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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Malaria, 瘧疾, 唐瘧)와 금계랍수(金雞納樹, 幾那, Cinchona, Quinine)

한부울 2011. 11. 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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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Malaria, 瘧疾, 唐瘧)와 금계랍수(金雞納樹, 幾那, Cinchona, Quinine)

 

글쓴이:한부울

 

말라리아(Malaria)는 학질(瘧疾)이다.

모기가 옮기는 전염병으로, 매년 2억에서 3억 명의 사람이 감염되고 수백만 명이 사망하는 위험한 질병이며 “학질” 또는 “하루거리”(間日瘧)라고 불렸다.

 

말라리아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460-BC377)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42명의 열성 환자를 관찰하여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는 열이 오르면서 한기를 느낀다는 증세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기술이 현재의 말라리아인지, 아니면 다른 열성 질환인지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질이라고 판정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말이다.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후 고대 로마의 문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BC116-BC27)는 “보이지 않지만 늪지대에 살고 있는 어떤 미세한 물질이 입과 코를 통해 인체에 들어오면 질병을 일으킨다”며 집을 지을 때는 늪지대를 피해야 한다고 소개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말라리아에 대한 문헌 역사기록이다.

 

원래 기나(幾那)나무가 난다는 남아메리카에는 이 말라리아(Malaria) 학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선물’로 추정되는 이 학질은 1493년 남미를 초토화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며 약 100년 후 남아메리카(South America, 1600–1650)에서 말라리아가 대유행하게 된다. 

아노펠레스 알비마누스(Anopheles albimanus) 모기 말라리아란 영어로 나쁘다(또는 미친)는 뜻의 “mal”과 공기를 뜻하는 “air”가 합쳐진 말로 “나쁜 공기”를 이탈리아어로 발음하면 말라리아가 된다. 이와 같은 이름의 유래를 가지게 된 것은 공기 중에 어떤 미지의 물질이 포함되어 공기가 나빠지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래전에 삼한 역사에서 나오는 병과 흡사하고 닮았다고 본다.

삼한의 역사자료에 선비들의 귀양지에서 풍토병으로 자주 등장하는 장기(瘴氣), 독장(毒瘴) 장독, 장려(瘴癘)과 같은 의미의 병이라고 생각된다. 이것들을 한어사전에 보면 나쁜 병을 일으키는 산천(山川)의 나쁜 기운 또는, 사람을 해치는 악기(惡氣). 疫氣(역기)라 하였고 열대나 아열대 산림의 습하고 더운 공기로 예전에는 장려(瘴癘)라 하던 것이다.

장려(瘴癘)는 한의학에서 나쁜 공기를 마셔 걸리는 병을 말한다.

이곳이 열대지역이나 아열대지역도 아닌 한반도에서 벌어진 역사라 하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기후나 자연적 환경으로 보아서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역사풀이다.

 

말라리아 원충에는 4가지 종류가 있는데

1.Plasmodium vivax (삼일열원충)은 온대, 아열대, 열대지방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유행하며 국내에서도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2.Plasmodium faciparum (열대열원충)은 인체에 가장 치명적인 열대지방과 아열대지방에 걸쳐 분포한다 했다. 그리고

3.Plasmodium malariae (사일열원충)은 열대열원충과 분포는 거의 같으나 발생 빈도가 훨씬 적고 4.Plasmodium ovale (난형열원충)은 매우 국소적이고 열대 아프리카지역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말라리아 원충 모두가 열대나 아열대지방을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던 이 병은 주로 열대지방이나 아열대지방에서 발병되는 질병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도 흔한 병, 토착, 풍토병이라고 하였으니 참 별일이다 싶다.

이것이 바로 반도사의 한계이고 병폐라는 것이다.

 

 

 

 

 

환경적인 요소가 전혀 아닌데도 기어코 한반도라고 떠들고 있으니 어찌 괴이하다 하지 않겠는가?

특히 모기(mosquito)로 인하여 생기는 병은 말라리아(malaria), 상피병(filaria), 일본뇌염(Japanis encephalitis), 황열병(yellow fever), 뎅기열(dengue)등이 있는데 모두 공통적인 환경은 덥고 습한 열대지방이나 아열대지역이라는 것이다.

특히 일본뇌염이라는 것은 온대기후에 있는 지금의 열도를 생장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은 조작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이와같은 사실에서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는가 하는 말이다.

일본뇌염이 과거에도 유행했다면 일본이 열대지방이나 아열대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게다.

 

일찍이 우리나라 역사책에 말라리아로 보이는 질환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의종 때인 1152년이고

고려 고종때 또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라 판단되는 징기스칸(Genghis Khan, 1162-1227)은 1227 년 봄에 질환과 같은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을 가지고 있었고 질병의 몇 개월 후 칸 죽었다 하는 설도 있으며 1258년 고려 고종 46년 7월에는 홍복원이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인형을 만들어 손을 묶고 머리에 바늘을 꽂아서 땅에 묻거나 우물에 빠뜨려 저주하는 것을 보고 조사한 즉, 아이가 학질을 앓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한다.

이렇다면 1493년 아메리카에 말라리아가 들어 초토화시켰다는 것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원정1차부터 4차까지 기간이 1492-1504)가 신대륙을 찾아 선물이 아니라 따져 보면 조선에서 넘어간 것이거나 조선내에서 일어난 토착, 풍토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조선 세종 2년(1420)에는 대비가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 역시 콜럼버스 운운하는 것 보다 빠른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역사문헌을 통해 추측해 볼 때 현재의 말라리아로 생각되는 질병은 토착성이나 풍토병으로서 조선사회에서 수시로 유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과연 한반도인가 하는 점 만큼은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단언 할 수 있다.

 

종 8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5월 27일(갑오)

임금이 낙천정에 가서 학질병을 앓기 시작한 대비께 문안하다

○甲午/上自豐壤詣樂天亭覲大妃。 大妃自是日, 始感寒痁。

임금이 풍양으로부터 낙천정으로 가서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대비가 이날부터 학질병으로 앓기 시작하였다.

 

세종 13권,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8월 2일(임진)

양녕군의 학질을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다

○讓寧君褆得瘧疾, 遣宦官問疾, 又遣御醫及呪僧治療。

양녕군 이제가 학질(瘧疾)에 걸렸다 하니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어의(御醫)와 주문(呪文) 읽는 중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성종 290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5월 29일(병진)

옥에 갇힌 자들에게 약과 얼음을 내려 이들을 구료하게 하다

○上以日候甚熱, 獄中囚繫者多, 其救療之狀, 令注書、史官同內官考驗于義禁府、典獄。 義禁府無氷丁、六和湯, 典獄無氷丁。

임금이 날씨가 매우 덥고 옥중(獄中)에 갇힌 자가 많다고 하여 그 구료(救療)하는 상황을 주서(注書)·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내관(內官)과 같이 의금부(義禁府)와 전옥(典獄)을 고험(考驗)27714) 하게 하였는데, 의금부에는 빙정(氷丁)과 육화탕(六和湯)이 없었으며, 전옥에는 빙점이 없었다.

 

위 성종25년(1494)기사도 말라리아가 아메리카를 초토화 했다는 사실에서 보면 거의 같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또 “...의금부에는 빙정(氷丁)과 육화탕(六和湯)이 없었으며, 전옥에는 빙점이 없었다”는 기록을 보면 학질이 대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육화탕은 더위(열대나 아열대기후로 해석)가 심장(心腸)과 비장(脾腸)을 상(傷)하게 하여 구토(嘔吐)를 하거나 설사(泄瀉)를 하고, 더러는 곽란(霍亂)으로 근육(筋肉)이 뒤틀리는 증세와 또 부종(浮腫)·학질(瘧疾)·설사를 다스리는 데 쓰이는 구급약(救急藥)이라 하였다.

이 한약이 당시 있었다가 없다는 것은 조선에서 그 만큼 학질환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1493년에 발생한 아메리카의 말라리아 대유행과 어찌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프레시안에 이런 기사가 있다.

 

“1886년 발행된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는 제중원 창설 후 1년간 내원한 환자들을 분류한 내용 중에 간헐성 발열 증세를 보인 풍토병환자들 중 삼일열이 171 예, 사일열이 713 예로 보고되어 있어서 이 중에서 상당수가 말라리아 환자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남아메리카 페루(잉카)의 원주민이 오래 전부터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 치료에 사용하던 기나 나무껍질이 유럽에 도입된 것은 1630년대였다. 그리고 200년쯤 뒤인 1820년에 프랑스의 약사 펠레티에(Pierre Joshep Pelletier)와 카방투(Joshep Bienaime Caventou)가 기나 나무껍질을 분리, 정제해서 키니네(金鷄蠟)를 만들어내었다. 키니네는 말하자면 아메리카 전통 의료와 유럽근대 과학의 합작품인 셈이다.

 

금계랍(金鷄蠟)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걸러 앓는 학질은 속칭 '당학(唐瘧)'이라는 병인데, 우리나라 사람이 이 병을 아주 두려워했다. 노쇠한 사람은 열에 네다섯은 사망했으며 젊고 기력이 좋은 사람도 몇 년을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 금계랍이란 약이 서양에서 들어온 뒤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한 돈쭝만 복용해도 즉효가 있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불려졌다. 우장(牛漿·우두 원료)이 나오자 어린아이가 잘 자라고, 금계랍이 들어오자 노인들이 명대로 살게 되었네."

 

이것을 보면 금계랍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미 1880년 무렵부터는 조선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호를 개방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벌써 조선은 서양산 약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중원을 찾은 열병 환자가 많은 것으로 보아 제중원도 금계랍을 보급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프레시안-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글]

 

 

▲ 1898년 10월 12일자 <독립신문>(왼쪽). 세창양행과 제중원의 금계랍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다. 세창양행은 독일제, 제중원은 미국제를 수입해서 팔았다.

 

또 하재일기에 보면

 

하재일기 5

1883년 왕실 수요 도자기를 만들어 진상해 온 사옹원 분원의 운영권이 민간으로 이양되어 분원공소로 전환된 이후 경영에 직접 참여한 공인(貢人) 지규식(池圭植)의 일기로, 고종 28년(1891)부터 1911년까지 20여 년간의 개인 기록이다.

병신년(1896) 12월 10일 맑음.

往韓龍植家 探劉主事 則今日權協辦文蹟成出云云 往貞洞 買藥院金鷄納一甁 上品四十兩貿得 刷齒毛一介三兩二戔五分貿來 圖書印朱二兩貿入 益俊許夕飯共喫

한용식의 집에 가서 유 주사를 탐문하니, 오늘 권 협판(權協辦)이 문적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정동(貞洞)에 가서 약원(藥院)의 금계랍(金鷄納) 한 병을 샀는데, 상품(上品)을 40냥에 샀다. 쇄치모(刷齒毛) 1개를 3냥 2전 5푼에 사 왔다. 도서(圖書) 인주(印朱)를 2냥에 사들여 왔다. 익준과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하재일기 5

정유년(1897) 5월 12일

경자. 비(庚子 雨)

鄭道京文一兩去 柳蕉史內子瘧疾 金鷄納二分重

정도경(鄭道京)이 돈 1냥을 가져갔다. 유 초사(柳蕉史) 내자(內子)가 학질에 걸려 금계랍(金鷄納) 2푼쭝을 - 판독불가 -

 

하재일기 5

정유년(1897) 8월 24일

신사. 비(辛巳 雨)

余有痰咳 試服金鷄納一分重 韓貴福文二十兩來 元心自京下來 見韓同知書 則社中事務 歸咎於吾 而日前元心便 咸東羲以崔東煥不言事 擇送別人之意 書及於韓同知 韓見書大怒 崔咸兩人 以社長分付招待次有書 而錢亦不送 此中事勢 萬不成樣 百般見困 使仁兒周旋 匠色雇價 得米分給 咸崔兩人 亦相爭詰 可歎可歎 京居金貞浩 以結卜事下來

내가 가래와 기침이 있어 금계랍(金鷄納) 1푼쭝을 시험 삼아 복용하였다. 한귀복(韓貴福)에게서 돈 20냥이 왔다. 원심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한 동지(韓同知)의 편지를 보니, 회사 사무를 나에게 허물을 돌렸다. 일전에 원심 편에 함동희(咸東羲)가 최동환(崔東煥)이 말하지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을 가려서 보내 달라고 한 동지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한 동지가 편지를 보고 크게 성을 내었다. 함동희와 최 동지 두 사람에게 사장의 분부로 초대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고 돈은 또한 보내지 않았다. 이곳의 사세가 매우 꼴이 아니라서 온갖 곤란을 당하여 인아로 하여금 주선하도록 했지만 장색(匠色)의 품삯은 나누어 주지 못했다. 최동환과 함동희 두 사람이 또 서로 다투니 매우 탄식스럽다. 서울에 사는 김정호(金貞浩)가 결복(結卜)에 관한 일로 내려왔다.

 

이란 기록도 있다.

먼저 프레시안 기사의 내용을 보면 “미국인 알렌(Allen,H.N., 安蓮)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에서 1886년 발행한 1차년도 보고서에 내원한 환자들을 분류한 내용 중에 간헐성 발열 증세를 보인 풍토병환자들 중 삼일열이 171 예, 사일열이 713 예로 보고되어 있어서 이 중에서 상당수가 말라리아 환자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분명 풍토병환자라 하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제중원에 찾아 온 환자 중 삼일열(Plasmodium vivax)은 171건, 사일열(Plasmodium malariae)은 713건이라고 하였으니 온대지방에서도 발병할 수 있는 삼일열은 그렇다 치고 그 보다 약 4배나 더 많은 환자가 열대나 아열대지방에서만 발병할 수 있는 사일열(Plasmodium malariae) 증세를 보였다는 것은 반도상식으론 엄청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어찌 놀라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학질 즉 말라리아가 조선사회의 토착이나 풍토병이라고 할 때 그 곳이 한반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사리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보 멍텅구리라 해도 과하지 않다고 본다.

명백하게 말라리아는 주로 열대지방이나 아열대지방에서 발병되는 질병이라 한 사실을 인용하면 조선은 누가뭐래도 열대지방과 아열대지방을 포괄하는 영역의 제국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후 환경 조건이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다 알다시피 모기의 생태가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어 환경에 더욱 더 잘 적응하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에 따른 지구온난화현상으로 지구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예전에는 주로 아열대 및 열대 지방에 분포되어 있던 모기가 이제는 과거의 온대지방으로 그 분포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말라리아 환자 발생지역도 점점 넓어져 가고 있다는데 동의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21세기 지금은 이 한반도 역시 말라리아의 안전한 지대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20세기 초반까지(1927)는 그러하질 않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조선시대까지의 학질 기록은 한반도 일 수 없는 것이고 그 기록은 분명 열대나 아열대를 영역으로 하는 대륙조선이었기 때문에 이렇듯 조선왕조실록에 학질 말라리아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남아메리카 페루의 국목이라고 하는 기나(幾那)나무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것은 아무래도 조선이 가지고 있던 한방약 중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는가 의심해본다.

중요한 것은 의학적인 발전 사례를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기나나무를 동양과 서양에서 어떻게 먼저 사용했는가를 살펴보자.

토착, 풍토병이라고 하는 이 말라리아를 상대한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전염병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였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당시 조선이 방역에 대한 정책적인 면을 한번 들어다 보면

1610년 광해군 2년 8월: 『동의보감(東醫寶鑑: 보물 제1085호(지정일: 1991-09-30))』 25권이 완성되다.

1610년 광해군 2년 12월: 평상시 양의사(兩醫司)가 모두 전매(典賣)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전란 후에는 다만 혜민서가 겨우 다시 설치되었다. 약재가 늘 부족하고 품절되어 모든 백성들에게 능히 지급하지 못하다. 도하 높고 낮은 사람들이 질병이 있을 때 약을 지어 치료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혜민서의 안(安)경기란 자가 평소부터 약재를 사구(私鳩: 개인적으로 모음)하여 지금까지 그만두지 않고 판매를 업으로 하니 사람들이 많이 의뢰하고 있다. 다만 그가 의국(醫局)에 몸담고 있어 한가한 짬이 없으며, 약을 갈라서 파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살 우려가 있어 이를 널리 펴지 못하는 바이다.

이제 본청에서 사용하는 여분의 쌀 몇 가마를 빌리면 이것으로 약재를 사고파는 자금으로 삼고, 명년 가을 추수시 반환하고 나머지로 이익을 취해 다시 약재를 구입하는 자금으로 쓰면 공가(公家)에 서로 손실이 없고 다만 약을 널리 쓸 수 있을 것이라 건의하다.

 

이것을 보면 제중원(濟衆院)이 1883년에 설립되었다 지만 그보다 200년이나 앞서 똑같은 기관인 양의사(兩醫司), 혜민서(惠民署)등이 설치되어 나름대로 수많은 전염병에 대한 구휼과 대책, 약에 대한 매뉴얼이 철저하게 작성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만큼 선진적인 의료진과 센터가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 세기 전까지 만해도 서양의 해부학과 생리학은 동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 졌었다고 한다. 또 질병 치료 방면에 있어서도 서양의학은 동양의학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컸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대륙조선이 전 세계 의학계를 쥐고 있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앞서 한센병, 매독, 천연두, 콜레라 등에서 조선이 대처한 상황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수준이 높은 의학적 학문이 분명하게 발전과정에 있었음에도 이러한 사실과 뛰어난 조선학자들을 반도사는 실학파(實學派)라는 애매모호한 학문 명칭에 연결시키고 발전적인 상황은 일체 감추어 버렸던 것이다.

1796년에 천연두(天然痘, Smallpox) 종두(種痘)를 발견했다고 하는 영국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조선 18세기 말에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란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밝혀야 할 사실은 1693년 여름 어느 날 강희(康熙1662-1722, 재위:1654-1722)는 학질(疟疾)에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머물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가 선물을 준 금계랍을 먹고 나았다는데 청조선은 이미 이와같은 한방 치료제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숙종과 강희제가 동일인물이란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서 살펴볼 때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1693년 숙종 19년 2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93년 숙종 19년 3월: 관북 지방에 전염병 사망자가 30여 명이다.

1693년 숙종 19년 4월: 관북, 호서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693년 숙종 19년 5월: 호남에 전염병이 돌다.

이 전염병이 학질이라 하지 않았다고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바로 학질인 것이다.

역사 분리 작업을 할 때 한쪽은 학질이라 하고 한쪽은 그냥 전염병이라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기나나무가 세계적으로 말라리아에 치료제 신코나 키니네(金鷄蠟:Cinchona)로 쓰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양인이 본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통적으로 기술한다.

말라리아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으나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어 탐험의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탐험가들과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천지로 떠나는 개척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면서 말라리아의 치료법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때는 16세기 초 남아메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가톨릭 예수회 신부들은 말라리아 치료를 위해 원주민들이 “키나”라고 부르는 나무껍질을 달여 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광경은 우리가 한약을 달여 먹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이 환자 치료에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였고 1630년경 유럽에서 말라리아가 대유행을 일으켰을 때 이 나무의 껍질을 유럽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다.

이것이 말라리아 치료를 위해 나무껍질을 사용한 문헌상 최초의 기록이며, 그 전에는 남아메리카에서 학질 치료법으로 상시 사용되었던 것을 위에서 확인하는 바였다.

때문에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 남아메리카는 대륙조선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한방약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분명 이 기나(幾那, 金鷄蠟, Cinchona)나무는 페루 국목(國木)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의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왕립의과대학의 교수들이나 의사들은 이 재료들을 “예수회 선교사의 가루”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무시(대륙조선의 치료법?)하였다고 했으며 1670년대에 영국에서 다시 말라리아가 유행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이 때 특효약을 가지고 나타난 사람이 바로 사교계의 돌팔이 의사 탈보(Robert Talbor, 1642-1681)였다 한다.

이 탈보 역시 대륙조선인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추리 할 수 있다.

탈보는 말라리아 특효약을 발견했다고 선전을 하였으며 가루로 된 약을 판매하였고, 그에게서 이 약을 구입해 사용한 환자들이 완치되었으며 탈보는 1672년 자신이 사용한 약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약의 제조법은 장미꽃잎 약 24g과 레몬주스 약 57g, 기나피가루를 진하게 우려내어 포도주에 탄 것이라 하였다. 때마침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에게 말라리아 증상이 나타나자 탈보가 만든 약을 복용하고 증세가 호전되었고,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황태자가 말라리아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탈보를 프랑스로 보내 황태자의 생명을 구해 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탈보는 1681년에 사망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탈보가 말라리아 치료제로 사용했던 가루가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키나(金鷄納)의 가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다.

 

1670년대에 영국에서 다시 말라리아가 유행하는 일이 발생과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나타난 전염병

1670년 현종 11년 2월: 충청도에 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80여 명이 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전염된 자가 1,300여 명에 이르다.

1670년 현종 11년 3월: 경상도에 전염병이 걸린 자가 1,000여 명이나 되다.

1670년 현종 11년 4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서로 잇다.

제주에서 전염병이 크게 일다.

1670년 현종 11년 12월: 충청도 홍산 등 읍에서 전염병이 크게 일다. 경기도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20여 명, 충청도에는 220여 명이나 되다.

 

바로 이 약이 금계랍(金鷄納)이라는 약이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이 금계랍(金鷄納)을 먼저 동양 한의학에서 먼저 설파했다고 보는데는

서양에서 17, 18세기엔 한약이라곤 디기탈리스(Digitalis : 强心劑)와 금계랍(金鷄蠟)뿐이었다고 하였고 그 당시 서양의학은 1578년에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저술한 것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고 판단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디기탈리스(digitalis, foxglove毛地黄属)=finger-like
本属植物原生于中亚和亚洲西部、非洲西北以及欧洲西部和西南
 This genus is native to western and south western Europe, western and central Asia, and northwestern Africa.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
(未分级)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未分级) 菊类植物 asterids
目: 唇形目 Lamiales
科: 车前草科 Plantaginaceae
屬: 毛地黄属 Digitalis L.

고대부터 베인 상처나 타박상에 대해서 약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1776년, 영국의 윌리엄·위더링 (William Withering)이 강심제로서의 약효를 발표한 이래,
울혈성심부전(鬱血性心衰竭, Heart failure)의 특효약으로서 부동의 자리를 얻기에 이르고 있다.
다만 맹독이 있기 때문에, 아마추어가 처방해서는 안된다.

 

1765년 청(淸)나라 조학민(趙學敏)의 저서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에 보면 ”西洋有一種樹皮 名金鷄勒以治瘧 一服卽愈 細枝中空 儼如去骨遠志 味微辛 治瘧:金鷄勒一錢, 肉桂5分, 同煎服. 壯實人金鷄勒可用二錢. 解酒:金鷄勒煎湯服”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양에 금계륵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나무껍질이 있는데 학질의 치료에 사용되며 단 일 회 복용으로 학질이 치유된다. 가는 가지의 중간은 비어있고 목심(木心)을 제거시킨 원지(遠志)와 흡사하다. 맛은 약간 매웁다. 학질치료:금계랍 1전(錢)과 육계(肉桂) 5푼(分)을 함께 끓여서 복용한다. 몸이 튼튼한 사람은 금계랍을 2 전(錢)까지 복용할 수 있다. 해주(解酒:숙취풀이):금계랍을 전탕하여 복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양(西洋)은 대서양(大西洋)을 기준으로 서쪽을 서양이라 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바로 서양 과 동양 모두를 대륙조선 또는 당시 문화주체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을 넘어 서면 대륙 끝이라는 개념이 강한 것이다.

서양을 지금 유럽으로 상식화하고 보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서양을 서양문화라고 등식을 가지고 보니 자꾸 동서가 나뉘어지고 흐트려지는 것이다.

이 서양을 지금의 서양문화가 꿰차고 들어앉은 것이다.

 

동양에서 금계랍(金鷄蠟)를 한방약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학질치료를 했다는 사실인데 이미 18세기에 실제로 동양에서 이와같이 제조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만 서양 의학은 이를 분석하여 구체화하고 현대양약으로 발달시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것이 남아메리카가 원산이라 하여 미개하게 취급하여 근원적으로의 역사를 감추어버렸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 내용이다.

실제 원주민들이 미개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상식을 초월하는 문화적으로 진보한 영역이었는지 없애버린 역사에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모든 의학이 지금의 잣대로 동양의학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방에서는 치료제로 사용되었다지만 서양인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체계화 시킨 의학적으로 볼 때 정확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오랜 기간 말라리아 치료로 이용되었던 키나가루의 효과를 분석하고 입증한 사람은 뻴르띠에(Pierre Joseph Pelletier, 1788-1842)와 까방뚜(Joseph Caventou, 1795-1877)에 의해서라 하였다.

1820년 드디어 “키나”에서 “키니네(quinine)”라는 물질을 분리하여 이 물질이 바로 말라리아에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전술 한 것처럼 훨씬 더 앞전에 키니네가 학질 치료약인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양인들이 뒤 늦게 이것을 이용하여 현대치료약을 만들었다고 하는데는 서로 알 수 없는 간격이 있으며 서양의학이 선 진보되었다는 학설은 적지 않은 모순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 부각시킨 나머지 정작 원래 동양의학에 대한 우수성이 묻혀지고 가려졌다는 사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Valle del Colca, Arequipa, Peru

 

키니네는 남미페루(Peru)인들이 쿠웨슈아(Quechua)나무에서 채취한 즙, 당분을 가미해 민간요법 해열제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조선으로 치면 감미를 가한 한방약인 셈이다.

달리면 쓴맛이 있는 것을 한방에서는 육계(肉桂) 5푼(分)을 넣어 같이 끊여 쓴맛이 덜하도록하기 때문에 복용하기 용이하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1600년대 유럽으로 전해졌고 키니네는 흰색의 알칼로이드 결정체로 쓴맛을 갖고 해열, 진통, 염증제거, 특히 말라리아의 특효약으로 1823년 파쿤지(Farr and Kunzi)란 회사가 인조 황산키니네(Quinine Sulfate)를 합성 제조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키니네보다 60배나 강한 효과를 지니는 파마퀸(pamaquine)이라는 물질을 찾아낼 수 있었고 다음해에 임상실험을 실시한 후 1927년에 플라스모퀸(Plasmoquine)이라는 상품명으로 학질 치료약을 발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서양의학의 발전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의학에 대해서 남은 것은 동의보감이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이러한 조치로 서양의학에 의해 태어난 서양금계랍, 황산키니네(Quinine Sulfate)가 앞서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과 1883년 왕실수요 도자기를 만들어 진상해 온 사옹원 분원의 경영인 공인(貢人) 지규식(池圭植)하재일기를 보면 비로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고종 28년(1891)부터 1911년까지 20여 년간의 개인 기록인데 지규식이가 학질 때문에 금계랍(金鷄納)을 구입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896) 12월 10일정동(貞洞)에 가서 약원(藥院)의 금계랍(金鷄納) 한 병을 샀는데

(1897) 5월 12일 유초사(柳蕉史) 내자(內子)가 학질에 걸려 금계랍(金鷄納) 2푼쭝을 샀다.

(1897) 8월 24일 내가 가래와 기침이 있어 금계랍(金鷄納) 1푼쭝을 시험 삼아 복용하였다.

는 기록이다.

 

분명 위 지규식의 일기에 나타난 시기 1896-1897년은 조선에 학질 즉 말라리아가 대유행을 했기 때문에 치료나 예방차원에서 금계랍(金鷄納)을 샀다는 사실이다.

 

Beginning in south-west China in 1873, the disease reached Canton in 1894 to kill more people than did the Great Plague of London in 1665.

(1873년 중국남서쪽에서부터 1894년 광동에 도달한 이 질병은 1665년 런던의 그레이트 흑사병(Great Plague)이 발생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

 

위 자료를 통해 보면 1896-1897년 사이에 학질이 창궐한 곳이 바로 인도 북부, 뱅갈지방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던 시기인 것이다. 

이 시기 때인 1896~1902년에는 열대지방 전역과 중국 북부에 계절풍이 불지 않는 기상이변이 발생하였고 이때 말라리아와 페스트, 이질, 천연두, 콜레라 등 전염병이 열대지방과 아열대지방에 창궐해 이미 기근으로 약해진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기상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열대 동태평양 지역의 급속한 가온(加溫)현상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북동부 전역에서 계절풍 약화와 가뭄을 발생시키는데 이를 엘니뇨현상이라 한다. 반대로 동태평양이 비정상적으로 냉각되면 이 현상이 역전돼 '원격 연계'된 지역들에서 비정상적인 강수현상과 홍수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라니냐현상이라 한다. 인도양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서 엘니뇨와 라니냐 두 현상이 연계돼 차례로 반복되는 시소 현상을 엘니뇨 남방진동(El Nino-Southern Oscillation),간단히 줄여서 ENSO라 하는데 19세기 후반 일련의 사태는 최근 500년 중 가장 강력했던 ENSO사태의 결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 때 열대지방과 아열대지방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것이다.

그곳은 분명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이제 제중원(濟衆院)에서 판 금계랍(金鷄納)에 대해서 알아보자.

1883년에 제중원에서 이 금계랍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판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 금계랍(金鷄納)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수입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당시 조선은 미국 가까이에 조선이 존재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사실은 본 블로그에서 여러가지로 증명해 가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 한반도 학질로 넘어가면

일부자료에서 보면 한반도에서는 1970년대 말에 가서야 비로소 토착성(土着性) 말라리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였다.

마치 한방이 아닌 양약치료에 의해서 병이 사라진 것처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선은 늘 학질 말라리아에 노출되어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이며 그에 비례하여 상당한 의료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을 위에서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토착성이란 단어와 풍토병이란 단어는 말라리아로 하여금 실제로 역사 찾기하는데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귀중한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에서 발병된 말라리아 학질은 다 토착성이고 풍토병(風土病)이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 조선은 대륙조선이고 열대지역과 아열대지역을 포괄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해 주는 있는 것이다.

1883년 조선에 처음 입국한 미국 의사 앨런도 말라리아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는 것은 조선이 토착과 풍토병이 늘 상존하였기 때문에 경고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일본 역시 기록을 보면 한때 토착 말라리아가 존재했지만 현재는 멸종되었다 하고 있다.

일본 뇌염 또한 이치적으로 마찬가지다.

일본 열도역시 기존 토착적인 기후 영역에서 지금 열도로 옮겨진 것이고 근원적인 역사 문제에서도 지금의 열도가 분명 아니란 것을 알게 하는 것들이 틀림이 없다.

 

세계 말라리아 발생 일지

Death toll

Region

Years

Name

Species

 

South

America

1600–1650

 

학질

 

Netherlands

1829

Groningen epidemic

학질

 

Egypt

1942–1944

 

학질

 

India

2006

 

학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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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1650 조선시대 학질관련 발생일지

1603

선조 36년

2월

전라도 나주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간혹 한 집안 모두가 몰살하다.

1604

선조 37년

1월

전라도 영암, 부안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이 지난 가을 이후부터 전염성 열병으로 죽은 자가 많다.

1612

광해 4년

1월

함경도 기근의 뒤 전염성 열병이 다시 치열하고 경흥 등 읍에 사망자가 줄을 잇다.

1612

광해 4년

11월

함경도에 전염성 열병이 가을 이후로 치열해져 점점 만연하니 사상자가 많다. 북에서 오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각 읍 여염집의 전염병 환자의수가 수백, 수천에 이른다고 전하다.

1612

광해 4년

12월

강원도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여 어느 곳이나 모두 그렇다. 목하 전염성 열병이 함경도, 강원도뿐만 아니라 서울과 각 도가 다 치열하다. 함경도가 특히 심해 돌림병 사망자가 2,900여 명에 이르다.

1613

광해 5년

9월

전염병에 단을 쌓고 제(祭)를 빌었으나 병기(病氣)가 쉬지 않아 다시 제를 지내다.

1614

광해 6년

4월

근자 도성 내외에 살인을 하고 쓸개를 탈취하는 도적이 자행하다. 창질 나병환자들에게 좋다는 소문으로...

1620

광해12년

3월

만포 등지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병(士兵)의 사망자가 10여 명에 이르다.

1620

광해12년

12월

일기가 순조롭지 않고 성안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여제사를 다시 설치케 하다

1621

광해13년

1월

성안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중신을 보내 종묘사직과 명산대천에 경건하게 기도케 하다. 죄인들의 구료 일을 착실하게 이행토록 지시하다. 전염성 열병이 여전히 치열하므로 다시 중신을 보내 종묘사직과 산천에 기도케 하다.

1621

광해13년

3월

근래에 돌림병이 다시 치열하여 급히 기도케 하고, 성안과 궐내의 돌림병자들을 일일이 동서활인서로 이송케하다. 경덕궁(경복궁과 덕수궁) 근처의 병자(病者) 역시 이송시키다.

1625

인조 3년

1월

전라도 장수현에서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한 읍에 사망자가 200여 명이나 되다. 변방에 주둔하는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죽은 자가 줄을 잇다.

1625

인조 3년

3월

평안도 창성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병졸들이 맣이 죽다.

충청도 충주, 홍주, 보령, 황간 등지에도 전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70여 명이 되다.

1627

인조 5년

3월

각 진의 군중(軍中)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627

인조 5년

5월

각 도에 염병이 크게 돌아 열 명에 한 명도 일어나지 못하다.

1627

인조 5년

11월

안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638

인조 16년

6월

함경도 경성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900여명에 이르다.

1638

인조 16년

9월

함경도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4,300여 명이나 되다.

1639

인조 17년

1월

공주에 전염성 열병을 사망한 자가 108명이나 되다.

1640

인조 18년

12월

경상도 울산, 봉화 등지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다. 향과 축문을 보내 제단을 설치하고 기도하다.

1642

인조 20년

12월

서울 내외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다.

1643

인조 21년

4월

이때 동활인서에 병자 483명, 서활인서에 환자 569명, 합계 1,052명이다. 그리고 여염의 환자가 날로 늘다.

1643

인조 21년

10월

금주(錦州) 변방의 병졸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자가 서로 잇다.

1643

인조 21년

11월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고, 큰 질병으로 죽은 자가 많다.

1643

인조 21년

12월

전라도에 전염성 열병이 매우 치열하여 사망자가 만여명에 달하다.

1644

인조 22년

1월

강원도내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10집에 9명은 아프고, 죽은 자를 미처 매장하지 못할 정도이다

1644

인조 22년

2월

8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함경도 자성에 특히 치열하여 사람이 많이 죽은지라 문묘(文廟)에 친히 제사를 지내다. 제사를 마치다 전염병도 잠잠해지다. 또한 대황(大黃)은 전염병 열병에 있어 참으로 좋은 대중 양약(良藥)이다.

1644

인조 22년

11월

경상도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645

인조 23년

2월

향과 축문을 지리산의 금성산 남해당에 보내 돌림병 제사를 지내다. 전라도에 지난겨울부터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이 잇달아서 도내에 병에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향과 축문을 강원도에 보내 제단을 설치하고, 어곽(魚藿: 해산물)의 세금을 감면하다.

1645

인조 23년

3월

경성에 돌림병이 계속 번져 동서활인서의 출막(出幕: 집안사람들에게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움막을 지어 집밖에서 치료함) 전염병자 696명 중에 사망자가 8명, 영차자(永差者) 271명, 현재 입원중인 자는 413명인데 이들 중 대부분은 사대부집의 종들이다.

1645

인조 23년

4월

황해도에 올 봄이래 각 읍의 병사자(病死者)가 큰 읍은 100여명, 작은 읍은 6, 70명에 이르고, 굶주리고 병든 자는 헤아일 수 없을 정도다. 평안도의 전염병 사망자는 1,400여 명에 이르다.

1645

인조 23년

7월

황해도에 전염병 사망자가 10명에 이르다.

1645

인조 23년

11월

이때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다.

1647

인조 25년

3월

동서활인서의 병자 수가 늘 수백 명에 이르다.

1648

인조 26년

1월

함경도에 큰 질병이 돌다.

1648

인조 26년

3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다.

1650

효종 1년

1월

황해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650

효종 1년

2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애매한 것은 그냥 전염성 열병이라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이병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남아메리카에서 학질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시기이기 때문에 전염성 열병이라는 단어가 학질과 겹쳐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스쳐 지나치기에는 솔직히 아쉬운 점이 있다.

그래서 정리하여 올려놓았다.

물론 학질이라고 분명히 기록하지 않았는데도 전염성 열병과 학질을 같다하여 비교하는 것은 경솔하지 않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 할 수 있지만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일제에 의해 고쳐지거나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근세기에 서양세력들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역사가 동양위주역사에서 서양위주 역사로 둔갑시켰다고 할 때 적어도 이렇게 비교하는 것도 엉뚱하지만 않다는 결론이다.

위 전염성 열병이라는 병명이 집중적으로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남아에리카(South America)에서 1600–1650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학질이 발생하던 시기와 유럽에서도 말라리아가 유행하던 시기가 함께 겹쳐지고 있는 것을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같은 병의 일지라고 하고 올려놓았다.

판단은 각자가 할일지만 대륙조선이란 존재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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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말라리아 병명을 지칭한 조선일지

 

중종 51권, 19년(1524) 8월 14일(병오)

영산군 이전이 앓자 의원을 보내 구완케 하다

○傳曰: “聞, 寧山君恮以似瘧証, 病勢頗重, 齎適藥, 遣良醫救之可也。 且其道監司處, 食物備給事, 亦下書可也。”

전교하였다.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恮)이 학질 비슷한 병으로 증세가 자못 중하니, 맞는 약을 주고 양의(良醫)를 보내서 구완하도록 하라. 또 그 도의 감사(監司)에게 먹을 것을 장만하여 주라는 것도 하서(下書)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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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9권, 4년(1549) 4월 23일(임술)

이홍남이 공초하다

그 뒤에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으므로 두세 번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역시 답이 없었습니다. 신이 금년 2월 스무날께 학질에 걸려 그 고통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러다가는 상달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정유길(鄭惟吉) 등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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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0권, 5년(1550) 11월 10일(기해)

황달 학질 치료방을 승정원에 내려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己亥/以黃疸瘧疾治療方, 下于政院曰: “見此方文, 治法簡要。 各道州府郡縣、僉使、萬戶處, 已命依啓印頒矣。 然窮村僻巷人, 不得徧觀, 令監司及州府巨邑, 印給境內人民, 則其於治療之方, 多有裨益矣。”

황달 학질 치료방(黃疸瘧疾治療方)을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이 방문(方文)을 보니 치료법이 간단 명료하다. 각도 주부 군현(州府郡縣) 및 첨사(僉使)·만호(萬戶)에게 이미 아뢴 바에 따라 인출(印出)하여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의 백성들은 두루 구해 보지 못할 것이니 감사 및 주부(州府) 등 큰 고을에서 인출하게 하여 경내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 치료 방법에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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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명종 5년 11월: 황달, 학질 치료방을 각 도 주, 부, 군, 현의 첨사, 만호 등에 인쇄케 하여 경내의 인민들에게 나눠주게 하다.

1551년 명종 6년 2월: 경기도 고양, 안산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3년 명종 8년 12월: 전라도 두도에 꽃이 만발하고, 양맥(보리와 밀)의 이삭이 패고, 오얏(자두)과 매화가 열매를 맺다.

황달, 학질 전염병 사망자가 전국에 걸쳐 심히 많다.

1596년 선조 29년 1월: 전염성 열병이 잠들고, 대신 학질이 치열하다. 이를 당학이라 불렀는데 어린이와 노인이 많이 죽다.

1596년 선조 29년 2월: 영남 지방에 돌림병과 학질이 크게 치열하여 10집 중 7, 8집에 아픈 자가 있으며, 겨울 이래 죽은 자가 많다.

1599년 선조 32년 4월: 강원도 평해에 서자(庶子) 안응진이 그 부모를 일찍 여위고, 당학을 앓는지 2년이나 되어 숨이 끊어질 듯 약해지다. 응준이 7살에 자기 왼손 무명지 한마디를 스스로 잘라 피를 받아 약에 섞어 바치니 어머니의 병이 즉시 쾌유하였고, 그 후에 다시 다음 마디를 잘라 술에 타서 어머니의 병에 바치니 또한 그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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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학질 치료에 쓰였다고 하는 남미 원산지인 나무

기나(幾那)나무 (金鷄蠟, Cinchona)기나피

 

 

기나나무는 꼭두서니과의 교목 또는 관목으로 키나라고도 하며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에서 볼리비아에 걸쳐 약 25종이 자생한다. 이 나무는 상록수이며 열대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꽃은 라일락을 닮았으며 자주색, 녹색, 흰색 등을 띤다. 나무껍질을 생약으로 사용하는데, 건위·강장제 및 말라리아의 치료약인 키니네, 신코닌(Cinchona)의 원료가 된다.

금계랍(金鷄蠟)나무라고도 한다.

상록 교목 또는 관목인데 잎은 마주나며 두텁고 잎자루가 있다.

꽃은 방사대칭이며 원추꽃차례로 피며 화관(花冠)은 깔때기 모양으로 길이6~17mm이다.

씨방은 하위로 2실(室)이고 열매는 양 끝이 뾰족한 원기둥으로 길이 10~35mm이며 갈라져서 날개가 달린 종자가 나온다.

 

나무껍질이 붉은 붉은기나나무(C. succirubra)는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와 페루의 안데스산맥 동쪽 해발고도 1,200∼3,600m의 고원지 원산으로 높이 25m에 달한다. 잎은 달걀모양 또는 타원형이며 톱니는 없다. 7월경 담홍자색 꽃이 가지 끝에 핀다. 나무껍질에 알칼로이드의 일종인 키니네를 가장 많이 함유하여 열대지역에서 많이 재배한다. 볼리비아 기나나무(C. ledgeriana)는 높이 4~10m이고, 가지에 털이 있으며 나무껍질이 황색이고 화관(花冠)은 황백색이며 향기가 강하다.

 

잉카족(族)은 옛날부터 학질에 치료 효과를 알고 있었으나, 서양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1865년 이후 자바의 남부고지에서 대규모적 재배에 성공하면서부터이며 네덜란드는 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고 있다.

그 후 수마트라·인도·콜롬비아·아프리카 등지에서 재배되었다.

 

키니네 함량이 높은 볼리비아 기나나무의 가지를 접수(珉穗)로 하여 강건하고 생장이 빠른 본종의 대목에 접목한 잡종(C. hybrida)이 최우량 품종이다. 기나나무의 껍질은 고미건위제(苦味健胃劑)·신경강장제로 쓰이고, 이 껍질로 제제한 황산키니네는 말라리아의 치료제·해열제·진통촉진제 등으로 쓰인다.[네이버]

 

기나(幾那)나무; 기나피

 

金鸡納树(学名:Cinchona,又稱作雞納樹、金雞勒、奎寧樹)為茜草科的一屬,約包含25種的物種,树皮和根皮是提取奎寧和奎尼丁的重要工業原料

native to tropical South America.

原産於南美洲,最初在安第斯山脈東面海拔900至2700米的山谷以內所被發現。

到了19世紀中期,金雞納樹被移植至東南亞一帶栽培,而印尼為最早引種的國家。1933年在中國廣東、雲南以及臺灣地區也開始有引種。

 

                                       [Cinchona tree by Theodor Zwinger, 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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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學分類

域: 真核域 Eukarya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龍膽目 Gentianales

科: 茜草科 Rubiaceae

屬: 金鸡納屬 Cinchona L. 1753

約25 種;另見本文

 

西印度苦香樹

 

Cinchona officinalis (Quinine Bark) is a tree native to Amazon Rainforest vegetation.

Scientific classification

 

 

 

                                             [Quinine Bark]

 

Kingdom: Plantae

Division: Magnoliophyta

Class: Magnoliopsida

Order: Gentianales

Family: Rubiaceae

Genus: Cinchona

Species: C. officinalis

Binomial name

Cinchona officinalisL., 1753

 

This plant, often thought to be used for the production of quinine, which is an anti-fever agent especially useful in the prevention and treatment of mal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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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chona antioquiae L.Andersson (1998).

Cinchona asperifolia Wedd. (1848).

Cinchona barbacoensis H.Karst. (1860).

Cinchona × boliviana Wedd. (1848).

Cinchona calisaya Wedd. (1848).

Cinchona capuli L.Andersson (1994).

Cinchona fruticosa L.Andersson (1998).

Cinchona glandulifera Ruiz & Pav. (1802).

Cinchona hirsuta Ruiz & Pav. (1799).

Cinchona krauseana L.Andersson (1998).

Cinchona lancifolia Mutis (1793).

Cinchona lucumifolia Pav. ex Lindl. (1838).

Cinchona macrocalyx Pav. ex DC. (1829).

Cinchona micrantha Ruiz & Pav. (1799).

Cinchona mutisii Lamb. (1821).

Cinchona nitida Ruiz & Pav. (1799).

Cinchona officinalis L. (1753): Quinine Bark

Cinchona parabolica Pav. in J.E.Howard (1859).

Cinchona pitayensis (Wedd.) Wedd. (1849).

Cinchona pubescens Vahl (1790) : Quinine Tree

Cinchona pyrifolia L.Andersson (1998).

Cinchona rugosa Pav. in J.E.Howard (1859).

Cinchona scrobiculata Humb. & Bonpl. (1808).

Cinchona villosa Pav. ex Lindl.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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