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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홍역(唐紅疫)은 왜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와 연결 되는가?
글쓴이:한부울
역사 찾기에 나선 이후 나타나는 놀라운 형상에 머리속은 혼란 그 자체다.
여기저기 나타나는 형상은 마치 대륙조선의 실체가 전세계를 가름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리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가로 막혀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왕조 조선의 역사와 대한제국의 역사의 실제영역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음이 서서히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본 블로그에서 한반도 조선이나 한반도 대한제국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판단하고 들어 선 길이었다지만 솔직히 들어 갈수록 점점 증폭되는 의문과 혼란은 걷 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갑갑한 형상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조선과 대한제국을 포함한 고려(corea)제국이 실체가 어느 정도이었기에 이렇듯 역사가 파면 팔수록 깊이가 깊어지고 넓이를 짐작 할 수 없도록 넓어지는 형상인가 하는 점에서 할 말조차 잃어버릴지경까지 왔다.
늘 이러한 의문으로 시달리는 나 자신을 채찍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근대사만 가지고 해석하고 이해하기란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동양역사보다 서양역사가 분명 우위에 있어야 하는 전제가 있어 만들어진 근대사라면 그 무엇을 감추고 있을 것인데 그 무엇을 알지 않으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비밀스러움이 뭉쳐 있어 수세미 같은 실타래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근대사가 감추고 있는 역사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감추고 있는 것은 분명 그들이 말하는 오리엔탈 문화인데 즉 오리엔탈문화란 어원자체도 불분명하지만 이 오리엔탈이 세계문화전부를 포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혼란에 나래를 접고 현실로 돌아가보게 되면 시초를 알 수 없는 암담한 우리의 역사가 있다.
우리민족의 커다란 핸디캡은 남북 분단국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군사적 대치상황에 대한 극복 문제이고 그로인한 정국불안이라고 하는 정치적 딜레마에 있다.
이것은 남한만의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그에 대한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막고 독재자가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갈망에 철저하게 이반되는 고통이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자국의 국익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강대국들이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이 핸디캡을 이용하고 때로는 마구 흔들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고 대한민국 나아가서 민족이 자칫 잘못하면 일시에 공멸해 버릴 위험성도 있기 때문에 암담하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단이란 약점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하여 강대국들이 인정하는 통일론을 거부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분단은 근원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내다보고 만든 틀이라고 할 수 있고 당시 강대국들의 무단한 횡포였다는 사실에서 무엇이 그렇게 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중대한 근원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역사찾기에 결정판이라 할 수있다.
그리고 혼란 스러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이데올로기 상황을 전제하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유독 한반도에 선을 그어 분단을 만들 필요까지야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은 제2차세계대전 일본의 야망에 의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태동이라면 일본이 국제질서를 반하여 태평양전쟁까지 도발한 도발 당사국으로서 독일처럼 마땅히 제제를 당해야 했다면 바로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사실에 맞는 이야기다.
그것이 국제질서 상 정도이고 정의의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도 죄없는 한반도에 선을 그어 분단을 만들었다.
이것은 인류가 가치를 인정하는 역사에서 크게 잘못된 역사란 사실이다.
아래 자료는 한반도가 분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사실대로 수집한 것이다.
분단이 될 수밖에 없는 과정
제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901-1909)는 1905년 7월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를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와 비밀 회담을 가지고 가츠라-태프트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체결하는데 여기에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통치'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분단의 태생적으로 가츠라태프트 밀약에서 나타나는 근원적인 불리함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한국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재임1933-1945)는 미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으로서 국무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거의 독단적으로 외교 업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그는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직후 일본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장개석과 동석하기를 기피한 스탈린을 위해 테헤란에서 미, 영, 소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공식 선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약속한 대가로 사할린 섬과 북방 4개 섬을 얻게 된다. 당시 회담을 기록한 회고록 등에 따르면 한반도 문제는 잠깐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루즈벨트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성공사례로 제시하며 한반도에도 3-4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다.
위 자료의 글에서도 분명 가츠라태프트의 밀약을 따른 것이다.
1945년 6월 국무장관 대리가 주미 한국대표부 이승만에게 쓴 전보내용
생략....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기타 한국인 기구들은 미국으로부터 통치당국으로 인정받기에 적합한 자격들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임시정부는 한국의 어떠한 일부에 대해서도 행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오늘날의 한국 민중을 대표한다고 간주될 수도 없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심지어 망명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극소수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위 전보내용를 보면 이미 결정은 나와 있는 상태에서 독립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인명이 고귀하게 희생되었지만 다 허수고 일뿐이고 정해진대로 진행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분단이었음이 알게 하는 내용이다.
당시 대한제국 임시정부는 한반도를 근거로 한 전쟁참여국으로서 당당하게 인정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원칙적인 미국의 생각은 단호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임시정부가 한반도 아닌 다른 지역을 통치했다고 하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또 임시정부란 한반도에서 넘어간 인사가 아닌 한반도와 전혀 관계설정을 애초부터 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미국입장에서 볼 때 임시정부는 한국 민중을 대표한다고 간주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기존 임시정부의 역사정체성은 한반도로 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미국과 가깝다고 생각되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마찬가지로 취급을 당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세계질서를 좌지 우지 하던 미국 실권자들에게서 나온 발언이라고 볼 때 그와 사실에서 무게가 실리는 것이고 또한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시정부에 귀속된 모든 인적자원은 결코 한반도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때문에 처리에 골몰하던 미국이 이러한 논리를 세워 한반도 지배권을 한정시켜버린 것이다.
이에 대한 임시정부인사들의 항의내용은 전혀 없다.
미국의 이러한 주장이 부당하였다면 마땅히 항의하고도 남았을 것인데 임시정부 모든 구성원들은 이와같은 사실을 순수히 받아들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역사주체가 한반도를 근거하였다는 사실은 실제와 다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도사관이 아니라 대륙역사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임시정부의 주체들은 한반도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었던가?
중국대륙 또는 아메리카대륙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임시정부인사들은 당시 무주공산으로 있던 대륙전쟁 세력간 충돌에서 밀렸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이런 결정을 내린 시기가 1945년도 라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다.
어쩌면 일본도 이때 어디를 주축으로 하던 정치적 주체가 비로소 열도로 쫓겨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1945년 7월 16일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미국 참모 본부는 1946년 후반 경에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했다. 그 과정에서 100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생겨날 것으로 예측하고 소련군의 참전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소련의 대공세로 한때 무적의 관동군이라 불리던 만주 지방의 일본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로 소련 극동군 25군 주력이 만주를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군대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들어왔고 9일에는 하산호(張鼓峰)로부터 경흥(慶興), 청학(靑鶴), 아오지(阿吾地)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10일 경흥을 점령하고 웅기(雄基), 나진(羅津) 방향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10일까지 바다와 하늘에서 웅기, 나진, 청진(淸津)을 공격하고 있었던 태평양 함대는 작전계획을 변경해 11일 웅기, 12일 나진, 13일 청진에 상륙하여 각각의 도시를 점령했다. 16일에는 원산항에 상륙하였고 그 후 23일에 개성(開城), 24일에 평양(平壤), 27일에 신의주(新義州) 등 소련군선견대가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한편 10일경 일본측이 천황제 인정을 조건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하자 미국은 즉시 항복 준비 작업에 들어가 10일 밤 국무성과 육군성, 해군성 실무자들이 모여 동남아 일본군은 영국, 중국내 일본군은 중국, 소련과 접전 중인 일본군은 소련, 일본 본토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하도록 결정하면서 한반도에서는 38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군에, 이남은 미군에 항복한다는 지침을 결정했다. 그 안을 제시한 것은 육군성의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대령이었다고 한다.
위 내용을 보면 마치 일본 열도가 아닌 한반도가 전쟁의 원인인 것처럼 처리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반도처리문제에 서양제국들이 골치아프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지들이 하고 애많은 한반도를 못 갈라서 안달이 난 형국이다.
때문에 소련은 전쟁 도발국인 일본 본토 가운데를 잘라 분단 할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미국 측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다는 후문도 있다.
왜 이런 부합리한 처분을 우리 민족이 받아야 했는가?
우리가 당시 힘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는 이에 대한 복잡한 메카니즘을 풀 수가 없다.
그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원칙 그 무엇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소련의 요구를 묵살한 미국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등 그들끼리 짜고 쳤던 고스톱 패는 서양역사를 만들고 지키고저한 발효(?)였다고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강대국 특히 미국의 조치는 횡포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역사라고 해보았자 우물 안에 개구리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형편에서 누구에게 당해면 당했지 어떤 국가도 스스로 침범할 수 없는 취약한 역사가 그들이 만든 것이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순종의 역사만 가진 조선을 아니면 대한제국을 다시는 제나라 지킬힘도 부족한 상태에서 근원적으로 힘도 못쓰게 허리를 갈라놓고 분단을 만들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이나 일본처럼 국제질서를 감히 건드리고 깨뜨린 역사 행위 자체가 전혀 없었는데 일방적인 불공평한 처분에 대한 의문은 쉽게 가시지를 않는 일인 것이다.
이런 분단의 고통의 예는 동서로 분단을 당한 경험이 있었던 독일의 경우를 보면 확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은 책임이 분명히 있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중대한 인류 파괴적인 범법행위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 하면 우리 역시 그들이 보았을 때 과거 독일과 같은 위치에 있었거나 국제질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반도에 갇혀 허구한 날 이리저리 치이기만 한 반도역사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부터 혼란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든 반도역사가 아닌 진짜 다른역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 대한제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사라진 조선은 무엇으로 대칭되었을까?
좀 오버한다면 조선이 갑자기 영국으로 얼굴이 둔갑한 것을 아닐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다.
조선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그 공백을 영국이란 국명으로 이식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추측이 오버인가?
정말 그렇다면 독일보다, 일본보다 더 큰 세계질서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되는 점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때문에 이런 모진 분단의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좁은 한반도를 갈라 놓는 것도 부족하여 같은 민족형제끼리 적이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쌍방간 5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상이 되는 처절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란 고통의 전쟁까지 경험도록 방치한 것이라고 추리 할 수 있다.
"The corea" 란 존재를 아주 짓이겨 놓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 서양세력들은 마치 구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며 어쩌면 최악에 경우 corea란 종족이 다 멸족해도 괜찮다고 보고 역사적으로 단절시키고자 한 것이락 볼 수 있고 어떤 형태로던간에 그들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보복차원에서 처절하게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무엇이 실체로 존재한 것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일까?
분명 우리가 모르는 대제국의 역사 흔적이고 기억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Asiatic History china, corea, japan.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
Modern cho-sen, 1392-1881 AD
New York: Phillips & Hunt. 1882
Rev, WM. Elliot Griffis(1843-1928)was an American orientalist, Congregational minister, lecturer, and prolific author.
그러나 이제 그러한 기억과 흔적을 그들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내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저히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을 그들이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온 것을 돌이켜 볼 때 이러한 역사가 정말 그들이 만든 틀이 아라면 역사찾기는 실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모르던 경악 스러운 일까지 파헤쳐질 것이란 예언을 감히 할 수 있다.
실로 놀라 자빠질 이야기가 널려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급할 것도 없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풀어 나갈 것이다.
위의 "유나이트 고려"란 메모는 물리학자이며 저술가 이고 동양학자((orientalist)이기도한 미국인 윌리엄·엘리엇·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가 발표한 것인데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네델란드 개혁파 교회계 대학인 뉴 저지주의 라트가스대학을 졸업하고 1871년 일본에 건너가 물리학 교사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고려 즉 코리아를 아시아역사란 책에서 "유나이티드 코리아"라고 분명 기술하였다는 점이다.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
Modern cho-sen, 1392-1881 AD
즉 고려는 연합제국이고 현대조선 즉 대륙조선은 1881년에 망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1881년은 무수히 많은 흔적을 안고 있다.
바로 대륙조선이 분리되어 조각조각 나게 하면서 그들이 본격적으로 그들 식으로 통합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1881년이라는 사실이다.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의문의 해답 열쇠가 첫번째로 구체화되기는 유아기 전염병인 홍역을 통해 아래에 나타난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 영국이 19세기 초부터 점령한 영역을 보면 그곳은 분명 대륙조선의 영역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대륙조선이 분리되는 형상은 근세기에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각 자치주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 형상인데 이때 대륙조선의 영역이 갈기갈기 째지고 조각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고 대륙조선의 영역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부(富, Rich)를 창조하고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금, 은, 보석 또는 장사로 이윤을 챙길 수 있는 향료, 기타 지하천연자원 및 식물자원 등이 풍부한 지역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그들끼리 영역싸움을 하였고 서로치고 받고 야단을 쳐 된 것이 바로 세계1차(1914.7.28-1918.11.11)와 2차 대전(1939.9.1-1945.9.2)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대제국인 대륙조선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국가로 서로 자율적으로 생성하는 조건의 좌익이 있을 수 있고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우익이 존재한 상태에서 전쟁을 한 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2차 대전은 지들끼리의 싸움인데 누가 더 큰 영역을 확보하는가에 대한 게임의 전쟁이라고 보면 맞다.
기존 역사에서 철저하게 비주류격인 좌익이 신군사력을 바탕으로 득세하였고 결국 그들이 세상을 차지하여 좌익이 아닌 우익으로 그리고 비주류가 아닌 주류로 행세한 사실이 현재 서양우위의 역사 근대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답이다.
대륙조선의 감추어지고 사라진 영광은 땅에 묻혀버리고 작은 한반도만을 끌어안고 사는 한민족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는 서럽고 한많고 차가운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에게 과거 역사로 따져 보아 심대한 위험이 될 수밖에 없는 민족이었기에 철저하게 흔적이나 기억을 없애고 영역을 줄이려 한 것이고 영토를 한정시켜 그곳에서 허접하고 별볼일없는 역사 터전을 만든 것처럼 꾸밀 필요가 분명하게 있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할을 서세 하수인 노예 출신 일제가 건방지게 담당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역할을 일선에서 대륙조선을 상대로 완벽하게 임무수행한 일제가 동등한 입장에서 영국과 같은 수준의 영역을 고집함으로서 미국과 충돌 할 수밖에 없었고 태평양전쟁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대륙조선에게 내린 형벌은 과거 인류문명을 발전시키고 인류역사를 창달하고 소유하고 지배한 원죄에 대한 처벌인 것이다.
때문에 이런 식의 모진 형국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 찾기에서 들어나는 이 놀라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홍역으로 들어가 보자.
홍역(紅疫, 麻疹.measles)은 파라믹소 바이러스(paramixovirus)과에 속하는 홍역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전염성이 매우 높은 질환이다. 주로 면역되지 않은 학령기 이전 소아에 호발하며, 비말(droplet)를 통해 호흡기로 감염된다.
홍역은 동물 전파 매개체가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감염된다.
과거에는 봄. 가을로 흔한 질환이었으나, 요즈음은 많이 감소하였고 계절에 관계없이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감염된 환자와 직접 접촉이나 비인두 분비물(nasopharyngeal secretion)에 오염된 물품의 매개로 전파되지만, 드물게는 공기매개로 전파(airborne transmission)옮길 가능성도 있다.
홍역 바이러스는 호흡기도(Respiratory tract)를 통하여 침입하며, 기도점막(粘膜)에 정착해서 증식하고 태반을 통과하기 때문에 태아가 감염되어 선천성 홍역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홍역은 증세의 경중에 관계없이 한 번 걸리면 강한 면역이 생기므로 두 번 다시 걸리는 일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생후 3개월까지의 아기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면역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홍역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 면역체가 감소하여 7개월 이후에는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생후 6개월까지는 걸릴 가능성이 적어 걸리더라도 경증이며 반면 7개월부터는 걸리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유아기에 걸리지만, 최근에는 생백신의 보급으로 홍역환자가 감소했기 때문에 소아기에 감염하지 않고 성장하여 성인이 된 뒤에 감염되거나 발병되는 사람도 있는 편이다.
이상 홍역의 설명이다.
이 홍역이 북미 미국 원주민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Smallpox and Measles and their effect on the Native American population in North America.
북미에서 미국 원주민에 천연두와 홍역이 근원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5년(1729)까지 홍역기록이 남아 있다.
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홍역을 가지고 아래 상황을 따져 보고자 하는데 실로 놀라운 사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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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s a list of major epidemics]
Measles (1530-1531) - Mexico, Peru in Epidemics/Pan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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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xico, Peru |
1530–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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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紅疫) |
위 메이저급 전염병 리스트를 보면 1530년–1531년 사이에 홍역이 멕시코와 페루에 유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같은 시기에 홍역기록이 있는데 멕시코, 페루보다 먼저다.
조선에서 홍역이 발생하고 난 후 7년 후에 중미, 남미에서 나타난 것이다.
중종 18년 계미(1523,가정 2)
4월25일 (병신)
세자 이피소의 입직 인원에게 상을 내리다
○傳于政院曰: “世子移避所入直人員賞賜事, 其依乙亥年例【世子斑疹時。】施行。” 於是, 賜賓客任由謙, 醫員河宗海各熟馬一匹, 其餘, 賜別造弓, 或木緜有差。
정원에 전교하기를,
“세자(世子) 이피소(移避所)의 입직(入直) 인원(人員)을 상사(賞賜)하는 일은 을해년의 예【세자가 마진(麻疹)을 앓을 때였다.】에 의해 시행하라.”
하였다. 그래서 빈객(賓客) 임유겸(任由謙)·의원(醫員) 하종해(河宗海)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내리고, 나머지에게는 별조궁(別造弓)이나 혹은 목면(木綿)을 차등 있게 내렸다.
위 기록을 보면 중종(中宗, 1488-1544, 재위:1506-1544)의 세자 휘는 호(峼), 자는 천윤(天胤)이 홍역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자는 조선의 제12대 임금인 인종(仁宗, 1515-1545, 재위1544-1545)인데 중종과 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다.
1520년(중종 15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11월에 즉위했으나 지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지 8개월 만에 승하했던 임금이다.
이 분이 세자 책봉이 되고 난 후 3년 되는 해(1523년)에 홍역인 마진(麻疹)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 중요한 전염병 발생 리스트에 나타나는 멕시코(Mexico)와 페루(Peru)홍역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추리하면 바다가 아닌 지상가까이에 조선이 있어 발병하여 육로 따라 전파 전염되었다고 할 수 있고 멕시코를 거쳐 페루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분명히 왕실의 세자가 홍역을 앓을 정도이라면 조선사회 특히 임금이 있는 서울한성에는 홍역이 들끓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자도 견디지 못하고 전염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쨌던 조선 임금이 있는 한성에 홍역이 유행했다는 가설이 생기며 그것이 멕시코와 페루로 들어갔다고 예상 할 수 있는 것이다.
[This article is a list of major epi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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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Colonies |
1657 |
Boston, Massachusetts |
홍역(紅疫) |
[This article is a list of major epi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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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Colonies |
1687 |
Boston, Massachusetts |
홍역(紅疫) |
또 위 전염병 세계 발생리스트를 보면 1657년과 30년 후인 1687년에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Thirteen Colonies)에 홍역이 대유행했다는 기록이다.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 1776)이라 함은 북아메리카에 있던 영국의 옛 식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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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세계 식민지 지도]
이곳에서 1776년 독립 선언하고 신생국가 미국을 세웠다.
캐나다는 노바스코샤(Nova Scotia)에 양키(Yankee)계 인구가 더 많았음에도 영국에 잔류했다고 한다.
무엇때문일까?
허접한 영국 역사를 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다.
동 플로리다와 서 플로리다의 식민지도 영국 측에 남았지만 1783년 에스파냐에 양도되었다고 하며 뉴펀들랜드(Newfoundland)는 1949년까지 캐나다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영국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영국이 무엇이 길래?
실제로 영국이 등장한 시기는 지금의 인도(india)를 흡수하면서 부터이다.
그 전 역사는 한마디로 허접한 역사뿐이다.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재위1837-1901)여제가 제위하기 시작한 1837년부터라고 보고 있다. 그 때부터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라 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라 하던 나라이었다.
소위 갑자기 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히 영국 근원이 어딘가에 대한 의문이 많다.
현대 런던은 대화재(1666.9.2)때를 시작하여 새롭게 만든 도시라 하듯 그와 상징성이 비슷한 시기에 영국이 등장한 것이다.
1603년부터 왕국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는 동군연합 상태였던 잉글랜드를 말한 것인데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란 명칭을 사용하고서 부터라면 실제로 아메리카를 식민지 삼았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어쩌면 영국은 아메리카를 근거로 시작된 나라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아메리카에 있었던 대륙조선을 분립하던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인도를 점령한다.
이것이 수수께끼이다.
타고르의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근원이 잡힐 것도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민간 회사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가 실제 영국의 실체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가 과연 무엇인가?
외계인인가?
이 회사의 대한 실체가 연구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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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 식민지 현황]
위 지도를 보면 영국이란 세력은 미미할 정도이다.
[1822년 식민지 현황]
위 지도를 보면 이 시기에 지키려는 세력과 차지 하려는 세력간 엄청난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5년 식민지 현황]
위 지도를 보면 대륙조선이 1881년 망하고 난 후 영국이 인도를 다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1600-1708: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
1708-1873: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
이 회사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대륙조선에게 위협을 가하고 결국 대륙조선 자체를 뒤엎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암암리 세력을 키워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 버리는데 기록에는
1757년에 무굴제국을 뒤 엎었고
1818년에는 마라타왕국(대륙조선의 대행전위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Maratha Empire(1674–1820)
무굴제국에 반대하는 힌두교도들이 인도 중남부에서 결성한 나라이다.
마라타 왕국은 1674년에서 1818년까지 존재하였다.
마라타란 힌두전사의 인도-아리아인 그룹을 형성하고 고대의 마하라시트라가 전와(轉訛)된 것이다.
대륙조선의 전위왕국이다.
3차에 걸친 마라타 전쟁 후 1818년 영국(東印度會社)에 합병되었다.
First Anglo-Maratha War (1777-1783)
Second Anglo-Maratha War (1803-1805)
Third Anglo-Maratha War, also known as the Pindari War (1817-1818)
Anglo(앵글로)가 영국인가?
아니면 대륙조선계류인가?
게르만 족의 일파로 지금의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있는 앙겔른 지역을 근원지로 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5~6세기경 로마 제국이 쇠퇴한 시기에 그들과 비슷한 문화와 관습을 갖고 있는 색슨족과 유트족을 연합하여 앵글로색슨족을 형성하고, 브리타니아에 집단 이주하였다. 그들은 브리튼 섬에 살던 원주민을 정복하고 거기에 왕국을 세우는데, 그 나라가 지금의 잉글랜드이다
English people, as in the terms
Anglo-Saxon, Anglo-American, Anglo-Celtic, Anglo-African and Anglo-Indian.
영국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년:대륙조선 병사)이후인 1858년에 영국정부(東印度會社)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대륙조선의 모든 기득권을 가로채버린다.
그것이 오늘날 영국이라고 보면 퍼즐이 맞아 들어간다.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가 중대한 키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홍역 발생으로 돌아가
1657년과 30년 후인 1687년에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에서 홍역이 대유행하였다는
매사추세cm(Massachusetts)주 보스턴(Boston)홍역은 위 멕시코와 페루의 홍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먼저 홍역이 퍼지게 된다.
광해군 5년(1613)에 조선에서 먼저 홍역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개 식민지13개 식민지의 목록[위키 자료]
1775년 당시의 지도. 영국은 빨간색과 분홍색 지역을, 에스파냐는 노란색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빨간색 지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하게 된다.
뉴잉글랜드
뉴햄프셔 식민지 - 지금의 뉴햄프셔 주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와 메인 주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 식민지 -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주
코네티컷 식민지 - 지금의 코네티컷 주
중부 식민지
뉴욕 식민지 - 지금의 뉴욕 주와 버몬트 주
뉴저지 식민지 - 지금의 뉴저지 주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 지금의 펜실베이니아 주
델라웨어 식민지 - 지금의 델라웨어 주
남부 식민지
메릴랜드 식민지 - 지금의 메릴랜드 주
버지니아 식민지 - 지금의 버지니아 주, 켄터키 주, 웨스트버지니아 주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 -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테네시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 지금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조지아 식민지 - 지금의 조지아 주
광해군 5년 계축(1613,만력 41) 10월25일 (기유)
돌림병에 대한 대책으로 허준에게 처방을 책으로 편찬케 하다
○禮曹啓曰: “近來運氣失序, 疾疫爲災。 天行班/斑疹自秋熾發, 閭閻之人, 多致不救, 此前所稀罕之証也。 或拘於禁忌, 或昧於治療, 坐視其死, 莫敢下手。 民生夭扎, 誠爲矜惻, 請令內局名醫, 博考方書, 經驗諸方, 纂爲一書, 印出頒布。” 答曰: “令許浚等, 速爲纂出, 厲壇更爲祈禳。” 【自秋冬間有此疫, 俗稱唐紅疫。 又癘疫間發, 自是無虛歲。 東城外僵尸相枕, 人以爲殺戮强魂之所致云。】
예조가 아뢰기를,
“근래 사시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서 염병이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천행반진(天行斑疹)이 가을부터 크게 성해서 민간의 백성들이 많이 죽고 있는데, 이는 예전엔 거의 없던 증상입니다. 혹은 금기(禁忌)에 구애되고 혹은 치료할 줄 몰라 앉아서 죽는 것을 쳐다만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돌림병에 일찍 죽는 것이 진실로 측은하니, 내국의 명의로 하여금 의방(醫方)에 관한 책을 널리 상고하여 경험해본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인쇄 반포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준(許浚) 등으로 하여금 속히 편찬해 내게 하고, 여단(厲壇)에도 다시 기도하여 빌도록 하라.”
하였다.【가을과 겨울 사이부터 이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 또 염병이 간간이 돌아, 이때부터 끊인 해가 없었다.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살륙을 당한 억울한 혼령들이 초래한 것이라 하였다.】
조선에서 먼저 일어난 홍역 기사를 보면
광해군 5년(1613)에 예조가 임금에게 아뢰기를“근래 운기가 질서를 잃어(사시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서) 질역(疾疫)으로 인하여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번역원의 풀이를 보면 “가을과 겨울 사이부터 이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 또 염병이 간간이 돌아, 이때부터 끊인 해가 없었다.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살륙을 당한 억울한 혼령들이 초래한 것이라 하였다.”로 나온다.
얼마나 전염병이 심했으면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것처럼 난리가 난 것이다.
나라의 꽃이라는 어린아니와 어른 할 것 없이 막 쓰러지니 이런 상황을 기록 한 것일게다.
이처럼 홍역으로 인하여 나라가 살육이 난 것처럼 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조선에서 일어난 홍역이라는 전염병이 옮겨 가 44년 후 1657년과 30년 후인 1687년에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에서 홍역이 대유행하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속칭(俗稱) 당 홍역(唐 紅疫)이라한 정확하게 당(唐)의 근원이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당(唐)은 바로 대륙조선이다.
[This article is a list of major epi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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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Colonies |
1713 |
Boston, Massachusetts |
홍역(紅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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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Colonies |
1713–1715 |
New England and the Great Lakes |
홍역(紅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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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da, New France |
1714–1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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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紅疫) |
또한 홍역은
그로부터 약23년 후에 또다시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에서 홍역이 대유행하였고 이어 (1714-1715)년에 캐나다 뉴 프랑스(New France)까지 홍역이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도 조선에서는 똑 같은 시기에 홍역이 일어나는데 바로 아래와 같다.
1707년 숙종 33년 4월: 평안도에 홍역(紅疫)으로 사망한 자의 총수가 1만 수천명에 이르다. 서울 안팎도 대략 이와 같으니 가히 전에 없던 해로운 재앙이다.
1707년 숙종 33년 11월: 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홍역이 치열하여 추수철을 잊을 정도다.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퍼졌는데 특히, 유아 사망이 높아 어린이가 희소할 지경에 이르다.
북쪽 근교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행하다.
숙종 33년 정해(1707,강희 46) 4월20일 (임인)
내전의 세자를 대내로 옮기다
○壬寅/傳曰: “今日內殿。 世子, 自內移避, 政院知悉。”【王子患紅疫故也。】
전교하기를,
“오늘 내전(內殿)의 세자(世子)가 대내(大內)로부터 옮겨서 피하니, 정원(政院)에서는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왕자(王子)가 홍역(紅疫)을 앓았기 때문이었다.】
숙종 33년 정해(1707,강희 46)4월26일 (무신)
평안도에 홍역으로 사망한 사람이 1만 수천 명이라고 장문하다
○戊申/平安道以紅疫死亡, 前後摠一萬數千人狀聞。 京外大略同然, 可謂無前之災沴矣。
평안도에서 홍역(紅疫)으로 사망(死亡)한 사람이 전후로 모두 1만 수천 명이라고 장문(狀聞)하였는데, 경외(京外)가 대략 같았으니, 전에 없던 재려(災沴)라고 할 만하다.
숙종 34년 무자(1708,강희 47) 2월17일 (갑오)
삼남 지방에 염병과 홍역이 창궐함을 듣고 구휼할 것을 전교하다
○甲午/傳曰: “連觀三南狀啓, 染病、紅疫熾盛, 民人相繼死亡, 湖南爲尤甚。 誠極驚慘。 大抵紅疫死亡, 多於染病。 以昨年下送醫方, 申勑各道, 着實救療, 待其寢息, 恤典一體擧行。”
전교하기를,
“연달아 삼남(三南)의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염병(染病)과 홍역(紅疫)이 아주 성하여 백성이 서로 잇달아 사망(死亡)하고 있는데 호남(湖南)이 더욱 심하니, 진실로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이다. 대저 홍역(紅疫)으로 사망하는 것이 염병(染病)보다도 많으니, 작년에 내려보낸 의방(醫方)을 가지고 각도(各道)에 신칙(申飭)하여 착실(着實)하게 구료(救療)하고, 그 병이 침식(寢息)하기를 기다려서 구휼(救恤)하는 은전(恩典)을 일체(一體)로 거행하라.”
하였다.
숙종 34년 무자(1708,강희 47)3월3일 (경술)
홍역·여역으로 죽은 자가 거의 수만 명에 이르다
○庚戌/通京外, 紅疫癘疫物故者, 幾至累萬名。 諸道次第啓聞。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홍역(紅疫)·여역(癘疫)으로 죽은 자가 거의 수만 명에 이르렀다. 제도(諸道)에서 차례로 계문(啓聞)하였다.
1708년 숙종 34년 2월: 3남에 전염성 홍역이 치열하게 번지는 데 특히 호남이 더 심하다.
1708년 숙종 34년 3월: 전국에 홍역 사망자가 거의 수만 명에 이르다.
이 역시 조선에서 먼저 발생한다.
그것이 번져 약 5년 후 1713년에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에서 홍역이 대유행하였고 이어 1714년과 1715년에는 캐나다 뉴 프랑스(New France)까지 홍역이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예를 든 것처럼 상황은 똑 같다.
어떻게 태평양을 가로 질러 미국 동부에 먼저 상륙할 수 있는가?
이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This article is a list of major epi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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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Colonies |
1729 |
Boston, Massachusetts |
홍역(紅疫) |
또 1715년 뉴 프랑스를 이어 14년 후 1729년에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에서 홍역이 대유행하였다.
그러나 그 앞전인 1718년과 1727, 1729년에 조선에서 홍역이 일었다.
숙종 44년 무술(1718,강희 57)7월4일 (신해)
중궁의 홍진이 평복되니, 임금이 의약청을 폐지하도록 명하다
○辛亥/中宮紅疹之假平復, 上命罷議藥廳。
중궁(中宮)의 홍진(紅疹)이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약청(議藥廳)을 폐지하도록 명하였다.
영조 3년 정미(1727,옹정 5)11월16일 (무진)
왕세자빈이 홍역을 앓으니 삼제조의 인원 중 1원만 직숙하게 하다
○王世子嬪患紅疹。 藥房都提調李光佐請三提調備員直宿, 上問前例有無。 光佐曰: “曾無前例, 當降一等於中宮殿而磨鍊。” 上只命一員直宿。
왕세자빈(王世子嬪)이 홍역(紅疫)을 앓으니,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삼제조(三提調)의 인원을 갖추어 직숙(直宿)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전례의 유무(有無)를 묻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일찍이 전례는 없는데 중궁전(中宮殿)에서 1등을 강등(降等)하여 마련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1원(員)만 직숙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3년 정미(1727,옹정 5)11월23일 (을해)
빈궁이 홍역을 앓았을 때 수고한 약원 제신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다
○錄嬪宮疹患時, 藥院諸臣之勞, 賞賜有差。 藥房都提調李光佐【鞍具馬、豹皮。】, 提調吳命恒、副提調鄭錫三【各熟馬、鹿皮。】, 史官【陞六。】, 春坊官【各兒馬。】, 醫官李燁【加資、熟馬、銀子。】, 差備諸醫官【加資、鹿皮。】, 掌務官【或準職、或加資。】, 同參議藥諸醫官【或熟馬、或兒馬、或弦弓。】, 員役【米、布。】。
빈궁(嬪宮)이 홍역(紅疫)을 앓았을 때에 약원 제신(藥院諸臣)의 노고를 생각하여 상(賞)을 내려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그 약원 제신은〉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안구마(鞍具馬)와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제조(提調) 오명항(吳命恒)과 부제조(副提調) 정석삼(鄭錫三)【각기 숙마(熟馬)와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사관(史官)【승륙(陞六:7품 이하의 벼슬아치가 6품에 오르는 일)하였다.】, 춘방관(春坊官)【각기 아마(兒馬)를 내려 주었다.】, 의관(醫官) 이엽(李燁)【가자(加資)하고 숙마(熟馬)와 은자(銀子)를 내려 주었다.】, 차비 제의관(差備諸醫官)【가자(加資)하고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장무관(掌務官)【혹은 준직(準職)하고 혹은 가자(加資)하였다.】, 의약(議藥)에 함께 참여한 여러 의관(醫官)【혹은 숙마(熟馬), 혹은 아마(兒馬), 혹은 현궁(弦弓)을 내려 주었다.】, 원역(員役)【쌀과 면포를 내려 주었다.】 이었다.
영조 5년 기유(1729,옹정 7)10월1일 (임인)
이집 등이 함흥의 홍역 구제책, 액례들이 청대죽을 구득하는 폐단을 아뢰다
○行常參。 右議政李㙫奏: “咸興, 紅疫大熾, 死亡至五百餘。 請依丁亥紅疫時例, 遣醫人持藥物往救。” 允之。 㙫曰: “昨有宮人所薦人定配之命。 金周鼎以叔姪間, 萬無不符同之理, 請一體定配。” 副校理柳儼曰: “治國之道, 惟在肅淸宮禁也。 顯廟朝良女薦入, 一切防禁, 況兩班之女乎? 臣昨見備忘, 喜而不寐。 大臣所達, 誠得宜, 嚴宮闈之道, 不一而足, 因此加勉, 則豈不益光聖德乎?” 上曰: “拿問處之。”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함흥(咸興)에 홍역(紅疫)이 퍼져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나 됩니다. 정해년 홍역 때의 예에 따라 의원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어제 궁인(宮人)을 추천한 사람을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김주정(金周鼎)은 숙질간으로서 부동(符同)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일체로 정배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부교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오직 궁금(宮禁)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데에 달린 것입니다. 현종조(顯宗朝)에 양녀(良女)를 추천하는 것도 일체 금방(禁防)했었는데, 하물며 양반(兩班)의 딸이겠습니까? 신(臣)이 어제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 반가운 마음으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이 아뢴 말이 진실로 적절한 것이나 궁중이 엄숙해지게 하는 도리는 한 가지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니, 이로 인해 더욱 힘써 간다면 어찌 성상의 덕이 더욱 빛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잡아다가 추문하여 처치하라.”
1729년에 일어난 홍역은 미국의 13개식민지(Thirteen Colonies)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톤 홍역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일어났는데 조선에서 일어난 홍역과 꼭 같은 시기이다.
1729년에 조선“함흥(咸興)에 홍역(紅疫)이 퍼져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나 된다 하고 있다.
조선 함흥에서 홍역이 먼저 퍼져 태평양을 건너 미국 동부 13개 식민지에 홍역 퍼졌다니 어떻게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긴가?
태평양을 건넜다면 바로 서부부터 옮겨야 맞다.
미국 동부라니....참 별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파나마 운하가 뚫어지기 전이다.
이와같은 상황을 종합할 때 도저히 최초 발생한 지역이 북 아메리카 다른 지역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어찌하여 당시 배 운항도 극히 미약하던 시기에 동서 방향도 다르고 똑 같은 시기에 홍역이 조선에서 먼저 일어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북아메리카 미국에 그리고 멕시코, 페루에 이 홍역이 퍼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도 미국 서부지역이 아니라 동부지역에 홍역이 무섭게 퍼졌다니 상황 설명이 바르게 되지 않는 이야기다.
이것은 도저히 태평양을 가로 두고는 이야기가 성립 되지 않는 상황이다.
분명 조선은 북 아메리카에 있어야 맞다.
같은 발발지점이나 유행지점이 같은 육지에 있어야 정상적인 홍역의 이동이라 할 수 있고 홍역이동지도처럼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있었고 태자가 있었던 서울 한성이 그곳에 있어야 맞는 것이다.
그곳 어디에는 봉황성이 있어야 맞는 것이다.
어떠한가?
영국이 만약 조선의 분립되어 나타난 존재라면 수세미같았던 실타래가 풀리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의 수도가 원래 런던일 수도 뉴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아서 영국과 런던은 미 대륙에서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륙조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글이 기대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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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토 확보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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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조약 (1783년)
1783년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조약이다. 1782년 영국과 미국 사이에 조인되어, 이듬해 비준되었다. 여기에 의해 미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고, 그 국경은 북으로는 오대호와 세인트로렌스강, 남쪽은 조지아의 남쪽 경계 및 북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 강으로 정해졌다. 또한 미국인에게는 뉴펀들랜드에 있어서의 어업권 및 미시시피강의 항해권이 인정되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1803)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은 1803년에 미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2,147,000 km2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구매' 중 하나다. 미국은 6,000만 프랑($11,250,000)에 채무 변제로 1800만 프랑($3,750,00) 을 해서 모두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매했다.
레드 강 할양 (1818)
미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사이에 어업과 국경 그리고 노예의 복귀에 관한 회담은 런던 회담, 1818년 영미 회담 또는 간단하게 1818년 조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1818년 미국과 영국 사이에 조인된 조약이며, 당시 두 나라간 국경 문제를 결정하고, 영국과 캐나다의 역사에서 허드슨 베이 회사의 컬럼비아 지구로 알려진 오리건 국에 대한 공동 점유와 거주지를 허용하게 했다. 그리고 뉴칼레도니아에 대한 남쪽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에 대한 최종 영구 영토 손실을 기록하였으며, 49도선 이상의 오늘 날 앨버타 주 남부의 밀크 강으로 알려진 루이지애나 준주의 최북단을 확정했다. 영국은 49도선 이하의 모든 루퍼트 영지와 레드 강 식민지를 포함한 로키 산맥 서쪽을 할양했다.
애덤스-오니스 조약 (1819)
애덤스 - 오니스 조약(Adams - onís Treaty)은 1819년에 북아메리카 2개국 간의 국경 분쟁을 끝낸 미국과 스페인과의 역사적인 협정을 말한다. 조약은 당시 신세계에서 스페인의 힘이 약화되어 있었던 영토권에 관한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긴장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플로리다를 미국에 주는 것 이외에, 조약은 텍사스의 새바인 강 가의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 록키산맥과 태평양까지 제대로 된 미국 영토를 설정했다.
텍사스 합병 (1845)
텍사스 합병(Texas Annexation)는 1845년에 텍사스 공화국이 자발적으로 미합중국에 서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미국의 28번째 주로 텍사스 주가 탄생했다. 이 때 산후안 산맥도 추가되었다. 미국에 텍사스의 합병은 대외적으로 멕시코와의 관계, 대내적으로는 노예제도의 확대에 따른 남북 대립의 격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가맹을 둘러싸고 오랜 논쟁이 있었고, 다른 주 연합과는 다른 방법에 의해 가입이 승인되었다.
오리건 조약 (1846)
오리건 조약(Oregon Treaty 또는 Treaty of Washington)은 1846년 6월 15일에 워싱턴 DC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1818년 조약에서 영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던 오리건 국가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충돌된 영유권 주장에 의해 발생했던 오리건 국경 분쟁이 이 조약에 의해 종결되었다.
멕시코 할양 (1848)
멕시코 할양지(Mexican Cession)는 멕시코-미국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맺은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은 미국이 획득한 현재 미국 남서부 지역의 역사적 명칭이다. 1848년에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할양했다.
개즈던 매입 (1853)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는 현재 미국 애리조나 주 남부와 뉴멕시코 주에 해당하는 30,000 평방마일(77,700Km²) 지역을 1853년, 멕시코로부터 미국이 구입한 사건을 가리킨다. 구입한 지역은 길라 강 남쪽과 리오그란데 강 서쪽 지역으로 산악 고원 지대이다.
구아노 제도법 (1856)
구아노 제도법(Guano Islands Act)은 1856년 8월 18일 연방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의 연방법이다. 미국 시민은 구아노가 매장된 섬을 영유 수 있다는 것이다. 점령되지 않고, 한편 외국 정부의 관리 하에 있지 않으면 섬이 어디에 있어도 좋다. 이 권익 보호를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군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미국의 사법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떤 섬, 바위, 산호초이건 구아노 매장지를 미국 시민이 발견했을 때는 다른 나라 정부의 법적 통제 하가 아니라 다른 나라 정부의 시민에 점령되지 않고 평화롭게 점유하고 그 섬의 바위, 산호초를 점령했을 때는 언제든지 미국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미국이 소유했다고 판단한다. (구아노 제도법 제 1절).이 법률은 지금도 유효하다.
알래스카 매입 (1867)
알래스카 매매 또는 알래스카 매입(Alaska Purchase), 알래스카 매각은 1867년 미국 국무부 장관 윌리엄 슈워드의 명령으로 미국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한 사건이다. 매입한 영토는 600,000 평방마일 (1,600,000 km²)로 현재 알래스카 주다.
하와이 합병 (1898)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독립국가(하와이 왕국)였다. 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먼저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주는 식이다. 이 방식은 나중에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수데텐란트 할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도 유사한 수법이다.
하와이는 19세기 중반부터 미국과 극동을 잇는 중간 기지 역할을 해왔고, 1887년에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진주만(Pearl Harbor)을 미국 해군기지로 제공하기도 했다. 하와이로 이민온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아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외국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1890년의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혜택을 폐지하는 헌법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에 하와이 혁명이 일어나서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합병운동은 "Newlands Resolution"라 하여 미국에 하와이를 합병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결국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이 조약을 미국 의회가 1898년 7월 7일에 비준하였다.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날짜가 1900년 4월 30일이다.
미국 합병 직후에는 준주(準州)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주(州) 승격운동이 활발해져 1959년 8월 21일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파리 조약 (1898년)
파리 조약(The Treaty of Paris of 1898, 스페인어: El Tratado de París de 1898)은 1898년에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강화 조약이다. 이 두 나라는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쟁을 벌여 미국이 승리를 하였다. 이 조약의 결과 스페인은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미국은 영향력을 태평양 지역까지 확장하며 유럽 열강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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