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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 AD165-AD180)과 신라(新羅)?

한부울 2011. 11. 2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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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 AD165-AD180)과 신라(新羅)?

 

글쓴이:한부울

 

우리는 역사를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근세기에 서양이 연출(演出)하고 일제가 각본(脚本)을 한 반도사는 잘 알고 있다.

수능시험에도 나오고 공무원시험에도 나오고 대학교 시험에도 나오니 그대로 암기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출세도 할 수 없다.

일제가 남기고 간 반도사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역사를 반도사라 하지 않고 참역사라고 한다.

왜놈이 만든 것이 아닌 찌들고 병든 역사가 아니라 희망과 진취성을 높일 수 있는 참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 역사는 하늘의 이치로 따져보아도 절대 어긋나지 않는 사실그대로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외우고 아는 역사는 역병하나도 제대로 바르게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불구의 역사이다.

그래서 바이러스같은 역사, 병든 역사, 찌든 역사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역병을 전염병이라고 하지 않고 괴질(怪疾), 악질(惡疾)이라 하였다.

한번 걸렸다 하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퍽퍽 쓰러지는 죽음을 잉태하는 병이니 대역(大疫)이라고 칭하면서 염라대왕 보듯 무섭게 여겼다 한다.

흑사병, 매독, 한센병, 콜레라, 천연두, 학질, 홍역 등이다.

그래서 이 무서운 역병은 공포로 받아들여졌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에게 떼죽음을 강요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가 되어 세월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기억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대대손손 이어져 우리에게도 선명히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그것이 바로 AD149년과 AD172년에 신라 서울에서 일어난 대역(大疫), 즉 죽음의 전염병인 것이다.

이 기록은 일단 자세하지 않다.

두루뭉술 몇년 어디에 일어난 대역이라고만 하였지 희생자가 몇명이고 그 전염병이 몇년이나 이어지고 구체적으로 무슨 병인지 알길이 없다.

워낙 큰 일이라 쉽사리 장난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예 빼 버릴 수도 없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다행스럽게 밝혀지는 것이다.

분명히 사람들에게 강한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역병을 찾으면 참역사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근대사에서 인류 5대 역병 중에 하나라 하여 안토니우스 역병(The Antonine Plague: 165-180 AD)을 들고 있다.

안토니우스 역병(The Antonine Plague: 165-180 AD)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61년-180년) 로마제국(Roman Empire)의 16대 공동 황제 때 일이다. 이 안토니우스 황제 제위기간에 일어난 역병이기도 하지만 황제가 안토니우스 본인이 이 역병으로 죽음을 맞이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가들이 그렇게 칭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서기 165년, 그리스의 의사 갈레노스(Claudius, Galen,130-200)가 고대의 이 전염병을 처음 설명하였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 역병이 천연두(天然痘)나 홍역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 역병 때문에 메소포타미아로 출정 갔던 로마의 병사들이 갑자기 회군했다고 하고 이 역병 때문에 사망한 두 명의 로마황제 중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이름을 따서 병명을 결정하였다고 하고 있다. 한창 이 역병이 창궐할 당시, 로마에서만 하루 동안 5,000명의 사람이 죽었다고 전해지며 결국 이 역병은 15년간 지속되었는데 총 사망자가 5백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고 있다.

 

박씨왕조(AD80-AD184)

대수

칭호

재위기간

비고

5

파사 이사금

(婆娑尼師今)

80년-112년

전왕탈해이사금의 아들이 아닌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

6

지마 이사금

(祗摩泥師今)

112년-134년

파사 이사금의 아들.

7

일성 이사금

(逸聖泥師今)

134년-154년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8

아달라 이사금

(阿達羅泥師今)

154년-184년

일성 이사금의 아들.

 

석씨왕조(AD184-AD261)

9

벌휴 이사금

(伐休泥師今)

184년-196년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박씨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갔다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

 

Nerva–Antonine dynasty(AD96-AD192)

12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96년-98년

트라이아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13

트라이아누스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년-117년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제위는 양아들로 삼은 사촌형제로 하드리아누스가 계승하였다

14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117년-138년

말년에 그는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15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nus Pius

138년-161년

로마로부터 12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에트루리아의 로리움에서 열병 때문에 161년에 사망하였다

16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61년-180년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161년-169년

그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부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이었다.

17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180년-193년

로마제국사상최악의 황제 중 한사람으로 언급되어'포학제(暴虐帝)'라고도 불린다. 콤모두스가 등극함으로써 이른바 오현제 시대는 종식을 고했다. 192년 12월 31일,콤모두스는 다음날에 검투사 복장으로 원로원에 가 집정관 직위를 받아들일 계획을 세우고 자고 있던 중에, 고문관들이 고용한 레슬링 선수에 의해 목이 졸려 암살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라시대 AD149년과 AD172년에 일어난 대역병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바로 신라 7대일성왕(逸聖泥師今, 134년-154년)과 8대 아달라왕(阿達羅泥師今, 154년-184년)때 서울에서 대유행했다고 하는 대역(大疫)이다.

 

 

1.기원 149년 신라 일성왕 16년 11월: 서울에 대역(大疫)이 들다.

2.기원 172년 신라 아달라왕 19년 3월: 서울에 대역(大疫)이 들다.

  

[피한지 리비에라(Côte d'Azur) 연안지역]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을 보면 12월인데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신라 영토가 지중해 연안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地中海性氣候)는 여름은 기온이 높고 건조한 건기가 지속되고, 겨울에는 다소 따뜻한 우기가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남북위 30˚~40˚ 사이 중위도 대륙 서안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연 강우량 측면에서는 온대 기후 중에서 가장 비가 적게 내린다.

최한월 평균 기온은 −3˚C 에서 18˚C 정도 된다.

 

겨울은 편서풍에 의해 온대 저기압과 전선 영향으로 비가 자주 내린다. 이에 반해 여름엔 아열대 고기압의 영향으로 매우 건조한 날씨가 지속된다.

이탈리아 부근의 리비에라(Côte d'Azur) 해안 지역은 피한지(避寒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위 삼국사기 기록의 두 대역은 165년에서 180년 사이에 일어난 안토니우스역병과 발병 시기가 같고 대역(大疫)이라는 큰 역병, 똑같은 무서운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대로마  수도에서 이 역병이 유행하였다는데 신라 서울에서 대역(大疫)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같다.

신라의 대역(大疫)이 바로 로마의 역병(疫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로마에 일어난 역병도 확실한 병명을 알 수 없어 천연두 또는 홍역이라고만 하였고 신라 서울에서 일어난 대역 역시 무능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식민사학에 빠져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무슨 병인지 밝혀내질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사람들의 생명을 무차별 앗아가는 무서운 전염병임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반도사가 지탱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이것을 명명백백 밝힌다는 것은 실제 반도사의 치부를 들어내고 밝히는 것이기에 기대하기가 힘든다.

언제나 구체성 없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중요한 요점은 빼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두루뭉술 뭉뚱그려 사실만 전할 뿐 그러한 실정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안토니우스 역병은 중동에 원정 갔다가 복귀한 로마병사들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강타하였고 15년 동안 500만정도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역병이라 했다.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은 ‘국제화된 전염병’의 첫 사례로서 근동지역(현재의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파병됐던 로마 군인들이 병에 걸려 귀국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전역으로 전염병이 퍼졌다고 했으며 자료에는 ‘안토니우스 역병’이라 불리는 이 병을 ‘의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의학자 갈렌의 이름을 따 ‘갈렌 역병’이라 하기도 한다 했다.

현대 사학자들은 이 병이 천연두나 홍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이 역병이 발생한 시기에서 신라와 로마를 비교해보면서 같은 점을 간추려 보면

신라의 박씨왕조(AD80-AD184)와 로마의 네르바 안토니우스왕조(Nerva–Antonine dynasty, AD96-AD192)는 같은 왕조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고 신라의 일성이사금과 아달라 이사금은 로마의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와 같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니면 로마 17대 황제 콤모두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와도 연결될 수 있다.

년도숫자에서(똑같으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지만)야간의 차이가 보이면서 입양을 하거나 양자로 입적한 후 등극하는 모양새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은 백제와의 전쟁을 벌렸고 로마는 파르티아제국과 전쟁을 벌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때 168년부터는 게르만족과의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했다고 하는 것과 신라가 일성이사금 때 말갈 침입을 받았다는 사실이 일맥상통한다.
물론 년도 숫자상으로 분명히 차이가 있으나 신라가 137년과 139년 말갈이 침입했다 하였고 로마에는 168년과 169년에 게르만족이 침입했다고 하였으니 사건 흐름상 같다.
신라 벌휴이사금(伐休泥師今)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하였고 로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5현제(성인)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 사실을 밝혔듯이 성인이나 현제라는 사실이 같다.

 

때문에 로마의 역병과 신라의 대역은 분명히 같다 해야 맞을 것이다.

동시대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 대 역병이 유행하였고 똑 같이 서쪽 서양땅에 서도 역병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살했다고 하는 것은 이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 같은 사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신라 서울에 이 역병이 들었다면 백제나 고구려 다 온전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같은 시기에 분명 백제나 고구려 역시 대역이라고 하는 역병으로 난리가 났어야 옳다.

한반도 신라는 일제가 꾸민 것이고 솔직히 지리학적인 판단을 감안하더라도 신라의 서울과 로마의 수도는 같다고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대역이 일어난 신라의 서울은 바로 로마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풀이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로마와 파르티아전쟁(Roman–Parthian Wars, BC66 – AD217)

 

기원전 200년경의 동지중해의 모습. 노란색이 파르티아 제국, 보라색이 로마 공화정, 그리고 파란색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이다.

 

로마제국 제14대 황제하드리아누스(Hadrian, AD76-138)는 파르티아 (Parthia, BC238-AD226)정복이 제국의 잠재적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짐작하고 즉위 직후 전임자의 정책을 되돌렸다. 그는 국경을 다시 유프라테스 강으로 돌리는 것이 로마의 국익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를 원래 지배자에게 돌려주고 국경을 전쟁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로마는 이후 최소 반세기동안 유프라테스 동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후임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는 로마제국의 제15대 황제(86-161)인데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콘술)을 지냈으며, 원래 갈리아(고구려)출신 집안 태생이었지만, 안토니누스는 로마와 가까운 라누위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외가의 조부 아미우스 안토니누스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미우스는 대(大)프리니우스의 친구였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신임도 두터웠고,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 요직을 역임한 뒤, 이탈리아 반도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안토니누스가 후계자로서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 138년 2월 25일에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 양아들 아에리우스 베루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아내의 남동생에 해당하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아에리우스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 두 명을 양아들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이 훗날의 공동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이다.

 

아내인 대(大)파우스티나와의 사이에는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지만, 딸 소(小)파우스티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 사망했다. 소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고결한 성품을 가진 황제였으며, 현군으로 추앙받게 될 양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로마로부터 12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에트루리아의 로리움에서 열병 때문에 161년에 사망하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또한, 중국의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는데 161년 본국 이탈리아와 그 주변에 걸쳐 기근과 홍수가 일어났고 같은 해 파르티아가 동방에 칩입해 1개 군단이 궤멸당하고, 카파도키아의 세베리아누스총독이 자결했고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점령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카파도키아 총독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를 임명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를 출정하게 하여 163년 동방의 남은 군단들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격파한 뒤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를 탈환했으며 165년까지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의 파르티아까지 진격하고 166년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파르티아 동쪽 깊숙이 쳐들어가 철저히 격파했다.

 

한편 168년부터는 게르만족과의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이 과정에서 169년 공동 황제 루키우스가 죽었고 170년 봄부터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키아 속주에서부터 북상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해 게르만족들을 패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프론토가 전사하고 로마군 2만 명이 포로가 된다.

 

그리고 270년 만에 북부 방어선이 뚫려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오고 그 영향으로 4개 군단을 더 창설하

기도 했다. 뒤이어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마우리타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니아까지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동생 피디우스 빅토리우스를 파견해 이를 진압했다.

 

172년부터 본격적인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빈과 베오그라드에서 동시에 공세를 감행했으나 도나우 강 건너에서 근위대가 대패하고 근위대장 빈덱스가 전사했으며 173년부터는 각개 격파 작전으로 바꿔 지지부진한 전쟁 끝에 174년 강화가 성립되었다.

 

175년에는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황제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177년에는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178년부터 다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대공세를 펼치며 집정관 율리우스 베루스가 전사함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을 무찌르며 압도했으나 180년 3월 17일 도나우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위키]

이 병이 바로 역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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