)

9.26 뉴질랜드, 대영제국 내의 자치령이 됨


10.9 『大韓每日申報』와 『The Korean Daily News』가 공중평화를 방해하고 인민을 정부에 반대하여 봉기토록 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는 구실을 내세워 통감부가 베델을 영국총영사관에 기소 → 유죄가 인정되어 베델, 6개월 근신 및 보증금의 공탁을 명령받음(10.15)

10.6(음8.29) 산남의진, 立巖(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전투에서 참패. 의병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전사순국

10.10 이석용·전해산, 의병봉기(진안)

10.11 동복 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한 의병장 高光洵(光詢)(담양, 1848~1907), 高濟亮(聖弼)(1894~1907) 高光秀·高光薰·朴贊德 등과 연곡사에서 전사순국

10.15 노백린,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 대구 신명여학교 설립

10.22 하와이 합성협회, 주간 『한인합성신보』 창간

10 김영백, 전남 장성군에서 1천명을 규합하고 창의 →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순창 등을 무대로 활약 / 정환직, 아들 정용기 의병장 전사 후 산남의진 재건

10.1 日, 17개 사설철도회사의 국유화 완료

10.9 伊藤博文, 주한영국총영사에게 공문을 보내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베델의 처벌을 요청 

10.18 日 헤이그 제2회만국평화회의의정서 조인

10.26 (주)동양척식 설립의 기본계획 완성

10.29 在韓 본신민의 경찰사무집행에 관한 협정체결

10 日, 「한국에 주둔하는 헌병에 관한 건」 제정(일헌병, 경찰권 장악). 한일간의 경찰사무집행에 관한 취지서 조인(한일간의 경찰합병)


11.1 淸 중국혁명동맹회, 鎭南에서 봉기

11.3 강원·충북·경북 등지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池龍起(양양·담양, 1848~1907), 전사순국

11.5 각 외국어학교(일, 영, 독, 불, 漢語)를 동일구내로 집결 → 1909.12.20. 관립한성외국어학교로 완전 통합

11.6 이강년부대 300명, 단양에서 일본군과 교전

11.10 이강년부대 200명과 신돌석 의병이 합세, 순흥군을 습격

11.11 일진회, 의병에 대항하여 자위단 조직

11.13 태황제, 창덕궁으로 移御

11.16 車道善·太陽郁 등, 북청에서 의병 봉기하고 일진회원 살해

11.18 황제, 종묘에서 國是 6개조 誓告

11.20 남궁억·윤효정 등 大韓協會 설립

11.21 의병장 金大圭(안동, 1878~1907), 장갈령 전투에서 전사순국

11.23 차도선·洪範圖·송상봉 등, 의병봉기(북청 후시령에서 山砲隊 이끌고 일본군 중대병력 섬멸)

11.30 淸 중국혁명동맹회, 광서성에서 봉기


12.5 황태자 垠, 유학명목으로 강제 도일 / 沈南一, 함평 신광에서 의병봉기 

12.6 허위·이인영·이강년·민긍호 등의 의진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十三道倡義軍결성(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규,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호남창의대장 문태수)

12.11 정환직 의병장, 청하 일본군 수비대에 피체 / 의병, 용인에서 일진회 지회장을 살해

12.16 경북 울진 등지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金正元 전사순국

12.20 중추원의관 출신의 의병장 鄭煥直(영천, 1843~1907), 아들 鏞基의 전사 후에도 활약, 일본군에 피체, 영천 南郊에서 총살순국

12.24 이승훈, 정주에 五山學校 설립

이해 경북 금릉 출신 李建奭, 을사늑약 후 討倭疏를 올리다 피체, 옥중에서 吐血순국[남쪽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