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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리안 역병(Plague of Cyprian)은 고구려에서 발생한 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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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카르타고(Carthago)를 영역에 두었다?
우리는 서양 근대사에서 카르타고(Carthago, 페니키아어: Kart-Hadasht)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속한 것이라 하여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카르타고에서 벌어진 역병(疫病)을 키프리안 역병(Plague of Cyprian)이라고 하는데 서기 251-270년 사이에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을 떼죽음을 시킨 흑사병의 일종 전염병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그 해 똑 같이 고구려 256년 중천왕 9년 12월에 눈은 내리지 않고 대역(大疫)이 들었다 하였다.
기원 256년 고구려 중천왕 9년 12월: 눈이 내리지 않고, 대역(大疫)이 들다.
이 카르타고를 엄밀히 따지면 로마제국(Roman Empire)의 영역이다.
그런데 고구려 중천왕 때 이곳을 지정하는 역병이 존재하였다니 사실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현재는 카르타고는 위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속한 지역이다.
이곳은 아주 오래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Assyria)에 멸망당할 즈음, 고대 가나안의 북쪽에 근거지를 둔 고대 문명으로서 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에 있었던 페니키아인(Phoenicia, 腓尼基, BC1200–BC539)들이 건설한 도시국가이다.
페니키아인들이 동지중해 지역에서부터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나 명확한 기록은 없다. 이것이 현대사의 중요한 맹점이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 BC484-BC425 )는 페니키아인이 지금의 페르시아만지역에서 지중해 지역인 근동 팔레스타인 지역 레반트(Levant)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언어나 신화 면에서 볼 때 페니키아인은 가나안(Canaan)의 다른 문화와는 유사하다. 페니키아인들은 스스로를 가나안인(Canaan)이라 불렀다. 기원전 14세기경에 제작된 아마르나 문서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가나안인이란 뜻의 케나아니(Kenaani) 또는 키나아니(Kinaani)로 부르고 있다. 이 문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른바 해양인이라 부르던 민족들이 침략한 것보다 1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기원전 6세기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페니키아를 키나(χνα)로 표기하였는데, 비블로스의 필로는 그의 신화학에서 "키나란 페니키아를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년경부터 비블로스에서 레바논의 국기에 나오는 삼나무(神木)를 배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고고학에서는 페니키아를 지금의 레바논 해안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 문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주변의 고대 이집트, 미노아, 필리스티네, 고대 이스라엘과 같은 제 민족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
기원전 2300년경에서 기원전 2100년 사이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민족이동으로 인해 비블로스는 주변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페니키아어와 아람어가 섞이게 되었다. 이후 수메르와 아카드(Akkad:메소포타미아 중부 지역의 도시와 그 근방)의 군대가 지중해 연안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은 헤브루(Hebrew, 解夫婁?-Kabul)의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1500년 고대 이집트의 토트메스 3세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역사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411년에서 기원전 1358년경에 작성된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아모리(Amorite)와 히타이트(Hittites)가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들을 굴복시켰으며, 당시 비블로스(Byblos)의 왕이었던 리브-하다와 티르의 왕 아비-밀쿠는 이집트의 봉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350년경에서 기원전 1300년 사이에 이집트는 페니키아를 탈환한다. 다음 세기에 이르러 우가리트(Ugarit)가 발흥하였으나 기원전 1200년경 멸망하였다. 사학자 게르하르드 헬름은 기원전 1200년경에 갑자기 출현한 이른바 해양인은 여러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로 보아 페니키아의 발달된 항해술과 그 역시 우수한 항해술을 지닌 미케네 문명(Mycenaean Greece BC1900-BC1100)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단언한다.[위키]
[미케네 문명]
[클릭원본]
[黄色为腓尼基城邦(페니키아),红色为希腊城邦(그리스),灰色为其它
Map of Phoenician and Greek colonies at about 550 BC (with German legend)]
반면 앗수르(Assyria, 亚述, BC23rd century to BC608) 즉 고대 아시리아는 중동에서, 기원전에 존재한 강성하였던 나라이다. 히타이트(Hittite,赫梯又譯為西台: 기원전16世紀–기원전1180)를 물리쳐서 세운 나라라고 본다.
초기에 아시리아라는 말은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며, 고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아수르(Assur)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나중에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체, 이집트, 아나톨리아까지를 지배하는 대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아시리아 본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체 (남부는 바빌로니아)에 해당하며 니네베를 수도로 하였다. 아시리아인의 고향은 티그리스 강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산악지방이며 "아슈르의 산(Mountains of Ashur)"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시리아의 왕들은 세 차례에 걸쳐 역사상 의미있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각각 고대 아시리아 제국, 중기 아시리아 제국, 신아시리아 제국(제국 또는 기)으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기원전 911년~기원전 612년의 신아시리아 제국이다.
다시 돌아와서 대역병이 일어났던 카르타고(Carthago)는 페니키아인(Phoenicia, 腓尼基, BC1200–BC539)계열의 고대도시인데, 이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Qart-ḥadašt), 새로운 도시(meaning New City)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와 패권 다툼을 벌였으며,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Third Punic War, BC149-BC146)에 패배하여 로마 공화정의 아프리카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63-AD14, 재위BC27-AD14)가 재건하여 북아프리카 일대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5세기경에는 반달족의 침입을 받았다가 698년 다시 아랍인들에게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다.
[로마 제국의 야만족 침입]
서양근대사는 로마 빼놓고는 전부 야만족이라 했다.
반달족(Vandals)은
The Vandals were an East Germanic tribe that entered the late Roman Empire during the 5th century.
5세기 초, 아마도 훈족의 침입에 밀린 반달족은 서진을 시작하여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밀려들어 왔다. 반달족은 당시 대부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로 개종해 있었다. 406년, 반달족은 별 어려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왔고 라인강 유역의 갈리아 북부에서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았다. 2만 명의 반달족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해 겨울 라인강이 얼자, 반달족은 대거 라인강을 넘었고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 시키고 아키텐까지 밀려갔다.
409년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들어갔다. 히스파니아에 이미 정착해 있던 로마 제국의 푀데라티 부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반달족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혔고 결국 알란족을 굴복시키고 정착하였다. 반달족의 족장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의 직위를 얻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정착한 반달족은 바이킹족처럼 해적으로 변신했고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도 했다.[위키]
반달(Vandals : 왕 계보)
Wisimar (d.335)
1.고디기젤(Godigisel 359-407)
2.군데리크(Gunderic 407-428)
3.가이세리크(Genseric 428-477)
4.훈데리크(Huneric 477-484)
5.군타문트(Gunthamund 484-496)
6.트라사문트(Thrasamund 496-523)
7.힐데리크(Hilderic 523-530)
8.겔리메르(Gelimer 530-534)
키프리안 역병에서 밝혀 본 역사의 흐름은 결국 기독교가 왜 정당한가에 대한 내용이라는데 있다.
카르타고인들에게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 타니트와 남신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고, 지금도 돌비석이나 모자이크 등에 어린아이를 바친 흔적이 남아있다 라고 기록하였는데 사실 인신공희(人身供犧, human sacrifice) 또는 인신공양이라는 것은 세계 여러 민족에서 볼 수 있던 공신(恭神)의 풍습이며, 수렵시대·유목시대를 거쳐 농경시대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중미 아스텍 제국(1325~1521년)에선 산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을 하였다는데 이것을 스페인 군대를 따라간 수사(修士, Monk)가 현장을 목격했다 하였다.
수사는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기독교의 수도사를 뜻한다.
그 사람이 '사제가 돌칼로 남녀의 심장을 도려내고 나면, 군중이 희생자를 불에 구워 먹었다' 하였다는데 나타나는 역사적인 모순을 살펴 볼 때 이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그들만의 역사에서 등장 할 뿐 실제 그것을 입증할만한 사실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혐오(Disgust, 嫌惡)스러운 것, 공포(Fear, 恐怖)스러운 것, 엽기(Grotesque, 獵奇)적인 것,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느님에게서 끔찍한 명령을 받는다(창세 22장).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는 것이다.
번제물은 석쇠에다 고기 굽는 것이나 마찬가지 뜻이다.
성경 예레미야 7장 21-22절에“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라는 문구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말이다.
그들 스스로가 번제란 희생과 헌신이다 했다.
결국 이러한 인신공양은 그들이 비난 일은 결코 아닌 것이며 이런 헌신공양은 카르티고나 아스텍제국에만 적용될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근세기 서양주도역사는 동양 또는 피식민지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마치 깨끗하게 청소하거나 제거해야 할 추악한 미신적인 것을 부각하고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마땅히 말살해도 좋을 것 같은, 멸망시켜도 죄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여지를 남겨 그들이 저지른 행동은 당연하다는 식에 논리를 적용 정당화 한 것이라고 풀이 되며 서양 우위의 역사를 꾸며가기 위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술책이 아니었는가 하는데 상당한 의혹이 없지 않다.
때문에 카르타고는 위치상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여태 검증한 바로는 고구려라고 판단되는 그리스인과 3세기에 걸쳐 충돌하였으나, 일찍이 로마(오히려 로마와 충돌이 많았을 법한데...)와는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다 하였고 그 후 결국 로마의 세력이 확대되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고, 유명한 카르타고 출신 한니발 장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패배하여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로마 초대황제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있는 카르타고는 로마시대 수사학, 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3세기에는 기독교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한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가 된다는 것이 카르타고 역사의 총체적인 결론이다.
더하여 당시 엄청난 역병이 발병했는데 카르타고 출신인 키프리안이란 사람이 목회자로서 헌신적인 구원을 마다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던 사실을 내세워 신격화한 면도 있다.
이 키프리안(Thascius Cæcilius Cyprianus, 200 or 210–258)이란 사람의 이름이 엄청난 공포의 역병이름으로 알려지고 더군다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으로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이며 순교자라고 한 사실에서 보더라도 띄우기에 한 단면으로서 위의 결론에 부합한다 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이 카르타고에서 발생한 역병과 사실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이특이하다.
분명 “기원 256년 고구려 중천왕 9년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고, 대역(大疫)이 들다” 한 것에서 이 대역이 만약 서기 251-270년 사이에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을 떼죽음을 시킨 전염병 키프리안 역병(Plague of Cyprian)과 같은 것이라면 고구려는 카르타고를 영역으로 해야 하며 고구려가 강점할 수 있는 곳 그 범주 내에 있어야 타당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키프리안 역병이라는 것은 키프로스(Cyprus)에서 일어난 역병이 아닌가 하며 그리스와 가깝게 있는 이 키프로스(Cyprus)라면 고구려 영역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풀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르타고(Carthago)도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Qart-ḥadašt), 새로운 도시(meaning New City)라 하였고 키프로스(Cyprus)역시 페니키아어로 콰르트하다쉬트(Qart-ḥadašt), 새로운 도시(meaning New City)라고 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 로마라고 하는 서로마의 일부가 고구려 영역으로서 존재하였을 것이며 시칠리아 섬에서 바로 연결되는 지역적 위치에 있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라고 추리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쨌던 삼국사기에 키프리안 역병과 같은 해 똑 같이 고구려 256년 중천왕 9년 12월에 눈은 내리지 않고 대역(大疫)이 들었다 하였다 하였으니 이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키프리안 역병과 고구려 중천왕 때 역병은 같다해야 맞다.
서기 256년 12월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기사는 겨울임에도 눈이 내리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은 분명 지형적인 문제와 기후적인 문제가 가려진 것이라고 보인다.
실제 광역의 고구려 영역 중에 기후가 지중해연안이나 북아프리카가 될 수 있는 문제이고 지중해기후와 열대성 기후를 가진 영역이라는 것까지 추리 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곳에서 대역병이 일었던 것이다.
고구려 땅에서 말이다.
때문에 이 키프리안 역병(Plague of Cyprian)으로 본 고구려는 서양역사와 다른 점이 분명히 존재 할 것이고 현재 지중해와 열대 지역을 가름하는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키프로스(Cyprus)의 역사
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며, 키뉘라스 왕과 테우크로스, 퓌그말리온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간 활동 흔적이 남은 곳은 남부 해안의 아이토크렘노스(Aetokremnos)로, 기원전 10,000년경에 이 섬에서 사람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기원전 8200년경에 마을 공동체(두레와 품앗이, 동제(洞祭)한국인들은 고대로부터 공동체적 삶을 살아왔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첫 인간의 등장은 키프로스 난쟁이 하마와 키프로스의 난쟁이 코끼리의 멸종과 서로 관련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비롯하여, 인구와 정착지의 이동이 몇차례 전개 되었으며, 기원전 3800년경에 지진이 일어나 취락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 섬으로 들어왔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 발견된 유물 가운데는 질 높은 철기가 드물지만, 소아시아에서 온 일부 사람들은 발전된 철기 가공 기술이 있었다. 기원전 2400년경 아나톨리아인(Anatolia)들이 키프로스에 오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600년경에 키프로스에 처음으로 왔는데, 이 시기 정착지는 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다른 그리스인 집단들이 기원전 1100~105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키프로스는 그리스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오늘날 라르나카와 살라미스 근처의 '콰르트-하다쉬트'("새 도시") 등 일부 페니키아 식민시도 들어섰다.
[후기1]부첨하여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카르타고(Carthago)를 페니키아인(Phoenicia, 腓尼基, BC1200–BC539)계열의 고대도시로서 페니키아어(語)로 콰르트하다쉬트(Qart-ḥadašt), 새로운 도시(meaning New City)라 했고 또 여기 키프로스(Cyprus) 역시 페니키아어로 식민시로 '콰르트-하다쉬트'("새 도시")라 했다 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와 키프로스 모두를 새도시라 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에 키프리안 역병이 카르타고에서 실제 발생했는지 아니면 키프로스에서 발생했는지 분명치 않다.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기원전 709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되었으며, 기원전 545년에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다. 오네실로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사람들은 기원전 499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이오니아 도시의 반란에 동참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키프로스 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키프로스는 완전히 헬레니즘화 되었으나, 기원전 58년 로마에 병합되었다.
튻히 이 키프로스가 기원전 58년에 로마에 병합되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또한(삼국사기를 인용할 때 기원전37년-668년)임을 상기해야 하고 또 몽골인이 쓴 무쿠리계보를 보면 고구려의 시원은 그 보다 160년이나 앞선 BC199년이라 하였으며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63-AD14, 재위BC27-AD14)와 연대가 비슷한 고구려 왕은 이상하게 6대 태조왕이라고 하는 타이쥬 칸(Taizu Khan, 재위:BC 76∼AD 22) 한자이름은 궁(Gung,宮)이고 본명 아이수(Aisu,於漱)라고 하는 왕과 비슷한 시기이며 고구려 태조왕을 국가를 새롭게 개창하였다 하여 구루니바반 칸(Guruni Baban Khan,國祖) 국조라고 하였는데 아우그투스 역시 로마 초대황제란 의미가 동일하다. 보통 국가의 시조를 태조라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고구려 태조왕은 시조가 아니라 국조이며 고구려 6대왕이라 특별하다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45년 예수의 제자 파울루스와 바르나바가 키프로스에 건너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다. 키프로스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 제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키프로스에서 추방당하였다.
중세때인 395년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649년 아랍인에 섬을 내어주었고 966년에야 다시 섬을 요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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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2]특히 이 키르로스에 있는 그리스 조각상 아프로티테를 보면 Kore / Korai 니케신전의 코레 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안 그래도 이 Kore / Korai 니케신전의 코레 란 조작상을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조각상으로 파르테논 신전 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코레(Kore)는 그리스어로 처녀라는 뜻이다.
이 코레 조각상은 여신에게 바친 조각상 10여개 가운데 하나로 아크로폴리스 니케신전에서 발굴되었으며, 나체가 아니라 옷을 입은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옷 무늬의 표현이 주요한 모티프이다.
초기 그리스 시대의 발굴품들에는 옷을 입은 소녀상과 나체의 청년상이 매우 많다. 이들 조각상은 신의 상도 아니며 실제하는 인간의 상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옷을 입은 소녀상을 코레(Kore)라 하고, 나체의 청년상을 코우러스(Kouros)라 한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대한 의문점이 많았다.
사실 대륙적 역사관으로 본다면 분명 Kore / Korai 는 조각상의 처녀와 청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바로 포괄적으로 고구려를 나타내는 단어이기에 의심을 한 것이다.
만약 추측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는 분명 고구려가 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Cyprus에 있는 아프로티테(Aphrodite)-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조각상]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보관 중인 Kore / Korai 조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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