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매독(梅毒, syphilis)이 발병된 조선이 한반도인가?

한부울 2011. 10. 3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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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독(梅毒, syphilis)은 왜 조선에서 먼저 발병되었는가?

 

글쓴이:한부울

 

매독(梅毒)은 매독균(spirocheta)에 의한 전염병이며 성병이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르 8세는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위스 등의 병사로 연합군을 편성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병사들에게서 나병보다 더 심한 피부병이 나기 시작, 긴급 철수해야만 했다. 매독 때문이었다. 최근까지는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1492-1504까지 4차례항해로 이 병을 신대륙에서 가져왔고 스페인 병사들을 통해 퍼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전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질병 열대성 프람베시아(framboesia)가 사실은 매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14세기 경의 영국의 아우구스티누스 교단 수도원(Augustinian Monastery)에서 발견된 수도사의 유골에서 전형적인 성병 단계의 매독의 병변이 발견되었다.  콜럼버스 이전의 폼페이(Pompeii, AC79), 메타폰토 (Metaponto)등지의 이탈리아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에서도 선천성 매독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해석을 놓고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다. 1303년에 레프라(lepra, 癩病)의 창궐을 기록한 유럽 저술가도 분명히 매독을 묘사하고 있는 점을 주목했다[위키]

 

유럽에 매독이 창궐한 것은 매춘문화의 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509년 베니스 인구 30만 명 중 30분의1인 1만1000여명이 매춘부였을 만큼 유럽은 매춘의 대륙이었다. 매독이 성병으로 알려지자 매독환자들은 수모 속에서 나환자촌으로 추방됐지만 나환자들조차 그들과 같이 있기를 꺼렸다. 그러나 귀족들 사이에서 매독이 만연하자 이 병에 걸리지 않은 남자를 목석으로 여겼다. 볼테르는 그의 시에서 매독을 ‘사랑의 꽃다발’로 표현하기도 했다.[인터넷자료]

 

매독(梅毒)은 매독균(spirocheta)에 의한 전염병이며 성병이란 사실을 알았다.

스피로헤타 팔리다(Spirochaeta pallida)라는 나선균의 감염으로 일어나는 만성성병(性病)으로 보균자의 음부나 입 등을 통하여 전염된다 하였다.

이것을 한어 자료에 보면 광동창(廣東瘡)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참 특이하다고 느끼며 또 버드나무와 매화나무를 섞어 양매창(楊梅瘡)이라 했던 것도 이상스럽다 느낀다.

그리고 한어에서는 이 병을 나폴리병(那不勒斯病, Naples),불란스병(法國人病), 이태리병(意大利病), 서반아병(西班牙病), 기독교병(基督徒病), 영국인병(英國人病)이라했으니 이것은  양병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감창(疳瘡)이라 했다 한다.

 

아래 지리적 분포도를 보면 대략 고유종으로서 지리적 위치가 유럽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북부와 터어키 일부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아라비아반도, 북아프리카를 총 막라하고 있다.

The geographical distribution of the endemic treponemal diseases circa 1900 is shown, based on a map created by Hackett .1900년경 발병 treponemal(트레포네머)질병 지리적분포

1.초록색표시는 지방병, 풍토 <생물> 고유종 지역을 나타내고
(T. pallidum subsp. endemicum-Closely related organisms cause endemic syphilis)
endemic syphilis or bejel (비성병성 전염매독)
2.붉은표시는 요(Yaws)마크 딸기종(腫)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 기록에서 조선왕조실록 세종 21년 기미(1439)기사를 보면 세종5자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 이여(李璵)의 집 계집종 부전(浮典)을 처음 세종3자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이용(李瑢)이 좋아했는데 계집종 부전(浮典)이 감창(疳瘡)을 앓다가 잇따라 급질(急疾)이 발작하여 더 이상 취하지 않았다고 내용이다.

세종때 왕족이나 귀족사회에서 이미 이 감창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39년이니 콜럼버스가 유럽에 들어온 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도대체 한반도에 그 당시 무엇이 와서 이런 감창을 퍼뜨렸다 말인가?

이것은 양병(洋病)이 아닌가?

이 기록 역시 한반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매독이란 사실을 알게 된 시기가 유럽에서 1494년 프랑스의 샤를르 8세가 이탈리아로 원정 떠날 때이니까 조선에 병이 돈 것은 그것보다 55년이나 앞선 상황이다.

이 세종조의 중궁(中宮, 昭憲王后 沈氏, 1395-1446)이 악병(惡病)이라 하여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은 이 감창 즉 매독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며 왕족이나 귀족사회에 넓게 퍼져 있었던 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조선이 지금 한반도인가?

 

어떻게 조선 잣대로 10,000리가 넘는 유럽에서 발병된 것을 한반도에 귀족 사회에 넓게 퍼져 알 수 있는 병이라 했단 말인가?

이것 너무 쇼킹한 이야기다.

 

그 당시 사회 풍기문란이란 사건을 다음 기사에 보면 알 수 있는데 비방글에 대한 사관이 논평한다.

 

성종 13년 임인(1482)윤 8월20일(병술)기사에 성균관을 비방하는 배율시가 벽에 붙자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충여(蟲餘)는 직강(直講) 김석원(金錫元)을 가리킨 것이니, 김석원은 이때 감창(疳瘡)을 앓고 있었으며...홍경손과 임수겸은 ‘백발(白髮)을 이고 백마(白馬)를 타는 자’라고 기롱(譏弄)함이 있어, 성균관의 벽상(壁上)에 쓰기를,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말도 또한 희구나.

하얀 사람의 흰 것이 백마의 흰 것과 다름이 없구나.’[有客有客 亦白其馬 白人之白 無異於白馬之白] 하였는데...

 

여기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찬술에 참여한 직강 김석원은 매독, 감창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당시 대신들이 백인 매춘부와 함께 노는 것을 빗대어 쓴 벽보임을 알 수 있다.

백마는 백인을 나타내는 것이니 백인여자를 일컬었다고 할 수 있다.

백인여자, 감창 등 1482년 성균관 벽상에 이런 비방하는 글이 있다는 것은 그 때 사회가 상당히 문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백인 매춘부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백인은 백인 매춘부를 빗댄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이곳이 한반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보다 훨씬 나중에 일이지만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소백과사전인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이 감창에 대한 비방약들을 실어 놓았다.

감창은 조선 귀족사회에서 흔히 유행하던 병이 틀림이 없다.

한어자료에서 광동병이라 하였으니 이 광동은 지금 대륙광동인가 의문시 된다.

지금 대륙광동이라면 그 당시 동양인들이 매독을 가지고 있고 시초라는 이야긴데 이것은 아니다.

나폴리병(那不勒斯病, Naples),불란스병(法國人病), 이태리병(意大利病), 서반아병(西班牙病), 기독교병(基督徒病), 영국인병(英國人病)이 있었던 곳이 광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어자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병, 프랑스에서는 나폴리병이라고 서로 불렀다고 하고 있다.

스페인과 감정이 좋지 않았던 네덜란드에선 스페인병이라고 이름 붙였고 포르투갈에선 경쟁관계에 있던 카스티야(Castile)를 지목, 카스티야병이라고 호칭했다 했으며 러시아에선 폴란드병이라고 하였고 터키에선 기독교병이라 하였으며 일본에선 중국병 당창(唐瘡) 혹은 포르투갈병이라고 불렀다 하고 있다.

모두 가장 멸시하고 싫어하는 존재가 가져온 병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 양인(洋人)들의 병인 것이다.

이것이 매독이다.

당시 조선인은 우리가 아는 조선이 아닌 것이다.

 

(1)성종 1년 경인(1470)  2월9일 (무오)
의금부에 명하여 임의로 이거을가개를 죽인 신수무·정산로 등을 추국하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신수무(辛秀武)·정산로(鄭山老) 등이 임의로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 부자를 죽이고 배를 갈라 쓸개를 꺼냈으니, 추국하여 아뢰라.”하였다.

 

(2)명종 19년 갑자(1564) 10월15일 (갑신)
한 동네 아이를 죽인 상주 정은춘의 치죄를 명하다
경상도 관찰사 이우민(李友閔)의 계본【상주(尙州)에 사는 정은춘(鄭銀春)이 한동네 사는 나이 7∼8세 되는 아이를 꾀어 산속에 들어가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놓고 살점을 베어내 구워 먹으려다가 사건이 발각되어 갇혀 있으니 그를 추국하기를 치계(馳啓)한 것이었다.】을 정원에 내리며 일렀다.
“이 계본을 살펴보건대 참혹스럽기 그지없다. 자세히 살펴 치죄(治罪)할 것을 형조에 말하라.”

 

(3)1576년 선조 9년 6월: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케 하다. 
이때 서울 안팎의 사람들이 창질(瘡疾 매독이나 나병 등 피부가 곪아 들어가는 질병)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간과 쓸개(肝, 膽)로써 약을 하다.
흉악한 무리들이 어린이를 사람없는 곳에 유괴하며, 비록 건강한 남녀라 할지라도 혼자서 길을 가면 겁탈하여 배를 가르고 쓸개를 탈취하여 비싼 값에 팔려지므로, 나무숲에 결박되어 배 갈라진 자가 산골에 서로 마주 볼 지경이다.

 

그리고 위 세가지의 기록을 보면 아주 끔찍한일이 시중에서도 발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창질(瘡疾) 즉 매독이나 나병 등 피부가 곪아 들어가는 질병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간과 쓸개(肝, 膽)가 약으로 쓰였다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배가 갈라지는 참혹한 현상이 발생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를 보면 시중에서도 매독이나 나병이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매독을 세종조의 중궁(中宮, 昭憲王后 沈氏, 1395-1446)이 악병(惡病)이라 하였으니 악질(惡疾)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 악질(惡疾)이란 명칭으로 수많은 기록이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선 사회가 매독으로 상당히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조선인 중에 귀족 양반이라고 할 수 있는 대신들이 서양 즉 백인과 놀아났다고 하는 실예가 밝혀졌으니 어찌 놀랍다 하지 않겠는가?

조선 귀족사회가 15세기초 이른 시기에 매독 때문에 난리를 났었다니 서양에서 말하는 "사랑의 꽃다발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다.

이곳이 한반도란 말인가?

매독때문에 풍기문란하였던 조선은 절대 한반도가 될 수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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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1년 기미(1439,정통 4)

5월4일 (신해)

임영대군의 징계에 대해 논의하다

○上謂都承旨金墩曰: “自古宗親驕淫犯法, 以亂家風者, 或有之矣。 故予嘗戒諸子曰: ‘凡有所爲, 必先稟於予。’ 初, 安平大君瑢見廣平大君璵家婢名浮典者悅之, 因阿母啓中宮, 以達於予, 予心以爲母弟之家婢, 而又爲處女, 亦無害也, 然未許之矣。 其後浮典者患疳瘡, 仍發急疾, 中宮謂瑢曰: ‘有惡病, 不可取。’ 然瑢心猶未忘, 予乃非之矣, 瑢終不得取, 後乃改悔。 臨瀛大君璆悅妓錦江梅, 因中宮以告於予, 予心以爲此見安平之事而爲也, 先達於予, 亦〔以〕爲可憐。 且彼爲處女, 亦何害乎? 乃許之。其時有諫止之者, 然予旣許矣, 何必更止之? 此予之過也。

임금이 도승지 김돈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종친이 교만하고 음탕하여, 법을 범하여서 가풍(家風)을 어지럽게 한 자가 간혹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하는 일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내게 먼저 여쭈어라.’고 하였다. 처음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집 계집종 부전(浮典)이라고 하는 자를 보고 좋아하였는데, 아모(阿母)가 중궁에게 아룀으로 인하여 내게 알려졌었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동생의 집 계집종이고 또 처녀이므로 무방하겠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에 부전이란 년이 감창(疳瘡)을 앓다가 잇따라 급질(急疾)이 발작하여서, 중궁이 이용에게 이르기를, ‘악한 병이 있으니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용이 마음으로 오히려 잊지 못하기에 내가 그르게 여겼다. 이용이 마침내 취하지 못하고 그 뒤에 이내 뉘우쳤었다. 임영대군 구가 기생 금강매를 좋아하는 것을 중궁으로 인하여 내게 알려졌는데, 내가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이는 안평대군의 일을 보고 한 것이구나. 먼저 내게 알리니 가엾기도 하다. 또 그가 처녀이니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하고, 곧 허락하였다. 그때에 이것을 중지하도록 간하는 이가 있었으나, 내가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어찌 다시 중지시킬 것이냐고 하였는데, 이것이 나의 과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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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3년 임인(1482,성화 18)

윤 8월20일 (병술)

직강 하형산이 성균관을 비방하는 배율시가 벽에 붙자 성균관 동지사 임수겸·유진 등이 사면을 청하다

史臣曰: “洪同、林同, 指同知事洪敬孫、林守謙, 李學、趙學, 指學官李丙奎、趙元卿, 蟲餘指直講金錫元, 錫元時患疳瘡。 南生指進士南孝溫, 孝溫嘗上書論師表無人。 李生未知的指爲何人也。 有譏敬孫、守謙戴白髮乘白馬者, 題成均館壁上曰: ‘有客有客, 亦白其馬。 白人之白, 無異於白馬之白。’ 或謂儒生李鰲所書, 疑指此也。 衣綠、鶖梁, 指司成方綱、典籍宋元昌, 對妾而居。 窮妹不恤, 指同知事兪鎭不收恤寡妹。 將父未遑, 指典籍黃宸孫不歸養老親。 其他未知指誰。”】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홍동(洪同)과 임동(林同)은 동지사(同知事) 홍경손(洪敬孫)과 임수겸(林守謙)을 가리킨 것이고, 이학(李學)과 조학(趙學)은 학관(學官)인 이병규(李丙奎)와 조원경(趙元卿)을 가리킨 것이며, 충여(蟲餘)는 직강(直講) 김석원(金錫元)을 가리킨 것이니, 김석원은 이때 감창(疳瘡)을 앓고 있었으며, 남생(南生)은 진사(進士) 남효온(南孝溫)을 가리킨 것이니, 남효온은 일찍이 상서(上書)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논(論)하였고, 이생(李生)은 분명하게 어느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홍경손과 임수겸은 ‘백발(白髮)을 이고 백마(白馬)를 타는 자’라고 기롱(譏弄)함이 있어, 성균관의 벽상(壁上)에 쓰기를,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말도 또한 희구나. 하얀 사람의 흰 것이 백마의 흰 것과 다름이 없구나.’[有客有客 亦白其馬 白人之白 無異於白馬之白] 하였는데, 〈이것을 쓴 사람은〉 간혹 ‘유생(儒生) 이오(李鰲)가 쓴 것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의록(衣綠)과 추량(鶖梁)은 사성(司成) 방강(方綱)과 전적(典籍) 송원창(宋元昌)을 가리킨 것이니, 〈이들은〉 첩(妾)을 데리고 살았으며, ‘가난한 누이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동지사(同知事) 유진(兪鎭)이 홀로 된 누이를 거두어 돌보지 않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아비를 봉양할 겨를이 없다.’는 것은 전적(典籍) 황진손(黃震孫)이 고향에 돌아가서 노친(老親)을 봉양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 것이며, 그 밖에는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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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제3권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항을 기술한 소백과사전적인 책.

구급(救急)

천포창(天疱瘡)

因男女房室傳染。有蝕傷鼻眼。腐爛陰莖。或筋骨疼痛。支軆拳攣。與癩無異。或皮破骨爛。口鼻難當。以至於死。 治法。香油二斤。入水一盞。煎至白烟起。收貯。每黃酒一鍾。入油一盞。溫服。日三。盡則全愈。又鴨一隻。餓三日。只與白水飮之。用輕粉一兩。粳米飯四兩。拌匀。喂鴨。待吃盡。以葦根。搥碎泡水。令鴨飮之。解去輕粉之毒。待鴨毛落盡。煮食。妙。寶鑒

남녀가 방실(房室)로 인하여 전염(傳染)되는 것으로 코와 눈에 식상(蝕傷)이 생기며 음경(陰莖)이 썩어 문드러진다. 혹은 근골(筋骨)이 아프고 사지가 뒤틀려서 나병(癩病)과 다를 게 없다. 혹은 살가죽이 터지고 뼈가 문드러지고 코와 입이 지탱키 어려워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치료법으로는 향유(香油) 2근을 물 1잔에 넣어 달여 흰 연기가 일어나면 거두어 저장해 두고 매번 황주(黃酒) 1종(鍾) 향유 1잔을 넣어 하루에 세 차례씩 따뜻하게 먹인다. 다 먹으면 온전히 낫는다.

또 오리 한 마리를 3일간 굶겨 다만 맹물을 주어 먹게 하고 경분(輕粉) 1냥을 갱미반(粳米飯) 4냥에 고루 섞어 먹이되 오리가 다 먹기를 기다려서 갈대뿌리로 쳐서 포수(泡水)를 부수어 오리에게 먹게 하여 경분의 독기를 풀리게 한다. 그리고 오리털이 다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잡아서 삶아 먹이면 신묘하다.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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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제3권

구급(救急)

감창(疳瘡)

口瘡糜爛。五倍子細末摻之。 尹方 走馬疳。齒根潰爛。齒黑脫落。顋有穴者。名曰走馬疳。宜用乳香丸。立效散。銅靑散。尿白散。 乳香丸方。乳香輕粉砒礵各五分。麝香少許。硏細。以薄紙一韭葉許。按過。揉紙少許和丸。如黃米大。臨臥將藥塡患處。至明卽愈。忌食醬鹽醋。 立效散方。靑黛黃柏白礬枯五倍子各一錢。爲末。先以米泔嗽口。糝之。 銅靑散方。白芷五錢。銅綠二錢半。馬牙硝一錢。麝 香一字。爲末乾糝之。 尿白散。 人中白火煅。白礬枯。白梅肉。燒存性各二錢。爲末。先用韭菜根。陳艾濃煎汁。以鷄翎蘸汁。刷去腐肉。洗去鮮血後。付藥。日二三次。 寶鑒 獐肉食之。付之。 尹方

구창(口瘡)이 미란(糜爛 썩어 문드러짐)되었을 때는 오배자(五倍子)를 세말(細末)하여 발라준다. 《윤방》

주마감(走馬疳)으로 치근(齒根)이 궤란(潰爛)되어 이[齒]가 검게 되면서 빠지고 신문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주마감(走馬疳)’이라 한다. 그럴 때는 마땅히 유향환(乳香丸)ㆍ입효산(立效散)ㆍ동청산(銅靑散)ㆍ요백산(尿白散)을 써야 한다. 유향환의 처방은 유향(乳香)ㆍ경분(輕粉)ㆍ비상(砒霜) 각 5푼에 사향(麝香) 조금을 가늘게 갈아, 부추잎 크기의 박지(薄紙)로 안과(按過 약가루를 쓸어 모음을 말함)해서 종이를 비벼 소황미(小黃米) 크기로 섞어 환(丸)을 지어 잠자리에 그 환약으로 환처(患處)를 메워주고 아침에 이르면 낫는다. 장(醬)ㆍ소금[鹽]ㆍ초(醋)를 먹여서는 안 된다.

입효산(立效散)의 처방은, 청대(靑黛)ㆍ황백(黃柏)ㆍ백반고(白礬枯)ㆍ오배자(五倍子) 각 1전을 가루로 만들어 먼저 미감(米泔 쌀 씻은 뜨물)으로 입을 씻어내고 발라준다.

동청산(銅靑散)의 처방은, 백지(白芷) 5전, 동록(銅錄) 2전 반, 마아초(馬牙硝) 1전, 사향(麝香) 1자(字)를 가루로 만들어 마른 가루로 발라준다. 요백산(尿白散)의 처방은, 화하(火煆)한 인중백(人中白)ㆍ백반고(白礬枯)ㆍ소존성한 백매육(白梅肉) 각 2전을 가루로 만들어 먼저 부추뿌리와 묵은 쑥을 농전(濃煎)한 즙을 계령(鷄翎)으로 찍어서 썩은 살을 닦아내고 선혈(鮮血)을 씻어낸 뒤에 하루에 2~3차례로 약을 붙여준다. 《동의보감》

장육(獐肉 노루고기)을 먹이고 붙여준다. 《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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