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許蘭雪軒) http://blog.daum.net/han0114/17047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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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같은 현상이 자꾸 생기고 발견되는 것인가?
바로 대륙조선을 반도조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연구중심 연구원인 김성남(45)씨가 사대주의 운운하고 있지만 속으론 틀림없이 비웃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조선이 대륙조선이었기 때문에 대륙조선에서 작품 활동한 허난설헌의 자료가 국내보다 대륙에 더 많은 이치를 바보가 아니면 알아채야 한다.
또한 그를 비평하는 국내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모사 또는 모방했다고 하는 발상도 이와 같은 현상에서 나온 것인데 어리석게도 일제가 남겨 둔 반도역사에 빠져 그것만이 사실인 줄 알고 거의 모든 논리를 그것에 목메 다는 현상에서 나오는 자기오류이고 결국 진실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불구가 되어 사실을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마치 코메디처럼 느껴 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노릇을 어찌 할 건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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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드날린 허난설헌 명성 확인
한겨레 2001/04/29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여성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논문이 중국에서 처음 발표됐다.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연구중심 연구원인 김성남(45·사진)씨는 26일 중국 대륙에서 3년여 동안의 연구 끝에 <조선시기 재녀 허난설헌 문학에 대한 문화교류사적 접근과 여성학적 해석>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허난설헌 관련 논문이 중국 땅에서, 더구나 중국어로 발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실장 등 여성운동 10여 년 경력의 김씨가 허난설헌 연구에 매달리게 된 것은 1998년 8월 중국문헌 속에 나타난 중국여성사를 정리하기 위해 베이징의 대학도서관을 뒤지다 허난설헌의 굵은 `흔적'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김씨는 허난설헌의 작품이 한국 땅보다 중국 땅에서 의외로 많은데다, 이제껏 국내에서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에 더욱 놀랐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유소사'(有所思) 등 13수의 시를 새로 발견했고, 시가 실린 13권의 중국문헌도 일일이 확인했다. 특히 명대의 문학가인 종성이 36권으로 집대성한 여성시집 <명원시귀>(名媛詩歸)에는 허난설헌 시가 한권(68수)을 차지하고 있으며, 1606년 역사서로 발간된 제갈원성의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도 허난설헌의 시가 수록돼 당시의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고 김씨는 밝혔다.
1589년 27살에 요절하기까지 210여수의 시를 남긴 허난설헌 작품의 표절시비에 대해 김씨는 “형식과 주제들이 정형화하고 상투화한 당시 조선시대의 문단풍토는 모방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며 “글자 몇 자가 같은 것을 표절의 척도로 삼는다면 당시의 유학자 중 표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허난설헌 작품의 느낌과 내용, 착상은 완전히 다르다”며 16세기에 시작된 표절논쟁이 아직까지 계속되는 바탕은 바로 여성에 대한 폄하의식과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허난설헌은 여성의 몸으로 스스로 이름을 `초희', 자를 `경번'으로 지어 봉건적인 사대부들의 눈밖에 났다”며 “대표작인 `유선시'(遊仙詩) 86수는 중국신화속의 여신들을 등장시켜 자유로운 사랑과 주동적인 애정을 구하는 생동감 넘친 장면묘사 등 중국과 한국의 여성작가를 통틀어 유일하게 진보적인 여성의식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사후 작품을 정리한 동생 허균의 정치적 실패도 표절과 위작시비를 부추긴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허난설헌이 진보적인 실학자들도 수긍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었다며 “중국문헌 <긍사>(亘史)는 허난설헌이 7살에 지은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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