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삼한, 고려, 조선제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한부울 2010. 8. 14. 20:31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징기스칸 몽골정권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5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

과연 고려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고려인은 몽골리안 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과 다른 모습이었을까?

아래 문견잡기를 보면 몽고인은 청인(만주인)과 다르다고 하였다.

현재 몽골을 보면 한반도와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인종적인 면에서도 역시 같은 종족이었다고 한다면 영역 또한 근세기까지 같은 영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래 문견잡기 기록은 충격이다.

지금의 몽고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눈이 푸르고 수염이 붉은 러시안 투르크계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고려연합제국인 고려인이 몽골리안 즉 한국인의 모습과 같은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 고려는 연합국가로서 다문화적인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역시 고려와 정책적인 면에서 다르지 않아 거의 모든 부분을 승계한 것이어서 다민족국가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중앙아시아에 존재하며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분명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이다.

하지만 과연 13세기 세상을 벌벌 떨게 하였던 몽골제국 즉 고려연합제국의 무신정권 무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분명 문견잡기(聞見雜記)청인과 몽고인의 모습이 다르다고 한 기록은 우리가 상상하던 몽골제국 전체를 까 뒤집어 놓는 엄청난 혼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혹 문견잡기에 몽고인은 몽고제국 고려연합의 무사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고려주체들은 몽골리안이 아닌 지금 러시안 투르크계 인종은 아니었을까?

눈이 푸르고 수염이 붉은...

결국 전통 몽고인은 몽골리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반도사가 말하는 것처럼 수많은 란과 전쟁에 화를 입어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도대체 삼한군왕들의 초상화가 일부러 없애버린 것처럼 하나같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다.

역사주체인 군왕들의 초상화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고구려, 신라, 백제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제왕모습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몽골리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세기말 역사조작세력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사라지게 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

(생략)

Rosh → Rashu→Russ → Russia : 로스 /러시아
Persia → Iran : 바사 / 페르샤 
Cush → Ethiopia : 구스 / 에디오피아
Put → Libya : 붓 / 리비야 → 리비아
Gomer : 고멜 → 아르메니아
Togarmah : 도가르마 / 도갈마 → 아제르바이젠

 

이러한 지역은 역시 흑해와 카스피해를 중심으로 그 북쪽의 유럽 동남부 지역과 남쪽의 서아시아 지역을 비롯하여 지중해 동남부와 홍해의 서쪽에 있는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을 포함한다.

바로 이 지역 가운데서 곡(Gog)과 마곡(Magog)의 지역은 로스․메섹․두발을 언급한 곳이며, 유럽의 동남부요, 서아시아의 북부에 해당되는 우즈[沃沮]․알란(Alan/阿蘭)․스키타이(Schythia)․마갸르(마쟈르: Magyar)․말갈(靺鞨) 지역이다.

이 곡과 마곡이란 이름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다녔던 곳이며, 그가 남긴《동방견문록》에서 우리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잇는 글이 잇다.

“74장 텐둑(tenduc) 큰 지방 이야기: 텐둑은 동쪽에 위치한 지방이며, 읍과 촌락이 많다. 대카안에게 속해있다. … 내(마르코 폴로)가 말했듯이, 통치권은 기독교에 있지만, 우상숭배자들이나,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그곳에는 아르곤(argon)이란 족속이 살고 있다. … 여러분은 프레스트 요한이 타타르들과 그 주변의 모든 지방과 왕국들을 다스렸을 때, 그의 도읍지가 이 지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이곳은 우리나라(이탈리아)에서 곡(Gog)과 마곡(Magog)이라고 부르는 곳을 이곳에서는 웅(Ung)과 몽굴(Mongul)이라고 부른다.”[김호동 역,《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사계절, 2005), pp.205-206]


여기서 마르코 폴로가 말한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Gog)=웅(Ung)”이고, “마곡(Magog)=몽굴(Mongul)”이라는 사실이다. 몽굴은 당연히 몽골이다. 위의 글은 마르코 폴로의 글에서 제2편 중앙아시아를 갔던 마지막 곳에 해당되며, 제3편 대카안의 수도로 오기 직전의 설명이다. 바로 여기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지배했던 대카안 지역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르코 폴로의 조국에서는 모두 대카안들이 지배했던 “웅(Ung)과 몽굴(Mongul)”을 그들은 “곡(Gog)과 마곡(Magog)”이라고 불었던 것이니, 그곳이 어딘가? 또 여기에는 “카타이(Catai)”라는 말도 나온다. 이 말은 다른 표기로 “Cata, Cataio, Cattayo, Ouchach, Ouchacha, Alcathay, Alochayray”라고도 문헌마다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김호동 교수의 설명이 더 적격이라고 본다. 하나의 지명을 나라마다 참으로 많이 다르게 불렀던 모양이다.


주35) 몽골제국시대 ‘카타이’ 혹은 ‘키타이(Kitai)’는 金朝 치하에 잇던 북중국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契丹(Kitai)을 옮긴 말로서 遼가 북중국을 지배할 때 그 지역에 대한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위의 책, p. 110]


이것은 결국 [카타이(Catai)=키타이(Kitai)=契丹=글단=글안]이며, 중국의 북쪽 지역이라고 했으니, 결국 “中國”은 아닌 것이며, “中國≠漢”으로 구분하여 위의 (4)에서 보듯이 “漢=키탇=키탄=키타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다녀가는 여행길에서 지명들을 보면, 신다추(Sindaciu), 이디푸(Yidifu), 차카노르(Ciagannor: 察罕腦兒, 백색의 호수), 샨두(Ciandu: 上都, 대카안이 있는 곳), 호리아트(Horiat, Oyirat, Boriat)가 나오는데, 이디푸와 차가노르의 사이는 사흘 거리이고, 차가노르와 샨두와의 사이도 사흘거리이다. 다 해봐야 1주일 거리이다.


이미 곡(Gog)과 마곡(Magog)의 지역은 로스․메섹․두발을 언급한 곳이며, 유럽의 동남부요, 서아시아의 북부에 해당되는 우즈[沃沮]․알란(Alan/阿蘭)․스키타이(Schythia)․마갸르(마쟈르: Magyar)․말갈(靺鞨) 지역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 지역이 몽골이라면 결국 여기서부터 1주일 거리에 대카안이 있는 곳 샨두(Ciandu: 上都)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몽골의 상도(上都: Ciandu)는 알타이산맥 이동쪽은 될 수 없는 것이다.[최두환]


볼가강 서쪽 칼미키아 공화국의 종족은 오이라트이고 몽고족입니다. 몽고의 발상지는 이 주변입니다. 볼가강 우랄강 카자흐스탄 지역이 몽고입니다[이태수]

********

문견잡기(聞見雜記) 하

연행기사(燕行記事) 이 갑(李 押, 1737~1795)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강한(强悍)하고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 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강희(康煕) 때로부터 점점 친근한 뜻을 보여 딸을 낳으면 반드시 시집보내며 또 종친왕(宗親王)의 딸도 시집보내어 이름을 양공주(養公主)라 하고, 은단(銀緞)ㆍ우마(牛馬)를 많이 보내주었다. 그런데 거처와 음식이 중국과 판이하기 때문에, 처음 시집 가면 청인들이 모두 가서 집을 지어 주고 살게 해도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그곳에 살기를 싫어하다가도 오래되면 그 생활에 익숙해져서 오라고 청해도 자주 오지 않는다고 한다. 존귀한 황제(皇帝)로서 그들과 친호(親好)함이 이와 같고 또 고관 대작으로 그들을 묶어 놓고 있으니, 어찌 속으로 두려워하며 밖으로 은의(恩意)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그들이 더욱 성하여 차츰 스며들어 안으로 들어오면 그 칼날이 향하는 곳은 대적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어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근심이 없을 줄을 알랴. 그들의 관사가 옥하관(玉河館) 북쪽에 있는데 관사에 있는 자가 낙타를 타고 길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들으니, 그들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즉 관사의 사면을 흙담으로 두르고 옥우(屋宇)는 없으며 넓은 마당은 텅 비어 있는데 10여 개의 전막(氈幕)이 벌여 있을 뿐이다. 자고 거처하는 곳에는 타는 낙타 수십 필만이 담 아래 누워 쉬고 있다. 막(幕) 안은 둥글고 10여 인을 수용할 만한데, 양 가죽과 잡털 갖옷[雜毛裘]을 두루 깔고 아래에는 석탄(石炭)을 피운다. 막의 꼭대기는 덮개를 걷어서 햇빛을 받고 겸하여 연기를 통한다. 본국(本國)은 연경에서 3000리인데 낙타를 타고 가면 한 달 만에 연경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 왕자(王子)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오면 별로 위의(威儀)가 없어, 청인들은 모두 말을 달려 스쳐 지나가는데, 몽고 사람들은 바라보고 모두 말에서 내리니, 저희들 중에도 등위(等威)가 있는 것 같다.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그리고 모두 몇 사람을 합한 것같이 힘이 세다. 사람이 있어도 오줌을 누며 부녀자를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데 입으로 연기를 뿜지 않고 코로 내보낸다. 모두 코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비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인들은 극히 두려워하여 방수(防守)하기를 극히 엄하게 한다. 출입할 때에는 갑군(甲軍)이 반드시 따라다니나 오히려 제재하지 못한다.


들으니, 일찍이 두어 사람이 저자로 다니며 겁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려 하다가 듣지 않으매 때려죽였다. 황제가 듣고 크게 노하여 대청문(大淸門)에 좌기하여, 군사 호위를 성대히 하고 잡아다가 목을 벤 뒤로부터는 감히 시가에 함부로 다니지 못하였다 한다. 그 뒤 강희(康煕 청 성조)가 별도로 스승을 정해 놓고 문자를 가르쳤는데 이로부터 차츰 규율이 생겼다. 지금은 가끔 향학(向學)하는 자가 있어 항상 옥하관(玉河館)에 머무른다. 이 관사는 본래 우리 사신이 거처하던 곳인데, 그들이 들어와 웅거하고 나가지 않으매, 청인이 그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따로 남소관(南小館)을 설치하여 우리 사신을 용접(容接)하게 하였다.(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